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Dive into you Ι
남자가 준 면역제는 실로 놀라웠다. 눈에 띄게 의식이 맑아졌고, 반대로 페로몬이나 냄새를 받아들이는 감각은 둔해졌다. 고작 하루뿐이었으나 예준은 누구보다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밖에 나가 더 많은 알파와 마주칠 기회가 없어 아쉬울 정도로.
온종일 숨을 죽였다. 약효를 온전히 알고 느끼기 위해서였다. 열두 시간은 거뜬히 효과를 내는 약이었다. 내내 스치기만 하다가 남자의 품에 안겼을 때, 예준은 페로몬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면서도 뛰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그렇다면 두근거림의 이유가 페로몬일 리 없었다. 태경의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고 제 변명은 갈수록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남자가 출근한 후, 예준은 집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공간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익숙한 작업실부터 개인 운동 공간, 정원을 향한 테라스, 욕조가 있는 건식 욕실, 대형 스피커를 갖춘 영상실까지. 그의 취향과 직업을 고려한 집에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이 안에서 여유롭게 일상을 누릴 그가 자연스레 그려졌다.
부유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TV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 같은 이들에게는 그 공간을 실제로 확인할 기회조차 드물었다. 예준은 언젠가 태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네가 궁금한데.’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어떤 사람이 취향인지, 그 취향에 나도 포함인지 아닌지.’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취향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부유함은 재력뿐만 아니라 그것을 누리는 여유에서 나온다. 눈 뜨자마자 돈벌이에 열중해야 하는 예준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발견해 낼 시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선수 시절엔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새벽 일찍 눈을 떠 밤늦게 침대에 들어갈 때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오메가로 발현해 선수촌을 떠난 뒤로도 비슷했다. 돈에 쫓겨 몸이 부서져라 일한 기억이 다였다. 죽도록 일하는데도 돈은 쌓이기는커녕 점점 메말라 갔다.
예준은 오늘 아침, 충분히 자고 일어난 후 여유롭게 샤워까지 마쳤다. 가사 도우미가 해 준 토스트와 샐러드를 먹고, 그가 좋아하는 쓴 커피 대신 설탕을 세 스푼이나 넣은 달콤한 커피를 마셨다. 드레스 룸에서는 여러 옷 중 하나를 골라 입었다. 너른 소파에서 햇볕을 쬐다가, 아무 책이나 집어 읽고 나서도 시간은 아직 정오였다.
바삐 스쿠터를 몰 필요도, 시도 때도 없이 굴욕을 당할 필요도 없었다. 이자 금액을 맞추지 못해 전전긍긍할 이유도 없었고, 온종일 찬 바람을 쐰 탓에 몸살에 걸려 이불 속을 파고들 필요도 없었다.
몸이 편하니 빠르게 도는 쪽은 오로지 두뇌뿐이었다. 예준은 그제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힘들어도 즐거웠으니 운동을 좋아하는 건 확실했다. 아침을 챙겨 먹는 것도 좋고,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커피믹스보단 직접 내려 먹는 커피가 좋다. 아침과 낮에 볕을 쬐는 게 좋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들이는 게 좋았다.
남자. 취향은 확실히 남자다운 쪽이다. 뭐든 몸으로 때우려는 형님들을 혐오하는 걸 보면 머리도 어느 정도 돌아가는 남자가 좋은 모양이었다. 예준은 눈을 감고 태경의 외향을 떠올렸다. 단단한 턱이나 높은 콧날, 너른 어깨, 아름다운 목선을 그렸다.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몸 구석구석까지 상기해 냈다. 아플지라도 큰 성기가 좋고 제 몸을 거뜬히 받치는 단단한 허벅지가 좋았다. 그가 차려입은 슈트도 좋다. 단순히 어울리는 것과는 달랐다. 따지자면 형님들도 슈트가 어울리긴 했다. 태경과는 다른 의미로.
생각을 이어 가다 보니 아래쪽 감각이 심상치 않았다. 아직 히트 사이클은 멀었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예준은 어느새 티셔츠를 흠뻑 적신 식은땀을 애써 부정하며 몸을 일으켰다.
테라스 문을 열고 나가자 버석거리는 황톳빛의 겨울 잔디가 밟혔다. 몇 번 드나든 뒤로 그가 꽃보다 나무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시원하게 뻗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정원 외곽을 두르고 있었다. 키가 허리까지 미치는 작은 나무들 모두 깨끗하게 손질된 것을 보면 정원사의 손길이 자주 닿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흐트러진 곳은 작업실 테이블 위뿐이었다. 침대 또한 자신 때문에 엉망이 되는 것이 아니면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강박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강박적으로 깨끗한 그가 마음에 들었다. 반대로 섹스 도중엔 어떤 불결함도 마다하지 않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예준은 점퍼 단추를 채우며 테라스 의자에 앉았다. 낮은 담에 둘러싸인 이 거대한 집은 차라리 작은 지구나 자신이 몰랐던 어떤 세상 같았다. 익숙해진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뒤늦게 발견하고 기뻐할 자신이 그려졌다.
사람을 알아 간다는 것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려고 들면, 알고 나면 욕심이 날 게 분명했다.
오메가가 된 이후로는 작은 스쿠터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가져 보지 못했다. 햇볕에 바짝 말라 죽음을 앞둔 식물처럼, 겨우 물 한 모금에도 목을 맬 자신을 안다. 그를 떠올릴 때마다 잔잔하게 고동치는 심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점점 평정을 잃어 간다. 어떤 자극에도 무심하던 감각이 작은 균열에도 터져 나와 날뛸 것처럼 생동했다. 무한한 사랑과 승리하리라는 확신 속에 메달을 걸었던 때처럼 고조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다음은 뭐였지?
예준은 햇볕 아래에서 눈을 감았다. 까맣게 닫힌 시야가 주황빛으로 변했다.
똑똑히 기억한다.
인생의 정점 후에는, 바로 추락이었다.
*
초저녁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예준은 낮의 징후가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불안증에 걸린 사람처럼 심장이 뛰었고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열은 몸살 증상과 닮았으나 면역력의 문제는 명백히 아니었다.
예준은 간지러운 배를 움켜쥔 채 핸드폰을 들었다. 제대로 사고하기도 전에 남자에게 문자부터 찍어 보냈다.
[억제제 필요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주기가 너무 빨랐다. 알파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히트 사이클이 이토록 이르게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늑골의 통증은 다 가라앉았다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다. 이대로는 자위도 섹스도 힘들었다. 차라리 잘 듣지 않는 약이라도 먹고 버티는 편이 현명할 터였다.
삼십 분쯤 지나자 답장이 왔다.
[9시에 도착해요.]
답장하지 못한 예준이 두 다리를 배배 꼬며 누웠다. 증상이 고조되기까지 하루 이틀은 걸리는 편이었는데 이번만큼은 진행 속도가 남달랐다. 증상이 최고점에 다다른 상태에서는 억제제도 소용없었다.
남자가 돌아오기까지는 두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예준은 우려를 삼키며 남자의 페로몬이 묻은 시트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향기를 힘껏 들이켰는데도 성욕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간지러웠다.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끙끙 앓았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남자의 존재감이 떠오르는 물건들뿐이었다. 떠올리면 참을 수 없었다. 통제가 되지 않았다.
*
남자는 예정보다 십오 분 일찍 집에 도착했다. 차고 문이 열리는 소리에 예준은 겨우 침대 속에서 빠져나왔다.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에 두려운 기분까지 들었다. 문 앞에 다다른 예준은 위태위태하게 선 채 남자를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예준이 남자와 시선을 맞추고 입술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가 마른 몸을 푹 끌어안았다. 탐색하듯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향취를 들이켰다. 조금 전, 자신이 시트를 끌어안고 끙끙댔던 때처럼 그에게선 여유를 찾을 수 없었다. 동시에 밀려드는 옅은 알코올 냄새에 예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경은 답을 듣자마자 예준을 번쩍 들어 안았다. 아직 코트도 벗지 않은 남자는 침실로 직행하더니 침대 위에 예준을 내려놓았다.
“억제제 주세요. 면역제도 먹을래요.”
“억제제는 없고, 면역제도 줄 생각 없어요.”
예준이 눈을 크게 떴다. 태경은 코트를 벗으며 덧붙였다.
“내가 있는데 억제제를 왜 써. 면역제는 더더욱 줄 이유가 없어요. 페로몬을 느껴야 자극이 더 세니까.”
마치 첫 만남의 반복 같았다. 어딘가 생경하게 느껴지는 남자를 마주한 채, 예준은 그때처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슈트 차림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온 태경은 셔츠 단추만 풀고선 침대 옆 협탁을 뒤졌다.
그가 잇새에 생소한 무언가를 물었다. 우성 알파가 히트 사이클을 맞이한 오메가를 두고 콘돔이라니. 예준은 다급하게 남자의 재킷을 당겼다.
“안 돼요.”
“왜.”
“안에 해 주세요.”
태경이 슬쩍 미소 지었다.
“그렇게 쉽게는 안 되겠어.”
알파의 정액 없이는 히트 사이클을 버틸 수 없었다. 정액을 주지 않겠다니, 그와 섹스하고도 치솟는 성감을 해소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정액 없으면 안 돼요. 적어도 사흘은 계속될 텐데.”
“알아요.”
두려움에 심장이 속수무책으로 뛰었다. 태경은 이미 타액으로 젖은 예준의 입술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럼 사흘 내내 하면 되겠네.”
“못해요. 다 낫지도 않았고…. 그러면 밑이….”
“좋을 거야. 믿어도 돼.”
그가 늑골 부근을 눌러 왔다. 통증을 가늠하는 듯한 손길이었다. 예준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상처는 아물고 멍은 사라졌다. 오로지 하얗기만 한 몸을, 남자는 욕정에 가득 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취했어요?”
“취했지.”
남자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누구랑 마셨는데요?”
이어 묻는 말에 남자가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이 흥미롭게 일렁였다.
“누구랑 마셨으면.”
“혹시 그때 만났던 주선영이란 분이랑 마셨어요?”
“맞아요. 둘이 마셨어요.”
거짓 없는 대답에 왜 남자의 몸을 밀어내고 싶은 욕구가 드는 걸까. 예준은 간지러운 배를 문지르며 몸을 뒤척였다. 이미 온몸을 덮친 남자 때문에 잘 움직일 수 없는데도 벗어나려고 시늉했다.
“왜. 선영이랑 술 마시지 말까?”
“…….”
“다른 여자는 돼?”
“…잘 모르겠어요.”
자신이 관여할 수 없는 문제였다. 거부감은 주제넘은 감정이었으나 예준은 싫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태경이 예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기특하게 질투를 다 하네.”
휘어지는 입매가 야속했다. 예준은 평정심을 잃는 자신이 싫었다.
“질투 아니에요.”
“그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태경은 귀담아듣지 않고 애꿎은 제 손만 잡아 이끌었다. 손끝이 향한 곳은 남자의 셔츠 단추 위였다. 예준은 별다른 주문 없이도 잠긴 단추를 하나씩 열었다. 매끈한 속살이 드러나고 페로몬이 강해졌다. 예준은 살결 위에 고개를 파묻고픈 욕망을 잠재우며, 옷깃을 벌려 남자의 어깨 뒤로 넘겼다. 열을 품은, 육감적인 몸매를 보자 다리 사이가 젖어 들었다.
“억제제는 왜 안 주세요….”
“하고 싶으니까.”
남자가 버클을 열며 상체를 낮추었다. 곧 예준의 귓가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면역제는 어땠어?”
“좋았어요.”
“착하게 굴면 또 줄게요.”
그의 혀가 달뜬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가 귀 근처의 연한 살을 애무하자 온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손쉽게 티셔츠와 바지가 벗겨졌다. 유두를 손톱으로 긁듯이 자극한 그는 이어서 옆구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가고 발끝이 곱아들었다.
그의 손길은 폭 팬 배꼽과 골반을 거쳐 더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이미 단단히 발기한 성기를 지나 더 뒤쪽으로 들어온 손이 애액으로 젖은 구멍에 닿았다. 그가 오물거리는 모양새를 감지하듯 더듬었다.
“혼자서 해 봐요.”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할 줄 알아야지.”
얼마 전, 도와주겠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예준에게 아직 자위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예준의 손을 이끌어 엉덩이 사이로 가져갔다. 무릎을 세워 벌리게 했다. 예준은 순순히 남자의 말을 따랐다. 그는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자신의 손끝을 집요하게 지켜보았다.
“얼른.”
예준이 구멍 속으로 꾸역꾸역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입구가 부드럽게 벌어지는 동시에 격하게 조이는 힘이 느껴졌다. 분명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 힘이 상대의 성기를 자극한다는 상상을 하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어때요?”
“…조여요.”
“좋아?”
“잘….”
고작 손가락 한 마디였다. 곧, 전라가 된 태경이 예준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가 상체를 맞붙이며 예준의 손목을 붙잡았다. 구멍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온 손가락은 예준의 것이 아니었다.
구멍 안에서 중지 두 개가 비벼졌다. 더 깊이, 끝까지 들어가자 예준의 잇새에서 신음이 터졌다.
“으응!”
고개를 젖히며 숨을 토한다. 태경은 길게 드러난 예준의 목에 키스했다.
“페로몬 풀게. 숨 쉬어요.”
쾌감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페로몬이 밀려들었다. 구멍이 크게 벌어지고 안이 축축이 젖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타액을 머금은 입 안처럼 부드러웠다. 기어이 질척이기까지 하는 몸속을 처음 인지한 예준은 차마 남자의 두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이런 구멍을 싫어하는 사내는 없을 것이다. 누구든 성기를 박고 싶어 안달할 터였다.
차마 견디지 못한 예준이 손가락을 빼내었다. 태경은 여전히 예준의 몸 안에 남아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굽혀 어떤 부위를 자극하자 쾌감이 솟았다. 예준은 남자의 어깨를 움켜쥐며 몸을 떨었다.
“으, 읏!”
“이제….”
“응, 좋아요….”
부드럽게 안을 휘젓던 손가락이 순식간에 세 개로 늘었다. 예준은 페로몬에 취해 몽롱한 와중에도 거칠어진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앗, 으! 아아!”
단단한 손가락이 입구를 마구 벌리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돌리듯 휘젓고 손 전부를 안까지 넣을 기세로 쑤셔 댔다. 고통에 몸부림치자 아래뿐만 아니라 늑골까지 통증이 퍼졌다. 잠자리하며 우는 습관은 여전했다. 예준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
“흐윽, 읏, 아파요! 아파….”
예준의 두 눈에서 굴러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태경은 거침없이 핥았다. 손을 빼낸 그가 잇새로 다급히 콘돔 포장을 찢었다. 발기한 성기 위에 그것을 씌우고는, 예고 없이 다시 예준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하아! 아응!”
비상식적인 크기의 성기가 입구를 찢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페로몬에 유연해졌음을 짐작하면서도 예준은 두려움에 남자를 밀어냈다.
그러나 태경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무릎을 눌러 다리를 활짝 벌리게 하고는 한계까지 밀어 넣었다. 태경 역시 오메가의 폭발적인 페로몬을 뒤집어쓴 형국이었다. 미약하게 남은 이성은 예준의 허리를 붙잡아 고정하는 데 쓰였다. 삽입의 충격으로 늑골을 재차 부러지게 해선 안 되니까.
“으으…. 하아, 너… 너무….”
“괜찮아…. 울지 마.”
“찌, 찢어져….”
“안 찢어져. 후우…. 조금만 참아요.”
“못 참아요…. 윽, 읏! 못, 못 참겠어….”
태경이 예준의 두 다리를 모아 어깨에 걸었다. 그는 성기를 반쯤 빼낸 뒤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이래도?”
“흐으, 으…. 콘돔 이상해요…. 빼고 해 주세요. 제발….”
“너무 젖어서 안 돼.”
“흐읏…, 싫어…. 뻑뻑해서 아파요….”
“구멍이 작아서 그런 거야.”
태경이 발갛게 열 오른 예준의 무릎을 어루만졌다. 미끈한 종아리에 입을 맞추고는, 느리지만 깊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아프다며 칭얼대는 것이 귀여워 더 엄하게 직시했다.
“그렇게… 태어난 걸 어떻게… 해요….”
“하아… 그렇게 작으면서 왜 이렇게 잘 삼킬까, 좆을….”
“읏…, 으응…. 안에 싸 주세요….”
“꼬시지 마. 안 통해.”
다 해 줄 것처럼 굴 땐 언제고 왜 이제 와 야속한 말만 늘어놓는 걸까. 예준은 울컥 치미는 원망에 뚝뚝 눈물만 쏟았다. 뜨겁고 딱딱한 성기를 더 노골적으로 느끼고 싶었다. 욕망이었다. 나쁜 술수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한테도 이랬어? 해 달라고 조르고, 안에 싸 달라고 매달리고.”
추궁한 남자가 벌어진 입술을 삼키듯 물었다. 깊이 침입한 혀를 혀로 마주 감싼 예준이, 팔로는 그의 목을 감으며 매달렸다. 남자는 입술이 홧홧하게 부풀 때까지 몰아붙이다가 쪽, 쪽, 소릴 내며 목덜미와 어깨를 빨았다. 스친 모든 곳에 발간 흔적이 남았다.
“하아, 아, 그, 그만….”
성기를 빼낸 그가 편편한 가슴을 모으듯 움켜잡았다. 흥분해 툭 튀어나온 유두를 잘근 깨물고 아프도록 흡입했다. 혀끝이 피부 위를 덧그렸다. 아래로 점점 내려가는 통에 성기가 빠져나가 구멍 안이 텅 비었다. 예준은 정신없이 입구를 오물거렸다.
“다시 자위해 봐요.”
남자가 이번엔 손가락 네 개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좀 세게 쑤셔 봐.”
“응, 으응, 아…, 이렇게요?”
“더 깊이.”
“하아, 하! 으, 으응…!”
태경은 예준의 오금을 잡은 채 구멍 주변에 얼굴을 파묻었다. 연한 허벅지 살을 물고 깨물다가, 구멍을 쑤시느라 혼이 빠진 예준을 보기 위해 시선을 들었다. 페로몬을 전부 쏟아 냈음에도 예준은 오로지 흥분할 뿐 부작용을 겪지 않았다. 고운 심성에 비해 지나치게 난잡한 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예준을 스쳐 간 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태경은 재차 물었다.
“그 사람들한테도 내 앞에서처럼.”
예준은 태경이 말을 끝맺기 전에 답했다.
“음, 읏, 그런 적 없어요.”
“…….”
“이렇게 흥분한 적, 하아…, 없어….”
답하면서도 끊임없이 아래를 쑤시던 예준이 일순 멈추었다. 움찔, 떨리는 성기를 발견한 태경이 기둥을 쥐고 흔들었다.
“하아, 하아…!”
몇 번 훑어 주자 예준의 성기에서 울컥 정액이 쏟아졌다. 그가 바르르 몸을 떨었다. 격한 숨이 터졌다. 정액을 윤활제 삼아 성기를 더 흔든 태경이 다시 예준의 몸 위로 올라왔다.
“잘했어.”
뺨에 입 맞춘 그가 덧붙였다.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힘이 빠져 허술하게 안기는 몸을 조금 더 강하게 당겼다. 늑골이 눌리고 성기와 허벅지가 마구 비벼지는데도 별다른 신음이 없는 걸 보면 회복이 빨랐던 모양이다. 희소식이었다.
예준은 부끄러워 느릿느릿 엎드렸다. 엉덩이를 곧추세운 뒤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자위 말고 섹스하고 싶어요….”
태경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늑골을 감싼 그가 남은 손으로 예준의 한쪽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성기와 손으로 쉴 새 없이 쑤셔진 구멍이 뻐끔대며 삽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구멍을 혀로 핥아 더 질척하게 축였다. 곧 예준의 예민한 감각이 삽입을 감지했다. 푹, 찔렀다가 빠져나가고 다시 안을 찌르며 들어오는 성기 탓에 배가 불룩이 부풀었다.
“하! 아!”
자위에 비할 바가 안 되는 쾌감이었다. 탄력 있게 늘어난 구멍이 성기를 빨아들여 조일 때마다, 도드라진 핏줄이 내장 속을 거칠게 긁었다. 자극 점을 비비거나 찌를 때는 눈가가 찡해지며 온몸이 덜덜 떨렸다. 사정의 쾌감과는 명백히 다른 그 감각이 전신의 신경을 날카롭게 타고 흘렀다.
“흐응! 아, 좋, 좋아…. 좋아. 아읏!”
잘록한 허리와 도톰하게 솟은 엉덩이가 힘없이 흔들렸다. 두꺼운 뱀처럼 안을 파고든 성기는 갈 수 있는 가장 안쪽까지 닿아 고통을 자아냈다. 흔들림이 상식을 벗어나자 늑골이 점점 아팠다. 예준은 끙끙 신음을 흘렸다.
태경이 그런 예준을 모로 눕히고 몸을 겹쳐 파고들었다. 남자의 손에 강제로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게 된 예준은 애꿎은 베개만 끌어안고 신음을 쏟았다.
“아, 아읏! 흥! 으!”
회음부에 손을 가져다 대자 남자의 흉포한 성기가 손끝에 걸렸다.
“하아…. 진짜 커….”
“알아.”
“단단해….”
“좋아?”
“응….”
가슴이 두근두근 뛸 때마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페로몬이 느껴졌다. 예준은 버겁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제 것과 남자의 페로몬, 쏟아지는 숨, 정액, 음부를 적신 애액의 냄새가 한데 섞였다.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성기가 단단해졌다. 허벅지에 경련이 일었다.
“흐응! 아앗, 앗…, 아아!”
“하아….”
“으읍, 응! 으, 응…!”
그럼에도 도저히 익숙해질 만한 사이즈가 아니었다. 예준은 퍽, 퍽, 내리꽂히는 성기를 받아 내다 결국 비척비척 시트 위를 기었다. 몸부림칠 때마다 남자의 손에 의해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지만, 삽입이 광적으로 지속될 땐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으읏! 너, 너무, 너무 빨라요! 아아!”
“하아…, 착하지….”
“아아! 읏….”
시트를 움켜쥔 예준의 숨이 꺽꺽 넘어갔다. 무릎으로 기어 침대 가장자리까지 도달한 예준은 성기가 폭 빠져나가자마자 참은 숨을 토해 냈다. 당기기보다 더 다가가길 선택한 태경 덕분에 예준은 도망가듯 더 앞으로 향했다.
그대로 골반만 붙잡아 박아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으나 태경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가뿐하게 예준을 당겼다. 그렇게 품 안에 안고 침대를 빠져나온 그는 예준이 벽면에 등을 기대게 했다. 한 손으로 예준의 몸을 지탱하고, 남은 한 손으론 두툼한 성기를 잡아 구멍에 비볐다.
예준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매달렸다. 중력의 힘으로 성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무리 없이 끝까지 들어온 성기가 배 속을 아프게 찔렀다. 태경은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도록 달콤하게 키스했다. 더불어 허릿짓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으읍, 응, 으! 아앗, 아…!”
“후….”
“흡, 읏!”
푹푹 쳐올리는 힘이 상당했다. 말랑한 허벅지 아래 닿는 단단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관능적이었다. 예준은 삽입에 몰입해 잔뜩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거칠게 욕을 내뱉거나, 입술을 짓씹거나, 불시에 시선을 마주하는 대담함에 귀두 끝이 아릿아릿 저렸다. 빨아 줬으면…. 볼이 폭 패도록 흡입해 줬으면 하는 바람은 그와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만, 오럴 섹스를 상상하는 행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자극 점을 쉴 새 없이 찔리자 낯선 쾌감이 고개를 든 탓이었다. 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사정할 것 같아서 자꾸만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저 혼자 꿈틀대는 성기를 그가 눈치채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으, 응, 읏!”
어찌나 깊고 세게 쑤시는지, 이대로 힘을 놓아도 남자의 완력 때문에 아래로 떨어질 리 없을 것만 같았다. 예준은 남자의 입술과 성기를 동시에 받으며 너머에 있는 욕실을 훔쳐보았다. 사정감과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요의에 더 가까웠다. 섹스 도중에 실수하는 것만큼 최악의 일은 없을 터였다.
“하읍, 읏! 저… 화장실….”
“하아…. 뭐?”
“응, 읏….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제야 성기를 빼낸 태경이 예준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성기를 움켜쥔 채 기대선 예준은 땀에 젖은 남자의 복부와 허벅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흉포하게 일어선 성기까지, 놀라운 몸이었다.
“여기가 간지러워?”
요의가 강해져 금방이라도 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화장실에 보내 주는 대신 더 바짝 다가서기만 했다.
“으응, 하, 만지지 마요…. 쌀 것 같아요….”
귀두를 엄지로 꾹 누른 그가 웃었다. 예준은 저도 모르는 사이 온몸으로 경련하고 있었다. 태경은 그 징조를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오줌을 쌀 것 같으면 여기가 아파야지.”
그가 아랫배를 꾹 눌렀다. 성기를 품고 있을 땐 아프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그럼… 또, 또 싸고 싶은 것 같아요.”
“사정?”
“빨아 주세요.”
“…….”
“자지 빨아 주세요….”
태경이 예준의 몸을 돌려세웠다.
“나 믿고 한 번 싸 봐요.”
그가 뒤에서 삽입하며 성기를 세게 움켜쥐었다. 오럴 대신 삽입을 선택한 그는 아래에서 위로 꽂듯 성기를 박기 시작했다. 한껏 숨을 들이켠 예준은 구멍에 닿는 음모를 느끼며 발꿈치를 들썩였다. 퍽, 퍽, 그가 엉덩이를 쳐올릴 때마다 몸이 허공에 들리는 기분이었다.
“윽, 으응!”
“참지 말고, 뱉어 봐요.”
“흐, 안 돼, 안 돼요….”
“싸도 돼.”
앞과 뒤를 빠르게 자극하자 요의는 더 심해졌다. 예준은 맨눈으로 자신의 떨림을 볼 수 있었고, 사정할 때처럼 격하게 호흡을 쏟아 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나며 정수리 끝까지 열이 올랐다. 눈앞이 흐려지고 배가 미치게 간지러웠다. 남자의 따뜻한 손안에 감긴 성기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아아!”
툭 터져 나온 신음을 끝으로,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
예준의 요도 입구에서 맑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예준은 오줌 줄기처럼 긴 액체를 쏟으며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벽에 이마를 찧은 채로 미친 듯이 온몸을 떨었다. 절정에 이르렀음에도 숨이 턱 막혀 쾌감을 분출할 수 없었다. 쾌감은 몸 안에 갇힌 것처럼 끝없이 증폭했다.
“하, 하아….”
열 오른 어깨에 남자의 숨결이 닿지 않았다면 그대로 정신을 잃었을지 모른다. 맑게 뻗어 나온 액체가 바닥과 몸을 흠뻑 적셨다. 제 성기를 쥐어짜듯 흔든 태경은 소강상태가 되자 행위를 멈추었다.
충격에 빠진 예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 황홀한 쾌감이 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어서였다. 삽입도, 성기를 자극하는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왜 하필이면 그 앞에서 이런 이상한 짓을 벌이게 된 걸까.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그는 여전히 제 몸속을 드나들고 있었다.
“늘 환장하게 조여 대는데.”
“…….”
“분수 쌀 땐 거의 씹어 먹네….”
그즈음, 예준은 그가 절정에 도달하기 직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심장을 멎게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짙은 페로몬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그가 울혈이 맺힌 예준의 눈두덩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입가마저 틀어막고 쉼 없이 삽입했다. 안을 찢을 듯 쑤시고 구멍을 더 벌리려는 듯 거세게 휘저었다.
“으응, 앗! 흣, 으아!”
예준은 아프지만 도저히 그만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너무 좋아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두 손을 등 뒤로 결박당하면서도 끝끝내 남자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런 예준을 한계까지 몰아붙인 태경이 이윽고 탄성 같은 신음을 흘렸다.
“하아…!”
불쑥 성기가 빠져나갔다. 그가 콘돔을 벗겨 냈다. 엉덩이 사이에 귀두가 비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뜨끈한 정액이 쏟아졌다. 태경은 끈끈한 점액질을 깊게 팬 골과 허벅지 아래에 비비며 길게 파정했다.
“하으, 하아….”
“후….”
끝내, 안에 싸지 않았다. 태경이 후희를 충분히 즐긴 후에 예준의 몸을 돌려세웠다. 툭, 부딪친 이마는 아프지 않았다. 그가 소년처럼 웃으며 눈을 맞추었다.
“우리, 먹지도 자지도 말고 이 짓만 해.”
고양된 눈빛이 아름다웠다. 속삭이는 입가가 시원하게 휘어 있었다.
*
온몸을 잠식한 열감은 도무지 사그라지지 않았다. 직전까지 가쁘던 숨은 잦아들었으나 아직 물 온도가 따뜻했다. 욕실 내의 희뿌연 수증기가 이전의 행위를 증명하고 있었다. 예준은 푹 젖은 눈을 감았다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태경이 맨 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가 귓가에 입술을 대며 물었다.
“자는 거 아니죠?”
“…네. 그냥… 좀….”
“좀?”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요….”
예준은 태경의 맨 가슴에 뺨을 비볐다. 욕조 안에서 남자의 몸 위에 엎드리듯 안긴 채 수 분을 보냈다.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몸 이곳저곳이 경련했다.
내내 계속된 섹스의 결과였다. 태경은 콘돔을 여덟 개나 쓴 후에야 정액을 주었다. 마지막 섹스를 마친 후 욕실에 들어와서도 몇 번이나 시달렸다. 히트 사이클로 성감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는 쪽은 태경이었다.
“자고 싶어?”
“네, 그리고 먹고 싶어요…. 너무 배고파요….”
두 시간도 안 되는 쪽잠으로 버틴 지 이틀. 물과 약간의 술, 정액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집 어디에서든 붙잡혀 받아 주고 나니 겨우 욕실이었다. 이제 더러워진 몸을 씻고 나면 정말 해방일 터였다.
“마지막이었어. 여기서 나가면 먹여 줄게요. 먹고 나서 같이 자.”
확답을 주자 살 것 같았다. 예준은 고개를 끄덕이곤 남자의 몸을 푹 끌어안았다.
뚝, 뚝. 어디에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통증을 참지 못하고 뒤척일 때마다 그는 허리를 지지해 주거나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 주었다. 남자 둘이 몸을 비비고 있는데도 욕조 안은 공간이 제법 남았다. 모텔이 아닌데 이토록 너른 욕조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나 없는 동안 뭐 했어요?”
태경이 물었다. 예준은 고요하던 집 안 풍경을 떠올렸다. 그러자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낯설었는지 실감 났다.
“이상하죠…. 매일매일 일하면서 하루만 푹 쉬어 봤으면 좋겠단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닌데…. 막상 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돌아다녔어요. 대표님 작업실도 가 보고, 거실에서 뒹굴기도 하고 정원도 둘러보면서…. 몸이 편하니까 자꾸 쓸데없는 생각만 나서… 별로였어요….”
“혼자 있는 거 안 좋아하나 봐.”
혼자건 여럿이건, 어떤 상태가 좋다는 생각은 딱히 해 보지 않았다.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예준이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가슴에 턱을 대자 고개가 젖혀지며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는 눈을 맞춘 뒤, 내내 울어 짓무른 눈꼬리를 어루만졌다.
“너무 심하게 몰아붙여서 미안해요.”
사과에 이어 눈가에 닿는 입술이 아직도 뜨거웠다.
“하아…. 뜨거워….”
“어디가 뜨거운데?”
“다요, 다…. 아, 진짜 뜨거워 죽을 거 같아….”
다리 아래 닿은 남자의 허벅지도, 아직 딱딱한 성기도, 입술도, 숨결도, 물 온도도, 가라앉지 않는 성감까지도 너무 뜨거워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준은 숨을 몰아쉬며 열감을 낮추려고 노력했다. 상체를 일으켜 남자의 품을 벗어났다. 공기 중에 몸을 더 많이 노출하자 겨우 숨이 트였다.
무심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빨아 댔는지 두들겨 맞았을 때 못지않게 멍투성이였다. 온통 얼룩덜룩한 자국 아래, 비정상적으로 튀어나온 유두, 먹지 못해 더 심하게 드러난 갈비뼈까지 보자 그가 왜 이런 몸에 안달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뻐.”
속삭이는 말까지 곧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가 손끝으로 몸 위를 덧그렸다.
“피부가 약해서 흔적이 잘 남는 것 같은데.”
“보기 싫어요….”
“예쁘기만 해.”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이어지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차라리 가리는 편이 옳다고 여겼기에 예준은 다시 남자의 품에 안겼다.
태경은 몸을 끌어안은 채 등 위로 손을 옮겼다. 건반을 치듯 가볍게 손끝을 두드렸다. 거기 닿는 피부 위도 엉망진창이긴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디든 깨물리고 빨렸으니까. 등허리를 타고 내려간 손이 엉덩이를 꽉 틀어쥐었다. 더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손끝을 감지하자 예준의 몸이 들썩였다.
“아…!”
만지기만 해도 쓰라렸다. 얼마나 부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예준은 순식간에 눈물을 쏟기 일보 직전처럼 격양되었다.
“아… 아파….”
태경은 손을 떼지 않고 고개를 기울였다. 달래듯 어루만지는 손길과 함께 달콤한 키스가 이어졌다. 입술도 부어 쓰라리긴 마찬가지였으나, 밀려오는 성감 탓에 예준은 뜨겁게 들어차는 혀를 마다할 수 없었다.
입 안 점막을 핥고 부드럽게 입술을 씹은 그가 코끝을 비볐다. 예준은 다시 입 속을 파고드는 혀를 혀로 얽으며 넘어오는 타액을 삼켰다. 키스가 끝났을 땐 입 주변이 화끈거렸다.
예준은 뒤늦게 감았던 눈을 떴다. 잡아먹히고 오롯이 삼켜진 기분이었다. 축축한 수증기, 식지 않는 체온이 버거워 입을 떼려던 찰나.
“이대로 있다간 기절하겠어.”
먼저 선수 친 태경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 들려 나간 예준은 신음과 함께 욕조 가장자리에 기대앉았다.
곧,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너무 시원해서 온몸을 떨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물줄기가 버거웠으나 오히려 숨쉬기는 더 편했다.
“정액 빼자고 하면 거절할 거고.”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은 그가 물을 미지근하게 조절해 몸을 씻겨 주었다. 구석구석, 은밀한 부위까지 말끔히 씻긴 뒤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감싸 들어 올렸다. 곧장 거실로 향한 그는 도톰한 러그 위에 예준을 내려놓았다.
드레스 룸에 들러 티셔츠와 트레이닝팬츠를 갖춰 입은 남자가 곧 곁에 앉았다. 비척비척, 힘없이 흔들리는 몸을 닦아 주기만 해도 분홍빛 성기가 꿈틀댔다. 겨우 다리를 모은 예준이 수치심 어린 눈으로 태경을 보았다.
“히트 사이클… 아직 안 끝났어요.”
“알아. 그래도 섹스는 더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동그랗게 고이는 눈물이 아직 발정기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예준이 입술을 축이자 태경은 달래듯 말했다.
“페로몬이 너무 강해서 나도 힘들어. 더하면 다칠 거야. 계속 같이 있어 주긴 할 테니까.”
“아직도… 애액이 나와요.”
“괜찮으니까 여기 앉아 봐요.”
태경이 말과 동시에 예준을 들어 제 앞에 앉혔다. 성감의 증거를 애써 무시하며 몸을 닦아 주고, 젖은 머리카락에 헤어드라이어를 가져다 댔다. 미지근한 바람으로 말려 주자 예준은 금세 얌전해져 고개를 기대었다.
“이러면 다 못 말려.”
“대충… 해 주세요….”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을 여력도 없었다. 원망스러운 마음과 반대로 페로몬에는 충실히 이끌렸다. 어느새 잘 갈무리된 페로몬이 콧속을 자극하고 있었다. 아래가 젖건 말건 더 가까이 가고 싶은 충동에 이끌렸다. 예준은 결국 태경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어렵사리 머리카락을 말려 주는 모습을 나태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어쨌든 안 떨어질 거지, 너.”
“음….”
머리카락을 다 말린 태경은 굳이 예준의 뒤통수를 헤집어 놓았다. 예준은 태경이 건넨 옷을 느릿느릿 꿰입은 뒤에 다시 안겨 들었다.
몸이 보송보송해지자 피로가 몰려왔다. 머리만 대면 잘 수도 있을 듯한데, 그보다는 공복감이 더 괴로웠다. 너른 어깨에 턱을 대고 눈을 맞추자 단번에 마음을 읽은 태경이 뺨에 입술을 눌렀다.
“죽이라도 먼저 먹자.”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인 예준은 이번에도 태경에게 안겨 주방으로 향했다. 스툴에 예준을 앉힌 태경은 얼려 놓은 죽을 꺼내 냄비에 옮겼다. 그다지 푹신하지 않은 스툴이 오히려 아파서, 예준은 어기적어기적 태경에게 다가갔다. 날개뼈 사이 폭 팬 등에 이마를 기대자 그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 안아 줘.”
주문에 예준은 두 팔로 태경의 허리를 감쌌다. 자꾸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힘들었지만, 곧 고소한 죽 냄새가 퍼져 견딜 만했다. 불편하게 매달려 있는데도 태경은 아무렇지 않게 주방을 오갔다.
태경과 나란히 앉은 예준은 순식간에 죽 두 그릇을 비워 냈다. 태경이 못 말린다는 듯 물었다.
“더 줄까?”
“아니….”
예준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답했다. 스툴이 불편하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태경이 예준을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아릿한 성감 때문에 괴로운 와중에도 예준은 남자의 티셔츠에 코를 묻은 채 페로몬을 들이켰다.
“간지러운데.”
“좀 참아 주세요…. 냄새 좋아서요….”
그러자 태경 또한 차분히 예준의 목덜미에 코끝을 묻었다. 그는 묻어 두었던 해답을 찾기 위해 입술을 뗐다.
“면역제 먹으니까 뭔가 달랐어?”
대수롭지 않게 질문을 이해한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로몬이 거의 안 느껴졌어요. 아무리 알파라고 해도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는 이상 신경 안 쓰일 것 같았어요…. 발현 이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머리도 맑아지고….”
“그런 거 말고.”
“…예?”
예준이 내리깐 시선을 들었다. 태경은 미소를 지운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어땠는지 알고 싶어.”
“…….”
“페로몬 없는 이태경이 어땠는지 궁금하다고.”
페로몬에 영향을 받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
예준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에게 이끌리는 것이 페로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은 탓이었다. 달콤한 향취 없이도 그는 누구나 탐을 낼 만큼 매력적인 남자였다. 강인하지만 부드럽고, 다정한 한편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순간들이 있었다.
발현한 이후, 예준은 몸이 아니라 마음을 얻기 위해 도전하는 상대를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당황스럽지만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흥미로웠다. 오감 또한 말초적으로 자극당할 때와 확연히 달랐다. 그는 지루하고 쉼 없는 예준의 쳇바퀴 속으로 뛰어든 단 하나의 변수였다.
“별로, 다르지 않았어요.”
밀고 당기기엔 재능이 없다. 거짓말이 먹힐 남자도 아니었다. 진실을 내놓은 예준은 무력하게 태경을 바라보았다.
“대표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예준은 어쩌면 태경의 여유로움을 동경했다. 무던하게 살면서도 아직 겁나는 것이 많은 저와 달리, 그에겐 어떤 고난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듯한 강직한 면이 있었다. 언젠가 그려 보았던 어른의 모습 그대로. 그런 느긋함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진 것이 많고 누릴 배짱이 있어야 했다. 하물며 태경은 타고난 우성 알파이자 재력가였다.
“고백이에요?”
태경이 입매를 휘며 물었다. 하염없이 침잠하던 예준은 별안간 얼굴을 붉혔다.
“객관적인 사실이니까요….”
애꿎은 뒤통수만 긁적였다.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무엇도 허투루 지나치는 법이 없는 그라는 걸 잠시 망각했다.
“솔직한 건 좋은데 사람 구슬리는 법은 좀 배워야겠어. 배운다면 꼭 나한테만 써먹고.”
예준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남자가 다가와 깊게 체취를 들이켰다.
“밀어붙이는 건 예준 씨가 내 마음 알아주길 바라서지 겁주려는 의도가 아니에요. 나는 당장 직접적인 관계 변화가 없다고 해서 불안할 만큼 어리지도, 미숙하지도 않거든.”
미숙하다.
예준이 생각하기에 그 단어만큼 자신을 잘 대변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단지,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을 아무것도 아닌 걸로 치부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뭐가 그렇게 부족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말했듯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데 조건은 필요 없어요.”
못난 자격지심일지도 모른다. 가슴속에 단단히 뿌리 박혀 달콤한 말로는 상쇄할 수 없었다.
“그때도 말했듯이 저는 대표님이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먹혀드는 기색이 아니었다. 초조해진 예준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어른들 말씀에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야 한다는 데는 다 이유가….”
“예준아.”
“네?”
“너 꼰대야?”
눈을 가늘게 뜬 태경이 예준의 뺨을 꼬집었다. 불편해하는 예준을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예준을 안아 든 채 볕이 잘 드는 거실을 향해 나아갔다. 소파 위에 내려놓자 습관적으로 양반다리하는 예준이었다.
“사랑을 쟁취해서 결혼에 골인하자는 것도 아니고, 가진 거 다 버리고 야반도주하자는 것도 아니고, 내 아이 낳아 달란 것도 아닌데. 대체 뭐가 그렇게 어려울까.”
태경이 소파 아래 자리 잡으며 말했다. 가볍게 턱을 괸 그가 곤란해하는 예준을 올려다보았다. 예준은 남자를 설득하려다가 도리어 설득당했다.
“어때요. 내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은데.”
“제 마음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오메가는 알파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하니까….”
“그렇게 가지는 건 아무 감흥 없어. 나는 예쁜 사람 데리고 인형 놀이하고 싶은 게 아니니까.”
오메가를 노예처럼 굴복시켜 갖는 알파들도 많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태경은 연거푸 고개를 가로저었다.
“갖고 놀 거였으면 그런 일에 익숙한 오메가랑 놀았겠지. 아무리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 앞에서 괜히 힘 뺄 필요 있겠어요?”
태경이 예준의 무릎을 감싸 쥐었다. 간지러워 몸을 떤 예준은 금빛 노을이 완연히 드리운 거실을 바라보았다. 그 빛을 따라가 다시 태경을 보자 아름다운 실루엣이 그려졌다. 촉촉이 젖은 채 자신을 응시하는 관능적인 남자. 군침이 돌고 만져지고픈 충동이 일었다. 물러설 수 없었다.
때맞춰 태경이 자신의 가슴 가운데를 가리켰다.
“난 너 보면 여기가 막 찌릿찌릿한데.”
예준에게는 묵직한 고동에 가까웠다. 때로는 눈가에 열감이 차오르기도 했고, 가끔은 회의적일 만큼 본능적인 욕구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대체로는 낯설었다. 귀가 아플 만큼 큰 박동 소릴 듣고 있자면, 꼭 끝도 안 보이는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든 기분이었다.
“넌 아닌가 봐.”
예준은 뜸을 들였다. 고백하자면, 그에게 빠지기 두려웠다. 사실을 인정하면 돌이킬 수 없을 터였다.
“서로 바쁘니까 일 마치면 겨우 얼굴 보는 정도겠지만, 뭐 그 정도도 괜찮아. 가끔은 술 같이 먹고 늦으면 누구 집에서든 자고 출근해도 좋고. 때로는 무리하게 시간 내서 근교로 여행 다녀와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히트 사이클, 러트, 그런 거와 관계없이 끌리면 섹스하고….”
“…….”
“내가 바라는 건 그 정돈데. 너 이미 그럭저럭 그러고 있는 건 알지?”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몸을 일으킨 태경이 소파 위로 올라왔다.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더 깊숙이 밀어 넣은 그가 지척에서 멈추었다. 직선으로 뻗은 속눈썹이 눈앞에 보일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태경은 그가 예준의 몸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일 목에 키스했다.
“그쯤하고 받아 줘.”
눈을 볼 수 없는데도 손끝 발끝이 저릿했다. 무너지는 말끝에 마음이 동하고 촉촉하게 닿는 입술에 갈증이 일었다. 얼마간 뻗대던 예준이 남자의 옆구리에 양손을 댔다. 도톰한 혀끝이 목을 자극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대신, 틈을 두지 않고 몸을 맞붙였다. 태경은 순진한 어린애에게 사탕을 쥐여 주듯 덧붙였다.
“데이트 끝나면 매일 집에 데려다줄게.”
“어리지도 않고… 미숙하지도… 않다면서요….”
움찔 떠는 어깨, 숨과 함께 퍼지는 웃음소리가 소년처럼 싱그러웠다.
“급하기는 하지.”
털어놓은 태경의 숨이 가빠졌다. 점점 농밀해지는 애무에 예준은 가물가물 눈을 감았다 떴다. 티셔츠 속으로 들어온 손이 미끈한 배를 쓰다듬었다. 그 손이 바지 고무줄을 비집고 들어왔을 때, 예준은 새끼 강아지처럼 끙끙대기 바빴다.
“대답 안 했어, 아직.”
목에 이어 턱을 잘근잘근 씹은 그가 말했다. 예준은 여전히 고민했다. 끝내 빠지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저는… 좀 미숙해… 요….”
“하아…. 아닐걸….”
그저 지분거리던 태경이 예준의 몸 위로 올라앉았다. 무릎 사이에 예준을 가둔 그가 소파 등받이 윗부분에 두 손을 짚었다. 예준은 제 눈앞에 불룩 솟은 남자의 앞섶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아주 미숙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답했다. 종용 없이도 남자의 팬츠 고무줄을 당겨 벗겼으니까.
남자는 손을 뻗어 어설프게 열린 예준의 입술을 벌렸다. 다정하지만 어딘가 위압적인 시선이 내리깔렸다. 달뜬 손끝이 주문을 걸듯 젖은 입 안을 더듬는다. 또렷하고 깊은 두 눈을 보았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흐트러지는 시선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쪽, 입술을 모아 입 속 깊이 들어온 손가락을 빨았다.
“네, 해야지.”
확답으로 무엇이 바뀔지 알 수 없었다. 목구멍을 뚫고 튀어나올 듯한 심장 탓에 눈가에 물기만 맺혔을 뿐. 예준은 입 안에 고이는 침을 겨우 삼키며 답했다.
“네.”
히트 사이클의 위력이었다. 순종적인 대답에 남자는 흡족히 웃었다.
*
태경의 집을 나오던 날, 예준은 마지막 검사를 받았다. 아직 아물지 않은 흉은 섹스의 여파일 뿐, 다쳤던 곳은 모두 회복했다는 결과를 얻었다. 힘주어 늑골을 눌러도 아프지 않았고 걷는 것도 수월했다. 돌아가면 바로 일을 시작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남자는 병원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혼자 집에 가도 괜찮다고 말했음에도 곧이듣지 않았다. 한창 업무 시간일 오후 세 시에 남자를 다시 보게 된 것이 예준은 퍽 부담스러웠다.
로비로 나오자마자 태경이 차에서 내렸다. 예준은 다쳤을 때처럼 부축해 주려는 그를 만류했다.
“다 나았대요.”
“아예? 깨끗이?”
“네. 일상생활 하는 데는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했으니까 이 손 놓으셔도 돼요.”
그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예준의 손을 이끌었다.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오른 남자가 제 몸 구석구석을 살피는 걸 예준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 큰 서울, 대학 병원, 시선이 쏟아지는 곳 한가운데에서도 보이는 게 저밖에 없다는 듯 구는 그가 신기했다.
“옷은 예준 씨가 자주 입었던 걸로 챙겨 뒀어요.”
“아, 그건 대표님이 사신 거니까 굳이 저 안 주셔도 돼요.”
“그렇다고 내가 입으면 어떤 꼴이겠어.”
“그건 그렇지만….”
예준은 머쓱하게 웃었다. 옷장을 가득 채운 새 옷 중, 남자의 사이즈에 맞을 법한 옷은 단 한 벌도 없었다.
“절반은 그대로 뒀으니까 내 집에 왔을 때 입으면 돼. 비밀번호 잘 기억했죠?”
“네….”
“벨트 매요.”
말과 달리 그는 손수 줄을 당겨 안전띠를 매 주었다. 머리카락 끝에 곧 남자의 손길이 닿았다. 아문 상처를 가늠하는 듯한 눈빛이 다정했다. 가만히 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자, 뺨을 문지르고 물러난 그가 핸들을 쥐었다.
예준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낯설게 느껴지리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남자의 집에서는 검진 때를 제외하면 내내 집 안에만 머물렀던 탓에, 정원 외의 바깥 풍경을 거의 보지 못했다. 병원과 남자의 집을 오가는 길이 단칸방으로 향하는 길목보다 익숙하다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바쁠 것이란 짐작이 사실인 듯 남자에겐 계속해서 연락이 왔다. 폰 진동을 여러 번 무시하는 장면을 보고 예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좀 걷고 싶은데 대로변에 세워 주실래요?”
그가 눈을 맞춘 뒤 턱을 문질렀다.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추운데.”
“바쁘시잖아요.”
“바쁜 게 대수야.”
“그러다가 또… 혼나요.”
“주선영한테?”
질투는 어른스럽지 못하고 제 어수룩함만 더 강조하는 꼴이 될 것이다. 예준은 거북한 마음을 차분히 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그가 원한 답은 아닌 모양이었다. 허탈하게 웃은 그가 차량 시계를 확인했다. 때맞춰 한 번 더 진동이 울렸다.
“저 어린아이 아니에요. 집 정도는 잘 찾아갈 수 있어요. 저번처럼 취한 것도 아니고요.”
일전, 몰래 뒤를 밟았던 그가 발견한 자신의 모습은 떳떳하지 않았다. 술 때문에 뻔한 집 비밀번호를 까먹어서 바보처럼 굴었으니까.
“정말 괜찮아요. 얼른 가 보셔야 하잖아요.”
히트 사이클을 무사히 보냈다. 지나치게 체력을 낭비했다는 사실만 빼면 다른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이상적으로 보낸 발정기였다. 형질을 지녔다는 사실이 수치스럽지도, 저주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예민하게 발달한 감각이 사실은 축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황홀한 섹스였다.
“알았어. 여기 세워 줄게요.”
대로변에 차를 세운 남자는 먼저 운전석을 비웠다. 차체를 빙 돌아온 그가 길게 뻗은 오르막을 바라보았다.
“괜찮겠어?”
“저 이래 봬도 운동했던 사람이에요.”
“알지. 도복 입은 거 귀엽더라.”
뚱딴지같은 소리에도 반감이 들지 않았다. 그가 도복 차림의 자신을 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어차피 아는 사람이 많으니 특별하게 여길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도 예준은 남자의 태도가 낯설었다. 찬 바람에 상기된 제 뺨을 그러쥔 그는 마치 헤어지기 싫은 사람처럼 뜸을 들였다. 자꾸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도 먼저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알파와, 남자와, 그런 끈끈한 헤어짐을 맞이해 보긴 처음이어서, 예준은 무척 간지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날씨 추워요.”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안아 줄까.”
“어서 가 보셔야 할 것 같다고요.”
에둘러 거절당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는 느긋함에 결국엔 자신이 적응해야 할 터였다.
“가 볼게요.”
“들어가면 전화해요.”
포옹도 키스도 없이 가만히 지켜보는 얼굴에 여전히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절박하지 않은 입술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렀다.
“다음엔 같이 영화 볼까요.”
아무리 둔해도 그것이 데이트 신청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예준은 뜨겁게 달아오른 귓불을 감추며 답했다.
“저 일 때문에 늦게 끝날 것 같은데….”
“심야 영화도 괜찮아.”
그러고 보니 발현한 이후에는 한 번도 영화를 본 적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영화관은 더더욱 가 본 적 없었다. 스쿠터를 타고 지나치다 높은 간판만 올려다보았을 뿐.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무언가를 누리는 것. 데이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한데도 대답을 내놓기는 어렵지 않았다.
“좋아요.”
꾸벅 인사한 예준은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위로 올라섰다. 그답지 않고 저답지 않은 것투성이다. 깜빡, 깜빡, 정차한 차량의 비상 깜빡이 소리보다 자신의 심장 박동이 더 빨랐다. 가슴 깊은 곳의 동요를 들키지 않길 바라며 예준은 별다른 인사 없이 돌아섰다.
그는 멀어지는 저를 붙잡지 않았다. 용기 내어 돌아보았을 때, 달아오른 얼굴을 무심히 가리며 겨우 손만 흔들어 보였을 뿐이다.
*
그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집엔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예준은 한바탕 청소를 마친 후 동난 라면이라도 사 오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남자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 계절은 완연한 겨울로 바뀌었다. 12월의 밤은 초겨울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무척이나 추웠다. 얇은 옷차림이 후회될 정도로 매서운 바람 탓에, 예준은 언 뺨을 연거푸 문지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 근처 마트에 들러 제일 싼 달걀과 라면, 소주 한 병, 식빵을 샀다. 제대로 해 먹기는 여러모로 여유가 없어서 일 가기 전이나 다녀온 후에 가볍게 요기할 것들만 사서 돌아왔다. 소주는 외롭거나 추울 때 한 잔씩 하기 좋으므로 빼놓을 수 없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음에도 안락한 생활을 향한 미련은 옅었다. 다시 적응할 필요도 없었다. 원래의 제자리가 이곳 단칸방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예준은 아무런 동요도 느끼지 않았다.
문제는 마트에 들렀다 온 뒤에 일어났다. 예준은 어둑어둑한 도로를 따라 걷다가 낯선 형체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가로등이 부실하여 처음에는 시커먼 덩어리로 보이던 그것이, 사실은 제 스쿠터임을 깨닫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잠깐 사이, 낮에 닦아 놓은 스쿠터가 넘어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예준은 핸드폰 플래시를 켜 주변을 밝혔다. 깨어진 유리 때문에 스쿠터 근처에선 자박자박 자갈 밟는 소리가 났는데, 아무래도 스쿠터 헤드라이트가 깨져 바닥에 떨어진 듯했다. 플래시로 스쿠터를 더 가까이 밝히니 현장은 처참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깨부순 흔적이 완연했다.
“…….”
뺑소니 사고 따위가 아니었다. 망치나 둔기로 두드리지 않고서야 얼마 전 수리를 마친 스쿠터가 이 정도로 망가질 리 없었다. 배달 음식을 담는 뒷좌석은 형체도 없이 일그러졌고 사이드미러도, 핸들 손잡이도 빠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욕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자명했기에.
집을 비운 동안 집 앞에는 또 꽁초가 쌓였고 불쾌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안으로 침입한 정황은 없었으나, 자신이 내내 집을 비웠다는 사실을 윤도하가 모를 리 없었다. 어쩌면 남자의 집을 도피처로 삼았다는 사실까지 알고 벌인 짓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통행하는 사람들이나 차량에 폐를 끼쳐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예준은 언 콧등을 쓱 비비고는 스쿠터를 세웠다. 좀처럼 바로 서지 않아서 힘을 쓴 끝에야 집 외벽에 기대서게 했다. 스쿠터는 한눈에 보기에도 수리만으로 어림없었고, 이번에는 정말 폐차 절차를 밟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예준은 망가진 스쿠터를 괜히 발끝으로 툭툭 찼다. 삐걱, 떨어진 구조물들이 야속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길게 흘러나온 한숨이 이내 어두컴컴한 골목 아래로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