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In the Desert I
오랜만에 치문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남겨져 있었다. 낮부터 도장에 나와 있던 예준은 지혁이 자리를 비운 사이 사무실로 들어와 전화를 걸었다. 투명한 창 너머로 도장 입구에 앉은 경호원이 보였다. 저 또한 모습은 보이겠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터였다.
“어. 치문아. 잘 지냈어?”
보호와 감시의 미묘한 경계를 버티기가 때로는 버거웠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일이기에 예준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다.
―형. 그 사람이 혹시 말했어?
“뭘?”
안부 인사보다 용건이 먼저라니 의아한 일이었다. 치문이 예준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저씨랑 형 빚, 그 사람이 다 갚은 거.
예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놀랐으나, 솔직히 말하면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전부 다?”
―응. 전부 다. 씨발, 그것 때문에 내가 미치고 팔짝 뛰겠어요.
자그마치 17억이었다. 저와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해도 선뜻 내놓기엔 지나치게 큰 액수였다. 막상 그의 호의가 현실이 되자 부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예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박정명 그 새끼, 꼭지 돌아서 날뛰는데 비위 맞춰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죽을 맛이야. 아주 지랄 났다니까. 뭐가 그리 배알이 꼴리는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데 내가 알 방법은 없고. 혹시나 해서 전화하는 거예요. 형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돼서.
“나한테는 아무 연락 없었는데.”
빚을 완전히 청산하면 정명의 입장에서는 저와 아버지를 쥐고 흔들 명목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그는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을 즐기므로, 그 진창으로 자신을 다시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든지 얄팍한 수를 쓸 가능성이 있었다. 치문도 그것을 알기에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럼 다행이고. 무슨 뒷공작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니까 당분간은 몸 사려요. 되도록 집 밖에 나가지 말고.
우려하는 치문에게 도장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예준은 말을 삼켰다. 정적이 감돌자 치문이 대뜸 성을 내며 물었다.
―아니, 근데 그 사람은 대체 돈이 얼마나 많기에 그 빚을 턱턱 다 갚아 줘?
예준은 결혼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이었다. 태경에게도 감사를 표하는 것이 맞는지, 왜 그런 과한 친절을 베풀었냐고 타박해야 마땅한지 혼란스러웠다.
“나를….”
그 사람이 나를 많이 좋아한다고 말하면 이해해 줄까. 낯간지러운 소리를 격 없이 지내 왔던 치문에게 내뱉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좋대? 형이?
제 마음을 읽은 듯 치문이 먼저 물었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 그런 것 같아. 엄청 잘해 주고….”
태경은 제 인생을 구제해 준 사람이자 처음으로 깊은 감정을 나누게 된 연애 상대였다. 각인으로 종속된 것도 모자라 이젠 결혼 이야기까지 오가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미래가 현실이 되었다. 예준은 알파와의 결혼에 관해서는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되돌아보면 볼수록 어색하고 적응이 안 되었다.
―그런 것 같았어. 형이 그런 사람 만나서 나는 좀 행복한 것 같아요.
치문이 거리낌 없이 말했다. 예준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뭘 그런 소릴 하냐?”
―아, 형 사는 게 진짜 좆같았잖아. 형이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사는 것만으로 내 인생 고민 하나는 덜었어. 나도 편해. 형 안 돌봐 줘도 되니까. 성질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혹시 그 사람이 딴짓하면 나한테 전화하고. 확 담가 버리려니까.
“그럴 일 없어. 그보다… 너는 어떤데. 잘 있는 거 맞아, 진짜?”
―에이, 좆같지. 그래도 살 만해. 그리고 나도 돈 많은 사모… 하나 물었으니까 너무 걱정 마요. 보살펴 준대. 덕분에 내 팔자도 확 펼지 어떻게 알아. 내가 아직 어리잖아요, 형.
“무슨 제비 같은 소리야.”
―그런 게 있어. 형은 형이나 신경 쓰라고.
전화기 너머로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허무맹랑한 말을 다 믿지는 않았다. 예준은 다만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형님들 손에서 인간 대접 못 받고 살던 때, 치문이 없었다면 절대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우리 집 한번 오면 안 돼? 보고 싶은데.”
예준은 치문을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버지보다도 더 가족 같은 아이였다. 처지가 나아질수록 더 많이 챙기고 더 자주 만나야 했다.
―그럴까? 이제 형은 편의점 도시락 같은 거 안 먹지? 나 거기 가서 상다리 부러지게 대접 좀 받아도 돼요?
“당연하지.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실컷 먹고 가.”
태경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예준은 우선 지르고 보았다. 절대 하지 않는 방법이었지만 생떼를 쓰더라도 허락을 받아 낼 생각이었다.
―배달 음식은 안 돼. 손맛이 느껴지는 걸로다가 준비해 줘.
구구절절 메뉴를 읊는 치문 덕분에 예준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뭔가 달라진 기척을 읽은 경호원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예준은 무례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럼에도 치문은 타박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
최근에는 태경의 퇴근 시간이 전에 없이 일렀다. 도장 일이 마무리되는 때를 구태여 맞추기 위함임을 알았다. 굳이 함께 퇴근하지 않아도 되는데, 빌딩을 나오면 항상 도로변에 남자의 차가 정차해 있었다. 예준은 학원가에서 경호원을 돌려보내고 그 차에 오르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예준이 차에 올랐다.
“오늘도 일거리가 이렇게 많아요?”
뒷좌석에 쌓인 서류를 보며 물었다. 태경은 인사 삼아 하는 뽀뽀보다 왜 그 말이 먼저인지 불만인 눈빛이었다. 가만히 뺨을 가져다 대는 남자를 보며 예준은 무미건조하게 입술을 눌렀다. 회사에서 처리하고 오면 될 일을 굳이 집에서 마무리하는 데는 무엇보다 제 탓이 컸다.
그가 굳이 자신을 당겨 몸을 지분거렸다. 뒤통수며 목덜미며 어깨며 만지작거리더니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야근하면 몸 상해. 집에서 하는 게 낫지.”
“거의 밤새우잖아. 난 신경 안 써도 돼요. 바쁜데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집도 혼자 갈 수 있는데…. 어차피 경호원이랑 같이 다녀서 따지고 보면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요.”
“이제 제법 잔소리를 하네.”
귀엽다는 듯 보는 눈에 애정이 그득했다. 예준은 부담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논리에 들어맞는 말을 해 봤자 어차피 제멋대로 구는 사람이었다.
“잔소리 아니야….”
예준은 얌전히 벨트를 매고 백미러를 흘끗거렸다. 서류 더미 옆에 커다란 상자가 있었다. 몸을 돌려 확인하자 익숙한 브랜드명이 보였다.
“벌써 옷 나왔어요?”
“어. 집에 가서 입어 봐.”
얼마 전, 남자와 함께 상견례를 대비한 정장을 맞추었다. 그가 사 준 옷이 이미 한 트럭이긴 하지만, 그중에 정장은 없었다. 운동복이 제일 편한 예준은 제대로 된 슈트를 입어 본 때가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옷에는 영 관심이 없어서 새 옷이 기대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옷을 입고 갈 장소를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렸다. 일주일 뒤, 먼저 남자의 본가에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양가가 함께하는 자리는 가당치 않다는 걸 안 그가 서로의 가족을 따로 만나자고 제안했다. 먼저 만나게 될 태경의 가족이 자신을 반길 리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예준은 무척 긴장한 상태였다.
예준의 낯빛을 기민하게 감지한 남자가 물었다.
“오늘도 속 안 좋았어?”
“음… 조금?”
가끔 헛구역질까지 하는 것은 모를 터였다. 긴장감에 앓는다는 사실을 아는 남자는 강제로 병원에 데려가는 대신, 부드럽고 자극적이지 않은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핸들에 놓여 있던 손을 옮긴 그가 명치 부근을 어루만졌다.
“너무 힘들면 말해. 병원 가 봐야 하니까.”
“오늘 점심도 반 이상 먹었어요.”
“그럼 다행이고.”
병원에 가면 위뿐만 아니라 무릎까지 붙잡혀 검사당해야 할 게 뻔했다. 그의 걱정을 늘리기도 싫고 나아질 게 없는 무릎 상태를 재확인하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다행히도 태경은 더 요구하지 않았다. 예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괜히 벨트를 쥐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빚이나 아버지에 관한 주제는 더 미룰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받기만 할 수도 없을뿐더러, 남자의 본가에 다녀오면 그다음 차례는 제 아버지였다.
“형.”
“왜, 예준아.”
남자가 부르길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저녁 식사처럼 격식이 갖추어진 자리는 부담스러우니 벗어나면 잊을 수 있는 차 안이 더 적절한 곳일지도 모른다.
“치문이한테 전화 왔었어요. 제 빚 해결해 준 거 있잖아요….”
태경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예준을 보았다. 놀란 기색은 아니었다. 예준은 그저 모른 척 지나갈 수는 없는 문제라고 여겼다. 입을 떼려는데, 태경이 먼저 선수를 쳤다.
“네가 그 빚에 몇 년이나 붙잡혀 있던 거 알아. 그렇게 네 인생을 저당 잡힌 채로 힘들게 살았는데, 그걸 내가 한 번에 다 갚았으니 어떤 박탈감을 느낄지 알고 있어.”
예준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남자가 자신의 자존심 문제까지 고려했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되도록 천천히 처리하고 싶었는데 네 자존심 지켜 주겠다고 갖은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위협이 되는 건 전부 없애야 내 마음이 편해. 지금도 늦었어. 그러니까 거기에 관해서 길게 생각할 거 없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까.”
“액수가요….”
“그래. 적지 않지. 그래도 돈이란 건 상대적인 거야. 나한테는 큰돈 아니니까 마음 쓸 거 없어.”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자 태경이 손을 당겨 잡았다.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눈을 맞추는 남자에게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너 대신 죽겠다고 나선 것도 아닌데 뭐 그 정도로.”
예준의 사정을 부러 가볍게 치부하는 것은 남자의 습관 중 하나였다. 예준은 꽉 막힌 듯 나오지 않던 말을 겨우 내뱉었다.
“고마워요.”
남자는 손깍지를 끼며 답을 대신했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부드럽게 전해지는 악력에 부채감이 조금은 옅어졌다.
“고마우면.”
태경이 숨을 들이마셨다.
“나중에 내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쉽게 용서해 주는 걸로 보답해 줘.”
그가 자신에게 어떤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을까. 다른 알파들의 만행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걸로 되겠어요?”
“더 바랄 게 없지.”
그가 천천히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예준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었기에 제안을 수락하긴 쉬웠다.
목에 감겨 시간이 갈수록 조여만 가던 올가미가 사라졌다. 예준은 그가 해결하지 못할 일이 무엇인지 의문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알파의 특권이라면 못 견디게 부러웠고, 개인이 가진 재능이라면 존경스러운 마음이었다.
자신은 절대 얻을 수 없는 능력일 테니까. 뒷맛이 써도 어쩔 수 없었다. 예준은 차마 아버지 이야기까지는 꺼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내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
집에 도착해 먼저 슈트부터 입어 보았다. 맞춤이기에 슈트는 몸에 꼭 맞춘 듯 잘 맞았다. 고급스러운 재질이었으나 너무 격식을 차린 듯한 느낌은 적었다. 예준은 거울 속의 자신이 어색해 미칠 지경이었다. 내내 미소를 참지 못하는 태경을 보며 머쓱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번 해 보자.”
그가 타이를 골라 목에 감아 주었다. 타이까진 할 필요 없다던 그가 마음을 바꾼 데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돼요?”
“해 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그가 가까이서 타이를 매어 주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예준은 남자의 단단한 턱선을, 섬세하게 움직이는 동공을 응시했다. 넓은 어깨와 벌어진 셔츠 속 살결은 언제 보아도 구미가 당겼다.
손끝에서 찌릿찌릿한 통증이 느껴질 만큼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저만이 느끼는 감각은 아닐 터였다. 예준이 생각하기에 타이로는 많은 야한 짓을 할 수 있었다. 그가 타이를 매어 주는 동안 목덜미에 자꾸만 손끝이 닿았다. 얇은 셔츠 위로 스치는 감각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예준은 상기된 얼굴이 티 나지 않길 바라며 목을 가다듬었다. 앞섶이 신경 쓰이기 시작하고 열감이 노골적으로 오르는데도 태경은 어쩐지 목석같았다.
매듭을 완성한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이내 타이를 풀어냈다.
“역시. 없는 게 더 어울리긴 하네.”
남자의 손에 늘어진 타이를 보자 숨조차 고르게 내쉴 수 없었다. 도복을 입었던 날도 이렇다 할 삽입이 없었으니 러트 이후로는 제대로 된 섹스를 하지 못했다. 그게 원인이리라 생각했다. 웬일인지 히트 사이클도 오지 않아서 그와 예전처럼 질척하게 붙어먹질 못하고 있었다.
남자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에 예준은 치미는 성욕을 전투적으로 참아 냈다. 슈트를 벗고 일상복으로 돌아가는 데도 무사히 성공했다. 따로 샤워를 마쳤고 잠자리에 들 시간까지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다.
더 참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남자의 작업이 길어지고 있던 자정 무렵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예준은 종종 그랬던 것처럼 불빛을 따라 작업실로 향했다. 태경은 테이블에 앉아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목을 끌어안을 때까지도 기척을 느끼지 못할 만큼 몰입한 상태였다.
부드러운 손길과 은은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저를 이끌어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남자의 눈이 다시 설계도를 향했다. 예준은 허리를 지분거리는 손길을 느끼며 물었다.
“형. 우리 왜 섹스 안 해요?”
남자의 얼굴에 얼핏 스치는 당혹감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정제된 눈으로 답했다.
“그동안 물고 빤 건 섹스로 안 치나?”
“그건 아니지만….”
“아니지만?”
“자지를 안 넣었잖아요.”
지나치게 직설적이었단 사실을 깨닫자 예준의 뺨이 달아올랐다. 태경이 열 오른 뺨을 달래듯 감싸 쥐었다.
“자지를,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게 아니라….”
부정할 수 없기에 예준은 쉽게 해명하지 못했다. 아직도 남자의 손에 늘어졌던 타이를 떠올리면 아랫배가 바짝 조여 들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제 살갗을 스칠 때 아찔했던 기분이 생생했다.
“그게….”
머뭇거리자 목덜미에 와 닿는 입술이 느껴졌다. 남자는 고른 숨을 내뱉으며 제 살결 위에 혀끝을 댔다.
“작업실에서 했던 거 기억해?”
“응.”
“그게 삽입 섹스보다 별로였다고 말할 수 있어?”
그렇지 않았다. 제 성기를 목구멍에 박아 넣느라 눈시울까지 붉혔던 남자를 똑똑히 기억했다. 표면의 단단한 힘줄만큼이나 튼튼한 목구멍이 성기를 힘 있게 조였었다.
“아니. 좋았어요.”
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남자의 목을 어루만졌다. 눈을 맞추고 입술을 열어 맞대자 혀가 급박하게 얽혀 들었다.
그 또한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그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손끝을 떨며 예준을 당겼다. 타액이 질척하게 섞이도록 입을 맞추고 턱이나 귓가에도 정신없이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귓구멍에 혀를 밀어 넣거나 엉덩이를 꽉 틀어쥐는 힘엔 욕구가 선명히 존재했다. 태경이 이번에는 밭은 숨을 쏟아 내며 말했다.
“몸 회복되면, 후우…. 싫다고 해도 할 거야. 안정적인 상태를 기다리는 거니까….”
“하아…. 안정적인 상태…?”
그가 웃으며 답했다.
“밥도 잘 먹고 여기도 더 안 아플 때 말이야.”
명치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성기가 위까지 닿는 것도 아닐 텐데, 남자는 구태여 턱에 힘을 주면서까지 성욕을 다스렸다. 그의 의지로 테이블에 올라앉게 된 예준은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를 제 다리 사이에 품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데.”
앞섶의 성난 굴곡이 느껴졌다. 이미 고조되어 버렸으니 멈출 수 없었다. 예준은 조금 성급하게 그의 트레이닝팬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두꺼운 성기는 금방이라도 튕겨 나올 듯 힘껏 발기한 상태였다. 예준이 시선을 들어 말했다.
“넣고 싶어.”
태경의 진득한 시선이 닿았다. 순식간에 열감이 번지는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성기를 쥐고 천천히 흔들었을 뿐인데 그는 곧 무너질 듯 상체를 기대었다.
“형도 하고 싶잖아. 다 알아요.”
“할 수 있겠어?”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문하듯 한 번 더 물었다.
“해도 되겠어?”
지나친 배려라고 생각했다. 예준은 대답 대신 남자의 목을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저를 번쩍 들어 올린 태경은 더 망설일 것 없이 침실을 향해 걸었다.
예준의 가슴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깊이 찔러지는 쾌감은 실상 어떤 행위로도 대체할 방법이 없었다. 자제력을 잃은 태경은 침대 위에 예준을 올려놓은 뒤 티셔츠를 벗었다. 예준의 헐렁한 트레이닝팬츠와 티셔츠는 쉽게 벗겨져 침대 근처를 나뒹굴었다.
예준은 낮은 조도 속의 광경을 보며 다리를 벌렸다. 나신이 맞닿고 남자의 성기가 회음부와 고환에 비벼졌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남자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정확히 그때, 남자의 페로몬이 열렸다.
“하아…. 으….”
온몸이 눅진하게 풀어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좁디좁던 구멍이 속살을 드러내며 열렸고 애액은 금세 그 주변을 적셨다. 숨이 턱 막힐 만큼 강한 페로몬이었지만 예준의 입가에는 미소만이 감돌았다. 예준은 남자를 바짝 당기며 졸라 대었다.
“빨리….”
서늘한 시선이 와 닿았다. 태경은 흡입하듯 예준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게걸스레 핥았다. 살이 온통 붉어지도록 턱과 목을 짓씹었다. 그의 너른 어깨와 흉통이 들썩였다. 예준은 남자의 거친 호흡 소리와 함께 별다른 전희도 없이 파고드는 귀두를 느꼈다.
“하응…!”
익숙한 통증과 함께 배 속이 아릿해졌다. 각도를 달리한 성기가 내내 간지러웠던 내벽을 쑤시며 들어왔다. 평소와 다른 점은 행위가 몹시 느리다는 것 정도였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안을 벌리자 더 견딜 수 없었다. 예준이 발버둥 치며 태경의 허벅지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좋아. 좋아요….”
“후…. 천천히 할 거니까 내 목 안아. 얌전히.”
러트 때의 거친 섹스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남자의 말을 따라 고분고분 매달린 예준은 사납지 않게 드나드는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감았다. 느렸으나 그의 성기는 부피감이 상당했다. 살을 찢는 듯한 통증 때문에 한동안은 아래가 얼얼했다. 눈물이 비쳤으나 꾹 참아 내었다.
“하아…, 읏….”
“너무… 조이지 말고….”
“형이 큰 거야.”
“깊숙이 안 넣어. 더 안 아플 테니까 힘 빼.”
“으응…! 빼고 싶은데…. 하… 못 빼겠어….”
남자가 흥분을 조절하기 위해 행위를 멈추었다. 예준은 자신의 구멍이 얼마나 강하게 남자의 성기를 씹어 대는지 모를 수 없었다. 오랜만의 삽입이 생각보다 극심한 쾌감을 불러들였다.
제 어설픈 유혹에 이리 쉽게 넘어올 줄 알았더라면 더 일찍 시도라도 해 볼걸 그랬다. 예준은 흥분에 못 이겨 골반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태경이 그러지 못하도록 허리를 결박했다.
“다쳐.”
고작 이 정도로 다칠 리 없었다. 다만, 강압적인 어조에 예준은 하던 짓을 멈추었다. 피가 날 때까지 거칠게 들쑤시는 삽입이 그의 취향임을 알았다. 섹스에 있어 과한 배려는 필요 없었지만, 충분한 쾌감이었기에 예준은 순순히 남자의 말을 따랐다.
“아픈 데 없어?”
남자가 조금 더 깊이 성기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예준의 팔이 느슨히 풀어지자 그가 이마를 맞대고 눈을 맞추었다.
“으응…. 하아… 좋아요….”
입가에 여실히 미소가 맺혔다. 얼마나 좋은지 예준은 곧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바삭거리던 시트에 습기가 들어차고 몸은 더더욱 질척하게 젖었다. 남자의 근육이 조여들며 열을 뿜어냈다. 예준은 제 살결에 남자의 탄탄한 피부가 더 진득이 맞닿으면 했다.
“네 냄새 때문에 정신 나갈 것 같아.”
태경이 읊조렸다. 각인이 이유였다. 알파에게 오메가의 향기는 늘 향기로우나, 각인한 오메가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예준은 자신이 남자의 페로몬을 달리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태경의 페로몬은 이제 덜 공격적인 데다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알파의 향기였다. 그가 아니라면 더는 흥분할 수 없었다. 감미로울 수밖에.
“형한테도 진짜 야한 냄새 나요. 계속 그랬는데….”
내내 좋지 않은 컨디션이 원망스러웠다. 예준은 맛을 보듯 태경의 어깨를 핥았다. 하체를 느리게 움직이던 태경이 뺨을 맞대며 귓가에 입술을 눌렀다. 사랑스러운 밀착감이 퍼졌다.
곧이어 그가 더 깊이 성기를 밀어 넣었다. 금방이라도 끝까지 닿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준은 허벅지에 바짝 힘을 주며 버텼다.
“읍…! 응!”
“아파?”
“으, 아니…. 깊어서….”
말 한마디에 그는 바로 체위를 바꾸었다. 엎드린 예준은 무엇도 할 필요가 없었다. 다리를 벌리지도, 엉덩이를 높이 치들지도 않았다. 힘을 빼라는 강요가 연신 이어졌기에, 등 뒤로 덮쳐 오는 무게감을 감지하며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엉덩이를 모아 안쪽으로 짓눌렀다. 구멍이 더 좁아졌다. 허벅지마저 맞붙었기에 살덩이를 제법 파고들어야만 구멍에 닿을 수 있었다. 폭신한 곳에 귀두가 부드럽게 비벼졌다. 그는 구멍 주변으로 넘치는 애액을 시트를 끌어와 닦았다.
“물이 너무 많아.”
“하아…. 싫어?”
“좋아. 그래도 그렇게까지 부드러울 필요 없잖아.”
그가 손가락을 쑤셔 젖은 구멍을 여러 번 훔쳐 냈다. 다음으로 이어진 삽입은 확실히 뻑뻑했다. 몇 번 오가면 금세 젖어 들겠으나 빡빡하게 들어차는 감각이 생각보다 버거웠다. 예준은 숨을 참으며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하아… 읍…. 읏…!”
엉덩이를 틀어쥔 그는 좀처럼 손을 떼지 않았다. 살덩이에 파묻힌 구멍 속으로 성기가 얕게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속도가 빨랐다. 퍽, 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에도 배 속이 울리는 듯한 통증은 없었다. 깊이 들어오지 않은 탓이었다.
예준은 곧 남자를 만류했다. 손을 밀어내고 엉덩이를 치솟게 한 뒤 구멍을 벌렸다. 또다시 젖어 버렸으니 깊이 밀어 넣어도 상관없었다.
그러자 태경은 성기 대신 입술을 그곳에 갖다 댔다. 배 밑에 여분의 베개를 깔아 준 뒤 움찔 조여드는 구멍 속에 혀를 밀어 넣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주변부엔 입술을 비비고 엉덩이 아래쪽에도 코와 뺨을 비벼 댔다. 구멍을 억지로 벌려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너무 간지러워 한계에 다다랐을 때, 성기가 안을 깊이 찌르고 들어왔다.
“아아…!”
남자의 음모가 닿았다. 뿌리까지 박혔다. 예준은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에 온몸을 뒤척였다. 비로소 배가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전립선이 뭉근하게 비벼지자 사정감이 몰려들었다. 예준은 숨을 몰아쉬며 신음을 쏟아냈다.
“아응, 좋아….”
“쉬…. 가만히, 움직이지 말고.”
“흐으… 좋아…. 못 참겠어….”
“알아. 너 지금… 하, 씨발….”
태경이 연신 욕설을 읊조렸다. 귓가로 쏟아지는 거친 음성에 예준은 더더욱 흥분했다. 성기가 터질 듯 부풀자 태경이 그것을 쥐고 귀두를 쥐어짜듯 훑어 올렸다. 예준은 성기를 품은 채 허리를 뒤틀었다. 여러 각도로 안을 자극당하자 금세 귀두 끝에 피가 몰렸다.
“하윽… 아아…!”
예준이 신음을 내지르며 사정했다. 베개에 삽입하듯 성기를 찔러 대며 몸부림쳤다. 허리를 흔들 때마다 남자의 성기가 들어찼다 나가길 반복했다. 앞은 울컥대었고 뒤는 움찔대었다. 온통 조여 들어 한참이나 전신을 뒤챌 수밖에 없었다.
“아응… 응… 흐으…!”
하얀 베개에 점도 높은 정액이 비벼졌다.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 끙끙거려도 사정의 쾌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멈추지 않는 태경 덕분에 그 쾌감을 더욱 길게 이어 갈 수 있었다. 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예준이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하아… 제발… 멈추지 마요….”
“못 멈춰. 여기서… 하아….”
“더 세게 쑤셔도 돼. 막… 흔들어 줘요.”
태경이 성기를 빼내고 예준을 돌려 눕혔다. 바로 누운 예준을 끌어안은 그가 읊조렸다.
“다치게 못 해.”
그러면서 뒤통수를 그러쥐는 힘이 상당했다. 머리카락을 쥔 채 그가 느리게 성기를 쑤셔 넣었다. 이번에도 깊었다. 배꼽이 들리는 기분에 예준의 발끝이 곱아들었다.
“으읏…! 하아…!”
몸을 가르듯 쳐올리는 대신, 그는 성기를 깊게 밀어 넣고 빼기만을 반복했다. 진동이 느껴지진 않았으나, 마치 두껍고 미끈한 뱀이 몸속까지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미칠 것 같은 쾌감에 엉덩이를 흔들면 금세 결박당해 움직이지 못했다.
이렇게는 정말 다칠 수가 없었다. 길들인 내벽이 과하게 부드러워지자 예준이 말했다.
“닦아 줘….”
“뻑뻑하게 하고 싶어?”
“응.”
태경이 무릎 뒤를 잡아 올린 채 이번에는 혀로 애액을 닦아 냈다. 그는 투명하게 비친 애액을 모두 빨아 없앤 뒤, 비교적 건조한 손등으로 타액을 훔쳤다. 쿠퍼액과 애액이 묻어 번들거리는 성기까지 시트로 닦아 낸 그가 다시 귀두를 쑤셔 넣었다.
“이러다 형 못 싸면 어떡해요.”
태경이 피식 웃었다. 그가 예준의 귓가에 숨을 불어 넣으며 속삭였다.
“그럼 조여 봐. 예준아.”
조인다고 조일 크기가 아니었다. 한계까지 벌리고 들어오는 부피감에 내벽이 자연스레 경련하는 것뿐이었다. 그나마 힘을 줄 수 있는 근육이라고는 입구뿐이었다. 예준은 허벅지 근육이 갈라지도록 힘껏 힘을 주었다. 그러자 이미 주름 하나 없이 벌어진 입구가 팽창감에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아아! 하으, 안 돼…!”
“하아, 씨발!”
그 공포스러운 감각이 남자를 미치게 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았다. 그의 허릿짓이 사나워지고 몸속의 성기가 크게 울컥거렸다.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태경은 다시 깊이를 조절해 빠르게 움직였다. 입구를 난잡하게 헤집고 벌려 대었다.
“하아…! …응! 으응!”
“하아…!”
남자의 손에 저지당해 미동할 수 없었던 예준은 그 자극적인 감각 때문에 뜨거운 눈물만 쏟아 냈다. 도무지 더 들어오지 않아서 노출된 남자의 성기를 한 손으로 그러쥐었다. 손이 성기 링 역할을 해 준 덕분에 삽입은 얕은 깊이에 그쳤다.
“흐으…! 하아….”
질척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성기가 부풀었다. 마지막 순간에 성기를 빼낸 그는 이미 정액으로 얼룩져 있던 예준의 배 위에서 귀두를 문질렀다. 손으로 쥐어짜듯 흔들자 정액이 후드득 흩어지며 쏟아져 나왔다.
정액은 촛농처럼 예준의 배꼽을 더럽히고 옆구리를 적시며 흘러내렸다. 아기를 품은 배 위라 보기엔 난잡한 꼴이었다. 쾌감에 전율하던 예준의 몸이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떨렸다. 태경은 예준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끼워 넣은 채 연약한 몸을 끌어안았다.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가 가늠하듯 예준의 몸을 어루만졌다. 예준은 간신히 떨고 있을 뿐, 고통스러운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는 땀에 젖어 맞닿은 몸 아래로 시트를 확인했다.
피가 비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임신 초기에 섹스라니. 미쳐 돌지 않고서야 해선 안 되는 짓이었다.
타들어 가는 속을 감추며 태경은 마른 몸을 제 품에 가두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쇄골에 닿고 매끈한 뺨이 가슴이 비벼졌다. 사랑스럽게 엉겨드는 그를 누구보다도 아끼기에 태경은 거칠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한참을 끌어안고 있자 겨우 떨림이 잦아들었다. 몸을 떼어 낸 그가 깨끗한 티슈로 예준의 배를 닦아 주었다.
“아픈 데는?”
“없어요. 괜찮아.”
형태에 예민하기에 전보다 더 부푼 배를 확인할 수 있었다. 태경은 그 포근한 배 위에 입 맞추는 자신을 미약하게나마 혐오했다.
그러나 저를 응시하는 귀여운 눈빛에 곧 눈이 멀었다. 다시 피가 몰리는 아래를 무시하며 그는 다급히 예준의 입술을 겹쳐 물었다.
*
물고 빤다는 말이 제격이었다. 예준은 온통 울혈 진 몸 위로 깨끗한 셔츠를 걸쳤다. 셔츠 깃 덕분에 키스 마크는 가릴 수 있었지만, 천이 스치는 곳마다 통증이 일었다. 섹스의 후유증은 보통 아래쪽에서 훨씬 강하게 느껴졌기에 고작 울혈에 앓는 자신이 우스웠다.
“해 달라는 건 제대로 해 주지도 않고….”
집이 비었기에 예준은 투정을 소리 내 말했다. 섹스가 한 번으로 끝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첫 삽입 이후로는 밤새 애무만 받았다. 자지도 못하게 사람을 괴롭혀 놓고, 그는 세 번이나 자위로만 사정을 마쳤다.
슈트를 갖춰 입은 예준은 단추를 완전히 잠갔다가 남자를 떠올리며 두어 개 풀어냈다. 울혈이 보여 다시 하나를 잠그고는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확인했다.
비싼 옷으로 치장해도 미천한 오메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태경의 아버지를 뵙는 자리기에 첫인상이 중요했다. 최대한 틈을 보이지 않아야만 제대로 된 결혼 상대의 발끝에나마 미칠 수 있을 테니까.
태경이 이른 퇴근 후 데리러 오기로 했기에 예준은 잠자코 기다렸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온종일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허기가 졌다. 또 게워 낼까 하는 걱정이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예준은 습관적으로 입을 막으며 냉장고를 열었다.
“우욱…!”
토스트라도 먹을까 하던 와중에 순간 헛구역질이 일었다. 이렇다 할 음식 냄새를 맡은 것도 아닌데 덜컥 신물이 올라온 것이다. 화장실로 뛰어가 한바탕 쏟아 냈지만 먹은 게 없어 나오는 것도 없었다.
“으윽…. 흐….”
단지 내장이 뒤집힐 듯 구역질이 나왔다. 예준은 눈물을 후드득 쏟아 내며 연거푸 헛구역질만 계속했다. 진땀이 배어날 만큼 심한 구역질은 처음이었다.
고통스러워 한참을 꺽꺽거리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도 토기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얼마나 긴장했으면 컨디션이 더 난조가 되었을까 싶었다. 저녁 식사가 가능할지 의문이었으나 이미 약속한 자리기에 어쩔 수 없었다.
겨우 진정했을 때는 약속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예준은 입을 헹구고 다시 세수한 뒤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마침, 태경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목을 가다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벌써 왔어요?”
―예준아.
그의 아버지가 약속을 취소했다고 했다.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리란 예상은 했지만, 약속까지 어그러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워낙 바쁘신 분이라 이런 일 잦아. 신경 쓸 거 없어. 다시 날 잡….
오메가이기에 안심할 수 없었다. 예준은 싸한 감각이 몰리는 눈두덩을 거칠게 비볐다. 눈앞에 놓인 무언가를 빼앗기는 일엔 익숙했다.
“정말. 바빠서 그러신 거 맞아요? 혹시 저를….”
―보지도 않은 사람을 어떻게 마음에 안 들어 하겠어.
그가 알파와의 결혼을 강요받는 처지라는 것을 안다. 예준은 태경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럴 수 있어요. 오메가니까.”
자격지심에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흠 없는 집안이라면 우성 알파의 배우자로 오메가를 들일 이유가 없었다.
―설마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해결할 문제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자신 없는 목소리 탓인지 전화 너머의 그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태경이 잠깐의 정적을 깨며 말했다.
―해결할 수 있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헤어질 생각 없어, 난.
결혼 허락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가 보잘것없는 저 때문에 가족과 틀어진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예준은 초조했다. 감내하기보다는 버리는 편이 쉬울 테니까.
예준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자 태경이 한 번 더 강조했다.
―못 헤어져. 그러니까 너도 그런 생각하지 마.
다 가진 그는 무엇도 잃을 필요가 없었다. 예준은 끝내 답하지 못했다.
*
태경의 차가 도착했을 때 예준은 차고 계단에 앉아 있었다. 집 안처럼 난방 상태가 좋지 않기에 얇은 티셔츠 차림으로는 한기가 들었다. 슈트를 제자리에 걸어 두고 평소 옷차림으로 갈아입는 동안에는 계속 가슴이 뛰었다. 불안한 마음에 차고까지 와서 내내 남자를 기다렸다.
“언제부터 기다렸어?”
통로만 지나면 집 안인데도 태경은 바로 제 코트를 예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얼마 안 됐어요.”
“손이 얼음장인데.”
예준은 닭살이 돋아난 팔을 의미 없이 쓰다듬었다. 태경의 눈에 이는 동정심을 감지했으나 평정을 가장할 여유가 없었다. 예준은 그저 몸을 일으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 따뜻한 체온과 단단한 육체를 어루만지자 잔뜩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는 기분이었다.
태경은 예준을 가볍게 안아 들고 집으로 향했다. 유리창 너머로 스산하게 몸을 흔드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보아도 바깥 날씨를 예상할 수 있었다. 예준은 남자의 목을 감은 채로 무표정하게 밖을 응시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청승을 떨고 있었으니 남자의 눈빛이 서늘한 것도 이해되었다.
태경은 곧장 욕조에 물을 받았다. 그는 예준을 소파에 앉혀 둔 채 집 안 기온을 2도 더 높였다.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담요까지, 극진한 대접이었다.
“형 아버지는 어떤 분이에요?”
이내 소파에 앉는 그를 보며 물었다. 태경은 제 품 속으로 예준을 당겨 안았다. 아직 바람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예준은 남자의 어깨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좋은 분이야. 연세가 지긋하신데도 우성 알파라 아직 정정하고 화통하시고.”
조금도 상상이 안 되었다. 예준은 가까스로 태경의 체격이나 이목구비를 떠올려 볼 뿐이었다. 만나기 어려운 제 아버지는 왜소한데다 나이에 비해 쇠약했다. 이렇게만 따져도 여러모로 어울리는 집안은 아니었다.
“나도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해. 같이 산 세월이 얼마 안 돼서.”
그러고 보면 그의 회사 사람 모두가 자신을 알아보았음에도 그는 알아보지 못했다. 아마 태경은 한국에 머무른 시간이 길지 않을 터였다.
“미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회사 생활도 몇 년 하다 들어왔으니까. 그리 가까운 부자 사이는 아니지.”
“반대하시는 게 당연해요. 난 괜찮은데, 형은….”
“괜찮은 거 맞아? 상심한 거 같은데.”
태경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는 예준이 안정을 찾도록 등을 어루만지다 뺨을 맞대었다.
“무서우니까 비 맞은 강아지처럼 차고까지 나와서 나 기다렸지.”
쉬이 반박할 수 없었다. 예준의 동공이 태경을 떠나 허공에 머물렀다. 태경이 예준의 턱을 당겨 시선을 붙잡았다.
“다음 주 주말에 작은 행사가 있어. 여러 기업이 참여하긴 하지만 규모가 크진 않아. 사교적인 자리라 가족이나 지인들도 제법 참석해. 거기 아버지도 오실 테니까 나랑 동행하는 게 어때?”
“제가요?”
“그래, 너. 내 파트너로.”
그의 회사와 관련한 일이라면 낯설었다. 음란한 향기를 풍기는 오메가이기에 행사 근처에도 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예준은 남자와 파트너로 동행하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쳐다볼 거예요.”
“맞아. 일종의 전략이야.”
“예?”
“기자들도 몇 있을 테니 사진이라도 찍히면 이런저런 소문도 좀 흘리고. 형질 때문에 결혼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면 여론이 좋지 않을 거야. 아버지도 좀 곤란해지시겠지.”
“먼저 선수 치자 그거예요?”
“속된 말로 하면, 그래.”
태경이 흥미로운 얼굴로 말했다. 예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전략이 먹혀들 것 같지 않았다.
“정식은 아니지만 가볍게 아버지 뵐 기회야. 결혼하면 그런 자리에 늘 불려 다닐 테니 이런 식으로 물꼬를 트는 것도 나쁘지 않아. 커리어도 남다른 데다 어리고 예쁘기까지 한 애인이 있다는 걸 알면 중매쟁이들도 더 말 못 붙일 테고.”
“그럼 일등 신랑감 자리 박탈당할지도 몰라요.”
“원하던 바야. 감흥 없는 자리에서 시간 죽이는 거 끔찍하거든.”
장난스레 휘어지는 남자의 눈매를 보고 예준은 얼른 시선을 피해 버렸다. 꼭 그와 단둘이 작당을 벌이는 것 같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애인이나 배우자란 말도 아직 어색하고 낯간지러웠다. 누군가의 연인으로, 결혼 상대자로 많은 사람 앞에 나서 본 적도 없기에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무서우면 손 꼭 잡고 있어. 지금처럼.”
태경이 손깍지를 끼우며 말했다. 손등에 가볍게 입 맞춘 그가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예준을 보았다.
“이제 혼자가 아니잖아.”
곰팡이 핀 어두컴컴한 단칸방이 아득한 때가 왔다. 예준은 과거의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다정한 말에 이리도 쉽게 마음을 빼앗기는 건, 가시를 세울 필요가 없는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게 된 덕이 컸다.
고개를 끄덕이자 한참 예준을 바라보던 태경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같이 씻을까? 안아 줄게.”
예준의 얼굴이 붉어졌다. 남자의 존재만으로 두려움은 가셨고 찌릿찌릿한 성감만이 전신에 퍼졌다. 서서히 짙어지는 페로몬이 노골적이었다. 적어도 그와의 목욕이 목욕만으로 끝난 적은 없었다.
“안아 준다는 게….”
용기 내어 물었다. 태경이 셔츠 단추를 열며 말했다.
“원한다면.”
모호하게 대답한 그가 시원하게 미소 지었다. 예준은 몹시 수줍은 얼굴로 남자의 품을 빠져나왔다. 담요를 열어 옷과 속옷을 모두 벗자 셔츠를 떨어뜨린 남자가 등과 무릎에 아래 손을 넣었다.
“안 떨어지게 꽉 안아.”
자신을 떨어뜨리기엔 남자의 힘이 너무 셌다. 불필요한 말로 매달리길 강요한 남자는 물이 찰랑이는 욕조 근처로 빠르게 걸어갔다. 예준은 태경의 목을 끌어안고 있다가 적당한 온도의 물속으로 내려앉았다.
눈앞에서 바지 버클이 열렸다. 아찔하게 드러나는 하체를 바라보던 예준은 뻣뻣하게 말라 있던 입술을 다급히 축였다.
*
지혁이 새로 건네준 도복에는 ‘김예준’ 석 자가 찍혔다. 예준은 세탁을 마친 하얀 도복을 금메달 옆에 놓아두었다. 사진만 찍어 두고 메달과 나란히 놓인 도복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부드럽지만은 않은 천 위에 손끝을 대자 지난날의 전율이 되살아났다. 다신 무엇도 사랑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준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엔 명백한 미래가 있었다. 지표가 되는 것들이 존재하고 무한한 가능성이 공존했다. 예준은 종종 제 방 안의 모든 것이 과분해 견딜 수 없었다. 지나친 행복이었다.
환청이 분명한 함성을 들으며 집을 나섰다. 예준은 맞춤 슈트 위에 나비넥타이를 한 채 태경을 마주했다. 가볍게 조수석 문을 열어 준 태경이 차에 오르기 전 비뚤어진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었다. 연신 웃고 있던 그가 뻔뻔하게 말했다.
“나한테 이성이란 게 조금은 존재해서 다행이야.”
“무슨 말이에요?”
“당장 바지부터 벗겨야 마땅한데 잘 참고 있잖아.”
예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결국 픽 웃고 말았다. 그러는 그는 어떠한가. 어설픈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차림새였다. 깔끔하게 올린 머리카락과 빛나는 피부는 물론이고,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각 잡힌 슈트 아래로 탄탄한 체격이 돋보였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는 그가 자라 온 시간이 빚은 결과였다. 감출 수 없는 귀티는 태생의 역할일 터였다. 그런 태경 앞에서, 예준은 마치 빨리 크고 싶어 뒤꿈치를 세우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긴장 풀어.”
“괜찮아요. 아직은.”
예준은 초조한 기분을 감추며 차에 올라탔다. 그가 채워 준 안전띠를 고쳐 쥐며 천천히 호흡했다.
“옆에 꼭 붙어 있기만 하면 문제없을 거야. 곤란한 질문은 대놓고 무시해도 돼.”
“응.”
태경은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아름다운 주택을 빠져나가는 길엔 막바지에 이른 겨울이 느껴졌다.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태경의 말과 달리, 행사의 규모는 꽤 거대했다. 예준은 태경이 미리 불러낸 직원을 따라 비교적 한적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손을 꽉 잡아도 긴장은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목적지가 불분명한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었고 의지할 길잡이는 오로지 태경뿐이었다.
행사장 입구에는 다양한 건설회사의 화환이 있었다. 그중, 예준은 익숙한 현장의 사명을 발견했다.
“…두화건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자 태경의 서늘한 시선이 닿았다. 예준은 애써 침착하게 덧붙였다.
“몇 번 일한 적 있어요. 현장에서.”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궁이 뒤따르진 않았으나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정명이나 열성 알파들에게 당했던 수모도 모자라, 마지막으로 현장에 갔을 때는 강제로 접대까지 해야 했다.
예준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진창의 그림자가 생각보다 가까웠다. 예전 같은 궂은일을 당할 필요는 없다지만 어깨가 뻣뻣이 굳었다. 긴장 탓인지 배가 아릿하게 아프고 갈증이 났다. 예준은 태경의 팔꿈치를 붙잡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마침, 그의 반대편 팔을 누군가 붙잡았다.
“야. 이태경 이제 오면 어떡해. 어? 예준 씨!”
선영이었다. 예준은 말을 그쳤고 곧 그녀의 손에 팔까지 붙잡혀 버렸다.
“미친. 이 대표가 이렇게 깜찍한 짓을 할 줄 몰랐네.”
“주선영.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그녀는 품이 큰 정장과 운동화 차림이었다. 일할 때의 태경처럼 흐트러진 모습인데도 귀티가 흘렀다. 그녀의 눈이 태경과 예준을 번갈아 오갔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도톰한 입술이 환하게 벌어졌다.
“귀엽다. 너희.”
기가 찬다는 듯 웃던 태경이 예준을 허리를 감쌌다. 부드럽게 와 닿는 시선에 예준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시간 맞춰 왔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
“어르신이 찾으시니까 그렇지. 드레스 안 입었다고 잔소리 엄청나게 하시더라. 밥도 못 먹고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걸 왜 입어? 누가 영감탱이 아니랄까 봐.”
“설마 그 말, 그분 보는 앞에서 한 건 아니지?”
“아니지. 나도 지능이란 게 있어.”
심심찮게 대답한 선영이 한발 물러났다. 예준은 몇 미터쯤 떨어진 거리에서 터지는 플래시, 몰려드는 인파에 아득해지는 정신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허리를 감싼 태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예준은 남자의 팔에 어깨를 맞붙였다.
“그럼 들어가자. 어르신 뵈어야지.”
의도가 뻔하다는 듯 선영이 굳이 에스코트를 맡았다. 휘황찬란한 분위기에 넋을 놓은 예준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행사장 안쪽으로 향했다.
상석 테이블은 비교적 한적한 분위기였다. 누군가 발견한 선영이 앞장섰다. 예준의 눈에는 테이블 밖으로 길게 뻗어 나온 다리가 가장 먼저 보였다. 그다음은 옆에 세워진 지팡이였다.
“……!”
탕탕, 지팡이를 두드리며 일어선 남자가 한 부부와 악수했다. 예준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멎어 버렸다.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나이에 비해 우직한 풍채와 깊게 팬 주름까지. 다른 이와 혼동할 수 없는 아우라였다. 아무리 눈을 비벼 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천한 오메가 놈들은 이불 위 아니면 영 쓸모가 없어.’
읊조리던 고약한 목소리, 그의 정액을 뒤집어썼던 일은 평생 잊지 못할 터였다.
역시, 그였다. 싸구려 언사나 지옥처럼 잔인한 기색 없이도 그는 분명 저를 짓밟았던 보스가 맞았다. 피가 식어 몸이 싸늘히 굳는 기분이었다. 반대로, 가슴속 깊은 곳에선 불길이 치밀었다. 예준의 눈가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아버지.”
태경의 입술에서 바라지 않던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예준은 끔찍한 심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사내가 고개를 틀었다. 저와 태경을 동시에 눈에 담는 사내에게선 화색도, 반색도 읽을 수 없었다.
“…….”
그저 고요한 호수 같았다. 냉담하기보다 온화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이후 다시 만난 보스에게서, 예준은 지하 세계의 어떤 어두운 구석도 발견할 수 없었다.
“늦었구나.”
“늦었다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부자간의 평범한 대화가 오갔다. 평온한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예준은 토기가 치밀었다. 가슴이 무너질 듯 아팠다. 머리 위에 내리꽂히는 벼락을 보고도 미동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아버지, 라니. 어떻게 그의 아버지가 제 몸을 추잡하게 탐하고 돈으로 목을 옥죄었던 보스일 수 있는가?
예준은 눈동자를 바르르 떨며 보스를 외면했다. 제게 닿은 태경의 손이 아니라면 당장 이곳을 박차고 뛰어나가 죽어 버리고 싶었다. 몸의 떨림을 주체할 수 없어 예준은 힘껏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순간, 태경이 다시 한번 바라지 않던 말을 내뱉었다.
“예준아. 인사드려. 명성건설 이석준 회장님이야. 내 부친이시고.”
무고한 태경의 눈을 차마 마주할 수가 없었다. 예준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보스를 보았다. 그가 지팡이로 바닥을 세게 짓이겼다.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처음 뵙겠습니다.”
이미 아들의 연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예준은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이 회장의 입매가 돌연 휘어졌다.
“김예준 선수야 전 국민이 알지요. 반갑네. 그때 만나기로 한 사람이 김 선수라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 이 대표.”
한 번의 막힘도 없는 말에 예준은 질식할 것만 같았다. 태경의 손이 뒤통수에 닿았다. 애정 어린 손길에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무례하셨어요. 그날.”
“그건 내 사과하지.”
잠자코 지켜보던 선영이 속삭였다.
“예준 씨. 이 회장님 무서운 분 아니야. 그렇게 떨 필요 없어요.”
어떤 대답도 목구멍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예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회장이 비로소 날 선 시선으로 저를 보았다. 현장이었다면 곧바로 손이나 지팡이가 날아와 비천한 몸을 내리쳤으리라 직감이 들었다.
찰칵, 터지는 셔터음에 이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플래시 빛을 손으로 막았다. 부산스러운 현장 분위기에 내내 예준을 지켜보던 태경이 귓가에 입술을 가져왔다.
“긴장 풀어. 우선 앉을까?”
긴장을 넘어선 굴욕이자 공포였다. 얼마나 떨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예준은 파리한 안색으로 태경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원형 테이블 바로 맞은편에 보스가 착석했다.
예준은 제 노력만큼 편히 호흡하지 못했다. 태경이 예준의 나비넥타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넥타이를 풀어내곤 단추를 두 개 열어 주었다.
“숨 쉬어.”
보스가 그 다정한 행위를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고요한 호수 아래 들끓는 분노를 예준만이 알아챌 수 있었다. 예준은 제 손을 잡으려던 태경을 밀어냈다. 온몸의 감각이 날뛰어 작은 소리마저도 칼날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긴장할 줄 몰랐는데.”
구태여 손목을 틀어쥔 태경이 말했다. 예준은 긴 공백 뒤에 읊조렸다.
“죄송해요. 잘… 못해서.”
설명할 수 없는 일인 데다 그가 이 추악한 진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자신의 아버지가 조직을 호령하는 우두머리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의 삶을 짓밟고 올라선 권력자라는 것을 알긴 하는 걸까?
예준은 일을 향한 태경의 열정을 떠올렸다. 그는 권력을 쥐기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할 줄 알고 그 가치 또한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보스와는 결이 달랐다.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보스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뒤바뀌지는 않는다.
이석준 회장에게는 이면이 있었다. 상류 사회에서 그가 내세운 간판이 명성건설이라면, 두화건설은 지하 세계를 위한 세컨드일 가능성이 컸다. 작년부터 시작한 큰 사업이라는 게 조직 운영에 보탬이 되는 더 큰 자금줄일 터였다.
손에서 힘이 빠지자 태경이 손깍지를 끼웠다. 자신이 옆에 있으니 긴장을 놓으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예준은 절망했다. 당장 보스 손에 붙잡혀 죽는다 해도 그의 분노가 풀리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예준은 숨죽여 보스를 보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는 자리에 있었다. 저와 시시콜콜 떠들 시간이 없어 다행인가 했다. 그럼에도 속눈썹이 축축이 젖을 만큼 눈물이 고였다. 발현하고도 울지 않았던 예준은 지금, 애석하게도 울고 싶었다.
“예준아. 나 좀 봐.”
장내가 조용해지자 음식이 서빙되기 시작했다. 뒤늦게 태경의 당황한 눈빛이 눈에 들었다. 고작 결혼 상대의 아버지를 만난 걸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유난스러워 보이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돌겠네.”
초조하게 흔들리는 눈빛, 그의 눈동자에 어린 동정심이 밉지 않았다. 그는 혼란스러운 듯 자신의 타이마저 느슨하게 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드러운 관심에도 예준의 심정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침, 예준 앞에 채소 향이 가득한 애피타이저가 놓였다. 평소였으면 맛있게 비웠을 접시가 코를 찌를 듯이 역겨웠다. 울컥 치미는 토기에 예준이 입을 틀어막았다. 동시에 태경의 얼굴이 싸늘히 굳었다.
“우욱….”
갑작스러운 헛구역질에 테이블에 착석한 모두의 시선이 닿았다. 선영의 눈이 크게 뜨였고 명성건설 관계자 몇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지막으로 보스의 서늘한 눈이 예준을 향했다. 그가 아드득 이를 짓씹었다.
‘저 냄새나는 것 치워!’
언젠가 그가 쳤던 호통이 선명히 떠올랐다. 예준은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장내를 가로질렀다. 바로 뒤따른 태경이 체격으로 예준을 감싸 입구로 향했다.
겨우 화장실에 다다른 예준은 또 신물만 게워 냈다. 태경이 등을 두드려 주어도 구역질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핑계 삼아 눈물을 쏟았다. 풀썩 주저앉은 예준이 얼른 눈가를 훔쳐 내었다.
“나한테 기대.”
예준은 태경의 가슴에 푹 안겨 호흡을 가다듬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두 팔로 그의 탄탄한 상체를 겨우 끌어안았다. 화장실 내에 정적이 감돌자, 예준은 그제야 직감했다.
“…….”
음식 앞에서 심해지는 구역질이 단순히 위의 문제일 리 없다고. 러트와 히트가 겹쳤던 연말, 사후 피임약이 듣지 않았거나 애초에 먹은 것이 사후 피임약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만에 하나 임신이라면.
이후, 단 한 번도 발정이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2개월 남짓이 흘렀으니 입덧이 시작되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 그보다 더 원치 않는 일이 있을까. 보스 앞에서 헛구역질했으니 임신한 상태를 광고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심장이 폭발할 듯 뛰었다. 잔뜩 겁먹은 예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시트에 남았던 피 얼룩과 사소한 증상들이 연이어 뇌리를 스쳤다.
벌벌 떨고만 있는데 태경이 눈을 맞추며 말했다.
“안 되겠어. 병원 가자.”
예준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무서웠기에 그의 떨리는 눈빛 같은 것은 더는 인지할 수 없었다.
“괘, 괜찮아요. 너무 긴장해서 그래….”
그렇다면 그가 모르는 편이 나았다. 안다고 해도 자신이 눈치챘단 사실은 숨기는 게 현명했다. 만약 이 임신에 어떤 의도가 더해졌다면 그를 용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용서는 필요 없었다. 더는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 분명하므로.
“…….”
숨이 멎고 시간이 멎었다.
정점 후엔 늘 추락이었다.
*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예준은 침묵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황폐했다. 거세진 눈발에 정체된 도로가 원망스러웠고, 피로에 젖어 이따금 저를 응시하는 태경의 존재감을 견딜 수 없었다. 공기에도 무게가 있는 듯 어깨가 무거웠다. 도통 가라앉지 않는 열감을 잠재우려 차갑게 식은 창에 뺨을 기대었다.
임신 같은 건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언젠가. 그래, 언젠가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대강 상상하기는 했다. 그마저도 행복한 상상은 아니었다. 그와 함께 낳은 아이가 만에 하나 오메가로 발현한다면, 그 절망감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충격에 충격이 더해져 숨 쉬기조차 버거웠다. 예준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뜨며 싸늘했던 보스의 눈빛을 상기했다. 그의 눈엔 자비가 없었다. 제 코앞에서 헐떡이던 거친 숨을 떠올리면 정말이지,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빚에 허덕이며 살았던 지난 나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자신의 상처는 둘째 문제였다. 뒤늦게 예준은 핸들을 감는 태경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이목구비 아래로 흐트러진 차림새가 보였다. 그대로 행사를 빠져나왔으니 그의 원대한 계획은 맥없이 사그라져 버린 셈이나 다름없었다.
세상 앞에 둘의 관계를 증명하자던 의도는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예준은 차라리 그리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부디, 기자들이나 사교계 사람들이 그와 자신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떠들지만 않길 바랐다.
더는 미래가 없었다. 행사장에 가기 직전, 행복에 벅찼던 것이 무색하게도 예준은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그를 향한 설렘을 증명했다. 그 감정은 너무나 견고하여 오래도록 깨지지 않을 터였다. 다만, 평화는 끝났고 단꿈에서 빠져나올 시간이었다. 예준이 입술을 짓씹었다. 시선을 느낀 태경이 말했다.
“오늘 일은 실수였어. 정식으로 아버지 뵙는 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설명할 길이 없으므로 예준은 답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창밖을 보았다.
그와는 날이 쌀쌀해지던 초가을에 만나 짧은 시간을 함께했다. 어느새 겨울의 끝자락에 다다르고 있었다.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준은 파도처럼 이는 마음속 동요를 가까스로 감추었다. 태경에게는 죄가 없다. 그는 그저….
“같이 씻을까?”
집에 도착해 묻는 태경을 보며 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손길을 만류하고 먼저 욕실로 들어가 부푼 배를 확인했다. 몸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그저 살이 쪘다고만 생각했다. 눈으로 확인하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물줄기를 맞다가 뒤늦게 욕실을 빠져나갔다. 태경은 침대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준아.”
그의 품에 안겨 혹독한 밤을 버텨 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고 달아나고 싶은 충동에도 사로잡혔다. 제 발로 벗어나지 않는다면 타의로 끌려 나와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른다. 보스가 그 곁에 기생하는 저를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이제까지 평화로울 수 있었던 건, 보스의 의지 덕분이지 자신에게 행운이 따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 긴장해서 내가 다 망쳤어. 미안해요.”
예준은 태경을 외면하고 침대 반대편에 누웠다. 시트를 열고 들어가 지친 몸을 뉘어도 시끄러운 머릿속은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았다.
지켜보던 태경이 다가와 몸을 끌어안았다. 예준은 목덜미에 입 맞추는 그를 재차 밀어냈다. 그러자, 태경이 서늘하게 물었다.
“왜 자꾸 손길을 피하지?”
“피한 게 아니라….”
“피한 게 아니면.”
피해 봤자 밀려날 남자가 아니었다. 예준은 이미 태경의 품에 쏙 들어가 안긴 채였다. 그의 손이 가슴 부근에 단단히 놓여 있었다. 작정하더라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힘이 느껴졌다.
“너무 긴장했더니 피곤해서 그래.”
그의 마음마저 돌볼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예준은 옅은 한숨과 함께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떴다.
“내가 있는데 뭘 그렇게 겁내.”
겁이 났다. 보잘것없는 인생이라 할지라도 아플까 봐, 다칠까 봐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대답하지 않자 그의 손이 느슨해졌다. 목덜미에 닿는 단단한 턱이 느껴졌다.
“돈 봉투 쥐여 주고 떨어져라, 그런 소리 하실 분 아니야. 아무리 오메가를 탐탁잖게 여긴다고 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다르지. 오늘, 그 정도면 아주 정중하셨다고 생각하는데.”
현장에서 만났던 보스와 오늘의 명성건설 회장은 완벽히 다른 사람이었다. 거침없이 저를 김 선수라 칭하는 목소리에서 그 간극과 관련한 어떠한 가책도 느낄 수 없었다. 극악무도한 조직의 보스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터였다.
“그러셨어요. 그런데 그냥 내가….”
“예준아.”
“…응.”
“긴장할 수 있어. 긴장해도 괜찮아. 그거에 대한 해명 듣자는 거 아니야.”
다정한 목소리에 예준이 고개를 틀어 남자를 보았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졌다. 떠나면 다시는 느끼지 못할 온기였다. 차라리 버림받는다면 덜 아플까 싶었다.
“힘들 땐 나한테 의지해야지. 밀어내지 말고 당겨, 이렇게.”
태경이 귓가에 속삭이며 기어코 몸마저 돌려 눕혔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아 짓눌렸다. 그의 터질 듯 뛰는 심장은 불안감 때문일까? 태경의 회유에도 예준은 끝내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대신, 그의 어깨에 코를 파묻었다.
완벽히 맞물리는 탄탄한 몸에 열기가 더해졌다. 그의 품속은 너무나 안락하였으나, 그를 둘러싼 주변은 온통 가시밭이었다. 찔려 피 흘리다 보면 그가 진실을 알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자신이 아니라면 굳이 들추어 낼 필요가 없었다. 노인이 자신 위에서 헐떡이다 정액을 싸질렀으며, 인격을 모독하고 상처 입혔다는 사실을 보스의 아들인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그가 알아서는 안 되었다. 신임하는 아버지가 더러운 조직의 보스라는 사실 또한, 그가 알 필요 없는 일이었다.
예준은 꽉 막힌 목구멍을 열어 말했다.
“천천히 하고 싶어요. 결혼은….”
감히 꿈꾸었다. 저와는 어울리지도 않는 행복을. 말끝이 떨려 예준은 남자의 등을 부러 꽉 끌어안았다. 태경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한숨에서 실망감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도 물러설 수 없었다.
“오늘처럼 힘들어하지만 마. 보는 거 괴로워.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두서없는 토로에 예준은 거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교감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챈 탓이었다.
공기가 가라앉자 곧 입술이 찾아들었다. 코와 턱을 짓이기며 기습적으로 침범하는 혀에 질식할 것 같았다. 태경은 절박하게 매달려 숨을 나누었다. 다소 거칠게 입술을 빨고 고운 살덩이를 잘근잘근 씹어 댔다.
“흐읍….”
아찔한 성감과 별개로, 예준은 허벅지를 누르며 올라타는 남자에게서 보스의 그림자를 보았다. 격이 다른 페로몬과 향기임에도 구역질 나는 기억을 뒤로할 수는 없었다. 진실을 알기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올가미에 얽매인 기분이었다.
아찔한 성감과 별개로, 예준은 허벅지를 누르며 올라타는 남자에게서 보스의 그림자를 보았다. 격이 다른 페로몬과 향기임에도 구역질 나는 기억을 뒤로할 수는 없었다. 진실을 알기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올가미에 얽매인 기분이었다.
“형…. 나….”
이 아름다운 남자가 자신을 괴롭혔던 보스와 같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울컥 수치심이 치밀었다. 무엇도 이전으로 되돌리지 못 하리란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못하겠어요.”
예준이 가쁜 숨을 쏟아 내며 태경을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난 태경이 예준의 들썩이는 폐부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태경이 조용히 읊조렸다. 예준은 태경의 눈빛에서 천천히 잦아드는 욕망을 읽어 냈다. 너른 품을 빠져나와 시트 속에 몸을 기대자 토닥이는 손만이 겨우 와 닿았다.
“예준아.”
한숨처럼 부르는 이름에 답하지 못했다. 예준은 시트 위에 고개를 파묻은 채 옅게 호흡했다.
*
예준은 잠든 태경을 뒤로한 채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맨발로 잔디를 밟자 축축하게 쌓인 눈이 느껴졌다. 눈발은 아직 거세었다. 겉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아 얇은 티셔츠 속으로 칼바람이 스몄다. 몇 분만 머물러도 금세 온몸이 꽁꽁 얼어 버릴 터였다.
조명마저 완전히 꺼진 정원은 고요하고 어두웠다. 예준은 이따금 이 주택의 담을 넘는 도둑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까칠한 입술을 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정원 가장 깊숙한 곳까지 숨어 들어가 핸드폰 화면을 눌렀다.
떨리는 손이 추위 탓인지, 뜨겁게 고이는 눈물이 깊은 어둠 탓인지 알 수 없었다.
“…….”
예준은 길게 이어지는 수화음을 숨죽여 들었다. 그 어떤 전화도 이토록 간절한 적 없었다. 저도 모르게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자 곧 잠에 취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경을 제외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단 한 명뿐이었다. 웅얼대는 부정확한 말 사이로 예준은 다급히 끼어들어 속삭였다.
“치문아. 나 좀 도와줘….”
무너질 듯한 목소리에 치문은 답이 없었다. 그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
아침 댓바람부터 주택에 나타난 치문은 씩씩거리는 채였다. 태경이 출근하고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마저 떠난 빈집에 때 아닌 손님이었다. 그런데도 내내 기다렸던 예준은 치문을 보자마자 두툼한 손부터 붙잡고 나섰다.
“사 왔어?”
“사 왔지.”
치문이 검정 봉지를 내밀었다. 예준은 더 두고 볼 것 없이 그것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치문은 멀어지는 등에서 시선을 떼고 으리으리한 주택 내부를 둘러보았다. 언젠가 가 보았던 갤러리가 이랬나 싶었다. 상상보다 더 부유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이런 곳에 사는 예준은 늘 황송한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마저도 소용없는 일이 되었지만.
치문이 혀끝을 툭 찼다. 예상치 못한 연락에, 기대하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 소파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준의 안정이 계속되길 원했기에, 착잡한 심정이었다.
예준은 욕조에 걸터앉아 결과를 기다렸다. 놀랍게도 막상 두 줄이 그어진 임신 테스트기를 보자 아무런 동요가 들지 않았다. 예준은 마른 눈을 끔뻑이며 부푼 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이 위태위태한 곳에 태경과 제 피가 반반 섞인 아이가 생겼다. 예준은 감상에 빠지려던 사고를 다급히 붙잡았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잉태의 기쁨 같은 건 원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했어?”
욕실에서 나오자 치문이 물었다. 예준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검정 봉지에 임신테스트기를 싸 치문에게 건네었다. 누구도 발견해선 안 되기에 가는 길에 버리게 할 셈이었다.
“진짜… 애 밴 거야?”
“어.”
“으, 씨발!”
욕지거릴 내뱉은 치문의 눈이 예준의 배를 향했다. 예준은 헐렁한 티셔츠를 부러 만지작거리며 돌아섰다.
“아직 별거 없어. 티도 안 나고.”
“아…. 형, 진짜….”
몰래 통화했기에 보스에 관한 이야기까진 미처 하지 못했다. 치문은 태경의 아버지가 반대한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예준은 치문 옆에 앉아 초조한 듯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 사람이 알고 임신시킨 거야?”
치문이 으르렁대며 물었다.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다만 예준은 우성 알파의 번식욕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르겠어, 그건. 그런데….”
그가 몇 주간 삽입을 꺼렸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잠자리에서 삽입이 있긴 했어도 몹시 조심스러웠다. 조금만 절뚝여도 곧장 응급실행이었는데 이번에는 입덧 증상을 보고서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태경이 자신을 일부러 임신시켰다고 믿고 싶지는 않았다.
“임신한 건 아는 것 같아.”
“아는데? 별말 없다고?”
“일단은 조심시키기는 하는데.”
“누가 우성 알파 아니랄까 봐 흑심이 그득하네!”
치문이 사납게 눈을 번뜩였다. 그가 예준의 마른 어깨를 훑어보며 말했다.
“이렇게 어영부영하다가 자기 애 낳게 하려고 그러는 거 아냐? 결혼하자고 닦달한다며!”
“그런 일 없을 거야.”
“엉?”
“애 안 낳을 거라고.”
“…어?”
두 번 고민할 가치도 없는 문제였다. 낳을 거였으면 치문을 정식으로 초대해 축하받으면 그만이었다. 태경의 귀를 피해 불러들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의도는 중요치 않았다. 그와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인 데다, 자신이 아이 낳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할 보스가 아니었다.
“너도 알다시피 병원에서 애 지우려면 알파 동의가 필요하잖아. 동의서 없인 절대 안 해 줄 거고.”
“아니, 형. 그래도 둘이 얘기는 해 봐야지. 그분이 빡빡 우길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아버지가 반대한다고 해도 형 다치게 할 사람은….”
“지울 거야.”
단호한 대답에 치문이 언성을 높였다.
“왜 그렇게 급하게 결정해?”
예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당황한 치문이 부산스레 뒤통수를 긁었다.
“너… 명성건설 알지.”
“명성건설이 왜?”
치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힘주어 짓씹은 탓에 예준의 아랫입술에 멍울이 맺혔다.
“명성건설 이석준 회장이 그 사람 아버지야.”
치문도 태경이 대단한 집안의 사람이리라 예상했다. 어떤 이름난 기업이 거론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기에 그는 의아한 얼굴로 답했다.
“우성 알파인 데다 집안 좋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그게 문제가 아니야.”
예준이 옅은 한숨과 함께 숨죽여 말했다.
“아마 조직에서도 아는 사람 몇 없을걸.”
“뭘?”
“명성건설 회장이 보스라는 거.”
“…뭐?!”
치문이 눈을 크게 떴다. 보스의 정체는 늘 오리무중이었다. 저 같은 따까리들은 그와의 대면도 쉽지 않았다. 태경에게 은밀한 부탁을 받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누가 보스의 정체 같은 중요한 정보를 따까리 따위에게 나불거리겠는가? 넘겨줄 만한 먹잇감이라고 해 봐야 박정명 하나뿐이었다.
치문은 보스가 예준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똑똑히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뿐만 아니라, 보스와 조직이 행하는 악독한 짓거리들을 바로 지척에서 보며 사는 형편이었다.
가깝다면 저와 훨씬 가까워야 할 보스가 왜. 치문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터트리려던 고함을 가까스로 참으며 되물었다.
“뭐라고, 형?”
“보스가 그 사람 아버지야. 내 눈으로 봤어. 그래서 이 아이 못 낳아.”
늘 뻣뻣했던 예준의 눈에 습기가 어렸다. 그렁그렁 맺힌 형의 눈물을 본 치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씨발! 그게 말이 돼?”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 사람이 소개해 주겠다고 데려간 행사에서 만났어. 명성건설 회장이라는데, 분명 보스였어. 내가 똑똑히….”
숨도 쉬지 못하고 말을 쏟아 내는 예준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치문이 덜덜 떨리는 예준의 손을 붙잡았다.
“형. 이거 사실이야?”
“보스도 내가 임신한 거 알아. 알았으니까 가만히 안 둘 거야. 그러니까 도와줘. 도움 청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
치문은 가까스로 충격을 지워 냈다. 형제나 다름없는 예준이 위험하다는데 무엇이든 해야 했다.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치문이 소리를 죽여 물었다. 예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업소에… 임신한 오메가들 있지. 그런 사람들 찾아가는 데 있을 거 아니야. 너도 알 거고.”
“그런 데서 애를 없애자고?”
예준은 불법 시술 업체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는지 알지 못했다. 눈으로 보았기에 아는 치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 마취도 제대로 안 해 줘. 사람을 뭐 사람으로 대해 주는 줄 알아? 고깃덩이 취급해! 그런 곳에 어떻게 형을 맡겨.”
“보스는 뭐 사람대접해 줄 것 같아? 보스한테 끌려가서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내가 알아서 하면…. 그 사람한테서도 떨어지고, 그러면 한번 봐줄 수도 있잖아.”
“하…. 그러지 말고 그냥 그 사람한테….”
“형은 내가 임신 사실 안다는 거 몰라. 애는 어떻게 없애든 상관없어. 아픈 것도 상관없고. 그보다… 어차피 더는 그 사람 곁에 있지도 못하는데 다 무슨 소용이야.”
언제든 진창으로 돌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처지였다. 예준은 안락함에 익숙해지기가 두려웠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비로소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며 그렇게 좋아하던 도복까지 다시 입게 되었다. 임신조차 누군가에게는 두말할 것 없는 축복이란 사실을 알았다. 예준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약속 잡히는 대로 말해 줘. 그날 바로 떠날 거야. 보스 눈 피해서, 멀리.”
치문이 사납게 숨을 들썩였다. 씨근덕대는 모습이 여느 조직원과 다를 바 없었다. 밑바닥 인생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제대로 겪고 산 녀석이었다.
“여태 보니까, 형 떠나면 그 사람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이렇게 임신까지 했는데.”
예준은 이미 폭발한 태경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봄볕처럼 우아하기만 했던 그가 자제력을 잃고 타인을 해할 때, 사납게 일그러진 눈빛을 똑똑히 기억했다. 자신의 부재 또한 그때처럼 그를 미치게 하리란 걸 알았다.
“알아. 그래도 이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형….”
그를 떠나기로 한 결정엔 오랜 고민이 필요치 않았다. 자신이 아닌, 보스의 존재감이 그리하도록 종용한 것이기에 따를 뿐이었다.
“정명 형님이나 너나 숨은 채무자들 찾는 데 귀신이잖아. 그러니까 어떻게 숨는지도 잘 알겠지.”
“그건 그런데.”
“뒷일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어. 일단은 보스 눈에 안 띄는 게 급선무야.”
“보스도 형이 이럴 줄 알고 두고 보는 건가 봐.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처리할 수 있는데 왜 괜히 힘 빼겠어.”
그에게 무력하게 당한 일만으로 과민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부하면 어떤 사달이 벌어질 것인지는 예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알면 떨어지란 거지. 나도 그 정도 머리는 있으니까.”
오메가라 할지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지금의 평화는 무언의 압박일 뿐, 당장 조직원들에게 머리채 잡혀 끌려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태경이 보스의 정체를 모른다면, 그건 보스가 그를 오롯이 양지에서만 길렀다는 의미였다. 후계자로 삼아도 모자랄 하나뿐인 아들을 양지에 두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보스가 태경을 얼마나 아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안온한 세계에서 자란 태경이 제 아버지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파국이었다. 예준은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감은 아주 미미할 뿐이라고 단정했다.
“준비할 테니까 제발 다치지만 말고 기다려요, 형.”
치문이 눈동자를 떨며 말했다. 예준은 주먹을 말아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길 수 없는 상대는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수년을 구르며 배웠다. 제 보잘것없는 사랑 따위는 어떤 상황에도 우선순위가 될 수 없었다.
*
깊은 밤, 태경은 피로에 젖어 귀가했다. 코트와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어두고 곧장 향한 곳은 예준이 잠들어 있을 침실이었다. 조명 하나 켜 두지 않은 방은 적요했다. 시트에 폭 파묻힌 몸에서 달콤한 페로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민 달빛에 의지해 태경은 예준의 파리한 뺨을 쓰다듬었다. 체온이 높지 않았다. 서늘한 피부 위에 뜨거운 손을 대자 잠시 움츠린 예준은 이내 미동이 없었다.
행사에 다녀온 이후 내내 가라앉아 있어 신경이 쓰였다. 제 아버지를 보고 사색이 되었던 낯빛을 잊을 수 없었다. 아우라가 대단한 우성 알파라 할지라도 그렇게까지 겁을 내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태경은 애써 뒤로해 두었던 한 가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예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두화건설이 내내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었다. 예준이 그 일원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조직의 그림자를 감지하는 데는 누구보다 예민할 터였다. 단순히 화환만 보고 냄새를 맡았다고 보긴 어려웠다.
명성건설 이석준 회장과 두화건설 김향선 사장.
과거의 친분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었다. 만에 하나 그 이면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부친과 쌓아 온 신뢰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태경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는 애써 생각을 잠재우고 손끝에 닿는 여린 몸을 들여다보았다. 눈 안에 담는 것만으로 저릿한 감각을 느낀 지는 오래되었다. 들끓는 욕망마저 잠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태경은 이내 피하듯 작업실로 향했다.
새벽 두 시가 다 되었을 때 기척이 느껴졌다. 예준은 웬일인지 작업실 문 앞에서 서성일 뿐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을 간지럽히는 페로몬 향에 태경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가볍게 손짓하자 그제야 안으로 들어서는 예준이었다.
“깨웠어, 내가?”
작업실에서 새어 나간 불빛이 방해되었을지 모른다. 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경은 곧바로 예준을 당겨 허벅지 위에 앉혔다. 머뭇거리는 시선을 붙잡아 눈을 맞추었다.
“깨울 걸 그랬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자 예준이 고운 눈을 감았다 떴다. 최근 들어 잘 웃던 얼굴엔 미소의 기미가 스며 있지 않았다. 단지 복잡한 눈동자가 닿았다 떠나길 반복했다.
스트레스는 예준과 아이 모두에게 좋지 않았다. 태경은 예준의 기분을 추궁하는 대신 당겨 상체에 기대게 했다. 두 팔로 등을 감은 예준이 너른 어깨에 뺨을 기대었다. 그대로, 태경의 손은 설계도 위를 오갔다. 초침 소리마저 옅은 새벽이었다.
한참 안겨 있던 예준이 태경을 떠나 근처에 앉았다. 태경은 설계도를 향한 호기심 어린 눈을 말없이 주시했다.
“그때 하던 건물이랑 다른 거죠?”
겨우 흘러나온 질문에 태경은 흔쾌히 답했다.
“달라. 외관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타워 형태라.”
“타워?”
대전의 랜드 마크가 될 타워였다. 전망대와 전시관, 푸드 코트 등을 두루 갖춘 복합 건물이자 지역의 활력을 불어넣을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목표였다. LK Architects의 팀이 아닌 태경 혼자 진행하는 일로, 다만 선영은 이 사업의 주인이 지역의 조직폭력배라는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럴싸한 전망대도 있으니까 완공되면 데리고 갈게.”
예준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 없인 이해하지 못할 선들을 묵묵히 바라보는 얼굴이 조금 야위었다. 태경은 우려를 표하지 않고 선을 그었다.
한동안은 사각거리는 잡음만이 맴돌았다. 손가락 사이로 펜을 굴리는 타이밍에 맞추어 예준이 태경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내 제 손가락을 교차로 꿰며 당겼다. 손등에 귀여운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태경은 건조한 손으로 예준의 뺨을 쓰다듬었다.
“주말에 또 출장인데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다녀오면, 병원에 데려가 정식으로 진찰받게 할 생각이었다. 입덧은 잦아들었으나 늘 곁을 지키는 형편이 아닌 터라 상태가 어떤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아이의 존재를 반기지 않을 걸 알기에 태경은 쉬이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선영의 말처럼 적기를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혼자 있을 수 있어. 근데 또 대전까지 가는 거예요?”
단순한 질문일 뿐인데 예준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잘 먹이고 잘 재우는 것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의자에 앉아 있던 예준을 다시 당겼다.
“따지자면 널 위한 거니까.”
예준의 두 눈에 물음표가 떴다. 태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예준을 올려놓았다.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포근한 목에 입을 맞추었다.
“당분간은 이 일에 매진할 생각이야.”
때로는 진실에 닿으려는 노력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예준은 그저 발화점일 뿐이었다. 그를 둘러싼 세계가 생각보다 저와 가까울지 모른다는 의심에 점차 무게가 더해지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진 마요.”
어느새 졸음에 취한 시선이 닿았다. 태경은 슬며시 예준의 티셔츠를 들치어 허리를 쓰다듬었다. 손끝으로 허리를 긁자 예준이 어깨를 떨며 움츠렸다.
“결혼에 관한 것도 좀 미뤄 둘 생각이니까 마음 편히 먹어도 돼.”
예준이 안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옅은 애무일 뿐이었는데도 예준의 입술은 대번에 벌어졌다. 취한 듯 몽롱한 시선을 전희 삼아 태경이 보드라운 살덩이를 물었다. 젖혀지는 목을 단단히 받친 그가 행위에 비해 조급히 혀를 밀어 넣었다. 정직하게 허벅지를 조이는 예준이었지만, 페로몬을 풀어 가혹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형은 아무 잘못 없어요….”
입술이 떨어진 타이밍에 예준이 속삭였다. 고마운 말이지만, 그런 말로 조금이나마 덜어질 가책이 아니었다. 자신은 순진한 오메가를 임신시킨 파렴치한 알파인 데다, 오메가를 혐오하는 아버지를 둔 형편이었다.
예준이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일 리 없는데도 태경은 빨라지는 박동을 감추어야 했다. 그러나 몸을 물리자 예준이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듯 두 다리를 옥죄었다. 교차한 다리 속에 갇힌 태경이 곤란한 듯 목덜미를 매만졌다.
“더 하고 싶어.”
“키스?”
“응.”
예준이 옷자락을 당기며 요구했다. 뻣뻣해지는 하체를 핑계 삼아 더한 일까지 하자고 조를 생각은 없었다. 다디단 입술을 빠는 행위라면 밤새 해도 모자랐다. 태경이 얼굴을 붉히며 예준의 뺨에 입 맞추었다.
“자다 깨서 해 달라고 하기에는 좀 야한 짓인데.”
“그래도….”
뒷말을 삼킨 예준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같이 숨 쉬는 기분이라서 좋아.”
예쁜 말이었다. 태경은 성급히 예준을 당겨 입술을 맞대었다. 덕분에 더는 물 맺힌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다만 온몸을 뜨겁게 달구어 흥분에 젖게 하고 싶었다. 더 파고들 수 없는 지경까지 파고들어 끝내 울리고 나면 번지는 만족감에 미소 짓게 될 터였다.
그러나 치닫는 욕망은 그저 상상에 그쳤다. 태경은 숨이 가빠 헐떡이는 예준을 사납지 않게 몰아붙였다. 앞섶이 비벼지도록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옅은 신음이 흘렀다. 그 신음을 삼키듯 혀를 쑤셔 넣고 뽀얀 뺨을 핥았다.
결국은 바지 속에까지 손을 밀어 넣었다. 그가 야릇하게 눈을 내리뜨며 읊조렸다.
“그냥 키스만 하는 거야.”
“알아요.”
쥐는 곳마다 보드라워 견딜 수 없었다. 손끝으로 애무하자 벌겋게 달아오른 예준이 목에 팔을 감고 매달렸다. 간절한 힘에 애꿎은 가슴속이 절절히 끓었다.
태경은 마른 몸을 안은 채 깊게 입 맞추었다.
숨을 불어 넣듯, 오래도록 온기를 나누어 주었다.
*
이 회장의 호출이 시기상조라고 생각지 않았다. 태경은 명성건설 빌딩에 발을 들이며 격 없이 풀려 있던 단추를 마저 잠갔다.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낯설지만 익숙한 시선이 모여들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이가 대부분이기에 저들끼리 속삭이는 말들이 신경을 긁었다.
회의실에 다다라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낯선 비서가 열어 주는 문 안으로 들어서자 텅 빈 장내가 보였다. 회장은 통유리 창 앞에 지팡이를 짚은 채 서 있었다. 지긋한 나이에도 꺾일 기세가 없는 노인이었다.
“앉거라.”
태경이 인사말을 내뱉기도 전에 이 회장이 먼저 명령했다. 상석에 앉은 이 회장은 지팡이를 테이블에 기대어 놓은 채 태경이 마주 앉기를 기다렸다.
“집으로 부르시지 않고요.”
평화로운 한마디에 이 회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언짢은 기색을 잘 내비치지 않는 아버지이기에 태경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내 무슨 일로 불렀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아버지.”
태경이 습관적으로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설마하니, 싸구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말로 훼방을 놓으려나 싶었다. 아직 바깥의 한기도 채 가시지 않았다. 태경은 입술을 달싹이는 이 회장을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직시했다.
“내가 몰랐으리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알아서 즐기다 버리겠지 싶어 내버려 둔 것이지, 그 아이가 마음에 들어 방관한 게 아니야.”
그가 예준에게 건넸던 인자한 말들이 진심이리라 여기진 않았다. 예상보다 노골적인 직언에 태경은 도리어 차분히 입을 뗐다.
“결혼 문제로 아버지 눈치 볼 생각 없습니다.”
이를 짓씹은 덕에 이 회장의 턱 근육이 깊게 팼다 제자리를 찾았다.
“이제껏 아버지 뜻 거스른 적 없어요. 이 정도면 아들로서 할 도리는 충분히….”
태경이 말을 끝맺기 직전이었다. 이 회장이 손을 뻗어 두툼한 지팡이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 아이, 페로몬이 남달리 야릇하더구나.”
태경의 안색이 싸늘히 식었다. 예준은 질 낮은 품평의 대상이 될 만큼 하찮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우성 알파인 제 아버지라 할지라도, 아들의 연인을 함부로 깎아내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무슨.”
“네가 잊고 있는 것 같아 내 제대로 상기시켜 주려는 게야.”
이 회장이 다가와 태경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오메가란 종자들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라는 걸, 우성 알파인 네가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말이지.”
잊을 리 없었다. 예준에게 닿는 음탕한 시선이 가장 거슬리는 사람이야말로 태경이었다. 달콤한 페로몬을 다른 알파들이 감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압니다.”
하물며, 제 아버지가 그러했다. 그러나 바뀔 수 없는 현상을 두고 몸을 사릴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사랑해요. 그 아이.”
태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을 내놓았다. 낮게 흘러나온 음성에 이 회장의 낯이 일그러졌다.
“음란하고 천한 족속들이야.”
“오메가보다 더한 족속들이 알파죠. 오메가를 두둔하고 싶어서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오메가든 알파든 베타든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끌리긴 쉬워도 마음까지 주긴 쉽지 않다는 거 아실 텐데요.”
태경은 제 셔츠 깃을 쥔 아버지의 손을 손쉽게 풀어냈다.
“현명하신 분이잖아요. 이런 일로 압박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말 안 듣는 아들 때문에 괜한 사람 괴롭힐 생각이라면 그만두세요.”
“결혼이라니, 가당치 않아!”
이 회장이 언성을 높였다. 그가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팡이의 긴 몸체가 흔들렸다.
“그 천한 배 속에 든 것이 혹여 오메가로 발현하기라도 하면, 그 망신을 다 어찌 감당할 셈이야?”
오메가의 목을 조르던 때와 별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더불어 인격과 형질은 별개라고 믿는 태경에게, 이 회장은 그저 놀라울 정도로 고루한 사고에 갇힌 사람일 뿐이었다.
“제 아이예요, 아버지. 사랑해 주셔야 마땅하죠.”
이 회장은 골치 아픈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각인했겠지. 각인 전이라면 그 행사장에서 버티지도 못했을 종자야. 금세 다리 사이가 흠뻑 젖어 널 곤란하게 만들었겠지.”
“모욕은 그만하면 됐어요.”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당장 어떤 짓을 저지르더라도 분이 풀리지 않을 터였다. 태경은 머리끝까지 치닫는 분노를 가까스로 삼켰다. 노기 어린 아버지의 낯에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의 이면은 아름답지 않았다. 더는 이전의 인자한 인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이는 지워. 꼴도 보기 싫다.”
거칠게 내뱉은 이 회장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서울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통유리 창 앞에 등을 보이고 섰다.
“그건 저희가 결정할 일입니다.”
태경 또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제 아버지 곁으로 걸어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제가 만났던 어느 부잣집 따님들보다 예뻐요. 지켜보면 알게 되실 겁니다.”
이 회장의 낯에 검게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곧 공기가 팽팽히 당겨지며 침묵이 차디찬 정적을 만들어 냈다. 그는 두려움 없이 기다렸다. 먹이사슬 가장 상위에 있는 우성 알파이자 한 기업의 회장, 존경받는 선도자로서 이 회장이 이어 갈 말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널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웠다. 어린 나이에 풍파에 치인 게 짠해서 내 빤한 실수를 저질렀어.”
“…….”
“늘 말했었지. 넌 범이야. 집안 일으키는 호랑이.”
용한 무당들이 입을 모아 그리 말했다고 했다. 태경은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거사를 앞두고 괜한 일을 벌였더구나.”
“대전 사업 말입니까.”
“그런 싸구려 사업에 손을 대면서 이 아비에겐 언질도….”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사업 계획이 싸구려라는 겁니까, 그 사업에 손댄 조폭들이 싸구려라는 겁니까?”
거칠 것 없는 직언에 이 회장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치들이야 수년 전에 서울에서 밀려난 패배자들이지.”
조폭들의 영역 싸움이야 빈번했다. 언제나 널리 세력을 뻗는 승리자들이 존재했고, 그들에게 밀려 덩치를 줄이는 패배자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사내들과 권력은 떼려야 뗄 수 있는 관계였다. 세력이 줄지언정 소멸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세계였다.
밀려난 조폭들이 대전에 터를 잡았다고 했다. 태경은 그들보다, 그들을 밀어낸 세력에 관심이 있었다.
“먼 과거 일이니 더는 관심 없으신 줄 알았는데요.”
“듣는 귀는 있다. 내 아들놈이 조폭들 하는 일에 손을 댔다는데 어찌 두고만 봐?”
“저한테는 일일 뿐입니다. 과민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건축가로서, 사업가로서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사업이었다. 태경은 자신이 흔든 떡밥을 기꺼이 문 이 회장에게서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무언가 감추려는 기색도, 종용도 없었으므로.
“앞으로는 더 큰 사업에 발을 들이게 될 거야. 이제껏 네가 해 왔던 일과는 판이 다르지.”
이 회장이 또렷이 시선을 마주했다. 태경은 그의 매서운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우성 알파라면 야망을 잃어서는 안 되는 법이야. 내 생명이 영원하지 않더라도 내가 일군 것들까지 사라질 필요는 없다.”
“무슨 뜻입니까.”
“당장 명성으로 들어와. LK는 명성건설과 적당히 합병하는 순서로….”
“아버지!”
태경이 소리쳤다. 그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이 회장을 노려보았다.
“이런 식으로는 말도 안 됩니다. 말 잘 듣는 꼭두각시가 필요하시다면 차라리 도하를….”
“하룻강아지 데리고 무슨 큰일을 해? 도하는 내 뒤를 이을 재목이 못 돼!”
윤도하는 곧 다가올 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었다. 태경이 직접 손쓴 일로, 저지른 일에 대한 벌이자 예준을 지키기 위한 해결책이었다.
“그 하룻강아지가 뭘 할 수 있겠어? 내 부하들 앞에서 오줌이나 지리지 않으면 다행이지. 사내들 세계가 어디 녹록한 줄 알아?”
붉어진 이 회장의 낯에 노기가 비쳤다. 사내들 세계라. 태경은 자신의 추측이 추측만으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읊조렸다.
“아직 완전히 손 떼신 게 아니군요.”
쯧, 혀를 찬 이 회장이 지팡이를 짓이겼다. 태경은 싸늘히 얼굴을 굳혔다.
“큰일 하는 데 정도正道가 답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태경은 절로 흘러나온 헛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전면에 내세운 명성건설 뒤에 어떤 세계가 존재할지 가늠도 안 되었다. 그 세계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의 목을 물어뜯고 약자들을 죄의식 없이 짓밟는 곳이라면?
이 회장은 이제껏 제 아들을 기만했다는 자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는 도리어 어깨를 넓게 펴고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태경을 탓했다.
“하물며 힘을 얻으려면 대단한 집안의 자제와 결혼하는 것이 도리지. 오메가는 수치다. 가업을 잇기도 전에 샌님으로 보일 작정이야?”
태경이 신경질적으로 단추를 풀어냈다. 그가 제 얼굴이 비친 창을 응시했다. 피 한 방울 나누지 않았음에도 자신은 이 회장과 꽤 닮은 구석이 있었다. 어릴 때는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와 연결된 단 하나의 고리마저 완벽히 도려내고 싶었다.
한발 물러서자 이 회장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가 태경의 어깨를 힘주어 주물렀다.
“두려움은 잊고 이 아비를 믿어.”
두려운 게 아니라 경멸하는 것이었다.
“손에 쥐면 만족하게 될 게다.”
무엇을. 추악한 권력을?
그러면서도 태경은 이제껏 자신이 누린 것 모두가 권력을 기반으로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성 알파라는 형질,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재력, 타고난 재능까지. 다른 이의 피와 살점이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들끓는 반항심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한가롭게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원하시는 게 뭡니까.”
태경이 가까스로 내뱉었다. 같은 우성 알파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긴장을 늦추면 정복당하고 말 것이다.
사그라지지 않는 태세에 이 회장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내 하나뿐인 아들이 내가 이룬 거대한 업적을 이어 나가는 것.”
태경의 어깨를 두드린 이 회장이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자신을 두고 멀어지는 너른 등을 보며 태경은 그의 천박한 젊은 시절을 상상했다. 찢긴 상처에 새긴 독기를, 견고하게 다진 힘을, 그에게 충성하고 있을 많은 알파를 떠올렸다.
“…….”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이윽고 굳어 있던 두 다리가 움직였다. 태경은 보폭을 크게 하며 빠르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이 회장이 원하는 자리에 자신보다 더 잘 어울리는 태생은 없으리라 단정했다.
묵묵한 걸음에 스치는 모든 이의 시선이 닿았다. 조잘대던 입들이 꾹 다물렸다. 페로몬이 얼룩처럼 공기에 남았다. 뒤바뀐 분위기를 감지한 자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
입구에서부터 진하게 느껴지는 페로몬에 태경이 눈살을 찌푸렸다. 알파, 오메가 할 것 없이 뒤섞인 동물적인 냄새로 이곳이 룸살롱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자각했다.
면역제의 효과가 미미해져 가는 늦은 밤이었다. 태경은 자못 불쾌한 기분으로 발을 들였다. 마담으로 보이는 여자가 카운터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뿐한 걸음을 뒤따르니 어느새 긴 복도 끝에 자리한 방 앞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테이블 위에 넘치게 세팅된 술과 안주가 보였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강한 페로몬은 갈무리하지 않은 열성 알파들과, 그들과 함께 뒹굴고 있는 오메가들에게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오셨습니까!”
보잘것없는 이들 가운데 우성 알파가 나타나자 이목이 쏠렸다. 열성 알파들이 후다닥 옷매무새를 고치며 자세를 바로 했다. 동경과 야욕이 어린 눈들은 익숙했다. 태경은 단지 페로몬 냄새가 괴로워 담배를 꺼내 들었다.
“정 사장님은 아직 안 오셨나 봅니다.”
깊게 연기를 빨아들이자 한 열성 알파가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늦으신답니다. 그 전에 먼저 시작하셔도 상관없대요.”
그 말이 허락일 리 없는데도 열성 알파들은 대번에 오메가를 주무르기 바빴다. 태경은 그들과 같은 짓을 하고 싶단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사업 이야기를 난잡한 룸살롱에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좆같았을 뿐이다.
골치가 아팠다. 출장이란 명목 아래 와 있는 곳이 고작 유흥업소라니. 상석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는데, 마담이 방 안으로 오메가 하나를 밀어 넣었다. 예쁘장한 남자애가 태경 옆에 앉았다. 태경은 마담을 향해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들어 보였다.
“이거 안 보여?”
그다지 설득력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마담이 웃으며 말했다.
“유부남이면 어때서요? 여기서 누가 그런 거 신경 쓴다고.”
반지를 웨딩 링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결혼이 성사되지 못했기에 태경의 가슴속이 소리 없이 타들어 갔다. 어쨌거나, 예준이 아닌 다른 오메가의 페로몬은 그저 불쾌감만 일으킬 뿐이었다. 태경은 제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오메가를 구석 자리로 보냈다.
“거기서 눈이나 좀 붙여요. 며칠 못 잔 것 같은데.”
어린 오메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한동안 뜸을 들였다. 태경이 무시한 채 담배를 비벼 끄자 그제야 꾸물꾸물 멀어지는 발끝이 보였다. 열성 알파들 손에 잡힐세라 아예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 가는 오메가를 보다, 태경은 새 담배를 꺼내 들었다.
“후우….”
사내들 세계란 이렇게 추잡하고 덜떨어진 곳에 불과했다. 지켜야 할 것과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태경은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담배만 태웠다.
“정 사장님, 오셨습니까!”
담배를 다섯 개쯤 비벼 껐을 때 단단히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두 번째 우성 알파의 등장이었다. 흐트러진 슈트 차림으로 등장한 남자는 비교적 점잖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왜 다른 새끼들만 기분 내는 모양샙니까? 대표님 위해서 준비한 자린데요.”
정 사장이 태경 옆에 자리 잡았다. 태경이 재킷을 벗으며 눈을 맞추었다.
“사업 얘기에 열성 알파들이 필요합니까?”
기껏 해 봐야 주먹이나 휘두르는 조무래기들일 터였다. 태경이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묻자 정 사장이 눈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별다른 주문 없이도 벌떡 일어난 열성 알파들과 오메가들이 줄줄이 방을 나섰다.
“이런 거 싫다는 사람은 이 대표님이 처음인 것 같은데요.”
싫기만 할까. 역겹기 짝이 없었다. 태경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양주를 따라 건넨 정 사장이 잔을 부딪치길 요구했다.
“한잔하고 시작하시죠.”
정 사장 옆, 비서로 보이는 남자가 서류를 꺼내 들었다. 비좁은 테이블에 공간을 만들기 위하여 정 사장이 아무렇게나 술병을 밀어 넘어뜨렸다.
“두화건설이 궁금하시다고요.”
태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성건설도 아실 텐데요.”
정 사장의 안색이 파리하게 굳었다. 제대로 짚었다. 태경이 술을 따라 정 사장에게 건넸다.
“제가 누구인지는 잊으셔도 됩니다.”
태경의 말에 정적이 감돌았다. 일순, 정 사장이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하하! 퍼지는 호탕한 웃음소리에서 태경은 오히려 그가 지닌 응어리를 읽었다.
그는 오래전, 서울에서 밀려나 대전에서 터를 잡은 조직의 우두머리였다. 명성건설과 두화건설, 이 회장과 김향선 사장의 뒤를 캐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앙심을 품은 정 사장만 한 사람이 없었다.
“이거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데요. 명색이 명성건설 아드님인 분이….”
“그러게 말입니다.”
다시 술을 따르던 태경이 처연히 눈을 내리떴다. 아름다운 옆모습에서 이 회장의 젊은 시절이 엿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 사장은 말을 삼켰다. 대신, 태경 앞에 두툼한 장부를 내밀었다.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으니 천천히 보시죠.”
정 사장이 장부 가장 상단에 적힌 두화건설을 가리켰다. 태경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
취한 태경이 비틀거리며 문을 열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예준과의 동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너른 집을 채운다는 사실만으로 전에 없는 충족감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
심장을 두드리는 듯한 설렘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곧 마주할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애가 탔다. 태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반쯤 흥분한 상태로 집 내부에 발을 들였다.
“…….”
매번 현관에 나와 자신을 기다렸던 예준은 임신으로 조금 게을러졌다. 태경은 한시라도 빨리 그를 볼 수 없어 불만이었다. 알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치기 어린 감정과 별개로 불쾌한 직감이 치밀었다.
평소보다 미미한 페로몬 향에 태경의 두 발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조명 하나 켜지지 않은 집은 고요했고 어디에서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태경은 폭발할 듯 뛰는 심장 박동을 애써 무시하며 집 전체의 조명을 켰다.
내부가 한낮처럼 밝아졌다. 그러나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페로몬은 강해지지 않았다.
태경이 거칠게 셔츠의 상단을 쥐어뜯었다. 취기에 의식은 몽롱해졌어도 감각은 배 이상 예민했다. 그의 직감은 잘 맞아 드는 편이었다. 집 안의 모든 것이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집이 비었다.
숨이 사라졌다.
태경은 거칠게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둥그렇게 솟아 있어야 할 시트는 평소와 달리 평평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위에 익숙한 메모지가 보였다. 기시감이 들었다. 태경은 지체할 것 없이 메모를 집어 삐뚤삐뚤한 글씨를 읽었다.
[형은 아무 잘못 없어요 설명 못 하고 가서 미안해요]
두 눈에 붉게 열이 몰렸다. 분노인지 절망인지 알 수 없었다. 태경은 무릎을 꿇은 채 페로몬 향이 스민 시트 위에 고개를 처박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으나 감히 내뱉을 수 없었다. 호흡을 멈춘 채로 시트를 구겼다. 취기 때문에 일어난 환각이 아니라면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쿵! 하는 소음과 함께 경호원이 들이닥쳤다. 그는 침실과 정원을 잇는 작은 테라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태경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공포에 젖은 경호원의 낯을 노려보았다.
“멀리 가진 못했을 겁니다.”
어떤 명령이든 내려야 하는데도 입술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살며, 단 한 번도 실감하지 못한 감정이 목구멍을 꽉 틀어막았다.
“…찾아.”
“…찾아.”
겨우, 한마디였다. 성대를 긁으며 흘러나온 음성에 경호원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테라스를 지나 정원으로, 굳건히 닫힌 대문을 박차고 이내 사라졌다.
태경은 반쯤 열린 테라스 문 앞에서 살랑이며 흔들리는 커튼을 바라보았다. 햇살조차 없는 깊은 밤이었다. 집 안으로 스미는 싸늘한 겨울의 냉기가 온몸을 찢는 기분이었다.
네가 어떻게 날 떠나.
의문은 곧 자책으로 뒤바뀌었다.
내 무엇이 널 떠나게 했나.
태경은 긴 밤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을 때까지, 그 살랑대는 커튼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 5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