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7. 심판
“응. 조금 바빠. 아마 11시는 넘겨야 할 거야. …뭐? 아직도 저녁 안 먹었다고? 자꾸 식사 거를래? 내가 먹여 주는 게 좋아서 그러는 거야?”
동시에 스피커 너머 음성이 “힉.” 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건 아닌데. 그냥 점심을 늦게 먹어서 배가 안 고파서 안 먹었어.
우물쭈물하는 목소리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계는 “그리고.” 하고 대꾸하고는 태블릿을 열어 어플을 켰다. 잠시간의 로딩 후, 네 개의 화면으로 나눠진 CCTV 속 영하는 침대 위에 모로 누워 한가로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뭐 하냐고? 공부하지. 다음 주면 학교 가야 하니까…. 이번에는 5등 안에 들도록 노력할게.
성적으로 잔소리한 적 없는 거로 아는데. 공부 이야기를 하는 영하의 목소리가 묘하게 주눅 들어 있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는 데다 아침에 본 잠옷 차림 그대로였다. 깜찍하게 거짓말을.
“우리 영하가 다 컸나.”
-벌써 예전에 다 컸지…….
“그래? 얼마나 컸는지 자세히 봐 볼까. 속옷 안쪽으로.”
-자꾸 변태 같은 소리……. 근처에 누구 있는 거 아냐? 그런 소리 좀 아무 데서나 하지 마.
“있기는.”
물론 있다. 운전 중인 차 안이니 기사는 당연했고 조수석에는 비서실장이 타고 있었다. 상사의 천인공노할 불온한 행위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앞만 응시할 뿐이었다. 얇은 칸막이로는 완전한 방음이 불가능했다. 단지 약간의 데시벨을 낮춰 줄 뿐이다.
생각을 마친 최세계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밤 풍경으로 눈길을 돌리곤 굳은 어깨 근육을 풀고 이어 뻐근한 목을 움직였다.
“곧 갈 테니까, 자지 말고.”
-당연히 기다리지. 피곤할 텐데 너무 빨리 오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조심히 와.
“그래. 끊어.”
-응.
태블릿 피시 위로 노란 가로등이 비치다 사라졌다. 영하는 여전히 침대 위에서 꼼짝을 안 했다. 배가 아프다 하여 며칠간 섹스를 안 했으니 컨디션이 좋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
영하에겐 잔업으로 늦는다고 말했지만 용건이 있었다. 서수민과의 만남을 마치고 검찰총장과의 약속이 연달아 있었다.
귀찮기 짝이 없는 약속을 이뤄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가 어머니의 복수를 부탁한 날. 최세계는 그녀와 약혼하는 판을 짠 것을 후회했으나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쉽게 결론 내리기에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미 영하와 서민석이 상견례 전에 안면이 있었다면 무슨 선택을 했든 간에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서민석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당장 1차 공판이 코앞이었다. 주변 동료들의 반응도 좋지 않았으니 탈출구는 손바닥만큼 작고 하찮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가 안도하지 못하는 것은, 서민석이 쥐새끼이기에 그 조막만 한 탈출구를 반드시 뚫고 나갈 것이란 예감 때문이었다.
끝 모를 추잡함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법이었다. 담당 검사들은 서민석을 수사하는 것을 저어했다. 서민석과 서승섭의 권력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쥔 자신들의 그림자가 까발려질까 손쓰지 못하고 있었다.
뒤에서 벌인 더러운 짓이 어디까지 손을 뻗었을까. 성품으로 소문난 검찰총장조차도 서민석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막내딸의 사위가 문제였다.
결국 서민석은 시궁창 쥐이자 검찰의 곰팡내 나는 썩은 뿌리였다. 뽑아내는 것이 해답임을 알아도 쉽사리 건드릴 수 없다. 퀘퀘한 나무 껍데기 속에 도끼를 박아 넣는 순간, 그 안에 자리 잡은 시커먼 것들이 팔을 타고 기어오를 것이 분명했으니 아무도 시도하지 않으려 한다.
오후 업무가 끝난 뒤 곧바로 서수민을 만났다. 그녀는 얼굴을 보자마자 USB 하나를 내밀었다. 5년간 자신의 아버지인 서승섭과 서민석의 행적을 담은 자료였다. 청탁, 협박, 폭행 등의 과거는 놀랍지도 않은 일이다.
최세계의 눈이 잠시 멈춘 곳은 실종된 젊은 여자에 관한 자료였다. 11개월 전이면 서민석이 검사로 임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기였다. 이 또한 놀라운 일은 아니었으나, 영하를 짝사랑했던 이정욱이라는 놈의 말이 떠올라 꺼림칙했다.
‘누나를 꼭 찾고 싶어요. 부탁드립니다…….’
이쪽이고 저쪽이고 죄다 나를 탐정으로 알지.
복수는 충동에서 비롯한 아주 원초적인 행위였다. 대다수는 복수라는 파괴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중독되어 이성을 잃기에 십상이다. 복수의 근원이 잔인할수록 충동도 비례했다. 서수민의 복수의 대상은 가족이었으나 피해자 또한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늘 엄마에게 열등감을 느꼈어요. 귀한 집에서 자란 고명딸이라는 이유였죠. 아버지는 가난했기 때문에, 아마 엄마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검사가 될 수 없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서수민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상대가 서승섭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벌어들이는 돈이 지저분한 돈인 걸 알고 경고했죠. 가족이 함께 별장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는 날이었어요. 술에 취한 아빠와 엄마가 싸우기 시작했고, 아빠의 손에 망치가 들렸어요.’
서수민은 잠시 침묵하곤 두 손을 움켜쥐었다. 한참 뒤 그녀는 어머니의 죽음을 말하는 대신 살인이 일어난 직후 설명으로 넘어갔다.
‘만취한 아빠 대신 사건 현장을 피습 현장으로 꾸며 놓은 게 옆에 있던 민석이었고, 그때 민석이는 고작 열여덟 살이었어요.’
세상천지 미친놈이 그득한데 친아들에게 집착 조금 하는 정도면 젠틀한 편이지. 하물며 영하가 성인이 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린 것으로 모자라 심지어 허락을 받고서야 안았다. 이만한 신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본인이 생각하고도 궤변이었기에 작게 실소하며 이어 대답했다.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했는데 왜 스스로 하지는 못한다는 겁니까?’
‘백번도 넘게 시뮬레이션했어요. 누나를 죽인 막내아들을 선처해 달라는 부모의 마음을 아무도 헤아리지 못하는 것처럼 세계 씨도 제가 아니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등에 칼을 찔러 넣는 상상을 하면서도 아버지가 속죄해서 자수하기를 바라요. 언제나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죠. 하지만 분명한 건 저는 마지막 순간 아버지를 용서할 거라는 거예요.’
물론 최세계는 그녀의 마음속 요동치는 갈등을 이해하거나 고려할 생각 없다. 뒤늦게 마음이 바뀌어 배신하진 않을까 싶어 떠봤을 뿐이었다.
잠시 회고를 멈춘 세계는 태블릿 속 CCTV 영상을 확대해 엎드린 영하의 상반신을 띄웠다. 혼자서 뭐가 웃긴지 휴대폰을 보며 웃는 중이었다.
“상무님. 도착했습니다.”
태블릿을 접어 두며 창밖을 응시했다. 미리 예약해 둔 고급 한식당을 취소하고 오늘 총장 쪽에서 제안한 식당으로 약속 장소를 바꿨다.
어디 대단한 곳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만, 최세계로서는 한 번도 발 들인 적 없는 낡고 허름한 밥집이었다. 갈색 철문에 붙인 시트지에 시커먼 먼지가 들러붙어 있었고 문 안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도 꺼림칙했다.
“…주소 확실합니까?”
“예. 총장님 비서 쪽에서 남겨준 가게 맞습니다. 청수식당.”
“……맞네.”
다 떨어져 가는 시트지에는 분명 청수식당이라는 글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세계는 한숨을 뱉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식당 안에는 주인으로 보이는 늙은 아주머니 하나와 둥그런 테이블에 싸구려 과자 접시를 덩그러니 두고 홀로 앉은 중년의 검찰총장뿐이었다.
“최 상무는 도련님이라 이런 데 안 와 봤지.”
희끗하게 센 머리를 보며 고개를 숙이곤 맞은편에 자리했다. 노래 하나 없이 적막한 곳이었다. 이따금 설거지하느라 틀어 놓은 물소리만 흐른다.
검찰총장이 먼저 소주병을 들었다. 세계가 달갑지 않은 얼굴로 잔을 들었다. 테이블 위로 바로 내리꽂히는 노란 천장 등 아래로 그림자가 시커멓게 진다. 빛이 가까울수록 어둠은 그랬다. 불빛 아래 속눈썹 그림자가 눈 밑에 길게 사선을 그렸다.
어울리지 않는 소주잔을 앞에 둔 세계는 당장이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일단 한잔해. 다 먹고 마시자고 하는 짓인데.”
“단골 가게입니까.”
“교복 입고 공부할 때부터 알던 가게야. 한복 곱게 차려입은 주인집 마님 있는 거창한 한옥집보다 여기가 더 마음 편해.”
잔 가득 찰랑이며 술이 담긴다. 얼른 마시라는 제스처에 마시긴 했으나 소주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공업용 알코올과 무슨 차이인지 알 수 없는 도수만 높은 증류주에는 관심 없다.
억지로 빈 잔을 만들어 스테인리스 테이블에 올리자마자 곧장 술이 채워진다.
젠장.
저 양반이 만족할 때까지 마셔야 한다는 의미였다. 총장이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여전히 잔 끝까지 술을 채웠다. 세계도 곧바로 남은 소주의 뚜껑을 돌려 따며 이야기했다.
“안주도 안 주시고 술부터 먹이십니까.”
“나는 중요한 대화를 앞두고 꼭 소주 한 병은 먹이고 시작하지. 술 취하면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라, 본성이 나오는 법이거든. 술 취한 사람과 아이는 거짓말을 안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오늘 최 상무 본성도 한번 보자.”
“저는 안 취합니다. 감추고 사는 게 없는 인간의 특권이죠.”
마저 잔을 비우고 턱을 굳힌 세계가 가게 안을 둘러보며 대꾸했다. 메인이 찌개인지 테이블마다 가스버너가 올라 있었다. 총장의 말대로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굳이 궁금하지도 않으니 경험할 이유도 없었다.
“하하하. 이놈이 연수원 졸업하고 바로 유학 간다는 걸 내가 확실히 붙잡아야 했는데. 네가 연수원에서 얼마나 유명한 놈인 줄 알아? 차석으로 졸업해 놓고 법조인 안 하고 경영한다고 유학 간 놈은 연수원 최초다. 이놈아.”
“아마 붙잡으셔도 갔을 겁니다. 학을 떼서.”
검찰총장과의 인연은 사법연수원의 마지막 학기, 실습 시절부터 이어졌다.
당시 그는 서울서부지검 형사 3부 부장 검사였고 최세계는 고단하기로 소문난 형사부에 배치된 검사 시보였다. 보편적으로 아무것도 모를 시기이니 설렘과 두려움, 긴장을 단단히 품고 있는 기존의 실습생과 달리 최세계는 무덤덤했다.
인지부 차장 검사가 최세계를 시보가 아니라 현직 검사로 착각할 정도였으니 늘 입던 오만함을 인턴 시기에도 벗지 않은 것이다.
세계의 태도에 흥미를 가진 그는 며칠 안 가 최세계가 재벌 집 자제라는 것을 알고 그제야 이해했다. 세상 무서울 게 없는 놈이니 가능한 짓이었다.
“나쁜 면만 보지 말고 좋은 면도 봐야지. 세상 어디나 다 똑같아. 이 판이나 저 판이나 더럽기는 마찬가지지. 그나저나 최 상무가 말한 탄환은 못 찾았어. 어디에 둔 건지 집 안을 수색해도 안 나와.”
이번엔 세계가 자신의 잔을 채워 술을 넘겼다. 탄환을 서민석의 차량에 넣은 뒤 곧바로 가까운 루트를 통해 밀고했으나 한발 늦었다. 서민석이 탄환을 먼저 숨긴 상태였다.
“단순 수집욕으로 가지고 있었을 뿐이라고 하면, 탄환도 없으니 아마 기소 중지되겠지. 무기징역을 원하면 더 큰 걸 가져와야 해. 아무리 자네 부탁이라도 명색이 총장이 되어서 고작 신임 검사 하나 따위에 시간 팔 수는 없지. 안 그래도 임기가 1년 반을 넘어가니 슬슬 내려가라고 압박이 들어온단 말이야. 나는 3년은 버틸 건데.”
그가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는 동시에 잘 구워진 부추전이 테이블에 올랐다.
“최 상무 먼저 들어.”
“저는 괜찮습니다.”
“하여간 말만 하면 다 싫다지.”
혀를 끌끌 찬 총장이 젓가락을 들었다. 전을 가르자 그 사이로 뜨끈한 김이 올라온다. 그가 길게 찢은 전을 간장에 푸욱 찍고 반대편 손으로 관자놀이를 툭 가리키며 말했다.
“가진 거라곤 이거. 머리밖에 없는 내가 이 자리까지 오며 얼마나 많은 땀과 피를 흘렸겠나.”
“그래도 김 총장님께서는 최소로 흘리셨습니다.”
“모자란 피는 내 피눈물로 채운 거지. 나는 아직도 검사라는 직업에 자긍심이 있는 놈이야. 그러니 서민석 그놈 하나 잡겠다고 내가 30년 가까이 몸담은 조직을 들쑤실 생각 없다. 자칫 잘못하다간 근간이 흔들릴 수 있으니 리스크가 너무 커. 서민석네를 내친다고 내 업적이 되는 것도 아니고.”
술잔을 흔들던 김 총장이 이어 뱉은 말에 최세계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장 쉬운 방법은 하나야. 적당히 포기하는 것.”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바에 제가 서민석을 죽여 버리고 말죠.”
“그렇게 간단하고 원시적으로 끝내기 싫으니 나한테 부탁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일을 들춰내 그 자식을 처벌하는 게 힘들다면, 서민석의 미친 짓이 탄로 나는 무대 위에 제가 주연으로 오르면 됩니다.”
처음의 계획이었다. 서민석을 교란시켜 끌어들이고 어떻게든 범죄 현장을 덮쳐 현행범으로 잡아넣는 것. 본인이 문자 그대로 피를 흘리고 다칠 수도 있었지만 가장 효과적이자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서수민에게서 받은 USB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막내딸의 사위가 서민석에게 약점을 크게 잡혔으니 검찰총장도 애가 탈 것이다.
“지금은 그보다 나은 선택이 있죠. 서민석과 서승섭의 그간 행적을 담은 자료입니다. 믿을 만한 구석에서 나왔으니 출처는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화기부재단에서 매주 만나 지저분한 바닥에서 돈 줘 가며 좆질해 댄 놈들끼리의 동지애가 없더군요. 공범인 주제에 모두 서 부자 둘이 우두머리라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디서 구한 거야?”
“방법이 있죠. 서둘러 주셔야 합니다. 분명 마지막 발악을 하려 할 테니, 저희 쪽에서 선수 쳐야 합니다.”
빨간색 USB를 힐끗 내려 본 총장이 듬성듬성 수염 난 입술로 미소 지었다. 저 정도 증거면 저 인간도 마음을 확실히 굳히겠지.
그를 설득하는 데만 한 달 이상이 걸렸다. 굉장히 신중한 작자다. 드문드문 연을 잇긴 했으나 10년의 세월을 통해서도 속내를 확신할 순 없었다. 다만 그는 정도의 길을 걷고 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총장님께서 검찰을 사랑하시듯 저도 존중합니다. 어차피 서민석 재판의 판사는 누가 배정되든 퇴임 후 모드 글로벌 법무팀에서 노후를 보낼 테니 수사에만 힘써 주십시오. 상황이 잘 해결된다면, 총장님의 막내 사위분, 내년에는 대기업 상무가 될 겁니다.”
세상에 돈과 자식 앞에 무너지지 않는 부모는 없다.
“뭐 그런 거 바라고 최 상무 만나나.”
건조한 뺨을 쓸어내린 총장이 씩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
“난 진짜 너 죽은 줄 알았다.”
함께 밥을 먹고 냉골인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다 의자에 몸을 길게 기댄 민재가 꺼낸 말이었다. 쥐 죽은 듯이 살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음료를 다 마시고 빈 컵에서 얼음을 골라 아작아작 씹으며 웃었다.
“이제 공부 열심히 하고 마음잡으려고. 개강까지 이제 사흘 남았잖아.”
“너 뭐, 문제 있는 건 아니지? 한 달 반이나 템플스테이를 하는 놈이 어디 있냐.”
“왜 없어. 내가 불교일 수도 있는 거고.”
“멀쩡한 거 보니 별일 아닌 거 같긴 한데…… 이정욱은 이야기했고?”
“어, 응. 별거 아니었어.”
정욱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긴 어려웠다. 자꾸만 캐묻는 통에 “같이 공부하자고 하던데?” 하고 둘러대니 민재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이정욱은 3등인데 걔가 뭐 하러 너한테 공부하자고 해?”
“모른다고!”
그 후로는 시시한 말싸움만 이어지다 헤어졌다. 별로 한 건 없는 거 같은데. 오래간만에 사회성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확실히 너무 집에만 있었지.
내친김에 영하는 최세계가 보고 싶어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네 시.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져 지하철로 향하는 지름길에서 돌연 멈췄다.
지금 바로 출발하면 회사 도착은 다섯 시쯤 되려나. 같이 퇴근하자고 할까. 아직 별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오늘은 정시 퇴근인 모양이다.
갈까…….
아직 비서 얼굴 보기는 조금 민망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찾아가면 그가 기뻐할 것이 분명했다.
좋아. 가자.
미소 짓는 최세계를 떠올리곤 설레는 마음으로 눈가를 접으며 휴대폰을 드는 순간이었다. 잠깐의 발소리. 곧이어 날카로운 무언가가 갑자기 뒤쪽에서 나타나 영하의 목에 바짝 당겨졌다.
“소리 지르면 그대로 동맥을 베어 낼 거야.”
갈라지고 가래 끓는 중년 남자의 어투와 어눌한 발음. 처음 듣는 목소리.
하얀 목에 가로로 붉은 상처가 나는 순간, 영하의 머리에 무언가가 뒤집어씌워졌다. 칼날이 아래로 내려가 배 위를 지그시 눌렀다. 까딱하다간 그것이 연약한 뱃가죽을 뚫고 들어올 것이다.
두려움에 휩싸여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심이 밀물처럼 밀려와 목 아래까지 간당간당하게 차올랐다. 영하가 사라진 자리에는 휴대폰만 남아 있었다.
*
차에 태워져 한참을 이동했다. 컴컴한 천 속에서 무수히 많은 상상들이 영하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나한테 이런 짓을 할까. 이상한 데로 팔려 가는 걸까. 지나친 두려움에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 호흡이 엇박자로 흐트러진다. 불편하게 모은 다리가 끊임없이 떨렸다. 입술 위로 찝찔한 눈물이 줄기를 만들며 떨어졌다.
아빠…….
며칠 전부터 그는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곧 서민석이 재판에 넘겨질 것이고 반드시 무기징역을 받을 거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렇다면 서민석이 벌인 짓일까.
가쁘게 호흡을 내뱉으며 삼천 개의 숫자를 셀 무렵. 영하는 다시 무자비하게 끌려 차에서 떨어졌고 신발이 벗겨져 맨발로 흙바닥을 걸었다.
콰앙!
어디론가 끌려와 내던져졌다. 이곳이 실내라는 것은 바닥에 더는 흙과 돌이 밟히지 않는다는 촉각으로 알게 됐다. 벽에 부딪쳐 쓰러진 영하는 묶인 팔다리를 어쩌지 못하고 옆으로 기었다. 그러다 건물 기둥에 뒤통수를 쿵- 치받았다.
“흑!”
찌릿한 둔통. 아픔보다 더 괴로운 것은 자신의 미래였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한참을 기어 이곳저곳 부딪친 후에야 영하는 자신이 갇힌 장소를 특정했다. 가정집. 아파트나 계단을 오르진 않았으니 아마 서울과 떨어진 지역의 일반 주택일 것이다. 의자와 식탁을 확인하고서 느리게 기어 다른 곳으로 몸을 옮겼다.
계단 앞이었다. 올라갈까 마음먹었지만 이렇게 팔이 뒤로 묶인 상태에서 올라가다간 실수로 떨어질 수도 있다. 결국 영하는 계단 아래 몸을 기대고 웅크렸다. 뒤집어쓴 천 아래로 땀이 흥건하다. 눈물과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아빠…….”
영하를 구해 줄 사람은 그 남자밖에 없었다. 오늘 민재랑 만나서 밥 먹기로 했다고 미리 말했으니 어쩌면 아직 자신이 납치된 사실을 모를 수도 있었다. 매번 뒤를 따라붙던 아저씨가 오늘도 따라붙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온통 새까만 세상. 의연한 척 스스로를 달래 보아도 의미 없다. 떨리는 몸뚱이를 갈무리할 수도 없었고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흐, 흐윽…….”
울먹이다 긴장 속에 날을 세웠다. 잠들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영하의 몸뚱이는 정신력을 이겨 낼 수 없다. 자신도 모르게 잠깐 잠들었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몸이 파드득 튀었다. 허리를 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을 응시했다.
곧장 문이 닫혔고, 가벼운 구둣발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 상대가 아빠이길 바랐지만 영하는 이미 정해진 답을 알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서민석의 목소리. 잊고 있었던 지난날의 악몽이 쇠사슬이 되어 영하의 몸과 정신을 옥죄었다. 발등과 손등이 딱딱하게 굳고 오그라든다. 하지만 영하는 발악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풀어, 이 개새끼야!”
이어지는 서민석의 웃음과 함께, 목을 꽈악 조이던 천이 해체되더니 단숨에 벗겨졌다.
“허억, 헉… 하아….”
영하는 땀범벅의 얼굴로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크게 헐떡였다. 폐부로 바깥 공기가 들어오자 이제야 정말로 숨을 쉬는 감각이 느껴졌다.
희게 변한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서민석이 그 잠시를 기다려 주지 않고 영하의 등을 콰직 내리밟았다.
“아악!”
“도망치는 흉내만 내고 다시 돌아오면 재미없지. 네 아빠가 미치다 말았잖아.”
시커먼 구둣발의 먼지가 흰 티셔츠 위로 말발굽처럼 흔적을 남기고, 그 위로 후벼 파듯 둥글게 비벼졌다.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몸이 묶여 그마저도 용이치 않았다.
뺨이 푹 들어간 서민석이 힐끗 웃으며 뒤로 묶인 손바닥 위로 구둣발을 세게 내리찍었다. 짓이겨지는 통증에 입이 크게 벌어진다.
“아아아악!”
“이제야 좆같은 기분이 조금 풀리네.”
공간을 채우는 찢어지는 비명을 듣고서 초췌한 얼굴이 반색했다. 성관계를 하는 듯이 눈이 까뒤집히더니 벌어진 입으로 웃음 지었다.
하하, 하. 끊어지는 웃음소리가 형태가 되어 기이하게 뒤틀린다. 머릿속이 희게 변모했다. 분명한 두려움에 사지가 벌벌 떨렸으나 영하는 최대한 침착하게 목소리를 낮춰 일갈했다.
“날 뭐 하러 납치한 거야. 그때 못한 거 이어서 하기라도 하려고?”
“고작 그거 하려고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봐.”
강한 척했지만 무서웠다. 그날의 기억이 발끝을 타고 소름 끼치게 기어오르는 것 같아 입술을 크게 물었다.
태연자약하게 대답한 서민석의 시선이 늘어나고 찢어진 티셔츠 아래로 향했다. 움푹 파이고 땀이 맺힌 쇄골이 푸른 형광등 아래 반들거리게 빛나고 있었다. 왼쪽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가는 동시에 그의 손이 목덜미로 다가왔다.
영하에게 그 손은 수천 개의 바늘이다. 닿고 싶지 않았다. 늘어진 몸에 갑작스레 힘이 들어가며 사정없이 버둥거렸다.
“놔! 미친 새… 아아악!”
거칠게 반항하며 서민석의 허벅지를 걷어차자마자, 쫘아악- 영하의 뺨이 크게 옆으로 비껴 나갔다. 입안이 터져 비릿한 핏물이 목구멍으로 울컥 쏟아졌다.
뺨을 날린 그가 곧 미친 듯이 가슴을 헐떡이더니 갑자기 돌변하여 영하의 몸을 퍽 소리 나게 걷어찼다. 사지가 묶여 벽에 몰려 무참히 공격당했다.
종아리가 부서지는 듯했고 가느다란 발목에 구둣발이 닿는 순간. 뿌옇게 흐려진 머릿속에 짧은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엄마가 없던 레슨 시간. 다른 타임의 선생님께 배우며 발레를 하던 어린 날 최영하의 모습이었다.
“발목은, 안 돼!”
다리가 높게 들리고 서민석은 영하의 발목뼈를 부술 작정으로 여러 번 내리찍었다. 뭔가가 부러진 것 같은데. 실제인지 착각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아흐윽, 아!”
고통에 몸부림치며 퍼덕이는 영하를 내려다본 서민석이 몸이 흔들리도록 크게 웃었다.
쇠창살에 찔린 듯이 날카로운 통증이 발목에 연달아 들이닥쳤다. 숨조차도 쉴 수 없었다. 살갗과 그 아래 근육에 시뻘겋게 타오르는 고통이 느껴져 울음을 삼킬 뿐이었다.
역류한 신물이 목구멍에서 간당거렸다. 영하는 두려움과 아픔으로 덜덜 떨리는 턱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말했다.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이렇게까지….”
이해할 수 없다. 영하가 그에게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빠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좌천 하나였다. 그 또한 없는 죄를 만들어 덮어씌운 것도 아니고 서민석 스스로 말했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근데 그게 날 납치하여 이 지경으로 만들 일인가?
영하의 물음에 그가 다리를 접어 앉아 고개를 가까이 내밀었다. 서민석의 눈가가 거뭇하고 이전보다 많이 말랐다. 마치… 약이라도 한 몰골이다. 그제야 정욱의 누나가 서민석과 함께 약을 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렸다.
“우습네. 너와 최세계를 벌하는 데에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하…… 그럼 아무 이유가, 흣, 없다고?”
“내가 말했잖아. 너한테 딱 맞는 형벌이 있다고. 벌써 잊었어?”
“닥, 쳐.”
말을 이어 가는 서민석의 뺨과 눈썹이 크게 오르내렸다. 지나치게 과장된 모습이었다.
“하늘 대신 더러운 네놈들에게 천벌을 내리는 건데.”
녀석이 눈꺼풀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그럼 굳이 이유를 만들어 줄게. 네 아빠가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날 아주 좆 되게 만들었거든. 벗어날 구멍이 안 보여. 간신히 구속은 면했지만 징역살이 당하기 직전이지. 이렇게 된 이상 최세계한테 곧이곧대로 당해 줄 순 없지. 그 자식 인생을 구렁텅이로 밀고 갈 거야. 그 첫 번째가 너고.”
입술을 당기고 눈가를 접어 징그럽게 웃어 댄 녀석이 영하의 티셔츠를 훌쩍 들어 올렸다. 떨림이 심해졌다. 부드러운 배와 허리에는 서민석이 만들어 낸 멍 자국이 빼곡했다.
“놔!”
원치 않아도 떠오르는 기억을 떨쳐 내려 기를 쓰고 발버둥 쳤다. 벽 위로 시커먼 발자국이 반복적으로 겹쳐졌다.
“건드리기만 해 봐, 미친 새끼야!”
서민석은 영하의 발악을 한가로이 바라봤다. 아무리 악을 쓰고 버둥대어 봤자 같은 자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천천히 일어나더니 주머니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가슴을 헐떡이며 살기 어린 시선으로 서민석을 노려보던 영하는, 불이 붙은 담뱃대에 피어오르는 연기와 그 향기를 느끼고는 짙은 공포심을 느꼈다. 등줄기로 찌르르한 전류가 치고 올라가 뇌를 때렸다.
“널 가지고 협박하면 난 상황이 더 나아질 수도 있겠지. 안 그래?”
정체 모를 담배를 깊게 빨아 당기고 후욱, 흰 연기를 뱉은 서민석이 얌전해진 영하의 배 위를 지그시 밟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영하는 1차원적인 고통에 패배해 얼굴을 구겼다. 아픈 자리를 다시 내리누르는 그 폭력적인 행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서민석이 환각을 보는 듯 몽롱한 눈으로 상기된 목소리를 뱉었다.
“내가 죽이기라도 할까 봐? 그럴 리가. 남자 중에 이런 얼굴은 흔치 않은데 죽일 순 없지.”
입을 꾹 깨물며 벗어날 방법을 생각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온통 텅 비어 있다.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영하의 발악을 즐거이 관망하던 서민석이 입에 문 담배를 들어 내밀었다.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담뱃재, 그리고 시뻘건 불길.
마침내 맨살 위로 불붙은 담배가 바짝 붙었다.
동공이 확장되고 피부에 소름이 끼치는 순간, 빨간 불길이 남은 담뱃재가 영하의 눈앞에서 바닥에 비벼져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눈동자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였다.
심장이 아래로 점점 꺼지고 있었다.
“네 아빠가 얼마 만에 널 찾을까 궁금해지네. 난 이틀 걸어 볼게. 넌?”
물음에도 머리가 텅 비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이 현실에 그가 구해 줄 시간까지 가늠할 여력도 없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음에도 서민석은 거추장스러운 재킷을 벗어 바닥에 던지고는 비틀비틀 집 안을 걸었다.
서민석이 조금 멀어지자 심장의 두근거림이 얕아지고, 부은 눈꺼풀 아래로 뜨인 눈에 겨우 실내의 모습이 들어온다.
가정집보다는 별장 같은 생김새였다. 사용감이 적고 드문드문 배치된 가구들이 흰 천으로 덮인 것으로 보아 최근에 사용한 적이 없는 곳이다. 생각보다 서울과 멀리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이틀 더 걸릴지도 모르지.
멀쩡한 모습으로 여길 나갈 수 있을까.
원치 않게 눈동자가 젖어 든다. 눈알 가득 힘을 주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영하의 바람과 달리 눈물이 뺨 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쇠창살로 막힌 창문 앞에 선 서민석이 틈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고는 물었다.
“파티를 열어 볼까.”
영하의 대답은 물론 없었다. 그가 다시 흔들거리는 몸으로 가까이 왔다.
“지 아빠 자지를 받는 구멍은 어떤 맛일지 다들 궁금해할 거야. 얼마나 씹질할 맛이 나면 그 고고한 최세계가 아들에 미쳐 날뛰는지.”
서민석의 적나라한 이야기에 눈이 질끈 감겼다. 몸이 바짝 타오르는 기분이었고, 전신의 촉각이 비명을 내지르며 절규하고 있었다.
서민석은 궁지에 몰려 있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다고 판단한 쓰레기가 선택한 것은 자신이 죽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본인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도, 이미 상식 밖의 인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네 구멍을 보고 좌절하는 꼴이야말로 진정한 클라이맥스지. 여러모로 안타깝네. 네 아빠가 최세계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약혼 소식에 질투해 서민석을 한 번 더 만난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약혼에 질투할 일도 없었겠지. 그래서 서민석 앞에서 울지 않았다면…….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영하는 최세계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다. 우연을 통해 타인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함께 머물 집에서 아빠와 아들로 만났음에도 첫눈에 반해 버렸다. 아무리 과거에 과거를 짚어 보아도, 끈덕이고 질척이는 불온한 사랑을 떨쳐 낼 수 없었다.
하하. 혼자서 웃음을 터뜨린 서민석이 식탁 의자를 질질 끌어와 앉았다.
“네 아빠만 내 뒤를 쫓은 게 아니야. 나도 최세계를 오랫동안 추적했지. 덕분에 네가 어디에 숨었는지도 알아냈었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네 아빠가 그 시골 골짜기의 농부 하나를 죽이려고 했지.”
김씨 아저씨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뒤로 묶인 손을 세게 쥐며 숨을 삼키고도 긴장이 떨쳐지질 않았다. 서민석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떻게든 아빠에게 흠집을 내려는 속셈이었다.
“아마 내일 저녁이면 모드 글로벌 차기 후계자가 살인 교사 혐의를 가졌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겠지. 하지만 걱정 마. 일주일 안에 내가 다른 이슈로 덮어 줄 테니까. 약속했잖아. 네가 돌아오면, 내가 어떻게 할지.”
아…….
카페에서 만난 날. 서민석은 영하의 존재가 세계의 목을 틀어막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김씨의 교통사고는 사이드다. 그가 마지막에 터뜨리고자 하는 것은 세계와 영하의 부적절한 관계였다.
“목숨 부지하고 싶다면 말을 잘 듣는 편이 좋을 거야.”
문득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민석이 한 곳으로 향했다. 문과 가까운 곳. 굽은 다리가 고급스러운 앤티크 테이블이었다. 중앙에 달린 조그마한 서랍 하나를 열더니, 그가 꺼내 든 것은 분명 권총이었다.
“흐, 흐으…….”
속수무책으로 몸이 떨렸다. 서민석은 형광등에 권총을 비춰 보며 입꼬리를 길쭉하게 당기며 웃었다.
“떨기는. 나중엔 제발 쏴서 한 번에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될 텐데.”
그러고는 페인트로 칠한 시커먼 사제 권총을 흔들었다. 서민석은 약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갑자기 무슨 환상을 보고서 총질을 해 댈지 모른다.
하아. 하. 하…….
영하는 가쁘게 호흡했다. 심장은 그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그래서 영하는 서민석의 주머니에서 들리는 벨 소리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천장을 향해 든 총을 내리자 온몸이 파드득 뛰었다.
“뭐야? 지금 바쁘다고. 아버지한테 말해 둬. 뭐? 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 서민석은 이윽고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상대방의 말이 길어질수록 안색이 험상궂게 변해 들었다.
“시팔.”
혼자서 발을 구르며 욕설을 뱉더니, 짜증스럽게 서랍 속에 도로 총을 넣어두고 걸어 잠갔다.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벽을 여러 번 발로 까 댄 남자가 벌컥 몸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제자리에 누워 옴짝달싹 못 하는 영하를 응시하고 쿵쿵대며 걸어 나갔다. 이윽고 철컥.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창문이란 창문은 합판으로 모두 가려진 곳이다. 서민석이 사라졌다 한들 영하는 온몸을 얻어맞아 걸을 기운조차 없었고 걸을 수도 없었다. 발목이 부서진 것처럼 아팠고, 그 망가진 발목 또한 노끈으로 칭칭 감겨 있었다.
‘약속했잖아. 네가 돌아오면 내가 어떻게 할지.’
안 돼.
그것만은 안 된다. 또 그의 발목을 붙잡는 존재가 되지는 말아야 했다.
단전에 힘을 끌어모아 몸을 버둥거렸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고 티셔츠가 위로 올라간 바람에 드러난 살결이 마찰되어 시뻘겋게 상처가 오르더라도 어떻게든 묶인 몸을 풀어 보려 안달이었다.
그러나 영하는 무력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온도가 너무 뜨거워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다. 그의 이름 석 자 옆에 더럽고 추잡스러운 추문이 붙기 전에 사라지고 싶었다.
자신이 가진 감정과 나눈 모든 것들이 역겨운 덩어리임을 알아도 영하는 최세계의 사랑이고 싶었다.
*
최세계는 오전 내내 미팅을 진행하느라 늦은 점심을 마치고 세 시가 되어 사무실로 돌아왔다. 평소보다 늦게 잤더니 나른하다. 겹겹이 물먹은 종이가 그의 등에 오른 것처럼 움직임이 둔하고 무거웠다. 그는 다리를 길게 뻗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잠시 뻐근한 눈꺼풀을 감고 숫자를 세는 짧은 휴식조차도 방해하는 이가 있었다. 손만 뻗어 진동을 울리는 휴대폰을 들어 통화를 연결했다.
-자네 이름으로 고발장이 접수됐네. 살인 교사 혐의가 있을 거라고 수사 요청과 함께 당시 보읍 교통사고 덤프트럭 운전자 전화번호가 적혀 있어.
“수사 진행하세요. 괜찮습니다.”
경찰서장이다. 천하의 사기꾼이 되고 싶진 않은 모양인지 배를 밟아 준 이후로는 고분고분했다. 서민석이 청송교도소에 감금만 된다면 서장도 자유로이 풀어 줄 생각이었다. 배 나오고 늙은 남자를 그의 우리 안에 가두고 싶진 않았다.
-자네 쪽에서는 고발장 접수할 것 없나? 아니면 나한테 미리 언질이라도…….
서장은 최세계가 수감이라도 될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아마 최세계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아닐 테고, 최세계와 서민석의 싸움에서 최세계가 무너지면 덜컥 겁에 질려 배를 옮겨 탄 보람이 없다. 자신이 탄 배가 난파선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가 재차 물었다.
그 초조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듣곤 세계가 긴 다리 다시 거두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필요 없습니다. 제 증인 또한 그 덤프트럭 운전자니까요. 빠른 시일 내에 출석시켜 심문해 보시죠. 그자가 가리키는 클라이언트가 누구일지.”
그가 즐거움을 숨기지 못하며 이야기했다.
이런, 너무 티를 냈나.
입가와 턱을 손으로 감추고 자세를 당겨 앉았다. 최세계의 휴대폰에는 서민석과 운전자의 대화 녹음 파일이 존재했다.
“멍청하긴. 두 번 세 번 밟아 확인했어야지.”
비서실에서 정보를 유출하는 놈이 있다는 건 영하가 떠난 직후 알게 되었다. 안에서부터 시작하여 차근차근 되짚어 보다 알게 된 실적이었다. 제일 최근에 입사한 남자였고, 일부러 해고하지 않고 내버려 뒀다.
애초에 김 씨를 처리할 계획을 세운 것도 서민석을 끌어들일 덫이었다. 완전한 베일에 싸이게 두지 않고 윤곽이 드러나게 한다. 예상대로 서민석은 쥐새끼답게 트랩에 걸려들었다.
한 번에 두 놈을 처리할 수 있으니 효율적이지.
세계가 심부름센터에 의뢰한 것은 사실이나, 의뢰가 하나만은 아니었다. 며칠 뒤 검사 하나가 접촉하면 자신에게 말해 달라 일렀다. 보수는 상대가 얼마를 불렀던 무조건 다섯 배. 입건 시 업계 최고 변호사 제공.
뭐, 서수민에게서 받은 자료가 모두 제대로 수사된다면 살인 교사 혐의는 별것 아닐 수도 있지.
“그나저나 왜 전화가 없어.”
낮에 친구를 만나러 간다던 영하가 종일 전화가 없다. 매일 한 번은 통화하는 사이이니 이쯤에서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 이내 접었다.
친구들과 있을 때 아빠가 전화 오면 곤란하다고 여러 번 이야기한 것이 불쑥 떠올라서였다.
아빠랑 통화하는 게 뭐가 어쨌다고.
퉁명스레 대답하긴 했으나 그 자신도 아버지와의 통화가 언제 적인지 까마득하다. 업무적인 볼일이 아니면 대면해 대화할 일마저 없었고 최근 아버지는 승준이 일로 체면을 구긴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핏줄을 잘 타고난 보람이 있는 남자였다. 유학에서 돌아와 막 실무를 뛰었을 땐 뇌에 과부화가 걸려 폭발해 버리고 싶었다. 죄다 아버지가 벌여 놓은 혐오스러운 문어발식 사업 부산물들을 거두는 데에만 3년이 걸렸다.
그러니까…. 본인도 좋은 아빠가 되기엔 시작부터 글렀고 최소한 귀찮은 애인이 되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의 자유는 보장해야 한다. 휴대폰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전화를 걸게 될 것 같아 억지로 내렸다.
그게 패착이었다.
그는 잠시 방심하고 있었다. 총장이 USB를 가져간 이후로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총장의 지휘 아래 검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서민석의 발과 입을 틀어막았다. 녀석은 예상대로 당분간은 조용했다. 집에 틀어박혀 꼼짝을 하지 않았다.
‘말씀하신 대로 서민석은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주변인이나 가족들의 움직임에도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서민석의 지인 중 하나가 나흘 전 심부름센터와 연락한 내역이 있는데, 그 후로는 별다른 동향은 없었습니다.’
직원을 시켜 알아본 것에도 문제는 없었지만, 혹시 몰라 열어 본 위치 추적 앱에서도 특이점은 없었다. 친구와 만나 놀 거라고 하더니. 영하가 주로 가던 번화가 부근에서 신호가 떴다.
놀고 있는 거겠지.
안심하고 휴대폰을 내려 둔 최세계가 불안을 감지한 것은 퇴근 직후였다.
집 안에 불이 모두 꺼져 있고 영하의 흔적은 없었다. 혹여나 또 도망간 것인가 살펴보았으나, 2학기에는 공부를 열심히 해 보겠다며 사 둔 책 위에 볼펜과 태블릿이 조금 흐트러진 채로 남아 있었다.
친구와 노느라 늦는다기엔, 영하는 섬세한 녀석이다. 그가 불 꺼진 집으로 퇴근하길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최소한 늦으면 늦는다고 분명 연락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곧장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영하의 뒤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였다. 기존에 일하던 남자를 교체해 좀 더 철저한 사람으로 골라 붙였다.
“…….”
그러나 그 또한 연락이 되질 않았다. 감지 못한 눈동자에 붉게 핏발이 서고 목빗근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정제되지 못한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푸우욱 흘러나와 땅으로 꺼져 내렸다.
아찔한 충격과 분노, 그리고 영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숨통을 겹겹이 틀어막았다.
화를 내고 있을 시간 따윈 없다. 분초를 다투는 일이었다.
여름날 저녁의 어둠이 모두 그의 삶으로 옮겨진 것처럼 바깥은 대낮처럼 밝았다. 지끈대는 머리를 붙잡고 도로 차를 타러 나가려는 와중에 휴대폰에 불빛이 들어왔다.
부리나케 들어 본 휴대폰의 화면에 뜬 문자를 읽은 최세계에게 음산한 공기가 척척하게 들러붙었다. 두 번 세 번 문자를 읽은 남자가 곧 치솟는 분노를 이겨 내지 못하고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쏟아 냈다.
“이 개새끼가!”
셋이서 하는 건 어때? 나도 네가 안달 내는 구멍에 넣어 보고 싶거든. 원하지 않으면 네가 하는 짓 전부 멈추는 게 좋을 거야.
곧바로 긴급 인력을 투입했다. 검찰총장에겐 무식한 방법이 아닌 법적으로 처리하겠다 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자만이었다.
서민석은 꼬리에 불을 달고서도 불길 근처에서 날뛰는 놈이었다. 제 몸이 불에 다 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발이 닿는 곳마다 폐허로 만들려는 녀석이다. 그런 놈에게 문명적인 방식은 어울리지 않지. 애초에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서민석 자택에 잠입한 팀에서 서민석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그렇다면 아마도 영하를 납치한 곳에 함께 있을 것이다. 연상 작용처럼 떠오르는 행위에 구역질이 치솟았다.
아직 어린애다. 고작해야 성인이 된 지 반년이 좀 넘은 아이였다. 그보다 최세계에게 영하는 서른이 되어도 마흔이 되어도 마냥 도움이 필요할 어린아이로 남을 존재였다.
이런 더럽고 치졸한 어른들의 복수와 싸움에 끼여 피해자가 될 이유가 없었다.
“찾았습니다.”
자못 어두운 얼굴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한참을 통화하던 남자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성화기부재단 회원들이 배신한 것을 알았나 봅니다. 서민석 본가인 제뉴어 포레 지하 주차장에서 확인했습니다.”
“대화만 하고 금방 나올 겁니다. 차 열 수 있는지 확인하고 가능하면 차 외부라도 도청 장치 붙여요.”
지금 그가 바라야 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영하가 무사하길, 그리고 홀로 있길.
*
영하는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물이 아니라 눈꺼풀이 말라붙은 듯이 뻑뻑하다. 잠시간 숨을 멈췄다. 사박사박 나무 벽을 두드리는 소리. 긴장을 풀어 보니 빗소리였다.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풀이 죽은 고개를 내리던 영하에게 또 다른 소리가 끼어들었다.
툭툭.
다소 둔탁한 노크 소리였다. 말라붙고 부어오른 눈이 겨우 반쯤 뜨여 허공을 응시했다.
“누구, 누구세요…….”
서민석이나 서민석의 일행이라면 노크를 할 리가 없다. 귀를 기울였다.
툭툭. 노크 소리는 문이 아니라 저편의 창문에서 들리고 있다. 얇은 빛의 선이 툭툭 소리에 맞춰 일렁이는 것을 발견했다. 영하가 그곳을 향해 비척비척 기었다. 발로 짓밟힌 발목의 통증이 어제보다 심했다. 그러나 달리 방법도 없었다.
툭툭.
“아빠……?”
의심쩍게 귀를 기울이며 기다란 빛 아래로 손을 뻗었다. 흐릿한 빛은 금방 영하의 손바닥 위에 올라탔다.
몰랐는데, 나 피 흘렸나 보구나. 빛이 비춘 손바닥에 거뭇거뭇한 피가 묻어 있다. 다리가 박살 났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피 따위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영하가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보며 공연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최세계…….”
“거기 혹시 최영하야?”
어쩌면 바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체념할 때, 벽 너머로 예상치도 못한 목소리가 답했다. 빗줄기 사이에 또박또박 귀에 꽂히는 여자 목소리. 영하 또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설마….”
“나야! 정욱이 누나…. 너, 너 혼자 있어?”
뻗은 손이 가차 없이 흔들렸다. 여기에… 여기에 정욱이 누나가 대체 왜?
“…누나가 왜 여기 있어요?”
“너는 왜 거기 있어?!”
“납치당해서…….”
하! 두꺼운 벽 너머로도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정확하게 귀에 꽂혔다. 이윽고 그녀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 자식 좆같아서 내가 잡아 처넣으려고 며칠간 연기했던 거야. 아무튼 서민석이 요 며칠 계속 여길 오길래 나도 잠복하고 있었거든. 기껏해야 마약 파티 할 줄 알고 카메라 준비했는데 납치라니…. 너 혹시 약했어?”
시커먼 어둠 안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희망이 영하의 발목을 감쌌다.
“안 했어요. 그냥, 집에 가는데 갑자기…….”
“그 새끼도 진짜 갈 데까지 가는구나. 서민석 방금 뉴스 뜬 거 봤, 아, 못 봤겠네. 걔 그냥 끝났어. 살인 사주해서.”
그런 말에도 안도나 즐거움 같은 기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서민석은 분명 가만히 넘어갈 리 없다. 어떻게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놈이었다.
불안한 상상만 하던 영하가 이내 고개를 흔들고는 애타게 목소리를 냈다.
“누나, 누나 저 갇혔어요. 도와주세요. 아빠한테 전화라도….”
“구해 주러 오는 걸 기다리다간 그 전에 서민석 오겠다.”
“그럼…….”
일단은 벗어나는 것이 최우선이다. 정신이 없어 그녀에게 세계를 아빠라고 불렀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상체를 겨우 일으켰다. 헐떡이는 배에 상처와 멍이 빼곡하게 물들어 있었다.
“잠깐만. 너 묶였어?”
“네, 네. 끈, 노끈으로.”
“다행이다. 나한테 칼 있거든? 잠깐만 이게 문구용 칼이라서 칼날만 빼면 들어갈 것 같기도 한데.”
영하가 갇힌 곳은 오래된 별장이었다. 피톤치드니 황토니 유행할 때 바짝 인기를 끈 통나무집으로 창문 또한 아파트 새시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허술했다. 그래서 나무로 덧대어 막아 놓은 걸까.
이해인이 벽 바깥에서 가느다란 칼심을 창문 아래쪽으로 조심스레 밀었다. 중간에 철커덕- 하고 막히던 칼심이 어떻게든 밀어 넣으니 기어코 창틀을 넘어 실내로 툭 떨어졌다.
그 자그마한 소리에도 영하가 벌벌 떨며 어깨를 퉁겼다. 총을 본 이후로는 떨림을 조절하지 못했다. 탄환이 자신과 세계의 이마를 뚫고 나간다 생각하면 당장 눈앞이 캄캄하게 막힌다.
“어디로 떨어졌어? 창문에 바짝 붙어 봐. 집 안에 CCTV 있어?”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등 뒤로 묶인 손을 움직여 바닥을 더듬었다. 손안의 반경이 지나치게 좁아 발목에 힘을 주어 조금씩 옆으로 이동해야 했다.
“모르겠어요. 어두워서 안 보여요.”
“몰카 아닌 이상 CCTV면 빨간불 들어와. 확인해 봐.”
빨간불……. 이를 악물어 고통을 견뎌 내고 몸을 움직였다. 시야 그 어디에도 붉은 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사이 바닥을 샅샅이 헤집던 손가락에 따끔한 고통이 아로새겨졌다.
“아!”
검지가 베였다. 입술을 질끈 말아 다물고 헐떡였다. 몸을 더 뒤로 빼고, 다치지 않은 반대편 손가락을 천천히 신중하게 더듬는다. 나무 바닥의 결을 느끼며 바닥을 문지르는 순간, 손끝에 칼날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읏.”
“찾았어?”
“네. 네. 하… 찾았어요.”
겨우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곧바로 가쁜 호흡을 뱉으며 칼을 세웠다. 손목이 완전히 꺾여 불안정한 자세였다. 그러나 손목에 칭칭 묶인 노끈을 자르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엄지와 검지에 안간힘을 주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하아, 하…….”
놓치면 안 돼.
한번 놓치면 칼을 다시 찾는 데에 체력과 시간을 소비한다. 체력은 둘째 치고 어젯밤 사라졌던 서민석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서민석이 고발로 인해 몸이 묶여 있더라도 다른 사람을 시킬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영하를 납치한 남자처럼.
“빨리… 빨리…….”
신중히 작업해야 한다는 건 알아도 마음이 급했다. 다시 서민석과 마주한다면 기필코 그가 총을 쏴 버릴 것 같다.
“빨리이…!”
멍이 든 두 무릎을 부딪치며 노끈을 칼날로 긁었다. 여러 겹으로 둘러싸 아무리 긁고 잘라도 쉽게 손이 풀려나지 않았다. 속이 탄다. 타다 못해 잿더미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잘 되고 있어?”
이해인이 물었다. 도대체 저 누나는 어쩌려고 서민석을 추적하다 여기까지 잠입한 걸까.
겁을 상실한 태도에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영하라면 꿈도 못 꿨을 일이다. 기자들은 다 저렇게 무모하고 막무가내인가. 아니면 꿈과 목표라는 게 두려움을 모두 이겨 내는 걸까.
“안 풀려? 그냥 내가 전화할까?”
“잠깐만요. 잠… 아!”
“왜?”
됐다. 같은 부분을 계속해서 잘라 내던 칼날이 잔뜩 해진 노끈을 완전히 끊어내며 영하의 손목에 생채기를 내고 바닥에 떨어졌다. 겨우 두 손이 자유였다.
“풀었어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영하는 나머지 노끈도 풀었다. 얼른 벽을 잡고 일어서는 순간, 발목에서 오는 미칠 듯한 통증으로 그대로 고꾸라졌다.
“무슨 일이야?!”
퍼억- 하고 넘어지는 소리에 이해인이 벽을 쾅쾅 두드렸다. 그 진동이 자신의 뇌까지 옮겨 타는 감각이었다. 발목이 부서졌는지, 두 다리마저 자유가 됐으나 영하는 걸을 수 없었다.
엄마가 사랑하는 발레가 미웠고, 어쩔 수 없이 기대에 맞춰 발레를 할 뿐이라 여겼으나 발목이 부러졌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영하는 다시금 열 살 먹은 최영하의 속내를 회고했다.
사실 영하는 엄마도, 발레도 사랑했다.
다만 사랑을 주기만 할 뿐 받지 못하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다.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결국 난 도피한 거야. 엄마도 발레도, 사랑받지 못하니까 내가 피해 버린 거나 다름없잖아.
발레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다시는 발끝을 세워 볼 수도 없는 다리가 될 수도 있다. 절망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다만, 영하는 공포에 질려 있을 새가 없었다.
지금의 최영하에겐 엄마와도 발레와도 견줄 수 없는 소중한 상대가 있었다. 그를 위해 죽고 싶다는 것 또한 도피였다. 영하는 반드시 살아 멀쩡하게 그를 만나야 한다.
세계는 자기 자신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영하를 사랑해 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제 최세계는 최영하 없이 완벽할 수 없는 남자였다.
“영하야?”
“괜찮아요!”
호기롭게 소리치며 벽을 붙들고 겨우 섰다. 다행히 왼쪽 발목은 오른쪽에 비해 상태가 양호했다.
현관은 쇠문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단단하게 생겼다. 심지어 연식이 있어 보이는 벽이나 장식들과 달리 아주 깨끗하다.
마치 이날을 위해 며칠 전 새로 달아놓은 것처럼…….
입술을 깨문 영하는 절뚝이며 창문 안쪽에서 가로막힌 합판을 흔들었다. 아무리 잡아당기고 몸을 실어도 꿈쩍이지 않고 단단히 붙어 있는 상태라 손쓸 도리가 없다고 느껴졌다.
원래의 컨디션이면 몰라도 지금은 온몸을 얻어맞아 만신창이였고, 발 하나로는 무게중심을 잡기 힘들다. 지쳐 더 힘을 빼기 전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손을 놓고 뒤돌아본 영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계단이었다. 영하가 충동적으로 외쳤다.
“누나, 2층도 창문 막혀 있어요?”
“아니. 2층엔 없어. 빨리 움직여! 언제 서민석이 올지 모른다고!”
영하도 동의했다.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망설임 없이 움직여 계단을 기어가듯 오른 영하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계단의 반 층을 올라가면 문이 있었고, 그 문이 잠겨 있었다.
철걱철걱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목을 죄는 쇠사슬 같았다. 폭행으로 인해 기력을 소진한 몸으로 문을 부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행위였다.
시끄럽게 뛰는 심장 위를 내리눌렀다.
집중하자. 뭔가 방법. 방법이 있어. 주방에 칼이라도 있다면 칼로……. 아니, 그걸론 안 돼.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빠른 시간 안에 할 수 있을 확률이…….
그 순간 불쑥 뇌리를 치고 가는 것이 있다.
서민석의 총.
영화에서처럼 잠금장치를 한 번에 부수진 못해도 경첩은 맞히겠지. 하다못해 그조차 실패한다 치더라도 탄환을 모두 소모하면 총알에 맞고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생각을 마치고 곧장 아래로 내려가 서랍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다. 어젯밤 서민석이 열쇠로 잠그고 갔기 때문이었다.
“좀! 열리라고…!”
악을 쓰며 온몸에 힘을 실어 서랍을 당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진다. 발목의 으스러진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작은 서랍을 세게 당겼다. 뒤로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바로잡은 동시에 서랍이 덜컹이며 열렸다.
서민석은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안달 난 녀석이다. 만약 이 총이 검찰이나 경찰의 손에 들어간다면, 영하의 납치 사실을 위한 증거가 아니라 다른 범죄에 연루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주의가 필요했다.
영하는 바로 티셔츠를 벗어 두 손으로 총을 감싸 들었다. 생각보다 묵직하고 느낌이 사납다.
매스컴으로 접한 총과 다르게 생겨 어디를 당겨 잠금을 풀어야 할지도 막막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영하는 무작정 앉아 해머 자리에 존재하는 것을 내리곤 부들거리는 팔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경첩을 저격했다.
팔이 벌벌 떨리는 것을 저지하려 일부러 앉아 무릎 위에 팔을 올리고 입술을 굳게 다물며,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연속으로 두 발의 총성이 크게 울렸다. 밖에 선 이해인이 무슨 일이냐며 비명을 내질렀다. 세 번째부터는 아무리 당겨도 총이 헛돌고 있다. 탄환은 단 두 개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코앞에서 쐈으니 두 방 모두 경첩을 부수고 회전하여 문 아래가 너덜너덜해졌다.
날아온 나무 파편과 잔해로 벗은 몸이 엉망진창이었으나 너덜거리는 문짝을 흔들어 보자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부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엉거주춤 일어났다.
다리가 벌벌 떨리고 현기증처럼 눈앞이 어지럽다. 그 긴급한 와중에도 영하는 총을 제자리에 가져다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엉금엉금 기어 총을 원래 상태로 복귀시켰다.
어깨가 부서질 듯 문을 쳐 대어 겨우 2층으로 진입했다. 이어진 복도에는 영하 한 몸 충분히 넘길 만한 커다란 창이 있었다.
“…괜찮아. 안 죽어.”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아래는 잔디밭이었다. 바로 밑에 난간이 있긴 했으나 이 몸 상태로 저걸 붙잡고 내려갈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질 않았다.
지친 눈동자가 아래를 훑었다. 고개를 조금 들어 보면, 시야에는 흐린 하늘 아래 온통 우거진 나무. 먹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녹음이었다. 물끄러미 보던 영하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는 못 걸어도 죽는 것보단 나아.”
반드시 돌아가서 그를 만나야 했다.
*
서민석은 동이 트기 직전 출발했다. 새벽 5시경이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세계는 전신이 저미는 고통 속에 차에 올라탔다.
서민석의 차량과는 거리를 두고 운전하던 도중이었다. 서수민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응답했다.
“뭡니까.”
-민석이 뭔가 이상하던데, 무슨 짓 또 저질렀나요?
“내 아들을 납치했어요. 당신 동생이.”
서수민의 잘못은 없었으나 같은 핏줄이라 짜증스러움을 어찌할 수 없다. 세계의 분노 섞인 음성에 침묵하던 서수민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대답했다.
-혹시 민석이 뒤쫓고 있나요?
“예.”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보세요. 포천 쪽으로 가고 있다면 짐작 가는 곳이 하나 있어요. 저희 별장이요….
별장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머뭇대며 줄어들었다. 더 길게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말하는 별장이 어디일지 짐작이 갔다. 그가 이를 악물며 “주소 문자로 보내 놔요. 급하니 끊습니다.” 대답하곤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시켰다.
일이 벌어지는 별장은 그녀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살해당하고, 아들에 의해 시체가 훼손당한 곳이었다. 그런 꺼림칙한 공간에 영하를 두다니.
서수민이 알려 준 주소 덕분에 서민석보다 먼저 도착한 팀 쪽에서 연락이 왔다. 별장 안이 비어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이야기에 기뻐해야 할지 괴로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오히려 패닉에 가까웠다.
만약 서민석이 눈치채고 먼저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저 자식을 잡아 고문한다고 그 위치를 실토할까?
자칫 잘못하다 서민석이 죽어 버린다면, 만약 영하가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리자 끝도 없는 저편에 자의 없이 온몸이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절망감이 손끝과 발끝까지 가득 차올랐다.
-서민석이 별장을 나와 차에 올라탔습니다. 손에 권총이 들려 있습니다. 상무님 조심하십시오.
“들키지 않게 뒤따라요.”
총을 지니고 있다는 소리를 듣자 어지럽던 정신이 찬물에 얻어맞은 것처럼 불시에 되돌아왔다.
서민석이 가진 실탄은 자신이 계획한 일이었다. 서민석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영하의 목숨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는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자제력을 잃은 심장의 격동을 느끼며 잠시 멈춘 차에 시동을 걸어 출발했다. 반드시 서민석보다 먼저 영하를 만나야 한다. 결의에 찬 눈길이 비껴간다. 곧바로 시동을 건 그가 거칠게 핸들을 돌렸다.
운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내비게이션 화면에 발신자가 모호한 번호가 떠올랐다. 그의 연락처에 없는 번호였다.
그러나 그 열한 개의 번호를 눈에 담는 찰나, 최세계는 귀를 잡아먹을 듯이 울리는 심장 소리와 세상 모든 것을 붙잡으며 애타는 자신의 가슴을 느꼈다.
두근, 두근. 혈류가 도는 심박 소리와 함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빠…!
끼이이이익.
피부를 찌릿하게 만드는 영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도로에 바퀴의 궤적을 그리며 차가 그리며 멈춰 섰다.
안전벨트에 매인 몸이 크게 흔들렸고, 세계는 정신없는 사이에도 영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빠! 나, 나…….
“너 어디야. 어디, 지금 어디야.”
당황해 더듬대며 말을 뱉었다. 이 순간 영하가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 현실인지 몽롱할 지경이었다. 영하가 곧장 대답했다. 울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려 했으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탈출했어. 탈출하고 나오는데, 휴대폰이 신호가 안 잡혀서, 그래서 바로 전화 못 했어.
탈출했다. 그 말 한마디에 전신의 긴장이 풀렸다. 간신히 핸들을 움켜쥔 남자가 손등 위에 이마를 대곤 연신 감격에 겨운 숨을 터뜨렸다.
“최영하…. 나를 이렇게까지 겁내게 만드는 건 너밖에 없어.”
-난 괜찮아……. 많이 안 다쳤어.
“알았어. 일단… 위치, 위치부터 확인해. 사람 보내서 데리러 갈 거니까 자꾸 움직이지 말고 제자리에 있어.”
-아빠는?
사람을 보낸다니 조금 시무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서운한 마음은 알지만 최세계에겐 아직 남은 업무가 있었다. 드디어 이 지지부진하고 같잖은 복수의 종결을 맺을 순간이었다.
서슬 퍼런 표정으로 핏발 선 눈을 부릅뜬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어 아들을 달랬다.
“아빠는 할 일 있어. 걱정하지 말고 주소 확인해서 불러.”
-위험한 짓 하는 거 아니지?
“걱정 마.”
-그냥, 가지 말고 나한테 오면 안 될까? 경찰한테 맡기면 되잖아…….
영하는 다시금 두려움을 느끼는지 숨을 크게 뱉곤 했다. 몹시 떨고 있을 것이 분명해 세계도 조금 갈등했지만, 그래도 할 일을 해야 한다. 이번 일을 확실히 마무리해야 더는 영하에게 위협이 될 일이 없다.
“곧 마무리하고 갈게. 걱정하지 마.”
-다치면 안 돼.
“안 다칠 거야. 괜찮아.”
말을 마친 세계가 곧장 속력을 높였다. 2차로 따라붙는 팀 쪽에서 영하를 발견했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비로소 안정이 찾아왔다. 오롯이 서민석을 죽여 버릴 마음가짐이 되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날은 여전히 흐릿했다.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없는 하늘이었다. 도시에서 벗어난 시골길. 근처에 이렇다 할 편의 시설이 전혀 없어 드문드문 자리 잡은 공장 외에는 사람의 발이 닿은 흔적이 없는 곳이었다.
카메라도 없는 곳이지.
“본인이 어마어마한 권력이라도 쥔 줄 알고 기어오르는데 위치를 알려 줘야지. 이 나라 권력은 결국 돈에서 나온다는 걸.”
결국에 세상은 법이 아닌 돈의 논리로 돌아간다.
그것이 세계가 법조인의 삶을 포기한 이유였다.
혼잣말을 지껄이는 동시에 앞쪽에서 서민석의 차가 눈에 들어온다. 생각은 짧았다. 흰색 차의 뒤꽁무니를 보는 순간, 최세계는 감당하기 힘든 폭력성이 치밀어 올랐다.
액셀을 지그시 밟았다. 가속의 힘을 버티기 위해 단단하게 허리에 힘을 세웠다. 계기판의 화살표가 서서히 오른쪽으로 치우쳤고 내비게이션의 숫자가 100을 넘는 순간부터는 빨간색으로 요란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무시하고 서민석의 차와 거리를 좁혔다. 두 차체가 손바닥 하나를 두고 맞붙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킨 직진 경로 끝에는 가파른 커브길이었다.
운전석의 창문을 내려 서민석의 차와 정면을 번갈아 보며 세계가 핸들을 강하게 움켜쥐곤 속력을 유지했다.
“이 미친 새끼가!”
서민석이 새된 음성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곳은 산등성이를 깎아 낸 곳이며 가드레일 너머는 가뭄으로 말라붙은 강가가 존재했다. 조금만 더 핸들을 움직여 붙였다간 둘 다 죽을 목숨이었다. 그러나 최세계는 목숨이 두 개인 사람처럼 차체를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붙였다.
마침내 두 차량이 부딪치기 일보 직전, 내비게이션에서 100m 앞 커브길을 안내하는 동시에, 최세계가 탄 SUV가 서민석의 벤츠 후미를 끼이이이익- 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종잇장처럼 얄따란 스침에도 차체는 큰 충격을 받아 덜컹! 하고 왼쪽이 공중에 들리며 기울기 시작했다.
“젠장할!”
욕설을 뱉는 사이 오른쪽 바퀴 두 짝으로 나아가던 차가 굉음을 내며 다시 가라앉았다.
“하. 씨발…….”
가진 차 중 가장 묵직한 놈을 고른 보람이 있다. 핏발이 선 눈으로 다시금 저급한 욕을 뱉어 내곤 목울대를 크게 삼켰다.
그사이 사이드미러를 통해 서민석이 탄 차가 속도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다.
세계는 이를 악물며 브레이크를 밟고 눈을 크게 떴다. 커브길이 코앞이다. 지금부터는 운에 맡겨야 했다. 핸들을 움켜쥐었다.
콰아아앙―!
회전하던 서민석의 차량이 가드레일을 버텨 내지 못하고 굉음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동시에 세계의 차 또한 마찰열과 타이어의 기괴한 소리를 길게 내다 겨우 멈췄다.
“크윽……!”
급정거하여 몸이 쏠리고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세차게 눈살을 찌푸린 최세계는 시야를 가리던 시커먼 흙먼지가 가라앉은 후에야 숨을 크게 내뱉었다.
입 안을 짓씹어 비릿한 쇠 맛이 나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닥친 풍경을 보며 그가 허탈하게 숨을 뱉어 냈다.
“하아… 하…. 죽었다 깨어나도 카레이서는 못 하겠는데.”
고개를 들어 올리자 바로 앞이 바위를 드러내고 있는 산이었다. 산에다 정면으로 차를 처박는 일을 가까스로 모면한 것이다. 스릴을 즐기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이 정도는 무리다. 두 번 겪고 싶진 않았다.
“역시 돈 쓴 보람이 있네.”
심장이 요동쳤다. 가쁜 숨을 격하게 몰아쉬곤 비틀대며 차 문을 열어 걸어 나왔다. 관자놀이에 흐른 땀을 닦아 낸 세계는 조수석에 던져둔 장갑과 성냥을 마저 챙겨 들었다.
세계가 아래로 내려오자, 이미 서민석의 뒤를 쫓고 있던 1팀이 보닛이 완전히 박살 난 차 속에서 서민석을 꺼내고 있었다. 머리를 부딪쳤는지 이마 위가 온통 피투성이인 꼴이었다.
그 처참한 몰골을 보니 몸 상태는 난장판이라도 기분이 산뜻하게 가벼워짐을 느꼈다.
장갑을 손에 끼며 담 위를 올려다보자 자신이 타고 온 차가 출발해 나아간다. 이곳에는 카메라가 없으나 오는 길에는 찍혔을 테니 혹시 모를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서민석은 사고사로 위장될 예정이다.
마약으로 인한 환각 증세로 인해 운전 중 헛것을 보고 핸들을 돌리다 강가로 추락. 그리고 엔진이 폭발해 화재로 사망한다. 주제를 모르고 지나치게 기어오른 자의 결말이었다.
세계가 찬찬히 미소 지었다.
“비가 오니 연기는 안 나겠네. 이제 보니 날씨마저 날 돕는 거야.”
서민석의 몸뚱이가 철퍼덕,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 밖으로 꺼낸 남자들은 이윽고 기름이 가득 든 말통을 가져와 차 위로 뿌리기 시작했다.
“대신 불도 안 붙겠지. 그럼 네가 완전히 잿더미가 될 때까지, 불을 붙이고 또 붙일 거야.”
지친 서민석이 초점 없는 눈동자로 그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내 “하, 흐으, 흐…….” 하고 울음 같은 조소를 흘렸다.
녀석이 힘겹게 엎드린 상체를 드는 순간, 처참한 몰골을 한 서민석의 손에는 총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총구가 최세계의 머리를 향해 겨누어져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세계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하…. 이 정도 역경은 버텨 내야 이깟 지저분한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거지.
불길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약해 빠진 시맥과 비늘로 이루어진 한 겹의 날개가 타들어 가 먼지가 되더라도 그는 영하를 사랑했다.
이성과 판단력을 좀먹으면서까지 포기할 수 없게 만들며 지극히 소모적이고 위험한 감정은 복수뿐만이 아니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그 파괴적인 사랑으로 인해 그는 신념을 부쉈다.
가끔은 법의 체계를 벗어나는 일도 생겨 줘야겠지.
총이 드러나자 기름을 붓던 남자들의 움직임이 돌연 멈췄다. 휘발유 범벅을 한 상황에 총을 쏘다간 불길이 튀어 모두 사망할 수도 있었음에도 서민석은 거침없었다.
서민석이 핏물로 흐려진 눈을 번득거리며 두 손으로 총을 고쳐 쥐었다. 녀석의 뒤쪽, 기름통을 든 남자가 세계에게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냈다. 총을 쏘기 전에 처리해 보겠다는 의미였으나 세계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씨발 새끼…!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널 죽여, 죽여 버릴 거야…….”
쇳소리를 뱉은 서민석이 몸부림치듯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방아쇠를 누르는 그 순간까지도 유지하던 미소가 진득해졌다. 당황한 녀석이 다시 한번 방아쇠를 당겼다. 마찬가지였다. 철커덕. 빈 소리만 날 뿐이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한 번 더 총을 쏘기 직전, 뒤쪽의 남자가 방심한 서민석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 순간이었다.
타아앙-!
방향을 잃은 손이 하늘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폭죽처럼 하늘을 향해 솟은 실탄이 잠시간의 부유 끝에 달아오른 몸체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서민석과 똑같은 신세네.
“안타깝게 됐어. 연달아 쐈으면 나를 죽였을 텐데.”
즐거운 목소리로 말하며 등이 짓밟힌 서민석에게 다가갔다. 그는 빗물 구덩이 위에서 꿈틀대는 지렁이 신세였다.
그러니 적당히 했어야지. 꼭대기를 모르고 까불어 대니 이 꼴이 나는 거지.
빗물에 젖어 발아래가 푹신하다. 천천히 걸어 다가간 세계가 그 앞에 긴 다리를 접고 고개를 기울였다. 서민석의 죽기 전 그 처참한 몰골을 더 또렷이 눈에 담기 위함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내린 서리가 바짝 말랐다. 입가와 턱이 단단히 굳었다. 주먹을 세게 그러쥔 남자가 이내 깊고 더운 한숨을 뱉어내곤 흐트러진 머리칼을 단정히 넘겼다.
“나도 법 배운 인간이라. 웬만하면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짙은 미소 위로 서슬 퍼런 기운이 감돌았다. 세계가 속삭이듯 나직하게 지껄였다. 목울대가 웃음소리와 함께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너는 그것도 아까운 놈이야.”
“날 죽여봤자 네가 더러운 놈인 건, 바뀌지 않아. 네 아들도…….”
“대단한 약점이라도 잡았다고 생각했나 본데. 안타까워. 아마 지금쯤이면 수사에 착수했을 거야. 덤프트럭을 운전했던 남자는 네가 시켰다고 자백하겠지. 네가 그자에게 전화한 날, 녹음 해 뒀거든.”
“…뭐?”
서민석이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 얼빠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슬슬 지루해졌다. 속 시커먼 새끼와 대화할 시간을 아끼고 서둘러 영하를 보러 가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었다.
세계가 턱짓하곤 천천히 물러섰다. 명료하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들이 얼마 남지 않은 휘발유를 쏟아부은 후, 말통 따위를 챙기며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서민석이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입을 크게 벌려 절규와 발악을 했다. 얼굴과 목에 흙과 피가 범벅이 되어 뻗은 사지를 버둥거렸다.
너무 반응이 느린데.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내 드는 동시에, 서민석의 몸이 강제로 들려 차 안으로 집어 던져졌다.
“놔! 문 열어! 열라고! 최세계 이 씹새끼가!”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탈출구가 막혔다. 이윽고 시원하게 미소지은 최세계의 손에 의해 꽃 하나가 피어났다.
새빨간 불이 붙은 성냥 하나가 한여름 밤의 축제를 밝히는 불꽃처럼, 창문이 박살 난 뒷좌석으로 던져졌다.
*
“속상해.”
병원에 입원해 환자 신세인 영하가 깁스한 다리를 멍하니 응시하며 투덜거렸다. 2층에서 뛰어내린 최영하는 무릎 아래를 몽땅 깁스한 처지였다.
난생처음으로 휠체어도 타 봤다. 양쪽 다 깁스했으니 목발로 걸을 수도 없었다. 서민석이 뼈를 부술 작정으로 밟은 데다 2층에서 떨어졌으니 양쪽 뼈에 금이 간 정도로 끝난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나마도 난간을 붙잡고 매달려 있다 이해인이 달려와 받아 줘서 망정이지, 운이 나빴다간…….
“다시는 발레 못 하겠지…….”
“…….”
영하는 칭칭 감아 둔 붕대 사이로 빼꼼 드러낸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세계의 오른손이 다가와 흰 발가락을 섬세하게 어루만졌다.
최세계도 멀쩡하진 못했다. 붕대만 없을 뿐, 그 역시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한 환자 신세임은 마찬가지였다. 분명 각자 1인실에 입원했는데 세계는 내내 자신의 방을 비우고 영하의 병실에서 자리를 지켰다.
“이 주만 더 깁스하면 되니까.”
“학교도 못 가고……. 휴학하기 싫었는데. 민재랑 같은 수업 들어야 하는데.”
“초등학생도 아니고 대학생이나 되어서 친구 없이 공부 못 해?”
“그래도 어색하니까 그렇지.”
하지만 정확한 일침이었다. 스무 살이나 먹고 혼자 밥 먹고 공부하는 게 불편하다고 투덜거리면 안 될 일이었다.
눈꺼풀을 손등으로 문지르곤 그 손을 그대로 뻗어 세계의 목덜미를 걱정 어린 시선을 담아 훑었다. 손가락 마디마디로 이 남자의 살갗과 체온을 함께 느꼈다.
모든 계절을 함께 보내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잠깐만 떨어져 있어도 그리웠다. 어쩌면 그를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한 별장 일 이후론 더욱 절실했다.
그는 서민석의 차가 뒤에서 박아버려 목을 다쳤다고 말했다. 서민석 개자식……. 이미 굴러떨어져 죽어 버렸어도 마음이 안 풀렸다.
감히 누굴 다치게 한 거야. 내 건데…….
아무리 속으로 욕을 뱉어내도 분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속이 상한 목소리가 축 처지듯 땅으로 꺼졌다.
양다리에 깁스를 하고도 세계가 다쳤다는 말에 어찌나 놀랐는지. 그날을 다시 돌이켜 보면 심장이 둘이 아니라 셋이라도 부족했다.
“이제 안 아파?”
“난 너랑 달리 튼튼하니까.”
“왜 나한텐 그 유전자를 안 줬어.”
“내 눈에 예뻐 보이려고 그랬나 보지.”
“되게 설득력 없네…….”
뼈마디가 가늘어서 좋았던 건 발레 하던 시기였다. 그 외엔 긴 바지를 입어도 앙상하게 드러나는 발목이 거슬렸다. 희미하게 미소짓는 남자의 얼굴을 퉁명스레 올려다본 영하는 “어휴.” 한숨을 쉬곤 이불 위를 괜히 두드렸다.
“잘게.”
“일어난 지 두 시간이야.”
“얼마 안 됐으니까 더 졸려. 잘래.”
이어 타박하는 말이 들려온다.
“하루 종일 먹고 자고.”
“걷지도 못하는데 그럼 뭘 해. 집도 아니고 병원이고.”
“집이면 뭐가 하고 싶은데.”
“몰라.”
“키스는 밤마다 해 주잖아. 그거 말고 다른 게 하고 싶어?”
“…….”
변태 같은 발언에는 무시로 일관하곤 그대로 모션 베드를 내렸다. 기대고 있던 자세였으니 영하는 따로 움직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잠들 자세로 만들어졌다. 이거, 사 달라고 할까. 집에 두고 싶은데.
일주일째 먹고 자고를 반복하다 보니 이제 잠드는 데엔 도가 텄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잠들려는 찰나, 영하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자신이 살아 있게 해 준 장본인이었다.
“아빠, 해인 누나는.”
“나중에.”
“응…….”
단호한 대답을 듣고선 꼬리가 말려 들어간다. 응. 나중에 이야기해야지. 아빠도 아빠 일로 바쁘니까……. 어련히 알아서 했을 것 같지만…….
“5분도 안 돼서 잠드네.”
잔다더니, 정말 금방 새근새근 숨소리를 든다. 세계는 순식간에 잠든 영하의 발간 뺨을 조심스레 쓸어 보곤 잠시 일어났다.
그는 입원할 만큼 몸 상태가 심각하진 않은데도 고집을 피워 입원했다. 순전히 같이 있고 싶은 욕망이었다.
“거래는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이제 더는 통화할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휴게실에서 연이어 다섯 통화를 끝마쳤다. 그중 하나는 서수민이었다. 서수민은 서민석을 죽이기보다는 교도소에 처넣길 원했으나 세계가 그런 세세한 사항까지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서민석이 불탄 현장 근처에서는 지문이 묻은 권총 한 자루와 근방에 떨어진 탄환 하나가 발견됐다. 조금만 추리해 보면 사건 현장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증거가 되었겠지만 관할 경찰서장과 검찰총장의 지시 아래 조용히 묻혔다.
서민석은 사고사로 처리됐고, 서민석의 별장에서 실탄을 쏜 흔적과 2층 창고에서 필로폰이 든 상자를 발견했다. 만약 영하가 탈출하지 못했거나 세계가 조금만 더 늦었다면 영하의 팔에도 주삿바늘이 놓였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서승섭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것까지 떠안고 몰락했다. 그의 이름 아래 붙은 수많은 범죄 행각 중에서 아내를 살해한 사건은 없었다. 서수민의 의지였다.
모든 게 일단락됐다. 이제 더는 서씨와 이씨, 두 집안과는 엮이지 말아야지.
세계가 병실 안으로 들어섰을 땐 영하 외에 다른 사람도 함께 존재했다. 맞은편 소파에 등을 꼿꼿이 세워 앉은 어머니였다.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정장 차림새와 깔끔하게 올린 머리. 책잡히기 싫고 완벽을 추구하는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느리게 내리꽂혔다.
“업무 보다 왔니.”
“네.”
테이블에 오른 보자기 포장을 흘끗 훑어보곤 고개만 까딱 숙여 인사한 세계는 어머니를 지나쳐 잠든 아들의 침대가에 앉았다. 불효자가 따로 없었다.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가 포개어둔 두 손을 고쳐 올리고는 물었다.
“영하 다리 다쳤다더니, 생각보다 심한가 보네. 양쪽 다리가 다 이래서 어쩌니.”
“다 제 탓이죠. 뼈에 금이 갔어요. 종아리뼈는 조각이 나서 맞추느라 의사가 애썼습니다.”
지금이야 지난 일이니 덤덤하게 말하고 있지만, 당시 최세계는 눈앞이 번쩍거리는 듯했다. 번개가 뇌 속으로 들이쳐 소란스럽게 요동쳤다. 겁 많은 녀석이 겪었을 일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감정을 정돈할 수가 없었다.
“그게 왜 네 탓이야……. 그나저나, 너야말로 무모하게 그게 무슨 짓이니. 오늘 너 혼내러 왔다. 내가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차분하던 목소리가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격양되며 언성이 높아졌다. 마른 목에 핏대를 세우던 그녀는 세상모르고 깊이 잠든 손자의 얼굴과 가슴팍을 차분히 두드려 주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선 습관처럼 손등 위를 매만졌다.
마른 입술을 연신 물었다 다물고는 끝내 보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미세하게 꺾었다.
다정한 아버지의 자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 없는 관계일 뿐이나 실상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은 사이였다.
불온한 자태를 마주하고도 기품 있고 고상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 여러 번 호흡한 후에야 안정된 목소리가 흘렀다.
“뭘 믿고 그렇게 달려들었어. 잘못했다간 그 작자가 아니라 네가 죽을 수도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니? 가만히 둬도 알아서 추락했을…….”
“가만히 못 둬요. 그렇게까지 해도 아직 분이 덜 풀렸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영하를 영영 못 찾길 바라셨겠지만.”
“네 어미를 뭘로 보고!”
그녀가 아들의 말을 곧바로 받아쳤다. 기껏 진정한 보람이 없는 셈이었다. 벌떡 일어난 몸을 내리곤 가슴을 쓸었다. 세계가 무심히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잘 알죠. 저를 위해 뭐든 하시는 분이시잖아요. 그러니까 승준이도 받아들이셨지.”
“…….”
“영하 받아들이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라곤 하지 않겠습니다. 적어도 손자로는 대해 주세요. 어머니가 조금만 마음 여시면, 저나 승준이보다 영하가 더 예쁘게 보일 겁니다.”
세계가 작게 덧붙였다.
“제 눈에 이렇게 예쁜데. 어머니도 그러실 거예요.”
실제로 영하를 내려다보는 눈길에는 얼어붙은 한겨울의 풀뿌리마저 녹일 듯한 따스함이 있었다. 어른이 되고부터는 시종일관 무뚝뚝하거나 비아냥대기나 하던 최세계에게도 그런 면이 있었다. 모든 걸 내어주고 단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느끼는 의존적인 한켠이.
다만…….
“꼭 영하여야 하니.”
“네.”
“너는, 내 마음 모른다. 네가 이런 짓까지 벌이는데도 못 버리는 어미 마음 몰라.”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 또한 바뀔 일 없을 겁니다.”
“…….”
“그러니 어머니가 받아들이세요. 저를 생각하신다면.”
아주 오랫동안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긴 시간 동안 체념과 고통, 찌를 듯한 수치심이 늙은 여자의 몸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었다.
김수림에게 아들은 위안이었고, 어찌 보면 이 결혼으로 얻은 트로피이기도 했다. 비참한 결혼을 한 게 아니라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실패한 결혼이었다. 남편은 자신이 아니라 이윽고 아들에게까지 상처를 남겼으니.
제 아들과 상피 붙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등 돌리고 멀어지자니 최세계는 여전히 그녀의 자식이었다.
“……그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좁은 통로. 결국 통로의 끝으로 나온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그 부끄럽고 죄악스러운 감정 중, 아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모정이었다.
*
정원의 푸른 나무에 조금씩 노란 물이 들어가는 계절이 왔다. 공기가 선선했고 잘 꾸며진 정원을 빙빙 돌며 걷기 좋은 날씨였다. 영하는 다리를 질질 끌어 거실 창밖을 빤히 바라보다 등을 돌려 말했다.
“할머니 댁 가고 싶어.”
아차차. 혹여나 그가 오해할까 싶어 덧붙이니 무뚝뚝한 대꾸가 돌아왔다.
“승준이네 할머니 집.”
“거길 뭐 하러 다시 가. 무슨 좋은 기억 있다고.”
집으로 돌아오니 최영하는 영락없이 백수 신세였다. 한 달간은 요양한다는 셈 치고 푹 쉬었으니 좋았는데 두 달째부터는 좀이 쑤셨다.
납치된 기억으로 잠을 설친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해 아직까진 혼자 밖에 나가는 건 무서웠고, 또 누군가 뒤에서 칼을 들이밀까 봐 겁이 났다. 영하의 외출은 최세계가 있을 때만 가능했다.
그마저도 요즘은 갑갑하다. 집 안에 가만히 있기를 좋아하는 최영하가 집 밖에 나가고 싶어 미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랑 지냈던 건 좋았어. 진짜… 할머니 같아서.”
자리로 돌아온 영하는 소파 위에 다리를 쭉 뻗으며 말했다.
영하의 다리는 완전히 나았다. 뼈가 깨끗하게 붙었고 걷는 데에는 무리가 없긴 하나 오래 걷거나 운동을 하면 발목에서 아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원래 발목은 한 번만 다쳐도 고질병이다. 최영하는 고작 스무 살에 고질병을 얻었다.
그런데… 어쩐지 친할머니 흉을 보는 기분이라 눈치가 보였다. 친할머니는, 그의 어머니였으니까.
힐끗힐끗 눈치를 보아하니, 세계는 일자로 입술을 꾹 다물고 아들의 발목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긴 눈매가 나른하게 조금 감겨 있었다. 소파 등받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곤 잠시 생각에 잠긴 듯이 침묵한다. 영하가 보기엔, 조금만 더 건드리면 넘어올 기세로 보였다.
영하가 잔뜩 기대하는 눈초리로 슬금슬금 엉덩이를 옆으로 옮겼다. “응?” 하고 넌지시 재촉하자 그가 잔뜩 스트레스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젖혔다.
“안 돼. 내가 널 또 거길 보낼 거 같아?”
이미 예상한 답변이다. 그럴 줄 알고 영하도 미리 준비했다. 소파 뒤로 자리를 옮겨 그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살살 타이르기 시작했다.
“같이 가면 되잖아.”
“누구.”
“아빠랑.”
“…….”
“같이 가자. 응?”
어깨를 주무르며 애교를 부리는데도 최세계의 미간에는 금이 선명하게 간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결국 영하의 뜻대로 흘러갈 것 같으니 짜증이 나는 것이다.
최영하가 만면에 지어지는 미소를 참지 못하고 어깨를 주물거렸다. 나중에는 뒷덜미에 고개를 푹 박고 “응? 응?” 하니 최세계가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
“승준이도 같이 갈 걸 그랬나?”
“걘 다음에 보내.”
차에서 내려 캐리어를 질질 끌던 남자가 혼자 덧붙였다.
“따로. 걔 혼자만.”
역시나 혼자 말하고 혼자 듣는다. 영하는 짐을 온통 최세계에게 맡기고 먼저 씩씩하게 앞서 걷고 있었다. “가을에 오니까 딱 좋다. 여름엔 엄청 더웠는데.” 영하 또한 혼자 말하고 있다.
승준이네 할머니 집으로 올라오는 길 내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민 할머니들과 눈인사를 했다.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이고, 영하 왔네.” 그 이야기를 듣자 왜인지 고향이라는 것이 생긴 기분이었다.
한 달간 살아온 고향. 비록 안 좋은 일을 겪고 떠났지만, 그보다는 좋은 일이 훨씬 많았다. 영하도 어른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아이였다.
깜둥이와 자주 따 먹었던 오디나무를 건넌 영하는 고작 두 달 만에 바뀐 광경을 보고 발걸음을 멈춰 섰다. 담장도 새로 페인트를 칠한 건지 뽀얗게 변했고 녹이 슨 슬레이트 지붕은 벽돌 기와집으로 변했다.
“완전 대궐인데.”
“누가 돈 좀 썼나 보군.”
영하의 말에 잇따라 그가 말했다. 들어 보니 돈 쓴 사람이 누구인지 감이 온다. 하. 나 몰래 뒤에서 집 고쳐 줘 놓곤 뭘 가지 말래. 하여간 착하게 굴면 인생 손해 보는 줄 아는 남자다.
“대문도 새 거네.”
감탄하며 대문을 밀었다. 마치 영하가 들어오길 기다린 모양으로 부드럽게 열린 대문 안에선, 마침 마루에 앉아 말린 고추의 꼭지를 따던 할머니가 영하를 발견하자마자 고추를 떨어뜨리며 손뼉을 쳤다. 흔쾌히 반기는 태도였다.
“할머니, 저 왔어요!”
“우리 영하 왔네. 온다더니 그래. 점심 먹고 올 줄 알았다. 아버지도 같이 왔다며.”
“네. 아빠도 같이 왔어요.”
세계가 대문 앞에 서서 묵례하곤 허리를 한참 숙여 대문을 통과했다. 늘 그렇듯 무신경한 태도여도 눈가에 의외로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하긴, 저 남자야말로 이런 광경이 낯설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영하의 엉덩이를 툭툭 두들겼다. 벽에 걸린 농기구 따위를 보던 남자가 예리한 눈초리를 하고선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시선이 영하의 엉덩이에 붙은 손에 가 있었다.
“아버지랑 사이좋은데 왜 가출해서 속을 썩여.”
“저도 속 썩일 나이잖아요……. 다음에는 승준이랑 같이 올게요.”
그가 들으면 분명 안 된다고 할 테니 승준이랑 오겠다는 대목에선 목소리를 작게 낮춰 이야기했다.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어제 승준이도 전화 왔다는 말을 하시더니, 저녁 찬을 준비하시겠다며 주방으로 향하셨다.
할머니가 없으니 할 일이 없다. 그를 피해 이곳에 살 때도 그랬다. 일거리라곤 할머니 일을 도와 드리거나 깜둥이 산책뿐. 아, 산책 하니 할 일이 떠올랐다.
“산책 가자.”
영하는 세계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가을로 바뀌는 풍경을 함께 구경하고 싶다. 여름이 한창 무르익어 갈 때는 혼자 먼 곳을 응시하곤 했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었다.
대문을 넘고서는 손목의 옷깃을 잡은 손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가 피부끼리 맞닿았다. 누군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곧바로 자연스럽게 손깍지가 얽혀 들었다. 영하가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가볍게 내디뎠다.
이곳 보읍 마을은 아직 개발의 힘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다소 원시적이다 싶을 만큼 땅이 거칠었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는 잡초가 힘 있게 허리를 세워 발목까지 자라 있었다.
마른 발목을 스치는 나뭇잎이 간지러워 희미하게 웃으며 걸었다.
나란히 걸으면서도 오가는 말은 없었다. 내리막길로 접어들며 걸음 속도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 종종걸음을 하던 영하는 주변을 둘러보다 익숙한 도랑을 보곤 우뚝 발길을 멈추었다.
“여기.”
짧게 말하며 손을 풀고 길가의 끝으로 향한 영하가, 마침내 덥석 바닥에 앉는 행동을 목격한 세계가 이마를 잔뜩 구겼다. 잔소리가 시작됐다.
“뭐 하는 거야. 왜 흙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네 살배기의 지저분한 행동을 꾸짖는 어투였다. 영하가 맹랑하게 손짓했다.
“이리 와.”
“지저분해. 빨리 일어나.”
“3초 이상 앉아서 이미 끝났거든. 여기 와 봐.”
자라나는 풀들을 깔고 앉았는데 더럽긴 뭐가 더러워. 여기서는 다 이러고 산다. 영하는 다리에 개미가 올라타는 것도 겪은 사람이었다.
옆자리를 탕탕 두드렸다. “빨리이.” 말끝을 늘이며 투정을 부리니 그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곁에 다가와 앉았다. 영하처럼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지는 않았고, 무릎을 굽혔을 뿐이었다.
하여간 곱게 커 가지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눈썹 부근을 간지럽혔다. 그가 가만히 눈가를 좁히며 노랗게 익어 가는 벼를 보곤 영하에게로 턱을 기울였다. 눈길이 부딪치자마자 영하가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여기 앉아서 아빠 생각 자주 했었어.”
“또 청승 떨고 있었겠네.”
“청승 안 떨었어. 아빠 욕했어.”
“뭐?”
자기 생각을 했다고 하면, 감성적으로 받아쳐 줄 줄 알았는데 청승이라니. 내심 기대한 기분이 와장창 깨졌다. 영하가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이내 입술을 쭉 내밀었다. 많이 힘들었냐고 어깨를 안아 주길 바랐는데.
에이씨. 신경질적으로 잡초를 손으로 뽑았다. 손끝에 묻은 흙을 보고선 세계가 불편한 기색으로 한숨을 내뱉고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아예 안 보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린다.
“내가 이미 옛날부터 사랑하는 거 알면서 사랑한다 한마디에 그렇게 좋아하던 게 너무 바보 같잖아. 십 대도 아니고.”
투덜대며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삐친 마음에 속에도 없는 말을 했다.
영하는 그를 바보 같다 생각한 적 없고, 대신 끝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미리 말해 줄걸……. 뒤늦은 후회를 했다. 바보 같은 건 최영하였다. 지레 겁먹고.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상처 줬다.
철없이 굴고 풀이 죽어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 때였다. 어딜 건방지게 구느냐며 화를 낼 줄 알았던 세계가 나직이 대답했다.
“말 안 하면 모르지. 난 독심술사가 아니야. 그리고 이제 그 이야기는 됐어. 트라우마 생길 것 같으니까.”
사랑한다고 말한 다음 날 떠나 버린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최세계의 표정은 무미건조했고 목소리 또한 덤덤했다.
그다지 상처받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실은 이 남자가 최대한 섭섭한 감정을 억누르며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차분한 그의 눈빛과 코, 다문 턱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현재 영하의 안에는 작은 조바심과 미안함, 속상함과 그를 향해 커지는 사랑 따위가 뒤섞였다.
“내가 잘못했어….”
넌지시 팔을 만지며 말해도 대꾸가 없다. 삐쳤네. 어떻게 풀어 줄까 하며 두리번거리던 영하는 엉덩이 옆에 피어난 민들레를 꺾었다. 그리곤 곧바로 세계의 뺨에다 대고 민들레를 흔들었다. 뺨에서 훌훌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를 느끼곤 그가 눈살을 콱 찌푸렸다. 재미있다.
“트라우마 없어지게 매일 말해 줄까?”
“지키지도 않을 약속.”
“할 수 있어. 왜 못 해.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해 주면 되잖아.”
“나보다 먼저 일어난 후에 말해 봐. 그래야 신빙성이 생기니까.”
어른이 더 일찍 일어나는 게 당연하지. 원래 나이 들면 잠이 없어진다고 했다고.
줄기만 남은 민들레를 훅 도랑 아래로 던져 버렸다.
“사랑해.”
“그만하는 게 좋을 거야. 노인네들 다 구경하게 비포장도로 한복판에서 야외 섹스 하는 수가 있어.”
“진짜 뭔 분위기만 잡으면 변태 같은 소리….”
순수한 감정으로 사랑을 말했더니 돌아오는 이야기라곤 음담패설이다. 욱하니 열이 받은 영하가 홧김에 벌떡 일어나려다, 아차 했다. 발목이 아팠다.
“아악!”
중심을 잃고 몸이 기울어지는 걸 느낀 것은 순간이었다. 허공에 손을 뻗자 놀란 세계가 황급히 그 손을 잡았으나, 그도 단단히 중심 잡긴 어려운 자세였다.
결국에는 남자 둘끼리 뒤엉켜 얕은 도랑으로 떨어졌다. 고작해야 1m 남짓 되는 높이에 그마저도 잡초들이 잔뜩 자라 뒹굴뒹굴 굴러 봤자 허리에 멍 좀 드는 수준이었다. 다치지는 않았으나 옷이며 머리가 온통 꼴사납게 잡초와 물로 흠뻑 젖었다.
“하아.”
영하를 품에 잔뜩 끌어안고 등으로 떨어진 세계가 일어날 생각은 않고 하늘을 쳐다보며 깊게 숨을 내뱉었다. 연거푸 이어 한숨이 꺼질세라 흘렀다.
잡초 위에 앉지도 않으려 하던 남자가 지저분한 물에 엎어졌으니 고귀한 행세는 오늘로 끝이었다.
“하아. 내가 트라우마 생긴다고 했지.”
“어째 매번 그러네.”
도랑에 엎어진 신세였으나 저를 끌어안은 최세계 덕에 영하는 팔베개를 하고 누운 팔자 좋은 자세였다.
등 아래로 반질반질한 돌의 형태와 물이 지나가는 느낌이 싫어 이제 일어나야지. 하고 상체를 일으키려는 순간, 먼저 일어난 세계가 젖은 입술을 겹쳤다. 물먹은 머리카락이 내려와 영하의 이마를 간지럽히고 그보다 축축한 혀가 입술을 갈랐다. 그 간질간질한 감각이 어찌나 얄궂은지, 온몸이 떨려왔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런 데서 해…. 읏.”
“어쩌긴. 부자지간에 정이 깊구나. 생각하겠지.”
잠깐 떨어진 사이 가슴을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최세계가 목울대를 울리며 깊게 웃고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하루도 이상한 말을 안 하는 날이 없지. 도끼눈을 하고 노려보다가, 셔츠 깃을 훅 넘겨 그의 목을 아프도록 이로 깨물었다.
“윽.”
잘 뻗은 미간이 통증으로 일그러진다. 벌겋게 자국이 난 부위를 손으로 문지른 세계가 영하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셔츠로 안 가려지잖아. 이렇게 보이는 데에다가 자국을 내면…….”
“누가 물으면, 애인이 했다고 해.”
수줍음을 이겨 내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물 묻은 뺨 위로 붉은 잉크가 서서히 번져 가고 있었다.
세계의 두 눈이 자신에게 오롯이 닿아 있었다. 영하는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도 못했지만, 어쩐지 그 눈에 담긴 성마른 열기가 느껴지는 까닭에 길 위로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쁜 짓을 저지르다 들킨 학생처럼 심장이 초조하게 뛰었다.
세계는 대답 대신 영하의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천천히 떼어 냈다. 긴장으로 빠르게 뛰던 심박의 의미가 조금씩 물들어 변해 갔다.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