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Pillow Talk
한때는 자신 또한 연민의 대상이었다. 다섯 살에 쓰레기장에 버려진 보잘것없는 아이. 유일한 혈육이자 보호자는 창부였던 베타 여자였고,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을 버린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떤 사연인지는 알지 못했다. 너무 어렸던 데다 꼬박 다섯 해를 골방 같은 제한된 공간에서만 살았으니까.
살아생전, 이따금 고약한 냄새가 나는 남자들이 여자의 집을 드나들었다. 행위는 짧고 바빴으나 벌이는 넉넉지 않았다. 굶고 사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여자는 어느 날, 아이를 배불리 먹인 뒤 낯선 곳으로 데리고 갔다.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인 무덤들. 남자들의 고약한 냄새가 쓰레기장에서 일하기 때문이란 건 그때 알았다. 여자가 죽었을 때, 시신을 발견한 남자가 눈을 치떴으니 안면은 있었을 터였다. 태경이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눈을 마주한 곳은 쓰레기장 한편에 있던 컨테이너 속이었고 그때는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공포와 추위, 무시, 굶주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견디던 그때,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두툼하고 큰 손. 쓰레기장 인부들과는 달리 좋은 냄새가 나는 사내였다. 남다른 풍채와 인자한 미소를 마주한 다섯 살의 태경은 그 사내가 자신의 동아줄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살려 주세요….’
멍하니 말을 내뱉자 사내는 마른 몸을 번쩍 들어 안았다.
‘안전한 곳으로 가자.’
군더더기 없는 말이기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곧장 병원으로 가 건강에 따로 문제는 없다는 확답을 얻었다. 며칠 태경을 돌보던 사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입양을 결정했다. 완벽히 안전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태경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울었다. 지독한 외로움이 끝났다. 안도한 이후부터는 완벽히 과잉된 삶을 살았다. 무엇도 부족한 것이 없었으므로.
어둠이 옅어지고 탄탄대로의 인생에는 볕만 들었다. 그러나 겹겹이 쌓인 양지 아래에는 고통의 흔적이 깔려 있었다. 그는 층고가 높은 마음과 예민한 감각을 지녔다. 가여운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정은 때때로 걸림돌이 되었다.
이석준 회장이 식사 중인 태경을 흘겨보았다. 서울 근교의 한 요정이었다. 저녁이나 먹자는 아버지의 말에 동의한 태경은 그곳에서 반갑지 않은 사람을 대면했다. 박중의 의원. 재개발 사업이 성사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의원이기에 사적인 만남은 접대로 불거질 소지가 다분했다.
이렇다 할 치부 하나 없는 건설사가 어딨겠냐마는, 이석준 회장은 어느 시점부터 태경에게 명성의 치부를 드러내길 꺼리지 않았다. 명성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명성의 치부 또한 떠안는다는 의미이므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일 터였다. 줄을 이은 접대 자리에선 구식으로 현금이 오가지는 않지만, 모인 자들의 손엔 그들에게 유리한 카드와 불리한 카드가 동시에 쥐어져 있었다. 요정을 찾은 박 의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D 기획 여식이 약혼했다지요?”
정갈하게 무친 나물을 집던 태경이 움찔했다. D 기획 여식이라면 오여진이 틀림없었다. 제 아버지가 직접 꺼낸 이야기이므로 피할 도리는 없었다. 그날로부터 2주는 흘렀나. 언제 맞선을 보고 언제 약혼까지 결정하게 되었을까. 여진의 추진력이라면 어렵지 않은 일이겠으나 태경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일사천리라더군요. 그러고 보니 이 대표랑 맞선 보지 않았었나?”
박 의원이 맞장구치며 젓가락으로 떡갈비를 집었다. 태경이 웃으며 답했다.
“인연이 아니었나 보죠.”
“모자랄 것 없는 여식들만 불러 모았는데 뭐가 그리 까다로운지….”
이 회장이 혀끝을 차며 말을 이었다. 우성 알파라면 그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 회장은 천연덕스럽게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요즘은 재벌가에서도 연애로 곧잘 만나곤 하던데요?”
“한쪽이 너무 기울면 안 하느니만 못하죠.”
안 하는, 그러니까 비혼은 선택지에 없었다. 장차 명성건설을 이끌어야 할 태경의 옆자리는 번듯한 집안의 올곧은 여자, 특히 알파를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알파와 알파가 만나야 알파를 낳을 확률이 높아지니 당연한 일이었다. 진실한 사랑이나 올곧은 결혼 생활을 믿기에는 가혹한 세상이었다. 일말의 기대조차 없는 일이라면 진심은 무의미했다.
거기다가, 지금 태경이 떠올릴 수 있는 상대는 속궁합이 잘 맞는 오메가 겨우 하나뿐이었다.
태경이 물을 들이켜며 주제를 돌렸다. 아버지의 따가운 눈총을 무시한 채, 제법 진지하게 미간을 찌푸린 그가 박 의원을 주시했다. 박 의원을 통해 또 어떤 부잣집 아가씨를 들이밀 작정이라면 어떻게든 훼방을 놓아야 했다.
“그건 내 선에서 처리 가능합니다. 이 대표까지 신경 쓸 것 없어요. 그보다 이 대표, 혹시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게 아니고서야 그렇게 잘난 아가씨들을 죄다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순진한 질문이 아닌, 치부를 들추려는 시도였다. 지저분한 추문 때문에 사교계에서 매장당한 기업의 자식들이 한둘이던가. 박 의원은 이 회장이 수십 년간 연을 쌓아 온 사업 상대와는 결이 다른 사람이었다. 태경은 내내 고여 있던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가볍게 한 모금 들이켠 그가 답했다.
“좋은 소식은 박 의원님한테 가장 먼저 들려드려야겠군요. 이렇게 제 결혼에 관심이 많으신 줄 몰랐습니다.”
“허허. 영 아니올시다면 내 쪽에서 중매 한번 서 보려고 이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제 조카아이가 혼기가 꽉 찼는데 이번 기회에….”
완벽한 결탁엔 사돈지간이 되는 일만 한 게 없다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박 의원이 패를 들이밀었으나 이 회장은 농담에 반응하듯 큰 소리로 웃었다.
“박 의원님 조카아이라뇨. 제 아들 녀석한테 너무 과분한걸요.”
“과분하다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호탕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내들의 이마에 소리 없이 핏발이 섰다. 언제 보아도 진풍경이었다. 호방한 가면 아래에 누군가는 지독한 자격지심을, 누군가는 이를 데 없는 오만방자함을 감춘 형국이었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관계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명성의 뜻이라면 태경은 그 뜻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제 손에 들어온 명성은 다를 것이다. 차차 민낯을 드러내는 아버지 앞에서 태경은 도리어 발톱을 감추었다. 그는 조용히 빈 잔에 술을 따랐다. 갑갑함에 습관적으로 셔츠 상단으로 손을 가져가려던 그가 대신 안주머니에 든 담배를 더듬었다.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특유의 다정한 눈빛에 사내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태경이 방을 나서자 박 의원의 체통 없는 외모 칭찬이 문밖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식기를 나르던 여자들이 태경과 수줍게 눈을 맞추며 물러났다. 요정은 시간이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 한옥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시간도 그 옛날에 머문 것처럼 고루한 곳이었다. 어둑한 정원으로 나가는 데까지만 해도 모든 직원이 시종처럼 머리를 조아리고 있지 않은가.
비단잉어가 유영하는 작은 연못 앞에서 태경은 담배를 꺼내 들었다. 훈기가 넘치는 내부의 온도와 달리, 이런 곳에서는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불을 붙이고 깊게 필터를 빤 뒤 갑갑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때였다. 주머니 속 진동을 감지한 태경이 무심하게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에 익숙한 이름이 떠 있었다.
[김예준]
자그마치 2주 만에 온 연락이었다. 제법 애간장을 태우는데, 정작 그 아이에겐 별다른 의도가 없으리라 생각하면 입 안이 썼다. 태경은 잴 것 없이 전화를 받았다. 그가 반가운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울분에 찬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윤도하가 찾아오면 연락하라고 하셨죠.
윤도하. 잊고 있던 이름이 신경을 긁는다. 예준답지 않은 말투에 미간을 좁힌 태경이 말했다.
“어딘데, 지금.”
―집 아래 공원이요. ○○공원이라고 치면 나올 거예요.
경찰서가 있던 동네였다. 굳이 자초지종을 물을 필요도 없었다. 윤도하가 자신과 잠자리한 오메가를 건드린 게 처음이 아니기에 미리 경고한 것이었다. 잇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태경이 담배를 비벼 껐다.
“다쳤어요?”
―아뇨. 제가 먼저 발견했어요.
“윤도하를?”
―네. 지금 스쿠터 옆에 서 있는데….
빠르게 걸음을 옮긴 그는 등 뒤편을 환하게 밝힌 불빛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직 자리는 파하지 않았고 두 사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다만, 태경은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고민 없이 그 퀴퀴한 방이 아닌 야밤의 공원을 고를 것이다.
“전화 끊지 말아요.”
요정 앞까지 단숨에 걸어 나온 그가 마침 도로로 들어서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핸드폰 너머로 코끝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운 건지, 울고 난 것인지, 감기에 걸린 건지, 단순히 추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적을 감싼 숨소리엔 계속해서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러라고 잘 먹이고 잘 재워 보낸 것이 아니다. 담담한 눈빛과 달리, 조바심이 일었다.
*
끊을까요? 하고 몇 번이나 물었던 예준은 그러나 전화를 끊지 않았다. 공원 입구에 도착한 태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벤치에 웅크린 인영을 발견했다. 구둣발 소리에 고개를 든 예준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윤도하는?”
“저기.”
공원 반대편에 예준의 것으로 보이는 스쿠터가 있었다. 윤도하는 그 바로 옆에 익숙한 덩치 하나와 함께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중이었다.
“배달하고 오니까,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고자질이 어색한 듯 예준은 사이사이 말을 멈추었다. 서늘한 공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자 목소리의 축축함은 더 선명했다. 직감일 뿐이겠지만, 윤도하가 원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좀 치워 주세요. 귀찮으니까….”
태경이 답하지 않자 예준이 한 번 더 말을 덧붙였다. 또 잠을 자지 못했는지 눈가엔 피로가 가득했고 호수처럼 고요한 분위기엔 불필요한 파동이 일고 있었다. 태경은 예준의 차게 식은 뺨을 어루만졌다. 이마까지 건드리자 머리를 뒤로 빼긴 했지만 끝까지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열은 없네.”
말간 눈동자가 그제야 위를 향했다. 태경은 무릎을 굽혀 예준과 시선을 맞추었다.
“무슨 일인지는 나중에 물을게요. 우선 저것부터 처리하고.”
윤도하를 가리키자 예준이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태경은 바로 몸을 일으켜 윤도하 무리에게 다가갔다. 불량하게 담배를 툭 던진 덩치가 그런 태경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경찰서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었다. 윤도하와 가장 친한 친구로 질이 나쁜 녀석이었다. 부수적인 것들로 사람을 판단하는 편은 아니지만, 흔히 말하는 부잣집 도련님에 가까운 윤도하가 그런 녀석과 어울리는 것이 늘 의아했다. 따지자면 이 회장과 이석희, 조 비서가 의아하게 생각했다. 중학교 때부터 이어진 인연이기에 고등학교는 부러 멀리 보냈는데도 사고를 칠 땐 항상 저 덩치와 함께였다.
예준 대신 등장하자 윤도하는 퍽 배알이 꼴리는 기색이었다. 덩치를 따라 담배를 던지고 일어선 윤도하가 턱을 치들었다. 동시에 태경은 자신을 따라 공원 안쪽으로 들어오는 예준을 발견했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다섯 걸음쯤 거리를 두고 선 눈빛에 발갛게 열이 올라 있었다.
대치하듯 선 두 고등학생을 바라보며 태경은 일언반구 없이 전화를 걸었다.
“조 비서님. 좀 와주셔야겠습니다. 도하 문제로요. 네.”
이 회장님은 모르게, 라는 말은 따로 덧붙이지 않았다. 윤도하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이 회장이기 때문이었다.
요정에서와 달리 거리낌 없이 셔츠 단추를 연 태경이 허리를 짚고 섰다. 늘 그랬듯이, 상황을 정리하고 돌려보내면 그만인 문제인데 근원을 알 수 없는 열이 치밀기 시작했다. 태경은 피가 빠르게 돌아 저릿한 손을 쥐었다 폈다.
“네가 또 왜 여깄어.”
윤도하의 불량한 눈빛, 키보다는 근육질이 더 눈에 띄는 윤도하 옆 덩치, 조잡하고 휑한 공원 풍경이나 늦가을치고는 퍽 매서운 추위, 그 모두가 원인은 아니었다.
“네가 불렀냐?”
윤도하가 자신 너머의 예준을 향해 말을 던졌을 때, 태경은 그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태경은 씩씩거리며 예준에게 다가가려는 녀석을 부드럽게 저지했다. 어깨를 붙잡아 원래 자리로 돌려놓자, 윤도하의 눈이 중간 없이 휘돌았다.
“씨발! 어딜 만져!”
권력관계에서 따지자면 가장 무력한 것은 물리적인 폭력이었다. 한 인간을 굴복시키는 것은 무력이 아니라 형질, 재력,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이었다. 태경은 원하는 형질을 가지지 못한 어린 사촌의 자격지심을 무력 없이도 건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굴복시키고자 마음먹는다면, 고작 자격지심에 상처 하나 입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으리란 사실을 윤도하는 모른다.
저 애송이. 철없는 부잣집 도련님 운동화에 짓밟혀 주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예준 같은 오메가들뿐이었다. 발현 전의 예준과는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을 녀석이 기고만장한 데엔 베타라는 어중간한 허울만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모른다면 올라설 수 없고, 애당초 베타가 포식자의 자리에 오르는 건 불가능했다. 세상에는 그 한계를 받아들인 예준 같은 사람들이 있고 받아들이지 못한 윤도하 같은 인간들이 있었다.
“형이 동생 좀 만지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차가운 어투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정을 유지하는 태경 덕분에 날뛰는 윤도하에 비하여 상황은 고조되지 못했다. 금세 흥미를 잃은 덩치가 속이 텅 빈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멨다.
“빠져 줄까?”
태경에게 시선을 고정한 윤도하는 답하지 않았다. 씨발, 욕설과 함께 덩치는 공원의 담을 넘어 자리를 떴다.
덩치가 사라지자 예준이 태경 뒤쪽에 붙었다. 페로몬을 더 가까이 감지한 태경이 모로 서 예준과 눈을 맞추었다. 더 다가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귓가에 속삭이는데 순간, 다정한 모습을 지켜보던 윤도하가 달려와 태경의 팔뚝을 붙잡았다.
퍽-!
접촉을 저지하고 주먹으로 턱을 가격했다. 강하게 내리꽂힌 주먹 탓에 태경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빠각, 살벌한 파열음이었다. 입 안이 터지고 입술에 피가 맺혔다. 피를 닦아 낸 태경이 윤도하를 보았다.
“도하야.”
“만지지 말라고!”
어린애처럼 악을 쓰고 발을 구른다. 과한 반응에 태경의 눈이 흔들렸다. 알파를 향한 자격지심이라기엔 이제껏 보여 준 모습과 비교해 지나친 행동이었다. 하필이면 예준을 반쯤 끌어안고 있을 때 그런 걸 우연이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애초에 윤도하가 한 번 건드렸던 오메가에게 다시 관심을 두는 것도 처음이었다.
“하….”
태경이 기가 막힌 듯 헛웃음 쳤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윤도하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예준을 응시했다. 소년처럼 어수룩한 얼굴 위로 깃든 지친 기색마저 무지의 색채 같다. 가로등도 드문드문 있는 어둑한 공원임에도 감추어지지 않는 미모였다. 저 또한 여러 번 애간장이 녹지 않았던가. 자극에 민감한 미성년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터였다.
이러다 한 대 더 맞기라도 하면 예준까지 다칠 수 있었다. 태경이 의식적으로 예준의 팔꿈치를 붙잡아 더 뒤쪽에 서게 했다. 의도치 않게 여린 팔을 어루만지자 윤도하가 이번에도 여지없이 몸을 날려 달려들었다.
빠각-!
악 소리와 함께 또 한 번 파열음이 들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태경에게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태경은 제 팔을 지지대 삼아 붙잡은 채 길게 다리를 뻗은 예준을 바라보았다. 190센티미터에 달하는 자신의 키를 위협하는 높이. 시선과 비슷한 곳에 날이 바로 선 운동화가 떠 있었다.
예준의 옆차기에 머리를 맞은 윤도하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악을 쓰며 일어나지 못하는 녀석을 뒤로한 채 태경은 제자리를 찾는 긴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힘은 예전에 미치지 못할 테지만 자세만큼은 완벽했다. 입술에 난 상처가 아릿하게 아파져 오는데도 입을 떼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실력 안 죽었는데.”
씩 웃으며 속삭였다. 찬사였으나 예준은 의외로 기뻐하지 않았다. 기술이 완전히 먹혀들었음에도, 윤도하를 주시하는 눈빛은 오히려 서늘한 데다 어딘가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성취감에 도취하긴커녕 끝내 입을 틀어막고 눈만 껌뻑인다. 혼란이 스민 말간 얼굴을 보자 태경의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
발이 정확히 꽂혀 들어갈지 예상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발현하지 않았다면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을 실력일 텐데. 잃은 것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미소를 잠재운 태경이 예준을 이끌어 근처 벤치에 앉혔다.
“제대로 물리쳤으니까 그쯤 해 두는 게 좋겠어.”
무력하게 따르는 얼굴은 멍해 보였다. 온갖 상념이 뒤섞여 태경의 몸에선 열이 펄펄 끓었다. 재킷을 벗어 예준에게 덮어 준 태경은 여태 나뒹구는 윤도하에게 다가가 뒤채는 몸을 붙잡았다.
“엄살 그만 떨고 정신 차려.”
“…씨발! 저 새끼가!”
세상에는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 법이다. 언어를 배워도 그것을 적확하게 써먹는 사람은 드물었다. 속에 품은 응어리를 설득하지 못하는 윤도하도 가엾기는 마찬가지였다. 태경은 그새 멍이 든 윤도하의 목을 거세게 틀어쥐었다.
“하지 말라고 했다. 다음엔 경고로 안 끝날 거야.”
“씹….”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스스로 해결하는 법을 배워. 그래야 너한테 주어진 자리라도 지키지.”
마침, 헤드라이트 불빛이 가까워졌다. 눈을 부라리며 욕을 지껄이는 윤도하를 태경은 집요하게 주시했다. 선을 분명히 긋겠다는 의도였지만 그 기저에는 분명 남자 대 남자로의 경계심이 녹아 있었다.
“너는 쟤 만족 못 시켜.”
명백히 침대 위에서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태경이 목소리를 낮추어 덧붙였다.
“안 될 싸움에 힘 빼지 마라.”
미성년자인 사촌 녀석과 경쟁이라니 가당치 않았다. 느긋하게 어깨를 두드리자 말귀를 알아먹은 녀석이 패악을 이어 갔다. 내리꽂히는 주먹을 가뿐히 저지한 태경이 몸을 일으켰다. 시기적절하게 대로변에 차를 세운 조 비서가 공원 안으로 뛰어왔다. 그날, 경찰서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다. 태경이 하룻강아지의 주먹에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 빼고는.
“외출 금지라도 시키세요. 이러다 더 큰 사고 치면 골치 아파집니다.”
조 비서를 향해 말한 태경이 얼얼한 턱을 쓰다듬었다. 꾸벅 머리를 조아린 조 비서가 경호원과 함께 윤도하를 일으켜 세웠다. 경호원에게 결박당한 채 차로 끌려가던 윤도하가 연거푸 뒤를 돌아보았다. 예준과 태경을 동시에 노려보는 눈매가 매서웠다.
자연히 조 비서의 시선도 예준에게 향했다. 그 또한 같은 오메가를 두 번 발견해서 좋은 것이 없었다. 그것도 명성 집안의 사촌 형제와 동시에 얽힌 오메가라면.
조 비서의 눈에 비친 의아함을 상쇄하기 위해 벤치로 향한 태경이 덧붙였다.
“이쪽은 내가 해결할 테니까, 그쪽이나 잘 부탁합니다.”
태경이 손으로 예준의 고개를 틀어 가리었다. 얼굴의 절반을 한 번에 감싸는 손이 바깥 날씨와 달리 뜨끈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인사한 조 비서가 공원을 나섰다. 차의 시동 음이 들리고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태경은 예준의 뒤통수까지 부드럽게 매만졌다.
“괜찮아요?”
몸을 낮춰 다시 눈을 맞추었다. 가로등 아래 비친 예준의 눈동자엔 미끄덩한 흰 점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아직도 축축한 것이 신경 쓰여 눈가를 더듬으려던 찰나였다.
“…안 괜찮아 보여요.”
예준이 태경의 턱을 더듬으며 말했다.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면 멍이 든 모양이었다. 이어 입꼬리로 향한 손이 아랫입술에 닿았다. 엄지로 도장을 찍듯 누른 예준이 묻어난 피를 보여 주었다.
“아직도 피 나고….”
실없이 웃자 입술과 입 안이 찢어졌음을 여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입술을 훔친 태경이 답했다.
“예준 씨가 막아 줘서 이 정도인 거지. 제대로 당할 뻔했어.”
그 말에 손을 거둔 예준이 괜스레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감언이설로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도록 종용할 수도 있겠지만 태경은 그저 조용히 예준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따금 구르는 눈동자를 또렷하게 읽긴 어려웠다. 윤도하를 가격한 것은 본능일 테지만, 그 본능이 불러들인 기억은 감당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과거의 영광이니까.
윤도하를 발견하기 전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따금 마주치는 눈엔 주눅이 잔뜩 스며 있었다. 먼저 입을 떼어 주길 바랐지만 예준은 시작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집에 데려다줄까요?”
먼저 물었을 때, 예준이 몸을 일으켰다.
“저… 잠시만 기다리세요.”
붙잡기도 전에 멀어지는 인영을 어떻게 두고 가겠는가. 무언가 번뜩 생각이 났는지 예준은 더 양해를 구하지 않고 성큼성큼 대로변을 향해 달려 나갔다. 미소를 머금은 태경은 텅 빈 벤치에 올라앉았다. 그는 고개를 젖혀 푸른 기운을 머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선명한 밤이지만 들이치는 바람 온도는 낮았다.
다시 돌아온 예준의 손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쭈뼛쭈뼛 다가온 예준이 태경 옆에 앉았다.
“이거 사러 다녀온 거예요?”
“예.”
처음 만난 날과는 반대의 상황이었다. 태경은 약봉지에서 소독약과 알코올 솜을 꺼내는 예준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얀 손끝이 서툴게 움직이더니 축축한 솜이 예고 없이 입가에 닿았다. 슬쩍 인상을 찌푸린 태경이 상체를 기울였다. 능숙하게 피를 닦아 낸 예준은 곧바로 항생제 연고를 손끝에 짰다.
“많이 해 본 것 같은데.”
“자주 다쳐서요.”
알파나 베타에게 시달리느라 그렇겠지. 선수 시절엔 경기나 훈련 중에 이런저런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았을 터였다. 태경은 얼마 전 보았던 기사를 떠올리며 예준의 무릎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
“부상이 있었다고 봤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그럭저럭요.”
간단히 답한 예준이 찢어진 입술 위에 연고를 바르기 시작했다. 워낙 조심스러워 아프기보다는 간지러웠다. 톡, 톡, 닿는 촉감이 낯설어 태경의 귓가가 붉어졌다. 구태여 만지지 않는다면 예준이 그 열감을 감지할 도리는 없었다.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일자로 쭉 뻗은 촘촘한 속눈썹이 위로 들렸다. 거리가 제법 가까웠다. 눈을 마주하자 마땅한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검색해 봤어요.”
“저를요?”
“네. 유명한 선수였다기에.”
습관적으로 입술을 물었다 놓은 태경이 뒤통수를 긁었다. 검색 결과에는 좋은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괜찮아요.”
무미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마침 연고를 다 바른 예준이 손을 떼어 냈다. 고맙다고 덧붙이려는데 말간 시선이 입술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눈치였다.
“도하가 꽤 귀찮게 했나 봐.”
“몇 번…. 그런데 오늘은 도저히 상대할 기분이 아니어서요.”
예준이 시선을 떨구었다. 인상을 쓰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얼굴엔 불량한 구석이 없었다. 태경이 떠난 시선을 따라붙으며 물었다.
“조금 더 일찍 말하지 그랬어요.”
“별것도 아닌 일에 오라 가라 하기가 그래서요.”
퉁명스러운 말 뒤에 옅은 한숨이 흘렀다. 눈 밑에 선명히 자리한 그림자, 생기 없는 낯이 오늘 또한 고된 하루였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파트너 하기로 해 놓고 한 번도 안 했잖아요. 좀 염치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태경이 웃었다.
“그 정도로 염치없지 않아요. 앞으로도 할 기회는 많을 테니까.”
예준이 귓불을 문지르며 눈을 맞추었다. 때맞춰 태경이 무릎에 놓인 아이의 손목을 당기며 물었다.
“그보다 무슨 일 있어요? 안색이 안 좋은데.”
만나자마자 묻고 싶었던 질문이다. 윤도하보다는 그게 핵심이었다. 화두를 던지자 예준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그를 마주 보는 얼굴에 낯선 기색이 가득했다.
“오늘 윤도하 일은 감사했어요. 이제 마주칠 일 없도록 잘 부탁드려요.”
노골적으로 화제를 돌리기에 태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예준은 불편한 듯 흘끗흘끗 시선만 맞출 뿐이었다. 섹스 파트너로서 어디까지 간섭하는 것이 알맞은 선인지 태경 또한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예준보다 일곱 살 더 많다는 이유로 상대를 회유하는 일에 능숙했다. 태경은 잡은 손목을 쉬이 놓지 않았다.
“말 돌리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예준이 숨을 들이켰다. 웃음기를 거둔 태경은 마냥 다정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손에 악력을 싣자 예준의 눈이 커졌다.
“일이 좀 있었어요.”
“무슨 일?”
태경이 긴장을 풀라는 의미로 예준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어디까지가 선인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연민이 이끄는 일이라면 어차피 브레이크는 없을 터였다.
“배달 일 하다 보면 골칫거리가 가끔 생기는데….”
“누가 괴롭혔어?”
오메가가 겪는 골칫거리라고 해 봐야 그게 다였다. 추궁이 끊이지 않자 후, 하고 한숨을 내쉰 예준이 그제야 속을 터놓았다.
“저 말고 떡볶이집 아주머니요.”
“떡볶이집 아주머니를 어떻게 괴롭히는데.”
예준이 몹시 피로한 듯 이마를 짚었다. 눈을 비비고 입술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그 알파가… 떡볶이 먹고 식중독 걸렸다고 병원에 드러누웠나 봐요. 휴무일 아니면 한 번도 가게 문 안 연 적 없는데, 오늘 셔터가 닫혀서 물어봤더니 아주머니가 그것 때문에….”
“많이 곤란해져서.”
“네. 그래서… 바로 병원에라도 가서 빌어야 하나, 하고 있는데 윤도하가….”
“여기 있었고.”
흔쾌히 맞장구를 쳐 주자 예준이 홀린 듯 덧붙였다.
“순간 화가 나서 홧김에 대표님 부른 거예요.”
“그래요. 그건 잘 알겠어.”
친절하지 않은 설명에도 태경은 대강 상황을 이해했다. 떡볶이집 아주머니가 예준에게는 조금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파를 그 알파라고 칭하는 걸 보면 이전에 엮인 적 있는 놈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알파가 왜 떡볶이 아주머니한테 그럴까?”
태경의 질문에 예준은 말문이 막힌 듯 세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피라도 보면 어쩌려고. 태경이 턱을 쥐었다 놓자 예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저 때문에요. 저한테 복수하려고. 얼마 전에 강간하려고 하길래 발로 까고 튀었거든요. 그 뒤로 가게에 별점 테러까지 하더니 이번엔 적반하장으로….”
“뭘, 해?”
태경이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예준은 뭐가 문제인지 짚지 못하는 눈치였다.
“식중독으로 드러누웠….”
“배달하다가 강간당할 뻔했다고?”
무의식적으로 더해진 악력 탓에 예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더 화를 내야 마땅한데 예준은 그저 무력한 얼굴이었다. 태경의 두 눈이 가라앉았다.
“예준 씨가 거기 가서 빌 이유 없어요. 사과는 그 알파가 해야지.”
“저는, 그런 건 괜찮아요.”
대부분 그런 식으로 일을 해결하는 예준으로서는 싹싹 비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태경은 연거푸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든 괜찮다고 하지 말고.”
무력한 태도에 핀잔을 주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사는 방식은 누구나 다르기에 처한 환경에 따라 달리 사는 것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되었다. 다만, 태경은 치미는 불쾌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 발 들이기엔 모호한 관계라 할지라도 그는 때때로 제 인생 가장 밑바닥에 있는 기억을 끌어 올리길 주저하지 않았다.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자 예준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대표님이 화를 내세요.”
“화난 것 같아요?”
“…네.”
더불어 깊은 동정이었다. 태경이 시큰한 볼을 감싸며 고개를 틀었다. 그는 눈앞의 오메가가 안쓰러웠고 점점 커지는 입 안의 통증이 거슬렸다. 입술을 축이자 빤히 보던 예준이 부스럭거리며 약봉지를 다시 열었다.
태경은 조금 전 제 입술을 빤히 바라보던 예준을 떠올렸다. 뭔가 할 일이 남은 듯 망설이던 태도. 예준은 말없이 손끝에 연고를 묻혔다.
“입 벌려 보세요.”
순순히 입을 벌리자 엄지가 입 안 점막을 건드리며 들어왔다.
“소독했으니까 괜찮아요.”
지금 그런 걸 문제 삼을 리가. 상처 위를 덧그리는 엄지와 뺨을 감싼 손끝이 조심스레 움직였다. 무방비하게 턱과 입 안을 내어 준 태경은 상처의 감각을 느끼며 예준의 이목구비를 훑었다. 더듬어 상처를 가늠하는 얼굴이 골몰했다.
찔걱이는 소리라니. 불결한 상상이 뒤따랐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코끝에 닿는 페로몬이 유독 달콤했다. 깜빡, 깜빡, 감았다 뜨는 눈을 집요하게 들여다보자 뒤늦게 눈길을 알아차린 예준이 엄지를 빼내었다. 연약한 곳에 닿아 놓고 너무 늦은 자각이 아닌가 싶었다.
“확실히 여기까지 능숙하진 않네.”
“혹시 불쾌하셨으면.”
“불쾌할 리가 있나.”
단지, 키스할 때 닿는 곳이기에. 예준의 혀끝이 그곳을 스칠 때 어떤 자극이 오는지 태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태경이 예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장시간 밖에 있기에는 싸늘한 날이었다. 열은 식지 않았다. 말을 멈추고 가만히 응시하는 눈동자를 보자 견딜 수 없었다.
“내 집으로 갈래요?”
“…….”
“혼자 두기 싫은데.”
가볍게 물었으나 돌아오는 시선은 무거웠다. 처음 이후로는 내내 호텔에서만 만났으니 집이라는 단어의 함의는 조금 다를 것이다. 안락하고 개인적인 공간을 내세우기부터 한 것은 분명 예준을 끌어들이려는 속셈이 맞다.
“대표님 집이요?”
“응. 내 집.”
수심에 잠긴 고운 얼굴 위로 희미하게 드리우는 호기심을 태경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예준의 손목을 당겼다. 잠시간 망설이던 예준은 결국 그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으슥한 공원을 벗어나 대로변으로 향하는 길목도 순순히 따를 뿐이었다.
길가에 버려진 소동물들은 으레 그랬다. 처음엔 발톱을 세우다가도 다정하게 달래 주면 곧 마음을 열었다. 태경은 벌어지는 간격을 좁히며 따라오는 녀석들을 거둔 적이 몇 번 있었다. 택시에 오르며 그들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아이를 집으로 이끄는 건 그저 가벼운 동정일 뿐. 가여운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는 성정 탓일 뿐이다.
유일하게 다른 것이라곤 불순물처럼 섞인 미약한 성욕이 다였다. 맞잡은 손이 뜨거웠다. 미끈미끈한 땀은 긴장의 증거일 텐데도 무심코 흘겨본 예준의 얼굴은 초연하기만 했다.
*
언제 보아도 감탄이 나오는 집이었다. 남자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예준은 자신의 단칸방과는 확연히 다른 훈기에 절로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 번 와 본 적 있어서인지 향기는 익숙했고, 무엇도 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까지 눈치챌 수 있었다.
예준은 통창 너머로 조명이 비춘 정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남자는 먼저 안으로 들어서 재킷을 벗었다. 셔츠 단추에 손을 가져가던 그가 일순 진동하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잠깐, 전화. 입을 만한 옷 욕실 앞에 둘 테니 먼저 씻어요.”
“저번 그 욕실에서 씻으면 될까요.”
“그렇게 해요.”
태경이 집 안쪽으로 사라지자 예준은 쭈뼛대며 점퍼를 벗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바보처럼 굴진 않을 생각이었다. 홀린 듯 옷부터 벗었던 때와 지금은 다르다. 파트너로서 당연한 일을 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했다.
예준은 택시에서부터 강해진 페로몬 때문에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갈무리해 은은한 정도라고는 하나 워낙 피로가 쌓인 탓인지 전해지는 자극이 상당했다. 윤도하를 내쫓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되었지만, 우성 알파인 태경을 상대하는 데는 생각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상처를 치료해 준 것으로 부채감은 조금 덜었다지만, 이만한 일에 치문도 아닌 그를 호출하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철부지처럼 고등학생 하나 처리해 달라고 고자질한 격이었다.
술 냄새가 났던 걸 보면 술자리 같은 데서 저 때문에 공원까지 온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가 주로 움직이는 동네도 아니고 그의 집과도, 회사와도 거리도 꽤 되었다. 와 주어 고맙지만 더불어 불편하기도 했다. 예준은 욕실로 향하며 자꾸만 열이 오르는 두 뺨을 어루만졌다.
정작 중요한 일은 해결되지 않았다. 떡볶이집 아주머니께는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명백한 거짓말로 아주머니를 곤란하게 만든 그 알파의 마음은 어떻게 돌려야 할지. 치문 때문에 심사가 더 뒤틀려 그러는 것이었다. 기껏 힘써 준 녀석이 미안해할까 봐 치문에게는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뭘 더 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남자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쉬고 싶었다. 몸의 긴장은 때때로 머릿속을 텅 비게 하므로. 그의 옆에서라면 어차피 성감을 누를 생각밖에 하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복잡한 머릿속은 우선 물과 함께 씻어 내릴 요량이었다. 물은 금세 따뜻해졌고 예준은 온종일 찝찝했던 몸을 꼼꼼히 씻었다. 새 칫솔, 새 수건, 새 옷까지. 귀한 대접이라 생각하며 밖으로 나온 예준은 완벽히 옷을 갖춰 입은 채였다. 욕실에서 머리카락도 대충 말렸고 몸을 잘 닦고 입은 터라 옷감도 보송보송했다.
먼, 다른 욕실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우두커니 선 예준은 섬유 유연제와 남자의 페로몬이 섞인 제 티셔츠를 당겨 킁킁거렸다. 적당히 취했을 때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배 주변이 뻣뻣해지고 성기 끝이 간지러운 건 그가 짙은 농도의 페로몬을 가진 우성 알파인 탓이었다.
얼마 후, 예준은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몸을 돌려세웠다.
“아….”
우습게도 남자가 헐벗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히트 사이클 때의 저처럼 전라는 아니지만, 아직 물기가 다 가시지 않은 널따란 상체가 멀지 않은 곳에서 보였다. 주방으로 가 물을 꺼내 마신 그가 컵을 내밀었다.
“마셔요.”
“네.”
잘 짜인 근육이 타고난 골격에 매끄럽게 붙어 있다. 가까워지자 예준은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가 가늠하듯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 잘 갖춘 차림새를 눈으로 훑었다.
쪽.
목덜미에 내려앉는 입술도 예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질끈 눈을 감은 예준이 무턱대고 남자의 가슴을 밀어냈다.
“저….”
페로몬을 더 깊이 느낀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남자를 거부할 수 없었다. 무력 없이도 예준은 순순히 몸을 내어 줄 터였다. 입술이든, 목이든, 다리 사이든, 어디까지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분명 태경보다 자신이 더 많이 원하게 될 테니까.
남자의 쇄골에서 미끄러져 가슴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예준은 멍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아래 자리한 깊은 복근, 얇은 트레이닝팬츠로는 가릴 수 없는 탄탄한 하체까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애가 탔다. 예준이 홀린 듯 물었다.
“해요?”
“뭘.”
“섹스요.”
벌써 두 번의 약속을 어긴 셈이었다. 한 번은 윤도하의 흔적을 달고 가서. 한 번은 바보같이 잠드는 바람에.
이미 한 번 몸을 섞은 사이인데도 왜 이렇게 긴장이 되나 싶었다. 오메가 주제에 섹스가 무서워 떤다고 하면 모두가 비웃을 것이다. 예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자고 말한 적 없는데. 목에 뽀뽀 좀 했다고 다 그 단계로 가는 건 아니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 그가 어깨 위에 다시 입술을 묻었다. 촉촉한 입술의 촉감이 아찔했다. 움찔, 튀는 허리를 단단히 그러쥐고 입술로는 목선을 타고 올라와 귓불을 씹은 그가 덧붙였다.
“발기했다고 다 사정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침대가 있는 방으로 천천히 미는 힘까지, 모든 것이 능숙하고 거칠 것 없었다.
고분고분 밀려나던 예준이 다시 한번 태경을 밀어냈다. 그의 시선이 예준의 중심으로 향했다. 예준 역시 얇은 팬츠를 입고 있어 발기를 감출 수 없었다. 비틀렸다 다시 마주치는 시선만으로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왜. 하기 싫어요?”
태경이 물었다. 침대 끝에 무릎 뒤가 닿을 즈음엔 정말 하는 건가보다 싶었다. 그와 뒹굴면 간지러운 성욕은 해소되겠지만 체력이 허락할지 걱정이었다. 기절이라도 해 버리면 우스워 보일 테니까.
“아뇨.”
뻣뻣하게 답한 예준이 티셔츠를 그러쥐었다. 아직 그가 허리를 잡고 있어 옷을 벗기가 불편했다. 툭, 한 번 더 미는 힘에 몸이 휘청였다. 위협적이지 않은 결박을 느낄 즈음에는 그의 입매가 완전히 호선을 그렸다.
“이렇게까지 긴장할 줄은 몰랐는데.”
그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흩뜨려 놓았다. 안전하게 침대 끝에 주저앉자마자 예준은 이 모든 것이 그의 얄궂은 장난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발기했으나 당장 오메가의 몸 위로 올라탈 생각까진 없는 듯해 보였다.
“저번에 왔을 때 내 침대에서 잘 잤잖아. 편히 쉬라고 데리고 온 거예요. 가뜩이나 머리 복잡한 사람한테 섹스하자고 들이댈 생각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너른 집이니 제 눈이 닿지 못한 곳에 손님 방 같은 게 있을 줄 알았다. 아니면 소파, 바닥이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번에도 그의 침대를 내어 줄 모양이었다.
“여기서 자라고요?”
“내 집에는 침대가 하나라. 원한다면 같이 자 줄 의향은 있지.”
“잠만….”
“그래요. 섹스 말고 그냥 눈 감고 자는 거.”
호텔에서 그가 자신을 안고 잤다는 건 깨어난 후에 알았다. 우성 알파와 밤새 붙어 있어서인지 피로하던 몸이 단숨에 개운해진 것을 기억한다. 그렇다고 해서 섹스가 싫은 건 아니었다. 남자의 성기는 받기 쉬운 사이즈가 아니지만 페로몬만 있다면 언제든 삽입할 수 있었다.
“원하시면 해도 돼요.”
몸은 힘들겠지만 마음은 편해질 터였다. 이래서야 섹스 파트너로 고개도 들 수 없는 처지니까. 발정기가 아닐 때 성욕을 해결한다는 개념이 없는 예준에게 저 자신의 성감이나 발기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예준 씨가 원하는 건 뭔데?”
“네?”
그런 걸 누가 물은 적이 있었던가. 예준은 당황해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하고 싶어, 하기 싫어?”
태경이 앉은 자리 양옆을 짚으며 몸을 낮추었다. 그는 무언가 설득할 때, 꼭 아이에게 하듯 시선을 맞추는 버릇이 있었다. 그가 아래쪽으로 흘끗 눈길을 주었다.
“섰다는 건 정확히 알겠는데.”
예준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었다.
“그건 나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니까 그런 걸 거고.”
“그러는… 대표님도 섰잖아요.”
“그것도 예준 씨한테서 너무 좋은 냄새가 나니까.”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알파에게 당해 놓고 알파에게 위로받다니 미묘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느라 예준의 두 눈이 멍해졌다. 한 번 빼고 나면 시원할 것 같은데. 그보다는 푹 자고 싶은데…. 욕망과 피로감이 치열하게 충돌했다. 지켜보던 태경이 부드럽게 그의 턱을 그러쥐었다.
입술이 닿았다. 가볍게 이어지는 프렌치 키스에 허벅지 안쪽까지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남자가 다리를 벌리고 몸을 더 맞붙이자 선명한 성기의 양감이 느껴졌다. 쪽, 쪽, 노골적으로 뽀뽀하던 남자가 못내 앓는 소리를 냈다. 입술의 상처 때문이었다.
“이래도 잘 모르겠어?”
몸이 닿는 건 너무 쉬웠다. 그와 저 사이에 벽이 느껴지지 않는 유일한 것이라고 해 봐야 알파와 오메가의 강력히 끌리는 상성 정도일 것이다. 더 닿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지만, 예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쉬고 싶어요.”
이토록 무섭게 끌린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은 저항력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강하기에, 때마다 혼란을 느끼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남자는 알파답지 않게 자제력이 남달랐다. 저처럼 키스로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는 듯한데 더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뺨을 쓰다듬고 물러난 남자가 침대 시트를 열어 주었다.
“집 온도를 평소보다 조금 높였어요. 자다가 덥더라도 이불 차지 말고 꼭 덮고 자요.”
“감사합니다.”
예준이 침대 위를 기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태경이 무심코 귓불을 매만졌다. 구태여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 준 남자가 앞머리가 드러나도록 이마를 매만졌다.
“복잡한 일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기도 해. 귀인이란 말 들어 봤어요?”
귀한 사람. 물론 들어봤다.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 치문을 제외하면 귀인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없었지만, 귀인이 나타나 행운을 불러들인다는 말 정도는 익히 알았다. 그러나 그 행운이 자기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번에는 치문이 도와준 일마저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꼴이 되었으니.
“그러니까 아무 생각 말고 푹 자요.”
남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단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고단해 예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안 주무세요?”
남자가 방을 떠날 기세기에 물었다. 침대가 하나라고 하지 않았나. 집주인을 소파에서 재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같이 잘 거야. 일이 남아서 그래요. 먼저 자도 괜찮아.”
“…예.”
왜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남자가 발걸음을 옮겼다. 불을 꺼 주고 방문을 닫던 그가 별안간 문틈 새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혹시 문 다 닫으면 무서워?”
“아뇨.”
“그럼 다행이고.”
가만히 보면 그는 저를 어린애로 보는 구석이 있었다. 예준이 고개를 가로저었음에도 남자는 굳이 문을 한 뼘 열어둔 뒤 자리를 떴다.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빳빳한 중심에 손을 올린 예준은 거추장스럽다는 듯 인상을 썼다.
침대에 남자의 페로몬이 깊게 배어 있었다. 어제도 이곳에서 잤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살에 닿았을 때의 촉감을 연상케 하는 미약한 체취까지, 곤란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시트를 그러쥔 예준은 결국 성감을 누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러다 몽정이라도 해 버리면 남자의 얼굴을 어떻게 다시 봐야 하나 싶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직 깊은 새벽이었다. 한참이나 잤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두 시간 남짓이 지났을 뿐이었다. 목이 말라 일어난 예준은 텅 빈 옆자리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여태 들어오지 않은 듯 처음처럼 냉기가 감돌았다.
온종일 긴장한 탓에 뒤늦게 근육통이 몰려왔다. 비척비척 침대를 빠져나온 예준이 주방으로 향했다. 어색한 기분으로 물을 꺼내 마시고 주변을 둘러보자 먼 곳에서 은은히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언젠가 가 본 적 있는 남자의 작업실로부터 뻗어 나오는 빛이었다. 허락 없이 돌아다니는 게 마음에 걸렸기에 예준은 굳이 발끝을 세워 작업실로 걸어갔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태경이 보였다. 어느새 맨투맨까지 갖춰 입은 그는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은 채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방해가 될까 봐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평소처럼 셔츠 차림이 아닌 데다 손질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그는 꼭 대학생처럼 어려 보였다.
골똘히 생각하던 남자가 연필을 들어 선을 그었다. 문외한인 예준은 그가 정확히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몹시 호기심이 일었으나 저는 손님인 데다 폐를 끼치는 처지였다. 귀찮게 불러내어 저를 돌보게 만들기까지 했으니 개인적인 시간마저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켜보았다.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이자 광경이니까. 예준에게는 그도, 그의 집도, 그의 직업도, 그의 작업실도 모두 새롭고 신기하기만 했다.
“뒤통수 뚫어지겠네.”
어느 순간, 태경이 말했다. 최대한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방해가 된 모양이었다.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인 예준이 다물린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 시간쯤 되면 약효가 떨어져요. 그래서 그 정도 거리에 있으면 페로몬이….”
민망해 얼굴이 달아올랐다. 남자는 불편한 기색이 아니었지만, 괜히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른 것처럼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한동안 우물쭈물하며 서 있자 남자가 손을 뻗었다.
“가까이 와서 봐도 돼.”
부드러운 목소리에 예준은 쭈뼛대며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다.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이 설계도임을 알아챌 정도로 가까워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일전에 이것저것 만져 보긴 했지만, 그걸 사용하는 남자를 관찰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피곤할 텐데 더 자지.”
“목말라서요.”
“침대 옆에 물 가져다 놨는데?”
예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못 봤어요.”
어쩐지 허둥지둥하게 되는 자신을 예준은 이해할 수 없었다. 테이블 근처에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자 태경이 제 바로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게 했다.
예준은 얌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다시 선을 긋기 시작하는 남자의 손만 응시했다. 깔끔한 손톱, 긴 손가락, 혈관이 불거진 남자다운 손등. 그 손이 설계도 위를 오가며 선을 창조해 내는 모습은 침대 위에서의 모습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딘가 관능적인 면이 있었다.
골몰히 고민하는 눈빛마저도 진지하고 어른스러웠다. 그의 손끝에 걸린 인생에는 단 한 치의 막막함도 없을 것만 같았다. 쿵쿵 뛰는 심장의 고동을 무시한 채 예준은 정적을 깨듯 물었다.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는 기분은 어때요?”
맥락 없는 질문에 태경은 당황하지 않았다.
“왜. 내 인생이 내 뜻대로 되는 것처럼 보여요?”
“…네.”
멋진 직업에 번듯한 회사, 이토록 아름다운 집이라니. 누구나 동경할 만한 것들이었고 예준 역시 그들처럼이나 궁금했다. 태경처럼 삶을 살면 어떨까. 한때 자신도 누린 적 있으나 그 삶은 신기루처럼 곧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당장 내일 먹을 것을 고민할 필요도, 빚에 허덕이지도, 툭하면 얻어맞을 이유도 없는 우성 알파라면….
“지금 하는 이것도 내 뜻대로 안 되는데.”
태경이 버릇없는 아이처럼 연필을 내던졌다. 대신 의자의 각도를 옮겨 예준을 마주한 그가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이러면 내 뜻대로 되는 건가.”
할 말을 잃은 예준이 굴러가는 연필을 주시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곧 바닥으로 떨어진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태경이 예준의 코끝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오늘 많이 힘들었어요?”
괜찮지 않았다. 자신이 괜찮지 않다는 사실을 남자 또한 알 터였다. 숨겨 봤자 의미 없는 일이었다. 예준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할 때마다 열이 들끓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포기하는 데에도 점차 지쳐 가고 있었다.
“그냥 화끈하게 한 번 하고 잊을 걸 그랬나.”
그런다고 잊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 남자는 가볍게 치부했다.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잊는 것만이 답이었다. 그의 말처럼 적어도 전신이 쾌락에 지배당했을 때는 잊기가 쉬웠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리니까.
“그럴 걸 그랬나.”
예준이 뒤늦게 고백했다. 사실은 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에 몸을 맡기고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굴 수도 있었다. 진정으로 원했던 건 안정이 아니라 쾌감이었을지도.
예준은 제 말에 느슨해진 태경의 표정을 살폈다. 단단한 턱과 목, 어깨와 가슴을 시선으로 더듬자 태경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불편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바라보니 실재하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졌다.
예준이 남자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살결과 근육의 굴곡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예준은 욕정 어린 눈빛으로 저를 보는 남자 대신 조금 전, 일에 열중했던 또 다른 태경을 떠올렸다. 아릿하게 배가 조여들었다.
“…….”
“…….”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는 것을 어떻게 눈치채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뿜어내는 기운이 잠들기 전처럼 부드럽지 않다는 것을 예준은 직감으로 느꼈다. 제 손길 한 번에 알파의 본성을 드러내는 남자가 놀랍기도 했다.
순간, 남자가 허리를 붙잡아 들어 올렸다. 설계도가 구겨지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을 테이블 위에 앉힌 그가 깊게 살 내음을 들이켰다. 마주 본 남자의 얼굴이 속수무책으로 붉어져 있었다. 반들거리는 두 눈동자가 무섭도록 제게 고정되었다.
얼굴에, 눈에, 입술에.
“예준 씨 뜻대로 해 봐요. 그거 별거 아니거든.”
태경의 말에 예준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내 뜻대로란 게 도대체…. 예준은 들이치는 성감에 집중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지금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바지를 벗고 그의 성기를 받고 싶었다.
예준이 트레이닝팬츠를 끌어 내리자 태경이 그 손을 도왔다. 한 번에 벗겨진 팬츠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예준은 두 다리를 벌리며 태경의 목을 끌어당겼다. 눈을 감고 천천히 입을 맞추자 몸이 훅, 뒤로 밀렸다.
테이블이 덜컹, 소리를 냈다. 곧 남자의 손길에 티셔츠가 가슴을 드러내며 밀려 올라갔다. 가볍게 안착하는 입술과 손끝을 느끼며 예준은 몸을 떨었다. 유두를 핥아 올리고 손으로는 허리를 간지럽힌다. 진득하게 눈을 감았다 뜨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간지러워?”
가슴 위에 남자의 더운 숨이 쏟아졌다. 고개를 끄덕인 예준은 차마 태경을 바라보지 못하고 천장만 주시했다. 큰 손이 배와 갈비뼈를 더듬었다. 유두를 잘근 씹는 치아와 살을 누르는 입술로는 어떤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자가 아파한다면 모를까. 그가 곧 다시 피가 샐지도 모를 그의 입술을 건드렸다. 짜증이 솟구친, 어딘가 불량한 얼굴을 들여다보던 예준이 저도 모르게 입매를 휘었다.
“웃지 마.”
“안 웃었어요.”
쉽게 바스러지는 디저트를 머금듯 입술이 맞물렸다. 길게 이어지는 키스는 단순한 입맞춤에 그치지 않았다. 다리 사이를 더 벌리며 들어오는 하체를 느끼자마자 양손을 결박당했다. 예준의 손목을 하나씩 붙잡은 태경이 테이블 위에 짓누르듯 힘을 실었다.
“아아….”
그 고통은 참을 수 없었다. 신음을 흘린 예준이 아득한 심정으로 태경을 보았다.
“아파요….”
“기분 나쁠 정도로?”
“아뇨.”
느슨하게 웃은 그가 이번에는 예준의 목덜미를 핥았다. 전기라도 통하는 듯 자꾸만 몸이 튀었다. 들썩일 때마다 가슴이 더 노골적으로 맞붙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온통 미끄러워 이미 쾌감에 푹 적셔진 기분이었다.
상쾌한 보디 워시 향을 맡으며 목과 귀, 어깨를 오가는 남자의 혀를 느꼈다. 인내력이 점차 바닥나기 시작했다. 거세게 비벼지는 아래가 울컥 젖는 게 스스로 느껴졌다. 예준은 다급히 태경의 맨투맨으로 손을 뻗었다. 더 가까이 맞붙고 싶은 욕구는 그저 본능이었다.
“빨리.”
툭 튀어나온 본심에 태경은 흔쾌히 맨투맨에 손을 가져갔다. 그는 맨투맨을 엑스 자로 들어 올려 벗고는 환히 드러난 예준의 배와 다리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물기가 가득 맺힌 분홍빛의 성기, 옴폭 팬 배와 미끈한 허리가 가릴 데 없이 모두 드러나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빨고 핥은 유두는 색이 옅게 올라와 도드라졌다. 태경은 예준이 헐떡이는 탓에 자꾸만 튀어 오르는 돌기를 세게 짓눌렀다. 고집스럽게 비틀어 더 붉은색을 띠게 했다.
“아읏….”
신음을 내는 도톰한 입술에 귀를 가져다 댔다. 태경이 배에 바짝 달라붙어 더할 나위 없이 발기한 예준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하읏!”
그가 벌어진 예준의 입술에 귀를 비볐다. 신음이 선명하게 귓가를 자극했다.
“듣기 좋아.”
“으, 하아….”
비벼지는 귀를 씹고 빠는 건 태경에게 배운 행위가 분명했다. 태경은 예준에게 귀와 턱을 내어 준 채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쥐어짜듯, 처음부터 세게 쳐올리자 예준이 어쩔 줄 몰라 몸을 뒤틀었다.
비벼지는 귀를 씹고 빠는 건 태경에게 배운 행위가 분명했다. 태경은 예준에게 귀와 턱을 내어 준 채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쥐어짜듯, 처음부터 세게 쳐올리자 예준이 어쩔 줄 몰라 몸을 뒤틀었다.
“으응, 으….”
예준은 벌써 고조되는 사정감에 체중을 실어 태경에게 매달렸다. 아직 바지조차 벗지 않은 남자가 원망스러울 만큼 짙은 쾌감이 몰아쳤다. 조금 전, 연필을 쥐었던 그 아름답던 손이 지금은 경박하게 제 성기를 흔들고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허벅지 근육이 바들바들 떨렸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그를 불렀다.
“아, 읏… 대표… 님….”
“하아, 왜?”
“못 참겠어요….”
“쌀 것 같아?”
“으, 으읏…. 네, 쌀 것 같아요.”
얼마나 만져졌다고 벌써…. 난잡한 오메가라 역시 그렇다고 단정해도 할 말이 없었다. 예준은 제 성기를 꽉 틀어쥔 손을 저지했다.
“소, 손 떼 주세요.”
“알았어. 예준 씨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물러나기에 고개를 들어 태경을 보았다. 물러난 손이 제 양 무릎을 붙잡아 벌렸다. 그의 전신이 낮아지더니 이제는 발기한 성기 뒤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숨통이 트였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아앗!”
손 대신 입술이 귀두에 닿았다. 그가 성기를 머금어 세게 빨아올리자마자 예준은 신음을 내질렀다.
“아! 안 돼요…. 하읏…, 아아…!”
차라리 세게 박혀 쑤셔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남자는 점액질로 미끄덩한 제 성기가 불쾌하지도 않은지 목구멍 깊이 그것을 밀어 넣었다. 다친 입 안의 점막이나 입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고통을 신경 쓰는 쪽은 오히려 예준이었다.
“아아, 읏…. 남자는 제가…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왜….”
“맞아….”
대답 뒤엔 쭈웁, 츄읍…. 노골적으로 성기를 빠는 소리가 따랐다.
“그래도 어떻게 하면 기분 좋은지는 알지.”
그가 미소를 감추며 가늠하듯 깊이를 더했다. 기둥을 혀로 감싸고 다시 한번 쪽 빨아올렸다. 더 이상의 기술은 필요 없었다. 촉촉한 입 안의 점막과 흡입하는 힘을 느끼는 것만으로 예준은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하아, 하아…!”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을 때, 입술을 옮긴 남자에게 허벅지를 깨물렸다. 그는 뺨을 허벅지 안쪽에 비비거나 정욕에 잠식당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았다. 혀끝을 세워 미끈한 살을 핥고 흥분이 잦아들면 다시 성기를 입에 물었다.
“아아, 으응….”
기둥을 틀어쥐고 세게 빨아들인다. 목구멍까지 성기를 삽입한 탓에 거칠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남자의 머리가 보였다. 예준은 남자의 어깨에 두 발을 올린 채 눈두덩을 손등으로 덮었다. 쾌감이 고조될수록 자꾸만 눈물이 나는 게 이상하고 창피해서였다.
“하아, 그, 그만….”
삽입을 멈춘 태경이 성기를 뺨에 비비며 말했다.
“입에 싸도 돼.”
자유로운 손으론 배를 묵직하게 더듬는다. 숨이 막혔는지 태경의 목과 어깨 부근이 붉었다. 도드라진 강인한 뼈와 단단한 근육. 제 무릎만큼이나 벌어진 너른 상체를 보자 구멍이 움찔 조였다 풀어졌다.
“흐으….”
아마, 속절없이 젖었을 것이다. 예준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만 감추었다. 태경이 다시 성기를 입에 물고 귀두를 사탕처럼 빨아 대 다행이었다. 너무 흥분해 벌써 구멍을 조이고 있다는 걸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아….”
그러나 능숙한 그를 속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미 전라인 데다 부끄러워 떨리는 몸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 타이밍에 맞추어 태경이 예준의 오금을 잡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치부가 환히 드러났다.
예준은 빠르게 엉덩이 사이를 더듬어 이미 흥건한 애액을 훔쳐 냈다. 그런다고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경련처럼 조여드는 구멍까지 가리기 위해 손을 덮었다.
태경은 그 손을 손쉽게 치워 냈다. 그가 드러난 회음부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너 진짜 야해….”
아무렇게나 흩어지는 말끝과 몽롱한 시선. 자신만큼이나 흥분을 참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뛰었다. 이명처럼 크게 번지는 고동을 애써 무시하며 예준은 태경을 응시했다. 부러 눈을 맞추긴 했으나 그 시선은 금세 흐트러졌다. 그가 반쯤 감긴 눈으로 제 구멍에 입술을 가져갔기에 그 후로는 더 볼 수도 없었다.
“하응, 으으…!”
도저히 그만두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까칠하게 부어오른 입술이 입구를 누르고 단단히 세운 혀끝이 구멍을 파고들 땐 정말로 그 쾌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읏!”
잔뜩 고개를 젖힌 예준이 격정적으로 숨을 토해 냈다. 입을 틀어막아도 봤지만 연이어 터지는 신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회음부에 남자의 코끝이 비벼졌고 이미 눅진히 풀어진 구멍 안으로 쉴 새 없이 혀가 밀려들었다.
삽입을 닮은 행위지만 고통스럽지 않았다. 질퍽하고 농밀한 움직임이 온몸의 감각을 그곳으로 집중시켰다.
“아아…. 하아…. 하으….”
예준은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혀를 조이는 자신의 구멍을 쉼 없이 느꼈다. 그가 살이 빨개질 정도로 강하게 제 허벅지를 누르는 게 좋았다. 쾌감에 젖어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갈무리할 여력도 없이, 그저 짐승처럼 제 구멍을 핥고 빠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 대단한 알파가 제 밑에서 무릎을 꿇고 정신없이 제 몸을 먹어 치우고 있다. 그 사실이 그의 수많은 달콤한 말보다 더 큰 만족감을 주었다. 기억은 휘발되고 오로지 쾌감만이 들이쳤다. 섹스는 최고의 망각제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더 해 줘요….”
그 말에 태경이 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예준의 몸을 들어 올려 뒤집었다. 테이블 위에 엎드린 예준은 무릎을 벌렸다. 남자가 엉덩이를 틀어쥔 채 다시 입술을 묻었다. 성기 없이도 쉽게 벌어진 구멍 안으로 다시 꼿꼿이 세운 혀가 쑤셔졌다.
“아아…, 하으…, 좋아요…, 좋아요.”
히트 사이클도 아닌데 온몸이 벌벌 떨렸다. 벌어진 잇새에서 침이 새고, 남자의 설계도 위로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예준은 태경이 페로몬을 조금도 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많이 젖어.”
보다 못한 태경이 예준의 아래를 티슈로 훔쳐 냈다. 예준은 고개를 숙여 제 다리 사이로 보이는 남자를 관찰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복근과 무섭도록 팽창한 성기가 아직도 바지 속에 갇혀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견딜 수 없이 그 성기를 보고 만지고 싶었다. 아무렇게나 손을 뻗자, 태경은 어림없다는 듯 예준의 두 손을 붙잡아 허리 뒤로 결박해 버렸다.
“끄응, 응…, 흐으….”
상체가 무너져 뺨이 설계도에 닿았다. 손목이 붙잡히고 온몸에 힘이 빠져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예준은 다시 부드럽게 비벼지는 태경의 입술을 느꼈다. 미세한 주름을 섬세하게 핥은 그가 예민한 구멍을 깨물었다가 강하게 빨았다. 삽입이 아닌 흡입에 예준의 얼굴이 잔뜩 이지러졌다.
“하아…! 왜 이렇게 잘해요…, 읏!”
“…네가 이걸 봐야 돼.”
“왜….”
“여기가 사람 돌게 만들거든.”
노골적으로 구멍을 만진 태경이 이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고작 하나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더….”
예준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태경은 들어주지 않았다. 부드럽게 풀렸으나 아직 좁은 구멍을 아래 방향으로 꾹 누른 채 그는 다시 혀를 가져갔다. 예준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벗어나기 위해 애쓸 수밖에 없었다. 삽입의 감각을 경험한 몸이 더 깊은 곳을 원하고 있었다. 그의 딱딱하고 굵은 성기가 배 속 가장 깊숙한 곳을 눌러 주길 바랐다.
“아아, 제발….”
단지 태경은 그 갈증을 제대로 이용할 줄 아는 남자였다. 당장 바지를 벗고 쑤셔 줄 수도 있는 문제였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섹스와 쾌감이 존재했다. 엎드려 성기를 받는 게 섹스라고 믿는 예준을 다른 방식으로 길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어쩔 줄 몰라 덜덜 떠는 몸이 안쓰러워 태경은 결박을 풀어 주었다. 손가락을 빼내자 구멍이 정신없이 움찔거렸다. 애써 외면하고 축 늘어진 몸을 당겨 일으켰다. 테이블 가장자리까지 끌어와 마른 몸을 폭 안아 주자 예준은 꼭 맞춘 것처럼 달라붙었다.
“하아…. 이거… 너무 좋아요….”
“빨아 주는 거?”
“…네.”
열 오른 예준의 목 위에 태경의 입술이 닿았다. 예준은 그와 섹스할 때면 좋다는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곧이곧대로 내뱉어 놓고도 민망해 입을 꾹 다물었다. 슬쩍 남자의 손을 당겨 제 고간으로 가져갔다. 태경은 순순히 성기를 붙잡아 느리게 흔들어 주었다.
“이것도… 이것도요….”
“좋은 게 너무 많네…. 이것도 좋아하잖아.”
그가 목덜미를 살살 깨물어 주자 몸이 움찔 튀었다.
“네…. 그것도….”
“나도 좋아, 너랑 하는 거….”
태경이 웃었다. 예준은 민망했으나 빨라지는 남자의 손길 탓에 곧 머릿속을 비웠다. 그가 제 등을 안정적으로 받친 채 빠르게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프지 않게, 그러나 충분히 강한 힘으로 성기를 쳐올리자 다시 사정감이 몰렸다.
“아아…, 아….”
태경이 달려들 듯 입술을 깨물었다. 예준은 입을 벌려 밀려드는 남자와 혀를 비비고 타액을 섞었다. 상처는 돌이킬 수 없이 덧날 것이지만 그 또한 멈추길 바라지는 않을 터였다. 부드러운 키스와 대조되는 아래의 움직임에 쿠퍼액이 기둥을 따라 흘러내렸다. 질척임이 더해져 손과 성기가 더욱 차지게 마찰했다.
“음, 읏….”
예준은 얼른 태경의 손을 겹쳐 잡았다. 혼을 쏙 빼놓는 키스에 정신이 팔린 사이, 태경이 어느 순간 훅 떨어져 나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다시 아래로 가라앉은 것이었다. 한쪽 무릎을 굽힌 그가 예준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기둥을 비틀며 귀두를 쪽쪽 빨아들였다. 다시 남자의 머리가 거칠게 움직였다. 볼이 폭 팰 정도로 강하게 흡입하는 남자의 뺨을 들여다보며 예준은 허벅지에 잔뜩 힘을 주었다. 배가 아릿하게 아팠다. 숨이 턱턱 막혀 어쩔 줄 몰랐다. 다리를 버둥거리다 남자의 머리카락을 아프게 틀어쥐었다.
“……!”
쿡, 목구멍에 귀두가 박히는 순간 온몸의 압력이 높아졌다. 성기에 목구멍이 틀어막혀 충혈된 남자의 두 눈이 보였다.
“…아읏!”
예준은 이내 제 전부를 쏟아내듯 사정했다. 남자의 고개가 밀리도록 깊게 밀어 넣으며 연약한 내장에 정액을 흘렸다. 꾸역꾸역 버티는 태경의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촉촉이 성기를 감싸는 촉감. 예준은 왜 알파들이 제 구멍에 박는 걸 그토록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
성기를 빼내었을 땐 이미 한참 늦어 버렸다. 태경이 몇 번 기침하곤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예준 씨는 자기 성기가 좀 크다는 걸 잘 모르나 봐.”
그렇게 타박을 주면서도 그는 예준의 성기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정액을 쉽게 삼킨 그가 여전히 꿈틀거리는 기둥을 쥔 채 귀두를 맛있게 빨았다.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뜬 예준은 사정의 후희를 기꺼이 즐겼다. 남자의 부드러운 귀를 더듬고 단단한 턱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마음껏 헤집어 놓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그가 제 성기를 놓아주길 기다렸다.
뒤늦게 몸을 일으킨 태경이 예준을 들어 올렸다. 의자에 앉아 예준을 허벅지에 올려놓은 그가 타액, 애액, 손길에 잔뜩 훼손된 설계도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거나 예준은 제 엉덩이에 닿은 그의 성기가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자신을 고조시키고 절정에 이르게 할 때까지 조금도 숨을 죽이지 않은 그 성기는 여전히 단단히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왜 바지를 벗지 않은 건지, 왜 제 몸을 마음껏 들쑤시지 않은 건지 의문이었다.
남자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예준이 갈무리된 페로몬을 과감히 들이켰다. 하고 싶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기꺼이 응할 생각이었기에 허리를 꺾어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였다. 그러자 설계도로 향해 있던 남자의 시선이 곧 자신에게 옮겨졌다.
“아무리 그래도… 예준 씨가 오늘 내 정액 맛볼 일은 없을 거예요.”
너무 지나쳤던 걸까 생각한 예준이 얼굴을 붉혔다. 행위를 멈추고 가만히 태경을 들여다보았다. 곧 익숙한 손길이 엉덩이 사이에 닿았다.
“읏….”
“난 이렇게 재미 보는 것도 충분히 좋거든.”
“저는….”
“너만 벗겨 놓고, 너만 싸게 하는 거.”
왠지 공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반박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눈가에 맺혀 있던 물기를 거칠게 닦아 낸 예준이 부어오른 남자의 입술을 더듬었다. 관찰하고 입맛을 다셨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안으로 파고드는 손가락을 느끼고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하아…, 하…. 그럼, 나만 느끼는 거예요, 오늘은?”
순진하게 묻는 말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태경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경의 지극한 헌신을 눈치채지 못한 예준의 입가가 휘어졌다.
“좋아요.”
귀엽게 두 눈까지 접힌다. 태경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슬쩍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보며 예준이 다시 한번 속삭였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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