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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Light & Shadow II (9/18)

8. Light & Shadow II

첫 번째 변화는 자신만의 방이었다.

남자의 작업실 맞은편, 빈 곳이나 다름없던 방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예준은 새하얀 벽지와 우아한 조명, 나무 본연의 빛깔이 돋보이는 어두운 바닥재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밟기가 송구해 발끝만 들었다 놨다 하는데 턱, 손을 붙잡은 태경이 안으로 발을 들이도록 이끌었다.

정원을 향해 있던 벽면이 통유리로 바뀌었다. 덕분에 오전의 눈부신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크리스털 케이스에 담겨 전시된 올림픽 메달, 벽면에 걸린 선수 시절 사진까지. 테이블과 소파도 갖춘 방이지만 침대는 없었다. 의문이 비친 예준의 눈을 보며 태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잠은 같이 자야지.”

“제 방은 있지만 제 침대는 없는 거예요?”

“불만이야?”

“아뇨….”

그럴 리 없었다. 각인 이후, 예준은 남자의 품속에 있을 때 더더욱 안정을 느꼈다. 페로몬의 영향이라는 걸 알지만 그것 없이도 편안했다. 특히, 눈을 떴을 때 바로 앞에 그의 잠든 얼굴이 보이는 게 좋았다.

“좋아요. 제 방 생긴 거.”

예준은 솔직히 표현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태경이 뺨을 맞대며 안아 주었다. 이번에도 그를 통해 잘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그의 집에 속한 제 공간이라 해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남자가 전시해 둔 메달 케이스를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고작 못 하나에 아무렇게나 걸어 두었던 지난 과거를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가 마련해 준 방 덕분에, 반지하 방에 사는 동안 자신을 돌보길 등한시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인지했다. 어쩌면, 스물일곱 해 동안 자신을 온전히 살아 낸 저보다 그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예준은 태경에게 다가가 너른 어깨를 끌어안았다.

“고마워. 그래도 사진은 뗄게요.”

“왜. 멋진데.”

땀에 푹 절어 숨을 헐떡이고 있는 사진이었다. 태권도복 깃이 지나치게 벌어져 살결이 불필요하게 드러났다.

“너무 과해요.”

“어차피 이 방에 나밖에 못 들어와.”

“제 방인데 대표님이 여기서 뭐 하시게요.”

그가 팔짱을 꼈다. 부푸는 근육을 보고 직감한 예준이 기함했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죠?”

“맞아.”

“아닌 척이라도 좀 하면 안 될까요.”

딱히 불쾌한 건 아니었다. 대낮도 아닌 오전에 나누기에는 부적합한 대화라 생각했을 뿐이다. 예준이 고개를 가로젓자 태경이 다가와 어깨를 맞대었다.

“나는 그런 상상이 연인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하는데.”

“활력이요?”

“그래, 활력. 이 방에서 나는 너 상상하면서 자위하고, 너는 자위하는 나 상상하면서 바지 속에 손 집어넣는 거.”

이미 경험한 일이기에 얼굴이 눈에 띄게 달아올랐다. 예준은 남자의 향취와 페로몬이 묻은 침대 위에서 자위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흔적이 남은 빈방이라면 남자 또한 그런 욕구를 느끼리라 인정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노골적으로 설명하지 마요.”

“왜.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은데.”

“알겠다니까요! 그래도 이제부터 여긴 제 방이니까 제 허락 없이는 안 돼요.”

태경은 어쩐지 제 엄포를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럼 그런 짓 하기 전에 꼭 허락받을게.”

“허락 안 하면요?”

그가 허락을 구하듯 뺨에 입 맞추었다. 엉겨드는 커다란 몸을 받아 내며 예준은 분에 넘치는 방을 둘러보았다.

“허락해 줘.”

“그때 가서 생각해 볼게요.”

당분간은 방을 비울 예정이 없었다. 당장 할 일도 없을뿐더러 애초에 계획된 인생도 아니었다. 예준은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았다. 어쨌든 태경은 굴복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허락하게 될 거야.”

태경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비쳤다. 예준은 거리낌 없는 남자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의 체취가 남은 소파 위에서, 제 사진을 바라보며 자위할 남자를 순간 상상했다. 온통 끈적하게 변한 방을 떠올리면 괜한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여기서 다시 시작해.”

다정한 말에 귓속이 간지러웠다. 그러나 예준은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곳에서도 길을 헤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네 말대로 네 방이니까 원하는 대로 채우고 버리면 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천천히 생각해 보고.”

건설 현장 일이나 음식 배달이 아니라면 뭘 할 수 있을까. 미래를 그리지 않은 지 수년이기에 예준은 그 무엇도 떠올릴 수 없었다. 남자의 집은 안전하고 편안하지만, 자신의 길잡이가 되어 줄 만한 곳은 못 되었다. 적어도 빚더미에 앉았을 때는 해야 할 일이 분명했다. 미친 듯이 돈만 벌면 되니까. 지금의 상황으로는 과거의 영광을 상기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안 해도 좋고.”

고심하는 예준을 보며 태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아무래도 예준이 놀고먹는 것을 가장 바라는 듯한 눈치였다.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어두운 길을 밝히며, 늘 그렇게 살아왔다. 나태하게 시간을 죽일 깜냥은 못 되었다. 또렷이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뺨을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이제부턴 앞만 봐. 뒤처리는 내가 다 해 줄 테니까.”

지긋지긋한 빚, 몸이 부서지도록 일만 했던 나날들, 배워 먹지 못한 조폭 형님들에게 시달린 것까지. 제 일상에 깊이 파고들었던 어둠을 완전히 등질 수 있을지 예준은 두려웠다. 한번 빠진 뒤론 무슨 수를 써도 벗어날 수 없었으므로.

“다시는 그 동네로 돌아갈 필요 없어.”

그 진창에서 건질 사람은 오로지 치문뿐이었다. 치문을 제외하면 과거의 그 무엇도 그립지 않았다.

예준은 남자와 눈을 맞추며 대답을 대신했다. 빛만 깃든 방이 좋았다. 제 마음을 읽은 듯 그의 입가에도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

LK의 지하 주차장으로 향한 태경이 시선을 옮겼다. 경호원은 비상구 문 앞에 선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의 기척을 확인한 두 사람은 차례로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서늘하고 어두운 계단 근처로 접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경호원은 태경에게 꾸벅 인사한 뒤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태경은 안에 든 두툼한 A4 용지를 꺼내 첫 장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예준이 오메가란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었고, 태경은 그 시작으로 예준의 지난 행적을 추적했다.

“여기. 두화건설 현장 아니야?”

“맞습니다.”

담백하게 돌아온 대답에 태경이 미간을 구겼다. GPS 추적으로 알아낸 결과에 따르면 머무른 시간은 대개 한 시간 남짓이었으나, 드나든 횟수가 제법이었다. 명성과 연이 닿은 곳에서 예준을 발견했다는 사실만으로 태경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예준이가 왜 거기 드나드는데.”

“두화건설 김향선 사장 밑에 똘마니들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사채놀이를 좀 합니다. 김재우 씨도 김예준 씨도 그쪽과 얽힌 것이고요.”

두화건설의 이름을 내건 현장에서 사채놀이를 할 정도면 대단한 배짱이었다. 태경이 서류를 다음 장으로 넘기며 물었다.

“이거, 두화건설 사장도 알고 있는 사실이야?”

“김향선 사장 말입니까.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당연히 알고 벌인 짓일 겁니다. 신분 세탁에 정성 쏟은 것에 비해서는 구린 게 많던데요. 명성건설 쪽은 깨끗해도, 적어도 두화건설은 아닙니다.”

이석준 회장의 말대로라면, 내실 있는 회사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쪽 세계에서 발 뺐다고 들었는데.”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럼, 아직도 조직폭력배랑 엮여 있다 이거야?”

“조직을 운영하기까지 하는 것인지는 불확실합니다. 다만,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이리저리 발 뺄 준비 마친 상태로 사채 굴리는 건 확실합니다. 사람 시켜서 엮인 열성 알파들 뒤도 밟아 봤는데, 인상착의가 죄다 조폭이던데요.”

골치 아픈 일이었다. 조직폭력배 소굴에서 예준을 벗어나게 만들기는 쉽겠지만 두화건설의 치부를 들추는 순간, LK와 관련된 프로젝트까지 그르칠 수 있었다. 더 최악은, 김 사장이 여전히 조직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회장이 안다는 가정이었다. 알고도 방관했다면, 혹여 이 회장도 그 조직과 연관되어 있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태경은 그 가정을 배제하지 않았다.

“역사가 깁니다. 괜히 겉핥기식으로 건드렸다간 오히려 이 대표님 쪽에서 피 볼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을 지녔다고 했던가. 이래서야 깨끗한 왕좌에 올라앉긴 그른 꼴이 되지 않았나. 태경이 불쾌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충고는 됐어.”

“이 대표님.”

“사채놀이 한다는 그자 이름이나 대봐.”

“박정명입니다.”

“두화건설 현장으로 예준이 불러들인 새끼가 그 새끼 맞아?”

“예.”

“열성 알파고.”

“그렇습니다.”

단 한 번도 형질을 내세워 서열 정리에 나선 적이 없는 태경이었다. 그러나 적대 관계에 있어서는 우위를 선점할 필요성이 있었다.

“박정명, 직접 만나실 생각입니까?”

경호원의 물음에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꼴같잖은 권력으로 힘없는 오메가를 얼마나 괴롭혔을지는 안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예준에게 룸살롱 복도나 닦으라고 지시한 사람도 분명 그였다. 사채놀이만 한다는 놈이 룸살롱까지 휘젓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인상착의가 딱 조폭이라고.”

“네.”

태경은 예준의 유일한 지인이나 다름없는 치문을 떠올렸다. 외부 사람이 정보를 캐기 위해 접근하는 것보다는, 내부 사람을 이용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터였다.

“제치문 그 사람과도 약속 잡아서 연락해.”

“알겠습니다.”

명령한 태경이 시간을 확인했다. 삼십 분 남짓 남은 미팅 자리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 움직여야 했다. 그는 봉투를 손에 든 채 비상구 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먼저 가.”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허리를 숙여 인사한 경호원이 먼저 문을 열고 나섰다. 퀴퀴한 공기 속에 잠시간 서 있던 태경은 바깥의 기척이 사라진 후에 자리를 떴다.

*

“…좀 쪘나?”

거울 앞에 선 예준이 혼잣말했다. 태경의 집에서 삼시 세끼 좋은 음식들만 섭취하고 있으니 살이 찐다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마저도 어설픈 제 솜씨가 아니라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의 수준급 요리였다. 선수 때처럼 체중 감량을 위한 식단도 필요 없어서 늘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했다. 편의점 음식으로 때우던 때가 무색하게도 날카롭던 두 뺨에 매끈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예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문을 나섰다. 마침 멀리에서 다가오는 태경의 차가 보였다. 해가 지고 있는 데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켜져 있었어도 남자의 차를 몰라볼 리 없었다.

부드럽게 정차한 차에 올라타며 예준은 태경과 눈을 맞추었다. 조금 전 살이 쪘다는 걸 인지한 탓일까. 남자가 뺨을 꼬집듯 건드리자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추우니까 앞으로는 전화하면 나와.”

“이 정돈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서 그래.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각인 후로 과잉보호가 더 심해졌기에 예준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 덕에 체력도 좋아졌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내 집 안에만 머무르는 탓에 감기 같은 건 걸릴 가능성이 없었다.

무척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데이트 겸 외식하자는 태경의 말에 예준은 선뜻 그러자고 대답했다. 차는 집에서 멀지 않은 한 고급 레스토랑 앞에서 멈추었다. 마침, 작은 정원 주변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예준은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주는 태경을 보며 말했다.

“혼자 내릴 수….”

“알아. 혼자 내릴 수 있는 거. 이만하면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바닥에 두 발이 닿자마자 감겨드는 손을 맞잡으며 예준은 얼굴을 붉혔다.

예준은 누군가의 연인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데 면역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시선들이 모여들었다. 레스토랑은 조용한 분위기와 달리 만석이었고 지금은 저녁 식사가 한창일 여섯 시 반이었다. 창가 테이블에 착석하자 레스토랑 안이 훤히 보였다.

그렇다는 사실은, 낯선 타인들 또한 태경과 예준을 어려움 없이 볼 수 있단 의미였다. 예준은 태경의 손길을 따라 코트를 벗으며 쭈뼛거렸다. 태경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예준을 먼저 자리에 앉혔다.

“저녁 식사일 뿐인데 긴장할 필요 없어.”

다독이는 말에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겐 익숙하지 않은 고급스러운 식사지만, 내부에 있는 이들에게는 일상적인 식사일 터였다. 테이블에 놓인 손을 어쩌지 못하자 태경이 큰 손으로 손등을 덮었다.

“떨지 말고.”

“안 떨었어요.”

“우리 닿아 있는데, 지금. 다 느껴져.”

그러면서 종아리를 더 깊숙이 얽는 그 때문에 예준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먹기도 전에 체하겠어요.”

“그럼 안 되지.”

태경이 웃으며 직원을 불러들였다. 의견을 묻지 않고 코스 요리를 주문하면서도 그는 맞닿은 손을 떼지 않았다. 결국 손가락을 얽어 맞잡자 테이블 위에 놓인 초가 유난히 아른거렸다. 남자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가 낮은 조도 속에 선명히 드러났다. 약간의 피로감이 깃든 시선이 제게 고정되어 있었다.

내내 느긋하던 그가 불편해 보인 것은 애피타이저가 서빙된 직후였다. 예준은 그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저에게서 눈을 떼어 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옆으로 돌아간 고개, 멀지 않은 곳에 시선을 둔 채 잠시 머무르는 눈빛. 이내 제자리를 찾은 태경의 두 눈에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예준은 남자의 시선이 닿았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각인 전의 알파와 오메가가 있었다. 그에게 각인당해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인지하지 못하는 저와 달리, 태경은 오메가의 페로몬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상기되는 뺨은 분명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준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불편해요?”

그래서인지 말투에 냉기가 묻었다. 예준은 상큼한 샐러드 속 토마토를 툭 건드리며 물었다. 태경은 미간을 좁힌 채 답했다.

“불편해. 면역제를 안 먹었거든.”

“왜?”

“너 온전히 느끼려고.”

결론적으로 옳지 않은 선택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여전히 오메가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가 목덜미를 매만지며 다시 한번 그 오메가에게 시선을 두었다. 남자인 데다 저와 비슷한 체구, 피부색을 가진 오메가였다. 예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남자의 손을 당겼다.

“보지 마요.”

“…….”

“자꾸 저 사람 보지 말라고.”

이 얼마나 불평등한 관계인가. 예준은 이제 태경이 아니라면 어떤 알파에게도 흥분할 수 없었다.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기에 당연히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제 것인 남자의 시선을 왜 다른 오메가에게 빼앗겨야 하는지,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서 본 거 아니야.”

태경이 말했다. 예준은 볼썽사납게 발개졌을 얼굴을 숙여 감추었다.

“그러면서 왜 두 번이나 보는데.”

말끝이 조금 떨린 것도 같다. 눈을 맞추지 않는 저를 보며 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태연하게 옆자리로 다가와 착석했다.

“이러면 돼?”

예준은 자신의 허리를 감는 단단한 손을 느꼈다. 곧이어 목덜미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이러면 네 냄새밖에 안 나는데.”

살가운 스킨십에 쉬이 녹을 감정이 아니었다. 예준이 남자의 입술을 밀어내듯 몸을 물렸다.

“불공평하지.”

머릿속으로만 내내 생각했던 말을 태경이 먼저 꺼냈다. 모두가 알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야기였다.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가 불공평하다는 사실은 아무런 관련 없는 베타들조차 아는 사실이었다.

“맞아요. 불공평해요.”

예준은 가까스로 답했다. 듣는 알파 입장에서도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닐 터였다. 우려와 달리 태경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다른 오메가 페로몬을 느끼는 건 맞지만, 그 어떤 사람 것도 각인한 네 것만큼은 아니야.”

“얼굴 빨개질 만큼은 느끼잖아요.”

태경이 곤란한 듯 귓가를 매만졌다.

“그건 아마 너 때문일걸.”

조금 더 가까이 맞붙는 남자의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 있었다. 큰 손이 예준의 뺨을 감쌌다.

“상황 모면하려고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그냥 타이밍이 나빴을 뿐이니까 오해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나긋나긋 타이르는 목소리에 예준은 괜히 예민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우성 알파로 태어날 순 없기에, 정말 그의 말이 사실인지 궁금했다.

“정말 제 페로몬만 강하게 느끼는 거 맞아요?”

“맞아. 사회적 지위 정도는 유지하고 있는 걸 보니 히트 사이클 때만큼은 아닌 것 같고.”

“…같고?”

“나도 각인은 처음이야. 아직 혼란스럽다고.”

태경이 예준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이처럼 털어놓는 고백과 달리 눈빛은 어른스럽고 차분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래. 불공평해. 각인할 만큼 좋았을 뿐인데, 좋을수록 더 불공평해진다니 좀 가혹하다는 생각도 드네.”

태경이 앞에 놓인 레드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어쩌면 평생 이해받지 못하겠단 느낌도 들고. 어쨌거나 다 가진 쪽은 나니까.”

그가 예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붙였다. 달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더 좋아하는 쪽은 난데, 너 못살게 구는 쪽도 나라서 선뜻 위로를 못 하겠어. 그래도 너 앞에 두고 몇 미터 거리에 앉은 오메가한테 꼴린다는 건 말이 안 돼.”

“쉿. 누가 들어요.”

노골적인 말에 예준이 태경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그럴수록 눈앞의 남자는 가까워질 뿐 멀어지지 않았다.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타인들은 느끼지 못할 둘 사이의 페로몬은 대신 야릇한 분위기로 전환되어 몸과 몸 사이에 고였다.

“너무 가까워.”

예준이 속삭였다. 가볍게 등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태경은 그런 예준의 곤란함을 알면서도 무시한 채 말했다.

“감정이란 게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거면 더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서 다른 것들로 유추해야 할 때가 많아. 눈빛이든 행동이든 말이든….”

예준은 그것을 알아채기도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그의 눈에 어린 욕망과 열감은 감지할 수 있어도 그 감정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 헤아리긴 무리였다. 그의 달콤한 말이 거짓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언제까지 유효한 것인지는 역시 의심스러웠다.

남들 다 하는 연애가 이렇게 어려운 건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약자인 오메가이기 때문일까. 애꿎은 입술만 짓씹고 있는데 태경이 말을 이었다.

“나이 먹고 이런저런 일에 능숙해진 것도 사실이고 매사에 머리 안 쓴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적어도 감정에는 솔직해. 한 번도 그걸로 남 이용해 본 적 없어. 그러니까… 동의 구하지 않고 각인까지 할 정도면 너 좋아하는 거 맞아. 감정은 생각보다 강력해. 사랑 때문에 목숨 바치는 사람들도 있는데 왜 못 믿어.”

그의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던 예준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예준은 조용히 구겨진 셔츠를 펴고 남자를 보았다.

“대표님도 느껴 본 적 있어요? 나보다 강한 상대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쩔쩔매는 거. 심장이 터지도록 억울하고 차라리 기절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끔찍하게 무력한 거.”

태경은 큰 고민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단 한 번도.”

우성 알파는 먹이 사슬 가장 상위에 있었다. 어떤 불행도 우성 알파를 무력하게 만들지는 못할 테니 당연했다. 옅은 반항심은 그를 향한 것이라기보다 알파란 존재를 향한 것이었다. 예준은 태경을 슬쩍 밀어내고 다시 토마토를 툭툭 건드렸다. 시선은 자연스레 낯선 오메가 너머의 알파에게로 향했다.

“페로몬은 못 느끼지만 알파라는 건 알 수 있어요.”

한동안 예준의 시선이 알파에게 머물렀다. 돌아서면 기억도 나지 않을 외모인데, 각인 후에도 여전히 알파임을 알 수 있단 사실이 경이로웠다.

“제가 이렇게 알파 보고 있으면 대표님은 기분이….”

태경이 강하게 예준의 팔을 붙잡아 당겼다.

“엿 같아. 그러니까 더 보지 마.”

직전의 다정함이 무색하게도 태경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 있었다. 그가 충동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손에도 상당한 힘이 실렸다. 그 짧은 찰나에 느껴지는 초조함, 분노, 질투심만은 한시적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믿을 수 있었다.

“어? 예준아.”

재차 확인하는 말에 예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백문이 불여일견인 법이다.

“면역제 꼭 먹어요.”

“응.”

“이제부터는 매일 확인할 거니까.”

단호한 말에 태경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별안간 알파를 노려본 탓에 예준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던 무력감을 가까스로 끌어 올렸다. 품 안에 가두고자 당기는 힘에 순순히 몸을 기대었다. 제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옭아매는 손길에도 거부 없이 응했다.

“나한테 종속된 게 가슴 터질 만큼 억울한 거면.”

태경이 예준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눈을 맞춘 그가 여유 없이 읊조렸다.

“어떻게든 보상해야겠지.”

따지고 보면 태경은 예준에게 굴욕을 주지 않는 유일한 알파였다. 먼저 든 예는 그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님에도 태경은 가책을 느끼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태도나 행동에 일희일비하는 남자가 싫다면 거짓말이다.

“보상은 이미 넘치도록 해 주셨어요.”

빚더미에 허덕일 이유도, 좁은 반지하 방에서 궁상을 떨 필요도 없는 일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 건 아무 오메가나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아니었다.

“저는 제 주제를 잘 알아요.”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정말 혼날 줄 알아.”

말과 달리 부드러운 입술이 찾아들었다. 싸하게 정적이 감도는 장내를 느끼며 예준은 남자의 가벼운 키스를 받아 냈다.

*

잠에서 깨어났을 때, 평소와는 다른 낯선 소음이 밀려들었다. 침실이 아닌 주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직 일곱 시 반이었다. 1월이라 이제 겨우 고개를 내민 해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예준은 의아한 얼굴로 텅 빈 옆자리를 더듬었다. 태경이 출근 준비를 하는 동안에는 보통 햇살이 쏟아지길 기다리며 뒹굴곤 했다. 묘하게 다른 아침임에도 예준은 오늘이 무슨 날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예준은 부러 침대를 빠져나가지 않았다. 살이 쪄서인지 부쩍 몸이 무거워진 것 같았다. 약간의 미열이 있는 듯도 했지만 체온을 재 보지 않았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베개에 고개를 푹 파묻은 예준은 보송보송한 시트를 끌어다 몸을 덮었다. 어차피 태경은 곧 저를 찾을 터였다. 드레스 룸이나 작업실에 있다가도 곧잘 침실로 찾아오는 그이기에 조급하게 마음먹지 않았다.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로 돌아왔다. 예준은 금세 다시 잠에 빠졌다가 남자의 기척에 눈을 떴다. 이제 햇살이 제법 들어오고 있었다. 태경은 아직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지 않은 채였다.

“잘 잤어?”

“응.”

예준은 대답과 함께 상체를 일으켰다. 눈을 비비자 장신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의 손에는 앙증맞은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어…?”

하얀 생크림에 딸기가 올라간 수제 케이크였다. 예준은 그제야 핸드폰을 들어 날짜를 확인했다. 1월 19일. 생일이었다. 비밀번호로 써먹는 형편이면서도, 발현 이래 한 번도 제대로 챙긴 적이 없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남자는 어딘가 멋쩍은 얼굴로 다가왔다. 상기된 목덜미만으로도 이런 이벤트가 처음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덩달아 어색해진 예준이 헛기침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예준은 다가오는 남자를 맞았다. 한쪽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춘 태경이 케이크를 내밀었다.

“생일 축하해.”

예준은 허둥지둥하며 초를 불었다. 까치집 지은 머리로 어수룩하게 굴자 그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이, 이런 거 언제 준비하셨어요. 아…. 저는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지. 네 생일이잖아.”

예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태경의 말이 맞았다. 그가 주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하던 와중이었기에 바보처럼 굴고 말았다. 예준은 괜히 뒤통수를 긁으며 태경을 보았다. 아직 옷매무시를 완벽히 가다듬지 않아 그의 블랙 셔츠는 흐트러진 채였다.

“이건 나중에 맛있게 먹기로 하고.”

태경이 슈트 하의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이번에는 능숙한 말이나 부드러운 눈빛 대신 차분한 공기가 주변을 맴돌았다.

“보상해 주겠다고 했지.”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열었다. 과시 없이 반지를 꺼낸 그는 예준의 네 번째 손가락에 그것을 끼웠다. 토끼 눈을 뜨고 태경을 응시하는 예준과 달리, 그는 선뜻 눈을 맞추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걸 지니고 있으면 분명 도움 될 거야, 너한테.”

대신 하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예준은 남자의 손에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가 이미 끼워져 있음을 눈치챘다. 남자에게도 저에게도 알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싼 제품이었다. 남자의 말처럼,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 감정을 떠올릴 수 있는 물건을 지니면 좋을지도 모른다. 과분하지만 반지의 무게가 짐처럼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예준은 이내 태경의 목덜미로 시선을 옮겼다. 달아올랐으나 볼썽사납지 않았고, 스타일링이 덜 된 자연스러운 모습은 왜인지 순수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성 알파와 순수함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단어임에도 태경에게는 꼭 들어맞듯 잘 어울렸다.

“고마워요.”

예준은 온 힘을 다해 말을 내뱉었다. 기대하지 않은 생일 아침이자 보상이었다. 보답으로 길게 뻗은 목에 입을 맞추자 태경이 간지러운 듯 어깨를 떨었다.

“씻고 나오면 생일상 차려 줄게.”

그제야 눈을 맞춘 그가 입술을 축였다. 잠시간 정적이 맴돌았다. 심장 박동이 쉼 없이 고막을 때려댔다. 말을 고르는 사이, 예준의 귓가와 뺨을 매만진 태경이 몸을 일으켰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이따 봐.”

그가 케이크를 들고 방을 나섰다. 가치에 비해 담백한 의식이었다. 예준은 혼이 나간 얼굴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손에서 확연히 느껴지는 반지의 존재감이 바로 직전, 남자의 행동을 증명했다. 그가 보잘것없는 제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수시로 확인하라고.

끓어오르는 마음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아랫배가 조여들고 허벅지가 경직되었다. 연약한 남자를 볼 때면 성감이 치밀었다. 더 두고 보면 속수무책으로 번질지 몰라, 예준은 부랴부랴 침대를 빠져나왔다.

“…….”

성급하게 침대 정리를 하던 예준이 순간 멈추었다. 구겨진 이불을 걷어 내자마자 시트 위로 얼룩이 보인 탓이었다. 엄지손톱만 한 핑크빛 얼룩은 침대 중간 즈음에 남아 있었다. 예준은 입고 있던 하얀 티셔츠를 이리저리 들추어 보았다. 손에도 허리에도 상처는 없었다. 기묘한 직감에 이윽고 바지를 벗어 속옷을 확인했다. 뒤쪽에 시트와 같은 색의 얼룩이 묻어 있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으나 피가 분명했다.

러트 이후로는 관계를 맺지 않았다. 속은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완전히 낫지 않은 상처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사후 피임약의 부작용일 수도 있었다. 예준은 대수롭지 않게 시트를 걷어 냈다. 이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면서.

시트를 갈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주방에서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예준은 묘한 기분으로 미역국을 그릇에 옮겨 닮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스툴에 올라앉아 남자가 건넨 그릇을 식탁 위에 놓았다.

“맛있을 것 같아요.”

“너무 기대하지 마.”

지나치게 짜고 달더라도 정성스레 만든 음식이니 싹싹 비울 생각이었다. 생일에 미역국이라니. 치문과 즉석 미역국을 함께 먹은 적은 있어도, 생일상을 통째로 받아 보긴 정말 오랜만이었다.

예준은 몹시 기대에 차 미역국을 한술 떴다. 맛없기는커녕, 담백하고 고소해서 입맛에 꼭 맞았다. 타인에게 음식을 해 주고 답을 듣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지 태경은 긴장한 기색이었다. 평가를 기다리는 그가 어딘가 안쓰러워서 예준은 밥을 통째로 엎어 미역국에 담갔다.

“너무 맛있어서 그런데 머슴처럼 먹어도 돼요?”

태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입을 가리자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빛났다.

“얼마든지.”

“대표님도 거기서 보지만 말고 같이 먹어요.”

목덜미를 매만진 태경이 마주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그가 미리 준비해 둔 정갈한 반찬이 놓여 있었다. 예준은 직전 보인 패기와 비교하면 차분히 식사를 이어 갔다. 몇 입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미역국은 금세 바닥을 보였다.

“더 먹을래요.”

태경이 일어나 한 그릇을 더 덜어 주었다. 예준은 두 번째 밥그릇을 엎어 다시 한 그릇 뚝딱 비워 냈다.

“맛있어?”

“진짜 맛있어.”

벅찬 이 기분을 어떻게 형용해야 좋을까. 선수 시절까지는 많은 축하와 선물을 받았기에 출생이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팬들의 말에 자신감이 드높이 치솟았던 때도 있었다.

발현 후에는 또 한 살 먹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치문에게 싸구려 선물을 받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못된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다.

새로운 아침이 두렵기까지 했던 나날이 무색했다. 스물일곱 번째 생일은 지난날과 달랐다.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그에게 선물도 받은 데다, 아침 인사로 생일 축하한다는 말까지 들었다. 손가락에는 마음을 담은 증표가 끼워져 있었다.

“…진짜 맛있어.”

편안하고 사랑스러운 생일 아침이었다. 예준은 괜히 눈가가 찡해져 바쁘게 두 눈을 비비는 척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좋아해.”

“누가 끓여 준 미역국, 엄청 오랜만에 먹어 봐요.….”

“이제부턴 매년 먹을 테니까 지겨워도 지겨운 티는 내지 말아줘.”

손가락을 얽자 반지의 이물감이 선명해졌다. 예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였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생각해 주는 그가 고마웠다.

“출근해야 하는데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거 아니에요?”

“출근?”

“네.”

생일인 건 몰랐어도 오늘이 수요일이라는 사실은 알았다.

“안 하지. 온종일 너랑 뒹굴 거야.”

태경의 말에 예준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뒹군다는 표현에는 여러 가지 함의가 있었다. 특별한 날이니까 역시 관계하게 되는 걸까.

“자꾸 빠지면 직원들이 뭐라고 할지도 몰라요.”

“저번에도 말했듯이 이러려고 대표 직함 단 거야. 떠맡은 자리니까 선영이도 잔소리보다 더한 건 못하지.”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길에 예준은 차분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고 보니 몸을 섞지 않은 지 2주가 넘었다. 달콤한 페로몬에 몇 번이나 아래가 불끈댔어도 그도 저도 티를 내지 않았다. 마지막 섹스가 너무나 격렬했던 탓이었다.

멍과 상처는 모두 사라졌지만 역시 안쪽이 문제였다. 조금 전에도 새어 나온 피를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점잖은 섹스는 저 또한 취향이 아니기에 하고 나면 상처가 덧날 게 분명했다. 예준은 괜히 입술만 만지작거리며 태경의 눈치를 보았다. 태경은 테이블을 간단히 치운 뒤 예준의 손을 잡고 욕실로 향했다.

함께 양치하고 나온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올라앉았다. 태경이 예준의 종아리를 붙잡아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생일이니까 어디 좋은 데라도 갈까 했는데.”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서로를 단속하기 바빠 온전히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여기가 더 좋아요.”

“좋지.”

“그런데….”

눈앞이 깜깜해졌다. 태경이 순식간에 다가와 티셔츠 자락을 쥐었다.

“그런데?”

유혹적으로 감았다 뜨는 남자의 눈에서 확연한 욕구가 읽혔다. 저지른 바가 있으니 밀어붙이지는 못해도 원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는 능숙했다. 달아오른 태경의 목만 보아도 입 안이 타고 배가 조여들어 예준은 발버둥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원하는데, 아직 안쪽이….

“대표님…. 저 다 안 나았어요, 몸이….”

“왜 아직 대표님일까.”

곤란한 와중 다행이었다. 태경이 새삼스럽게 호칭을 문제 삼았다.

“대표님 맞잖아요.”

“말했듯이, 나는 네 고용주가 아닌데.”

“음….”

“여보 자기까진 안 바라. 차라리 이름을 부르든지.”

예준은 잽싸게 답했다.

“이태경.”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태경이 아연실색하며 웃었다. 다가온 손이 예준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드넓은 어깨가 치고 들어와 상체를 눌렀다. 그가 살덩이를 물고 빨아 대는 바람에 예준은 어쩔 줄 몰라 몸을 뒤척였다.

“그런 거 말고.”

페로몬과 함께 어른스러운 향수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예준은 태경을 떠안듯 감싸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뭐….”

“좋은 거 있잖아.”

“흐음….”

“미리 말해 두는데, 님 자는 빼 줬으면 좋겠어.”

그가 조폭 끄나풀도 아닌데 형님이라 부를 리 없었다. 예준은 그와의 첫 데이트를 떠올렸다.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들인 듯 떨렸던 영화관 데이트였다. 그와 만난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벌써 추억할 일이 생겼다는 게 내심 좋았다.

‘남자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뭐라고 불러, 보통.’

예준은 태경이 원하는 호칭을 분명히 알면서 망설였다. 낯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게 뭐라고 목구멍이 꽉 막혔다. 긴장감에 무릎을 조였다.

“형.”

“…….”

“태경이 형.”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말하자 태경의 몸이 바짝 굳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의 잇새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예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요? 이름은 뺄까요?”

순식간에 트레이닝팬츠 고무줄이 벌어졌다. 남자는 벌어진 틈으로 거침없이 손을 밀어 넣었다.

“이거 생각보다 더 위험한데.”

“아…. 안 돼요. 하면…!”

손을 쓰기도 전에 상체가 풀썩 눕혀졌다. 능숙하게 올라탄 그가 전신을 꽉 맞붙였다. 예준은 자연스레 다리를 벌리게 되었다. 은밀한 부위로 남자의 단단한 성기가 비벼졌다. 아니, 그는 퍽퍽 쳐올리듯 거세게 골반을 움직였다. 바지 위로 느껴지는 성마른 행위에 예준의 발끝이 곱아들었다.

“환장하겠네, 진짜.”

가까스로 행위를 멈춘 그가 예준의 어깨에 코를 파묻은 채 말했다.

“왜 이렇게 귀여워, 예준아.”

형 소리가 뭐라고 정신이 나간 걸까. 예준은 도통 태경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예준은 그가 예준 씨라고 부르든 김 선수라고 부르든 예준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었다. 예준아, 하고 다정하게 불러 주는 게 제일 좋긴 하지만 그렇다고 곧장 짐승이 되어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말할 때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태경의 성기가 더 딱딱하게 부풀어 올랐다. 뭉근하게 비비는 힘을 느낀 예준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대답할 필요 없어. 나 혼자 정신 못 차리는 거니까.”

어느새 전신으로 퍼진 열감이 심상치 않았다. 예준 또한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의 몸 구석구석을 다 아는 형편이기에 끓는점에 도달하긴 쉬웠다. 삽입하지 않고도 흥을 돋울 방법은 많았다. 예준은 남자를 이끌어 반대편으로 밀어 눕혔다. 단단한 몸 위에 올라앉아 말했다.

“그래도 조절은 해야 해요. 넣는 건 진짜 안 돼.”

그러려면 형 소리는 더 안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이었다. 저렇게까지 좋아한다면 더 말하기도 어려웠다. 눈만 마주쳐도 아래가 간지러워 미칠 지경인데, 형이라는 호칭이 촉매제가 되어 좋을 것이 없었다.

“한 번 더 불러 줘.”

아래에 누운 태경이 상기된 얼굴로 읊조렸다. 그를 내려다보며 예준은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그를 정복하는 일은 낯설지만 흥미로웠다.

“좆 간수 잘할 테니까….”

“그렇게까진 안 해도 돼요. 그냥 넣지만 않으면 돼.”

예준은 남자의 버클을 열고 바지를 끌어 내렸다. 천 위로 도드라졌던 허벅지 근육이 드러나고 바지 속에 가까스로 갇혀 있던 성기가 튀어 올랐다. 예준은 자신의 트레이닝팬츠 또한 엉덩이 아래까지만 끌어내려 남자의 성기 위에 앉았다.

“셔츠 단추 열어 봐요.”

태경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순조롭게 단추를 모두 연 태경이 셔츠를 벌렸다. 훤히 드러난 상체를 보고 예준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하얀 손끝이 도드라진 가슴과 미끈한 배를 더듬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손을 편 채 남자의 몸을 힘주어 매만졌다.

태경은 더 참지 못했다. 그가 예준의 허리를 붙잡은 채 성기를 길게 덧그리도록 종용했다.

“하아….”

예준은 남자의 손길을 따라 회음부터 구멍까지 성기가 닿도록 움직였다.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가 엉덩이를 뒤로 빼, 귀두부터 뿌리까지 뭉근하게 비볐다. 삽입의 쾌감을 아는 몸이 벌벌 떨렸다.

“조금 더 세게.”

남자의 요구에 예준은 더 푹 앉아 성기를 문질렀다. 몇 번이고 반복하자 예준의 성기 끝이 젖어들었다. 혈관이 바짝 도드라진 성기의 형태가 느껴졌다. 깊이 쑤셔 흔들어도 모자랄 판에 이런 행위로 욕구가 채워질 리 없었다.

“그냥, 한 번만… 한 번만 넣을까.”

예준이 태경의 맨 가슴 위로 주먹을 말아 쥐며 말했다. 태경이 이를 꽉 물더니 예준을 당겨 안았다.

“그날 너 많이 다쳤어.”

시트 위로 흘린 피만 해도 상당했으니 그럴 만했다. 예준은 고분고분 남자를 끌어안았다. 대신 예준의 티셔츠를 붙잡아 올린 태경이 머리 위로 그것을 벗도록 도와주었다. 따뜻한 상체가 맞닿자 성감은 더더욱 짙어졌다.

“후으…. 으읏….”

엉덩이를 꽉 붙잡은 태경이 예준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이제 남자의 성기는 예준의 판판한 배 아래 깔린 채였다. 이따금 둘의 성기가 함께 비벼졌다. 귀두가 배꼽을 파고들듯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예준은 얼굴을 붉힌 채 태경의 어깨에 코끝을 파묻었다.

“으응…. 좋아….”

흘러나온 신음에 태경이 예준의 허리를 꽉 잡아 눌렀다. 배가 더 밀착하며 성기를 압박했다.

“읏…. 아아!”

이어 거세게 변한 행위에도 예준은 좋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예준의 부드러운 배에 성기를 비비는 태경이나, 태경의 복근 위에 달라붙어 성기를 비비는 예준이나 쾌감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더불어 더할 나위 없이 크기를 키운 성기가 쾌감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마찰했다.

예준은 가능하다면 온몸을 비비고 싶었다. 곧 애액이 회음부를 타고 흘렀다.

“하아….”

“아…. 으으….”

숨을 헐떡이며 예준을 붙잡아 흔들던 태경이 일순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몸은 쉽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제 골반에 감긴 다리를 떨구어 낸 태경이 예준의 바지를 마저 벗겼다. 양 무릎을 모아 잡은 그는 예준의 다리를 상체 쪽으로 눌렀다. 그러자 뒤쪽 허벅지와 엉덩이가 하얗게 드러났다. 그는 유독 엉덩이에만 살이 찬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이전에도 그쪽만 유난히 탄탄했던 것이 인상적이긴 했으나, 확실히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여기가 왜 이렇게 예뻐졌지.”

태경이 탱글탱글한 살집을 쥐며 말했다. 예준은 살이 쪄서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는 예준을 보며 태경은 더 묻지 않았다.

“여기도 이렇게 꽉 들어차고….”

태경이 예준의 허벅지 사이에 성기를 밀어 넣었다. 예준이 본능적으로 힘을 주자 이렇다 할 틈이 없었다. 미끈하게 조여드는 허벅지 근육을 구멍 삼아 태경이 삽입하듯 골반을 퍽 쳐올렸다. 머지않아 소파가 삐걱삐걱 울었다. 예준은 애꿎은 손등만 씹으며 정신없이 신음을 뱉어 놓았다.

“으응! 읏! 하읏….”

“하아…!”

삽입의 감각을 상상하며 예민한 회음부의 마찰에 집중했다. 다리가 조금만 벌어져도 그는 힘으로 무릎을 모으게 했다. 성기가 마구 쑤셔지고 비벼졌다. 도달할 듯 도달하지 않는 쾌감에 속이 끓었다.

더는 견딜 수 없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태경이 성기를 세게 붙잡아 흔들어 주었다. 이미 미끈하게 젖은 성기는 그가 손바닥을 조이며 쳐올리자 금세 정액을 뱉어 냈다.

“…아읏!”

때맞춰 태경이 젖은 구멍 입구에 귀두를 밀어 넣었다. 겨우 귀두만 삼킨 구멍이 벌어지다 꽉 조여들었다. 예준은 엉덩이를 마구 들썩이며 뒤척였다. 너무 조여 성기가 빠지지 않았다. 고작 손가락 두 마디 정도였으나, 배까지 들어찬 감각과 견줄 만한 쾌감이 치솟았다.

“하아! 그냥 끝까지…!”

태경이 예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짐승 같은 신음과 함께 어깨를 떨었다. 오랜만의 섹스이기에 사정은 무척이나 길었다. 기어코 내벽 속에 정액을 뱉어 놓은 그는 삽입이 깊어지지 않도록 온몸을 결박했다. 폭, 빠져나온 성기를 따라 점액질이 길게 이어졌다.

그가 몸을 훅 뒤집더니 엉덩이 사이로 코를 파묻었다. 허리를 곧추세운 예준은 질척질척한 구멍 안으로 침범하는 뜨거운 혀를 느꼈다. 그가 부푼 살을 꽉 쥐자 허리는 가라앉고 엉덩이만 더 높이 솟았다. 회음부까지 흘러내린 정액이 입술을 더럽힐 텐데도 그는 아랑곳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구멍을 미치도록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는 허벅지 안쪽까지 얼굴을 파묻어 페로몬을 들이켰다. 은밀한 부위에서는 더 농도 짙은 페로몬이 느껴질 터였다. 흐드러지게 핀 들꽃처럼 키스 마크가 번져 나갔다. 발갛게 멍울진 흔적 위에 태경은 재차 입술을 눌렀다.

예준은 잘근잘근 엉덩이를 씹어 대는 남자를 밀어내고 저와 마주 보도록 했다. 다리 사이로 들어온 태경의 입술은 까칠하게 부풀어 있었다.

“넣고 싶으면서….”

“넣고 싶어. 너 정신없이 울리고 매달리게 만들고 싶어서 돌 지경이야.”

상처가 낫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예준이 태경을 당겨 안으며 속삭였다.

“그럼 나중에…, 진짜 진짜 깊게 들어와 줘요, 형.”

찌꺼기처럼 눌어붙은 이성마저 마저 긁어 가는 귀여운 호칭이었다. 다시 무섭게 파고드는데도, 예준은 좀처럼 태경을 밀어내지 않았다.

*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에 앉은 치문은 질척하게 쌓인 눈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아이스 바닐라 라테의 얼음을 게걸스레 꺼내 오독오독 씹었다. 쓴 커피는 취향이 아니었다. 커피 믹스에 길든 입맛이라면 바닐라 라테를 먹으라던 예준의 말을 기억했을 뿐이다.

남자는 대로변이 아닌 매장 안쪽에서 등장했다. 아무래도 건물 주차장에 차를 댄 모양이었다. 어깨가 잔뜩 젖은 치문은 그런 그가 고까웠으나, 예준을 생각하면 다행인 일이기도 했다.

치문은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를 보며 작은 눈을 치떴다. 궂은 날씨에도 젖은 기색 하나 없는 값비싼 코트를 보자 속이 울렁거렸다. 빨이란 빨은 다 받은 슈트 하며 잘 손질된 머리카락, 빗방울도 미끄러질 듯한 매끈한 피부. 시원시원하게 뻗은 이목구비와 느긋한 시선에서 고귀한 우성 알파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매력이었다.

저렇게 잘난 놈이 왜 하필이면 우리 형을 물었을까. 생각하는 동시에 성큼 다가온 태경이 손을 내밀었다.

“저번에 뵈었죠. 이태경입니다.”

치문은 엉거주춤 일어나 손을 맞잡았다.

“제치문입니다.”

일전, 예준의 아버지를 찾아 정선에 간 일이 있었다. 그 지역 조폭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갈비뼈가 나가기까지 한 예준을 돌봐준 사람이 바로 태경이었다.

“번거로웠을 텐데 나와 줘서 고맙습니다.”

“아… 뭐…. 예준이 형 일이니까요.”

예준이 늘 태경에게 저자세인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메달까지 딴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면 평생 떵떵거리고 살아도 된다고 여겼다. 귀한 마음에 비해 보잘것없는 대접이지만, 치문이 늘 예준을 떠받드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저에게는 하늘 같은 형이 이 남자 앞에선 쩔쩔매기 일쑤였다. 저런 우성 알파라면 예준뿐만 아니라 어느 오메가든 사족을 못 쓸 것이다. 치문은 한동안 흐르는 정적을 틈타 유심히 남자를 관찰했다. 자신이 여자였다면, 혹은 남자가 취향이었다면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발악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발악.

그러나 예준이 하는 짓은 그것과는 달랐다. 발악은 추하지만, 예준은 단 한 번도 치문에게 추해 보인 적이 없었다. 단지 자신의 처지를 들키기 싫어했고 폐를 끼칠까 봐 노심초사했다.

으, 씨발! 치문은 제 소중한 형이 난봉꾼이나 다름없는 우성 알파를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곁에 머무르는 동안은 편하겠지만 버림받기라도 한다면 치유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고 말 터였다.

“제치문 씨를 만나자고 한 건 몇 가지 알고 싶은 게 있어섭니다. 부담은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예.”

상념에 빠진 치문을 깨우듯 태경이 정중히 말했다. 치문은 눈을 부라리며 빨대를 쪽 빨았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귀가 간지러웠다. 드센 형님들과는 질이 다른 남자였다.

“형은 잘 있어요?”

“살도 좀 붙고 웃기도 잘 웃고. 내 집에서 편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거머리 같은 형님들 손아귀에서 벗어났으니 제법 살 만할 터였다. 최근엔 보스와 그런 일도 있었고. 이대로 쭉 남자의 보살핌을 받는다면 또다시 조폭 끄나풀들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질 필요가 없었다.

예쁜 인형을 빼앗긴 정명은 시시때때로 날뛰는 중이었다. 보스가 또 예준을 찾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예준 하나 때문에 조폭들 세계가 난장이 되긴 했어도 치문은 꿋꿋이 입을 다물었다. 거처를 불라고 두들겨 맞기도 했고, 그 우성 알파가 누군지 알아 오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지만 무시했다.

아는 게 있어야지. 오늘 만남으로 떡밥 정도는 캐 갈 작정이었다. 그게 예준의 안전을 더 길게 보장한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치문은 바닐라 라테를 바닥낸 뒤 남은 얼음을 계속 씹었다.

“예준이가 그쪽 세계에서 힘들었다는 거 어느 정도는 압니다. 괜히 쉬운 길 놔두고 어려운 길로 갈 뻔했어. 예준이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제치문 씨라는 사실을 괜한 감정 때문에 배제하고 있었어요.”

태경이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교차한 다리가 유려하게 뻗었다. 질투일까? 괜히 치문의 어깨가 솟아올랐다.

“형이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보이긴 해도 은근히 깡다구가 있어요. 발정 나면 손쓸 수 없긴 하지만, 멀쩡할 땐 제법 딱딱하게 굴기도 하고….”

“딱딱하게?”

“예. 다른 오메가들은 안 그러거든요. 하란 대로 안 하면 맞아 죽을 수도 있으니까.”

태경이 시선을 내리깔며 턱을 매만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연말만 해도 예준은 술집 작부로 팔려 갈 뻔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엔 보스의 접대를 했고, 그 전엔 발정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형님들과 무분별하게 관계했다. 오메가는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

치문은 예준의 존엄성을 지켜 주고 싶었다. 예준이 그런 자신의 처지를 숨기고 싶어 했으니까. 제 입으로 발설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내가 빙다리 핫바지도 아니고, 묻는다고 다 말할 것처럼 보여요?”

때때로 감정이 잘 조절되지 않았다. 치문의 급발진에 태경의 미간이 좁아졌다.

“예상은 했지. 예준이한테 충성도가 높은 사람이니까.”

충성. 그렇다. 치문이 충성하는 이들은 형님들이나 그 조직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충성할 만한 사람을 뽑자면 예준밖에 없었다. 방황하다 조폭 세계로 흘러들었을 때, 저를 애지중지 대해 준 사람은 예준밖에 없었다. 덩치만 크지, 어린애라고 짠해하던 예쁜 눈빛이 선연했다.

도와줄 사람이 서로밖에 없었던 때도 있었다. 피를 나누진 않았어도 평생 형님으로 모실 생각이었다. 저 잘난 놈이 채 가지 않았더라면 진창인 바닥에서라도 서로 의지하며 버텼을 터였다.

“예준이 데리고 도망칠 생각은 안 해 봤어요?”

태경의 질문에 치문이 피식 헛웃음 쳤다.

“그럼 형님들이 발목이라도 분질러서 주저앉혔을걸요? 형은 무슨 일을 더 당했을지 알 수 없고…. 만만한 형님들 아니에요. 그랬다간 진짜 좆 됐을 거예요. 나나 예준이 형이나 현명해서 버틴 거지.”

태경의 턱 근육이 길게 패었다 제자리를 찾았다. 부쩍 가라앉은 남자의 눈빛을 치문은 예민하게 감지했다.

“도망칠 생각 안 해 봤어요. 그것도 자원이 있고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거지. 우성 알파라서 잘 모르겠지만, 인생 좆 되면 좆 된 대로 버티고 사는 사람들도 많아요.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진다는 거 아니까.”

우성 알파를 비하했음에도 태경은 난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신 깊이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파.”

“…….”

“나는 예준이가 단념하는 게 끔찍하게 싫어요. 매사에 기대도 없고 욕심도 없어. 그게 다 경험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하면 피가 식는 기분이야. 어떻게 버텼는지 다 알아낸다 해도 전부 이해할 순 없을 거라는 데 자괴감도 들고.”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으나 눈빛만큼은 어딘가 반항적이었다. 감정을 고백하면서도 초조함 없이 느긋한 남자를 보자 치문은 괜히 제 가슴이 다 두근대는 기분이었다. 귀신도 아닌데 홀렸다. 치문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니까 형 울리지 마요. 그럼 내가 아주 다 박살 내 버릴 테니까.”

괜히 엄포를 놓자 태경이 상체를 기울였다. 가까이에서도 반짝반짝 윤이 나는 남자였다.

“그 분노를 좀 유용하게 써 줬으면 좋겠는데.”

치문은 가라앉은 두 눈을 보며 주의를 집중했다.

“예? 무슨?”

“알다시피 그 형님들이란 새끼들이 한마디로… 개좆같잖아. 네가 더 잘 알겠지. 예준이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개좆같기만 할까. 다 모아 불 싸질러 버려도 아쉽지 않을 쓰레기들이었다. 철없던 시절, 말도 안 되는 누아르 영화를 믿고 조직에 들어왔다. 현실은 그보다 더 가혹했고 비열했으며, 눈곱만큼의 희망도 없었다. 특히나 권력을 쥐지 못한 처지라면 평생을 윗대가리들의 개돼지로 살아야 했다.

“유용하게 쓴다는 게 뭘 어떻게 쓰는 건데요.”

“나한테 정보를 좀 줬으면 좋겠어. 아주 민감할 정보일 테지만, 목숨을 담보로 해서까지 빼 오라고 강요하진 않을 거야. 내부 사람이니 그 조직에 대해서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내부 정보를 빼 오라고요?”

“정보라고 하니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요약하자면 그 조직이 어떤 새끼들 집합소인지 내가 좀 알고 싶다 그거예요.”

잔잔히 미소 짓는 얼굴에 그 누구도 침을 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조직을 배신하라고요?”

“아니. 움직이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넌 그냥 내가 움직일 수 있게 유용한 정보나 캐 달라 그거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무식하게 헤딩부터 할 필요는 없잖아. 보다시피 내가 그쪽으론 문외한이라 아는 게 없어요.”

건실한 회사의 대표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만 보아도 햇살이 어울리지, 뒷골목이 어울릴 남자는 아니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부잣집 도련님이 불건전한 조폭 새끼들한테 관심을 다 가지고.

치문은 예준을 위해서라면 위험 정도는 기꺼이 무릅썼다. 남자가 예준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물고 빨기 바쁜 귀여운 애인이 조폭들 손에 굴렀으니 불쾌하기 짝이 없기야 하겠지만.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저 존나… 좆밥이라 아는 게 별로 없는데요.”

남자가 원하는 정보가 유용하게 작용하려면 현장에 아주 가끔 드나드는 우성 알파의 신상 정도는 되어야 할 터였다. 치문이 접하는 형님들이라고 해 봐야 최고봉이 겨우 정명인 수준이었다.

“제일 먼저 박정명이라는 인간을 만날 생각인데.”

치문은 저도 모르게 손을 높이 치들었다.

“아. 그 형님은 제가 잘 알아요. 그럼 잘 알지.”

부쩍 커진 언성에 주변의 눈총이 날아들었다. 날카롭던 시선들은 태경을 거치자 순한 소의 그것처럼 변했다.

“거기서부터 시작합시다. 말해 두는데, 안전이 최우선이에요. 안 그럼 예준이가 가만 안 있을 테니까.”

고귀한 우성 알파께서 한낱 오메가의 눈치를 보다니, 역시 예준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치문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접한 정보라고 까지나 마요. 그리고 보상은….”

“보상은 걱정하지 말고.”

예준의 합의금으로 천만 원을 내밀었다고 했던가. 치문은 불편해하던 예준을 떠올리며 반대로 기대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천만 원이면 이런 궂은날 비 맞지 않을 정도의 중고차는 마련할 수 있을 터였다. 삶의 질이 상승하는 일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뭐부터 말해 주면 되는데요.”

“박정명이 총괄하는 사채업.”

채무자들을 두들겨 패는 것이 치문의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분야는 자신 있었다. 치문이 뻣뻣한 양복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종이랑… 펜 줘 봐요.”

*

태경은 혼잡한 현장 입구를 지나쳐 근처에 차를 대었다. 길게 하품한 선영이 먼저 차에서 내리자 태경이 그 뒤를 따랐다. 철거된 주택 단지 뒤로 한창 시공 중인 회색빛 건물이 보였다. 두화건설의 메디컬 빌딩이었다.

“생각보다 시공 속도가 빠른데?”

선영이 말했다. 미리 받은 서류상 층수보다 족히 다섯 층은 더 쌓아 올린 상태였다.

“그러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태경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추위에 코트를 여민 선영은 굳은 표정의 태경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생각보다 복잡한 일에 얽혔다. 예준을 위해서는 예준의 주변을 살펴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와중, 이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두화건설 사장의 의심스러운 행적을 알게 되었다.

조폭들 소굴로 향하는 중이라지만, 이미 예정된 현장 방문이기에 위화감을 살 필요가 없었다. 설계 외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선영이라면 사태를 모르는 편이 안전할 터였다. 애초에 LK의 사람들이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단 것도 말이 안 되었다.

현장에 다다르자 소장이 마중 나와 있었다. 태경은 늘 그래 왔듯 현장 소장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수고 많으십니다.”

“아, 이 대표님. 먼저 연락받았습니다.”

“바쁘신데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번에 두화건설과 함께 일하신다 들었습니다. 미리 현장 파악하시려는 것뿐인데요. 긴장은 저희 쪽에서 해야죠.”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고요.”

현장 소장 뒤에 서 있던 인부가 안전모를 내밀었다. 안전모를 받아 드는 태경을 보며 현장 소장이 말했다.

“현재 절반 정도 진행된 상황입니다.”

“예상보다 빠르군요. 지금 현장은 갤러리와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시공사가 두화건설이니 골조는 같겠죠.”

“맞습니다. 한 바퀴 도시기 전에 커피 한잔하실까요?”

태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현장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간이 건물이 보였다. 고작해야 컨테이너가 전부인 타사와는 확실히 달랐다. 높이는 3층, 간이 건물치고 꽤 튼튼해 보이는 외관까지.

치문이 말한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현장은 예준의 GPS 추적 목록에 있던 주소와도 완벽히 일치했다.

태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소장을 따랐다. 서늘한 입구로 들어서자 열성 알파들의 페로몬이 무분별하게 느껴졌다. 태경과 선영은 동시에 코끝에 손을 댔다. 강하진 않지만, 이곳을 드나드는 이들이 페로몬을 조절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는 농도였다.

“…….”

예준이 이토록 저급한 곳을 드나들며 살았다. 노골적인 조직원들의 흔적을 감지하며 태경이 물었다.

“현장에 열성 알파들이 있나 보죠?”

“아, 네. 아무래도 김 사장님 부하 직원들이 자주 드나드니까요.”

소장이 땀이 맺힌 목덜미를 무심코 닦아 냈다. 1월, 추위가 매서운 날이었다. 고작 자신의 현장 방문 때문에 긴장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마침 계시니까 같이 차 한잔하시죠.”

태경은 대답하지 않고 소장을 따랐다. 3층에 이른 소장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눈에 보기에도 조폭 같은 덩치들 셋이 보였다. 소파에 둘러앉아 있던 이들 중, 가장 나이 많은 남자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가 상흔으로 얼룩진 손을 내밀었다.

“아이고. 명성건설 이 회장님 아드님이시라고요? 그러면 김 사장님 아드님이나 다름없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이제 재개발 들어가서 이 주변 길이 험해.”

태경은 손을 맞잡는 대신 내부로 들어섰다. 그가 소파 상석을 차지하고 앉자 남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내부의 묘한 분위기를 읽은 선영이 태경 옆에 자리 잡았다.

“커피는 어떻게 드릴까. 단 걸로, 안 단 걸로?”

“그냥 블랙으로 두 잔 주시죠.”

현장이라면 태경 못지않게 익숙한 선영이 대답했다. 멋쩍게 마주 앉은 남자가 덩치들에게 턱짓하자, 한 오메가가 종종걸음으로 나와 커피를 대접했다. 끽해야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남자애였다.

태경과 선영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이 터졌다.

“어디서 싸구려 취급이야.”

저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은 선영과 달리 태경은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겁에 질린 오메가에게로 향했다. 젖은 눈, 피멍울이 맺힌 입술, 알파의 페로몬을 감지하여 곤란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이런 일 또한 시켰겠지. 가늠하자 그의 얼굴이 싸늘히 굳었다.

“박정명입니다. 박 사장이라고 부르셔도 되고요.”

조 비서가 말한 대로 예준과 김재우의 빚을 소유한 사람이 바로 이자였다. 치문을 통해 미리 들은 바도 있었다. 예준이 말한 형님 중에 대표 격인데다, 예준에게 직접 강요나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우성 알파인 태경에게는 하등 쓸모없는 인간처럼 보일지라도, 열성 알파들 사이에서는 힘깨나 쓰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더한 덩치의 끄나풀들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보다 앞으로 나서지 않도록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통 알파를 이런 식으로 대접합니까?”

“이런 걸 대접이라고 할 수야 있나요. 그냥 눈요기나 하시라고 갖다 놓은 거지.”

태경의 질문에 정명이 수치심 없는 얼굴로 답했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에 불쾌감이 일었으나 태경은 사사로운 기분을 드러내지 않았다.

“맘에 안 들어 하시잖아. 잘 좀 해 봐, 예쁜아.”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달래는 정명 때문에 오메가는 오히려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며 깔깔 웃는 열성 알파들과 달리, 선영은 손수 오메가를 일으켜 옆에 앉혔다. 완벽히 갈무리된 페로몬과 은은한 향수 냄새에, 오메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 선영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일하러 온 거지, 접대받으러 온 게 아닌데요. 당황스럽네요.”

선영이 불쾌감을 표하자 정명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냥 기분이나 내시라고.”

그들이 평소 오메가를 어떻게 대하는지 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태경은 옅은 조소와 함께 선영 곁에 앉은 오메가를 바라보았다.

“섭섭할 뻔했습니다. 이런 걸 대접이라고 받기에는 전혀 감흥이 없어서요.”

태경의 말에 선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평소 자유분방한 편이지만 성 매수엔 관심이 없었다.

“뭐야, 너. 이런 거라니.”

선영이 복화술로 으름장을 놓았다. 평소의 태경이라면 지금처럼 오메가를 물건 대하듯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태경은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정명에게 시선을 두었다.

“언제 제대로 한 번 접대해 주시죠.”

떡밥을 던지면 물게 되어 있다. 지위가 낮을수록 더 절절히 원하는 법이었다. 호의적인 태경의 말에 정명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이 회장님 자제분인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언제 저희 가게 한번 오시죠. 물 좋은 애들로다가 쫙 대령해 드릴 테니까.”

이 회장이 정명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소싯적 조직에 몸담았던 아버지라 할지라도 지금은 만인의 존경을 받는 선도자였다. 예전이었다면 박정명이 그런 그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모욕을 느꼈겠으나,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은 작금이기에 태경은 적당히 받아 주는 데 그쳤다.

낮은 테이블 위에서 식어 가는 커피에는 누구도 입을 대지 않았다. 마침 선영이 태경의 구둣발을 운동화로 꾹 눌렀다.

“너… 진짜 왜 이래?”

태경의 어깨를 터는 척하던 선영이 눈을 매섭게 떴다. 그녀의 눈엔 주변을 둘러싼 어깨들이나 평소답지 않은 태경이나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먹고 먹히는 사내들 권력 싸움에는 이골이 났다. 알파의 본능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태경만큼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고 믿었다.

우려가 무색하게도 태경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는 무섭도록 집요하게 박정명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더 예쁜 애가 있긴 한데, 걘 잘나디잘난 우성 알파가 채 갔지 뭡니까? 그거 아니었으면 오늘 보셨을 수도 있는데.”

정명이 촉새 같은 입을 열었다. 우성 알파 앞에서 우성 알파를 욕보이다니, 어지간히 경우가 없는 놈이다 싶었다.

“누군데요?”

동시에 직감이 태경의 뇌리를 스쳤다. 태경은 천연덕스럽게 되묻고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에이…. 그냥 말해 드리면 재미없죠. 워낙 유명 인사라 아마 보시면 바로 아실 겁니다. 언제 기회 한번 만들어 드리죠. 왜, 연예인도 불러내고 그러는데 오메가 하나를 못 불러내겠습니까?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딴따라 중에 우리 가게 출신도 많아요, 예.”

태경은 제집에서 안전히 머무르고 있는 예준을 재차 떠올렸다. 불러낸다고? 어림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박정명이 예준을 다시 볼 일은 없을 터였다.

“그건 그렇고. 이 건물은 다 뭡니까? 완공 후에도 사용할 계획입니까?”

태경은 내부 구조를 빠르게 스캔해 머릿속에 담았다. 다용도실을 제외한 방 안쪽에서 강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그중에는 이 요란한 열성 알파들 것 이외에 우성 알파로 추정되는 페로몬도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동물적 감각만큼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하찮은 사채업자 위에 김 사장이 있다면 묵인할 수 없었다. 김 사장의 뒷공작이 세간에 밝혀지면 이 회장의 지위까지 흔들릴 터였다.

“여기저기에서 손님이 많이 오십니다. 누추한 곳에서 대접할 수는 없으니까요.”

손님이라면 아마도 조직을 이끄는 자들이나 조력자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이곳을 조직의 본거지 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했다. 언뜻 보기에는 뻔뻔하고 조심성 없어 보일지 모르나,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의심을 피할 방법이었다.

윗선의 어디까지 마수가 뻗쳤는지가 관건이었다. 태경은 조급하게 구는 대신 유심히 안쪽 방을 주시했다. 그제야 그 시선이 껄끄러워진 정명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이러나저러나 내부의 분위기를 가장 견디기 힘든 사람은 선영이었다.

“쓸데없는 잡담할 거면 바로 현장이나 가시죠, 이 대표님?”

선영이 오메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며 말했다. 그녀가 이전보다 훨씬 센 힘으로 태경의 구둣발을 밟았다.

“응? 좀 가자고.”

태경은 본능적으로 예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썼다. 예준은 선영 옆의 오메가보다 더한 취급을 받았으면 받았지, 그들이 오메가를 칭하는 것처럼 귀염을 받았을 리 없었다. 그랬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 더 끔찍한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태경은 선영의 손이 팔에 닿자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태경의 시선이 내려앉자 정명이 굽실대며 명함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저를 빌어먹는 우성 알파 중 하나로 삼고 싶은 기색이었다. 태경 또한 바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접대, 농담한 거 아닙니다.”

“아이고. 잘 압니다.”

매듭 하나 엮였다고 실실대는 낯이 꼴사나웠다. 태경은 정명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곤 앞서 나갔다. 오메가를 신경 쓰다 끝내 내버려 두고 뒤따르던 선영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안전모로 태경의 머리통을 갈길 뻔했다.

“야, 이태경!”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는 태경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욕을 씹어 먹는 목소리 또한 날것 그대로였다.

투쟁욕에 사로잡힌 알파의 본성을 목격한 선영은 들고 있던 안전모를 얌전히 머리 위에 썼다.

“뭔지 말이나 해 주든가.”

그와 같은 알파기에 겁먹지 않았다. 하필 예준을 떠올린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예준은 짧게 와 닿는 뽀뽀에 눈을 떴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어느새 사위가 깜깜한 밤이 된 모양이었다. 겨우 무거운 눈두덩을 들어 올리는데, 태경이 덮치듯 몸을 감싸 안았다.

“벌써 자?”

이 집에 온 이후로 잠든 채로 남자를 맞이한 적은 없었다. 어쩌다 낮잠이 초저녁잠이 되어 버렸는지 몰라 예준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그냥 잠이 와서 잤어요….”

“아침에도 침대에서 나 배웅했잖아.”

“음…. 그때부터 쭉 있었던 건 아니고….”

“그럼? 뭐 했어?”

“아, 형…. 무거워….”

그는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어디든 입 맞추었다. 목에도 턱에도 손등에도. 가뜩이나 몸이 가라앉는데 체격으로 눌러대기까지 하니 속수무책이었다.

“으으….”

“씻고 자는 거야? 좋은 냄새 나는데.”

“아니. 아침에 씻었는데.”

예준은 최근 들어 무척이나 게으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먹고 자는 시간이 늘고, 저답지 않게 빈둥대며 시간을 보냈다. 매사에 의욕도 없고 졸음만 쏟아져서 태경에게 나태한 모습을 들키는 것이 몹시 신경 쓰였다.

“침대에서 네 페로몬 냄새 진동해. 얼마나 뒹굴었기에.”

“이상한 짓은 안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자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꼭 뜨거운 물에 푹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둔해진 기분이었다.

“맛있는 거 사 왔는데, 일어날래?”

그가 손을 뻗었다. 예준은 남자의 힘으로 일어나 두 발을 짚고 섰다. 순간, 휘청이는 몸을 단단한 손이 지탱했다. 그의 몸에 반쯤 매달려 주방으로 나오니 식탁 위에 익숙한 떡볶이가 놓여 있었다.

“어? 이거.”

“맞아.”

“일부러 사 왔어요?”

“응.”

그렇지 않아도 종종 생각이 나던 차였다. 예준은 태경이 접시에 옮겨 준 떡볶이를 바삐 삼켰다. 이렇게 먹으니 살이 찌는 거였다. 슬쩍 배를 만져 보자 부푼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평생 판판하기만 했던 배였다. 오메가로 발현했다 하더라도 운동선수 출신이니 앞으로도 쭉 그럴 줄로만 알았다.

“흐음….”

머쓱해진 예준은 얼른 배에서 손을 떼어냈다. 먹는 모습을 관찰하던 태경이 웃었다.

“맛있어?”

“네. 그렇지 않아도 생각났었는데…. 고마워요. 잘 먹을게.”

맞은편에 서 있던 태경은 식탁을 돌아와 바로 옆 스툴에 앉았다. 예준은 배가 고팠지만, 남자의 시선을 의식해 천천히 떡볶이 접시를 비웠다.

그때, 소파에 던져두었던 핸드폰 화면이 반짝였다. 예준은 폰을 가져와 다시 스툴에 앉았다.

[예준아. 나 지혁이. 연초에 다들 바빠서 이제야 모임 날짜 정했는데 시간 되면 와. 이번 주 토요일, 저녁 여섯 시. OOO로 오면 돼. 선수촌 근처야. 알지?]

까맣게 잊고 있던 연락이 마냥 반갑지는 않았다. 예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지혁의 문자를 응시했다.

“왜. 누군데?”

태경이 부쩍 서늘해진 눈빛으로 물었다. 제게 오는 연락이라고 해 봐야 치문을 제외하면 모두 껄끄러운 것들뿐이기에 그럴 만했다.

“아…. 지혁이요.”

“그, 첫사랑?”

“예?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아니야?”

“그래도 첫사랑은 고등학교 때 여자 친구일 거 같은데….”

예준은 불필요하게 정정했다.

“따지자면, 짝사랑.”

“첫사랑이나 짝사랑이나.”

괜히 예준의 볼을 꼬집은 태경이 답했다. 그가 허탈하게 웃은 탓에 예준은 그제야 눈치를 보았다.

“지혁이가 뭐라는데? 아직 연락하고 있을 줄 몰랐어.”

“연말에도 연락이 왔었어요. 친구들이랑 다 같이 한번 보자고.”

지금은 친구라 부를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지혁과는 잘 지내고 있을 터였다. 예준은 못내 씁쓸한 표정으로 폰만 만지작거렸다. 지혁이 격 없이 부른다고 해서 아무런 고민 없이 참석할 처지가 아니므로.

“둘만 보는 거 아니면 괜찮은데.”

그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예준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둘은 안 돼?”

“안 돼.”

“그럼 다 같이 보는 자리니까 가도 돼요?”

“되지. 가고 싶으면 갈 거라고 통보만 해 주면 돼. 언제, 어디, 무슨 용건으로 가는지.”

남자의 말을 다 믿을 순 없었으나 기대하지 않은 너그러움이었다. 예준은 남자의 말을 반영하여 고쳐 말했다.

“이번 주 토요일 여섯 시에 선수촌 근처 식당에 친구들 만나러 갈까 생각 중이에요.”

“얼마 만에 만나는 건데?”

“발현하고 처음이요….”

지금까지는 변한 외모나 처지에 관해 수군거리는 말을 감내할 자신도 없었고, 그들 앞으로 나설 용기도 없었다. 예전이라면 고민의 여지도 없이 거절했을 일을 두고 예준은 괜한 고민에 휩싸였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오메가란 사실은 영영 변하지 않겠지만,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하게라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예준은 발현 이후 완전히 빼앗겼던 여유와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제게 찾아온 변화는 당연한 기회가 아니므로, 환경이 변했다면 자신 또한 변해야 옳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남자가 말했던 미래를 위해서라도.

“부부 동반 모임은 없나.”

태경이 말했다. 예준은 시선을 들어 남자를 보았다. 뻔뻔하게 말을 내뱉어 놓고 그는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저 아직 스물일곱이라. 누구 결혼했단 소식은 못 들은 것 같아요….”

“그건 그렇겠지.”

그가 노골적으로 예준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섹스 파트너에서 연애도 모자라, 이제는 그의 입에서 결혼이란 단어까지 나오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저… 진짜 가도 돼요?”

“가도 돼. 그런데 토요일 여섯 시면, 하필 주말 출장이라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게 불가능한데.”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예전에 살았던 동네라.”

“내가 불안해서 그래.”

태경은 잠시간의 공백 후에 덧붙였다.

“언제 말할까 했는데 지금이 적기겠네.”

“무슨 말이요?”

“앞으로 외출할 땐 경호원이 동행할 거야. 사생활 침해보다는 신변 보호가 목적이니까 거절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편리한 수를 쓰는 대신 서로를 통해 서로를 알아 가자고 말했었다. 러트 때의 일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무효가 되었다면 변명의 여지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사생활 침해를 아주 안 할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우성 알파 소유의 오메가라면, 경호원 정도는 대동하는 게 상식이고.”

남자는 부러 소유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다. 그 명석한 머리로 자신이 물건 취급당할 때의 기분을 유추하지 못할 리 없었다. 분명 기저에 깔린 함의가 있을 터였다.

예컨대, ‘한눈팔지 마.’ 같은.

“저는 이 집이나 대표님 차 같은 재산이 아니에요. 사람이잖아요. 알파들이 오메가를 소유물로 여긴다는 건 알지만 듣기 좋진 않아요. 꼭 마음에 들면 가지고 질리면 버릴 거란 말처럼 들려서.”

예준은 이제껏 속으로만 했던 생각을 말로 내뱉었다. 고분고분 굴지 않자 태경의 손에 악력이 실렸다.

“내가 먼저 너 버릴 일은 없을 거야. 말했듯이 인형 놀이할 작정으로 너 여기 들인 것도 아니고.”

그 힘이 버거워 예준은 남자의 손길을 밀어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확신은…, 읍…!”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태경이 거칠게 입술을 맞대었다. 예준은 밀려난 상체를 도로 남자에게 결박당한 채 잇새를 벌렸다.

“우읍, 으….”

상체가 남자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가 감겼다. 스툴과 스툴 사이, 얽힌 다리는 더 단단히 옥죄어졌다. 숨을 불어 넣듯 거칠게 키스하는 태경에게서 조바심이 읽혔다. 예준은 자신의 단념이 그를 미치게 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 가고 있었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그인데, 어째서. 농염하게 얽혀 드는 남자의 혀를 예준은 본능적으로 핥고 빨았다. 목구멍까지 닿을 기세로 깊이 침범한 혀가 다리 사이를 아릿하게 달아오르게 했다. 거친 행위는 금세 온몸에 불을 붙이고 더운 기운을 쏟아 내도록 종용했다.

눈물이 찡 맺히도록 아프게 입술이 빨렸다. 더 아파지라고 꾹꾹 씹어 대기까지. 예준은 밭은 숨을 쏟아 내며 남자에게 매달렸다. 허벅지에 바짝 힘을 주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자 온몸을 더듬던 남자의 손길이 절절 끓었다. 그는 입술과 그 주변이 얼얼할 때까지 몰아붙였다.

“왜 발정이 안 오지?”

의문스러운 눈이 그답지 않게 매서웠다. 그러고 보니 그를 만나고 몇 번이나 닥쳤던 히트 사이클이 이번엔 올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발정 올 때가 됐는데.”

히트 사이클은 규칙적이지 않았다. 알파의 페로몬에 매일 노출되는 데다 각인까지 당했는데 거의 한 달 동안 발정이 오지 않은 것은 예준으로서도 의문이었다. 왜 그걸 문제 삼나 생각하는데, 남자가 읊조리듯 덧붙였다.

“그게 와야 절실해지잖아, 나한테.”

정적이 감돌았다. 예준은 발정기만 되면 더 해 달라고 조르는 자신의 태도가 부끄러웠다. 알파 없인 성욕을 해결할 수 없기에 남자의 말처럼 절실히 매달렸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 괜한 죄책감이 일었다.

“애가 타 죽겠어.”

한 걸음 물러난 태경이 말했다. 감정을 어쩌지 못해 저를 탓하는 남자가 낯설었다. 평정을 가장하는 습관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예준은 남자의 느긋함 뒤에 비친 그늘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잖아요.’

알면서 상처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이 지닌 감정의 크기를 함부로 재단해선 안 되었다. 서늘한 남자의 두 눈을 응시하며 예준은 무겁게 표정을 굳혔다. 그는 도전적인 눈빛에 비해 부드럽게 몸을 놓아주었고, 이내 몸을 일으켰다.

“경호원 일은 동의한 거로 알고 있을게.”

남자가 셔츠 단추에 손을 가져가며 멀어졌다. 드레스 룸으로 향하는 매끈한 뒤태를 바라보며 예준은 초조함에 손끝을 깨물었다.

*

토요일 아침, 남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평소처럼 눈을 뜨자마자 포옹해 주었고 식사하는 동안에도 별일 없이 차분했다. 기분은 나쁘지도 좋지도 않아 보였다. 약간의 예민함은 아마 오늘 있을 출장 때문인 듯했다.

중요한 출장인지 셔츠 소매엔 커프스단추가, 슈트 상의 안에는 조끼가 갖추어져 있었다. 주로 흐트러진 차림만 선호해 왔기에, 모처럼 차려입었어도 사회 초년생처럼 마냥 건실해 보이지는 않았다. 예준은 그가 번듯한 회사의 대표임을 새삼 자각했다. 자신을 말랑말랑하게 대한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약속, 여섯 시라고 했지?”

태경이 말을 꺼냈다. 약속 당일이라는 사실을 먼저 말하기가 껄끄러웠는데 다행이었다.

“네.”

“시간 맞춰서 차 보낼 테니까 타고 가면 돼. 술은 너무 많이 먹지 말고.”

그가 코트를 입으며 덧붙였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예준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 없는 자리기에 식사 후에 술을 먹기까지 버틸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가게 앞에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뒤돌아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 긴장돼?”

초조함을 읽었는지 태경이 물었다. 그는 코트 깃을 바로 하며 예준에게 다가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떨지 예상이 안 돼서요. 지혁이는 좋은 마음으로 부른 것 같은데 다른 애들은 어떨지 모르겠고.”

예준이 뒤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마지막 인사가 퍽 냉정했던 아이들도 있었기에 쉽게 안심할 수 없었다. 예준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자, 태경이 다가와 굽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부부 동반도 아닌데 동행하는 건 극성맞은 학부모처럼 보일 테고.”

능청스러운 말에 굳었던 예준의 얼굴이 풀어졌다. 예준은 남자의 고급스러운 슈트가 구겨질까 봐 천 위에 가까스로 손끝만 댔다.

“아마 그게 최악의 상황일 것 같은데요.”

어색하게 존재감을 뽐내는 경호원은 들키겠지만.

“시간도 많이 흘렀고 별일 없을 테니 너무 긴장하지 마. 상처받는 게 두려우면 아무것도 못 해.”

태경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한발 나아가겠다고 다짐했으니 뒤따를 문제는 감수해야 마땅했다.

“상처받아도 돌아올 곳 있잖아. 여기.”

태경이 자신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묘하게 현실적인 위로였다. 예준은 남자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며 대답했다.

“출장 잘 다녀와요.”

“전화할게.”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주는 손길에 의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태경은 곧 몸을 떨어뜨렸고 시계를 확인한 뒤 현관을 나섰다.

남자를 보내고 예준은 소파 위에 앉았다. 비는 오지 않지만 날이 흐렸다. 그러고 보니 아침을 제대로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왠지 속이 부대끼고 불편한 기분이었다. 몸이라도 움직이면 체기가 사라질까 싶어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를 살피자 속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비해 식사는 거의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태경이 지적하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로.

예준은 내내 입맛이 돌다가 단번에 떨어진 게 언제인지 떠올렸다. 아마도 이틀 전일 터였다. 구역질이 올라온 적도 있기는 했지만 화장실로 달려갈 정도는 아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약속에 너무 신경을 쓴 것이 문제인 모양이다. 더한 일도 잘 버티고 살았는데 유난이었다. 이전과 다르게 편안하고 조용하기만 한 일상이 성정을 유약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예준은 어김없이 몰려오는 졸음에도 일단 버틸 작정이었다. 이대로 누웠다간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할 것이 뻔하므로.

*

경호원은 약속 시간에 맞추어 모습을 드러냈다. 예준은 태어나 치문보다 더 우락부락한 사내는 처음 보았다. 그는 하마터면 떡 벌어질 뻔한 입을 가까스로 다물며 현관을 나섰다.

“자세한 사항은 이 대표님이 지시해 주셨으니 따로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최대한 방해 안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감사하고요.”

예준은 제 또래의 건장한 사내에게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베타이긴 했으나 손만 해도 제 얼굴보다 컸고, 키는 태경과 비슷하나 근육의 두께가 달랐다. 안심은 되지만, 저런 거구의 사내를 친구들 앞에서 감추기는 어려우리란 확신이 들었다.

“날씨 춥습니다. 따뜻하게 입으시랍니다.”

태경이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했으리라 생각하니 어쩐지 아득한 기분이었다. 예준은 경호원이 건넨 새 코트에서 태경의 취향을 읽었다. 베이지색의 결 좋은 코트는 다소 이목을 끌 듯했다.

“꼭 입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제가 곤란해요.”

자신과 관련한 인터넷 기사만 해도 한 페이지에 추릴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밑바닥 인생이라는 걸 모두가 다 알 텐데 이런 고급스러운 코트를 입고 나타나면 무슨 생각을 할까 싶었다. 손에 끼워진 반지도 그렇고.

“잠깐만요.”

그렇다고 경호원을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예준은 재빨리 반지만 빼 케이스에 담아 두었다. 침대 옆 서랍에 그것을 고이 넣어 두고 나오자 사내가 코트를 펼쳐 들고 있었다. 억지로 껴입으니 생각보다 부담스러워 보이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그럼 출발하시죠.”

사내는 능숙한 운전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고급 승용차의 부드러운 승차감은 언제 느껴도 적응이 잘 안 되었다. 내내 흐렸던 하늘에 까만 어둠이 내렸다. 지나치는 차들의 번잡스러운 헤드라이트 불빛을 바라보며 예준은 긴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오 분 전, 지혁의 전화를 받았다. 늘 문자로만 연락을 주고받았기에 액정에 지혁의 이름을 뜨자 몹시 긴장되었다.

“어, 지혁아.”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받는 데 성공했다. 잠깐 말이 없던 상대는 이내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예준아. 다 와 가? 나 가게 근천데, 만나서 같이 갈까?

“그러자. 어디로 가면 돼?”

함께 훈련했던 때에 비해 부쩍 굵어진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케케묵은 과거의 먼지가 한 겹 날아갔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도로 건너면 바로 편의점 있거든? 거기 앞에서 기다릴게.

“응. 나 다 와 가. 오 분 안에 도착해.”

―어. 이따 봐.

격 없는 대화는 선수 시절과 별다를 바 없었다. 지혁과의 마지막 인사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적어도 다른 아이들처럼 혐오감을 내비치진 않았으니 다행인가 싶었다.

함께 훈련과 합숙을 반복하며 뒹군 세월만 해도 삼 년은 족히 넘었다. 드문드문 이어진 연락은 남달랐던 정이 근거일 터였다. 짧게 스쳐 갔던 짝사랑을 들키진 않았으나 오메가에, 남자와 연애하는 지금의 상황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다.

예준은 긴장감을 마저 지우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려던 경호원보다 앞서 지혁이 열린 문 모서리를 잡았다.

“김예준. 오랜만이다.”

지혁은 도장 이름 쓰인 얇은 점퍼를 입고 있었다. 가난해서가 아니라 열이 끓는 청춘이어서 그럴 터였다. 앳된 선은 사라지고 투박한 남자의 골격이 남았다. 예준은 별안간 저를 끌어안는 지혁의 등을 두드렸다.

“힘세네, 여전히.”

핀잔 아닌 핀잔에 지혁은 픽 웃고 말았다. 그의 눈이 오롯이 예준에게 향했다.

“너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발현한 이후,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니 낯설게 여길 만했다. 예준은 자신의 단단했던 외향이 부드럽게 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발현 전에도 대단히 남자다웠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땐 체지방량이 적은 근육질의 몸이었다. 지금은 근육의 굴곡만 보였고 만지는 곳마다 폭신했다.

“이제 오메가니까.”

예준이 무심하게 말했다. 이미 아는 사실이니 감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어째 예전보다 더 어려진 것 같다.”

천만다행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지지는 않았다. 알려진 바가 있으니 그도 어느 정도 예감했으리라 짐작했다.

옅게 웃던 지혁의 손끝이 예준의 머리카락으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불쑥 다가온 경호원이 지혁의 손을 저지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예준의 낯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혁의 눈에도 의문이 비쳤다.

“누구야?”

어떻게 답해야 할까. 연애 상대가 우성 알파라 주제넘게 경호원을 거느리게 되었다고 솔직히 말해야 하는 걸까.

“김예준 씨 신변에 위협이 없도록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사내는 이미 교육받은 듯 또렷하게 답했다. 그가 예준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불편하게 해 드리려는 건 아닙니다만, 누구와 어떤 접촉이든 삼가라는 지시가 있어서요.”

“아….”

예준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태경이라면 그런 당부쯤이야 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다른 아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지혁에게는 굳이 감추고 싶지 않았다.

“애인이 좀 예민해서.”

“애인?”

지혁의 눈이 커졌다. 그와 친하게 지낼 때만 해도 예준은 연애나 여자 문제에 숙맥이었다. 그러니 연애라는 단어와 저를 매치하는 것마저도 낯설지 모른다.

“아. 혹시, 알파야?”

“어.”

뻔한 질문이 되돌아왔다. 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음 질문은 더 뻔할 것이다. 아마도 애인의 성별이나 종속 여부 같은 걸 묻겠지. 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거면 묻지 말아 주라. 우리 진짜 오랜만에 만났잖아. 천천히 이야기하자, 사생활 문제는.”

선을 긋자 지혁은 순순히 수긍했다. 지혁이 한 걸음 물러서자 경호원의 거리도 멀어졌다. 사내는 시야 안에는 있지만 기척이 불편하지 않을 거리에서 예준을 주시했다. 예준은 이깟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어렵고 무서운 건, 가게 안에 있을 친구들과의 대면이었다.

“그럼 들어갈까?”

가게 문만 바라보고 서 있자 지혁이 물었다. 예준은 고개를 끄덕이곤 횡단보도로 향하는 지혁을 따랐다. 심장이 뛰어 아득했다. 긴장감에 귀에서는 옅은 이명이 울렸다.

‘상처받는 게 두려우면 아무것도 못 해.’

무너지려는 기분이 들 땐 남자의 말을 상기할 작정이었다. 예준은 용기를 내어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예준과 지혁을 포함하여 머릿수는 다섯이었다. 예준은 순식간에 제게로 쏠리는 시선을 감지하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눈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잡고 앉자 그들과의 마지막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예준아. 진짜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그러게. 너 선수촌 나가고 폰이 끊긴 건지 번호가 바뀐 건지. 연락이 안 돼서 안부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

바로 앞에 앉은 다정과 수영이 물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어서 예준은 잠시간 숨을 골랐다. 둘 중 하나는 울었던 것도 같은데. 눈물짓던 어린 얼굴이 떠올랐으나 예준은 상념을 길게 이어 가지 않았다.

“폰이 망가져서 새로 사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 그 후론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잠시간 정적이 감돌았다. 다정과 수영은 질문의 답을 듣기보다 예준의 외모를 관찰하는 데 집중했다. 또렷한 눈 네 개가 예준의 얼굴과 코트, 손 따위를 훑었다. 예준은 바삐 코트를 벗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

지혁이 조금 전의 자신을 잊은 듯 여자애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니, 뭔가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서.”

“그때도 잘생겨서 인기 많았잖아. 국민 요정!”

수영의 말에 다정이 맞장구를 쳤다. 분위기가 풀어지자 지혁이 한마디 거들었다.

“지금이 더 요정 같은데.”

“맞아! 그때보다 지금이 더 그 말이랑 잘 어울려.”

수영이 웃으며 답했다. 예준은 아이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소리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다행히 혐오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민과 호기심은 둘째 문제였다. 예준은 초조함 때문에 손바닥에서 배어난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문제는 나머지 한 사람인 명호였다. 그는 시종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어 앉아 있었다. 입술은 한일자로 다물려 벌어지지 않았다. 예준은 뒤늦게 명호의 기색을 읽었다. 여자애들과 달리 그의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명호야. 너도 인사 좀 해. 오랜만이잖아.”

명호는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쥔 사람 같았다. 지혁이 허벅지를 누르며 눈치까지 주는 걸 보면 분명 그럴 터였다. 예준은 앞에 놓인 물을 삼키며 흘끗 명호를 보았다.

“그래.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명호가 말했다. 베타 넷에 오메가 하나. 과거의 영광이 없다면 확실히 부적절한 모임이었다. 예준은 명호의 마음이 굳건히 닫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체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비참하지 않다면 그것만으로 행복할 터였다.

“그럼 우선 밥부터 먹고 자리 옮기자.”

수영의 말에 지혁의 시선이 예준을 향했다.

“어. 뭐 먹을까? 예준아.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딸랑, 입구의 종이 울렸다. 시간을 두고 내부로 들어선 경호원이 대각선 어딘가에 자리 잡는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속이 좋지 않은 데다 입맛이 싹 달아났다. 예준은 부러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지혁이 너랑 같은 걸로 먹을게.”

경호원의 등장으로 더는 평범한 자리가 되지 못했다. 예준은 사내의 눈을 피하며 지혁이 밀어 주는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했다.

*

전부, 모르는 이야기였다.

지혁이 부모님 도움으로 도장을 열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세계 대회는 아닐지라도 전국 대회에선 메달을 수없이 딴 녀석이기에 제힘으로 해냈을 줄 알았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그를 과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니까.

그뿐만 아니라, 수영은 곧 결혼을 앞두었고 명호는 작년부터 국가 대표 코치로 부임했다고 했다. 다정은 부모님 가게에서 일하는 게 불만이어서 어떻게든 독립할 생각으로 버틴다고 불평했다.

그간 만났더라면 쉽게 알 수 있을 만한 근황이었으나 예준은 모든 게 새로웠다. 그들과의 기억이라고 하면 승리욕에 들끓어 임했던 훈련, 서로의 땀이 느껴질 만한 거리에서 붙어 잤던 기억, 실없는 대화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리고 활력이 넘쳤던 때가 무색하게도, 모두가 어떻게든 삶의 권태에 빠진 채였다.

그럼에도 이들 중 누구도 자신처럼 산 사람은 없었다. 예준은 대화가 길어질수록 그들과 저 사이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예준의 고민은 흔한 스물일곱과는 달랐다. 나이를 제하더라도 형질로 갈등을 빚을 필요가 없는 베타들인 데다가, 조폭과 엮일 일은 더더욱 없는 아이들이었다. 쉽게 공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어서 예준은 떠드는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예준이 넌 어떻게 지내? 네 이야기는 기사로밖에….”

수영이 말을 꺼내 놓고 아차 했다. 기사라면 안 좋은 이야기뿐이니 꺼내기에 썩 유쾌한 주제는 아니었다.

“기사에 나온 것처럼 나쁘지는 않았어. 그냥 이 일 저 일 하면서 지냈지, 뭐.”

실상은 그보다 더했지만,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세한 내용까지는 몰라도 모두가 대강 짐작하는 눈치였다. 오메가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뻔하니까.

“오메가들은 혼자선 절대 못 살잖아. 집안 좋은 거 아니면 어떤 알파한테든 기생해야….”

명호가 제법 이성적으로 떠들었다. 그의 눈이 의자에 걸린 값비싼 코트를 향했다. 반지까지 끼고 왔다면 어떤 말이 나왔을지 아득했다.

“명호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자. 예준이 기분 나쁘잖아.”

“그래. 예전엔 어렸다 쳐도….”

지혁의 말에 다정이 거들었다. 아이들의 눈에 동시에 동정심이 서렸다. 예준은 따가운 명호의 눈초리보다 다른 아이들의 측은한 눈빛에 더욱 가슴 졸였다.

당연히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먹은 게 별로 없는 데도 온종일 계속됐던 체기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속이 답답하고 두통마저 일었다. 예준은 몸 상태를 핑계 삼아 대답을 회피할 생각이었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낮부터 체한 게 안 나아지네.”

“체했어? 그럼 같이 나가. 약국 가게.”

“괜찮은데, 혼자 가도.”

“같이 가 줄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명호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은 차였다. 지혁이 나서자 다정과 수영이 그러라고 거들었다. 실랑이를 벌였다간 더 추궁당할 게 분명하니까.

예준은 결국 지혁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곧바로 경호원이 뒤따라 붙었다. 통증이 느껴지는 이마 부근에 손을 대보자 미열이 나고 있었다. 모임에서 버티는 게 생각보다 더 대단한 스트레스였던 모양이다.

“괜찮아?”

“어. 그냥 속이 좀 안 좋아서 소화제라도 사 먹으려고.”

“바로 근천데 내가 사 올까?”

지혁의 배려가 어쩐지 부담스러웠다. 예준은 먼저 앞서 나가며 말했다.

“아니. 차라리 좀 걷는 게 나을 것 같아.”

건널목을 두 번 건너자 바로 약국이 나왔다. 경호원의 말처럼 몹시 추운 날씨였기에, 세찬 바람에 두 뺨이 싸늘히 식었다. 예준은 코트에 손을 집어넣은 채로 약국 안으로 들어섰다.

“소화제 하나 주세요.”

지혁이 말했다. 약사는 지혁이 아닌, 파리한 안색의 예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구인지 아는 기색이었다.

“어느 분이 드실 건데요?”

“제 친구요.”

지혁이 예준을 가리키자 약사가 무심히 물었다.

“임신 가능성 있으세요?”

그 말에 수치심이 들이닥쳤다. 예준은 당황하는 지혁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러트와 히트 사이클이 동시에 왔던 마지막 관계 때는 분명 사후 피임약을 먹었다. 그러나 약사는 들어먹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 놓고 나중에 항의하는 오메가분이 종종 있어서요. 일단 임산부도 드실 수 있는 걸로 드릴게요.”

예준이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혼자였다면 아무런 심경의 변화도 없었겠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 앞이라면 달랐다. 그와 함께했던 발현 전, 예준은 그저 평범한 소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스무 살 남짓의 남자애들은 임신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멋쩍게 뒤통수를 긁던 지혁이 소화제를 대신 받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예준은 황급히 약국을 빠져나왔다. 뒤따라온 지혁이 사색이 된 예준을 붙잡으며 말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괜찮아. 별생각 없어, 예준아.”

“어, 알아. 그냥 안이 너무 따뜻해서. 빨리 찬 바람 쐬고 싶어서….”

칼처럼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예준의 연약한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예준은 그새 얼어붙은 귀를 손으로 덮으며 지혁의 눈을 피했다. 어쩐지 초조해 보이던 지혁이 예준의 팔을 더 가까이 당겼다.

“……?”

예준은 순간, 다가오던 경호원의 기척보다 익숙한 누군가의 체취를 먼저 감지했다. 은은한 머스크 향과 함께 알파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이제, 단 한 사람의 페로몬밖에 느낄 수 없는 처지였다. 예준의 눈이 커졌다. 확장된 동공이 약국 옆 편의점으로 향했다.

남자는 잇새로 문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와중이었다. 지혁에게 붙들린 예준의 팔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물고 있던 담배를 제거한 태경이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

저벅저벅 다가온 그는 가장 먼저 지혁의 팔을 치워 냈다. 굳은 표정에 비해서는 퍽 부드러운 행동이었다. 얼떨떨한 기색의 예준을 무시한 그가 지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지혁 선수. 처음 뵙겠습니다.”

정중한 인사 한마디에 지혁은 많은 사실을 깨우쳤을 터였다. 지혁은 마치 우성 알파를 처음 대면하는 베타처럼 눈을 빛내며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어…, 예준이 그…, 되시는….”

지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준은 남자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예준의 허리를 감싸 안은 태경이 미소 지으며 지혁을 내려다보았다. 예준은 저도 모르는 사이 흘린 식은땀에 오한이 들었다.

“대전 간 거 아니었어요? 거기서 여기까지 온 거야, 설마?”

묻자, 태경의 손에 악력이 실렸다. 지척까지 다가온 경호원이 태경의 저지에 물러났다.

“긴장 많이 했잖아. 오늘 일정은 다 끝났어.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가도 안 늦어.”

저를 집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그 먼 길을 왔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연실색하자 태경이 예준의 손을 당겨 잡았다. 예준에겐 반지의 이물감이 느껴졌으나 태경에겐 아니었다. 태경의 눈빛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반지는.”

낮게 묻는 목소리에 예준은 뻣뻣이 굳어 버렸다.

“혹시나 해서 집에 두고 왔어요.”

구구절절하게 오메가의 처지에 대해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이들 눈이 무서웠을 뿐 아니라, 지혁 앞이었다. 조금 전 약국에서 당한 수치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이야기해요.”

아직 모임이 끝나지 않았다. 이 순간 불청객은 태경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묘한 긴장감에 지혁이 한 걸음 다가와 말했다.

“막 술자리로 넘어갈 예정이었는데.”

태경이 지혁의 말을 잘랐다.

“예준이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태경이 지혁의 손에 들린 소화제를 보았다. 소화제가 예준을 위한 것임은 분명했다. 아침 식사가 시원찮았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약 먹으면 괜찮을 거 같아.”

예준은 지혁의 손에서 소화제를 가져와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모임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자 태경이 깊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했다.

“어…. 몸 너무 안 좋으면 무리할 필요 없어, 예준아.”

지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허리에 닿은 태경의 손에 힘이 실렸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도 내버려 둘 남자가 아니었다. 달리 생각하면 불편한 자리에서 벗어날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예준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지혁아. 미안한데 오늘은 먼저 갈게. 다음에 또 보는 걸로 하자.”

지혁의 낯에 실망감이 비쳤다. 그러나 그는 곧 특유의 밝은 미소로 화답했다.

“어어. 걱정하지 마. 애들한텐 내가 잘 설명할게. 너 몸 안 좋아서 간다고.”

지혁은 베타이기에 우성 알파를 보고 위압감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았다. 더불어 반지의 부재와 예준의 몸 상태를 감지한 태경의 언짢은 기분이 지혁의 뒷걸음질을 부추겼다. 예준이 먼저 돌아가겠다고 말한 것은 태경의 강요에 대한 동의라기보다, 상황을 유연하게 넘기려는 의도에 가까웠다.

태경이 카드를 꺼내 경호원에게 내밀었다.

“뒷정리 좀 부탁해.”

“예. 알겠습니다.”

경호원이 슬쩍 지혁의 팔을 잡아당겼다. 지혁이 가까스로 말했다.

“예준아, 전화할게. 아직 못한 이야기가 있어서.”

“응. 알았어. 미안….”

지혁은 경호원에게 반쯤 끌려가다시피 멀어졌다.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태경이 손을 들어 예준의 꽁꽁 언 귀를 감쌌다.

“너 지금 안색이 어떤 줄 알아?”

“…반지는 나쁜 생각으로 그런 거 아니에요.”

“반지 때문 아니야. 반지는….”

태경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기분이 좋지는 않지. 그런데 네가 저기에서 어떤 취급 받을지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아. 무슨 의도로 반지 빼고 그 자리에 갔는지,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예준아.”

한바탕 곤욕을 치르리라 예상했던 예준이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불쾌한 기색이 완연하긴 했으나, 남자는 그걸 빌미로 자신을 몰아붙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본 태경이 매서운 바람을 피해 골목으로 예준을 이끌었다. 담과 담 사이에 몸을 들이자마자 예준은 남자의 코트 속을 파고들었다.

“좀 체한 것뿐이에요.”

태경이 부드럽게 예준의 뒤통수를 감쌌다.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자 두피 근처가 축축했다. 식은땀과 피부의 열감이 추위를 무색하게 했다.

“친구들 만나는 게 그렇게 무서웠어?”

무서웠다. 끔찍할 만큼 긴장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들이 이렇게까지 목을 옥죄리라고는 예준 또한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오메가니까. 자신은 타인에게 민폐만 끼치는 아버지를 둔, 볼품없는 전 금메달리스트였다. 명호의 말처럼 우성 알파에게 기생하고 있는 처지를 들키기도 했다. 고작 스트레스 때문에 몸 관리가 안 된다는 것도 창피했다.

평범함의 범주에 자신을 끼워 넣으려던 생각이 어리석었을까. 예준은 불청객인 태경을 기꺼이 도피처로 삼았다. 이젠 상처 입어도 돌아갈 곳이 있었다. 그의 집, 그의 품.

“전부는 아니어도 넷 중에 셋은 이해해 줬어. 그럼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별로 좋지 않아요. 이건 내 문제인 것 같아.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

태경이 예준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시도는 좋았어.”

“잘 모르겠어.”

“나 믿어.”

“안 믿어요. 형이야말로 나 못 믿어서 여기까지 왔잖아.”

태경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말했다.

“과거 있는 남자랑 같이하는 자리인데 어떻게 안심해. 차지혁. 그래, 훤칠하니 예쁘게 생겼네.”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자조에 예준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감정의 찌꺼기가 단 한 톨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예준은 지혁의 곁에서 단 1초의 설렘도 느끼지 않은 자신을 뒤늦게 깨달았다. 스쳐 갔다 하더라도 어떤 순간에는 활활 타오르기도 했던 감정인데.

“지혁이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두 사람 사이에 새겨진 기억을 내가 무슨 수로 알겠어.”

그가 지나고 바랜 과거마저 경계할 줄은 몰랐다. 눈앞에 닥친 일만 해도 버거운 저와 달리, 그에게는 시간의 깊이까지 가늠할 여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에 예준의 낯에 그늘이 졌다. 태경이 그런 예준을 흩트려 놓았다.

“그보다 걱정돼서 온 거 맞아. 이렇게 아파질 줄 알았으니까.”

“여기까지 안 왔어도 어떻게든 버티긴 했을 거예요.”

“혼자 버티게 하기 싫어. 이성적인 범위 안이니까 그렇게 혼낼 필요 없어.”

예준이 다시 남자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누가 혼냈다고….”

예준은 남자에게 의지하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고분고분 내비친 적이 없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강한 페로몬에 욕구가 동하는 동시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의 앞이라 바짝 긴장했으면서도 정신이 빠진 사람처럼 속내를 술술 털어놓고 말았다.

“데려다주고 나면 바로 대전으로 돌아가요?”

예준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자기 싫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예준은 얼른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러자 묘한 기색을 눈치챈 태경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같이 잘까?”

귓가에 닿는 남자의 입술 덕분에 예준은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옅은 숨소리와 촉감으로 남자의 입매가 휘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몸이 나으려면 남자의 페로몬에 의지하는 게 옳았다. 우습게도 예준은 함께 있는 것만이 옳은 대책이라고 생각했다.

“호텔로 같이 가. 내 옆에서 자도 돼.”

체기가 사라질 것처럼 극도의 안도감이 몰려왔다. 남자의 일을 방해해야 한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은 옅었다. 남자의 품을 벗어난 예준은 곧장 저를 이끄는 힘에 두 발을 맡겼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을 벗어나 차가 세워진 도로변까지 조바심을 내며 걸었다.

*

남자가 옷을 벗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태경은 코트와 재킷을 벗은 뒤 셔츠의 커프스단추를 분리했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타이를 풀고 조끼를 벗은 후엔 언제나처럼 셔츠 상단의 단추를 먼저 열었다. 답답한 옷차림에서 벗어난 남자가 유독 홀가분해 보인 건 예준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호텔은 대전 도심에 있었다. 도착했을 때는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한 번도 온 적 없는 도시의 낯선 호텔로 들어서자 예준은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남자의 흔적은 오로지 남자의 육체에만 존재했고, 방에 다른 사람의 기척은 묻어 있지 않았다.

예준은 곧바로 침대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모로 누워 태경을 관찰했다.

“열날 때는 안 씻는 게 좋아.”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가온 태경이 예준의 니트 하단을 들어 올렸다. 땀에 젖은 매끈한 몸이 드러나자 남자의 목덜미가 눈에 띄게 붉어졌다.

“여기까지 들일 생각은 없었는데.”

그가 당황스럽다는 듯 웃었다. 예준은 바지 버클을 스스로 풀며 답했다.

“다 젖었어요.”

“열이 잘 안 가라앉네.”

태경이 예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속옷만 남긴 채 바지를 벗기고는 제 트렁크에서 깨끗한 티셔츠를 꺼내 예준에게 입혔다. 대단히 큰 사이즈의 티셔츠만 겨우 입은 예준은 곧 늘어졌다. 열이 자꾸 오르는 건 그와 함께인 탓이 더 컸다.

태경은 쉬이 멀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몸을 겹친 그가 예준의 귀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아프다는 배 윗부분을 문질러 주며 뺨에 코끝을 대었다. 쪼옥, 쪽, 턱선을 따라 입 맞추는 행위에는 분명한 함의가 있었다.

“무슨 생각 해요?”

“네 몸 들쑤실 생각.”

갑작스러운 직언에 예준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이제 안은 다 나았겠지만, 여전히 속이 좋지 않은 데다 열이 끓는 형국이었다.

“열나는데….”

“뜨거울 때 더 좋아. 하얀 덴 더 하얗고, 빨간 덴 더 빨갛고.”

그렇다면 벌써 행동으로 옮겼어야 했다. 그러나 태경은 집요하게 키스만 할 뿐, 폭력적으로 안을 드나들지 않았다. 긴장한 예준이 무릎을 모으자 큰 손이 두 다리를 도로 벌려 매만졌다.

“체모가 없어서 닿는 데마다 미끈미끈해.”

중심부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손이 마른 허리를 향했다.

“힘줘서 누르면 두 손안에 다 잡힐 거 같아.”

그가 예준의 쇄골 부근에 코를 묻었다.

“살에서 무슨 들풀 같은 향기도 나고.”

예준이 생각하기에 제 페로몬 향은 들풀과 거리가 멀었다. 지금은 식은땀에 푹 젖은 탓에 불쾌한 냄새만 날 터였다. 그런데도 태경은 서슴없이 살 위에 혀끝을 댔다. 감상에 취한 남자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위로를… 되게 야하게 하네요, 형은.”

“야해?”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고났어.”

천연덕스러운 대답에 그제야 예준의 입가에도 미소가 비쳤다. 때맞춰 남자는 탓하듯 예준의 손가락을 물었다. 엄지부터 하나하나 입 맞추다 약지에서 멈추자 예준의 심장이 쿵 울렸다.

“사랑의 증표는 항상 몸에 지니는 편이 좋아.”

“애인 없는 척하려고 그랬던 거 아니야.”

“알아야 할 사람은 알았으니 상관없어.”

의도치 않게 흘러가는 대화에 예준은 또 자신이 지고 말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괜히 손으로 두 눈을 감추자 태경이 애꿎은 손목에 입 맞추었다.

“세상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 없잖아. 넷 중에 하나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부러 가볍게 치부하는 심리를 모르지 않았다. 그 말에는 동의했다.

“맞아요. 아는데 좀 그랬어.”

태경이 뻣뻣이 굳은 예준의 어깨를 주물렀다. 길게 드러난 목을 응시한 그가 열감에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 모습을 본 예준이 태경의 목을 감아 당겼다.

“해도 돼.”

태경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혀를 내어 목선을 따라 핥았다.

“하아….”

길게 신음한 예준은 약국에서 당한 수치는 함구했다. 임신 이야기는 알파의 번식욕에 불만 지피고 말 터였다. 남자의 성욕을 감당하기 어려운 때에 꺼내기엔 썩 좋은 주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을 검열하면서, 예준은 순수하게 끓어오르는 자신의 성욕은 어찌하지 못했다. 예준의 눈에 반들반들 물기가 차오르자 태경이 셔츠 단추를 마저 풀었다.

침대 옆으로 셔츠를 떨군 그가 상체를 맞대었다.

“위로. 계속해도 되겠어?”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등 너머로 어둑한 천장을 보며 예준은 두 눈을 감았다. 따뜻한 혀가 비벼지고 입술이 맞물렸다. 질척하게 시간을 끌며 키스한 남자가 두 팔 안에 예준을 가두었다. 사랑스럽게 코끝을 비비다 눈을 맞춘 뒤엔 부어오르기 시작한 입술을 물었다.

예준은 바르작거리면서도 능숙하게 입을 벌렸다. 입맞춤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애를 쓰는 남자가 좋았다. 태경은 제 욕구를 앞세우는 대신, 부드러운 애무에 집중했다. 그가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입술을 벗어난 입술이 목덜미를 빨았다. 쇄골로, 가슴으로 옮겨 간 뜨거운 살덩이가 이내 몸 구석구석에 닿았다.

옆구리에 다다랐을 땐, 눈에 띄게 몸을 뒤척였다. 너무 간지러워 입꼬리를 올리자 태경이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한껏 얼굴을 붉힌 예준은 맥없이 남자의 어깨를 밀어냈다.

태경이 행위를 멈춘 것은 뼈가 툭 불거진 골반 부근에서였다. 그의 손에 속옷이 반쯤 내려갔다. 늑골과 폭 팬 배꼽과 도드라진 뼈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이내 예준의 아랫배를 주시했다.

“…….”

요 며칠 계속 체기가 있긴 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살이 제법 올랐었다. 예준은 설마 살이 더 쪘나 싶어 아찔했다. 그 모습을 보고 예뻐졌다고 말한 전적이 있는 그지만, 괜히 부끄러웠다.

“왜? 이상해?”

“이상할 리가.”

태경이 푹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예준의 아랫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냥 예뻐서 보는 거야.”

많고 많은 곳 중에서 왜 하필이면 배인가 싶었다. 예준은 이번에는 두 발로 태경의 어깨를 밀어냈다. 밀려나지 않고 버티는 통에 어쩌다 보니 허벅지까지 붙잡히고 말았다. 빤한 시선은 계속되었다. 열에 들뜬 눈동자가 가슴부터 배까지 느리게 움직였다. 몹시 집요하게, 배와 그 부근을 관찰하던 남자가 그대로 얼굴을 파묻었다.

허벅지를 벌려 세게 누른 채 고운 살결을 짓씹기도 했다. 무언가 탐구하듯 귀를 대어 보고 혀끝을 할짝대던 그는 이내 소리 없이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너.”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명료하게 대답한 그가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갔다. 제 몸이라면 어디든 집요하게 사랑해 주는 그이기에, 예준은 배가 정말로 예뻐지긴 했나 보다,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아래의 자극이 심해지자 더는 상념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었다. 예준은 남자의 입술이 은밀한 곳에 닿자마자 호소하듯 말했다.

“빨아 줘요.”

“기꺼이.”

대답한 태경이 망설임 없이 속옷을 벗겨 냈다. 이런 위로라면 상처 입는 것이 두렵지 않을 터였다. 입가에 번지는 화색을 감추지 못했다. 예준은 시트 자락을 잔뜩 구기며 뜨거운 숨만 뱉어 냈다.

*

모임 후 나흘이 지났을 때, 지혁에게 연락이 왔다. 도장으로 놀러 오라는 말에 얼떨결에 그러겠다 대답한 예준은 태경의 존재를 상기하고 전전긍긍했다. 곧이곧대로 말하면 절대 못 가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지혁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니까. 지혁과 제 과거를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경계하는 남자를 어떻게 달래어야 할지 아득했다.

그러나 저녁 식사에서 화두를 던졌을 때, 태경은 그리 언짢은 기색이 아니었다.

“도장이 어딘데?”

“D동이라 여기서 가까워요.”

남자의 질문에 예준은 잔뜩 눈치를 보며 답했다. 태경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잔에 레드 와인을 따랐다. 그가 가져다준 디저트 케이크를 먹던 예준은 남자의 음주가 길어지리라 예상했다. 그럴 거면 맞춰 주는 편이 좋았다.

슬쩍 제 잔도 가져와 마주 앉자 태경이 잔을 빼앗아 갔다.

“아직 컨디션 회복 안 됐잖아.”

“조금은 괜찮아.”

“안 돼. 그 케이크나 다 먹어. 오래간만에 잘 먹는데.”

예전보다 더 입이 짧아져 종종 남자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계속 속이 안 좋기는 한데, 그렇다고 아예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다. 크게 아프기라도 했으면 예외 없이 병원행이었을 터였다. 다행히도 계속 조심하기만 한다면 남자 손에 당장 병원으로 끌려갈 일은 없을 듯했다.

결국 케이크를 남기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태경이 내려놓은 포크를 굳이 집어 마지막 조각을 들이대었다.

“살도 다시 빠지는 것 같고, 식사도 시원찮으니까 무리는 안 했으면 좋겠어.”

“응.”

“얌전히 갔다 오는 거면 반대 안 해. 가벼운 식사 정도는 괜찮은데 술자리는 금지야.”

구체적인 요구였으나 이만하면 다행이었다. 이번에도 경호원과 동행해야 하겠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예준은 케이크를 마저 삼키고 잔을 입술로 가져가는 남자를 지켜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 술이 늘었다. 식사할 때도, 작업할 때도 남자는 늘 술잔을 곁에 두고 있었다. 과음은 아니기에 그러려니 하던 차였다. 대표 자리에서 많은 일을 감당하려면 스트레스가 적지 않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예준은 굳이 묻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어디에서든 길을 잃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대신, 예준은 케이크를 하나 더 꺼내 와 남자에게 내밀었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이거 한 입씩 먹어요.”

“먹으면 뭐 해 줄 건데.”

되돌아오는 느긋한 미소에 가슴이 뛰었다. 예준은 도리어 당황하여 남자를 보았다. 남자 곁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태경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예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몸의 한 면을 완전히 맞댄 그가 마른 허리를 감쌌다.

“먼저 자지 마. 그거면 돼.”

예준의 어깨를 잘근 씹은 그가 속삭였다. 잠이 늘어 심통이 났나 보다. 예준은 남자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답했다.

“오늘은 형 자는 거 보고 잘게요.”

“좋지.”

말한 태경이 잔을 비웠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

학원가의 빽빽한 빌딩과 화려한 간판을 보자 속이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빌딩 앞에서 겨우 지혁의 태권도장 간판을 찾은 예준이 3층을 가리켰다.

“저긴가 봐요.”

벽처럼 서 있던 경호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체격이 상당했기에 지나가는 학생들의 이목이 쏠렸다. 혹시나 저를 알아볼까 싶어 예준은 더 지체할 것 없이 걸음을 옮겼다. 빌딩의 복잡한 구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다다라서도 도장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잠깐 뜸을 들이다 유리문을 열자, 태권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제 얼굴을 보기도 전에 몸을 밀치고 달아나는 아이들은 마치 작은 괴물들 같았다. 예준은 그러면서도 입매를 휘어 웃었다.

아이들의 괴성이 멀어지자 곧 진이 빠진 지혁이 나타났다.

“어? 예준아. 생각보다 빨리 왔네?”

오는 길엔 교통 체증도 이렇다 할 방해 요소도 없었다. 경호원이 운전해 주는 차에 올라 편하게 왔으니, 평소보다 서두른 것이 오히려 실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수업 끝난 거야?”

“끝나긴. 이제 한 타임 끝난 거야.”

지혁이 목덜미로 흘러내린 땀을 닦으며 말했다. 예준은 자신이 입고 있는 패딩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도복 차림의 지혁은 한창때와 다를 게 없었다. 여전히 체격이 좋을 뿐 아니라 남다른 실력까지 지녔을 터였다. 선수 시절, 제법 인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원생이 이 정도로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들어가도 돼?”

“어. 이제 한 시간 정도 휴식이야. 그러고 나면 또 저런 것들이 한 트럭 온다니까.”

지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예준은 땀 냄새와 먼지 냄새가 뒤섞인 도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움은 당연했고 그에 기묘한 동요를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십수 년을 이런 환경에서 살았으니까. 매진하고, 몰입하고, 한계를 뛰어넘었다. 미치게 좋기도 미치게 싫기도 했다. 그래도 그것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예준은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을 애써 무시하며 지혁을 따랐다.

“그… 경호원분은 여기 사무실에 계속 있어 주시겠어요? 애들이 좀 겁먹을 거 같아서요. 아, 나쁜 의도로 말하는 건 아니고 워낙 체격이 크시니까.”

“예. 여기서도 눈에 다 보이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무실엔 큰 창이 있어 도장 내부가 훤히 보였다. 사내는 알아서 의자를 찾아와 구석에 앉았다. 팔짱을 끼고 존재감을 지우는 그를 뒤로한 채, 예준은 지혁과 마주 앉았다.

“기분이… 진짜 이상하다. 도장 온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 그런가.”

“그 이후로 처음이야?”

“어. 완전 처음이야.”

아버지가 마련해 주려던 도장은 시작부터 꼬였으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예준은 여전히 호흡을 고르는 지혁을 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테이블에 두 손을 올려 두자 지혁이 왼손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를 흘끗거렸다.

“먼저 가서 애들이 많이 아쉬워했어.”

“그러게…. 좋은 맘으로 불러 준 건데, 제대로 마무리 못 하고 가서 미안.”

“뭐, 몸이 안 좋았으니까. 그분도 오셨고….”

“어…. 뭐….”

잠시 가라앉는 분위기에 애꿎은 예준의 뺨이 붉어졌다. 예준은 태경을 떠올리며 큼큼 헛기침했다. 그날, 호텔로 가 위로랍시고 받은 애무가 아직도 생생했다. 은밀한 기억은 접어 두고서라도, 옛 친구 앞에서 연인을 화제로 삼자니 어색하고 불편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지혁이 화제를 바꾸었다.

“사실, 얼마 전에 사범님 한 분이 그만둬서 지금 전쟁 치르는 중이야.”

“너 혼자 하는 거 아니었어?”

“나 빼고 두 명 더. 여기 성인 취미반도 있거든.”

예준은 조금 전 보았던 작은 괴물들을 떠올렸다.

“애들 장난 아니던데. 많기도 하고.”

“장난 아니야. 나야 선수 키우려고 도장 하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애들 체력 키우고 기운 빼놓는 역할 하는 사람이니까. 한 타임만 끝나도 녹초야. 보람은 있는데, 예전에 하던 운동이랑은 아주 다르지.”

한눈에 보아도 규모가 큰 도장이었다. 거기다 학구열이 뛰어난 동네의 학원가 중심에 있으니 명성도 자자할 터였다. 지혁은 부러 자신을 낮추어 말했지만, 예준은 그가 이룬 성과를 의심하지 않았다.

“사실 그날 술자리에서 말할까 했는데.”

“어. 뭘?”

“너 지금 따로 하는 일 있어?”

배달 일이나 일용직은 그만둔 지 오래였다. 남자 곁에서라면 실상 무슨 일이든 하지 않아도 되었다. 쳇바퀴처럼 일에 치여 살던 때가 그립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사는 삶은 그것대로 공허했다. 완벽한 직업을 가진 연인과 함께한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과거의 명성을 잇고자 하는 욕심은 없지만 제 앞가림 정도는 하고픈 욕구가 있었다.

“지금은 딱히 하는 일 없어.”

“전까진 뭐 했는데?”

“배달 일 하면서 가끔 공사 현장 가서도 일하고.”

오메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혁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공사 현장에서 일했다고?”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어. 페로몬 때문에 일반적인 일 하기는 좀 힘들어서.”

“아… 페로몬.”

지혁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비쳤다. 베타들은 으레 그러했다.

“그거 진짜 궁금하더라. 어떤 냄샌지, 어떤 기분인지.”

성적인 함의야 없겠지만 베타와 나누기엔 적합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예준이 화제를 전환했다.

“하는 일은 왜 물어봐?”

“아. 그게.”

지혁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웃었다.

“혹시 생각 있으면 여기서 아르바이트해 볼 생각 없어? 일주일에 세 번, 한 시간 반. 딱 한 타임만 하면 되는데.”

“나? 나 말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제의에 예준의 입이 벌어졌다. 지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답했다.

“어. 너. 초등학교 저학년 애들 가르치는 거라 형질은 상관없어. 사춘기 오기 전에 발현하는 경우는 없으니까.”

슬쩍 흘겨보자 경호원의 미간이 구겨져 있었다. 예준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시계를 확인하는 지혁을 주시했다.

“조금 있으면 말 더럽게 안 듣는 이… 애새끼들 오는데 보고 가는 거 어때?”

과격한 표현에 비해 말투엔 애정이 가득했다. 벌떡 일어선 지혁이 캐비닛에서 깨끗한 도복을 꺼내 와 건넸다.

“운동 좋아했잖아. 다시 보자마자 그 생각했어. 예전처럼 같이 운동하고 싶다고.”

지혁이 씩 웃었다. 얼떨결에 도복을 받아 든 예준은 은은히 끼치는 섬유 유연제 향에 떨리는 박동을 주체하지 못했다. 남들에게는 그저 도복이겠으나 예준은 과거, 매일 입었던 그것을 근 몇 년간 구경도 하지 못한 처지였다.

“사이즈 맞을 거야. 네 이름 새겨진 건 아니지만… 급한 대로.”

부드러우면서도 뻣뻣한 천을 만지작거리며 예준은 뒤늦게 미소 지었다.

“아직 한다고 안 했어.”

“그럼 논다고 생각하고 놀고 가.”

지혁이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기에 예준은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토록 쉬이 손에 들어올 줄 알았더라면 미약한 노력이나마 해 볼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태권도는 아버지의 실패 이후로 성역처럼 여기던 영역이었기에 감히 재도전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 훈련 안 한 지 오래돼서 별로 쓸모없을 거야.”

“그런 건 몸이 기억해. 얼마나 지났는지는 별로 안 중요할걸.”

선수 시절이 부끄러울 정도로 무지해졌을 터였다. 저에게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지혁은 힘을 실어 말했다.

“안쪽에서 갈아입으면 돼. 해 보자.”

지혁이 제 도복 깃을 바로잡았다.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예준은 뜸을 들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잃어 본 적 있기에 지독하리만큼 강한 설렘이 몰아쳤다.

“무리는 안 하셨으면 합니다.”

들뜬 예준을 보며 사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예준은 태경을 생각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간 강하게 불었던 바람이 잦아들었다. 건물 옥상으로 올라온 태경은 높은 고도에도 유난스럽지 않은 바람을 맞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뒤따라 나온 선영도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태경은 연기가 전신에 퍼지도록 깊게 필터를 빨아들였다. 한숨과 함께 공기 중으로 퍼지는 뿌연 형체를 응시하던 선영이 물었다.

“임신한 것 같다고?”

“어.”

선영은 하, 하는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애는 내가 더 빨리 낳을 줄 알았는데.”

“농담 아니야. 애 몸이 변했어. 페로몬도 달라졌고.”

예준의 몸이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보지 않고 그릴 수 있을 만큼 선명했다. 마르고 유연한 육체는 다른 오메가와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남자의 특징이 분명히 살아 있으면서 어딘가 매끄러운 실루엣을 지녔다. 손끝이 닿으면 전율이 일 정도로 부드럽고, 하얀 피부는 그 인상이 주는 서늘함이 무색하게도 무척이나 포근한 체온을 품고 있었다.

길쭉하게 뻗은 몸에 살이 오른 걸 보았을 때 태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전 호텔에서 부푼 아랫배를 마주했을 때는 완벽히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기가 애기를 가졌네.”

선영이 말했다. 측은하게 남자를 보던 선영의 눈빛이 일순 가라앉았다.

“근데, 그럴 거 몰랐다고는 말 못 하지, 너도.”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메가의 형질은 복잡해서 여건이 되는 사람은 꾸준히 병원에 들러 관리해야 했다. 잉태하기 쉬운 몸이기에 피임 또한 철저히 해야 하는데도, 많은 오메가가 제 몸속에 스민 정액을 방치하는 형국이었다.

선영이 건넨 사후 피임약은 90%의 오메가에게는 통상적으로 듣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 선영이 제 오메가를 위해 마련한 약이라면 10%의 실패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확실히 하고 싶었으면 그길로 병원부터 데리고 갔겠지. 예준 씨 만나기 전까지는 철저했잖아. 약 안 듣는 부류에 그 애가 포함될 수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준 거야. 발현했다고 해서 아무나 병원 관리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예준 씨가 자기 몸을 그렇게 잘 알 수는 없지.”

태경이 꽁초를 비벼 껐다. 새 담배에 불을 붙인 그의 낯은 어두웠다. 그가 처연한 눈빛과 대조적으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걔 닮으면 얼마나 예쁠까.”

“어우, 누가 우성 알파 아니랄까 봐.”

알파, 특히 우성 알파의 번식욕은 매우 강한 편에 속했다. 아끼려는 마음과 가학하려는 욕심이 상충하는 건 태경이 이전에 겪지 못한 괴리였다. 알파로서 당연한 본능을 누리기엔 예준을 향한 감정이 컸다. 알면서 몰아붙였다. 10%의 가능성을 나태하게 방관한 건 태경 자신의 선택이었다.

“사후 피임약 구해 달라고 했을 때 왜 그냥 두고 봤어.”

“알파가 오메가 임신시키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선영이 옥상 테라스에 팔꿈치를 괴었다.

“가끔 보면 넌 쓸데없는 자책이 너무 많아.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임신시켰다고 누가 손가락질할 것 같아? 그 오메가 팔자 폈네, 그런 소리나 하겠지.”

“임신한 거 알면 충격받겠지.”

“충격만 받겠어? 결혼에도 시큰둥한 애가 애 가졌다는 거 알면…. 절대 낳자는 말은 안 할걸.”

“애 낳자고 걔랑 섹스한 거 아니야.”

“그럼.”

“좋으니까 뭐든 참을 필요가 없었던 거지. 걔 임신시켜서 가정 꾸릴 꽃밭 같은 생각한 게 아니라고.”

태경이 씹, 하고 욕지거릴 중얼거렸다. 타들어 가던 담배 끝단에서 버티던 재가 떨어졌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을 다시 제 입술 근처로 가져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선영이 탓하듯 말했다.

“그러다 임신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피임약으로 애 안심시키고 딴마음 먹은 건 꽃밭 아니면 뭔데.”

인정한다.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태경은 자조하듯 답했다.

“쓰레기 같은 짓이야. 다음 러트 때도 정신 나가서 걔 임신시킬 생각만 하겠지. 못 참을 거고, 걘 또 아이 가질 거고. 피임약 가지고 내가 또 무슨 장난을 칠지 어떻게 알아.”

태경의 손끝이 떨렸다. 알파이면서 알파를 혐오했던 과거가 우스웠다. 집착적으로 애정을 쏟는 오메가가 생기니 어떤 본능도 자제할 수 없었다. 과거, 혐오했던 알파의 행태를 똑같이 답습하고 있었다. 질타 따윈 들을 필요가 없는 고고한 알파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만큼은 속일 수 없는 법이었다.

선영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어찌 됐든 원망 들을 준비해. 걔 안 놔줄 거잖아. 때리면 맞고 울면 달래고 다 하라고.”

태경이 꽁초를 던지고 새 담배를 꺼냈다. 선영이 그것을 빼앗았다.

“아기 아빠 될 준비되셨으면 담배 끊으시고요.”

“…….”

“준비 안 되셨으면 하루빨리 서두르시고요. 임신은 오메가가 해도 선택은 알파가 해야 하는 거 아시죠?”

아이를 낳는 일도 지우는 일도 알파의 동의 없인 불가능했다. 가혹하지만 누구보다 잘 아는 사실이기에, 태경은 옅은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재차 상기시킨 선영은 태경의 담배를 제 슈트 안주머니에 챙겼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자책하는 태경이나 부러 가볍게 치부하는 선영이나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골치 아픈 건 질색이다. 선영은 청명한 날씨를 만끽하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찬 바람에 꽤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었고, 마침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녀가 비좁은 공백을 뚫고 말했다.

“그보다, 너 대전 간 거 말인데.”

눈빛도 사뭇 진지해졌다. 그녀가 허리를 양손으로 짚으며 덧붙였다.

“조폭들이랑 엮여서 뭐 어쩌려고 그래? 그러다 칼 맞는다? 아기, 아빠 없이 키울 거야?”

두화건설의 이질적인 인상과 더불어 태경의 대전 출장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선영이었다. 그녀는 눈치로 무슨 일인지 알아차린 듯했지만 대강 읽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태경은 선영까지 일에 말려들게 할 생각이 없었다. 언제까지나 제 문제였고 저만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아이에 대한 의견은 잘 알겠고.

“벌써 발 들였어. 빼긴 늦었지.”

태경의 대답에 선영이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는 자신이 두 발 딛고 선 고층 건물 주변으로 빼곡한 빌딩들을 둘러보았다.

“너랑 나랑 한배 탔어. 여기까지 오는 데 꽤 오래 걸렸지. 너 떠나기 전에 이 배 난파시키면 나 가만 안 있을 거야.”

함께 이룬 성과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태경은 그녀의 호언장담을 가슴 깊이 새겼다.

“구조선 제일 첫 번째 자리 너 줄게. 그러니까 캐물을 생각 말고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해.”

“어쭈. 대표는 너라 이거지?”

직함이 이로울 때도 있다니 기대하지 않은 바였다. 태경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선영은 어떤 순간이든 제 편이 되어 줄 동료이자 친구였다. 숨기지 말아야 할 순간에는 숨기지 않을 터였다. 아직은 때가 아닐 뿐.

“어? 내 말 똑똑히 들으라고, 이태경!”

시큰둥한 반응에 선영이 으르렁대며 소리쳤다. 인사도 없이 뒤돌아선 태경은 구시렁대는 선영을 무시하고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제풀에 꺾인 선영은 결국 육중한 옥상 문을 밀고 사라졌다.

“…….”

그러자 담배 연기와 함께 차디찬 겨울 공기가 폐부에 스몄다. 고작 점심시간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태경은 뻣뻣하게 굳은 손을 쥐었다 폈다. 이 손에 예준의 인생이, 우리의 인생이 걸려 있었다.

*

해가 저물었다. 네 시경, 데리러 가겠다는 전화에 예준은 헉헉대며 괜찮다는 답을 내놓았다. 경호원에게 태권도장 아이들과 놀고 있다는 보고를 받긴 했지만, 꽤 진심인 모양이었다. 무리하지 않게 단속하라는 말에 경호원은 제대로 된 확답을 내놓았다. 오늘만큼은 허락할 생각이었다.

태경은 학원가 근처에 다다라 예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차분히 전화를 받은 예준이 말했다.

―여기 복잡해서 찾기 힘들어요. 제가 도로변에 나가서 기다릴게요.

건물 구조에 익숙한 데다 감각이 뛰어난 태경이 찾아가지 못할 리 없었다. 태경은 우선 만류하고 보았다.

“추워. 어딜 나온다는 거야.”

―나갈 테니까 길 따라 쭉 와요.

예준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전화 너머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전해졌다. 제 나름 부산을 떠는 것 같아 태경은 뒤늦게 그러겠다고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변에 선 예준을 찾아냈다.

“…….”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말이 멎는 기분이었다. 태경은 크게 뜨인 눈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갓길에 차를 대고 내리자 패딩을 어깨에 걸친 예준이 추위에 종종대며 다가왔다.

“봐요. 진짜 복잡하죠?”

드러난 목이 춥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두 번째 문제였다. 태경은 그 아래로 흐트러진 도복, 이력에 어울리지 않는 흰 띠, 급하게 신고 나온 운동화를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두 눈과 상기된 두 뺨이 기쁨을 자아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차림새에 뜨거운 설렘을, 반대로 싸한 절망을 동시에 느끼는 건 오로지 태경 자신뿐인가 했다.

“다시 보고 싶었는데. 꼭, 내 눈으로.”

태경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차지혁이 자신이 해 주지 못한 것을 해 주었으니 질투가 차올라야 마땅했다. 그러나 사소한 치기는 결국 벅찬 감동을 파고들지 못했다. 대신, 확신이 공허한 속을 채웠다.

태경이 서서히 웃었다. 그가 예준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결혼하자. 결혼, 하는 게 좋겠어.”

불쑥 내뱉은 진심을, 예준은 과신하지도 깎아내리지도 않았다. 태경의 손이 왜 배 위에 놓였는지는 알지 못한 채 예준이 답했다.

“그만큼 저 좋아한다는 거죠. 알아요.”

담담한 대답에도 태경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온통 하얀 도복 차림이기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겼다고 해도 부끄럽지 않았다. 눈이 먼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태경이 벌어진 예준의 도복 깃을 바로잡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예준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더는 체념이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음….”

뜸을 들이는 말간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몄다. 부정의 의미는 아니었다. 호선을 그린 입가, 휘어진 눈매, 이내 뒤통수를 긁적이는 손이 예뻤다. 눈을 맞추어 태경을 보던 예준이 일순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이에요?”

태경이 패딩째로 예준을 감싸 안았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예준의 도복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행복해?”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 동안 태경은 못내 긴장한 채였다. 자신의 상황을 가늠하듯, 허공을 보던 두 눈이 다시 맞닿았다. 예준의 눈가에 여지없이 기쁨이 맺혔다.

“그럼요.”

발현 후, 몰락했던 인생이 무색하게도 예준은 온전히 기뻐했다. 그 행복이 태경에게까지 전해졌다. 가슴속에 퍼지는 그 감정이 무엇보다 충만했기에 이면에 깔린 아픔 따윈 모른 척할 수 있었다. 예준도 그런 모양이었다. 예준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다시는 못할 줄 알았거든요.”

“운동?”

“네. 방금 했던 걸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재밌었어요. 간만에 아무 생각 없이 논 거 같아요.”

조잘대는 입술과 안온한 눈빛에 태경은 겨우 마음을 놓았다. 그는 상기된 예준의 뺨 위에 입술을 눌렀다.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귀를 스쳤다.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치던 무리는 곧 멀어졌다.

“예쁘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부끄러워 뒤척이는 몸을 꽉 안아 주었다. 자신이 배라면, 차지혁은 예준에게 닻이 되어 준 셈이나 다름없었다. 태경은 순순히 인정했다. 치미는 소유욕은 예준을 감싼 두 팔에 힘을 싣는 것으로 감추었다.

“그래서, 그 결혼 말인데요.”

예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섣부른 고백엔 아이의 존재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예준이 받을 충격을 알기에 태경은 쉽게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연애의 결실이 결혼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야. 때가 되었다고 여겨서도 아니고, 더 구속하겠다고 마음먹어서도 아니고.”

“…그럼?”

예준의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태경은 맞닿은 목에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예준의 긴장을 읽었다. 아이가 아니어도 예준을 원하는 마음은 이미 절실했다.

“네가 지금처럼 행복할 때, 그 감정을 가장 먼저 나누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 곁에 있어 주고 싶어. 행복하게 해 주고 싶고.”

태경은 부러 웃음소릴 내며 덧붙였다.

“신변 보호뿐만 아니라, 가능한 법적 보호도 받았으면 좋겠고.”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안전한 집이 있다지만, 오메가라면 제도적 보호막이 절실했다. 때로는 무력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법이므로.

“헤어지려면 이혼 절차도 밟아야 하고. 그거 번거롭잖아요.”

우스갯소릴 내뱉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태경이 예준의 마른 몸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상대의 체온으로 살아 있음을 깨닫고 설렘으로 삶의 원동력을 얻는 일이 자신에게도 벌어지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제 너 없이는 결핍이 생겨. 다시 예전처럼 살지는 못할 거야. 사랑이 점점 커져.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씨도 있다고 믿거든, 나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믿음일지도 모른다. 태경은 다소 염세적인 예준 앞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무력감을 느꼈다. 어떤 말이 돌아올지 예상할 수 없었다. 남자의 허리에 놓인 손을 꼼지락대던 예준이 이윽고 답했다.

“형 심장 터지겠어. 다 느껴져요.”

“딴소리하지 말고, 예준아.”

“딴소리하는 거 아니야.”

예준이 태경의 가슴 위에 귀를 대었다.

“나는 법보다 이걸 더 믿는다 그거지….”

헛웃음 지은 태경이 예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쌌다.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주제에 뭐가 그리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는지. 태경은 제 가슴팍에 고개를 쿡 처박은 채 코끝을 비비는 어린 연인이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결혼하겠다는 거야, 안 하겠다는 거야.”

“부모님은….”

“양가 부모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려야지.”

“그걸 어떻게 해.”

일이 이렇게 풀리면 장인어른 될 사람을 감시한 꼴이 된다. 예준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오메가를 혐오하는 제 아버지를 설득할 길도 까마득했다. 그러나 태경이 생각하기에 그런 문제는 극복하지 못할 장애물이 아니었다.

예준이 불쑥 태경을 밀어냈다. 한 걸음 멀어진 예준이 말했다.

“난 우리 아빠가 부끄러워요.”

예준의 눈두덩이 붉게 달아올랐다. 회한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연민과 동시에 증오가 있었다.

“나도 내 아버지가 부끄러워질 예정이야. 만나 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텐데 벌써 겁낼 필요 없어.”

“형.”

“아버지가 뒷조사로 네 존재 알아채기 전에 내가 먼저 소개하고 싶어.”

예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모두 까마득한 이야기였다. 집안 좋은 우성 알파가, 알파가 아닌 오메가와 결혼하는 일은 드물기에.

태경은 다시 다가가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예준의 허리를 붙잡아 높이 들어 올렸다. 두 팔로는 제 목을, 두 다리로는 제 허리를 감게 했다. 순식간에 높이 안긴 예준이 태경의 이마에 이마를 맞붙였다.

“넘어야 할 산이 많아. 그래도 난 그러고 싶은데.”

태경이 읊조렸다. 예준은 불안한 기색이었다.

“넌 자랑스러운 금메달리스트고 나도 중매 시장에서 이름 좀 날렸으니 매스컴의 조명도 있을 거야. 많은 사람이 떠들 거고 주목받는 결혼이 될 테지만, 그거 다 감수하고서라도 너 내 배우자로 만들고 싶어. 누구도 못 건드릴 거고 완벽한 보호 아래 있게 될 거야.”

“그럼 이건요?”

예준이 제 도복 깃을 매만지며 물었다.

“설마, 안주인 노릇하라고 집 안에 눌러 앉히기라도 할까 봐? 우리 생활은 달라질 거 없어. 지금처럼 계속 같이 지내기만 하면 큰 불만 없을 거야.”

태경의 뺨에 예준의 손이 닿았다. 절절히 마음을 고백하면서도 태경은 무엇도 희생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모든 것이 희생일 터였다. 보잘것없는 오메가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형은 쉬운 길이 싫은가 봐요.”

“쉬운 길은 상대를 덜 사랑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거지.”

“저를….”

“사랑해. 참고로, 이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더 말해 줄 수 있어.”

예준이 두 눈을 떨었다. 태경의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천천히 멎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그는 보란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을 축인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뚜렷했다.

곤란해하던 예준이 주변을 살폈다.

“여기 학원가예요. 미성년자들도 있다고요.”

“미성년자들도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뭘 하는지 정도는 알아.”

차마 웃지 못한 예준이 태경의 귀를 어루만졌다. 원하는 남자를 이길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처럼 입술을 축인 예준이 다가가 잘생긴 입술을 물었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이어지는 프렌치 키스에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번에는 태경이 예준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높이 안은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대답해 줘.”

터질 듯 뛰는 심장 박동이 분명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태경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노골적으로 대답을 기다리니, 예준은 말하지 않고 버틸 수 없었다.

“…하, 할….”

말을 끝맺기도 전에 태경이 드러난 예준의 가슴팍에 키스했다. 맨살 위에 벌어진 입술이 닿고 남자의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예준은 도복 깃을 모아 잡으며 태경의 어깨를 퍽퍽 쳤다. 그래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꿈쩍도 하지 않던 남자는 그대로 차로 다가가 예준을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허물처럼 벗겨진 패딩이 보도블록 위를 나뒹굴었다. 태경은 아랑곳없이 운전석에 올랐다.

“지혁이가 같이 밥 먹자고….”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가 셔츠 단추를 빠르게 풀며 답했다. 학원가를 벗어나자마자 태경은 아무 공터에나 차머리를 박아 넣었다. 코트를 벗고 뒷좌석으로 넘어오는 남자의 얼굴에 욕망이 서려 있었다. 무릎으로 시트를 짚은 태경이 말했다.

“수없이 상상했거든. 그때 못 잡아먹은 게 한이라고 생각했어.”

선수 시절을 말하는 것이었다. 태경이 손쉽게 흰 띠를 풀어내자 예준의 도복 깃이 맥없이 열렸다. 땀에 젖었던, 하얀 몸이 드러나 움찔대었다.

“그땐 날 몰랐잖아요.”

“알았으면 가만히 안 뒀어.”

태경이 성스러운 띠를 이용해 예준의 손목을 뒤로 묶었다. 그는 무력을 행하면서도 자책 없는 얼굴이었다. 바지마저 벗겨지자, 황당한 얼굴로 지켜보던 예준이 물었다.

“혼자 했어요?”

“진이 빠지도록 했지.”

예준의 낯에 약간의 수치심이 비쳤다. 이미 본 적이 있기에 쉽게 상상되었다. 이내 호기심으로 변하는 미묘한 흥분을 태경은 놓치지 않았다.

“거기서 더 벗을 필요 없어.”

말한 그가 예준의 무릎을 벌리고 성급히 파고들었다. 혼이 나가도록 깊게 들쑤셔도 모자랄 지경이지만, 예준은 이미 잉태한 몸이었다. 치부보다도 허벅지 안쪽이 괴로울 터였다. 태경이 부러 하얀 살 위에 손자국을 내었다.

“이거 입을 때마다 이러면….”

“그럴 거야.”

태경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과거를 연상시키는 도복이 그간 절제한 성생활에 기름을 들이부은 셈이었다.

예준은 체념한 듯 순순히 몸을 내어 주었다. 가죽 시트에 엉덩이가 비벼지는 감각은 익숙하지 않았으나 몸을 짓누르는 힘에는 익숙했다. 셔츠를 벗은 태경이 다가오자 예준이 탄탄한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그럼, 자위하는 거 먼저 보여 줘.”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짐승처럼 목을 물며 달려든 태경이 숨을 헐떡였다. 뜨겁고 열렬한 기척에, 예준은 첫 순간부터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

우당탕, 누군가 발을 구르는 소리에 정명이 예민하게 눈을 치떴다. 소파에 늘어져 낮잠을 청하려던 참이었다. 요란하게 등장한 따까리 중 하나의 팔에는 두툼한 장부가 끼워져 있었다. 구식이지만, 컴퓨터보다야 더 믿을 만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뭔데 그래?”

정명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보고는 오후 늦게나 받는 것이 법도였다. 귀찮은 일이 아니고서야 낮잠을 깨울 리 없기에, 그가 길게 하품하며 상체를 바로 세웠다.

“형님. 그, 그, 있잖아요.”

“그, 뭐?”

“그 이쁜이!”

소파로 다가와 쭈그려 앉은 따까리가 장부를 펼쳤다. 펼친 페이지에는 김재우, 김예준 이름으로 된 채무 목록이 빼곡했다. 그 목록에 모두 빨간 선이 그였다. 마침, 따까리가 A4 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김재우와 김예준의 채무가 모두 상환되었다는 확인서였다.

“씨발. 이게 뭐야?”

사람을 쥐고 흔드는 데는 돈이 최고였다. 돈이 아니라도 쥐고 흔들 명목은 많았다. 빚을 다 갚았다면 또 빚을 지게 하면 그만이었다. 다만, 그들의 채무는 애당초 한 방에 갚을 수 없는 액수였다. 노름꾼에, 일용직이나 전전하는 놈들이 무슨 수로.

정명이 확인서의 가장자리를 힘주어 구겼다. 채무 목록에 비해 허전한 내용을 빠르게 훑었다.

“이쁜이 물어 간 그 알파 새끼요.”

“그 새끼가 이걸 다 갚았다고?”

“예! 그렇다니까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고 이게 진짜 히트예요, 히트.”

예준이 어떤 알파를 물었다 했어도 정명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우성 알파들은 습관적으로 오메가를 갈아 치우기 일쑤였다. 어떤 요망한 놈이 물었다 할지라도, 예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질 게 자명했다. 그렇다면 그때 거두어 또 실컷 괴롭혀 주면 그만이었다.

“어떤 미친놈이 이 씹지랄을 해?”

어떤 우성 알파도 오메가의 빚까지는 척척 갚아 주지 않았다. 누가 일회용품에 그만한 공을 들이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명이 쉬이 눈에 들지 않는 확인서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때, 시야 속으로 검은색 명함 한 장이 치고 들어왔다.

“어떤 놈이 독하게 확인서까지 받아 가면서 이걸 내밀었다니까요.”

“이게 뭔데?”

묻긴 했으나 이미 익숙한 명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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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또 문제 만들면 아주 뒤지게 곤란하게 만들어 버릴 테니까 처신 잘하라고 협박까지 하던데요. 물론 그분이 직접 하신 건 아니지만.”

정명이 눈을 크게 떴다. 이태경이라면 이미 만난 바 있는 남자였다. 소문대로 우아하고 고귀하기가 이를 데 없는 우성 알파. 자신처럼 대담한 놈이 아니었으면, 누구든 바지에 오줌 한 방울 지리고도 남을 만한 아우라가 있었다.

“이, 씹….”

그가 이곳에 직접 사람을 보내 채무를 갚았다는 것은 정명 자신의 정체까지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저 자신의 정체도 알아 달라 명함까지 남기고 간 데에는 분명한 함의가 있었다.

“아, 씨이발!”

정명이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쳤다.

고고한 도련님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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