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Underwater II
예준은 맞은편 빌라 주인에게 사정해 CCTV를 확인하기로 했다. 전화로는 언짢은 기색이 완연했으나, 막상 망가진 스쿠터를 보자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번거롭게 업체 직원을 부르거나 경찰과 동석할 필요가 없어 다행이었다.
주택이 빽빽이 들어찬 동네임에도 지나치는 사람은 많지 않은 조용한 골목이었다. 예준은 자신이 집을 비운 직후부터 빠르게 영상을 돌려 누군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덩치 몇몇이 화면 속으로 절묘하게 들어왔을 때, 빌라 주인이 물었다.
“건너 동네 학교 애들 아닌가?”
예준과 같은 동네 사람이라면 흔히 보는 교복이었다. 단 한 명, 윤도하만 그들과 달리 부유한 동네의 질 좋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빌라 주인은 눈살을 찌푸린 채 혀를 끌끌 찼다.
“경찰에 신고하고 학교에도 말해서 아주 곤란하게 만들어 버리지, 그래? 이렇게 떡하니 증거가 있는데 빼도 박도 못 하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에도 그랬듯 신고와 합의 절차를 거치면 새로 스쿠터를 장만할 정도의 합의금은 받아 낼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이전과 달리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었다. 예준은 자연스레 떠오른 태경을 떨치지 못했다. 여러 번 도움을 받고도 그에게 또 치다꺼리를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껄끄러웠다. 윤도하와 여태 엮여 있단 사실을 구태여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불미스러운 일로 괜한 분란을 일으킬까 염려되었다.
예준은 고민 끝에 빌라 주인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 일단 이거 지우지 말아 주세요.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당장 안 하고?”
“네. 좀 걸리는 게 있어서.”
빌라 주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준은 그에게 꾸벅 인사한 뒤 빌라를 빠져나왔다.
방관하는 것으로 녀석의 반항기를 잠재우려던 전략은 실패였다. 아직 덜 자란 미성년이라고 만만하게 본 것이 문제였을까. 담판을 보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일이었으나 실상 머릿속에 떠오른 해결책은 아무것도 없었다. 밀어내고 무시해도 소용없는 일이라면 대체 어떻게.
막막하다고 해서 하루를 공칠 수는 없었다. 예준은 치문에게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
오랜만에 만난 치문은 건강한 모습이었다. 패딩을 걸쳐 입고 나타난 녀석은 시린 바람에 두툼한 손을 호호 불었다. 예준은 주머니에 꽂은 손을 빼고 인사했다.
“몸은 괜찮아?”
“그거야 내가 물을 말이지. 뼈는 다 붙었대?”
“어. 이제 멀쩡해.”
예준이 늑골 부분을 두드리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치문도 자신도 여기저기 얻어터진 채였다. 상처가 아문 것만 해도 다행이기에, 치문의 입에서도 덩달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우리 형, 신수가 훤한 거 보니 그 알파가 잘해 주긴 했나 봐.”
녀석이 씩 웃으며 말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말랐던 뺨에 살이 올랐다. 하루 세끼 잘 챙겨 먹고 잘 잔 덕분에 안색도 환해졌다. 예준은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좋은 사람이니까.”
“잘생겼고 돈도 많고 경호원까지 부리고, 그치?”
언제까지고 숨길 수만은 없는 일이기에 추궁이 뒤따른다 해도 감수할 생각이었다. 예준은 눈을 홉뜨는 치문을 무시하며 슬쩍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돌아 집으로 향하자 망가진 스쿠터가 가장 먼저 보였다. 미리 사정을 들은 치문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사진은 찍어 놨어?”
“동영상도 찍었어.”
“뭐, 이대로 묻는다면 형 뜻에 따르긴 할 건데요. 그래도 호구처럼 당하면 안 돼. 증거는 남겨 둬야지. 그걸로 협박하든 돈을 뜯어내든, 분명 써먹을 데가 있을 거야.”
치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묻겠다고 결론 내린 이유는 단지 태경 앞에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아서였다. 비슷한 처지, 동등한 관계까지는 어렵더라도 연이어 문제만 만드는 골칫덩이가 되고 싶진 않았다.
“확 찾아가서 조져 버릴까? 얼씬거리면 반 죽여 놓는다고. 끽해야 고딩 새끼라며.”
“그렇게 말 안 해도 너 무섭게 생긴 거 알아. 그 생각도 안 해 본 거 아닌데 그러다 괜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 될까 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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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준은 부러 떡볶이집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건장한 목을 이리저리 꺾은 치문이 거들먹거렸다.
“애새끼들이 존나 겁이 없어. 합의금 두둑이 부르면 어쩌려고 CCTV도 다 있는 데서 그 지랄을 해?”
예준은 아득한 기분으로 이마를 짚었다.
“걔도 부자래. 삼촌이 힘 좀 쓰는 사람이라던데.”
“어떻게 아는데?”
덕분에 태경을 만났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사람 사촌이거든, 그 애가.”
“뭐? 그 알파 사촌이라고?”
“어.”
“그럼 그 알파한테 확 조져 놓으라고 하지, 왜?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바깥에서도 샌다고. 거, 청소년 비행 문제는 집구석에서 알아서 해결해야 할 거 아냐.”
눈을 내리깐 예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현장에 그를 불러내 해결을 떠넘긴 전적도 있었다. 그때와는 다른 상황이 되었기에 똑같이 대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거 봐, 이거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뭐가.”
연거푸 머뭇거리기만 하자 치문이 넘겨짚었다.
“그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러는 거네. 괜히 분란 만들었다가 사이 틀어지면 곤란하니까. 알파랑 오메가가 다 그렇지. 나 다 알아요.”
단호하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예준은 뺨을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그와 저 사이에 연애라는 주제가 끼어들었기에 조심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면서 괜한 곤욕을 치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예준이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스쿠터를 발로 툭툭 건드렸다. 힘도 주지 않았는데 부품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부끄러워하는 것 좀 봐. 세상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치문이 부품을 주워 스쿠터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추위에 움츠러든 예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사람 고생 좀 하겠다. 형 막대기처럼 딱딱한 거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순간, 예준은 딱딱하게 굴지만 않으면 되는 건가 생각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이 스쿠터 좀 처리해 줘.”
“내가 아무리 힘이 세도 혼자서는 안 돼요. 이따 애들 데리고 와서 어디 빈 창고에 박아 두기라도 할게.”
“나도 같이 갈까?”
“됐어. 형 오늘 일할 거라며.”
“괜히 너 힘들게 하기 싫어서.”
“운동하는 셈 치지 뭐. 아, 그리고 정명 형님한텐 연락하지 마요. 현장팀장님 번호 알려 줄 테니까 거기로 연락해. 괜히 눈에 띄었다가 형님 성질 돋울 수도 있으니까.”
“…아직 아빠 찾고 있어?”
태경의 말대로라면 재우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에도 정명의 존재를 떠올리면 못내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었다.
“찾기야 늘 찾지. 이번엔 튀는데 사기꾼도 끼고 조폭도 끼었으니 뿔이 단단히 났어. 그 조폭 새끼들도 입 딱 다물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형은 어떤 알파 놈이 물어 갔다고 둘러댔어. 대충 그러려니 하는 눈치에요.”
“물어 가?”
“그럼 채 갔다고 해?”
치문이 손을 호호 불었다. 알파 손에 쥐락펴락 당하는 오메가가 한둘이 아니기에 변명이 통한 모양이었다.
“고맙다. 형이 밥 사 줄게. 먹고 가.”
“웬일이야? 진짜 사 줘?”
“어.”
예준이 씩 웃어 보이자 치문이 격하게 달려들었다. 예준은 치문에게 떠밀리듯 골목을 내려갔다. 골치 아픈 와중에도 발걸음이 가벼운 묘한 아침이었다.
*
[준비 다 했어?] [네 그런데 저기 십 분만 더요] [가는 데 이십 분은 더 걸릴 테니까 천천히 해요.]
남자는 신호 대기에 맞춰 답장을 보내왔다. 부랴부랴 씻고 나와 옷장을 뒤지던 예준은 ‘네’ 하고 간단히 답장을 보냈다. 조그마한 옷장에 넘치는 옷들을 다 꺼내 놓고 골몰히 고민했다. 그에게 받은 옷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뭘 입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서였다.
옷이 없으면 몰라도 많아서 고르기 어려운 적은 처음이었다. 운동할 때도 늘 운동복만 입고 다녔던 편이라 흔히 말하는 데이트에는 뭘 입어야 맞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예준은 고민 끝에 추운 날씨니까 코트를, 속에 입을 것으로는 따뜻한 니트를 골랐다. 패션 감각 따위 죽었다 깨어나도 없으니 안전하게 니트와 코트 모두 검은색을 꺼내 들었다.
머리카락은 반쯤 말려 툭툭 털어 버렸다. 온종일 먼지만 잔뜩 뒤집어썼기에 샤워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현장에서 내내 벽돌을 나른 덕에 어깨며 허리며 끊어질 듯 아팠다. 그래도 약속을 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예준은 미리 집 앞에 나가 있었다.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익숙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였다. 예준은 태경이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 주기 전에 재빨리 조수석에 올라탔다.
“안녕하세요.”
어쩐지 얼굴을 마주하기가 쑥스러웠다. 인사를 뱉어 놓고 정면만 응시하자, 좋은 향기와 함께 따뜻한 손이 뺨에 와 닿았다.
“진짜 안녕한 거 맞아요?”
“네.”
“그럼 얼굴 좀 보자.”
슬쩍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한결같이 잘생긴 얼굴을 보고 예준은 괜히 헛기침했다. 훈훈한 히터 바람 때문에 귀가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이 능숙하게 귓불을 문지른다. 움찔 떤 예준은 크게 심호흡했다.
“늦었는데. 밥은?”
“먹었어요.”
현장 삼촌들에게 끌려가 뜨끈한 곰탕을 대접받았다. 베타들만 가득한 현장은 편안했고 아들 같네, 조카 같네, 하는 말들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일이 늦게 끝난 태경과는 결국 심야 영화를 함께 보기로 했다. 열 시 반, 영화를 보고 나오면 날이 바뀔 시각이었다.
“대표님은 드셨어요?”
“응.”
별다른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아닌데 왜 긴장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와중, 태경이 가까이 다가와 눈을 맞추었다.
“씻었네.”
“네.”
“바로 자는 게 좋은데 괜히 나오라고 한 거 아니에요?”
“아뇨.”
남자의 말을 자른 예준이 덧붙였다.
“괜찮아서 나온 거예요….”
치문이 말했듯 막대기처럼 딱딱하게 굴긴 싫었다. 쥐어짜듯 솔직하게 말하자 나지막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냥 괜찮아? 자는 것보단 나 만나는 게 나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면.”
차마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계속 뜸만 들였음에도 끈덕진 시선이 도무지 곁을 떠나지를 않았다. 남자가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지만 밖으로 내뱉기는 민망했다.
“그럼 갈까요?”
입매를 휜 채 저를 보는 눈빛에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총명한 두 눈은 어둠 아래에서도 선명히 빛났고, 그 모습을 보자 미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긴장 때문이 아니라 뭔가 기대되어서였다. 어딘가에 기대를 두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어 잊었던 감각이다.
볕과 그늘처럼 두근거림과 공존하던 불안감은 옅었다. 적어도 자신의 분수를 떠올릴 틈 따위는 그 순간 존재하지 않았다. 예준은 생경한 기분에 사로잡혀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곧 미끄러져 낯선 곳으로 향했다.
*
영화관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이었다. 늦은 시각이기에 비교적 한산한 내부를 예준은 쭈뼛대며 걸었다. 그는 자신과 발을 맞춰 걸으며 눈길이 닿는 곳에 함께 시선을 주었다.
스낵 코너를 지나치자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역시, 언제 먹어 보았는지도 가물가물한 팝콘이 눈에 띄었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알알이 노란 팝콘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태경이 휘어진 입가를 가리며 물었다.
“사 줄까?”
예준은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곧장 자신을 이끌고 스낵 코너로 향했다.
“어떤 맛으로 드릴까요?”
점원이 친절히 물어왔다. 남자는 선택을 재촉하지 않았으나 예준은 빠르게 답을 내놓았다.
“기본이랑 캐러멜 맛 반반이요.”
값을 치르고 카드를 건네받은 남자가 예준의 품에 직접 팝콘과 콜라를 안겨 주었다. 받자마자 팝콘을 입에 넣은 예준은 긴 목록의 메뉴판을 보며 말했다.
“사람들은 영화관에 영화 보러 오는 게 아니라 뭐 먹으러 오나 봐요.”
“그러게요.”
그가 빤히 응시했기에, 예준은 바삐 팝콘을 삼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는 사람들 손에 들린 먹을거리를 볼 때마다 ‘사 줄까?’ 하고 물었다. 그렇게까지 식충이는 아니기에 예준은 때마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먹을 것은 팝콘이면 충분했고 그렇지 않아도 구경할 것들이 많았다.
좌석은 후미진 곳에 있었다. 드문드문 앉은 사람들 모두 중앙에 있는데 태경과 자신만 가장자리인 것이 예준은 의아했다. 그것도 맨 뒷자리. 불이 꺼지고 본격적으로 광고가 흘러나오자, 아무래도 영화를 보기에 좋은 좌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태경이 귓가에 입술을 맞붙였다.
“목 드러나는 걸로 사 줄 걸 그랬어요.”
예준은 직감적으로 니트의 목 폴라 부분을 매만졌다.
“이거요?”
“응.”
목도리를 하는 것보다야 덜 성가신 옷인데 왜 그렇게 말하나 싶었다. 예준은 태경이 불쑥 턱에 입 맞춘 후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입술이 다음에 도달할 곳은 목이었으므로.
긴장한 예준은 팝콘을 꽉 쥔 채 멈추었다. 태경이 어깨와 체격으로 사람들의 시야를 차단한 채 다가왔다. 그가 아랫입술을 쪽 빨았다. 깊게 입술을 비비고 물러난 후엔 난감한 듯 웃었다.
“짠맛 나는데.”
내내 기본 맛만 먹고 있었다. 예준은 소리를 죽여 물었다.
“먹지 말까요?”
“먹어도 돼.”
그래 놓고, 팝콘을 가져가는 손보다 먼저 입술을 맞붙이는 그였다. 부드럽게 뒷덜미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소리 없이 입술만 비비던 그가 결국엔 몸과 몸 사이를 가로막은 손잡이를 접었다.
예준은 팝콘 통이 구겨지는 것도 모른 채 상체를 맞붙였다. 슬쩍 입술을 벌렸더니 남자의 혀가 입 안의 연한 점막을 핥으며 들어왔다. 혀를 얽자 신음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견뎌 내곤 쪽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움직였다. 곧 남자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암전이 깊어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예준은 고개를 젖힌 그대로 태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스크린을 응시하다가 이따금 시선을 돌려 눈을 맞추었다.
데이트라고 해 봐야 쭈뼛대기 바빴던 학창 시절의 기억이 전부였다. 뽀뽀하긴 했었나. 되짚은 지 오래라 가물가물했다. 예준은 남자의 리드를 따르며 괜한 속앓이를 했다. 풋내기처럼 보이기 싫다는 고집은 왜 생겨난 것인가 했다. 아마도 상대가 너무 능숙한 탓일 터였다.
영화를 보던 태경이 물었다.
“재미없어?”
“…아뇨. 왜요?”
“계속 내 쪽 흘끗거리길래.”
“제가요?”
그가 낮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도장을 찍듯 뺨에 뽀뽀하고 물러나는 눈이 다정했다. 남자는 별다른 고민 없이 손깍지를 끼었다. 닿은 손의 열감이 신경 쓰였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제일 마지막으로 상영관을 나섰다. 애당초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사람들뿐이었고 엘리베이터가 한차례 지나간 탓에 복도 뒤편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태경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물었다.
“내일 몇 시에 일 나가요?”
“여덟 시요.”
“그때도 뭐 주문하는 사람들이 있어?”
아차 싶었다. 남자는 스쿠터가 망가졌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 치문이 일 좀 도와주고 일하려고요.”
“치문이.”
예준의 호칭을 따라 한 태경이 미간을 좁혔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치문이는 치문인데 나는 왜 계속 대표님이에요?”
“태경아, 할 수는 없잖아요.”
예준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융통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대답에 태경의 입매가 휘었다.
“중간이 없어.”
“예?”
“남자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남자를 뭐라고 불러, 보통.”
“형.”
대수롭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렇게 흘려버릴 수도 있는 대화였으나.
어깨를 감싸는 남자의 손길을 느끼며 예준은 별안간 뒤통수를 긁적였다. 융통성은 없어도 눈치는 있었다. 뒤늦게 읽어 낸 태경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냥 대표님이라고 부를게요.”
중얼거리듯 말했다. 친밀하게 부르기엔 아직 그와 자신 사이의 거리가 멀었다.
“한번 떠본 것뿐이니까 겁먹지 마요.”
손을 꽉 쥐는 악력에 예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는 곧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영화를 보자는 용건은 끝났다. 이미 자정이 넘어, 예준은 집으로 돌아가면 몇 시간 자지 못하고 출근해야 했다. 남자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저 늦었는데 그냥 걸어가도 돼요. 여기서 집까지 별로 안 멀어서.”
“누가 잡아가면 어쩌게.”
태경이 농담조로 건넨 말에 예준은 뜨끔했다. 오메가인 처지라면 늘 그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므로.
“데이트 끝나면 데려다주겠다고 한 거 빈말 아니었어.”
단호하게 말한 태경이 예준을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 운전석에 오른 그는 의기소침한 예준의 앞머리를 헝클어뜨린 뒤 물러났다.
집까지는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골목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차는 반지하 방 앞에서 멈추었다. 느릿느릿 벨트를 푼 예준이 여느 때처럼 꾸벅 고개를 숙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시간을 꽉 채운 영화였는데도 미묘하게 아쉬움이 남았다. 예준은 남자의 집에서 단칸방으로 돌아오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었나. 하루를 잘 마무리했다면 홀가분해야 마땅한데도, 어쩐지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들어가 볼게요.”
그래도 바쁜 남자를 더 붙잡아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예준은 태경과 눈을 맞춘 뒤, 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경이 예준을 따라나섰다. 그는 예준이 반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밟기 직전에 손을 뻗었다. 허리를 감싸는 손길에 작은 몸이 움찔거렸다.
“이렇게 싱겁게 끝나는 데이트가 어디 있어.”
예준은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남자와 함께 단칸방으로 향했다. 문을 등지고 올려다보자 야릇한 눈빛이 시야 속에 담겼다. 반사적으로 밀어낸다는 게 그만 남자의 코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꼴이 되었다.
“싱거워요?”
재밌었는데…. 재미없었나?
영화가 별로였냐고 물으려는데 영화관에서처럼 입술이 먼저 와 닿았다. 뒤통수를 감싼 그가 처음부터 강하게 입술을 맞붙였다. 다급히 몰아붙이는 키스에 예준은 얼떨결에 눈을 감았다. 영화관 안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농도여서, 그의 셔츠를 꼭 쥔 채 끙끙 신음했다.
곧 예준의 코트 속으로도 손이 밀려들었다. 니트 위로 허리를 쓰다듬던 손끝이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아래쪽으로 움직였다. 그가 엉덩이를 꽉 틀어쥐자 순식간에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하아…. 저….”
자세를 바꿀 때마다 부실한 전등이 깜빡거렸다. 켜졌다 꺼지길 반복하는 터라 길을 지나는 누군가가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염려되었다. 키 차이에 젖힌 목이 버겁고 아프게 혀를 빠는 힘에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겨우 태경의 목을 안은 예준은 숨 쉴 타이밍을 찾지 못해 헉헉댔다. 발끝을 세우고 매달리자 배 근처에서 무시할 수 없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놀란 예준이 태경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미는 힘이 무색하게도 다시 다가온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이마를 맞대며 물었다.
“집에 라면 있어?”
씩 웃으며 묻는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라면 먹고 갈까?”
“그런 건, 집주인이 먼저 묻는 거 아니에요?”
“마음 있는 쪽이 먼저 묻는 거지. 뭐 크게 상관있나.”
그가 부은 입술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아랫입술을 짓이긴 손이 하얀 살갗이 발개지도록 그 주변까지 더듬었다.
“라면 있기는 한데… 저… 그게….”
남자는 답하기가 무섭게 잠금장치 위에 손을 올렸다. 빠르게 번호를 입력하고 예준을 번쩍 들더니 안으로 들어섰다. 예준의 두 발은 곧 땅에 닿았으나 반항하기도 전에 코트가 벗겨졌다. 지독한 어둠, 여전한 한기에도 맞붙은 몸에선 열이 났다. 현관에 선 채 또 키스가 시작되었다. 쪼옥, 쪽…. 방음도 되지 않는 좁은 방 안으로 질척한 소음이 늘어졌다.
“저… 진정하세요….”
“진정은 했어.”
“숨, 숨 막혀요.”
자꾸 밀어내자 목 폴라를 끌어 내린 태경이 귀 아래에 입 맞추었다.
“그럼 이거 벗을까요?”
“라면은….”
“먹어야지. 그 전에, 돌아서 볼래?”
쭈뼛대며 뒤돌아선 예준이 남자에게 목과 등을 내어 주었다. 그가 하체를 밀착한 채 배를 쓰다듬었다.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는 뭉근하게 페로몬을 들이켰다. 기분 좋은 성감이었다. 예준은 벽에 뺨을 댄 채 입꼬리를 올렸다. 소릴 내지도 않았는데 금세 눈치챈 남자가 입술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었다.
“싫다면 안 할 생각이었는데.”
“…싫어요.”
“하는 게 싫다는 거야, 안 하는 게 싫다는 거야.”
그가 코트를 벗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골반을 틀어쥐고 노골적으로 하체를 비비자 예준의 발끝이 곱아들었다. 거기서 행위를 더하지 않는 것이 능숙했다. 이 모든 스킨십이 단지 키스의 부산물 같았다. 성감을 돋우고 기분 좋은 자극을 유도하지만 섹스의 전조가 아님은 명확했다.
그렇다면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간지러워 몸을 뒤척이던 예준이 완전히 돌아서 태경을 마주 보았다. 셔츠 사이로 드러난 맨살에 코끝을 묻자 그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지, 너.”
“…응.”
그의 탄탄한 복근을 더듬었다. 선명히 팬 근육을 가늠하듯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기특하다는 듯 귓불에 입 맞춘 남자가 말랑한 살을 아프지 않게 씹었다. 뚫었던 흔적이 남은 귀. 남자의 혀가 아주 작은 구멍을 핥고 지나갔다. 소름이 돋고 다리 사이가 간지러웠다.
“집에 가지 말까.”
축축한 귓속으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들었다. 반지하 방의 누추함 따위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답하지 않자 남자가 재차 물었다.
“밤새 이러고 놀까요, 우리.”
구미가 당겼다. 예준은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예준을 매달고 안으로 들어선 태경의 발에 무언가 밟혔다. 태경이 탁, 불을 켜자 잔뜩 널브러진 옷이 드러났다. 남자의 목에 입 맞추려던 예준은 싸한 직감에 두 눈을 흘끗거렸다.
“아….”
짧은 탄성과 동시에 예준의 귀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예준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늘어진 옷들을 벽 구석으로 밀었다. 좁은 옷장에 꾸역꾸역 쑤셔 넣자 그제야 발을 딛고 설 공간이 생겼다. 그러고도 너저분하게 던져 놓은 수건이나 개어 놓지도 않은 이불 따위가 보였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태경을 들였다는 사실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위기 깨는 방법도 가지가지긴 한데.”
슬그머니 밀려드는 상체에 예준은 기함했다. 버티려고 노력해 봤지만 무리였고,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맨바닥에 등이 닿았다. 파란빛이 감도는 환한 형광등 아래였다. 남자는 부끄러움 한 점 없이 바지 버클에 손을 가져갔다.
“예쁘면 다 상쇄돼. 불공평해도 어쩔 수 없어요.”
예준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나쁜 사람 같아요.”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에요. 예준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사람일 수도 있어.”
느긋하게 웃은 태경이 예준의 버클에도 손을 뻗었다. 곧 속옷 아래 굴곡이 드러나고 허벅지가 맞붙었다.
“일곱 살이나 어린 남자애 꼬시자고 작정했던 것도 썩 떳떳하진 않고.”
나긋나긋한 말투를 더듬듯 예준은 남자의 입술로 손을 뻗었다. 드문드문 닿는 살덩이가 뜨거웠다.
“할 때마다 자제를 못 해서 아프게 만드는 것도 미안하고.”
그게 꼭 나쁘기만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관심은 낯설지만 흥미로웠고 격정적인 섹스는 고통을 유발하는 동시에 극명한 쾌락을 맛보게 해 주었다. 예준은 태경의 입술에 이어 수려한 이목구비를 더듬었다. 반들반들한 눈으로 잘생긴 얼굴을 감상하던 그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예쁘면 다 상쇄돼요.”
흡족해하는 남자의 눈빛이 좋았다. 군림하려 드는 알파라면 경멸해야 마땅한데도, 그의 통제를 반기기 시작하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눈먼 사람처럼 구는데….”
그의 손이 니트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홧홧한 배를 문지르다 위로 향한 손은 가슴 근처에서 멈추었다.
“심장은 뛰어서 살아 있는 게 실감 나지.”
예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터질 듯한 박동이 부담스럽던 차였다. 세찬 박동을 감지한 남자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확실히 나만 그런 건 아니네.”
뺨에 내려앉은 입술이 부드럽게 열렸다 닫혔다. 속옷마저 벗겨지며 무게가 더해졌다. 겨우 태경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예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확신에 찬 남자가 거침없이 하체를 맞붙였다.
손깍지를 끼운 그가 맞잡은 손을 맨바닥에 눌렀다. 거칠게 벌어지는 턱, 다소 폭력적으로 밀려드는 혀에도 그것을 전희라 생각하지 않았다. 몸과 몸 사이에 고인 열은 뜨거웠으나 닿는 손길은 그저 부드럽기만 했다. 조급함을 어쩌지 못해 마구 몸을 비볐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에 닿는 살덩이를 물고 빨았다.
예준은 범해지려 다리를 벌리면서도 굴욕을 느끼지 않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면 연애가 시작되는 건가 싶었다. 이후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
태경은 직접 나서 라면을 끓였다. 라면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작은 밥상 위엔 낡은 냄비만 놓였다. 누구도 초대해 본 적 없는 집이지만 다행히 수저는 두 쌍이 있었다. 예준은 언젠가 이웃에게 얻었던 국그릇 두 개를 내어놓고 마주 앉는 남자를 주시했다.
삽입까진 가지도 않았는데 몸이 노곤했다. 차례로 씻고 나온 터라 뜨거운 물이 닿았던 남자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가 사 준 옷 중 가장 큰 것을 골라 건넸는데도 티셔츠의 표면이 팽팽했다.
“나한테는 욕실이 너무 작아요.”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욕실뿐만 아니라 방도, 현관도, 창문도 그에겐 모두 작을 터였다. 이따금 고개를 숙이거나 건장한 몸을 구기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많이 불편하셨어요?”
“밖에 있는 너 생각하면 불편한 것쯤이야 감수할 수 있지.”
“저는 익숙해서 다 괜찮은데요. 대표님은 키가 크시니까요.”
“키만 클까.”
“…더 말 안 하셔도 잘 알아요.”
괜히 입술을 깨문 예준이 먼저 젓가락을 들었다. 씻기 전까지 남자의 손길에 화답한 주제에 이제 와 부끄러워하는 것도 우스웠다. 뒤통수를 긁적인 예준은 시선을 피한 채 면발을 후후 불어 먹었다. 내내 시달린 터라 몹시 배가 고팠다. 새벽 두 시가 넘었지만 공복감 때문인지 전혀 졸리지 않았다.
“맛있어?”
“네. 맛있어요.”
실패작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끓여 준 라면이니 상관없었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운 예준은 먹기보다 저를 보기 바쁜 태경의 눈치를 살폈다.
“배고픈 줄 알았으면 더 맛있는 거 사 줄 걸 그랬어.”
“괜찮아요.”
집요한 시선 탓에 긴장감은 옅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심호흡하는 예준을 보며 태경이 물었다.
“선수 시절에 인기 많았죠?”
그는 귀엽다는 말이나 예쁘다는 말에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준은 화끈거리는 귓불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파나 성희롱은 빼고.”
“추파도 빼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추파 받았는데.”
“그냥….”
예준은 애꿎은 허공을 보며 답했다.
“인터뷰한 기자님들이 가끔 사적으로 번호 물어보시기도 하고….”
“하고?”
“세계 경기 나갔을 땐 타국 선수들이 좀… 방에 찾아오고 그래서 귀찮았어요.”
“남자였어, 여자였어.”
“여자가 8, 남자가 2 정도요?”
“방에 찾아오면, 잤어요?”
“예? 그럴 리가요.”
지금이야 아버지와 관련한 추문에 시달리는 형편이지만 당시만 해도 누구보다 깨끗한 사생활을 유지했다. 발현 전이어도 피가 끓는 나이였고, 몸 쓰는 운동선수들과 함께인 상황이었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선을 넘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발현하기 전에는 얌전했어요.”
예준의 해명에 태경이 미지근하게 웃었다.
“지금은 안 얌전해?”
발현 후에는 빨아 쓰지도 못할 걸레 취급당하기 일쑤였다. 조금 전까지 남자와 나눈 행위만 돌이켜 봐도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우물쭈물하자 그가 먼저 입을 뗐다.
“난 얌전한 건 별로라서.”
예준은 팔짱을 끼는 태경을 보며 선영을 떠올렸다. 듣기로 부잣집 아가씨들만 만났다고 하지 않았나.
“가능하면 잠자리에서 훌륭한 상대가 좋지.”
“저는….”
딱히 질문은 아니었는데 그가 선수를 치듯 답했다.
“잘해. 내내 그 생각밖에 안 나게 할 만큼.”
남자가 밥상을 밀어내고 손을 뻗었다. 예준은 남자의 접힌 무릎으로 발을 뻗어 더 다가오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그러나 곧 발목을 붙잡혔다. 그는 달랑거리는 트레이닝팬츠를 걷어 도드라진 복숭아뼈를 더듬었다.
“나도 내 성욕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건 예준도 마찬가지였다. 예준은 간지러운 발목을 빼내려 안간힘 썼다.
“저 내일 출근해야 해서요….”
“알아. 그래도 지금 재우긴 싫어요.”
남자는 곤란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저를 주시했다. 시간이 흐르자 미소를 가까스로 참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입매가 시원하게 벌어지고 미소가 노골적으로 깊어졌다. 장난일 뿐인데 괜히 긴장하고 말았다.
“…섹스에 환장한 사람인 줄 알았잖아요.”
“여기에 좀 미쳐 있긴 하지.”
그렇게 말한 남자가 발목을 당겼다. 다리 사이로 불쑥 들어온 손이 예준의 허벅지 안쪽을 주물렀다. 동시에 뺨에 입 맞춘 그가 속삭였다.
“그래도 오늘은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어때요.”
“…좋아요.”
다시 시작된 식사는 머지않아 마무리되었다. 예준은 남자와 함께 설거지하고 양치까지 마친 뒤 매트리스에 앉았다. 불을 끄고 전기담요의 스위치를 누른 남자가 이불을 열고 들어왔다. 새벽 세 시. 준비하는 시간을 빼면 네 시간이나 잘 수 있을까 말까 한 시간이었다.
12월이 되면서 밤이 길어졌다. 일어나야 하는 시간에도 동이 트지 않으리라 생각하면 막연히 우울한 기분이 들던 때도 있었다. 다른 사람과 매트리스에 함께 몸을 뉘는 것이 처음이어서일까. 다행히도 오늘의 막막함은 덜했다. 예준은 남자와 거리를 두고 마주 누웠다.
“또 언제 볼까.”
헤어지기도 전에 다음을 기약하다니. 성급하다고 여겼으나 남자의 얼굴은 느긋했다.
“또요?”
바보 같은 질문을 미처 삼키지 못했다. 모로 누워 제게로 손을 뻗은 남자가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 해 본 적 없어?”
“딱히 없어요.”
“연애도 해 봤고 좋아한 사람도 있었다면서.”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당시에는 그랬을지도 모르나 지금에 이르러 그때의 기억은 흐려진 지 오래다.
“늦었다는 거 알면서 붙잡고 싶고 오늘 봤으면서 내일 또 보고 싶은, 그런 거 있잖아.”
남자의 손길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부근이 간지러웠다. 예준은 눈을 감았다 뜨며 남자와 시선을 맞추었다. 웃으며 다가온 남자가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난 오늘 그랬어. 넌 아니었다고 해도 상처 안 받을게.”
예준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었다. 남자의 속눈썹이 살짝 떨린 듯도 하였으나 상대방의 감정을 온전히 읽어 내는 일엔 익숙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가깝지 않은 사람과 가까워지는 과정은.
정의하지 못한 감정 때문에 조금 혼란스러웠다고 말한다면 화답이 될까 싶다가도, 결국 입술을 떼긴 어려웠다. 대신 예준은 그와 저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를 좁히기 위해 조금 안쪽으로 누웠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이번엔 귓불에 닿았다.
“나랑 있는 거 재미없었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내일은 일 때문에 못 볼 것 같아.”
“괜찮아요.”
약속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다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예준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모레는 될 것 같은데, 괜찮겠어? 진도가 너무 빠른 듯하면 미리 말해 두는 것도 방법이에요.”
손끝이 저릿하게 달아올라 입술을 감쳐물었다. 자신 같은 숙맥이 관계의 속도를 가늠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휩쓸려 가는 와중이었다. 예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하듯 답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물러서기도 전에 다가와 버리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조절할 테니까 긴장할 때마다 숨 참지 마요. 괴롭잖아.”
뺨을 두드리는 감각에 예준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목을 젖혀 바라보자 다정한 눈빛이 와닿았다. 어떤 위협도 품지 않은 반들반들한 동공에 시선을 빼앗기긴 쉬웠다. 그러나 남자가 자신을 가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견디기가 녹록지 않았다. 제게 파고들기 위해, 첨예하게 관심을 기울이는 상대는 처음이기에.
“봐, 또.”
뒤늦게 숨을 내쉰 예준은 차라리 남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두 귀가 너무나도 뜨겁게 달아올라 더는 남자를 마주 볼 수 없었다.
*
태경은 창 너머로 희뿌연 서울의 전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빽빽하고 혼잡하게 세워진 건물들은 때때로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일이지만, 개개인의 이기가 집합한 모습은 조화롭지 않았다. 그는 담배가 당긴다고 생각하며 부산스레 정리 중인 회의실로 고개를 틀었다.
명성건설의 고층 회의실이었다. 관계자들이 장내를 빠져나가고, 맨 마지막으로 일어선 선영이 바쁘게 서류를 정리했다. 전화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한 그녀는 태경과 눈을 맞춘 뒤 아직 자리를 지키고 앉은 이석준 회장을 흘끗거렸다.
선영마저 떠나자 회의실 안은 고요해졌다. 공적인 자리에선 하기 힘든 질문이 남아 있었다. 갑갑함에 셔츠 단추를 하나 푼 태경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회의실 상석으로 다가가 제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그렇게 자리 뜨고는 전화 한 통이 없더구나.”
이석준 회장이 혀를 끌끌 찼다. 룸을 박차고 나간 뒤로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태경은 그때의 일을 입 밖으로 꺼내기보다 대강 둘러대었다.
“아시다시피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바빠요.”
이 회장의 낯선 모습에 불쾌감을 느꼈다 한들 지적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본성을 숨기거나 드러내므로, 사내의 행동에는 분명 함의가 있을 터였다. 태경은 건축주가 은연중에 한 말을 잊지 않았다. 동전의 양면이라. 이 회장과 명성건설에도 이면이란 게 있다면 자신 또한 그에 관해 알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버지.”
그를 부르며 수치심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태경은 불편한 목을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여쭤볼 게 있습니다.”
“무엇을?”
“선영이한테 맡기신 갤러리 건이요. 시공사가 좀 의외던데요. 두화건설이요.”
“그렇지 않아도 왜 말이 없는가 했다. 명성도 아니고 LK와 협력한 시공사도 아니니 뒷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지.”
회사 차원에서 공수한 자료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 회장이 직접 소개한 회사라면 그의 입으로 듣는 것이 가장 많은 정보를 획득할 방법이었다.
“아버지가 선택하신 곳이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말 그대로 의외라서요. 저희 쪽에서도 알아보긴 했는데 딱히 이렇다 할 성과가 없던데요. 명성과의 공통점이라고 해 봐야 시작한 지역이 겹친다는 정도고.”
“네 말이 맞아. 이름난 곳도 아니고, 맡은 일이라고 해 봐야 업계에선 구멍가게 수준이지.”
준비된 후계자로서 명성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다고 여겼던 태경이지만, 믿음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그는 차분히 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언젠가 명성을 이끌어야 할 때가 왔을 때, 곤란을 피하려면 예민하게 신경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십수 년 전부터 실력 탄탄히 다진 내실 있는 회사다. 우두머리가 공사판에서 구르기부터 시작한 진짜배기야. 그때야 보잘것없는 일용직이었다지만, 지금은 건설사 사장으로 앉아서 아랫사람 부리는 형편이지.”
이석준 회장의 입매가 휘어졌다. 과거를 되짚듯 두 눈동자는 위쪽을 향했다. 원목 책상을 툭툭 두드리는 손끝에 여유가 묻어 있었다.
“일로는 그렇고.”
태경이 셔츠 깃을 바로잡으며 물었다.
“사적으로는요?”
과거, 주먹깨나 썼던 이석준 회장으로서는 연을 맺은 이들만 해도 수백, 수천 명에 달했다. 그중에는 대의를 위해 내친 이들도 있었고 선도를 위해 제 살 깎아 가며 불러들인 이들도 있었다. 업계에서 정평 난 명성건설이라 할지라도 과거에는 많은 추문이 따랐다. 주먹 쓰던 놈이 엘리트 행세한다는 말이나, 그래 봤자 무고한 사람 피 빨아 세운 회사 아니냐는 말이 지금도 이석준 회장의 꼬리표로 붙어 다녔다.
“김 사장, 믿을 만한 사람이다. 나 때문에 칼도 대신 맞아 줬을 만큼 충직한 놈이고. 고생했으니 자격에 맞는 일감 좀 주려고 그런다. 떼돈 버는 공사는 아니라지만 이참에 선배 덕 좀 봐야지.”
사내들 세계에 몸담았던 이 회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리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결국 과거의 인연으로 두화건설을 선택했다는 말이었다.
“내가 선택한 놈들이 언제 일 허투루 하는 거 봤어?”
“그렇게까지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해합니다.”
LK가 아닌 명성의 방식이었다. 이석준 회장의 그러한 정신은 태경이 명성건설에 합류하는 대신 LK를 설립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태경은 일에 있어서만큼은 원칙과 객관성을 우선시하는 편이었다. 그에게는 누군가를 선도할 만한 대단한 신념이 없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건축 그 자체를 사랑하고 설계에 집중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래서 재능에 합리를 더해 이상적인 집단을 만들었다. LK의 건축가들 모두가 정교하게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동력을 이어 나갔다. 선영처럼 실험적인 건축물만 파고드는 예술가와 태경처럼 실용적이고 묵직한 건축물을 담당하는 인재가 공존했다. 재능보단 사람이 먼저인 명성과는 결이 다른 셈이었다.
“그래도 검토는 해야 하니 실무자 통해서 자료는 보내 주십시오. 검토한 후에 미팅 진행할 수 있도록요.”
“그건 걱정하지 마라. 조만간 자리 마련하마.”
호탕하게 말한 이석준 회장이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멎자 공기가 가라앉고 정적이 흘렀다.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태경은 업무 이야기보다 이제 시작될 이야기에 더 뻣뻣한 긴장을 느꼈다.
“N 그룹 여식이랑 맞선 자리 마련해 놨다. 네 녀석이 하도 선만 보고 일을 그르쳐서 더 찌를 규수도 없다는 거, 내 사정사정해서 부탁한 자리야.”
선이라면 귀찮은 일이나 업무의 연장쯤으로 여겼던 때도 있었다. 딱히 감정을 소모하지 않았기에 이 회장의 강요에도 순순히 따랐다. 결혼이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니 적당히 비위만 맞추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었다. 말간 눈으로 체념을 반복할 아이의 두 눈이 그려졌다. 싫은 티는 내어도 다른 사람과 만나지 말란 말은 끝내 뱉지 못할 게 분명했다.
“손 귀한 집안이다. 너한테 그 정도 생각은 있을 줄 알았는데.”
태경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또 한 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반항심을 억누르려 애썼다. 무고한 오메가와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 회장이 안다면 경을 칠 것이다. 그는 부러 가볍게 말했다.
“다산하려면 오메가를 만나야죠, 아버지.”
“어림없는 소리.”
“속궁합도 그쪽이 훨씬 좋아요.”
하나뿐인 아들이 오메가와의 관계를 두둔하고 나섰기에 이 회장의 눈매가 싸늘히 가라앉았다.
“농담이 지나쳐.”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무심하게 대답한 태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이 회장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사내가 턱에 잔뜩 힘을 주자 오메가의 목을 틀어쥐던 때가 겹쳐 보였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견고한 권력을 손에 쥔 우성 알파였다. 군림하는 데 평생을 쏟아부었으니, 진창을 구르는 이들이 눈에 보일 리 없었다.
존경해 마지않던 아비의 다른 일면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이제껏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난관이었다. 마른 입술을 축인 태경이 꽁꽁 언 공기를 녹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조 비서님 통해서 시간, 장소 보내 주세요. 아버지 민망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친근하게 어깨를 두드리자 이 회장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태경은 다시금 옷깃을 정리한 뒤 빠르게 장내를 빠져나갔다.
곧장 차로 향하던 중,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태경은 차에 오르며 경호원의 전화를 받았다. 무의식적으로 주차장 주변을 살피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알아봤어?”
―네. 보고드리겠습니다.
하루 일정이 빡빡한데도 태경은 차의 시동을 걸지 않았다. 그는 으슥한 주차장 구석을 응시하며 경호원의 말을 기다렸다.
―김재우 씨 말대로라면 빚은 대략 17억 정도고, 부동산 사기 때문에 사채를 썼다가 이자가 불어 현 금액이 됐답니다.
“사채업자 쪽은?”
―이 사람들, 일하는 방식이 꽤 구식입니다. 제 선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부가 터무니없는 걸로 봐서는 아마 이중장부를 쓰는 것 같은데 그것도 수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대면하는 것도 꺼리는 데다가 소재도 불분명해서, 정확한 내용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김재우는 입을 안 열고?”
―네. 말만 나와도 벌벌 떨던데요. 괜히 찔렀다가 불똥 튀면 어쩌냐는 말만 반복하고요. 김재우 씨 태도만 보면 말이 사채업이지, 사업자 등록도 안 된 조폭들이 운영하는 곳 같았습니다.
노름방을 전전했던 처지이니 그런 이들과 엮였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선에서만 해도, 하마터면 하나뿐인 아들을 지역 조폭들 손에 넘길 뻔하지 않았던가.
지하 세계에서 권력을 잡은 이들 중에는 열성 알파의 비중이 월등히 컸다. 태경은 예준이 말했던 형님들이 실제로 조직 폭력배일 수 있다는 사실에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미 룸살롱에서 예준을 마주친 전적이 있기에 몰랐던 바는 아니었다. 대걸레를 손에 쥔 모습만 보면 접대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어쨌든, 열성 알파들에게도 예준에게도 발정기는 찾아왔을 터였다. 성격상, 예준은 새로운 사람을 찾기보다 주변에서 성욕을 풀 대상을 골랐을 확률이 높았다.
“룸살롱부터 파 보는 게 좋겠어.”
―지배인은 입을 안 엽니다. 김예준 씨도 알긴 알지만 직접 고용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고요.
이 회장과 연이 닿아 있는 룸살롱이지만 경호원의 주인이 태경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메가와의 염문과 별개로, 태경이 이 회장의 눈을 피해 사람을 부린다는 사실을 들켜서 좋을 것은 없었다.
이 회장이 노골적으로 명성의 치부를 드러내기 시작한 시점과 그가 혐오하는 오메가에게 마음을 빼앗긴 시점이 절묘하게 맞물렸다. 이대로 예준과 만난다면 이 회장의 귀에 말이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만, 누군가 룸살롱을 들쑤신다는 소문에서 비롯된 소식은 아니어야만 했다.
대단한 권력가와 재력가들이 드나드는 곳이므로 더욱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당분간은 얌전히 있다가 명성 쪽도 같이 파 봐. 믿을 만한 사람 있으면 여럿이서 움직여도 좋고. 그 아이와 관련된 사채업자가 룸살롱을 쥐고 있는 조폭이라면 명성과도 분명 오간 게 있을 테니까. 두화건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대학 병원 건축주 말을 아직 신경 쓰시는 겁니까.
“명성에 발 들이자마자 뒤통수 맞긴 싫거든.”
퍽 도련님다운 말에 경호원은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 정적을 태경이 먼저 부수었다.
“…17억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정리하기 어렵지 않은 액수지만 예준의 반응을 떠올리면 골치가 아파지는 것이다. 이제껏 겪어 본 대로라면 아이의 의지와 상관없는 갑작스러운 문제 해결은 오히려 혼란과 무력감만 안겨 줄 게 분명했다.
제 비관적인 처지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맹렬히 발톱을 세우는 예준이었다. 태경은 예준의 문제에도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골몰한 얼굴로 명령했다.
“그 아이 빚은 함부로 건드리지 마. 대신 목줄 쥐고 있는 놈이 누군지 확실히 찾아.”
*
치문이 신경을 써 준 덕분에 예준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일할 수 있었다. 형질을 두고 여러 가지 강박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데, 마침 새 현장의 팀장이 알파라면 치를 떠는 부류였다. 현장 사람 대부분이 베타였고 오메가 또한 아주 드물었다. 누구도 제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성적 위협을 받을 일도 없었다.
“퉤!”
간혹 소문을 들은 젊은 베타들이 침을 뱉거나 욕을 지껄이고 지나가기는 했다. 오메가에게 억하심정이 있다기보다는 학습된 혐오일 가능성이 컸다.
“드럽게.”
예준은 운동화에 침이 묻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려니 하곤 이미 흙먼지투성이인 운동화를 툭툭 털었다. 곧바로 모래가 담긴 포대를 세 개나 어깨에 얹었다. 어찌나 무거운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발현 전이었다면 거뜬했을 무게이기에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이, 예준이! 하나 더!”
계단을 오르려는데 호방한 아저씨 하나가 포대를 하나 더 얹었다. 짓궂은 장난에 예준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고꾸라질 뻔했다. 손윗사람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실없이 웃고는 계단을 밟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가 무색하게 땀이 비 오듯 흘렀다. 7층까지는 가야 하는데 고작 3층에 이르러 포대를 내려놓아야만 했다. 예준은 건설 현장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부류였다. 근육이 퇴화하여 베타인 성인 남성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근력을 지닌 탓이었다.
오메가는 오로지 성 접대에나 요긴하게 쓰인다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죽도록 싫은 오메가들만이 자신처럼 험한 일을 자처했다. 예준은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아 내고 다시 포대를 들어 올렸다. 무게가 가해지자 선수 시절 늘 다치곤 했던 무릎이 우지끈했다.
무시하고 반 계단쯤 올랐을 때, 바쁘게 내려오던 누군가와 정통으로 부딪쳤다.
“아!”
몸이 훅 뒤로 밀리더니 눈앞이 핑 돌았다. 마감되지 않은 벽에 등을 세게 부딪쳤고 차디찬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상대가 메고 있던 벽돌이 쏟아져 발길질처럼 내리꽂혔다. 늑골이 아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에 억 소리를 내기도 전에, 쇠 파이프로 두들겨 맞았던 그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학생, 괜찮아?”
낯선 인부였다. 예준은 몸에 쏟아진 벽돌을 치워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운 낯을 보고 그는 자신을 학생이라 불렀다. 대학교는 반도 채 다니지 못하고 자퇴한 형편이었는데도.
“으…. 괜찮아요….”
이 정도 통증이면 멍이야 들겠지만 대충 훑어보아도 피가 난 곳은 없었다. 거친 벽돌 표면에 옷이 찢어지고 구질구질한 행색이 되긴 했어도 이만하면 다행이었다.
상대는 멀쩡해 보였다. 벽돌을 쏟긴 했지만 난간을 짚어 넘어지진 않은 모양이다. 포대를 나르던 다른 아저씨들은 작은 해프닝이라 여기고 제 갈 길 가 버리는 분위기였다.
“인부들 지나치는데 거슬려. 치우게 일어나요.”
예준은 손을 내미는 인부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다.
“윽….”
막상 몸을 일으키자 늑골보다 고질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던 무릎에서 더 큰 통증이 일었다. 선수 시절에도 흔히 겪었던 부상이기에 예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저… 죄송한데 팀장님 어디 계시는지 아세요?”
“컨테이너에 있을걸?”
고개를 끄덕인 예준은 벽돌을 주워 남자의 등에 올려놓았다. 족히 스무 개는 되기에 한참이 걸렸다.
“얼굴은 멀쩡한데…. 정말 괜찮은 거 맞지?”
“예. 옷은 어차피 버릴 거였고 피도 안 났어요.”
“그럼 다행이고.”
벽돌을 수습한 인부는 대강 눈만 맞춘 뒤 계단을 내려갔다. 예준은 포대 자루를 들려다가 삐걱 우는 무릎을 감지하곤 허탈하게 내려놓았다.
“큰일 났네.”
좌절하기보단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는 편이 더 현명했다. 예준은 일전에 국밥을 사 주었던 퉁퉁한 남자를 떠올렸다. 다른 인부들은 그를 박 씨라고 불렀다. 잠깐이었지만 아들처럼 챙겨 주었기에 곤란한 저를 외면하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박 씨를 찾아 나서려는데, 마침 그와 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절뚝거려? 진짜 안 다친 거 맞아?”
팀장이 큰 소리를 냈다. 예준은 부어오르기 시작한 무릎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박 씨는 몸을 낮추고 선뜻 등을 내어 주었다.
“일단 업혀. 부업이라도 시키게.”
치문이 기껏 마련해 준 자린데 민폐만 끼친 꼴이 되었다. 무안한 얼굴로 박 씨에게 업힌 예준은 곧 코끝에 닿는 노동의 기척에 미간을 찌푸렸다. 진한 땀 냄새. 겨울이어도 후끈후끈한 몸. 햇볕에 그을려 갈색빛으로 변한 두툼한 목덜미.
불쾌한 게 아니었다. 때때로 살 부대끼며 건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정이 고팠다. 예준은 차라리 안도했다.
*
팀장이 주로 사용하는 컨테이너 청소를 맡았다. 다른 현장이었으면 바로 내쳐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으나, 치문의 말대로 팀장은 제법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인부들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아랑곳없이 할 만한 일을 내어 준 그는 곧 현장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박 씨는 가벼워도 너무 가벼운 것 아니냐며 타박만 주었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예준은 무릎에 파스를 붙인 뒤 움직였다. 얼마나 방치한 건지 책상 위 서류 더미에도 먼지가 쌓여 있었다.
절뚝거리며 먼지를 닦고 있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예준은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전화할까?]
태경이었다. 예준은 하루를 보내며 어떤 때를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자극을 주는 것도 없었고 닥친 일은 죄다 불행에 가까웠기에, 별일 없는 삶이 최고의 미덕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태경의 연락은 사소하지만 위대한 변화였다. 예준은 은연중에 그의 연락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저 일하는 중이에요 저녁에 해도 돼요?]
묻자 태경은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끝나면 전화해요. 기다릴게.]
이제 겨우 해가 낮아지기 시작했으니 마치려면 몇 시간이나 더 걸릴 터였다. 예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말했던 모레는 이미 지났다. 그럼 언제 볼 수 있는 걸까. 궁금하지만 곧이곧대로 묻기는 부끄러웠다. 주제넘는 짓 같기도 하고, 그런 걸 묻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서였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예준은 다시 걸레질했다. 팀장이 내내 켜 놓은 난로 덕분에 넘어질 때의 여파로 점점 심해지던 근육통도 어느 정도 견딜 만했다.
“예준아. 밥 먹었어? 사줄까?”
작업이 마무리되자 박 씨 무리가 컨테이너로 왔다. 어느새 해가 져 있었고, 예준의 목표대로 내부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인부들이 와, 하고 감탄을 내뱉자 그래도 일당 값은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저…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왜? 애인 만나?”
“…예?”
당연한 듯 던지는 질문에 예준은 당황하고 말았다. 예준의 두 눈이 떨리자 박 씨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
“그냥 물은 건데 정곡을 찔렀나 보네. 부끄러워하는 거 보니.”
같이 국밥을 먹었던 서너 명의 아저씨들이 분위기를 맞추듯 덩달아 웃었다. 예준은 괜히 실수한 것 같아 애꿎은 뺨만 긁었다.
“무릎은?”
“파스 붙였더니 좀 나아요.”
“내일도 나올 거면 팀장한테 짬짜미 잘해야 할 거야. 아무리 그래도 현장 나와서 노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되지. 보는 눈들이 많으니까.”
“네. 신경 쓸게요.”
눈을 가늘게 뜬 박 씨는 이내 무리를 이끌고 컨테이너를 나섰다. 왁자지껄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다, 문득 예준은 현장의 실세가 온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의아해졌다. 이제껏 거쳤던 현장은 모두 전쟁터 한복판과 다름없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의 불이 모두 꺼졌다. 예준은 팀장이 돌아오기 전에 옷을 갈아입었다. 입고 왔던 옷은 여기저기 찢기긴 했지만 살이 드러나는 곳은 없었다. 그거면 다행이었다.
팀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나서자 여덟 시가 막 지나는 시간이었다. 발을 딛을 때마다 아픈 무릎이 심상치 않았다. 절뚝이며 보도블록 위를 걷던 예준은 마침 정류장에 다다른 버스를 타려다 그만두었다. 걷기 힘든 몸이지만 왠지 걷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잠시 뜸을 들이다 몇 없는 연락처에서 ‘이태경 대표님’을 찾았다. 태경은 수화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저예요.”
―일 끝났어요?
“네.”
―밥은?
“대충 사 먹으려고요.”
별다른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예준은 찬 바람에 식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대로변의 조잡한 네온사인을 올려다보았다. 정적만으로도 뭔가 불만인 남자의 심기를 읽을 수 있었다.
―뭐 시켜 줄까?
태경이 물었다. 배달 일이 직업이나 다름없는 예준이지만 정작 배달 음식을 시키는 때는 잘 없었다. 혼자 시키기엔 음식값도 배달비도 부담스러운 경우가 많은 탓이었다. 치문이 저렴한 짜장면을 시켜 준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다. 그것도 맛있기는 했으나, 저렴하기로 따지자면 편의점 음식만 한 게 없었다.
선수 시절엔 체급을 유지하느라 강제로 다이어트를 했었다. 이러나저러나 배부르게 먹고 살진 못할 인생인가 했다.
“괜찮아요. 대표님은 드셨어요?”
―직원들 데리고 간단히.
“아직 회사예요?”
―네.
고작 일용직인 저도 이리 바쁜데 회사의 대표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도 당연했다. 잘 알기에 그가 만나자고 말하지 않는 것이 야속하지는 않았다. 예준은 무심코 그 자리에 멈춰 심호흡했다. 코앞에 하얀 입김이 퍼졌다.
―하아….
동시에 남자의 입술에서도 한숨이 샜다.
―그냥 보러 갈까? 보고 싶은데.
예준의 눈이 커졌다. 그가 꼭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쉽사리 화답할 수는 없었다. 예준은 손쓸 수 없이 퉁퉁 부은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변명거리가 마땅치 않았기에 그를 만나는 건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신데 뭐 하러요.”
―뭐든 먹이고 싶어. 먹는 거 내 눈으로 보고 싶고.
“얼마 안 있다 가셔야 하잖아요.”
―그건 별로예요?
답을 않자 그 역시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몇 번이나 그를 부르는 음성이 흘러들었다. 뭐라 답한 태경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예준은 다시 걷기 시작하며 그의 정갈한 사무실을 떠올렸다.
―섹스는 어때요.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예준은 괜히 달아오르는 두 뺨에 손등을 댔다. 통화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새 골목 입구에 다다랐다. 차마 입을 떼지 못하자 핸드폰 너머의 남자가 나지막이 웃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기를 잠재웠다.
―하고 싶어.
산뜻하게 들려오는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저도요.”
쾌락에 지배당한 사람처럼 금세 격정을 떠올리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체온을 나눌 때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만날 수 없는 지금 같은 때에는 그의 아래에서 미치도록 범해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그 안에서 나누었던 격정 또한 가까워졌다. 그가 솔직한 욕구를 알렸다는 사실만으로 예준은 조금 흥분했다. 예준은 가까스로 숨을 내뱉었다.
―만나면 그것부터 해.
“좋아요.”
이번에 태경에게서 전해진 정적은 곤란함을 품고 있었다. 저처럼 달뜬 몸을 어쩌지 못해 곤란해하고 있을 그가 그려졌다. 예준은 미지근하게 웃곤 길 모서리에 있는 전봇대를 돌아 집으로 향했다.
―밥 대충 때우지 말고 맛있는 거 먹어요. 어디서든 내 이름으로 달아 놔도 돼. 진심이야.
“점심 너무 많이 먹어서 간단하게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통화가 마무리된다면 이번에도 다시 만날 날에 관해서는 듣지 못한 셈이 된다. 예준은 부쩍 느려진 걸음으로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언제 만날 수 있느냐고 용기 내 물으려는데, 남자가 먼저 절묘한 답을 내놓았다.
―모레. 데리러 갈게요.
예준은 반지하 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탁, 전등이 켜지며 내부가 밝아졌다.
“어디로요?”
―괜찮으면 예준 씨 집으로요.
딱히 어디든 관계없었다. 기다렸던 화제가 닥치자 예준은 큰 고민 없이 말했다.
“제가 대표님 집으로 가도 돼요.”
막상 말을 내뱉자 민망했다. 더 안달을 내는 사람처럼 보였을까 봐. 찬 바람에 상기된 얼굴 위로 연거푸 열감이 더해졌다. 예준은 잠금장치 버튼에 손을 올려놓으며 괜히 눈을 질끈 감았다.
상대가 답이 없는 사이, 등 뒤로 누군가의 기척이 드리웠다. 예준은 천천히 뒤돌아섰다. 주황빛 전등 아래 익숙한 교복 소매가 가장 먼저 보였다.
윤도하.
어렵지 않게 이름을 떠올렸으나, 예준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집에서만 놀면 재미없잖아.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말끝에 스미는 남자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예준은 동시에 제 앞에 선 고등학생을 올려다보았다. 태경처럼 장신인데다 섬세한 외모를 지녔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껄렁껄렁하고 못돼 보였다.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병원에서 도망가듯 태경의 집으로 간 데다가 전화까지 차단했으니 손바닥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녀석은 날 선 눈빛으로 시선을 맞추기만 했다.
“그래도 물어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란 듯 웃으며 답했다. 예준은 도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통화를 이어 나갔다.
―너 그렇게 깍듯하게 굴 때마다 귀여워 죽는 거 알지.
“…예?”
―거리 두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 오히려 역효과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여태 저에게 그런 걸 묻는 사람이 없었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대부분의 알파는 오메가의 취향이나 의견 따위엔 관심도 없을뿐더러 애당초 그것을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끄는 만남 같은 건 예준에게 있어 먼 나라 이야기였다.
“기분 나쁘셨어요?”
―말했잖아, 귀엽다고. 그래도 가능하면 섹스할 때처럼 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예준은 버티고 선 도하를 노려보며 되물었다.
“제가 섹스할 때 어떤데요?”
―더 해 달라고 조르고, 매달리고,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지.
“…그 정돈 아니에요.”
사적인 대화였고 사위가 고요했다. 핸드폰 속 상대의 말도, 자신의 말도 윤도하 귀에 정확히 들릴 터였다. 복수심일까, 반항심일까. 예준은 몸 사리고 싶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모욕적이길 바랐다. 저 아이에게 실컷 당했을 때의 절반만큼이라도.
한동안 웃던 태경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가 저번 잠자리에서 자신이 내뱉은 말을 답습하듯 말했다.
―만나면 자지 빨아 줄게.
다분히 의도적인 음담에 예준은 침만 꼴깍 삼켰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넌 내 목구멍에 박아 줘.
야릇한 목소리. 예준은 하마터면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갈 뻔했다. 전해지는 그의 숨소리가 적나라했기에, 그와의 경험으로 목구멍에 박는 감각이 얼마나 짜릿한지 이미 알고 있기에. 다만, 대화를 엿듣는 이가 있어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좋아요.”
굳었던 윤도하의 입가가 휘어졌다. 좋은 구경이라는 듯 웃는 얼굴에는 안타깝게도 모욕을 느낀 기색이 없었다. 녀석의 등장으로 태경과의 통화가 변질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준은 태경과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뒤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저 이제 쉬려고요.”
―아침에 전화할게.
“…그럼 먼저 끊을게요.”
곧 전화가 끊겼다. 예준은 핸드폰을 쥔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잠시간 정적이 맴돌았다. 전등이 꺼졌다가 다시 빛을 냈다. 다시 부르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윤도하.”
“이제야 부르네. 씨발, 난 못 본 줄 알았지.”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성큼 다가왔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지척에서 멈추곤 덧붙였다.
“이태경 집에서 뒹구니까 좋든? 팔자가 폈을 텐데 전화는 왜 차단하고 지랄이야? 내가 이태경한테 일러바치면 어쩌려고.”
그런 협박을 하기에는 윤도하가 저지른 죄가 더 컸다. 아니, 애초에 녀석에게 추행당한 것이 죄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예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빌라 입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스쿠터, 너랑 네 친구들이 한 짓인 거 알아. 나야말로 경찰이든 학교에든 알릴 수 있었던 거 가까스로 참은 거야.”
“왜.”
“이렇게 찾아올 거 뻔하니까. 만나면 수습할 기회 주려고.”
사실은, 남자에게 도움을 구하기가 껄끄럽고 또 한 번 구질구질하게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 현장에 별 도움은 못 되었지만, 배달이 아닌 다른 일로 돈을 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버티다 보면 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 이태경한테 일러바치지 그래?”
윤도하는 오히려 역정을 냈다. 노골적으로 예준의 목덜미 부근을 흘겨본 녀석이 읊조렸다.
“대화가 생각보다 저질이던데.”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단호하게 말하자 단숨에 멱살을 움켜쥔 윤도하가 코끝을 맞붙였다. 예준은 억센 힘을 이겨 내려다가 무릎 통증 때문에 신음을 흘렸다. 녀석은 약점이 무릎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맞붙은 무릎을 튕겨 의도적으로 고통을 유발했다.
휘청이는 모습을 확인한 윤도하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목을 틀어쥐었다. 예준은 다가오는 입술을 간신히 피했다. 무심코 맞닿은 녀석의 뺨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온도에 놀란 예준이 윤도하를 밀어내며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너.”
“몰라, 씨발.”
대치하듯 눈을 맞추었다. 윤도하는 귀며 코끝이며 온통 빨간 데다가 손아귀마저 잔뜩 굳어 있었다. 해가 지고부터는 바깥에서 십 분도 채 버티기 힘든 추운 날씨였다. 대체 언제부터 저를 기다린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른 행세를 할 때는 소름 끼치게 강압적이면서, 들이박기부터 할 땐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이 날씨에 대체 어떤 어른이 언제 올지 모를 상대를 기다리며 맹추위를 견딘단 말인가. 예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녀석을 떨쳐 냈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선 녀석이 언 손을 비비고 섰다.
“누가 남 괴롭히려고 자기 자신까지 괴롭혀? 너 오늘 몇 도인지 알아? 큰일 날 수도 있어.”
“그럼 일찍 기어들어 오지 그랬냐.”
다시 다가오려는 녀석을 저지하며 예준은 치솟는 열감을 감지했다. 상대방의 상황이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패악에 이골이 나면서도, 정반대의 미련함에는 속이 끓는 것이다.
“도대체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 너 베타잖아. 대체 왜 볼 거 하나 없는 오메가한테 이렇게 끈질기게 구는데? 남들이 보면 비웃어. 네 친구들도 비웃고 있을지 몰라.”
“걔네가 뭔 상관인데.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네가 백번 이래 봐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 타격도 없어. 그 사람 골탕 먹이려는 게 목표라면 사람 잘못 골랐어. 적어도 나는 아니야.”
“어떻게 알아? 씨발, 다른 오메가들 건드릴 땐 눈 하나 깜짝 않던 새끼가 너 건드리니까 발작을 하는데!”
예준은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태경과 관계했던 오메가들에 관해서는 알고 싶지도 않거니와, 그와는 한시적인 관계밖에 맺을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게 뭐 대단한 것처럼 보여?”
“뭐?”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발작이라고 말하는 거 보니 그 사람이 여태 너한테 너무 점잖게 굴었나 보네.”
상식적일 필요가 없는 우성 알파임에도 그는 늘 상식선상에 있었다. 적어도 예준이 느끼기에 윤도하의 태도는 유난이었다. 태경이 어떤 반응을 보였다면 그건 자신의 존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단순히 그의 심기가 불편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알파 성질 긁지 마.”
예준은 아픈 무릎을 굽혔다 펴며 움찔거렸다. 씨근덕대던 녀석이 불쑥 어깨를 붙잡았다.
“꼴이 그게 뭐냐? 어디서 또 처맞았어? 다리는 왜 저는데, 병신처럼.”
현장에서 막노동하다 다쳤다는 말을 녀석에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추위 속에 내내 서 있었음에도 무릎의 열감은 식지 않았다. 빨리 찜질이라도 하지 않으면 더 크게 덧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경 꺼. 나 백날 찔러 봐야 아무 소득 없을 테니까 스쿠터나 해결해. 해결 안 하면 경찰서 찾아갈 거야. 증거 다 있으니까 빌어먹을 스쿠터나 변상하고, 이거 놔.”
어깨에 닿은 손을 떨구어 내자 녀석이 잇새를 꽉 깨물었다. 추위와 성에 못 이겨 떨리는 녀석의 몸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이태경한테 가서 바로 이를 줄 알았더니 입 꾹 닫은 이유가 뭔데. 들어나 보자.”
“너 봐주려고 그랬을까 봐.”
“그럴 수도 있지. 베타라면 환장하는 오메가들 많잖아.”
“오메가가 베타한테 환장한다고?”
페로몬의 영향을 받지 않는 관계만이 진실하다고 믿는 오메가들도 더러 있긴 했다. 그러나 최음제나 다름없는 알파의 페로몬을 한번 맛보고 나면 그 야릇함에 중독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수월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몸이 열리는 것은 물론, 쾌감 또한 베타와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이태경이 너한테 끌리는 게 페로몬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좀 비참하지 않냐?”
자격지심을 이런 식으로 해소할 요량인가 보다. 머리로는 알지만 예준의 가슴속은 동요로 울렁였다. 안다. 그런 건 녀석의 말대로 비참한 일이었고, 태경이 내비친 감정에 페로몬이라는 불순물이 어느 정도 섞였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별거 아니라고 말했잖아.”
무표정을 가장한 예준이 윤도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절뚝이며 계단을 올라 녀석을 빌라 밖으로 밀어냈다.
“알면 좀 가. 그러다 얼어 죽겠다.”
열 오른 눈빛이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추워서 덜덜 떨기나 하는 주제에 어른의 모습을 가장하려 드는 녀석에게서 예준은 얼른 시선을 떼어 냈다. 무의식적으로 목덜미를 감춘 그가 뒤돌아섰다.
윤도하는 예준이 반지하로 들어서 자취를 감출 때까지도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
비좁은 골목에 빼곡히 차가 들어차 있었다. 태경의 SUV가 불법 주차된 차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내내 오르막인 골목을 따라 안쪽 깊숙이 들어가면 이내 막다른 골목을 연상시키는 주택가가 나왔다. 그 어디쯤 예준의 반지하 방이 있었다.
태경은 예준에게 전화를 걸기 전 차에서 내렸다. 도로와 맞붙은 작은 창 안에서 형광등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라 안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을 예준이 그려졌다.
태경은 낮은 빌라 현관으로 들어서 계단을 밟았다.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릴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자신에게만 주어진 특권을 기꺼이 누리기로 했다.
[0119]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고리를 열었다. 얇은 목 폴라 티 위에 셔츠를 겹쳐 입으려던 예준이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아, 깜짝 놀랐네….”
태경은 현관에 선 채 두 팔을 벌렸다. 눈짓으로 품을 가리키며 버티자 쭈뼛쭈뼛 다가온 예준이 느슨하게 허리를 안았다. 태경이 마른 등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요.”
대답은 없었으나 이내 떨어져 나간 예준의 목덜미가 붉어져 있었다. 몇 걸음 거리를 두고 선 예준은 다시 셔츠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결국 안으로 들어선 태경이 하얀 손을 그러쥔 채 단추를 채워 주었다. 그가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코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거 입으면 돼.”
검은색 폴라 티에 흰 셔츠, 극단적인 색감을 상쇄시키는 회색 코트였다. 고분고분 코트를 입긴 했으나 예준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상기된 얼굴로 평소보다 더 쭈뼛거리는 모양새가 유독 뻣뻣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디 아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태경이 물었다. 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별거 아니에요.”
태경은 옷차림을 점검한 뒤 슬금슬금 다가오는 예준을 부드럽게 당겨 안았다. 천천히 이마와 코끝을 맞대자 곧 보들보들한 입술이 유순하게 벌어졌다. 성급히 밀어 넣는 혀도 부드럽게 받아 낸다. 키스 좀 했다고 금세 가빠지는 숨소리를 듣자 태경의 배 부근이 뻐근해졌다.
“피곤하진 않아요?”
“…괜찮아요.”
그가 예준을 번쩍 들어 안았다. 쪽쪽 요란한 소리를 내며 뽀뽀하자 웃는 둥 마는 둥 하던 예준이 입술 바깥으로 혀를 내었다. 할짝할짝, 핥는 감촉을 느낀 태경은 예준의 다리 사이에 성기 부근을 거세게 비볐다.
“끄응….”
난감해하는 얼굴과 앓는 소리 모두 마음을 동하게 했다. 태경은 부러 야릇하게 말했다.
“내 집으로 가서 자.”
“음….”
신음처럼 내뱉는 대답이 흡족했다. 그대로 불을 끈 태경이 잠금장치를 열었다. 예준을 동동 매단 채 집을 나선 그는 곧장 조수석으로 향했다. 차 안의 공기는 아직 식지 않았고 너른 내부에 예준을 밀어 넣기는 쉬웠다.
가볍게 술이나 한잔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안전띠를 매어 주려는 동안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과 마주하자 태경은 욕구가 들끓었다. 며칠 동거하기까지 했으면서 집 얘기만 꺼내면 맑아지는 낯빛이 귀여웠다. 조수석 가장자리를 짚은 태경이 물었다.
“카섹스 해 봤어?”
예준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릴 듯 말 듯한 질문이 되돌아왔다.
“대표님은요?”
이걸 솔직하게 말해야 해, 말아야 해. 난감했다. 태경은 잠자코 예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떨 것 같은데.”
가만히 고민하던 두 눈이 어느덧 오롯이 태경에게 닿았다. 금세 개운해지는 것을 보면 과거야 어떻든 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그 무심함이 싫어 태경은 굳이 상체를 기울였다. 너른 어깨부터 밀어 넣자 예준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조수석 의자를 뒤로 민 태경이 예준을 눕히며 안으로 들어섰다. SUV 차량이어도 장신을 구겨 넣기에는 턱없이 좁게 느껴지는 내부였다. 가까이 맞닿은 가슴이 다쳤던 늑골을 압박하지 않도록 자세를 바로 한 뒤 오금부터 붙잡아 당겼다. 제법 강하게.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예준의 잇새에서 높은 신음이 샜다.
“아…!”
흥분해서가 아니었다. 태경이 뻣뻣한 무릎을 그러쥐며 물었다.
“다쳤어?”
이미 몇 번이고 닿은 손끝이 몸의 굴곡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평소와 달랐고 뒤채던 예준은 부정하지 않았다.
“네. 어쩌다 좀… 넘어졌어요.”
“어쩌다가 넘어졌는데.”
“계단에서…. 선수 때부터 계속 말썽이었던 곳이라 그래요. 파스 붙이고 며칠 지나면 괜찮아져요.”
태경은 두 팔 안에 예준을 가둔 채로 멈추었다. 통증을 유발하는 섹스가 취향이긴 하지만, 부상당했던 곳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가 벌어진 예준의 입술을 더듬으며 말했다.
“카섹스는 생각보다 요령이 좀 필요하거든.”
“…예.”
“그 상태론 어림없어.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반사적으로 셔츠 깃을 당기는 행동에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겨우 입만 맞춘 채 물러난 태경이 흐트러진 예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병원부터 가요. 데이트는 그다음에.”
“정말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간단하게 처치라도 하고 집에 가요.”
설득하자 예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조수석에서 빠져나온 태경이 예준의 안전띠를 매어 준 뒤 물러났다. 꽤 도톰한 바지를 입었음에도 열감이 느껴졌을 정도라면 상태가 좋지 않을 게 분명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예준은 말이 없었다. 폐 끼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이란 걸 잘 알기에, 태경은 이따금 달뜬 뺨만 어루만져 주었다.
심야의 응급실은 예상보다 한산했다. 예준을 부축하려다가 번쩍 안아 든 태경이 곧바로 빈 침대를 향해 걸었다. 시트 위에 가뿐히 내려놓자 피로에 찌든 당직 의사가 다가왔다.
“부기가 상당한데요. 많이 아프셨겠어요.”
형광등 아래에서 보니 예상보다 상태가 더 심각했다. 예쁘게 뻗은 다리 가운데가 퉁퉁 부어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예준은 병원에 다다르자 그제야 아픈 기색을 내비쳤다. 이를 꽉 물고는 의사보다는 태경의 눈치를 보았다.
“간단하게 엑스레이 찍어 보고 처치 들어갈게요.”
응급실 내의 이목이 쏠렸으나 태경은 개의치 않았다. 우성 알파인 자신을 의식하는 사람도, 말끔하게 차려입은 예준을 알아보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저들끼리 속삭이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으나, 그런 관심에는 태경도 예준도 이미 익숙한 형편이었다.
“많이 아파?”
태경이 커튼을 치며 물었다. 조심스레 무릎을 감싸 쥐자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즉시 저를 불렀더라면 이렇게까지 상태가 악화하진 않았을 터였다.
“폰은 뒀다 뭐 해
“네?”
“넘어졌을 때 바로 날 불렀어야지.”
“그런 일로요…?”
예준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천연덕스러움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으나 태경은 부러 티를 내지 않았다.
“엄살떨 줄도 알아야죠.”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요.”
“손쓸 수 없을 때 알게 되는 게 싫어. 항상 말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요. 그럴 때 써먹으라고 만나는 거니까.”
혼을 내려던 의도는 아니었는데 예준은 혼나는 아이처럼 얼굴을 붉혔다. 정곡을 찌르면 스스로 속을 더 갉아먹을 성미라는 것을 알기에 태경은 말을 더하는 대신 다정하게 물었다.
“안 추워? 검사받는 동안 따뜻한 거라도 사다 줄까?”
코트도 벗고 다리도 드러낸 데다가 응급실 중간 문이 계속 열렸다 닫히고 있었다. 태경은 예준의 배와 허벅지 위로 담요를 덮어 준 뒤 따듯한 차를 사 들고 돌아왔다. 손에 들려주자 마시기보다 먼저 손을 비비는 예준이었다.
“실례할게요.”
잠시 후, 의사가 커튼을 열었다. 뒤늦게 차를 홀짝이던 예준은 긴장한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김예준 선수 맞으시죠? 이전에도 무릎 부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네.”
“큰 문제는 아니고 충격으로 무릎에 물이 좀 찼어요. 물 빼고 항생제 드릴 테니까 당분간은 무리하지 마시고 쉬셔야 해요.”
쉬어야 한다는 말에 예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태경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의사를 보았다.
“날 잡아서 정밀 검사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검진받은 지 오래됐으면 한번 해 보시는 것도 좋죠. 운동선수들 무릎 부상은 평생 안고 가는 경우가 많아서 관리 잘해 주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태경은 종용하듯 예준을 보았다. 큼큼, 헛기침한 예준이 재차 물었다.
“무리하면 안 된다고요?”
“네. 적어도 일주일은 쉬세요. 찜질 잘 해 주시고요.”
이어 다가온 간호의 손에는 긴 주사기가 들려 있었다. 예준은 겁을 먹었다기보다 시무룩해 보였다.
“오늘 자고 가기로 했잖아. 간 김에 내 집에 있으면 되겠네.”
태경이 말했다. 의사와 간호사의 존재감을 지운 그는 부드럽게 예준의 뺨을 쓰다듬었다. 끈적한 눈빛이 닿자 예준은 소스라치며 남자를 밀어냈다.
“나중에 얘기해요, 그런 건.”
알파와 오메가. 남들이 보기엔 당연하게도 성행위를 떠올리게 하는 커플이었다. 두 형질이 붙어 있는 모습만 보아도 아래가 단단해진다는 베타들도 있는 형편이었다. 자연히 의사와 간호사의 눈에도 호기심이 비쳤다. 히터 바람으로 훈훈한 병원 공기가 더욱 달구어지자 예준만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태경은 조용히 재킷을 벗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그가 부산스레 처치를 시작하는 의사와 간호사를 지켜보았다. 슬쩍 눈치를 살핀 의사가 말했다.
“아프실 수도 있어요. 금방 끝나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네.”
태경이 손을 잡아 주었음에도 예준은 그다지 지지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예준이 태경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많이 해 봤어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하는 말간 얼굴이 귀여웠다. 태경은 어딘가 쓰린 속을 무시하며 예준의 뒤통수를 쓰다듬기만 했다.
처치를 끝낸 의사와 간호사가 자리를 떴다. 커튼을 틈 없이 닫은 태경이 침대에 걸터앉아 예준을 보았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프단 말을 많이 해서 못 참을 줄 알았어.”
“제가요?”
“내 아래에 있을 때 말이에요.”
예준은 아연한 얼굴로 답했다.
“그거랑 이거랑 어떻게 같아요.”
“다른가?”
“달라요. 그것도 엄청 많이.”
예준이 반쯤 남긴 차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진지하게 한 말도 아니었고 예준 또한 진지하게 듣는 기색은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인 예준이 무거운 입을 뗐다.
“스무 살 때 국내 경기하다가 처음 다쳤어요. 준준결승이었는데 져서 아까워 죽겠더라고요….”
자기 얘긴 잘 하지 않는 예준이기에 순간 태경은 가슴이 뛰었다. 평정을 가장한 그는 번잡한 응급실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오롯이 예준에게 집중했다. 도톰한 입술이 전에 없이 바쁘게 열렸다.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선수기는 한데, 걔가 반칙 써서 다친 거예요. 페널티는 제대로 받았으니까 억울할 건 없다지만 억울하던데요. 걔만 아니었으면 금메달도 딸 만했는데.”
태경은 올림픽 금메달마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했던 예준을 떠올렸다.
‘별거 없어요. 그냥 열심히 해서 금메달 땄던 게 다고…. 어차피 그것도 다 옛날 일이고요.’
예준의 말을 곧이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쯤은 이미 파악했다. 괜찮다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 괜찮다고 믿으면 안 되었다. 연한 속살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딱딱한 껍질을 몇 번이나 깨는 과정이 필요한 상대였다.
“그땐 진짜, 분한 것도 많고 슬픈 것도 많고 좋은 것도 많았는데. 지금은 세상 굴러가는 걸 대충은 아니까 다 그저 그래요. 이번에 다친 것도 시간 흐르면 괜찮아질 줄 알았어요.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예준이 자주 말하는 단어가 ‘네’나 ‘예’라는 것을 고려하면 퍽 긴 속 얘기였다. 조잘조잘 떠드는 목소리 하나에도 태경은 속에서 무언가 충만하게 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변화를 읽어 내는 순간은 늘 짜릿했다. 변화의 이유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 선수 어떻게 해 줄까.”
“…이름 기억 안 난다니까요.”
“네 경기 이력 찾아보는 방법도 있어.”
“정말 그렇게까지 하실 건 아니죠?”
태경이 웃었다.
“네가 원한다면 무슨 짓이든 하지.”
“안 원해요. 그러니까 그 이야긴 그만해요.”
멋쩍게 정적이 감도는 차에 태경은 차분히 예준의 입술을 찾았다. 알맞은 각도로 젖혀지는 고개를 따라 입술을 더 깊이 파묻었다. 소음을 내지 않기 위해 흡입은 만류한 채 살덩이를 비볐다. 코와 턱까지 스스럼없이 내어 주던 예준의 두 눈이 스르륵 풀렸다. 입을 벌리고 혀를 찾는 타이밍이 제법이었다.
예준이 더 능숙해질 때마다 태경의 기쁨은 배가 되었다. 태경은 내내 페로몬을 풀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항생제가 반쯤 남았을 때, 태경은 간단히 업무 통화를 하고 돌아왔다. 그는 공기가 답답하다는 예준을 데리고 응급실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응급실 내부보다는 인기척이 적었다. 둘은 대기용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태경은 예준의 어깨에 제 코트를 덮어 준 채 링거가 꽂히지 않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프니까 얼마나 서럽겠느냐는 생각이 남다른 동정심을 자극했다.
이따금 지나치는 의료진이나 환자들 때문에 자동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 타이밍마다 깜깜한 밤 풍경과 함께 한기가 들이쳤다. 다행스럽게도 예준은 오히려 그 한기를 반기는 듯했다. 아이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찬 공기를 들이마시듯 호흡했다.
성감이 조금은 가셨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섰고 약간의 피로감이 느껴졌다. 묵직한 어깨와 달리 속마음은 그리 무겁지 않았다. 내내 제 말을 잘 따르던 예준이 한참 눈치를 보다가 어깨에 고개를 기대어 왔다.
차분히 가라앉은 고요함. 태경은 기분 좋게 뛰는 심장 박동을 감지하며 예준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거 되게 싫을 줄 알았는데.”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예준이 먼저 입을 뗐다. 태경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가?”
“누가 저 돌봐 주는 거요.”
알파에게 굴욕당하거나 통제당한 경험만 있는 예준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태경은 한편으로 서글픈 기분에 휩싸였다. 보살핌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다는 착각만이 유일한 방어 기제일 테니까.
“동정받는 것도 불쾌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가끔은 그날 대표님이 절 동정해 줘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처음 만난 날?”
“네. 그날.”
멍하게 눈을 내리뜬 예준과 달리, 태경은 밤 풍경 사이로 흩날리는 하얀 먼지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좀 예뻤어야지, 네가.”
예준의 입술 새에서 헛웃음이 샜다. 태경은 촘촘히 뻗은 예준의 속눈썹과 곧은 코, 도톰하고 색이 붉은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순간에서조차 발정을 유발하는 이목구비가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동그랗고 큰 눈. 두 눈은 물기를 머금어 투명할 때가 가장 예뻤다.
기대를 따르듯 다시 눈을 마주하는 예준이었다. 살짝 웃고는 벌어진 제 셔츠 속으로 눈길을 주는 모습이 익숙했다. 태경은 옷깃을) 살짝 벌리며 속삭였다.
“너 때문에 이 날씨에 이러고 있는 거야.”
“예?”
“셔츠 단추 푸는 거, 네가 좋아하잖아. 처음 봤던 날도 내 속살에서 눈을 못 떼던데.”
문밖을 곁눈질하자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태경은 부러 예준의 이목을 끌었다. 예준은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귀엽게 눈동자를 떨었다.
“모르겠어요. 이거 보면 왜 이렇게 기분이….”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에 혼란이 비쳤다. 고작 남자의 속살을 보고 죄책감을 느끼기에는 너무 많은 짓을 한 뒤였다. 태경은 예준의 갈색빛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보고만 있지 말고.”
길게 뻗은 목을 눈짓으로 가리키자, 침을 꼴깍 삼킨 예준이 살 위에 입술을 눌렀다.
“하아.”
예준이 태경의 재킷 속으로 손을 집어넣곤 폭 안겼다. 충실히 페로몬을 들이켜며 저답지 않게 귀한 안달을 냈다.
태경은 생각했다. 속절없이 뛰는 박동, 온몸에 드리우는 열감, 그 열감에 질식할 것 같은 아득한 기분을 느껴 본 게 언제인가. 계산에 익숙하고 연애가 전부는 아닌 나이였다. 이성과 애정을 분리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당황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열과 성을 다해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있긴 했을까. 과거에도 지금과 비등한 순간이 있었나. 누구도, 어떤 순간도 떠올릴 수 없었다. 태경은 그럼에도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왜 아프게 됐는지 말해 줘서 고마워. 아마도 그 얘기 들은 사람이 나밖에 없을 것 같아서 더.”
예준의 손등에 꽂힌 링거가 신경 쓰였다. 태경은 제품에 고개를 파묻고 비비는 어수룩한 오메가를 마지못해 밀어냈다. 밀려난 예준은 어느덧 또렷하게 태경의 눈을 주시했다. 갈구하듯 바라보다 야릇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유혹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그 짧은 행위에 태경의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뭐라 입술을 달싹이던 예준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색함을 무마하고자 눈을 접어 웃는 얼굴이 미치도록 예뻤다.
태경은 더 곤란해지기 전에 바깥을 향해 눈짓했다. 예준의 시선이 저와 같은 곳을 향할 때까지 미동하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지 않아 눈송이가 보기 좋게 흩날렸다. 뒤늦게 고개를 돌린 예준의 두 눈이 커졌다. 탄성 대신 입술이 벌어졌다. 운전하기 고달파 질색일 텐데도, 자신과 함께 첫눈을 맞이하는 눈은 오로지 낭만만을 담고 있었다.
태경은 몰입하여 부드럽게 휘어진 예준의 입술에 손을 댔다.
“한 번도 제대로 말한 적 없지.”
“뭘요?”
이 순간, 같은 감정을 지녔다면 누가 먼저 말하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짧은 단어가 거울처럼 상대를 비추고 말 테니까.
태경은 당황하는 자신이 저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심을 전해 본 적 없던 탓이었다. 머쓱한 얼굴로 뜸을 들이자, 내내 바깥의 눈을 보기 바빴던 예준이 다시 시선을 맞추었다.
“말 안 하셔도 알아요.”
달싹이는 입술을 더듬는 손길. 차분히 뜨였다 감기는 눈. 제법 어른스럽게 자신을 달래는 예준을 보며 태경은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맞잡은 손에 악력이 들어가고 심장 박동이 거세졌다. 불같이 치미는 감정이 언젠가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눈이 쌓이기는 일렀다. 불균형한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은 눈송이는 곧 사라졌다.
서로에게 시선을 고정한 두 사람 앞, 자동문이 열렸다 닫혔다. 부산스러운 기계음과 함께 찬 바람이 내내 살을 할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시선을 돌린 쪽은 예준이었다. 쪽, 뺨에 닿은 입술 덕분에 예준은 환히 웃었다.
*
밤새, 틈 없이 꽉 조인 구멍을 드나들었다. 태경은 붉게 부풀어 오른 입구를, 손자국이 남은 하얀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옅은 신음을 흘렸다. 탈진해 미동조차 없는 예준은 몸이 경련할 때만 눈을 떴다. 물 맺힌 눈이 크게 뜨였다가 감기자, 태경이 이미 질척한 뺨 위에 입술을 눌렀다.
“눈 감지 말고 나 봐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주며 시선을 맞추었다. 예준은 피멍울이 맺힌 입술을 겨우 열었다.
“목소리가… 잘 안 나와요….”
내내 신음을 내질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교접하는 동안 동이 트고 있었다. 태경은 더 말을 잇지 못하는 예준을 보며 느리게 하체를 움직였다. 그렇게 쑤셔 댔는데도 탄력을 잃지 않는 구멍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자기 전, 진한 애무나 하자고 접근한 것이 화를 불렀다. 살을 비비고 엉기다 보니 맞붙은 무릎을 벌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준의 말랑말랑한 허벅지 안쪽과 구멍을 빨아 주기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조임이 심상치 않은 구멍을 보자 눈이 돌아 버렸다. 달콤한 저녁 시간이 무색하게도 제대로 된 전희도 없이 파고들었다. 금세 울기 시작한 예준은 페로몬을 완전히 푼 뒤에야 눈물을 그쳤다.
아래로는 미친 듯 성기를 씹어 대며 우는 얼굴, 발갛게 상기된 뺨으로 앓듯이 내는 신음, 떨어지기 싫어 매달리는 두 팔에 인내심이 바닥났다. 마른 몸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거칠게 해 댔는데도 예준은 싫은 소리 한 번 내뱉지 않았다.
“하아, 으응….”
이미 안에 싸지른 횟수만 해도 일곱 번은 거뜬히 넘었다. 애액과 정액으로 엉망이 된 구멍에서 핏줄기가 새는 것을 확인한 태경이 마지막으로 속력을 높였다. 느린 움직임이 거세게 돌변하자, 꼭 안긴 예준이 태경의 등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이미 눈물범벅이던 두 뺨이 한 번 더 젖어 들었다.
“하읏, 아아!”
“쉬, 괜찮아요.”
“읍, 아, 아파요…! 하윽, 응, 읏!”
예준의 전신이 경련하듯 떨렸다. 태경의 사정감이 강해질 때마다 예준의 쾌감도 강해지는 탓이었다. 아픈 무릎 탓에 하체를 가누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늘어진 인형처럼 다리를 활짝 벌린 예준은 속수무책으로 쑤셔 대는 태경을 퍽퍽 때리기에 이르렀다.
“하으, 으흑, 아, 아파요, 제발…!”
“하아….”
“빨리 싸요, 으으! 빨리… 빨리….”
몸부림치는 예준을 결박한 태경이 성기를 깊이 밀어 넣었다. 귀두를 조이는 좁은 곳이 느껴졌다. 회음부를 짓이기듯 쑤시며 가장 안쪽에 기어코 정액을 뱉어 냈다. 퍽, 퍽, 밀어 넣는 힘에 예준이 서러운 울음소릴 내며 고개를 틀었다.
“하아, 하아….”
태경의 목울대에 핏대가 솟았다. 일순 멈춘 그는 예준의 몸 안에 길게 사정했다. 삽입을 반복하며 후희를 충분히 즐기다 뒤늦게 성기를 빼내었다. 폭, 소리와 함께 품었던 것을 내뱉은 구멍이 움찔 조여들었다가 이내 새빨갛게 열렸다.
“안이 다 보일 만큼 벌어졌어.”
태경이 구멍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말했다. 그는 다시 쑤셔 대고픈 욕망을 가까스로 누른 채 예준을 보았다. 불안한 얼굴로 상체를 세운 예준은 태경과 손을 겹쳐 제 구멍을 만져 보았다. 시트에 맺힌 핏방울을 보곤 기함을 하며 물었다.
“다쳤어요?”
“많이 찢어지진 않았어. 약 바르면 돼.”
밀려드는 죄책감에도 아랑곳없이 태경은 달래듯 예준을 안았다.
“안심해도 돼.”
“…아파 죽는 줄 알았어.”
“아팠어?”
“피 나고 나선 계속 아팠어요. 그, 근데 계속 안 멈추고…. 진짜 계속… 아,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너무 좋아서 그랬다는 말은 변명이 되지 못할 것이다. 태경은 홧홧한 몸을 더 깊게 안으며 말했다.
“싫다고 말했으면 그만했을 거야.”
“거짓말하지 마요…. 아프다고 계속, 계속 말했어, 나….”
“이제 안 아프게 해 줄게.”
태경은 예준의 조잘대는 입술을 틀어막듯 키스했다. 고분고분 받아 준 예준은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긴 키스가 끝난 후, 태경은 아래로 내려가 예준의 허벅지를 벌렸다. 티슈로 상처를 지혈하고 구멍을 핥아 주자 예준의 손이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애무하듯 혀를 깊게 쑤셔 넣었다. 어느 순간 밀어내려 발버둥 치는 힘이 느껴졌다.
“쌀 거, 쌀 것 같아요.”
“사정할 것 같아?”
“아니…. 정액…. 안에 든 거….”
태경은 예준의 허벅지에 키스한 후 상체를 일으켰다. 만류하는 손을 결박하곤 열심히 정액을 뱉어 내는 구멍을 응시했다. 옅은 주름이 펴졌다가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꼬리뼈를 따라 상당한 양의 정액이 흘렀다.
“우리 섹스가 늘 이러면.”
태경이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너 아기 가지기 쉽겠어.”
예고 없이 흘러나온 말에 예준은 아연실색했다. 히트 사이클과 러트가 겹치지 않으면 임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일이라지만, 생각만으로도 아찔한 기분이었다.
“저 씻고 싶어요.”
명백히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태경은 그다지 위화감 없는 얼굴로 재차 예준의 다리 사이를 확인했다.
“다 싸면 데리고 가 줄게요.”
“다 쌌어요….”
태경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아직 묽은 액이 흘러나왔다.
“더 싸요.”
어쩐지 위압적인 목소리에 예준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곤 시트로 하체를 감추며 힘을 주었다. 손쉽게 시트를 치운 태경은 정액이 예준의 몸 안에서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감시했다. 이따금 손가락을 삽입하며 헤벌리는 행위에 예준의 잇새에서는 내내 신음이 흘렀다.
뒤처리를 끝낸 태경은 예준을 안고 욕실로 향했다. 이른 아침, 그는 거품 목욕으로 예준이 호사를 누릴 수 있게 해 주었다. 온갖 체액으로 질척대던 몸이 보송보송해지자 예준의 컨디션이 나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도 두 발을 바닥에 딛게 할 순 없었다. 태경은 아직 불편한 무릎에 부쩍 신경을 쓰며 드레스 룸까지 예준을 안고 갔다. 장식장 위에 예준을 올려 둔 뒤 그가 꺼낸 옷은 자신의 깨끗한 티셔츠였다.
강제로 꿰어 입히자 예준이 느슨하게 웃었다.
“제 옷 있는데 왜 자기 옷 입혀요?”
“자기? 밤일이 끝내줬나 봐. 대표님에서 자기 된 거 보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예준이 티셔츠를 당겨 킁킁 냄새 맡았다.
“바지는요?”
“내 집에 있는 동안은 그거 안 입어도 돼요.”
“예? 지금 겨울인데요?”
“난방 빵빵하잖아.”
“그래도….”
“양말은 신겨 줄게.”
“…그게 더 이상해요.”
그렇다면 바지를 달라 강력하게 말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퉁퉁 부은 입술은 오히려 조용히 다물렸다. 예준은 티셔츠의 넉넉함이 거추장스러운 듯 이리저리 팔을 들며 품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뒤로한 채 태경은 새 셔츠를 꺼냈다. 하체에 감고 있던 수건을 걷어 내자 나신이 드러났다. 보지 않아도 예준이 자신을 보고 있단 사실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셔츠를 걸치는 것으로 시작해 완벽한 슈트 차림이 될 때까지 드레스 룸 안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꼴깍, 예준이 침 삼키는 소리와 옷감 스치는 소리만이 예민하게 울려 퍼졌다.
마지막으로 손목시계를 찬 태경이 다시금 예준에게로 향했다. 맨 엉덩이를 틀어쥔 채 들어 올리자 끄응, 앓는 소리가 나왔다. 채광이 좋은 거실로 나와 예준을 눕히고서 그는 익숙한 듯 연고를 찾아 돌아왔다. 다른 손에는 따뜻한 차가 들려 있었다.
소파 위에 드러누운 예준은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긴장한 예준과 달리 태경은 느긋하게 구멍을 덧그렸다. 피는 멎었고, 상처는 사흘이면 아물 것이다. 조급하게 그 상처를 다시 헤집는다고 해도 예준이 마다할 리는 없었다.
태경의 눈이 바깥을 향했다. 예준이 누운 채 보고 있는 정원에는 어느새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응급실에 간 날부터 시작된 눈은 이틀간 계속되었고, 반 뼘쯤 쌓인 뒤론 녹지 않았다.
“예뻐요.”
하얀 눈 위로 햇살이 스며들어 반짝였다. 태경에게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다만, 그는 정원보다는 제 앞의 상대에게 더 쉽게 눈길을 빼앗겼다.
슈트 재킷을 벌린 그는 예준의 무릎을 쥔 채 상체를 숙였다. 헐렁한 티셔츠를 걷어 편편한 배를 들여다보았다. 예준은 본래 가진 근육의 모양이 예뻐서 단련하지 않더라도 빼어난 몸 선을 지니고 있었다.
태경은 따뜻한 체온을 감지하듯 배 위에 뺨을 댔다. 보드라운 피부에 입술을 묻으며 웃자 예준이 간지러워 바르르 몸을 떨었다.
“출근해야 하잖아요.”
“그렇지.”
“그럼 어서….”
“저녁에 데이트할까? 밖에 나가서 먹을래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예준이 괜히 귓불을 만지작댔다. 물든 것처럼 발개진 귀를 본 태경의 가슴이 뛰었다. 어쩌면 소년처럼 지나치게 맑은 쪽은 예준이 아닌 자신일지도 모른다.
알파가 오메가를 소유하려는 행위는 오만한 본성이었다. 당연한 섭리라 할지라도 태경에겐 형질보단 인격이 먼저였다. 인간 본연의 품성을 훼손해선 안 되고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 계급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고 배워 왔다. 동의했다. 그 때문에 이제껏 어느 오메가도 제 것으로 종속시키지 않았다.
많은 알파가 오메가를 각인시켜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주로 첩이나 정부의 형태로. 태경에게는 따지자면 관심 밖의 일이었다. 사람을 재물처럼 소유하다니, 성노예로 삼는 것과 다름없는 만행임에도 심지어 그 누구도 정당하게 포장조차 하지 않았다.
예준이 곤란한 듯 물었다.
“제 배에 뭐 있어요?”
“없어. 그냥 따뜻해요.”
“그럼 이만 티셔츠에서 나오세요.”
부러졌던 늑골을 애무하느라 어느새 거기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티셔츠에서 빠져나온 태경이 여전히 천을 들친 채 예준의 배 위를 주시했다. 아주 짧게, 상상했다. 저 작은 배가 부풀어 생명을 잉태하는 장면을.
그 이전에, 제게 각인되어 제 아래에서만 발정하는 오메가를 그렸을지도 모른다. 알파에게는, 특히 저 같은 우성 알파에게는 오메가에게 있어 버림받기 싫어 벌벌 떠는 삶을 살게 할 권력이 있었다.
태경의 상념을 읽지 못한 예준은 시선을 따르기 바빴다. 거친 섹스가 괴로웠을 텐데도 말간 얼굴에는 노기가 전혀 없었다.
“왜 자꾸 봐?”
“…그냥.”
내내 입술을 달싹이던 예준이 태경의 말에 머쓱한 기색을 보였다. 반들반들 빛나는 동공을 보자 갈증이 일었다. 태경은 각인을 떠올리는 자신에게 회의를 느끼면서도 물러설 여유가 없었다. 보면 볼수록 더 짙은 소유욕에 시달리는 형편이었다. 본능이 아니라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자꾸 그러면 나 출근 못 해.”
“아…. 죄송해요. 일어날게요.”
예준이 티셔츠를 끌어 내려 하체를 가렸다. 그곳도 마다하진 않겠으나 지금 홀린 쪽은 보는 것만으로도 애가 타는 옅은 미소였다. 태경은 예준을 당겨 키스했다. 아프도록 결박한 채 입을 맞추자 확신은 더욱 커졌다.
곧, 저 예쁜 아이를 평생 제 영역에 가둘 기회가 올 것이다. 그 기회를 잡는 것도 놓치는 것도 오로지 태경만의 몫이었다.
만난 이후, 태경은 처음으로 알파의 본성을 되새겼다. 표정을 지운 남자가 예준의 긴 목을 조르듯 틀어쥐었다. 제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예준은 그저 밀려드는 타액을 삼키기 바빴다.
*
예준은 나갈 채비를 하기 전, 태경의 연락을 받았다.
[야근해야 할 것 같은데 오늘 약속 내일로 미뤄도 되겠어?] [(눈물)]
태경이 덧붙인 이모티콘을 보며 예준은 옅게 미소 지었다. 이모티콘엔 관심도 없으면서, 굳이 노력해 상황에 맞는 것을 골랐을 그가 그려진 탓이었다. 예준은 미지근한 얼굴로 ‘괜찮아요’ 하고 답장을 보냈다. 다만 저녁 약속이 취소된 것이기에 궁금했다.
[저녁은 드시고 일하세요?]
하는 일을 전부 다 안다고 할 순 없겠으나 태경은 회사를 이끄는 대표였다. 그가 시간 대부분을 회사에 쓰는 것은 당연하기에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뻐근한 다리를 스트레칭하고 있는데 곧 답장이 돌아왔다.
[별로 생각 없어.]
배달 건수가 많을 때는 예준 또한 곧잘 끼니를 거르곤 했다. 그러나 스쿠터에 의지해야 하는 저와 달리 태경은 번듯한 사무실까지 갖추고 있었다. 끼니 정도는 무난하게 챙길 수 있는 사람이 왜 거를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지 말고 챙겨 드세요.]
타인에게 잘하지 않던 말을 쓰자 어딘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기껏해야 식사 이야기지만, 자신 외에 신경 쓸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 생각보다 불편하진 않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괜찮으면]
다음 말은 곧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괜히 손끝을 잘근잘근 깨문 예준은 얼마 후 도착한 완전한 문장을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회사로 오는 건 어때? 같이 밥 먹고 내 사무실에서 쉬다가 같이 퇴근해요.]
애당초 바깥에서 그를 만나기로 약속했으니 외출이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전에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 결혼 적령기라 보는 눈이 많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상황에 놓인 알파가 사무실로 오메가를 불러들이는 건 좋지 않은 결정이었다.
[차 보내 줄게. 준비하고 정시까지 나와 있어요.]
난감한 저와 달리 태경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바쁜 와중에 실수했나 싶다가도, 차까지 보낸다는 것을 보면 대충 한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의 결정이니 따르면 그만이겠지만 예준은 선뜻 동의하지 못했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만 들으며 골몰히 고민하고 있는데 남자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무슨 생각 하는지 말 안 해도 알겠는데 편하게 와도 돼. 기다릴게.]
군더더기 없는 문장을 보며 예준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와 저 사이에 오간 게 없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관계엔 분명 진전이 있었다. 그의 직원들에게 그 사실을 들킬까 염려되었다. 예준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하겠다고 다짐한 뒤 미리 챙겨 두었던 겉옷을 입었다.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탓에 벌써 정시가 코앞이었다. 폰만 챙겨 대문으로 나가자 익숙한 검정 세단이 집 앞에 정차해 있었다. 시답잖은 일에 바쁜 경호원을 불러들여 마음이 불편했다.
예준은 운전석에서 나와 인사하는 경호원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괜히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대표님 지시 따르는 것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호원은 간단명료하게 답했다. 예준은 차 문을 열어 주려 다가오는 그를 만류한 뒤 스스로 뒷좌석에 올라탔다. 주변을 살핀 경호원 역시 이내 운전석에 올랐다. 회사로 향하는 길에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
LK에 도착한 예준은 로비 직원에게 용건을 말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곳에 방문하는 건 두 번째였지만 처음 올 때와 다름없이 낯선 기분이 들었다. 기억대로라면, 문이 열리자마자 등장할 그를 알기에 예준은 초조하게 코트 깃을 가다듬었다. 긴장이 무색하게도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39층에 도달했다.
“…….”
문이 열렸는데도 태경이 보이지 않았다. 예준은 절뚝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웅성거리는 복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식사해요. 난 손님이 올 예정이라.”
난색을 보이는 직원들 틈에 태경의 얼굴이 솟아 있었다. 법인 카드를 내민 남자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지만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챈 직원들이 추궁을 시작했다.
“누구요? 이 시간에 비즈니스 미팅일 리는 없고.”
“말하면 혜윤 씨가 알아?”
“아, 대표님. 저 촉 좋아요. 요즘 뭔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섞여 다음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예준은 당장 비상구로 숨어 버리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직원들 앞에서 만나기로 한 오메가에 관해 떠들 리는 없겠으나, 그의 약속 상대가 자신임을 들키는 것만으로 부담스러웠다.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데 페로몬을 감지한 태경이 몸을 틀었다. 예준은 얼떨결에 마주친 직원들과 어색하게 눈인사했다. 그러자 성큼 다가온 남자가 팔을 붙들었다.
“잠깐 직원들한테 붙잡혔어.”
“아.”
“왜 이렇게 긴장했어?”
스스럼없이 시작되는 대화에 직원들의 눈이 커졌다. 알아보는 사람들이야 때때로 있었고 그들도 그중에 포함되었지만, 그저 합의금만 받으러 왔을 때와 같은 상황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와 연을 이어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랄 테니까.
“운전해 주신 분이 이거 들고 가라고 하셔서요.”
예준은 태경의 친절한 손길을 만류하며 손에 들린 도시락 봉투를 내밀었다. 그제야 직원들이 한데 뭉쳐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준이 내린 것과 반대편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오른 사람들은 가지각색으로 표정을 감추며 허리를 숙였다.
“그럼 식사하고 오겠습니다. 대표님.”
“맛있는 거 사 먹어요. 천천히 와도 되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엘리베이터 문은 곧 닫혔다. 예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보았다.
“이래도 괜찮아요?”
예준의 우려와 달리 남자의 입매는 호선을 그렸다. 다가온 그가 아무렇지 않게 입 맞추었다.
“내 회사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
태평하게 말한 그가 팔꿈치를 내밀었다. 예준은 트인 복도에 서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빠르게 손을 꿰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남자는 유리 벽을 불투명하게 전환했다.
“보기엔 괜찮아 보이는데. 걸을 만해?”
“네.”
“아침까지만 해도 못 걸었잖아.”
“그건, 대표님이 저를 과잉보호하시니까요. 아침에도 걸을 수 있었어요….”
“그랬어요?”
고개를 갸우뚱거린 태경이 예준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추운 날씨에도 착실히 목 부분이 파인 니트를 찾아 입은 아이가 기특해서였다.
“같이 식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예준은 남자가 빼 주는 의자에 앉아 코트를 벗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덟 시가 다 된 시간임에도 남아 있는 직원이 여럿이었다.
“말 새어 나가는 게 걱정이라면 마음 쓸 필요 없어. 직원들 입단속 정도는 단단히 시킬 테니까.”
“아니, 저보다 대표님이요.”
“나?”
“결혼 적령기라 보는 눈이 많다고 하셨잖아요.”
태경이 예준과 나란히 앉은 뒤 도시락 봉투를 열었다. 익숙한 동작으로 테이블 위에 음식을 진열한 그가 읊조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예준은 가만히 그 눈빛을 들여다봤지만, 그의 의중을 다 읽어 낼 수 없었다. 남자는 잠시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
“이제 반항이란 걸 좀 해 볼 생각이라.”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예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당초 태경 같은 부잣집 도련님이 운명을 거스르는 게 가능한가 싶었다. 다만, 자신을 숨기려는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렇다면 가벼운 식사 정도는 함께해도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이었다.
“직원들은 너 좋아해. 눈에 하트 가득한 거 못 봤어?”
그런 눈빛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괜한 소리였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치, 하는 유치한 소리를 내곤 남자를 도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외부와 차단되어서인지 긴장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남자가 의자를 당기자 금세 어깨와 팔꿈치가 부딪쳤다. 열이 오르는 기분에 예준은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러자 큰 손이 이마에 닿았다.
“몸살 나면 어쩌나 했는데.”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격렬했던 섹스의 여파로 앓았어도 이상하지 않을 밤이긴 했다.
“괜찮아요.”
뜨끈한 손을 붙잡아 떼어 내자 그의 어깨가 더 가까워졌다.
“왜. 둘밖에 없잖아.”
“식사하세요. 직원들 오기 전에.”
의자와 몸 사이로 손을 밀어 넣은 그가 허리를 감싸 왔다. 부쩍 짙어지는 페로몬에 예준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태경을 보았다. 거부의 기색을 내비칠 때마다 그가 쓰는 수법이었다. 이러려고 회사까지 온 게 아닌데.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않자 그는 이내 장난을 멈추었다. 몇 번 뒤통수를 쓰다듬고 물러난 그가 수저를 들었다.
“잘 먹을게.”
“제가 할 말이에요.”
내내 조용한 식사였다. 예준은 이따금 귀나 뺨에 닿는 남자의 손길을 느끼며 음식을 꼭꼭 씹어 삼켰다. 어떻게 비웠는지 모르게 도시락은 곧 바닥났다. 예준은 태경과 함께 식기들을 정리하고 그가 건네는 티슈를 받아 들었다.
불시에 테이블 밑으로 손을 뻗은 그가 무릎 상태를 확인했다. 확실히 부기가 줄었다.
“어차피 나을 거라면 좀 천천히 나았으면 좋겠어.”
너무 가혹한 말이 아닌가 했지만, 곧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야 내 집에 더 오래 있지.”
물론 예준은 낫는 즉시 돌아갈 예정이었다. 태경과 보내는 시간은 즐겁지만, 나태하게 즐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자 상환일이 코앞이기에, 그에게 받은 합의금을 갉아먹지 않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일을 해야 했다.
태경은 곧 핫초코가 담긴 머그잔과 담요를 건넸다. 예준은 담요를 덮고 머그잔을 받으려다가 그의 셔츠에 묻은 펜 자국을 발견했다.
“여기 펜 묻었어요.”
“그래? 늘 이래.”
슬쩍 아래를 본 태경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한 얼굴로 자리를 잡았다. 지척으로 서류를 가져온 그는 다시 팔꿈치가 닿는 거리에 있었다.
너무 가까운 탓에 그의 뺨 위에 달라붙은 속눈썹까지 발견한 예준이었다. 손길이 닿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의 몸에 직접 손을 대는 건 아직 어색했다. 우물쭈물하던 예준이 태경의 팔꿈치를 당겼다. 기꺼이 눈을 맞춘 태경은 뺨에 닿는 하얀 손끝을 느린 시선으로 훑었다.
“속눈썹 묻어서요.”
속눈썹을 떼어 내고도 예준의 손은 여전히 태경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보는 것만큼이나 보드라운 살결이 따뜻한 체온을 머금은 채였다. 턱은 단단하고 목의 굴곡은 남자다웠다. 셔츠에 감싸인 몸은 침대 위에서 수없이 만진 뒤였지만, 얼굴은 왠지 낯설어 더 만져 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는 순순히 따라 주었다. 입술로 손을 옮겨 가자 그의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노골적이었나 싶어 예준은 얼른 손을 떼어 냈다. 그러자 역으로 남자의 손길이 닿았다. 다리 사이로 쏙 들어온 손이 은밀한 부위를 움켜쥐었다.
“여긴 아직 안 나았지.”
들쑤셨던 곳을 말하는 것이라면 당연했다.
“네. 아직 움직일 때마다 아파요.”
“얼마나 아플 예정이에요?”
“적어도 사흘은 쉬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 피를 보면 제대로 된 섹스를 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와는 살을 맞대는 것만으로 좋으니 예준은 견딜 수 있었다. 태경은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오피스 섹스도 카섹스만큼 재미있어.”
“그래요?”
“네.”
“혹시… 해 보셨어요?”
그에게 연애 경험이 많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궁금했다.
“곤란한 질문 하면서 너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인 거 아니야?”
“왜 곤란해요?”
“나는 네가 형님들 얘기 꺼낼 때마다 기분이 참 별로거든.”
일순 서늘해지는 눈빛이 근거였다. 조바심이 느껴지는 눈동자가 싫지 않았다.
“저는 형님들이랑 딱히 뭘 한 게 아니에요.”
“섹스했지.”
“대표님이랑 해 보고 그게 섹스가 아니란 것도 알았어요.”
아마 강간이라고 해야 맞겠지. 평소에는 꽤 서글서글한 형님들이라 할지라도 육체관계에 있어서는 폭력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상대의 쾌감에 관심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행위에 예준 자신이 만족스러웠다 할 부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저와 달리, 태경이 연애 상대와 오피스 섹스를 했다면 그건 꽤 달콤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책상 위에 서류 더미 대신 여자를 눕혀 올라탔을지 모른다. 폭신한 소파에서도, 그게 아니라면 서로가 비치는 통유리 창에 몸을 기댄 채. 구체적으로 파고들수록 예준은 답을 얻고 싶은 욕구가 사라졌다.
“왜. 내가 여기서 다른 여자랑 잤다고 생각하면 기분 별로야?”
잠시 뜸을 들였을 뿐인데 그는 정확히 자신의 속내를 간파했다. 다른 사람의 몸을 정성껏 애무하고 그 위에서 헐떡이는 그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예준은 가라앉은 얼굴로 멎어 버렸다. 태경이 뺨을 꼬집으며 말했다.
“얼굴 빨개졌네. 귀엽게.”
“놀리지 마요.”
제법 단호하게 손길을 밀어내자 그가 달래듯 속삭였다.
“퇴근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줘요.”
예준은 태경이 서류를 살피는 동안 천천히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수상 트로피나 그의 기사가 담긴 매거진이 노골적으로 전시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의 아이디어는 아닌 듯했다. 집엔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고, 섹스어필이 아니라면 굳이 과시하려 드는 성격이라고 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준은 몰래 매거진을 꺼내 그의 사진과 기사가 담긴 페이지를 찾았다. 멋진 슈트 차림의 그는 익숙하지만, 기사의 내용은 낯설었다. 기사에는 ‘LK Architects’의 설립 배경, 건축가로서의 목표, 결혼관까지 비교적 다양한 주제가 담겨 있었다.
그중, 예준의 흥미를 끈 부분은 결혼관이었다.
[운명의 상대를 찾는 건 아니지만, 매 순간 즐거울 필요가 있다. 같은 일을 해도 새로운 기분을 느끼는 게 좋다. 그런 상대가 나타난다면 기꺼이 결혼할 생각이다.]
인터뷰에는 형질이나 스펙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런 부분 또한 분명 고려하고 있을 터였다. 선영의 말에 따르면 선으로 만난 부잣집 따님들과만 연애했다고 했다. 태경은 주목받는 건축가이자 LK의 대표이기에 결혼만으로도 업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게 분명했다.
멀다. 몇 걸음 만에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예준은 입이 써 괜히 뒤통수를 긁었다. 그가 읽고 있는 서류를 자신이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배달원에, 가끔은 일용직인 처지에도 불만을 품지 않았는데. 그가 존재하는 세상의 고도가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을 깨닫자 가슴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크리스마스에 뭐 할까?”
매거진을 제자리에 꽂아 두고 서성이고 있는데 태경이 물었다. 예준은 눈을 크게 떴다.
“크리스마스에요? 어….”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엔 배달이 대목이기에 늘 일했던 기억만 있었다. 삼겹살집에서 치문과 대차게 고기를 구워 먹은 적도 있기는 했지만, 예준에게는 딱히 특별한 날이라 할 수 없었다.
“늘 일만 했어서…. 그날 저 보시게요?”
“그러고 싶어.”
“가족들이랑 시간 보낸다거나….”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태경이 서류를 덮었다. 의자를 뒤로 물린 그가 허벅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예준은 머쓱하게 다가갔다가 손길에 이끌려 남자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선수 시절엔 동료들과 놀거나 가족과 함께 보냈다. 지금은 같이 보낼 가족도 없는 형편이고, 동료들과도 아주 가끔 연락만 주고받는 정도였다. 그와 보내는 크리스마스라. 떠올리는 것만으로 뺨이 달아올랐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단 사탕을 입에 문 기분이었다.
“호텔 갈까? 여행도 괜찮고.”
이렇게 놀기만 해도 되는지 아득했다.
“여행 가면 하룻밤 자고 오는 거죠?”
“그래. 여행 가자.”
질문이 원하는 바라 생각했는지 그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예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생활이 저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늘 받기만 하는 데다가 일로 빡빡하게 채워도 모자란 시간을 그냥 허비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나쁜 버릇 들 것 같아요.”
“응?”
“놀고먹는 게 도저히 적응이 잘 안 돼요.”
남자에겐 저처럼 불안한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다. 이미 안정권에 오른 삶이니 그럴 만했다. 예준은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며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남자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럴 때는 앞으로 뭘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뭘 할지요?”
확신에 찬 시선이었다.
“나랑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어. 배달원으로 사는 게 고되다면 다른 일을 찾아볼 수도 있고. 지금 사는 집이 마음에 안 든다면 더 나은 집으로 옮길 수도 있고.”
“…….”
“매진할 만한 취미를 갖는 것도 좋고 다시 공부해 보는 방법도 있어요. 스물여섯이면 아직 너무 어린 나이니까.”
그렇다면, 그에게 얼마나 더 큰 민폐를 끼치게 되는 걸까.
“저는 그럴 만한 가치가….”
“그건 내가 판단해. 그러니까.”
태경이 싸늘하게 덧붙였다. 예준이 움찔할 정도로.
“다신 그런 말 안 했으면 좋겠어.”
천천히 표정을 누그러뜨린 태경이 서류 더미로 눈길을 돌렸다. 제 몸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읽어 내려가는 얼굴은 차분했다. 속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남자에게 점점 스며들고 있었다. 예준은 방해가 될까 벗어나려다가 도리어 붙잡히고 말았다.
“딱 한 시간만. 그 안에 끝낼게요.”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의 시선이 다시 하얀 종이 위로 향했다. 정적이 이어졌다. 통창 너머로는 이제 막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
집으로 향하리라 생각했던 남자는 낯선 곳으로 핸들을 꺾었다.
“드라이브나 하다 갈까요.”
정중하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남자가 운전하는 차에 오른 처지였기에 예준은 쉬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한동안 빛을 머금은 빌딩 사이를 달렸다. 예준은 이따금 창을 내리고 찬 바람을 쐬었다. 스쿠터에 올라탔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여유를 만끽하며 풍경을 감상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덩치 큰 빌딩 사이를 빠져나간 차가 반짝이는 한강 다리 근처 주차장에서 멈추었다. 몹시 추운 데다 눈까지 날리고 있어서 인적은 드물었다.
차에서 내린 남자가 담배를 물었다.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예준도 차 문을 열고 나갔다. 무릎을 회복하는 데는 좋지 않을 테지만 담배가 당겼다. 남자의 잇새에서 길게 뻗어 나오는 연기를 바라만 보자, 곧 의중을 눈치챈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려 주었다.
치익, 지포 라이터의 불빛이 담배 끝에 닿았다. 깊게 필터를 빤 예준은 남자가 이끄는 대로 차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는 당연하게도 체격으로 바람을 가려 주었다.
나이 차이 때문인지 신분의 격차 때문인지, 태경과는 어쩐지 맞담배 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예준은 슬며시 눈을 피하고 고개를 비튼 채 연기를 흘려보냈다. 손등으로 뺨 온도를 가늠한 그가 반쯤 태운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상의할 문제가 좀 있어.”
예준은 담배가 아까워 그것을 쥐고만 있었다. 대답 대신 눈을 맞추자 남자가 곤란한 눈초리로 말했다.
“네 빚 말인데.”
예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가 제 치부를 들출 때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들이치는 거부감에 예준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미리 말하는데 곤란하게 만들 생각 없어. 단지 한 번은 해야 할 이야기라 껄끄러워도 그거 다 감수하고 말하는 거야.”
“빚이 왜요?”
“사람 통해 알아봤어. 액수가 꽤 되던데.”
자그마치 17억이었다. 도저히 손에 잡히지 않는 숫자라 예준은 까마득하게 많은 돈이라고만 생각하고 살았다. 정선에서 그 소란이 일었으니 남자가 뒷조사한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사치스러운 감상에 젖어 있는 동안 내내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질 나쁜 사채업자 같은데, 이자도 말이 안 되고 여러모로 수상한 점이 많아. 설마하니 그 돈을 다 갚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물고 괴롭힐 확률이 높아요. 이미 어느 정도는 겪고 있으리라 생각해.”
룸살롱에서 일하는 것도 정상적으로 보이긴 어려울 터였다. 조직원들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은 너무 익숙해 이젠 별다른 일이라고 느껴지지도 않는 형편이었다. 예준은 남자가 어디까지 아는지 가늠하려 했지만 읽어 낼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주제넘게 굴고 싶지 않아서 꽤 치열하게 고민했어. 내가 그 빚을 갚아 주면 간단한 문제겠지만 그건 네가 극구 거부할 테고. 그 정도야 이미 알고 있어. 어쩌면 날 아주 안 보겠다고 말할지도 모르지. 그만큼 너한테는 중대한 문제일 테니까. 그래서 가능하면 채권을 이전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 이어졌다. 남자의 의도는 알겠으나 뒤엉켜 자라는 넝쿨처럼 그를 옭아맬 생각은 없었다. 예준은 어느새 다 타들어 간 담배가 손가락에 상처를 입히는 것도 모른 채 태경을 불렀다.
“대표님.”
“응.”
“대표님 눈엔 제 모든 게 엉망으로 보인다는 거 알아요. 알면 알수록, 말 그대로 구제 불능처럼 보이겠죠.”
예준은 제 처지를 서글프게 여기지 않았다. 태경처럼 사는 삶이 있으면 저처럼 사는 삶도 있는 법이다.
“그래도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어요. 잘 먹고 잘산다고 해서 죽고 싶은 기분 같은 거 한 번도 안 느껴 본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잖아요. 애초에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생긴 빚이니까 누구도 탓하고 싶지 않아요.”
꽁초가 된 담배를 먼저 발견한 태경이 예준의 손에서 그것을 앗아 갔다. 하얀 손을 쥔 채 빨갛게 부푼 상처를 들여다보는 눈에는 여전히 동정심이 어려 있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저다운 거예요. 그러니까 뒷조사 같은 건 여기까지만 하셨으면 좋겠어요.”
남자의 입술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그의 얼굴에 비친 불만스러운 기색을 예준은 부러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런 걸 계속하게 될 거라면.”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준은 조금 아득한 기분으로 말을 골랐다.
“계속 만나고, 헤어질 때 아쉬운 기분을 느끼고, 그때 말씀하신 그런 사이가 되는 거라면…. 저를 구제해 줘야 할 불쌍한 애로 보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봐 주세요. 빚이 많아도 전 괜찮아요. 당장 뭐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고개를 떨군 예준이 발끝으로 툭, 바닥을 찼다. 굳이 마주 보길 강요하지 않은 남자가 뺨을 어루만졌다.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예준은 남자의 코트 속에 푹 파묻혔다. 꽉 끌어안는 힘에 목덜미부터 열이 올랐다.
“사람 시키는 게 더 쉽다는 거 알지만, 계속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남자의 어깨 위로 겨우 고개를 들었다. 참았던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퍼졌다. 가로등 빛이 비친 허공에 시선을 두었더니 조금 굵어진 눈발이 보였다. 남자의 코트에 들어간 손은 그 시린 풍경에 비해 몹시 따스했다.
“그래. 그런 식은 좀 그렇지.”
남자가 토로하듯 말했다. 뺨을 비비는 다정한 행동만 보자면 그의 애정을 한 몸에 받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기분은 조금 특별했다. 예준은 남자의 셔츠를 꽉 쥐며 답했다.
“저에 관한 거라면 저를 통해 아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래요. 내 생각이 짧았어.”
남자는 부정당하고도 자존심 상하는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예준은 대단한 느긋함이라고 생각했다. 빚의 액수를 들켰다는 것만으로도 온갖 수치심에 시달리는 저와 달리, 그는 순순히 자기 실수를 인정했다. 실수를 인정하는 알파라니, 역시 본 적 없었다.
끌어안은 몸을 부드럽게 놓아준 남자가 손을 뻗었다. 그의 머리카락에 붙은 눈송이만큼이나 저에게도 그런 것들이 많이 내려앉아 있을 터였다. 부산스럽지 않게 눈송이를 털어 준 남자가 차창을 짚고 섰다.
“존중해 줄 테니까 여기서 확실히 해.”
“뭘요?”
“어중간하게 만나는 사이 하지 말고 그냥 애인하기로.”
남자의 두 팔 안에 구속된 예준은 아연실색했다. 물러설 기미 없는, 도전적인 눈빛을 응시하자 남자가 덧붙였다.
“확실히 못 박지 않으면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만 할 거잖아. 나랑 만난다고 에둘러 표현할 필요 없어요. 그냥 사귀는 걸로 해, 이제부터.”
“…….”
“뭐든 참지 마. 나도 듣고 싶거든.”
“뭘….”
“좋아한다는 말.”
싸늘한 공기가 아니라면 열감 어린 두 뺨을 감추지 못했을지 모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예준 앞에서 태경은 잊어서는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덧붙였다.
“침대 위에서, 정신 반쯤 나갔을 때 하는 말은 제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