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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Pillow Talk(2권) (4/18)

3. Pillow Talk

반지하 방엔 볕이 잘 스미지 않았다. 특히 추워지는 계절이 되면 해도 늦게 떠 늘 캄캄한 어둠을 맞이하며 눈을 떠야 했다. 그래서 눈을 뜬 순간 환하게 해가 비쳤을 때, 예준은 자신이 낯선 곳에 있음을 실감했다. 전신을 편하게 지탱하는 튼튼한 매트리스, 포근한 이불, 훈기가 가득한 공기. 무엇 하나 제 단칸방과 비슷한 것이 없었다.

늦게까지 시달린 것에 비하자면 이른 기상이었다. 예준은 옆자리가 비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길게 기지개 켰다. 어젯밤, 남자가 충분히 즐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내 불발이었던 섹스를 드디어 해냈다. 삽입하지도 않았는데 온몸이 아프긴 처음이었다. 깨물리고 빨린 곳, 계속해서 마찰을 느낀 중심이 아파서 예준은 저도 모르게 어기적거렸다.

대강 둘러보았으나 남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예준은 늘 사용했던 욕실 문을 별다른 경계심 없이 열었고, 그곳에서 갑작스레 태경을 발견했다.

“잘 잤어요?”

남자는 샤워를 끝낸 후 수건을 허리에 감은 채였다. 쉐이빙 크림을 바르고 면도 중이던 그가 말을 건넸다. 늘 다른 욕실을 사용하지 않았나. 이곳 역시 남자의 것이기는 마찬가지지만 예준은 당황했다.

“네. 잘 잤어요.”

교성을 내느라 목 상태가 엉망이었다. 예준은 화끈거리는 뒷덜미를 어루만지며 뒷걸음질 쳤다. 대충 닦아 내긴 했지만 온갖 점액질이 묻은 몸은 찝찝했고 요의도 느끼는 와중이었다. 태경 옆에서는 샤워할 수도, 요의를 해결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남자의 등에 남은 상처들이 신경 쓰였다. 분명 자신이 긁거나 깨물어 남긴 상처였다. 할 땐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어떤 것들에선 피까지 배어 나와 있었다.

“금방 끝나는데. 지금 들어올래, 기다릴래? 아니면 반대편 안쪽에 다른 욕실 있으니까 거기 써도 돼.”

남자가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면도기의 날카로운 날이 목부터 앞쪽 턱까지 부드럽게 움직였다. 예준은 연고를 가져와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 남자는 반라인 데다가 어제 상처를 치료하다가 이곳까지 온 것이 생각나서였다.

“기다릴게요.”

예준은 문을 닫고 나와 어정쩡하게 남자를 기다렸다. 태경은 이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크림이 사라지자, 남자의 턱에 선명히 남은 멍과 입술 상처가 또렷이 보였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자 그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하랑 나 사이엔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아요. 몇 번 이런 적 있었어. 사과는 오히려 내가 해야지. 사촌 단속 못 해서 피해 본 건 예준 씬데.”

예준은 말없이 눈을 비비적거리기만 했다. 그 말도 맞긴 하지만, 자신이 불러내지 않았다면 그가 저 때문에 다치는 일 따위는 없었을 터였다.

“씻을 거면 도와줄까요?”

허리를 잘 펴지 못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남자가 물었다. 예준은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변도 봐야 하고, 성감이 없을 때는 타인에게 몸을 보이기가 어색했다.

“혼자 할게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부리나케 욕실 문을 걸어 잠갔다. 바깥의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남자는 금세 자리를 뜬 것 같았다.

키스 마크는 목덜미나 어깨보다 허벅지 안쪽에 더 많이 남아 있었다. 배꼽 주변까지 빼곡히 남은 붉은 흔적이 민망할 정도였다. 입술을 다치고도 헌신적으로 애무해 준 어젯밤의 그를 떠올리면 아무리 무던한 예준이라도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전히 받기만 하는 섹스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그런 걸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 다시는 형님들과 했던 그런 섹스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정액을 얻는 것이 목표가 아닌, 행위 자체를 즐기는 섹스.

예준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샤워기를 들었다. 더 폐를 끼치기 전에 얼른 집을 비워 줄 생각이었다.

씻고 나오자 주방에서부터 고소한 냄새가 났다. 속이 비어 입 안에 군침이 돌았으나 예준은 성급히 걷지 않았다. 쭈뼛대며 주방 가까이 가니 팬 앞에 선 태경이 보였다.

“출근 때문에 그리 여유가 없어. 간단하게 해 줄 테니까 먹고 가요.”

“네. 감사합니다.”

“혹시 아픈 거면.”

민망해서 우물쭈물하는 걸 어디가 아파서 그런다 오해한 모양이다. 어제 그런 짓을 해 놓고도 어떻게 그리 태연할 수 있는지. 예준으로선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토록 번듯한 남자가 밤만 되면 그런 모습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까? 아니, 그런 기대를 품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보잘것없는 오메가를 정성껏 핥아 주고 소중하게 입 맞춰 주는 알파가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지 의문이었다.

“안 아파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럼 다행인데.”

그러고도 안 아플 수 있을까. 어쩐지 그렇게 보는 눈빛이었다. 예준은 연거푸 고개를 저으며 스툴 위에 올라앉았다. 그사이 흰 셔츠와 정장 바지 차림이 된 남자는 주방 안에서도 위화감이 없었다. 팬 안에는 적당한 크기로 썰린 토마토가 있었고, 남자는 막 달걀을 그 위로 깨던 와중이었다.

“기분은 좀 나아졌어요?”

“네.”

예준이 무심하게 뺨을 긁었다. 시선을 들어 그런 예준을 흘끗 보던 태경은 그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남자는 어쩐지 눈을 쉬이 떼지 못했다. 관찰하듯 느리게 움직이는 눈동자가 예준의 열감을 부추겼다.

“좀 부은 것 같네.”

“어….”

“부어도 귀여워.”

또 아이를 대하는 듯한 말투였다. 처음 잤을 때도 여러 번 듣긴 했지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성감에 취해 의식이 혼몽한 때도 아니므로 예준은 괜히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웠다.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기척이 느껴졌다. 별다른 함의는 없을 것이다.

마침, 토마토 달걀 볶음을 마무리한 남자가 접시를 내밀었다. 바로 옆엔 따뜻한 우유가 담긴 컵이 놓였다.

“편하게 먹어요.”

“같이 안 드시고요?”

“아침은 보통 커피로 끝내는 편이라.”

저 때문에 굳이 조리까지 한 건가.

“준비할 게 있어서 잠시 작업실에 있을게. 저번처럼 말없이 가지 말고 내 차 타고 가요. 공원 들러서 스쿠터도 가져가야 하잖아.”

준비가 아니라 뒤처리를 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어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수습이 필요할 터였다. 그러나 남자는 부어 솟아오른 예준의 뺨을 두드리고 물러났을 뿐이다.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대신 말하는 것처럼.

오전 아홉 시 반이 되었을 때 예준은 남자의 차에 올랐다. 코트를 뒷좌석에 놓아둔 남자가 안전띠를 매라는 신호를 보냈다.

“도하는 최대한 타일러 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내 말을 듣는다는 보장이 없어요. 그때처럼 친구들 대동해서 폭력이라도 쓰겠다고 나서면 도움 청하기엔 너무 늦을 거야.”

남자가 차의 시동을 켰다. 예준도 동의하는 바였다. 알파를 향한 자격지심이든, 저를 향한 비상한 욕망이든,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단순히 패악을 부리는 데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을 쓰는 게 무엇보다 안전할 거예요.”

“사람이요?”

“원한다면 경호원 정도는 붙여 줄 수 있어요.”

하는 일이라곤 룸살롱 청소와 배달밖에 없는 오메가가 무슨 경호원을 대동한단 말인가. 행여 형님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곤혹스러운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경호원이라니. 말도 안 돼요.”

부잣집 도련님인 그라면 당연히 그런 생각부터 하게 될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예준은 알파가 제 삶을 통제하는 것이 싫었다. 사채에 묶여 지금도 절반은 조종당하며 사는 운명이었다. 보호라는 명목 아래 감시당하는 건 원치 않았다.

차고를 빠져나가는 차 안에서 예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핸들을 돌린 태경이 곤란해하는 예준의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안 다쳤으면 해서 그런 거야.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말아요.”

그는 더 무리하게 종용하지 않았다. 예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음을 인지한 탓이었다. 오메가의 자존심은 인격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어막 같은 것이었다. 선. 선이 중요했다. 태경은 월권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해야 했고, 예준은 남자의 개인사에 간섭하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다시 찾아오면 제가 잘 말해 볼게요. 지금까진 계속 무시하기만 해서 더 그런 걸지도 몰라요.”

태경은 동의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에 더한 요구는 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굴어도 관계없는 알파면서 남자는 도리어 강요를 참았다. 예준은 태경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섹스를 제외하고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야말로 그런 친절과 배려였으므로.

맴도는 정적이 무거워 예준은 내내 떨구었던 시선을 들어 남자를 보았다.

“어제는 고마웠어요. 다 잊고… 편하게 잤어요.”

“나는, 별로 못 잤어요.”

이유가 궁금했지만 남자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예준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전면 창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유가 뭐냐고 물어야 맞는 걸까. 묻지 말아야 맞는 걸까.

“전화하면 받아요. 일단은 지켜보겠지만 철부지 사촌 둔 덕분에 아주 불안하거든.”

소리 없이 웃은 남자는 곧 미소를 거두었다. 이어 찾아든 서늘한 눈빛의 원인이 자신이라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준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앞을 보았다. 그새 손등에 손톱자국을 냈다. 눈만 끔뻑이며 시간을 죽이자 곧 공원 근처에 다다랐다.

공원 울타리에 세워 둔 스쿠터까지 남자는 굳이 동행했다.

“다음에 볼 때는 식사라도 합시다. 폐 끼쳐 놓고 제대로 대접도 못 했으니 기회 좀 줘요.”

이미 넘치게 받았는데 뭘 더 해 주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쿠터에 올라타 시동을 켠 예준이 팔짱을 끼고 선 남자를 보며 되물었다.

“식사요?”

“그래요. 밥 한 끼 제대로 먹자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많이 신경 쓰였던 걸까. 관계에 앞서 그런 문제들이 있으면 거슬리긴 할 터였다. 그렇다면 편의점 음식이라도 먹고 만날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태경은 단호했다.

“평소에도 밥 잘 챙겨 먹어요. 너무 말랐어. 어제, 만지는 곳마다….”

오전 시간에 지나는 사람이 더 많은 곳이었다. 예준이 바쁘게 입술에 검지를 가져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이를 보며 태경은 허탈하게 웃었다.

“평가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쓰여서 그래요.”

마음이 쓰인다. 언제 들어 보았는지도 모를 까마득한 문장 하나를 띄워 놓고, 예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려 까끌까끌한 목을 무시한 채 연거푸 침만 삼켰다.

그의 차는 비상등을 켜 둔 채 갓길에 정차해 있었다. 더 시간을 붙잡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헬멧을 들어 머리에 쓰자 그가 다가와 보호 유리를 닫아 주었다.

“오늘도 수고해요.”

“이, 태경 대표님도요.”

말도 안 되게 깍듯한 답변에 태경이 입매를 올려 웃었다. 역시, 말도 안 되게 멋진 남자의 미소를 바라보며 예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어차피 헬멧을 쓰고 있으니 티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꾸벅 인사한 예준이 요란하지 않은 엔진음을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구불구불한 공원 사잇길을 지나가자 스쿠터가 위로 퉁퉁 튀었다. 꼴사납지 않을까 생각하곤 이윽고 반듯한 아스팔트 도로를 탔다. 온몸이 뻐근하게 아팠지만, 나쁘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

떡볶이집은 사흘간 닫혀 있었다. 옆 가게에 물어 아주머니 핸드폰 번호를 알아냈지만 전화를 걸어도 응답이 없었다. 인터넷상에선 와전된 헛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가게 상호를 노골적으로 밝히진 않았으나 그 집 떡볶이를 먹고 배탈 난 적이 있다던가, 내부의 청결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루머가 적힌 글들이 올라왔다.

발현한 이후 인터넷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퍼져 굳이 댓글까지 달았다. 그러나 떡볶이집을 옹호하고 해명하는 댓글은 정당성과 관계없이 몰매만 맞을 뿐이었다.

막막했다. 아주머니와는 연락도 안 되고 그 알파가 입원했다는 병원은 찾을 수도 없는 데다가, 사실을 알면 괜히 미안해할 치문이 신경 쓰여 녀석의 연락은 대강 넘겨야 했다.

오후께부터 시작된 두통 탓에 예준은 인상을 쓰며 배달할 치킨을 받아 스쿠터로 돌아왔다. 밤 열 시 반, 마지막 배달이기에 이것만 잘 마무리하면 집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막 스쿠터 뒤편에 치킨을 실으려는데 빨간색 스쿠터가 다가와 예준의 스쿠터와 머리를 맞대듯 섰다.

헬멧을 벗은 예준이 스쿠터의 주인을 보았다. 공원에서 윤도하와 함께 앉아 있던 그 덩치였다. 가뜩이나 험악한 인상인데 잔뜩 표정을 구기고 있으니 흔히 보는 조직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다시 볼 일 없으리라 믿었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자 가뜩이나 아픈 머리가 더 지끈대는 기분이었다.

“찾느라 좆 빠질 뻔했네.”

추운 날씨에 배달이 늦어지면 곤란했다. 예준은 무시하고 헬멧을 쓰려 했으나, 덩치의 손에 곧 저지당했다.

“주소 불러. 대신 배달해 주라니까.”

“누가.”

“도하가.”

예준은 일전에 남자가 말했던 ‘외출 금지’를 떠올렸다. 정말 외출 금지라도 당한 것이라면 집안에서도 적잖이 골칫덩이인 모양이었다. 고등학생에게는 알맞은 조치라고 생각했지만, 윤도하가 한 일들, 제게 했던 말, 어울려 노는 이 덩치를 보면 도무지 고등학생이라고 짐작하기 어렵기도 했다.

“내가 하면 돼. 쓸데없는 짓 하지 말란 말이나 전해 줘.”

이건 무슨 기발한 괴롭힘인가 싶었다. 다시 치킨을 챙겨 넣으려는데 이번에는 덩치가 버럭 성을 내며 소리쳤다.

“씨발, 나도 이 날씨에 이딴 짓 하기 싫다고!”

“하기 싫으면 하지 마.”

“한 대 처맞아야 내놓을래?”

키만 멀대같이 큰 윤도하가 무리의 우두머리 격이 된 건 아무래도 녀석이 부잣집 도련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 대 남자로 싸우면 이 덩치가 윤도하를 때려눕히기는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윤도하의 말을 명령처럼 따르는 걸 보니, 험악한 표정 뒤에 감추어 둔 고단함이 은근슬쩍 엿보이는 것이다.

선수 시절을 보내고, 조직원들 곁에 기생해 살면서 남자들 세계의 위계질서는 익히 배웠다. 예준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하자는 대로 하면 귀찮게 안 할 거지?”

“당연하지. 누군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나.”

비 오던 밤, 덩치에게 맞은 자리가 아직도 쑤시는 기분이었지만 예준은 핸드폰을 꺼내 덩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외울 수 있겠냐? 주소.”

순간 녀석이 핸드폰을 확 낚아채 번호를 입력했다. 어찌나 힘이 센지 스친 손이 얼얼하게 아팠다. 어딘가 전화를 건 녀석이 순순히 도로 핸드폰을 내놓았다. 아마 윤도하에게 제 번호를 상납한 것 같았다.

“또 어디 가서 다리 벌리지 말고 집으로 재깍 가라고 전하란다.”

가래를 모아 퉤 뱉은 덩치가 치킨을 빼앗아 달아났다. 주소를 제대로 못 외웠다면 또 번거로운 일이 생길 터였다. 미덥지 못했지만 가운뎃손가락을 세우고 멀어지는 녀석을 쫓아가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치킨집 사장이 의아해할까 봐 예준은 빠르게 자리를 떴다. 혹시 치킨집으로 걸려 올 항의 전화 따위가 신경 쓰여 윤도하의 바람처럼 바로 집으로 돌아가진 못했다. 추위를 피하려고 스쿠터를 세워 두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담배를 피웠다. 온종일 신경을 쓴 덕분에 평소보다 피로감이 심했다.

예준은 윤도하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골몰히 머리를 썼다. 굴복시키기 위해서라면 폭력밖에 쓸 줄 모르던 녀석이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걸까. 방법이 올바르진 않았다 하더라도 배달 대리는 확실히 자신의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한 일이 맞았다.

“…….”

담배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짧아질 때가 되어서야 예준은 윤도하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남자를 불러내어 고자질했던 밤. 다정하게 어깨를 어루만지던 손길, 눈을 맞추며 더 다가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속삭였던 남자. 고등학생에 비할 바 없는 어른이자 녀석의 자격지심을 유발하는 우성 알파.

혹여, 그 장면이 그 어수룩한 고등학생의 심장을 두드린 격이라면?

앞일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따라 유독 메케한 담배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예준이 차디찬 벽면에 등을 기대고 섰다.

*

다음 날, 남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태경이 말해 준 주소는 낯선 한식당이었다. 예준은 호기심에 그 식당을 검색해 봤다가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자는 식사 자리에 대접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예준은 제게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마음이 편해지자 갖는 자리라면 자기 식사비 정도는 스스로 내려고 했는데, 얼핏 가격만 살펴봐도 어림없었다. 밥 한 끼에 몇십만 원이라니. 사진으로 본 상차림이 훌륭하긴 했으나 예준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비싼 식당이었다.

인터넷을 켠 김에 예준은 떡볶이집과 관련한 게시 글도 다시 한번 찾아보았다. 어쩐 일인지 검색 결괏값이 이전과는 달랐다. 예준은 자신이 남긴 댓글을 보려다가 ‘삭제된 게시물입니다.’란 안내문만 여러 번 마주했다. 아주머니가 법적인 도움을 받으시기라도 한 걸까. 인터넷 게시물이 삭제된 것만으로 받은 피해를 다 보상받을 수는 없겠지만 루머가 더 퍼질 일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예준은 무력감에 속앓이하면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못내 무거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랐다. 남자가 식사 이후 관계하자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나 해서 몸을 깨끗이 씻고 빨아 둔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도로 정체가 심한 저녁 시간이었다. 늦지 않을까 내심 전전긍긍했는데 다행히도 약속 시간보다 오 분 빨리 정류장에 내릴 수 있었다.

식당은 예상처럼 으리으리했다. 빼곡한 빌딩 사이에 있으면서도 담과 정원에 둘러싸여 어딘가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드나드는 사람 중엔 알파도 있었고 부유한 자태의 베타들도 있었다. 예준은 부러 입구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남자를 기다렸다.

손님이 끊이지 않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택시 한 대가 식당 앞에 도착했다. 열린 문 사이로 길게 뻗어 나온 다리만 보고도 예준은 그가 이태경 대표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입구에 모여 있던 예약자들의 눈이 이제 막 택시에서 내린 남자에게로 쏠렸다. 수군거리는 모습만으로는 실제로 그를 아는 건지, 그저 남다른 외모에 놀라 입방아를 찧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예준은 이목이 끌린 틈에 남자를 만나는 것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제 이름이 뜬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던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이상한 기분이었다. 곧 전화를 받은 남자가 물었다.

―도착했어요?

“네. 저 반대편에 서 있어요.”

예준은 가로등도 잘 비추지 않는 으슥한 건물 사이에 서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손쉽게 예준을 발견했다. 그가 턱짓으로 식당의 귀퉁이를 가리켰다.

―다른 입구 있으니까 나 따라오면 돼.

“네. 갈게요.”

남자는 귀퉁이를 돌아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예준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남자를 따랐다. 작은 대문 앞에 단정한 차림새의 직원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태경이 그 직원 앞에 다다랐을 때 예준은 남자와의 격차를 좁혔다.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며 눈인사하자, 남자가 거리낌 없이 어깨를 감쌌다.

“룸으로 예약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신경 쓸 거 없어요.”

“예.”

곁눈질하듯 보자 멍은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입술 상처도 흔적만 남았을 뿐 덧나지는 않았다.

“많이 나았네요. 여기.”

예준이 제 입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입술과 턱은 성기를 빠느라 꽤 오래 혹사당했다. 그러고 보니 등과 가슴도 상처로 엉망이었지. 함의를 감추고 말을 던졌는데도 그가 턱을 어루만지며 눈을 내리떴다.

“뭐, 좋던데요. 힘줄 때마다 아픈 것도.”

행위에 관한 야릇한 감상이 되돌아왔다. 예준은 붉어진 귀를 다급히 감추었다.

호텔에서처럼 낯선 이들의 눈을 피해 룸으로 향했다. 높고 잘나신 분들이 드나들긴 마찬가지지만, 룸살롱과 이 한식당은 명백히 결이 달랐다. 평소에는 발조차 들일 수 없는 윗물임이 분명해 괜히 와서는 안 될 곳에 온 것만 같은 이질감이 들었다. 그래도 고작 식당에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들키기는 싫어 조용히 남자를 따랐다.

향수를 바꾸었는지 남자에게서는 날씨와 잘 어울리는 시원한 향기가 났다. 예준을 안쪽으로 안내한 태경이 코트를 벗었다. 셔츠 위로 솟은 상박이 탄탄해 보였다. 예준도 점퍼를 벗고 자리에 앉았다. 정갈한 기본 상차림만으로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씻었어요? 좋은 냄새 나네.”

“네. 씻고 왔어요.”

아차 했다. 평소에는 피로에 찌들어 불쾌한 냄새가 났나 싶어서.

예준은 직원이 서빙해 준 국과 밥, 소담하게 담긴 여러 가지 반찬들, 받침에 가지런히 놓인 식기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밥상 앞에 앉아 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보통은 편의점에서 끼니를 때우거나 라면으로 버티거나 김, 참치 통조림 따위로 연명하는 편이기에, 잘 갖추어진 상이 마냥 신기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직원이 태경과 눈을 맞추고 물러났다. 안면이 있는 것 같았다. 직원까지 알 정도라면 아마 많은 여자가 이곳을 거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직감이 들었다.

“입맛 없어도 괜찮을 거예요.”

뭐부터 집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태경이 말했다. 그의 말과 달리 예준은 온종일 제대로 먹은 게 없어 허기가 진 상태였다. 가격을 생각하면 불편했지만, 이미 나온 음식을 남기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잘 먹겠습니다.”

막상 음식을 보자 자꾸만 입 안에 군침이 돌아서 참기가 힘들었다. 예준은 반들반들 윤기가 도는 달걀말이를 입에 가져가며 그 따뜻함에 놀랐다. 따뜻해야 할 음식은 따뜻하고 시원해야 할 음식은 시원한 게 당연한데, 어쩌다 보니 그 당연함을 낯설게 여기게 된 처지였다.

식욕은 도는데 찬 바람을 맞아서인지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나오기 전에 씻기까지 해서 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무의식중에 어깨를 떨자 한기가 든다는 사실을 눈치챈 남자가 물었다.

“추우면 소주 한 병 시켜 줄까요.”

그가 은근슬쩍 곁눈질했다. 식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들여다보는 눈빛이 다정했다. 좋은 음식과 함께하는 소주는 달 것이다. 예준은 쉽게 현혹되었다. 소주도 귀해서 못 먹는 형편이니 마다할 수가 없었다.

“네. 한 병만요.”

곧 점원이 소주와 잔을 가져다주었다. 예준은 소주 궁둥이를 팔꿈치로 톡톡 두드리고 뚜껑을 땄다. 병을 기울이려는데 태경이 소주병을 가져가 잔을 채워 주었다.

“크으.”

단숨에 들이켠 예준이 저도 모르게 시원한 소리를 냈다. 사방이 막힌 곳이어서인지 처음 발을 들였을 때보다 이질감이 덜해졌다. 예준은 눈치를 보며 생선조림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제법 잘 먹는 모습에 그는 의외란 듯 물었다.

“그렇게 맛있어요?”

“네.”

무뚝뚝하게 내뱉고는 밥을 한술 크게 퍼 올렸다. 곧, 부드러운 음성이 와닿았다.

“얼른 먹어요. 잔 비면 따라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남자는 말처럼 충실히 잔을 채워 주었다. 예준의 눈이 풀리고 행동이 굼뜨게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워낙 굶주렸던 탓인지 실컷 먹은 게 밥 한 공기였다. 어느 정도 배를 불린 이후부터는 조심스레 남자를 관찰했다. 소주를 따르는 정갈한 손, 젓가락을 바르게 쥐는 습관, 이따금 마주치는 시원한 눈매가 어쩐지 아랫배 부근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어요? 도하가 또 괴롭혔다거나.”

“없었어요.”

배달할 치킨을 녀석 친구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치킨집에 항의 전화가 오지 않았으니 그걸 괴롭힘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남자와 헤어지고 무사히 며칠이 지났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었으나 예준은 떡볶이집 이야기를 더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

소주 반병을 비우고서부터는 안주랄 것을 먹지 않았다. 깡소주 마시는 게 습관이라 그랬는데 이미 식사를 끝낸 태경도 딱히 태클을 걸지 않았다. 템포가 느려지도록 천천히 잔을 채워 주웠을 뿐이다.

얼마만의 포만감, 얼마만의 취기인지. 온종일 어깨를 짓눌렀던 피로감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그런 예준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가 물었다.

“히트 사이클 때 억제제는 잘 안 먹는 편이에요?”

그와의 첫 만남이 아직 선명했다. 그렇게 강렬한 밤을 쉽게 잊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섹스 파트너답게 그가 사적인 질문을 건네는 때는 많지 않았다. 거기다 굳이 거짓말할 필요는 없는 질문이었다.

“못 먹어요….”

“왜?”

“약도 잘 안 듣고 돈이 없어서요.”

마침, 소주 한 병이 동났다. 예준의 마른 어깨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흔들리는 어깨를 고정한 남자가 물었다.

“예준 씨. 몇 살이에요?”

검색해 봤다면 이미 알 텐데도 그는 굳이 물었다. 어쨌거나 나이는 그와 저 사이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예준은 곧이 답했다.

“스물여섯이요.”

취기가 도니 그대로 만류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직원을 불러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예준은 남자가 채워 주는 잔을 바라보며 뒤늦게 물었다.

“그러는… 이태경 대표님은… 몇 살이신데요.”

“서른셋.”

간단히 답한 그가 덧붙였다.

“나이보다 많이 어려 보이는 거 알죠. 지금 술잔 채우는 데 죄책감이 좀 들 정도야.”

말과 달리 씩 웃는 남자의 얼굴엔 그다지 가책이 엿보이지 않았다. 왜 호구 조사를 시작하는지 별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갈수록 배 위에 오른 듯이 시야가 일렁였다. 보다 못한 남자가 옆자리로 와 예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취한 것 같아?”

“네. 조금….”

인사불성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조금 좋아진 정도. 알파와 함께 있으면 다음 날 근육통에 시달릴 만큼 긴장해야 마땅한데도 그 긴장마저 기분 좋았다. 남자는 위협을 일삼지 않으니까. 이렇게 은밀한 공간에 단둘이 있는데도 바지부터 벗기고 볼 생각 없는 점잖은 도련님이니까.

“그럼 이제까지 히트 사이클은 어떻게 보냈어요?”

예준은 감기려던 눈을 또렷이 떠 남자를 보았다. 첫 섹스를 하면서 얼핏 이야기하긴 했지만.

“참거나, 형님들이랑 하거나….”

“그래. 그 형님들. 그 사람들이 누군데?”

질문이 많아지는 걸 보니 그가 노린 것이 취중 진담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예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읊조렸다.

“파트너 공유하는 취미 없으시다고 했죠.”

“맞아요.”

“예전엔 형님들이랑 했지만, 대표님 만나는 동안은 안 할 거예요. 그러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선을 긋자 그의 눈빛이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미소마저 옅어지는 순간, 예준의 목덜미엔 소름이 돋아났다. 그는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유형의 알파일까. 이따금 찾아오는 서늘한 감각은 유쾌하지 않았다. 예준이 침을 꼴깍 삼키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돌봐 줄 사람은 있어?”

“…저를요?”

“네. 예준 씨 돌봐 줄 사람 말이에요.”

예준은 다 큰 성인이다. 오메가인 신세라 해도 딱히 누군가에게 돌봄까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친한 동생은 있어요. 치문이라고….”

어째서 질문에 곧이 답하게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예준은 무거운 눈꺼풀을 손등으로 비벼 흐릿해지려는 시야를 바로잡았다.

“부모님은.”

“…검색해 보셨으면 알 텐데.”

“대강은 아는데, 인터넷에 어머니 이야기는 없더라고.”

그가 달뜬 뺨을 아프지 않게 두드렸다. 덧붙이는 목소리가 낮았다.

“당사자가 눈앞에 있는데 네 말을 믿겠어,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말을 믿겠어.”

인터넷에 유언비어가 많긴 했다. 예준은 남자의 시선에 꽁꽁 묶인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아빠랑은 가끔 문자만 하는 정도고…, 엄만… 태권도 그만두고 얼마 안 돼서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발현 후 촉발된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예준은 오메가가 되고 삼 개월 남짓이 흘렀을 때 이혼하겠다는 부모님의 선언을 들었다. 그로부터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엄마는 새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 아들의 처지를 감당하기 힘들어 그런 식으로 도피했다고 해도 솔직히 원망스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함께 있으며 괴로운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다만, 재혼을 앞두고 사고를 당한 건 비극이었다.

“그럼 혼자 살아요?”

“예.”

“감당이 돼?”

“뭐가…?”

“히트 사이클이나 먹고사는 문제 말이에요.”

마른 건 아빠의 빚을 갚느라 가난해서가 맞다. 단순히 돈이 없다기보다는 스스로 돌볼 시간이 부족했다. 뭐 하나 제 손으로 해낸다는 감각이 없는 삶이었다. 완벽히 인생을 통제하고 사는 남자의 눈엔 꽤 한심해 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굶고 다녀서 하기 전에 꼬르륵거리기나 하고, 의무도 다하지 않은 채 불쑥 잠들어 버리기나 했으니.

“그럭저럭요.”

가볍게 퉁치기에 이보다 적합한 말이 없었다. 민망해서 슬쩍 웃자 남자의 눈에 완연한 동정심이 어렸다. 경멸보다는 나았다. 남자는 곧 화제를 전환하듯 말을 꺼냈다.

“곧 러트가 올 거예요.”

“아….”

형질을 지닌 사람이라면 발정기의 징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페로몬은 갈무리되어 은은하지만, 발정기가 도래하면 페로몬 농도가 진해지고 컨디션이 저조해질 터다. 예준은 밑이 간지러워져 어쩔 줄 모르곤 했다. 우성 알파인 그는 아마 어느 구멍에든 쑤셔 박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그 말을 꺼내려고 괜한 호구 조사를 했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애초에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것도 러트를 함께 보내길 요구하는 게 껄끄러워서일 수 있었다. 잘 교육받은 사람이니까 먼저 목적을 드러내기보단 대화의 방향을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데 익숙할 것이다.

“제 발정기 때도 도와주셨으니까 저도 할게요. 그런 말은 그냥 편하게 하셔도 돼요.”

“편하게?”

“파트너니까요. 식사도 하자고 하시고… 괜히… 이것저것 물으시기에.”

남자의 눈을 마주하기 위해 고개를 젖히자 이번에는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곧 목 뒤를 부드럽게 감싸 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거 얻으려고 사탕부터 쥐여 주는 사람처럼 보여요?”

알 수 없었다. 그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므로. 다정하다가도 때론 차갑고, 예의 바르다가도 룸살롱 같은 곳에 거리낌 없이 드나들기도 하는 사람이 아닌가. 몸을 섞기는 쉽지만 껍질 속을 들여다보기 쉬운 유형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에요?”

예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퍽 진지한 질문에 태경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런 사람이면 어떤데.”

이 정도 대접이면 나쁘지 않았다.

“괜찮아요. 밥도 잘 먹었고 술도 잘 마셨으니까.”

침묵이 이어졌으나 남자는 몽롱한 제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취기 덕분인지 어색함이 옅어서 예준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온몸의 감각이 시각에 집중되자 남자의 이목구비가 유난히도 수려하게 느껴졌다. 깨끗한 살결 위에 남은 상처가 견딜 수 없이 거슬릴 정도로.

예준은 여전히 남자의 손에 상체를 맡긴 채였다. 정적을 뒤로하고 슬쩍 손을 들어 남자의 까칠한 입술 상처를 건드렸다. 무례하게 턱을 붙잡아 색이 옅어진 멍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남자는 의아할 정도로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시선을 떨구고 후각에 집중했다. 페로몬을 후각만으로 느끼는 건 아니지만, 정말 미치게 좋은 향기였다. 어느 오메가든 몸이 달아오르고 끌리지 않을 수 없을 테다. 예준은 인내하느라 깊어진 숨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집중력이 흐려지자 남자가 시선을 끌듯 물었다.

“난 러트 때 통제가 안 되는데 괜찮겠어요?”

“…어떤 식으로요?”

우성 알파는 번식욕이 강하기에 러트 때만큼은 침대 매너가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가끔은 의식이 흐려져 성욕만 앞세우기도 하고, 아주 폭력적인 섹스만 선호하기도 한다고.

“설명하기 어려운데.”

“아픈 건 괜찮아요.”

태경이 그 모두에 해당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와 보낸 밤과 달리 예준이 해 왔던 섹스도 거칠기는 마찬가지였다. 섹스라는 단어로 부르기도 민망한 그 행위는 항상 아팠고, 언제나 기대 이하의 쾌감만 불러들였다.

“형님들이랑 할 때도 늘 아픈데요, 뭐….”

조금 무섭기는 하지만 파트너로서 의무는 다해야 했다.

“그러니까 그 형님들이란 사람들이 대체 누군데….”

질문이 아니었다. 그가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덧붙였다.

“…기분 좆같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전 상대를 들먹인 게 기분 나빴던 모양이다. 예준은 괜히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 남자는 핑계가 담긴 손을 저지하고 나섰다. 태경에게 손을 붙잡혔으면서도, 예준은 속수무책으로 강해지는 취기에 마음대로 벌어지는 입을 단속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손가락만 넣은 줄 알았어요…. 근데 자지였어요. 그게… 너무… 작아서….”

“예준 씨.”

“형님들은 진짜 작으면서 큰 척… 해요…. 그러면서 아프기는 또 얼마나… 아프게 흔드는지….”

부득이 형님들과의 섹스를 떠올리던 예준이 주정했다. 이제 졸음이 쏟아지고 귀까지 윙윙거렸다. 제정신으로 주절거린다고 보기 어려운 말은 대체로 음탕하나 이성적으로 곤란한 점들을 담고 있었다.

“좋아서 막, 난리를 치는데 저는… 잘 모르겠….”

예준은 곧 태경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가쁘게 숨만 들이마셨다 내쉬는 아이를 끌어안고 태경은 저도 모르는 사이 잇새를 짓씹었다. 턱에 얼얼하게 힘이 들어가고 목덜미에 열이 오르더니 귓불까지 붉어졌다.

곤히 잠든 아이는 말간 얼굴을 두드려도 깨지 않았다. 이런 무방비함을 건드렸을 수많은 남자를 떠올렸다. 다루기 쉽다고 생각하면서, 다루기 쉬웠을 아이의 과거를 떠올리며 섬뜩한 감각에 휩싸였다.

작기는 또 왜 이렇게 작아서. 좋은 냄새와 포근한 감각에 아찔해진 태경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쌔근쌔근, 가슴 부근에서 퍼지는 숨이 달고 달아 인내하는 손끝이 자꾸만 떨렸다.

*

필름이 끊겼다. 구토감에 눈을 떴을 때 예준은 택시 뒷좌석에 기대어 있었다. 흐릿한 시야 안으로 낯선 이의 뒤통수가 보였고, 바로 지척에서 달콤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남자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몸을 감싼 따뜻한 체온이 그 추정에 무게를 더했다. 예준은 남자의 가슴에 기대어 안긴 채였다. 낯선 뒤통수는 택시 기사였다. 흘끗거리는 비밀스러운 움직임이 조금은 불편하게 여겨졌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태경의 옆얼굴이 보였다. 예준은 다짜고짜 말했다.

“죄송합니다.”

“일어났어요?”

“…네.”

“집이 어디예요?”

“S동이요.”

“저번, 그 경찰서 근처.”

“…네.”

아직 의식이 맑지 못했다. 원래도 주량이 세지는 않지만, 워낙 오랜만에 먹은 탓에 몸이 받아 주질 못하는 듯했다. 그 와중에도 머쓱하게 몸을 일으킨 예준이 우선 태경에게서 벗어나려 단단한 옆구리를 밀어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요.”

태경은 그렇게 말한 뒤 예준의 팔을 당겨 제 허리에 두르게 했다. 표면상 지탱하려는 노력처럼 보였으나, 푹 안겨 셔츠에 고개를 파묻으니 예준은 그저 페로몬에 숨이 막힐 따름이었다.

예준은 곧 아랫배가 간질거려 다리를 꼬았다. 발기하지 않으려면 환기가 필요했다. 단단한 남자의 품 안에서 뒤척이다 결국엔 무척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람 쐬고 싶어요….”

그러나 부드러운 시선은 단호했다.

“바람 차서 감기 들어요.”

쉽게 들어주진 않으리란 예감이 왔다. 늘 기꺼이 친절을 베풀면서 왜 지금은 말을 들어주지 않는지 의아했지만 피로감이 심해 더 실랑이를 벌이기도 귀찮았다. 전해지는 체온이 썩 나쁘지 않아서 예준은 그냥 포기한 채 두 눈을 감아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자 이번에는 응시하는 남자의 두 눈이 바로 보였다. 얼떨결에 눈이 마주쳐 예준은 다시 자는 척을 했다. 흉내라는 걸 모를 리 없으면서 남자는 괜히 콧등이나 속눈썹 따위를 톡 건드렸다. 부담스러워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토할 것 같아요.”

“차 세울까?”

거짓말에 애꿎은 택시 기사를 수고스럽게 만들 순 없었다.

“그냥 잘게요.”

“위로 올라올래요?”

태경이 제 허벅지를 두드리며 물었다. 예준은 대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요.”

보는 눈도 있는데 채신머리 없이 그런 짓을 할 리 없었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어쨌든 커다란 몸에 기댄 것만으로 살 것 같았다. 꾸준히 운동하는지 남자의 몸은 얼떨결에 만지는 곳마다 탄탄하고 매끈했다. 이미 시각과 촉각으로 확인한 몸이지만, 손끝이 닿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감탄을 참기도 어려웠다.

손을 움직인 건 명백히 무의식이 한 일이었다. 저릿한 손끝을 쥐었다 펴자 그가 낮게 웃었다.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돼요.”

“어디, 어딜요….”

남자는 다리를 조금 더 벌렸다.

“어디든.”

앞섶이라도 만지라는 말인지 황당할 노릇이다. 술에 잔뜩 취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히트 사이클 기간도 아니었다. 예준은 다시 한번 됐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끌어안고 있는 몸이 그저 베개일 뿐이라고 상상하면 도착할 때까지는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다시 잠들 수는 없었다. 익숙한 길이 나타나자 조금씩 초조해졌다. 집 앞까지는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살 만한 동네, 가성비 좋은 반지하 방이라 생각하지만 누추한 꼴이었다. 예준은 한적한 버스 정류장 앞에서 태경의 셔츠를 쥐며 말했다.

“대로변에 세워 주시면 돼요….”

“집 앞까지 가. 추운데.”

“아뇨. 저… 좀 걸으면서 술… 깨고 싶어요.”

하얗게 질린 예준이 이상했으나 태경은 그 미약한 고집마저 꺾으려 들지는 않았다.

“알겠어요. 세워 줄 테니까 지퍼 끝까지 올려요.”

“네.”

점퍼 지퍼를 목 끝까지 잠근 예준이 아른아른 떨리는 눈으로 태경을 보았다. 불안해 손잡이에 손까지 대고 있는 것을 태경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느리게 이동한 차는 두 번째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자마자 멈추었다.

“내려요.”

밀착했던 몸을 떼어 내고 태경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바쁜 마음에 비해 예준은 느릿느릿 차 문을 열었다.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 굼뜬 몸에 당황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어차피 500m 남짓만 걸어가면 집이었다.

“귀 벌써 빨개졌어.”

남자는 예준을 거의 받아 내듯 부축해 주었다. 두 발을 땅에 딛고 서자 매서운 찬 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양손으로 귀를 덮어 준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 집까지 안 데려다줘도 되겠어요?”

“네. 이대로 자면 더 술병 나요….”

혀가 꼬이는데도 예준은 단호했다. 뭐라 말을 이으려던 그가 도로 입술을 다무는 게 보였다. 앞이 어질어질하긴 해도 수없이 다닌 길이니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진 않을 터였다.

“알겠어요. 조심히 들어가요.”

의외로 간단히 물러난 그가 말했다. 예준은 못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꾸벅, 허리를 접어 인사하곤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발걸음이 바쁘면 이상하게 볼까 봐 상상으로 긴 줄을 그려 떠올린 그대로만 발을 움직였다.

높다란 언덕 때문인지 무릎이 시큰시큰했다. 열일곱 살 때 입은 부상 탓에 가끔 여기저기가 쑤셨다. 언젠가 형님들 구둣발에 밟힌 곳이 아팠고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갈 땐 항상 명치가 눌린 듯 갑갑하기도 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대부분 캄캄했다. 생각보다 많이 늦어진 모양이다. 남자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겠지, 했을 즈음부터는 가쁜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때는 사십 평이나 되는 아파트에 아빠와 엄마, 자신까지 셋이서 산 적도 있었다. 주로 차를 타고 다녀서 매서운 추위는 잠깐 느끼고 마는 정도였다. 도장에서 늦은 밤 귀가해도, 집을 그리워하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도 막바지에 다다른 늦가을이 추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괜히 킁킁 찬 기운을 들이마신 예준이 비틀비틀 움직였다. 호기롭게 말했지만 취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의지와 달리 예준은 팔자로 휘청이며 낡은 빌라 현관으로 들어섰다.

탁, 마침 주황빛 센서 등이 켜졌다. 난간에 허벅지를 처박고 손으로 벽을 짚기도 하며 계단을 반 내려가자 드디어 집이 나왔다.

“…비밀번호 뭐였지.”

뜻밖의 난관이었다. 쿵, 현관문에 이마를 댄 예준은 더더욱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려 애썼다. 우선 아무거나 눌러 봤지만 잠금장치에서는 계속해서 삐빅거리는 경고음만 울렸다.

“아, 진짜… 추운데….”

물러나서 발로 문을 툭 건드려 보기도 하고 치문이 망가뜨린 문손잡이를 돌려 보기도 했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별게 다 사람 힘들게 하네, 자조하며 문에 의지해 겨우 서 있던 때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추위에 몸이 떨리기 시작할 즈음 누군가 탁탁, 계단을 짚으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불안해서.”

“…….”

“가만히 두고 보질 못하겠네.”

훅 끼치는 달콤한 향에 예준은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금세 전신의 절반을 덮는 따뜻한 기운을 감지하곤 들켰다는 수치심보다 더 큰 안도감을 느꼈다. 남자는 허벅지 앞면으로 예준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쳐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했다. 미끄러져 들어오는 손이 부드럽게 허리를 감쌌다.

“잘 생각해 봐요. 번호 뭔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밀착한 몸이 부담스러웠다.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감과 무거운 머리를 제외한 모든 감각이 선명했다.

“기억이… 잘….”

그가 내쉰 한숨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구태여 정면만 응시하며 예준은 애꿎은 잠금장치만 더듬었다. 자기 집 비밀번호도 기억 못 하는 등신 머저리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생일이 언젠데.”

“…1월 19일이요.”

설마, 그렇게 쉬운 걸로 해 뒀을까. 부드럽게 손을 치워 낸 태경이 번호를 눌렀다. 띠릭, 잠금장치가 손쉽게 열리며 바른 소리를 냈다. 다시 예준의 귓가에 흩어진 것은 남자의 허무한 웃음소리였다.

“기특하네. 자기 생일도 잘 알고.”

머쓱해진 예준이 느릿느릿 코끝을 손등으로 훔쳤다. 태경이 거침없이 문을 열자 바깥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냉기가 끼쳤다. 그는 집주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에게 끈끈하게 달라붙어 집으로 들어온 예준은 신발을 벗자마자 무너졌다.

“아….”

다리에 힘이 빠져 푹 주저앉았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태경을 보자, 그는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말했다.

“그러게. 데려다준다니까.”

“…됐어요.”

“되긴 뭐가 돼.”

“감사합니다.”

“인사만 잘하면 답니까.”

슬쩍 눈을 피했다. 바보처럼 굴었으니 더 변명해 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그보다 예준은 슬슬 등 뒤편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어둠은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으나 한편으로 치부를 감추는 가림막이기도 했다. 자그마한 창문으로 스미는 가로등 빛이 전부라면 모든 살림살이를 샅샅이 들킬 필요는 없었다.

“이제 가셔도 되는데.”

태경은 가는 대신 자세를 낮추었다.

“싫은데.”

그가 예준이 입고 있던 점퍼의 지퍼를 열었다. 헐렁한 점퍼는 손쉽게 벗겨졌고 곧 남자의 두 손이 허리춤에 닿았다. 순식간에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예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매트리스만 덜렁 놓인 자신의 침대 위에 안착했다.

태경은 바닥을 굴러다니던 이불을 집어 예준에게 덮어 주었다.

“춥지.”

“추워요.”

“그래서 그냥 두고 못 가요.”

이토록 과분한 친절이라니. 예준은 진심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넋 놓고 있을 수 없어 재빨리 전기담요부터 켰다. 낡기는 했지만 한번 열을 내면 땀이 흠뻑 날 정도로 쓸 만한 놈이었다.

“이러면 안 추운데요….”

머쓱한 기분에 눈을 접어 웃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예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고 볼이 봉긋하게 솟았다. 상황을 모면하려는 실없는 웃음이었을 뿐인데 남자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그는 곤란한 눈빛으로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축였다.

“너 술 먹으면 안 되겠어.”

혼이 났다. 무슨 말인가 싶어 예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곁에 있던 남자가 상체를 기울였다.

“내가 알파라는 거 알고는 있는 거지.”

짚고 넘어가는 목소리가 낮았다.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온몸을 저릿하게 만드는 이 페로몬이 그 증거였다.

“…제가 뭐 잘못했어요?”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편하다면 떠나면 그만일 텐데 괜히 핀잔을 준다.

“정말 가셔도 되는데.”

“알아서 갈 테니까 그렇게 재촉할 필요 없어요.”

“네….”

그가 마른 얼굴을 쓸며 예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관찰하듯 옮겨 가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예준은 함의가 분명한 눈빛을 읽어 내지 못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페로몬을 느끼듯, 남자 또한 야릇한 열감을 느낄 게 분명했다. 알파와 오메가, 단둘뿐인 방 안이라면 언제 욕구가 들이닥쳐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저….”

당황한 것도 잠시, 몽롱한 시야 안으로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예준은 가까스로 남자의 입술을 피하며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자 턱선 어딘가에 입술이 닿았다. 아찔한 촉감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안 돼?”

허락을 구하는 건가. 고민하는 순간, 큰 손이 턱을 감싸 쥐었다. 강제로 저를 보게 하는 데는 약간의 힘이 실렸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에 어느새 부드러운 기척이 잦아들어 있었다. 예준의 눈이 잔잔하게 떨렸다. 다시 다가오는 입술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입술을 물고 비빈 그가 가볍게 어깨를 그러쥐었다.

“아…. 우웁, 안 돼요.”

“뭐가 안 돼?”

그는 비껴간 입술 대신 뺨에 입 맞추었다.

“페로몬 때문에….”

“아아, 예준 씨 페로몬 때문에 내가 이러는 거예요?”

“네….”

미묘하게 끌리는 야릇한 기분을 예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끌린다기보다 꼴린다고 해야 할까. 마음에 드는 페로몬을 맡으면 상대를 인지하기도 전에 배가 먼저 간지럽곤 했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화학 반응에 불과한….

“예준 씨.”

“네.”

“예준 씨 페로몬이 달고 좋기는 한데 나한테는 그렇게 치명적이지 않아요. 난 매일 면역제를 먹거든.”

“면역제요?”

워낙 고가여서 아무나 헤프게 먹지 못할 뿐, 페로몬의 영향을 상쇄하는 약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다. 예준은 그와 처음 보낸 하룻밤을 떠올렸다. 남자는 짐승처럼 달려드는 대신 먼저 정성스레 애무해 주었다. 애무할 여유가 있다는 건 확실히 페로몬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덜 흥분하는 거예요?”

“그게 덜 흥분한 거라면, 네. 그래요.”

태경이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어떤 새끼들만 만났기에 그걸 덜 흥분했다고 표현하는 건지.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건 페로몬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왜요….”

머리로는 대강 이해가 가는데 그렇다면 자신에게 왜 이러는 것인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욕만 해결하면 그만인 섹스 파트너 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피가 빠르게 돌자 취기가 심해졌다. 골몰히 생각에 잠긴 예준이 간지러운 코끝에 손을 댔다. 태경은 그 손을 달뜬 뺨으로 옮겨 제 손안에 감추었다.

“내 냄새 좋지.”

정곡을 파고들어 묻는다. 예준은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이용해도 돼?”

그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페로몬을 풀었다. 아주 약하게 전해졌을 뿐인데도 예준은 전신이 녹진하게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 하아….”

다리를 모으려 안달하고 떨어질까 불안한 아이처럼 손을 뻗는다. 페로몬에 수없이 농락당했으나 그의 페로몬은 형님들과 달리 공격적이지 않았다. 농도가 짙고 효력도 강하지만, 깊이 빠질까 두려운 감각 외에는 어떤 거부감도 느낄 수 없었다. 예준은 금세 흠뻑 젖어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자자고는 안 할 테니까 눈 좀 보여 줘요.”

그가 부드럽게 회유했다. 페로몬 아래에서는 어떤 거부도 할 수 없었다. 예준은 경직되었던 머리를 베개 위로 떨어뜨렸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고개가 젖혀졌다. 자연히 벌어진 입술이 번들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낯빛이 선명히 붉어졌다.

“긴장하지 말고.”

태경은 도톰한 아랫입술부터 핥아 올렸다. 따뜻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이불 속 온도는 분명 전기담요의 힘이겠으나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예준의 이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크게 공기를 밀어 넣는 폐부를 손끝으로 더듬자, 예준이 어쩔 줄 몰라 새끼 강아지 같은 신음을 냈다.

“바, 반칙이에요.”

“그래야 키스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쓰지. 반칙.”

“나… 쁜….”

뭐라 욕지거릴 중얼거린 예준은 말과 달리 얌전하게 키스를 받아 주었다. 타액으로 입 속을 축이고 손끝으로는 탄탄한 목덜미를 덧그렸다.

“알아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소년다운 얼굴에 욕망이 들끓는 눈이라. 태경의 허벅지가 바짝 조여들었다.

“나는 같은 오메가와 두 번 잔 적 없어요.”

대화의 맥이 끊기고 그 사이로 뜨거운 눈빛만이 오갔다. 점점 열이 끓어 예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비척비척 뒤트는 다리를 결박한 태경이 상체를 낮추었다.

“다리 벌리지 말고 입술만. 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예준이 눈을 감았다. 치아가 살짝 드러나도록 입술을 열고 답답한 듯 혀를 내어 핥는다. 꿀이라도 바른 듯, 벌써 통통하게 부어오른 입술의 열감이 시각으로 전해졌다.

더 참지 못한 태경이 과육처럼 한 입 베어 물었다. 델 듯이 뜨거운 온도까지, 쉼 없이 내달렸다.

*

삐비비익, 띠릭.

집 안에 있으면 도통 듣지 못하는 소리였다. 누군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소음을 알람 삼아 예준은 느리게 눈을 떴다. 목까지 덮인 이불에 짙은 페로몬이 배어 있었다. 오히려 불쑥 나타난 태경 자체의 페로몬은 옅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실수했나?

예준은 빠르게 지난 기억을 더듬었다. 공교롭게도 필름이 끊기지 않았다. 바보처럼 집 비밀번호를 잊고, 남자에게 매달리고, 밀어내고, 다시 끌어안겨 키스한 것까지 모조리 기억했다.

…미동하지 않았으니 자는 척 이불을 뒤집어쓰면 그만이었다.

“예준 씨. 벌써 정오 지났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속을 관통했다. 그냥 집으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아직 남아 있는 건지 야속할 지경이다. 추태를 부렸으니 사과해야 마땅하지만, 도저히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예준은 내부가 몸서리치게 고요해지고 나서야 빠끔 얼굴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술 취해서 이상한 소리 한 거랑 늦잠 잔 거요.”

저벅저벅 걸어온 태경이 예준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는 당연한 듯 예준의 이마를 짚어 보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애써 담담한 태도를 가장한 예준이 그런 태경을 눈으로 훑었다. 새 셔츠와 바지, 얇은 코트까지. 어제와 분명 달라진 차림을 보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집에 갔다 왔어요?”

“네.”

“멀 텐데.”

“멀고 차도 막혔는데 출근은 해야 하잖아요.”

예준이 은근슬쩍 제 뒤통수를 긁었다.

“그럼 출근하시지….”

“매정하네. 배 맞춘 사이에.”

“…예?”

낯 뜨거운 말이지만 어젯밤만 떠올려 보아도 미친 듯 엉겨 붙고 뒹굴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유사 성행위나 다름없는 접촉은 키스의 한 부분이라고 쳐도, 이미 여러 번 질퍽하게 살을 맞댄 사이였다.

예준은 침착하게 마음을 정리하고 남자를 보았다. 추위 때문인지 남자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쩐지 눈을 떼지 못하고 사로잡혀 있는데 남자가 일순 시선을 툭 떨어뜨렸다.

“또 엉망으로 만들어 놨네. 오늘 날씨 추우니까 웬만하면 목 가릴 수 있는 옷으로 입어요.”

“…네.”

“아직 삼십 분 정도 시간 있는데 씻을래요?”

“가셔도 되는데.”

아무리 반지하라 할지라도 해가 중천이라 방 안은 환했다. 무엇도 감출 수 없는 처지였다. 자신이 자는 사이 남자가 집 구석구석을 살폈다고 생각하면 들이치는 현실감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예준이 부쩍 가라앉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사이 예준의 볼을 만지작거린 태경이 벽에 걸린 금메달을 가리켰다.

“실제로 처음 봐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예준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태경은 이 집에서 유일하게 귀한 것을 향해 다시 한번 눈짓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랑 하룻밤을 다 보내고. 이태경 출세했네.”

예준이 기시감에 눈을 크게 떴다.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저 또한 똑같은 말을 했었으니까. 그러나 굳이 남자가 알 필요까진 없는 이야기였다. 여러 번 입을 벙긋거린 예준은 곧 입을 다물었다. 찰나를 놓치지 않은 남자가 물었다.

“왜. 무슨 말 하려고 했는데.”

“별거 아니에요.”

대충 얼버무린 예준은 재빨리 욕실로 달아나 위기를 모면했다.

차가웠다 뜨겁기를 반복하는 물줄기가 거슬렸다. 뜨거운 물을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고 수압도 좋은 남자의 집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도 꼼꼼히 씻고 나오자 그는 회사 사람으로 추정되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주선영, 잔소리 좀 그만해. 곧 갈 테니까.”

방에 비하자면 지나치게 큰 체격이다. 남자가 다가와 아직 축축한 몸을 끌어안았다. 남자는 제 등 뒤로 팔을 뻗어 손목시계를 보는 듯했다. 아무래도 바쁜 것 같은데 왜 아직 여기 남아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예준은 태경이 저를 떼어 놓기 전에 스스로 물러났다. 머리카락을 닦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는데도 그는 통화가 끝날 때까지 집을 나서지 않았다.

“가서 이야기해.”

내내 듣기만 하던 남자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끊었다. 축축한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문지른 예준이 흘끗 눈치를 보았다.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자 남자가 다가와 낮은 자세로 시선을 맞추었다.

“속은 괜찮아요? 술 과했잖아, 어제.”

자연스럽게 손이 겹쳤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닦아 준 그는 제법 물기가 가시고 나서야 손을 떼어 냈다. 손이 떠나고도 저릿한 감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괜찮은 것 같아요.”

사실은 속이 좀 쓰렸다. 얼버무리는 게 버릇이라 그랬는데, 남자가 다시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같이 먹긴 좀 빠듯해서 해장할 만한 거 주문해 놨으니까 먹고 출근해요. 쉬었다가 느긋하게 하면 더 좋고.”

여유 있는 해장까진 사치였다. 이미 정오가 지났으니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도 목표한 배달비를 채우긴 어려울지 모른다. 과음 좀 했다고 이런 호사까지 누릴 필요는 없었다. 남자는 굳이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내밀었다.

“네 입 안에 있는 거 내가 다 먹어 치워서 갈증 심할 거야.”

남자의 말과 달리 예준의 입 속엔 군침이 가득했다. 혀를 섞고, 입 안 점막을 내어 주고, 흡입하듯 당기는 힘에 슬슬 끌려가다 보면 입 안은 마르는 대신 더 흠뻑 젖었다. 예준은 지난밤을 떠올리며 괜히 손등으로 입술을 감추었다.

남자가 큰 손으로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정말로 강아지가 된 기분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남자가 말했다.

“돌봐 줄 사람 없다는 말이 좀 신경 쓰여.”

그 말뿐만 아니라 제 꼴과 집까지 들여다본 후의 이야기였다.

“배 맞추는 것도 우리 할 일이긴 하지만….”

다정한 눈빛이 오히려 상처라면 믿어 줄까.

“곤란한 일 있으면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요.”

남자의 호의에 예준은 궁지로 몰린 기분이었다. 그저 모면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

바삐 배달을 끝내고 떡볶이집 옆 가게 아저씨를 못살게 굴었다. 복잡한 일에 엮이기 싫다던 아저씨는 연거푸 매달리자 결국 알파가 입원했다는 병원을 알려 주었다. 걸어서 십오 분 거리에 있는 종합 병원이었다. 예준은 가는 길에 꽃가게에 들러 위로용 꽃다발을 샀다. 꽃줄기 사이사이가 허전하긴 해도 구색을 갖추기엔 손색이 없었다.

병원 관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설마하니 험한 일까지야 당할까 싶었다. 아무리 간악한 열성 알파라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메가를 겁간하긴 어려울 터였다. 모욕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무릎이 닳도록 빌어서 해결만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할 작정이었다.

몇 호에 입원했는지도, 이름이 뭔지도 몰라 한참을 헤맸다. 예준은 겨우 내과 병동 간호사실을 찾았다.

“혹시 떡볶이 먹고 식중독으로 입원한 열성 알파… 몇 호실인지 알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신데요?”

“저는… 그 일과 관련된 사람인데.”

사정을 자세히 말할 수 없어 답답했다. 그러나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기 전에 간호사가 먼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알파라면 퇴원했어요.”

“네?”

“강제 퇴원이라고 해야 하나.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 정장 쫙 빼입은 남자들이 다짜고짜 찾아와선….”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라면 아무래도 조직원일 확률이 높았다. 그새 치문이 소문을 들었다면 저 모르게 수를 썼을 수도 있다.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갔을걸요? 식중독 유발한 음식이 떡볶이가 아니라는 것 같던데.”

애당초 떡볶이를 먹고 식중독에 걸렸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치문이 그 사실까지 알아낸 걸까. 경찰과 친한 조폭도 있기는 하지만 치문은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준이 의아한 얼굴로 서 있자, 수간호사가 다가와 간호사를 저지했다.

“그래도 나름 개인 정본데 그렇게 막 알려 줘서 되겠어요?”

“퇴원했는데요, 뭐. 있는 내내 우리 희롱하고 추태만 부렸잖아요. 그 알파.”

간호사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어깨를 떨었다. 그 정도 인성이라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예준은 괜히 미안한 마음에 서성이다가 병원을 빠져나왔다. 꽃다발은 쓸모없는 소비가 되어 버렸고, 저로 인해 촉발된 사태는 공교롭게도 타인의 손에 일단락되려는 와중이었다.

예준은 병원 입구에 서서 치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떠들썩한 형님들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제치문.”

―왜 성까지 붙여서 부르고 그래요. 무슨 일인데?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할 말? 무슨 말?

말끝이 뭉개지는 걸 보니 또 고기라도 씹고 있는 모양이었다. 딴청인지 알 수 없어 녀석이 순순히 불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몇 초간 음식을 씹어 삼킨 녀석이 물었다.

―형 술 마셨어?

“아니.”

―그런데 왜 주정뱅이처럼 뜬구름을 잡고 그래? 무슨 일 있어? 내가 지금 갈까?

목소리만으로는 치문이 상황을 지휘했다고 여기기 어려웠다. 거짓말에 능숙한 녀석이 아니기에 이 정도로 침착한 대응이라면 정말 모르는 일일 확률이 높았다. 예준이 습관적으로 부르튼 입술을 뜯었다. 치문 외에 떡볶이집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설마,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가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었다.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려던 예준이 불현듯 떠오르는 목소리를 곱씹었다.

‘돌봐 줄 사람 없다는 말이 좀 신경 쓰여.’

‘곤란한 일 있으면 어려워하지 말고 말해요.’

알파에게 괴롭힘당하는 일에만 익숙하지만, 이런 사태를 손쉽게 수습할 만한 사람 역시 다른 알파밖엔 없었다.

“일단 끊어 봐.”

―에이. 싱겁게.

말한 치문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 결국 먼저 종료 버튼을 누른 예준이 통화 목록에 남은 남자의 연락처를 찾아냈다. 남자는 수화음이 길게 이어지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예준 씨.

치문과 달리 태경이 있는 곳은 고요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했다. 예준은 손에 든 꽃다발을 꽉 쥐며 물었다.

“대표님. 지금 어디세요?”

―회사에 있어요.

안부나 용건은 오가지 않았다. 그는 아마 자신이 던질 말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기대하고 있을까. 그러나 안도와 별개로 예준의 속은 뜨겁게 타들어 갔다. 적어도 그에게서만큼은 알파의 과시 따위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예준은 강남으로 향하기 위하여 건널목을 건넜다.

“이야기 좀 해요.”

―곧 퇴근하니까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아뇨. 그냥 제가 가면 돼요.”

올곧이 고마워할 수 없는 미운 마음은 그간 차곡차곡 쌓인 시간의 결과였다. 알파 손에 좌지우지되는 형편이 지겨웠다. 그는 선을 넘었다. 남자가 내디딘 첫발의 의미를 예준이 이해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로변에 잠시간 서 있었는데도 손이 꽁꽁 얼었다. 예준은 마침 다가오는 버스를 보며 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들이 가득 들어찼다. 겨우 버스를 붙잡아 오르는데 남자가 말했다.

―회사 앞에서 기다릴게. 조심히 와요.

동요 한 점 없는 목소리였다. 예준은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

오후 열 시가 넘었지만 빼곡한 빌딩 숲엔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예준은 잘 정돈된 보도블록을 따라 걸었다. 남자는 회사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도톰한 코트 차림이었으나 속에 재킷은 갖춰 입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코트만 바로 걸치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예준이 남자를 발견했을 때, 태경 또한 예준의 기척을 바로 발견하고 손을 들어 보였다. 담배를 비벼 끈 그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다가왔다. 바로 옆에는 대로가, 이따금 지나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빌딩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서웠다. 그런데도 예준은 보도블록 한복판에 서서 남자를 맞이했다.

따뜻한 버스에서 내려 곧바로 칼바람을 맞은 탓에 두 볼이 따가웠다. 남자는 상기된 뺨으로 손을 뻗으려고 했다. 예준이 고개를 비틀어 그 손을 만류했다.

“그 알파, 대표님이 손쓰신 거예요?”

태경이 허탈한 듯 손을 거두었다.

“아직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타이르는 듯한 어투였지만, 예준에게는 지금 남자의 감정까지 헤아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구겨진 꽃다발 포장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시선을 내려 손에 들린 꽃다발을 주시했다.

“내가 한 거 맞아. 추워 보이는데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할까?”

남자를 따라가면 또 무엇에 현혹될지 알 수 없었다. 멋진 사람들이 있는 곳, 다정한 눈빛, 따뜻한 차, 그의 흔적이 쌓인 사무실은 마음을 누그러뜨릴 게 분명했다. 사람의 손길에 익숙하지 않은 예준은 그런 것들에 약했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상황에 굳이 나서서 발을 들일 이유는 없었다.

“아뇨. 그냥 용건만 말하고 갈게요.”

말한 예준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끈질길 정도로 집요하게 꽃다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깊게 패고 두 눈이 노골적으로 가라앉았다.

“이런 식으로 해결하려 들까 봐 내가 먼저 손쓴 거예요. 다행이네. 그 알파는 못 만났을 테니까.”

그가 꽃다발을 가져가 빈약한 모양새를 들여다보았다.

“잘못한 것도 없이 이런 거 들고 사과할 필요 없어.”

“그런 건 상관없어요.”

“예준 씨.”

“이건 제 일이에요. 억울해도 제가 해결해야 맞아요. 대표님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다는 말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우성 알파의 권력이 아니었다면 지지부진하게 아주머니께 민폐만 끼치며 시간을 낭비했으리란 사실은 예준이 더 잘 아는 바였다. 알파가 거짓으로 고소나 합의를 들먹이지 않았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어쩌면 대놓고 잠자리를 요구했을지도, 그 끔찍한 행위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실, 예준은 깊이 안도했다. 병원에서 알파를 만나지 못한 게 얼마나 대단한 천운인지 모르지 않았다. 선량한 아주머니가 더는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었고, 구질구질한 소란 없이 사태가 일단락된 것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다만, 그가 섹스 파트너에 불과한 자신에게 과한 관심을 두는 게 부담스러웠다. 하나를 받으면 그다음엔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다.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파트너 관계에서 상대방의 호의에 익숙해지는 일만큼은 경계해야 마땅했다.

상대가 우성 알파라면 더더욱.

“좀 당황스러웠어요.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저도 모르게 일이 해결된다는 게.”

“예준 씨도 알겠지만, 이런 일 처리하는 거 나한테는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내가 나서서 그쪽 상황이 나아진다면 두 번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라 한 것뿐이야.”

친절한 설명에도 복잡한 머릿속은 쉬이 정리되지 않았다. 예준은 저도 모르는 사이 멍울이 맺히도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예준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이렇게 해명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목덜미에 열감이 번졌다. 그와의 격차가 너무 선명해 부끄러운 기분마저 드는 지경이라니. 순수한 호의에 지레 겁을 먹고 과한 반응을 보인 격이라면 창피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예준이 알기로는, 어떤 알파도 오메가를 위해 이런 일을 자처하고 나서지 않았다.

“그래도.”

“그래도?”

예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앞으로는 제 일에 개입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피차 선 지키는 게 깔끔하잖아요. 대표님도 당연히 그런 걸 원하시는 줄 알았어요.”

“원하지.”

그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답했다. 번거로움 없이 성욕을 해결할 수 있는 관계가 섹스 파트너란 것 정도는 별다른 경험 없는 예준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태경의 손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꽃다발을 쥔 손에 힘을 준 탓이었다.

“피곤하다고 호텔 방도 내어 주시고 밥도 사 주시고 그 정도는 누구에게나 하시는 걸 테니까 감사히 생각할게요. 그래도 제 어려움은 제가 해결해야 맞아요. 그걸로 약속 어기는 일 없도록 신경 쓸 거고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

아마도 관계의 종말을 알리는 사람은 남자 쪽일 것이다. 예준은 아직도 발정기가 곤란한 상황이었으므로, 약간의 균열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관계를 깨고 싶지는 않았다. 그와의 잠자리는 훌륭하고 그의 친절은 기꺼웠다. 다시는 그와 같은 알파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곧 러트라고 하셨죠. 집에서 보내실지 호텔에서 보내실지 모르겠지만 주소 보내 주시면 바로 갈게요.”

러트를 들먹인 건 조금 절박하게 보였을지도. 어차피 물러날 곳 없는 인생이었다. 예준은 내내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 남자를 보았다. 웃음기 없는 눈빛이 매서웠다. 남자는 그 차가움에 비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주 주말로 정하죠. 그날은 예준 씨가 직접 우리 집에 와 줬으면 좋겠어요.”

형님들도 러트를 겪어 대강 알기는 하지만, 우성 알파인 태경은 그들과 차원이 다를 터였다. 형님들은 힘이 무척 세지고 발정 난 개처럼 헐떡거렸다. 그는 어떨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난 러트 때 통제가 안 되는데 괜찮겠어요?’

문득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성욕이 통제가 안 된다는 건지, 그만큼 저를 아프게 만든다는 건지,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잘 모른다고 해도 우성 알파의 페로몬만 있다면 성기를 받는 일만큼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러트임을 고려하더라도 기껏해야 기절하는 정도일 터였다. 너무 아픈 바에는 차라리 기절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차 보낼 테니까 연락하면 집 앞에서 기다리면 돼요.”

예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내려다보며 여지없이 얼어 버린 두 손을 말아 쥐었다. 가슴속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이 응어리는 무엇일까. 남자에게 털어놓고도 아무것도 해소되지 않은 듯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선언한 대로 용건을 끝냈음에도 예준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시선을 끌었다.

“깊이 생각 안 하고 한 일이에요.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

눈빛으로 수긍하자 그가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껄끄러운 불순물이 남았지만 예준은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가오는 남자의 손길을 피하지도 않았다. 차가운 뺨 위로 놀랍도록 뜨거운 손이 닿았다. 뭐라 말할 듯하던 남자는 어떤 달콤한 회유도 없이 이내 손을 떼어 냈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태경이 대로변을 가리켰다.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은 남자는 정차한 택시 쪽으로 예준을 이끌었다.

“그 알파가 다시 예준 씨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피해 본 아주머니도 적절한 보상을 받을 테고. 그건 확실히 해 두고 싶어.”

고마운 일이었다. 그가 우성 알파인 데다 자신의 섹스 파트너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감사했습니다.”

“이건 내가 버릴게요.”

그가 꽃다발을 흔들어 보였다. 예쁘지만 주인을 찾지 못했으니 쓰레기에 불과했다. 예준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당연한 듯 지갑을 꺼내 드는 태경을 저지했다.

“오늘은 제 돈 내고 타고 갈게요.”

그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은 아니어서일 터였다.

“예준 씨가 나 만난 후에 자기 돈 내고 집에 갈 일은 없을 거예요. 그게 무슨 일이든, 무슨 용건이든.”

“그래도.”

“타협 못 하는 문제니까 이 정도는 편히 받아요.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

일갈한 남자가 택시비를 지불했다. 썩 떳떳하지 않았지만 지나친 실랑이는 택시 기사와 그를 번거롭게 만들 것이다. 택시에 오른 예준은 남자와 눈만 맞춘 뒤 창문을 닫았다. 택시는 곧바로 출발했다. 뒤돌아보자 채 몇 발 딛기도 전에 담배를 꺼내 드는 그가 보였다.

필터를 깊게 빨아들이고 내뱉는 얼굴이 저를 마주할 때와 달리 예민하게 구겨져 있었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는 남자는 분명 기분이 상했다. 택시비를 두고 벌인 언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

점심시간에 맞추어 콜이 들어왔다. 익숙한 떡볶이집 상호가 화면에 뜨자 예준은 반가운 얼굴로 스쿠터를 몰았다. 다시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가게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마침, 떡볶이 포장을 마무리한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쳐 꾸벅 인사했다. 그녀가 환히 웃으며 손짓했다.

“들었어?”

“뭘요?”

“그놈 이사한 거.”

거기까진 미처 듣지 못했다.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고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걸 짐작했을 뿐이다. 남자와 만난 이후, 아주머니가 가게 문을 연 건 꼬박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내내 마음을 졸였으나 남자의 말처럼 그 알파가 아주머니나 자신을 귀찮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도움에 아주머니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아주머니는 기자들의 집요한 연락을 피하려고 가게 전화와 핸드폰을 모두 꺼 두었다. 예준은 한동안 그녀와 연락할 수 없었지만, 남자가 부리는 사람들이 그녀와 접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먼저 전화해 예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사람은 아주머니였다. 그녀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예준이 네가 해결했다며?’였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구구절절 설명하고 나서면 남자와의 관계를 해명해야 할 것 같아 예준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다행이에요. 별 탈 없이 끝나서.”

“다 예준이 덕분이지.”

애초에 예준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 일이라곤 남자에게 사정을 토로한 것밖에는 없었다.

“그래. 어디 보자. 명함이….”

아주머니가 조끼 주머니를 뒤져 명함을 내밀었다. 예준은 익숙한 검은 색상의 명함을 보고 입술을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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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보냈던 사람들은 부하들이었나 보더라. 아주 훤칠하니 잘생겨서 그런지 주변이 떠들썩했어. 난 몰랐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알파라고 수군거리더라고. 그것도 귀한 우성 알파라고.”

예준이 눈을 크게 떴다. 그렇다는 말은.

“직접 왔었다고요?”

“그렇다니까? 어제 와서 명함 주고 일 잘 마무리됐다고 알려 주고 갔어.”

분명 선을 지키기로 하지 않았나. 예준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사람을 시켰다고 해도 과한 일이라고 생각할 판에 직접 들르기까지 했다니.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자 아주머니가 씩 웃으며 물었다.

“대체 누구야?”

아주머니 앞에서 섹스 파트너란 단어를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예준은 에둘러 말했다.

“우연히 만난 사람인데….”

“사람 하나 쉽게 치워 버릴 수 있을 정도면 꽤 이게 되는 사람인가 봐?”

아주머니가 엄지와 검지를 이어 원을 만들었다. 정신 사납게 손을 흔들어 대는 그녀를 보며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성 알파에다 좋은 집안의 도련님, 번듯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이니, 그런 사람에겐 열성 알파 하나 치워 버리는 일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예준이를 알까. 예준이는 또 어떻게 그런 알파를 다 알고?”

머쓱해하는 예준을 보며 아주머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몹시 궁금해하는 눈치였기에 예준은 괜히 입이 말랐다. 몇 번 형님들과 마주친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녀에게도 태경은 이전의 알파들과 완벽히 다른 이미지로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그냥, 뭐….”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하자 아주머니가 먼저 화제를 돌렸다.

“알았어. 꼬치꼬치 그만 캐물을게. 배달 가야지.”

“네. 이리 주세요.”

따뜻하게 배달하려면 시간이 생명이었다. 예준은 해명하는 대신 얼른 떡볶이를 받아 들었다. 아주머니는 더 묻기보다 마른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무튼 고맙다고 한 번 더 전해 줘.”

“네. 아주머니, 또 올게요.”

“저녁에 와서 떡볶이 가져가든지.”

“괜찮아요. 어차피 앞으론 매일매일 바닥날 텐데요.”

정직한 가게가 이전의 명성을 되찾긴 어렵지 않을 터였다. 저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자 아주머니가 인자한 미소로 화답했다. 예준은 바쁘게 가게를 나서 스쿠터에 올랐다.

사실 예준의 속은 제법 시끄러웠다. 제대로 경고했다고 생각했다. 알파와는 분명한 목적대로 몸만 섞는 편이 옳으니까. 그 역시 자신 같은 오메가와 사적으로 어울려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왜 자꾸 선을 넘는 걸까. 그럴수록 예준은 오히려 오메가인 자신의 처지에 회의감만 느낄 뿐이었다. 문제 해결 능력이 없는 오메가의 무능함을 눈앞에 두고, 그가 정말로 알파의 능력을 과시한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겪은 바로 그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예준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순수한 동정심이라면 마음이 편해져야 마땅한데, 막상 그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말을 듣자 체한 듯 속이 답답해졌다. 파트너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예상처럼 쿨하지 않았다. 이런 것인 줄 알았다면 남자의 제안을 그리 쉽게 받아들이진 않았을 텐데.

예준은 홀가분하지 못한 기분으로 헬멧을 썼다. 상념은 지우고 서둘러 몸을 움직이려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예준은 떡볶이를 싣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가장 먼저 낯선 번호가 눈에 띄었다.

[예준아 잘 지내지 저번에 돈 보내 준 거 고마웠다 그런데 혹시 여윳돈 있으면 조금만 더 보내 줄 수 있을까 이번에 좋은 건수가 있어 여기 500만 넣으면 다섯 배, 열 배로 불릴 수 있을 거 같아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면 500만 아래 계좌로 넣어 줄래? OO은행 오한수 xxx-xxxx-xxxx-xx]

얼음물에 처박힌 것처럼 온몸에 저릿한 감각이 퍼졌다. 이제 겨우 숨 좀 쉬나 했는데 순식간에 진창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예준은 핸드폰을 감추듯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남자에게 받은 합의금이 아직 수중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모조리 사채 이자와 원금을 갚는 데 써도 부족한 형편인데, 또 돈을 보내 달란 아버지의 연락이라니.

다섯 배, 열 배. 그 말이 가장 무서웠다. 노름판을 전전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히트 사이클 전에 부쳐 준 돈이 백만 원이었다. 이번에 오백만 원을 입금해 주고 나면 다음엔 또 얼마를 요구할지 모를 일이었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가 닥쳐와 어깨를 짓누른다. 무시하려던 예준은, 그럼에도 들끓는 동정심을 어찌하지 못했다. 사람답지 못한 짓을 해도 사람답지 못한 형편으로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건 늘 괴로웠다.

배달을 마친 예준은 결국 핸드폰을 다시 꺼내 들었다.

[아빠 어디예요?]

그렇지 않아도 형님들이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돈 얘기보단 안부를 먼저 묻고 싶었다.

[돈은 되겠어?]

답장은 무심했다. 예준은 씁쓸하게 찬 손을 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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