10. In the Desert II
타닥타닥, 아스팔트를 차는 소리가 요란했다. 예준은 숨이 턱 끝까지 찬 채로 긴 도로를 달렸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탓인지, 몇 분 뛰지도 않았는데 탈진해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굽이친 주택가를 한참 지나서야 대로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예준은 눈앞에 보이는 택시를 붙잡아 다급히 올라탔다.
“이 겨울에 그렇게 입고 춥지 않아요?”
택시 기사가 물었다. 예준은 자신의 단출한 티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쉼 없이 뛴 탓에 차림새가 무색하게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질문에 답하는 대신, 목적지를 말하자 기사는 곧 입을 다물었다.
하루에 두 번, 한 시간씩이었다. 예준은 가사 도우미가 자신의 식사를 준비할 때, 경호원이 요기하러 떠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식사를 걸렀다. 후에 먹을 수 있도록 준비만 해 두고 떠나시란 말에 가사 도우미는 예정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경호원이 돌아오기까지 겨우 십수 분만이 남아 있었다. 온종일 침실에만 머물렀으니, 그사이 자신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그가 알아채긴 쉽지 않을 테다.
폰 유심은 변기에 빠뜨려 흘려보냈고 집 안의 물건은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예준은 비교적 손쉽게 주택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태경의 차로 오갔던 길이 아닌, 반대편 길로 뛰기 시작했다.
풍경이 낯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덜컥 겁이 났다. 태경의 집과 그와의 생활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두려움 없는 일상은 몸과 정신 모두를 유약하게 만들었다. 어디로 던져져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예준은 이제 사소한 자극 하나에도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이 부담스러웠다.
현금으로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리자 치문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인적이 드문 주택가로,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제3의 동네였다. 치문은 두툼한 더플백을 들고 있었고, 평소처럼 조폭 티를 내는 슈트 차림이 아니었다. 후드와 패딩을 입은 치문을 보자 그의 어린 나이가 실감 났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가뜩이나 힘들 텐데….”
치문이 두꺼운 점퍼를 내밀며 말했다. 약속 시각은 자정이었다. 시술하기에 적절한 시간은 아니었으나 애당초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없었다.
“너도 다… 정리한 거야?”
렌터카에 오른 예준이 물었다. 치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 케어하면서 형님들 속이기 힘들 거야.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 기회에 나도 같이 빠지는 게 낫지. 시술소 소장도 입단속 단단히 시켰으니 며칠은 벌었어. 마음 편하게 생각해요.”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 시술만 도와주면 그때부터는….”
“거기 자주 가 봤어. 일 치르고 멀쩡히 걸어서 돌아간 오메가 없어요.”
치문이 빠르게 핸들을 감으며 덧붙였다. 걱정되어 내뱉은 말에 냉정한 일갈이 돌아오자 현실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낡은 경차가 윙 하는 엔진음을 내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잠시간의 정적 후, 치문이 입을 열었다.
“몸이 다 낫는다고 해도 형 혼자 어떻게 살아. 별별 것들이 다 찌르고 귀찮게 굴 텐데.”
그 난리를 다시 겪을 생각을 하면 예준도 끔찍했다. 그러나 그보단 조직을 떠나기로 결심한 치문이 더 걱정이었다.
“형님들 가만히 안 있을 거야. 형님들이 등 돌린 사람한테 얼마나 가혹한지 너도 잘 알잖아.”
“안 걸리면 돼요. 준비 잘해 놨으니까 형은 형 걱정이나 해.”
예준은 못내 불편한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치문이 조직을 떠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저와 함께라면 더 큰 보복을 당할 수 있었다. 예준은 점퍼를 단단히 여미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술소는 단칸방이 있던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창고나 다름없는 허름한 철제 건물에서 미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차에서 내린 치문이 익숙한 듯 쪽문을 열고 들어갔다. 뒤따르자 문 너머로 아주 비좁은 길이 보였다.
깊숙한 곳에서 한 번 더 문을 거쳤다. 예준은 순간 들이치는 피 냄새에 코끝으로 손을 가져갔다. 너른 공간에 수술대로 보이는 테이블이 있었고 그 주변으론 온통 잡기만 가득했다. 피 냄새는 방치된 거즈나 씻지 않은 철제 통 같은 것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석에서 꾸벅꾸벅 앉아 졸던 남자가 인기척에 번뜩 눈을 떴다. 치문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데려왔어.”
덜렁 남자 하나였다. 몸을 맡기기에 신뢰가 가는 상황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보증된 신분도 아닐 터였다. 남자는 마른 손바닥을 비비며 테이블 아래편에 앉았다.
“뭘 보고 서 있어? 옷 벗어요.”
예준은 점퍼를 벗어 치문에게 건넸다. 이미 온몸이 찬 기분인데 금속 테이블 위에 몸을 뉠 생각을 하니 지옥 같았다. 아이를 가져 본 적도 지워 본 적도 없었기에, 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다.
“진짜 마취 안 돼?”
“인력이 있어야 하지.”
치문의 말에 남자가 퉤 침을 뱉으며 답했다. 그가 엄지와 검지를 말아 동그란 모양을 만들며 덧붙였다.
“이것도 모자라고.”
남자가 만족할 만한 돈을 쥐여 주기는 무리였다. 치문에게도 저에게도 그만한 돈은 없었다. 못내 가책을 느끼는 듯 치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형. 괜찮겠어, 진짜?”
“괜찮아, 정말로.”
말과 달리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예준은 애써 평정을 가장하였으나 떨리는 손끝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밑에, 속옷까지 다 벗고 위로 올라와요.”
머뭇거리고 서 있자 남자가 재촉했다. 예준은 고작 이런 일에 눈시울을 붉히는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불과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포근한 향기가 풍기는 침대 위에 있었다. 단 두 시간 만에 처지가 뒤바뀐 셈이었다.
예준은 심호흡한 뒤 바지 버클에 손을 가져갔다. 치문이 담요를 둘러 아래를 가려 주었으나 괜한 수고였다.
쾅-!
그때였다. 예준이 이를 악물고 지퍼를 내리던 와중, 멀리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누군가 처음 통과했던 문을 박차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예준은 놀라 행동을 멈추었다. 치문이 예준을 감싸 품에 안자 남자가 엉덩이를 들썩였다.
콰앙-!
이번에는 마지막으로 통과한 문을 누군가 발로 찼다. 탁탁, 울리는 발소리만 들어도 침입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예준이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움츠렸다. 치문의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이, 제치문이.”
넷. 정명과 그의 따까리들까지 모두 넷이었다. 급히 온 것인지 모두가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호흡하고 있었다.
“이쁜이 오랜만이다?”
예준은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그들의 목적이 이해되지 않았다. 보스가 분명 강제로라도 아이를 지우라 지시했을 터였다. 치문의 속셈을 알아챘다고 하더라도 일이 끝난 뒤에 들이닥쳐 제압하면 그만이었다.
“이쁜아.”
정명이 다가와 치문의 손을 치워 냈다. 예준의 팔을 우악스레 잡아당긴 그가 눈을 맞추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았어야지.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가당치도 않은 말에 예준은 눈매를 잔뜩 일그러뜨렸다. 노려보자 정명이 턱을 세게 쥐어 고정했다.
“깜찍하게 우성 알파를 다 꼬셨다 했더니…. 그게 우리 도련님일 줄이야.”
우리 도련님. 오히려 태경이 들었다면 영문을 몰랐을 말이었다. 그러나 보스가 명성건설 이석준 회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예준은 정명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정명이 보스와 태경의 관계를 아는 걸 보면, 조직 내에서의 입지가 상승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이는 지울 거예요. 지우려고 했어요. 그러니까 형님은 신경 쓰실 거 없어요. 보스한테 그렇게 보고만 하면….”
“보쓰가 너나 내 목숨줄 쥐고 있는 건 맞아. 맞지, 당연히.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늘 복종만 하겠어, 어? 하라는 대로만 하는 사람은 크게 못 돼. 큰 사람은 늘 생각이란 게 있어야 하지.”
정명이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비열한 미소가 더해졌다.
“무슨…, 무슨 생각요.”
밀려난 치문은 따까리들 손에 강제로 무릎을 꿇었다. 그가 반항적으로 눈을 치뜰 때마다 거친 손이 뺨을 내리쳤다. 악 소리도 내지 않고 버티는 치문 곁에서 예준은 주저앉지 않기 위해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정명이 예준의 마른 몸을 밀어붙여 차디찬 벽에 기대 세웠다.
“확률이 적긴 해도 전혀 없는 건 아니잖아. 이 애가 우성 알파로 발현할 확률 말이야.”
“……!”
따까리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태경이 우성 알파라 하더라도 한쪽이 오메가라면 아이가 우성 알파로 발현한 확률은 10% 미만이었다. 이 회장이 태경의 배우자로 알파를 고집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왜 없어. 영 없는 일도 아닌데.”
“형님.”
“이쁜아. 너도 이런 데서 애 떼기는 싫을 거 아니야. 얼마나 끔찍하겠어. 저기 누운 오메가들이 얼마나 악을 쓰다 내려오는 줄 알기나 해?”
예준의 입술이 희게 질렸다. 당장 닥칠 일이 무섭다고 해서 정명의 뒷공작에 가담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이 애가 우성 알파로 발현하기라도 하면…!”
보잘것없는 열성 알파들에게는 횡재나 다름없는 소식일 터였다. 뒤늦게 보스에게 진실을 밝힌다고 해도 뭇매는커녕 과찬을 받을지도 모른다. 휘이, 따까리들이 휘파람을 불어 댔다.
그러나.
“…발현하지 못하면요.”
“베타라면 산속에다 파묻어 버리면 그만이야. 어디 먼 타국에 내버린다고 해도 누가 알겠어. 이 애가 누구 피인지 말이야. 오메가로 발현하면 그저 그런 것들 밑이나 핥게 업소에다 처박아 두면 돼. 평생 바깥세상 구경 못 할 텐데 뭐가 걱정이니.”
아이가 오메가로 발현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알파가 아니라면 발끝에 차이는 쓰레기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게 이들 세계의 법칙이었다. 예준은 사고가 정지해 꼼짝하지 못했다. 10%도 안 되는 가능성에 도박하듯 운을 걸겠다는 이들이 지독히도 잔인하게 느껴졌다. 숨이 턱 막혀 욕지거리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씨발!”
지나친 모욕에 치문이 대신 욕설을 내질렀다. 이미 시퍼렇게 멍든 치문의 얼굴에 퍽, 주먹이 꽂혔다. 정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형님이 이 한 몸 불살라서 지켜 줄게. 그러니까 아기 낳자, 응? 예준이 너 닮으면 얼마나 예쁘겠어. 도련님도 한 인물 하잖아. 껍데기만 따지면 천생연분이지. 안 그래?”
예준은 절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었다.
“형님, 제발요…. 제발 아이 지우게 해 주세요.”
“치문이 저 새끼는 치밀하지 못한 게 흠이야. 저런 새끼한테 어떻게 널 맡길 생각을 해? 덩치만 크지, 새파랗게 어려서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정명은 간곡한 부탁을 귀담아듣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오만 원권 지폐 두 장을 꺼내 시술소 남자에게 건넸다.
“이쁜아. 내 부하들 따라가서 소일거리나 하며 숨죽이고 살아. 이 대표 곁에서만큼은 아니어도 사람답게 대우해 줄게. 약속해.”
남자는 고작 십만 원에 양심을 팔았다. 원망할 기력도 없어 바라만 보려니, 정명이 예준의 티셔츠 속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부푼 아랫배를 움켜쥐려 했다.
“흐윽!”
“왜. 이제 이 형님은 싫어? 살랑살랑 꼬리 칠 땐 언제고.”
폭력적인 행동에 예준은 손길을 마구 밀어내며 발버둥 쳤다. 반항을 멈추지 않자 정명은 곧 손을 떼어 내고 따까리들에게 명령했다.
“이 새끼 혀 안 깨물게 뭐라도 물려.”
정명의 명령에 따까리들이 치문을 방치한 채 다가왔다. 예준은 그들 손에 넘겨져 결박당했다. 그렇게 입 속으로 더러운 손수건이 들어오려던 찰나였다.
윽, 윽! 비명이 두 차례 들리더니 저를 붙잡았던 덩치들이 동시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시야를 가렸던 덩치들이 사라지자, 땀범벅이 된 채 씨근덕거리는 치문이 보였다. 치문의 손에는 꽤 큰 과도가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어깨와 오금을 찔린 덩치들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예준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이 타이밍이었다. 예준은 곁에 선 정명의 옆구리를 죽을힘을 다해 가격했다.
“악…!”
반동에 튕겨 나간 예준은 겨우 벽을 짚고 섰다. 모자란 처지라 할지라도 합만 잘 맞으면 상황을 모면할 수 있다. 치문과 정선에서 몸소 배운 바였다.
“씨발, 뭐야!”
기습당한 정명이 나뒹굴었다. 체격에 비해 날쌔게 다가간 치문은 정명의 어깨에 즉시 과도를 찔러 넣었다. 꾸욱, 꾹, 힘을 줘 날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를 더하자 정명은 두 발을 휘저으며 악을 썼다. 날을 뽑지 않았기에 출혈량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이 얼마만큼의 부상을 입혔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따까리들은 제 형님이 당하는 꼴을 보고서도 바닥을 기기만 할 뿐 다가오지 못했다.
치문이 정명의 상박을 단단히 눌렀다.
“형님. 언제까지 애송이 취급할 거예요? 나도 이제 연장 정도는 쓸 줄 안다고.”
“으, 씨발! 이거 안 빼? 이 씹새끼가!”
시술소 남자는 의자가 나뒹구는 줄도 모르고 바닥에 엎드렸다. 자신에게도 해가 올까 봐 지레 겁을 먹은 것이었다. 치문은 남자를 한번 흘끗거린 뒤 다시 정명을 보았다.
“사람을 개좆밥으로 본 벌인 줄 알아요.”
치문이 과도를 이리저리 비틀어 정명을 더 못살게 만들었다. 바닥에 피가 번지고, 내부는 장정들의 앓는 소리로 난장이었다.
“너! 너 씨발, 이러고 목숨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아?”
“형님. 인생 그리 길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똑바로 살아.”
치문이 사납게 눈을 번뜩였다. 예준은 치문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보내온 복종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험한 짓을 행하고 못 볼 꼴을 당하며 조직원들을 따른 쪽은 치문이었다. 자신이 아는 부분이라고 해 봐야 극히 일부에 불과할 터였다.
“네가 뭔데 그따위로 지껄여? 으윽! 이제까지 너 먹여 주고 재워 준 게 누구인지…!”
“그만큼 갈아서 써먹었잖아, 씨발! 약한 사람 건들지 말고 건드릴 거면 너 같은 알파 새끼들이나 조지라고!”
치문이 정명보다 더 악을 쓰며 반박했다. 우렁찬 목소리가 너른 창고를 울렸다. 죽여 없애도 모자랄 원망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을 더 지체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치문아.”
예준이 바득바득 이를 가는 치문을 불렀다. 작은 목소리에도 치문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알았어, 형.”
칼을 빼낸 치문은 정명의 셔츠에 날을 닦았다. 그는 패딩 안쪽 깊숙이 과도를 꽂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치문이 난장판이 된 내부를 쭉 훑어보며 말했다.
“사람답게 살자고요. 어?”
“아아악!”
피가 새어 나오는 상처를 꾹 밟자 정명이 수치심 없이 악을 썼다. 퉤 침을 뱉은 치문은 아랑곳없이 예준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단숨에 예준을 번쩍 들어 안았다. 배 쪽을 흘끗거리는 걸 보면 몸에 무리가 갈까 봐 유난을 떠는 듯했다.
“치문아. 너….”
“나 조폭이었던 거 알지. 그러니까 이런 짓도 할 줄 알아. 뭐 새삼스러운 거라고 그렇게 봐.”
그럼에도 치문의 낯에는 수치심이 서려 있었다. 예준은 차마 내려놓으라는 타박을 뱉을 수 없었다. 결국 건장한 체구에 매달려 시술소를 빠져나가야 했다.
좁은 길을 지나갈 때마다 철제문이 팽 소리를 내며 여닫혔다. 렌터카는 시술소 앞에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었다. 조수석에 예준을 욱여넣은 치문은 차에 올라 빠르게 시동을 걸었다.
“아씨. 아기가 이런 거 보면 안 되는데.”
뒤통수를 흐트러뜨리는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제 밥 먹이기가 인생의 가장 우선순위였던 녀석이 칼부림이라니. 조직원으로 생활하는 걸 알면서도 눈으로 보긴 처음이었다. 충격보다는 애잔한 마음이 컸다. 섣불리 위로할 수 없는 일이기에 예준은 대신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출발하자. 정명 형님이 다른 놈들 호출하기 전에.”
“예.”
예준이 턱 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었다. 치문은 큼큼 헛기침하며 핸들을 꺾었다. 위잉, 엔진 소리와 함께 주택가를 빠져나가는 길엔 달빛이 휘영청했다. 날이 궂지 않아 다행이었다.
*
고속도로에 올라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차를 버렸다. 졸음 쉼터에 차를 박아 둔 치문은 예준을 업은 채 야산을 올랐다. 갈증이 일고 허기도 심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최대한 멀리, 빨리 사라져야 따라붙는 이들을 따돌릴 수 있으므로.
예준은 헉헉거리는 치문이 가여워 스스로 걷겠다고 말했으나 단박에 거절당했다. 을씨년스러운 야산엔 제대로 된 길도 나 있지 않아 한 걸음 한 걸음이 절박하기까지 했다. 인적도, 빛도 없는 흙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매달려 있기도 괴롭다고 느낄 즈음 작은 소도시가 나타났다.
곧 동이 텄다. 예준은 치문과 함께 논두렁 아래 숨을 죽이고 있다가 시외버스에 올랐다. 벌벌 떨어 얼음장이었던 몸은 첫차의 훈기에 녹아 금세 따뜻해졌다. 컨디션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미행도 없는 게 확실했다.
“형 괜찮아?”
그러나 예준의 안색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몸보다는 마음의 무게 때문이었다. 재차 묻는 치문을 보며 예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괜찮으니까 십 분마다 안 물어봐도 돼.”
어찌나 극성인지 이대로라면 앞으로 함께 지낼 일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원래도 곰살맞은 녀석이긴 하지만, 임신한 몸이라 더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예준은 몰려오는 졸음을 애써 쫓으며 버스의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6시. 치문은 목적지를 알려 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차한 곳은 근처에 있는 고속버스 터미널이었다. 그곳에서 가장 빨리 탈 수 있는 고속버스를 탔다. 빙빙 돌아가야 했지만 시를 넘나들며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는 편이 여러모로 안전했다.
종국에는 택시를 타기도, 또 걷기도 했다. 끊어진 다리처럼 행적 사이사이에 틈을 주었다. 잘 준비했다는 치문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가는 길은 멀어도 목적지는 분명해 보였다.
“형 힘들면 눈 좀 붙여도 돼.”
“너는.”
“난 익숙해서 며칠 깨어 있는 건 일도 아냐.”
치문이 제 두꺼운 어깨를 퍽퍽 두드리며 종용했다. 따르지 않는다면 못살게 굴 것을 알기에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러 머릿속을 텅 비운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대로라면 숨이 끊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교대로 자. 나 자고 나면 너 깨울게.”
“알았어.”
치문이 그렇게 놔둘 리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 해 봐야 그 정도였다.
예준은 가쁜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피곤하면 말해. 그러나 호흡에 삼켜 들어간 말은 곧 멎었다.
*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났을 땐 한낮의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깊은 바다 냄새가 낯선 듯 예준이 코를 킁킁거렸다. 마지막 택시에서 창밖을 바라보자 눈부시게 반짝이는 바다가 보였다.
서울에서 아주 먼 곳이라는 직감이 왔다. 내내 평온하던 감정이 낯선 풍경 하나에 와르르 무너졌다. 의식이 선명해지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예준은 온몸을 잠식하는 열감이 버거워 한동안 들뜬 숨을 조절해야 했다.
그 사람과 멀어졌다.
달려온 시간만 생각해 보아도 종적을 감추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내내 눌러놓았던 상념들이 한바탕 쏟아져 나와 기분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정명 형님에게 실컷 당할 때도 아니고 강행군을 이어 가던 새벽도 아닌, 안도해야 할 이때 예준은 가장 동요했다. 주변의 생소한 풍경이 정말로 그의 곁을 떠났음을 실감케 한 탓이었다.
예준과 치문은 선박들이 이리저리 뒤엉킨 광경을 보며 택시에서 내렸다. 비린내에 가까운 바다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이었다. 거기서부터 인부들이 선박을 오가는 모습을 뒤로한 채 걷기 시작했다.
삼십 분쯤 흐르자 굽이친 빽빽한 주택가가 보였다. 예준은 그제야 뒤늦게 물었다.
“여기 어디야?”
“영도.”
어렴풋이 들어 본 적 있었다.
“부산?”
“맞아요.”
어떠한 연고도 없는 곳이었다. 처음 밟는 땅이자 처음 마시는 공기였다. 진이 빠진 예준은 의문도 불만도 없이 치문의 팔꿈치를 움켜쥔 채 걸음을 뗐다. 잔뜩 녹이 슨 대문들을 수없이 지나자 드디어 치문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좋은 데는 못 구했어.”
“좋은 데 필요 없어. 이렇게까지 해 준 것만 해도 평생 어떻게 은혜 갚아야 할지 막막할 정도야.”
예준이 부러 미소를 띠며 답했다. 얼굴까지 붉히며 머쓱해하던 치문은 대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얼마 전까지 예준이 살았던 단칸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
아주 비좁고 열악했다. 온통 낡아 어딘가 닭장 같기도 했으나, 이 틈바구니라면 누구에게도 발견되긴 쉽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낮임에도 볕이 들지 않아 비좁은 거실에 불을 켰다. 거실을 겸한 주방과 방 한 칸이 전부여서 두 남자가 몸을 들이자 집이 꽉 차 버렸다. 예준은 어색하게 서 있다가 바깥과 거실 사이의 미닫이문을 닫고 앉았다.
치문이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했다.
“약은 필요 없을 거 같으니까 물이랑 먹을 것 좀 사 올게. 형은 여기 있어요.”
부실한 담 너머로 수평선이 보였다. 대형 선박들이 드문드문 머무르고 있었다. 잔잔한 물결 위에 잘게 부서지는 햇볕은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이 정도면 어디에 내놓아도 뒤처지지 않을 전경이었다.
“고마워, 치문아. 정말로.”
“여기서부턴 천천히 생각해요.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문은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한 채 집을 나섰다.
예준은 곧 낮잠 자는 고양이처럼 늘어졌다. 패딩을 벗자 밤새 흘린 땀 때문에 냄새가 훅 끼쳤다. 바닥이 얼음장이었다. 그래도 보일러는 있어 다행이었다. 치문이 돌아왔을 때는 춥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얼른 전원을 올렸다.
바닥은 쉽게 달구어지지 않았다. 예준은 차디찬 바닥에 누워 있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한 평 남짓한 욕실로 들어가 한참 기다린 후에야 온수로 몸을 씻어 내릴 수 있었다. 온통 쓰라려 살펴보자 온몸이 멍과 상처투성이였다. 정명과 그의 따까리들이 건드린 곳엔 멍이, 야산에서 쓸린 곳엔 찰과상이 남겨져 있었다.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았다. 가난한 오메가는 밴드와 연고를 달고 사는 처지니까. 잠시간,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살았다고 해서 형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뿐이라고, 가뿐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예준은 소리 없이 되뇌며 치문이 미리 준비해 놓은 듯한 옷가지를 찾아 입었다.
할 일을 마치자 몸이 굳었다. 지독한 적막은 태경의 집과 차원이 달랐다. 여기에서는 정말 외로울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직감이 들었다.
“…….”
가슴은 무너지는데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예준은 머리카락도 말리지 않고 다시 늘어졌다. 이제야 겨우 바닥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안도하며 습관적으로 축축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러자 자주 닿았던 손길이 떠올라 적막을 흩트려 놓았다. 감각이 아닌 의식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었다. 어느 사이에 이렇게나 익숙해졌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예준은 보송하게 마른 머리카락 결 사이로 스치는 손가락을 태경 못지않게 좋아했다. 곁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였기에 간절하다 느낀 적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간절해지는 것들이 많아질 터였다. 잊거나 잊히는 일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예준은 두방망이질하는 심장 박동을 애써 모른 척한 채 눈만 끔뻑끔뻑 감았다 떴다. 몸속의 생명을 떨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서웠고, 고작 몇 시간 후에 벌어질 일조차도 예상할 수 없었다.
막막해서 어쩔 줄 몰랐다. 잠들지 못한 채 온몸을 떨고 있는데 곧, 치문이 부산을 떨며 모습을 드러냈다. 갈증이 심해졌다. 예준은 치문이 건넨 생수 한 병을 단숨에 비워 냈다.
“형. 천천히 먹어. 못살아, 내가….”
사치스럽게 목을 축이자 흐렸던 시야가 조금은 맑아졌다. 갈증이 해소된 것만으로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버티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마주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조금은 비참하게 느껴졌다. 다만, 바람은 옅은 데 비해 현실의 감각은 뚜렷했다. 예준은 체념하는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단념하고 잊으려 노력하면 그럭저럭 버텨지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랑 같은 건 왜 해서….
마음에도 없는 후회를 삼키다가, 예준은 그렇게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찾을 수가 없었다.
추적은 추적일 뿐, 본질에 다다르기란 쉽지 않았다.
태경은 직접 몸을 던져 조사를 이어갔다. 낮에는 LK의 대표로, 밤엔 조직원들과 한데 뒤엉켜 예준의 행적을 쫓는 일에 몰두했다. 정 사장의 조직원들이 서울 모처에 근거지를 마련한 덕분에 그곳에서 더 은밀히 추적을 이어 갈 수 있었다.
태경은 조직의 가담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대전 사업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리라 각오한 바였다. 정 사장은 제 발로 찾아온 숙적의 아들을 흔쾌히 사업 파트너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태경은 예준을 찾는 일로 이석준 회장을 들쑤시거나 경찰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었다.
지하 세계에 사는 조직원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람을 찾았다. 상식에서 한참 벗어난 불법 행위와 협박 따위는 문제 삼지 않았다. 경찰과 동행하지 않고도, 예준이 집을 나선 직후부터 길목에 설치된 CCTV 자료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태경은 퍼즐을 끼워 맞추듯 예준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그날, 택시에 오른 때가 밤 열 시경이었고 택시의 목적지는 낯선 동네의 주택가였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가는 길목엔 흔적이 남기 마련이었다.
직후, 돌아 나온 렌터카의 차창엔 익숙한 실루엣의 두 남자가 있었다. 제치문. 예준과 동시에 증발했기에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어느 폐창고에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하기까지 자그마치 이 주가 걸렸다. 태경은 CCTV 화면이 띄워진 노트북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연기를 내뱉는 숨엔 여유가 없었다.
조직원들이 재깍 주소를 캐내어 핸드폰을 내밀었다. 태경이 흘끗 화면을 노려보았다. 낯설지 않았다. 두화건설 조직원들이 섭렵한 동네라는 사실을 주소의 앞부분만 보고도 알아챌 수 있었다.
“가시죠.”
태경이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빠르게 재킷을 챙겨 나가는 남자의 시선이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조직원들은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우성 알파를 뒤따르며 나지막이 욕지거릴 읊조렸다. 상당한 체격의 조직원 셋이 단번에 발걸음을 뗀 덕분에 지하실 계단이 쿵쿵 울렸다. 그들은 검은색 승합차에, 태경은 경호원을 따라 자신의 SUV 차량에 올랐다.
미리 주변 정리를 해 놓겠다던 조직원 중 하나가 폐창고 앞에서 무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경은 가장 먼저 도착해 폐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훅, 끼치는 피 냄새는 조직원들이 잡아 놓은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깊게 밴 냄새였다. 태경은 눈앞에 펼쳐진 괴이한 풍경을 보고 이곳이 불법 시술소임을 짐작했다.
겁도 없이 이런 곳에.
예준의 선택을 질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예준은 이런 터무니없는 곳에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선 안 될 사람이었다. 무엇이 두려워 이토록 공포스러운 현장에 직접 몸을 던지기로 한 걸까. 만약 예준이 이곳에서 고통받았다면 태경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터였다.
태경은 곧 의자에 묶여 있던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제압 과정이 꽤 격렬했는지 남자의 얼굴은 깊은 상처로 엉망이었다. 사시나무 떨듯 어깨가 진동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폭력적인 광경에도 태경은 동요하지 않았다. 제 태생 또한 하류라는 사실을 알기에 사내들의 거친 생태계에도 쉬이 녹아드는 것인가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태경이 남자의 지척에 서서 읊조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제 연인에게처럼 다정하진 않았다. 내리깔린 시선에 곧 폭발할 듯한 분노가 응집되어 있었다. 남자는 태경을 마주 보며 입술을 뗐다.
“그… 그날… 치문이가 오메가인 남자애 하날 데려왔어요…. 낯이 익은데 주의 깊게 보진 않았고….”
태경의 다리가 무릎에 부딪히자 남자는 와악, 소리라도 질러 댈 기세로 몸을 떨었다.
“왔는데.”
“애를 떼야 한다고 하기에…. 약속 잡고 온 거였어요. 제가 하는 일이 그건데…. 그거 가지고 이러시면….”
절박한 오메가들에게는 이곳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다. 알면서 비윤리니, 불법이니 하는 소릴 내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꼴로 사는 남자를 동정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으며 애초에 태경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세계였다. 다만, 그는 이 늪과도 다름없는 세계에서 예준을 완전히 건져 올렸다고 생각했다. 안일한 확신과 자만이 실수였다면 실수였다. 예준은 결국 자신이 아닌 이곳을 제 탈출구로 삼았으니까.
태경이 한쪽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었다. 눈높이를 맞추자 남자의 눈동자가 태경의 두 눈에 완전히 고정되었다.
“애는.”
“저, 저는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믿어 주세요.”
남자는 제 눈앞의 우성 알파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직업이나 나이, 재력 따위는 알지 못해도 그 아이의 주인이라는 사실만큼은 명백했다.
남자가 눈을 질끈 감자 피와 함께 땀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태경은 남자의 토로를 완벽히 믿지 않았다.
“그게 네 일이라며. 왜 못 했어?”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형님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형님들?”
태경의 눈이 싸늘히 식었다.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살벌하게 가라앉는 눈빛에 남자는 겁을 먹고 입을 다물었다.
“형님 누구.”
태경이 남자의 단단한 턱을 잡아 눌렀다. 부러뜨릴 기세로 입을 벌리게 하자, 남자가 신음을 내뱉으며 답했다.
“윽, 으으! …정명 형님! 박정명이요!”
박정명.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태경은 치미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그 새끼가 무슨 짓을 했는데.”
“막 협박을 했어요. 그 애한테. 아기, 그래…. 그 아기가 우성 알파로 발현할 수도 있지 않냐고. 아기 낳는 게 어떠냐고. 자기가 잘 돌봐 주겠다고…!”
감히!
태경이 잇새를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정명의 회유가 어떤 결말로 귀결되는지 모를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 탓에 폐부가 터질 것 같았다. 태경은 살의가 스민 눈빛으로 남자를 보았다.
“결국엔 치문이가 난장을 쳤어요. 따라온 따까리들을 과도로 작살내 놓고 정명 형님 어깨에도 그걸 꽂고 찌르고 비틀고….”
“제치문.”
“예! 치문이! 치문이가 여길 피바다로 만들고 갔다니까요.”
태경이 사납게 물었다.
“갔어?”
“예. 그 아이 들쳐 안고 빠져나갔어요. 그 뒤론 어떻게 됐는지 저도….”
태경은 남자의 이실직고에 꽉 막힌 숨을 겨우 내놓았다.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도망을 쳤다는 거였다.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까진 알아내었다.
“정명 형님이나 따까리들이나 많이 다쳐서 곧바로 따라가진 못했을 거예요. 제가 눈으로 봤어요. 그러니까… 제발 살려 주세요.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정말로!”
피가 빠르게 돈 탓에 날카로운 이명이 들렸다. 태경은 남자의 짖는 듯한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곧바로 돌아선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세 시. 새로운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또 하루가 지났다는 의미였다.
“이 새끼는 어떻게 할까요?”
태경이 벌레 보듯 남자를 흘겨보았다. 입맛을 다시는 조직원들과 달리 태경은 폭력에 취미가 없었다. 태경은 자기 손에 당연히 쥐어진 권력을 무기로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누구를 응징해야 하는지는 분명했다. 막다른 길에서 경고는 무의미했다. 태경은 경호원이 건넨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박정명한테 오늘 있었던 일 전부 전해.”
“제… 제가요? 전부 말하라고요…?”
“네가 불었다는 것까지 전부.”
그렇다면 남자는 아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입 다물면 여기 이 사람들 다시 보게 될 테니 처신 똑바로 하고.”
두 가지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의 답안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쪽을 선택하든 남자는 안도하지 못할 터였다.
남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질척한 피가 바닥을 더럽혔다. 태경은 이 불결한 곳에서 단 일 초도 더 버티고 싶지 않았으나 본능을 빌미로 희미한 예준의 흔적을 찾았다. 향기조차 남지 않은 연인을, 그리고 애달픈 마음을 감추었다. 거친 사내들은 눈치채지 못할 감정이 텅 빈 가슴을 채워 가고 있었다.
“…….”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디에도 없었다. 무엇도 찾아낼 수 없으리란 사실을 직감한 그는 이번에도 가장 먼저 발걸음을 떼었다.
*
나흘 뒤, 청주에서 흔적을 발견했다. 시외버스 터미널 CCTV에 담긴 예준의 흐릿한 얼굴은 초조함에 젖어 있었다. 치문의 팔에 매달려 주변을 살피는 걸음걸이가 무거웠다. 고되어 어쩔 줄 모르는 모습만 보아도 불안감에 온몸이 들끓었다. 예준이 사라진 지도 벌써 스무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과를 마치고 차에 오른 태경이 피로한 눈을 큰 손으로 덮었다. 위험하게 아이를 지우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임신한 오메가는 알파의 페로몬 없이 건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지금쯤이면 컨디션이 난조에 이르고도 남았을 터였다.
“괜찮으십니까?”
운전대를 잡은 경호원이 물었다. 괜찮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경호원의 눈빛에 어린 죄책감은 꼴도 보고 싶지 않은 형편인 데다, 상실감이 온몸을 잠식해 호흡하기도 버거웠다.
내 무엇이 널 떠나게 했나.
두화건설의 화환을 발견했던 행사장이 기점이었다.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했으나 목표 지점이 분명치 않았다. 의심은 의심일 뿐. 실체는 어둠 속에 있었고 그곳을 파헤치는 것만이 답을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차가 미끄러지듯 출발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라 할지라도 혹시 예준이 아닐까 하는 기대는 걸지 않았다. 태경은 그저 하나의 가능성만 열어 둔 채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이 대표님 저 박정명입니다.
가능성은 실제가 되었다. 태경의 기색이 심상치 않자 경호원이 백미러로 뒷좌석의 분위기를 살폈다. 폰 너머로 경박스러운 목소리가 덧붙었다.
―안부를 물으시려면 직접 물으시지, 괜한 수고를.
두루뭉술하게 떠다니는 말 뒤에 불법 시술소 남자에 관한 의견이 있었다. 태경은 깜깜히 내려앉은 밤,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접대, 잊었습니까.”
간결한 질문에 되돌아오는 대답이 마치 머리를 후려치는 둔기 같았다.
―그 새끼가 이 대표님더러 우리 도련님, 우리 도련님, 했던 제 말은 쏙 빼먹었지 뭡니까?
우리 도련님.
태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도시의 밤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그는, 그러나 정명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견고한 믿음이 일그러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이석준 회장의 청렴결백을 맹신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대단한 반전은 아니었다. 그럴 수 있겠다는 의심이 사실로 변모했을 뿐.
―보쓰가 애지중지 키운 건 알겠는데 너무 곱게 자라 우리 도련님이 세상 물정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세계가 무너졌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유약하지 않았다. 다만 태경의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것은 예준의 빈 자리였다. 그날, 예준이 그 행사장에서 발견한 진실은 단순한 조직의 그림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보스.
박정명이 칭하는 자가 제 아버지이며, 그가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어떻게 직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태경의 턱 근육이 깊게 팼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었다. 하나뿐인 연인의 목줄을 옥죈 자가, 저를 거두어 키운 자신의 아버지라니.
“이 회장님은 내게 자격이 있다고 믿는 모양이던데.”
태연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상대는 잠시간 침묵했다. 이내 활기찬 음성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잡음은 안 만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잡음이라.”
―…….
“네가 내 사람과 내 아이에 눈독 들였던 일 같은 거 말인가?”
짓누르는 듯한 음성이 차 안의 공기를 팽팽히 당겼다. 쉼 없이 달려 대로를 빠져나가는 차 내부에서 태경은 박정명이 저지른 죄를 조용히 곱씹었다.
―그건 보쓰를 위해서…!
“내 아이가 우성 알파로 발현하지 못하면? 그건 보스를 위한 일이 아니지. 거기까지 생각 못 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테고.”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들 세계에서 예준과 아이가 어떤 존재로 전락할지는 뻔했다.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창을 구르는 쓰레기. 발에 채는 것이 거슬려 없애 버려도 하등 문제가 없는 불필요한 존재들.
―예준이 그 아이는 내가 지켜본 세월이 더 깁니다. 잘 설득하면 알아들었을 텐데 제치문이 그 새끼가….
“더러운 입에 그 이름 함부로 올리지 마.”
부하에게 칼빵이나 맞은 주제에 입만 살아 날뛰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박정명은 먹잇감을 놓쳤고, 예준과 치문은 무사히 서울을 빠져나갔다. 그 사실을 아는 마당에 징징 앓는 목소리를 더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접대 자리 마련해서 시간, 장소 보내. 덩치들 대동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데려와도 좋으니 뱉은 말 무를 생각이라면 지금 말하고.”
태경은 느려진 차의 속력에 맞추어 창을 내렸다. 막바지의 겨울이 들이닥쳤다. 찬 바람이 피부에 닿았으나 전신에 갇힌 열감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무를 생각 없습니다.
그렇다면 죗값을 받아야지.
태경은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제야 찾아온 정적 사이로, 전방 주시에 바쁜 경호원의 예민한 움직임만이 소란스러웠다.
*
접대는 그로부터 닷새 후 성사되었다. 박정명, 그자가 자신이 가진 얄팍한 권력을 과시할 만한 자리였다.
밤 11시. 태경의 경호원은 흥이 오르기 시작하는 강남의 한 고급 룸살롱 앞에 차를 세웠다. 올 때마다 위화감이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류 사회는 하류 사회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고, 서로서로 혐오한다고 하더라도 상생하지 않고는 굴러갈 수가 없는 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가뿐하게 차를 빠져나간 제 고용주가 재킷의 단추를 채웠다. 누가 봐도 어깨인 자들이 꾸벅 인사를 건넸다.
“들어가시죠.”
문 앞에 가드가 넷, 계단을 내려가자 카운터에 선 가드가 둘 더 보였다. 이름만 대면 고개 끄덕일 사람들만 드나드는 주점인데 입구에서부터 가드 여섯은 과한 대처였다. 태경은 카운터에 있던 지배인으로 보이는 사내에게 환대받았다. 경호원은 제 뒤로 뒤따르는 조직원들의 기에 눌려 마른 입술을 축였다.
태경이 데려온 조직원은 고작 둘이었다. 상대가 될까 싶었지만, 그가 등에 업은 자가 보스라면 누구도 섣불리 손대지는 못할 터였다. VVIP 룸은 주점 가장 안쪽에 있었고 복도가 깊어질수록 인기척도 눈에 띄게 줄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의 연인을 놓쳤다는 핑계로 태경은 자신을 내치지 않았다. 대신 영리하게 이용했다. 경호원은 예준을 찾는 일과 태경을 보좌하는 일 모두 게을리할 수 없었다.
고용주에게 실수라는 가벼운 말로 치환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귀여운 구석이 있던, 그의 예쁘장한 연인은 생각보다 먼 곳으로 떠났다. 제 앞에서 어색한 기운만 뽐내던 사람이 그토록 심지가 굳으리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다.
탕.
둔중한 문이 열렸다. 경호원은 앞서 들어가는 태경을 지척에서 따랐다. 조직원들과 함께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낯익은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박정명이었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회사에서 태경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직원을 대했다. 언제나 별 노력 없이 이목을 끌었고 회의실 분위기는 늘 화기애애한 편이었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부드러운 시선에 상쇄되어 누가 보아도 귀한 티가 줄줄 흘렀다.
“먼저 한잔하시죠.”
술을 따르는 박정명 주변으로 여덟 명의 조직원이 자리를 잡았다. 겁먹었다고 광고라도 하려는 셈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박정명이 태경 양옆에 앉은 조직원들을 흘겨보며 말했다.
“쟤들, 태산파 애들 아닙니까.”
대전에서 정 사장이 이끄는 조직원들이었다. 태경이 사업을 목적으로 그들과 밀접하게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박정명이 모를 리 없었다.
“알면서 뭘 물어.”
태경이 양주를 한 잔 비워 내며 말했다. 박정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보쓰가 아십니까.”
“알다마다.”
“두고 보지 않으실 텐데요.”
“우리 부자 사이에 왜 그리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네.”
태경이 보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조직원들이 아리송한 눈빛을 했다. 주변이 웅성대자 박정명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보쓰가 언질을 주시기 전까지는….”
이곳에 오기 전, 태경이 말했다. 보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얼굴 한번 대면해 본 적 없는 그저 그런 조직원들만 가득하리라고. 보스 귀에 들어가는 걸 박정명 또한 원치 않을 테니 조직 내 실세를 대동하고 나타나진 않을 거라고. 그 말을 증명하듯 VVIP 룸 안에 우성 알파는 태경이 유일했다. 모두가 열성 알파가 아니면 베타였다.
말을 삼킨 박정명이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태경은 그를 차갑게 주시하며 말했다.
“아버지가 그 언질을 당신한테 직접 할 것 같지는 않은데.”
태산파의 조직원 둘이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웃었다. 사내들끼리는 뿜어 나오는 기운만으로 상대가 쓸 만한 인간인지 가늠하게 되는 법이었다. 태경이 말로 기를 죽이지 않았더라도 박정명이 그저 그런 사채업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를 사내는 없었다.
“그래도 궂은일은 다 나한테 맡기시는걸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
정명의 입가가 별안간 씩 휘어졌다.
“접대 같은.”
박정명이 굳이 꺼낸 화제를 태경은 흘려듣지 않았다. 오메가를 혐오하는 아버지가 당신의 부하를 통해 접대받으리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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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지배인이 노크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 오는 오메가의 페로몬 향에 태경이 손을 들어 출입을 저지했다.
“부르기 전에 이 문 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가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경호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배인과 오메가 무리를 밀어냈다. 적당히 돌려보내고 자리에 앉자, 태경의 시선이 박정명에게 고정되어 있는 장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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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대 말이지.”
“지금 이 대표님께 하는 거랑은 질이 좀 다르죠.”
왜 코너로 몰리는 와중 저런 이야기를 꺼낸 걸까. 경호원 또한 태경 못지않게 의문을 품었다.
“아시다시피 러트 때 억제제 먹는 우성 알파는 잘 없잖아요. 열성 알파야 그렇다 쳐도…. 우성 알파는 씨 뿌리는 게 천하의 미덕인 세상인데. 보쓰는 그런 데 별 관심은 없다지만 일단 욕구는 풀어야 사는 맛이 나실 테니까.”
“억제제로 버티는 걸 내 눈으로 봤는데도.”
“최근에 마음이 바뀌셨더라고요. 어디 맘에 드는 오메가라도 눈에 띄셨는지….”
어딘가 슬슬 긁는 듯한 말투에 태경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버지의 성생활이니 썩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겠다 싶었지만, 제삼자에게는 흥미로운 주제였다. 경호원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한테 따로 말씀하시기에 예쁘장한 오메가 하나 소개해 드렸죠. 아, 보쓰랑은 이미 안면이 있어서…. 듣자마자 무척 좋아하시던걸요.”
그즈음, 분노로 떨리는 태경의 손끝을 경호원은 놓치지 않았다. 담배를 술잔에 비벼 끈 그는 반대로 태연한 얼굴로 박정명을 직시했다.
“누구.”
짧은 추궁에 정명은 환히 웃으며 답했다.
“이쁜이. 우리는 그렇게 불러요. 이 대표님은 모르시려나. 아, 이 대표님은 예준이라고 부르시지…. 이 대표님이 끔찍하게 아끼….”
태산파 조직원 하나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내부의 공기가 달라졌다. 낄낄대던 박정명의 조직원들도 덩달아 표정을 지우고 이를 갈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제 고용주는 주변 공기가 어떻게 변하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만, 그가 눈짓하자 태산파의 조직원이 달려들어 박정명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컥컥거리던 사내가 이내 거칠게 신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시뻘겋게 피가 몰린 얼굴에서 끈적한 땀이 흘렀다. 경박한 입이 기어코 열렸다.
“으익…! 당신 아, 아버지가 그 애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별다른 주문 없이도 조직원이 박정명의 얼굴을 가격하기 시작했다. 대가리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는 조직원들은 가오나 잡을 줄 알았지, 제 윗사람을 구해 낼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어떻게 알, 아…! 배 속의 아기가… 네 애가 맞는지….”
태경이 시계를 풀고 재킷을 벗었다. 너른 어깨와 날개뼈의 골격 덕분에 블랙 셔츠가 팽팽히 당겨졌다. 힘을 줄 때마다 얇은 천 위로 근육이 도드라졌다. 팔뚝에 돋아난 혈관이 곧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는 벗은 시계를 조직원에게 던졌다. 시곗줄을 손가락에 감은 조직원이 제 아래에 놓인 자의 안면을 세게 후려쳤다. 이미 엉망인 박정명의 입가에서 토하듯 피가 터졌다.
“…으, 아악!”
경호원이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태경의 성정이 고고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양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피는 못 속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룸 내부의 어느 누구보다도 조직 수장처럼 보였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모든 상황을 조종하고 있었으니까.
“이, 이거 놔…! 후윽, 으!”
박정명이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꼴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제야 조직원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비싼 양주의 병목을 깨어 기선 제압을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맨주먹을 들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개중 그나마 머리가 있는 자들은 오히려 두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태경이 우세하다는 사실을 감각으로 아는 탓이었다.
한동안, 모두가 그 자리에 정지한 듯 서 있었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악랄하게 악을 쓰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씨발! 아아악…!”
경호원은 차분하게 앉은 태경과 경악에 찬 조직원들을 차례로 눈 안에 담았다. 부조화와 조화를 오가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내부를 반으로 가른 것처럼 한쪽에선 난장이, 한쪽에선 우아한 술자리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 대표님.”
부르는 소리는 날이 선 내부의 분위기에 먹혀들고 말았다. 태경은 경호원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가 바로 옆에 자리한 조직원에게 명령했다.
“그거 가져와.”
오늘 놀린 혀를 벌하기 위함이라면 그보다도 더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태산파의 조직원이 불투명한 갈색 병을 내밀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응집된 최음제로, 단 몇 방울만으로도 침대 위에서 흥을 돋울 수 있었다. 알파와 베타를 가리지 않는 효과 덕분에 페로몬을 동경하는 이들에게는 그만한 물건이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저주인 페로몬을 누군가는 섹스 용품으로 사용하는 형편이었다.
그제야 일어선 태경이 최음제의 뚜껑을 열었다. 최음제가 공기에 닿자 내부에 있던 대부분의 사내들이 제 고간을 움켜쥐었다. 태경은 피떡이 된 박정명의 입 안으로 액체를 무감하게 흘려보냈다.
“이제 여기가 오메가 뒷구멍처럼 녹진해질 거야.”
그는 정명의 어깨와 가슴, 배, 허벅지에도 그 최음제를 모두 뿌려 없앴다. 동난 빈 병을 룸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태경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그가 자신의 까칠한 입술을 매만지며 덧붙였다.
“여기로 좆이 들어오면 열심히 빨아야지. 그래야 예쁨받을 테니까.”
“…으윽!”
“이러고 있으니 네가 하대하던 오메가와 다를 바 없어. 벌써 네 부하들이 침을 질질 흘리잖아.”
“흐윽, 쿠욱, 우욱….”
박정명이 펄떡일 때마다 최음제의 효과는 강해졌다. 면역제를 복용한 태경과 그의 사람들은 가까스로 무사했다. 경호원은 한발 물러난 태경에게 습관적으로 손수건을 건넸다.
즉시 테이블을 돌아 나온 태경이 평소의 자태로 손에 묻은 최음제를 닦아 냈다. 그는 벗어 놓은 재킷을 집어 들었다. 숨을 고른 후부터는 박정명에게 더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끼고 서 있던 태산파의 조직원들과 눈을 맞추었다. 그가 건장한 두 사내를 보고 명령했다.
“죽이기 전에 혀를 잘라.”
“예.”
“혀를 잘라서 죽이든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박정명의 부하들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 이어질 장면은 지금보다 더 끔찍하고 역겨울 터였다.
애써 시선을 뗀 경호원이 닫혀 있던 문으로 손을 뻗었다.
“이만 가시죠.”
저 정도 양의 최음제라면 몇 시간을 서로 뒹굴지 모를 일이었다. 부리던 사내들에게 겁탈당하는 기분이 어떠할지 경호원은 조금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안에서 한바탕 난장이 벌어지는데도 바깥은 조용하기만 했다. 룸살롱 관계자들이 조직 보스의 실체까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회장은 그 자체로 중요한 고객이었다. 그의 아들인 태경을 섣불리 건드려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거기다가 적대적인 조직원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들어왔으니, 어쩌면 이 일이 태산파와 있을 마찰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었다.
이 일이 귀에 들어가면 이석준 회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섣불리 짐작할 수 없었다. 경호원이 문을 열고 나서자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경호원은 태경과 아주 가까이 붙어 걸음을 옮겼다. 그때부터는 구태여 견제하지 않아도 남자를 본 모두가 마주친 자리를 피했다.
정면을 직시한 채 걷는 남자의 두 눈은 고요했다. 그 무고해 보이던 오메가가 그의 아버지를 접대했다고 했다. 불 보듯 뻔했다. 역겨운 일이었다. 지금은 고요하다 한들, 보잘것없는 열성 알파에게 조롱까지 들었으니 그의 분노가 어디까지 치달았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차는 룸살롱 입구에 정차해 있었다. 권력 앞에서 여섯 명의 가드는 무용지물이었다. 눈치를 보던 가드 중 하나가 나서서 직접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남자는 그 에스코트를 제지하지 않았다.
“집으로 모실까요.”
경호원이 물었다. 뒷좌석에 안착한 태경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미끄러져 나가는 차창 위로 빗방울이 스치기 시작했다. 이내 폭우로 변하는 비를 보며 경호원은 차게 식은 핸들을 고쳐 잡았다.
*
집에 도착한 태경은 곧장 예준의 방으로 향했다. 언뜻 스친 거울 속 자신을 모습을 흘기자 꼴이 엉망이었다. 파리한 얼굴, 역겨운 페로몬, 젖는 바람에 채도를 더한 셔츠까지. 불쾌했으나 씻어 낼 여력이 없었다. 그는 피로한 눈두덩을 누르며 텅 빈 의자 위에 무너지듯 자리했다.
예준이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던 푹신한 의자였다. 본래 놓여 있던 각도 그대로 정면을 바라보자, 거센 빗발로 을씨년스러운 정원이 눈에 담겼다.
[형은 아무 잘못 없어요 설명 못 하고 가서 미안해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버지에게 유린당한 처지를 어떻게 구원할 수 있을까.
그 절박한 심정을 단 두 문장으로 마무리한 예준이 가여워 버틸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어떻게 그리 정리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저를 찌르고 해쳐도 모자랄 판국에 기꺼운 마음만 남기고 떠났다.
태경은 이석준 회장과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그는 러트를 맞은 이 회장에게 직접 제안했다.
‘오메가와 함께 보내시는 것도 방법이에요.’
그 제안이 이 회장의 의지에 불을 붙인 격이라면.
태경에게 예준을 제외한 오메가는 그저 불분명한 대상일 뿐이었다. 그 모순과 안일함이 저 또한 가해자의 오명을 벗지 못하도록 낙인찍었다. 접대를 받은 자는 제 아버지라 할지라도, 그 행위를 유도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태경이 젖은 얼굴을 감싸 쥐며 고개 숙였다. 잠시 스친 비로 어깨가 젖었다. 그럼에도 마치 태양열이 들끓는 사막 위에 던져진 심정이었다.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할 물 한 방울도 없었다. 바짝 마른 전신에 날카로운 모래알이 비벼진다 해도 이 정도로 고통스럽지는 않을 터였다.
드러난 진실로 받은 충격은 두 번째 문제였다. 예준을 떠올리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제 치부를 도려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예준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돌아올 곳을 마련해 주었는데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듯이. 완벽하게 설계한 집이라 여겼으나 예준을 들이고 나서야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그 없이는 완전하지 않았다. 곳곳에 난 균열이 회복 불가능한 상흔을 남길 것이다.
태경이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서랍장 위에 남은 포근한 기운을 살폈다. 메달과 도복 역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종종 햇살 아래 그것을 더듬는 예준을 관찰하곤 했다.
발현하기 전에 알았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너무 멀리 지나와 버렸다. 희망을 걸 수도 없는 헛된 망상이었다. 태경은 멍울이 지도록 강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온통 뻐근한 등을 겨우 등받이에 기대었다. 긴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이제는 향기조차 남지 않아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서랍장으로 다가가 바싹 마른 도복 위에 손을 놓았다. 손끝으로 더듬어 그 도복이 감쌌던 부드러운 육체를 떠올렸다. 매끄러운 피부 위로 눈에 띄지 않게 돋아난 솜털, 선이 고운 근육, 바르작대던 떨림, 델 듯이 뜨거운 체온, 눈빛.
“…….”
선명히 되살아나는 잔상에 복부가 뜨거워졌다. 태경은 도복을 집어 천 위로 코끝을 묻었다. 셔츠를 열어 맨살에 비비거나 주름지도록 세게 틀어쥐기도 했다.
결국엔, 버클을 열고 지퍼를 내렸다. 팽팽히 부푼 앞섶을 더듬던 그가 일순 거친 호흡을 토해 냈다. 하체가 바짝 긴장하자 상체의 근육 또한 여러 갈래로 쪼개어졌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짝 일어선 성기의 선단을 쥐었다.
“하아….”
수음을 시작하는 손이 떨렸다. 차게 식은 공간을 데우는 숨은 멎을 줄 몰랐다. 겹겹이 더하고 더해져 질퍽한 땀마저 쏟아 내었다.
그 뒤로 던져둔 핸드폰이 반짝였다. 불이 번진 듯, 뜨거운 눈두덩을 감춘 태경은 반복되는 알림조차 감지하지 못했다.
*
예준은 가능하면 일을 할 작정이었다. 새벽부터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치문이 신경 쓰여서였다. 숨어 사는 처지에 가당치도 않은 욕심이란 걸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용직을 전전할지라도 치문의 짐을 덜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형. 왜 그렇게 떨어. 아직도 추워요?”
그러나 하루가 지나기 무섭게 몸이 쇠약해졌다. 알파의 페로몬이 없어서라는 걸 알기에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어제까지는 치문 앞에서 떨림을 감출 수 있었는데, 오늘 아침부터는 떨림이 멎지 않았다. 방이 절절 끓는데도 한기가 들고 입이 바짝 말랐다.
“…괜찮아.”
가까스로 말한 예준이 두툼한 니트를 한 장 더 겹쳐 입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부실한 아침상을 차렸다. 달걀부침과 옆집에서 얻은 김치, 흰쌀밥이 다인데도 치문은 머슴처럼 크게 밥 한술을 퍼 올렸다.
“내가 한다니까 진짜….”
치문이 못마땅한 얼굴로 투정했다. 예준은 까끌까끌한 입 안을 물로 축이며 답했다.
“이거라도 안 하면 내가 뭘 하겠어.”
“힘들면 누워 있어도 돼. 내가 다 할게.”
“집안일도 네가 다 하고 돈도 네가 다 벌면 난 뭐 하라고.”
“형은 형 몸 돌보는 데만 신경 써.”
예준은 밥을 반 술만 떠 입 안에 넣었다. 씹는 일도 괴로워 굼떴지만 치문은 타박을 놓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흘끗거리다가 찬물보단 뜨거운 물이 좋겠다며 벌떡 일어섰을 뿐이다.
“자, 마셔. 좀 덜 추울 거야.”
“고마워.”
때때로 죽을 듯 괴로운데도 어떻게든 살아지는 게 신기했다. 예준은 치문이 데워 준 물을 반찬 삼아 느리게 밥을 삼켰다. 다 먹기까지 기다리면 늦을 터였다.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진 않았으나 치문은 매일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밥을 싹 비운 치문이 두툼한 패딩을 입으며 말했다.
“싱크대에 던져 놔. 설거지 내가 할 테니까.”
“너무 안 움직이는 것도 안 좋아. 걱정 말고 다녀와.”
“형.”
“입 삐죽대지 말고.”
건장한 몸을 힘없이 밀어내자 그제야 순순히 신발을 신는 치문이었다. 못내 불편한 눈빛으로 멀어지는 치문을 예준은 한동안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출 시간이 빨라졌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동이 트는 아침은 쌀쌀했지만 한낮이 되면 제법 따사로운 햇살이 비쳤다.
미닫이문을 열면 바로 담장인 조그마한 집이었다. 초라한 넝쿨에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예준은 낮은 담에 턱을 괴고 바다를 보았다. 치문 입에 들어갈 재료들을 생각하느라 하루를 다 소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
듣기로 눈이 드문 곳이라고 했다. 그 말처럼 이곳에서 눈을 더 보긴 어려웠다. 비가 잦아졌고 앙상한 나무에도 푸릇한 색감이 번졌다. 봄이 오고 있었다.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는데도, 한 치 앞의 미래도 상상할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됐다.
표류하는 배 위에 선 기분으로 예준은 외로운 시간을 버텼다. 그래도 친동생 같은 치문 덕분에 사무치는 절망과는 거리를 둘 수 있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날이 흐려졌다. 떨림은 더 심해졌고 입술까지 하얗게 말랐다. 햇볕을 쬔 후, 뉘었던 몸을 일으켜 보니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집에 먹을 것이 동나서 요 앞 슈퍼라도 다녀올 작정이었다. 멀리 갈 수 없는 형편이라 비싼 가격은 감수하는 편이 나았다.
예준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입술을 깨물어 혈색을 돌게 하고, 날에 비해 두꺼운 점퍼를 입고 집을 나섰다.
툭, 툭….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TV도 인터넷도 없는 환경이기에 어디서 온 비구름인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
예준은 비를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금세 숨이 차고 갈증은 더 극심해졌다. 집 밖을 잘 나서지 않아서 내리막이 심한 동네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항상 아래 전경을 내려다보았으면서도 집이 꽤 높은 지대에 있음을 잊고 말았다.
오르막보다는 내리막이 낫겠지 싶어 내린 결정이 화근이었을까.
빗발이 굵어지며 아스팔트가 미끌미끌해졌다. 후드 모자 때문에 시야가 밝지 않았던 예준은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겨우 걷다가 풀썩 미끄러졌다. 아니, 주저앉았다. 다행히 몇 가지 채소를 사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순 있었다.
오래간만에 그럴싸한 찌개도 끓였는데 자꾸만 배가 아픈 게 이상하긴 했다. 넘어졌어도 배 속에 해가 갈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는데. 예준은 자신의 스트레스가 속을 곪게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단지 잉태한 제 몸이 부실해서, 잘 자지도 먹지도 못해 컨디션이 나쁠 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버렸다.
아홉 시에 다다라 나타난 치문은 식은 밥상 앞에서 멈추었다. 그가 인형처럼 앉은 예준을 이상하리만큼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근처에 작은 의원이 있는데 거기 의사 아들이 오메가래.”
“…그래?”
“내가 단단히 매수해 놨어. 그러니까 날 밝으면….”
검진받고 수액이라도 맞으면 좀 낫지 않겠어? 그렇게 말하려던 치문은 불길한 직감에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사위가 축축했다. 가까이 다가선 치문이 익숙한 냄새에 코끝을 벌름거렸다. 그가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 예준의 이마를 짚었다.
“형 열나.”
“알아.”
“…피도 나.”
예준이 덜덜 떨리는 어깨를 굽혔다. 아래가 축축하다는 걸 이미 몇 분 전에 알았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예준은 몹시 미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거기 지금 가도 된대?”
“가도 되고 말고가 어딨어. 내가 나오라면 나오는 거지.”
치문은 부러 내부를 환히 밝히지 않았다. 그가 방 안에서 담요를 내와 예준의 어깨를 감쌌다.
“아파도 내 목 꽉 두르고 있어.”
“…어.”
마른 몸을 훌쩍 들어 업은 치문이 미닫이문을 열고 나섰다. 몇 걸음 떼기도 힘에 부쳤던 예준과 달리, 두꺼운 두 다리는 가파른 오르막을 순식간에 올랐다. 빗방울이 얼굴을 때려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달렸다.
예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간헐적으로 끊기는 의식을 붙들었다. 깜빡깜빡, 낡은 간판에 적힌 의원이란 두 글자를 스쳐보았던 것도 같다.
“좀 어지러워….”
“다 왔으니까 그냥 눈 감아.”
예준이 무거운 눈두덩을 내리떴다. 달뜬 호흡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열이 바짝 오른 채로 숨을 헐떡이던 치문이 낯선 곳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
살을 에는 듯했던 겨울 추위가 가셨다. LK의 옥상에 오른 태경은 제법 포근한 공기를 감지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비가 그친 후, 놀랍도록 청명한 하늘이 며칠째 지속되고 있었다.
푸른 색감이 머리 위로 바로 닿을 듯 가까운 고층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이석준 회장은 질 좋은 정장 차림이었다. 그가 지팡이를 짚으며 느릿하게 걸어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경은 담배를 필터 끝까지 태우고 비벼 껐다.
꺾이기 직전의 나무가 가장 장성한 법이 아닐까. 고고할수록 부러뜨리기 쉬운 법이다. 가까스로 사념을 잠재운 태경이 제 코앞에 이른 아버지를 마주했다.
“깜찍한 짓을 벌였더구나.”
허락 없이 적대적인 조직의 조직원들을 이끌고 쳐들어가 아버지의 부하를 죽인 사람이 듣기에는 퍽 점잖은 말이었다.
“꽤 지독했다지.”
짧은 보고로 난장 속의 말로를 들었다. 태경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회장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던 태경의 의식 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들끓었다. 다만 무어라 단언하기엔 너무 오래 묵은 감정이었다. 제 아버지와 저 사이에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긴 세월이 존재했다.
“뺨이라도 치실 줄 알았는데요.”
이 회장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태경은 제 아버지의 낯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럴 리가.”
저 입술이 그토록 깨끗한 피부에 닿았을까. 저 두꺼운 손가락이 아이의 몸 어디를 수치스럽게 했을까. 아들의 연인을 탐했다는 사실을 알면서, 마주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느긋함은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그 아이는 무너졌는데.
‘오메가란 종자들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라는 걸, 우성 알파인 네가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말이지.’
태경은 이 회장의 지난 말을 곱씹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하리라 믿었던 혐오가 정확히 한 사람을 겨냥하자 평탄했던 자신의 삶마저 위태해졌다. 알파다운 태도와 나태한 방관이 만든 결과이니 받아들여야 마땅하나, 아비를 향한 반항심은 그에 그치지 않고 더 깊은 증오로 바뀌었다.
태경은 가까스로 평정을 가장했다. 괜히 드넓은 서울의 전경으로 고개를 틀었다가, 다시 이 회장을 보았다.
“박정명 그자야 끄나풀일 뿐이지. 가진 것에 비해 욕심이 많아. 간사한 성정이라면 미리 끊어 내서 나쁠 게 없다.”
“조직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 그 별 볼 일 없는 오메가 때문에 벌인 짓이란 걸 안다.”
이 회장의 턱 근육이 조여들었다. 태경은 뻔뻔하게 눈을 맞추는 눈앞의 남자가 존경받아 마땅했던 제 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수치스럽더구나. 하마터면 아들의 배우자가 될 뻔한 아이와 하룻밤을 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떠났다지? 적어도 눈치는 있는 종자야. 저만 빠져 주면 모든 게 제자리라는 걸 알 정도는 되는 걸 보니 말이다.”
한발 다가선 태경이 불이 번진 눈빛으로 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코끝이 닿을 듯 가깝고 이성은 점점 말라 바닥을 보였다. 저를 거두어 준 은혜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침을 뱉고 경직된 목을 꺾어 버려도 시원찮을 지경이었다.
“그쯤 해 둬. 내 이번 일은 특별히 눈감아 주지. 너도 명성의 실체를 알았으니 스며들면 그만이다. 직접 손에 피 묻힐 필요는 없어. 그건 열등한 인간들이 해야지. 박정명 그자를 처리했을 때처럼 사람을 부리는 게 네 위치에서 할 일이야.”
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회장이 덧붙였다.
“내 후계자가 되면 세상 무엇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듣고만 있던 태경이 하하, 헛웃음을 흘렸다. 이 회장이 그제야 언짢은 기색을 비쳤다.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슈트 재킷의 먼지를 툭 털어 낸 노인이 말했다.
“덜 가진 자가 굴복하게 되어 있다.”
“아버지가 저보다 더 가지신 게 뭔데요. 권력? 재력? 명성? 그딴 걸로 저 회유하시려는 거면 집어치워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정말 네가 원하는 게 그것들이 아니라고 자부할 수 있어?”
“원해서 가진 적 없습니다. 아버지가 내 손에 쥐여 주신 거죠.”
“누리니 어떠하든?”
뭐든 움직일 수 있었다. 단 하나만 빼고. 이 회장이 두꺼운 손으로 태경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보다 더 얻을 수 있어. 난 이미 그걸 가졌고.”
과시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꺾을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일까. 태경이 표정을 지운 채 답했다.
“그걸로 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진정한 부자 관계가 아닙니다.”
태경이 이 회장의 꼭 잠긴 셔츠 위쪽을 구겨 쥐었다. 악력을 싣자 꿈쩍할 것 같지 않던 이 회장의 몸이 흔들렸다. 지팡이로 바닥을 짓이기고 서 있던 사내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비쳤다.
“아버지가 원하는 게 절 후계자로 만드는 거라고요.”
날카로운 시선과 달리 부드러운 음성이 사내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럼 당신이 원하는 걸 헌납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사람도 저겠군요.”
“너…! 감히…!”
지키는 이 하나 없는 빌딩의 옥상은 적막했다. 멀리에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만이 주변을 맴돌 뿐.
악력을 다하여 아버지의 멱살을 틀어쥐었던 태경이 끝내 힘을 풀었다. 이 회장이 벌게진 얼굴로 주변을 살폈으나, 애당초 아무도 데리고 올라오지 않았기에 기댈 구석이 없었다. 태경은 잔뜩 흐트러진 제 아버지의 옷매무새를 바로잡으며 덧붙였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소문이 뜬소문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슨 소문.”
“부자들이 모종의 검사로 어린아이의 형질을 미리 아는 것 말입니다.”
화두를 던지기는 했으나 이제 와 이 회장의 의도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이 우성 알파임을 알고 거두었든 그렇지 않았든, 이미 받은 게 많으므로 악의를 트집 잡지는 않을 요량이었다.
“제가 회장님을 만난 게 다섯 살 때였고, 그때 저를 검사해 준 분이 지금의 병원장이시죠. 아버지가 형질을 알고 절 거두었어도 상관없습니다. 덕분에 태생에 비할 것 없이 풍요롭게 자란 데다 이미 손에 쥔 것들도 많으니까요.”
“내가 아니었으면 넌 그 쓰레기 굴에서 죽었을지도 모를 운명이야.”
“그 자격지심이 절 여기까지 키웠으니 아버지께 감사해야 할까요.”
“이태경!”
태경이 뜻을 굽히지 않자 이 회장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변명할 의지조차 없는 제 아버지를 바라보던 태경의 눈이 일순 매서워졌다.
“원하는 걸 얻으시려면 태도를 달리하셔야죠, 아버지.”
상대의 기를 제압하기 위하여 알파의 본능을 발휘한다. 제 아버지를 향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한 아우라가 마주한 시선 사이를 스쳤다.
“절 명성과 조직의 우두머리로 앉히실 생각이었다면 적어도 그 아이는 건드리지 마셨어야 해요.”
대로하여 일그러진 명성건설 회장의 초상은 추했다. 수치심을 고백했으나, 정작 사내의 얼굴에는 단 한 톨의 수치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것을 누리고도 타인의 고통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매정함이 태경의 냉정을 부추겼다.
“너! 너! 태산파 정 사장 믿고 이러는 게냐?”
“믿긴요. 제 위치에서 할 일은 사람 부리는 일뿐이라고 하신 건 아버지신데요.”
탁, 이 회장을 밀어낸 태경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는 끔찍하게 습하고 더러웠던 쓰레기장에서 그가 내밀었던 단단한 손을 떠올렸다. 그 동아줄이 타인의 피와 살점으로 매듭지어졌다는 사실을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적어도 그때 그가 내민 손은 진심이었을까.
상대하기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었다. 씨근덕대며 멀어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태경은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
며칠간 열이 계속되었다. 이틀간 내리 잠만 잤던 예준은 그 뒤론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치문은 벽에 기대앉아 숨소리조차 죽인 예준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의사가 별문제 없을 거랬잖아.”
“그래도.”
아이를 잃고도 알파의 페로몬이 필요하다니 가혹한 일이었다. 예준은 목덜미에 배어난 땀을 닦으며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일 갈 생각은 안 하고 저를 관찰하는 동생이 가엾다면 가여워서였다.
오메가를 아들로 두었다는 의사는 오메가의 처지를 비교적 잘 이해하고 있었다. 원치 않게 임신하는 이들도 많아 제 아들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새긴 채 산다고 했다. 덕분에 그럴듯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대가를 치르지도, 구구절절한 사연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예준과 치문은 무사히 의원을 빠져나왔다.
알파에게 버림받은 오메가들에게는 유산이 흔하다는 말도 들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놀라지 말라던 위로에 예준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버림받은 게 아닌데. 오히려 자신이 그를 버렸다면 모를까. 그리 생각하면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예준은 치문이 건넨 물로 마른입을 축이며 애써 상념을 떨쳤다.
“별다른 기척은 없어?”
아예 자리를 깔고 앉은 치문에게 물었다. 집을 나와 정명 형님이나 조직의 눈까지 피해야 했기에 늘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집 안에만 있는 저야 감시나 미행 따위를 감지할 기회가 없다지만 치문은 아니었다.
“없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안 보여.”
“…그렇다면 다행인데.”
치문 또한 영도를 떠나 돌아다니는 기색이 없었다. 생활 반경은 대부분 언덕배기에 있는 작은 동네에 그친 듯싶었다.
“그래서. 너 무슨 일 하는 건데.”
치문은 새벽부터 나가 밤늦게 돌아왔다. 요기가 변변치 않은지 살도 많이 빠졌다. 그래 봤자 통이 큰 체격이었다. 저처럼 쓰러질 일은 없겠으나 예준은 그 작은 변화에도 크게 동요했다.
“사람 배때기 쑤시는 일 같은 거 아니야. 저 아래 큰길까지 나가지도 않아. 그냥 요 근처에서 힘쓰는 일 해. 형이 신경 쓸 거 없어.”
일갈한 치문이 손을 뻗어 축축이 젖은 니트를 만지작댔다. 식은땀 때문에 벌써 두 번이나 갈아입었는데도 또 온몸이 푹 젖어 있었다. 예준은 민망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보기보다 상태가 나쁘진 않아….”
“알았어. 방 안으로 옮겨 줄 테니까 몸 닦고 옷 갈아입어요.”
이곳에 온 후, 치문은 예전과 다르게 예준을 대했다. 알파 손을 탔으니 함부로 몸 만지는 게 아니라고 버럭 대기도 했고, 저를 짐짝처럼 옮길 때가 아니면 알몸을 보는 것도 꺼렸다.
예준은 방 안으로 옮겨져 끈적한 니트를 벗었다. 치문이 온수를 적신 수건을 문틈으로 건넸다.
“내외하냐.”
“해야지. 형은 그 사람 건데.”
무심코 말한 치문이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언급하기가 껄끄러운데도 종종 실수하곤 했다. 예준은 천천히 적응하고 있었다.
“그 사람 얘기해도 돼. 말 안 한다고 없던 일 되는 것도 아닌데.”
그를 떠올리면 제 곁에서 헐떡이던 보스가 떠올랐다. 아이를 빌미로 협박하던 정명의 악한 얼굴도. 빚 때문에 괴롭힘당했던 시간뿐만 아니라, 히트 사이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님들과 놀아났던 끔찍한 기억도 되살아났다.
품었던 생명을 잃은 건 오히려 아무렇지 않았다. 그럴 만큼 오래 품지도 않았고, 따지자면 뭐가 뭔지 잘 몰랐다. 정명 같은 악독한 사내들에게 저당 잡힐 바에야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
잃었다는 걸 알면 화를 낼까. 우성 알파의 본능을 따른다면 번식의 실패를 반기지는 않을 터였다.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상상은 무의미했다. 예준은 부러 배를 바라보지 않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 내었다. 닦아 내는 순간에도 식은땀이 배어났다.
“오늘 날 좋은데 바람이라도 쐴래?”
겨우 후드 티를 입고 문을 열자 치문이 물었다. 치문은 조악한 손수건으로 예준의 목을 감았다.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이거 해.”
애 취급도 정도껏 하지. 타박을 주려다 말았다. 예준은 힘없이 웃으며 치문에게 이끌려 나갔다. 마른 몸을 담 근처 턱 위에 앉힌 치문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고맙다, 치문아.”
“뭐가.”
불쑥 튀어나온 진심에 치문은 미간을 좁혔다. 퉁명스러운 말투에다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민망해 일그러지는 얼굴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순수했다.
“…몰라서 물어. 나 때문에 사서 고생하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그런데도 해 줘서 고맙다고.”
“형도 나한테 이렇게 해 줬어. 나 미짜일 때 기억 안 나?”
“기억 나. 그때도 미짜 같진 않았지.”
“아, 씨….”
툴툴대던 치문이 예준 옆에 자리 잡았다. 그의 말처럼 날이 좋았다. 공기는 포근하고 눈앞의 전경은 아름다웠다. 도피가 아닌, 휴가나 소풍이었다면 무척이나 즐거웠을 터였다.
“나 굶고 다닐 때 형이 밥 먹여 줬고, 씻지도 못하고 더럽게 다닐 때 목욕하라고 집에도 들여 주고 그랬어.”
“그랬나?”
“그래. 아플 때 약도 사 주고. 제일 싼 거였지만.”
“미안.”
치문이 그놈에 주둥이를 어찌하고 싶단 식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붕어처럼 제 입술을 잡았다간 혼쭐을 내줄 작정이었다. 예준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담에 팔꿈치를 괴었다. 겹친 손등 위로 이마를 대자 사그라지지 않는 열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해. 나도 은혜 갚는 거니까 잔말 말아요. 사람 민망하게.”
“알았어. 알겠으니까 그만 윽박질러.”
과거, 자신이 해 주었던 사소한 배려와 지금 치문이 해 준 것들이 같은 무게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과민한 반응을 보이기에 예준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오늘은 땡땡이 깔 거야. 맘 편히 눈 좀 붙여. 잠 한숨도 못 자고 꼴이 그게 뭐야.”
“잠이 안 와.”
“억지로라도 자라고.”
“알았어. 햇볕 좀만 더 쬐다가….”
가끔은 눈을 감는 게 무서웠다. 머릿속에 아로새긴 것들이 선명히 그려지기 때문이었다. 매일 뜨는 해와 그 햇볕에 남자의 기억이 스민 것이 원망스러웠다.
눈을 감자 어둡고 발갛기만 했던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자연히, 포근한 내부로 들이치던 햇살이 생각났다. 부드러운 시트 위에 누워 서로의 숨결을 느끼던 나른한 오전이 미치게 좋았다.
예준은 느리게 눈을 떴다. 사무치는 그리움에 눈가가 찡해졌다. 부러 감추며 손등 위에 이마를 비볐다.
그에 비하면 육체의 고통은 고통도 아니었다. 가슴이 텅 빈 듯해 가까스로 숨을 내뱉었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더 쇠약해졌다. 누워 꼼짝할 수 없는 데다 이따금 헛것이 보이기도 했다. 젖은 이불을 갈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던 치문은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땐 거의 화가 난 듯 보였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의식은 늘 또렷했다. 다만, 갈증 탓에 입을 열 수가 없어서 치문을 안심시킬 말 한마디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끙끙 앓는 신음이 거슬릴까 봐 이불을 머리끝까지 쓴 채 버텼다. 온몸이 찌를 듯 아프고 내내 피로감이 몰아쳤다. 정말이지 벼랑 끝으로 내몰린 기분이었다.
내내 집 밖에서 씩씩거리던 치문이 이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말라 찢어진 입술 위로 축축한 거즈를 눌렀다.
“도대체 그 새끼가 형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왜 안 낫느냐고 몸이!”
그저께는 몰래 의원에 들러 링거도 맞았다. 의사가 말하기로 사람에 따라 회복 기간이 다르다고 했다. 심하게 앓는 사람도, 그럭저럭 버틸 만한 사람도 있다고. 함께한 알파의 페로몬이 강할수록 더 곤혹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했다. 같이 들어 놓고도 치문은 그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말문이 막힌 예준은 초라한 이불 위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쌕쌕대며 가쁜 숨만 내뱉자 지켜보던 치문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갔다 올게.”
어디? 하고 묻지도 못했다. 며칠째 일도 못 하고 병간호만 했으니 답답한가 싶었다. 바쁘게 채비하는 녀석을 보고 예준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기다리지 마.”
미닫이문을 쾅 닫고 집을 나선 치문은 밤이 늦도록 소식이 없었다. 돌아오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했단 사실을, 예준은 끝내 털어놓지 않았다.
이대로 영영 떠나 버려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치문은 동 틀 녘이 되자 착실히 집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검은색 봉지가 들려 있었고 격양되었던 얼굴은 차분했다. 안도한 예준은 몸을 일으키려다 그만두었다. 또 떨기라도 하면 화를 낼지도 모르니까 자는 척이라도 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그러나 치문은 자신이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가 봉지를 뒤져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약봉지를 건넸다.
“수면제야. 이거 먹으면 죽은 듯이 잘 수 있대. 며칠째 한숨도 못 잤잖아. 잠 못 자면 죽어. 그러니까 푹 자고 일어나서 뭐라도 먹자.”
어딘가 횡설수설하는 기색이었으나 예준은 그 약을 의심치 않았다. 치문이 저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므로, 안정적으로 등을 받쳐 주는 손길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등을 곧추세워 앉자 입속으로 곧 알약 두 알이 들어왔다.
물을 따라 건넨 치문은 게워 내지 않도록 상체를 벽에 기대게 해 주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 속이 쓰렸으나 놀랍게도 삼십 분쯤 흐르자 졸음이 몰려왔다. 눈꺼풀이 이렇게 무거울 수도 있다는 건 태어나 처음 알았다. 동이 틀 무렵이었음에도 사위가 어두워지더니 귀가 먹은 듯 멍해졌다.
“어때. 좀 졸리는 거 같아?”
“멍해….”
힘을 쥐어짜 목소리를 내었다. 그 미약한 음성에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치문이 마른 이불을 꺼냈다. 그는 얇디얇은 천을 몇 겹이나 깔아 푹신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지친 몸을 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상한 약 아니니까 그냥 마음 놓고 자면 돼.”
잠겨 드는 의식 속에서 서투른 사과가 들렸다.
“아까 화내서 미안해.”
고작 그런 걸로 사과는. 미처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눈꺼풀이 닫혔다.
예준은 고른 숨을 내쉬며 드디어 잠들었다.
*
약은 효과가 있었다. 잠들었다 깨어날 때면 전날에 비해 확연히 나아진 컨디션을 스스로 느낄 정도였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내 적막했던 일상에 생기가 감돈 건 분명 그 덕분이었다.
가위에 눌렸을 때처럼 방과 집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대신 통증이나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지구에 아무도 남지 않은 듯 외로웠으며,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런 기분으로 해가 지기 전에 잠들면 꿈에서의 시간은 저물녘에 멈추어 계속되었다. 고요한 대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나타났다. 처음 보인 이래로 그는 내내 같은 시간에 저를 찾았다.
절대 보일 리 없는 사람이었다. 현실이 아니기에 함께할 때와 같지 않았다. 남자는 주로 볼캡에 티셔츠 차림이었고 짙은 그늘 때문에 이목구비까지 선명히 알아볼 순 없었다.
그는 늘 붉은 석양을 등친 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깥과 공기가 통하면 그다음에 들이치는 것은 달콤하다 못해 군침이 도는 향기였다.
‘…….’
왜 안아 줄까, 나를.
축축하고 더러운 몸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남자는 곧장 저에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불을 걷어 내고 두 팔과 다리를 꿴 뒤 몸을 뉘었다. 가슴과 가슴이 바짝 맞닿았지만 아프거나 숨이 막히지 않았다. 남자의 목덜미에 코와 입술을 묻으면 너무 향기로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남자는 그제야 거슬리는 모자를 벗고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무런 말도, 요구도 없었다. 그저 소중한 것을 다루듯 등을 쓸어 주거나 뒤통수를 만지작댔다.
예준은 포근하고 단단한 몸을 바짝 끌어안은 채 잠들었다. 꿈에서 한 번 더.
깨어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