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Tighten
스쿠터가 박살 났다. 당장은 돈을 벌 방법이 없다는 의미였다.
반지하 방에 틀어박혀 이틀을 더 보내고서야 히트 사이클이 끝났다. 예준은 이불을 꽁꽁 몸에 두른 채 그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뎠다. 알파의 정액이 아니었다면 형님들에게 구걸하거나, 통증에 가까운 욕구를 참느라 내내 울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데, 그때만 되면 수도꼭지가 되는 자신이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그 짓 할 땐 특히 더. 좋아하는 이들도 있지만, 반대로 뚝 그치라며 뺨을 갈겨 버리는 못된 새끼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나오는 눈물을 틀어막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쿠터는 수리점에 맡겨 두었다. 건수가 많아 며칠 더 걸리겠단 전화만 반복됐다. 그나마 히트 사이클이 끝난 덕분에 컨디션이 좋아져 다행이었다. 뻐근한 어깨를 휘휘 돌린 예준은 고픈 배를 부여잡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데는 이미 도가 튼 처지였다.
치문은 수화음이 채 세 번도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치문아. 바빠?”
―형, 왜 이제야 전화를 해!
인사도 없이 돌아오는 추궁에 예준은 대강 사정을 설명했다. 알파도 아닌 베타 나부랭이에게 처맞아서 아스팔트 위를 나뒹굴었다고. 스쿠터는 다행히 폐차를 면했고 운 좋게도 보상해 주겠다는 사람은 대단히 부자라고.
―괜찮아? 어디 부러진 거 아냐? 어떤 씹새끼들이 또 우리 형을 괴롭혔대? 나 불렀으면 흠씬 두들겨 줬을 텐데!
“순식간이어서 그럴 정신도 없었어. 많이 다치지도 않았고 치료도… 받았으니까 신경 쓸 거 없어.”
―난 또 잠적한 줄 알고 가슴 쓸어내렸네. 형, 내가 말했지. 아무리 곤란해도 도주는 안 돼. 형님들 뿔나면 존나 무서운 거 알죠.
모를 리 없었다. 이미 전적이 있었고, 그 후폭풍에 관해서는 되새기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나 없을 때 우리 집 왔었지?”
―어떻게 알았대?
“문손잡이가 찌그러졌던데. 그럴 사람 너밖에 없잖아.”
대부분의 일을 힘으로 해결하는 치문이기에 자신의 부재가 그를 폭력적으로 만들었어도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히트 사이클 직전에 헤어졌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형…. 발정기는 끝났어?
예준은 두툼한 손으로 전화기를 든 채 눈을 가늘게 떴을 그를 상상했다. 무엇이 궁금한지 모르지 않았다.
“괜찮아.”
―형님들 아무 말 없던데.”
“형님들이랑 안 했어.”
―안 하고 쌩으로 버텼다고?
“그건 아닌데.”
그날 일은 굳이 상기하고 싶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뱉기가 껄끄러웠고 떠올리면 괜히 목덜미가 간지럽기도 했다. 이전엔 한 번도 겪지 못한 일인 데다 어딘가 낯설고 어색한 기분이 들어 등줄기에 소름까지 돋았다.
어릴 때부터 운동만 해 온 탓일 수도 있고 밑바닥에서만 굴러먹은 탓일 수도 있다. 예준은 누군가 자신을 그토록 부드럽게 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과민 반응이라 해야 할지, 거부 반응이라 해야 할지. 분주하게 이유를 찾았지만 애초에 셈이 빠른 머리가 아니었다.
그날, 예준은 소유하길 꿈꿔 본 적도 없는 그 대단한 남자와, 아름다운 주택과, 사람다운 대접에 하마터면 혹할 뻔했다.
―왜 말을 안 해요? 이거 참 궁금해지네.
“그냥 잘 넘어갔어.”
어설프게 둘러대자 치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파고들면 질색할 걸 알기에 참는 눈치였다. 예준은 괜히 미안한 마음에 목덜미를 긁었다.
그보다 스쿠터가 망가졌다고 며칠을 허송세월 보낼 수는 없었다. 당장 돌아오는 이자 상환일을 맞추기 위해 예준은 뒤늦게 용건을 꺼냈다.
“혹시 현장에 빈자리 없어?”
―그쪽 부자라며. 어차피 합의금 두둑이 챙겨 줄 텐데 이참에 좀 쉬지?
합의금만 믿고 속 편하게 놀 깜냥은 못되었다.
“내내 앓았더니 뻐근해서. 몸 좀 풀려고.”
―알아보고 연락해 줄게요.
“그래. 고맙다.”
막 통화를 마무리하려는데 동시에 휴대폰 너머의 공간이 시끄러워졌다. 걸걸한 목소리가 여럿 겹치는 걸 보니 치문이 있는 곳으로 형님들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치문이 휴대폰을 든 채 뭐라 중얼거리자 곧바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쁜아, 해가 중천이다. 현장엔 자리 없어. 사무실로 와서 커피나 탈래? 오늘 손님맞이 잘하면 일당 쏠쏠히 쳐줄게.
정명 형님이었다. 다짜고짜 이어지는 희롱에 예준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밤새 부려 먹은 복도 청소로는 모자랐던 걸까. 기어코 자존심을 짓밟아야 성이 풀리겠다는 듯, 요구하는 일에 헛웃음이 났다.
구구절절 따지고 들던 시기는 지났다. 예준은 퍽 주눅이 든 목소리로 답했다.
“아, 예. 갈게요….”
―애간장 녹게 하지 말고 서둘러 와. 여기 애들이 너 보고 싶다고 난리다.
“예…. 뭐….”
별다른 반응이 없자 전화는 간단히 끊어졌다. 후우, 한숨을 내쉰 예준은 열감이 느껴지는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가 며칠 돌보지 못해 엉망인 집 안을 살폈다. 고작 열 평 남짓한 단칸방. 그마저도 반지하라 해가 잘 들지 않았다. 여름 내내 괴롭도록 들끓었던 곰팡이는 가을이 깊어지며 잠잠해졌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부쩍 낮아졌다. 이제 배수관 따위가 어는 것을 슬슬 걱정해야 할 시기였다. 뼈 빠지게 일하느라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잔다지만 그래도 짧은 인생, 자신의 전부가 이곳에 있었다.
가구랄 것은 없고 옷가지나 잡기들이 바닥에 들러붙은 듯 굴러다녔다. 그것들은 언제 사라져도 아쉽지 않겠으나 딱 하나 분신처럼 아끼는 물건이 있었다.
이 집의 유일한 장식품. 그마저도 투박하게 못질한 못에 걸려 있었다. 딱히 기운이 깃들지도, 저주가 걸리지도 않았는데, 형님들은 때때로 집을 뒤집어 놓으면서도 금빛으로 빛나는 그 물건만큼은 절대 손대지 않았다. 복권 사기 전에 만져나 보자는 형님들도 있긴 했다. 조금 전 통화한 정명 형님이나 그의 따까리들처럼.
예준은 금빛 메달을 쓱쓱 만져 보곤 손을 떼어 냈다.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았더라면 몇 개나 더 목에 걸었을지 모를 포상이었다.
이제는 볼 때마다 가슴을 내리치던 절망 또한 옅어졌다. 마주하며 웃을 수도 있었다. 귀가 터지도록 크던 함성마저 당당하게 상기할 수 있게 되었다.
태연하게 하품한 예준이 눈가에 배어난 생리적인 눈물을 손등으로 툭 찍어 냈다. 한낮임에도 어두컴컴한 반지하 방에 서 있다 보니 그 밤, 귓가를 자주 스치던 손길이 문득 떠올랐다.
연기처럼 사라지려던 장면을 붙잡아 당겼다. 다리 사이로 들어오던 탄탄한 허벅지, 목덜미에 촉촉하게 달라붙던 입술의 감촉이 아직 선명했다. 흐리게 흩어지던 귀엽다는 말, 예쁘다고 속삭이던 다정한 말투, 말도 안 되는 크기의 성기, 셔츠가 잘 어울리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관능적인 몸매, 흉내 낼 수 없는 귀티까지.
무엇도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알파라면 진절머리가 나야 마땅했다. 히트 사이클이 오면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당한 게 수십 번이었다. 히트 사이클이 아닐 때도 별반 다를 것이 없기에 다른 오메가들처럼 순응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날, 그 남자와 그 밤은….
예준이 보기 좋게 어깨를 떨었다. ‘이태경’의 완벽함을 상기하며 자신의 초라한 단칸방을 둘러보았다. 어떤 것 하나 번잡스럽고 구질구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런 주제에, 그렇게 잘난 우성 알파와 하룻밤을 다 보내고.
“김예준 출세했네.”
중얼댄 예준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마주한 벽 모서리에 그제야 겨우 햇살 한 점이 비치고 있었다.
*
정명이 예준을 불러들인 곳은 새로 부지를 닦는 데 한창인 현장이었다. 거대한 굴착기 몇 개가 부지런히 땅을 파내는 장면 뒤로 으리으리한 간이 건물이 보였다. 보통은 컨테이너 따위를 사무실로 쓰지, 건물까지 세워 놓진 않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에 우리 보쓰 형님이 사업 크게 하신다잖냐.’
언젠가 그렇게 허풍을 떠는 정명을 본 적이 있었다. 조폭들이 하는 일이라고 해 봐야 어차피 불법이고 제대로 된 사업에도 비할 바는 못 될 테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규모가 남달랐다. 재개발, 재개발, 노래를 부르더니 자신이 두 발 딛고 선 땅뿐만 아니라 주변이 죄다 철거 중이거나 공사 중이었다.
“별일이네.”
중얼거린 예준이 훅 이는 먼지에 콜록거렸다. 눈치껏 인부들을 피해 건물로 향하자 한 손에 검은 봉지를 들고 선 치문이 보였다.
“왔어?”
“안 늦었지?”
“늦긴. 아이고, 우리 형 얼굴이 반쪽이네.”
“반쪽은 무슨.”
“밥은?”
“아직.”
치문이 혀를 끌끌 차며 예준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성하지 않은 곳은 모두 옷으로 가렸으니 사정을 들킬 일은 없었다. 발가벗겨진 기분에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자 치문은 괜히 들고 있던 검은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요기부터 하자.”
“뭔데?”
“도시락.”
“뭘 이런 걸 다.”
“나 아니면 누가 형 끼니를 챙겨요.”
맞는 말이기는 했으나 공짜 밥이라고 마냥 좋아할 순 없었다. 제 코가 석 자일 텐데도 치문은 예준을 극진하게 챙겼다. 대우받던 사람은 끝까지 대우받아야 비참하지 않다고 말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고맙다.”
“별말씀을 다.”
과거의 영광이 지금 와 무슨 소용이라고. 예준은 계단을 두 개씩 건너뛰어 지하로 향하는 치문을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협소한 공간에는 아직 다 치우지 못한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들여놓은 것이라고는 뭘 수납하는지 모를 캐비닛, 초록색 미끄럼 방지 패드가 깔린 탁자, 어디서 주워 온 것이 분명한 낡은 소파가 다였다. 모든 물건의 마감이 엉성해 화학 성분에 노출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긴 이래도 위는 번드르르하지?”
예준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물었다. 치문은 입맛을 쩝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은 따까리들이나 여기 쓰지.”
치문은 손수 도시락을 까 주며 ‘돈가스 든 게 더 맛있어.’ 하고 중얼거렸다. 맛있는 도시락을 예준 앞으로 민 녀석이 나무젓가락을 갈라 건넸다.
“맛있는 거면 너 먹지.”
치문은 양복 위로 도드라진 제 알통을 퍽퍽 두드렸다.
“나야 이렇게 딴딴하니까 돈가스 같은 거 안 먹어도 되는데! 형은!”
별안간 성을 낸 녀석이 예준의 마른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여.”
“왜 악담하냐?”
“그러니까 많이 좀 먹으라고.”
고기란 고기는 다 예준의 반찬 위로 겹쳐 놓는 녀석이었다. 실랑이를 벌여 봤자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에 예준은 고분고분 돈가스를 입에 가져갔다.
내내 비었던 위장에 음식이 들어가자 부대끼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치문의 눈치가 보여 젓가락을 놓을 수는 없었다. 밥을 반절만 비우고 지상으로 솟은 창문을 바라보는데 치익, 하며 차 여러 대가 건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때마침 치문이 물었다.
“아저씨는 아직 연락 없지?”
예준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치문에게서 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기까지는 항상 시간이 걸렸다. 형님들 뒤꽁무니 따라 채무자들 겁주는 게 제 일이면서, 치문은 항상 예준 앞에서만 몸을 사렸다.
“형님들한텐 말 안 할 거지?”
“당연히 카바 쳐 주지.”
예준은 옅은 한숨과 함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얼마 전에 전화 와서 백만 원만 넣어 달라기에 넣어 줬어.”
“어디 있다는데?”
“어디 있다는데?”
“경기도 어디 하우스인 거 같은데, 정확히는 몰라.”
치문이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아저씨는 왜 형 발정 나기 직전만 되면 전화해서 지랄이래?”
“야. 발정이 뭐냐, 발정이.”
“아니 씨발, 그러니까 맨날 약도 못 먹고! 형님들이랑….”
얼굴도 모르는 사람 계좌에 백만 원을 쏴 주고 보니 수중에 남은 돈이 만 삼천 원이었다. 오십만 원이 훌쩍 넘는 억제제를 사서 먹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치문에게 꾸는 것도 한두 번이지, 발정이야 떡 쳐서 해결하면 그뿐이었다. 거기다 이번 히트 사이클은 제법 고상하게 보냈으니까.
한참 구시렁대던 녀석이 물티슈를 쑥쑥 뽑아 건넸다. 그걸로 입가를 닦은 예준이 얼른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손님맞이하랍시고 부른 것답게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여럿이었다.
궂은일 하는 형님들이야 꼴이 후지다지만, 윗대가리들은 제법 말끔한 편이었다. 보스와 함께 사업체를 운영하는 형님들은 여느 기업가 못지않게 부티가 난다고 했다. 이 조직에는 도끼파니, 양은파니 하는 유치한 간판도 없었다. 지나친 소속감에 사고 치는 것들이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묻어야 할 일이 생기면 차라리 이름 없는 편이 처리에 더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예준은 조직과 채무 관계로 엮여 있었다. 예준의 아버지, 재우가 아니었다면 평생 쳐다보지도 않았을 사람들이었다. 조폭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존재였는데 이제는 채무 상환 때문에 하루가 멀다고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채에 연 50%가 넘는 이자를 붙이는 쓰레기들. 그러나 1원도 벌기 힘들 때 용돈벌이라도 하라고 불러 주는 사람 또한 이들뿐이었다. 돈을 모두 갚기 전까진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평생 일해도 빌린 돈을 다 갚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남몰래 제 처지를 한탄한 예준이 몸을 일으키던 순간이었다.
“윽!”
예준이 다급히 코를 틀어막았다. 예고 없이 낯선 페로몬이 들이친 탓이었다. 숨을 참는 저를 의아하게 보는 치문에게 예준은 억지로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왜 여기 우성 알파가 있어?”
“아, 오늘 보쓰 형님 오신댔는데 그래서 그런가?”
“보스 형님?”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예준이 주로 마주치는 형님들은 별 볼 일 없는 열성 알파지만, 마주치지 못하는 형님 중에는 드물게 우성 알파도 있다고. 이들이 보스라고 부르는 사람 또한 그러했다. 애초에 우성 알파가 아닌 사람이 조직을 이끌 리 없으니까.
“괜찮아요?”
“…어. 아직은.”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않는 알파들은 주로 난잡한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려고 일부러 페로몬을 노출하는 놈들도 있었다. 오메가만이 느낄 수 있는 격차라고 해도 근본 없는 조폭들이니 애초에 때와 장소를 가릴 이유가 없었다.
“올라가자.”
죽을 만큼 괴롭지는 않아도 예준은 알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정명 형님이 이런 상황을 모르고 호출했을 리도 없고. 골탕이나 먹이며 재미나 보자는 것 같은데, 심보가 못돼먹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상기되는 두 뺨에 손바닥을 대며 예준은 치문을 따라 계단으로 향했다. 꼭대기인 3층은 들어서는 입구부터 지하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허리를 반으로 굽혀 인사하는 치문을 방패막이 삼아 예준은 겨우 고개만 꾸벅거렸다. 조폭에게 빌어먹는 신세라 할지라도 그들처럼 살고 싶지는 않은 탓이었다. 디귿 자로 놓인 소파에 옹기종기 모인 정명 형님과 그의 따까리들이 일제히 손을 흔들었다.
일어나 치문을 옆으로 치운 정명이 예준의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너 같은 놈들은 비쩍 마르면 볼품없어.”
물건 보듯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치문과는 확연히 달랐다. 기계처럼 어색하게 웃어 보인 예준이 슬그머니 정명의 손을 치워 냈다.
“진짜 커피만 타 드리면 일당 주실 거예요?”
“당연하지. 온종일 시멘트나 지고 나르는 것보다 낫지 않냐? 가게 싹 뒤져도 너만 한 애가 없어. 하겠다는 애들 다 물리치고 너부터 부른 거야.”
정명이 목소리를 낮추어 예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보쓰 형님도 오셨으니까 얌전하게 차 시중만 들고 가라.”
“예.”
술집 창부와 비슷한 취급이라 하더라도 이젠 대체로 무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곧바로 대답한 예준은 정명을 따라 탕비실로 향했다.
굳게 닫힌 문 너머, 모인 사람 중 적어도 셋은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않은 우성 알파였다. 본능적으로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몸이 달아오르고 귓불까지 발개졌음을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꼴로 들어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도 예준은 조용히 커피만 탔다.
제 것을 먼저 달라 아우성치는 열성 알파들에게 커피 믹스를 돌린 뒤 안으로 가져갈 차를 챙겼다. 생전 본 적도 없는 고급스러운 차에서 씁쓸한 향이 났다. 쟁반을 들고 선 저 자신이 썩 떳떳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말은 되도록 하지 말고. 묻는 말에는 대꾸하고.”
정명이 으름장을 놓았다. 애초에 방 안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생각 따위 없었으니 괜한 수고였다. 고개를 끄덕인 예준은 노크 후 문을 연 정명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모르나 예준이 등장하자마자 말소리가 멎었다. 서로 눈빛을 나누며 키득대는 조직원 둘을 지나 예준은 가장 상석에 앉은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당연하게도 존재감 없이 차만 놓고 나가기는 무리였다. 방 안의 모든 사람에게 동물원 원숭이처럼 관찰당했다. 알파들의 야릇한 시선이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이를 꽉 깨문 예준은 사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찻주전자와 잔을 내려놓았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들어 사내를 보았다. 쥐고 있던 지팡이를 팡팡, 내리친 사내는 예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욕부터 지껄였다.
“천한 오메가 놈들은 이불 위 아니면 영 쓸모가 없어.”
차를 따르기도 전에 패악질이었다. 보스로 보이는 사내는 생각보다 나이가 지긋했고 풍채가 좋았다. 두 눈은 가로로 찢어져 매서웠고, 페로몬은 입버릇만큼이나 천박하고 노골적이었다.
예준은 가까스로 숨을 고르며 차를 따랐다. 이런 놈들 앞에서도 발정하는 제 처지가 끔찍하게 징그러웠다. 그 혐오감에 쐐기를 박듯 누군가 고함쳤다.
“저 새끼 가랑이 젖었나 확인해 볼까?”
“아하하!”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보스가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허허실실 따라 웃는 정명도, 보스의 비위를 맞추려는 아랫사람들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목청껏 깔깔댔다. 예준은 그제야 왜 자신이 여기 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때 말끔히 양복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예준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형님 얘 모르시겠어요? 왜, 오 년 전인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서 광고도 찍고 했던 새낀데.”
“아, 그 태권도복 입고 발차기하던 광고?”
“그땐 지가 베탄 줄 알았겠지. 신세가 이리될 줄도 모르고.”
자신의 과거를 아무렇지 않게 떠드는 사람들에게 예준은 투명 인간처럼 차를 따라 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처럼 그 당시에는 이렇게 살게 되리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때보다 지금이 더 예쁘장하니 귀엽잖아요.”
정명이 말을 보탰다. 편이라도 들어 뿌듯한지 그가 예준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말에 보스가 예준의 팔을 잡아당겨 제 가까이 붙였다. 턱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 탓에 까슬한 수염이 따갑게 느껴졌다. 억지로 목 폴라를 내려 목덜미 냄새까지 맡은 그가 선명하게 남은 키스 마크를 보고 맨바닥에 퉤 침을 뱉었다.
“추잡하기 짝이 없어.”
훅 미는 힘에 예준은 여지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물건처럼 내쳐졌음에도 더러운 손길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아픔 따윈 느낄 새도 없었다. 겨우 다시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바지 허리춤에 사내들의 손이 닿았다. 마구 끌어당겨, 정말로 엉덩이 사이를 확인하려 드는 몇몇 때문에 예준은 그제야 소스라치게 몸을 떨었다.
“이 새끼 김재우 아들이지?”
“예.”
“잡았어?”
“아뇨. 어찌나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는지 가 보면 도망가고 없어요.”
보스의 질문에 정명이 또박또박 답했다. 재우는 하우스를 전전하며 여기저기로 도망 다니는 중이었다. 제 명의도 모자라 아들 명의로도 사채를 써 놓고 착실히 갚을 생각은 하지 못하는 한량이었다. 이미 예준의 저축뿐만 아니라 연금까지 한 번에 받아 탕진한 뒤였다. 부채 또한 손쓸 수 없을 만큼 늘어 버렸다.
“노름판 전전하면 어디서 돈이 솟는다디?”
“땄다 잃었다 하나 보더라고요.”
어차피 사채업자의 목적은 원금 회수가 아니었다. 원금의 액수를 늘리고 이자를 불리는 게 목적이기에 한 번 발을 담근 사람은 다시 빠져나오기 쉽지 않았다.
“그 새끼 찾으면 손목이라도 잘라서 정신 차리게 만들어.”
냉혈한 저 사내가 채무자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몇 년 동안 시달리면서도 실체를 확인하긴 처음이기에 예준의 손끝이 떨렸다.
그러면 뭐 하나,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발현 이후 당장 눈앞에 있는 상대 하나 때려눕히기도 힘든 약체가 되었다.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몸소 겪으며 깨달았다. 이미 칭칭 감긴 목줄을 끊어 낼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이. 손목 자르면 사람 구실 못하죠. 어디 공장에라도 끼워 넣으려면 음, 새끼손가락 정도…?”
“그거야 눈치껏 하면 될 일이지.”
사람 하나 썰어 버리는 것 정도야 우스운 사람들이었다. 농담처럼 오간 이야기가 정말 농담으로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 예준은 알고 있었다.
“회의나 하게 저 냄새나는 것 치워!”
사내들의 손길에 휘둘리던 예준은 이미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공포감에 두 눈은 빨갛게 충혈되었고 그들의 예상처럼 가랑이 사이도 축축했다.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않는 알파라면 ‘언제 어디서든’ 오메가를 범할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다리를 벌리고 알파를 받을 수 있는 몸이라는 게 누구나 오메가를 혐오하게 된 이유였다.
“야, 임마! 어디 가!”
예준은 정명이 손을 뻗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탕, 탕, 사내가 지팡이로 바닥을 치는 소리를 뒤로한 채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
사흘 뒤, 스쿠터 수리가 끝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수리 업체에서 보내온 영수증 사진을 메시지에 첨부해 놓고 예준은 잠시간 뜸을 들였다. 경찰서를 통해 제 연락처를 알았을 텐데도 남자는 연락이 없었다. 설마 합의금을 떼먹지는 않을 테지만, 말도 없이 집을 떠나 버린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명함을 한 손에 든 채 고민하던 예준은 곧 떳떳이 받을 돈이니 주눅들 필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쿠터 수리 끝났어요]
간단히 용건을 적어 보내고 어제부로 꺼낸 전기담요에 몸을 뉘었다. 중요한 자리에서 깽판을 놓았으니, 얼굴을 비추려면 며칠 더 몸 사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준은 치문이 뒤늦게 들고 나타난 일당의 반절을 물리치지 않고 챙겨 받았다. 정명이 준 것이 맞느냐고, 네가 괜히 내 생각에 가져온 것 아니냐고 물었을 때 치문은 흐지부지 말을 얼버무렸다.
“쓸데없이 착해 빠져서.”
치문의 얼굴을 떠올린 예준이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날, 녀석에게 추한 꼴을 들켜서인지 체한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얼마 후, 답장이 도착했다.
[계좌번호 알려 주면 바로 입금해 줄게요.]
담백하게 돌아온 말에 예준은 아차 싶었다. 제 통장은 죄다 압류된 지 오래라 쓸 수 있는 계좌가 없었다. 머리를 긁적이다 벌떡 일어나 앉은 그는 치문의 통장이라도 빌릴까 하다가 이내 가능성을 묻었다. 형님들이 알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최대한 안전하게 받는 것이 우선이었다.
[혹시 현금으로 받을 수 있을까요?]
[만나서?]
[네]
[언제가 좋아요?]
[저는 오늘도 괜찮아요]
최대한 빨리 스쿠터를 찾아 배달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다음 답장이 돌아오기까지는 십 분이 더 걸렸다.
[괜찮으면 회사까지 와 줄 수 있겠어요? 일이 너무 바빠서.]
예준이 다시 명함을 들어 회사의 주소를 확인했다. 강남까지는 버스로 사십 분이 걸렸다. 온종일 시간만 죽여야 하는 형편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몇 시에 갈까요?]
[일곱 시에 봅시다. 로비 직원한테 나랑 약속 있다고 말하면 돼요.]
모든 대화가 군더더기 없이 돌아갔다. 하긴, 오메가 하나 때문에 굳이 열을 올릴 우성 알파가 있을 리 만무했다. 심지어 그날 실컷 성욕을 푼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었다. 똥 밟은 셈 치겠지, 간단히 치부한 예준이 즉시 답장을 써 보냈다.
[네 알겠습니다]
*
40층은 훌쩍 넘을 듯한 건물을 예준은 굳이 목덜미까지 잡아 가며 올려다보았다. 고층이지만, 흉물스럽지 않았고 주변 건물들과 조화롭게 느껴져 의외였다. 외벽에 간판이 빼곡히 붙어 있지 않은 건물은 오랜만에 보는 듯했다. 이 근처론 도통 올 일이 없어서 모든 점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었다.
부쩍 짧아진 해 때문에 이미 하늘은 깜깜했다. 도시의 현란한 불빛들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지 십 분이 지났음에도 약속 시간까진 이십 분이 남아 있었다.
바람이 차서 편의점에라도 들어가 있을까 하다가 딱히 뭘 사서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건물 모퉁이에 서서 시간을 보냈다. 예준은 약속 시간 삼 분 전에 맞추어 건물의 회전문에 몸을 들였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직원의 말처럼 ‘LK Architects’는 39층이라 쓰여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무덤덤하던 가슴이 조금씩 고동을 내며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합의금을 받게 되어서 기쁜 건지, 남자를 다시 보기가 껄끄러운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예준은 내내 굽어 있던 어깨를 펴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깔끔히 닦인 구두가 보였다.
“미안해요. 여기까지 오게 해서.”
아래에서 언질을 들은 것인지 남자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안간 잘생긴 얼굴이 나타나자 예준은 본의 아니게 당황하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형님들에게도 그러지 않는데 불필요하게 허리까지 굽혀 인사했다. 겨우 시선을 마주하자 남자의 입가에 옅은 웃음기가 걸렸다. 완벽히 갈무리된 페로몬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확실히, 자신의 주변과는 격이 다른 남자였다.
“잘 지냈어요?”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늘, 잘 지내지는 못했다.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느라 입술만 달싹였다. 먼저 그날 일을 해명해야 맞을까. 그러나 용건 이외의 대화는 부담스러웠다.
“입술은 다 나았네.”
남자는 그다지 대답을 들을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가 분별없이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인상을 찌푸리자 손은 금세 떨어져 나가 애꿎은 등허리에 안착했다.
“들어가요.”
그는 오늘도 셔츠 차림이었다. 열린 단추 근처에만 구김이 있는 걸 보면 하루가 꽤 고되었던 모양이다. 드문드문 불 꺼진 사무실을 둘러본 예준은 퇴근 시간이 지났음을 뒤늦게 인지했다. 회의실로 보이는 곳만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공간이 통유리로 분리되어 있어 그 안에 대여섯 명쯤 되는 사람들이 모여 앉은 것이 보였다.
태경이 향한 곳은 그의 사무실로 보이는 공간이었다.
“회의 끝날 때까지 십오 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은데.”
“기다릴게요.”
예준은 태경의 손길에 이끌려 모양이 특이한 테이블에 착석했다. 어딘가 분주해 보이던 그가 양해를 구하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돌아온 그는 하얀색 머그잔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거 마시고 있어요. 여기 태블릿 있으니까 갖고 놀아도 되고.”
베이지색 거품이 몽글몽글한 핫초코, 비밀번호가 걸려 있지 않은 태블릿 PC가 눈앞에 놓였다. 침대 위에서 그렇고 그런 짓까지 다 한 마당에 이 남자는 대체 저를 몇 살로 보는 걸까?
의문이 들었음에도 예준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핫초코 잔을 쥐자 얼었던 몸이 녹았고, 꽤 오랜만에 보는 태블릿에도 흥미가 일었던 탓이다.
고개를 끄덕인 예준이 핫초코를 한 입 들이켰다. 태경은 눈만 맞춘 뒤 사무실을 떠났다. 그가 회의실로 들어가 사람들과 다시 말을 섞는 모습을 예준은 곁눈질로만 흘겨보았다.
대표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딱히 무게감 있게 구는 성격은 아닌 듯했다. 직원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태도, 의견을 피력하며 표정을 느슨히 풀었다 조이는 남자는 한편으로 건실한 사회 초년생처럼 보였다. 잘 모르지만, 일에 열정이 있었다. 목적지가 명확해서 어디에서든 길을 헤맬 것 같지 않은 남자였다.
몇 살일까?
태블릿 PC는 가뿐히 치워 버린 예준이 태경을 응시했다. 자신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 같다. 좋은 집안에서 잘 교육받고 자란 알파들은, 아무리 알파라 할지라도 저토록 고귀한가 싶었다. 베타였어도 알파만큼의 인기를 누렸으리라 확신했다. 누구나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 안달할 테니까.
합의금만 받으면 더는 엮일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남자가 자세를 바꿀 때마다 셔츠 위로 드러나는 근육질의 몸을 보자 욕구가 동했다. 환각처럼 떠오르는 밤을 때마다 밀어내기도 피로한 일이었다.
오메가인 자신을 탓하며 예준은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했다. 따뜻한 핫초코를 열심히 삼키자 배 속이 뜨거워졌다.
“…….”
회의실이 조금 떠들썩해졌을 때, 예준은 직원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챘음을 깨달았다. 함의가 깃든 시선들이 어느 순간 제게로 향했다.
‘김예준 선수.’
이럴 땐 사람들의 입 모양이 비상하게 읽혔다. 예준은 태경의 눈이 커졌다가 제 크기를 찾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내 직원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던 그는 뒤늦게 흥미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았다.
이어질 이야기는 그리 유쾌하지 않을 터였다. 부담스럽게 집중된 이목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예준이 입술을 꾹 깨무는 동시에 태경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태경은 곧 리모컨을 들어 예준이 있는 사무실을 불투명하게 전환해 버렸다.
이윽고 해방된 예준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오래라 해도 수치심은 옅어지지 않았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추락.
오메가로 발현해 더는 운동선수로 남지 못한 이들도 많다지만 아버지의 사기 혐의, 폭력 시비 등으로 기사에 오르내리는 저 같은 사람은 드물었다.
태경은 정확히 십오 분 후에 다시 사무실을 찾았다. 컵을 거의 다 비운 예준이 목을 가다듬었다.
“어릴 때부터 외국에서만 살아서 예준 씨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몰랐어요.”
구설수에 관해 들었을 텐데도 태경은 장난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거의 국민 요정급이었다던데.”
예준의 얼굴이 화륵 달아올랐다. 그 별명은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 되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마주 앉은 태경이 말을 멈추자 초조함이 더 심해졌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경험한 탓인지 히트 사이클 때처럼 소름이 돋았다. 하물며, 페로몬에 더 자주 노출될수록 히트 사이클 주기가 빨라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배가 간지럽다 못해 아팠다. 좁은 방 안에 단둘만 있는 시간이 지속되자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발정기가 아니어도 우성 알파의 존재감은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이곳에 오메가의 흔적이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날.”
태경이 입을 뗐다. 별로 곱씹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같이 식사하고 싶었어요.”
탁자에 팔꿈치를 댄 그가 상체를 기울였다. 예준은 남자의 목덜미를 보고 침을 질질 흘려 댔던 때와 비슷한 자극을 느꼈다.
“도대체 그 메모는 뭐였어?”
태경이 곤란한 듯 목덜미를 만지작댔다. 예준이 입술을 뗐다.
“진심이었어요.”
“예준 씨가 버린 것들도 다 봤는데, 나를 무슨….”
태경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아니, 정액….”
차마 말을 잇지 못한 그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예준은 하마터면 일어나 그의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아, 여기서 하기는 좀 부적절한 이야기죠.”
“…네.”
“결론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던 걸로 생각해도 되겠죠?”
“네.”
우성 알파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치고는 퍽 겸손했다. 나쁘지 않았던 정도가 아니라 참을 수 없이 황홀한 밤이었다. 때때로 지나치게 격렬하긴 했으나 정성스러운 애무를 받은 뒤였기에 고통보다는 쾌감이 더 컸다.
“그런 건 처음 해 봤어요.”
“뭘?”
“정상적인 섹스….”
예준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예준에게 이제까지의 섹스는 거의 엎드린 자세로 열성 알파의 성기를 받는 일에 불과했다. 종종 남자의 몸을 혐오하는 이들도 있기에 눈에 거슬릴 만한 것은 손으로 잡아 감추어야 했다. 거기다 형님들에게 애무란 주로 살덩이를 쭉쭉 빨아 아프게 만드는 행위였다.
“그날, 예준 씨가 좋다는 말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해요?”
태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의식이 흐리긴 했지만 어림잡아도 백 번 이상이었다. 순순히 답하고 싶지 않아서 예준은 그저 머그잔 손잡이만 만지작거렸을 뿐이다.
태경이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바깥 기온이 8도인데.”
“네?”
“티셔츠 한 장이 다네. 그렇게 얇게 입고 다니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처음엔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했다. 예준은 초가을에나 어울릴 법한 얇은 긴소매 티셔츠 차림이었다. 집에 굴러다니는 점퍼는 너무 낡고 해졌기에 굳이 입지 않았다.
“그냥 별생각 없이.”
태경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커다란 책상 서랍에서 얇은 봉투 한 장을 꺼내 예준 곁으로 왔다. 그사이 소파에 걸어 둔 점퍼까지 챙기는 모습을 예준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점퍼 안쪽을 드러낸 태경이 주머니를 가리켰다.
“합의금은 이쪽에 챙겨요. 바지 주머니보단 나을 테니까.”
손수 안주머니에 봉투를 끼워 넣은 그가 예준의 팔을 당겼다.
“일어나서 팔 끼워 봐요.”
“입으라고요?”
“좀 크겠지만, 거슬릴 정돈 아닐 거예요.”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싼 점퍼였다.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빌려주다니 예준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었다. 태경의 도움을 받아 점퍼를 입은 예준은 알아서 지퍼까지 잠가 주는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밖에서 안 보이니까 이런 거 해 줘도 돼요.”
“아, 그게 신경 쓰이는 건 아닌데요.”
“그럼?”
“이거 비싸 보이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태경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왜. 꿀꺽하게요?”
“그게 아니라….”
“다음에 만날 때 돌려주면 되지.”
“다음에요?”
그로서도 귀찮은 일은 끝났을 텐데 굳이 다음을 언급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예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넉넉한 품의 점퍼를 내려다보았다. 가볍고 포근하다고 생각하는 사이, 저도 모르게 그에게 이끌려 가고 있었다.
“도하와 관련한 일은 이렇게 마무리해도 되겠어요?”
“네.”
더한 일은 감당할 깜냥도 처지도 못되었다. 스쿠터 수리비만 보상받으면 군소리를 더 할 이유가 없기에 예준은 곧바로 수긍했다.
“혹시 그 애가 또 귀찮게 하면 경찰보다 차라리 나를 부르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천적처럼 으르렁대던 두 사람을 기억한다. 명색이 그 건방진 고등학생의 보호자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준이 생각하기엔 그 애도, 제 옆에 선 이 남자도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예준은 별다른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눈을 피해 걷다 보니 다시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태경이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식사라도 하면서 말하면 좋겠지만, 보다시피 또 들어가 봐야 하는 상황이라.”
“더 하실 말씀이라도….”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예준은 괜히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정기적으로 관계 맺는 알파가 있는지.”
무례하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물어봐도 될까요?”
태경의 우려와 달리 예준은 그런 질문에는 둔감했다. 정기적으로 관계를 맺는다라. 섹스 파트너의 존재 여부를 묻는 말이라면, 일하기도 바쁜 데다 그런 호사를 누릴 처지도 아니었다. 발정기엔 아무거나 주워 먹기 바빠서 탈이 나기 일쑤였고 그마저도 어려운 날에는 꾸역꾸역 참으며 버텼다.
“없어요.”
간단히 말하자 엘리베이터는 20층을 지나고 있었다. 예준은 어렴풋이 뒤따를 말을 예상했다. 형질 때문에 전해지는 긴장은 비단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엘리베이터는 어느 층에서도 멈추지 않고 곧장 로비로 향했다. 남자는 가볍게 입술을 뗐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욕구 해소를 못 하면 곤란할 때가 많잖아요. 꼭 발정기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따로 파트너를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성욕이 남다르니까. 그건 예준 씨도 어느 정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예. 그렇죠.”
이윽고 발을 디딘 로비는 한산했다. 예준은 등에 닿은 남자의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걸었다. 입구에 다다른 남자가 부드럽게 몸을 마주 세웠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혹시 파트너 둘 생각 없어요?”
예준의 두 뺨이 전에 없이 달아올랐다. 형님들 앞에서 온갖 음담패설을 다 들을 때도 무감하던 몸이 남자의 부드러운 음성에는 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섹스 파트너요?”
“그래. 섹스 파트너.”
남자가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정액받이 삼겠다고 으름장을 놓아도 모자랄 판에, 다정하게 의사를 묻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침대에선 다소 거친 그일지라도 이성이 존재할 땐 한없이 친절했다. 보통의 알파들은 침대 위에서와 평소 태도가 일관적이기에 신선했다.
머뭇거리자 남자가 열 오른 손목을 쥐었다. 고개를 기울여 조금 더 깊이 시선을 맞춰 왔다.
“그날 나만 만족했던 건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그건 그렇지만.”
“당황하게 만들려던 건 아니었어.”
“네.”
“당장 대답하라는 거 아니에요.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나중에 연락해도 좋으니까.”
뒷주머니로 손을 뻗으려던 남자가 이내 행동을 멈추었다.
“내 명함도 있을 거고, 번호도 있을 테니 필요하면 연락해요.”
“제가 필요할 때요?”
그가 오메가를 대하는 방식은 그간 예준이 겪어 온 하대와 사뭇 달랐다. 굴복당하기 싫어 반항할 필요도, 무력감에 미리 체념부터 하고 나설 필요도 없었다.
“파트너는 말 그대로 동등한 관계가 되자는 의미에요. 내 욕구만 채울 거였으면 파트너 제의를 하진 않지. 전화 한 통이면 달려올 사람이야 넘치는데.”
성욕으로 곤란하다고 해서 어떤 알파를 호출할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히트 사이클만 해도 과분한 제안인데 필요할 때면 언제든 연락하라니.
“…아무 조건 없이요?”
“조건이나 대가 없이. 발정기가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나 역시 일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불편한 때가 오면 예준 씨한테 연락할 테니 여건이 되는 한에서 성실히 만나 주면 돼.”
귀가 솔깃했다. 그날 밤처럼 황홀한 관계를 지속해서 맺을 수 있다는 기대보다도 발정기 때 더는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정액을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비밀은 지켜 줬으면 좋겠어요. 결혼 적령기라 본의 아니게 지켜보는 눈이 많거든.”
섹스 파트너, 결혼, 모두 예준과는 상관없는 단어였다. 그러나 그런 저와 달리, 그는 우성 알파인 데다 번듯한 회사의 대표이기도 했다. 사회적 지위나 집안 사정 따위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되는 바였다.
“그런 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래도… 조금 더 생각은 해 볼게요.”
“좋아요.”
협박도, 회유도 없는 담백한 대화가 이질적이었다. 끝내 시선을 피하자 남자는 로비 밖 대로변을 응시하며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곧 노란 택시가 대로변에 멈추었다. 누군가 내리자마자 예준은 다시 한번 남자에게 이끌려 바깥으로 향했다.
밤공기가 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올 터였다. 예준은 괜히 점퍼 끝자락만 매만지다가 택시 뒷좌석에 올랐다. 지갑에서 오만 원권을 꺼낸 남자가 빳빳한 지폐를 기사에게 내밀었다.
“안전하게 부탁드립니다.”
넉살마저 우아했다. 선뜻 지폐를 받아 든 기사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예준은 어색한 얼굴로 창을 내리고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요.”
아이에게 하듯 편히 손을 흔든다.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꿰며 물러섰다. 예준은 즉시 창을 올리고 멀어지는 남자를 뒤돌아보았다. 금세 뒷모습을 보인 남자는 긴 다리를 곧게 뻗으며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S동이요.”
뒤늦게 목적지를 말하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를 받아 본 때가 너무 까마득한 탓일까.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예준은 건조한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아주 오랜만에 편히 집으로 향했다. 올 때처럼 버스를 갈아탔다면 추위와 피로감에 시달려야 했을 테니 기대하지 않은 호사였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골목 입구에서 기사는 안쪽까지 들어가길 거부했다. 좁은 골목이어서 주차된 차들이 빼곡했고 일방통행 구간이 많아 귀찮다는 사실은 이해하지만, 오만 원이나 받아 놓고 인색하게 군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군말 없이 택시에서 내린 예준이 골목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예준은 곧장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불이 옅은 가로등을 올려다보았다. 저러다 깜빡이겠지, 대수롭지 않게 돌아서려는데 그 밑에 소복이 쌓인 담배꽁초가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어떤 것은 불씨가 남아 있었다. 낡은 운동화로 우지끈 밟아 비벼 껐다. 기분 나쁜 기척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어떤 베타들은 형질에 궁금증을 가지기도 했다. 과한 호기심은 때때로 스토킹으로 변모했다. 몇몇 사람에게 귀찮은 미행을 당한 경험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베타였고 같은 남자이기에 물리칠 수 있는 정도였다.
윤도하 일당에게 붙잡힌 건 쪽수에 밀려서다. 히트 사이클이 아니었다면 과거의 영광에 힘입어 제압하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혀끝을 찬 예준이 말린 어깨를 폈다. 괜히 불결하여 꽁초는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
‘OO년 올림픽 스타 김예준, 아버지 사기 혐의로 구설수’
‘태극 요정 김예준, 오메가로 발현’
‘김예준 소속사, 근거 없는 억측 자제 바란다.’
‘전 태권도 국가대표 김예준 아버지 이번엔 폭행 시비, 혐의 없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기사의 첫 페이지를 보고 태경은 기사 탭을 꺼 버렸다. 대신 이미지 탭으로 넘어가 지금과는 사뭇 다른 ‘김예준 선수’의 과거 사진을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사진 아래에는 주로 곱상한 얼굴, 호리호리한 체격에 웃는 모습이 아기처럼 예쁘다는 사족이 붙어 있었다. 흔히 말하는 대포 사진까지 존재했는데 꽤 퀄리티가 좋아서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감흥이 일었다.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에는 근육이 단단하게 붙은 몸이었다. 태경은 동영상 탭으로 넘어가 금메달을 목에 건 예준의 마지막 경기까지 감상했다. 실력은 두말할 것 없고, 보는 이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는 멋진 선수였다. 금메달을 따고서도 차분한 얼굴 또한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흠….”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태경 뒤로 그림자가 졌다. 팔짱을 끼고 선 선영이 혀를 끌끌 찼다.
“살다 보니 이태경 딴짓하는 꼴을 다 보네.”
“가라.”
태경이 짧게 답했다. 선영의 타박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턱을 괸 채 느릿느릿 스크롤을 내렸다. 퍽 앳된 얼굴이라고 생각하는데도 더 어릴 때가 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 엄마가 진짜 좋아했어. 이때도 귀엽긴 했는데 지금은 진짜 깨물어 주고 싶게 귀엽더라?”
예준이 회사에 왔을 당시, 선영 또한 회의실에 자리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선영이 구구절절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하자 태경은 인터넷 창을 최소화한 뒤 뒤늦게 시선을 옮겼다. 선영은 태경과 같은 알파였다. 그녀가 성별과 관계없이 오메가들을 키 링처럼 여긴다는 사실을 태경은 알고 있었다.
“관심 있어?”
묻자 선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오메가한테 침을 다 바르고, 진짜 무슨 일이라니.”
“주선영.”
태경은 회사에 사적인 손님을 들인 적도 없거니와, 오메가에 관해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절 먹잇감을 던져 주지 않았다. 그래, 그날은 좀 급했다. 미루어도 될 약속이었는데 예준을 무리하게 회사로 끌어들였다는 것은 태경도 인정하는 바였다.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기억을 뒤로할 수 없었으니까. 오메가와 관계 후, 질척댄 경험은 없다고 자부하는데도 그날은 뭔가 달랐다. 머리로는 더 엮여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면서 손끝에 닿던 미끄러운 감각을 몇 번이나 상기했던가.
인사도 없이 집을 떠났으니 무엇 하나 나무랄 게 없는 하룻밤이었다. 그대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면 될 일이었는데 기회가 생기자 말간 눈을 구태여 다시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하룻밤으로 끝내기엔 아쉬웠던 거다.
태경이 저도 모르는 사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선영이 으름장을 놓았다.
“오메가랑 어울리는 거 말리진 않겠는데 눈치는 좀 봐라. 회사에서 떡하니 대포 사진이나 보고 있고.”
“시정할게.”
고분고분한 대답이 돌아오자, 선영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영은 태경의 대학 동기로, 시카고에 있을 당시 같은 건축 회사에서 일했던 절친한 동료이기도 했다. 한국에 들어오겠다는 의지가 맞물렸던 것이 함께 회사를 운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태경과 상성은 다르지만 실력 있는 건축가였다. 자유분방하고 예술적인 건축물을 선호하는 그녀의 제안으로 대표 직함은 태경이 달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거지, 회사를 갖고 싶은 게 아니라던 선영의 말에 태경은 어느 정도 동의했다. 그는 타인의 어깨에 짐을 지게 하는 것보다야 자신이 짐을 떠맡는 게 속 편한 성격이었다.
“근데 걔, 구설수 되게 많잖아.”
확실히, 현재의 모습은 조금 전 보았던 사진 속 사람과 매치하기 어려웠다. 운동선수가 오메가로 발현하면 어떤 처지에 직면하게 되는지는 자명했다. 발현이 늦어서 더 고된 대가를 치렀을지도.
“뭐, 그렇지.”
구설수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 가족이 족쇄인 사람은 세상 어디든지 존재했다. 묻어 두었던 동정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를 향한 연민이 관심의 기저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밤새 들여다본 기사로는 예준에 관해 전부 알기에 한계가 있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태경은 한숨처럼 읊조렸다.
“그게 그 애 잘못은 아니니까.”
마른 화초처럼 창백해 보이지만, 입을 열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귀염성이 튀어나오곤 했다. 때때로 직설적인 질문을 던지는 야릇한 얼굴이 솔직히 취향이었다. 침대 위에서의 대범함, 손안에 감겨드는 완벽한 몸매는 또 어떤가.
일에 매진하느라 성욕은 대체로 일회성 만남으로 푸는 편이었다. 예외를 둔 이유는 확실히 그날 밤의 관계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남자가 취향이었던 걸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래가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뭐, 속궁합이 잘 맞는 오메가와 알파는 널리고 널리지 않았나.
“그래. 대놓고 홀렸는데 그런 게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냐.”
“그런 건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입가에 묻은 침이나 좀 닦아라.”
“장난 그만 치지?”
유리막 너머로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본 직원들이 바쁘게 입을 가리며 웃었다. 머쓱해진 태경이 셔츠 깃을 바로잡으며 선영을 보았다.
“미팅이나 가자.”
노트북을 덮고 일어섰다. 사무실을 나서려던 선영이 태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버림받은 강아지 못 지나치는 버릇은 여전해. 그렇지?”
꿰뚫어 본다고 해야 할지, 넘겨짚는 재주가 있다고 해야 할지. 사주 풀이나 미신 따위를 맹신하는 제 아버지가 선영을 남달리 반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걔 강아지 아니야.”
바로잡은 태경이 웃었다. 보살핌이 필요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가 유기견을 거두어들인 경험과 예준의 부탁을 들어준 일은 명백히 결이 달랐다.
“그래서. 어르신은 잘 계시지?”
“곧 볼 텐데, 뭘 물어.”
곧 있을 미팅은 명성건설과의 협업과 관련한 일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업계의 회사를 운영하면서 함께 일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수의 건축가 집단으로 시작했던 곳이 지금은 제법 경쟁력 있는 회사로 발돋움했다. ‘LK Architects’는 명망 높은 건축 프로젝트에도 이름을 올리면서 반응이 뜨거운 신생 회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오늘 예정된 미팅은 부자 사이의 조우가 아니라 대표 대 대표의 만남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정작 별 감흥이 없는 태경과 달리 선영은 뿌듯함에 입매를 휘어 웃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턱턱 어깨를 두드렸다. 태경은 무심히 그 손을 툭 쳐 낼 뿐이었다.
*
높은 담에 둘러싸여 우뚝 솟은 저택은 태경의 작품 중 하나였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기초부터 섬세히 다진 견고하고 실용적인 구조의 건물이었다. 균형과 조화, 형태 본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태경에게는 어느 곳 하나 부족하지 않은 자태였다.
오랜만에 이석준 회장의 저택을 마주한 선영이 괜히 타박을 놓았다.
“너무 심심해.”
“그렇지. 넌 좀 요란한 게 취향이잖아.”
“요란하다니, 화려한 거지.”
무의미하게 서로를 공격하며 두 사람은 높다란 계단을 올랐다. 양옆으로 펼쳐진 정원에는 이미 낙엽을 떨군 앙상한 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너머 숲을 연상시키는 빽빽한 정원을 보고 있자면 이토록 높은 담이 무슨 쓸모가 있나 싶었다.
이따금 드러나는 불균형은 이석준 회장의 취향이었다. 집만큼은 사는 사람의 개성이 묻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기에 태경은 굳이 그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어르신, 잘 계셨어요?”
“어이구, 선영이 오랜만이다.”
응접실로 향하자 상석에 이석준 회장이 앉아 있었다. 인자한 표정과 부드러운 인상이 살아온 인생과 대조적으로 너그러웠다. 얼굴에서 인품이 보인다는 말도 영 틀리지는 않았다. 위화감 없이 회장을 안았다가 물러나는 선영을 태경은 몇 걸음 뒤에서 지켜보았다.
태경과 선영이 자리에 앉자 가사 도우미가 차를 내주고 물러났다. 조용히 차를 들이켜는 태경을 보며 이석준 회장이 말을 던졌다.
“집에 좀 자주자주 들러라.”
집이라고 부르기엔 낯설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쭉 미국에서 공부했기에 방학 때 몇 번을 제외하곤 아버지와 함께 산 적이 없었다. 한국으로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친밀한 부자는 아니었으나 태경은 진심으로 제 아버지를 존경했다.
“아시잖아요. 일이 너무 바빠요.”
“핑계도 좋다, 녀석.”
환갑이 지난 나이에도 대단한 아우라를 가진 남자였다. 한때는 주먹깨나 날렸다지만, 지금은 번듯한 건축회사의 회장이자 지역 사회에 이바지하며 사는 선도자였다. 그 일련의 과정을 멀리에서나마 지켜본 태경은 그가 제게 내밀었던 손을 잊지 못했다. 동아줄이자 생명수였다. 고작 다섯 살이었으나 그 덕분에 더는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는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 얘기부터 할까?”
“좋죠.”
태경보다 먼저 대답한 선영이 재개발 구의 지도를 꺼내 펼쳤다. 선영이 맡게 될 건물은 현대 미술품을 주로 전시하게 될 갤러리였고, 태경은 한 대학병원의 신관을 설계할 예정이었다. LK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업이 지역의 이미지를 완전히 탈바꿈할 프로젝트를 앞두고 있었다.
그로써, 지역의 역사가 사라진다. 누군가의 단골 가게가 자취를 감추고 가족과의 추억이 담긴 집이 허물어진다. 태경이 생각하기엔 그 또한 하나의 불균형이었다.
무심결에 마신 차가 썼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선 태경이 재킷을 벗었다. 셔츠를 걷어 올린 그가 펜을 집어 계획된 부지를 따라 선을 그었다. 마침 회장의 경호원과 프로젝트를 함께 할 직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부터 보시죠.”
단숨에 주목이 집중되었다.
*
회의가 끝난 후 선영을 먼저 돌려보낸 태경은 이 회장의 뜻에 따라 저택에 남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이 회장은 소파에 앉아 게슴츠레한 눈으로 태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하 건은 잘 마무리했겠지?”
“네. 더 귀찮은 일 없을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무심히 답한 태경이 팔짱을 꼈다. 일 처리를 하는 도중 오메가와 엮였다는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회장은 오메가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다른 우성 알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경하게 오메가를 혐오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오메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어 본 적 없기는 태경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아버지와 뜻을 같이하지 않았다. 같은 사람일 뿐, 형질로 고통을 받는 처지는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구태여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동아줄을 내민 은인 앞에서 제 사사로운 의견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이제 LK도 제법이더구나.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해. 내 추천 없이도 프로젝트를 따냈으니 능력은 이미 입증한 셈이지.”
“과찬이십니다.”
씩 웃은 태경이 답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가기엔 이상할 게 없는 대화였으나 태경은 어깨가 뻐근해지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처음부터 우리 명성에서 뜻을 펼쳤으면 좀 좋아. 요즘 젊은이들이 다들 그렇다기에 지켜보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너도 명성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
“알고 있습니다.”
태경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석준 회장이 이끄는 명성건설은 이미 입지를 탄탄히 다진 건설사였다. 피를 나누지는 않았으나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은 분명 태경이었다. 아직 정정하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물러나야 할 이 회장이기에, 시시때때로 독촉해 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늘 말만 네, 네, 하지.”
“저처럼 말 잘 듣는 아들이 어딨습니까, 아버지.”
두루뭉술하게 넘기려는데 현관에서부터 인기척이 들렸다. 이 회장의 여동생이자 명성건설의 전무인 이석희가 집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뒤를 불퉁한 표정의 윤도하가 따랐다. 태경은 웃는 낯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모님. 오랜만입니다.”
인사를 건네자 이석희와 윤도하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큼큼 목을 가다듬은 이석희가 다가와 태경과 이 회장을 차례로 보았다.
“오랜만이구나. 오늘 집에서 회의가 있었다지?”
“네. 막 끝내고 아버지와 이야기 나누던 참입니다.”
아버지. 당연한 단어임에도 이석희의 두 눈에 언짢은 기척이 스쳤다. 명성건설 후계자 자리엔 응당 이씨 집안의 피를 나눈 그녀의 아들, 윤도하가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다만, 아내 셋을 두고도 친자를 얻지 못한 이석준의 의견은 완강했다. 베타가 기업의 수장이 될 수는 없다는 고정관념이 이석희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어려서부터 이미 왕좌를 빼앗긴 윤도하도 다를 바 없었다.
“윤도하.”
태경이 부르자 윤도하가 매서운 눈빛을 한 채 2층 계단으로 향했다. 빠르게 멀어지는 장신을 의식하는 이는 오로지 태경뿐이었다. 이석희와 이석준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화목을 가장하는 데는 도가 튼 집안이기에 이석희는 곧 차가운 표정를 풀고 이석준의 어깨를 주물렀다.
“남은 일이 있어서 저녁 시간 맞춰 내려올게요. 태경이는 다음 집안 모임 때 보자꾸나.”
“그러시죠.”
미련 없이 떠나는 이석희를 보며 태경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한때는 그 지독한 타인 취급에 진저리를 칠 때도 있었으나 적어도 서른셋인 지금은 아니었다.
“석희가 아무리 쌀쌀맞게 굴어도 저 하룻강아지 같은 도하 놈이 네 자리 꿰찰 일은 없을 거다.”
“고모님 마음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닌데요.”
태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주제도 모르고 오만방자하게 구는 입양아란 소리는 자라며 지겹게 들었다. 그러나 제 마음의 상처를 돌보기보다는 공격하는 자의 심리를 헤아리는 편이 더 받아들이기 편했다.
쓰레기장에 버려졌던 창부의 아들이 기업의 후계자라니. 속사정을 알면 모두가 코웃음 칠지도 모른다. 태경은 자신의 하찮은 태생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가진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그는 다섯 살에 이석준에게 입양되어 우성 알파로 발현했단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다른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내내 떨치지 못하고 살았다.
“네가 내 유산을 받는 순간 꼼짝도 못 하게 될 거다.”
“아버지. 그런 말씀 하시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거 아시잖아요.”
“녀석! 벌써 명성에 들어와 후계자 교육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속 썩이는 게 누군데!”
자식을 얻지 못한 우성 알파의 마음 또한 이해했다. 이석준 회장이 기업을 성장시키고 권력을 사로잡는 데 모든 시간을 쏟아붓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욕망은 자격지심의 증거나 다름없었다.
태경은 버럭 성을 내는 아버지를 앞에 둔 채 느긋하게 웃었다.
“제가 언제 아버지 말 거역한 적 있었습니까.”
“접대 자리 한 번으론 어림없다. 부를 때마다 재깍 와서 얼굴도장 찍고 어울리도록 해. 사람이 곧 사업이니.”
고급 주점에서의 접대는 명백히 태경의 신념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얼마 전, 이 회장의 극성에 못 이겨 자리했다가 경멸만 안고 돌아왔던 기억이 선명했다. 권력을 쥔 우성 알파들 사이에서 멸시받는 열성 알파들, 그런 열성 알파들 손바닥에서 쉬이 놀아나는 오메가들까지. 방 안 가득 들어찼던 짙은 페로몬에 질식해도 이상하지 않을 밤이었다.
“맞선도 미룰 생각 마라. 서른셋이나 먹고 변변한 와이프도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이석준 회장은 아내 셋을 들이고 차례로 그들의 장례를 치렀다. 태경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와중, 마지막 아내가 유명을 달리했다. 이전의 두 사람은 만난 적도 없거니와, 세 번째 여자와 대면한 날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이 회장은 조촐히 상을 치렀고 태경은 초대받지 않았다. 실상, 누구도 초대받지 못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한 우성 알파의 아내는 보통 그런 취급이었다. 그 책임이 남편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D 기획 여식이라니 너도 안면이 있을 거다.”
사교 모임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알파에다 저보다 대여섯은 어린 여자였다. 이 회장은 자신의 맞선 상대로 우성 알파나 알파만 고집했다. 그래야 우성 알파를 낳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조 비서님한테 연락받았습니다. 이번 주말이죠? 미뤘다간 아버지한테 멱살이라도 잡힐 판이네요.”
“또 그르쳤다간 멱살로도 끝나지 못할 줄 알아!”
실패를 거듭함에도 이 회장은 몇 번이고 선 자리를 주선했다. 고사한 적은 없으나 애당초 알파 대 알파의 만남이 호감으로 변할 가능성은 작았다. 노발대발하는 아버지를 두고 태경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이 회장은 그제야 붉으락푸르락하던 얼굴을 희게 잠재웠다.
그때, 태경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태경은 이 회장에게 양해를 구한 뒤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합의금이 너무 많아요 정말 제대로 주신 거 맞나요?]
동시에 이 회장이 가사 도우미를 불러들여 양주와 잔을 받았다. 태경은 술을 따르는 아버지를 뒤로한 채 답장을 써 보냈다.
[이번 주말에 시간 됩니까?]
그날 기분이 좆같을 예정이라.
“받아라.”
이 회장이 잔을 건넸다. 태경은 그 잔을 만류했다.
“운전해야죠.”
“하여간 뻣뻣해서는.”
투덜거린 회장이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표정 변화 없이 잔을 내려놓고는 쓰읍, 하며 입소리를 냈다. 태경은 아버지의 식도를 뜨겁게 달굴 알코올을 연상했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달리 컸다. 저도 모르는 사이 허벅지 위에 놓인 손끝을 일정한 속도로 두드리고 있었다. 묘하게 초조한 건 아버지의 날 선 눈을 마주하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 아이에게서 답장이 늦어지기 때문일까.
이내 다시 울리는 진동은 맥이 길었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태경이 몸을 일으켰다.
“중요한 업무 전화라서요.”
이 회장이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버지를 뒤로한 태경은 간이 문을 넘어 테라스까지 향했다. 쌀쌀한 오후의 바람이 몸을 스쳤다. 끈질긴 진동 끝에 전화를 받자 상대는 잠깐의 공백 뒤에 말을 건넸다.
―…밤늦게는 가능해요.
“그 말은.”
―네. 할게요. 그거.
자신 없는 목소리에 비해 또렷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다. 윤도하에게 당한 날만 봐도 발정기를 보내는 게 녹록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일 때문에 다른 시간은 좀 곤란해요. 만나는 건 적어도 밤 열 시 이후였으면 좋겠어요.
“그 정도는 맞춰 줄 수 있으니 편하게 생각해요.”
일이 우선이긴 태경도 마찬가지였다. 남들 눈을 피하기에도 늦은 시간이 유리했다. 태경은 순순히 동의했다. 그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스쿠터는 잘 도착했어요?”
―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었어요. 제가 찾으러 가면 되는데 번거롭게….
미리 수리점에 연락해 스쿠터를 집 앞에 세워 놓도록 부탁했다. 구태여 친절을 베푼 건 그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가 맞았다. 해야 할 일을 하나라도 덜어 주어 어깨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지길 바란 것도 있고.
“번거로울 것 같아서 해 준 거니까 부담스럽게 생각 말아요.”
―감사합니다.
이윽고 정적이 감돌았다. 태경은 머쓱해할 상대와 뒤편에서 저를 주시하고 있을 아버지를 저울질하며 뜸을 들였다. 제안이 받아들여졌으므로 선을 보고 난 후엔 몰래 오메가를 만나 뒹굴 작정이었다. 간혹 맞선 상대와 몸을 섞기도 했지만 그날 밤은 다를 것이다.
“장소와 시간은 따로 남길게요. 주말에 봅시다.”
―예. 알겠습니다.
어딘가 무뚝뚝한 대답에 태경은 실없는 웃음소릴 내며 전화를 끊었다. 히트 사이클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가 신경을 긁는다. 불현듯 온몸을 잠식했던 성감을 상기하고는 붉어진 얼굴을 단속했다. 이내 고요히 기분을 가라앉힌 그가 돌아섰다. 투명한 창 너머로 불만에 가득 찬 이 회장의 얼굴이 보였다.
달래 주지 않으면 후폭풍이 길 터였다. 그가 내민 손을 잡았을 때 이미 저당 잡힌 운명이었다. 태경은 걸음을 옮겨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이 회장이 거듭 건네는 술잔을 받았다. 물렁물렁하게 굴자 이 회장의 얼굴에는 금세 화색이 감돌았다.
*
떡볶이만 배달했을 뿐인데 또 멱살을 잡혔다. 오메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문 앞에 놓고 가라는 메시지를 적어 두고도 집 안의 알파는 벌컥 대문을 열고 나왔다. 정신과 육체가 반하는지, 그는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예준을 보면서도 집 안으로 끌어들이려 두 손에 힘을 주었다.
헬멧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발차기로 옆구리를 가격해 고꾸라지게 만들기는 쉬웠다. 열성 알파여서 다행이었던 걸까. 무사히 벗어나긴 했으나 떡볶이는 아파트 복도를 나뒹굴었다. 예준에겐 더러워진 복도를 치울 정신도 알파를 더 단죄할 용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알파는 정확히 반나절 뒤, 떡볶이집 리뷰에 테러를 저질렀다. 사건의 원흉인 예준의 이야기는 ‘배달원이 포장을 열어 음식에 손을 댔다.’라는 말로 왜곡되었다. 애꿎은 떡볶이집엔 별 하나와 악성 리뷰가 달렸다.
예준은 떡볶이집 앞에 스쿠터를 정차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2년째 매일같이 보는 얼굴이라 아주머니께만큼은 해명해야 했다. 죽상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떡볶이를 젓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또야?”
“죄송해요.”
곧 문을 닫을 시간이라 한가했다. 이미 익숙한 아주머니는 예준을 탓하는 대신 남을 게 분명한 떡볶이를 포장했다.
“리뷰로 그런 것 보면 더 해코지는 안 할 거 같은데, 만약 무슨 일이라도 나면 제가 해결할게요.”
“바쁠 텐데, 예준이는.”
“그래도 할게요.”
“알았으니까 들고 가. 날 추워. 여기서 먹는 것보다 집에서 먹는 게 나을 거다.”
베타인 아주머니는 가게 안 손님들의 형질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녀가 건네는 떡볶이를 예준은 마다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실랑이를 벌이는 게 더 민폐임을 아는 탓이었다.
“감사히 잘 먹을게요, 아주머니.”
“그래, 또 봐.”
꾸벅 인사한 예준이 스쿠터 뒤 칸에 떡볶이를 담았다. 바로 근처니까 얼른 집으로 가져가면 따뜻하게 먹을 수 있을 터였다.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자 시동을 걸던 예준도 선뜻 화답했다. 다시 꾸벅 인사한 예준은 빠르게 핸들을 돌려 가게를 벗어났다.
곧 집 앞에 다다랐다. 골목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부웅, 소리를 낸 스쿠터가 엔진을 멈추자마자 예준은 내내 쓰고 있던 갑갑한 헬멧을 벗었다.
“후우….”
길게 뻗어 나오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대로 핸들에 고개를 처박은 예준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지긋지긋하다, 정말.”
그때, 타박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상체를 겨우 일으킨 예준이 제 앞으로 다가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살폈다.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꽉 틀어쥐는데 장신이 눈앞에 쑥 나타났다. 어린 낯이 드러나는 동시에 건방진 목소리가 들렸다.
“뭐가 지긋지긋한데.”
따지듯 묻는 목소리가 낯익었다. 예준의 잇새에서 다시 한숨이 샜다. 참 끈질긴 베타였다. 집 앞에 쌓인 꽁초의 범인이란 사실은 진작 알았다. 집 앞을 서성이거나 반지하 창문을 기웃거리는 꼴을 여러 번 발견한 탓이었다.
“넌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 기웃거리는데?”
묻자, 녀석이 입에 담배를 물며 되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럼, 아니야?”
“몰라, 씨발….”
오늘은 덩치들을 대동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예준은 윤도하를 무시한 채 스쿠터의 시동을 껐다. 무시하고 곧장 집으로 향하려는데 녀석이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무슨 냄새야.”
냄새. 페로몬의 다른 이름이었다. 느낄 수도 없는 베타면서 무슨 허풍인가 싶었다. 밀어내고 앞서 나가려고 하자 윤도하가 이번에는 옷깃을 그러잡고 킁킁대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낯익은 향수 냄새가 나는데.”
점퍼. 스민 페로몬이 아니라 할지라도 남자의 향수 향이 아직 배어 있을 수는 있었다. 아주 미약하게 남았을 그 향을 감지하다니 베타치고는 개코였다. 예준은 괜히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윤도하의 손길을 밀어냈다. 녀석의 표정이 금세 사나워졌다.
“씨발. 너 이태경이랑 만나냐?”
대답할 가치도 이유도 없었다. 교복 차림에, 열여덟이라 했던가. 온종일 시달리긴 했지만 그때처럼 발정기를 겪는 와중도 아니었다. 예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온 힘을 다해 녀석을 밀어냈다. 그러자 잔뜩 성이 난 녀석이 그날처럼 스쿠터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어? 말해 봐. 만나냐고!”
“만나기야 했지.”
“잠도 잤고? 씨발, 더러운 오메가 새끼 아니랄까 봐 그새 다리 벌렸냐? 어?”
알지도 못하는 녀석에게 왜 이딴 모욕까지 당해야 하나 싶었다. 예준은 붙잡고 늘어지는 녀석을 연거푸 밀어내며 스쿠터를 바로 세웠다. 기껏 고쳐 놓았는데 또 스크래치가 났다. 지리멸렬한 하루야 일상이라지만, 끝까지 지독하긴 오랜만이었다.
더 소란을 피우는 것도 민폐기에 예준은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다. 곧장 곰팡내가 풍기는 반지하로 들어서려는데 단숨에 따라붙은 윤도하가 팔뚝을 붙잡아 벽으로 밀어 세웠다.
“이태경 그 새끼 취향도 알 만하네.”
차라리 달래는 편이 나을까 싶었으나 어떤 말도 들어 먹을 눈빛이 아니었다. 녀석이 으르렁대듯 덧붙였다.
“도련님이면 뭐 해. 걸레가 취향인데.”
“야.”
“꽉 물어. 떨어질 거 많잖아.”
설마 그런 의도로 그의 섹스 파트너가 될 생각까지 했을까. 이 어리석은 베타는 오메가의 발정기에 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게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예준은 그저, 억제제를 사지 못해 성감을 참으며 버티거나 형님들과의 관계 후 자괴감을 느끼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같이 다니는 새끼 보고 조폭이 취향인 줄 알았는데. 뭐, 아니라곤 못 하겠지.”
예준이 매섭게 눈을 치떴다.
“뒤도 따라다녔냐?”
“그거야 네 알 바 아니고.”
가까이 맞붙은 녀석이 턱을 치들었다. 하다 하다 미행까지. 도대체 제게 이토록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할 말을 잃어 멍하게 앞만 보고 있는데 녀석이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결박당한 팔이 아팠지만, 예준은 꿋꿋이 버텼다. 눈을 맞추고 반항하듯 들여다보자 녀석이 시선을 떨구었다. 보드라운 무쌍의 눈두덩이 아직 아기 티를 벗지 못한 듯 고왔다.
“그만 좀, 떨어지라고!”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녀석을 밀어내려는데 달뜬 손끝이 목덜미에 닿았다. 예준은 불시에 닿은 낯선 이의 촉감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날 자비 없이 저를 폭행하던 단단한 손바닥이 아닌, 여린 손끝이었다. 어딘가 끔찍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자 목선을 덧그리던 손이 어깨를 콱 틀어쥐었다.
놀라 숨을 들이마시는 것과 동시에 녀석이 사납게 목덜미에 코끝을 묻었다. 곧 살을 짓씹혔다. 예준은 온 힘을 다해 녀석을 밀어냈다. 휘청, 하며 물러난 녀석이 다시 달려들 기세기에 재빨리 발을 들어 복부를 가격했다. 반대편 벽에 처박힌 녀석은 곧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축축해진 잇새로 신음을 내뱉었다.
“뭐 하는 짓이냐, 너.”
예준이 얼얼한 목덜미를 감추며 물었다. 뭐가 불만인지 잔뜩 시근덕대던 녀석이 힘차게 몸을 일으켰다. 이미 헐렁한 넥타이를 더 느슨하게 풀고 불안한 짐승처럼 제자리에서 빙빙 돌아 대기까지 한다. 녀석이 제 뒤통수를 마구 헤집으며 씨발, 씨발, 욕지거릴 해 대었다.
예준은 벽에 딱 붙어 그와 거리를 두었다. 죽일 듯이 노려보자 이번에는 선뜻 다가오지 못한 녀석이 입술을 짓씹었다.
“걸레 같은 새끼.”
재차 욕보인다. 그런 걸레를 깨문 건 저면서.
한마디 보태려는데 윤도하가 먼저 발걸음을 뗐다. 한 대 때리려는 시늉이 이어졌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예준은 도망치듯 계단을 밟는 녀석을 주시했다. 시끄럽게 욕을 해 대던 녀석은 주황빛으로 깜빡이는 현관 불빛만 남겨 둔 채 빠르게 사라졌다.
“하….”
뒤늦게 목덜미를 만졌다가 손끝을 보자 피가 묻어 있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얼얼한 통증을 무시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예준은, 그러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 따윈 하지 못했다. 모든 고난은 스스로 견뎌야 함을 깨달은 게 벌써 오래전이었으므로.
신경질적으로 목덜미를 틀어쥔 예준은 다시 현관을 벗어나 스쿠터로 향했다. 아주머니가 싸 준 떡볶이가 아니라면 이 공복감을 편히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골목에는 윤도하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재빨리 떡볶이를 챙긴 예준이 부산스레 주변을 살피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집은 어떻게 안 거지. 골칫덩이가 아닐 수 없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끝이 떨렸다.
*
남자가 알려 준 호텔은 S동 근처에 있었다. 택시를 보내 주겠다는 것을 극구 만류한 예준은 씩씩하게 버스에 올라 호텔로 향했다.
이토록 으리으리한 호텔은 선수 시절에도 와 본 적이 없었다. 호텔 정문에 도착해서는 혹여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안으로 향했다. 로비에서 남자의 이름을 말하자 직원 하나가 방 앞까지 손수 안내해 주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직원 엘리베이터를 탔다. 남자의 배려인지, 은밀한 만남을 위한 조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직원이 문을 두드리고 자리를 뜨자 남자는 머지않아 문을 열었다. 방 안의 조도가 호텔 복도만큼이나 낮았기에 예준은 눈부심 없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은은한 페로몬을 감지한 동시에 눈앞에 남자의 품이 있었다. 당황한 예준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올려다보자 그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차 보낸다니까.”
“…그런 건, 괜찮아요.”
약간의 술 냄새와 함께 여자 향수 향이 느껴졌다. 남자는 흐트러진 셔츠 차림이었고 피로한 듯 눈두덩을 누르고 있었다. 예준은 비켜서는 남자를 지나 조금 더 안쪽으로 향했다. 어색하게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기에 손바닥에서 축축한 땀이 배어 나왔다.
섹스 파트너라니.
예준은 점퍼를 벗어 소파에 걸어 두었다. 그러자 술잔을 든 채 다가온 남자가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그가 노골적으로 살냄새를 들이 맡았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시작되는 전희에 예준이 움찔 몸을 굳혔다. 저도 모르게 남자의 가슴을 밀어내자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왜.”
“저….”
산통을 깨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저번 통화에선 말도 꺼내지 못했으니 제대로 마무리하고 관계를 맺는 편이 나을 터였다. 일을 치른 후에는 도망가기 바쁠 테니까.
“합의금이 천만 원이던데….”
“맞아요.”
“천만 원은 너무 과해요.”
남자의 눈에 흥미가 도사렸다. 그가 술잔을 협탁에 놓아둔 뒤 예준을 당겼다. 얼떨결에 소파에 앉은 예준은 제 다리를 벌리고 앞에 무릎 꿇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부드럽게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합의금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도 너무 많으면….”
“많으면?”
“적선같이 느껴져요.”
그가 건넨 얇은 봉투에는 천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생전 실물로 본 적도 없는 그 수표는 제 반지하 방에 모셔 두기에 불안할 정도로 큰돈이었다. 이자뿐만 아니라 원금도 일부 갚을 수 있는 액수지만 곧이 받기에는 양심에 찔렸다.
“심지어 치료도 직접 해 주셨고, 섹스도….”
그런 가벼운 상처를 제대로 치료해 보기도 처음이었다. 상처와 멍은 이미 아물어 사라졌으나, 예준은 누군가 베푼 친절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도 적다고 생각하는데.”
태경이 또렷이 눈을 맞추며 말했다. 허벅지에 닿는 큰 손이 뜨거웠다. 조금 더 안쪽으로 향하는 손길을 느낀 예준이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사람 자존심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날 예준 씨가 몸만 다치고 말았을까. 내가 모르는 그 사건 당시에는 훨씬 더 심하게 모욕당하지 않았어요?”
늘 당하는 예준의 기준으로 그 정도는 모욕도 아니었다. 모두가 고등학생들이었고 히트 사이클만 아니었다면 도망치는 것도 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날은 윤도하 일당에게만 자존심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었다. 평소 경멸하던 알파에게 잠자리를 가져 달라 말할 때는 뭐 떳떳했을까.
“저는, 그런 건 괜찮아요.”
“괜찮다고 하지 말고.”
윤도하가 다시 찾아왔으니 일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경찰보단 자신을 부르라던 남자의 말을 기억하지만, 예준은 진정으로 그런 사치스러운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무조건, 천만 원 다 받으라고요?”
“받아요. 그럴 자격 있으니까.”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태경의 기에 눌린 예준은 쉬이 거절하지 못했다. 타는 눈으로 바라만 보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내어 줄 것이 없으니 적선이나 화대로 치부하진 않을 것이다. 오늘 밤 관계를 끝내면 조금 더 명확해질 일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골반 양옆에 남자의 손이 놓이더니 너른 어깨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예준은 압도적인 남자의 체격에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물렀다.
“이제 해도 되겠어요?”
태경이 예준의 손을 당겨 앞섶에 놓았다. 터질 듯 부푼 양감에 놀란 예준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긴 이목구비를 뽐내며 웃은 남자가 턱에 입술을 대었다. 날렵한 턱선을 따라 살을 빨아 당기고 입술을 문지르는 솜씨가 능숙했다.
“페로몬 풀 테니까 힘들면 말해요.”
이미 경험했기에 긴장이 되었다.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발끝이 곱아들었다. 예준은 속옷을 적시며 쏟아지는 애액을 스스로 느꼈다. 무겁게 내려앉는 페로몬에 성감은 금세 한계까지 치솟았다. 가까스로 고개를 틀어 버텼다. 남자는 목을 감싼 폴라 티가 거슬린다는 듯 옷자락을 들치었다.
배 위를 스치는 알파의 손끝. 이어 따끈한 손바닥이 늑골과 가슴을 묵직하게 문지르며 올라왔다. 예준은 허리를 뒤채다 두 팔을 들어 올렸다. 남자의 도움으로 상의를 벗자 하얀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발정기가 아니기에 남 앞에 보이기가 어색했다. 페로몬을 흡수한 몸과 맑은 의식의 괴리가 괴로웠다.
예준은 물기 어린 눈을 감추지 못한 채 남자를 보았다. 그의 시선은 어느덧 제 눈을 떠나 목을 향해 있었다.
“파트너가 되자고 말한 건 일대일의 관계가 되잔 의미였어요.”
“…예?”
무슨 뜻인 줄 몰라 되물었다. 그러나 남자의 손끝이 윤도하가 남긴 상처에 닿았을 때, 예준은 남자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키스 마크로 받아들인 걸까. 해명하려던 예준은 남자의 몸에 짙게 남은 여자 향수 냄새를 의식했다. 일대일이 아닌 건 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예준 씨 상대가 더 있으리라곤 예상 못 했는데.”
이번에도 그 녀석에게 당했다고 말하면 될 걸,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징징대는 성격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윤도하와 저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때마다 그가 뒤처리해 주길 바라는 것도 말이 안 되었다.
“이건 그냥 사고 같은 거였어요.”
예준은 에둘러 말했다. 흠결은 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위축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순식간에 서늘해진 남자의 눈빛이 낯설었다. 언제나 친절하고 다정하던 눈동자가 노골적으로 식어 있었다. 남자는 어딘가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했다.
제삼자의 손을 탔다는 이유로 감흥이 식은 것일 테다. 알파들은 으레 그랬다. 서늘한 눈이 살 위를 날카롭게 벨 듯 고정되었다. 예준은 상처 위를 연거푸 덧그리는 남자를 내버려 두었다. 쇄골의 솟은 부분을 매만지던 그가 색이 옅은 유두 위로 손을 옮겼다. 드러난 갈비뼈와 볼품없는 허리까지 그러쥔 그는 결국 옅은 한숨과 함께 시선을 맞추었다.
“옷 입어요.”
섬세한 움직임에 예준은 곤란할 정도로 발기했다. 그러면서도 남자의 요구에는 고분고분 따랐다. 남자는 이내 몸을 일으켜 근처에 놓아두었던 술잔을 집었다. 흐트러진 셔츠 위로 곧게 솟은 목을 어루만지고는 애액 대신 술로 입술을 축였다.
침묵이 감도는 사이 예준은 옷을 도로 꿰입었다. 서서히 옅어지는 페로몬과 남자와의 거리 덕분에 성감을 가까스로 누를 수 있었다. 예준은 잠깐 눈치를 보다 몸을 일으켰다. 몸을 섞지 않을 거라면 더 머무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먼저 재킷을 챙겼다. 그는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피곤해 보이는데 아침까지 쉬었다 가도 좋아요. 배고프면 뭐 시켜 먹어도 괜찮고.”
남자의 친절이 진심인지 습관인지 의문이 들었다. 예준은 그 자리에 멈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충분히 짐작할 만한 상황이지만, 어쩌다 그토록 짙은 여자 향수 냄새를 묻히게 됐는지 궁금했다. 예준은 괜히 코가 간지러워 코끝을 어루만졌다.
“대표님이 결제하신 방이잖아요. 제가 더 머물 이유가 없어요.”
일이 틀어졌으니 파트너가 되기로 한 제안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걸까. 변덕스러운 알파를 두고 안도했던 지난 며칠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예준은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소파를 벗어났다. 그러나 문가로 다가서자, 가뿐히 무시하리라 생각했던 남자가 거리를 좁혔다.
“난 파트너를 누군가와 공유하는 취미 없어요.”
알파와의 관계에서 독점욕을 배제할 순 없었다.
“말했듯이, 이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에요.”
저 역시 그저 그런 오메가들과 다르지 않으므로 언제든 희롱당할 수 있었다. 애초에 윤도하가 그랬듯이. 몇 걸음 만에 바짝 다가온 남자가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 쥐었다. 그저 한 손만이 닿았을 뿐이지만, 단단한 힘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다음번엔 사고라도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다음번이라. 이대로 끝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음 히트 사이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골치가 아픈 와중 다행인 말이었다. 그러나 예준은 이 기회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관계는 흔하지 않고 뒤따르는 안도감 또한 길지 않으리란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 두어야 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저 때문에 실망하셨다면 죄송해요.”
읊조리자 남자가 노골적으로 낯을 살폈다. 이목구비를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의중을 파악하려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점차 본연의 온도를 되찾아 가는 듯했으나 어떤 의도이든 상관없었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남자의 가슴을 밀어내며 거리를 벌렸다.
“향수 냄새 진동해요.”
“…….”
“여자 향수 냄새.”
그렇다고 한들 오메가가 알파를 책망할 수 있을까. 예준은 말을 내뱉은 뒤 얼른 돌아서 방을 나가 버렸다. 구태여 지적한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저를 붙잡아 그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예준은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얼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뻣뻣이 솟은 아래가 괴로워 벽면을 짚고 섰다. 발정기를 제외하곤 성욕이 강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막상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노출되자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늘 주변을 맴도는 열성 알파 형님들에 비할 바가 못 되는 페로몬이었다. 아랫배가 조여들고 몸에 닿았던 남자의 손길이 선명히 그려졌다.
어디 화장실에 박혀서라도 빼고 가야 하나. 발정기도 아닌데 그런 짓은 수치스럽다. 이래서야 성욕 때문에 파트너를 두는 형편이 아니라 파트너 때문에 애꿎은 성욕이 치솟는 상황이 아닌가. 모순적인 성감에 예준은 연거푸 심호흡했다. 다행히도 로비 층에 도착했을 때는 허리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저만 이런 상황이라면 퍽 억울할 듯싶었다.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호텔을 빠져나가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예준은 난감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이태경 대표님]
이번에도 무시가 아니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자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올래?
여자 향수를 지적했다고 화가 나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더더욱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싫어요.”
무뚝뚝하게 대답한 예준은 얼른 전화를 끊었다. 알파와 실랑이를 벌이는 일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었다. 전화는 다시 걸려 오지 않았다. 예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바삐 걸음을 옮겼다.
*
나흘간 미친 듯이 일만 했다. 밥까지 굶어가며 열두 시간씩 움직이자 합의금을 제하더라도 이자를 갚을 만한 돈 정도는 준비할 수 있었다. 예준은 태경이 준 수표를 깨 오만 원권으로 바꾸고 옷장 깊숙이 숨겨 두었다. 우선은 백만 원만 꺼내 원금을 조금 갚고 나머지는 비상시를 위해 남겨 둘 작정이었다.
이자 상환일이기에 두 시간 일찍 일을 마무리하고 정명의 사무실을 찾을 계획이었다. 먼저 전화를 걸어가겠다고 말하자 정명은 재개발 공사 현장에 있는 건물로 오라고 답했다. 얼마 전, 보스와 알파들에게 굴욕을 당한 곳이기에 몹시 껄끄러웠으나, 어차피 오라면 와야 하고 가라면 가야 하는 처지였다.
마지막 배달지에서 스쿠터에 올라탄 그는 곧 현장으로 향했다. 건물 앞에 다다르자 담배를 피우고 선 치문이 보였다.
“치문아.”
“형!”
부리나케 담배를 끈 치문이 예준을 반겼다. 두툼한 팔로 어깨동무를 하곤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이번엔 돈 꿔 달란 소리 없는 거 보니 합의금 두둑이 받았나 봐?”
“그냥….”
“연락 두절이어도 걱정이고 연락이 와도 걱정이고.”
“뭘 걱정까지 해.”
“형, 요즘 나한테 의지를 안 하는 거 같아서 나 좀 섭섭해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떤 치문이 예준의 등을 퍽퍽 두드렸다.
“그러니까 내일은 나랑 같이 밥 먹어.”
“편의점 도시락?”
“플러스로 컵라면까지.”
“알았어.”
가장 친한 동생인 데다 자주 돈까지 꿔 주는 호구. 밥 굶으면 세상 무너지는 줄 아는 천진한 녀석에게 통 신경을 못 써 준 것 같아 예준은 순순히 응했다.
어깨에 자꾸 치이는 기분으로 계단을 내려가자 야밤의 지하실이 눈앞에 보였다. 고문실을 연상케 하는 빈약한 백열등, 꿉꿉한 먼지, 시큼한 열성 알파들의 페로몬 냄새에 예준은 슬쩍 코끝을 비볐다.
“예, 예. 잘 알아들었습니다, 형님. 정선이요, 네.”
정명은 통화 중이었다. 안주머니 깊숙이 넣어 둔 봉투를 꺼낸 예준이 테이블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몇 분 후, 전화를 끊은 정명은 평소와 달리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웬일로 속을 안 썩여?”
며칠만 봐 달라고 통 사정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합의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들켜서 좋을 건 없기에 예준은 그저 머쓱하게 웃어 보이고 말았다. 봉투를 챙긴 정명은 가라는 말도 없이 가만히 예준을 응시했다. 두 손을 모아 잡고 주위로 빙 둘러선 따까리들이 턱을 치들고 있어 의아했다. 이자도 잘 갚았고 원금까지 넣었는데 뭐가 그리 불만인가 싶었다.
“재우한텐 연락 없고?”
아버지가 이유였나. 내내 잠잠했기에 예준은 곧이곧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돈을 부쳐 달라고 연락이 왔던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뒤에서 호박씨 깐다고 두들겨 맞았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연락 오면 꼭 전화해라, 나한테.”
“예.”
만나기만 하면 희롱을 일삼는 정명이 오늘은 날이 서 있었다. 그날 알파들 앞에서 추한 몰골을 보였기에 정이라도 떨어졌나 싶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예준은 멋쩍게 선 치문과 눈을 맞추고 정명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꼭 전화해라?”
“예.”
“다음 달도 이자 잘 맞추고.”
재차 확인한 정명이 팔짱을 꼈다. 그가 소파 등받이에 거만하게 상체를 기대었다. 예준은 대답 삼아 다시 인사한 뒤 뒤돌아섰다.
혼자서만 부산스럽던 치문이 배웅하겠다고 나섰다. 예준은 더 망설이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치문아. 형님들 뭐 안 좋은 일 있어?”
“몰라? 나 담배 피우러 나오기 전까진 분위기 괜찮았는데.”
다듬지 않은 현장의 바닥을 밟자 자박거리는 소음이 퍼졌다. 건설 현장의 밤은 별다른 조명 하나 없이 컴컴하고 음습했다. 스쿠터에 올라탄 예준이 헬멧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줘.”
“알았어요. 운전 조심하고. 밤길 어두워.”
이곳만 벗어나면 가로등이 있어 곧 환해질 터였다.
“꼭 노인네처럼 말한다니까.”
“걱정돼서 그러지, 걱정.”
“걱정하지 말고 내일 점심때 연락해.”
“전화 받아요!”
“어.”
치문에게 웃어 보인 예준이 헬멧을 썼다. 핸들을 잡고 돌리자 시동이 켜지면서 스쿠터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손을 흔들어 보인 치문은 다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치문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뒤로한 채 예준은 너른 비포장 길을 빠져나갔다.
집으로 가기 전 대로변 떡볶이집에 들렀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 떡볶이집 배달을 놓치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나 배달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예준은 대로변에 스쿠터를 세우자마자 고개를 내미는 아주머니에게 꾸벅 인사했다. 마감 시간에 이르기는 했지만,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악성 리뷰 하나에 가게가 이 지경이라니 기함할 노릇이었다.
스테인리스 조리대 위엔 십 인분은 거뜬히 넘을 떡볶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바깥 날씨가 퍽 서늘함에도 당혹감에 몸에 열이 올랐다. 아주머니는 이미 자신이 먹을 떡볶이를 포장 중이었고 덕분에 죄책감에도 불이 붙었다.
“뭘 그러고 서 있어. 덕분에 며칠 편했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평판이 좋은 동네 장사였다. 시류에 따라 배달 앱에도 상호를 올렸다지만, 맛이나 주인의 됨됨이에 신뢰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매일매일 재료가 소진될 만큼 성황인 맛집이어서 하루아침에 가게가 망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준은 막상 상황을 보자 자신이 일을 그르쳤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제가 그 사람 만나서 리뷰 지우라고 할게요. 정정 글도 올리라고 할 거고, 더는 피해 못 끼치게 할 테니까…. 조금만요. 아주머니.”
횡설수설 변명하자 아주머니가 포장을 마무리하며 답했다.
“장사 한두 해 해? 이러다 말겠지. 뭘 그렇게까지.”
그렇게 해도 받은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없었다. 이 동네, 단칸방을 구해 배달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된 아주머니는 비루한 제 처지를 외면하지 못했다.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무심하게 싸 준 떡볶이 한 그릇에 꽁꽁 언 마음이 녹았던 겨울을 기억한다.
“할게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준은 억지로 떡볶이를 건네받으며 연거푸 말했다. 대강 고개를 끄덕인 아주머니가 얼른 가 보라며 손짓했다. 눈두덩이 뜨끈할 정도로 쪽팔리고 열이 오르는데 혼자 찾아갔다간 험한 꼴만 보리란 사실이 더 화가 났다. 예준은 떡볶이를 스쿠터 뒷좌석에 넣어 두곤 폰을 꺼내 들었다. 덩치만 큰 동생을 요긴하게 써먹을 때가 온 것이다.
*
치문을 불러들이긴 했지만, 예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치문은 사정을 듣자마자 길길이 날뛰었고 이제부터 그가 행할 행위에 정의 구현이란 이름을 붙였다. 힘 조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녀석인지라 괜히 긁어 부스럼이라도 만들까 걱정이었으나 치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저 혼자 열성 알파를 찾아갔다간 험한 일만 당하고 돌아올 것이 분명한 탓이었다.
“형은 그냥 집에 있으라니까.”
“어떻게 그러냐. 너 혼자 이런 데 보내 놓고.”
치문이 두툼한 주먹을 쥐었다 펴며 계단을 올랐다. 이렇다 할 보안 장치도 없는 빌라는 허름했고 어딘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명색이 유단자인 예준도 지금은 몸의 변화로 예전 실력의 80%도 구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남자 대 남자, 일대일의 상황에서도 형질이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열성 알파 하나라며? 한주먹거리도 안 되지.”
베타치고도 체격과 힘이 남다른 치문 정도나 되어야 상대할 수 있었다.
쾅쾅!
“이봐, 아저씨!”
앞서 나간 치문이 다짜고짜 문을 두드렸다. 상대는 묵묵부답이었다. 떡볶이를 배달했을 때와 같은 시간인 데다 평일이기에 당연히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인상을 팍 찌푸린 치문이 다시 한번 문을 쾅 두드렸다.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없자 기어코 커다란 귀를 문에 가져다 댄 치문이 물었다.
“딸까?”
“아서라.”
그렇다고 지금 찾아갈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연락을 먼저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준은 문고리를 뜯을 기세인 치문을 간신히 말린 뒤 팔을 잡아끌었다.
“기다리자.”
“올 때까지?”
“어. 그 수밖에 없잖아.”
일도 공친 데다 시간만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떡볶이집 사정을 두 눈으로 본 마당에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예준은 치문과 함께 빌라를 나섰다. 기역 자로 돌아 골목으로 들어서자 잘못된 시공으로 불쑥 솟은 시멘트 턱이 보였다. 차디찬 곳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가장 먼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형님들에게 하듯 선뜻 불을 붙여 준 치문도 이어 담배를 꺼냈다.
“씹새끼…. 존나 마음에 안 드네.”
아는 것이라곤 사는 곳이 전부인데도 마치 아는 사람 욕하듯 내뱉는다. 허구한 날 당하는 일이라지만, 치문이 직접 나서 주기는 처음이었다. 구질구질하게 살았어도 구질구질한 모습을 보이기는 껄끄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분위기가 가라앉자 치문의 잇새에서 보란 듯이 한숨이 흘렀다.
“알파 새끼들은 왜 다 그 모양이야.”
“그러게.”
깊게 필터를 빨아들인 예준은 그러나 머릿속으로 다른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가 비교적 상식적인 것은 우성 알파라서가 아니었다. 조직을 이끄는 우성 알파들이 제게 어떤 추태를 보였는지는 누군가 짚어 주지 않아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알파로서의 본능에는 충실하지만, 사회화가 되었다고 할까. 그것이 집안과 교육 덕분이라고 해도 놀라웠고 타고난 기질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모르는 세상엔 그런 알파도 있었다. 뭐랄까. 발현 이전처럼 형질이 아닌 사람으로 대해지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더 그를 형질로만 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발정기를 위해서라면 꼭 필요한 알파. 침대 매너가 좋고 섹스를 잘하는….
담배를 반절쯤 태우자, 해가 지기 시작했다. 초가을의 저녁은 쌀쌀하기에 치문이 꽉 끼는 양복 소매를 매만지며 유난을 떨었다. 연거푸 담배를 피워 추위가 조금 가시기는 했지만 애초에 드나드는 사람조차 적은 골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여전히 열성 알파의 집은 빛 한 점 없이 고요했다.
그즈음, 예준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파를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무게가 실린 탓이었다. 치문을 더 붙잡아 두었다가 형님들에게 깨지게 만들면 더더욱 마음이 불편할 터였다.
“가자.”
“왜. 그 새끼 족치고 가야지.”
“너 춥잖아. …덩치도 큰 게 덜덜 떨기나 하고.”
괜한 핀잔에 치문이 마른 입술을 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손을 부딪쳐 탈탈 턴 녀석이 어느새 새까매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골목을 나서 빌라 3층을 확인하곤 턱에 잔뜩 힘을 준다. 이 새끼 오늘 못 조져서 아쉬워 죽겠다, 뭐 그런 허세였다.
“내가 조질 테니까 형은 이제부터 신경 꺼. 이사한 건 아닐 거 아냐. 뺑이 치다 보면 나타나겠지.”
“됐어. 나 없을 땐 하지 마. 가뜩이나 양아치 짓 시키는 것 같아서 좀 그런데….”
“나 양아치 아니야, 조폭이지. 양아치보다야 전문성이 있다고. 이런 새끼들 조지는 게 내 일인데 뭘 그렇긴 그래.”
그래도 지켜보는 형의 입장에선 떳떳이 부려 댈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싸고돌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사정이라 두고 보는 것일 뿐이었다. 오메가가 힘 좋은 베타 걱정이라니, 형님들이 알면 까무러치게 웃을지도 모른다. 예준은 버티고 선 치문을 힘껏 잡아끌었다. 바삐 걸음을 옮기자 못내 따라온 녀석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을 맞추었다.
“내가 해결해.”
“하면 혼날 줄 알아.”
“씨발. 겁만 좀 주고 눈물 콧물만 쏙쏙 빼겠다는 건데 뭘 그렇게.”
마주치면 주먹부터 꽂을 기세였던지라 예준의 두 눈에 의문이 비쳤다.
“진짜? 비폭력으로 해결할 수 있겠어?”
“하지. 조폭들도 비폭력 좋아해. 어디 맨날 칼침만 놓고 사는 줄 아나.”
말한 녀석이 두 손을 모아 호호 불었다. 그렇게까지 추운 날씨는 아닐 텐데. 후드 한 장 차림이 다인 예준은 머쓱해져 뻑뻑하게 마른 눈을 비볐다.
“비폭력이면 인정.”
“떡볶이집 앞에서 싹싹 빌게 만들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어깨를 쫙 편 치문이 말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예준은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자꾸만 느려지는 녀석을 당기며 걸었다.
“…난 형님들이랑 달라. 너한테 양아치 짓 시키기 싫어. 네가 그런 거 잘한대도 시키기 싫다고.”
중얼거리듯 말하자 치문이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예준은 한편으로 걱정이었다. 아무리 조폭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녀석이라 할지라도 그걸 잘하고, 잔혹한 생태계에 빠져 살다 보면 제 본연의 인격마저 잃어버리게 되고 마는 곳이 그 세계였다. 그래서 이 이상 깊이 빠져들지 않도록 제동을 걸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치문에겐 부모도 친척도 형제도 애인도 없었다. 오메가로 살며 바짝 말라 가는 저를 지탱해 주는 사람이 녀석이듯, 예준 또한 치문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했다.
“알아. 형 잔소리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
“알면 내 말 좀 들어.”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데 밝은 대로변으로 나오자마자 녀석의 눈길이 제 또래의 예쁘장한 여학생에게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부끄러워 잘 쳐다도 보지 못하면서 흘끗흘끗 시선을 주는 게 영락없는 흑심이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지만, 예준은 모른 척 미간을 좁혔다.
“여자 친구 만들던가.”
“위험해서 안 돼.”
“네가?”
“아니. 씨발, 형은…. 내 일이 그렇다고.”
예준이 보기에 그건 핑계였다. 치문은 숙맥이어서 여자 친구를 못 사귀었다. 못난 얼굴도 아니고 키가 작은 것도 아니고 좆같을 만큼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도, 좀처럼 여자애들에겐 말을 못 붙였다. 내내 붙어 다닐 때는 형님들에게 둘이 붙어먹냐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치문은 여자 뒤꽁무니에서 눈을 못 떼니까. 예준이 씩 웃었다.
“말 안 걸 거면 가자. 정명 형님 지랄하겠다.”
치문이 아프지 않게 예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미약한 힘에도 종잇장처럼 휘청인 예준을 녀석이 다시 바쁘게 붙잡아 세웠다.
*
예준은 벌써 나흘째 룸살롱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보통은 열 시, 열한 시나 되어야 끝나는 배달 일을 한창 최고조 시간인 여섯 시를 앞두고 마무리해야 했다. 오늘도 다섯 시 반에 편의점에 들러 삼각 김밥 두 개만 겨우 먹고 얼굴을 비추었다. 요즘 기분이 안 좋은 정명 형님은 대면할 때마다 희롱 대신 사나운 눈빛만 쏘아 보내고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의중인지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거기 걸어 두면 돼.”
세탁한 홀복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자 누군가 말했다. 화장을 고치던 여자가 예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베타인 여성 접대부들만 모인 방이기에 이목을 끌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예준은 시선을 피하고 반절 정도 비어 있던 옷걸이에 잔뜩 들고 온 옷을 걸었다. 여자는 미소를 띤 채 빈 잔에 독한 위스키를 콸콸 쏟아부었다.
“예전엔 잡아먹히고 싶었는데 이젠 잡아먹어야 하나.”
변한 외모를 조롱하는 투였다. 여기저기서 실없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예준은 쓰고 있던 모자를 더 푹 눌러쓰고 돌아 나가려 했다. 붙는 시비에 모두 대응했다가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게 뻔하므로.
“농담이야. 속 안 비었으면 몰래 한잔하고 가.”
손님을 맞이하기도 전에 벌써 풀어진 눈들을 주시했다. 긴장을 풀겠다는 명목으로 때로 약을 하거나 과음하는 접대부들은 흔했다. 무시하고 가 버리면 그 잔에 담긴 걸 몽땅 다 마셔 버리겠지. 예준은 그 사실이 조금 불편해서 여자가 건네는 술잔을 받았다. 오메가들이 모인 방에서 당하는 취급에 비하면 양반인 이유도 있었다.
한 번에 잔을 비우자 누군가 목구멍을 찢는 것 같았다. 가슴팍에서 알싸하게 퍼지는 통증이 아찔할 정도였다. 상황을 모면하고자 최대한 빨리 바라는 일을 들어줬을 뿐인데 눈 한 번 감았다 뜨기가 아득했다. 예준은 쓴맛이 감도는 입술을 겨우 열어 숨을 뱉었다. 흡족한 여자의 눈을 마주하자 조롱이 길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만져 봐도 돼?”
“뭘요.”
“얼굴.”
여자가 말을 꺼내자 다른 접대부들까지 달려들었다. 단정치 못한 옷차림으로 다가온 여자들은 오메가의 윤기가 감도는 피부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가게 애들은 여기다 뭘 떡칠해서 잘 몰랐는데 진짜 부드럽다.”
“언니 만져 봐. 코끝도 진짜 예뻐.”
“오메가들은 다 이런가.”
“아냐. 얘 예전에도 인기 많았어. 이건 그냥….”
저들끼리 주고받는 말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다만 놀랍게도, 모자까지 벗겨 어루만지는 손길들은 거칠지 않았고 자칫하면 터져 버릴 비눗방울을 더듬듯 조심스러웠다. 예준은 모인 시선과 손끝이 민망해 얼굴을 붉혔다. 눈으로도, 피부 온도로도 열감을 느낀 여자들이 소리 내 웃었다.
“귀엽다.”
“잡아먹을 수 있겠는데.”
때맞춰 취기가 확 돌았다. 이토록 부드러운 손길이라면 예준 또한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한 감각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예준이 가까스로 여자들을 물리쳤다. 무뚝뚝한 거부를 앙탈로 받아들인 여자들은 희게 드러난 목덜미까지 매만진 뒤에야 물러났다.
방을 빠져나와 직원 화장실로 향하는데 복도가 빙글빙글 돌았다. 소주 한 병도 거뜬한데 위스키 원샷은 좀 과했나 보다. 형님들에게 걸리면 혼이 날 일이기에 예준은 벽에 손을 짚은 채 걸었다. 지겨운 복도 청소가 남아 있었다. 막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지 들이치는 손님들의 구둣발이 젖어 있었다.
미묘한 기시감. 겹겹이 쌓이면 일상이 되고 만다. 화류계나 유흥가에 곧잘 스며드는 오메가의 처지가 싫어 위험한 배달 일을 하며 버텼다. 돈줄을 쥔 자들에겐 순응해야 마땅하지만, 이런 곳에 하루가 멀다고 드나들긴 죽기보다 싫었다.
예준은 굽이굽이 친 복도를 따라 걸었다. 이곳에는 저당 잡힌 운명들이 너무 많았다. 인격을 죽이고 성 도구로 사는 약자들의 집합소. 그들은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죄라는 사실도 모르는 알파들이나 돈과 재력을 가진 남자들에게 몸을 내어 주어야 했다. 세상 천한 오메가라 할지라도 가지려는 자들이라면 호기심을 품게 마련이다.
예준은 마른걸레로 복도를 닦기 시작했다. 질척한 바닥이 쉬이 마르지 않아서 금세 더러워진 대걸레를 깨끗하게 빨았다. 힘을 쓰고 몸을 움직이니 피가 빨리 돌았다. 취기가 가시기는커녕 속까지 울렁대었다.
그때였다. 가물거리는 눈만 깜빡이며 바닥 청소를 하고 있는데 어딘가 익숙한 공기가 스쳤다. 설마. 별다른 직감에 목덜미에 쭈뼛 소름이 돋아났다. 무시하려고 했으나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었다. 고집스레 바닥만 보고 있던 예준이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장신의 남자가 둔중한 문 앞에 서서 담배를 꺼내 물고 있었다.
“…….”
실내에다 지하였다. 간판에는 흡연 금지라고 적혀 있었으나 담배를 금하는 사람은 없는 곳이었다. 설마. 예준의 입에서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이 맴돌았다. 설마. 설마…. 예준은 두 눈을 비벼 뿌연 시야를 맑게 지워 냈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그를 발견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오메가와 여자들을 사들이고 짓밟는 룸살롱에서 그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
남자가 문에 기대었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깊게 연기를 들이마시며 보는 눈에 저와 비슷한 의문이 실렸다. 예준은 쥐고 있던 대걸레를 은근슬쩍 감추었다.
“여기서 일해요?”
모른척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남자는 굳이 말을 걸며 다가왔다. 손에 들린 담배를 치운다고 치웠지만 매캐한 연기까진 어찌할 수 없었다. 예준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가끔요.”
남자가 고개를 돌려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였다. 옅게 미소 띤 채였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의외인 게 많네, 예준 씨는.”
밑바닥에서 굴러먹는 오메가를 룸살롱에서 발견하는 정도야 특별하다고 볼 수 없었다. 다른 직원들처럼 유니폼을 입은 것도 아니고, 접대하는 오메가처럼 얄팍한 홀복을 입은 것도 아니니 차라리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보여야 맞았다. 배달하다 불려 나와 청소나 하고 있단 해명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파트너가 이런 데서 일하는 것도 좀 그런가요. 그런 일 하는 건 아닌데….”
문장을 길게 말하니 발음이 꼬였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술은 왜 먹었어.”
“대신 마신 거예요.”
“누구 걸?”
“…그대로 두면 너무 과하게 마실 것 같아서.”
동문서답한 예준이 축축하게 젖은 입술을 쓱 닦아 냈다. 손에 열감이 느껴져 차가운 벽을 짚고 서자 남자가 부축 삼아 팔꿈치를 그러쥐었다.
“그러는 이 대표님은 여기 어쩐 일로.”
예준이 중얼대듯 말했다.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남자가 답했다.
“일 때문에.”
간단한 대답에 예준은 그러려니 했다. 남자들 일이야 다 거기서 거기였고 우성 알파니 높으신 분들과 어울리겠지, 라고 예상하기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파트너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그에게서 풍겼던 여자 향수 냄새를 떠올렸다. 접대부들의 향기였을까. 이러나저러나 상관은 없다지만, 그들과 어울리며 왜 굳이 파트너까지 따로 두려는지는 의문이었다.
“취했네. 좀 쉬는 게 어때요.”
예준이 가까스로 벽에 등을 기대었다. 갈무리했다고 할지라도 페로몬이 밀려들자 취기에 성감까지 더해져 의식이 흐려졌다. 잠깐 사이 어깨를 떨자 팔꿈치에 닿아 있던 남자의 손이 허리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연기를 빤 남자는 복도 귀퉁이까지 예준을 끌고 가 조잡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쉬면 혼나서요.”
거기다가 알파와 노닥거리고 있는 걸 알면 뺨을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번뜩 정신이 든 예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타이밍 나쁘게 왁자지껄 떠들며 들어서는 조직원들이 보였다. 덩치들이 정명 형님에게 이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귓가를 두드리는 발소리가 심장을 때리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바쁘게 벽을 더듬던 예준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문부터 열어젖혔다. 복도 안쪽이라 드물게 손님을 받는 룸이었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무슨 생각인지 손쉽게 끌려와 안으로 들어섰다.
깜깜한 방 안에는 겨우 비상구 불빛만이 어른거릴 뿐이었다. 예준이 허둥대자 태경이 전원을 찾아 불을 켰다.
“뭐 하자고?”
생글거리며 묻는 목소리가 낮았다. 씩 올라간 입꼬리와 가볍게 휘어진 눈매가 손끝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먼저 나가도 된다고 속삭이려는데 남자가 다른 말로 입을 틀어막았다.
“향수 냄새가 싫으면 싫다고 하지. 왜 도망갔어요, 그날?”
남자가 예준의 모자챙을 들어 올리더니 더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했다.
“웃기지. 그 말에 꼴리더라고.”
그런 말을 듣는데도 그가 질 낮아 보이기는커녕, 괜히 입 안에 군침만 돌았다. 돌아갔으면 질퍽하게 뒹굴었을까. 반항하는 쪽이 좀 더 취향인가. 무의미한 상상을 하는데, 남자의 허벅지가 다리 사이를 가르며 들어왔다.
“…예?”
문가에 바짝 기대서 있던 예준은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가뜩이나 속이 울렁거리는데 노골적인 말까지 듣자 위가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관계에 우위를 점한 쪽이 그라는 걸 알기 때문일까. 격 없이 다정한 시선 앞에서도 속수무책으로 주눅이 들었다.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어요.”
“알아요. 그런 타입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런데 왜… 따지시는….”
손을 든 남자가 턱선을 어루만졌다.
“따지는 게 아니라, 곤란했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그렇게 말한 남자의 시선이 목으로 향했다. 이제 깨물린 자리는 옅은 붉은 기만 남아 있었다. 따뜻한 엄지가 그곳을 쓸자 중심에도 아릿하게 힘이 들어갔다. 단단히 닿은 허벅지가 신경 쓰여 예준은 무심하게 남자를 밀어내었다.
“자리에 돌아가 보셔야죠. 저도 이만….”
그러고 보니 빈손이었다. 대걸레는 어디다 버렸지. 조직원들을 보고 당황하는 사이 손에서 놓친 모양이었다. 머쓱하게 바지에 두 손을 비빈 예준이 남자와 거리를 두고 섰다. 꽤 세게 밀려났음에도 특별히 기분 나쁜 기색이 없던 남자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피하려고 나온 거예요. 불편해서. 그런데 눈앞에 딱 예준 씨가 있더라고.”
“아….”
“불발된 약속이 떠오르는 것도 당연하지.”
“…알아들었어요. 다시 시간 장소 주시면 맞춰 갈게요.”
예준으로서도 남자의 사생활에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 여자 향수는 어차피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날은 키스 마크에 대한 변명이 필요했을 뿐이고, 여전히 히트 사이클을 안전하게 보낼 파트너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예준은 불룩하게 솟은 남자의 앞섶을 눈치챘다. 알파와 오메가가 만나면 이런 웃지 못할 일이 손쉽게 벌어지곤 했다. 예준은 머쓱한 눈빛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앞으로 세 시간은 더 일해야 해서….”
“시급은 내가 대신 줄게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튀면 혼나요.”
“누구한테 혼난다는 거야. 누가 널 혼내는데.”
형님들이라고 말하면 조폭과 얽힌 신세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예준은 에둘러 답했다.
“점장님이요.”
어차피 애들 관리야 정명이 하니 그렇게 말해도 상관없었다. 남자가 불량한 표정으로 양 허리에 두 손을 짚었다. 그가 한쪽 재킷을 뒤로 물리자 빡빡하게 붙은 얇은 셔츠가 드러났다. 예준은 남자의 탄탄한 굴곡과 함께 핏줄이 불거진 손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다시 문자 주세요.”
그렇게 말한 뒤 자리를 떠야만 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들어 올린 예준이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남자가 불쑥 다가왔다. 꽤 위협적인 한 걸음이었다.
“그럼 그날 못 한 것만 좀 하던….”
태경의 말끝이 씹혔다. 예준은 남자의 손아귀에 붙잡혀 다짜고짜 맞닿는 입술의 감촉에 눈을 크게 떴다. 페로몬의 영향일까. 어지간히 성욕이 이는 것 같은데 양해도 없이 키스부터 하고 보는 건 어딘가 그답지 않았다. 경찰서에서 만났던 날도 뒹굴기 전에 상처 치료부터 하지 않았던가.
예준은 딱딱하게 굳어 겨우 입술만 벌렸다. 그것마저 남자의 능숙한 리드를 따른 것이었다.
“뭐 하는….”
“가뜩이나 다른 오메가들 페로몬에 절어 있는데….”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올린 남자가 덧붙였다.
“익숙한 페로몬에 노출되면 더 하지 않겠어요?”
익숙한.
그와 저 사이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아랑곳없이 숨 쉴 틈만 준 뒤 입술을 맞붙였다.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촉감에 금세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마를 맞대고 코끝을 비빈 그가 아득하게 눈을 맞추었다. 단단한 손이 검은색 티셔츠 속을 파고들자마자 모자가 툭 벗겨졌다.
예준은 고이는 침을 바삐 삼켰다. 쪽, 하는 소리 사이사이에 다디단 알파의 타액이 밀려들었다. 숨을 참고는 힘 있게 치고 들어오는 남자가 버거워 예준은 버둥거렸다. 슈트에 감싸인 몸을 연거푸 밀어내었지만 들이치는 성감에는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혹감은 옅어졌다. 오 분을 훌쩍 넘은 키스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화답하는 것이 자존심 상해 머뭇거리던 예준은 제 몸을 번쩍 들어 올리는 남자의 힘 앞에서 미약하게 남은 반항심마저 고이 내려두었다. 남자의 골반에 두 다리를 감고 두 팔로 목을 감싼 채 안겼다. 시선이 높아지자 남자가 고개를 젖혀 편하게 입을 맞추도록 이끌었다. 입술에 꿀이라도 발라 놓은 것일까. 좀처럼 마다하기 힘들었다. 혀를 얽을수록 더 깊어지는 갈증은 누군가의 금단 증상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이미 경험한 적 있는데도 정신을 못 차렸다. 그날 이후, 배는 맞춘 적 없다지만 이런 게 잘 맞는 상성인가 싶었다. 삽입은 더 좋다는 걸 온몸이 알고 있었다. 예준은 아래가 흠뻑 젖은 채로 남자의 입술을 바삐 빨았다. 힘주어 흡입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으며 단단한 어깨를 그러쥐었다.
“…….”
겨우 끈적하게 달라붙은 입술을 떼어 내었다. 한참 숨을 고르던 예준이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은 남자는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붉게 달아오른 남자의 귀 윗부분을 어루만진 예준이 화들짝 손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 손을 붙잡은 남자가 목덜미의 옅은 자국 위에 키스했다. 깨무는 듯한 통증에 예준은 감길 듯 말 듯한 눈을 바르르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 좋았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페로몬, 서늘한 피부 위에 닿는 들뜬 체온, 살결을 묵직하게 누르는 감촉까지 더할 나위 없이 좋기만 했다.
“…진짜 가 봐야 해요.”
군림의 의지가 없는 알파는 이토록 부드러웠다. 예준은 혼을 쏙 빼앗겨 얼떨떨한 얼굴로 다시 한번 남자를 밀어냈다. 그제야 순순히 물러난 남자가 이번에는 직접 그의 귀를 어루만졌다. 미간을 좁힌 채 바라보는 눈빛에 불만이 그득하다. 그래도 다정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웬만하면 이런 곳에선 일하지 말아요. 알파들 드나드는 곳이잖아. 손버릇이 좋을 리도 없고.”
애초에 제 의지로 발을 들인 것이 아니었다. 예준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게요.”
“물 좀 마시고 술부터 깨요. 아직도 어지러운 것 같은데.”
취기 때문인지 성감 때문인지 둘 다가 원인인지 알 수 없었다. 큰 손으로 귓불과 뺨을 동시에 어루만진 태경이 예준을 품으로 당겨 안았다. 문을 안쪽으로 열기 위해서였다.
“딴짓했다는 거 아무도 모를 거야.”
“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이상한 우연. 그러나 남자는 잠깐의 접촉만으로 기분이 풀린 듯했다. 스킨십에 화답하기는 쉬우나 속사정을 묻기는 불편한 미묘한 관계였다. 일 때문이라는 짧은 답으로는 궁금증을 다 해소할 수 없었다. 남자도 그럴 것이다. 저 역시 그 못지않게 간결하게 답했으므로.
“연락할게요.”
“예….”
남자가 문을 더 열어 공간을 내어 주었다. 예준은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 곧장 밖으로 향했다. 복도와 복도가 만나는 곳에 대걸레가 넘어져 있었다. 뒤따라 나온 남자는 제게 시선을 주지 않고 원래 있던 방으로 향했다. 대걸레를 주운 예준이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화려한 불빛을 응시했다. 안은 떠들썩하고 질척할 것이다. 성욕이 동한 남자가 무엇을 더 이어서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예준은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그사이 더러운 먼지로 뒤덮인 바닥을 묵묵히 닦아 내기 시작했다. 취기는 차츰 가셨다. 유난히도 지루한 밤에, 예준은 이따금 부은 입술을 훔쳐 냈다. 무의식중에 벌인 행동이었다.
*
며칠 뒤 다시 만난 치문은 의기양양해 보였다.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았기에 예준은 대뜸 물었다.
“무슨 짓 했어, 너.”
“그 새끼 손 좀 봐줬어. 이제 걱정 안 해도 돼, 형은.”
녀석이 편의점 안에서 데워 온 핫바를 건넸다. 대번에 미간을 찌푸린 예준은 껍질 깐 핫바를 받아 들며 으름장을 놓았다.
“폭력은 안 된다고 했잖아.”
“안 썼어! …근데 무릎 꿇린 것도 폭력이야?”
“폭력이지.”
“잘못했으면 벌 받는 게 당연한 건데 뭐 어때.”
제 앞에서 거짓말할 리 없는 치문이지만 예준은 여전히 체한 듯 가슴이 답답했다. 정말 그런 협박으로 그 알파의 패악질이 얌전해질지는 두고 봐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결국엔 치문에게 양아치 짓을 청탁한 꼴이었다. 못내 입이 써서 도리어 말을 그치자 치문이 황급히 덧붙였다.
“그냥 무릎 꿇려서 싹싹 빌고 다신 안 그러겠다는 확답 받아 냈어. 리뷰도 지우게 하고. 별 볼 일 없는 새끼가 화풀이할 데가 없어서 형 붙잡고 지랄한 거야. 한 번만 더 문제 만들면 진짜로 칼침 놓는다고 했으니 이제 입 싹 닫고 얌전히 있을 거라고.”
치문과 예준은 동네 귀퉁이에 있는 작은 편의점 앞 파라솔에 앉아 있었다. 치문은 컵라면 두 개를 뚝딱 해치웠고 예준은 컵라면 하나와 삼각 김밥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비쩍 마른 오메가와 덩치 큰 조폭 녀석이 마주 앉아 있으니 드문드문 지나치던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시선 따위야 익숙했다.
“고마워. 근데 함부로 주먹질은 하지 마.”
“안 해, 안 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저 몰래 손을 쓴 녀석을 탓하는 건 무의미했다. 예준은 빈 컵라면 쓰레기들을 치우며 왠지 열감이 솟는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간만에 배달을 끝내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답례랍시고 치문에게 별것 아닌 편의점 음식을 사 주고는 생색을 낼 수도 없었다. 배를 두둑이 채우고도 입맛을 다시는 녀석과 술이라도 한잔하자고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며칠간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 전기담요 속을 파고들어 눈을 붙이고픈 생각밖에 없었다.
“들어가.”
“데려다줄까?”
“됐어.”
극구 만류하고는 녀석을 먼저 보냈다. 치문은 꽉 끼는 양복을 꼴사납게 여미며 손을 흔들었다. 다치지 않아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맥없이 눈썹을 긁은 예준이 뒤늦게 걸음을 옮겼다. 비싼 점퍼 덕분에 추위는 옅었다.
그렇게 집에 다다랐을 때였다. 반지하 창문 앞에 웅크리고 앉은 인영이 보였다. 앞에 쌓인 수북한 꽁초만 보면 교복 차림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푹 수그리고 있던 고개가 들렸다. 윤도하가 매섭게 눈을 치떴다.
“또 누구한테 대 줬기에 이 시간이야?”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예준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반지하 계단으로 향했다. 무시로 답하자 녀석이 다가와 어깨를 잡아 세웠다.
“어? 씨발, 맨날 뭐 하고 다니기에 자정 아니면 새벽이냐고?”
죽도록 일하는 것밖에 더 있나.
“무슨 상관인데? 그러는 넌. 대체 시간이 몇 신데 고등학생이 집에도 안 들어가고 또 여길 와 있어?”
“내 맘인데?”
“나도 내 맘이야.”
실랑이할 에너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윤도하를 밀어낸 예준이 현관문을 향해 다가섰다. 또 붙잡히지 않을까 예상은 했지만 막상 팔을 붙들리자 짜증이 치솟았다. 있는 힘껏 잡은 손을 떨쳐 내고 돌아섰다. 마침, 제대로 작동한 적이 없는 반지하 등이 깜박였다. 흰 불빛이 파르르 떨리다 켜지자 녀석이 거칠게 멱살을 잡아챘다.
옷이 늘어나면서 그 속에 은밀히 남은 흔적이 드러났다. 발견한 윤도하의 눈이 번뜩였다.
“이거 뭐야?”
윤도하가 남긴 상처 위에 덧남은 키스 마크. 녀석의 사촌 형이자 우성 알파인 이태경 대표의 작품이었다. 빨래를 못 해서 목이 드러나는 옷을 입은 게 화근이었다. 예준은 목덜미를 감추며 윤도하를 밀어냈다.
“걸레 새끼가 하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
눈에 띄게 이를 짓씹은 덕에 녀석의 잇새에서 까드득 깨무는 소리가 났다. 새파랗게 어린 낯으로 부들부들 떨어 대는 모습이 퍽 과민해 보였다. 밑바닥 인생이라 비난하면서 정말 밑바닥처럼 몸을 굴리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대체 왜? 그날의 폭력과 능욕으론 부족했나? 당해 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계속 찾아와 괴롭히는 걸 더는 받아 주어서는 안 되었다.
예준은 녀석을 내칠 작정으로 물었다.
“이 상처 왜 남았는지 궁금하지?”
녀석의 눈이 차게 가라앉았다. 예준은 멈추지 않고 상처를 환히 드러냈다.
“네 사촌이 남긴 거야, 이거. 너도 알다시피 그 사람은 알파잖아. 알파는 오메가랑 만나면 이런 짓 해.”
그러자 윤도하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비아냥댔다.
“그새 이거라도 됐어?”
“퍽이나. 난 그냥 다리만 벌려 주면 그만….”
순간, 녀석의 두 눈이 휙 돌았다. 말을 끝맺기도 전에 번개처럼 날아온 손을 막을 정신도 없었다. 퍽, 소리와 함께 세차게 돌아간 고개가 뻐근했다. 형님들처럼 저를 벌하는 듯한 후려침에 어이가 없었다. 예준은 피 맛이 감도는 침을 겨우 삼키며 말했다.
“네가 아무리 이래도 난 너한테 관심 안 둬. 페로몬이라는 게 생각보다 강력한 거거든. 머리가 하얘질 정도로 좋아. 걸레 같은 오메가라 알파한테만 발정 나는 걸 어떡해? …그러니까, 제발 그만 괴롭히고 가. 너 이러는 거 시간 낭비야.”
“처맞고도 반격 한 번을 안 하네. 왜 그러고 사냐?”
반항해 봤자 매만 더 번다는 걸 몸소 겪은 탓이었다. 수년간, 별 볼 일 없는 자들에게마저 굴복하며 살아야 했으니까. 소란을 피하는 방법으로 인격을 죽이는 것만큼 좋은 전략이 없었다. 속을 텅 비운 채로 견디다 보면 끔찍한 시간도 끝이 났다. 습관이라면 습관이고 지혜라면 지혜였다.
예준은 윤도하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아픈 뺨을 부여잡고 현관 비밀번호를 치기 위해 돌아섰다. 씩씩대면서도 한동안 말이 없던 녀석이 별안간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나랑도 해.”
뭘?
“이태경이랑 하는 거. 나랑도 하자고.”
툭, 전등이 꺼져 버렸다. 갑작스러운 어둠 아래 볼 수 있는 것이라곤 녀석의 음영 진 이목구비뿐이었다. 당황한 예준이 목덜미를 긁었다. 그와 했던 마지막 키스가 아직도 선명했다. 그런 걸 이 반항심에 가득 찬 고등학생과 할 리 없었다.
“베타는 감흥 없어.”
“이태경은 알파라서 좋다 이거야?”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예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파라는 단어에 녀석의 안광이 번쩍였다.
“그놈의 알파, 알파…!”
녀석이 주먹으로 벽을 쾅 내리쳤다. 씨근덕거리던 숨이 더 격하게 차오른다. 훅 떨어져 나가서는 돌겠다는 듯이 또 뱅뱅 맴도는 모습을 보자 녀석을 미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알파.
정확히는, 녀석 근처에 있는 우성 알파.
예준은 숨을 죽인 채 윤도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게 치근덕댔던 걸까. 알파를 향한 자격지심 때문에. 헛웃음이 났다. 하다 하다 이런 베타 녀석에게까지 시달려야 한다니.
“돌아가.”
씨발, 씨발, 연거푸 욕설이 이어진다. 반지하 바닥에 침을 퉤 뱉은 윤도하가 예준을 노려보았다.
“걸레.”
“그렇게 더러우면 이제 찾아오지 마.”
말하자 그제야 멀어지는 녀석이었다. 탕, 탕, 신경질적으로 계단을 밟아 오른 녀석이 두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혐오가 담긴 눈빛을 상상할 수 있었다. 녀석이 품은 관심은 감정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는 미미한 것임을 예준은 다른 설명 없이도 이해했다. 짓밟아도 되는 대상 앞에서는 다들 그러니까.
녀석이 떠나고도 예준은 잠시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맞은 뺨보다 속 깊은 곳이 더 아팠다.
*
스크린을 응시하던 태경의 주머니가 진동했다. 자그마치 두 시간만의 연락이었으나 상대가 누구인지는 직감으로 느꼈다. 핸드폰을 꺼내 들던 그의 두 눈에 화색이 감돌았다.
[네 괜찮습니다]
재미없는 예준의 답장이었다. 짤막한 문장 위에는 자신이 먼저 보낸 문자가 남아 있었다.
[만날까요? 오늘.]
명색이 섹스 파트너가 되기로 해 놓고 제대로 한 게 없었다. 첫 약속은 타인이 남긴 키스 마크로 감흥을 잃었고, 심지어 두 번째는 우연한 만남이었다. 접대 자리가 불편해 벗어난 타이밍에 떡하니 나타날 건 뭔가 싶었다. 창부와는 거리가 먼 차림이어서 다행이었지만, 대걸레를 쥔 손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생계가 녹록지 않은 오메가는 흔하다. 지켜본 바로 예준을 그런 곳에서 마주쳤다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왜 그런 곳에서 일하느냐고 묻는 것만으로 기분이 상할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간섭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말을 아낀 건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우성 알파라는 이유로 때때로 작은 호기심마저 월권으로 치부당하곤 했다. 묻지 않는 것이 최선의 존중임을 예준이 이해해 줄지는 미지수였다.
[열한 시에 봅시다. 장소는 따로 남길게요.]
[네]
이번에는 곧장 답신이 왔다. 짤막한 한 글자를 주시하며 미간을 찌푸린 태경이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표님이 요즘 영 집중을 못 하시는 것 같은데요?”
입사한 지 6개월 된 사무직원의 말에 선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수업 시간에 딴짓하는 고딩도 아니고 왜 테이블 밑으로 핸드폰을 보고 그래?”
그랬었나. 굳이 이유를 찾자면 회의실 내부가 어두워 액정 화면이 방해될까 그런 것뿐이었다. 그러나 딴짓도 맞고 딴짓을 들키기가 싫었던 것도 맞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중요한 연락이라.”
대강 둘러댄 태경이 상체를 바로 세웠다. 다시 집중하겠다는 의미였는데 사람들의 핀잔이 끝나지 않는다.
“창밖 보면서 딴생각도 많이 하시는 것 같구요. 어제는 커피 들고 멍 때리시던데 왜 그러시는 거예요? 1분 1초도 낭비 안 하던 분이.”
LK의 초기 멤버인 혜윤이 사무직원의 말을 거들었다. 일 중독자인 데다 최근에는 후계자 수업이란 명목으로 퇴근 후에도 이리저리 끌려다니기 바빴다. 겹겹이 피로가 쌓이는 와중이라 할지라도 머릿속을 번잡스럽게 만드는 주제는 늘 존재하는 법이었다.
예컨대, 이전에 없던 섹스 파트너라던가.
“연애하세요?”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태경이 헛웃음을 지었다. 연애라. 오메가와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상대 쪽에서 생각이 있다면 물러설 이유는 없겠지만, 비밀에 부쳐야 할 관계였다. 번듯한 기업의 후계자가 오메가를, 그것도 남성을 반려로 들일 수는 없으므로.
“연애는 무슨. 그런 거 할 시간이 어딨습니까. 지금 이것만 봐도 해결할 문제가 산더미네요.”
태경이 스크린에 비친 조감도를 가리켰다. 꽤 역사가 깊은 동네에 들어설 한 교회 건물로, 끽해야 2~3층 높이의 건물들만 빼곡히 들어선 곳에 유럽의 양식을 본뜬 첨탑이 이질적으로 솟아 있었다.
“저 가시 같은 첨탑은 건축주 요구입니까?”
“네. 노트르담 뺨치게 만들어 달라던데요.”
“성당 아니고 교회인 걸로 아는데.”
“모든 종교인이 다 조예가 깊은 건 아니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 혜윤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건축주의 요구에 따라 만든 교회 건물은 따지자면 최악의 결과물을 내놓은 셈이었고, 태경은 이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다.
“흉물이야. 저대로 두면.”
“예?”
혜윤이 퍽 충격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웃음기를 지운 태경이 다시 한번 스크린을 가리켰다.
“주변 풍경과 전혀 조화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외관이라도 콧대가 너무 높아요. 저 잘난 맛에 취한 이질적인 건물은 보기 흉할 뿐입니다. 저런 곳에서 누가 종교의 절대적인 너그러움을 이해할 수 있겠어, 안 그래?”
“그건 그렇지만…. 건축주께서 워낙 단호하셔서요.”
“최대한 타협해 봐요. 저런 상태로는 절대 컨펌 못 내립니다. 하다못해 저 고고한 첨탑만이라도. 혜윤 씨가 그 정도 능력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혜윤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미소를 띤 태경이 그녀 쪽으로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애걸복걸해야 들어줄 겁니까?”
“에이…. 대표님도….”
함박웃음을 띤 혜윤이 네, 해 볼게요, 하며 손사래를 쳤다.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선영이 혀끝을 찼다. 그녀는 태경의 너른 어깨를 퍽 두드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 그럴 때마다 격 떨어져 보이는 거 알지.”
노골적인 귓속말에 태경은 반박하지 않았다. 언제는 몸 파는 애들 같다더니, 저 정도 핀잔이면 양반이었다. 원하는 바가 있을 땐 고개를 숙여야 하는 법이다. 어차피 자신이 돌보아야 할 직원들이었다. 격 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저 건물처럼 콧대 높은 대표가 되고 싶진 않았다.
“오늘 기분 좋은 일 있나 봐. 오는 말이 고운데.”
능청스럽게 받아치자 선영이 미소를 가장하며 답했다.
“너야말로 기분 좋은 것 같은데. 혹시 만나재? 예….”
태경은 하마터면 친구일 때처럼 선영의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직원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기에 귓속말이 들릴 리는 없었지만, 회사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져 좋은 것이 없었다. 하물며 연애도 아니고.
“체통 좀 지키자, 이태경?”
애써 자세를 바로 한 태경이 입술 가운데 검지를 가져갔다. 슬며시 눈가를 찡그리자 알아들은 선영이 입에 지퍼 채우는 시늉을 했다.
“하긴 시작도 전에 초 치면 안 되지.”
의미심장하게 말한 그녀가 활짝 웃었다. 태경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직함을 단 그녀가 직원들의 수다 사이를 파고들었다. 뭔데요? 뭔데? 선영 역시 그녀가 말한 격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한바탕 딴 길로 샌 회의 분위기를 바로 잡기 위해 태경이 리모컨을 들어 내부의 불을 밝혔다.
“삼십 분 정도 쉬고 합시다. 커피 사 줄까?”
묻는데, 누군가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손님 오셨는데요.”
적어도 오늘 회사에서 만나기로 한 손님은 없었다. 데스크 직원의 얼굴엔 난감한 기색이 가득했다.
“누군데?”
“저 그게… 맞선 본 분이라는데요….”
눈치를 보면서도 꿋꿋이 말한 직원이 뒤통수를 긁었다. 회사에선 애정 전선의 일부조차 드러내지 않는 태경이기에 회의실 모두가 탄성을 내뱉었다.
“대표님 결혼하세요?”
“와…. 당분간 생각 없으시다더니. 반전인데요?”
태경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결혼은 무슨.”
너른 어깨를 바르게 편 그가 곤란한 듯 한 손을 허리에 짚었다. 큼큼,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헛기침 덕분에 직원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귀하고 귀한 떡밥을 마다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흐트러진 셔츠를 바로 잡은 그가 회의실을 나서자 문틈 새로 기어코 말이 흘러나왔다.
“진짜 결혼하시나 봐….”
웅성거림은 돌아와서 수습할 생각이었다. 태경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데스크로 향했다. 사무실 바깥 복도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언제나처럼 어그러진 선 자리였다. 그날, 그 자리에서 분명하게 의사를 밝혔고 여자 쪽도 군소리 없이 수긍한 것으로 알았다.
알파들끼리의 만남은 명확한 목적이 없다면 성사되기 어려웠다. 그 목적이 얼마나 간절하냐에 따라 판가름 나는 판이었다. 정략결혼은 대부분 쇼윈도 부부로 이어졌다. 혼인 관계와 별개로 끌리는 형질의 파트너나 애인을 따로 두는 경우가 많았고, 결혼으로 애정까지 얻는 부부는 극소수였다. 동질의 페로몬을 선택하면 극적인 쾌락을 포기해야만 한다. 형질을 지닌 이들에게는 대단한 비극이었다.
그렇기에 결혼과 애정 생활을 분리하는 알파가 많았다. 배우자나 정부를 여러 명 두어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알파들이 대부분이라지만 태경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것도 아니기에, 그는 그저 누군가에게 결속되는 시기를 의도적으로 늦추려 노력할 뿐이었다.
“오여진 씨.”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해요.”
짙은 향수 냄새. 시트러스 향과 플로럴 향이 적당히 섞인 인공적인 향에는 분명 함의가 있었다. 정작 페로몬은 갈무리하여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
‘향수 냄새 진동해요. …여자 향수 냄새.’
순간, 떠오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미성이 섞인 낮은 음성은 덜 자란 소년을 연상케 했다. 태경은 배 부근의 뻐근한 감각을 애써 지우고 사무실 초입의 유리문을 열었다. 여자를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날 잘 마무리한 걸로 기억하는데요.”
“잘 마무리했어요. 무례하지 않게.”
태경을 스쳐 지나간 여자가 가장 가까운 미팅 룸에 발을 들였다. 고개를 빼꼼 내민 직원들이 노골적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태경은 부러 통창을 가리지 않았다. 숨기려는 태도가 헛소문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아는 탓이었다.
“그런데 좀 아쉽더라고요.”
여진이 태경이 빼 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단발머리를 부드럽게 귀 뒤로 넘긴 여자가 태경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끝내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맞선 봐야 할 텐데 그럴 바에… 좀 질질 끌어 봐도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던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태경도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맞선을 봐야 하는 지경이었고 매번 파투를 내기도 무안했다. 아버지나 뚜쟁이에게 질타를 듣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부모님들이 워낙 극성이니까…. 몇 번 더 만나 볼 생각 없어요?”
길게 드러난 목이 예쁜 여자였다. 태경은 의자 대신 테이블에 걸터앉아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그날 못 잔 것 때문에 이러는 거면.”
여진의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수치스럽다기보다 부끄러운 기색이었다. 그녀는 선을 보았던 그날 호텔 방에 함께 머무르길 먼저 제안했고, 재고 없는 태경의 거절에도 자존심을 다치지 않았다. 누구나 떠받드는 알파이기 때문일까. 태경에겐 잘된 일이었으나 재고의 여지가 없기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아요.”
“잠자리 거부 잘 안 한다고 들었는데요.”
대체 소문이 어떻게 났기에. 업계나 결혼 시장에서 탐나는 신랑감으로 유명해지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저렴하게 굴진 않았다. 그저 몇몇과 몸을 섞은 정도일 뿐. 애당초 알파와의 관계로는 성욕을 다 채우기도 어려웠다.
오메가라면 모를까. 태경은 예준을 만났던 날 몇 번이나 사정했는지 떠올렸다. 여진과 헤어진 후에 보았을 때는 고작 목덜미에 입 맞춘 게 다였다는 사실도. 더불어, 룸살롱에서 마주친 순간에는 며칠 동안 사막에서 헤맨 사람처럼 키스했다. 성욕은 쌓여 갈 뿐 해소되지 못했다. 노골적으로 청해 오는 만큼 알파와 대강 풀어도 될 일이겠으나 도저히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태경이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할 땐 해요. 여진 씨처럼 너무 원하는 사람과는 거리를 두는 편이 깔끔해서 그러는 거지.”
단호한 태도와 달리 손끝이 달아올랐다. 몸이 이전의 유희를 기억해 낸 탓이었다. 탱글탱글하게 솟은 엉덩이를 꽉 움켜쥐던 감각. 남자의 구멍 속에 성마르게 성기를 박아 댔던 밤.
알파인 여진에게서는 그런 쾌락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탓하려면 형질을 탓해야 할 상황이었다. 제대로 된 오메가 맛을 봐 버려서 이러는 거라고 자조한다 해도, 태경의 속내를 여진이 알아챌 도리는 없었다.
“여진 씨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그럼?”
“감정 얽히면 복잡해져요.”
“아아. 자면 감정이 얽힐 거다?”
한 번으로 끝내자던 여자들이 한 번으로 끝내기 싫다며 매달린 게 여태껏 백 퍼센트였다. 태경에겐 두 번 고려할 것도 없는 진중한 문제였으나 여진은 대단한 자신감으로 받아들일 터였다. 태경이 머쓱한 듯 귓불을 매만졌다.
“곤란한 건 알겠는데 피차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저 낭비하는 거 좋아하는데. 알파들이 다 그렇잖아요.”
자신보다 일곱 살 어린 여자. 그 아이도 스물여섯이라지 않았나. 여지없이 누군가를 상기한 태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낭비해 줄 알파 찾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가능하면 그 사람이랑 해 줘. 다음 상대가 나보다 나을지 어떻게 알겠어.”
여진은 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태경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단호하게 말하겠는데 이 대표님보다 나은 알파는 없어요. 어차피 결혼해야 한다면 빨리 해치우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요?”
실리를 따지자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쇼윈도 부부로 살 거라면 그 시기가 몇 년 앞당겨진다고 하더라도 매한가지일 테다. 태경에게도 결혼은 그저 형식일 뿐이지만, 지금은 일에 매진해야 할 시기였다. 아버지에게 자기 능력을 증명하는 일은 끝냈으나 개인적인 욕심까지 명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일곱 살 많은 남자 별로야. 또래 찾아.”
그러면서 오늘 밤 일곱 살이나 어린 남자와 놀아날 계획을 품지 않았던가. 모순으로 점철된 상황에도 태경의 말은 진심이었다.
“주제넘은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다음 사람이랑은 자 달라면 좀 자 줘요. 모르니까 더 궁금하잖아.”
태경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여진은 기분 나쁜 눈빛을 하지 않았다. 제 말이 먹혀들어 오히려 기쁘다는 얼굴이었다. 어색하지 않은 정적이 잠깐 맴돌았다. 적기에 자리에서 일어선 여진이 태경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냈다.
“일하는데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연락하면 안 만나 줄 것 같아서 그런 거니까 이해 좀 해 주시고요.”
“기꺼이.”
미련 없이 발걸음을 떼는 여진을 위해 태경은 이번에도 문고리를 먼저 잡아 길을 터주었다.
“쓸데없이 친절하네요.”
투정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베이터 앞까지 동행해 주자 재개하기로 한 회의 시간이 이미 가까워져 있었다.
“조심히 들어가요.”
“다음 모임 때 봐요.”
“그러든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돌아선 태경이 통창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것 좀 질질 끌어 주는 게 뭐가 어려워서 거절해?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뻔했다. 말간 얼굴을 떠올리며 태경은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내젓던 그의 두 눈에 은밀한 열감이 더해졌다.
*
H 호텔에서 열한 시. 약속을 정하는 일은 간단했다. 사무실 조명을 끈 태경이 재킷을 집어 들었다. 회사는 텅 비어 있었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사람 또한 그가 마지막이었다. 태경은 굳은 어깨를 주무르며 자신의 SUV 차량에 올랐다. 금요일 밤, 강남의 대로는 환했다. 기온은 12도. 자신이 준 점퍼를 입었다면 그저 쌀쌀한 정도에 그칠 날씨였다.
멀지 않은 H 호텔은 몇 번 선을 본 장소이기도 했다. 오여진과도 이곳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일전의 약속은 따로 안면을 터 둔 M 호텔 직원과 은밀하게 잡았으나 지켜보는 눈이 있다면 익숙한 장소도 나쁘지 않았다. 하룻밤으로 그칠 일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테니까. 오메가와의 정기적인 만남을 반기지 않을 이 회장을 의식한 일이었다.
호텔 초입에 다다랐을 때였다. 태경은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오른쪽 차선, 대각선 방향에 시선을 두었다. 정차한 차들의 브레이크 등이 검은색 스쿠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스쿠터와 같은 색의 헬멧은 비교적 작은 치수였고 태경은 곧 자신의 점퍼를 알아보았다.
이 시간까지 일한 건가? 저번에는 스쿠터 없이 오지 않았던가. 희미한 기억을 더듬는데 신호가 바뀌었다. 태경은 차선을 바꾸어 먼저 앞서 나가는 스쿠터를 따랐다. 예준의 스쿠터는 갓길로 빠져 다른 차를 앞지르거나 칼치기로 속력을 높이는 요령 따윈 없었다. 다만, 호텔 정문에선 제법 가파르게 핸들을 꺾었다. 호텔이 아닌 호텔 주변에 주차할 모양이었다.
어딘가 올곧은 면이 운전 습관에도 배어 있다. 슬며시 미소를 띤 태경이 호텔 정문으로 향했다. 직원에게 차를 넘겨준 뒤 부러 담배를 피우고 로비로 들어섰다. 곧 엘리베이터 앞에서 머리를 정돈하던 예준의 뒷모습이 보였다.
옆에 나란히 서자 페로몬을 감지한 예준이 고개를 들었다. 따로 눈치를 주지 않아도 먼저 인사를 건네는 실수는 하지 않는다. 바로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꾹 다물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오른 엘리베이터 안에는 단둘뿐이었다.
“잘 지냈어요?”
“예.”
안부를 묻고 룸 카드를 점퍼 주머니 속에 넣어 주었다.
“먼저 올라가 있어요.”
태경은 예약한 방의 층수보다 2층 아래에서 내렸다. 부러 층계를 오른 뒤 방으로 들어서자 방 한가운데 어색하게 선 예준이 보였다.
“이제까지 일한 거예요? 스쿠터 타고 왔던데.”
태경이 재킷을 벗으며 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점퍼의 지퍼를 내린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서 보니 적잖이 피곤한 기색이었다. 말간 얼굴은 평소보다 더 하얗게 질린 채였고, 가뜩이나 마른 몸은 안 본 새 더욱 종잇장이 되어 있었다.
“먼저 씻을래요?”
어쩐지 대화를 나누는 게 더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선뜻 제의하자 예준이 쭈뼛대며 욕실로 향했다. 배까지 맞춘 사이에 뭐가 그리 어색할까 싶으면서도 섹스 파트너를 둔 경험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태경은 소리 없이 웃으며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샤워기 물소리를 뒤로한 채 한동안은 주말을 앞둔 도시의 야경에 사로잡혀 있었다.
뒤이어 씻고 나오자 이렇다 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아하게 침실 쪽으로 향한 태경이 침대 위에 푹 파묻힌 예준을 들여다보았다. 입고 온 옷을 그대로 꿰입은 채 눈을 붙인 아이는 곤히 잠들어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태경은 머리카락도 말리지 않고 무방비하게 누운 몸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그대로 뺨과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 맞추자 뒤척이던 예준이 눈을 떴다. 무게감 없이 올라타 고개를 젖히게 했다. 예준이 옅은 한숨과 함께 목덜미를 내어 주었다. 허벅지 안쪽을 꽉 잡아채 벌렸다. 젖었을 안쪽을 당장 들쑤시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꼬르륵….
처음엔 무시했다. 티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납작한 배를 문질러 주자 예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리고 다시 꼬르륵. 텅 빈 위장이 내는 소리가 제법 컸다. 태경이 살결 위에 파묻었던 입술을 떼고 눈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식사한 게 언제야?”
경악스럽게도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태경이 예준의 입술을 두드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설마 온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건 아니지?”
“…바빠서요.”
“한 끼도 안 먹었어요?”
“네….”
자신 없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잠에 취한 눈두덩까지, 잠을 깨워 달려들기부터 한 것이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태경이 가까스로 맞붙은 배를 떼어 냈다. 손을 붙잡아 일으키자 휘청이던 몸이 푹 안기더니 곧 동그란 코끝이 어깨에 닿았다.
“어젠.”
“저녁은 먹었어요.”
“이대로 하면 기절할지도 몰라.”
“…괜찮은데. 어차피 깨니까.”
말과 달리, 예준의 배가 한 번 더 꼬르륵 울렸다. 고개를 내저은 태경은 결국 침대를 벗어나 흐트러진 가운 차림을 가다듬었다.
“뭐라도 시켜 줄 테니까 눈 붙이고 있어요. 많이 피곤한 것 같은데.”
“그냥 하고 집에 가서 해결해도 괜찮아요.”
벌써 자정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겉모습만 보아도 평소 끼니를 잘 거른다는 사실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려보내도 기껏해야 라면 같은 걸로 때우겠지. 어쩌다 하루 굶은 것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쓰였다. 태경은 곧바로 룸서비스를 주문하고 방 안의 조도를 더 어둡게 낮춰 주었다.
삼십 분쯤 흘렀을 때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태경은 예준을 깨워 테이블에 앉혔다. 섹스할 때 부담스럽지 않도록 수프와 함께 부드러운 식감의 음식만 주문했는데, 예준은 그것을 보자마자 감사 인사도 잊은 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던 거다. 마주 앉은 태경이 도수가 낮은 화이트 와인을 잔에 따라 주었다.
“몇 시부터 일했어요?”
“열 시요.”
“몇 시까지 일했는데?”
“여기 오기 직전까지요.”
온종일 여기저기 쏘다녀야 하는 일이었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라면 감기에 걸릴 가능성도 컸다. 공복이 아니더라도 컨디션이 좋을 리 없었다.
“오늘 같은 날은 거절해도 괜찮아요.”
수프에 빵을 찍어 먹던 예준이 슬그머니 뒤통수를 긁었다.
“…좀, 하고 싶었어서.”
의외로 솔직한 대답에 태경의 귓불이 뜨거워졌다. 히트 사이클 때와 평소의 모습이 사뭇 달라서 그 또한 성욕을 느낀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섹스는 정신적 피로를 푸는 데도 효과적이고, 애초에 오메가의 성욕은 컨디션에 좌우되지 않으니 그럴 수 있었다.
“아까, 만졌을 때 젖었어요?”
“네.”
답한 예준이 빵 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고 다시 숟가락을 집는 손끝이 발갰다.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오메가가 눈앞에서 음란한 향을 풍기는 탓에 태경의 성기는 이미 단단해진 지 오래였다. 먹는 모습만 보고도 사정할 순 있겠으나 테이블 아래에서 기둥을 쥐고 흔드는 건 취향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어느 정도 위장을 채운 예준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이젠 팔꿈치를 괸 채로 슬슬 졸기까지 한다. 피곤해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를 들쑤시는 것도 취향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 태경이 복잡한 머릿속을 잠재우며 예준이 놓친 숟가락을 손에 쥐여 주었다.
“주말에도 일해요?”
“네. 가능하면요.”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먹이고 돌려보내면 깔끔할 것을, 태경이 저답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내일 정오까지 같이 있을까? 굳이 집까지 갈 필요 없잖아. 피로 풀고, 괜찮으면 섹스는 내일 오전에 하고 헤어집시다. 어때요?”
만난 이래 눈을 가장 크게 뜬 예준이 눈치를 보았다.
“그래도 될까요?”
“되지.”
섹스를 안 하겠다고 하면 이대로 돌아가겠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만났으니 섹스는 하고 헤어져야 도리에 맞는다고 여길지도. 태경에게도 목적은 오메가와 몸을 섞는 것이었다.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만남까지 일이 틀어지긴 했으나 두 사람을 정의하는 관계는 명백히 섹스 파트너였다. 이번에도 하지 않고 헤어지면 정의가 불분명해진다.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던 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치고 와인으로 입가심까지 하면서도 눈이 가물거려 감기 바쁘다. 성욕을 풀지 못했으니 짜증이 나야 마땅한데도 보고 있으니 귀여웠다. 가학심을 자극하는 면만 빼면 도통 부정적인 생각을 품을 수가 없는 예쁜 얼굴이었다.
“불편할 테니 가운 입고 자도록 해요. 온종일 입고 있던 옷이잖아. 이건 세탁 맡겨서 내일 바로 입을 수 있도록 해 줄게.”
예준이 그런 친절까진 바라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잠잠해지는 걸 보면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태경은 깨끗한 가운을 건네고 돌아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옷을 갈아입은 예준이, 페로몬이 푹 밴 티셔츠와 바지를 내밀었다. 직원을 호출한 태경이 턱짓으로 침실을 가리켰다.
“먼저 자요.”
그가 고분고분 지나치려는 예준을 붙잡았다. 젖은 머리카락 끝을 문지르며 덧붙였다.
“머리는 말리고.”
“네.”
대답한 예준이 미련 없이 침실로 향했다. 가운이 어색한 듯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태경은 다소 허탈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세탁까지 마치고 침대로 향하자 한쪽 면을 넓게 비워 둔 채 잠든 예준이 보였다. 옆에 누워 팔 안에 가두어도 깨지 않는다. 품속에서 밤새 달콤한 숨이 퍼졌다.
*
배려가 무색하게도 예준은 오전 열 시가 지나도 눈을 뜨지 못했다. 태경은 커튼을 부러 열지 않고 손목시계를 채웠다. 어제의 차림새 그대로 재킷까지 걸치자 결국에는 나쁘지 않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성욕에 시달리느라 잠을 설쳤다. 그러나 겨우 스민 달빛에 의지해 잠든 얼굴을 보는 일은 즐거웠다. 페로몬을 지닌, 따뜻한 몸을 내내 품고 있었던 탓에 피로가 쌓인 몸도 오히려 회복된 기분이었다.
밤새 미열이 오른 예준을 강제로 안기는 무리였다. 예준에게 어떤 것이 쌓였든 섹스로 그것을 풀기엔 말이 안 되는 컨디션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섹스는 불발이었으나 태경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가운에 감싸인 몸을 어루만지다 방을 빠져나왔다. 용량이 적은 해열제와 아침으로 먹을 죽은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과한 친절이라 할지라도 섹스를 하지 않았으니 화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터였다. 부담스러울지언정 오해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섹스 파트너란 관계는 무척이나 오묘했다.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겠다고 선언한 뒤 시작한 관계일지라도, 서로의 사정을 아주 모를 수는 없었다.
치열하게 감추어도 숨길 수 없었던 예준의 고된 어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