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6. 세계 (2)
“사과해. 사과하면 용서해 줄게.”
대답 대신 영하의 몸을 휘어잡아 침대 위로 내리눌렀다.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 치는 몸이 평소보다 오래 버티고 있었다. 눈가가 새빨갛도록 핏대를 세운 녀석이 세계의 손등 위로 손톱을 아프도록 박아 넣으며 말했다. 열을 내고 흥분해 잔뜩 호흡이 섞여 든 목소리였다.
“아빠도 나 아프면 속상하잖아. 아프게 한 거 후회하잖아…! 그러니까 이런 짓 그만하고 사과해.”
“속상해.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
결연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에 절망을 느낀 것이다.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다. 영하의 웃음이 사라진 것이 안타까우나 세계는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망치려 마음먹는다면 그는 정말로 미뤄 두었던 일들을 벌일 작정이었다.
덜덜 떨리는 턱을 감추려는 듯 입을 틀어막던 영하가 안간힘을 쓰며 외쳤다.
“모르겠고, 사과해! 빨리!”
가슴이 퍽 밀쳐졌다. 기운 없이 밀려난 남자의 어깨를 붙잡은 영하는 집요한 태도로 그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말이 요구와 종용이지, 결국에는 자신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남자를 용서해 주고자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누굴 닮은 건지, 미련하기 짝이 없는 꼴이었다.
저렇게 약해 빠져서. 싫은 말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용서해 주겠다고 하다니.
죽음조차 떼어 낼 수 없는 짙은 혈연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들은 겨울과 여름의 틈새와도 같았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용서하고 싶으니까 사과하라고! 잘못했다고 빌어!”
“아킬레스건을 끊고 싶었다고 했던 것도 진심이야. 네가 다신 도망가지 못하게 걷지 못했으면 좋겠어. 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해서 차라리 바보가 되길 원한다고. 이런 꼴을 당하고도 날 용서하고 싶어?”
“상관없어. 용서하든 안 하든 그건 내가 정하는 거야. 그러니까 잘못했다고 해!”
영하의 음성이 빨라졌다. 세계의 몸을 붙잡아 지탱해 상체를 일으킨 영하가 연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웅웅 울리는 진동 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마른 허벅지 사이로 분홍색 짧은 선 하나가 존재했다. 세계가 그것을 손으로 쥐며 대답했다.
“아니. 용서하지 마. 용서한다는 건 가슴에 사무친 흔적들을 잊어 없애겠다는 뜻이야.”
줄을 힘껏 잡아당기자 “흐윽…!” 신음과 함께 젖은 로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 증오하고 원망해. 평생 그렇게 네 마음에 둬. 네가 날 잊으려고 할 때마다 난 더 가혹하게 굴 거야.”
그는 이깟 로터가 되고 싶은 심정도 종종 들었다. 한순간도 빠져나오지 않은 채로 최영하의 몸 깊은 곳에 자신을 쑤셔 박고 싶었다.
어깨를 쥔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손등에 하얀 뼈 부위가 도드라졌다.
“읏.”
잠시 몸을 떨던 영하가 진동하는 로터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바닥으로 힘껏 집어 던졌다. 플라스틱이 무참하게 갈라져 나동그라진다. 세계가 멀거니 그것을 보는 찰나, 영하의 손이 그의 뺨을 내리쳤다.
“아빠를 때리다니. 이런 불효자가 있나.”
로터를 던질 때와 비하면 손에 온통 힘이 빠져 아프지도 않았다. 이렇게 약해서야…. 고개를 들어보니 그렇게 눈물이 많던 녀석이 메마른 뺨과 또렷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했다.
“왜 내 감정을 의심해? 내가 잊으려고 용서하려는 것 같아?”
의심하느냔 말에는 대답할 길이 요원했다. 실제로 최세계는 영하의 사랑을 의심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확신을 내릴 수 없었다. 둘 사이의 관계가 단지 더럽고 역겹기만 했다던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짓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나만 용서하고 싶은 게 아니라, 아빠도 나한테 용서받고 싶잖아. 왜 아닌 척해? 시간 끌지 말고 말해.”
어서!
다그치는 외침이 최세계의 머릿속에 섬광을 일으켰다. 가슴이 초조하게 뛰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닿기 전, 간지러운 음성으로 자신을 부르던 모습이 속속들이 떠올랐다.
‘사랑해.’
숨겨 둔 마음이 서서히 물 위로 부유하는 것을 느낀 세계가, 눈매를 좁히곤 자조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나라고 널 사랑하는 게 쉽기만 했을 것 같아?”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의 비난보다 네가 날 떠나는 게 더 무서워. 세상에서 제일 겁나는 걸 겪어 봤으니 이제 내 눈엔 보이는 게 없지.”
“…이럴까 봐 돌아오기 싫었던 거야. 아빠 옆에 있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달 만에 돌아오면 사랑하는 사람한테 상처만 주고 아무것도 못 이룬 게 되잖아. 그게 무서워서 그랬어.”
턱을 아프게 쥐던 손의 힘이 누그러진다. 구름이 달에 가려져 사물의 명암이 흐릿하고 모호한 하늘이었다. 고개를 아래로 꺼뜨린 남자가 한숨을 품은 나직한 어조로 용서를 구했다. 결국 자신은 영하를 이길 수 없다.
“잘못했어, 다시는… 다시는 날 떠나지 마.”
“용서해 줄게.”
마른 팔이 자신을 끌어안았다. 그제야 감춰 두고 묻어 놓은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나도 미안해, 아빠……. 보읍마을에서 했던 말. 다 거짓말이야. 내가 너무 겁쟁이라 그랬어….”
깃털처럼 사뿐사뿐한 손길이 그의 뺨을 쓸어내렸다. 창밖에 밤의 자락이 내려앉았다.
자신이 벌인 짓은 여전히 후회하지 않는다. 그가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영하는 어떻게든 자신을 위한 일이라 치부하며 도망쳤으리라.
다만 무수히 많은 일 중 단 하나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영하가 품은 감정을 의심한 것이다. 영하가 보여 준 애정은 그가 평생 느꼈던 것 중 가장 순도 높고 선명한 진심이었다.
*
화해한 다음 날은 조금 어색했다. 아침 9시에 눈을 떴는데, 아빠는 여전히 침대에 있었다. 내내 잠든 자신을 보고 있었는지 팔을 괸 채 옆으로 누운 모습이 휴가철의 나른함을 안은 듯 느긋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 주가 그의 생일이었다. 올해 생일은 특별하길 바랐는데, 특별은 무슨… 아마 그의 일생에 가장 최악의 생일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눈을 마주치고도 한참이나 말이 없어, 조금 입술을 우물거리다 이불을 목 위까지 끌어 올렸다.
“추워.”
“온도 올릴까.”
“응.”
에어컨 바람이 차갑다. 바로 누워 천장을 올려본 영하는 가슴 위를 문지르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매트 위를 슬금슬금 거미처럼 손가락으로 기듯이 움직였다. 최세계의 손이 있을 부근을 찾아 헤매고 있었는데, 영하가 찾아내기도 전에 먹잇감이 스스로 목을 내밀었다.
“……!”
손등 위로 그의 손이 닿아 꽉 쥐어진다. 얇은 이불 아래가 움직임으로 불룩해졌다. 손등에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윽고 영하는 그나 자신이나, 싸움도 냉전도 아닌 그 애매하고 괴로운 시간을 거치면서도 한순간도 반지를 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손가락 사이에 차가운 무언가가 존재했다.
눈꺼풀을 깜빡이며 머뭇댄 영하가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하곤 이야기했다.
“승준이 할머니가, 내 반지 보고 예쁘다고 하셨어.”
“…….”
“나랑 잘 어울린대. 누가 사 줬냐고 해서…….”
“응.”
“여자 친구가 사 줬다고 했어.”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달 만에 듣는 그의 웃음소리인지 까마득하다. 어쩐지 가슴이 벅차고 들뜨는 기분이 들어 자제하고자 아랫입술을 이로 꾹꾹 깨물었다. 깍지 낀 손가락이 영하의 반지 주변을 느리게 더듬었다.
“차라리 네가 사 준 거라고 했어야지.”
“그렇게까진 머리가 안 돌아갔어. 바보인가 봐.”
세계는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어색한 상황이 이어졌다. 아빠랑 이렇게 어색했던 거… 열네 살 이후로는 없었는데.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말한 의도는 어색해지자는 뜻이 아니었다. 민망스러운 상황을 극복하고자 영하는 질문 공세를 펼치기로 했다.
“왜 오늘 회사 안 가? 쉬는 날이야?”
“연차 냈어.”
“왜?”
“며칠 내내 혼자 있었으니까, 같이 있어 줘야지.”
함께해 주겠다고 대답하는 남자의 표정이 온화했다. 굳어 있거나 비아냥대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내 우울하던 감정에 푸르른 싹이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참지 못하고 팔을 뻗으며 그의 목덜미에 머리를 쿵- 박았다.
정말 바보가 틀림없다. 그런 수모를 겪고도 다정한 몇 마디에 이렇게 기뻐하다니…….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내리깔고 고민하던 영하가 눈동자만 굴려 위를 응시했다. 높다란 코와 움푹 파인 눈썹뼈 아래 그늘진 눈동자 또한 지그시 영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의 광대뼈와 이어지는 턱선을 매만지고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하나도 안 닮았어.”
“그래. 내가 더 잘생겼지.”
자아도취에 찌든 발언을 들으니 그제야 알고 있던 아빠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 났다. 다행이다. 일생에 겪을 일 없던 수모를 제게 안겨 주었더라도, 영하는 그를 사랑했다. 지난 6년여간 접으려고 발버둥 쳐도 접지 못한 감정이었다.
아침은 대충 먹었다. 아주머니가 어제 사 두신 요거트에 냉동 라즈베리를 왕창 넣고 갈았고, 그사이 세계는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셨다. 본인도 그다지 영양소 밸런스 좋은 식사를 하는 건 아니었으나, 물에 카페인 탄 게 무슨 식사라고 아침 대용으로 먹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여름에도 뜨겁게 김이 올라오는 아메리카노를 먹는 세계를 물끄러미 보던 영하는 자리를 옮겼다. 그가 불편해서가 아니라, 햇볕을 쬘 시간이었다.
외출할 길이 요원하니 집에서 햇볕을 쬐어야 한다. 본가만큼은 아니라도 이 한 몸 온전히 누울 수 있는 근사한 정원이 존재했으나 한여름이었다. 이른 새벽이라도 땀방울이 맺히는 날씨에 밖에 있고 싶지 않았다.
거실 바닥 위, 마름모 모양의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스무디를 느리게 떠먹었다. 속눈썹 그림자가 길게 눈 아래로 이어지고, 몽롱한 시선이 창밖 어디엔가 닿아 있었다.
단지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었는데, 남들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다가온 세계가 옆에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
“나가고 싶어?”
“응?”
“외출하고 싶냐고.”
“아니… 뭐….”
그렇게 물으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나가고 싶냐면, 아니었다. 원래도 영하는 외출을 기꺼워하는 편은 아니었고, 사흘 정도는 집 밖에 나가지 않아도 답답함을 못 느끼는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은 사흘이 아니라 열흘이었지만.
스푼을 입에 물고 고민하고 있으니, 세계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알겠다며 짧게 마무리했다.
“저녁은 나가서 먹자.”
“…나가도 돼?”
“걱정 마. 너 유치장 들어갈 일은 안 만드니까.”
“아니. 정말? 진심이야?”
“진심이니까 그렇게 알아.”
하지만 분명 큰일인데…….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게 가능한가. 수사 종결이…….
괜한 걱정에 텅 비어 있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턱 아래를 손으로 쿡쿡 찌르던 영하가 갑작스레 스쳐 가는 기억에 벌떡 고개를 들었다. 눈이 잔뜩 확장되어 있었다.
“사망 신고 할 거야?”
“안 해.”
“장난치는 거 같은데…….”
도통 믿을 수가 없다. 영하가 경계 어린 눈길로 그의 표정과 목 근육을 샅샅이 훑어보던 도중이었다. 식당 테이블에 올려 둔 세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일어난 그가 휴대폰을 찾아 통화를 끝맺은 뒤, 얼마 가지 않아 방문객이 찾아왔다.
“왔네.”
“뭐가 와?”
“최영하가 좋아하는 거.”
뜬금없는 대답에 영문을 몰라 귓불을 만지작댔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데? 당장 물어도 선뜻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는 상황에…….
최영하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거실 창문에 코를 박고 바깥을 지켜보고 있으니 인부들이 뭘 나르는지 훤히 보였다.
처음에는 옅은 노란색의 길고 거대한 것을 끙끙대며 들고 오시길래, 대체 저게 뭔가 싶어 나중에는 창문을 열고 머리만 빼꼼 내밀어 관찰했다. 마지막으로 파란색 카트를 타고 등장한 것을 풀어 놓자, 비로소 그가 주문한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정원의 파라솔과 테이블, 야외 그릴.
세계는 테이블 앞에 서서 파라솔 사용법을 듣고 있었다. 영하의 시선이 그의 손을 따라간다. 그가 파라솔 아래의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커다란 파라솔이 서서히 위로 솟으며 그늘막을 만들어 냈다.
익숙하게 떠오르는 물건이었다. 처음 아빠의 집에 도착해 영하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던 공간.
햇빛 아래 눈동자가 축축이 젖어 들었다. 시골로 향하며 너무 많이 울어 눈물이 말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최영하는 울보였다. 더 울지 않으려 허벅지를 꼬집고 애써 참아 냈다.
바보는 내가 아니라 저 인간이네.
가구가 하루 이틀 만에 오는 것도 아니고, 못해도 일주일 전에 주문했을 텐데… 이럴 거면서 왜 자꾸 못되게 굴어. 어차피 사과하라고 화내지 않았어도, 아마 한 달도 못 가 스스로 꼬리를 내릴 남자였다.
파라솔과 테이블은 저 좋으라고 한 행동인데 공연히 화가 나서 가슴 위를 문질렀다.
갑갑한 숨결을 여러 번 뱉어 내고 창문을 꽉 닫은 시점, 세계가 인부들을 내보내고 거실로 들어섰다. 잠깐 정원에만 나갔다 들어왔음에도 여름의 꼬리를 길게 달고 온 모습이었다.
멀쩡한 소파를 두고 바닥에 앉아 몸을 웅크린 영하가 물었다.
“어떻게 알고 저걸 샀어? 본가에는 이미 낡아서 버리고 없잖아.”
“시간만 나면 그 앞에 가서 쳐다보고 오는데, 왜 모르겠어.”
만국기처럼 조명이 늘어진 아래 야외 테이블. 그 공간을 눈에 담으면 어린 영하가 꿈에 그리던 가족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사이좋은 부모님과 다정한 할머니 할아버지, 쾌활한 동생. 그 사이에 피어오르는 훈연 연기. 어차피 이제는 모두 꿈속의 장면에 불과해도.
어느새 다가온 세계가 영하의 손목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영하가 순순히 일어나 소파에 엉덩이를 내리곤 이야기했다.
“화목한 가정이 갖고 싶었거든. 왜, TV에서 많이 나오잖아. 드라마에서는… 다 같이 고기 구워 먹고.”
“아직도 그런 걸 원해?”
“…지금은… 아니. 필요 없어.”
지금은 신이 나타나 그 꿈을 이루어 준다고 해도 사양이다. 영하는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옆자리에 앉은 그가 타이르듯 나직이 속삭였다.
“고기야 둘이서 구워 먹으면 되지.”
“응. 지금은 더워서, 가을 되면.”
“그리고 깻잎 대신 네 거대한 바질잎으로 쌈 싸 먹으면 되겠네.”
“아, 깜빡하고 있었다.”
나 허브 키우고 있었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
“깔끔하게 해결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설마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했다고 거짓말할까. 정 궁금하면 경찰서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보든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무신경한 사람이다. 외출하는 내내 긴장해 주변을 살피는 영하에게 내민 말이었다. 최세계의 오만한 어투는 마음의 평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화병만 선사했다. 그렇지 않아도 담이 약하고 간이 콩알만 한 영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시골에 틀어박혀 있던 것을 고려하면, 가히 한 달 반 만의 외출이었다. 차 안에서는 괜찮았는데 막상 밖으로 나오자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고 뺨 위로 홍조가 돌았다.
아직도 영하는 꿈을 꾸면 구치소에 붙잡혀 있는 장면을 만들어 냈다. 꿈속의 내용은 대강 비슷했다. 두 뺨에 잔뜩 눈물을 흩뿌린 영하가 차갑고 두꺼운 쇠창살을 붙잡고 버둥대면, 한참 뒤 최세계가 나타나 하얀 두부 한 모를 내밀었다.
단단히 화가 난 영하에게 그 꼴이 좋게 보일 리 없다. 창살 밖으로 손을 쑥 내밀어 두부를 세차게 집어 던져 버리면, 어깨를 으쓱인 남자가 “어쩔 수 없지.” 하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대부분 꿈의 마지막은 영하가 “아빠!” 하고 크게 그를 부르는 것에서 마무리됐다.
“심장이 자꾸 뛰어.”
“심장은 원래 뛰는 거야. 안 뛰는 것 같으면 그땐 병원 가 봐.”
“장난치지 마. 장난 칠 기분 아니야.”
퉁명스러운 대꾸를 하면서도 영하의 손은 그의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마치 도망갔던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최세계인 양 굴었다. 날이 뜨겁다.
시골의 더위는 햇살은 강했어도 바람은 선선했다. 그늘에 숨어 따끈따끈한 깜둥이를 품에 안은 채 땀방울을 차갑게 식히는 바람을 맞는 것이 시골 생활의 얼마 없는 즐거움이었다.
“언제까지 걸어?”
“오 분.”
“왜 차로 가게 앞까지 안 가고 걷는 거야?”
“체력이 바닥났잖아. 걷기부터 해야지. 운동.”
“더워 죽겠는데 무슨…….”
가로수 그늘을 걸어도 더운 기운이 풀풀 풍겼다. 운동은 무슨. 내 체력이 바닥난 건 운동 부족이 아니라 과도한 섹스로 인한 축난 몸이 문제야.
“운동은 나중에 하고, 너무 더워. 그냥 아무 데나 가자.”
일단 눈앞에 보이는 식당에 바로 들어가려 코너를 꺾자마자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간이로 쳐 둔 흰 천막 아래로 피아노 한 대. 천막에 걸린 현수막 타이틀은 어린이 예술 자랑이었다. 머리를 질끈 묶은 여학생이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인형을 연주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나오던 음악 소리가 스피커가 아니라 실제 연주였구나.
연주를 구경하는 사람들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스쳐 걸었다. 귓가에 피아노 소리가 흐려지기도 전, 앞만 보고 걷던 세계가 물었다.
“이제 발레는 생각 없어?”
“왜 갑자기 발레 이야기야?”
“클래식 들으니 생각나서.”
턱짓으로 뒤쪽의 피아노 무리를 가리켰다. 뒤돌아 힐끔 흘겨보니 그 짧은 사이에 구경꾼이 늘었다. 티셔츠를 펄럭이며 억지로 바람을 일으킨 영하가 도리질 쳤다.
“없어. 어차피 그만둔 지 한참 돼서 몸 굳어서 이제 발레 못 해. 클래식 발레는 어림도 없고, 모던 발레는 가능하려나.”
중학교에 입학하며 발레랑은 완전히 멀어졌으니 발레리노로서의 생명은 끊어진 것과 다름없다.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영하도 종종 발레리노가 된 자신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근데 그쪽은 현대무용도 같이 섞어서 하는 거라 아빠가 생각하는 발레랑 많이 다르기도 하고. 아무튼 몸 굳어서 안 돼. 이제 다리 찢기도 못 할걸.”
바로 코너를 꺾으니 식당이 즐비했다. 이런 곳 두고 뭐 하러 5분을 더 걷겠다는 거야? 건물의 층마다 붙은 제각각의 간판 중 식사할 곳을 눈여겨보던 영하는 자신의 허리를 바라보며 혼자 내뱉은 최세계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떨었다.
“딱히 안 굳은 것 같은데. 섹스할 때 보면.”
“미쳤어? 밖에서 무슨…!”
안과 밖을 가리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구는 남자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영하는 파드득 떨며 주변을 연신 살폈다. 다들 살인적인 더위에 넋이 나가 잔뜩 찡그리며 앞만 보고 걷는 중이었다. 겨우 심장의 두근거림이 조금 잦아들었나 했더니,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영하가 그의 허리를 주먹으로 퍽 치며 화를 냈다.
“제발 좀!”
“어차피 아무도 못 들었어.”
“그런 이야기는 밖에서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자제해 볼게.”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대답을 한 귀로 흘려 넘긴 영하는 무작정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무 데나 들어가야지. 바로 건너편에 한식당이 있었다. 돼지고추장김치찌개. 영하가 그곳으로 발길을 돌리자 세계가 몸을 붙잡고 짜증을 냈다.
“데이트에 무슨 기사식당이야.”
“그냥 점심 먹으러 나온 거 아냐? 데이트였어?”
“따라와.”
데이트라고 말 안 했으면서.
결국 다시 원래 방향으로 돌아갔다. 오 분을 더 걸어야 나오는 레스토랑이었다. 저 고집불통! 세일할 때 천오백 원 주고 산 비엔나도 모르고 잘만 먹으면서 입맛 까탈스러운 척하기는!
창가 자리를 두고서도 더위에 지쳐 에어컨 바람이 가장 강하게 드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연신 손부채질로 뺨의 열기를 식힌 후에 메뉴판을 크게 펼쳤다.
런치 A코스. 세계가 손을 뻗어 메뉴판을 만지려 하자, 영하가 눈에 띄게 경계하며 메뉴판을 사수했다. 손에서 휙 빠져나가는 메뉴판에 한 템포 늦게 손이 거둬졌다.
“아빠는 선택권 없어. 내가 먹고 싶은 거로 주문할 거야.”
그냥 아무거나 먹지 기어코 여길 왔네.
별다를 것도 없는 평범한 레스토랑일 뿐이다. 천장이 높은 단독 건물 구조에 샹들리에가 화려한 빛을 밝히는 인테리어와 그다지 감흥 없는 술병들을 일렬로 진열해 둔 차이밖에 없다. 영하의 당돌한 발언에 턱을 괸 그의 미간이 살포시 찡그려져 있었다.
“갈수록 건방져.”
“몰라.”
“우리 영하 어릴 땐 순진해서 귀여웠는데. 아빠가 목소리만 깔아도 벌벌 떨고…. 아기 고양이처럼.”
과거를 회상하듯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열 받는다. 난 지금도 순진하거든. 메뉴판의 페이지를 넘기며 영하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따지자면 나도 그때 아빠가 더 좋아. 그땐 되게 멋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변태 같애.”
본인도 똑같이 대답해 줬으나 여전히 짜증 났다. 내친김에 영하는 그가 싫어하는 크림과 치즈가 잔뜩 든 메뉴만 골라 주문했다. 트러플명란파스타, 리코타치즈샐러드, 크림 소스 스테이크.
직원에게 메뉴를 줄줄 읊는 것을 가만히 듣던 세계가 표정 변화 없이 그대로 고개를 돌려 멀리 떨어진 창밖을 응시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짜증 낼 줄 알았는데 조용하네. 그의 반응을 훔쳐보던 영하가 곧장 주문을 정정했다. 스테이크는 티본으로 바꿔 주세요.
수저질에 소질이 없는지 파스타를 먹다 포크를 떨어뜨려 왼손이 크림으로 범벅이 됐다. 잘 먹다가 식사를 거의 끝마칠 때쯤 손이 더러워져 그만 먹겠다고 하곤 화장실로 들어와 손을 씻었다.
반지 속에도 크림이 묻은 것 같아 반지를 빼내고 물비누로 손을 깨끗하게 씻었는데, 그사이 반지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뭐야? 분명 옆에 뒀는데. 당황한 기색으로 세면대 아래까지 샅샅이 뒤졌으나 없다. 어디 갔지? 거울 속 영하의 얼굴이 몸 뒤쪽의 하얀 벽보다 더 희게 질려 있었다.
“어떡하지…. 어디 갔지.”
아니, 분명 그냥… 세면대 옆에 뒀는데? 설마 물에 휩쓸려 하수구로 들어갔나? 그렇다면 최악이다. 영하는 물 묻은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앓았다.
“안 되는데…….”
화장실 전체를 뒤져도 반지는커녕 반지 그림자 비슷한 것도 찾지 못하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 당황한 얼굴도 점점 울상으로 변해 들었다.
반지 잃어버리면 아빠가 속상해할 텐데. 사과를 받고 용서해 주었으니 화해한 것이었으나, 아직은 둘 사이가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어 댄 영하가 이윽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한숨을 토해 냈다.
“내 반지…….”
분명 화장실 어딘가에 있어야 하는데. 영하가 들어온 이후로 나간 사람이나 들어온 사람이 없으니 갑자기 공중으로 증발한 것이 아닌 이상에야 분명 이곳에 있다.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더운 숨을 뱉어 내던 영하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하아?”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어?
반지가 세면대와 연결된 은색 파이프에 기대어 세로로 서 있었다. 분명 아까 바닥 확인했는데 제대로 못 본 모양이다. 씻다가 굴러서 저기 아래까지 갔나 본데. 시간이 좀 걸렸어도 찾았으니 다행이다. 십년감수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그가 화장실에서 살림 차렸냐며 놀릴 것을 각오하고 대꾸해 줄 말을 궁리하며 제자리로 돌아왔더니 빈 접시만 놓여 있었다.
계산하고 나갔나?
뒷문으로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직행했는데 차만 있고 사람은 없다. 고개를 갸우뚱한 빙빙 돌아 정문으로 향했다. 세계는 레스토랑 입구 앞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아빠, 뭐 해?”
자신을 기다리려 서 있는 것이었으나 괜히 한 번 물어본다. 한창 기승을 부리는 더위에 지친 건지, 세계는 조금 굳은 얼굴이었다.
차에서 기다리거나 안에서 기다리지. 뭐 하러 문밖에 버티고 있지?
계단을 올라 다가갔다. 마지막 계단에서 그를 올려다본다. 그제야 영하는 세계가 이유 없이 여름날 야외에서 자신을 기다린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별한 연역적 추리도 필요하지 않았다. 차분히 서 있을 뿐이었으나 창백해진 그의 눈가에는 초조함과 약간의 두려움이 존재했다.
고작 한 달 만에 붙잡혀 왔으니 부질없는 도피가 그와 자신에게 상처만 남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후회는 의미 없는 짓이다.
씁쓰름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 영하가 손을 뻗어 세계의 손등을 감쌌다. 제게 조용히 닿은 손등과 체온에서 쌀쌀한 밤이 느껴졌고 또한 영하는 본 적 없는 장면이 눈앞으로 그려졌다. 넓은 집. 혼자 남은 남자.
영하는 직감으로, 그리고 자조적으로 뱉은 그의 말을 알고 있었다. 세계가 자신의 사랑을 의심한다는 것을.
괴로운 일이었으나 그 또한 어쩔 수 없다. 깊은 수렁 속에 온몸을 내던지지 않고 단지 발만 걸쳐 두겠다는 욕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화장실에서 반지 잃어버려서 늦었어. 반지 찾느라. 한참 찾다가 겨우 발견했어.”
영하가 왼손을 눈앞에 내보이며 말했다. 침묵을 이어가는 한숨 같은 시선이 반지로, 그리고 영하의 얼굴로 순차적으로 닿았다. 어떠한 표현도 보이질 않았지만, 그렇기에 그가 자신의 공백을 한순간도 버티기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계는 거대한 구름이 한참 동쪽으로 움직인 후에야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손님들을 의식해 손을 붙잡아 당겼다. 그가 무력하게 이끌려 계단을 내려왔다. 세계의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향하며 영하가 이야기했다.
“어디 안 가.”
“…….”
“정말이야. 도망칠 생각 아니었어.”
아들이 돼서 아버지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불효인데, 어쩐지 이 남자가 좀 어린애 같다. 아무래도 역시 도련님으로 자라 고생 한번 안 해 봐서 그렇지.
한 달의 시골 생활 끝에 할머니들의 가치관을 주입받은 영하가 새초롬히 눈가를 좁혔다.
차량 근처에 도착하여 차를 타기 직전, 갑작스레 어깨를 붙들어 당긴 세계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소 이상하게 느낄 만큼 좁은 거리였다.
“할 수만 있다면 너한테 내 머리 속을 뜯어서 보여 주고 싶어.”
“…….”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야 해.”
그럴 필요 없다.
전해 오는 목소리가 그림 같은 형태와 향기까지 한가득 품에 안고 있었기에, 머리 속을 해부해 보지 않아도 영하는 그 사랑의 크기와 깊이를 열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잠깐의 생각이 맴돌던 짧은 순간, 피 말리는 더위마저 잊은 영하는 끝내 결정했다. 어차피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도 없고, 단 한 사람에게도 미움받지 않는 삶은 불가능했다. 그를 잊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남자처럼 두꺼운 면피를 뒤집어쓰고 함께 불길을 걸어야 했다.
“다시….”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다고 되뇌려던 영하는 짧게 고개를 흔들고는 정정했다.
“평생 곁에 있을게.”
영하는 그를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눈보라에 비유했다. 아무리 쓸어내도 발악해도 부질없이 켜켜이 쌓이는 눈. 부정을 멈추는 순간 덮쳐와 숨통을 틀어막아 버릴지도 모르는 마음.
하지만 죽음마저 각오하고 마침내 눈을 감아버리자, 이윽고 모든 눈이 녹아내리고 그 위로 푸른 싹이 조심스레 돋아났다. 제게 향하는 그의 사랑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달리 보여도… 제게는 그랬다.
무력하게 질질 끌려갔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집의 계단을 두 개씩 밟아 올라가며 연신 더운 숨을 뱉었다. 보폭 차이가 이만큼 나는데 멀쩡히 따라갈 리가 없었다. 영하는 잠깐 걷는 사이 죽을 것만 같았다.
헐떡이며 신발 밑창이 거의 갈아지듯 끌려간 영하가 잠깐 숨을 고르자, 그사이 현관문이 열려 조용히 따라 들어가려던 것도 실패했다.
안으로 당긴 그가 몸 주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운동화를 멋대로 벗기더니 현관을 넘자마자 벽에 몸을 세차게 밀어붙였다.
“아흑-!”
등이 퍽 부딪쳤다. 휘청거린 머리 덕에 골이 띵하게 울려 여러 번 눈을 감았다 떴다.
기력 없이 쩍 벌어진 다리 사이로 예고 없이 탄탄한 허벅지가 끼어들어 강한 힘으로 사타구니 사이를 올려붙였다. 갑작스레 아래를 짓누르는 것을 넘어 탄력적인 허벅지를 바짝 붙여 영하의 몸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뒤꿈치가 들려 올라가자, 영하는 발끝으로 서며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 이러지 마…!”
“뭘 이러지 마. 이러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는데.”
“으, 흐읏…. 씻고, 씻고 해. 응? 아, 땀이…!”
분명 몸에 땀이 흘렀다. 씻지 않고, 게다가 이런 현관 앞에서 섹스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씻고, 하다못해 샤워실에서 하자며 그의 가슴을 다독이며 달래 보았으나 소용없다. 최세계의 정염을 더욱 타오르게 할 뿐이었다. 지글지글 끓는 듯한 눈길이 영하의 위아래를 훑었다.
시선이 납작한 가슴을 핥듯이 응시했을 때는, 영하는 왜인지 모르게 울고 싶은 기분에 눈동자를 적셨다.
하아. 하.
정제되지 않은 가쁜 호흡이 줄을 이었다. 잠시 진정한 모양새였던 최세계는 갑자기 돌변했다. 영하의 턱 끝, 부드러운 살갗을 깨물고 목덜미를 길게 핥았다. 그의 혀가 지나간 자리마다 에어컨 바람이 차갑게 닿아 소스라치는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내렸다.
“으응….”
버클이 풀리고 청바지가 아래로 쑥 내려갔다. 최세계의 무릎뼈가 사타구니 사이를 꾸욱 내리누르자 아랫배가 눈에 띄게 진동했다.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흐읏.” 신음하는 것을 보며 그가 입꼬리를 당겼다.
“아흑! 여기서… 싫다니까!”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순진한 성기가 무릎뼈에 한심하게 짓눌려 크기를 키웠다. 손안에 그것을 쥐고 흔들던 세계의 손등이 음모가 난 사타구니를 쓸며 나직하게 의사를 물었다. 눈가가 찌푸려지는 제안이었다.
“다음에, 여기 밀어 줄까.”
“싫어….”
“우리 영하 백자지 되면 더 예쁠 텐데.”
고상하지 못하고 적나라한 단어 선택에 하얀 미간 사이가 좁아 들었다. 부러 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고는 투덜거렸다.
“싫다니까….”
“우리 아기는 싫은 것도 많지. 걱정 마. 이다음은 네가 좋아하는 거니까.”
말을 마친 그가 곧장 엉덩이 아래를 받쳐 몸을 띄우더니 통통한 살을 강하게 움켜쥐며 양쪽으로 벌렸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다물린 구멍이 가로로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세계는 흉흉하게 발기한 음경을 골 사이로 문질렀다. 미끈한 귀두가 들어올 듯 애를 태우며 주름진 점막 위를 배회했다.
삽입을 예고하자 흰 살갗으로 얇게 덮인 아랫배가 파들파들 진동했다. 두툼한 자지가 내벽을 가르고 들어오는 기쁨을 알고 있어서였다. 배꼽 주변이 안쪽으로 함께 들어갔다. 간신히 바닥에 닿아 버티고 있는 다리 끝에는 흰 양말에 둘러싸인 발등이 잔뜩 굽어졌다.
“아빠아…….”
“응.”
“여기서, 하기 싫어…. 씻고. 응? 흑….”
이 너른 집을 두고 왜 매번 현관에서 하려고 안달일까. 처음 섹스할 때도 현관 앞에서 개처럼 엎드려 그에게 이러지 말라고 빌었다. 좀 더 평범하게 하고 싶은데.
그러나 긴 생각을 할 시간은 없다.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을 주던 영하는 이윽고 성기의 끄트머리를 느끼곤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최세계의 침묵은 대부분 부정의 뜻이었다. 영하의 바람과 달리 기어코 현관에서 삽입 섹스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아파.”
손가락 사이로 오른 엉덩잇살이 짓눌리도록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고, 점막 위를 배회하던 귀두가 벌름대는 구멍 위를 잡아 벌리듯이 밀어 올렸다. 삽입이라기보다는 구멍을 벌리는 행위에 가까웠다.
유난히 두툼한 큰 귀두 아래에는 그보다 더 두꺼운 기둥이 있었다. 안에서 흐른 맑은 체액이 내벽을 타고 뜨겁게 발기한 살덩이 위로 흘러내렸다. 그 순간 잘 발달한 상체가 영하의 몸을 난폭하게 끌어안았다. 열이 오른 체온 속에서 애를 태우는 듯한 하체는 벌름대는 구멍의 틈새를 강제로 벌리고 단숨에 침입했다.
“아읏, 아직, 안 풀어졌…!”
비명과 함께 단단한 성기가 성마르게 안으로 진입했다. 안쪽이 이례적으로 빡빡하다.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용솟음치는 욕정을 내리누르지 못하고 결국 다시 한번 난잡하게 허릿짓을 했다.
“으흑.”
울음소리와 함께 말랑한 아랫배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급박한 섹스인 터라 내벽이 열리지 않아 두터운 성기가 제대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귀두부만 받아들인 채로 공중에 뜨인 허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하….”
“읏, 천천히…. 흐… 도망, 안 가니까….”
너무 급하다. 풀어 주는 시간도 지체하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그가 연신 위로 박아 넣으며 답싹 안긴 몸을 고쳐 안았다. 크게 호흡을 들이마셔 머리가 어지럽다. 영하가 희뿌연 눈을 내리감고 성난 등근육 위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달래어 보려 애쓰는 몸짓이었다.
흉흉한 성기가 억지로 박아 넣는 망치질처럼 들이박을 때마다 땀에 젖은 살갗이 부딪쳐 쩍쩍 소리가 난다. 영하의 울음도 시시각각 솟아났다.
“젠장.”
이윽고 욕설을 뱉으며 성난 몸짓으로 왼팔을 벽에 지탱한 그가 영하의 엉덩이 아래를 붙잡아 들었다.
잠시 한쪽 다리를 내려 발끝으로만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것도 곧 무색해지게 전신이 공중으로 들렸다.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가자, 남근을 받아들이는 뒷구멍에서 이어진 아찔한 둔통이 척추를 강타했다.
“으응! 아프….”
“힘 빼. 자지 물고만 있는다고 좋아지는 게 아니야.”
고압적인 그의 어투에 속상한 듯 눈을 내리깐 영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아랫배와 항문의 힘을 풀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이미 벌어진 골반을 더 넓게 벌리며 종아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최세계가 그 순응적인 행동에 욕설을 내뱉으며 성기를 뒤로 빼더니, 단숨에 정신없이 안으로 쑤셔 넣었다.
“흐윽…! 아아아아!”
엉덩이의 까슬한 음모가 닿았고, 남자의 성기가 제집처럼 배려 없이 드나들었다. 구멍의 점막에 화끈화끈하게 불이 올랐다. 새된 비명을 내지른 영하의 아랫입술이 온통 타액으로 범벅이었다.
“아… 읏, 흑…….”
“하, 젠장…. 크읏….”
벽에 붙은 두 사람의 몸이 납작 달라붙을 만큼 겹쳐졌고, 최세계는 낮게 신음하며 영하의 허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질끈 감았다 뜬 눈동자에 잿더미처럼 시커멓고 타오르는 열락이 그득했다. 도통 힘을 풀 생각이 없는 내벽을 강제로 좌우로 벌려 박아 넣었으니 항문이 말도 못 할 만큼 자지를 조여 대고 있었다.
“우응. 흑, 움직, 이지….”
헐떡이며 울음을 참아 내던 영하는 곧 눈을 크게 뜬다. 엉덩이에 맞붙은 사타구니를 안쪽으로 더 밀어 넣으며 문지르자, 벽에 완전히 내몰린 몸이 짓눌려 숨 쉬는 것마저 버거워졌다.
헥헥. 눈가가 뿌예진 영하는 입을 벌려 구강으로 호흡했다. 벌어진 입술 위로 남자의 입술이 닿고 혀가 얽혀 든다.
호흡이 버거워 입을 벌린 영하의 마음도 모르고 혀를 얽어 대는 행위에 미간이 찡그려지고 이마가 구겨졌다. 접힌 눈가로 뜨끈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배 속에 든 남근이 더 깊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전장치처럼 애타게 붙든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싫다는 의사 표현을 했으나 부푼 성기는 끝도 모르고 안을 벌려 쑤시려 했다.
안 돼. 더, 더 넣기 싫은데….
이미 속이 더부룩하고 토기가 올라올 지경으로 들어왔다.
이제 세계는 영하의 한계를 알고 있다. 삽입의 깊이와 사정 횟수를 기억하고 컨트롤했다. 그가 장 안쪽 깊은 곳에 삽입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흥분을 참지 못해 못 견딜 지경이거나, 심술이 나 영하를 괴롭히려 할 때였다.
안긴 자세가 훌쩍 고쳐진다. 얽히던 혀가 떨어진 직후 바로 숨을 들이켜고 고개를 내저으려 했으나 그가 더 빨랐다.
“아빠…!”
최세계는 발버둥 치는 영하의 몸을 억지로 품에 단단히 가두고 하체로 여러 번 쳐올렸다.
“끄흐, 읏, 아앗, 응!”
광포한 움직임에 결국 내벽에 박힌 성기가 조금 위치를 바꿨고, 곧장 구부러진 장벽으로 귀두가 파고드는 동시에, 맞붙은 남자의 허리가 경련하듯 진동했다. 그가 안쪽에 박아 넣자마자 참지 못하고 사정한 것이다.
“하아….”
연거푸 쏟아지는 한숨과 함께 장 내벽으로 정액이 세차게 쏟아진다.
그가 이렇게 빨리 사정한 것이 처음이라 영하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정액으로 아랫배가 부풀까 봐 걱정스러운 눈길로 자신의 배를 들여다보았다.
우물쭈물 입술을 깨물고 처진 눈가에 두려움이 섞인 것을 깨달은 세계가 신경질적으로 영하의 입술을 깨물었다.
“흣….”
흐느낌이 목구멍 안으로 먹혀 들어갔다. 성기가 아닌 곳을 강제로 성기로 쓰는 최세계의 남근과 같이, 물컹하고 뜨거운 혀도 영하의 입 안과 목구멍을 또 다른 성기처럼 헤집었다.
동시에 허리 아래와 등을 문지르던 세계의 손이 움직였다. 납작한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압박하고 느리게 살갗을 마찰시켰다. 유두가 뾰족하게 서서 그의 손가락마다 툭툭 걸렸다.
그럴 때면 영하는 세계의 어깨와 목 뒤편에 손톱을 꾸욱 누르며 허리를 튕겼다. 예민하고 작은 유륜을 문지를수록 허공에 들린 다리가 계속해서 전율했다. 흰 뺨에 붉은 기가 오르고 그 위로 눈물의 흔적이 적나라했다.
“영하야.”
영하는 아래턱을 파르르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흠뻑 젖은 뺨으로 “흣, 흐읏.” 하고 신음하던 영하는 자신을 부르는 세계의 목소리에 눈을 들었다. 내내 그의 어깨 위를 바라보며 신음하던 중이었다.
“아!”
눈이 마주치자, 사정하고 있던 그가 위로 크게 한 번 박아 올렸다. 내장이 짓이겨지는 느낌. 동시에 안에 든 정액이 출렁이는 감각이었다.
“최영하.”
“응…….”
짧은 대답에도 울음이 섞였다. 눈앞이 어룽져 눈꺼풀을 꾹 감았다 뜨자, 뺨 위로 흘러내리는 것과 동시에 최세계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키스해 달라는 듯 혀를 빼꼼 내밀었다.
미간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린 남자가 단단하게 몸을 얽으며 입 맞췄다. 그의 몸도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아들의 가장 깊은 곳에 중심을 박아 넣고 사정하고 있었다.
질리도록 오랫동안 정액을 아들의 배 속에 싸지른 남자가 잠깐의 휴식 후, 다시금 성기를 발기시켰다. 안쪽에서 울컥울컥 커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들어 올린 몸을 고쳐 안은 세계는 말간 눈을 마주치는 영하의 코끝에 입 맞추곤 짐승처럼 아래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이마와 관자놀이에 핏대가 올랐고, 땀이 난 두 살갗이 연신 아프도록 맞부딪쳤다.
흰 엉덩이와 허벅지가 붉게 마찰열이 올라 쓰라릴 만큼 격한 허릿짓이었다. 그러나 구멍의 벌어짐이 익숙해지고 몸이 달아오르자, 전보다 강한 쾌감이 일었다.
신발만 겨우 벗어 둔 현관 앞이었다. 당장 문을 열면 더운 열기와 시퍼런 하늘이 가득한 야외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전신이 달아올랐다. 입 밖으로 가느다란 고음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응! 후으, 앗, 흐으으응….”
세계에게 원하는 곳을 찔러 달라 칭얼거렸다.
“아빠아, 흑, 거기, 응, 아아… 거기 찔러 줘….”
“여기, …박으면 좋아?”
“응, 흑, 응… 안에, 아아아…!”
수긍하자 기다란 성기가 연신 안쪽을 깊이 때렸다. 얄팍한 배 위로 남근이 드나드는 흔적이 시시각각 솟아났고 배꼽 바로 아래까지 기다랗게 부풀었다.
“우응.”
헛구역질이 올라올 만큼 세찬 움직임에 몸서리친 영하가 허리를 뒤틀었다. 배 아래쪽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엉덩이 아래를 단단히 받친 남자가 거칠게 허리를 놀렸다. 잔뜩 부푼 성기를 타고 흐른 정액이 엉덩이와 사타구니 사이에 엉겨 붙어 희게 거품이 일어난다. 몸을 버티기 힘들어진 영하는 그의 목을 생명 줄처럼 끌어안았다.
“아, 아흐, 좋, 아아, 흣, 앗, 아빠, 흑…….”
마구잡이로 박아 댄다. 엉덩이와 허벅지 뒤쪽에 마찰열이 일어나 살갗이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아프고 좋았다. 그의 성기가 전립선을 긁고 지나가면 회음부가 따뜻해지고 얼얼해졌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조악한 행복감마저 느껴졌다.
“흐, 흐아, 아아아…! 히익, 아응, 아빠아아!”
전신이 쿵쿵, 뇌까지 흔들리는 느낌. 몸을 가눌 수가 없으니 지나친 자극이 싫다며 버둥댈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기운이 빠져 허물어지는 몸을 고쳐 앉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최영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 마음대로 제 구멍을 사용하는 남자를 위해 엉덩이의 힘을 빼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영하를 위한 행위이기도 했다. 최세계의 성기가 어디를 박아 대든 저릿저릿한 쾌감이 온몸에 번개를 쳐 댔다. 안을 쳐올리는 힘은 무자비할 정도로 강했으나 그의 성기가 영하의 그곳을 헤집을수록 상냥하고 가느다란 무언가가 허리와 엉덩이 위쪽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거친 움직임에 흰 엉덩이가 붉게 물들고 호흡이 가빠 야릇한 신음 사이로 숨을 뱉어 냈다.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성기를 붙잡으려 가쁘게 구멍을 조이고 허리를 흔들었다.
“아흥, 흣, 아으, 응! 아아아아….”
길쭉한 성기가 내벽을 잔뜩 긁었다. 전립선을 긁고 압박할 때마다 영하는 이 이상 없을 쾌락을 느껴 울었다. “앗, 흐읏!” 부끄러운 신음과 함께 발기한 성기에서 흰 사정액을 쏟아 냈다. 최세계의 탄탄하고 굴곡진 가슴과 복근 위로 흰 정액이 사정없이 튀고 흘러내렸다.
“아흐, 흐… 흐윽… 아….”
한 팔로 아들을 받친 남자의 손이 영하의 중심부를 쥐고 흔들었다. 남은 정액을 짜내려는 듯이 요도 주변을 문지르니 가느다란 허리가 덜덜 떨리고 눈이 까뒤집혔다. 미칠 듯한 자극에 벌어진 입이 연신 다물리지 않았다. 사정할 때 앞을 만져 주면, 영하는 늘 뒤쪽의 감각마저 함께 느꼈다.
“그만, 그, 그만…! 흑, 뒤로, 아, 나오는데…!”
“네가 구멍으로 질질 흘리지 않던 적이 언제 있다고 싫대.”
한 번에 자극되면 버티는 것이 힘들다. 살려 달라 버둥대는 행위조차 공중에 들린 몸이라 불가능했다. 외려 최세계는 뜨거운 성기를 한계를 모르고 삽입하려 몸을 퉁겼다.
“더 넣을까, 영하야. 하, 더 깊게…….”
그의 말에 희게 질린 영하가 비명처럼 횡설수설했다.
“아니야. 아빠, 이미 끝까지, 들어왔잖…!”
거칠고 광폭하게 허리를 놀려 댔다. 그가 정말 그렇게 할까 봐 두려움이 자신을 집어삼켰다.
“그러지 마….”
칭얼대는 신음 소리가 금방 먹혀 들어갔다. 그가 키스하며 혀뿌리까지 탐하듯 혀를 빨아 대어 영하는 목구멍으로 신음을 앓았다.
금방 갔는데, 아, 흑… 또…….
바로 직전에 사정했음에도 영하는 다시 아득한 절정의 기운을 느껴 울음을 터뜨렸다. 뜨겁고 딱딱한 성기가 제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발기하고 흥분하는 것이 현재의 최영하였다. 스스로 아래를 적시고, 남근을 원해 구멍이 벌름댄다.
“분수 칠 것 같아?”
“흑…….”
그가 다시 질 낮은 소리를 지껄였다. 울먹인 영하가 수치심에 몸을 떨며 등을 손톱으로 긁어 댔다. 사실이라 아니라고 할 수 없어 그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 외에는 복수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흐으, 읏, 으응! 싫, 흐아아아!”
시야가 희게 변한다. 세계의 목을 꽉 당겨 안은 영하가 그의 자지와 허리를 함께 조이며 흐느꼈다. 두툼한 남근의 뿌리를 문 구멍이 쉴 새 없이 옴쭉대며 음란한 애액을 흘리고 있었다.
세계가 완벽히 밀착된 배 사이로 손을 넣어 영하의 아랫배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배꼽 주변의 말랑한 살결이 땀과 정액으로 범벅이 되어, 먹고 남긴 아이스크림인 양 질척하게 손바닥에 들러붙었다.
“아, 아파…!”
세계가 아들의 배 속에 파묻은 제 성기의 부피를 느끼려는 듯 자꾸만 압박했다. 연약한 뱃가죽이 휘어짐 없이 딱딱하고 두꺼운 성기에 반복적으로 꿰뚫렸다.
점막이 온통 부어오른 듯 쓰라리다. 안에 든 성기가 거대하고 단단한 돌덩이 같았다. 영하가 살려 달라는 듯 애처롭게 몸을 떨며 그에게 애원했다.
“아윽, 너무, 딱딱해서, 아, 아아… 그렇게 안에, 응, 세게 때리면, 아, 아흑. 읏. 배, 배 아파요, 그만… 아…!”
영하의 말에 욕설을 뱉은 그가 벽을 짚으며 삽입한 성기를 거칠게 잡아 뺐다. 납작한 배에 힘이 들어갔다. 장 내벽이 아파도 빼고 싶지는 않았다.
“싫어, 빼지…! 우응, 앙, 흐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빠져나가는 남근을 잡으려 조여든 구멍이 이내 다시 빠끔, 그의 좆 둘레만큼 벌어졌다. 아들의 애액에 푹 잠겨 있던 남근이 쏟아지는 물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의 허벅지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다 못해, 움찔움찔 경련하는 영하의 아래에서도 핏핏, 가느다란 물줄기가 튀어 내렸다.
세계는 어린아이를 다독이듯 아들의 등을 여러 번 쓸어내렸다.
“흐, 흐윽, 흣, 만지지, 마. 히익, 힉, 아흐으…….”
영하는 그 손길에도 쾌락을 느껴 달아오른 뺨 위로 물줄기를 만들어 냈다.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이 조붓이 다물려 조금씩 벌름거릴수록 회음이 뜨거웠다.
안을 메우던 성기가 빠져나갔음에도, 영하는 여전히 그에게 박힌 것처럼 품 안에 안긴 몸을 위아래로 조금씩 흔들었다. 전신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빠져나간 성기를 갈망하며 허리를 요분질 치는 것이었다.
울음소리가 멎고 절정감의 떨림이 잦아들 때쯤, 그가 가만히 영하를 바닥 위로 내렸다.
“영하야.”
“흑, 흐으, 흐읏, 응….”
여전히 최영하는 뒤로 느낀 절정에 몽롱한 얼굴이었다. 잠깐을 서 있는 것도 못 해 바닥에 곧장 주저앉아 초점 없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벌어진 입 밖으로 혀가 빼꼼 나왔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세계가 영하의 발그레한 뺨에 성기를 문지르며 나직이 속삭였다.
“효도해야지.”
“읏, 싫어.”
“그런 불효자가 어디 있어.”
그가 한계까지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손으로 흔들며 야살스럽게 지껄였다.
“입 벌려 봐.”
천하의 불효자가 근육질의 피부 위로 아들이 울음과 흥분 속에 쏟아 낸 체액들로 뒤덮인 채로 웃고 있었다.
녹초가 된 영하가 이윽고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깔곤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를 빨면 무슨 기분일지 조금, 궁금했다.
*
침대 끄트머리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남자가 눈을 떴다. 침대 바깥으로 빠져나간 팔이 저린지 미간을 찌푸리며 팔뚝을 주물럭거렸다.
영하가 커다란 킹사이즈 베드에서 혼자서 자리 차지를 다 하고 누운 탓에 세계는 침대 모서리에 겨우 몸을 누이다가 6시에 일어났다.
조용히 이불을 갈무리하고 씻고 나오자, 영하가 부은 얼굴로 눈만 끔뻑이며 멍하니 침대 중앙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표정이었다.
머리 위를 덮은 수건을 내리며 지나치던 세계가 자다 깨어 둥그런 뺨을 툭 건드리며 거실로 빠져나갔다. 그 손길에 버튼 눌린 인형처럼 일어난 영하가 홀린 듯이 뒤를 졸졸 따랐다.
“밥.”
“눈도 못 뜬 게 무슨 밥 타령이야.”
“밥 먹을래…….”
잠옷 바지가 엉덩이 위쪽에 간당간당 걸쳐 끝단이 바닥에 질질 끌린다. 여섯 시 반이면 아직 최영하의 기상 시간이 아니었다. 세계가 출근하기 직전에 일어나기 부지기수였다. 시골에 있을 땐 할머니 따라 다섯 시 반이면 일어났는데, 생체 리듬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배 아프다….”
배고프다고 주방 앞을 서성이고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이제는 아랫배를 문지르며 혼자 중얼거렸다. 머리를 말리던 세계가 시끄러운 바람 소리 사이에서도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드라이어를 끄며 돌아봤다.
“이리 와 봐.”
부르는 소리에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갔다. 거북이 기어가는 움직임을 가만히 보다 못한 세계가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앞까지 오더니 잠옷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새벽녘에 참지 못하고 한 번 더 했다. 당시 영하가 너무 세게 박으면 배가 아프다고 칭얼거렸었다. 차분히 아랫배를 달래 주고 계속했는데, 그 때문인가 싶어 세계의 눈가를 좁히며 배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찬 피부에 뜨끈한 면적이 닿으니 감기던 영하의 눈이 조금 뜨였다. 말랑하고 납작한 배 위를 여러 번 매만진 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차갑네. 자면서 배라도 내밀고 잤어?”
“나야 모르지… 배 아파. 근데 배고파.”
“단순한 게 아주 짐승 같네. 눈 뜨자마자… 우유 데워 먹어. 찬 거 먹지 말고.”
영하는 다시 뒤돌아 머리를 말리는 그의 벗은 어깨를 주무르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내가 애기야? 우유를 데워 먹게?”
“네가 애기가 아니면 뭔데.”
“아니지. 난 스무 살이라고.”
“나이 들먹이면서 어리지 않다고 강조하는 점이 바로 어린애라는 증거야.”
“그래. 나이 많아서 좋겠다. 이 아저씨야.”
잠결에 뇌를 거치지 않고 곧장 목구멍 바깥으로 말이 튀어 나갔다.
앗.
저도 아차 싶어 거울을 통해 세계의 찌푸린 눈과 마주치곤 조금 간담이 서늘했으나, 부러 겁먹지 않은 척 턱을 치켜들었다.
잠깐의 눈싸움 후, 세계는 대충 머리카락의 물기가 어느 정도 제거되자 곧장 몸을 일으켰다. 배가 아프고 고프다던 영하는 오리 새끼처럼, 드레스 룸을 향하는 그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밥 먹는다더니 왜 자꾸 따라다녀.”
“배 아파서 이따 먹을래.”
게다가 갑자기 밥 생각도 사라졌다. 아빠 출근하면 먹지 뭐.
눈가를 문지른 영하는 드레스 룸 중앙의 시계 장에 기대고 섰다. 세계는 옷장 앞에 서서 셔츠와 정장을 고르던 중이었다.
“하으. 너무 일찍 일어났어.”
연이어 하품이 터졌다. 졸음이 덜 가신 눈가를 문지르고 혼자서 중얼거리니, 허리춤에 손을 올린 그가 가만히 돌아보고는 영하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반쯤 잠긴 눈이 오늘 처음으로 크게 뜨였다.
“무너져!”
“안 무너져.”
덥석 안겨 엉덩이가 서랍장 위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서랍장이 망가지는 상상부터 떠올린 영하가 기겁했다.
날카로운 비명에도 무심하게 대꾸한 그가 이마 아래로 내려온 영하의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넘겨 주며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떼어 냈다. 이마 키스에도 멀뚱하니 반응이 없자 콧대를 겹치고는 살짝 다물린 입 위로 겹쳤다.
촉.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부드러운 점막. 이번에는 영하가 다시 질색하며 그를 밀쳐 냈다.
“양치 안 했으니까 하지 마.”
“안 해도 예쁘니까 괜찮아.”
“다 부은 얼굴이 예쁘긴 뭐가 예뻐.”
“내가 예쁘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반쯤은 내가 만든 작품인데 예뻐하는 게 뭐가 문제지?”
“창피하게… 문제 많아.”
이걸 칭찬으로만 받아들여야 하나? 그냥 듣기엔 나보다는 본인 칭찬인 것 같은데. 의심쩍게 그를 흘겨보곤 가슴을 마저 밀쳐 냈다.
서랍장 튼튼하겠지?
당장 내려가려던 생각을 접은 것은 서랍장 높이 탓에 제 시선이 그와 엇비슷해졌기 때문이었다.
출근할 적마다 옷 고르는 것도 일이었다. 가지런히 걸어 둔 셔츠와 바지를 몇 번 둘러보던 세계도 귀찮아졌는지 아무렇게나 골라 걸치고는 차분한 하늘색 넥타이를 뒤로 내밀었다.
넥타이 매 주는 것도 오랜만이네.
정말 예전의 사이로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멀어졌던 행복이 조금씩 발 위로 차박차박 차오르는 기분이다. 희미하게 입술을 올리곤 깃을 세운 칼라 뒤쪽으로 넥타이를 걸쳤다. 그사이 단추를 끝까지 잠근 세계는 눈으로만 영하의 엉덩이 아래 시계들을 가늠하고 있었다.
실크 넥타이의 촉감을 손끝으로 느끼던 영하가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둘 사이의 행복을 떠올리면 매번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아빠, 내가 할머니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봤는데.”
가죽 시계 부근을 손으로 툭툭 치던 세계가 할머니란 말에 와락 인상을 구겼다. “시키지도 않은 쓸데없는 짓을 하네.” 중얼거린 그가 확실하게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런 걸 왜 하는데.”
“들어 봐. 아무튼, 귀한 아들 애지중지해서 서울대 보내고 유학도 보냈는데…. 결혼도 안 한 주제에 밖에서 아들이 둘이나 생기고, 성격도 나빠서 부모님 말씀도 안 듣고, 어버이날도 안 챙기고,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무뚝뚝하게 굴고.”
“아침부터 이거 뭐 하는 짓이지? 이열치열로 열받게 하기 작전, 뭐 그런 건가.”
들어 보라더니 온통 욕밖에 없다. 게다가 진짜 아들은 최영하 하나라는 오류점을 제외하면 모두 사실이었다.
최세계를 면전에 두고 타박하고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긴 할까. 영하는 세계의 짜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어 말했다.
“효도도 안 하는 아들이… 결혼도 안 하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손자랑… 그런다고 생각하면 진짜 난 까무러쳤을 거야.”
진심을 보여 주는 것처럼, 영하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덩달아 넥타이를 쥔 손도 함께 진동했다. 한숨을 낮게 뱉어 낸 남자가 서랍장을 손으로 붙들었다. 찡그려진 왼쪽 눈가가 도통 풀릴 생각이 없다.
“도대체 그런 상상을 뭐 하러 하냐고.”
“상상되니까 하는 거지. 넥타이 다 맸어.”
“이해가 안 가는데. 그 상상의 결론이 뭔데.”
“결론은 할머니한테 죄송하다고.”
아빠가 날 꼬신 거지만, 나도 아무 잘못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 이야긴 속으로 숨기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아래로 내렸다. 내친김에 그의 팽팽한 가슴도 나쁜 손바닥으로 톡톡 두드렸다. 흘끗 시선을 내린 그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는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러나 말을 마치자마자 찡그린 세계가 곧장 설명을 덧붙였다.
“너한테 따로 접근하시는 일 없으실 거야. 이야기해도 네가 아니라 나한테 하시는 게 도리지. 나중에 연락 오면 바로 나한테 말해. 알았어?”
“응…….”
“확실하게 대답해야지.”
“응. 그럴게.”
착실한 대답을 듣고서 손만 뻗어 재킷을 들어 올리던 세계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곧장 표정을 바꿨다. 불만 가득하던 뺨에 음흉한 미소가 새겨지기 시작하니, 지켜보는 사람만 불안하다. 이윽고 길게 당겨진 입술이 기가 막힐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렇게 죄송하면 애 하나만 낳아 드려. 네 동생이 사대 독자가 되어 버렸으니까.”
“제발 그런 술 취한 아저씨 같은 농담 좀 하지 마.”
최세계는 질색하는 발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능구렁이처럼 대답했다.
“농담으로 받아들일 거야?”
“수십억을 들여도 남자가 임신하는 약은 개발 안 돼. 남자 연구원들이 개발을 원하지 않거든.”
“오래간만에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네.”
정말 하루라도 이상한 소리를 안 하면 못 견디는 걸까. 대충 대꾸하고 어깨를 탁 밀치는 순간, 머릿속에 번개처럼 뭔가가 파고들었다. 전기에 맞은 듯 움찔 몸을 떤 영하가 바로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갑작스레 목이 강제로 앞으로 당겨져 세계가 찡그리며 신음했다. 그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다급한 목소리로 영하가 으름장을 놓았다.
“혹시 할머니가 자꾸 잔소리하고 화낸다고 해도 밖에서 애 만들면 안 돼. 절대 안 돼.”
터무니없는 상상이긴 했으나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었다. 승준이가 있으니까 후계 걱정은 없지만, 혹시 모른다.
영하의 끝을 모르는 상상에 세계가 억울하다는 듯 넥타이를 뺏어 들며 목을 좌우로 움직였다. 영하는 매번 그를 정신없이 아랫도리를 휘두르는 난봉꾼 취급했다.
“너… 전부터 날 대체 뭐로 보는 거야.”
“전과가 둘이나 있잖아.”
“그 전과가 바로 너야.”
“그러니까! 약속해, 빨리!”
스무 살이니 다 컸다고 자만하던 영하가 그의 가슴 앞에 불쑥 손을 내밀었다. 주먹 쥔 손에 새끼손가락만 빼쪽 섰다. 어린애들처럼 원초적인 방식으로 손가락 걸고 약속하라는 뜻이었다. 흘끗 손을 내려다본 그가 내민 손에 고리를 걸며 다소 질 낮은 확언을 뱉었다.
“걱정하지 마. 이제 최영하 아니면 발기가 안 되니까.”
저런 저질스러운 농담에 기분 좋은 걸 보면 저도 미치긴 했나 보다. 헛웃음 지은 영하가 이윽고 그의 목을 잔뜩 끌어안고 너른 품에 한가득 매달렸다.
*
평화로운 일상은 지속됐다. 주말이었다.
“어우, 무거워.”
이건 뭐 귀신이 올라가 붙어도 이것보단 덜 결리겠네. 영하가 어깨를 털며 짜증을 내도 당당하게 올라간 최세계의 팔은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소파 스툴에 긴 다리를 올리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옆으로 기대 오는 세계 때문에 영하는 가만히 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운동하는 기분이 간접적으로 들었다. 아랫배에 가득 힘을 주고 버티다 못해 결국 팔을 걷어치우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턱을 치켜든다. 영하가 항의했다.
“자꾸 아빠가 팔 올리니까 내 키가 멈춘 거야. 분명 어릴 땐 진짜 큰 편이었는데. 키 순서대로 줄 서면 늘 내가 제일 뒤였어. 열네 살부터 역전당했다고.”
“핑계 많아서 좋겠다.”
진심을 담은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가 화면을 바라본 채 시큰둥한 한마디로 일축했다.
“그보다 빨리 앉아. 줄 거 있으니까.”
“줄 거 있다고? 뭔데?”
성을 내던 영하는 줄 게 있다며 자세를 고쳐 앉는 세계를 보고선 곧장 반색했다.
집 밖에 나갈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곤 해도 아직은 혼자 나가는 건 꺼림칙했다. 늘상 집 안에 있으니 무료해 미칠 지경이다. 선물이라도 받으면 좋지.
얼른 제자리에 앉아 손부터 내밀었다. 얌전히 뻗은 두 손을 보고선 테이블의 서랍을 열던 세계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뭔 줄 알고 손을 내밀어.”
“빨리 줘.”
내민 손을 흔들며 칭얼대니, 잠시 고민하듯 눈꺼풀을 내리깐 세계가 서랍을 확 열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튀어나온 서랍 속에는 영하의 태블릿과 휴대폰이 들어 있었다. 영하는 앉은 것이 무색하게 다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여기 숨겼어?! 난 갖다 버린 줄 알았는데.”
“서랍에 넣은 게 뭐가 숨긴 거야. 네가 안 열어 본 거지.”
“황당하네…. 아무튼 됐어. 드디어 전자기기 다이어트에서 벗어나네.”
“다이어트는 무슨, 스마트폰 중독에서 잠시 벗어난 거지. 곧 다시 중독자 신세가 되겠지만.”
못마땅해하는 목소리를 넘기곤 재빨리 휴대폰부터 집어 들었다. 약 두 달을 휴대폰 없이 살며 눈동자와 정신이 맑아지기는 무슨, 금단 증상에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소중하게 휴대폰을 품에 안아 들던 영하는 문득 이 남자가 의심스러워졌다.
왜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냥 주는 거지?
“근데… 왜 주는 거야?”
“다시 일반인 하기로 했으니까.”
“그러면….”
서랍을 도로 닫곤 소파에 등을 길게 기대는 것을 보며 슬금슬금 머리를 굴렸다. 기분 좋아 보였다. 그러면 이 기회를 틈타 좀 더 요구해도 되지 않을까?
방전되어 전원을 켜도 켜지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세계의 옆에 바짝 붙여 엉덩이를 내렸다. 아까 내내 무겁다고 했는데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티를 내는지 어깨 위로 바로 팔이 올라왔다.
부탁할 것이 있으니 화내지 않고 그의 허벅지에 슬그머니 손을 올려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냥, 조금 나긋하게 굴어 볼까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행위였는데, 손바닥 아래로 근육의 형태감이 희미하게 느껴져서 눈이 동그랗게 튀어 올랐다. 영하가 사심을 담아 허벅지를 주물럭거리며 물었다.
“있잖아… 나 학교는?”
“포기해.”
곧장 단호한 거절의 대답이 튀어나온다. 이럴 수가. 기대했는데… 낭패했다. 고개를 돌리곤 빠르게 눈을 굴렸다.
어차피 지금은 학기 등록도 늦었겠지. 설마 학교 못 다니게 할 생각인가. 영하는 수능을 다시 치는 상상을 하곤 침을 크게 삼켰다. 싫은데…….
도망칠 땐 학교는 안중에도 없었으나 상황이 바뀌니 욕심이 났다. 어떡하지. 일단, 충전부터 시키고 찾아봐야겠다. 영하가 얌전히 있자, 그가 추궁의 눈길을 보냈다.
“바락바락 대들 줄 알았는데, 왜 조용해?”
“뭐 어떡하겠어. 등록금 대 주는 사람이 안 된다는데…….”
난 장학금도 못 받았고…… 돈도 없고. 10억…. 더 빼서 다른 곳에 몰래 둘 걸 그랬나. 못된 생각으로 빠질 찰나였다. 세계가 예상 밖의 이야기를 했다.
“일단 다녀. 2학기 등록해 놨으니까.”
“뭐? 정말?”
“그래.”
웬일이래. 무슨 바람이 불어 허락해 줬냐고 물으면, 분명 짜증 내겠지. 입 다물고 있어야지. 기분이 들떠 아이처럼 발꿈치로 바닥을 콩콩 내리눌렀다.
학교는 계속 다니는 것으로 결정되자 철없이 옷부터 떠올랐다. 공부는 뒷전이고 가을 옷 살까, 부터 고민하는 사이 그가 다시 납작한 배 위를 문질렀다. 쑥 와 닿는 따끈따끈한 손길을 느끼며, 묻기 전 영하가 미리 대답했다.
“지금은 안 아파. 어제 아빠가 너무 거칠게 해서 그래.”
어떻게 된 게 이틀을 못 참고 자꾸 덤벼들지? 휴대폰 켜지면 잦은 섹스로 인한 건강 악화 주제의 기사를 찾아서 눈앞에 들이밀어야지.
슬슬 횟수를 조절할 때가 왔다. 발정기 온 짐승도 이렇게 들러붙진 않겠네. 성욕이 넘치는 건지 그냥 자제력과 이성이 부족한 건지.
속으로는 그를 흉보면서도 슬금슬금 움직여 세계의 어깨에 뺨을 대었다. 키가 저보다 크니 가만히 앉는 것보다 더 불편한 자세였으나 영하는 굳이 그 자세를 고수했다.
단단한 어깨에 눌린 볼살이 위쪽으로 광대와 함께 볼록 튀어나왔다. 세계가 둥그렇게 튀어나온 볼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그럴 때마다 눈가가 고양이처럼 빼쪽 치켜 올라갔다.
한참을 괴롭히던 그가 고개만 조금 기울여 영하의 턱 끝에 입 맞춘다. 마른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백수.”
“왜에.”
“뭐 할 거야, 오늘은.”
“오늘은… 바질 이파리 수확하기.”
영하가 손으로 이파리를 톡톡 떼어 내는 흉내를 내며 대답했다.
한 달 전만 해도 50년 경력 베테랑들의 어깨너머로 배우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얼뜨기 농부 지망생이었으나, 최세계에게 잡혀 와 돈 한 푼 없이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백수 신세가 됐다. 집에서 하는 일이라곤 공부와 잊고 살던 허브 돌보기.
“또? 다 딴 거 아니었어? 너 뭐 바질 농사라도 해?”
“아직 좀 남았어.”
최세계가 바질 소리에 기겁했다. 이름만 나와도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지고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하가 바구니 가득 바질을 따오더니 이틀 내내 바질 잔뜩 올린 미트볼스파게티를 해 줬다. 첫날 두 끼 연속으로 파스타를 먹은 세계가 이튿날에는 나가서 사 먹자고 했으나, 영하가 거절했다.
‘남은 거 다 먹어야지. 남기면 큰일 나. 혼나.’
‘누가 혼내는데. 이 집 주인은 난데.’
‘아무튼 혼나.’
그리하여 네 끼 내내 똑같은 미트볼스파게티를 먹었다. 세계가 그 기억을 떠올리는지 어깨 근육을 굳히고는 한숨처럼 이야기했다.
“갈아서 페스토를 만들든가 해. 더는 생바질 씹기 싫으니까.”
“맛있기만 한데. 투덜대지 말고 직접 하든가.”
“할 수 있어. 먹고 감격해서 울지나 마.”
“됐어. 안 먹을래.”
요리하는 꼴을 보진 않았으나 저 인간이 손도 안 대는 거로 봐서는 못 하니까 그런 거다. 아마 잘했으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이건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건 저렇게 하면 안 되고 잔소리 전쟁이었을 텐데.
“그래서. 또 집에 있겠다고?”
영하의 볼살을 좀 더 꼬집어 보던 세계는 상대가 반응이 없으니 금방 시큰둥해졌다. 이미 한낮처럼 노란 햇살을 잔뜩 내리쬐는 정원을 가리키며 묻는 말에 영하가 자세를 고쳐 그의 가슴 사이에 뒤통수를 대곤 퉁명스레 물었다.
“내가 집에 있는 거 제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이럴 거면 용서해 주니 마니 할 필요가 없었네. 지명수배자 탈출시켜 줘도 집 밖에를 안 나가니. 스스로 감옥에 가둔 거나 마찬가지지.”
“스스로 안 나가는 거랑 타의로 안 나가는 게 같아?”
가끔은 카페 가서 커피도 사고 공원 벤치에 5분 앉아 있다 오기도 해야지. 움직여 봤자 반경이 도보 10분 이내였다. 게다가 휴대폰도 없었으니 당연히 못 나갈 수밖에.
순 자기 탓이면서.
뒤통수에 잔뜩 힘을 주어 세계의 가슴에 마구잡이로 머리를 문질렀다.
도련님. 생활력 없는 곱게 자란 도련님.
영하의 소심한 복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세계는 휴대폰을 들어 인터넷을 켠다. 화면을 보자 영하도 자신의 휴대폰이 생각났다.
드디어 이 금단 증상을 해결할 생각을 하니 손마디가 저려 온다. 설렘을 안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눈가가 꿈꾸듯이 희미한 곡선으로 휘어져 있었다. 고작 휴대폰 하나에.
“나도 충전할래.”
“적당히 충전하고 나와. 영화 보러 가자.”
“벌써?”
벽면의 시계를 보니 이제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좀 이르지 않나. 눈뜬 지 삼십 분도 안 됐는데.
“조조로 봐야 한 푼이라도 더 아끼지. 등록금 내려면.”
“시계나 그만 사고 말해.”
세계를 타박하고 안방으로 들어온 영하는 두 달 만에 만나는 휴대폰에 잔뜩 들떠 있었다. 바로 영화를 보러 가야 하니 만남의 시간은 아주 짧겠지만.
소중한 휴대폰을 조심스레 베개 위에 올렸다. 최영하의 베개가 아니라 최세계의 것이었다. 충전 케이블을 꽂자마자 시커먼 화면에 로고가 반짝이며 등장한다. 영하의 눈동자도 이채가 서렸다.
잠시 기다렸다 열어 보니 부재중 전화와 그간 쌓인 메시지의 숫자가 제법 크다.
나 이렇게 인기 많았었나?
통화 내역부터 들어갔다. 민재와 학교에서 자주 이야기했던 친구들의 내역은 예상한 부분이다. 그러나 부재중 내역에서 의외의 이름을 발견했다.
[아빠]
휴대폰은 부산 숙소에 두고 나왔다. 그걸 챙겨서 집에 가져온 사람이니 이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 봤자 상대가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남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부재중 세 건. 가장 최근은 2주 전이었다. 아마 화해하기 직전의 시점.
보고 있자니 들뜨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가 무슨 심정으로 꺼져 있는 휴대폰에 전화를 했을지……. 차마 가늠조차 되지 않을 그 남자의 감정이었지만, 우울한 상념에 오래 빠져 있을 필요는 없다. 화해했으니까.
자신은 다시는 그를 떠나지 않기로 했고, 그도 더는 혼자서만 알고 있거나, 영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영하는 고개를 내저어 우울감을 공기 중으로 털어 냈다. 더 내려 보니 민재가 보낸 연락이 제일 많았다. 연락을 받지 않는다고 화를 내더니 며칠 뒤 무슨 일 있냐며 온통 걱정하는 메시지였다. 나중에는 정욱이도 너를 찾는다며, 연달아 연락하더니 일주일 전부터는 뚝 끊겨 있다.
이정욱은 뭐지.
영하라도 민재가 갑자기 한 달 넘도록 연락이 끊기면 놀랄 일이었다.
일단은 더 늦기 전에 전화부터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냉큼 통화가 연결됐다.
-야, 최영하! 너 뭐야?!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소리가 휴대폰의 한정된 데시벨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 같아 휴대폰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뭐냐고! 무슨 일인데 연락이 전혀 안 돼? 걱정했잖아, 미친놈아! 다른 애들도 다 연락 안 받는다고 난리던데. 진짜 죽은 줄 알았다. 뭐야. 무슨 일인데? 너 장학금 못 받았다고 쫓겨났냐?
“그런 걸로 왜 쫓아내? 너도 못 받았잖아. 사이좋게 10등 밖이면서.”
-그게 중요하냐? 왜 연락 끊겼냐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다. 둘러댈 거리를 궁리하던 영하는 엊그제 TV에서 템플스테이 다큐멘터리를 본 것을 떠올리곤 대답했다.
“나 템플스테이 갔어. 한 달 좀 넘게. 오늘 막 도착했어.”
-허……. 템플스테이를 한 달 넘게 갔다고? 골 때리네. 그게 스테이냐? 무브지. 장래 희망 바뀌었냐? 스님으로?
“절도 날 안 받아 줄 텐데.”
스님이 되긴 개뿔. 최영하와 최세계라면 아무리 속세의 죄를 씻어 내더라도 자비로운 부처조차 받아 주지 않을 인간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빠, 천주교였던 것 같은데 성경책은 고사하고 주말에 성당 가는 꼴을 못 봤으니 분명 패션 종교인 게 틀림없다.
“아무튼 그렇다고. 전자기기 반입 금지라서 그랬어. 말하고 가야 했는데 바빠서 못 했네, 미안.”
-한 달이나 전화 없이 산골에 짱 박혀서 무슨 생각을 하려고?
은근히 김민재, 예리하다. 보이지도 않을 상대에게 고개를 내저으며 괜찮다고, 지금은 아무런 문제 없다고 대답했다.
잠깐의 침묵 후, 눈치를 보듯 헛기침한 민재가 이정욱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정욱이가 너 찾더라
“걔가 왜.”
-그냥 미안하고 부탁할 게 있다던데. 자세한 건 말 못 한다고 해서 나도 몰라. 제발 말만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 야, 이정욱이 너한테 고백했냐?
김민재 하여간 눈치만 빨라 가지고.
“왜? 나 걔 별로야.”
-알겠는데. 뭔가 좀 그래. 엄청 간절해 보이던데 마음 받아 달라고 연락하려는 건 아닌 거 같고. 너 차단했지? 풀고 전화 한번 해 봐. 그냥 모른 척 무시하는 것도 찝찝하잖냐. 들어 보고 헛소리하면 다시 바로 차단하든가. 어차피 학교 가면 마주치게 돼 있는데 차단 그거 의미 없다.
“…알았어. 전화해 볼게. 나 영화 보러 갈 거라서. 나중에 통화하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사람이면 몰라도 이정욱은 당장 2학기가 시작되면 마주칠 인간이다.
통화를 끊고 그대로 침대에 대자로 뻗었다. 고작 4분 통화했는데 기운이 쪽 빠졌다.
영화 보러 갈 힘 없을 것 같은데.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이불 위를 손톱으로 긁다가 뒤집기 하는 아기처럼 끙끙대며 뒤돌아 천장을 보고 누웠다.
차단 풀고 전화해야 하나. 걔가 나한테 그렇게 간절히 바랄 게 뭐가 있지. 우린 변호사 끼고 피해 보상 하고 끝났는데.
하지만 찝찝하지 않겠냐던 민재의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이정욱에게 남은 앙금이 여전하지만, 영하 또한 깨끗하게 처리되지 않은 잔여물을 원하지 않았다.
아빠와도 화해했으니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야지.
할머니와 서민석은 아직도 커다란 복병이었지만, 아빠의 말대로 내가 나설 수 없는 일이었다. 믿고 기다리는 게 최선이었다. 무서워도… 참고 이겨 내 보는 수밖에.
할머니와 서민석은 아빠가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나는 이정욱을… 만나 보는 건 좀 그렇고 통화, 아니 메시지만…….
막상 마음먹고 나니 간이 쪼들렸다.
대체 이정욱네 누나가 헛소리한 날 무슨 정신으로 주먹을 날린 거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데.
“하아.”
뜨끈뜨끈한 휴대폰을 손에 쥐고 한숨만 여러 번 내쉬길 반복한 끝에, 영하는 연락처에 들어가 차단 목록에서 이정욱을 삭제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로 이야기하는 편이 더 거리감이 있겠으나 몇십 분간 녀석과 대화하느라 시간 쏟고 싶지 않다. 통화로, 용건만 간단히.
그러나 의미 없는 짓이었다. 뚜-뚜-뚜- 흐르는 신호음이 끝날 때까지 정욱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안내 메시지에 전화를 꺼 버리곤 푸우욱 한숨을 내쉬었다.
부재중 전화가 이렇게 안심이 될 줄이야.
일단은. 영화 보고 나서 생각하자.
*
“아침부터 다들 부지런하네.”
아직 방학이라 그런지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과 커플들이 눈을 돌리는 곳마다 존재했다. 일찍 일어났다고 조금 으쓱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와중에도 자꾸만 하품이 흘러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우우. 팝콘이나 먹을까.
“팝콘.”
“사.”
“캐러멜 사도 돼?”
“마음대로 해.”
고개를 주억이곤 냉큼 팝콘을 주문하고 음료수에서 잠깐 고민하다 그냥 콜라로 두 잔 시켜 버렸다.
탄산 안 마시던데,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내 마음이야.
캐리어 백에 담아 주는 음료와 팝콘을 들고서 돌아보자, 건너편 벽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다가왔다.
평생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해 줘도 저 모양이었다. 언제 도망갈지 몰라 눈이 떨어질 새가 없다.
근처 빈 테이블에 팝콘과 콜라를 올려 두고 나란히 앉았는데. 뺨과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이름 모를 사람 몇이 두 사람을 곁눈질하며 지나치고 있었다. 빨대로 콜라를 쪼옥 빨아 넘긴 영하가 같은 반지를 낀 손을 의식하곤 슬그머니 왼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며 팝콘만 욱여넣었다.
뭐라고 생각하며 보는 걸까. 지레 찔려 목구멍으로 넘긴 탄산이 왼손에 닿은 듯이 아르르했다. 형제지간이나 삼촌, 조카로 보려나. 아니면 단지 아빠 얼굴 구경하다가 가는 걸 수도 있고.
그 생각을 하니 의식하기도 전에 입술이 얄궂게 일그러지고 퉁명스러운 표정이 지어졌다. 턱을 괸 채 시간만 흘려보내던 세계의 손이 덥썩 튀어나와 영하의 입술을 건드렸다.
혹시나 누가 커플로 봐 주려나 상상하고 있던 영하가 놀라 파드득대며 몸을 떨었다. 철제 의자가 뒤로 밀려 나가며 끼기긱- 바닥 긁는 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깜짝이야…!”
“종일 보고 있어도 심심하지는 않네. 혼자 삐지고, 화나고, 기분 좋고.”
최세계의 말에 영하의 핀트가 이상한 곳에 꽂혔다.
“웃기지 마. 하루 종일 보지도 않잖아. 8시에 나가서 7시에 들어오는 주제에.”
“으음, 아빠가 출근해서 서운했어?”
“…맞아. 서운해. 일찍 들어와.”
하루 종일 보는 게 불가능하단 말에는, 무슨 생각인지 눈 아래 도톰한 살을 만들어 내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웃는 얼굴에 화는 못 내겠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얇게 접히는 눈가와 시원하게 벌어지는 입술이 좋아서 뚱하니 다시 빨대를 입에 무는데, 멀지 않은 건너편에 눈에 익은 얼굴이 보였다. 최세계의 어깨 뒤편, 무인 티켓 기계 앞에 선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
영하의 기색에 세계마저 뒤돌아보더니 같은 사람을 발견하곤 눈가를 찡그렸다.
“데이트가 아니라 가족 모임이었나. 아들이 둘이네.”
상대는 승준이었다. 주변에 또래로 보이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친구들과 함께 보러 온 모양이다.
세계와 눈이 마주치자 머뭇댄 승준이 느리게 걸어왔다. 발을 질질 끌면서 오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가까이 온 녀석은 생각보다 더 불편한 기색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그래. 오랜만이네.”
“네… 아버지도….”
영하를 보곤 말끝을 흐린다. 할 말이 없는 쪽은 영하도 마찬가지였다. 승준이에게는 미안한 마음만 들어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승준이는 형과 아버지가 피 섞인 사이에 몸까지 섞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낯이 뜨거워져 이슬이 맺힌 콜라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승준이는 내가… 아빠한테 억지로 당하는 줄로 알고 있을 텐데.
그러니 도와준 거겠지. 그렇게 도피시켜 놨더니 두 달 만에 데이트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뒤통수가 얼얼할 일이었다.
세계와 승준의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알 리가 없는 영하는 혹여나 승준이 뒤늦게 사실을 알고 일을 크게 벌일까 두려워졌다.
설마 가족들… 할머니 말고도 아시는 건가.
큰고모와 작은고모, 할아버지까지 합세해 내지르는 원색적인 비난을 떠올려 보곤 얼굴이 희게 질렸다.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했다. 잠시간의 그와의 싸움에 잊고 지내던 것이 다시금 뇌리에 낙인처럼 새겨졌다.
불안해지자 저도 모르게 버릇처럼 왼손에 낀 반지를 문지르며 어깨를 움츠렸다. 죄인처럼 몸을 숙이는 영하를 목격하고 표정을 굳힌 세계가 이내 가라앉은 어투로 내뱉었다.
“형한테도 인사해.”
“…형도, 오랜만이네.”
“어…….”
시선은 테이블에 두고 대답했다. 탁자 모서리를 쥔 손 위에 온기가 덮였다. 세계가 손을 잡은 것이다. 화들짝 놀란 영하가 어깨를 굳혔다.
승준이 앞에서 이러면 안 돼.
얼른 손을 빼려 하자, 세계가 먼저였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꽉 붙잡아 깍지 끼며 승준을 턱짓해 가리켰다.
“영하 너도 똑바로 인사해야지.”
연인처럼 손가락을 얽어 두고는 잔소리를 하는 아빠의 음성이었다. 아무도 뭐라 한 사람 없었으나 홀로 기가 죽은 영하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어… 안녕.”
“됐네. 인사했으니까, 끝.”
승준에게 들렸을지 확신도 가지 않은 상황을 멋대로 종결시킨다. 팝콘과 콜라를 쥔 세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라도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건 최승준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에게 묵례하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무리로 합류했다.
*
기분이 안 좋았다. 승준이 앞에서 손을 잡는 모습을 보여 준 일이 타격이 컸다.
영하는 저공비행을 하는 군인 영화를 보러 왔는데, 도통 집중이 안 되어 내내 이마 중간에 줄 두 개를 그어 놓고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만약 가족들이 둘 사이를 알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시뮬레이션 중이었다.
나가라고 소리친다면 어떻게 할까. ‘저는 이미 나가서 아빠랑 살고 있는데요?’ 당돌하게 대답해 봤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초등학교 5학년의 대답 같았다.
의미 없는 짓에 골몰하던 찰나, 그가 몸을 옆으로 한참 기울였다. 조조 영화로 돈 아끼자던 남자가 값비싼 프리미엄 상영관으로 예매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 우수수 떨어지는 폭탄으로 스피커가 시끄럽게 울릴 때쯤, 팝콘을 먹는 최영하의 귓가에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뜨거운 숨결이 바짝 닿았다.
“여기. 바로 이 자리에. 귀신 나온다는 거 알아?”
“…뭐?”
귀신이라고?
겁쟁이 최영하는 세상에 겁나는 게 무척이나 많아 두 손을 다 사용해도 모자랐지만. 귀신은 그중 첫 번째다. 본 적도 없는데 왜 이리 무서울까. 아니, 본 적이 없어서 무서운 걸까? 귀신 이야기만 들어도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털이 쭈뼛 섰다.
영하가 크게 치켜 떠 흰자가 드러나는 눈길로 영화관 안을 느리게 훑었다. 프리미엄 상영관인 데다 영화도 극장에 걸린 지 꽤 시일이 지난 작품이라 몇 자리 빼고는 비어 있다.
스크린에서 폭탄이 터지는 영화관에 을씨년스러움이 느껴지는 건 그 순간부터였다. 영하가 자세를 고쳐 앉고는 되물었다.
“거짓말이지…?”
“사실이야. 4층 6관. 이 자리에서 귀신 나온다고.”
좀 더 명확한 정보를 전해 준다. 괜히 들었다. 최세계의 손가락이 영하가 앉은 좌석 숫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숫자를 확인하곤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최영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겁쟁이였다.
아니야, 영하야. 무서울 게 뭐 있어. 세상 사람들은 귀신보다 나나 아빠가 더 무서울걸? 그러니까 안 무서워. 내가 더… 내가.
영화를 볼 수 있을 리가. 그 순간부터 옷 아래로 드러난 살갗마다 닭살이 돋고 머리털이 곤두서서 승준과 가족들 걱정을 할 틈새가 없었다. 분명 장난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사람 심리가 그랬다. 모서리에 귀신이 살고 있다는 글을 보면 그날은 온종일 방 모서리를 쳐다보지 못하는 것처럼.
스크린이 아니라 영화관의 시커먼 모서리를 노려보는 영하에게도 흥미로운 시선이 닿았다. 귀신이 아니라, 최세계의 시선이었다.
그는 금방 영화에 흥미를 잃고 겁쟁이의 행동거지만 눈에 담았다. 이윽고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무렵 영하의 감정도 최고조에 이르러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나갈래.”
좀 전부터 자신만 쳐다보는 남자의 손을 붙잡고 속삭였다. 척 보기에도 안색이 잿빛이었다. 최세계가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출 생각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아. 살 것 같네.”
서둘러 시커먼 극장 안을 빠져나오자 심장이 빠르게 뛴다. 크게 숨을 터뜨리며 무릎을 잡고 호흡했다.
어후우. 그 한숨 소리에 세계가 옆에서 팝콘과 콜라를 버리고는 돌아섰다. 영화를 보던 중에 지나친 상상력에 휘말려 기절할 뻔한 자신과 달리, 잘생긴 얼굴 만면에 핀 미소를 확인하니 영하는 다른 의미로 뒷목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짜증 나게…! 왜 장난쳤어?!”
“장난이라니. 난 진지한데.”
“영화도 제대로 못 봤잖아! 아까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고작 이거 가지고. 네가 정도 이상으로 겁이 많은 거지.”
다가온 세계가 턱 아래를 잡아 올리며 말했다. 낯 뜨거운 스킨십에 눈치 보인 영하의 눈이 데구루루 굴러 복도를 확인한다. 영상 도중에 나와 사람은 없었으나, 곧 직원들이 나타날 수 있다. 밖에서 이러면 곤란하지. 뒷걸음질 쳐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자 세계가 눈가를 좁히며 찌푸렸다.
“왜 그런 말을 했어? 오랜만에 영화 보러 나온 건데 데이트 다 망쳤잖아.”
“이미 데이트는 망쳤어. 영화 보는 내내 날 옆에 두고 딴 남자 생각만 했잖아.”
왜 저렇게 자꾸 과장되게 말을 하지? 그런 건 사업가 아니고 사기꾼 특징 아닌가?
딴 남자 생각이라니. 그냥 좀 사색에 잠긴 거지.
나름대로 미래를 위한 생산적인 행동이었다고. 게다가 저 인간이 말하는 남자야 뻔하다. 최승준이었다. 왜 자꾸 날 엮지 못해 안달이야? 머릿속에 음흉한 생각밖에 없는 꼴이다. 꺼 둔 휴대폰을 켜고 그의 손목을 잡아 걸으며 투덜거렸다.
“자꾸 저번부터 승준이한테 그러는데, 그러지 마. 나 진짜 걔한테 아무런 감정 없어.”
“없어야지.”
“그래. 없다고.”
기다란 복도에 둘만 있으니까 아직도 무섭네.
보통 귀신들은 이런 곳에서 나타난다. 갑자기 불이 깜빡깜빡하다가 화악. 그러나 귀신 대신, 그보다 끈질긴 최세계가 자꾸만 손을 잡으려 힘을 사용했다. 손잡으려는 사람과 그러지 않으려는 사람끼리 엎치락뒤치락 힘겨루기 탓에 영하의 목덜미까지 피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까 봐 일부러 손목 잡았는데 왜 이래, 진짜!
“손은 집에 가서 잡고, 좀!”
“근데 너, 전화 오는데.”
어라? 휴대폰 켠 지 얼마나 됐다고 전화가 오지. 한 달 반 잠수 좀 타니까 인기가 많아졌나. 이래서 인간 생활에도 밀당이…….
휴대폰을 들어 보자 화면에는 이정욱이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세계의 날카로운 눈빛이 휴대폰 화면에서, 영하의 얼굴로 느리게 이동했다. 영화관에 상주하는 귀신도 기에 눌려 달아날 시커멓고 음산한 시선을 느낀 영하가 죄인처럼 더듬더듬 해명했다.
“용건 있대서……. 꼭 말해야 한대서….”
“줘 봐.”
두말하지 않고 공손하게 내밀었다. 여기서 통화하면 될걸, 휴대폰을 받아 든 세계는 굳이 긴 다리를 넓게 뻗어 복도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결국 복도에는 영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
11시 40분. 늦은 브런치를 먹고 근처 카페에서 원두 한 팩을 사서 집으로 출발했다. 아메리카노는 시험 기간 아니면 손도 안 대지만, 커피 향은 좋아서 원두가 담긴 봉투에 코를 박고 킁킁대다가 개냐는 소리를 들었다.
개라고 하니까, 시골에 있을 우리 깜둥이 생각나네. 깜둥이 나 아니면 산책시켜 줄 사람도 없는데… 또 그 1m 줄에 묶여 있을까.
영하의 속상한 마음을 아는 것처럼. 집에 도착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오자 유리창 표면에 튄 빗방울 때문에 바깥 풍경이 뿌옇게 흐려진 빛망울 같다.
창가에 이마를 쿵- 대고서 흐리멍덩하게 아래로 흐르는 빗방울을 따라 보고 있자니, 뒤늦게 욕실에서 나온 세계가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로 샤워하는 남자. 몸이 닿는 곳마다 뜨겁다.
“더워.”
영하가 몸을 흔들며 칭얼댔다. 세계는 영 다른 소리를 했다.
“이정욱이랑 통화할 거면 나한테 먼저 허락받아.”
“아빠도 업무상 여자들이랑 통화할 때 나한테 허락받든가.”
“쉽지.”
쉽긴 뭐가 쉬워?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응시하니 흰 뺨에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린다. 형광등 불빛이 내려앉은 뺨이 기억보다 희었다.
왜 이번 여름에는 골프도 안 나가서 얼굴이 하얗대.
한여름에 뭘 그렇게 드시고 정력이 오르는지 이 시기만 되면 골프며 테니스며 요트며 온갖 야외 스포츠를 섭렵하러 나가던 사람이 내내 집에만 있어서 여느 때보다 흰 편이었다. 저런 얼굴로 밖에 나가면 곤란한데.
“정욱이를 왜 집으로 불렀어? 나가서 만나지.”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말고 그냥 여기서 만나서 깔끔하게 끝내는 거로. 그리고 너랑 나랑 같이 사는 사이라는 걸 알아야 미련 끊지.”
“나한테 두 대나 맞고 미련이 있겠어?”
영하가 그날의 자신을 떠올리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난생처음으로 사람을 때려 본 날이었다. 두 번째는……. 시골에서. 괜한 생각 했다. 유리창에 꾹 눌렀던 이마를 떼어 내고 뒤에 선 남자의 가슴팍에 편안히 기대어 섰다.
“왜 없어. 혹시 모르지. 그 녀석이 맞는 거 좋아하는 놈이라면, 그날의 기억이 짜릿했을 테니까.”
“으. 또 이상한 소리 한다.”
저 괴상한 이야기에 더 살이 붙기 전, 때마침 손님이 등장했다. 벨 소리가 울리고 인터폰에서는 해가 가려져 어둑한 대낮 아래, 그보다 더 수심에 찬 이정욱의 얼굴이 나타났다.
편의점에 파는 작은 비닐우산 하나를 쓰고 온 이정욱의 어깨는 온통 젖어 있었다. 현관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물을 보고 놀란 영하가 얼른 달려가 수건 두 장을 가져와 내밀었다. 정욱이 어색한 손길로 받아 목덜미와 뺨을 닦아 냈다.
“고마워. 그리고… 미안.”
“어어…….”
아까 승준이랑도 우연히 만났는데 정욱이랑도 강제로 마주해야 한다니. 오늘 무슨 날이야?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세계의 등 뒤로 슬그머니 발을 뺐다. 조금 떨어져 있으려는 의도였는데 언제나 영하 마음대로 굴어 주지 않는 남자가 불쑥 다가와 허리를 바짝 당겨 끌어안았다. 졸지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끌어안긴 영하가 뺨을 붉히며 이를 악물었다.
정말 시도 때도 안 가리고…….
“놔….”
“용건만 간단히 빨리하지.”
“네…….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최세계의 허리를 꼬집어 복수하던 영하는 부탁이라는 말에 시선을 돌렸다. 이정욱은 갑자기 내린 소나기가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무언가에 덮쳐진 모습이었다. 잔뜩 수세에 몰려 드러난 두려움을 갈무리하지 못한 창백한 낯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이정욱이 이내 무릎을 굽혔다.
“야… 뭐 해. 너 왜 그래?”
“누나가… 일주일 넘게 사라졌어요.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실종 신고는 경찰서에서 받아 줄 텐데.”
그의 비아냥대는 말투까지 수긍하기는 어려웠으나 영하도 같은 생각이다. 사라진 누나를 왜 여기서 찾는 걸까. 그러나 대답은 곧바로 이정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첫날에 실종 신고… 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아무런 소식도 없고, 수색에 진전도 없고… 제 생각엔 아무래도 서민석 검사 때문인 것 같아요.”
또 등장하는 그 지긋지긋한 이름. 손아귀에 가득 힘이 들어간다. 세계의 셔츠를 강하게 움켜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허리를 안은 손이 등 뒤로 넘어가 겁먹지 말라는 듯, 따뜻하게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괜찮아. 겁 안 먹었어. 발바닥에 달라붙은 지저분한 유리 테이프처럼 귀찮고 성가실 뿐이었다.
“누나가, 그냥 참을 수는 없다며 서민석한테 자료 넘겨준 이후로 회사에서 잘리고 많이 힘들어할 때 서민석이 약을 줬어요. 그 이후로 누나가 제정신이 아니었고요. 그러다가 며칠 전에 갑자기 일하러 가겠다며 나갔는데 연락도 안 됩니다. 일할 정신이 아니었는데…….”
약. 비슷한 수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시골에서 본 뉴스에서도 약 이야기가 나왔지.
정욱의 말을 들어 보면 이해인의 경우에는 맨정신일 때 약을 권유한 것 같았으나, 어찌 됐든 목적은 하나였다. 곪은 곳을 파고들어 이성을 잃게 하는 것.
“후안무치가 따로 없군.”
최세계의 비아냥에 굽은 등이 움찔거린다. 서투르게 말을 더듬은 정욱이 이어 말했다.
“여, 염치없는 부탁인 거 압니다. 평생 사과할게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입만 다물었으면 누나가 제 일에 나설 일도 없었고, 무모한 짓 할 리도 없었을 거라, 제가 너무 죄책감이 들어서 누나를 꼭 찾고 싶어요.”
이정욱이 턱 아래로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 내며 이었다.
“부탁드립니다…. 다른 부탁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어요. 최세계 상무님이 제가 아는, 제일…….”
“나와 관련 없는 일인데 내가 잘도 개입할 거라 생각하나 본데. 내가 서민석을 잡아넣고 싶은 건 맞지만 네 누나를 구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야.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저희 누나를 이용하세요.”
최세계가 눈썹만 올리며 침묵했다. 턱 아래로 흐른 눈물을 닦아 낸 정욱은 낮은 숨을 꺼트리듯 조용히 호흡을 이었다. 한참 뒤에서야 대답이 나왔다.
“누나가 서민석이랑 함께 약을 했다고 했어요. 떠나기 며칠 전에 갑자기 메시지 보내더라고요.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어쨌든 누나만 찾으면 반드시 자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누나가 마약 건으로 조사받게 되면 서민석도 반드시 연루될 거예요.”
나중에는 울음기가 섞여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욱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온갖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영하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싫었다. 완전한 타인이 되어 자신과 세계의 사이를 바라본 실감은 끔찍했다. 남들이 그와 자신을 다정한 연인 사이로 봐 주지는 않아도, 그런 편견을 한 꺼풀 덧씌워서 볼 거라고 예상치 못한 만큼 그 편견이 세계에게 칼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다.
알고 싶지 않은 현실을 깨닫게 해 준 이정욱과 그의 누나가 미웠다. 선의로 비롯되었을지 몰라도 자신은 가시밭길을 맨발로 걷는 듯한 아픔을 겪었다. 좋아해서 걱정되어 그랬다는 이정욱이야말로 사랑을 가장한 폭력이다.
하지만…….
내가 너무 무른 걸까.
입술을 꾹꾹 씹으며 고개를 들자, 잠깐의 시선도 느낀 그가 영하에게로 턱을 돌렸다.
“왜.”
“……못 도와줘?”
이윽고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 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자꾸 내가 탐정인 줄 아나 본데. 난 사업가야. 마약 탐지견은 더더욱 아니고.”
불쾌한 듯 투덜거리더니 기둥에 어깨를 기대어 섰다.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진 눈썹뼈 아래가 한참을 찡그려져 있다가 뒤늦게 펴졌다.
“이미 서민석은 불법 총기 소지와 마약류 관리법 위반으로 기소됐어. 이 상황에 네 누나 하나 더한다고 도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난 완전히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카드 말곤 필요 없어. 네 누나가 그 정도는 아니야.”
“…….”
도움 되지 않을 거란 대답에 이정욱은 입술을 말아 물며 침묵했다. 턱 아래로 여전히 굵은 눈물이 빗물처럼 떨어졌다. 정욱이 느낄 절망감이 미약하게나마 짐작 가능했다. 영하로서도 이해 못 할 상황인데 당사자가 된 이정욱은 얼마나 괴로울까. 미워도 가족이란 말이 있듯이 결국은 떼어 낼 수 없는 끈끈한 존재였다. 하물며 두 사람은 우애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정욱아, 일단. 집에 가.”
아빠는 내가 설득할게, 하고 말하려던 영하는 입을 벌린 채 잠시 침묵했다. 절대 들켜서는 안 되며 정욱에겐 단지 커플로만 보여야 했다.
“이 사람은 내가 설득할게.”
“너한테는 진짜, 너무 미안하다…….”
“알았으니까 너 일단 가. 갈 때 택시 타고 가. 비 맞지 말고.”
“눈물겨운 우정이네.”
비아냥대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아열대 기후의 소나기처럼 사납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졌다. 정욱이 가져왔던 우산을 내밀자, 바닥을 내려다보던 녀석이 비틀대며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욱이 죽으러 가는 사람의 낯으로 인사를 고했다. 쓸쓸한 뒷모습을 뒤로하고 문을 닫았는데, 그 문틈 사이로 정욱이 남기고 간 절망감과 괴로움이 연기처럼 들어와 발치에 떨어졌다.
최영하는 타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공감하려는 버릇이 있어 문제였다. 분명 민재에게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껄끄럽고 곤란했던 정욱에게 측은지심이 들어 정신이 소란스러웠다.
세계의 마음도 이해했다. 그와 자신의 일만으로도 벅찬 상황이다. 더불어 선의로 도와줄 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아랫입술을 손끝으로 만지며 영하가 중얼거렸다.
“복잡하네.”
“복잡할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나도 저 두 사람 싫어. 싫은데……. 그래도 그냥 무시할 사안은 아닌 것 같아.”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미소 지은 남자가 곧바로 표정을 굳히고는 신랄하게 다그쳤다.
“이해인이 중독된 멍청이라는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설마 이해인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결국엔 그 여자가 저지른 일로 우울해하다 나한테서 도망쳤잖아. 서민석이 사진 같은 걸 쥐고 협박했겠지. 그게 그 여자 작품이야.”
그 자리에도 없었으면서 어떻게 저렇게 잘 알까.
영하도 물론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해인을 구하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나 우연을 통해서라도 행방을 알게 된다면, 무시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 영하의 결론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보고 모른 척해.”
“해 봐. 할 수 있어.”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모두가 힘들다고 약에 손을 대진 않아. 여기가 제약 회사가 판을 짜 놓은 미국도 아니고, 마약성 진통제 처방해 주는 의사가 얼마나 있겠어. 일부러 알고 찾아가는 거야. 제 발로 늪지대에 들어가 목구멍을 처박는데 도와주는 멍청인 없어. 알아들어? 구해 주겠답시고 발 넣는 순간 너도 같이 가라앉는 거야.”
잔뜩 낮게 깐 음성이 영하를 설득했다. 양쪽 어깨를 붙잡혀 그와 눈길이 겹쳐졌다. 세계가 이맛살을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영하의 안색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그가 더 걱정하기 전에 영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객기 부릴 생각은 없다. 그가 싫다면 강요할 수도, 강요하고 싶지도 않았다.
얼굴에서 그늘을 애써 걷어 내곤 손을 포개어 쥐고 재차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다시는 떨어져 지내지 않으려면 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되는 것은 물론이며 존중할 수 있어야 했다. 그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알겠어. 이해했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네가 나서기만 해 봐.”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나서…. 그러니까 이정욱도 내가 아니라 아빠한테 부탁한 거잖아.”
“얌전히 있다가, 학기 시작하면 학교만 왔다 갔다 해.”
하아. 학교 가서 이정욱 얼굴은 또 어떻게 보지. 세계의 어깨에 뺨을 기대며 답답한 숨결을 연이어 내보냈다. 비와 함께 기분이 축축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