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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We were made for each other (10/11)

외전 1. We were made for each other

온통 젖은 꼴로 할머니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었다. 다 큰 남자 둘이서 무슨 짓을 하다가 애들도 안 빠질 도랑에 빠져서 그 꼴이냐며 잔소리도 들었다.

영하야 뭐, 늘 듣는 게 잔소리지만 최세계는 실로 오랜만에 들을 호통이었다. 그가 묵묵부답으로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평생 고급 호텔에만 묵었을 남자가 근처 모텔에 방을 구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영하는 할머니 집에서 잘 계획이었다. 할머니에게 못다 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 승준이에게 가진 미안한 마음 때문에 할머니께 좀 더 잘해 드리고 싶다. 결국, 최세계가 넘어갔다.

그날 밤에는 피곤한 낯으로 촌스러운 이불 위에 누운 남자의 옆구리에 딱 붙어 잠들었다. 조금 무서운 기억이 남은 방이었으니, 그 핑계를 대고 달라붙자 세계는 가타부타 말없이 영하의 가슴 위를 차분히 두드렸다.

“깜둥이 귀엽지?”

아침 일찍 일어나 손을 잡고 걸었다. 목적은 깜둥이였다.

머리에 마른 풀을 잔뜩 묻힌 깜둥이가 영하를 보자마자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녀석이 뛸 때마다 뿌연 땅 먼지가 공중에 부유했다. 영하는 그조차도 신경 쓰지 않고 당장 뛰어가 무릎을 꿇고 깜둥이를 끌어안았다. 뺨과 입술 위로 강아지의 조그마한 혀가 느껴졌다.

“까만색이네.”

“색깔로 차별하면 안 돼. 털 색에 묻혀서 눈이 잘 안 보이는 게 매력 포인트인데.”

“차별한 적 없어. 까만색이라고. 그냥.”

“깜둥아, 오빠 보고 싶었어?”

영하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깜둥이에게 물었다. 깜둥이가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을 끔뻑이곤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으으으응.”

신음처럼 앓는 소리를 내고 깜둥이를 다시 한번 품에 안았다. 너무 조그매. 이대로 안고 도망가 버리고 싶다. 이렇게 밖에서 키우기엔 너무 작은 개인데. 깜둥이의 발은 영하의 손가락 두 마디보다 작다. 발소리도 가벼운 소형견이었다.

“오빠도 깜둥이 너무 보고 싶었어. 왜 이렇게 귀여운 거지? 밖에서 외롭겠다. 나 아니면 산책시켜 주는 사람도 없는데….”

서울에 있는 동안, 영하는 종종 깜둥이를 떠올렸다. 하다못해 중대형견이었으면 이렇게까지 걱정하지도 않는다.

보슬보슬한 머리 위를 손가락으로 간지럽혔다. 깜둥이가 작은 턱을 손바닥 위에 올리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니 세계가 못마땅한 듯이 주변을 배회했다. 정신 사납게.

“아직 두 살 애긴데….”

“개가 두 살이면 다 큰 거야.”

“저리 가. 깜둥이랑 놀 거니까.”

“참 나.”

기가 막힌 듯 헛숨을 뱉고는 정말로 저리 갔다. 유난히 오늘따라 말을 잘 듣는다. 점심만 먹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야 하니 깜둥이와 이별할 시간이었다.

산책이라도 마저 시켜 줄까. 몸집에 비해 유난히 크게 솟은 귀를 만지작거리곤 일어섰다. 키우고 싶지만, 그가 절대로 허락해 주지 않을 테니 여기서 마음껏 놀아 주고 가야지.

이별을 앞두고 우울해하던 영하는, 정작 집에 돌아갈 땐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돌아갈 땐 둘이 아니라 셋이었으니까.

품 안에는 비누 향을 풍기는 깜둥이가 영하의 겨드랑이 밑으로 얼굴을 쏙 내밀고 세계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깜둥이는 차에 타 보는 게 처음일 텐데도 겁 하나 내지 않고 씩씩하게 네 시간을 버텨 냈다. 겁쟁이 주인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다.

영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바닥에 깜둥이를 내려놓고 끙끙거렸다. 개처럼 엎드려 깜둥이와 눈을 마주치고 기뻐했다. 현관 앞에서 그 꼴을 내려다보던 세계의 눈가가 미묘하게 좁아 들었으나, 그날은 건드리지 않았다.

“아빠.”

이틀 내내 자리를 비워 밀린 업무를 처리하던 세계가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는 한쪽 발을 치켜든 새까만 강아지가 존재했다. 영하가 다시 한번 “아빠.” 하고는 강아지의 오른발을 살며시 흔들어 인사하는 모습에 다물린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넌 뭔데.”

“난 오빠지.”

“엄마 아닌가.”

세계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무시했다. 의자를 가져와 일하는 세계의 옆에 붙어 앉은 영하가 허리를 내밀어 모니터 안의 글자를 읽었다.

숫자만 한가득…….

통계학과나 회계학과는 못 가겠네. 뽀송뽀송한 냄새가 나는 깜둥이의 머리 위로 사알짝 턱을 올리자 안긴 몸이 움찔 떨었다.

너무 좋아. 그리고 저를 위해 강아지를 키우기로 결심한 이 남자도 좋다. 지금은 길거리 한복판에서 뽀뽀를 하라고 시켜도 할 수 있을 기분이었다.

전날, 저리 가라는 내침을 듣고 세계가 향한 곳은 깜둥이의 주인집이었다. 바깥에서 키우는 개에게 비싼 값을 쳐주겠다니 노부부는 잠깐의 고민 끝에 승낙했다. 영하라면 더 잘 키워 주리라 믿음이 간다는 이유였다.

“까만색이라 털 묻어도 티는 안 나겠네.”

까만 티를 입고도 아무런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며 말했다. 영하 역시 동의했다. 코트나 재킷을 입어도 괜찮겠다. 물씬 사랑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저 까만 개로 태어났을 뿐인데도 그게 고맙다. 깜둥이의 가슴팍을 마구마구 문지르자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한다. 그래 봤자 조그마해서 전혀 무섭지 않았다.

세계가 물었다.

“이름 새로 안 지을 거야? 깜둥이는 너무 시골집 개 같잖아.”

“생각해 보고 있어. 좋은 게 안 떠올라. 까미는 너무 흔하잖아. 까만 개 이름은 대부분 까미일걸?”

영하에겐 첫 번째 강아지다. 그토록 염원하던 것을 이뤘고, 또 깜둥이는 특별한 연을 맺은 사이였다. 혼자 남은 외로움과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 주던 존재였다.

“어떡해, 아빠…. 너무 귀여워.”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며 그가 돌아본다. 손으로는 케이스에서 안경을 꺼내고 있었다. 품속에는 어두운 그림자에 묻혀 존재감이 흐릿해진 강아지가 얌전히 쌕쌕 숨만 뱉고 있었다. 안경을 꺼내 든 그가 “그래.” 하고 대꾸했다.

최세계의 눈에는 낯선 강아지보다는 귀엽다며 개를 향해 애교를 부리는 영하가 훨씬 사랑스럽긴 했으나, 앞으로 최소 한 달간은 개만 끌어안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불만을 말할 수는 없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다.

*

“오늘은 뭐 할 거야.”

출근 준비를 마치고 시간이 남은 세계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최세계의 뒤꽁무니를 토독토독 따라다니던 강아지는 안방에 따라와 침대맡에서 고개를 올리더니 영하가 흐아암, 하품하는 소리를 듣고선 눈을 끔뻑였다. 갸우뚱 얼굴을 기울이곤 거실 소파 옆의 인디언 텐트 모양의 제 침대로 향했다. 영하가 강아지더러 집에 들어가라고 할 때면 “졸리지 않아? 흐아암.” 하고 하품하는 흉내를 내곤 했는데, 그 때문인 모양이다.

“백수 놀이.”

“그 놀이 이제 안 지겨워?”

“날마다 새로운데…….”

“…….”

애인 대신 이불을 잔뜩 끌어안은 영하의 대답이 마뜩잖은 얼굴로 침묵하던 세계가 이내 침구 속으로 손을 넣더니 예고도 없이 허리를 간지럽혔다. “으하학!” 호흡 가득 담긴 웃음소리가 거실까지 흘렀다.

폭신한 쿠션 위에 턱을 올리고 자던 강아지가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쫓아왔다. 저만 빼고 재미있는 것을 하는지 감시하는 모습이었다. 흘낏 침대 밑으로 시선을 준 세계는 아예 잠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 옆구리를 마구 괴롭히다 겨드랑이로 올라갔다.

“으흑, 악, 하지 마! 간지러워!”

“간지러우라고 하는 거야.”

“아흐, 흐, 하지 말라니까! 빨리 돈 벌어 와!”

“이게 정말.”

버릇없는 발언에 핏대가 솟았다. 정장이 구겨지도록 옷을 걷어붙이고 영하를 괴롭히던 남자는 이내 아들의 목소리가 헥헥대는 숨소리로 바뀌어 흐느끼자 손을 뗐다. 최영하는 완전히 녹다운이다. 침대에 누워만 있었는데 녹초가 된 모습으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영하가 입만 움직여 말했다.

“출근하고 나면 두부랑 같이 시체 놀이 할 거야.”

두부는 강아지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뭔가 특별한 이름을 찾는다던 영하는, 이틀이나 고민한 끝에 강아지의 이름을 두부로 지었다.

이름과 달리 두부는 까만색 포메라니안과 푸들 믹스인데, 커다란 귀가 조금 처졌고 유난히 귀 끝에만 털이 곱슬곱슬했다. 배 쪽에는 흰 털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세계가 손을 내려 두부를 가리키며 말하자 귀를 쫑긋 세운 녀석이 다가와 세계의 발 옆에 엉덩이를 내렸다. 매일 함께 있는 사람은 영하인데 두부는 영하보다 세계를 좋아했다.

사료 사 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건지, 단순히 얼굴을 밝히는 건지, 가끔 세계가 안아 주면 시야가 훌쩍 올라가니 그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영하는 서운하다.

너도 여자라고 저 남자가 좋으냐며 토라진 체를 해도, 두부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거실의 창문 앞에 앉아 바깥을 쳐다볼 뿐이었다.

“쟨 활동적이야. 너랑 달리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다고.”

“그래서 사십 분씩 두 번 산책 가잖아. 두부 덕에 매일 만 보씩 걷는다고.”

“그래서 이제 백수 놀이에 죄책감도 없으시다?”

“하루에 두 시간은 학생 놀이도 해.”

두부에게 향했던 손이 영하의 코끝을 내리눌렀다. 높은 코가 꾹 눌리자 버튼 눌린 곰 인형처럼 영하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하지 마.” 세계 또한 한숨을 흘렸다.

“환장하겠네.”

“뭘 환장해.”

“취두부는 쟤가 아니라 너야.”

영하가 두부라고 지었다는 말에 까만색 강아지니 두부가 아니라 취두부가 아니냐는 농담으로 시작했는데, 진짜 취두부는 최영하다. 말을 안 듣는다.

“왜 사람보고 취두부래!”

“월!”

두부 이야기가 계속 나오니 이름의 주인도 입을 열었다. 개 짖는 소리에 고개를 빼꼼 내민 영하가 두부를 보고 활짝 웃었다. 두 눈 가득 접고 사르르 녹아내리는 예쁜 미소를 지었으나 최세계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개를 데려오면 찬밥 취급 당할 것은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길다. 벌써 한 달인데 영하는 아빠 대신 두부였다.

“그래서 오늘 또 집에 있을 거야?”

“…나 한심해?”

두부를 끌어안고 멀뚱히 앉은 영하가 눈만 굴려 뜨며 말했다. 손안에 조그마한 발을 꾹꾹 눌러 본다. 좀 전까지 버릇없이 굴던 게 누구냐는 듯이 얌전해졌다.

“한심한 게 아니라 집 밖에 너무 안 나가니까 걱정해서 그러지. 트라우마 남은 걸까 봐.”

“트라우마 없어.”

“어떻게 없어. 너처럼 겁 많은 애가 납치를 두 번을 당하고 그렇게 다쳤는데.”

두부의 머리 위에 턱을 올린 영하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대답 없이 처진 모습을 보던 세계는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은 출근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영하.”

“응.”

“회사 쨌으니까 오늘은 외출해.”

세계가 영하의 두 뺨을 손에 쥐고 살살 얼굴을 흔들었다. 손 위에서 눈이 둥그렇게 커진다. “째도 돼?” 손바닥에 닿은 입술이 간지럽히듯 움직였다.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영하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잠깐의 고민을 마치더니 안아 달라며 두 팔을 위로 뻗었다.

무릎 위에서 폴짝 두부가 튀어 달아났고, 영하는 세계의 품 안에 안겨 올랐다.

나무 바닥 위를 타박타박 걷는 3kg의 발걸음 소리도, 익숙한 체향도 좋다. 커다란 손이 등을 연거푸 쓸어내리곤 뺨 위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트라우마가 없다는 말은 거짓이라도 예전과 달리 불안함은 없다.

두 발이 바닥에 닿았다. 영하가 말했다.

“혼자 나가는 건 아직은 조금 무섭긴 해.”

두 번째 납치에선 뒤따라 붙는 사람이 있는데도 당했다. 영하의 뒤를 밟던 남자는 전치 3주의 외상을 입었다. 서민석은 죽고, 서민석의 아버지 또한 재판을 앞두고 구속당했어도 초조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계의 가슴팍에 들러붙은 영하가 중얼거렸다. 두부도 영하를 따라 세계의 다리 뒤편에 매달려 두 발을 버둥거렸다.

“어서 안아 줘.”

본인 말고 강아지를 안아 주란 명령이었다.

뺨을 실룩인 세계가 두부를 품 안에 들어 올리자, 영하의 입술이 내내 두부의 주둥이인지 뺨인지, 턱인지 알 수 없는 부근에 가볍게 내려앉는다. 세계가 불쾌한 낯으로 새까맣고 조막만 한 얼굴을 응시했다.

개를 질투하는 건 개만도 못한 일이다.

최세계의 휴대폰의 잠금 화면을 열면 나오는 글자였다. 오죽하면 배경 화면으로 만들어 놨다.

최세계는 질투라는 소모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남자였다. 당연한 일이다. 시기와 질투는 결핍으로 일어나는 감정이었다. 부, 명예, 외모, 어쩌면 정신력. 남들이 바라던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그가 살면서 누군가를 부러워할 일이 없었으니 질투라는 것을 느껴 볼 겨를이 없었다.

물론 최세계라고 36년을 살면서 언제나 첫 번째 자리만 고수해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말의 부족함은 다른 점으로 충분히 커버를 하고도 남는다. 그러니까 질투를…….

“아이고, 예뻐.”

“…….”

“오빠는 두부가 진짜 세상에서 제일 좋….”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질리지도 않는지 하루 종일 두부와 오빠를 입에 달고 사는 영하의 말을 끊었다. 당분간 두부 반찬은커녕 찌개에 들어간 두부도 꼴 보기 싫다.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자 가느다란 손가락이 세계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오더니 미간을 꾹꾹 내리눌렀다. 표정 좀 펴라는 이야기였다. 세계가 언제 굳혔는지 모를 표정을 조금 이완시켰다.

“알았어. 어디 가는진 모르겠지만, 갈게.”

산뜻한 대답을 듣고선 세계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뽀뽀.”

“내 입에 두부 침 잔뜩 묻었는데 할래?”

“양치하고 와.”

*

도착한 곳은 병원과 회사의 간판이 빼곡한 빌딩이었다. 2층에 ‘바른이 치과’라는 커다란 간판을 보고서 영하가 경악하고 뒷걸음질 쳤다. 흰자가 잔뜩 보이도록 두 눈이 확장된 얼굴이었다.

“설마 데이트하는 척 날 치과에 데려가는 거야?”

“놀라는 걸 보니 치과 가야 하는 모양이네.”

“아니거든?”

“그럼 왜 제 발 저린 것처럼 그러는 건데. 걱정 마. 치과는 너 혼자 가고, 오늘 볼일은 거기 아니니까.”

가볍게 미소 지은 세계는 손을 잡아끌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의 손을 유심히 지켜보니, 다행히 2층이 아니라 6층을 누른다. 곧장 고개를 돌려 층별 안내판을 확인했다.

6층

블레스 금융투자.

라비에 재활치료센터.

‘날 데리고 금융투자 회사에 데려가진 않을 테고. 재활치료센터에 데려가는 건가.’

이제 발목 안 아픈데. 혼자 중얼거리는 사이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들도 올라탄다. 세계의 등 뒤에 바짝 달라붙곤 습관처럼 어깻죽지에 이마를 쿵- 박고 있었다. 영하는 시선을 느끼고선 흘낏 고개를 돌리다 좀 전에 탔던 젊은 여자 셋과 눈이 마주치곤 어깨를 떨었다.

놀랐네…….

재빨리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왜 쳐다보지. 설마 또 아빠 보고 있던 건가.

단지 남자 둘이서 지나치게 붙어 있으니 쳐다본 것뿐인데, 영하가 엉뚱한 곳을 짚었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심에 세계의 허리를 쿡 찔렀다. 그는 별 반응 없이 층계 숫자만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6층에서 내린 것은 둘뿐이었다. 손목을 붙잡은 세계가 블리스 재활센터로 이끌었다. 역시 저쪽이구나. 재활 운동은 고모부가 있는 병원에서 충분히 했는데, 또 해야 하나?

“발목 이제 안 아픈데. 오래 걷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런 재활 운동이랑 달라.”

“뭐가 다른데?”

“상담 들어 보고 네가 결정해.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말은 그래도……. 이렇게까지 데려왔는데 하기 싫다고 할 수는 없다. 너무 게으르니까 이런 거라도 하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벽에 발레 사진이 유난히 많다. 유명한 무용수들의 사인도 열을 맞춰 걸려 있었다.

그제야 카운터 위에 적힌 홍보 책자가 눈에 읽혔다.

전문 무용수 컨디셔닝

재활 발레

재활 운동

세계 말대로 평범한 재활센터는 아니었다. 리햅 발레라고, 재활 발레와 자주 다치는 무용수들을 위한 재활치료센터였다.

영하는 흘끗 시선을 돌려 세계를 쳐다본다. 그 또한 내부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가 이곳을 부러 찾아보고 상담 예약을 잡았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 아래가 간질간질했다.

발레를 못 하게 되어서 속상한 표시를 낸 적은 입원했을 때 단 한 번밖에 없었다. 그야 무용수도 아니고 무용과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질척하게 남은 미련이었으니까.

시선을 느낀 그가 말했다.

“시체 놀이 그만하고 일주일에 두 번은 와.”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더니.”

“하기 싫다고 안 할 거잖아.”

뺨에 손가락이 툭, 닿았다 떨어졌다. 이 발목으로 발끝을 세울 수는 있으려나 모르겠네. 자신은 없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학원이나 업체가 다 그렇겠지만, 원장은 발목뼈에 금이 갔었다는 이야기에도 마냥 괜찮다는 말만 했다.

뭐가 괜찮을까? 의심스럽다. 나중에는 거의 혼몽한 눈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원장이 긍정적으로 말했다. 다 괜찮고, 그러려고 이 센터를 차렸다. 단 두 달이면 원래의 발목 컨디션으로 돌려놓겠다.

“오늘은 구경만 하세요. 마침 인대 늘어났던 무용수 회원분이 지금 재활 치료 중이시거든요. 그분도 발레를 하다가 현대무용으로 전환하셨다는데, 도움 많이 됩니다.”

어영부영 두 달 치 사인하긴 했다. 다른 것보다 레오타드를 입어야 하나 걱정이었다. 지금 입으면 좀 부끄러울 것 같은데. 재활 치료로 하는 거니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안내하는 원장을 따라 제일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연습실은 역시 10년이 지나도 다들 똑같구나. 발레 학원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영하는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구석에 콕 박혀 있었다. 대부분 여학생들이라 자기들끼리 친했다. 영하가 남자라고 배척하지는 않아도 같은 성별끼리 더 편한 모양이었다.

수강생이 제법 많은 학원에도 남자는 영하를 포함하여 고작 넷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동갑이었다.

다리를 모으고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으면, 동갑 친구가 수학 학원을 마치고 뒤늦게 등원했다.

‘영하 뭐 해?’

연습실에 들어오자마자 영하를 찾으며 인사하는 편이었다. 그날 친구는 키가 크질 않아 발레는 그만두려고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영하는 또래 중에 가장 컸고, 여성 무용수를 높이 들어올려야 하는 발레리노의 체형 조건 또한 큰 키를 선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작 초등학생이 키 걱정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일렀다. 실제로 영하는 그전까지 키가 큰 편이었지만, 중학생이 되며 역전됐다. 평균치는 웃돌아도 발레를 업으로 삼기에는 작은 키였다.

그때 고민해야 했던 건 걔가 아니라 나였네. 멈춰 선 세계의 등에 코를 박고 눈가를 찡그렸다. 안쪽을 둘러보기 위해 몸을 돌리는 사이,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곱슬거리는 머리에 마른 체구. 길게 트인 눈.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묘한 기시감을 느꼈는지 자세를 취하다 말고 영하의 얼굴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눈썹을 좁혔다.

“어디서 봤지…?”

“뭐야?”

웬 남자를 오랫동안 보며 고민하고 있으니 세계의 불쾌한 목소리가 닿았다. 그가 의식적으로 영하의 앞을 가리며 되물었다. “뭔데?” 그 물음에 대답했다.

“아니. 어디서 본 것 같아서. 근데 기억이…….”

다행히 더 고민해 볼 필요 없었다. 발끝을 세우던 남자가 “아!” 하고 크게 소리치더니 영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영하지?”

“어… 혹시 너 리듬 발레 학원 다녔어?”

“어! 맞아! 나 김기우. 기억해?”

얼굴을 보니 알겠다. 그때의 모습이 조금 남아 있었다. 다만 이름까진 기억해 내지 못해 안절부절 가슴이 조금 초조했는데 먼저 이름을 말해 주어 다행이었다. 영하가 화색을 띠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두 분 아시는 사이인가 봐?”

“네. 초등학교 때 발레 학원 같이 다녔거든요. 저 친구는 전학 간다고 옮겼지만요.”

“세상 이렇게 좁다니까. 특히나 뭐 발레나 무용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안다니까? 잘됐네요. 기우 씨도 몇 달 전에 다치고 컨디션이 계속 나쁘다며 등록했는데, 두 분 같은 시간에 하시면 되겠다. 그쵸?”

박수를 두 번 짝짝, 친 원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박수 소리가 연습실 안을 울린다. 기우가 고개를 빼며 물었다.

“영하 너 언제 언제 되는데? 나는 수요일 공강이라 수요일, 토요일 이렇게 다니거든.”

“아, 나는 휴학해서… 아무 때나 상관없는데 그러면 수…….”

“주말은 안 돼.”

의미심장한 기색이 내린 얼굴로 세계가 끼어들었다. 잠시 그의 존재를 잊고 있던 터라 화들짝 놀라 어깨가 떨렸다. 파드득 떨어 대는 어깨를 다독이듯 그의 손이 닿자 기우도 슬그머니 세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남자가 저렇게 존재감이 없는 타입이 아닌데.

“어, 응. 주말은 안 돼. 그럼 저는, 월요일, 수요일 할게요.”

“좋지요. 한 주의 시작을 경쾌하게 보내면 좋지. 그럼 시간은 이 시간대로 하고?”

“네. 네.”

“너 무슨 학교 다녀? 무용과? 너 엄청 잘했잖아. 그럼 예대 갔나?”

원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우가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긴, 어릴 때도 기우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조용한 영하에게 늘 먼저 다가와 이야기했다.

“잘하긴… 나 지금은 무용 안 해. 그냥 문과야. 역사학과.”

잔뜩 추켜세워 주니 민망하다. 간지러운 뺨 위를 문지르곤 고개를 내저었다.

“아, 진짜? 난 네가 김 선생님 아들이고 그래서 당연히 발레로 직업 삼을 줄 알았지. 근데 뭐, 무용과 가도 별거 없어. 졸업하고 일반 회사 들어가는 선배들 많다더라. 아차차, 난 현대무용과.”

내친김에 창문 앞에 가까이 있던 기우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 끝이 햇빛에 비쳐 노랗게 보인다. 그게 예쁘거나, 기우가 잘생겨서 본 건 아니고 염색모를 보니 비슷한 색깔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뒷머리를 쓸고는 고개를 주억였는데, 미간 사이를 좁히며 유심히 들여다보던 기우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너는 어릴 때도 그러더니 커서도 되게 예쁘게 생겼다. 눈이 진짜.”

“응…? 아니…….”

“영하 네가 공부를 왜 해. 연예인 하지. 무용과 갔어도 잘했을 것 같다. 여기도 결국엔 외적인 게 중요하거든.”

죽었다 깨어나도 한국인이다. 영하는 칭찬에 면역력이 없었다. 세계가 해 주는 예쁘다는 말에는 뻔뻔하게 ‘이제 지겨워.’ 하고 넘겨 버리는데 남들이 해 주는 칭찬은 아직까지 부끄러웠다.

게다가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은 더하다. 영하가 얼렁뚱땅 넘기곤 수줍어하며 고개를 꺼뜨렸다. 좀 전부터 심기가 비틀린 최세계의 굳은 입매가 잠시 잠깐 꿈틀거렸다.

얼굴 이야기에서 화제를 전환하고자 무슨 학교에 다니느냐 물으려던 영하는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에 무심코 등을 돌렸다. 누군가 에어컨을 등에 바짝 대고 켜 둔 것처럼, 시원하다 못해 찌릿하다.

돌리자마자 세계와 눈이 마주쳤다. 출근 준비를 끝마치고 회사를 쉬었으니 세계는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수트를 입고 있었다. 그 상태로 심기가 불편하다는 내색을 잔뜩 보이고 있으니, 꼭 과장 하나 붙잡아 회의하며 피를 말리는 부장 같은 꼴이었다. 직장은커녕 이력서 하나 없는 스무 살 영하가 간담이 서늘해 얼른 대화를 끝냈다.

“응, 오늘 바빠서. 다음 주에 보자.”

다소 뜬금없이 대화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기우가 휴대폰 번호를 교환하자기에 어쩔 수 없이 그것만 해결하고 얼른 센터를 빠져나왔다. 세계의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일이야 대수롭지 않으니 평소처럼 물었는데, 영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이제 우리 어디 가?”

물음에 세계는 침묵했다. 힐끗 눈만 굴려 영하를 내려다보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선 말도 없이 혼자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뭐지. 의문을 담아 따라붙었다.

뭐가 또 기분이 상하셨을까. 까탈스러운 남자의 기분을 풀어 주려 슬그머니 손목을 붙잡아도 반응이 없었다. 고층의 비즈니스 빌딩들이 다 그렇듯, 기어가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부술 듯이 노려볼 뿐이었다.

“왜 화났어?”

“왜 그럴까 찬찬히 고민해 봐.”

“뭐?”

황당하다. 최세계는 고갯짓 하나 없이 정면을 보며 이야기했다. 이어지는 영하의 반문에도 묵묵부답을 고수했다.

“기우 때문에 그래?”

“…….”

“좀생이같이 왜 그래? 그냥 초등학교 친구인데.”

“…….”

태도가 투명했다. 영하가 다른 남자랑 친밀해 보이니 질투를 하는 모양이었다. 통통한 입술을 길게 늘이며 미소 지은 영하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쿵쿵 박았다. 뜬금없는 귀여운 행동에도 세계는 미동조차 없었다.

한참 어른한테 이러면 안 되지만, 귀엽다. 바보 같아.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1층으로 내려가며 휴대폰을 내내 만지던 영하는 차에 올라타곤 곧바로 그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분홍색 튜브를 탄 하얀 포메라니안이 수영장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사진이었다. 세계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크롤을 내려 다른 사진을 보여 줬다. 이번엔 선글라스를 낀 치와와가 컵케이크 모양의 간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빠, 집에 가서 두부 데려오자.”

“왜.”

“두부랑 같이 애견 카페 가고 싶어. 여기 봐. 아빠 있을 때 가야지. 주말엔 사람 많아서 싫고, 평일이니까 별로 없을 거야. 강아지 수영장도 있대.”

“데이트할 건데 굳이 개를 데려가야 해?”

“이제 가족이니까. 데려가야지.”

“하. 나중엔 아주 섹스할 때도 옆에 앉혀 두겠네.”

성에 차지 않아 투덜거리면서도 상체를 빼어 영하의 안전벨트를 채워 주곤 좌석에 등을 기댄다. 잠시 정면을 응시하며 어깨의 긴장을 풀어 내린 세계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

기우의 친화력이 남달랐다. 함께하는 수업 첫날, 영하는 기우의 전 여자 친구가 저번 달 22일에 혼전임신으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소식과 전 여자 친구의 남편이 기우의 중학교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혀 원치 않은 정보였다.

난감한 상대였으나 다행인 점은 기우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상대방에게 호구 조사를 강요하는 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발목은 왜 다쳤냐고 물으면 지금은 죽고 없는 범죄자가 밟아 대서 금이 가 버렸다고 설명하는 대신 가벼운 변명거리를 생각해 왔는데 의미가 없어졌다. 기우가 관심 있는 것은 그쪽이 아니었다.

“너 왜 SNS 없어? 비밀 계정이야?”

스무 살다운 질문이었다. 문제는 영하다. 그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다.

영하도 분명 SNS 계정이 있었다. 셀카를 거의 찍지 않긴 했지만, 종종 데이트나 여행에서 그가 찍어 준 사진을 가끔 올리거나 친구들과 대화하는 용도로 썼다.

다만 어느 날 무슨 경우인진 몰라도 팔로워가 급격하게 늘어난 이후로 세계에게 붙들려 계정이 지워졌다. 얼굴이 너무 많이 팔린다는 이유였다.

세계는 유명 인플루언서가 겪은 고충이나 범죄의 예시를 들어 주며 영하를 겁먹게 했다. 스토킹, 절도, 사기, 루머 유포.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이야기에 영하는 얌전히 그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빠가 지웠다기에도, 그렇다고 애인이 싫어해서 지웠다고 하기에도 곤란하다. 상식적으로 이상한 행동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왜 계정 지우는 거에 동의했지? 아무리 무서웠어도… 뭐에 씌었나?

이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분노가 솟아오른 영하가 대충 대꾸했다. “그런 거 잘 못해서.” 그러자 기우가 끄덕였다.

“하긴. 나도 잘은 못해. 근데… 그때 같이 온 사람은 누구야?”

기우의 물음에 입술을 물었다. 뭐라고 설명하지. 아빠라고 하긴 싫다. 뒤따라올 반응도 반응이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싫었다. 하지만 애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영하는 이번에도 제일 쉬운 선택지를 골랐다.

“형.”

“형?”

되물은 녀석이 곧바로 “아아―.” 하고는 크게 수긍했다.

“어쩐지. 좀 닮았더라. 그 사람은, 약간 무섭지만. 아니, 좀 많이 무섭나.”

기우가 얼굴 앞에 손바닥을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닮았나? 닮았다는 이야기는 들을 때나 할 때나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종종 영하는 그를 ‘아빠’라고 부르면서도 가끔은 둘 사이를 망각할 때가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정말 종종. 단지 조금 나이 차이가 날 뿐인 연인 관계로 느껴지곤 했다. 우스운 일이지. 정작 강아지인 두부도 영하의 딸이 아니라 여동생이고, 최세계의 딸인데.

머리가 복잡해진다. 더 생각하기 싫다. 마침 클래스 선생님이 오셔서 엉덩이를 들었다. 발목을 다쳤기 때문에, 자세를 잡을 때는 매번 신중해야 했다.

“오늘도 반바지네.”

수업이 끝나면 절대 한가할 리 없는 남자가 매번 데리러 왔다. 영하의 수업은 열 시에 시작해 열두 시에 끝난다. 아무리 이 남자가 임원이라도 직장인인 이상 점심시간이 하루 중 단비일 텐데 그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조금 미안했다.

잠시라도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 얼른 준비를 마치고 내려왔다. 조수석에 올라타는 영하의 다리를 보곤 그가 아쉬운 태도로 다시 중얼거렸다.

“발레복은.”

“안 입어.”

세계는 영하가 레오타드를 입을 줄 알고 내심 기대한 모양이었다. 정작 반바지를 입고 한다고 설명하자 김이 샜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굴었다. 발목의 모양과 뼈를 제대로 보려면 스타킹도 안 입는 편이 나았다.

유연성은 타고난 건지, 오래 쉬었지만 생각보다 동작 수행이 가능했다. 다만 그간 놀고먹은 덕분에 근육이 좀 사라져 정확한 자세를 유지하는 데에 힘이 들었다. 선생님이 내내 옆에서 허리며 발목이며 자세를 교정해 줘야 했다.

무용을 하려면 반드시 근육을 만드는 운동을 병행해야 한다. 가녀려 보이는 여성 무용수들도 힘을 쓰면 근육의 형태가 도드라졌다. 남자는 더하다. 어쩌면… 발레 포기한 게 그 이유일 수도 있겠네. 영하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은 숨쉬기 운동과 두부와 함께하는 터그 놀이 운동이었으니까.

“그건 뭐야.”

레오타드 타령을 무시하고 안전벨트를 맸다. 영하가 스스로 벨트를 매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세계가 무릎 위에 올려 둔 초코바 두 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먹고 싶어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영하가 초콜릿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가지고 있으니 물어보는 것이었다.

“아, 이거. 기우가 줬어. 에너지바래. 다이어트 중이라 점심은 이걸로 때운다는데. 칼로리 삼백이야, 이 조그마한 게.”

영하가 부스럭부스럭 흔들어 대며 말했다. 세계는 기우의 이름이 나오자 또 입술이 꾹 다물렸다.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최세계가 기우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다. 굳이 그에게 김기우 이야기를 꺼낼 일도 없지만, 방금처럼 물어 오면 대답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하는 세계를 힐끗 흘겨보던 영하가 소심하게 물었다.

“재활센터 옮길까?”

“거기가 제일 좋은 곳이야. 못 옮겨.”

“그러면 시간…….”

“됐어. 네가 왜 시간을 옮겨? 신경 쓰이는 놈 있어?”

지금 짜증 내고 있는 서른여섯 살 먹은 남자 하나, 라고 콕 집어 말하려다 참았다. 소중한 점심시간을 내어 데리러 와 줬으니까.

초코바를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고 운전하는 세계의 손에 시선을 뒀다. 며칠 전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등록하면서도 자신이 없었다. 내가 운전을 한다고…? 내가…?

“나 다음 주에 기능 연습해. 떨려.”

“쉬워. 떨 필요 없어. 감독관이 시키는 것만 그대로 외우면 돼.”

“T자 주차 어떻게 해?”

“그냥 핸들 쥐면 감이 와.”

저런 무성의한 대답.

그 좋은 대학은 어떻게 갔냐고 물으면 그냥 평소에 공부 잘하면 돼, 하고 대답하겠지.

“아빠는 죽었다 깨어나도 선생님은 못 하겠다.”

어차피 할 생각도 없어. 그가 대답하는 사이 휴대폰의 벨이 울린다. 연결된 내비게이션 화면에는 어머니, 라는 세 글자가 떠올랐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이번에는 영하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린다.

-주말에 집에 좀 와라.

“일요일에 갈게요.”

-토요일에 와. 너 주려고 반찬이며 떡이며 해 놨으니까. 와서 점심, 저녁 먹고 아버지랑 화해도 하고.

통화는 스피커폰으로 연결됐다. 조용히 숨죽여 통화를 몰래 훔쳐 듣는 사람인 양 귀를 기울이던 영하는 뻔히 예상했던 대화 속에서 처음 듣는 소식을 발견했다.

할아버지랑 화해?

화해를 한다는 건 싸웠다는 이야기인데……. 뭘까. 싸웠다는 말을 한 적은 없는데. 회사에서 싸웠나.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세계는 정면만 쳐다보며 목소리에 대꾸했다.

대체 언제 싸운 거지. 놀랍긴 해도 의외는 아니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에겐 심각하게 무뚝뚝하니까.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고 업무에 필요한 대화만 가끔 하는 편이었다.

영하도 할머니는 무섭지만, 할아버지는 단지 어색하다. 가끔 용돈을 쥐여 주시긴 하는데 그뿐이라 정이 가는 상대도 아니었다.

-그리고 너 혼자 오지 말고, 영하도 데려와.

“핫…….”

영하가 작게 탄성하곤 입을 틀어막았다. 우회전을 하며 영하에게 잠깐 시선을 준 남자가 미약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영하는 왜요. 저만 갈게요.”

-데려와. 못 본 지 세 달은 됐다. 아버지 생신 이후로 본 적 있니? 멀리 사는 것도 아니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할머니가 손자 얼굴 보고 싶다고 빌어야 해?

“또 무슨 소리를 하시려고. 됐어요. 안 데려갑니다.”

-그래. 할 말 있어서 그런다. 나도 두말 안 해. 물러날 생각도 없다. 데려와. 데려와서 밥 먹고. 대화 좀 하자.

음성이 조금씩 격양되고 말투가 빨라졌다. 세계의 눈썹 또한 납작하게 좁혀지며 불쾌한 기색을 역력하게 드러냈다. 영하를 그곳에 불러 할 이야기는 굳이 듣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으며 본가에 다녀온 영하가 우울해할 것 또한 예상 범주에 있는 일이었다.

세계가 깊게 호흡을 흘려 내곤 낮게 잠긴 목소리로 짜증을 토로했다. 얌전히 듣고만 있던 영하가 대화의 흐름에 불씨가 붙기 전 대뜸 끼어들었다.

“안 데려간다고 몇 번을…….”

“할머니! 저 갈게요! 가요!”

보이지도 않을 상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통화 너머 할머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영하 너도 같이 있나 보구나.” 조금은 질린 듯한 태도였다.

“회사 도착했어요. 전화 끊을게요.”

아직 교차로였다. 게다가 방향은 모드 글로벌 본사로 향하는 것도 아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한 세계가 통화를 끊으려 둘러대곤 아무렇게나 버튼을 터치했다.

“안 가도 되는데 왜 또 굳이 간대. 가서 무슨 말을 들으려고.”

“아빠 말대로 평생 안 보고 살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래.”

“나는 몰라도 너는 평생 안 보고 살아도 돼.”

“아무리 그래도…….”

그때, 뚝, 하고 전화 끊기는 소리가 불청객처럼 차 안을 찾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비게이션 화면에 닿았다.

어머니. 2분 35초. 통화 시간이 뜬 화면이 여러 번 깜빡이다 완전히 사라졌다. 전화가 안 끊긴 줄도 모르고 사적인 대화를 한 것이다.

특별한 대화가 오고 간 것은 아니지만 할머니가 들으시기엔 충분히 기분 나쁘실 이야기였다. 안 그래도 날 싫어하시는데……. 영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머니 속 초코바를 와자작 구겼다.

“할머니 화내실까?”

“…….”

이번에는 최세계도 명확한 대답을 내려 주지 않았다. 본인도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이마 위를 문지른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 아래로 그늘이 생겼다. 꽤 깊게 골몰하던 기색의 남자는, 이내 딴소리를 뱉어 냈다.

“머리 아픈데 회사 가지 말고 데이트할까.”

“오늘은 데이트 싫어.”

“뭐?”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곤 핸들을 움켜쥔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꾸밈없이 적나라한 거절에 화내는 기색을 보이니 조금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사실이었다. 데이트를 너무 자주 하고 있다고.

같이 사는데 데이트를 하루걸러 하루 할 필요가 있을까? 남들처럼 특별한 어딘가를 가거나 체험하는 것도 아니었다. 최세계는 아저씨다. 아무리 잘나고 잘생겼다 해도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서른여섯 살의 남자였다.

그가 데려가는 데이트 코스라고는 몇 년 전부터 뜨고 있는 국내 판화가의 전시회나 분위기 좋은 바나 레스토랑, 연주회였다.

처음에는 수입이 안정적인 것을 넘어 여유로운 어른들이나 갈 만한 곳에 발길을 들인다는 생각에 설레던 감정도 이제는 완전히 무뎌졌다.

영하는 프랑스의 예술영화보다는 아무거나 파괴하고 부수는, 비주얼과 기술력을 자랑하는 히어로 영화가 더 좋은 스무 살이었다.

“나랑 데이트가 싫다고?”

세계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대충 듣기엔 비슷한 말이라도 해도, 그 안에 품은 속내가 전혀 달랐다. 영하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는데, 하필 저주를 대신 받는 인형처럼 초코바를 마구마구 뭉개고 있던 터라 손에 기우가 준 초코바가 아슬아슬하게 쥐어져 있었다.

세계의 한쪽 눈썹이 비대칭을 그리며 슬금슬금 올라갔다. 빨간색 신호를 받고 멈춰 선 차를 다시 움직이며 비아냥거렸다.

“스무 살 동갑 남자랑 지내다 보니까 이제 나한텐 질렸나 봐.”

어쩐지 목에 시퍼런 핏대가 불거져 올라왔다. 최영하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껴 어깨를 좁히곤 안전벨트를 생명 줄처럼 부여잡았다.

“마, 말이 왜 그래. 내가 언제 그랬어?”

“지금도 소중하게 들고 있네. 대체 그게 뭐라고 하루 종일 손에 쥐고 있는 거야?”

“아니, 소중한 게 아니라 막 부수고 있었다고!”

발끈하여 성을 내어 말해 봤자 듣지 않는다. 뻔했다. 세계는 본인이 원하는 말만 골라 듣고선 짜증스레 앞만 노려볼 뿐이었다.

앞편에 선 흰 승용차 차 뒤편에 [초보 처음 보냐?]라는 글자가 연습장 종이에 매직으로 성의 없이 휘갈겨져 있다.

“수준하고는…….”

최세계는 다문 턱으로 이를 갈았다. 매섭게 빛나는 눈동자가 승용차를 부서뜨릴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셔츠를 걷어붙이고 운전에 집중하는 꼴을 보자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영하에게 닿았다.

기우를 향한 기세가 영 다른 곳으로 향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안전벨트를 쥔 손에 더 힘이 들어가고, 본인도 모르게 좌석에 등과 목을 바짝 붙였다.

그때 세계가 불쑥 말했다.

“미래의 판검사가 타고 있다는데.”

빵빵거리면 콱 브레이크를 밟겠다던 차와는 멀어졌다. 가는 방향이 달라 다행이다. 이번에는 은색 SUV였다. 미래의 판검사가 타고 있으니 조심해 달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여기도 미래의 판검사 있잖아.”

“너?”

“그럴 리가. 아빠 말이야. 할 수 있는 거 아냐?”

“나더러 이제 와서 공무원을 하란 말이야? 그나저나 넌 뭐 할 거야. 졸업하면.”

아.

괜히 말했다. 장래에 뭘 할지 물어보면 확실히 대답해 주기 곤란했다. 내 성적엔 관심도 없으면서 왜 자꾸 물어본대. 하지만 최세계는 영하에게 복합적인 인물이었다. 천륜을 어기는 행위이긴 하나, 애인이자 피붙이다. 충분히 궁금해할 자격이 있었다. 가루가 된 초코바를 짜증스레 주머니에 넣고선 조용히 이야기했다.

“안 그래도 어제 해인이 누나랑 만나면서 이야기했는데…….”

“그 여자랑 만나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의외로 건설적인 이야기를 했군.”

“응. 그 누나도 나보단 어른이니까.”

다리가 나은 후, 민재보다도 먼저 만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이정욱의 누나, 이해인이었다. 그녀 또한 복합적인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동전처럼 양면이 명확하게 나뉜 존재이기도 했다.

영하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남긴 사람이었지만, 그녀의 무모한 태도와 용기 덕분에 영하는 무사히 서민석의 납치에서 탈출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어쩌면 지금은 살아 숨 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

며칠 전, 이해인과 광화문 근처 골목길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인절미티라미수가 맛있는 곳이었다.

먼저 도착해 메뉴판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시켰는데, 한 입 먹자마자 성격 못된 남자 하나가 떠오르는 맛이었다. 같이 나누고 싶은 맛.

이해인은 파란색 사원증을 재킷 바깥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어 둔 모습으로 나타나 영하를 발견하곤 곧장 다가왔다. 그러고는 “아차차. 주문. 주문.” 하고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다. 정신없이 바쁘다는 상태가 한눈에 보이는 장면이었다.

“그거 맛있어? 나도 시킬까. 근데 먹을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이따 나갈 때 테이크아웃 해야겠네.”

자리에 앉은 이해인은 영하가 먹던 티라미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포크 하나를 내미니 고개를 내젓는다. 손에는 노트북 가방이 들려 있었다. 이해인은 한 달 전 취직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언론사였다.

“네 덕에 내가 한국신문에 취직을 다 하네. 거기다 정치부라니. 곧 총선이잖아. 딱 죽기 직전까지 바쁜데 너무 재밌다.”

그녀는 정치부에 배정받은 것을 대단히 기뻐했다. 영하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는 점이었다. 정치가 뭐가 재미있다고.

이번 만남은 이해인이 먼저 불러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한 일도 있으니 밥 한 끼 사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외향적인 사람들은 밥 같이 먹는 게 엄청난 호의인 줄 알지만 최영하처럼 집콕 인간은 밥 사 주겠다는 호의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영하 또한 그녀에게 고마운 점이 있으니 군말 없이 따랐다.

이해인이 낙하산으로 한국신문 정치부에 발을 내린 것은 순전히 최세계 덕분이었고, 영하를 구해 준 목숨값이었다.

“발목은 어때?”

받아 온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휘 저으며 그녀가 말했다. 영하는 테이블 아래로 발목을 슬그머니 보곤 고개를 주억였다.

“이제 괜찮아요. 요즘 재활 치료랑 재활 발레 같이 하는데, 확실히 더 나은 거 같아요.”

“와, 너 발레 해? 진짜 어울린다.”

이해인이 박수까지 치며 말했다.

발레랑 어울리는 건 어떤 느낌이지. 발레리노들은 생각보다 키도 체격도 크다. 발레리나와 파드되를 하며 사람을 들어 올리고 버티려면 코어 근육이 필수 조건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걸 떠올리진 않았겠지.

“역시 부자들은 운동도 헬스 같은 건 안 하네. 발레라니. 최세계도 골프랑 테니스 하지?”

“어떻게 알았어요?”

“당연하지. 원래 세계에서 돈 제일 잘 버는 개인 스포츠가 골프랑 테니스야. 승마라든가.”

하지만 최세계는 헬스도 하고 수영도 한다. 하나만 하면 지겹다는 이유로 일주일의 계획표를 세우고 나가는 편이었다. 뭐 수영이야 하도 영하가 반대해서 요즘은 안 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런 것까지 단속하는 건 너무한가 싶다가도 그가 조그마한 수영복 하나 입고 여자들 앞에서 수영하는 꼴을 상상하면 질투 나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요즘은 뭐 해? 발목 때문에 휴학했다며.”

“백수로 지내다가 얼마 전부터 학원 잔뜩 시작했어요. 영어랑 운전면허랑. 아까 말한 발레. 공부도 집에서 하고.”

사학과니 동양 역사뿐만 아니라 서양 역사도 배운다. 한자와 영어는 필수였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다 보면 두부가 토독토독 귀여운 발소리를 내며 의자 밑에 앉아 가만히 올려다보는 순간이 좋다. 강아지 한 마리가 주는 안정감이 대단했다.

두부가 오기 전에는 홀로 낮을 보낼 때 하루 종일 그 남자만 생각하느라 바보가 되어 가는 기분이 종종 들었다. 누구 한 명에게 사랑받는 것 아니면 삶의 의미가 없는 사람이란, 지나치게 수동적인 사람이다. 이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의외로 열심히네. 나라면 그냥 돈 벌어 줄 사람 있겠다 집에서 놀고먹을 것 같은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한다. 영하가 보기에 그녀는 일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었다. 서민석이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서도 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을 잡아내려 별장까지 뒤를 쫓아 기사를 쓰려 했던 행위는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정욱이는 대학원 간다던데. 너도 대학원 가려고?”

“고민 중이에요. 아, 아니, 음. 세계 씨는…….”

무심코 아빠라고 부르려다 실수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해인 앞에서는 실수하면 곤란했다. 그러나 그를 부를 호칭이 마땅히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무작정 이름을 불렀다. ‘세계 씨.’ 으. 닭살 돋아. 손등 위를 벅벅 긁고는 이어 말했다.

“큐레이터 하라던데.”

“모드에 미술관 없잖아. 아. 미술관 차려 준대? 역시 부자 남자 친구가 좋네.”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하던 이해인이 묘한 얼굴로 짧게 웃었다. 눈을 내리깔고 이야기하던 영하는 차마 보지 못한 순간이었다.

“큐레이터 하려면 미술사 쪽으로 대학원 나와야 하니까 저도 뭐……. 일단은 생각만 하고 있어요. 아직 졸업까진 멀었고.”

“그래, 뭐. 스무 살이면 아직 놀 때지. 휴학한 김에 그냥 놀아. 나이 더 들면 못 논다.”

이해인이 기지개를 켜며 답했다. 남자 친구 발언에는 철없이도 조금 가슴이 설레었다.

민재를 제외하곤 남들에게 그를 애인이라 소개해 본 적이 없으니 기분이 굉장히 야릇했다. 약간의 죄책감과 떨리는 감각. 발목이 아릿아릿하고 가슴 위쪽에 뜨거운 물을 쏟아 내는 기분.

다른 생각에 빠져 영하가 대답 않고 조용하니 이해인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남 이야기 하듯 말을 꺼냈다.

“그, 영하야… 전에. 그땐 내가 좀 미쳐 있었어. 뭔가에 쫓기듯이 매일 불안했고… 나는 내가 특별할 줄 알았거든. 가고 싶은 직장도 한 번에 붙고, 내가 원하던 기자의 삶이 펼쳐질 줄 알았지. 그래서 많이 초조했나 봐.”

길게 이어 말하던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치들곤 손을 내저었다. “무작정 용서해 달라는 건 아니고.” 하더니 이어 말했다.

“어쨌든.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미쳐서 서민석이랑 손잡고 최세계를 어떻게 해 보려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나도 낙하산 입사니 누굴 뭐라 할 주제도 못 되고.”

“서민석… 혹시, 누나. 사진….”

“그때 사진 찍어서 보냈던 거. 서민석한텐 사람 매수할 돈만 지원받았어. 그 자식은 현금 준 것 말고는 아무것도 개입 안 했고. 그때 말로는 혹시나 덜미가 잡히면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최세… 그러니까 네 애인이 당연히 잡아낼 걸 예상하고 나한테만 덮어씌울 생각이었겠지.”

이해인은 ‘네 애인’을 말하며 슬며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휴대폰을 열어 보는 척하며, 문자메세지 함을 열었다. 최세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입금했으니 입단속 잘해. 전에 내가 말한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니까.

협박의 메시지. 입 모양만으로 조용히 따라 읽은 뒤, 이해인은 휴대폰을 뒤집곤 이어 말했다.

“아무튼 꼼짝없이 네 애인한테 걸려서 USB며 뭐며 다 털려서 원본 사진 더 없다. 정말로. 걸리면 사회적으로 고립시켜서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삶으로 만들어 주겠다는데… 나 그 정도 담은 없어.”

믿어야겠지. 믿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제발 믿어 달라며 부탁하는 통에 알겠다며 대답했다. 낙하산이라 본인도 최세계가 무너지면 곤란해지니,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란 약속을 여러 번 들었다.

*

세계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 준 영하는 고민에 잠겼다. 과를 잘못 왔다. 사학과는 인문계 중 대학원 진학률이 가장 높은 과였다.

“대화하다 보니까 대학원 가야 할 것 같고….”

“마음대로 해. 정 싫으면 회사 들어와도 되고.”

영하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건너편 멀리 모드 글로벌 본사의 건물이 보였다. 그러나 세계는 다른 방향으로 차선을 변경했다. 데이트하기 싫다는 말에도 결국 자기 마음대로 할 생각인 모양이다.

“으음.”

대학원은 가기 싫은데, 그보다 더 싫은 건 아빠 회사에 취직하는 일이었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다간 매번 일은 못 하고 저 남자한테 휘말려 있을 게 분명하다.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혹은 비서를 시킬 수도.

“영하, 아빠 비서 할래?”

“으으.”

어떻게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비서 이야기를 할까.

“뭐야, 그 반응은? 주 4일 근무에 넌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니 출근은 10시. 오전 미팅도 다 빼 줄게. 어때, 워라밸 최고 아냐?”

그냥 비서도 아니고 최세계 상무님 비서?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심지어 그가 백만 원을 주고 입을 다물게 했다는 비서와 한 사무실에서 지내야 한다는데.

고개를 팩하니 창가로 돌리곤 투덜댔다. 입술이 삐죽 나오고 눈가가 비틀렸다.

“워라밸 최악이야. 진짜 싫어.”

“최악이라니. 이런 좋은 회사가 어디 있다고.”

분명 일 안 시키고 이상한 야한 짓만 시키겠지. 싫어.

*

눈물이 어려 앞이 흐렸다. 영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눈꺼풀을 문질렀다. 너무 세게 문지르는 바람에 얄팍한 눈꺼풀이 붉게 부어올랐다.

어른어른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누군가의 사타구니였다. 은은하게 광택이 나는 수트에 감싸인 허벅지가 두툼하고 탄탄했다.

‘흐윽….’

주변을 둘러보자 최영하는 작고 좁은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허리를 조금만 들어도 천장에 정수리가 부딪칠 만큼 작은 곳이었다. 쌕쌕 숨을 몰아쉰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불쑥 위에서 손이 나타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 가벼운 감촉에 멍한 머릿속이 조금 맑아졌다. 영하는 좁은 방에 갇힌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책상 밑에 앉아 있다.

‘아…….’

조금 가슴이 뛰고 초조했다.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뺨을 매만지는 손을 붙잡아 그 위에 입술을 가만히 올렸다. 남자의 손이었다.

아빠겠지? 변태같이 날 왜 책상 밑에 넣은 거야.

‘아빠, 이제 나가고 싶…….’

손을 밀치며 고개를 내밀려던 때였다.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길이 거둬지더니, 그가 자신의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뒤이어 이어질 일련의 과정들을 떠올린 영하가 입을 멍하니 벌리곤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책상 밑에서 이런 짓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무릎을 밀치려 했으나 남자는 오히려 의자를 가깝게 당겼다. 영하에게 할당된 공간이 더 좁아졌다. 이어 남자는 바지 버클을 완전히 풀곤 두껍고 기다란 성기를 꺼냈다.

‘빠는 거, 이제 안 하기로 했잖아…….’

바닥 위를 짚은 손에 잔뜩 힘을 주곤 아랫입술을 꾹꾹 씹었다. 몇 번 성기를 훑자 흉흉한 기세로 크기를 키웠다. 그가 곧 영하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싫어. 여기서 말고, 차라리 나가서 빨아 줄게.’

영하의 말에도 그는 강경했다. 결국 책상 밑에 쪼그려 앉아 남자의 성기를 빨아야 한다.

단단하게 발기한 남근이 뺨을 때리듯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 위를 툭툭 쳐 댔다. 창부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수치스러워 목뒤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집스레 입술을 물어 대던 영하는, 곧 손가락이 다가와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자 거북함을 삼켜 내며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후윽…!’

익숙해질 틈조차 주지 않고 뜨거운 성기가 단숨에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말랑한 혀를 내리누르고는 부족하다 느꼈는지, 목구멍을 길로 사용했다. 두꺼운 귀두가 좁은 구멍을 벌리며 깊이 들어오는 감각에 영하는 욕지기가 치솟아 눈가에 눈물이 바들바들 매달렸다.

괴롭다. 목구멍이 아니라 전신을 자지에 꿰뚫린 듯 몸을 떨었다.

이내 남자의 탄탄한 허벅지를 마구 내려치며 빼 달라고 요구했으나 그는 결국 영하의 입 안에 뿌리 끝까지 성기를 밀어 넣었다. 입이 크게 벌어지고, 코끝에 남자의 사타구니가 퍽- 부딪쳤다.

‘흐엑, 흐, 우읍…!’

눈물길이 만들어져 그 위로 계속 뜨끈한 물줄기가 흘렀다.

세계가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에 한 번 오럴 섹스를 한 적이 있었는데, 혀로 기둥을 핥는다고 생각했던 영하의 상상과 달리 목구멍까지 받아야 했다.

그 경험이 영하에겐 상당히 고역이었다. 끅끅대며 울다가 목구멍 안쪽에서 쏟아지는 비릿한 정액을 받아 마시고는 탈진했다.

다음 날 목이 부어 밥도 먹질 못하는 것을 보곤 세계가 다시는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후로는 가끔 영하가 자진하여 혀로 귀두나 요도구를 핥아 주는 것 외에는 해 달라고 요구한 적 없었다.

약속했으면서…….

바닥을 꾹 쥐고 신음한 영하는 목구멍 안에서 사이즈를 키우는 성기를 느끼곤 다시 침음했다. 좁다란 목구멍 속에 조이는 성기를 느끼는지 책상 위쪽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떨어졌다.

손을 뻗어 남자의 발목을 쥐곤 최대한 입을 벌렸다. 이로 성기를 긁지 않으려 노력하며 손으로 그의 고환을 만져 애무했다. 목구멍 속 성기가 조금씩 더 부풀었다. 헛구역질을 삼키느라 눈물에 어룽진 눈동자가 겨우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다.

영하의 다물린 항문이 옴쭉거렸다. 입 말고 뒤쪽으로 받고 싶은 것이다. 이러지 말고 넣어 달라고 부탁할까 고민하던 찰나, 영하는 의아함을 느꼈다.

뭔가 달라…….

다른 남자의 성기를 이만큼 가까이서 본 적 없긴 해도, 성기의 생김새나 사이즈가 분명 최세계였는데, 코끝에 닿는 향이 달랐다. 세계는 일상에서 향수를 쓰지 않았다. 인공적인 향 따위는 싫다는 게 그의 취향이었다.

지금은 분명 이질적인 향이 맡아졌다. 평소 느끼던 이 남자의 체향이 아니었다.

누, 누구.

아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다른 남자의 성기를 빨아 주고 싶지 않았다. 영하에게 남자라고는 오로지 최세계 하나였다.

왜 이런 상황에 빠졌는지 이전의 일이 기억나질 않았다. 눈에 띄게 몸을 떨며 남자의 무릎을 세게 움켜쥐고 허벅지를 때렸다.

울음이 울컥울컥 치솟았다. 그만 좀 울어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 눈물부터 흘리는 스스로가 한심하다. 아무리 남자의 몸을 아프게 때려도 꿈쩍하기는커녕 안쪽에 대고 성기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캉한 혀 위로 울퉁불퉁하게 핏대가 선 성기의 형태가 그대로 느껴졌다.

싫어, 힉, 싫어!

머릿속이 희게 번졌다. 두꺼운 귀두가 입천장을 훑고는 길을 들여 놓은 목구멍으로 침입했다. 아찔한 두려움 끝에, 영하는 턱에 힘을 주고 성기의 밑동을 깨물었다. 동시에 남자가 욕설을 뱉으며 의자를 강하게 뒤로 빼냈다.

‘윽! 젠장!’

의자의 바퀴가 구르며 남자의 사타구니만 들어오던 시야가 그의 가슴팍까지 들어찼다. 흐릿한 스트라이프 셔츠 중앙에는 네이비색 넥타이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넥타이핀이 단정하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근육으로 촘촘히 이루어진 가슴팍의 형태가 셔츠 원단 아래로 그려질 듯 선명했다.

남자의 셔츠 포켓에는 choi.라는 회색 글자가 흘림체로 작게 수놓아져 있었다.

최…?

아픈 목을 감싸며 올려다보던 영하에게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상사 자지 자를 일 있어, 최 비서?’

‘아…?’

의자를 뒤로 무른 남자가 허리를 조금 굽혀 책상 아래를 들여다본다. 잔뜩 화가 난 기색의 최세계였다.

‘이런 식이면 이번 달 월급은 없을 줄 알아.’

사법 고시를 패스한 남자가 노동법을 모조리 무시하는 발언을 하곤 손을 뻗었다.

‘뭐야?!’

기가 막힌 영하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게 지금 뭐 하는 거냐고!’

크게 고함지르는 순간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 와중에, 이상한 이물감이 뒤쪽에서 느껴졌다. 잠깐만, 이거 뭐지……?

“응……?”

최영하는 눈을 떴다. 회색 커튼 너머로 흰 빛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하는 아침의 초입이었다. 자신은 이불을 둘둘 말아 다리 사이에 끼우고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초점이 덜 잡힌 눈동자가 드러났다.

‘꿈꿨나…….’

왜 그런 변태 같은 꿈을 꾼 거지. 아무도 모르고 혼자만 간직할 꿈이었으나, 가슴이 답답하다. 천박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기운이 쪽 빠진 손을 들어 이불을 밀치려 몸을 조금 움직이던 영하는, 움직임이 평소와 달리 원활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가 등 뒤에서 가슴을 바짝 붙이고 잠든 것 때문은 아니었다.

“흣… 뭐, 하는…….”

영하는 잠옷 상의만 입고 있었다. 다리가 휑하다. 최세계의 한쪽 다리가 영하의 허벅지 위로 올라와 내리누르고 있었고, 무엇보다 구멍이 여전히 벌어져 그의 성기를 받아 내고 있었다. 잠든 내내 삽입되어 있던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벌어져 있어도 되는 걸까. 걱정이 들자 입술이 순식간에 바짝 말랐다.

“아읏.”

낯부끄러운 꿈 생각이 금방 달아났다. 꿈이 문제가 아니었다. 안에 든 성기를 빼내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 움직였다. 그 순간 잠든 줄 알았던 최세계가 손을 뻗어 영하의 배를 잡아당겼다.

“흐아아!”

납작한 배가 내리눌리며 조금 빠져나온 성기가 단숨에 뿌리 끝까지 구멍을 파고들었다.

“흣, 흐으으… 일어, 났으면… 빼 줘…….”

마른 무릎이 서로 부딪치며 부들거렸다.

“음…….”

그 또한 잠에서 막 깨어 잔뜩 잠긴 목소리였다. 대답을 회피한 세계는 나른한 몸을 조금 일으켜 세우더니, 몸무게를 실어 영하의 몸 위로 커다란 육신을 내리눌렀다.

덕분에 서서히 크기를 키우는 성기가 제집처럼 안을 가득 메웠다. 아래에 깔린 몸뚱이가 흠칫흠칫 허리를 떨었다.

등과 가슴팍에는 어젯밤 정사의 흔적이 선연했다. 여기저기 깨물어 댄 통에 유두는 붉은색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아침부터 빨아 달라고 이러는 거야?”

“웃기지 마. 그보다 빼달, 라니까아…. 왜 넣고 잔 거야. 안 다물리면 어떡해…….”

“어제 네가 넣고 자도 된다고 했잖아.”

“내가 언… 앗…….”

영하의 타박에도 희미하게 웃은 세계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귓불에 혀를 대곤 말했다. 아니라고 내저으려던 영하는 그 순간 떠올랐다. 어젯밤 섹스의 끄트머리가.

‘그, 그만할래…….’

‘그만 없어.’

‘그만, 더는, 못 해…….’

‘발레를 시작해도 이렇게 체력이 형편없다니.’

‘사실 나 몰래 정력제 먹는 거지….’

‘아빠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그렇게 말하며 세계는 아래를 계속 쳐올렸다. 영하의 다리는 부끄럼을 모르고 넓게 허벅지를 펼쳐 내보인 채였다. 사실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다물 수가 없었다. 머리에 대고 있던 베개도 힘을 실은 격렬한 움직임에 잔뜩 흩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영하는 정말 한계였다. 발기한 성기에서 더는 정액이 나오질 않았다. 뒤로 절정에 다다른 것도 부지기수였다. 앞이나 뒤나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온몸에 흐르는 전류 안에서 저릿한 마른 절정에 도달했다.

이윽고 눈앞이 깜깜해지다 겨우 빛이 들어오는 것을 느낀 영하가 그에게 애원했다. 기절할 것만 같았다.

‘제발… 망가지겠어요…….’

‘그렇게 못 하겠으면 대신 넣고 잘까.’

‘네… 네에…….’

최세계가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못 한다. 그리고 잠들고 싶었다. 세계는 영하의 순종적인 대답에 웃었다. 어깨가 위아래로 오르내리도록 웃어 버리니 그와 아래가 이어진 영하의 몸에도 진동이 울렸다.

“…빼. 당장 빼 버려.”

잠시간의 기억을 떠올리곤 퍼렇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세계는 빼내는 대신 이불 속에 파묻힌 영하의 성기로 손을 뻗었다. 그러곤 잠이 완전히 깨 버린 얼굴로 입술을 당겼다. 성기를 가리고 있던 이불 부근이 정액으로 젖은 것을 느낀 것이다.

희고 멀건 정액이 묻은 손가락을 문지르며 눈앞으로 가져오는 행위에 창백해진 얼굴이 곧 벌겋게 물들었다.

“야한 꿈 꿨나 보네.”

“아니, 아니야…….”

“아니긴. 스무 살인데 몽정을 해? 다 컸다더니, 우리 영하 아직 아기였네.”

그가 음란한 목소리를 꾸며 내며 아기 타령을 했다. 듣기 싫다고 생각할 무렵, 세계가 사타구니를 바짝 붙였다. 남근 뿌리의 두툼한 부분까지 삽입되어 영하는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기어코 눈을 뜨자마자 다시 섹스하려는 의도였다.

“아아, 흣, 아흐… 앗, 빼라고…!”

“무슨 꿈 꿨어. 응?”

“몰라아… 묻지, 으응, 응….”

“나랑 꿈에서 뭐 했는데?”

“아니야.”

“아니면 뭐야. 애인을 두고 딴 놈 생각에 아침부터 정액을 싸지른 건가?”

영하의 대답을 듣고 최세계는 왼쪽 눈가를 찌푸렸다. 목울대가 한 번 위아래로 오르내리더니, 이어 몸짓이 난폭해졌다. 완전히 빠져나간 성기가 벌어진 구멍을 단숨에 퍽 치고 안으로 쑤셔 넣었다.

“흐아앗!”

꿰뚫린 몸이 비명을 내지르며 파드득 떨린다. 가느다란 팔이 허공을 갈랐다. 세계가 허리를 단단히 안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힘을 받아 내지 못하고 위쪽으로 자꾸만 밀려 올라갔다.

“아아! 아프, 흐읏, 아빠아, 너무… 흣, 앗, 아아아…….”

다리가 제멋대로 바들바들 떨리고 배꼽 아래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눈이 풀려 허공을 응시하던 영하는 마른 가슴살을 움켜쥐는 손길을 느끼곤 눈물을 흘렸다. 어제 한참을 씹어 대어 아픈 통증과 함께 야릇한 쾌락이 회음부부터 전해졌다.

“아응, 읏…… 흐읏.”

새벽 내내 괴롭히다 겨우 재웠기 때문일까. 영하는 평소보다 몸을 가누지 못했다. 거칠게 굴어도 싫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흐느끼며 신음했다. 밤 내내 물고 있던 자지로 길들여진 따뜻한 안쪽, 매번 자지러지게 느끼는 부근을 찔러 주면 허리를 퉁기며 아래를 잔뜩 조였다.

“나 아니면 누가 나왔는데.”

“몰라아… 오늘, 아, 아아… 할아버지 집, 가는 날인… 데…….”

세계는 마음껏 성기를 박아 대면서도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꿈에서 그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였다.

“아아, 우응, 빨리, 앗, 아흐으!”

마음이 조급했다. 오전 중에 할아버지 댁에 가기로 했다. 어젯밤 그가 안에 싸 놓은 정액을 모두 처리했지만 내내 성기를 받아 물고 있던 구멍은 스스로 축축해졌다. 잔뜩 질퍽해지고 노곤해져 성기가 어디를 찌르든 뇌 속을 엉망으로 만드는 쾌락이 몸통을 가로질렀다.

하루의 시작부터 이래서는 곤란하다. 꿈조차도 음란한 내용이었는데, 이렇게, 눈뜨자마자…….

“흐윽… 아…….”

마른 다리로 허리를 감아 매달렸다. 자세가 바뀌자 침대 위를 더듬은 세계가 베개를 집어 와 영하의 허리 아래에 대어 주곤 빠르게 허릿짓 하기 시작했다. 퍼억, 퍽 살갗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이어졌다.

“하아, 후… 꿈에 누가 나왔길래, 읏, 질질 쌌냐고 물었잖아.”

“흐으으, 흣, 싫어, 그, 으응…! 응! 그만 좀…….”

“싫긴 뭐가 싫어. 응? 아빠 자지 넣고 잠들면서 누굴 꿈꿨냐고. 동창이라도 나왔나 봐?”

“무슨, 아아아…! 흐읏, 힉, 아으, 으응……!”

그 순간 난폭한 흐느낌이 이어졌다. 얄팍한 뱃가죽 아래 꿈틀거림이 선명해지자 부러질 듯 가느다란 허리가 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아!”

영하는 숨을 가쁘게 뱉어 냈다. 이 감당하기 힘든 감각 속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이 번쩍 들어 몸을 흔들자 안쪽에 있던 성기가 내벽을 잔뜩 긁어 댔다. 자지러지는 신음이 터지고 동시에 최세계가 눈을 깊게 감았다 뜨며 등을 굽혔다. 퍼억.

“흣…!”

뭉툭한 허릿짓에 힘을 실어 엉덩이를 내리쳤다. 깜깜한 절정의 기운이 발끝부터 잡아먹을 듯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세계가 고환까지 박아 넣을 기세로 몸을 실었다. 내내 벌어졌던 구멍은 절절하고 녹진하게 안을 벌려 준다.

“응, 읏, 으흥, 흑, 나… 으응, 찢어지, 느은데에, 흑, 히이익!”

영하는 힘껏 끌어안긴 몸을 흔들며 가쁘게 울음을 터뜨렸다. 항문을 가득 메운 성기가 거북해지는 시점이 왔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쾌락의 형태가 머리 위쪽으로 몰려들고 호흡이 깔딱거렸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찰나, 이를 악문 최세계가 영하의 몸을 안아 당기며 그대로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웅- 몸이 회전하며 눈앞이 어찔해진다. 그의 다리 위에 올라타 앉은 자세로 바뀌며 결합이 더욱 깊어졌다. 말도 안 되는 쾌감이 번개처럼 내리쳤다.

“아, 흣―, 응, 아, 아아아―!”

넓게 뻗은 연인의 어깨와 등을 문지르며 영하는 절정에 도달했다. 얄팍한 종잇장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몸이 완전히 겹쳐진 상태였다.

“흣, 흐읏, 읏, 끄흣…….”

경련처럼 허리 아래가 파득파득 떨리며 동시에 몸 안을 파고든 성기를 강하게 조여 댔다. 그 강한 조임에 세계가 콧등을 찡그리며 발발 떠는 아들을 고쳐 안았다. 입 밖에 흐르는 더운 숨이 예민하게 달아오른 피부 위로 내려앉았다.

“응, 읏… 응, 흐… 흐으……. 아빠아…….”

흐느끼는 영하의 앞과 뒤는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마른 절정이었다. 사정액 대신 눈가에 눈물만 그득했다.

비명이 잦아들고 울먹임이 잔잔한 신음으로 바뀔 때까지, 세계가 뺨에 입술을 쓸며 말랑한 엉덩이를 가만가만 주물렀다. 녹초가 된 눈길이 아직까지 흥분을 가득 안은 남자의 시선과 마주쳤다. 격렬한 허릿짓이 다시 시작됐다.

*

겨우 옷을 갈아입고 차에 올라탔다. 아침부터 일을 치르느라 입에 댄 건 한 잔의 물 이외엔 없었다.

영하는 단정한 흰 셔츠에 짙은 감색 카디건을 걸쳤다. 어제부터 내내 고민해서 고른 것이다. 한 시간 동안 드레스 룸의 옷장을 다 열어 가며 옷을 고르고 있으니, 최세계가 어디 상견례에 가느냐며 비웃었다.

그 비웃음 사이에서도 꿋꿋하게 옷을 골라냈다. 자사 브랜드로 고르려니 입을 것이 그다지 없어 한참 뒤에야 무난한 세트를 만들어 냈다.

아침부터 기운찬 남자를 상대하느라 영하는 10년은 늙은 기분이었다. 아마 세계에게 말했다간 도리어 짜증을 내겠지만, 어찌 됐든 영하는 늙은 기분이었다. 무릎이나 팔꿈치, 마디마다 기운이 쪽 빠져 움직이기도 힘들었으며, 밤부터 아침까지 내내 거근을 담고 있던 구멍은 아직도 벌어진듯한 착각이 들었다. 창가에 이마를 대고선 불편한 엉덩이를 계속 고쳐 앉았다.

하필 가족들 보러 가는 날 아침에…….

“횟수를 정해야겠어.”

창밖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지친 낯으로 바라보던 영하가 중얼거리며 이어 말했다.

“자꾸 매일 하려고 하잖아. 매일은 안 돼.”

“요 며칠 안 했어.”

“그전에는 거의 매일 했어!”

고개만 비틀어 옆을 보니 최세계는 불만스러운 태도로 눈가를 찡그리고 있었다. 사실이니 더는 반박은 못 하고 핸들을 쥔 손등의 핏줄만 도드라진다. 그래 봤자 어쩔 수 없다. 영하는 마음을 정했으니까.

“일주일에 두 번.”

“뭐? 미치는 꼴 보려고 해? 네 번.”

“절대 안 돼. 두 번.”

“마지노선이 세 번이야.”

흘끗 고개를 돌린 세계가 일갈했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뱉었는데, 소득은 없었다.

“참다가 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

“난 참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럼 이 기회에 좀 배워. 두 번. 끝.”

“하아…….”

가족들 앞에서 고개를 들 낯이 없다. 최세계야 원래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니 비교적 정상인인 자신이라도 챙겨야 했다.

잠깐. 챙긴다고 하니 생각났다. 녹초가 되어 모래사장에 박힌 미역처럼 늘어져 있던 영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술! 술 챙겼어?”

“트렁크.”

“다행이다…….”

영하의 호들갑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세계가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술은 영하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비싸고 좋은 물건이나 홍삼 같은 건 주변 사모님들 모임이나 회사 선물로 많이 들어올 테니, 늦은 밤 내내 고민하다 근사한 도자기에 담긴 전통주 세트를 주문했다. 물론 카드 결제 내역은 최세계의 휴대폰으로 떨어졌다.

“가서 밥 못 먹을 것 같아. 벌써 속이 떨려.”

“그러니까 뭐 하러 가. 그냥 집에 데려다줄까.”

“아니… 그래도 가야지…….”

영하는 배 위를 문지르다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래도 해야 하고. 아빠가 본가와 연을 끊지 않는 이상 살면서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그가 자신 때문에 회사와 가족을 포기하는 건 영하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일단, 할머니한테는 선물드리고…….

그다음엔 승준이. 승준이가 문제였다. 승준이는 둘 사이를 알고 있는 데다 영하를 도와주려다 실패했다. 눈만 스르륵 굴려 운전하는 세계를 흘끗 쳐다보곤 허벅지 위를 손가락으로 갉작갉작 긁었다.

분명 저 남자가… 그냥 좋게 넘어갔을 리가 없는데…….

그러나 이제 와 묻기엔 이미 지난 일인 데다 다시 돌이키기에도 좋지 못한 기억이다.

승준이한테도 일단 무조건 미안하다고 해야지.

*

“선물 고맙다. 예쁘네. 할아버지랑 나중에 오붓하게 한 잔씩 하면 되겠구나.”

선물의 효과일까. 할머니의 말투나 태도가 전보다 부드러워진 기분이었다. 늘 영하를 못마땅해하거나, 트집 잡을 거리가 없나 찾아보던 반응에서 가족은 아니라도 최소한 손님을 대하는 반응 정도로 발전했다.

선물을 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아 감격한 영하가 입술을 가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네. 네.” 하고 소리 내어 대답했다.

서서 지켜보던 최세계가 가늘게 눈꺼풀을 내리깔곤 영하의 옆자리에 앉는 순간, 1층 주방에서 걸어 나오던 영하의 큰고모 최승주가 하품하던 손을 들어 흔들었다.

“이 집 상전 오셨네.”

“안녕하세요. 근데 고모…… 임신하셨어요?”

그녀는 편안한 흰 원피스만 걸치고 있었는데, 전과 달리 배가 조금 도드라졌다. 팔다리는 여전히 마른 것으로 보아 살이 찐 건 아닐 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괜히 뱉고 나서 눈치가 보였다.

임신 아니면 어떡하지. 다행히도 최승주가 걸어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졸음이 쏟아지는지 연신 하품하는 모습이었다.

“하으으… 응. 임신. 4개월 차인데 쌍둥이라 그런지 벌써 배가 나오네.”

“쌍둥이요? 와…….”

저 몸에 쌍둥이가 들어 있다니. 그나저나 5년을 딩크로 지내더니 결국 임신했다. 그러니 축하를 해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할머니의 맞은편에 앉은 승주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세계에게 덤덤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지아는 안 와. 이따 1시 되면 점심 먹자.”

“작은고모 바쁘세요?”

“가족끼리 붙어먹는 역겨운 짓거리에 자기까지 포함하진 말라던데.”

“…….”

다리를 쭉 뻗으며 뱉은 말이었다. 적나라한 단어 선택에 입술이 달라붙었다. 악의를 가진 발언은 아니었다. 큰고모는 원래 그랬다. 지나치게 솔직하고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점이 아니라…….

굳은 가족들을 훑은 승주가 배 위를 문지르며 첨언 했다.

“그래서 조카로 대해 줄까, 시누이로 대해 줄까.”

두 손을 모아 꼼지락대던 영하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지고 숨결이 둔탁하게 먹혀들었다. 세계의 검은 눈동자가 조용히 영하를 응시했다.

최승주의 손은 리모컨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듯한 무신경한 태도였다. 하지만 분명, 일반적으로는 해서는 안 될 발언이었다.

“둘이서 의논하고 더 마음에 드는 걸로 정해. 난 뭐든 상관없으니까.”

“승주 너 방에 들어가.”

“싫어. 아니 엄마, 방금 나왔는데 왜 들어가? 이 집에 사는 사람은 난데. 지아처럼 피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니까? 엄마도 손자 말고 손님 취급하려는 거 아니었어?”

“조용히 좀 해라.”

영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을 감추려 바닥으로 고개를 내리깔았다. 두려움을 참지 못해 보드라운 카디건의 끄트머리를 주먹으로 세게 움켜쥐었다.

전부 알고 있어.

승준이, 할머니 말고도.

어쩌면 가족들 모두가…….

밝혀져서는 안 될 사이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가 아니라, 용인할 수도 포장할 수도 없는 관계였다. 아무리 별것 아니라는 듯이 평범한 일상의 한 조각처럼 말해도…….

눈에 띄게 굳은 영하의 등 위로 남자의 손바닥이 닿아 마른 몸뚱이가 흠칫 떨렸다. 둘만 있는 상황이 아니니 단지 올려 둘 뿐이었다. 세계가 최승주를 보고 찌푸리며 힐난했다.

“네가 애를 안 낳아서 다행이었는데, 너 같은 게 곧 셋이 된다니.”

“내가 할 소리지. 네 유전자로 영하가 태어난 일이 신기할 정도였다고. 뭐, 어쨌든 둘이서 천인공노할 사고를 쳤으니 결국엔 부전자전이지.”

“너 태교 안 하니?”

“엄마, 태교를 나더러 24시간 하라고? 학교 공부도 그렇게 안 했어. 저 독한 새끼는 하루에 세 시간 자고 공부했지만.”

영하의 귀에는 부정적인 단어만 골라 들렸다. 천인공노할 사고와 부전자전. 눈물보단 아득한 두려움이 발밑에 존재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체온이 맞닿아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위안이 되질 않았다.

낯짝 두꺼운 사람이 되어 보려 노력해도 역시나 자신에겐 분명히 한계가 있다. 농담처럼 흘러나오는 말에도 면역이 없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무작정 일어나 아무렇게나 걸었다. 발길이 닿는 곳에 화장실이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갑갑하고 신물이 올라오는 명치께를 크게 문지르며 후문을 열었다. 건물 밖에 나와 바깥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뭉텅이로 숨결이 쏟아졌다.

“하…! 하아…….”

등을 둥글게 말며 가슴을 한 번 내리쳤다. 내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리던 남자가 떠올랐다.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는데.

설마… 그가 가족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남자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다. 알면서도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

바로 그때 후문이 다시 열리고 누군가 나타났다. 최세계였다.

둔탁한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문을 닫은 세계는 허리를 굽혔다. 고개를 푹 숙인 영하의 얼굴 아래를 들여다본 그가 참을 수 없었다는 듯 픽 웃음을 흘렸다. 현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리듬감 있는 어조가 그에게서 나왔다. 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안 우네.”

“그렇게까지 자주 울진 않아.”

“내 기억이 잘못됐나.”

지금은 농담에 풀릴 기분이 아니었다. 멍하니 고개를 내젓다가 닫힌 문을 흘끗 보고서는 목소리를 작게 낮춰, 어차피 모두가 알 만한 이야기를 했다.

“왜, 왜 다들 알고 있는 거야……. 고모까지…….”

같은 죄를 지은 남자와 얼굴을 마주하니 다시금 가슴이 산만하게 뛰고 불안해졌다.

대체 조금 있다 점심시간에 가족들을 무슨 얼굴로 대해야 하고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나를 볼까?

차라리 할머니는 쉬운 상대였다. 할머니는 두 사람의 잘못된 관계를 질책하기보다는 아빠의 안위를 걱정했다. 혹여나 발각되어 그 사람에게 지우지 못할 끔찍한 낙인이 새겨질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하아…….”

연거푸 한숨을 내쉬는 영하에게 그가 속 편한 소리를 지껄였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잖아.”

“아니! 난 모르길 바랐어!”

“모를 수가 있어? 네가 날 보는 눈빛을?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완전한 남이 봐도 너랑 내 사이를 부자 관계라고 짐작하진 못할걸.”

“…….”

최세계는 언제나 그렇듯 동요 없이 덤덤했다. 자신의 이름 옆에 근친상간 이슈가 붙어 뉴스 헤드라인에 뜬다 하더라도 시큰둥할 기세였다.

입술을 달싹이다 도로 다문 영하는 탄식처럼 돌아섰다. 잠시라도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붙잡은 것은 역시나 최세계였다. 주춤, 하고 앞으로 나아가던 발걸음이 돌부리에 걸린 듯이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다정한 목소리가 깃털처럼 곳곳을 달래듯이 어루만졌다.

“약속했잖아. 도망치지 않기로.”

“알아. 아는데, 그래도 너무 갑자기…….”

“괜찮아. 답답한 생각 그만하고 날 믿어.”

철면피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어려웠다. 평생 그렇게 못 살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다. 어깨 위에 닿았던 손이 차츰차츰 내려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따뜻한 체온과 약간의 압박감은 누구에게나 안정을 선사한다. 익숙한 품 안에 안겨 어깨 위로 턱을 올렸다.

후원은 그늘이 많이 지는 곳이라 영하가 살 때만 하더라도 가족들이 거의 찾지 않던 공간이었다.

최세계는 종종 영하를 찾으려 저택을 헤매다가 후원을 찾았다. 영하가 좋아하는 이 적막한 공간. 기다란 카우치에 누워 나뭇잎이 만드는 그림 같은 그늘을 손바닥에 담고 있다 보면 발소리가 들릴 때가 있는데, 영하는 그럴 때마다 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맞혔다.

그가 내는 숨소리와 발소리, 기침 소리를 모두 구분할 수 있었으니까.

이곳에도 분명 추억이 있다. 그와 함께한 모든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집에 가고 싶어.”

“방금 왔잖아.”

“알아…….”

지금은 두부가 기다리고 있을 이층집이 영하의 집이었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 고기를 구워 먹기로 했다. 해산물을 좋아한다는 누군가를 위해 조개도 구워 먹으려고 쇼핑몰 장바구니에 한가득 담아 놨다.

딴생각을 하다 보니 불안함이 조금 가셨다. 영하는 어깨에 기댄 턱을 떼어 내곤 세계와 얼굴을 마주했다.

기우가 그더러 무섭다고 표현한 말이 기억났다. 일견 차가운 외모 위로 덮인 걱정 어린 시선에서 애정이 느껴져 조금 미소 지을 찰나, 누군가 벽면을 툭툭 치는 소리를 냈다.

“아.”

황급히 품에서 떨어지며 뒤돌아보니 승준이었다.

“죄송한데, 할머니가 부르셔서요.”

녀석이 머쓱한 얼굴을 감추려 등을 돌리면서 말했다. 세계가 영하의 허리를 받치며 함께 출발하려 하자, 곧장 뒤이어 말했다.

“아버지 말고 형이요. 형 혼자만 오라고 하셨어요.”

혼자만 따로 불러서 무슨 이야기를 하실 생각일까. 세계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단단한 턱 아래를 문지른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같이 가.”

“아니야. 나만 부르시는데. 혼자 가야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남자의 손등을 쓸며 달랬다. 정작 할머니가 간단한 안부만 물어보실 수도 있는데, 괜히 같이 갔다간 일이 더 커질 수도 있었다.

최세계는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눈동자를 들어 노란빛으로 색이 빠지고 있는 나뭇잎을 멀거니 보다가 뒤늦게야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뒤돌아보던 승준이 맞잡은 손에 잠시 시선을 주곤 문고리를 다소 둔탁하게 잡아 돌렸다.

거실로 가려면 그림이 일렬로 장식된 흰 복도를 지나쳐야 한다. 막 모서리를 돌기 전 승준이 갑자기 비어 있는 방의 문을 열며 말했다.

“할 말 있어.”

방 안쪽을 턱짓하며 영하를 돌아본다. 껄끄럽긴 해도 오늘 계획 중 승준이에게 사과하기가 있었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빈방에는 햇살만이 유일하게 방을 채우고 있었다.

“승준아…. 너한텐 정말 미안해.”

영하는 마음먹을 시간도 없이 일단 뱉고 시작했다. 고민하다간 끝도 없을 것 같고, 승준이와 따로 대화하려 시간을 마련하기보다는 지금 쇠뿔을 당기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너는 내 생각 해 줬는데, 형이 진짜… 너한테 너무 폐만 끼친 것 같아서.”

“그것보다.”

어젯밤부터 줄줄이 써 내려간 대본이 있었는데, 승준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이다음이 클라이맥스였는데! 영하가 머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 형 진짜 아버지랑 좋아서 그러는 거야?”

방금 물음에는 역겨움이나 불편함 따위가 없었다. 정말 단순히 궁금한 점을 묻는 모양새였지만 역시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침을 크게 모아 삼키는 사이 승준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감춰 두었던 불쾌한 감정을 모조리 쏟아붓고 있었다.

“강간이 아니라 정말 좋아서 아빠 옆에서, 너 진짜 네가 좋아서 그러는 거야? 아버지 비위 맞춰 주고 살랑거리는 거?”

“방금은 내가 비위 맞춘 게 아니라 오히려 아빠가…….”

“지금 그게 중요해? 더 적나라하게 말해 줘?”

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다. 신물이 올라올 것처럼 괴로웠지만, 영하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그의 뒤에만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은 영하가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조용히 고백했다.

“내가, 먼저 좋아했어.”

달갑지 않은 고백이었다. 침착을 가장하던 승준의 얼굴이 비로소 와자작 일그러졌다. 하! 숨을 크게 뱉은 녀석은 얄궂은 벽만 발로 냅다 걷어찼다.

“하, 시발… 살다 살다……. 다른 사람한텐 그 말 하지 마. 먼저 좋아했다느니. 그런 말 말라고. 할머니가 들으셨다간 바로 쫓아내실 테니까.”

최승준은 예상보다 추리력이 떨어졌다. 영하가 이미 겪은 일이다. 돈 가득 든 통장 쥐여 주고 안 보이는 데로 도망가서 살라는 건, 쫓아내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몇 번 벽을 더 걷어찬 녀석이 번개처럼 뒤돌더니 빠르게 말을 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데. 형이 이 집 오기 전부터 아는 사이였어? 그랬던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열네 살에 왔잖아. 대체… 미친 거 아니야? 아버지는 원래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사는 건 알지만 형까지…….”

혼자 묻고 혼자 깨닫는 동생을 보며 영하는 침묵했다. 이미 둘 사이를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승준이는 여직 최세계의 강압이라 계속 믿은 모양이었다.

정말 그래서 날 도와준 거구나. 하긴, 먼저 나더러 도망치라고 했고, 내가 알려 준 대로 도망쳤으니…….

영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창문 모양의 햇살 위로 적막이 잠시 내려앉았다. 껄끄러운 고요함을 먼저 깨뜨린 쪽은 승준이다.

“어릴 땐 잠깐 형이 부러웠지. 아버지는 나한텐 전혀 다정한 아빠가 아니었으니까.”

“…….”

그래서 영하는 승준이에게 미안했다. 영하는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했으니 승준이가 느낄 질투와 박탈감을 충분히 인지하고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빠를 둘이서 나눌 수 없었다.

승준이에겐 사랑해 주는 엄마가 있으니까, 나는 아빠를 온전히 가지고 싶어. 짧은 욕심이 점점 커져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 이제 최세계는 영하에게 유일한 남자였다.

그래. 그는 영하의 남자였다. 용인될 수 없는 더럽고 추악한 사랑. 시대를 거슬러 머나먼 과거에 존재했을 친족 간의 혼인에서도 부모와 자식이 혼을 맺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하는 그를 사랑했다. 가슴을 헤집고 이따금 심장이 분출하는 혈맥이 그와 닮아 타오르는 불덩이처럼 느껴지는 감정이었지만, 단어 그대로 사랑이었다.

“둘이서 그렇게 지저분하게 붙어먹었으니…….”

“…….”

“난 결국 둘 다 잃은 거네. 아버지도 형도.”

창가 앞에 선 승준은 고개를 떨어뜨리곤 혼자서 뇌까렸다.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영하는 잃었다는 말에 무어라 대답할지 몰라 망설였고, 먼지가 조금 내려앉은 창틀을 매만진 승준이 손을 털어 내며 이야기했다. 과거를 한 뼘 한 뼘 거슬러 가듯이.

“예전에 처음, 형이 집에 왔을 때 좋았어. 솔직히.”

“…….”

“아버지는 무섭고, 나한테 관심도 없고. 또래도 없고. 게다가 엄마는 따로 사니까. 근데 갑자기 형이 생긴다는 거야. 멍청하지. 그땐 그냥 신나기만 했어. 당장 이십 년만 흐르면 상속을 두고 경쟁할 텐데도 열두 살엔 그런 거 안중에도 없지. 처음 만난 날 형이 먼저 말 걸어 주면서 그랬잖아. 안녕, 승준아. 너 참 잘생겼다.”

“내가 그랬던가.”

“그랬어.”

“하지만 너, 한 마디도 안 했잖아. 낯 가려서.”

한 달이 되어서야 비로소 승준과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그전까진 영하는 최승준이란 벽을 세워 두고 혼잣말을 지껄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벽 위에 손가락을 올린 승준이 대답했다.

“엄마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거든. 엄마는 형을 견제했겠지.”

“…그래.”

“만약에 내가 처음부터 형이랑 잘 지냈으면, 형이 아버지랑…… 그런 짓 안 했을까.”

이어 나온 말은 조금 쓰라렸다. 승준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이었다. 영하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더라도, 애정 결핍으로 인해 어긋난 감정이라 여기는 것이었다.

영하는 멀쩡한 옷을 괜히 쓸어내리곤 한 템포 느리게 대답했다. 형과 아버지 둘 다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무슨 대답을 하든 결국 승준에게 상처를 주는 결과로 귀결된다는 걸 인지했다.

“…너한텐 이게, 아니…… 그냥 내가 잘못된 거 나도 알아, 승준아.”

“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둘 다 멀쩡하잖아. 그렇게, 만날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나는…… 그 사람 아니면 안 돼.”

마침내 영하가 세계를 아빠가 아니라 그 사람이라고 칭하는 순간, 승준은 얼굴을 구기며 돌아섰다. 괴로운 얼굴로 이마를 문질렀다.

“미안.”

그를 사랑하며 벌어진 무수한 사건들과 비극들을 겪고도 영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저버릴 수 없었다.

자신과 닮은 눈동자가 사랑을 품고 온화하게 내려다볼 때마다, 그 남자의 품에 안길 때마다. 철없는 행동과 바보 같은 대화들의 나열 속에서 가슴 저린 행복을 느꼈다.

그 끝이 물에 적신 종잇장에 질식되는 결말이라 하더라도, 결국엔 어리석은 사람처럼 당장의 행복을 좇았다.

“미안해. 너한테 다 뺏어 가서…….”

진심이었다. 최세계의 애정을 온몸으로 받아 내면서도 미안한 마음은 내내 영하의 마음 깊숙한 곳에 존재했다. 승준이도 아빠가 필요할 텐데.

“됐어. 알고 보니 아버지는 형이 뺏어 간 게 아니었으니까.”

“응?”

“나가자. 할머니 기다리시겠다.”

영하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 승준이 지친 얼굴로 문을 열었다. 영하도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산 하나를 넘으니 그보다 더 큰 산이 나타났다. 할머니와 마주할 시간이었다.

“휴학했다더니 집에서 가만히 뭐 해. 학원이라도 다니지.”

역시 시작부터 잔소리다. 잔소리 심한 누군가의 어머니다운 발언이었다. 학원 안 끊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영하가 부리나케 대답했다.

“안 그래도 2주 전부터 학원 다니고 있어요. 시간 남는 김에 영어랑 한자 좀 잡아 두려고요.”

영하는 다리를 바짝 모아 앉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피부 위가 곤두서는 느낌이라 따끔한 목덜미를 긁었다. 할 말 없으시면, 그냥 보내 주시는 게…….

그 순간 할머니가 뒤편의 서랍에서 주얼리 케이스를 들어 탁자 위에 내밀었다. 납작하고 길쭉하다. 굳이 열지 않아도 그 안에 목걸이가 있을 거란 예측이 들었다. 할머니가 케이스의 뚜껑을 열자, 역시나 안에는 알이 굵은 다이아가 박힌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무슨 목걸이인지 아니.”

“할머니께서 자주 착용하신 건 기억나요.”

“그래. 이 집에 시집오면서 시어머니께 받았다. 나중에 며느리 생기면 물려주라고 하셨지.”

할머니의 목걸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런 사연까지는 몰랐다.

며느리를 운운하시는 것으로 보아 너 때문에 멀쩡하고 잘난 내 아들이 장가 안 들고 역겨운 짓거리를 하게 생겼으니 화가 난다는 말씀을 하시겠구나, 생각했다. 같은 말 도돌이표겠네. 적당히 귀를 닫고 대답만 해야겠다. 그러나 영하의 할머니는 다른 말을 꺼냈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세계가 이 목걸이를 너한테 주라고 하더구나.”

“…네?”

염치와 수치를 모두 팔아넘긴 남자의 전적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할머니의 낯빛과 화려하게 반짝이는 목걸이를 번갈아 보곤 목덜미까지 피가 쏠려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미친 소리를 지껄인 것은 최세계이나, 그가 느낄 수치심마저도 죄다 영하에게 이전됐다.

미친 거지, 정말…….

어떻게 자기 엄마한테 그런 말을.

무릎 위 바짓가랑이가 구겨 쥐도록 쥐고 침을 삼켰다. 눈을 마주할 용기도 나지 않아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하지도 않은 일에 용서를 구했다.

이래서 본가에 오기 싫다. 작아지고, 숙이고, 잘못했다고 말하게만 만드는 곳.

“제가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목걸이는 여성용이라 지아 시집가면 줄 생각이다. 이거 받아라.”

고개 숙인 영하의 정수리에 대고 말한 그녀가 건네는 것은 흰 봉투였다. 영하는 비슷한 것을 받은 적 있다. 다른 것으로 섣불리 오해하기 전, 테이블 위로 무게감 있게 떨어지는 봉투에 대해 그녀가 먼저 언질했다.

“가서 세계랑 같이 백화점에서 옷을 사든 시계를 사든. 마음대로 해라. 목걸이 대신이니까.”

할머니의 목소리가 낮게 메었다. 대신이라는 말을 할 때는 그녀의 목덜미도 영하처럼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수치심이었다. 그러나 영하와는 다른 종류의 수치심이다.

몸과 피가 바짝 마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중년과 노인의 경계에 선 사람. 삶이란 계절이 바뀌는 틈새.

만약 영하가 조금 다른 방법을 통해 태어나고 처음부터 이곳에서 자랐다면, 어쩌면 최세계만큼이나 자신을 아껴 주었을지도 모를 상대였다.

영하가 바라던 이상적인 할머니는 승준이의 외할머니였다. 조금 원초적이고, 조금 거칠기도 하지만 귀여운 강아지를 대하듯이 보듬어 주는 사람. 눈앞의 할머니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날 때부터 상류층이었다는 것이 한순간도 잊히지 않도록 흠잡을 데 없는 모습.

아빠가 많이 닮았구나.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느낀 분위기가 그랬다. 고압적이면서도 우아하고, 그 속에 자리 잡은 당연한 자신감과 야심이 남자로서 바랄 수 있는 최대치의 이상향을 본떠 만든 사람 같았다.

지금이야 입만 열면 장난치고 못살게 구는, 잘생긴 아저씨지만.

“네…….”

한참 이어진 혼자만의 상상 끝에 고개를 주억였다. 느릿하게 흰 봉투를 당겨 손에 쥔다. 영하의 손에는 여전히 반지가 자리 잡았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네게 이런 말을 하는지, 너도 내 마음 짐작은 갈 거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지. 결국 자식이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고집을 부리면 어쩌지 못하고 그 길을 따라 같이 걷는 게 부모의 마음이야.”

“…….”

“그렇다고 내 자식을 그런 추문에 휩싸이게 할 수는 없으니 양자로 입적시킨 건 다시 파양할 생각이다. 그러면 최소한 서류상으로는 네 아…, 아니 세계와 완전히 남이 될 수는 있어. 의미 없는 짓이지만 최소한 탈출구 하나는 만들어 둬야지…….”

“…죄송해요.”

“…앞으로 밖에서는 아빠라고 부를 생각 마라. 나한테도 할머니라도 부르지 말고. 호칭에 조심해라. 사람들은 작은 흠집도 크게 부풀리니까.”

긴 이야기를 마친 그녀는 깊은숨을 내뱉고는 굳은 어깨를 떨어뜨렸다. 영하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네.” 말고는 없다. 둘 사이를 묵인해 주겠다는 말에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예전과는 달리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들었음에도 영하는 좋아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자신 하나가 너무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건 아닌지 울적해졌다.

아니야. 그래도 좋게 생각해야지. 가족들의 시선이 낯 뜨겁고 괴로워도,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었다면 이 미친 기행에 같이 장단을 맞춰 주는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했다.

대화하고 났더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돈 봉투는 매번 문제였다. 이런 거 필요 없으니까 그냥 앞으로는 이 집에 안 오는 게 좋겠어.

“아니, 그러면… 뭐 어머님이라고 부르라는 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아…….”

할머니의 방을 빠져나와 복도를 막 꺾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쳤다. “아악.” 하고 물러난 영하는 상대방의 발만 보고도 누군지 알아차렸다.

“똑바로 보고 걸어야 할 거 아니야. 운전면허 떨어지겠네. 전방 주시 몰라?”

“코너에서는 보행자도 조심하는 게 기본이잖아.”

“그래서. 너희 할머니가 뭐라고 하셨는데.”

“돈 봉투 받았어.”

시시껄렁한 시비를 걸던 남자가 영하가 내민 흰 봉투를 보고는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돈 봉투?”

세계가 대뜸 봉투를 받아 열었다. 안에는 수표 한 장과 오만 원권 지폐가 다량으로 들어 있었다.

“백화점 가서 쇼핑하라고 하시던데.”

“갑자기? 왜.”

“그냥……. 그냥 주시는 거야. 아빠 가져. 난 필요 없으니까.”

수중에 돈 한 푼 없다고 투덜댄 것을 잊고 현금을 몽땅 세계에게 넘겼다. 터덜터덜 걷는 뒷모습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지켜보던 그가 보폭을 넓게 벌려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무슨 일이야?”

사실대로 말해 주긴 싫다. 모른 척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꼭 저렇게 꼬치꼬치 캐묻지. 사업가 아니고 검사나 형사를 해야 했어. 용의자 하나 붙잡고 캐묻지 죄 없는 날 데리고…….

할머니가 날 손자 말고 남으로 대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까. 절대 자신의 입으로는 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낯부끄럽고 죄책감이 들었다. 자식을 사랑하다 못해 그 아들의 부도덕함도 눈감아 주고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망설이던 영하는 에둘러 대답했다.

“할머니가 밖에선 아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셨어.”

“고작 그 이야기 하려고 널 따로 불렀다고?”

“돈 봉투도 주시고… 도망치라고 주신 거 아니고 진짜 쇼핑하라고 하셨어. 가서 확인해 봐.”

“…….”

여전히 석연찮은 눈빛이었지만, 세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안 해 주니 어쩔 수 없이 넘어가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앞서서 걸은 그가 “옷 사기엔 금액이 많은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야 하나.” 하고 말했을 땐 심장이 철렁했다.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아니야. 설마 돈 봉투 하나 가지고……. 영하가 혼자서 고개를 내저을 찰나 세계가 힐끗 뒤돌아보며 말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예물인가?”

“씨이…….”

“나 말고 어머님께 애교 좀 부려 봐. 평생 그런 거 못 보고 사신 분이니까 껌뻑 넘어가실걸.”

“무서워서 못 해. 그리고 어머님이라고 하지 마.”

짜증 난다. 눈치가 왜 저렇게 빠를까. 세계가 픽픽 웃으며 앞서 걸었다.

*

“최영하. 너 마치고 어디 가는데? 학원?”

수업을 마친 뒤 일부러 샤워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길이었다. 매번 집까지 데려다주던 세계가 오늘은 미팅하느라 늦어 출발하지 못했다는 문자를 보고 나왔다. 배 위로 말린 티셔츠를 내리면서 문을 열던 영하는 기우와 눈이 마주치곤 화들짝 놀라 문고리를 억세게 쥐었다.

간 떨어질 뻔했네.

가슴팍과 어깨 부근에 성격 이상한 남자가 만들어 둔 자국이 신경 쓰여 남몰래 옷을 갈아입었더니 간이 조막만 해졌다.

기우가 배는 봤을 것 같은데… 배에 자국이 있었나? 집착처럼 배꼽을 빨아 댔었는데…….

“집에 가냐? 데려다줄게.”

“어?”

“데려다준다고. 차 가지고 왔거든.”

어쩐지 녀석이 의기양양하게 턱을 들고 있었다. 키 큰 놈이 그러고 있으니 눈꼴시어 퉁명스럽게 굴려던 영하는, 곧 기우가 자신의 배나, 하다못해 본인이 얼룩덜룩해진 가슴을 드러내고 있어도 전혀 관심을 주지 않을 거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입꼬리가 길게 당겨지고 광대가 볼록 솟아 눈과 한껏 가까워진 꼴의 기우가 손가락에 걸어 둔 스마트 키를 계속 흔들었다. 유난히 은빛이 반짝거린다. 새것처럼.

“기뻐해라. 네가 세 번째 태워 주는 거야.”

“…오…….”

“첫 번째는 부모님. 두 번째는 여자 친구.”

어쩐지 수업 내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굴더니. 차를 사서 자랑하고 싶었구나. 영하는 아직 도로 주행이 남아 면허가 없는 상태였다. 운전만 잘한다면 차를 사 주겠다던 세계의 언급이 있긴 했지만 그다지 기대는 없다.

도망갈까 봐 무서워서 절대로 안 사 줄 것 같은데.

기우의 차는 요즘 유행하는 흰색 SUV였다. 튼튼하고 투박하고 네모난 SUV.

새 차라는 것을 증명하듯, 아직 뒷좌석에는 비닐이 깔려 있었고 곳곳에 커버를 덜 떼어 낸 부분도 존재했다. 그런 것을 보게 되면 몸가짐이 조금 더 조심스러워지게 된다. 남의 새 차를 더럽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으로 다리를 모아 앉았다.

“요즘 차 나오는 거 오래 걸리지 않아? 부모님이 사 주셨어?”

“어. 내가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사백만 원 합쳐서. 작년에 산 건데 1년 기다렸지. 존나 설레. 오늘이 세 번째 주행이거든.”

“…응? 세 번째?”

“어어.”

“연수… 받았지?”

“형한테 네 시간만. 더 했다간 싸움 났을걸.”

형한테 네 시간… 안전벨트를 막 매던 영하의 몸짓이 굳었다. 김기우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고개를 이리저리 빼며 주차한 차를 출발시켰다. 운전을 한다는 것이 즐거움을 넘어 감격에 겨운 모양이었다. 영하의 경우에는 다리가 떨렸고, 이윽고 손이 차가워져 두 손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목이 타네. 이 차 타도 되는 거 맞나.

“…너 운전 잘해?”

“어. 잘하지. 껌이지.”

말은 그런데 몸이 굳어 있다. “어어.” 하고는 창문을 내리곤 차의 간격을 살폈다. 주차된 차를 빼는 것부터 난관이다.

갑자기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영하는 엄살이 심하므로 별안간 세계에게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내야 할 것 같다는 충동이 들었다.

난폭 운전을 할까 봐 노심초사했건만, 기우는 의외로 도로 위의 준법자였다. 시속 50킬로를 준수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나 집중을 하는지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다.

덕분에 영하는 마지막 인사를 담은 문자 대신, 행선지를 바꾸기로 했다.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누군가가 보고 싶어졌으니까.

“이야… 건물… 멋있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내비게이션이 알려 준 시간보다 12분 늦게 도착했다 모드 글로벌 본사 앞에 차를 세운 기우가 선팅이 짙은 창문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기우가 막 안전벨트를 푸는 영하에게 물었다.

“여기에 니네 형이 근무한다고?”

“어. 응.”

최세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영하는 할머니가 밖에서는 그에게 아빠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던 일을 떠올렸다.

아빠가 아니라 형이면 되는 건가? 형도 가족인데, 의미 없는 짓 아닌가. 형이 아니라 그냥 아는 형이라고 둘러댈까 고민했다. 정작 기우는 그렇게 깊게 궁금해하지 않을 텐데도.

민망하게 뺨을 문지르곤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갈게. 데려다줘서 고마워.”

인사하곤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이었다. “잘 가.” 하던 기우가 난데없이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아! 잠깐!” 번개처럼 소리쳤다.

영하의 처진 눈가가 삐죽 솟아오르고 눈동자가 크게 확장됐다. 심장이 가슴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뭐, 뭐야?”

“미안… 미안. 야, 혹시 너 좋아하는 스타일이 어떻게 돼?”

“어…? 갑자기?”

“어. 뭐 이상형, 그런 거 없어?”

기우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얼굴로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잠시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영하를 채근했다.

“약간 연예인 스타일 들어도 되고. 머리 긴 게 좋아? 키는 작은 거?”

뒤이어 덧붙인 말을 듣고서야 기우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소개팅시켜 주려고 그러나 보네.

기우가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해도 영하는 딱히 애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 아마 솔로라고 생각했나 보다. 녀석이 가죽 핸들 위를 조심스럽게 잡고는 대답 없는 영하에게 일렀다.

“우리 과 애 소개해 줄까? 진짜 예쁘고, 진짜 착한 애 있거든? 걔가 또 마침 소개팅을 하고 싶어 한단 말이지. 그래서 듣자마자 바로 네가 떠올랐어. 어때? 좋아하는 스타일?”

“음, 이상형.”

“어어. 내가 들어 보고 찾아 줄게.”

“이상형…….”

있다.

비록 기우가 원하는, 긴 머리냐, 생머리냐, 파마머리냐, 혹은 피부가 희냐. 그런 종류의 것들이 아니라 차마 이야기해 줄 순 없지만, 영하에게도 꿈에 그린 듯한 사람이 분명 존재했다.

영하는 문의 손잡이를 표면의 감촉이 느껴지도록 느리게 문질렀다. 멋쩍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인 영하가 눈꺼풀을 살며시 내리깔고 말문을 열었다.

*

“최세계 상무님 뵈러 왔는데. 혹시 계시나요? 음, 영하가 왔다고 전해 주실 수…….”

“네네. 상무님이 좀 전에 손님분 오실 거라 말씀 주셨습니다.”

“네?”

“올라가실까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빠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서프라이즈를 해 주고 싶어 데스크에 넌지시 물었다.

당신 누구냐는 대답도 각오했는데, 손님이 올 거라고 미리 이야기를 했다고? 예상치 못 한 전개였다.

최영하는 뻣뻣한 자세로 직원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세계의 사무실이 있는 층에 가까워지는 내내 머리에는 ‘어떻게 알았지?’ 하는 생각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 그 생각은 곧,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지워졌다.

엘리베이터를 나와 오른쪽 복도를 조금 걷다 보면 상무이사의 비서실이 나타난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 그들의 시선이 한데로 모여 영하를 바라보는 순간, 저 중에 ‘백만 원 비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상무님 기다리고 계십니다.”

깔끔하게 머리를 넘기고 안경을 쓴 남자가 영하를 안내했다. 몇 걸음만 나오는 상무이사 팻말이 붙은 문까지 굳이 안내해 줄 필요가 있을까. 다른 비서 둘은 영하에게 묵례만 하고 도로 앉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혹시 이 아저씨가 그 백만 원 아저씨는 아니겠지.

과거, 회사에서 섹스를 한 날에 세계가 함께 야근을 한 비서에게 백만 원을 주고 입을 다물게 했다고 말한 적 있었다. 그 후론 심심하면 백만 원 이야기를 해 대는 터라 노이로제가 걸렸다. 회사에 놀러 오라는 말을 다 무시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말 안 오고 싶었지만……. 오늘은 백만 원 어치의 부끄러움보다는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기에 이겨 냈다. 하지만 상무이사의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인 영하는 그사이 목덜미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왔네.”

서향이라 뒤늦게 햇살이 많이 내리쬐는 편이었다. 긴 통창마다 블라인드를 반쯤 내린 탓에 흰 태양의 빛은 창가 아래로 바짝 붙어 사선을 그리고 있었다.

세계는 기분 좋은 얼굴로 입술을 크게 당겨 웃었다. 눈가가 부드럽게 접혀 그 아래 도톰한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좀 전에 차 안에서 기우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뜨끈한 목과 어깨를 문지른 영하가 소리 없이 고개만 끄덕여 대꾸했다.

“내가 올 거란 걸 어떻게 알았어?”

“너무 사랑해서 텔레파시가 통했나 보지.”

“…….”

영하가 침묵한 채로 눈을 얇게 뜨고 치켜 보자, 그가 덧붙였다.

“1층에서 비서실장이 널 봤어. 보자마자 나한테 전화해 줬고. 그래서 아는 거지.”

하지만 뭔가 수상하다. 최세계는 갑자기 들고 있던 휴대폰을 내리더니 잘 꽂혀 있던 파일철에서 연두색 파일을 하나 꺼내어 그 안의 서류들을 손대중으로 잡아 넘겼다.

업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영하가 보더라도 ‘그 서류, 굳이 지금 안 봐도 될 것 같은데?’ 하는 의문점이 드는 어설픈 모습이었다.

그냥 둘러대는 것 같은데…….

뒷짐을 지고 고양이같이 살금살금 다가가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기가 힘들다. 흐으음. 눈가를 찌푸린 영하에게 세계가 딴소리를 했다.

“혼자 올 생각을 다 했네. 아직 집 밖에 혼자 있는 거 싫어하잖아.”

“기우가 태워다 줬어.”

책상 앞으로 가까이 오는 영하를 보고선 파일을 내리던 남자가 잠시 몸을 굳혔다. 파일 모서리를 쥔 손이 공중에 떴다.

기우의 이름이 나오니 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곧 입술과 함께 턱이 단단하게 다물리고, 아래로 향한 시선을 굴리던 남자가 멈추었던 동작을 부드럽게 이어 가며 의자를 틀었다.

고개를 든 세계의 얼굴은 다시 아찔하도록 미소 지은 채였다.

“이리 와.”

“응.”

기우 이야기만 하면 싫어하고……. 날을 세우지. 대체 왜 기우를 질투하는 걸까?

자기 위에 앉으라는 듯이 허벅지를 두드리는 것에 고개를 내저었다. 대신 영하는 세계와 무릎이 닿도록 바짝 붙이고 서서 남자의 뺨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기우가 이상형 물어보더라고.”

그는 앉고, 자신은 서 있으니 평소 시야가 역전되어 즐거웠다. 내려다보는 게 이런 기분이네.

희미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니, 세계는 반대로 미소에 금이 갔다. 결국엔 사람 좋은 남자 연기를 포기했는지 질린다는 목소리로 짜증스레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또 그놈의 기우. 기우. 그 자식이 네 이상형은 왜 궁금해해?”

어쩐지 재밌다. 그가 싫어하고 화를 내는 모습이 즐거웠다. 그래서 자꾸 날 괴롭히는 건가?

“집 밖에서 웃지 말고 정색만 하고 다녀. 넌 착하게 생겨서 염치없는 새끼들이 주제 파악 못 하게 된다고.”

“됐고 계속 들어 봐. 그래서 고민하다가…….”

영하의 기억은 10분 전으로 되돌아갔다. 차 안에서 기우에게 해 주었던 대답을 떠올리니 흰 뺨에 불그스름한 생기가 돋아났다. 말하기 조금 부끄럽고, 약간은 설레는 감정이었다.

아랫입술을 크게 베어 문 영하는 허리를 조금 숙여 최세계의 무릎께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이야기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했어.”

사실, 굉장히 닭살 돋는 발언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단어를 나열하다 보니 무미건조한 말이 된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내 마음은 더 큰데. 이상형 정도가 아니라 다른 남자는 상상도 해 본 적 없을 만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영하는 그렇게까지는 솔직하지 못했다.

“아빠 이상형은?”

“나는 그런 거 없어.”

대답은 조금 늦게 이루어졌다. 그가 목소리를 내는 대신 영하의 뒤통수를 잡아 부드럽게 당겼다. 허리가 굽어 들고, 입술 위로 또 다른 입술의 촉감이 느껴진다. 영하는 흐느끼듯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감았다. 몸 위로 올라타고픈 충동이 척추뼈를 간지럽게 타고 올랐다.

“거… 짓말. 저번에 분명 예쁜 사람이 좋다고…….”

“그건 그냥 둘러댄 거지. 그냥 네가 사랑스러운 데다, 이제 너 말곤 의미 없어.”

입술을 떨어뜨리고도 만족 못 하고 여러 번 쪼듯이 입 맞춘 뒤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귀 끝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동시에 심장이 뻐근했다.

과거를 되짚어 봐도 사랑스럽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정말 처음이었다.

“왜 기우를 질투하는 거야…….”

부끄러워 다른 이야기로 넘겼다. 딴생각을 해야 멀쩡한 얼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타액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벅벅 닦아 내곤 남의 책상 위나 훑었다. 아무렇지 않은 체하려는 행동이었으나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세계가 픽픽 흐르는 웃음을 거둘 생각도 없이 영하의 허리를 뒤에서 안았다.

“내가 모르는 너를 알고 있으니까. 네가 발레 하던 시절도 알 거고. 대체 너희 엄마는 영상도 안 찍어 두고 뭘 한 거야? 콩쿨을 세 번을 나갔다는데 남아 있는 자료가 하나도 없잖아.”

날개뼈 사이에 고개를 박은 남자가 어쩐지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어투로 이야기했다. 절대 어린애일 수가 없는 사람인데.

아무튼. 그래서 질투했다는 거네…….

“아기 때인데 뭐가 궁금해? 그리고 별거 없어. 특출 나게 잘한 것도 아니었고.”

“잘하는지 못하는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그 순간의 네가 보고 싶은 거야. 그래… 뭐. 어차피 넌 내 눈엔 평생 아기니까.”

아…….

단지 그 순간의 네가 보고 싶다는 말이 화살이 되어 영하를 찔렀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본 적 없는 어린 날 자신에게도 닿은 그의 애정이 고맙고 기꺼웠고, 뒤늦게라도 아무에게 사랑받지 못하던 어린이 최영하가 사랑받은 기분이었다.

괜히 눈가가 축축해져 애써 눈을 크게 깜빡였다. 다만 세계는 영하가 감동에 젖을 잠시간의 시간도 허락하질 않았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을 못 본 게 그나마 다행인 일이지. 양심에 찔리다 못해 너덜너덜해질 텐데.”

“웃기지 마. 찔릴 양심도 안 남았으면서.”

영하는 눈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찡그리곤 세계의 손등을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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