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Underwater I
쾅, 쾅!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잠에서 번뜩 깨어난 예준이 몸을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전기담요에서 빠져나오자 한기가 들며 소름이 끼쳤다. 이런 파열음엔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미 수십 번 겪었으면서도 심장이 터질 듯 쿵쿵 뛰었다.
“형! 안에 있어요?”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치문이었다. 그런데도 놀란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형!”
문을 열자 치문이 밖을 살피며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직전까지 고깃집에 있었는지 삼겹살 냄새가 진동했다. 얼굴이 발간 걸 보면 술도 걸친 듯한데 왜 전화하는 대신 집을 찾았는지 의문이었다.
“후우…, 형 들어 봐요. 방금 정명 형님이랑 회식했거든?”
“어, 그런데.”
“아니, 그보다 형, 아저씨 정선에 있는 거 알았어요?”
“정선?”
“왜, 카지노! 거기!”
마지막으로 듣기에는 경기도 어딘가라 했다. 도박에 목을 매고부턴 전국 각지를 돌며 하우스를 전전했기에 정선이라도, 정선이 아니라 할지라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카지노?”
“그래. 아저씨 판 키웠나 본데, 몰랐죠? 형도.”
“몰랐지. 모르는 게 낫다고 절대 안 알려 주니까.”
하다 하다 이젠 카지노까지. 하우스나 카지노나 예준에겐 크게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 곳이었으나, 언젠가 들었던 정명의 통화가 신경 쓰였다.
‘예, 예. 잘 알아들었습니다, 형님. 정선이요, 네.’
그래서 현장 건물을 찾았던 날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나 싶었다. 혹시 몰래 연락이라도 주고받을까 봐. 쫓고 쫓기는 신세라면 상황은 언제든 역전될 수 있었다. 조직에서 거처를 알아낸 덕분에 노름꾼인 김재우가 다시 조직의 화두에 오른 듯했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라기에 회식 끝나자마자 똥줄 빠지게 왔잖아요. 이번엔 진짜 가만 안 둘 것 같던데. 현장 뺑뺑이라도 돌리게 만들겠대. 보쓰 말처럼 손가락이라도 자를 기세야. 걱정 안 돼? 형은?”
예준이 일정 몫의 이자를 납부하고는 있다지만 이런 식이라면 평생 원금까진 절대 갚지 못할 터였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뿐이었다. 조직에게 빚을 져 놓고 꼬리를 완전히 감추기는 불가능하니까. 어쩌면 조직에서 냄새를 맡은 것일 수도 있었다. 소문이 날 정도로 판돈을 크게 땄다거나….
“정선 어디에 있는지 알아?”
“정명 형님이 술 먹고 주절거려서 정확하진 않은데. 왜, 그 카지노 주변 모텔에서 달방 잡고 사는 노름꾼들 많잖아요. 거기 어디래. 해 뭐시기 모텔이라는데 풀 네임까진 정확히 못 들었어요.”
“확실한 거 맞아?”
“확실하니까 여기까지 왔지! 버스 타면 잡힐까 봐 차까지 렌트해 왔는데?”
“뭐? 너 술 먹은 거 아냐?”
“깼어, 깼어. 다 깼어.”
“너 진짜….”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예준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고맙지만 잘못 걸리면 치문까지 크게 화를 입을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안 게 어디예요. 형님들 도착하기 전에 아저씨 빼돌리자.”
“뭐?”
“형님들 입장에서도 아저씨가 뭐 긴급이겠어? 그러니까 차일피일 미룬 거지. 일단 사지는 멀쩡히 붙어 있게 해야 할 거 아냐.”
채무자의 신변을 위해 사채업자 끄나풀이 살신성인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예준은 양복에 싸인 치문의 두꺼운 가슴을 밀어냈다.
“고마운데 넌 여기에서 빠지는 게 좋겠다.”
“뭐?”
“너 정명 형님이 이거 알기라도 하면 맞아 죽어.”
“모르게 하면 되잖아.”
순진한 두 눈을 마주하자 예준은 속이 끓었다. 애초에 조직 따위에 들어갈 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착하게 살았어도 잘만 살았을 녀석이, 착한 짓 할 데가 없으니까 애꿎은 저에게 이러는 것이었다.
“빼돌리는 게 진짜 가능하기는 해?”
예준은 반신반의하며 마지막 문자를 떠올렸다. 오백만 원이나 필요하다고 말한 걸 보면 그새 딴 돈을 다 잃었나 싶었다. 아니면 그 돈까지 더해 더 큰판을 치를 작정일 수도 있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급변하는 노름꾼 처지를 한동안 얼굴도 못 본 예준이 알 리 없었다.
“형님들은 아침 먹고 출발한댔으니까 내일 정오는 지나야 정선 도착할 거예요. 우린 지금 출발하면 돼. 해로 시작하는 모텔만 뒤지면 뭐, 아저씨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나한테 정보가 있잖아, 정보가.”
“정명 형님이 너 건수 잡으려고 일부러 흘린 거면 어떡해.”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그 형님 머리가 그 정도는 안 돼.”
버티고 선 녀석을 돌려보낼 수도, 아버지의 행방을 알면서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고 노름판을 전전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얼마간 고민한 예준이 핸드폰을 찾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치문을 등지고 남은 합의금을 꺼냈다. 위기를 모면할 땐 돈만 한 게 없을 테니까.
점퍼 안주머니에 돈을 챙기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당장 내일이 약속이지만 지금은 그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때까지 아버지를 찾아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예준은 치문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가자.”
*
치문이 준비한 차량은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을 무난한 회색 승용차였다. 취한 치문을 대신해 예준은 직접 운전석에 앉았다. 늦은 시각에도 여전히 불 밝은 서울을 벗어나자 한적한 고속 도로가 나왔다.
컴컴한 도로 위에선 애써 사고를 정지시켜야 했다. 헤어질 때 급하게 짐을 싸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잔상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두들겨 맞아 멍든 얼굴이나 하얗게 튼 손끝은 따지자면 잊고 싶은 모습 중 하나였다.
솔직히 말해 다시 보기가 두려웠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나은 게 없다면 차라리 없는 사람인 셈 치고 사는 편이 더 견딜 만했다.
“치문아. 자?”
“음…. 아뇨.”
치문이 의자 아래로 쑥 빠진 몸을 바로 세웠다. 턱 밑에 맺힌 침을 쓱 닦은 녀석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해로 시작하는 모텔이 딱 세 개야. 두 개는 카지노 바로 옆이니까 거기부터 가면 돼요.”
모텔 주인에게 핸드폰 사진첩에 있는 아버지 사진을 보여 줄 계획이었다. 십 년도 더 전에 찍은 사진이라 지금과 비슷할지는 미지수였으나,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모텔 주인이 입 다물면 어떡하지? 거기 아빠랑 비슷한 사람들 한둘이 아닐 텐데. 미리 입 맞췄을 수도 있잖아.”
“에이. 그런 노름꾼들보다 내가 훨씬 더 무서울걸.”
치문이 제 두툼한 주먹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예준에게야 착한 동생이지만 치문은 누가 보아도 조폭임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너보다 무서운 사람들도 많을 텐데.”
“아, 그래도 내가 짱이야.”
녀석이 천하태평이라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예준은 휴게소에서 산 물로 목만 축이며 도로를 주시했다. 강원도 정선이란 표지판이 더 자주 눈에 띌수록 심장의 고동이 커졌다. 빵빵하게 히터를 틀어 놓았음에도 자꾸만 손이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바쁘게 달려서인지 예정보다 십오 분이나 일찍 정선에 도착했다. 새벽 두 시. 동이 트기까진 네다섯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내비게이션으로 찾은 첫 번째 모텔은 포털 사이트에서 보았던 사진보다 더 신식이었다.
“여기 맞아?”
“맞아요.”
아무래도 최근에 리모델링을 마친 듯했다. 이런 곳에서 노름꾼들을 상대로 달방을 내어 줄 것 같진 않았다. 예준은 의심스러워하며 모텔 문의 열림 버튼을 눌렀다. 알파들이 자주 드나드는지 입구에서부터 페로몬 냄새가 진동했다.
“저기, 뭐 좀 여쭤보려고 하는데요.”
카운터에 있던 베타가 예준과 치문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예준은 아랑곳없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혹시 이 사람 여기 묵고 있나요?”
화면을 대충 들여다본 베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집엔 혼자 오는 손님 없어요.”
예준처럼 사람을 찾는 경우가 왕왕 있는지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의 말처럼, 모텔은 실내 장식만 보아도 연인이나 주점 손님들이 주로 드나들 법한 분위기였다. 짙은 페로몬 냄새가 그 증거였다. 숙박업소의 역할보다는 성관계를 위한 곳임을 노골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허름한 행색의 노름꾼이라면 발 벗고 나서 물리칠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 아버지가 이곳에 들렀다고 해도 현금을 썼을 테고 제대로 된 기록을 남겼을 리 없었다.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배제하기 위해 예준은 다시 베타에게 물었다.
“한 번만 자세히 봐 주실래요? 하루라도 묵고 간 적 없을까요?”
성의 없이 사진을 확인한 베타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확실해요. 이런 사람은 못 봤어요.”
“제대로 본 거 맞아?”
치문이 카운터에 팔꿈치를 괴며 말했다. 위협적인 덩치와 목소리 탓에 베타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예준은 치문의 정보보다는 자신의 직감을 더 신뢰했다.
“됐어. 여기 아닌 것 같아. 다른 데 가 보자.”
예준의 말이라면 곧이듣는 치문이 두 손을 털며 베타를 노려보았다. 눈을 부라리는 녀석의 팔을 붙잡고 예준은 재빨리 모텔을 빠져나왔다.
“털면 불 수도 있어.”
“여기서 주먹 쓰라고 너 데려온 거 아니야.”
저 답답하다고 문고리까지 망가뜨린 녀석인데 오죽할까 싶긴 했다. 예준은 차에 오르자마자 내비게이션 앱을 켰다. 다음 모텔은 이곳과 2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시비 붙어서 좋은 거 없으니까 얌전히 굴어.”
형이랍시고 잔소리를 했다. 차에 올라탄 치문은 오만상을 지으면서도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
두 번째 모텔도 허탕이었다. 첫 번째 모텔보다 더 산중에 있는 허름한 곳이었는데, 접근성이 좋지 않은 탓인지 달방을 주진 않는다고 했다. 페로몬 냄새가 진동했던 이전 모텔과 달리 불쾌한 흔적도 비교적 적었다. 드나드는 사람 중에서도 노름꾼으로 보이는 이들은 없었다.
카지노와 거리가 있는 마지막 모텔 앞에 다다라 치문과 예준은 담배를 나눠 피웠다. 예준이 담배를 요구하자 치문은 줄 듯 말 듯 장난만 쳐 댔다. 긴장을 풀어 주려고 그러는 걸 알기에 얌전히 기다려 줬다. 치문은 뒤늦게 불까지 붙인 담배를 예준의 입에 물려 주었다.
“여기도 없으면 어떡하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이 타고 초조했다. 막상 아버지와 마주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대로 서울로 돌아갈 자신이 있지도 않았다. 형님들에게 덜컥 잡혀 버리면 아버지를 구제할 방법은 없을 테니까.
“들어가?”
“어.”
담배를 다 피운 다음 모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는 좋은 말로 하면 깔끔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휑했다. 검은색에 가까운 벽지는 군데군데 훼손되어 있었다. 흔한 액자나 간판도 없이 카운터만 덜렁 놓인 점이 이상했다.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주인을 향해 예준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 달방도 주시나요?”
이번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물었다. 고객처럼 보여야 조금이나마 성의를 보일 터였다.
“주지. 두 분이 묵을 거예요?”
주인이 치문과 예준을 번갈아 보며 혀끝을 찼다.
“커플은 안 되는데.”
“…커플 아니에요.”
치문이 입을 막고 낄낄거렸다. 괜히 목덜미가 서늘한 예준과 달리 치문은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몇 달이나 묵으려고?”
주인이 물었다. 마침, 뒷주머니에 꽂은 핸드폰을 꺼내려는데 비쩍 마른 한 남자가 카운터 주인과 눈인사하며 지나쳤다. 옅은 술 냄새, 초췌한 눈 밑. 확신할 수는 없었으나 예준은 치문을 세워둔 채 남자를 뒤따라갔다.
“저기요.”
담배에 불을 붙이던 그가 눈을 치떴다. 예준은 더 지체할 것 없이 핸드폰 화면에 사진을 띄워 내밀었다.
“혹시 여기 달방 사는 분 중에 이 사람 보신 적 있으세요?”
“아. 김 씨?”
“네. 김재우 씨요.”
단번에 알아보다니 기대하지 않은 수확이었다. 남자는 담배를 문 채 거드름을 피웠다.
“김 씨는 왜?”
“몇 호에 묵는지 아세요?”
남자가 엄지와 검지를 바쁘게 비볐다.
“고건 개인 정보라 맨입으로 안 되는데.”
모텔 주인도 아니면서 개인 정보 타령이었다. 예준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만 원짜리 세 장을 꺼냈다.
“이거면 될까요?”
의아한 얼굴로 따라 나온 치문이 돈을 낚아챘다.
“어이.”
그 돈을 제 주머니에 챙기고는 별안간 턱을 치든다. 팔짱을 끼자 두꺼운 근육이 볼썽사납게 도드라졌다. 낄낄대던 때와는 사뭇 다른 치문의 분위기에 남자는 곧바로 깨갱 꼬리를 내렸다.
“402호.”
“지금 안에 있어요?”
“아까 나가는 것 같았는데… 요.”
“어디로요?”
“그것까진 모르지.”
남자는 얼마 피우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부리나케 자리를 뜨는 그를 보며 치문이 팔짱을 풀었다.
“일단 방구석부터 어떤 꼬락서닌지 좀 보자. 거기서 명함이라도 한 장 건지면 땡큐고.”
“주인도 없는 방엘 어떻게 들어가.”
모텔 주인이 쉽게 키를 내어 줄 리 없는데도 치문은 자신만만했다. 미심쩍게 치문을 모텔로 들여보낸 예준은 그가 쾅 카운터를 내리치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402호 키 좀 줘 봐!”
바깥에서도 다 들릴 정도로 큰 목청이었다. 경찰을 부르니 마니, 노름꾼들 등쳐 먹는 주제에 개소리를 하니 마니, 몇 분간 실랑이가 오갔다. 몇 번 더 쾅쾅 카운터를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예준은 파열음이 듣기 괴로워 귀를 틀어막았다.
얼마 후, 치문이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가자, 형.”
손에는 카드 키가 들려 있었다. 기세등등한 녀석을 앞세워 예준은 다시 모텔로 들어섰다. 불퉁한 표정의 주인을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불안감에 말아 쥔 두 손에서 땀방울이 배어났다.
[402호]
초조한 심정으로 문을 열었다. 침대도 없이 이불만 덜렁 놓인, 5평이나 될까 싶은 방이었다. 예준은 아버지의 흔적보다 굴러다니는 소주병이나 배달 음식 찌꺼기 따위를 먼저 발견했다. 예상대로 초라했다. 겨우 숙식만 해결하는 수준인 것 같은데 방이 이 꼴이면 사람 꼴은 어떨지 굳이 보지 않아도 짐작이 되었다.
“하아….”
흘러나오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었다. 측은지심을 어쩌지 못한 채 예준은 어떤 단서라도 찾기 위해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쩍 말이 없어진 치문도 예준을 도와 둔한 몸을 움직였다. 이십 분 동안 손이 닿는 곳은 다 뒤졌는데, 나오는 것이라곤 배달 음식 쿠폰이나 찢어진 영수증이 전부였다.
치문은 익숙한 듯 화장실 변기 뚜껑과 환풍구까지 열어 보았다. 몰래 돈이라도 숨겨 두었을까 미세한 균열까지 손으로 다 더듬어 보았지만, 역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방 가운데 털썩 주저앉은 예준이 핸드폰으로 시각을 확인했다. 새벽 네 시. 피로가 온몸을 덮쳐 아버지의 더러운 이불에라도 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이 방에 더 머무를 용기가 없었다. 예준은 두 눈을 비비며 치문에게 말했다.
“차에 히터 틀어 줄 테니까 가요.”
“어.”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켰을 때였다. 드륵, 누군가 카드 키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에게 아버지가 들어와도 모른 척하라고 당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느리게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분명 재우가 맞았다. 흰머리가 머리카락의 절반을 덮고 수염이 지저분하게 자라났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는 법이었다.
“예준아. 여긴 어떻게….”
치문이 얼른 재우의 팔을 당겨 바닥에 앉혔다. 손에 들린 검정 비닐봉지에는 소주 두 병과 육포, 담배가 담겨 있었다. 크게 판돈을 딴 사람치고는 조촐한 메뉴였다.
“아빠,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가슴속에서 무언가 와르르 쏟아졌다. 형언하기 힘든 감정을 추스르며 예준은 자꾸만 조여드는 목을 가다듬었다. 거지나 다름없는 아버지의 행색을 눈으로 확인하자 아무리 숨을 몰아쉬어도 폐부가 답답했다.
“뭐 하긴. 아빠가 여기서 큰돈 벌어 가면….”
“노름으로 어떻게 큰돈을 벌어!”
“아들.”
“형님들이 아빠 잡으러 오겠대. 이번엔 손가락이라도 하나 분질러서 버릇 고칠 작정인 것 같은데…. 아빠는 그것도 모르고…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요.”
재우가 별안간 고성을 내질렀다.
“누가 네 형님이야!”
뺨까지 갈길 기세로 손을 치들기에 치문이 재우의 손목을 붙잡아 저지했다.
“언제부터 형님들이라고 불렀어? 그 쓰레기 같은 조폭 새끼들을!”
재우는 잡힌 손목을 비틀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 잡것도 한 패거리였지?”
괜히 과녁이 된 치문도 덩달아 날을 세웠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말릴 여력이 없었다.
“그 사람들 싫어해서 어쩌게. 아빠나 나나 어차피 조폭한테 빌붙어 사는 처진데.”
오메가이기에 하라는 일은 다 해내며 버티는 중이었다. 다만 그 꼴을 눈으로 확인한 적 없는 재우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 마음을 모른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언제까지고 회피하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빚진 거 못 갚으면 평생 그러고 살아야 해.”
단호하게 말하자 재우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애초에 빚진 것도 너 하나 잘살게 해 보겠다고 그런 건데.”
오메가로 발현한 뒤, 예준은 선수 생활을 즉시 그만두었다. 첫 히트 사이클을 맞았던 날, 선수촌을 퇴소하며 알파로 천운을 누리고 사는 동료들에게 시선으로 유린당한 기억이 선명했다. 뒤늦게 발현한 선수들이 그렇듯 다니던 체대도 자퇴하고 친한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재우는 불쌍한 것, 번듯한 도장이라도 차려 주겠다고 큰소리쳤다. 학원가가 몰린 강남 요충지에 값싼 매물이 나왔다며 기뻐하던 그를 어머니도 자신도 믿었다. 터무니없는 가격이었음에도 세상 물정 모르고 덤벼든 재우가 부동산 사기를 당한 것이 채무의 시작이었다.
“알아요. 나 때문에 그런 거.”
빚이 불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후, 신세를 비관한 아버지가 일확천금을 얻는 일에 미쳤어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예준은 제 아버지의 까칠한 손을 쥐었다.
“그래도 이게 답은 아니잖아요. 차라리 형님들이 하라는 대로 뼈 빠지게 일이라도 해서 갚는 게 나아.”
“예준아. 너랑 내가 17억을 무슨 수로 갚아. 어?”
“평생 일하면 되잖아요.”
“평생? 평생 일해도 그 돈 다 못 갚아! 너는 그 새끼들 밑에서 노예로 살고 싶어? 한 번 실수 때문에 평생을?”
“이렇게 사는 건 뭐 좋아?”
예준이 허름한 방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아빠, 지금 형님들한테 걸리면 말로 안 끝날 거예요. 일단 서울 올라가서 몸 좀 사리다가 제 발로 찾아가요.”
“오늘은 안 돼.”
“왜 안 돼?”
“내일 큰 건수 하나 물어 놨어. 그거 성공하면 그래도 숨통이 좀 트일 거다.”
“건수? 설마 카지노에?”
“그래.”
번뜩 생각난 듯 재우가 쏘아붙였다.
“너 오백은 들고 왔어?”
들고 왔지만 순순히 내어 줄 생각은 없었다.
“오백만 더 보태면 일억은 떼 놓은 당상이야!”
“그 건수라는 게 설마 노름꾼들 작당은 아니죠?”
천하에 믿을 수 없는 게 노름판이고 노름꾼들이었다. 피라미인 노름꾼들 틈에 지역 조폭이나 사기꾼이 끼어 가짜 소문을 흘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솜씨 좋은 놈을 고용한 판이니, 조작한 걸 들킬 일도 어그러질 일도 없다는 부실한 근거를 믿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한탕에 눈먼 노름꾼들이 거기 꾀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다는 건, 도박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예준도 아는 사실이었다.
“이번엔 확실한 건수야. 이것만 잘하면….”
재우가 사정하자 치문이 예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이런 노답을 살려 보겠다고 여기까지 왔네. 그지, 형.”
“무슨.”
“어이, 아저씨. 혼자 망하는 건 상관 안 하겠는데 우리 형 돈 뜯어 갈 생각은 감히 하지도 말아요.”
예준의 아버지이기에 치문은 누구보다 열성을 다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한다는 소리가 돈이나 더 달라는 말이라니. 얼굴도 몇 번 보지 못한 재우와 계속 지켜봐 온 예준을 향한 애정의 크기가 같을 리 없었다. 치문이 예준을 싸고돌자 재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거 하지 말고 그냥 서울로 가요. 어떤 사람들이 낀 판인지도 모르잖아.”
예준은 재차 시간을 확인했다.
“동트기 전에 떠야 안전하니까… 우리 차 타고 가요. 제발, 아빠.”
“난 안 간다!”
매달리는 예준을 밀어낸 재우가 몸을 일으켰다. 볼품없이 마른 형편에도 달라붙는 예준을 뜯어내는 힘이 상당했다. 예준은 치문의 발치에 내동댕이쳐진 탓에 도망치는 재우를 미처 만류하지 못했다.
구태여 따라나서려는 예준을 치문이 부축해 일으켰다. 부리나케 방을 나온 두 사람은 이미 문 닫힌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어 좁디좁은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하. 진짜 가지가지 하네.”
치문이 헉헉대며 불평했다. 달래 줄 여유가 없어 예준은 치문의 팔만 붙잡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로비에 다다라서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새 도로변까지 나간 재우가 방향을 찾지 못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빠!”
“너희 먼저 돌아가. 나는 이거 해야 돼. 이거 꼭 해야….”
간절하게 말하는 모습이 가여울 지경이었다. 단출한 옷차림 탓에 이내 벌벌 떠는 재우를 보며 예준이 손을 뻗었다.
“노름꾼들 말을 어떻게 믿어요.”
“오 사장 말은 믿어도 돼. 하루 이틀 준비한 것도 아니고….”
문자에 쓰여 있던 낯선 이름이 떠올랐다. 오한수였나.
“오 사장이 누군데?”
“있어. 이 지역 토박인데, 사람도 좋고 수완도 좋고 소문이 자자해. 나만 낀 것도 아니고 이름 올린 사람만 삼십 명이 넘어. 이것만 성공하면….”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애초에 판을 조작하는 것부터가 범죄고 사기였다.
“그냥 확 기절이라도 시킬까?”
치문이 재우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물었다.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대로 두고 돌아가면 정명 형님 패거리가 아니라 이곳의 누군가에게 사달이 나도 날 게 분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낯선 헤드라이트 불빛이 주변을 밝혔다.
“……!”
도로변으로 쌍라이트를 밝힌 봉고차가 들어섰다. 직감이 좋지 않았다. 낡고 변색된 회색 봉고차는 정확히 예준과 치문, 재우가 선 자리 앞에서 멈추었다.
설마, 정명 형님이 벌써 도착한 걸까? 예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었다. 그런 예준을 치문이 막고 섰다. 재우 또한 본능적으로 가장 뒤쪽에 몸을 숨겼다.
“김 씨!”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장정 일곱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다 끼어 타기가 버거웠는지 후줄근한 양복을 털어 대는 손들이 바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정명 형님 패거리는 아니었으나 씩씩거리는 모양새가 범상치 않았다.
“아아. 이 이쁜 것이 그 유명한 김 씨 아들내미야?”
한 덩치가 정확히 예준을 지목하며 비아냥댔다. 질 낮은 페로몬이 공기를 더럽혔다. 드문드문 섞인 열성 알파 셋이 가장 앞 선으로 걸어 나왔다.
“이봐, 김 씨. 한탕 할 땐 하더라도 돈은 갚고 튀어야지!”
마치 세월을 되돌린 듯한 이질적인 장면이었다. 요즘 세상에 어느 사채업자가 밑도 끝도 없이 채무자를 두들겨 패고 다니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법망 밖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법과 사회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버러지들은 여전히 버러지 취급을 받고 살았다.
“여기서도 사채 썼어요?”
예준이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재우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극히 비밀스러워야 할 한탕이 조폭 조무래기들 귀에까지 들어간 게 아니라면 애초에 그들이 짠 판일 가능성이 컸다. 노름꾼들 골수까지 다 빨아먹으면서도 죄책감 하나 느끼지 않을 놈들이니까.
“안 갚을 거면 곱상한 아들내미 뺑이 돌려서 삼천 만들까? 어? 여기서 김 씨 아들 오메간 거 모르는 사람 있어?”
“씨발. 개좆만 한 새끼들이 말 함부로 할래?”
보다 못한 치문이 어깨를 쭉 펴고 소리쳤다. 재우를 제외하면 이쪽은 둘, 저쪽은 일곱이었다. 아무리 한주먹 한다는 치문이라고 해도 역부족이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치문아 나 돈 있어. 이거라도 주면 봐줄 거야.”
예준이 치문을 당겨 속삭였다. 이런 일에 쓰려고 들고 온 돈이었다. 지나가는 자리마다 사고를 일으키는 제 아버지가 강원도라고 해서 얌전하게 살진 않았을 터였다. 당장 사람 하나 반병신 되는 것보다야 돈 오백 잃는 것이 더 나았다.
예준이 치문의 팔꿈치를 붙잡고 흔들었다.
“이거 주고 빌어.”
“절대 안 돼.”
“치문아.”
“형 돈은 절대 안 돼요.”
덩치들이 반원을 그리듯 주변을 둘러쌌다.
“뭐라고 작당하는 거야?”
예준이 무마하듯 나섰다.
“저기, 이봐요.”
“아이고, 서울말 간지럽다.”
이어지는 희롱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열성 알파들에게 수도 없이 당해 왔던 이력이 있으니까.
치문은 침을 퉤, 뱉고 정신없이 쌍욕을 지껄였다. 예준의 허리춤엔 벌벌 떨리는 아버지의 손이 닿았다. 피가 빠르게 돌며 심장은 터질 듯 뛰는 반면 머릿속은 차게 굳었다. 위기를 모면할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치문이 등 뒤쪽으로 손을 뻗어 차 키를 건넸다.
“아저씨 데리고 차 탈 준비 해.”
치문이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텔 앞에 쌓인 쓰레기 중 짧은 쇠 파이프 여러 개가 눈에 띄었다. 건물을 짓다 말았는지 그것 이외에도 주먹 대신 쓸 것들은 차고 넘쳤다.
예준은 치문의 손에 밀려 차 쪽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어리둥절한 재우도 예준을 따랐다. 느릿느릿한 행동에 별 의심을 하지 않던 덩치들은 치문이 쇠 파이프를 집어 들자 대열을 갖추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있는 거라도 다 내놓지?”
“한 푼도 못 줘. 돈 맡겨 놨냐?”
치문이 덩달아 윽박질렀다.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모순적으로 예준의 심정은 태평하게 가라앉았다. 극한으로 몰리자 반대로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는 허탈감에 사로잡혔다. 부실한 아버지와 덩치들을 상대해야 하는 치문이 걱정이었지만 놀랍게도 들끓던 열이 식었다. 이상한 경험이었다. 정말 죽을 때가 다 된 걸까.
“운전대 잡아요.”
예준이 재우에게 말한 뒤 다시 치문에게로 향했다. 시동이 켜지는 소리를 뒤로한 채 쇠 파이프를 집어 들고 치문과 나란히 덩치들의 대척점에 섰다.
겁난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막상 위기에 닥치자 겁먹은 기색 하나 없는 치문이었다. 하나보단 둘이어서 다행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거 분명히 정당방위야.”
“알지, 알지.”
고분고분 대답한 치문이 맨손으로 선 조폭들에게 힘차게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덩달아 앞으로 치고 나간 예준이 제게 달라붙는 알파의 복부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눈을 질끈 감고 쇠 파이프를 휘두르자 텅 빈 수박이 깨지는 것 같은 기괴한 소리가 났다.
선빵을 날려 보긴 처음이다.
죽도록 맞았어도, 그거 하나만큼은 두고두고 속 시원했다.
*
태경은 오전 내내 러닝머신 위에 있었다. 러트 증상이 시작되면서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평소와 1, 2도 차이에 불과하지만, 체감하기로는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써야 할 듯한 기분이었다.
죽도록 땀을 빼는 게 제법 효과가 있었다. 늘 그렇듯 온몸이 땀으로 젖을 때까지 뛰었다. 태경은 잔뜩 부푼 근육 위로 달라붙은 티셔츠를 미련 없이 벗어 던졌다. 성감이 조금이나마 잦아든 후에야 러닝머신의 속도를 늦추었다.
생수로 목을 축이고 운동 기구 위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낮 동안 운동으로 에너지를 소비하면 저녁엔 예준과 식사 정도는 함께할 수 있을 터였다. 다른 오메가들처럼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통제가 가능하다면 우선 시선을 맞추는 것부터 시작할 계획이었다.
[오후 5시에 차 보낼게요. 시간 맞춰 나와요. 저녁 같이할 거니까 식사는 안 하고 와도 돼.]
마지막으로 본 게 열흘 전이었다. 뻣뻣하게 선을 긋는 모습이 그 나름의 자존심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그간 아이에게서는 단 한 번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예준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 말에 상처받았을까. 예준은 호의라면 달게 받는 다른 오메가들과는 달랐다. 개입하지 말라는 경고와 별개로 반항기 어린 눈빛이 선명한 잔상으로 남았다. 예준을 만나고 난 후에 태경은 때때로 그 잔상을 떨치지 못했다. 동정에서 시작된 감정이 오롯이 그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으리란 직감이 드는 것도, 느긋함을 가장하기 위해 점점 애를 쓰게 되는 것도 자신답지 않은 일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태경은 이전의 경험으로 그 감정을 낯설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딪치긴 어렵지 않았으나 지켜보는 눈들로부터 아이를 감추기는 번거로울 터였다. 이 회장은 알파라는 형질에 대단한 집착이 있는 사내였다. 어떻게든 알파, 특히 여성과 결혼시키려고 혈안인 마당에 남성 오메가와의 정분을 들켜서 좋을 게 없었다.
더해지는 갈증에 한 번 더 목을 축인 태경이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그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답장은 한 시간이 지나서 도착했다.
[저 일이 있어서 약속 못 지킬 것 같아요 죄송합ㄴ다 다음 러트 때 부르시ㅁㅕㄴ 꼭 갈게요 안 보겠다고 하셛ㅗ 어쩔 수 없고요]
땀을 닦아 내며 핸드폰을 보던 태경의 미간이 좁아졌다. 우성 알파의 러트는 악명 높아서 직전에 도망가는 오메가들도 더러 있긴 했다. 하지만 예준은 의외였다. 어떻게든 보답하려고 안달이었으니까.
그보다 이 말도 안 되는 오타가 어쩐지 예준답지 않았다. 목소리라도 듣고자 했지만 상대는 답이 없었다. 그는 즉시 개인 경호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번호 보낼 테니까 위치 추적해 봐. 최대한 빨리.”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땀에 흠뻑 젖은 태경이 운동을 마치고 거실로 향했다. 미약한 시계 초침 소리가 신경을 긁는다. 팔짱을 낀 채 통창 앞에 선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열 오른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초조함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사사로운 동요에 온 의식을 집중하는 건 따지자면 불유쾌한 일 중 하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진동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위치 찾았습니다. 강원도 정선으로 나옵니다. 정선 외곽에 있는 공장 단지 근처입니다.
약속한 시각이 바로 오늘 저녁이었다. 서울을 떠나 있기에는 적절한 시간도 아닐뿐더러 강원도 정선은 생각지도 못한 지역이었다. 더군다나 예준은 언제 어디서든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오메가였다. 태경은 자신의 직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개인 정보랑 인상착의 보낼 테니 찾아. 찾는 즉시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대표님.
빠르게 대답한 경호원이 전화를 끊었다. 통창으로 정원을 바라보던 태경은 한동안 상념에 젖었다. 초조함에 노골적으로 심장이 뛰었다. 그 감각에는 확실히 익숙지 않았다.
태경은 천천히 욕실로 향했다. 이내 서늘한 물줄기 아래 섰다. 뻣뻣한 하체가 불쾌하고 도무지 식지 않는 열감이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발정기가 이끄는 대로 내버려 두자 질척하게 몸을 섞었던 기억만이 정지한 머릿속을 꽉 채웠다.
100을 주면 겨우 10이 돌아오는데도 다디달아 다가가길 멈출 수 없었다. 손끝에 닿을 듯 말 듯한 아슬아슬함이 좋고, 끝까지 100은 주지 않을 것만 같은 모자람이 전에 없는 갈증을 일으켰다. 좁혀지지 않는 간극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법이었다. 정신없이 흔들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러난다. 특유의 담담함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
욕실을 빠져나온 태경이 깊이 쑤셔 박아 둔 억제제를 꺼냈다. 우성 알파라면 사용할 필요가 없는 그것을 고민 없이 혀 위에 올렸다. 약을 삼키고 향한 곳은 다시 러닝머신 위였다. 한참 달리던 그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별짓을 다 해.”
열감 위로 열감이 덧씌워졌다. 특정한 오메가가 없다면 해결할 수 없는 욕구였다.
*
차는 폐공장이 밀집한 어느 골목에 서 있었다. 아직 낮이지만 골목은 어두웠다.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 때문에 창엔 뿌옇게 김이 서렸다. 예준과 치문, 재우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삼십 분마다 위치를 이동하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윽….”
차 안엔 신음과 함께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울렸다. 운전석에 앉은 치문은 십 초에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여기저기 죄다 얻어터졌다지만, 맷집이 좋은 치문은 견뎠고 예준은 그렇지 못했다.
예준은 재우의 무릎에 누워 배 부근을 부여잡고 있었다. 형님들에게 맞았을 때도 이렇게까지 아팠던 적은 없었다. 고통의 크기로 짐작했다. 분명 어딘가 크게 잘못된 게 틀림없다.
“형. 괜찮아?”
“…괜찮아.”
새벽, 쇠 파이프로 셋은 때려눕혔지만 그러고도 덩치 넷이 더 남아 있었다. 예준은 동시에 덤벼드는 그들에게 쇠 파이프를 빼앗겨 역으로 두들겨 맞았다. 온몸이 구둣발에 짓밟히고 맨주먹에 얼굴을 강타당했다. 어찌나 아픈지 차라리 정신을 잃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버텼다. 치문이 나머지 넷까지 나뒹굴게 만들어 시간을 벌도록. 덩치들이 미적미적 전열을 가다듬는 찰나, 치문에게 짐짝처럼 들려 차에 던져졌다. 미리 핸들을 잡고 있던 재우는 차 범퍼를 여기저기 처박으며 현장을 겨우 벗어났다.
어딘지 모를 논두렁에서 치문이 운전석을 차지했다. 재우의 운전 실력으론 빠르게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재우는 엉엉 울며 뒷좌석에 올라 피범벅인 예준을 안았다. 감은 팔을 꾹 잡아당기자 예준은 뒤늦게 아빠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실재하는 사람 같았다.
복부가 죄다 멍투성이였다. 근처 병원에 가면 들킬 위험이 커 제자리에서 시간을 죽였다. 의식은 왜 이럴 때만 지독하게 붙어 있는지, 예준은 죽을 맛이었다. 약국에서 진통제라도 사 먹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좁은 동네라 어떤 식으로 말이 퍼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 봐.”
보다 못한 치문이 앞 좌석 사이로 손을 뻗었다. 열린 점퍼 속 티셔츠를 들어 올리자 검푸르게 번진 피멍이 보였다. 치문은 조심스레 손끝을 대 예준의 늑골을 더듬었다. 가볍게 눌렀을 뿐인데도 예준이 부러질 듯 이를 악물었다.
“하, 씨발. 갈비뼈 나간 거 같은데.”
치문이 미간을 잔뜩 좁히며 예준을 보았다. 반쯤 감긴 눈으로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거면… 다행이고.”
“뭐가 다행이야. 이러다 폐라도 찔리면 어쩌려고.”
치문이 제 싸구려 손목시계를 빠르게 들여다보았다. 차라리 걸릴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재깍 서울로 돌아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아빠가 미안해….”
재우가 눈물범벅인 얼굴을 닦아 대며 말했다. 오만상을 지은 치문은 그런 재우의 어깨를 툭 밀어냈다.
“그럼 맞고 있는 거 보고만 있지 말고 대신 맞아 주지 그랬어요!”
“그러다 봉고차에 실어 가기라도 하면 어떡해! 나라도 운전대 잡고 있어야 도망을 치지. 너 인마, 조폭 새끼들이 오메가 데리고 가면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래?”
“존나 잘 알아, 씨발! 그러니까 애초에 여기 조폭들이랑 엮이지 말지 그랬어, 아저씨.”
“그러는 넌 조폭 아니고?”
“난 위험한 일엔 형 절대 안 끌어들여요.”
으르렁대며 벌어진 실랑이에 예준은 피로감만 느낄 뿐이었다.
“됐어…. 그만해…. 이 와중에 싸움 뜯어말리는… 거까지 해야 해요?”
겨우 말했음에도 두 사람은 죽일 듯 서로를 노려보기 바빴다. 진이 빠져 더 말릴 힘도 없었다. 예준은 눈을 감은 채 조금이나마 편한 자세를 취해 보려 몸을 뒤척였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재우가 읊조리듯 말했다.
“네가 여기 오면 안 됐어.”
지고 싶지 않았다.
“안 왔으면 아빠 그 새끼들한테 맞아 죽었어.”
회의적으로 답하자 재우가 입을 다물었다. 예준은 재우의 마른 뺨을 흘겨보길 그만두었다.
삼십 분 정도 흘렀을까. 별안간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워낙 으슥한 곳이어서 사람이 드나들 만한 길이 아니었다. 잔뜩 긴장한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어깨를 움츠렸다. 치문은 덩치를 숨기기 위해 좌석 아래로 빠질 듯 몸을 낮추었다.
똑똑-.
누군가 태평하게 창을 두드렸다. 뿌연 탓에 잘 알아볼 수 없었으나 창을 두드린 사람은 정장 차림의 한 남자였다. 반듯하게 올려 고정한 머리만 봐도 조폭 끄나풀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긴장감은 좀처럼 옅어지지 않았다. 여차하면 수를 쓰기 위해 치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안에서 끝내 답이 없자 남자가 물었다.
“김예준 씨. 괜찮으십니까?”
예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고개를 갸우뚱거린 치문이 읊조렸다.
“아는 사람이야? 말투가 존나 소시오패스 같은데.”
치문이 그리 느끼는 건 지금의 상황 탓일 가능성이 컸다. 아수라장인 차 안 광경에 비해 지나치게 정중한 목소리였으니까.
“김예준 씨?”
남자가 다시 한번 이름을 불렀다. 예준은 목덜미가 서늘한 기분으로 눈을 바로 떴다. 별 볼 일 없는 오메가를 정중하게 칭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늘은 러트를 맞은 태경과 약속이 있는 날이었고, 그는 아무래도 약속이 불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치문아. 창문… 열어 봐.”
예준이 가까스로 말하자 치문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창문을 열었다. 곧바로 자세를 낮춘 남자가 정체를 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태경 대표님 지시로 왔습니다.”
*
경호원이 타고 온 차는 먼지 하나 없는 뻔쩍뻔쩍한 세단이었다. 치문의 덩치도 가뿐히 수용할 만큼 넓은 내부와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재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질 낮은 조폭들은 이런 차에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그걸 알아서인지 세 사람을 안내하는 경호원에게서는 어떤 조바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곧장 서울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재우가 조수석에, 치문이 예준을 안고 뒷좌석에 올랐다. 조금 전부터 열까지 올라 예준의 이마엔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한기가 드는지 어깨를 떨기까지 해서, 치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빨리요. 이러다 우리 형 잡겠네.”
예준은 가만히 숨만 몰아쉬었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남자가 있었다.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예의는 차릴 작정으로 약속 취소 문자까지 보냈다. 그는 도대체 자신이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경호원을 보낸 걸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의아해하는 치문과 재우 앞에서 꺼내기엔 껄끄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이태경 대표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치문에게야 합의금을 주었던 그 부자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가 왜 이런 일까지 나서서 하는지 설명하긴 어려웠다.
합의금을 주면 준 거지, 위기 상황에 떡하니 경호원까지 보내 구해 준다? 심지어 자신의 위치를 알고 온 것을 보면 위치 추적 같은 일을 행했을 소지가 다분했다.
“아직 숨 쉬는 건 괜찮고?”
“숨 좀… 차긴 한데 괜찮아….”
발을 동동 구르는 치문과 달리 재우는 말이 없었다. 울음도 그치고 소리를 죽인 재우 때문에 예준은 괜히 불안했다. 돈 냄새가 나는 것을 보면 환장해야 마땅할 사람이 웬일인지 조용했다. 이태경 대표가 누구냐는 추궁 하나 없이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내내 적막하기만 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요금소가 눈앞에 나타나자 서서히 마음이 놓였다. 차는 곧장 으리으리한 한 대학 병원으로 향했다. 멀리에서 커다란 고층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낯선 동네이긴 마찬가지였지만 강원도를 떠나 다시 돌아온 것만으로 불안감이 가라앉았다.
그즈음, 예준은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싶어 바쁘게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흐려진 시야는 좀처럼 선명해지지 않았다. 예준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밤이 된 것처럼 앞이 점점 어두워졌다.
“형.”
“…….”
“형?!”
결국엔 귀가 멎고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감각이 둔해지며 고통도 사라졌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데도 오히려 몸은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듯했다.
“형, 형!”
의식을 잃으면서도, 예준은 이제라도 기절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천연덕스럽게 생각했다.
*
탁, 불이 켜지는 것처럼 의식이 돌아왔다.
열린 문틈에서 들어온 빛이 온통 깜깜한 내부로 스몄다. 삐익, 삐익, 심박수를 알리는 기계음, 묵직한 몸, 깨질 듯이 아픈 머리, 소독약 냄새가 나는 이불.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니 무사히 병원에 도착한 듯했다.
정신은 차렸지만, 배가 너무 아파 예준은 움직일 수 없었다. 얼마간 정자세로 누워 있었는지 등에 돌이라도 깔린 듯 불편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용을 쓰고 있는데 치문이 링거를 끌고 들어섰다.
“형. 깼어?”
“어….”
치문이 병실의 불을 켜자 햇살 속에 선 듯 눈이 부셨다. 시야 속으로 빠끔 들어오는 치문의 얼굴이 기괴했다. 여기저기 부은 데다 상처를 꿰매기라도 했는지 온통 반창고투성이였다.
“내 뼈는 단단해서 금 하나 안 갔는데 형은 갈비뼈가 골절됐대. 존나 아팠겠다던데, 의사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그렇게 아파 보긴 처음이었으니 골절이라면 이해가 되었다.
“아파 죽는 줄 알았어.”
“그래도 형이 둘은 제대로 때려눕혔으니까 그 정도면 우리가 이긴 거야.”
그런 걸 가지고 좋아할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예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차디찬 바닥을 뒹굴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지금은 편안히 병실에 누워 있어 다행이란 생각뿐이었다.
자신에겐 과분한 호사였다. 거기다 제법 너른 병실에 소파와 화장실까지 딸린 걸 보면 아무래도 일인실인 듯했다. 선수 시절, 부상을 입었을 때를 제외하곤 구경도 못 해 본 일인실이기에 신기했다.
약이 도는지 머리도 몸도 멍했다. 푹 가라앉는 기분에 잠자코 천장만 바라보고 있는데 불현듯 생각이 났다.
“아빠는?”
당연히 옆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친 곳은 없다지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을 것이다. 치문에겐 좋은 소리 못 듣는 데다 이곳 모두가 낯설게 느껴질 터였을 테고. 불안한 예감에 예준은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며 치문을 보았다.
“갔어.”
“뭐?”
“갔다고.”
차 안에서 내내 조용하기에 불안했다.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예준은 붕대에 감싸인 늑골 부근에 손을 댔다.
“으윽….”
“아, 형! 일어나면 안 돼. 형 이틀 만에 깬 거라고, 지금.”
“뭐? 이틀?”
“그래, 이틀!”
“아빠는? 아빠는 언제 가셨는데?”
치문이 턱에 힘을 주었다.
“언제 갔으면? 뒤쫓아 가기라도 하게?”
손등에 꽂힌 링거를 뽑아 던진 예준이 이불을 걷어 냈다. 예준은 하얗게 변한 머릿속을 인지하지 못하고 맨발로 병실 바닥을 밟았다. 치문에게 붙잡혔으나 놀라운 힘으로 그 손을 떨쳐 냈다.
“그냥 보내면 어떡해….”
간신히 사기 노름판에서 빼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바닥을 짚은 예준의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척추가 내려앉을 것처럼 늑골에도 무게감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홀린 듯이 병실을 빠져나가는 예준을 치문이 바쁘게 뒤쫓았다.
예준은 어기적어기적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무리 진통제를 맞았더라도 몇 층이나 될지 모를 계단을 뛰어 내려갈 순 없었다. 링거 바늘이 빠진 손등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덕분에 무사히 로비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링거 줄에 감긴 치문이 전쟁을 치르는 사이, 예준은 로비를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까맣게 밤이 내려앉았으나 시끄럽게 울리는 구급차 소리,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차량의 헤드라이트 불빛 때문에 사위가 밝았다.
“아빠.”
예준은 재우가 자신 때문에 신세를 망쳤다는 사실을 뒤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았다면, 그가 아들을 구제하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힐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만한 빚을 떠안고도 부채감 탓에 아빠를 온전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재우의 뒷수습을 감내하는 건 따지자면 모든 불행의 시작이 자신에게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아빠….”
예준은 어쩌면 언제 떠났는지 모를 아빠를 찾기 위해서 이곳까지 뛰쳐나온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멀리 사라진 아빠의 등을 확인하고 안심하기 위해 이런 무모한 행동을 벌인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아빠를 만나서 다행인가? 다시 떠나서 다행인 건 아니고? 함께 있지 않으면 부채감을 덜 수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감정으로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
재우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걱정과 안도 사이의 기묘한 괴리감이 들이쳤다. 자신이 너무 냉정하게 느껴져서 예준은 병원 앞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때, 누군가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예준아.”
익숙한 페로몬에 예준은 코를 킁킁거렸다. 절묘한 순간에 나타난 남자는 편한 운동화를 신은 채였고 직전에 씻었는지 좋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까지는 보았으나, 예준은 차마 남자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입술만 짓씹었다.
눈물이라도 나면 좋겠는데 눈두덩에 피조차도 몰리지 않았다.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와중에 태경이 손수건을 꺼내 손등의 출혈을 막아 주었다. 온기를 느끼는 순간, 자각하지 못했던 고통이 한순간에 밀려들었다. 예준은 앞으로 퍽 고꾸라지는 상체를 통제하지 못하고 태경의 어깨에 고개를 처박았다.
“으윽…, 아…. 아파….”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와 끙끙댔다. 고통에 반해 점점 머리가 맑아지며 주변의 공기가 선명해졌다. 이렇게 추웠나, 생각하자마자 한기까지 몰려왔다. 어찌나 아프고 추운지 두 뺨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뭐가 문젠데.”
당장 늑골이 으스러질 듯 아픈 것도 문제고, 떠난 아빠도 문제고, 빚도 문제고, 오메가인 것도 문제고, 그에게 무력하게 안긴 처지도 문제였다. 그러나 한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곧 예준의 두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런 예준을 가뿐히 들어 안은 태경이 말했다.
“손등 꽉 누르고 있어.”
치문이 뒤늦게 우당탕대며 로비 문을 열고 나왔다. 도와주겠다고 다가온 간호사를 뿌리치지 못해 늦어도 한참을 늦어 버렸다. 치문은 예준을 안아 든 채 빠르게 지나치는 우성 알파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뭐야.”
위압적인 자태. 다정하게 예준을 안은 것에 비해 무섭도록 싸늘한 무표정까지. 눈이 돌게 잘생긴 외모는 차치하더라도 편안한 차림에도 줄줄 흐르는 부티가 심상치 않았다.
예준의 사정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까지 와서 치료받는 동안 묻지 못한 질문의 답이 바로 저기 있었다.
“씨발, 너 뭔데….”
*
예준은 남자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누웠다. 현기증과 갈비뼈의 통증 때문에 인상을 쓰자 그가 달래듯 말했다.
“진통제 달라고 할 테니까 조금만 참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을 찾은 간호사가 가슴 부근에 진통제 패치를 붙여 주었다. 간호사는 지혈을 마친 뒤 새 환자복을 건네주고 돌아갔다. 병실이 비자마자 남자의 손끝이 환자복 단추에 닿았다.
“통증은 괜찮아질 텐데 많이 졸릴 거야. 그럼 참지 말고 그냥 자요.”
상의를 열어 놓은 채 예준은 한동안 관찰당했다. 그는 늑골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단단히 등을 받치고 새 환자복을 입도록 도와주었다. 갈무리되지 못한 페로몬, 확연히 느껴지는 열감에 예준은 고통을 참으며 태경을 보았다. 손길은 부드러웠으나 평소와 달리 남자의 눈빛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화가 난 건가. 러트의 성감 때문에 괴로운가 싶다가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남은 껄끄러운 감정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묘한 이질감에 예준의 입이 타들어 갔다. 몸은 물에 빠진 듯 둔한데 심장은 스피커 바로 앞에 선 것처럼 크게 고동쳤다.
약 기운이 돌아 고통이 거의 잦아들 즈음, 예준은 꾹 다물었던 입술을 뗐다.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해요.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성대를 긁으며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남자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제 머리카락으로 손을 뻗었다.
“친절하게 문자까지 보내 놓고 뭐가 미안해. 말없이 안 왔다고 하더라도 괜찮았을 거예요.”
“페로몬이 아직….”
“맞아요. 러트는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끝날 텐데 억제제를 먹었거든. 적어도 다친 애 강간은 안 하겠다 싶어서 왔어.”
다른 오메가를 찾으면 될 걸, 우성 알파가 굳이 억제제를 먹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페로몬을 참을 만한가 싶었다. 러트인 알파와 마주하고 있다면 벌써 아래가 흠뻑 젖고 저도 모르게 다리를 벌렸어야 맞는 일이었다. 배가 아릿아릿 조여들긴 했지만, 확실히 앞뒤 없이 달려들 정돈 아니었다.
“예쁜 데는 다 망가뜨려 놨네.”
반창고가 붙은 이마와 찢어진 귓불을 확인한 태경이 미간을 좁혔다. 가라앉는 눈빛이 신경 쓰여 예준은 애꿎은 두 손만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적요 속에서 그의 시선을 느끼자 괜히 발끝이 저릿하고 긴장이 되었다.
“뇌진탕에, 늑골 골절에, 복부 출혈에…. 온몸이 붓고 터져서 말이 아니에요.”
이만하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에 새겨진 불쾌한 기색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예준은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시선을 들었다.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
또 한 번 남자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예준의 가슴속 어딘가를 짓눌렀다. 그가 자신을 찾지 않았다면 저나 치문, 재우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고마운 일이지만 역시 당연한 일은 아니었다.
“문자가 예준 씨답지 않아서요. 위치는 핸드폰 번호로 추적했고, 오해할까 봐 덧붙이자면 예준 씨 일에 개입하지 말아 달란 말을 무시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
“그 말 지키자고 내 직감까지 무시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 건 맞아요. 예준 씨는 언제든 위험한 일에 휘말릴 수 있는 오메가니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예준 씨보다 내가 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감사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고?”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남자가 아니었다면 위기를 돌파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한참이나 뜸을 들인 예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아요. 그냥… 또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려서 대표님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예준이 옅은 한숨을 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남자는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을 선택했지만, 그 선택은 확실히 잘못된 결정이었다. 섹스보단 제 뒤치다꺼리를 더 많이 하고 있지 않은가. 예준은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해 달라고 했죠. 아버지를 찾고 싶었던 거면 그냥 나한테 말하면 될 문제였어. 그럼 약속을 어길 일도, 이렇게까지 심하게 다칠 일도 없었을 거예요.”
“그런 말 하는 게 저랑 대표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어느 알파가 고작 섹스 파트너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겠어요. 말이 안 되잖아요.”
“예준 씨.”
“그때 말씀드렸다시피 대표님이랑 아무 상관 없는 제 사적인 문제일 뿐이고.”
그가 턱을 붙잡아 돌렸기에 흐트러진 시선이 이끌렸다. 눈동자를 직시한 그가 덧붙였다.
“따지자면 인간이 하는 일 중에 섹스가 가장 사적인 범위에 속하지 않겠어요? 배 맞추는 사이에 못 할 말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피차 깔끔한 게….”
“그건 자기 인생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끼리의 이야기지. 매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오메가는 누구와도 깔끔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어요.”
정곡을 찔렸다. 오메가는 형질의 특성 때문에 관계를 정상적으로 이어 나가기 어려웠다. 예준이 수치스러워 얼굴을 붉히자 태경이 마른 어깨를 감싸 쥐었다.
“다시 안 볼 사람과는 가능하겠죠. 그런데 난 예준 씨를 계속 보고 싶거든.”
꼴불견인 모습만 보였으니 이대로 관계가 끝난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예준은 진통제 탓에 점차 몽롱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남자를 보았다.
“고작 몇 초 마주친 알파도 얽혀 보겠다고 갖은 수작을 다 부리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베타까지 널 두고 어쩔 줄을 모르잖아.”
그의 턱 근육이 깊게 팼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눈빛만 보아도 성감이 고조된다. 쉽게 성욕을 달구는 형질끼리 만났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속궁합이 잘 맞는 경우는 드물었다. 알지만, 그 관계가 귀찮은 모든 일을 감수하면서까지 이어 나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모호했다.
예준이 혼란스러워 말을 삼키는 사이, 남자가 한탄하듯 읊조렸다.
“하물며 침대에서 뒹굴어 본 나는 어떨 것 같아?”
그의 개입이 싫다면 파트너 관계마저 끊어 버리면 그만인 일을, 히트 사이클이 두렵다는 이유로 버티는 형국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와의 잠자리를 상기하고, 그의 다정한 눈빛을 떠올리며 낯선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았던가.
“그게… 제 탓은 아니잖아요.”
기어코 내뱉은 말에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탓하겠다는 게 아니야. 현실을 바로 보라는 거지. 예준 씨는 도움이 필요하고 난 예준 씨가 다치지 않게 도와줄 수 있어요. 섹스 파트너 관계에서 어디까지가 선인지 그런 건 모르겠고, 문제가 있다면 그냥 날 이용해요.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니까.”
마음이 쓰인다고 했나. 그럼 이건 단순한 알파의 소유욕이자 한편에 자리한 동정심일까. 치워 버리기 어려울 만큼 제 몸이 마음에 들기라도 하는 걸까. 그러나 실상 예준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선 긋는 건 그만 해요. 이런 일로 피차 힘 빼는 거 무의미한 일이잖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예준은 마른침만 연거푸 삼켜 냈다. 뜸을 들이자 그가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에 깃든 피로감이 엿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몹시 힘든 게 아닐까. 히트 사이클이 왔을 때의 저만 돌이켜 보아도 그가 느끼고 있을 성감이 어떨지 짐작되었다.
“걱정 많이 했어요. 이만하길 다행이란 말은 못 하겠고.”
그가 서늘한 눈빛으로 덧붙였다. 이내 비껴간 남자의 시선이 창가에 가닿았다.
시선의 구속에서 벗어난 예준은 점점 탈력감이 심해져 머리를 침대맡에 기대었다. 통증은 견딜 만해졌지만 속이 울렁거리고 눈두덩이 견딜 수 없이 무거웠다.
“아빠는….”
“김재우 씨는 찾아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왜 병원 앞에서 찬 바람을 맞고 서 있었는지, 남자는 그 이유마저 이미 아는 듯했다. 곧 손목을 그러쥐는 남자의 손길이 느껴졌다. 다른 한 손으로는 부드럽게 이마를 쓰다듬는다. 멍든 곳이 아릿하게 아팠다. 그러나 그 따뜻한 손길이 싫다면 거짓말이었다.
“죄송해요. 너무 졸려서….”
“보고 있어. 눈을 못 뜨네.”
예준은 결국 진통제의 위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삐-하는 이명이 들리더니 사위가 고요해졌다. 예준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고르게 잦아들 때까지 태경은 잠자코 시간을 죽였다.
“…….”
얼마 후, 예준의 호흡이 확연히 깊어졌다. 상념을 지우고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다만, 태경의 심장 박동은 여전히 거세었다. 어디 하나 성한 곳 없는 몸을 본 직후부터 피가 끓었다. 가까스로 누르고 달래는 일에 집중했으나 쉬이 가시지 않는 감정이었다.
예준을 이해하긴 어렵지 않았다.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 아무런 보호막 없이 살아온 짧은 인생을 생각하면 태경 자신에게까지 그 무력감이 전이되는 기분이었다. 그 무게에 짓눌려 본 경험이 있으므로 감히 짐작할 수 있었다.
태경이 잠든 예준의 뺨을 어루만졌다. 보드라운 귓가를 쓸고 땀이 식은 목덜미에 코끝을 댔다. 억제제를 먹었음에도, 마주한 순간부터 닥친 페로몬을 감당하긴 쉽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이불을 열고 들어가 아이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고 싶었다. 약효가 들지 않았다면 부러진 늑골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얀 허벅지를 쉼 없이 깨물고, 연한 구멍을 미친 듯 헤집고, 울먹이는 얼굴을 보며 사정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양 굴 수도 있었다.
러트에 동반한 증상인 걸 머리로는 알지만 그렇다고 괴물이 된 기분마저 상쇄되는 것은 아니었다. 귀가 터질 듯 심장이 뛰었다. 태경은 가까스로 예준의 몸에서 손을 떼어 냈다. 간이 등을 끄고도 한참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실로 오랜만의 격동이었다.
*
아침이 되어 눈을 뜨자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예준은 극심한 갈증을 느끼며 일어났다. 다행히도 협탁 위엔 물이 놓여 있었다. 한 모금 들이켜고 주변을 살피자 남자가 남긴 쪽지가 보였다.
[저녁에 다시 올 테니 쉬어요.]
무거운 마음으로 쪽지를 접은 예준이 몸을 일으켰다.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통증이 한결 나아졌다. 얼마나 머무르고 떠났을까. 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들었으니 가뜩이나 무거운 머리를 굴려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가까스로 침대 머리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치문이었다.
“형.”
“치문아.”
“죽은 듯이 자기에 일부러 안 깨웠어.”
“고마워. 밥은?”
“먹었지. 나야….”
치문의 손에는 점심으로 나온 죽이 들려 있었다. 쭈뼛쭈뼛 다가온 녀석이 침대 테이블을 올리고 식판을 놓아 주었다. 제 밥 먹이기에 열성인 건 그렇다 치고 자꾸만 이쪽을 흘끗거리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왜 자꾸 봐?”
“아니, 그 남자… 누구야?”
“어?”
그러고 보니 설명할 기회가 없었다. 그가 보낸 경호원의 도움을 받은 데다가 어젯밤 남자를 봤다면 치문이 궁금증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치문은 짐작 가는 데가 있는 얼굴로 덧붙였다.
“그 우성 알파 맞지? 합의금 준 놈.”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경에 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기에 치문은 몹시 괘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형한테 이렇게까지 해 줄 만큼 엮였는데 나한테 말을 안 해?”
“…이렇게까지 해 줄 줄 몰랐어.”
“형 찾아내서 구해 준 것도 그렇고, 도대체 어떻게 엮였기에 이렇게 으리으리한 병실도 마련해 주고 그러냐고. 나한테는 언제 말할 생각이었어? 아, 진짜 형 이러면 나 섭섭해 죽어요.”
반찬 뚜껑을 열던 녀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치문 앞에서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수위 높은 이야기를 꺼내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예준은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골라 말했다.
“합의금 받으러 갔다가 발정기 같이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발정기?”
정확히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성욕을 참기 힘들 때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그거 있잖아. 그냥 성욕 푸는 목적으로 만나는.”
“아아. 섹스 파트너?”
“그래. 그냥 그거 하자고 한 거였어. 나도 형님들보다야 그 사람이 나아서 동의한 거고.”
바쁘게 답한 예준은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가는 몸을 들썩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치문이 양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제대로 앉을 수 있게 몸을 들어 주었다. 늑골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인 녀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와, 씨…. 모르긴 몰라도 귀티 장난 아니던데.”
“부자니까.”
“도대체 어떻게 꼬셨기에 그런 우성 알파가 형한테 사족을 못 써?”
꼬신 적도, 그가 사족을 못 쓴 적도 없었다. 예준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답했다.
“무슨 말이야.”
“그 사람, 새벽까지 있다 갔어.”
“…….”
“애초에 형 찾아낸 거면 위치 추적까지 했다는 건데…. 섹스 파트너라며. 누가 섹스 파트너한테 그렇게 집착해? 몸만 섞으면 그만인데.”
“그건 그 사람이 러트여서.”
“히익! 그럼 더 말이 안 되지. 형님들 러트 때 어떤지 몰라? 눈 돌아서 오메가 거기 쑤실 생각밖에 안 하는데 그렇게 점잖게 있다 갔다고?”
그는 치문과 자신이 겪어 왔던 알파들과 격이 다른 사람이었다. 낭설로만 듣자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예준이 생각하기에 태경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자제력이 있었다.
“억제제 먹었대.”
“그게 더 이상해. 어떤 우성 알파가 러트 때 억제제를 먹어, 말이 돼?”
“제치문.”
“와…. 월척이네, 월척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치문이 죽 한술을 떠서 내밀었다. 예준은 받아먹는 대신 숟가락 손잡이를 쥐어 직접 죽을 넘겼다.
“오해하지 마. 그런 거 아니니까.”
그 사람의 의중은 잘 모르겠다.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데 거리낌 없는 사람이고 그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까지는 알겠으나…. 그 이상의 마음이 있다고 여기기는 어려웠다.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닥쳤고, 하필이면 그 사정을 그에게 모두 들키고 말았다. 이번 일도 그랬다. 러트 약속만 아니었다면 그가 자신을 찾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알파가 속에 품은 걸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뭐라고 하는데.”
“흑심.”
“말도 안 돼.”
“내지는 반했다, 꽂혔다, 빠졌다 등등.”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는 페로몬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다. 그 강력한 끌림과 감정을 명확히 분리하긴 어려웠다. 그러니까 그가 만약 자신에게 호감을 느낀다면 그건 그저 페로몬의 한 작용일 가능성이 컸다.
“형은 형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해. 형이 괜히 국민 요정 소리 들었겠어? 귀엽지, 잘생겼지. 나는 형이랑 자 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알파가 눈 돌 만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뭘 그렇게 부정해.”
“너 형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형은 진짜 나만큼도 모르면서 맨날 아는 척이에요? 그 알파가 형 좋아서 그러는 거라니까?”
예준이 저도 모르게 헛웃음 쳤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체하겠다.”
핀잔 좀 준 정도로 금세 통증이 전해졌다. 예준은 늑골 부근을 문지르며 치문을 만류했다. 죽은 다섯 숟갈쯤 넘기니 울렁거림이 심해져 먹길 그만두었다. 숟가락을 내려놓자 익숙한 치문은 별다른 잔소리 없이 식판을 치웠다.
“아저씨는 내가 수소문해 볼게.”
“그 사람이.”
말하려던 예준이 멈칫했다. 치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손끝으로 예준의 어깨를 찔렀다.
“그 사람이 뭐?”
“…찾아 주겠대. 그러니까 넌 잠자코 있어. 형님들 알면 큰일 나니까.”
아버지가 또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예준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치문이 괜히 들쑤시면 이번 일까지 들켜 곤욕을 치를 수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저들보다야 남자가 아빠를 찾아내는 게 더 빠르고 쉬울 터였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건 남자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것이다. 예준은 또다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봐. 다 해 주잖아. 내 말 맞지?”
예준은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저는 그렇지 않았다. 치문과 둘이서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나섰다가 험한 꼴만 보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선을 마음대로 넘나들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할 수 있는 일과 그럴 수 없는 일을 인정하는 것만이 민폐를 덜 끼칠 방법이었다.
“모르겠어, 나도.”
언제 이렇게까지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나. 알파라고는 저질의 열성 알파들만 상대해 본 게 다였다. 자신이 모르는 윗물에는 태경 같은 사람들도 있다는 걸 이제 막 알았을 뿐이다. 예준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치문이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잘 봐.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녀석은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사람처럼 덧붙였다.
“아무 감정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형도 잘 알잖아.”
*
남자는 해가 지고 한 시간 남짓 지나서 병실에 도착했다. 러트 탓에 오늘도 출근하지 않았는지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성욕에 시달렸을 텐데 마르기는커녕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점퍼를 벗은 그는 조용히 병실 문을 닫은 뒤 다가왔다.
침대에 누워 졸고 있던 예준이 때맞춰 몸을 일으켰다. 그저 상체를 좀 들었을 뿐인데 그가 손을 뻗어 등을 받쳐 주었다. 페로몬이 어제와 달리 은은한 걸 보면 러트가 끝난 게 확실했다.
“감사합니다.”
바로 앉은 예준이 말했다. 태경은 미소가 맺힌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거 없었어요?”
“네. 전혀요.”
몸이 불편한 것 말고는 오히려 집보다 더 편안한 곳이었다. 치문과 점심을 먹은 이후로는 내내 혼자 있어 낮잠을 방해하는 이도 없었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꼬질꼬질한 행색 정도일까. 뒤늦게 거울을 보고 멍든 얼굴과 터진 입술에 놀라기도 했고. 예준은 괜히 뺨을 긁으며 태경과 눈을 맞추었다. 그는 긁힌 상처나 입술 주변을 더듬으며 자신이 더 쓰라리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아프진 않았어요?”
“어제보단 훨씬 괜찮았어요.”
“다행이네.”
그가 옷자락을 들어 늑골 주변을 살폈다. 붕대 탓에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자 통증이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가까이 맞붙은 덕분에 예준은 어쩔 수 없이 부담스러운 거리에서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상기된 뺨,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바깥 날씨와 어울리지 않았다.
“더우세요?”
“병원이라 좀 덥네.”
자신은 얇은 환자복 차림이라지만 태경은 점퍼까지 입고 온 데다 양손에 든 짐만 해도 제법이었다.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해하는 사이 그가 맨투맨 아랫자락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래도 병원인데 그렇게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 알파가 형 좋아서 그러는 거라니까?’
낮에 치문에게 괜한 말을 들어 신경이 쓰였다. 예준은 태연한 얼굴로 구겨진 반소매 티셔츠를 정리하는 남자를 주시했다. 눈길을 끄는 값비싼 시계를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도드라진 혈관, 잔뜩 부푼 근육. 확실히 몸이 더 좋아졌다. 티셔츠 위로 굴곡진 모양새만 보아도 만졌을 때의 감각이 절로 그려졌다.
“배고프지.”
“네….”
그가 침대 테이블을 세운 뒤 죽을 가져왔다. 잡념을 지운 예준은 열린 뚜껑 아래 노란 빛깔의 죽을 내려다보았다. 단호박죽이었다. 달콤한 향을 맡자 군침이 돌았다.
“지인한테 부탁해서 만든 거니까 맛은 괜찮을 거예요.”
“괜찮은데….”
“괜찮은 거 알지. 그래도 가능하면 좋은 거 먹이고 싶어.”
단조롭게 말한 그가 제대로 된 숟가락까지 건네자 괜히 미안해졌다. 러트만 해도 고생이었을 텐데 이런 일까지 도맡아 해 주다니.
“…감사합니다.”
예준이 죽을 뜨며 읊조렸다. 픽, 웃은 그가 예준의 뺨을 문질렀다.
“별말씀을.”
태경이 식사할 때 얼마나 예의 바른지 알기에 예준은 최대한 차분히 죽을 삼켰다. 허기를 급하게 채웠다간 꼴사납게 체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대표님은 안 드세요?”
“난 먹고 왔으니까 편하게 먹어요.”
그가 테이블 맞은편에 긴 다리를 구겨 넣어 앉았다. 숟가락과 입술을 번갈아 보는 노골적인 시선에 예준은 애꿎은 물만 삼켰다.
“먹으면서 들어요.”
“네.”
남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덩달아 아픈 척추를 곧추세운 예준이 눈을 맞추었다. 잠시간 뜸을 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김재우 씨 소재는 확인했어요.”
한동안 의식의 가장 바깥 자리에 두었던 화제였다. 떠올리기가 괴로워 접어 둔 이야기를 그가 먼저 펼쳤다.
“병원에서 나간 뒤에 고속버스를 탔더라고. 이번에는 인천으로 갔는데 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별다른 설명 없이도 예준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같은 사람은 몇 달을 소비해도 성과를 얻지 못할 일인데, 태경에겐 고작 하루면 충분하다는 사실이 씁쓸할 뿐이었다.
“원하면 계속 추적할 테지만, 그 사람을 예준 씨 가까이에 두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어딘가 단호한 어투였다. 아빠 때문에 다치기까지 했으니 함께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예준도 아빠와 예전처럼 한집에서 살고 싶다는 헛된 꿈 같은 건 꿔 본 적 없었다. 태경의 우려와 달리 재우를 제 삶에 불러들일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어떤 절실함도, 반박도 없이 수긍했다. 예준은 반쯤 남은 죽을 차분히 삼키며 덧붙였다.
“그래도 아빠가 위험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태경이 따듯한 손으로 예준의 뺨을 감쌌다. 다친 귓불을 문지르고 손을 떼어 낸 덕분에 예준은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다 먹었어요?”
“조금만 더요.”
죽을 바닥까지 싹싹 비우자 태경이 흡족한 얼굴로 빈 그릇을 치웠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 조금 쉰 후에 예준은 남자가 사 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늘 생각하지만, 저를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목 안이 부어서 불편할 땐 아이스크림이 좀 도움이 돼요.”
“네.”
고분고분 대답한 예준은 손에 쏙 들어오는 컵 아이스크림도 모두 비워 냈다. 그러자 남자는 어린애에게 하듯 머리를 쓰다듬고 물러났다.
뒷정리를 끝낸 태경이 방의 조도를 낮추었다. 이불을 배까지 끌어 덮으며 예준은 태경의 눈치를 보았다. 낮잠을 푹 자서 그런지 잠이 오지도 않았고, 바람 소리조차 나지 않는 밀폐된 공간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까맣게 잠긴 창밖으로 빼곡한 아파트와 건물들이 보였다. 쭈뼛대며 이불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이만 돌아가리라 생각했던 남자가 소파에 기대앉았다. 거리낌 없이 바인더를 꺼내 드는 걸 보니 일을 할 모양이었다.
“일하시려고요?”
“네.”
“이만 가 보셔도 돼요. 덕분에 잘 먹었어요. 저 혼자 움직일 수 있어서 굳이 안 계셔도 괜찮은데요….”
“억지로 있는 거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소파 불편하잖아요.”
“불편한 거 감수하고서라도 여기 있고 싶어. 그러니까 잔소리 그만하고 눈 좀 붙여요.”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운 남자가 느긋하게 펜대를 굴렸다. 딱히 잔소리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민망해진 예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예준은 남자의 말대로 눕는 대신 침대 너머의 인영을 숨죽인 채 관찰했다. 그는 곧 예준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바인더 속 서류에 눈을 고정했다. 운동선수를 연상하게 하는 체격이 무색하게도 미동 없이 집중한 모습은 그저 우아하기만 했다.
허벅지 안쪽이 간지러운 건 페로몬의 영향이라기보다 시각적인 자극 탓이었다. 예준은 남자의 섬세한 모습을 볼 때마다 묘한 성감을 느꼈다. 그가 작업실에서 설계도 위에 선을 긋는 장면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제 일상과는 너무도 다른 대척점에 있어서일까. 왠지 마음이 뒤숭숭해져서 예준은 뒤늦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들긴 어렵지 않았으나 새벽부터 열이 오른 것이 문제였다. 몽롱한 기분으로 깨어난 예준은 갑자기 밝아진 형광등 불빛 아래 눈살을 찌푸렸다. 입고 왔던 맨투맨을 다시 꿰입은 남자가 병실을 찾은 당직 의사와 뭐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보였다.
온몸이 물에 빠진 듯 무거워서 예준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잠자코 기다렸다. 땀에 푹 젖은 이마에 남자의 손이 닿았다. 저와 달리 보송보송하고 서늘한 감촉이었다.
링거를 몇 개 더 추가했다. 남자는 소파 대신 보호자용 의자를 끌어와 곁에 앉았다. 잠든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애초에 잘 생각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준은 눈만 깜빡이며 남자를 보았다. 차가운 수건을 몸에 댄 남자가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잘 봐.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아무 감정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형도 잘 알잖아.’
자꾸만 치문이 한 말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무런 기대도 없으면서 의심을 품는다. 보잘것없는 저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이유가 뭐냐고 묻고 싶었다.
묻지 않았기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열감으로 귀가 뜨거워졌다.
*
남자는 하루에 서너 번씩 전화를 걸어왔다. 밥은 잘 먹었는지, 검사는 잘 마쳤는지, 피곤하진 않은지. 대화는 그런 대수롭지 않은 질문으로 이어졌고 마지막엔 대체로 오늘은 들르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안정적인 회복세에 오르면서 치문은 퇴원했다. 형님들에겐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어서 다쳤다고 둘러댄 모양인데, 변명이 통했다고 해도 며칠이나 병원에서 시간을 축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치문마저 사라지자 병실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혹 들르는 간호사나 회진을 도는 의사 무리가 아니라면 예준은 내내 혼자였다. 늘 그래 왔듯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니 쓸데없는 생각들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비극적인 과거의 일이나 아빠 문제, 이자 상환일, 방치된 스쿠터까지. 이렇게 골치가 아프도록 고민해 보긴 오랜만이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 깼다 자길 반복하고 있는데, 오랜만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좋지 않은 직감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윤도하였다.
―또 어디서.
“다리 벌리고 있냐고?”
늘 같은 레퍼토리였다. 예준이 선수를 치자 윤도하는 대번에 욕을 내뱉었다.
―그래, 씨발. 또 누구한테 대주느라 집구석엘 처 안 들어와? 이태경이야?
다치는 바람에 그와 잠자리를 가지지 않은 지 꽤 되었다. 예준은 거짓 없이 대답하려다 도리어 질문했다.
“외출 금지는 끝났어?”
창피한지 녀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윤도하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 중 하나였다. 예준은 갈비뼈 부근에 손을 댄 채로 몸을 일으켰다.
“할 말 없으면 끊을게.”
―아니, 씹…! 어디냐고!
“어디면. 그건 알아서 뭐 하게.”
―좆만 한 새끼가. 뒤지게 맞고 싶어서 뻗대지?
말과 말 사이에 씩씩대는 숨소리가 섞여 든다. 언제나처럼 순식간에 고조된 녀석이 정신없이 욕설을 읊조렸다. 예준은 윤도하를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바로 전화를 끊었다. 다시 걸려 온 전화는 무시했다. 그러자 부재중 전화가 열 번이나 반복해 찍혔다.
“당분간 못 들어가니까 집 찾아오지 마. 내가 어디에 있든 그거 너한테 말해 줄 이유 없어.”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자 녀석이 호소하듯 말했다.
―끊지 마.
“…….”
―끊지 말라고, 씨발.
끝내 쌍욕을 덧붙이긴 했지만 녀석이 대단히 자제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상태로는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한지 궁금했다. 예준은 전화기를 든 채 녀석을 기다렸다.
―왜 집에 안 들어오는지 말해.
이해할 수 없는 관심이 피로했다. 예준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답했다.
“좀 다쳤어. 그래서 못 들어가.”
―어딜. 어딜 다쳤는데.
“그런 게 있어. 넌 몰라도 돼.”
―좆같이 굴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왜 다쳤는데!
버럭 성을 낸 녀석이 다시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녀석이 머무르는 공간에서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길게 한숨을 내쉰 예준이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맞기밖에 더 했겠냐.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고 관심 꺼. 너랑 실랑이할 힘도 없어, 지금.”
―이태경은 알아?
예준은 그의 이름을 방패막이로 쓰고 싶지 않았다. 녀석의 자격지심을 건드리는 건 치졸한 방법이니까. 그러나 도리가 없을 때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 녀석의 의지를 꺾는 데에는 알파의 이름만 한 게 없으므로.
“알아.”
간단히 답한 예준이 전화를 끊었다. 전화는 다시 걸려 오지 않았다.
예준은 윤도하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가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남자의 이름을 들먹인 건 그와 관련한 병원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는 걸, 윤도하의 두 눈을 마주하자마자 깨달았다. 덩치들을 풀어 수소문했는지 집안사람에게 부탁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녀석은 전화를 끊은 지 네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병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어딜 다쳤다는 건데?”
녀석이 턱을 붙잡아 상처를 살폈다. 그다음에는 마구잡이로 손을 뻗어 옷을 들치고 붕대가 감긴 허리 부근을 주물럭거렸다. 무감하게 통증을 유발하는 바람에 예준이 윽, 신음하며 등을 고꾸라뜨렸다.
“야.”
“으, 윽…. 왜.”
“씨발, 그 정도인 줄 모르고 만진 거야.”
“대체 여긴 왜 왔어.”
고통이 절반쯤 잦아들었을 때, 예준은 녀석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았다. 아담한 크기였지만 얼마 전 자신이 샀던 위로용 꽃다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분홍색 장미가 빽빽이 들어찬 꽃다발은 녀석과도, 녀석의 교복 차림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 또한 보는 입장에선 그저 난감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불쾌한 감각과 함께 예준은 이불을 끌어와 보호막처럼 덮었다.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내비치자 윤도하가 턱을 꽉 다문 채로 눈을 마주했다.
“또 뭔 짓을 했기에 몸이 이 지경이야?”
“무슨 짓 안 해도 늘 이래.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냐.”
“어떤 새끼가 그랬는데.”
“알면 뭐 어쩌게.”
“뒤지게 패 주게.”
녀석의 눈이 이글거렸다. 윤도하는 뭐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일인실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남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가 놓아두고 간 서류, 그의 지인에게 죽을 받아 왔을 때 가져온 종이 가방 같은 것들.
“확실히 다르네. 이전 것들이랑은.”
오메가를 물건처럼 칭하는 윤도하는 아무런 죄의식도 없어 보였다.
“이 대표. 자고 갔어?”
윤도하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침대 위로 툭 던졌다. 노골적으로 하체를 들여다보며 덧붙였다.
“넌 그 꼴로 좆 받을 수 있나 보네.”
불청객인 주제에 말이 거칠었다. 기죽지 않고 노려보자 녀석이 성큼 다가와 이불을 붙잡아 당겼다. 이리저리 뒤채며 반항하던 예준은 죽을힘을 다해 통증을 참다가 결국에는 윤도하의 턱을 퍽 후려쳤다. 한 걸음 뒤로 밀려난 녀석이 악 소리를 내며 턱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너덜너덜한지 봐야겠어.”
구멍을 말하는 것일까. 재차 다가온 녀석이 예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거 놔!”
단숨에 목이 옥죄었다. 꽁꽁 쥐고 있던 이불은 곧 바닥으로 떨어졌다. 상체를 결박당한 것도 모자라 녀석의 손이 환자복 하의 고무줄에 닿았다. 거세게 당기는 힘에 흰 골반과 허벅다리가 드러났다. 순간, 거침없던 손끝이 멈칫했다.
“…….”
벼랑 끝으로 몰렸다고 생각했던 예준은 얼음처럼 굳었다. 속살을 노려보던 윤도하가 얼굴을 붉힌 탓이었다. 분명, 속옷 위로 도드라진 남자의 성기가 기분을 불쾌하게 만든 탓은 아니었다.
“놔.”
내리깔렸던 녀석의 속눈썹이 위로 향했다. 부드럽게 골반을 그러쥐는 손이 누군가와 닮았다. 멍해진 때를 틈타 가까워진 코끝을 보며 예준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랑도 하자고 말했었지. 이태경이랑 하는 거.”
말문이 막혔다. 반박하려 입을 떼려는데 녀석이 상체를 깊이 들이밀며 입술을 맞대었다. 당황해 밀어내지 못한 걸, 멋대로 해석한 녀석이 입 속으로 혀를 쑥 집어넣었다. 풋내 나는 키스였으나 상대의 기분을 헤아리지 않는 혀는 폭력적이었다. 예준은 있는 힘껏 윤도하를 밀어냈다.
“그만해.”
“페로몬이 뭐. 그거 못 느껴도 너한테서 존나 좋은 냄새 나. 충분히 꼴린다고.”
다시 다가온 입술이 이번에는 목덜미에 닿았다. 허벅지 안쪽으로 들어오는 손을 저지하며 예준은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뭘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베타가 이래 봐야 난 아무 감각 없어.”
끈덕지게 달라붙는 녀석을 밀어내고 덧붙였다.
“그리고, 대표님은 나한테 막무가내로 이런 짓 안 해.”
기분이 상하거나 상처를 받길 바랐지만 녀석은 몇 번 더 입술을 맞붙인 뒤 몸을 떼어 낼 뿐이었다. 흐트러진 교복 셔츠를 바로 잡을 생각 없는 불량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아무렇게나 굴러먹는 오메가잖아. 기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이태경한테 비밀로 해 줄게. 그 새끼, 일 중독자라 어차피 너 독수공방시킬 텐데 뭐가 걱정이야.”
했던 대로 떼를 쓰리라 생각했던 윤도하가 머리를 굴리고 나섰다. 침대 위를 뒹굴던 꽃다발을 집어 강제로 품에 안기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이태경 없을 땐 나랑 재미 보고, 나 없을 땐 이태경이랑 재미 보라고.”
녀석은 대단한 아이디어라도 내놓은 것처럼 활짝 웃었다. 그럴수록 예준의 기분은 가라앉았다. 경박하게 아랫도리를 드러낸 채 열여덟 양아치를 상대하는 기분이 유쾌할 리 없었다.
“빨리 나아. 그래야 내 위에서 열심히 흔들지. 하필 부러져도 거기가 부러졌어.”
녀석이 경우 없이 침을 퉤 뱉었다. 예준이 꽃다발을 집어 던졌는데도, 녀석은 그것을 다시 그의 품 안에 안겼다.
“나 왔다 간 거 모를 거야. 걱정하지 마.”
공원에서처럼 시원하게 때려 주기라도 했으면 이 답답함이 해갈될까 싶었다. 예준은 자신의 고분고분한 대답이 녀석을 기쁘게 한단 사실을 깨달았다. 목석처럼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녀석이 셔츠 깃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매일 올 거야. 이태경 없을 때.”
“이태경한테 꼰지르면 뒤질 줄 알아.”
*
오지 못한다던 남자가 병실을 찾은 건 자정이 지나서였다. 인기척에 잔뜩 어깨를 움츠렸던 예준은 익숙한 페로몬에 모로 누웠던 몸을 바로 했다. 가까이 다가온 태경에게서는 옅은 술 냄새와 함께 여자 향기가 났다. 접대부의 것인지, 다른 여자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얼굴만 보고 갈 거니까 일어날 필요 없어요.”
예준은 고개를 끄덕인 채 어둠 속에 선 남자를 관찰했다. 지친 듯 목을 어루만지던 그가 다가와 흩어진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평소보다 높은 체온을 머금은 손이 뺨을 쓸자 예준의 잇새에선 편안한 숨이 흘러나왔다. 한 번도 사람 손에 익숙해져 본 적이 없는데, 그의 손길에는 잘 길든 동물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이 신기했다.
다만, 손끝이 오래 머물수록 낯선 향기는 더 짙어졌고 예준은 그 이질감을 쉬이 넘길 수 없었다. 그가 하는 일, 그가 사는 세계,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 관해서는 알 필요가 없는 관계기에 미약한 거부감마저 사치라는 걸 알지만.
“어디 갔다 오셨어요?”
오늘은 질문을 참기가 어려웠다. 예준은 그런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일하고 왔어요. 회사는 아니었지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답을 들은 예준은 구차하게 질문을 더 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느낌만으로도 태경의 눈이 제게로 고정되어 있음이 느껴졌다.
“질문 같은 거 전혀 안 하더니.”
무례하다 생각하진 않길 바랐는데 남자는 오히려 미소까지 머금으며 덧붙였다.
“내가 궁금하긴 한가 봐요.”
늦은 시간인 데다 피로감도 제법인 것처럼 보였다. 예준은 그가 왜 굳이 저를 보겠다고 이곳까지 들른 것인지도 의아했다. 궁금한 걸 찾자면 끝도 없는 사람이지만, 알아봤자 달라질 게 없기에 입을 떼지 않을 뿐이었다.
“무심한 건지, 무감한 건지.”
남자가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손길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고민하게 되는 건 확실히 치문이 한 말 때문이다. 자꾸만 그의 행적을 되짚고 그가 한 말을 곱씹어 보게 되니까.
정적이 찾아들자 남자가 흐트러진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 주었다. 예준은 잠이 오지 않아 괜히 헛기침했다.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했으니 곧 다시 혼자가 될 터였다. 그러나 남자는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그가 병실을 둘러보았다. 이내 발끝 쪽 이불을 정리해 주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가 무언가 집어 들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것이 윤도하가 가져왔던 꽃다발 속 장미 꽃잎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꽃다발은 부러 복도 끝 다용도실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윤도하가 강제로 안겨 줄 때 잎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태경이 코끝에 장미 꽃잎을 가져갔다. 예준은 이불 가장자리를 꼭 쥔 채 남자를 보았다.
“누가 왔다 갔어?”
이미 고자질한 전적이 있으면서 예준은 왠지 입을 뗄 수 없었다. 풋내 나는 키스 따위야 아무런 의미도 없는데, 어쩐지 그 몰래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든 탓이었다.
“치문이요.”
예준은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먼저 퇴원한 치문이 자신을 보기 위해 들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남자가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장미네.”
“…….”
“아마 분홍색일 거고.”
색까지는 뚜렷하게 볼 수 없을 텐데도 남자는 정확히 짚어 냈다. 불길한 직감에 답을 않자 그가 미련 없이 꽃잎을 버렸다.
“그거 좋아하는 사람을 알거든.”
추궁 없이도 예준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목구멍이 꽉 막혀 애꿎은 허공에 시선을 두자 남자가 느리게 눈을 흘겼다.
“치문이란 그 친구도 취향이 같나 보네요.”
탓하는 투는 아니었으나 긴장한 탓에 예준의 이마가 뜨거워졌다. 예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에 쥔 이불만 만지작거렸다. 예전의 저라면 알파의 기분 따위는 일절 상관하지 않았어야 맞다. 초조함을 유발하는 것도 알파의 특권인가 생각하는 사이, 태경과 눈이 마주쳤다.
“피곤할 텐데 쉬어요.”
남자는 간단하게 물러났다. 그는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습관처럼 자신의 감정을 정돈하는 법을 잘 알았다. 그런 점이 어른 같아 보이면서도 그래서 속을 더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윤도하가 다녀갔느냐고 직설적으로 물었다면 어땠을까.
예준은 멀어지는 남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가 어둠만 남기고 사라졌음에도, 심장 박동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
윤도하는 점심 이후 매일 병실에 들렀다. 늘 교복을 입고 있긴 했지만 하교할 시간보다는 훨씬 일찍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날은 줄곧 폰 게임만 하다 돌아가기도 했고, 어떤 날은 오메가의 난잡함에 관해 빈정거리기도 했으며, 또 어떤 날은 은근한 눈빛으로 스킨십을 종용했다. 다행히도 들러붙는 몸을 밀어내긴 갈수록 수월해졌다. 골절상은 점점 회복되었고 걷기 연습을 하고부터는 피로감도 옅어진 덕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녀석의 양옆에는 날개 돋친 듯 익숙한 덩치 둘이 서 있었다. 늘 혼자 들렀기에 친구들을 대동한 건 변수였다. 구겨진 미간과 붉어진 얼굴이 녀석의 기분을 대변했다.
“씨발. 진짜 좆같다니까.”
눈을 맞추자마자 던지는 한 마디에 예준의 목덜미에 솜털이 돋아났다. 변덕이 심한 윤도하라지만, 처음 보았을 때와 다름없이 예민한 모습을 보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든 그때의 기시감이 찾아오니까.
“담임이 꼰대한테 전화한다고 협박하더라. 뒤 봐줄 땐 언제고 인제 와서 딴소리야.”
윤도하가 투덜대자 한 덩치가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흔들었다.
“요것 좀 꽂아 달라 이거지.”
“씹…. 거지새낀가.”
녀석은 그대로 소파에 드러눕듯이 앉았다. 덩치들은 병실 곳곳의 물건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담배를 귀에 꽂은 덩치 하나는 병실에 딸린 화장실까지 뒤졌다. 예준은 언짢은 기색으로 몸을 뉜 채였고, 윤도하는 그런 예준을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이리 와 봐.”
명령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준은 이불을 끌어와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무시당한 윤도하가 욕지거릴 내뱉으며 말했다.
“야. 바깥에 누구 있는지 좀 봐.”
“나?”
“그래, 너 인마.”
이불 속에서 예준은 어깨를 움츠렸다. 밖에 누가 있으면,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여차하면 호출 버튼을 누르겠다고 다짐하는데 윤도하가 덩치 둘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망 좀 봐.”
“아, 우리도 재미 좀 보자.”
“지랄하지 말고.”
일갈한 녀석이 몸을 일으켰다. 삐걱 우는 소파 소리를 들은 예준은 두 귀를 막아 버렸다.
“야. 쌩까냐?”
“…피곤해. 집에 가. 좀.”
저항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상대의 화를 돋우기보다는 스스로 감내하는 일에 오히려 더 익숙한 예준이었다.
“내 얼굴 보라고!”
거칠게 이불을 들춘 윤도하가 성을 냈다. 곧 팔을 붙잡힌 예준은 윤도하의 힘에 끌려가 맨발로 바닥을 짚고 섰다.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몸이 휘청였다. 중심을 잡으려다 녀석의 어깨 즈음에 고개를 파묻었다. 기회 삼아 뒤통수를 휘어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안기란 소린 아니었는데.”
녀석이 이죽거렸다. 예준은 통증을 예상하지 못하고 녀석을 힘껏 밀어냈다. 반동 때문에 이번에는 허벅지 뒤편을 침대에 부딪쳤다. 충격으로 늑골에도 통증이 가해졌다. 반쯤 주저앉아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자, 윤도하가 허리를 잡아 그를 일으켰다.
옷 속으로 들어온 손이 붕대 주변을 쓰다듬었다. 화를 냈다가 이내 얼굴을 붉히는 소년을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아, 씹…. 존나 부드럽네.”
윤도하가 등허리를 따라 손을 올렸다. 날개뼈를 감싸 쥐는 통에 배가 드러났다. 귓가에 닿는 입술이 끔찍하게 싫었다. 이번엔 풋내가 아닌 남자 냄새가 났다. 예준은 뻣뻣이 굳어 버렸다.
“가만히 있어. 말 잘 들으면 아프게도 안 할 거고 이태경 그 새끼한테도 말 안 할 거야. 반항하면 밖에 저 새끼들 보는 데서 굴려 줄 테니까 내 말 들어.”
속삭이는 목소리가 조급했다. 녀석이 폐부를 들썩이며 살냄새를 들이켰다. 버클을 여는 소리를 들었으나 미동할 수 없었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녀석이 강제로 무릎 꿇리기 위해 정강이를 걷어찼다. 자연히 예준은 윤도하의 앞섶에 고개를 묻게 됐다.
“빨아.”
명령이 이어졌으나 예준은 화답하지 않았다. 녀석 또한 지퍼를 열기보단 뒤통수를 틀어쥐고 앞섶에 얼굴을 비비게 만드는 데 급급했다. 움찔 떨리는 모양새만 보자면 그 정도 자극으로도 쌀 수 있을 듯한 분위기였다. 아무리 경우 없는 녀석이라 할지라도 잠자리 경험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두려움이나 절망감은 옅었다. 권력으로 위협하려 드는 형님들보다야 훨씬 견딜 만했으니까. 적어도 성기가 입 속까지 들어오진 않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비위가 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예준은 발기한 성기의 양감을 느끼며 바삐 구역질을 참았다.
*
대표의 분위기가 부쩍 가라앉은 덕에 LK 내부는 내내 날이 서 있었다. 오전 회의와 점심 식사에서 대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으나, 이후 그의 사무실 블라인드는 내내 닫혀 있었다. 직원과의 소통을 중요시하기에 대표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블라인드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가 마음의 문을 닫았다는 건 오늘이 바로.
“알잖아요. 한 달에 한 번 하는 집안 모임.”
본가에 들러 식구들과 식사하는 날이란 의미였다. 혜윤이 말을 꺼내자 간식을 먹던 직원들이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그가 명성건설 후계자 자리를 놓고 부친과 실랑이 중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았다. 본인이 일구어 낸 회사라 할지라도 태경은 언젠가 LK를 떠날 사람이었다. 선영이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뭐 집안 모임 때문에 그러겠어.”
“그거 아님 대표님이 예민해질 이유가 없잖아요.”
“그거 말고도 많지. 예를 들면….”
썸이라든가.
선영은 대표의 속을 태우는 어린 오메가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을 발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선영이 말을 멈추자 직원들의 두 눈이 빛났다. 선영은 결국 쿠키를 오도독 씹으며 딴소리했다.
“집안 모임 때문이겠지, 뭐.”
에이, 실없는 탄성이 여기저기 터졌다. 태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직원들은 그의 사생활에 관해 입방아 찧길 좋아했다. 결혼 시장에 나온 좋은 매물인 데다가 LK와는 덩치가 다른 건설 회사를 물려받을 인물이었다. 숱한 여자들과 여러 구설수가 있었지만 확인된 바는 없었으며, 직원들에게 익숙하다고 해 봐야 일에 몰두한 모습이 다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선본 여자분 찾아왔었잖아요. 잠잠한 거 보니 결혼하시는 건 아닌가 봐요?”
혜윤이 묻자 선영이 꼬았던 다리를 바로 하며 말했다.
“모르지. 이 대표 마음을 누가 알겠어요. 이러다 갑자기 청첩장 뿌려도 안 놀랄 것 같은데, 나는.”
물론 그 청첩장의 주인공이 부잣집 아가씨란 보장은 없었다. 선영은 씨익 웃고 말았다. 입방아를 찧는 건 상관없지만 태경에게 정말로 피해가 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구랑 결혼하실지 진짜 궁금해요. 아니, 애인이라도 알고 싶다니까요. 누구 있다는 느낌은 오는데 워낙 힌트를 안 주시니까.”
태경이 다친 예준의 병원에 드나든다는 건 선영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함구했다. 사무실에 찾아왔던 예준에 대해선 모두 잊은 기색이었다. 의아해하긴했어도 대표가 전 국민이 아는 오메가에게 관심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남 연애사에 왜 그리들 관심이 많아요? 다 먹었으면 농땡이 부리지 말고 일이나 합시다. 할 거 많잖아.”
선영이 손뼉을 부딪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장서 쿠키 부스러기를 치우는 그녀를 따라 모두가 움직였다.
“뭐 알게 되시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나만 믿어.”
너스레를 떤 선영이 데스크로 향하자 때맞춰 대표 사무실의 블라인드가 열렸다. 재킷과 코트를 갖춰 입은 태경에게 모두의 시선이 이끌렸다. 과하지 않게 세팅된 머리, 깔끔하고 부티가 흐르는 차림새, 느긋한 움직임은 바로.
“역시 일등 신랑감.”
그런 단어를 연상시켰다. 서로 눈을 맞추며 웃은 직원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나온 대표가 말했다.
“먼저 퇴근할게요. 내일 오전 일찍 출근할 테니까 검토할 서류는 데스크 위에 올려놓으세요.”
“예. 들어가 보세요, 대표님.”
여기저기서 소리 없는 미소가 번졌다. 유독 화기애애한 직원들을 태경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선영까지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둘렀지만, 괜히 이야기를 꺼내면 붙잡혀 있어야 할 시간도 길어질 것이다. 태경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사무실의 들뜬 분위기는 곧 잦아들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태경은 경호원의 짧은 보고를 들었다. 폰을 귀에 가져다 댄 그는 지나가던 빌딩 사람들과 이따금 눈인사했다.
―김재우 씨 거처는 마련해 드렸습니다. 당분간은 집 안에만 머무르라고 당부했고 사람도 붙여 놨으니 별일은 없을 겁니다.
“정선 쪽 어깨들은 조사해 봤어?”
―네. 이번에 판이 커서 사기당한 사람만 수십 명이랍니다. 뜨내기 하나가 조폭 끌어들여서 벌인 짓 같은데 구속된 놈들은 몇 안 됩니다.
태경의 SUV 차량은 엘리베이터와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는 곧 긴 다리를 접어 차에 올랐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가 차에 시동을 걸며 말했다.
“애초에 김재우가 그쪽으로 흘러든 이유가 궁금한데.”
―빚이 있답니다.
“무슨 빚.”
―사채 빚이요. 지금은 김예준 씨가 이자와 원금 일부를 상환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딱히 새로울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예준에게 닥친 상황이 명확해지자 태경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그렇게 쉴 틈 없이 일한 건가. 끼니도 거르고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예준은 제 일에 개입하지 말아 달라 말했으나 이런 심각한 문제를 놓고 저울질할 태경이 아니었다.
“깊게 파 봐. 빚이 얼만지, 사채 쥐고 있는 건 어떤 놈들인지.”
―알겠습니다.
간단히 답한 경호원이 전화를 끊었다. 핸들을 쥐는 태경의 손에는 제법 강한 악력이 실렸다.
*
응접실엔 온 식구가 둘러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 봐야 이석준 회장과 이석희 부부 내외, 그들의 아들 윤도하까지 넷이 전부였다.
“어서 앉아라.”
태경은 코트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눈인사를 건넸다. 모두에게서 화답이 돌아왔으나, 곧이 믿을 만큼 순진하진 않았다.
“이 대표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니, 태경아?”
이석희의 남편인 윤한주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짧게 악수한 태경은 먼저 욕실에 들러 손을 씻고 돌아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십 분인데, 뭘.”
이석희가 살갑게 말했다. 맞은편의 윤도하를 흘긋한 태경이 착석했다. 비었던 공간에 밥과 국이 놓였다.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저녁 식사는 누군가 짜 맞춘 듯 인간미가 없었다.
태경은 마지막으로 아버지 이석준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숙였다. 이 회장은 눈을 찡긋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회사가 아주 바쁜가 보구나. 한 달에 한 번 있는 저녁 식사에 늦을 정도면.”
이석희가 말했다. 언제나 그랬다. 칼이 먼저냐 방패가 먼저냐의 차이일 뿐, 이석희의 말에는 대부분 가시가 있었다. 이 회장이 먼저 말을 받아쳤다.
“그 정도면 손색이 없단다. 그러니 명성건설과도 협업이 척척 진행되지.”
이석희가 환히 웃었다.
“처음엔 저 쥐구멍만 한 회사로 뭘 할 수 있을까 했는데…. 회장님이 잘 이끌어 주신 덕분이겠죠.”
태경이 숟가락을 들며 덧붙였다.
“아버지 없인 아무것도 못 하죠. 부자 사이의 끈끈함이 사업 수완 중 하나라고 할까요.”
씨익 웃어 보이자 이석희의 입술이 경련했다. 이 회장과 자신을 부자라고 칭할 때마다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기 바쁜 이석희였다. 그러고 보면 하수였다. 태경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식사를 시작했다.
“아주머니, 잘 먹겠습니다.”
마침 등 뒤로 지나가는 가사 도우미를 붙잡으며 말했다. 가사 도우미는 익숙한 듯 태경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물러났다.
호화스러운 저녁 식사에 일조한 사람은 따지자면 이 회장과 가사 도우미뿐이었다. 돈을 대는 사람은 이 회장,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은 가사 도우미였다. 나머지는 고고한 얼굴로 궁둥이만 붙이고 앉아 생색을 내는 사람들이었다.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한 듯 어깨를 펴고 앉은 이석희 부부나 조리한 음식에서 채소만 골라내 식탁 위에 툭툭 던지는 윤도하에게 그에 상응하는 교양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졸부란 단어가 어울렸다. 가난에도 높낮이가 있듯 부에도 높낮이가 있었다. 같은 부를 지녔어도 형질이 열등하면 자격지심을 지니게 된다. 자격지심을 지닌 사람은 누구든 제 발아래 두려고 발악하는 법이었다. 예컨대.
“삼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말, 무슨 뜻이에요?”
퍽.
윤한주가 아들 윤도하의 머리통을 퍽 후려쳤다. 식탁을 가로지르느라 음식이 쏟아지긴 했지만, 태경에게는 차라리 그런 훈계가 교양에 가까웠다. 태경은 벌어진 난장에 비하여 침착한 얼굴로 윤도하를 보았다.
“도하가 제법인데요. 예전엔 입양아란 단어 없인 말도 못 했는데 이젠 인용도 할 줄 알고.”
감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윤도하가 소리 없이 욕지거릴 지껄였다. 맞은 곳을 벅벅 문지르며 고기반찬을 집어 먹는 사촌은 열여덟이 아니라 마치 여덟 살 같았다. 천연덕스럽게 구는 녀석에게 할 말이 많았으나 부러 식사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었다. 태경은 느긋하게 식사를 이어 갔다.
“도하야. 식사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참을 순 없는 거냐?”
이 회장이 어린것을 달래듯 말했다. 픽, 입소리를 낸 녀석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식사에 열중했다. 식탁 아래에서는 거친 발길질이 이어졌다. 종아리에 여러 번 발끝이 부딪쳤음에도 태경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피도 안 섞인 게 무슨 가족이야.”
“형질은 맞으니까 구색은 맞춘 셈이라고 생각하는데.”
집안의 피를 잇고서도 알파로 발현하지 못한 윤도하는 제 평범한 정체성을 견디지 못했다. 우성 알파로 발현했더라면 명성은 당연히 윤도하의 것이 되었을 테니까. 음지에서는 유전자 검사로 형질을 미리 아는 경우도 있다지만 뜬소문에 불과했다. 이 회장이 태경을 거두었을 때 우성 알파로 발현할 걸 미리 알았다고 여기기 어려운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도하가 뭐 틀린 말 하는 거 봤니. 솔직한 것도 미덕이야.”
이석희가 말했다. 솔직한 것이 미덕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윤도하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태경은 녀석에게 얻어맞았던 턱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고모님, 외출 금지는 좀 심하셨어요. 도하가 어린애도 아닌데.”
“그게 뭐 내 뜻이겠어. 오라버니 뜻이지. 오메가 좀 괴롭힌 걸 가지고 뭘 2주씩이나 집에 틀어박혀 지내라는 건지.”
이 회장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유급시킬 생각이다. 폭력은 더 못 참아. 감방에 가면 어떻게 되는지 녀석도 알아야지.”
남자들 세계에서 굴러먹은 세월이 긴 이 회장이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감방 생활도 포함됐다. 태생부터 오냐오냐 소리만 듣고 자란 윤도하가 거친 교도소 생활을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오메가 좀 두들겨 팼다고 감방 가는 거 봤어요?”
윤도하가 윽박질렀다. 태경은 녀석의 입에서 오메가란 단어가 나오자 표정을 굳혔다. 하는 짓을 보자면 예준은 녀석이 이제껏 괴롭혀 왔던 오메가와 결이 달랐다. 그렇게 경멸하는 오메가의 환심을 사겠다고 장미꽃 다발까지 들고 병원까지 찾아간 주제에.
“이 녀석이 그래도?”
거기다가 이번에는 태경까지 일에 엮여 들었다. 녀석이 건드린 오메가와 잤고, 섹스 파트너가 되었고, 종국에는 그 짜릿한 관계를 이어 가고픈 욕망마저 느꼈다. 윤도하가 더 말을 내뱉는다면 예준의 존재가 특별하다는 걸 가족 모두에게 들킬 수 있었다. 잠자코 지켜보던 태경이 그제야 윤도하의 정강이를 쳤다.
“일 년 남았는데 유급이라니 유감이다, 동생.”
“너 나한테 빚진 거야. 새끼야.”
의미심장한 눈빛이 되돌아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태경에게도 예준은 이제껏 만나 왔던 오메가와 달랐다. 찰나, 정적이 스쳤다. 격양된 분위기를 잠재우듯 이 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 대표가 잘 처리했다니 다행이지만…. 단순한 범죄라도 반복되면 죄질이 더 나빠지는 법이야. 나는 내 조카를 범죄자로 키울 생각 없다. 대단한 인재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이 대표 반만 하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렵니, 도하야.”
도리어 불난 집에 부채질한 꼴이었다. 출신은 차치하더라도 우성 알파는 누구보다 우월한 존재였다. 이 회장의 말을 달리 해석하면, 죽도록 노력해야 태경의 절반에나 미친다는 의미였다.
“씨발….”
반복된 훈육으로 도하는 이미 사정을 알고 있었다. 녀석이 식탁 위로 숟가락을 퍽 내던지며 일어섰다. 태경은 팔짱을 낀 채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새끼보다 내가 못한 게 뭔데!”
결국, 이렇게 진창이 되는 거다. 태경이 허탈한 얼굴로 이 회장을 보았다. 식탁에 둘러앉은 모두가 알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야기. 처음은 열두 살 때였을 것이다. 녀석은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먼저 운을 떼는 역할을 했다.
쓰레기장, 창부의 자식, 근본 없는 알파 새끼, 삼촌한테 빌붙어 기생하는 버러지.
윤도하는 태경을 주로 이런 문장들로 정의하곤 했다. 씁쓸했다. 적어도 열다섯 살 태경의 눈에 비쳤던 예쁜 아기는 이런 악질이 아니었으니까.
“윤도하!”
이 회장이 두툼한 맨손으로 쾅! 식탁을 내려쳤다. 눈을 부라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그를 태경이 눌러 앉혔다.
“제가 잘 이야기해 볼게요.”
태경의 눈은 시종 윤도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정서적 학대를 받은 불쌍한 아이, 졸부의 아들, 오메가 못지않은 약자.
태경의 정의는 이러했다. 치워 버리기에는 너무 유약하기에 치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겨우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태경이 엉망이 된 식탁을 둘러보았다. 씩씩대며 숨을 고르는 윤도하의 어깨가 어느덧 남자답게 자라 있었다. 욕망을 앞세울 줄 알고 감정을 정의할 줄 아는 열여덟은 위험하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녀석이 신경을 긁기 시작했다.
태경이 윤도하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멋쩍은 부부의 낯은 위안이 되지 못했다.
*
태경은 저택의 2층, 가장 구석진 방으로 윤도하를 끌고 왔다. 그는 문의 잠금장치를 잠근 뒤 돌아섰다. 불안한 짐승처럼 방 중앙을 뱅뱅 맴도는 녀석의 얼굴이 시뻘겠다. 도돌이표처럼 계속되는 분란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사람은 늘 사태의 원인인 태경이었다.
“앉아.”
읊조리는 말에 도하가 픽 비웃음 쳤다. 태경은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도하를 침대에 밀어 앉혔다.
“나한테는 얼마든지 패악 부려도 좋지만, 어르신한테는 아니야. 이 식사 자리가 지옥 같긴 마찬가지거든. 이럴수록 귀찮은 일만 늘어나. 알면서 왜 그래?”
테이블 의자를 끌어온 태경이 도하와 마주 앉았다. 눈높이를 맞추었으나 도하는 태경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또래에 비해 월등한 신장임에도 낯은 앳되었다.
태경이 처음 이 회장을 만났을 때 윤도하는 이 세상에 없었다. 이 회장과 열 번이나 해를 함께 보낸 뒤에야 만난 하나뿐인 사촌 동생임에도 마음의 거리는 멀었다. 베타인 아버지를 두었지만, 이석준 회장은 윤도하가 우성 알파이기를 고대했다.
바람이 어긋났어도 그들이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무능하지 않다면 거머쥘 것들이 부지기수였다. 권력, 재력, 이 회장이 쌓아 놓은 인맥만으로도 이미 보장받은 미래였다.
그런데도 뭐가 그리 불안해서. 태경은 저도 모르게 혀끝을 찼다. 녀석의 자격지심이 집안 사정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형질 같은 바꿀 수 없는 문제를 두고 자학을 해서 좋은 것이 없었다.
“윤도하.”
“잘난 척하지 마. 꼰대 새끼야.”
“그 좆같은 말버릇은 좀 고치고.”
태경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최근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는지 게스트 룸엔 사람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았다. 반항적인 녀석의 시선을 직시하자 곧 빈정거림이 들렸다.
“걔랑 재미 좋냐?”
꺼냈어도 자신이 먼저 꺼냈어야 할 주제였다. 태경이 뻣뻣이 고개를 틀었다. 일순 가라앉은 눈빛을 윤도하는 인지하지 못했다.
“나한테 뒤지게 처맞고 너한테 뒤 대 준 새끼 말이야.”
모를 리가 있겠는가. 태경이 도하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악력이 심상치 않았다.
“경고했을 텐데. 관심 두지 말라고.”
어쩌면, 예준을 처음 만났던 날 감지했던 일이었다. 태경은 경찰서를 나온 도하가 예준을 어떤 눈빛으로 보았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예준 곁에서 윤도하를 치우는 건 따지자면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에 이르러 태경이 신경 쓰는 건 예준의 마음이었다.
‘치문이요.’
태경은 예준의 거짓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않았다. 공원에서 태경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때와 지금의 마음이 다르다면 유감이었다. 자신 모르게 윤도하를 만나고, 윤도하와 어떤 유대를 쌓기라도 했다면. 그렇다 한들 예준이 끔찍이 싫어하는 알파의 통제력을 섣불리 발휘할 순 없는 일이었다.
“내가 걔한테 관심이 좀 많아. 귀엽잖아. 예쁜 구석도 있고.”
도하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태경이 그런 도하의 어깨를 힘주어 주물렀다.
“알파들 하는 짓거리 흉내 내기 좋아하니까 당연히 마음에 들겠지. 그거, 네 특기잖아.”
싸늘하게 식는 윤도하의 낯빛보다 예준의 껄끄러운 눈빛이 동요를 일으켰다. 도하의 사고는 늘 단발성이었기에, 녀석과 오메가 문제로 갈등을 빚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짜 표적은 태경 자신이라고 믿었으나 점차 그 믿음조차 흔들리고 있었다.
“걔랑 뭐 하려고.”
“너는 걔랑 뭐 하는데.”
자세를 낮추어 눈을 맞추었다. 알파가 오메가를 만나 하는 일은 빤했다.
“몰라서 물어?”
태경의 얼굴에는 감정이 스며 있지 않았다. 차분한 태도에 배알이 꼴린 녀석이 받아쳤다.
“알아. 나도 걔랑 그 짓 하고 싶거든. 걔 걸레잖아. 알파한테 벌리는 가랑이 베타한테 못 벌리…!”
태경이 도하의 아래턱을 잡아 눌렀다. 이전과는 다른 거센 악력에 도하의 잇새에서 신음이 샜다.
“아…!”
윗사람이자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사촌으로서 녀석을 무력으로 제압하려 드는 행동은 비겁하다는 걸 안다. 미성년자에다 저보다 열다섯은 어린 아이였다. 수없는 도발에 단 한 번도 반응한 적 없는 태경에겐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성이 옅어진 것도 아닌데 잦아들어야 할 가학심은 오히려 더 증폭했다. 예준을 폄하하는 말이었기 때문일까. 태경은 격식에 맞춰 잠가 놨던 단추를 뜯듯이 풀었다.
“다시 말해 봐.”
으름장을 놓자 녀석이 비웃음을 흘렸다.
“천하의 이태경이… 오메가를 이렇게까지 애지중지할 줄은 몰랐네.”
윤도하는 입 안에 고인 피를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퉤 뱉었다. 얻어터져 놓고도 녀석은 눈만 질끈 감았다 뜰 뿐, 여전히 성난 얼굴 그대로였다. 조롱으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윤도하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껏 너랑 뒹군 오메가 내가 따먹어도 아무 말 안 했잖아?”
그들과는 관계란 걸 맺지 않았으니까. 러트를 보내기 위한 일회성 섹스와 파트너와의 관계가 같을 리 없었다. 태경은 예준 이전에 어떤 오메가도 동정한 적 없으므로 그들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네 꽃다발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던데, 그 아이도 동의한 거 맞아?”
녀석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 짓을 하고 싶단 이야기는 아직 그 짓을 못했단 말과 같았다.
“걔 의견 같은 거 안 중요해. 내가 하면 하는 거지.”
예준이 자신과 윤도하를 같은 선상으로 보진 않겠지만, 작정하고 감춘다면 둘 사이의 일을 알 방법은 없었다. 태경은 윤도하의 일방적인 폭행을 우려하는 것을 넘어 예준의 속마음까지 들추고픈 욕망에 사로잡혔다. 왜 윤도하의 방문이 더는 폭력이 아닌지. 녀석의 비틀린 관심에서 구해 달라고 말하기보다 감추는 쪽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체를 일으킨 태경이 허리를 짚고 섰다. 싸늘하게 내려다보자 녀석이 중얼대듯 읊조렸다.
“걔한테 좋은 냄새 나.”
“페로몬도 못 느끼는 새끼가 뭘 안다고.”
“그래도 나던데. 좋은 냄새.”
도발에 순순히 넘어가 주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태경은 예준의 속살이 품은 그 달콤한 향기를 정말로 윤도하가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너넨 나 아니면 만나지도 못했어.”
맞는 말이었다. 만나기 전까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았으니까. 들끓던 열이 이번에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순식간에 식었다.
“그게 무슨 권리라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히트 사이클인 오메가를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두들겨 패 놓고, 윤도하는 마치 자기 몫의 대가를 바라듯 뻔뻔하게 굴었다. 열여덟 살짜리를 경멸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자조한 태경이 못 박듯 말했다.
“두 번 다시 그 아이 찾아가지 마.”
“걔가 나랑 자는 거 싫어할 거란 보장 있어?”
“모르지.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테니까.”
태경은 싸늘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저릿저릿한 손끝의 신경통은 어린 사촌을 향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알파를 경계하는 예준을 아니까. 시작이 어떻든 알파보다는 베타에게 마음을 열기 더 수월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경고하는데 도전할 생각하지 마.”
성대를 긁는 듯한 낮고 무거운 음성에 윤도하는 웃음기를 잠재웠다. 일촉즉발의 팽팽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너 하나 제압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야. 장난 받아 주는 건 여기까지니까.”
“걔 아니어도 넌 가진 거 많잖아!”
“맞아. 가진 게 많지.”
태경이 셔츠 깃을 바로잡으며 윤도하를 내려다보았다. 좁은 턱을 그러쥔 손에서 악력을 풀었음에도 녀석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렇다면 네가 가진 건 뭔데. 믿는 구석이라고 해 봐야 졸부인 부모님뿐일 테고, 어린 데다 네 힘으로 일군 건 아무것도 없는 열여덟일 뿐이지. 심지어 진심으로 사람 대하는 법도 모르잖아. 떼쓰는 걸로는 아무것도 못 얻어 내. 부딪쳐 봐서 알잖아.”
도하의 시선이 태경의 값비싼 실크 셔츠로 향했다. 완벽한 자태의 우성 알파를 보는 눈에 일그러진 동경이 담겨 있었다. 경멸하는 동시에 닮고 싶다는 욕망을 품은 눈빛이었다. 태경은 압도하기보다 다정하게 속삭였다.
“다시 걔 볼 일 없어, 윤도하.”
발끈, 돌변하는 질풍노도의 반항심은 공포가 아닌 자극이었다. 태경이 다시 한번 읊조렸다.
“두 번은 안 봐줘.”
약자를 짓밟고 우위에 섰다. 경멸하던 짓을 저지르고도 태경은 속죄하지 않았다.
*
차에 오른 태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 시간 남짓 머물렀을 뿐인데도 가족 모임은 늘 지독한 피로감을 불러들였다. 오늘은 윤도하와의 마찰까지 더해져 골치가 아팠다. 시트에 등을 기댄 그는 곧바로 저택 앞을 떠나지 않고 한동안 눈을 붙인 채 앉아 있었다.
가진 것이 많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존재한다. 태경에겐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태생이 그러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저 또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다. 자격지심이 지독하게 가슴을 짓누르던 사춘기, 작은 상처에도 유난히 아팠던 어린 시절.
이따금 목적지를 잃은 기분이었다. 누구보다 정착한 삶을 살고 있음에도 늘 어딘가를 떠도는 존재처럼 공허했다. 느리게 숨을 고르던 그가 눈을 떴다. 드라이브라는 그럴싸한 핑계로 서울 시내를 떠돌고 싶지는 않은 날이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모든 것을 완벽히 갖춘 집은 분명 아니었다. 태경은 차에 시동을 걸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욕망이 이끄는 곳은 명확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하체 부근이 묵직하게 달아올랐다. 핸들을 쥐는 손끝이 저릿했다.
언젠가,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는 기분은 어떠냐고 물었었지.
그러나 그런 태경조차 흔들릴 때가 있었다. 눈앞이 아득하고 오롯이 무력함만 느끼는 때가. 태경은 그가 자신의 연약함을 알아주길 바라는 미묘한 욕망의 근원이 궁금했다. 저보다도 연약한 존재에게, 지독히도 외로운 자신을 구제해 주길 바라게 되는 건 대체 어떤 마음인가 했다.
처음이기에 난처했다. 그럼에도 태경은 차량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
밤늦게 찾은 병실은 텅 비어 있었다. 한동안 어둠 속을 응시하던 태경은 의심을 품는 대신 정황 파악에 나섰다. 간호사실에 묻자 간호사가 눈을 빛내며 복도 끝을 가리켰다.
“하늘 정원 쪽으로 가시던데요?”
하늘 정원이라면 같은 층에 있는 야외 쉼터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피로해 보이는 간호사에게 미소로 답한 태경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바람은 약하지만 기온이 꽤 차가운 날이었다. 태경은 예준을 발견하기도 전에 코트를 벗어 팔에 걸었다.
예준은 구석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내내 흐렸다. 밤하늘에 별이 보일 리 없는데도 예준의 고개는 반쯤 젖혀졌고, 시선은 까만 구름을 향한 채였다. 온기도 냉기도 없는 덤덤한 얼굴이 가슴속 어딘가를 뻐근하게 당기는 기분이 들었다.
타인의 사정을 안다는 건 때로 혹독한 경험이다. 단순히 오메가인 처지를 동정할 때와 그의 지친 얼굴, 지리멸렬한 일상, 상처를 눈으로 본 후의 느낌은 달랐다.
태경은 더는 삶이 고단한 스물여섯의 오메가 정도로 예준을 정의할 수 없었다. 삶을 향한 무력한 태도, 기대 없는 매일, 습관이 된 체념, 사그라지지 않는 경계심. 예준을 대하며 알게 된 것들의 무게가 상당했다.
그럼에도 별을 찾는 눈빛을 보면 어둠 아래 반짝이는 것들이 아직 많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뎌진 신경을 자극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쩌면 유일하겠지. 선이 고운 말간 얼굴을 곁눈질하는 지금, 그 빈자리를 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경은 기척을 죽여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다 감기 들어요.”
마른 어깨를 코트로 덮어 주자 예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윤도하의 방문을 모른 척하지 않았기에 아이의 얼굴엔 금세 그늘이 졌다.
“오셨어요.”
무심하게 뱉는 한 마디에 속이 쓰렸다. 집요한 추궁 없이도 사람을 몰아세우긴 어렵지 않았다. 태경은 예준의 마음을 껄끄럽게 만들었던 것을 후회했다.
“상태는 많이 호전됐다고 들었어요.”
“네. 이제 걷는 것도 조금 편해졌어요.”
답한 예준이 다시 별을 찾았다. 무의식적으로 코트 자락을 여미는 걸 보면 어지간히 추웠던 모양이다. 태경은 예준의 빨개진 귀로 손을 뻗었다. 차갑게 굳은 살덩이를 부드럽게 쓸어 주자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뜬다.
이내 고개를 튼 예준과 시선을 마주했다. 흔들리는 눈빛에서 묘한 긴장이 느껴졌다.
“회사에서 오는 길이세요?”
“아니. 본가에 들렀다 오는 길이에요.”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던지는 질문이 제법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인 아이는 금세 눈치를 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머쓱하게 턱을 긁기도 하는 것이 어딘가 수상했다.
궁금증은 곧 풀렸다.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 주세요?”
곧은 질문이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라는 걸 태경 또한 이미 알았다. 두 사람 사이를 정의하는 건 피차 욕구만 풀면 그만인 섹스 파트너 관계였다. 그러나 예준을 만난 이후로, 태경은 시간이 갈수록 더 과한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잘해 주면 안 돼?”
태경은 예준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웃었다. 돌아올 말을 예상하지 못한다면 거짓말이다. 이전에 그랬듯, 알파에게 통제당하기 싫다는 말로 단숨에 선을 그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되물은 태경은 느긋하게 답을 기다렸다. 무언가 골몰히 생각하면서도 예준은 자신의 손길이 움직일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다.
“이해가 잘 안 가서….”
손길을 느끼며 제 손끝은 꼼지락거리기 바쁘다. 태경은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았으므로 예준처럼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었다. 이윽고 고개를 떨군 예준이 흘끗 눈치를 보았다. 공백이 길어졌다. 초조해서였다.
“혹시.”
운을 떼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하늘 정원의 미약한 조명 곁에서도 맑은 피부는 빛을 잃지 않았다. 태경에게 하체가 뻣뻣해지는 감각은 익숙했다. 포근한 페로몬이 어떤 위협도 없이 몸을 간지럽힌다는 건 따지자면 축복에 가까운 일이었다.
“혹시 저 좋아하세요?”
훅 치고 들어오는 직언에 태경은 순식간에 고조되었다. 그는 번지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예준을 마주했다. 물어 놓고 뻔뻔하게 굴진 못하겠는지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열감이 제법이었다. 태경은 무릎에 놓여 있던 예준의 손을 당겨 잡았다.
“반대로 물을게.”
긴장으로 깨무는 아랫입술이 견딜 수 없이 야했다. 태경이 손깍지를 끼며 물었다.
“좋아해도 돼?”
“…예?”
“내가 너 좋아해도 되냐고.”
허락을 구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감정이 너를 휘두르거나 제압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싶었다. 태경은 다른 알파처럼 아이를 짓밟아 취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숨을 불어넣고 싶었다. 본래 지닌 생기를 되찾도록.
선뜻 답하지 못하는 얼굴에 혼란이 번졌다. 태경은 생각했다. 이건 윤도하의 자극 때문도, 타고난 동정심 때문도 아니다. 불순물을 걷어 내고 조금 더 순수한 욕망에 집중했을 뿐이다. 끌림. 빌어먹을 페로몬 탓이든 아니든 관계없었다.
고개를 기울여 조금 더 다가갔다. 까칠하게 마른 입술을 더듬자 전에 보기 힘들었던 호기심이 예준의 눈에 비쳤다. 몰두한 채 상대의 이목구비를 들여다보는 눈빛은 그 나이 또래다울 뿐 아니라 어딘가 어수룩했다. 아무런 가림막도 없기에 오히려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대답해 봐요.”
“…….”
“내가, 좋아해도 되겠어?”
이번에는 대답을 종용했다. 사태를 파악하느라 시시각각 변하는 눈매가 사랑스러웠다. 끝내 답을 듣지 못하리란 예감이 들었지만 태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번처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예준은 겁을 먹은 것 같았다가 도리어 안도한 것 같았다가 결국에는 어쩔 줄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대표님이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예상 답안 중 제일 뻔한 문장이었다. 모진 대답이었어도 가슴속엔 싸한 감각이 퍼졌다. 생명을 지닌 자들만이 기꺼이 가질 수 있는 감정. 저택을 떠나며 느꼈던 공허함을 채우는 정반대의 기대감. 빛나는 두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위로를 얻는 기분.
태경은 이젠 통증에 가깝도록 올라오는 하체의 열감을 억누르며 답했다.
“난 이대로 계속 갈 생각이니까.”
그저 물 한 방울로 갈증을 축이겠단 속셈으로 다가갔다. 예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핥은 그가 덧붙였다.
“마음의 준비 정도는 하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