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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Dive Into You I (6/18)

5. Dive Into You I

의사가 붕대를 교체한 후 물러났다. 꾸벅 인사하고 물러나는 그를 보며 예준은 복부를 어루만져 보았다. 몇 년간 혹사당한 몸이라지만 회복은 빠른 편이었다. 이제는 등받이 없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도 삼십 분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침대를 빠져나온 예준은 병실 안에서 조금 걸었다. 내내 누워 있어 온몸이 찌뿌듯했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곤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보는데, 별안간 얼굴에 열감이 퍼졌다. 기억이란 꺼내고 숨기는 타이밍을 종잡을 수 없는 법이다. 지난밤의 남자를 떠올릴 때마다 속절없이 뛰는 심장이 이제는 버거울 지경이었다.

더는 치문을 탓할 수도 없었다. 남자가 감정을 명확히 밝혔으니까. 예준은 그 밤, 태경에게 또 한 번 현혹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자극에도 무디기만 했던 심장이 터질 듯 뛴 데다가 얼굴이 달아오르고 흔들리는 눈빛마저 감출 수 없었다.

예준은 자신이 아무리 무지해도 제 안에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파의 자극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건 저답지 않았으므로.

그가 자신을 좋아하겠다고 말한 것은, 반대로 그의 애정을 오롯이 받아내야 한다는 의미와 같았다. 제 몸을 원했던 알파들의 거들먹거림과는 차원이 다른 직선적인 고백에 예준은 어떤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사고가 정지한 대신 몸이 반응했다. 두근거림이, 떨림이, 저릿함이, 그의 애정을 기대하고 있음을 증명한 것과 다름없었다. 예준은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감정을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오메가들이나 하는 짓이기에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저녁 여덟 시가 되었을 때, 남자가 병실을 찾았다. 늦게 식사를 마친 예준은 병실 화장실에서 양치하고 있었다. 남자는 코트와 재킷을 벗고 셔츠만 남긴 채 욕실로 다가왔다.

“의사가 퇴원 이야기를 하던데. 퇴원하면 내 집으로 가는 게 어때요.”

눈인사도 하기 전에 묻는 말이 대담했다. 예준은 눈을 크게 뜨며 답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아직 일은 무리지만 생활은 할 수 있으니까.”

예상치 못한 제안 때문인지 복부에 힘이 들어가 고통이 밀려들었다. 극구 고개를 가로젓는데 남자가 다가와 양손으로 허리를 붙잡았다.

“이러면 좀 편해요?”

“…네.”

셔츠 소매 아래로 도드라진 팔뚝이 거울에 비쳤다. 혈관이 불거진 손등이 악력 때문에 희게 질려 있었다. 남자의 힘에 의지하면 상체에 힘을 덜 들일 수 있었다. 예준은 구부정하게 어깨를 굽힌 채로 입을 헹구었다. 통증은 덜해졌지만, 삽입할 때 제 허리를 틀어쥐던 기억 속 남자를 지워 내기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부쩍 성감이 날뛰고 있었다. 자극적인 우성 알파가 자주 곁에 있어서인지 배가 아릿하게 아픈 일도 부지기수였다. 예준은 조금 몽롱한 의식으로 부축해 주는 남자를 따라 병실로 나왔다. 그는 자신을 침대에 걸터앉힌 뒤 말을 이어 갔다.

“평생 눌러살라는 거 아니고 다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있으란 얘기에요.”

예준은 괜히 목덜미만 긁적거렸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무조건 거부하고 나설 일이었겠으나 최근 변수가 생겼다. 거의 매일 병실을 찾는 윤도하. 점점 요구가 상식선을 넘어가더니 최근에는 오럴 섹스까지 강요당했다. 몇 대 맞는 걸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러다가 언제 험한 꼴을 보게 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 나을 때까지만요?”

“그래. 다 나을 때까지만.”

퇴원하면 또 집까지 찾아와 못살게 굴 게 분명했다. 남자의 집은 도피처란 단어와 어울리지만, 정말로 도피처로 삼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거의 매일 야근이라 아마 집 비는 시간이 많을 거예요. 편하게 있어도 돼. 식사는 가사 도우미가 챙겨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벗어날 방법은 단 하나뿐인데도 선뜻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태경이 턱을 감싸 쥐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타협의 여지가 없는 문제야. 안 간다고 하면 어깨에 메고라도 갈 테니까 그냥 하자는 대로 해요.”

채광이 훌륭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남자의 집은 안락했다. 넓디넓은 침대와 작은 숲 같은 정원, 신비한 작업실. 막연히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으나 현실이 되리라곤 기대치 않았다.

“아픈데, 혼자 있으면 서럽잖아.”

계속되는 설득에 예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태경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남자는 허락의 진짜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하늘 정원에서의 만남 이후 예준은 그가 더 불편해졌다. 그저 마주할 뿐인데도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거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눈을 마주할 엄두도 나지 않을 때도 있었고 여러모로 속이 복잡했다. 치문의 말에서 시작된 의심이 어떤 진전을 일으켰을 때, 예준은 경험해 보지 못한 관계에 덜컥 거부감부터 느꼈다.

언젠가는 제대로 된 애정을 나눌 상대를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아쉬울 건 없다고 여겼지만, 막연한 상상 속에서도 그 대상은 알파가 아니었다. 예준은 다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경이 부담스러워 목덜미를 긁었다.

“당분간 일 못 할 테니 필요한 돈은 마련해 줄게요.”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건 절대 안 돼요. 합의금만 해도 충분해요.”

무심코 남자의 팔뚝을 붙잡은 예준이 다시 입을 떼려는데, 불쑥 너른 어깨가 밀려들었다. 무게를 싣지 않은 두 팔이 부드럽게 등을 감싸 안았다.

“애인한테 차 사 주고 집 사 주는 사람도 널리고 널렸어. 내가 고작 이거 해 주면서 예준 씨 눈치 봐야 해요?”

예준은 딱딱하게 답했다.

“저는 대표님 애인이 아닌데요.”

애인이라도 돈이란 걸 함부로 받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돈이 오가는 관계는 뭐든 좋지 않았다. 호의는 권력으로 변모하기 쉬웠다. 제 인생을 쥐고 흔드는 여러 사람처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거저 받지는 않을 거예요. 억지로 주시면 꼭 갚을 거고요.”

당장 이자 상환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일을 전혀 하지 못했으니 손해가 막심했다. 그래도 형님들에게 두들겨 맞는 게 낫지, 남자에게 도움을 구하기는 싫었다. 이미 받은 게 너무 많았다.

“알았어. 그렇게 갚고 싶으면 갚아요. 대신 기한은 안 둬.”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잖아요.”

“그사이에 우리가 어떻게 될 줄 알고.”

누구든 쉽게 얻었을 남자에겐 자신감이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자 남자의 어깨가 더 깊이 밀려들었다. 예준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도, 마주한 어깨를 보자 그 단단함에 기대고 싶어졌다. 향수와 페로몬이 은은히 뒤섞인 부드러운 체취. 목덜미가 벌레라도 기듯 간지러웠다.

흘끗거리려니 남자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환자복 위로 드러난 목덜미, 그즈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야릇하게 내리뜬 시선이 지나치게 고혹적이어서 예준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목에 키스해도 돼?”

더 견디기 힘들다고 느낄 때쯤 남자가 물었다. 예준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곧 열에 들뜬 입술이 피부 위에 닿았다. 부드럽게 비비는 감촉에 들이마신 숨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쪼옥, 쪽.

아릿한 고통이 흩어졌다. 치아로 살결을 씹고 따뜻한 혀로는 그 아릿함을 상쇄하듯 핥는다. 모자랐는지 환자복 단추를 두 개 푼 그가 다시 입술을 댔다. 찢어진 귓불까지 축축한 소리를 내며 애무한 그는 결국 옷 속으로 손까지 집어넣었다.

“하아…. 만지면 아파요….”

“조심할게.”

서로의 몸을 알면서 너무 오래 관계하지 않아서일까. 예준은 남자의 도발에 쉽게 고조되었다.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내뱉을 뻔한 신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럼에도 남자의 입술에 의해 저절로 젖혀지는 고개까진 어찌할 수 없었다. 목 뒤쪽을 손으로 감싼 그가 목젖을 굴리듯 물었다. 길게 팬 굴곡을 따라 쪽, 쪽, 노골적으로 입 맞추었다. 상의 속을 헤집던 손은 하의에까지 다다랐다. 파고들면서도 미묘하게 성기를 비껴간 손이 연약한 허벅지에 닿았다.

“아파?”

“…안 아파.”

분명히 어딘가 강압적인데 아프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예준은 그저 눈을 감고 남자의 입술과 손길을 온전히 느꼈다. 배가 조여드는 감각이 점차 위험하리만큼 강해졌다. 이대로라면 분명 …젖을 텐데.

유일하게 다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허벅지 안쪽은 예민했다. 남자의 손등에 자꾸 성기가 닿아 민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빼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경계심을 단숨에 녹여 버리는 애무 덕분에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아읏…. 이제 아파요.”

엉거주춤 남자의 목을 두르자 늑골의 통증이 심해졌다. 예준은 인상을 쓴 채 입술을 짓씹었다. 그 모습을 본 그가 부드럽게 등을 받쳐 주었다.

“편하게 누워.”

반쯤 세워 놓은 침대 위로 등을 대자 통증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온몸이 화끈거리는 데다 성감이 강해져 자꾸만 몸에 힘이 들어갔다. 겨우 입술과 혀만 닿았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흥분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안 아파?”

“…네.”

볼이 뜨거워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병실이 어두워 다행이라 생각하는 동안, 다시 남자의 손길이 닿았다.

늑골이 부러진 채로 섹스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예준은 덜컥 겁이 났다. 그가 하체를 조금만 세게 움직여도 눈물이 찔끔 나도록 아플 게 그려졌다. 러트 약속도 지키지 못했는데 이것마저 거부하면 염치없게 보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애꿎은 눈동자만 굴렸다.

태경이 예준의 어깨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는 자연스레 기울인 고개 아래로 길게 뻗은 목을 핥았다. 혀가 미끄러지더니 건장한 상체가 더욱 깊이 내려앉았다. 너무 좋지만, 예준은 도저히 삽입까진 할 자신이 없었다.

“안 돼요. 안 될 것 같아요.”

“뭐가?”

태경이 눈을 맞추며 물었다. 예준은 다급히 태경의 입술을 밀어냈다.

“뚝 부러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골절이랬어요. 이 상태로는… 못 해요….”

“아…. 못 해요?”

“네.”

“그런데 뭘 못 한다는 거야?”

“그거요.”

남자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눈마저 접어 웃은 그가 갑자기 정색하며 덧붙였다.

“그게 뭔데? 설마, 지금 내가 하려는 게 섹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에요?”

“내가 그 정도로 개새끼는 아닌데.”

예준은 태경의 말을 곧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붕대 위를 더듬으며 덧붙였다.

“할 리가 없잖아. 러트도 끝났는데.”

“그럼 이건….”

받기만 했을 때처럼 기분 좋은 게 또 있나 싶었다. 예준은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태경을 응시했다.

“예준아.”

“네.”

“내가 알아서 할게. 그냥 눈 감아 봐.”

달콤한 회유에 예준은 고분고분 두 눈을 감았다. 예준은 붕대를 거쳐 더 위로 올라오는 손길에 집중했다. 맨 가슴을 쥐었다 놓은 손이 겨드랑이 아래로 밀려들었다. 옆구리를 간질이던 그가 이번엔 목 대신 입술을 머금었다.

긴장감에 숨을 들이마신 예준이 입술을 벌렸다. 파고드는 혀를 조심스레 얽자 애꿎은 배가 뭉근히 아팠다.

젖는다.

젖고 있었다.

입술을 떠나, 앞턱과 볼에 닿은 그의 입술에서 사랑스러운 무게감이 전해졌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와의 행위는 언제나 기분 좋았고, 그 사실을 숨기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입 주변이 축축해지도록 키스한 태경이 몸을 일으켰다. 시트 위를 힘 있게 짚은 그가 훌쩍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무릎과 무릎 사이에 예준을 가둔 채 상체를 낮추었다. 몸이 닿지 않도록 신경을 쓰는 데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아프면 말해.”

그가 부드럽게 뺨을 비볐다. 살과 살이 맞닿으며 뜨거운 온기를 만들어 냈다. 예준은 달뜬 신음을 감추고 저도 모르게 몸과 몸 사이의 공간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남자의 얇은 티셔츠가 걸렸다. 슬쩍 손을 넣어 보았는데 굴곡진 복근이 만져져 움찔 어깨를 떨고 말았다.

당연히 그도 그 손길을 느꼈을 터였다. 그가 행위를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만지고 싶어?”

그렇게 물어도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는 없었다. 예준은 남자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티셔츠 끝자락만 소심하게 잡아당겼다. 태경이 의도적으로 몸을 낮추어 주었기에 속살을 더듬긴 어렵지 않았다.

남자의 몸엔 딱딱하리만치 성난 근육이 자리하고 있었다. 옆구리도, 허리도, 가슴도 그저 탄탄하기만 해서 괜히 양 귓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 미치겠네….”

예준은 부끄러워져 손을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러나 멀리 가지 못하고 태경에게 붙잡혔다. 그는 자신의 손목을 붙잡아 트레이닝팬츠의 중심을 더듬게 했다. 놀라 턱이 벌어졌다. 곧 입술이 맞물렸다.

“하아…. 읏….”

예준이 남자의 바지 속으로 손을 넣었다. 성기를 만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한 손에 다 쥐어지지도 않는 허벅지를 세게 주물렀다. 태경이 거친 숨을 쏟아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호흡을 이어받듯 숨을 내쉰 예준은 다소 거칠게 변하는 입맞춤을 감당하기 위해 어깨를 들썩였다.

“계속 만져 봐.”

낮은 음성이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흩어졌다. 예준은 요령 없이 허벅지를 주무르다 다시 남자의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올록볼록 솟은 복근을 세게 비볐다. 가슴에 다다라서는 어딘가 민망해 주먹을 쥐었다. 손끝이 상처를 남기기라도 할까 봐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게 퍽 간지러웠는지 태경이 몸을 떨었다.

태경이 티셔츠를 끌어 올려 끝자락을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거만하게 아래쪽을 향해 턱짓했다. 낮은 조도에서도 빛을 발하는 몸매를 보자 예준의 손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예준은 이내 태경에게 매달리듯 안겼다. 척추를 곧게 세우고는 통증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호흡이 편해지자마자 드러난 남자의 가슴에 입술을 묻었다. 짙은 페로몬에 애간장이 다 녹는 기분이었다. 그가 하던 대로 흉내라도 내고 싶어 혀끝을 할짝거렸다. 이어 익숙한 소음이 귓가를 자극했다.

“하아….”

태경이 신음을 흘린 탓이었다. 시선을 들어 열이 절절 끓는 눈빛을 마주했다. 다리 사이가 속수무책으로 젖어 들었다.

이게 섹스가 아니면 뭐지?

점점 여유를 챙길 여력이 없어졌다. 마침, 그가 환자복을 거칠게 들어 올려 허리를 끌어안았다. 충격이 가해지지 않을 선에서였지만 목이 타고 배가 간질거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하지 마요, 이제.”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민망했다. 잔뜩 부푼 그와 자신의 앞섶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왜.”

반박한 태경이 예준의 엉덩이를 잡아 들어 올렸다. 침대 위에 앉은 그는 역으로 제 허벅지 위에 예준을 올려놓았다. 낮았던 예준의 시선이 높아졌고 발기한 성기 또한 더욱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예준의 등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때 말했지. 발기했다고 해서 다 사정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그러나 예준은 하고 싶었다. 발기하면 사정하고 싶었고, 흥분하면 삽입당하고 싶었다. 그게 오메가의 당연한 욕구니까.

“자꾸 하면 하고 싶어지니까.”

못지않게 얼굴을 붉힌 태경이 노골적으로 예준의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하…. 젖었네, 너.”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예준은 아득한 눈빛으로 태경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니까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예준은 태경의 너른 등을 끌어안은 채 그가 먼저 놓아주길 기다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체를 가리고 누우면 발기는 가라앉을 터였다. 여기서 그만두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태경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등을 어루만지며 이미 키스 마크가 가득한 목에 또다시 입술을 묻었다. 당황한 예준은 뻣뻣이 굳어 버렸다.

“이렇게 예민한데 그동안 자위도 안 하고 어떻게 버틴 거야.”

“…예?”

“히트 사이클 때 자위도 안 해 봤다면서요.”

왜 또 그 민망한 주제를 화제 삼는지 예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머쓱해 뒤통수만 긁자 태경이 말을 덧붙였다.

“만족하려면 아무래도 뒤로 하는 게….”

“…예.”

거친 숨을 내뱉은 태경이 속눈썹을 떨었다. 예준 또한 뒤로 자위하는 자기 모습을 상상했으니 그의 머릿속은 어떨지 짐작되었다. 예준은 태경의 품 안에서 조용히 숨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고조된 자극이 잦아들기를,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만하는 게 좋겠어.”

어느 순간, 태경이 예준을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눕혔다. 엉거주춤 침대에서 내려온 그는 골반 위에 손을 짚은 채 마른 얼굴을 쓸었다. 그만하자고 말한 것에 비해 발기한 상태는 지나치리만큼 그대로였다.

“집에 가면 그거 해 봐. 도와줄 테니까.”

“…네.”

그가 도와주는 자위. 솔직히 말해 싫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 배운 것만 해도 수십 가지였다.

예준은 바쁘게 팔을 뻗어 티슈 몇 장을 뽑아 들었다. 이불을 덮은 뒤, 바지 속으로 티슈를 밀어 넣어 흥건한 애액을 닦아 냈다. 닦아도 닦아도 또 나올 것처럼 자꾸 흥분되었지만, 이불 속에 젖은 티슈를 숨긴 뒤 모른 척했다.

문제는 남자가 그 모습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성큼 다가온 그가 예고 없이 이불을 걷어 냈다. 속옷과 환자복 하의를 한 번에 끌어내리고는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왔다. 무릎을 세워 벌리는 힘에 예준은 순순히 응했다.

“흥분해도 몸에 힘은 주지 마요.”

남자의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렸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그가 잔뜩 발기한 성기를 꺼내자 무엇을 할지 예상되었다. 예준은 하얗게 질려 그처럼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단지, 그 성기보다는 더 아래 자리한 구멍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태경이 엄지로 입구를 한 번 훔쳤을 뿐인데 투명한 애액이 묻어 나왔다. 손에 꽉 쥐고 있는 티슈 따위는 애초에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예준은 차마 태경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상체를 기울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한쪽 엉덩이를 벌린 남자가 다른 손으로는 두툼한 그의 성기를 쥐었다. 자위. 왜 그게 화두가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잘 체감하지 못했던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 그대로 구현되었다.

헉, 헉…. 곧이어 거친 숨이 쏟아졌다. 예준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제 허벅지에 닿는 남자의 귀두를 느꼈다. 질척이는 기묘한 소음, 일그러진 얼굴. 기시감과 이질감이 동시에 들었다. 남자의 요구대로 그저 아래만 보여 주고 있을 뿐인데도, 정신없이 섹스할 때처럼 심장이 뛰었다.

“하아, 하아….”

커다란 손이 성기를 빠르게 쳐올렸다. 귀두는 구멍 근처만 맴돌 뿐 그 속을 파고들지 않았다. 힘을 주면 아플 게 분명하기에 예준은 자신의 성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최대한 힘을 빼고 자위하는 남자만 감상했다. 그런데도 자꾸만 성기가 꿈틀대고 아랫배가 아팠다.

그가 몸 위로 완전히 올라왔다. 욕정에 잠식된 눈이 곧게 와닿았을 때, 예준은 견디지 못하고 남자의 입술을 머금었다. 키스보다는 성기를 자극하는 일에 몰입한 남자를 위해 뭉근히 입술을 비비고 페로몬을 느끼도록 뺨을 대어 주었다.

“입에 싸도 돼요.”

정액으로 시트가 더러워질 바에야 삼키는 편이 더 깔끔할 터였다. 알파와 오메가 단둘이 있는데 환자복 하의에 시트까지 갈면 간호사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걱정되기도 하고.

“읏….”

태경이 아프게 아랫입술을 깨무는 바람에 예준은 눈을 찡그렸다.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찔걱, 찔걱, 쿠퍼액으로 충분히 젖은 남자의 성기에서 갈수록 야한 소리가 났다.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준은 태경에게 꾸지람을 들었음에도 입술을 조금 벌린 채 기다렸다.

“하아, 아….”

남자의 목에 혈관이 도드라졌다. 성기를 흔드는 팔의 근육도 터질 듯 부풀었다. 폐부가 더욱 커지며 그가 목이 졸린 듯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빠르게 일어난 그가 예준의 몸을 통과하듯 위로 향했다. 침대 헤드를 붙잡은 채 피가 잔뜩 몰린 성기를 예준의 입술에 짓이겼다. 예준은 최대한 힘껏 입을 벌렸지만 남자의 성기를 반도 삼키지 못했다. 그는 지금의 얕은 깊이에도 만족한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성을 잃은 사나운 눈빛이 관능적이었다. 예준은 남자가 사정할 때까지 기둥을 쥐어짜듯 흔들며 귀두를 빨았다. 얼마 버티지 못한 남자가 등을 굽혔다. 진득한 정액이 입 안에 쏟아질 때마다 그는 온몸을 떨며 짐승 같은 신음을 뱉었다.

“하아, 하아….”

갑자기 온몸에 피가 돌고 힘이 들어갔다. 경직된 늑골에서 심한 통증이 전해졌다. 예준은 점차 아래로 내려오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절로 튀어 오르는 허리 탓에 고통스러운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윽, 읏!”

보다 못한 태경이 그의 성기를 쥔 채 흔들었다. 한 손으론 움직이지 못하도록 배를 눌렀다.

“아아…!”

곧, 더할 나위 없이 딱딱해진 귀두에서 정액이 울컥 쏟아졌다. 그 정액이 남자의 티셔츠를 더럽히고 시트 또한 더럽혔다. 배까지도 온통 하얀 점액질로 얼룩졌다.

“내가 자위하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흣….”

“손도 안 댔는데 쌀 정도로?”

그가 멋쩍게 웃었다. 예준은 성감 탓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 늑골에 손을 댔다.

“윽, 아파요….”

그가 뺨에 입술을 묻고 붕대 위를 어루만져 주었다. 이제 흥분과 고통이 잦아들 일만 남아 있었다.

“아팠어?”

“아팠어….”

새로 티슈를 꺼낸 남자가 배와 성기, 엉덩이 사이를 깔끔히 닦아 내 주었다. 씻는 편이 더 좋을 테지만, 조금 전까지 지독히 아팠으니 더는 무리일 터였다. 예준은 얼굴을 가린 채 발끝만 동동거렸다. 여전히 무릎을 벌리고 있던 탓에, 태경은 당연하게도 그 사이를 파고들어 연한 허벅지에 입 맞추었다.

“아프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그가 조심히 등을 받쳐 일으키자 예준은 시선을 피했다.

“내 거 맛있게 먹어 준 건 고마운데 입은 헹구는 편이 좋겠어.”

결국 눈을 맞춘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귓불이 터질 듯 뜨거워졌다.

*

퇴원하는 날, 이른 아침 병실에 도착한 태경은 완벽한 슈트 차림이었다. 입원했던 동안 12월에 들어섰기에 슈트 위에 걸친 코트도 제법 두꺼워 보였다.

화요일 오전인데 회사 대신 여기에 와 있어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그간 퇴근 후에 들러 자고 출근한 경우는 있어도 아침부터 얼굴을 비춘 적은 처음이었다. 예준은 이미 남자가 건넨 카드로 중간 수납을 하거나 간식거릴 사 먹었다. 퇴원 수속 정도는 얼마든지 혼자 할 수 있는데 괜히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옷은 이걸로 갈아입으면 되고.”

예준은 남자에게 쇼핑백을 건네받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올 때 입고 온 옷은요?”

따지자면 그것도 남자의 옷이었다. 그래도 또 새것을 받는 건 불편했다.

“세탁해도 의미 없을 정도로 망가져서. 이제 추워서 입지도 못해. 소지품은 이 가방 안에 따로 챙겨 놨어요.”

그가 검은색 가방을 들어 보였다. 소지품이라고 해 봐야 현금이 전부지만, 지금 그보다 더 소중하고 든든한 것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두들겨 맞으면서까지 지킨 현금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길에 남은 합의금을 챙긴 것도 어리석어 보였을지 모른다.

우려와 달리 태경은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새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을 묵묵히 도와줄 뿐이었다. 침대 아래에는 역시 남자가 사 준 스니커즈가 놓여 있었다. 저처럼 운동화를 막 신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밥 잘 먹였는데 왜 더 마른 것 같지.”

가방을 챙긴 태경이 팔꿈치를 내밀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거의 2주간 매일 먹을 것을 사 들고 퇴근했다. 여섯 시에 온 날도, 자정이 다 되어서 온 날도 있었다. 예준은 오메가가 된 이후 그렇게 포식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쪘어요. 2킬로그램.”

병원에서 심심하면 몸무게를 쟀기에 체중이 불었다는 사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먹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티도 안 나. 더 먹여야겠어요.”

태경이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뒤통수를 긁는 예준에게 그는 재차 팔꿈치를 내밀었다.

“이쯤 했으면 팔짱 좀 끼워 주지?”

“아, 죄송해요.”

다른 방식으로 부축받으리라 생각했던 예준이 황급히 태경의 팔을 붙잡았다. 보통은 등이나 허리에 남자의 손이 닿았기에 팔짱에는 익숙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보다 살짝 높은 남자의 팔뚝을 그러쥐자 안정감이 느껴졌다.

“이러면 걷기 더 편할 거예요.”

“예.”

순순히 대답하자 태경이 먼저 걷기 시작했다. 뼈는 무사히 잘 붙고 있다고 했다. 퇴원해서 속 시원한 사람은 저인데 왜 애꿎은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힌 건지 의문스러웠다.

예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차에 올랐다. 반지하 방이 아닌 남자의 집이 목적지라는 게 무척 생소했다.

“벨트 매도 괜찮겠지?”

태경이 예준의 패딩 위를 더듬으며 말했다. 안전띠가 늑골에 압박이라도 가할까 봐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예준은 아무렇지 않게 안전띠를 둘러맸다.

편한 차림일 때와 달리, 깔끔하게 넘긴 남자의 앞머리가 제법 가까이 보였다. 시원하게 드러난 눈썹과 잘생긴 눈매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남자가 상체를 세우고 핸들을 쥐었다.

“그럼 갈까?”

“네.”

예준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창밖을 보았다. 태경이 그런 자신을 눈치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남자는 무척 바빠 보였다. 쉴 새 없이 핸드폰 진동이 울렸고 연이어 짧은 업무 통화가 오갔다.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내용이기에 예준은 남자의 통화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태경의 입에서 선영이란 단어가 나왔을 때는 본능적으로 귀가 솔깃해졌다.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어서였다.

“한 시간 내로 들어가.”

―뭐 하는데? 애기 데려다주는 중?

…애기?

예준이 알기로 태경은 결혼한 적이 없었다. 이 차 안에도 아이는 없는데, 지인의 아이를 또 어딘가에 데려다주어야 하는 일정이 따로 있는 건가 싶었다.

“주선영, 제발 좀….”

태경이 눈에 띄게 얼굴을 붉혔다. 곤란한 듯 입가마저 가리기에 예준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바쁘신 거면 저 그냥 택시 타고 갈까요?”

블루투스 때문에 제 목소리 또한 상대방에게 들린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예준은 실례를 범한 듯해 태경처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선영은 흐응, 콧소리를 낸 뒤 말했다.

―맞네. 애기 데려다주는 거. 그래도 회의는 좀 늦지 마라. 상습이야, 너.

딱히 대답을 들을 의지가 없는지 전화는 매정하게 뚝 끊어졌다. 예준이 일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애기…?”

“아, 그게….”

“설마, 저 말하는 거예요?”

“맞아요.”

태경이 웃음을 꾹 참으며 답했다. 예준은 애기란 단어가 자신을 지칭하리라곤 감히 생각조차 못 해 봤다. 태경이 민망해하지 않았다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호칭이었다.

“저를 왜….”

덩달아 벌겋게 달아오른 예준이 큼큼 헛기침했다. 순간, 차 내부에 정적이 흘렀다. 그가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기에 아직 웃고 있는지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예준 씨.”

“예….”

영혼 없이 대답한 예준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형님들이 ‘아가’ 하고 부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창피함에 심장이 날뛰고 자꾸만 두 뺨에 열이 올랐다.

“선영이가 자기 오메가를 그렇게 불러요.”

“아….”

“그러니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예….”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창피함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태경조차 민망해 어쩔 줄 모르니 자신 또한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스물여섯 살이나 먹은 남자를 애기라고 부를 정도면 그녀의 오메가는 어떨지 궁금했다.

그렇다는 말은.

“그분도 알파예요?”

예준이 물었다. 그리 예의 있는 질문은 아니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긴장이 누그러질 것 같았다.

“맞아요. 회사도 같이 설립했고 대학 때부터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그래서 회사 사람을 그리 다정하게 부르는 건가 싶었다. 예준은 달뜬 볼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에 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것들이 많았다.

“다 왔어요.”

내내 헛기침만 하다 보니 곧 집 앞이었다. 예준은 기대감과 불편함이 공존하는 낯선 기분으로 차에서 내렸다. 걸음은 느렸으나 통로를 지나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놀랍도록 익숙했다. 병원에서처럼 팔짱을 끼고 걷자 남자가 물었다.

“안 아파?”

“네. 괜찮아요.”

여전히 걱정하는 눈빛이었으나 이제 걷는 것 정도는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었다.

정원에 수북이 쌓여 있던 낙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나무의 가지들도 앙상한 것을 보면 완연한 겨울이었다. 병원 주차장에서 출발해 바로 차고에 도착했기에 견디기 힘든 추위는 느낄 새가 없었다. 그럼에도 주변 풍경을 보니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일하기 녹록지 않은 겨울이 두려웠다. 눈이라도 오면 공쳐야 하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이 집에 머무르는 때만큼은 부정적인 생각 따윈 접어 둘 생각이었다. 더불어 익숙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것도 잊지 말아야 했다. 안락함에 익숙해졌다가는, 반지하 방으로 돌아갈 때 험한 생활에 다시 적응해야 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지고 말 테니까.

“들어와요.”

태경이 먼저 집으로 들어섰다. 실내화를 예준의 발 앞에 놓아 준 그가 결 좋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적어도 점심은 같이하고 싶었는데 알다시피 일이 좀 바빠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요.”

예준이 손사래 쳤다. 태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채광이 좋은 거실 소파로 예준을 이끌어 조심히 앉게 했다.

예준은 제 옆에 앉은 남자의 팽팽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잘 맞는 슈트가 자세 덕분에 보기 좋게 벌어져 있었다. 태경은 격식을 온전히 갖춘, 흔히 볼 수 없는 유형의 남자였다. 괜히 열이 나 예준은 슬그머니 패딩을 벗었다.

“정말 제가 여기 머물러도 괜찮으시겠어요? 불편하실 수도 있….”

“불편한 게 꼭 나쁜 건 아니에요.”

평정을 되찾은 남자가 무심히 말했다. 괜히 긴장한 예준은 무릎 위에 올려 둔 패딩을 꼭 쥐었다.

“예준 씨는 내가 편해요?”

예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역시도 예준 씨가 마냥 편한 건 아니에요.”

태경이 드러난 예준의 목을 바라보았다. 자주 입는 검은 계열의 옷보다는 자신이 고른 흰색 니트가 훨씬 잘 어울리는 피부라고 생각하면서.

“편하다는 건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다는 건데.”

그가 예준의 목에 가볍게 키스했다. 코끝을 파묻고 달콤한 페로몬을 들이켰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몸을 떤 예준은 얼떨결에 그런 태경을 밀어냈다.

“확실히 그건 아니잖아.”

동의했다. 습관적으로 늑골 근처를 쥐고 시선을 피하자 태경이 침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침실을 주로 쓰겠지만, 내가 쓰는 공간이라면 어디든 사용해도 좋아요.”

생활 반경은 거실과 욕실, 주방, 침실, 정원 정도면 충분했다. 남자의 사생활을 더 침해할 생각은 없지만, 욕심나는 공간이 하나 있었다.

“작업실에 있어도 돼요?”

“당연하지.”

“거기서 따로 뭘 할 게 있는 건 아닌데.”

“입에 담지 못할 짓을 한다 해도 다 괜찮아요.”

예준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태경을 보았다. 그는 목덜미를 조금 붉힌 채로 귓불을 매만졌다.

“예준 씨가 마지막으로 내 작업실에 있었을 때, 뭐 했는지 생각해 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너만 벗겨 놓고, 너만 싸게 하는 거.’

나지막이 읊조리던 말을 기억한다. 예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내내 담담하던 남자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눈매 또한 느슨히 휘어졌다.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 그의 능숙함에 예준은 도무지 태연하게 굴 수 없었다.

목을 어루만지던 그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선영이란 분에게 약속했던 한 시간은 한참 지난 것 같은데도 조급한 기색이 없었다. 이런 게 대표의 특권인가, 생각하던 예준이 남자가 더 뜸을 들이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최대한 얌전하게 있다 갈게요.”

덩달아 몸을 일으킨 태경이 품 안에 예준을 가두었다. 힘주어 안지 못하는 것이 가혹하다는 듯, 등 언저리에서 주먹을 쥐었다 편 그가 눈을 맞추었다.

“그럼, 저녁에 봅시다.”

*

지이잉, 울리는 진동에 예준이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사라진 집은 고요했고 이제 막 해가 넘어가는 늦은 오후였다. 몸은 피로했으나 잠들지 못하던 차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치문이었다.

“어. 치문아. 몸은 좀 괜찮아?”

―괜찮지. 솜방망이 몇 대 맞았다고 죽기라도 할까 봐?

살 떨리던 그날 새벽을 영웅담처럼 포장하는 치문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고 해도 맞아 터진 상처만 수십 개일 텐데 목소리가 너무 태평했다. 예준은 괜히 멍이 사그라든 제 얼굴과 목덜미를 매만졌다.

―형은 그 사람 집에 간 거예요?

“응. 가자는데 안 간다고 하기가 좀 그래서. 며칠만 있다 갈 거야.”

명목상 윤도하를 피해 남자의 집에 온 것이나 다름없지만 치문은 사정을 알지 못했다. 윤도하의 만행을 알면 나서려고 할 게 분명하기에 예준은 부러 말을 삼켰다. 치문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형. 근데 그 사람이랑 뭐 하는 거예요? 설마 연애하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연애라는 단어가 나오자 예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사람 우성 알파야. 나랑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

예준은 남자와 저 사이에 유의미한 감정이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관계의 진전을 이끌지는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집까지 데리고 간다고?

“따로 이야기는 안 해 봤어.”

―형 알아주는 둔탱이잖아. 다 믿진 못하겠는데.

“괜히 넘겨짚을 필요 없어.”

앞으로도 몸을 섞을 테고 그의 배려를 받는 일도 있겠으나 관계는 그 정도에 그칠 터였다.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결혼 적령기의 우성 알파가 오메가와 어울린단 소문이 나면 혼사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예준은 태경에게 그런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이유로 만났다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남자였다. 예준은 그와 동등한 관계로 거듭나고픈 욕심 같은 건 없었다. 연애라니, 가당치 않았다. 예준은 덤덤한 눈빛으로 화제를 돌렸다.

“정명 형님 쪽은 별 기척 없어?”

―눈치는 깐 것 같아. 아저씨가 혼자 도망친 거 아니고 누구 도움받았다는 것 정도는.

정명도 간판만 사채업자일 뿐 실상은 조폭이었다. 정선에서 판을 가지고 논 조폭들이 정명의 따까리들을 만나 불었다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만, 입원한 내내 아무런 연락도 없었기에 그들과 합의보다는 마찰을 빚었으리라 예상했다. 같은 조폭이라도 다른 집단이라면 서로 경계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

“우리란 건 모르고?”

―알았으면 벌써 잡혀서 실컷 두들겨 맞았지. 거기까진 모르는 것 같고 그냥 도망갈 때 일행이 있었다, 그 정도만 아는 듯싶어요.

사실을 들킨다면 호되게 혼이 날 터였다. 그동안의 정으로 정상 참작해 줄지, 예외 없이 응징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서 걱정하지 말고 일단은 몸 사려요. 간 김에 좀 길게 눌러앉는 것도 방법이야. 형님 눈에 띄지 말고.

자신은 안전하다지만, 조직원들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는 치문이 걱정이었다.

“너도 조심해. 정명 형님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잖아. 사실 알면 우리 가만히 안 둘 거야.”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해. 그러자고 형 데리고 정선까지 간 거니까 너무 걱정 마요.

미덥지 않은 자신감을 내비치는 치문이었다. 예준은 못내 씁쓸한 기분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런 소리도 전해지지 않겠지만 말없이도 자신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을 녀석을 안다.

“아빠 일은 고마웠어. 병원에서는 정신없어서 제대로 이야기도 못 했다.”

―말 안 해도 알아. 닭살 돋으니까 거기까지만 해요.

으으, 하며 몸서리를 치는 치문이 그려졌다. 예준은 피로감에 시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즈음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웅성거림이 들렸다.

―형님들이 부른다. 이만 전화 끊을게.

“어. 들어가.”

치문이 간단히 통화를 마무리한 뒤 전화를 끊었다. 붉게 물들었다 파랗게 잠드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예준은 포근한 시트를 끌어 올렸다.

*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을 넘었을 때 예준은 윤도하의 전화를 차단했다. 비로소 조용해진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는데 차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내 침실에 머물렀던 예준은 머쓱한 기분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마중을 나가야 하는 건가 고민하는 사이 현관문이 열렸다.

“자고 있었어? 그냥 침대에 있어도 되는데.”

안으로 들어선 남자가 머리 부근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준은 까치집 지어진 머리카락을 얼른 정돈했다. 태평하게 잠이나 잤다는 사실을 들키기는 싫었는데 곧 남자의 손이 머리카락에 닿았다.

“아주머니 쉬시라고 했어. 씻고 저녁 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아직 더 회복해야 하잖아.”

부드럽게 뒤통수를 쓰다듬은 남자가 코트를 벗었다. 예준은 그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소파로 향했다. 통증이 없도록 부축하는 행동이 이제는 꽤 능숙했다.

“쉬고 있어요. 금방 해 줄게.”

누군가 직접 차려 주는 식사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예준은 욕실로 향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뜨거운 목덜미만 만지작거렸다. 곧 물줄기 소리가 나더니 남자가 편한 복장을 한 채 거실로 나왔다. 눈을 맞추고 주방으로 향한 그가 냉장고를 열었다. 낮에 다녀간 아주머니가 채워 놓은 식자재가 언뜻 보였다.

아무리 보아도 조리를 자주 할 것 같지 않은 남자였다. 그는 차라리 시중받는 것이 더 어울렸다. 작업실이나 회사에 머무르는 시간만 보아도 대단한 일 중독자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그런 그가 굳이 시간을 내어 식사를 차려 준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주방으로 향한 예준이 남자가 꺼내놓은 앞접시를 식탁에 옮겼다. 그 모습을 흘긋한 남자는 구태여 만류하지 않았다. 그는 간단히 채소와 새우를 손질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한 오일 파스타를 내놓았다. 적당한 크기로 썰린 토마토와 윤기 나는 면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예준은 마주 앉는 남자를 관찰했다. 다 마르지 않은 머리는 촉촉했으나 물방울을 떨구지 않았고 입은 옷은 모두 깨끗하게 다려져 있었다. 홈 웨어가 분명한데도 구김 하나 없는 티셔츠가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그 티셔츠를 팽팽하게 만드는 건장한 골격이 너무나도 알파다워서 예준은 저도 모르는 사이 두 뺨을 붉혔다.

“자주 하는 편은 아니라서 맛은 보장 못 하겠어. 그래도 먹을 만은 할 거예요.”

“잘 먹겠습니다.”

포크를 집어 든 예준이 서툴게 면을 감아올렸다. 혼자 있을 때라면 아무렇게나 먹겠지만 잘 교육받은 사람 앞이어서인지 괜히 긴장되었다. 몇 번 면을 놓치자 미소를 띤 채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경이 포크로 손을 뻗었다. 능숙하게 면을 감은 그가 입가에 포크를 댔다. 얼떨결에 받아먹은 첫입은 기대 이상이었다.

“맛있어요.”

말한 예준은 다시 남자로부터 포크를 건네받아 식사를 이어 갔다. 늘 번개처럼 끼니를 때우는 습관이 들어 태경과 속도를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다행히도 식사는 그와 비슷한 시점에 끝났다. 그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티슈를 건네주었고, 바로 일어서서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었다.

꽤 조용한 식사였다. 그래서 남자가 이야기를 꺼냈을 때 예준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예준 씨. 혹시 연애 경험 없는 건 아니죠?”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둘이 식사하는 모습이 어색해 보여서였을까. 예준은 차를 입으로 가져가려다 제자리에 놓았다.

“있어요, 경험은….”

“누구?”

“고등학교 땐 여자 친구 있었고요.”

그때, 예준은 자신이 베타인 줄 알았고 당연히 여자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대학교 입학하곤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사귀진 못했지만.”

그 애는 지금도 승승장구 중인 전 국가 대표였다. 함께 훈련하며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정이 들었다. 한때 남몰래 짝사랑하며 애를 좀 태웠더랬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식으론 꽤 좋은 동네에 도장을 차렸다고 했다. 규모도 크고 원생도 많아서 역시 자신의 처지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혹시 지혁인가 뭔가 하는 그 선수?”

남자의 입으로 들으리라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예준이 앓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아셨어요?”

“같이 찍힌 사진이 많더라고.”

“…인터넷에요?”

“네. 뭐, 부끄럽게 생각은 안 해요.”

그가 식탁 위에 팔꿈치를 괴며 말했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기에 오히려 예준이 더 안절부절못하게 됐다.

“갑자기 연애 얘긴 왜 물어보시는 건데요.”

묻자, 남자가 시선을 떨구었다.

‘좋아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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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던 낮은 음성이 떠올랐다. 잠깐의 공백에 예준은 긴장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만나 본 적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과는 먼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페로몬의 영향에서 자유롭기 위하여 진짜 연애만큼은 형질을 고려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알파라면 오메가는 피하고 오메가라면 알파를 피했다. 베타나 자신과 동일한 형질만 고집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예준 씨가 전혀 감을 못 잡는 거 같아서.”

“제가요?”

“왜 잘해 주냐고 물었죠.”

“…네.”

“난 예준 씨한테 관심이 많아요. 그러니까 생전 해 본 적 없는 인터넷 검색 같은 걸 다 하지.”

남자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다정한 눈빛을 마주하자 심장이 뛰었다.

“별거 없어요. 그냥 열심히 해서 금메달 땄던 게 다고…. 어차피 그것도 다 옛날 일이고요.”

“선수로서 관심이 많다는 게 아니라.”

“…….”

“연애 상대로 말이야.”

화들짝 놀란 예준의 어깨가 튀었다. 하마터면 차를 엎지를 뻔한 예준이 악력을 실어 컵 손잡이를 쥐었다.

“…예?”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가 곁에 와 나란히 앉았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깊은 눈빛을 더 선명히 마주하자 예준의 의아함이 커졌다. 남자는 그 의아함을 상쇄하듯 물었다.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은은한 페로몬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 페로몬이 공기를 오염시켰기에 여지없이 배 속이 아릿하게 아팠다. 순식간에 온몸의 성감을 장악하는 이 힘이 정말 믿을 만한 것인지 예준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네가 궁금한데.”

“…….”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어떤 사람이 취향인지, 그 취향에 나도 포함인지 아닌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다가왔다. 벌어진 제 다리 사이로 깊게 들어와 잘생긴 눈을 내리떴다.

“예준 씨는 나한테 아무 관심도 없어요?”

예준의 눈이 떨렸다. 창백히 가라앉은 하얀 피부, 초조한 듯 아랫입술을 깨무는 얼굴이 태경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이 예뻤다. 달싹이며 몇 번이나 열렸다 닫힌 입술에선 정작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섹스만 해 달라 이겁니까.”

예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처럼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가 상체를 숙였다. 그림자처럼 예준을 덮친 남자는, 그러나 부드럽게 목덜미에 입술을 대었다.

“왜 내 집으로 오자는 말에 동의했어?”

윤도하의 괴롭힘이 싫어서. 그의 포근한 침대가 좋아서. 작업실에 흥미가 일어서. 이유는 다양했다. 그러나 예준은 떳떳하지 않았다.

“섹스 파트너 제안은 왜 수락했어요?”

“…히트 사이클 보내는 게 너무 힘들어서요.”

적어도 이때는 떳떳했었나. 혼란스러운 예준과 달리 남자는 차분했다. 목덜미에서 귓가로 옮겨 온 입술이 귓불에 비벼졌다. 예준은 거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순종적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왜 다 받아 주는데.”

누군가 다정하게 자신을 대한다는 사실이 기꺼웠을지도 모른다. 친절과 배려에 그토록 쉽게 현혹되는 성정이라는 걸 남자를 통해 깨달았으니까.

“싫다면서 입술을 들이대도 좆을 들이대도 다 받아 주잖아.”

옆구리에 남자의 뜨끈한 두 손이 밀려들었다. 아프지 않도록 느슨하게 끌어안는 힘에 예준은 순순히 답했다.

“처음 만난 날 저랑 자 주셨으니까요.”

“보답이에요? 내가 느끼기엔 보답 같진 않은데.”

알파와 오메가라는 적격의 형질을 지닌 두 사람이었지만, 예준과 태경은 평생 단 한 번 섞이기도 어려운 이질적인 관계였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탄탄대로만 밟고 자란 도련님이라면 모를까. 자신처럼 가난한 오메가는 우성 알파와 연애란 단어로 묶일 수 없었다.

“자꾸… 이러면….”

그치지 않는 남자의 애무에 예준의 발끝에까지 힘이 실렸다. 어쩔 수 없이 맞닿은 어깨를 밀어내자 남자는 고분고분 몸을 떼어 냈다. 그러자 두 눈이 바로 마주쳤다. 쭉 뻗은 촘촘한 속눈썹 아래 짙은 갈색의 동공이 보였다. 그 사이엔 둔탁하지도 얇지도 않은 아름다운 굴곡의 콧등이 자리했고, 폭 팬 인중과 도톰한 입술의 균형은 가히 완벽했다.

“이러면?”

따뜻한 계절을 연상케 하는 피부색. 남자다우면서도 부드러운 인상. 피로가 스몄음에도 고운 피붓결하며 소년처럼 날렵한 턱까지. 예준은 홀린 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가 저 눈빛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못 참겠어요.”

견디지 못하고 내뱉은 말은 진심이었다. 태경이 화답했다.

“그럼 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술이 맞닿았다. 키스는 이토록 쉬운데 연애라는 단어에는 발작하듯 굴게 되는 이유가 뭘까. 상념을 지우려 노력하며 예준은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더 깊게 맞물렸다. 부드러운 혀가 입 속 점막을 핥고 지나갔다.

때맞춰 남자의 손이 허리를 붙잡아 당겼다. 하체가 맞붙고 얼굴이 뒤로 밀렸다. 숨 쉴 타이밍을 찾아 상체를 물리자 속절없이 달아오른 귓가에 다시 한번 입술이 닿았다.

“하아….”

흥분을 고조시키는 능숙함. 도통 겪어 보지 못해서인지 당할 때마다 속이 절절 끓었다. 애가 타 죽을 것만 같았다.

“이거 말고, 또 뭐가 있을지 안 궁금해?”

남자가 물었다. 궁금했지만 알려고 들 생각은 없었다. 주제를 잘 알고 사는 것도 나름의 미덕이니까.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요.”

“섹스 파트너?”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손끝이 아랫입술에 닿았다. 꾹 눌렀다가 턱을 쓰다듬는 행위는 다정했고 우려와 달리 그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거절에도 끄떡없는 잘난 남자라서인지,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더 하자고 하면 울겠어요, 예준 씨.”

곤란할 뿐이지 울고 싶은 건 아니었다.

“안 울어요.”

“알아요. 침대 위에서만 우는 거.”

고작 몇 번의 잠자리만으로 제 버릇을 짐작한 모양이다. 치솟는 두 볼의 열감을 감지하며 예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진실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뺨을 어루만졌다.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지 못하자 설득하듯 손목을 그러쥐었다.

“당장 뭘 어떻게 하자는 게 아니라 고려해 달라는 거예요.”

예준의 어깨에 턱을 기댄 태경이 눈을 감으며 덧붙였다.

“기껏 고백했는데 뭔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예준은 제 인생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날 리 없다고 믿으며 살았다. 친절한 알파에게 애정과 보살핌을 받는 일 따위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명백히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당위성을 찾는 자신이 싫었다. 불행하지 않은 일은 모두 신기루라 믿는 습관이 언젠가 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다.

“왜 말이 없어.”

구태여 확답을 얻겠다는 뜻이었다. 예준은 남자에게 기대고 싶은 욕망을 힘껏 참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룸살롱 VIP 룸에는 대학 병원 병원장과 건축주가 앉아 있었다. 직원에게 코트를 건네고 안으로 들어선 태경이 그들과 눈인사한 뒤 자리에 앉았다. 이미 무르익은 술자리는 친우끼리의 만남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이번에도 실상은 접대였다.

“이 회장이 좀 늦는구먼.”

“금요일 밤이라 도로가 혼잡한가 봅니다.”

취한 오메가들이 병원장과 건축주에게 엉겨 있었다. 환갑이 넘은 사내들은 그럼에도 일말의 수치심도 없이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오메가들을 주물럭거렸다. 낯선 오메가의 향취는 목구멍이 아플 만큼 짙었고, 태경이 들어선 이후로 그들의 시선은 내내 태경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우성 알파 중 유일하게 오메가를 불러들이지 않았으므로. 태경은 성감을 부추기는 페로몬을 무시하고 위스키를 따라 들이켰다. 내내 계속된 회의로 공복인 상태에서 술을 삼키자 원했던 대로 감각이 둔해졌다. 담배가 당겼지만, 태경은 우선 갑갑하게 닫혀 있던 셔츠 단추부터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회장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친우들과 호탕하게 인사를 나눈 뒤 가장 상석에 앉았다.

“늦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별말씀을요. 바쁘신 분인데요.”

병원장이야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곳이 많다지만, 대학 병원 건축주는 이렇다 할 직업이 없는 한량이었다. 알파인 아내를 두었으면서도 오메가와의 염문설이 끊이지 않아 사교계에서 꽤 유명세를 날리고 있었다.

병원장과 건축주의 음란한 모습을 발견한 이 회장도 언짢은 기색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베타인 여성 접대부를 불러들였고, 태경의 옆자리는 여전히 공석이었다.

“아드님이 늘 점잖아서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사내들이 껄껄대며 웃었다. 태경은 알코올이 돌아 뜨끈해진 목덜미를 문질렀다. 부적절한 자리인 데다 일말의 흥미도 없다고 일갈해야 마땅하나, 태경은 말없이 미소로 응답했다. 그가 술잔에 손을 가져가자 이 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 아이야 유흥보다는 혼사가 중요하지요.”

지겨운 레퍼토리가 또 시작되나 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건축주가 상체를 쑥 내밀었다.

“그보다 아드님이 이 회장님 사업에 관해서는 다 알고 있는 게 맞습니까?”

명성건설이 어떤 사업에 주력하고 있는지는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건축주가 말하는 사업이란 게 그것만 지칭하진 않는다는 듯한 직감이 들었다.

“어허. 쓸데없는 소리.”

이 회장이 혀끝을 차자 건축주가 덧붙였다.

“머지않아 명성의 주인이 되실 테니 이 대표도 슬슬 준비해야죠.”

“그렇지 않아도 곧 불러들일 생각입니다.”

이 회장과 건축주가 은밀히 시선을 교환했다. 병원장은 이미 만취해 대화를 나눌 형편이 아니었다. 태경은 기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웠다. 다만, 직접적인 질문이 이 회장의 면을 살려 주지 못 하리란 사실을 알기에 침묵했다.

“사람에겐 동전처럼 양면이란 게 있는 법이죠. 그걸 잘 이용해야 대장부가 되는 겁니다. 이 회장님처럼 말입니다.”

이미 진행 중인 자선 사업만 해도 여럿 되고 대외적으로도 청렴한 기업으로 소문난 명성이었다. 그러나 가진 것은 주먹밖에 없던 사내가 기업을 키우는 데에 청렴결백을 내세우는 건 어불성설이란 사실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덕분에 제가 덕을 크게 보고 있지요.”

“과찬입니다.”

이 회장은 태경에게 점점 더 노골적으로 그 이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명성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기업의 추악한 일면까지도 떠안는다는 의미였다. 태경은 접대 자리에서 얼굴도장만 찍으면 그만이란 말을 순진하게 믿을 철부지 도련님이 아니었다.

“타고났으니 잘할 겁니다.”

이 회장이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태생을 들추는 듯한 미묘한 눈초리. 늘 담담하게 반응해 왔으면서, 왜.

“그러려면 훌륭한 안주인을 들여야지요.”

뒤늦은 반항심이 들끓는 것일까. 겉으로는 머쓱하게 웃는 얼굴로 무마했지만 태경은 이 회장 아래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에 슬슬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은혜를 입은 양자이기에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젖어 살았다. 순응했고 증명은 어렵지 않았으나, 태경의 이상은 이석준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곧, 이 회장의 접대부가 안으로 들어섰다. 태경은 흡연 욕구를 더 미룰 수 없었다.

“안이 좀 덥네요.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태경이 셔츠 깃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은 중요치 않았다. 그는 접대부의 허벅지에 손을 올려놓는 이 회장을 외면하고 룸을 빠져나왔다.

도로 위 경적이 유난한 밤이었다. 룸살롱이 밀집한 강남의 뒷골목은 취객들로 혼잡했다. 태경은 건물을 돌아 으슥한 골목을 찾았다. 겨우 담배를 입에 물었지만 답답한 기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예정에 없던 약속이었다. 집에 누군가 들이지 않았다면 관계없었겠지만, 아마도 예준은 늦어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는 곧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긴 수화음 끝에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경이 담뱃재를 털었다.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잠깐의 공백 후, 답변이 돌아왔다.

―몇 시쯤이요?

“글쎄. 기다리지 말고 자는 게 좋겠어요. 인사는 내일 아침에 하는 걸로 하고.”

최대한 조용한 곳을 찾았다지만 혼잡한 유흥가의 소음이 이미 흘러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태경은 룸 안에 있는 오메가나 접대부와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그런데도 향수 냄새를 지적하던 예준을 떠올리면 입 안이 썼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여긴 대표님 집이니까, 대표님 일정대로 하시면 될 것 같아요.

조금만 기회를 줘도 금세 냉정한 말이 되돌아오곤 했다. 태경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가 깊게 담배 필터를 빨았다.

“뭐 했어, 오늘?”

―정원에 나가서 조금 걷고 아주머니가 차려 주시는 밥 먹었어요.

“걸을 만해?”

―네. 거의 다 나은 것 같아요.

또 다른 부류의 답답함이 들이쳤지만, 적어도 룸살롱 안에서 느꼈던 불쾌감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여전히 소년의 기척을 지닌 미성이 듣기 좋았다. 태경은 무의식적으로 손끝에 닿는 아이의 피부를 떠올렸다. 미끄러지듯 닿는 아찔한 감각을 상기하자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그 부드러운 피부를 온종일 시트에 비비는 탓에 포근한 페로몬이 얇은 천 속까지 스몄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부드러운 살냄새까지. 잠결에 다가와 안기면 달뜬 체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규칙적인 숨소리는 안정과 함께 때때로 조바심을 끌어냈다.

―주변이 시끄러워요.

예준이 말했다. 비로소 호기심을 담은 목소리엔 자신감이 없었다.

―…술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고민 후에 뱉었을 말이 퍽 귀여웠다. 태경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어진 정적을 감내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어?”

―침대요.

“내 침대.”

―네. 거기. 이제 자려고요.

오메가와의 달콤한 밀회를 이 회장이 알게 되면 역정을 낼 것이다. 분명히 알면서 그 달콤함에 중독되어 가고 있었다. 언젠가 끝을 내야 하고, 감정이 고조되기도 전에 정리해야 할 관계일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는 것이다. 단단한 외피를 깨고 들어가 가장 연약한 곳에 닿고 싶은 욕구. 일종의 도전 정신이었다. 어렵지 않게 피어난 애정이자 알파로서의 본능 그 자체였다.

태경은 자주 볼 수 없는 예준의 웃는 낯을 그렸다. 길게 연기를 들이마시고는 몹시 아쉬운 마음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귀찮게 안 할 테니까 편히 자요. 집에 가서 봐.”

―네.

대답과 동시에 전화는 끊겼다. 들이치는 싸한 공백이 무거웠다. 싸늘한 공기에도 귓불은 충실히 달아올랐다. 홧홧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태경은 담배를 두어 개 더 피운 뒤 룸으로 돌아갔다.

안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고 있었다. 태경은 문을 열자마자 이 회장의 일그러진 얼굴을 발견했다.

“건방진…!”

그는 오메가의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아 짓누르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 범벅인 채로 앓고 있던 오메가가 살려 달라는 듯 태경을 보았다.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거리는 병원장, 사태를 수습할 생각 없이 다른 오메가를 찾는 건축주 때문에 난장인 상황이었다.

“어디서 더러운 오메가가 건방지게 입을 놀려?”

이 회장이 오메가를 혐오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의 폭력적인 성향을 눈으로 목격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태경은 충격을 감내하기 이전에 오메가를 그의 손에서 구출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룸살롱 가드들이 들이닥쳤다. 태경은 업소 가드들에게 제압당하면 이 회장의 체면이 퍽 우스워지리라 짐작했다.

“…….”

그러나 가드들이 손을 뻗은 곳은 이 회장의 몸이 아닌 오메가의 목덜미였다. 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잡아 붙든 가드들이 오메가를 끌고 나갔다. 오메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땀과 분비물이 바닥을 더럽혔다.

소동의 원인이 제거되자 사과는 당한 오메가가 아닌 이 회장에게 전해졌다.

“심기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다시는 저것 얼굴 보고 싶지 않아.”

태경은 저도 모르게 잇새를 짓씹었다. 역겨워 더 두고 볼 수 없는 것이다. 뒤늦게 이 회장과 눈을 마주했다. 그는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명백히 자신의 가학적인 일면을 감추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이 회장님 이번엔 너무하셨어요. 제 딴에는 장단 맞추자고 끼어든 건데 그걸 그렇게….”

병원장이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스레 말했다. 이 회장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기색이었다.

겁에 질린 접대부들이 어깨를 떨었다. 이번에는 종업원들이 들이닥쳐 엉망이 된 테이블을 치웠다. 태경은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와 비교할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이곳은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리자 이 회장의 고성이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

예준은 눈을 뜨자마자 들리는 숨소리에 돌연 숨을 멈추었다. 시트가 아무리 포근해도 이 정도로 따듯하게 몸을 데우진 못할 터였다. 단 한 번 깨지도 않고 남자의 품에 안겨 잔 경위가 궁금했다. 손끝에 만져지는 맨몸에 놀라 예준은 참았던 숨을 사고처럼 내뱉었다.

통창으로 스민 햇볕 때문에 남자는 알람 소리 없이도 자연스레 눈을 떴다.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관찰하고 있던 덕에, 예준은 그와 덜컥 눈을 마주하고 말았다. 민망한 얼굴을 감춘다는 게 그만 품을 파고든 꼴이 되었다. 이마와 코끝, 입술에 남자의 맨가슴이 닿았다.

“간지러워.”

말한 태경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가 떼어 냈다. 늑골에는 어떤 무게도 가해지지 않았고 포옹은 그저 가볍게 끌어안고 있는 정도에 그쳤다. 예준은 뒤척일 때마다 남자와 다리를 얽어야 하는 상황에 도통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번잡스러운 움직임을 감지한 남자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부드럽게 옆구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일부러 안 깨웠는데 자꾸 내 쪽으로 파고들더라고.”

다정한 눈빛과 낮은 음성이 심장 박동을 자극했다. 딱히 유혹하려는 의도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예준은 남자를 마주할 때마다 묘하게 유혹당하는 기분이었다.

“제가요?”

“네. 예준 씨가요.”

“죄송해요.”

“죄송한 일처럼 보여?”

남자가 뒤통수를 헤집어 머리카락을 잔뜩 흩뜨려 놓았다. 덕분에 깊이 잠들었고 그 또한 만족스러워 보였으니 더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예준은 다가오려는 남자를 조금씩 밀어내며 품속에서 빠져나갔다. 그러자 당기는데 아무런 위화감 없이 굴던 남자 또한 침대를 벗어났다.

샤워 후 머리카락을 닦으며 나오는 그를 보고 예준 또한 가볍게 몸을 씻었다. 욕실 앞에 옷이 놓여 있어서 아직 깨끗한 홈 웨어를 굳이 갈아입었다. 남자는 식사를 준비하고 떠나는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쭈뼛쭈뼛 걸어 나가자 아주머니가 인사를 건넸다. 몇 번 마주치긴 했지만 인사 외에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어 어색했다. 예준은 태경의 손길에 이끌려 스툴에 앉았다.

“간단히 드시겠다고 해서 샌드위치 준비해 뒀어요.”

“잘 먹겠습니다. 이제까지 해 주신 음식도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를 전할 기회도 없었다. 눈을 맞추며 웃어 보이자 아주머니 역시 화답했다. 겨우 틀어진 시선을 사로잡은 사람은 태경이었다. 예준은 제 얼굴에 남은 미소가 그를 기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닙니다. 그럼 또 뵈어요.”

아주머니가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 예준은 태경을 따라 일어서려다 저지당했다. 남자는 아주머니를 배웅한 뒤 돌아왔다.

“예의 바른 건 좋은데 내 사람들한테 일일이 머리 숙일 필요 없어요. 예의는 내가 차리면 그만이야.”

남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예의는 사람을 가려 가며 차리는 게 아니니까.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과분할 정도로 정성껏 식사 준비해 주셔서.”

그래도 굳이 속마음을 내뱉자 남자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 실랑이가 벌어지리라 예상했던 예준은 의외로 고분고분한 남자의 태도에 안심했다. 그 사실을 남자가 빤히 안다는 건 어딘가 부끄러웠다.

함께 샌드위치를 먹은 후, 예준은 무의식적으로 남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집으로 오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예준은 마치 주인 없는 빈집에서 생활하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드레스 룸에는 처음으로 발을 들였다. 입을 옷은 매일매일 침실에 준비되어 있었고 굳이 이곳까지 찾아들 이유가 없었다. 예준은 기척을 죽여 남자를 따랐다. 드레스 룸 중앙에는 시계 수납장이 있었고 벽면엔 옷과 신발, 가방 같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시계는 모두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고가의 제품이었다.

무엇보다 예준을 놀라게 만든 것은 옷장의 한 공간이었다. 그곳은 사이즈로 보나 디자인으로 보나 태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명백히 자신만 입을 수 있는 옷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꼭 ‘김예준 구역’으로 보인달까.

단벌 신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처지였는데, 여기 놓인 티셔츠만 해도 열 개가 넘었다. 거기다 점퍼와 바지, 속옷, 양말, 신발, 목도리까지. 그는 제 방이 이 드레스 룸보다 작다는 사실을 잊은 걸까.

“저 이렇게 많은 옷 필요 없어요.”

어차피 곧 떠날 예정이었다. 이러면 되도록 흔적을 남기지 않고 머무르려던 계획이 허사가 된다.

“알아요. 그냥 내 쪽에서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지나쳐서 그래.”

남자가 셔츠를 꿰입었다. 탄탄한 몸에 고급스러운 소재의 블랙 셔츠가 감겼다. 그는 어떤 부산스러운 움직임도 없이 능숙하게 단추를 채우고 손목시계를 찼다.

“예준 씨. 나랑 만나려면 받는 데 익숙해지는 게 좋아.”

만난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남자의 입에서 연애라는 생소한 단어까지 듣기는 했지만 예준에게 그는 연애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부의 격차, 형질 문제, 사적으로 얽힌 모든 것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으므로.

“부족해서 해 주는 게 아니에요. 예준 씨 생각나면 망설임 없이 살 거고 대부분 상식적인 수준일 테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거부 반응 일으킬 필요 없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합의금만 해도 무엇이 상식적이라는 것인지 예준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해 준 것들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도 없었다. 적어도 예준은 받는 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가 재킷을 입으며 다가왔다.

“넌 내가 과분하다고 생각하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받는 쪽이어서 그래. 주는 쪽은 그런 거 생각 안 하거든.”

“물질적인 그런….”

“아니. 애정.”

놀리려는 속셈인 걸 알면서도 예준의 두 뺨이 정직하게 달아올랐다.

“무슨, 그런 말을….”

선수 시절, 과분한 사랑을 받긴 했다. 금메달을 따서 이름을 알리기 전에도 경기마다 찾아와 선물을 주는 팬들도 있었다. 예준에게 사랑이란 짧은 연애 경험이 아니라 그런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우리가 가진 것들, 처한 상황, 형질 그런 걸 다 떠나서 너 충분히 매력 있어. 사랑받는 데 자격이 필요하다곤 생각 안 하지만, 네 생각이 그렇다면 당연히 그 자격도 있고.”

거칠 것 없는 직언에 예준은 남자를 바로 볼 수 없었다. 속이 꽉 막힌 것 같았다. 남자가 더 다가온 탓에 예준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결국엔 옷장 어딘가가 등에 닿았다.

“반응이 이렇게 미지근한 걸 보면….”

“…….”

“사귈 만큼은 아니에요? 내 매력이 그 정도는 안 되나?”

시선만으로도 종종 하체가 묵직해지는데 매력이 그 정도는 안 되냐니,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사귀자는 말을 입에 담으면서 숙맥처럼 굴지 않는 어른스러움은 차치하고서라도, 태경은 누구나 탐낼 만큼 귀한 사람이었다. 따지자면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맞아요…. 사귈 만큼은 아니에요….”

“그래요?”

“예….”

예준은 제 생각과 정확히 반대되는 말을 내놓았다. 부정당했음에도 남자는 그 말에 상처받은 기색이 아니었다.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빛에서 약간의 반항심만이 엿보였을 뿐이다.

“확실히 당긴다고 오는 타입은 아니네.”

그가 옷장 어딘가를 톡톡 두드리며 덧붙였다.

“그럼, 밀면 와?”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이보다 한 발 더 그와 가까워진다 생각하면 묘하게 짜릿한 한편, 덜컥 겁이 났다. 그의 속살을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와 그간의 경험으로 알파에게 갖게 된 선입견이 상충했다.

감추고픈 지독한 열등감엔 다 이유가 있었다. 온 세상이 그는 네게 어울리지 않는다, 소리치는 가운데에 선 기분이니까. 그와 끝나는 순간이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관계는 가벼운 편이 나았다. 예준은 바삐 변명을 찾았다.

“아마 페로몬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끌리는 이유는 페로몬이다. 빈약한 근거를 빌미로 눈을 빛내자 그가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부드럽게 손목을 잡아끄는 힘에 예준은 남자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태경이 선반을 열어 면역제가 담긴 투명한 유리병을 꺼냈다.

“면역제 먹어 본 적 있어?”

“아니요.”

“이거 한 알이면 페로몬을 거의 못 느껴요. 그건 알고 있죠?”

처음 만난 날, 그가 히트 사이클인 오메가를 앞에 두고도 평온할 수 있었던 이유다. 너무 고가여서 가난한 오메가는 구할 수 없었다. 돈이 없어 흔한 억제제도 못 먹는 처지에 면역제를 먹어 봤을 리 없었다.

“이제 페로몬 핑계는 그만 대는 게 좋겠어.”

면역제 한 알을 꺼낸 태경이 예준 앞에 다가왔다. 그가 예준의 양 볼을 잡아 눌렀다. 순식간에 입 속으로 들어온 알약을 예준은 물 한 모금 없이 삼켜야 했다.

“너무 긴장을 안 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가 찡하게 물이 고인 예준의 눈을 잠자코 응시했다. 약을 먹느라 하얗게 질려 버린 뺨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아요.”

두 눈이 떨렸다. 단호한 말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꿀처럼 다디달았다. 예준은 출근에 앞서 작업실로 향하는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장면이 아닌데도 어쩐지 이전과 달리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건조하게 넘긴 알약 때문인지 기침이 나올 듯 어깨가 들썩이고 가슴이 답답했다. 예준은 바삐 물을 찾았다. 급하게 삼키고는 다시 남자가 사라진 방향에 시선을 두었다.

사람들이 떠드는 말에는 생각보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늘 먼저 다가오던 그가 등을 보인다.

밀어내자, 가고 싶었다.

*

시곗바늘이 일곱 시를 가리켰을 때 차고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생각보다 이른 귀가라고 생각하며 예준은 침대 위에 늘어졌던 몸을 일으켰다. 긴장이 풀린 후, 쏟아진 졸음이 아직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래도 마중을 나가지 않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어…?”

그런데 통로를 지나는 걸음이 의외였다. 평소 남자의 단정한 발걸음과는 조금 다른 발소리 하나가 그를 종종 뒤따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질린 기색의 태경이 먼저 보였다. 그 뒤로 나타난 여자가 운동화를 던지듯 벗었다. 거리낌 없이 들어선 여자는 현관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선 예준을 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김예준 선수!”

익숙한 목소리에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소개 없이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이 대표랑 같이 일하는 주선영이라고 해요.”

불쑥 다가온 선영이 손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악수한 예준은 바삐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늘어져 자는 일은 없었을 텐데. 선영 너머의 태경과 눈을 맞추자 그는 그저 멋쩍게 목덜미만 매만질 뿐이었다.

은은하지만 색다른 페로몬. 선영의 페로몬은 태경의 것과는 결이 다른 낯선 향이었다. 잘 갈무리된 데다 오전에 먹은 면역제 덕분에 치명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그때 회사에선 인사도 못 했죠. 우리 엄마가 예준 선수 팬이거든요. 확실히 보정한 사진도 실물은 못 따라오네. 너무 예쁘….”

“주선영.”

태경이 선영과 예준 사이를 파고들며 뒷말을 저지했다. 선영을 등지고 선 그는 예준의 어깨를 감싸며 덧붙였다.

“일하러 온 거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예. 저는 괜찮아요.”

선영이 굳이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왜. 좀 보자, 나도.”

“약속했잖아. 곤란하게 안 만든다고.”

“그냥 이야기만 하자는 거지.”

떨떠름한 표정의 남자는 마지못해 물러섰다. 예준이 생각하기엔, 값비싼 도자기도 마음껏 만지게 해 주는 사람이 왜 저를 두고 저러나 싶었다.

예준은 곧게 와닿는 선영의 시선에 얼굴을 붉혔다. 예쁜 사람은 자신이 아닌 그녀였다. 괜히 시선을 피하고는 지척에 선 태경을 올려다보자, 그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같이 저녁 먹어요. 먹고 작업실에서 일할 거니까 예준 씨는 편히 쉬어도 돼요.”

“네.”

고분고분 대답하자 태경의 큰 손이 뺨에 닿았다.

“심심했어?”

“그냥… 잤어요.”

쭉 잠에 빠져 있었다. 저녁, 식탁에 놓인 음식을 본 후에야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한 번 더 들렀다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침대는 구름 위처럼 부드럽고 포근해서 한번 파고들면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었다.

예준은 태경이 이끄는 대로 먼저 식탁 스툴에 앉았다. 태경이 그 맞은편, 태경의 옆자리는 선영이 차지했다. 집게 핀으로 긴 머리카락을 고정한 그녀는 이내 묘한 얼굴로 예준을 관찰했다.

“예준 씨한테서 좋은 향기 난다.”

의도가 분명한 멘트에 태경이 고개를 내저었다.

“얌전히 식사하고 일이나 하다 가라.”

“알겠으니까 술 좀 가져와 봐. 반주하게.”

이런 일이 빈번한 듯 태경은 별다른 거부 반응이 없었다. 예준은 재깍 와인을 꺼내 오는 태경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타인에게 다정다감한 그의 모습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선영의 시선은 쭉 제게로 향해 있었다. 그녀는 우성 알파는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과는 아우라가 다른 알파였다. 알파가 둘이라니. 자꾸만 목이 타고 긴장이 되었다.

곧 테이블 위에 잔 세 개가 놓였다. 차례로 와인을 3분의 1쯤 채운 태경이 예준의 잔 앞에서 멈칫했다.

“딱 한 잔만 먹어요.”

고개를 끄덕인 예준은 함의를 담은 눈빛으로 태경을 보았다. 아침, 제법 날이 선 그의 눈빛을 보아서인지 괜히 긴장되었다. 인내심이 길지 않다는 건 더 빠른 결정을 원한다는 뜻이었다. 뭘, 어떻게. 예준은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을 감지한 선영이 말했다.

“예준 씨. 나 그냥 태경이 친구일 뿐이니까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녀가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추파 던지는 것도 그냥 습관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구.”

머쓱하게 귓불을 매만진 예준이 웃었다. 그녀는 상황을 유연하게 만드는 일에 능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다만, 속마음을 감추는 데 소질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웃는 거 봐. 이러니까 이태경이 정신을 못 차리지!”

그가 자신의 웃는 모습을 좋아한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직설적인 칭찬을 소화하긴 쉽지 않았다. 예준은 뻣뻣이 굳어 남자의 기척을 살폈다. 남자는 와인의 라벨을 훑으며 읊조렸다.

“웃어 주지 마요. 쟤 착각하니까.”

힘이 실린 한 마디에 선영은 질린 얼굴을 했다. 예준은 차마 미소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채 와인 잔만 만지작거렸다.

정갈한 한식으로 마련된 저녁 식사는 금세 끝이 났다. 음식보다 오히려 모두의 관심을 받은 것은 벌써 반이나 비운 와인이었다. 예준은 태경과 선영의 만류에 상 치우는 것을 돕지 못했다. 좌불안석인 얼굴로 두 사람이 식탁과 주방 곳곳을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관찰한 대로라면 주로 상대를 툭툭 건드리는 쪽은 선영이었다. 받아 주며 느긋하게 웃는 태경을 보자 예준은 자꾸만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자신에게도 친절하다면 다른 이에게도 친절한 게 당연했다. 예준은 저녁을 너무 급하게 먹었나 생각하며 바쁘게 물을 들이켰다.

“환자들 동선도 중요하지만, 네 이름 걸고 만드는 건물이니까 외관에도 신경을 좀 쓰라고.”

“신경 써.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지.”

“병원 건물이라고 투박할 필요 없잖아.”

“투박하다고 생각해?”

“아니. 그래도 지나치게 단순하다고는 생각해.”

오가는 대화 내용은 주로 일에 관한 의견이었다. 두 사람이 하는 일에 관해서는 무엇도 덧붙일 말이 없기에 예준은 내내 입을 다문 채였다.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서 슬쩍 와인 병에 손을 가져갔다. 싼값에 빨리 취하는 데는 소주가 제격이기에 예준은 와인 자체가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만.”

반 잔을 한 번에 털어 넣자 태경이 잔을 빼앗았다. 맛만 보면 도수가 높지 않은 것 같은데 그것도 술이라고 위가 쓰리듯 아팠다.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으름장을 놓은 태경이 다시 예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와인을 한 병 더 꺼낸 선영도 그 옆에 자리 잡았다.

“이게 더 순한 건데 이거 마실래요?”

선영이 제안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태경은 마지못해 수락했다. 감시하듯 고정된 시선을 무시하고 예준은 선영이 따라 준 와인을 홀짝였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보자 내내 머릿속을 떠다니던 문장이 또렷해졌다.

‘잘 어울리는 한 쌍.’

때마침, 선영이 흥미로운 화제를 꺼냈다.

“얘가 부잣집 따님들이랑만 연애해서 은근히 모르는 게 많아요.”

태경의 환경이라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 남자 경험이 없다고 했으니 연애 상대는 당연히 여성일 터였다. 태경의 입으로는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이기에 못내 호기심이 일었다.

“며느릿감으로 잘 교육받고 자란… 대충 어떤 유형인지 알겠죠? 그것도 죄다 알파.”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옆에서 다 지켜봤으니까?”

지루한 듯 턱을 괸 태경이 말했다.

“왜. 나쁘지 않았는데.”

예준은 구체적으로 그의 지난 상대를 생각해 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많은 인연이 있었으리란 짐작은 했지만,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을 여자의 모습은 어떤 방식으로도 그릴 수 없었다.

“몸 사린 적 없어. 첫 만남이 중매 비슷한 거였을 뿐이지.”

그런 방식에 딱히 불만이 없다는 듯 태경은 차분한 얼굴이었다. 선영은 그의 심드렁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목적이 결혼인 만남인데 거기에 무슨 사랑이 있고 미래가 있어.”

“있을 수도 있지.”

“넌 아니었잖아.”

그녀의 사정없는 직언에도 태경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선영이 와인을 잔에 따르며 덧붙였다.

“가끔 보면 알파를 인격 가진 사람이 아니라 유전자 개체로 보는 경향이 있거든요?”

예준 역시 어느 정도 동의했다. 사회적 지위는 다르지만, 통념상 알파와 오메가는 베타에 비하면 퍽 인간답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알파의 유전자는 보존할 대상이었고, 더 많은 출산을 위해 임신 능력이 뛰어난 오메가가 필요한 형편이었다. 그중에는 양질의 유전자만 선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알파끼리 만나면 우성 알파나 알파를 낳을 확률이 높아지니까 사람을 아주 들들 볶아. 자식이 우성 알파면 이후는 뭐 탄탄대로니까. 두뇌도 뛰어나고 피지컬도 남다르니까 성공이 보장된 거나 다름없잖아. 그게 부모들을 미치게 하나 봐.”

부유한 집안의 알파라면 결혼 압박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에게는 뛰어난 유전자를 남겨야 한다는 의무가 주어지곤 했다. 말없이 술을 들이켜는 태경도,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주무르는 선영도 심심찮게 시달리고 있을 터였다.

“알파와의 성생활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취향이 아냐.”

내내 담담하던 태경이 그제야 발끈했다. 그가 이번에는 예준이 아닌 선영의 잔을 빼앗았다.

“애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러는 그는 그 애와 어떤 짓까지 했던가. 취기가 오른 예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이니 일이니 하는 어른스러운 주제에 끼지 못해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는데. 예준이 눈을 끔뻑 감았다 뜨며 말했다.

“하셔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예준 씨. 자연의 섭리를 말할 거면 알파와 오메가를 논해야지. 서로 끌리라고 페로몬이니 뭐니 만들어 놓고, 결혼은 알파랑 하라고 하면 내가 빡이 쳐요, 안 쳐요?”

식탁을 쾅 내리친 선영이 예준에게로 상체를 더 기울였다. 때맞춰 선영의 어깨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태경이 덧붙였다.

“결혼은 알파랑 하고 사랑은 오메가랑 해, 그럼.”

간단히 정리하는 태경의 얼굴에는 감정이 묻어 있지 않았다. 다 함께 술을 마신 데다 잔을 몇 번이나 비웠음에도 그에게선 취한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예준은 그즈음, 이제껏 생각해 보지 못한 세계에 눈을 떴다. 권력과 재력을 어느 정도 갖춘 어른이라면 사랑과 결혼을 분리할 수 있다. 우성 알파에게는 결혼이 피할 수 없는 과제이며, 이미 서른세 살인 태경 또한 예외일 순 없다. 이제까지 모든 연애 상대를 중매로 만났을 정도면 그 의무의 무게가 꽤 무겁다는 사실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예준은 홀짝이던 와인을 꿀꺽 삼켰다. 그의 말처럼 연애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는 한시적일 터였다.

“예준 씨. 취했어.”

그가 술 대신 물을 따라 내밀었다. 예준은 중얼중얼 신세를 한탄하는 선영을 뒤로하고 그런 태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물컵을 건네받고 물을 마시는 순간에도 시선은 그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잘생긴 이목구비를 더듬고 남몰래 셔츠 속 부드러운 살결을 상상한 건 분명 취기 때문이었다.

예준은 태경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알코올에 잠식된 몸은 발긋하게 달아오른 데다 힘이 없었다. 기꺼이 일어나 상체를 숙인 남자가 예준에게 귀를 가져다 댔다.

“대표님도 결혼….”

그렇다면 섹스 파트너로 관계를 이어 나가는 것이 나은가 싶다가도, 그랬다간 그의 배우자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예준은 누군가 기만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부류가 아니므로 위축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삼킨 말끝을 단번에 이해한 듯 보였다.

“아마도.”

모호하지만 확언에 가까운 답이었다. 예준은 남자에게 이끌린 시선을 쉬이 거두지 못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두 눈이 꽤 오랫동안 제게 머물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남자가 술을 들이켰다. 예준은 와인 방울이 맺힌 빈 잔만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예준을 침실로 보낸 후 돌아온 태경이 작업실 문을 닫았다. 선영은 태경의 대학 병원 설계도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착공은 언제쯤 가능할 것 같아?”

“빨라도 6개월 후.”

짧게 대답한 태경이 선영에게 의자를 내어 주었다. 그제야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선영은 어지럽게 널린 스케치를 모아 서브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곧바로 백팩을 뒤진 그녀가 바인더를 꺼내 태경에게 내밀었다.

“아트 갤러리 건 말인데. 확정된 건설사 확인했어?”

검토해야 할 서류만 해도 높이가 한 뼘에 이르는지라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트 갤러리는 명성건설 이석준 회장의 소유로, 태경의 부친이기도 한 그가 대표로 앉게 될 건물이었다. 설계는 LK의 선영이 하더라도 시공은 명성건설이 맡으리라 예상하던 차였다.

“어르신 끗발이 있으니 허가는 걱정 안 하는데, 시공할 건설사가 좀 의외야.”

“어딘데.”

“두화건설이라고 들어 봤어?”

낯선 이름이지만, 애당초 재개발 자체가 여러 기업이 참여하는 대형 프로젝트였다. 서로 간의 협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명분이 있기에 아직 이름을 알리지 못한 기업이 리스트에 오르는 일도 없진 않았다.

“규모는?”

“명성에 비할 바가 못 되지. 여태 5층 이하 상가 빌딩들만 손댔던데, 갑자기 갤러리라니 좀 뜬금없긴 해.”

“명성 쪽이랑 이야기는 해 봤어?”

“아니. 어차피 곧 회장님 뵐 테니까 그때 여쭤보려고 했지. 설계만 해도 6개월은 족히 걸릴 거라 착공 신고까진 여유가 좀 있고…. 혹시 몰라서 우리랑 협업한 시공사 리스트도 보냈는데 애초에 고려도 안 하신 것 같아.”

역시나 의아해진 태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노트북을 열어 검색창에 두화건설을 입력했다.

“재개발 구에 착공 들어간 건물도 있는 것 같은데?”

“어. 20층짜리 메디컬 빌딩. 골조 공사도 다 끝나서 이미 층수 올리고 있더라고.”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이력을 보면 두화건설은 2005년에 설립한 회사로 아직 이렇다 할 실적은 없는 작은 기업이었다. 건축가나 기업의 이름으로 수상한 내역도 없고, 주로 작업하는 지역과 건물의 종류로 보아 특별한 클라이언트를 상대한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어떻게 이 재개발 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시공사의 정체가 불분명하기에 선영이 의문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곧 있을 회의에서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만큼 확실한 일도 없기에 태경이 먼저 제안했다.

“아버지랑 이야기해 보고 현장 한번 가 보든지.”

“뭐. 회장님이 선택한 곳이니까 아주 근본이 없진 않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어.”

“그럼 다행이고.”

산뜻하게 말한 선영이 이번에는 갤러리 조감도를 꺼내 펼쳐 보였다.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던 태경도 일어나 선영 곁으로 가 섰다. 외관 디자인도 끝났고 건물은 이미 세부 설계가 진행 중이었다. 그중, 선영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지상 주차장에서 본관까지 쭉 이어지는 조경 말인데.”

건축물과 자연의 조화를 선호하는 태경과 달리, 선영은 그 방면에 재능이 없었다. 태경의 조언을 얻고자 조감도를 가리킨 선영이 난감한 듯 목덜미를 긁었다.

“이대로 되겠어?”

“아니.”

단언한 태경이 노트북을 선영 앞에 가져다 놓았다. 시작 단계부터 고민한 것을 알기에 그 또한 신경을 쓰고 있던 부분이었다.

“참고할 만한 거 폴더에 넣어 놨으니까 일단 한번 훑어봐. 어느 정도 반영하면 마무리는 도와줄게.”

“알았어.”

다시 제자리에 착석한 선영이 골몰히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조감도를 한참 주시하던 태경은 자리에 돌아와 시각을 확인했다. 아홉 시 반. 저녁 식사가 길어지는 바람에 자정을 넘기지 않으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이따금 닫힌 문을 흘끗거리는 태경을 보며 선영은 남몰래 고개를 가로저었다. 평소였으면 회사에서 마무리했을 일이었다. 디지털 자료도 실물 자료도 회사에서 보는 편이 훨씬 효율적인 데다 야근이 일상인 태경에겐 사무실이 집보다 더 편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태경이 6시 정각이 되자마자 코트를 꺼내 들었다. 당장 급한 일은 없다 해도 정시 퇴근은 가당치 않았다. 선영이 같이 저녁이나 먹자며 사무실에 들르지 않았다면, 이미 빈 내부를 보고 허탈하게 발길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집에 모셔 놓은 신줏단지 때문이라는 사실을 선영이 모를 리 없었다. 언제나 연애보다는 일이 우선이던 태경이다. 그런 그의 원칙을 깨게 만든 이가 하필이면 보잘것없는 오메가라니.

고생길이 훤했다. 또 한 번 뒤돌아보는 태경을 보며 선영은 혀까지 끌끌 찼다.

“가난한 애들은 딱 두 가지 부류로 나뉘지.”

펜을 귀에 꽂은 선영이 정적을 깼다. 피식 웃으며 그녀를 본 태경이 무료하게 턱을 괴었다.

“왜, 또.”

“기회만 있으면 악착같이 다 가지려고 하는 애들이 있고, 반대로 손에 쥐여 줘도 절대 안 가지려고 하는 애들이 있거든.”

“그런데.”

“확실히 예준 씨는 후자야. 아까 결혼 얘기할 때 봤지? 네 배우자 자리에 자긴 고려조차 안 하는 거.”

“…….”

“걔한테 너는 애초에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잃은 게 많은 애니까 이해 못 할 일도 아니긴 하지.”

태경의 눈길이 다시 문을 향했다. 머릿속으로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을 아이를 떠올렸다. 연애 이야기만 나와도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가벼운 섹스 파트너 관계에는 안도하는 것만 보아도 선영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합의금 문제도 그러했다. 다른 오메가라면 더 뜯어내지 못해 안달이었을 일을, 예준은 오히려 분에 넘친다고 불편해했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선영이 아픈 곳을 찔렀는데도 태경은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차분히 내려앉은 그의 시선을 보며 선영은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결론이 있다기보다는 그냥 궁금한 거지.”

“뭐가.”

“걔는 그렇다 치고. 너는 어때?”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태경이 선영과 눈을 마주했다.

“걔 사정 알잖아. 한때는 승승장구했던 금메달리스트지만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오메가고, 직업도 변변치 않은 데다가 지독하게 가난해. 사랑받으려는 욕심도 없어서 이 연애 전선에 진전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상황이란 말이지.”

“…….”

“뭐, 욕구만 풀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너 하는 짓 보면 이전에 만났던 부잣집 따님들이랑은 차원이 다르다 이거야.”

선영이 의자를 당겨 태경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엮이면 어쨌든 너만 손해일 거야. 서른셋 먹고 스물 몇 살짜리 애송이한테 상처만 받고 물러날지도 몰라.”

태경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건 확실히 태경이 우려하는 부분이 맞았다.

“무엇보다 그 시궁창이나 다름없는 처지…. 네가 그런 애랑 엮일 거라고 어디 생각이나 해 봤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날, 윤도하에 의해 그 경찰서에 이른 것은 사고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충돌.

“그러니까 내 말은.”

선영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네가, 걔가 사는 진창에 뛰어들 자신 있느냐고.”

태경의 입가가 휘어졌다. 신세를 비관해도 모자랄 판에 멋지게 미소 짓는 친구를 보며 선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왜. 겁나냐. 내가 예준이 감당 못 할까 봐.”

태경의 말에 선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괴었던 턱을 놓고 상체를 바로 세웠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에 긴장하는 사람은 그가 아닌 선영이었다. 이윽고 태경이 입을 뗐다.

“걔한테 빠질 준비 됐어.”

팔짱을 낀 그가 여유롭게 덧붙였다.

“다른 건 좆도 신경 안 써.”

< 3권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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