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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6. 세계 (1) (7/11)

챕터 6. 세계 (1)

초록은 꿈을 꾸게 한다. 네모난 칸을 가득 메운 덜 익은 벼가 바람을 따라 아름답게 물결쳤다. 푸르른 녹색의 파도가 펼쳐지고, 발과 수레가 닿지 않는 좁은 길목에는 저마다 이름이 존재할 잡초들이 허리를 펴고 섰다.

뜨겁고 후덥지근했지만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가 폐부 안으로 들어온다. 소박하지만 청량한, 품에 안길 듯한 풍경.

영하는 눈앞에 펼쳐진 온통 초록색의 자연을 보며 반대로 몸을 작게 웅크렸다. 영하의 꿈은 최세계에게 유일무이한 존재로 사랑받아 그의 곁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연인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그가 마냥 예뻐해 주는 대상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다.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 주고 가슴 깊이 애정을 나누어 주는 관계.

어쩌면 그래서 오래가지 못했나 봐. 내가 기대려고만 해서.

손을 뻗어 그늘에서 벗어난다. 손바닥 절반에 햇빛이 내려앉았다. 멍한 기색으로 ‘덥다.’고 생각하던 시점이었다. 뒤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거 앉아서 뭐 하노! 와서 점심 먹어라.”

“갈게요. 할머니!”

엉덩이를 털어 내고 벌떡 일어난다. 금 간 자리에 여러 번 시멘트를 겹쳐 올려 얼룩덜룩한 담장을 지나쳐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TV에서나 봤던 시골 가정집의 풍경이 이제는 익숙했다.

고속버스와 시외버스 두 번. 네 시간 반 걸려 도착한 곳은 지도를 아무리 확대해도 건물의 위치가 그려지지 않는 시골 깡촌이었다.

‘아버지가 절대 못 찾을 만한 곳이 있어.’

‘내 진짜 외할머니. 첩이었어. 그러다 몸만 쫓겨나서 따로 살아. 혼자 사시는 분이고.’

‘형 도와주면서 부탁하는 거야. 할머니 좀 보살펴 줘. 아버지도 거긴 몰라. 시골이라 CCTV 같은 것도 없고 경찰도 신경 안 쓰는 어르신들 몇 명 사는 정말 작은 동네야. 할머니 혼자서는 거동도 불편하고 많이 외로우셔. 당분간 형이 거기서 살아.’

‘육 개월만 버티면 아버지도 포기하실 거야. 반년만 버티다가 외국으로 가.’

본가에서 문을 따고 영하와 마주했던 승준의 본론이었다.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혼란스러웠다.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승준이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것도, 승준이 자신의 아버지를 불한당 취급하는 것도.

영하가 그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승준의 이야기가 시발점이었다.

둘 사이의 관계가 밝혀지면 모든 책임이 그에게로 향할 것이라는 예감이 내내 영하를 괴롭혔다. 그는 가해자도 아니고 영하가 도망쳐야 할 상대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생각이 두려웠다.

너무 짧았어.

최소한 1년은 그와 연인 놀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작 4개월. 몇 달 만에 들켜 버릴 불장난에 지나지 않을 행위에 불과했다. 뇌의 중추를 자극하는 비도덕적인 행위는 그보다 더 큰 리스크를 동반한다.

문제는 리스크의 대부분을 최세계가 감당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영하는 성인이고, 성인이 되어 그를 선택했지만 둘 사이에는 열여섯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었으며 그와는 사회적인 위치가 달랐다.

부산으로 여행을 오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곳은 기차는 물론이고 바로 가는 고속버스도 없었기에 시외버스와 시내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했다. 서울에서 출발한다면 못해도 여섯 시간은 걸릴 거리였다. 그사이 잡히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새벽. 온몸을 가리는 시커먼 우비의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터미널에 도착한 영하는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가 티셔츠를 두 겹으로 겹쳐 입고 모자를 썼다. 일부러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갈 때 그 틈에 숨어 빠져나왔다.

CCTV로 행적을 찾는 것을 방해하려는 시도였다. 그가 자신을 찾아선 안 된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떠나 버렸으니 분명 깊게 상처받았을 것이다. 며칠 안 가 붙잡힌다면 그 남자에게 상처만 남긴 의미 없는 행위일 뿐이었다.

시내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영하는 다시 한번 옷을 갈아입었다. 남루해 보이는 시커먼 티셔츠와 카키색 바지였다. 신발도 고쳐 신은 후 커다란 타포린 쇼핑백에 가방을 담고 모자를 구겨 썼다.

깊은 산골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영하는 내내 울었다. 창문에 머리를 박고 눈가가 퉁퉁 부을 때까지 울었다. 청승맞은 짓 하는 본인을 두들겨 패고 싶은 만큼 기분이 들 때까지.

목적지까지는 버스에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야 했다. 미리 출력해 둔 지도를 보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척척하던 뺨은 어느새 말라붙어 버석한 소금기가 느껴졌다.

열네 살에 시작된, 어긋난 자신의 마음도 애초에 말라 버렸으면 더 편했을 텐데.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살았을 텐데…….

“할머니! 제가 할게요!”

“됐다. 끝났다.”

허리가 조금 굽은 할머니가 은색 밥상을 들어 마루에 놓고 있었다. 황급히 달려가 도와드리려고 했으나 이미 밥상을 내려놓은 뒤였다.

“할머니, 앞으론 제가 할게요. 무거운 거 들지 마세요.”

“니 없을 때 평생 내가 혼자 했다. 뭐가 무겁다고. 많이 먹어. 돼지고기 사 왔다.”

“죄송해요…. 제가 시장 따라가 드려야 하는데.”

시장엔 갈 수 없다. 영하는 이 마을을 벗어날 수 없는 신세였다.

“혼자 가는 게 더 편한데 뭐. 됐다. 집에서 바닥 잘 닦아 놨네.”

왜 여기까지 와서도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지. 머쓱하게 자리에 앉아 수저 정리만 도와드렸다. 다음에는 식사 시간 전에 미리 와서 도와드려야겠네. 할머니는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며 눈치 보는 영하에게 일렀다.

“영하 네가 생활비도 많이 갖다줘 가지고 내가 고기도 다 사 먹네.”

“고기 많이 사 드세요…. 소고기도요.”

은색 앉은뱅이 식탁 위에는 양념갈비가 올라 있었다. 할머니의 앞으로 접시를 밀자,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그어진다. 영하의 살가운 행동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주일 전, 무작정 커다란 짐과 소고기 상자를 들고 방문한 영하를 할머니께서는 흔쾌히 받아 주셨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얼마든지 있어도 된다며 우느라 얼룩덜룩해진 영하의 뺨을 찬 수건으로 쓸어 주셨다. 아빠 말고는 처음 느끼는 온기였다.

어쩌면 난… 어른들이랑 잘 맞는 걸지도 몰라.

엄마가 친정과는 절연해 외가 사람은 본 적도 없었고, 친가의 할머니는 영하에게 떠나라고 한 사람이었다. TV에서나 보던 가까운 할머니를 처음 겪었다.

“승준이랑 많이 친하나?”

“…네. 친해요.”

“승준이 착하제. 전화도 자주 오고, 승준이 참 착하다.”

“네네. 착하죠.”

최승준… 집에서는 무뚝뚝하게 굴더니 할머니께는 잘했나 보네.

승준이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그리움을 품은 애정이 여러 겹 덧씌워져 있었다. 식사하다 말고 갑자기 유선 전화기 아래의 서랍을 열더니 까만 사각형 주얼리 케이스를 꺼내 들어 영하에게 내밀었다.

“곱제. 이것도 사기는 지 애미가 샀어도 승준이가 골라 줬다.”

상추쌈과 고기가 오른 밥상을 배경으로 케이스를 열자 동글동글한 진주 목걸이가 드러나 반짝였다. 미색의 진주 위를 쓰다듬는 손길. 귀하고 소중해 차마 착용하지는 못하면서도 매일같이 열어 들여다봤을 모습이 선했다.

내내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것을 보며, 영하는 진주 목걸이를 선물받은 할머니가 아닌, 이런 애정을 받아 온 승준이가 부러워졌다. 영하에게도 사랑해 주는 할머니가 있었다면 많은 것을 해 드렸을 거란 상상도 이어 봤다.

엄마는 영하를 사랑해 주지 않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어쩌면 엄마는 타이밍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 사랑하질 않아서, 뒤늦게 사랑해 주고 싶어도 용기가 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미국으로 떠난 엄마를 잠깐 떠올린 영하는 이내 생각을 접었다. 늘 실처럼 따라오는 어떤 남자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랑에 타이밍이 있다면 이별에도 마찬가지였다.

*

최영하란 존재는 그에게서 굴욕의 부산물이었다. 20년 전, 잔상 하나 없이 기억이 모두 사라진 역겨운 사건에 의해 태어난 그의 핏줄. 그러나 최영하는 최세계의 삶에서 가장 귀애하는 것이었고 또한 전부였다.

그 애가 가진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알고 있다. 그걸 믿고 방심했다. 영하가 떠나리라 의심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뭐가 문제였을까. 모든 것이 톱니바퀴에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는데. 자신만의 착각이고 자만이었을까.

“세계야.”

높고 공허한 천장으로 초점 없는 시선을 두는 사이. 누군가 그를 부른다. 어머니였다. 벌써 한 시간째 말없이 앉은 아들을 향한 한숨 섞인 근심. 세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영하가 그를 떠난 갖가지 이유 중 하나였으니.

‘확인해 본 결과 사모님께서 도련님 대학에 찾아가신 적이 있습니다. 도련님이 서민석과 만나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그날 영하는 고열에 앓았다. 눈가와 뺨이 짓무를 만큼 울면서도 병원에는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건 자신의 잘못이었다. 감기 몸살이라 단순히 여길 게 아니라 좀 더 면밀하게 살펴야 했다.

차갑게 식은 공기 사이로 팽팽한 전류가 흐르는 듯하다. 따뜻한 홍차를 테이블 위로 내려 두던 중년의 여성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머,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가서 볼일 봐요.”

“예, 사모님.”

컵 받침 위로 넘친 홍차를 보며 놀라자 세계의 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파리한 안색의 최세계는 미동 없이 소파에 앉은 채로 이따금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이 주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최세계는 후회와 분노에 휩싸여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고속버스 터미널 화장실로 들어가는 CCTV를 찾아냈으나 나오는 사람 중 영하는 없었다. 옷을 갈아입거나 변장을 하고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여행의 목적이 자신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배낭에 옷을 한가득 넣어 간 것도 여행을 위한 준비가 아닌, 추적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나도 이리저리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으니 잠이라도 좀 자라. 몰골이 이게 뭐니….”

걱정스러운 목소리에도 대답이 없다. 찻잔을 아들의 앞으로 밀어 준 그녀가 연신 큰 소리로 한숨을 내며 무릎을 쥔다. 탁 트인 거실 안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방금 막 만들어 온 샌드위치를 건네 보아도 세계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숨만 붙은 채로 굳은 사람 같았다. 세계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버림받은 남자의 갈라진 목소리였다.

“처참해서 잠들 수가 있어야죠.”

“…….”

“어디까지 찾아보셨어요.”

“경기도는 싹 다 뒤져 봤지. 돈도 안 벌어 본 애가 있을 만한 데가 고시원이나 모텔이니…. 일단 숙박업소는 다 찾아보고 있다.”

“배우는 승준이 엄마가 아니라 어머니가 하셔야겠어요.”

세계는 자신의 앞에 넘겨준 찻잔과 접시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고 허공을 응시했다. 비아냥대는 말투에 어머니의 눈가가 좁혀진다. 목덜미를 매만지던 그녀가 손을 고쳐 쥐고는 태연한 음성을 내어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 그러면… 내가 손자가 없어졌는데 찾아보지도 않고, 이런 말 한다는 거야?”

“찾아보신 거 알아요.”

“그러면.”

“혹시나 발견하면 저 안 보이는 곳으로 더 꼭꼭 숨겨 두시려고 찾으신 거잖아요.”

얼굴 근육이 단단하게 굳었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맑은 정원을 내다보던 세계의 눈썹뼈 아래에는 웅크리고 주저앉은 시커먼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소파 팔걸이에 둔 손이 일정한 박자에 맞춰 느릿하게 움직였다.

침착한 외견과 달리 세계의 속은 초침이 흐를수록 파괴되어 가고 있었다. 매일 밤과 낮마다. 아침의 동이 트는 순간마다 영하에게 무슨 잘못을 했을지 되새겼다. 그래봤자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를 충만하게 만들었던 사랑의 어조들은 모두 최세계라는 남자의 눈과 귀를 멀게 할 수단에 불과했다.

“어머니가 미리 깔아 두신 포석이겠죠.”

“그런 적 없다.”

“영하같이 겁 많은 놈이 제 발로 도망칠 생각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 적 없다니까.”

믿지 않았다. 세계는 마지막으로 그의 망막에 남겨진 영하를 떠올렸다. 저품질의 CCTV에 담긴 모습이었다.

“영하가 출처 모를 카드로 사천만 원을 뽑아 갔던데.”

서울로 돌아와 곧장 문자 내역과 은행 ATM기의 CCTV를 매치했다. 카드 내역은 하루에 한 번 삼만 원에서 오만 원가량 인출되었으나 CCTV에선 매일 두 번씩 인출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추적 결과 모르는 명의의 카드였으나 실제 주인은 불 보듯 뻔했다.

“어머니가 아시나 해서요.”

“그럴 리가. 나는, 모르는 일이다.”

담담하게 뱉으려 노력했으나 목소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말을 마친 어머니는 찻잔을 들어 바짝 타는 목을 축이며 아들의 시선을 피했다. 상관없다. 어차피 그녀에게서 진실을 얻으려 물어본 것도 아니었다.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따로 알아봐야겠네요.”

우선은 그러려면 영하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렇게 치밀한 녀석이 아니었다. 분명 실수를 했을 텐데. 잡을 수 있어야 정상인데 대체 어디를 간 건지.

영하가 떠난 그날만 해도 세계는 사흘 안으로 찾을 수 있을 거라 자만했다.

그러나 2주. 14일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혹여나 사천만 원으로 위조 신분증을 사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는지 확인도 했으나 건진 건 없었다. 마침 대학교 여름방학 시기라 또래 남자애들의 출국이 많아 위조 신분증 파악에 시일이 오래 걸렸다. 생각이 뻗을수록 근심만 쌓였다.

이쯤 오니 세계는 자신을 떠난 것에 대한 원망과 분노보단 걱정이 앞섰다. 가족 일로 마음고생은 했어도 몸 고생은 해 본 적 없는 아이였다. 필요 이상으로 겁도 많아 아무 데서나 혼자 있지도 못할 텐데…….

무거운 어깨를 소파에 기대며 눈을 잠깐 감은 새였다. 현관이 열리곤 승준이 터벅터벅 들어온다. 벌써 저녁인가. 둘째 아들의 인사에도 세계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꺼풀을 뜨끈한 손으로 문지르며 영하의 행방을 찾을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아, 아버지도 계셨네요.”

“승준이 너한테도 연락 온 거 없지?”

“네? 네. 저야….”

승준이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대답했다. 세계는 여전히 영하 생각에 잠긴 채였다.

아예 자신을 떠날 생각이었다면 한국에서 버틸 계획은 아니란 말인데. 누군가 조력자가 있다면……. 하지만 영하를 도주를 도울 사람은 어머니 말곤 없고, 최지아나 최승주나 그럴 인간이 아니었다. 아버지 쪽도 확인해 봤으나 역시나 아버지는 말뿐이지, 행동이라곤 아랫도리를 놀리는 짓 말고는 없는 작자였다.

“하긴. 너랑 영하는 평소에도 말이 없었으니. 고생했다. 들어가서 쉬어.”

“네. 들어가 볼게요.”

승준의 자신 없는 목소리. 그제야 감은 눈이 번쩍였다. 가느다란 섬광이 그를 강렬하게 때리고 사라졌다. 최세계의 눈길이 계단을 오르는 승준의 등으로 향했다.

최영하가 연락처를 알면서도 절대 도움을 구하지 않을 사람.

아무도 최영하를 도와줬을 거라 예상하지 못할 사람.

하지만 영하의 부재가 분명히 도움 될 만한 상대.

“잠깐.”

시선이 모여들었다. 세계는 소파 등받이에 팔을 괴고는 뒤돌았다. 네 번째 계단을 딛고 올라서던 승준의 어깨가 움찔거리고, 끼기긱- 소리가 날 듯 천천히 등을 돌려 돌아본다. 승준은 때아니게 굳은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세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너구나.”

마치 싸늘하던 공기를 반으로 가르고 무너뜨리는 듯한 소리였다.

모든 것은 아주 천천히, 느긋하게 이루어졌다. 뒤틀린 미소를 지은 세계가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으며 다가가자, 승준의 얼굴은 곧 좀 전의 그처럼 파리하게 안색이 흐려진다. 굳게 다문 입매가 경련했다. 바닥을 응시하던 승준이 가방끈이 구겨지도록 세게 쥐며 목을 삼켰다.

먹잇감을 향해 접근하는 들짐승 같던 세계를 막은 것은 상기된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게 무슨 말이니.”

“어디다 숨겼어.”

“무, 무슨 말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아직 교복 입는 어린애였다. 다 큰 흉내를 내 봤자 소용없다. 최세계는 금방 승준을 간파했다. 그 안에 무엇을 숨기고 있을지 뻔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거나 옷을 구길 듯이 꽉 쥐고 있는 것이나, 더 재 볼 것도 없다.

그는 한시가 급한 남자였다. 그 급박한 감정과 호흡이 목소리에 담겨 자제력을 잃었다.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잡아 내린 세계가 눈가를 좁히며 채근했다. 최승준은 분명 영하와 자신의 사이를 알고 있다. 본인 앞으로 온 소포를 뜯어봤을 것이다.

“최영하. 어디다 뒀냐고.”

“몰라요. 평소에 형이랑 대화도…!”

“그러니까 네가 숨겼잖아. 흥분하기 전에 말해. 아들 상대로 폭력 휘두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정말 아니라고요! 제가 형을 어떻게 숨겨요.”

“뭐야? 또 무슨 일이야? 부자간에 분위기가 왜 이렇게 살벌해.”

음울한 목소리 사이로 높은 음성이 침범했다. 막 퇴근하고 들어오던 승주가 피곤한 기색으로 머리를 높게 묶다 말고 놀라 손을 떨어뜨렸다. 세계와 승준을 번갈아 보더니, 어머니를 향해 눈을 돌렸다.

“저 진짜 몰라요. 형이 어딨는…!”

끝까지 발뺌하는 모습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모하는 것을 느낀 세계는 끝내 부정의 말을 더는 듣지 못하고 계단에서 승준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슬리퍼가 미끄러지고 발을 헛디딘 녀석이 휘청이다 난간을 붙잡으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비명을 지르며 뛰어온 승주와 어머니가 놀라 승준을 부축했다.

“세계야, 너!”

“너 미쳤어?! 이 새끼가 하다 하다.”

“그럼 안 미치고 배기나. 시간 끌지 말고 대답해.”

최세계의 거친 행동에도 불구하고, 승준은 단단히 마음먹었는지 목을 부여잡고 켁켁 밭은 소리를 내면서도 입 밖으로 영하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어 그를 향해 치켜든 얼굴이 이례적으로 적대심을 드러냈다. 단 한 번도 다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한계치로 쌓인 것인지, 제 형과의 관계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소모적인 대화 속 낮게 숨을 터뜨린 세계는 마른 뺨을 쓸어내리곤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끝까지 말을 안 해? 그래. 좋아.”

말을 마친 그는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 수화기를 향해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이름을 듣고 동공을 크게 확장한 승준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위태롭게 그에게 달려들었다.

“우지은 당장 내 눈앞에 데려와. 촬영 중이든 해외에 있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장.”

“아버지!”

흥분해 달려드는 몸뚱이를 가볍게 밀어낸 세계는 뻐근한 눈을 조금 내리깔 뿐, 동요 없는 자태로 완고하게 이야기했다. 통화는 이미 끊어 버린 건지 화면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세계가 성의 없는 몸짓으로 휴대폰을 소파 위로 던져 버렸다.

“시간 끌수록 네가 잃는 게 많을 거야. 네 엄마는 물론이고 후계자 자리도 이딴 식이면 곤란해. 얌전히 말 잘 들으니 지금까지 널 내버려 둔 건데 쓸모없이 굴어서 되나.”

“…….”

“네가 선택해. 지금 당장 대답할지 입 꾹 다물고 네 엄마와 네 인생 모두 망칠지.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최승준은 자신에게 기대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제 엄마를 일에 끌어들일 거라 생각하지 못한 걸까.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잔뜩 흔들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 빠르게 깜빡였다.

비 맞은 생쥐 꼴로 몸을 떨던 최승준의 뒤로 승주가 다가오자, 고모의 모습에 용기라도 얻은 듯 눈빛이 재차 사나워졌다. 자신과 닮은 얼굴이 연신 목덜미를 문지르고 주먹을 쥐었다 편다. 핏발이 선 눈동자. 고집 속에 내재된 두려움을 억지로 포장하려는 그 모습에서 세계는 제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해 냈다. 쓸모없는 것을 닮았군.

“그래. 버텨 봐. 네 엄마 올 때까지.”

“엄마는 건드리지 말라고!”

소파로 다가가던 몸이 우뚝 멈춰 선다. 살벌한 기운에 집 안을 청소하던 사용인들이 모두 흔적을 감췄다. 적막한 거실, 숨소리마저 잦아든 가운데 몸을 돌려 승준의 앞으로 다가가는 그의 발소리만 이어졌다.

세계는 승준과 마주하고 섰다. 몰랐는데 키가 제법 컸다. 한참 아래에 있는 영하와 달리 굳이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시선이 비스듬하게 마주쳤다.

“너야말로 주제 파악이나 하고 내 걸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이렇게 될 거란 걸 생각도 안 하고 저지른 건가?”

“형이 왜 아버지 거예요. 형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에요. 단지 아버지 핏줄 받아 태어났을 뿐이지 아버지 물건 같은 게 아니라고요!”

“아니. 영하는 내가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라고 있을 거야.”

무심하게 튀어나오는 말에 승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창백하게 마른 입술을 벌리더니, 근처에 망연자실하게 선 할머니와 고모를 응시하다 이내 몸서리치듯 몸을 떨며 휘청거렸다. 손을 뻗어 겨우 몸을 지탱한 승준은 세계에게서 멀어지려는 듯 발길을 돌렸다.

“아버지가 이러는 거, 어떻게 다들 모르는 척하고 살아요? 여기선 아버지만 괜찮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는 거예요? 왜 아무도 먼저 도와줄 생각 안 하는데요. 형은요… 형이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이 집에선 아버지가 왕이라서, 그래서 형이나 저나 이런 인간 이하의 취급 받는 거냐고요!”

계단 난간으로 향하며 승준은 울분을 토해 내듯 외쳤다. 세계는 당연한 이야기를 듣는 남자처럼 아무런 의식의 변화도 없이 단단한 기둥 위에 등을 대고 바라볼 뿐이었다.

승준이 재차 할머니를 보며 호소했다.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할머니, 아버지 좀 말려 봐요.” 그 태도에 세계는 불편함을 느꼈다.

영하랑 그 정도로 절절한 사이였던가. 둘 다 서로 서먹했다. 애초에 성향도 성격도 완전히 달라 가까워지기엔 무리가 있는 형제 관계였다.

생각의 항로가 미묘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곧 세계는 상당히 불쾌한 상상을 하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깨가 축 늘어진 승준에게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내가 네 형한테 무슨 짓을 하는데?”

듣던 어머니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마른 목에 사선으로 선이 도드라진다. 승주는 흥미로워했고, 승준은 수치를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섬뜩함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세계가 씹어뱉듯 말을 이었다.

“네 형이 끔찍하게 불쌍해서 도와준 척하지만 네 속내는 뻔해. 최영하를 내 눈앞에서 치워서 상속과 승계 정리도 하고 싶었겠지.”

“…….”

“내가 네 형한테 홀려서 전 재산을 물려주기라도 할까 봐 겁났던 거 아니야? 아버지 같지도 않은 인간 밑에서 굴욕적으로 버티는데, 유산과 회사를 물려받아야 수지 타산이 맞는다고 생각했겠지. 순진한 네 형한텐 단지 네가 형제애와 측은지심으로 도와주는 척 위선 떨면서.”

“전 아버지랑 달라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버지처럼 이득만 따져 가며 행동하진 않는다고요. 저도 형 좋아해요. 아버지처럼… 그런 꺼림칙한 짓이 아니라. 가족이니까요. 그러니까 정상으로 만들고 싶은 거죠.”

단지 가족이라 불쌍해서 도와준 것뿐이라. 최승준의 말대로 본인이 너무 이해관계만 따지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승준의 말을 완전히 믿기는 힘들었다. 본인은 애써 아니라고 부정할지 몰라도, 영하를 도망치게 한 행위에는 반드시 경쟁자가 없는 안온한 후계자 자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 최승준의 입에서 정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재미있었다.

“정상이라……. 내가 비정상이면, 너도 정상은 아닐 텐데.”

“형이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 같아요?”

세계의 눈가가 잔뜩 힘이 들어가고 차분하던 호흡이 뿔뿔이 흩어진다. 그가 목울대를 넘기며 기대고 있던 몸을 꼿꼿이 세웠다. 승준은 세계의 몸이 긴장으로 움찔 떨리는 것을 확인하곤 주먹을 움켜쥐고 발악하듯 소리쳤다.

“떠난 건 형의 의지고 저는 단지 도와줬을 뿐이에요. 제가 없었어도 형은 결국 아버지를 떠났을 거예요. 형한테 아버지의 자상한 연기가 먹혀들었던 건 단지 형이 애정 결핍이라 그런 관심조차 급해서 몰랐던 거지. 그 안엔 처음부터 역겨운 의도밖에 없었는데…. 나처럼 무시로 일관하는 대신 형한텐 예쁘다고 해 준 건데. …그래서 형이 잠시 착각한 거죠. 아버지를 좋아한다고.”

승준이 세계의 역린을 건드렸다.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영하가 서툴러 자신의 감정을 착각했을 수도 있다는 것은, 그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었다.

낯선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는, 갓 태어난 짐승 같던 녀석이 자신을 보며 수줍음 떠는 모습에 애정보단 흥미를 느꼈던 순간부터. 그가 짐작하고 있었던 것.

발치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기이하게 일렁이는 감각이었다. 몸이 불길로 바짝 타올라 말라 가고, 곧이어 분노라는 잿더미가 그를 와락 뒤덮었다.

세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 의미심장하고 불길한 침묵 속에서 승준은 부러 더 길게 말했다. 초조함을 숨기려는 노력의 일환이자 또 어떻게든 그에게 상처를 주려는 행위였다.

“화풀이해 봤자 형은 안 돌아와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형은 아버지랑 달리 끔찍한 놈이 아니거든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어머니가 이내 더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그때. 세계가 혼자만의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김수림을 부축하던 승주의 눈마저도 크게 확장시키는 발언이었다.

“참 조카 사랑이 유별나네. 영하의 속마음까지 고려해 주고 말이야.”

희미하게 주름진 김수림의 이마에 왈칵 가로선이 그어졌다. 세계를 말리려는 듯 발을 뻗었으나 승주가 붙잡아 더 다가갈 수 없었다.

“비밀 하나 알려 줄까.”

“…….”

“넌 내 아들 아니야.”

승준의 입술이 벌어진다. 최세계는 서슬 퍼런 기운을 숨기지 않은 채 미소 지었다. 난폭한 눈빛과 어울리지 않는 미소의 극명한 대비가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번득거리는 눈빛 아래 말을 잃은 승준의 시선이 세계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그러나 끊어진 TV 속 화면처럼 움직임이 둔탁했다.

“누굴까 궁금하지. 이 난리 통에도 방에 틀어박혀 안 나오는 한 사람. 같잖은 위엄과 권위를 지키겠답시고, 제 자식도 자식이라 못 하는 인간 말이야.”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좀 전에 세계의 어머니인 김수림이 향하려던 방문이었다. 그곳은 이 집안 가장 어르신들의 침실과 거실, 그리고 최중엽 회장이 자주 사용하는 작은 골프 연습장이 있는 곳이었다.

“눈치가 빨랐다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을 텐데. 할아버지가 네게 유난히 신경 쓴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렇게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싶다니 말해 줄게.”

“……무슨…….”

“자식새끼한테 발정하는 놈과 아들의 여자 친구를 임신시킨 것으로 모자라 아들의 자식인 척 속이는 놈. 어느 쪽이나 미친놈이긴 마찬가지지.”

딸에게 의지한 어머니는 목덜미까지 피부를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내리깐 얼굴 아래 무슨 표정이 그려져 있을지는 모르겠다. 세계는 자신의 어머니에게는 조금 미안함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

가장 큰 것을 잃은 자신에게 거리낌이나 주저함 따윈 남지 않았다. 어머니도 알아야 했다. 자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에게서 자꾸만 영하를 떨어뜨리려고 한다면, 남은 것은 추락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최세계는, 절대로 혼자 죽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단하신 분께서 가짜 유전자 검사표로 날 속이려 했는데. 안타깝게도 난 이미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도 내가 모른 척하고 너를 내 아들로 입적시킨 이유는 하나야. 한참 어린 동생이 멋모르고 끼어들어 내 자리를 탐낼까 봐. …하지만 걱정하지 마. 주제넘게 나서지 않고 얌전히 말만 듣는다면, 내 뒤로 넘겨줄 테니까.”

할 말을 마친 세계가 소파로 향했다. 힘이 빠진 어머니를 부축해 반대편 소파에 앉힌 승주가 승준과 세계를 번갈아 보고는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터뜨렸다. 음울한 거실 안으로 그녀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내가 이래서 분가를 안 하지. 이 꼴 놓쳤을 걸 생각하면 억울해서 잠도 안 왔겠네. 아침 드라마 뭐 하러 봐? 우리 집 생중계 보는 편이 낫지. 기를 쓰고 돈 안 되는 사업 확장할 바에 미국 걔네처럼 차라리 인터넷 방송을 하는 게 더 승산 있다니까. 이따위 콩가루 집안.”

최세계가 소파 위로 풀썩 몸을 내렸다. 승준은 아직도 벽에 붙어 바닥만 내려 보고 있었다. 최승준에게 이제 남은 볼일은 영하의 위치뿐이다.

세계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등을 돌리며 말했다.

“주소 불러.”

*

바람이 미미한 여운을 담고 불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뻘뻘 흐르는 한낮, 할머니는 조금도 가만히 있질 못하셨다. 밭이라고는 작게 농사짓는 토마토밭과 먹으려고 파와 고추 따위를 심어 둔 텃밭뿐인데도 연신 바쁘게 움직였다. 며칠간 어깨너머로 하시는 일을 봐 왔으나 뭘 해야 할지 몰라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영하는 발목의 간지러운 느낌에 아래를 본다. 커다란 개미 두 마리가 툭 튀어나온 복숭아뼈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어찌나 큰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으악!”

다리를 구르며 발버둥 치자 개미가 데구루루 떨어져 나갔다. 영하의 호들갑에 할머니는 무슨 개미 가지고 겁을 먹냐며 혀를 차곤 잘 익은 토마토를 장갑으로 닦아 내며 수확했다.

시골 생활 내내 영하는 마주하는 대다수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잠시도 가만히 계시지 않는 할머니 곁에 있자니 영하의 생활 방식도 물들었다.

아홉 시가 되면 눈이 감기고 동이 트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던 서울 생활과는 천지 차이다. 매일 아침 아들을 깨워야 했던 세계가 본다면 박수라도 칠 광경이었다.

뜨거운 물 쪽으로 수도꼭지를 틀면 보일러를 틀고도 한참이나 지나야 뜨거운 물이 나온다는 것을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보일러도 기름을 쓰기 때문에 아껴 써야 한다. 기름을 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김 씨 아저씨의 경운기를 빌려 타고 읍내로 나가 말통 두 개에 가득 담아 와 기름보일러에 넣어야 했다.

보일러는… 세금만 내면 틀 수 있는 것 아니었나.

새삼스레 자신이 곱게만 큰 것 같아 내심 충격적이었다. 어릴 적에 스스로 밥도 해 먹고 알아서 옷 챙겨 입고 학교 갔으니 혼자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됐다. 들어가라. 남은 거 얼마 안 된다. 할매가 할게.”

“같이 해요. 더 도와 드릴게요.”

“뭐 하러. 시뻘게 가지고… 더위 먹으면 도움 안 된다. 들어가라. 살 다 타겠다. 뽀얘야 이쁜데.”

벌겋게 익은 얼굴을 보며 할머니가 혀를 차더니 영하의 반팔 아래 드러난 팔뚝을 가리켰다.

오랜 밭 생활로 이곳 보읍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모두 멋지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그 사이에 도시 생활만 하던 영하가 들어가니 눈에 띄게 하얀 편일 수밖에 없다. 할머니들은 영하의 피부를 만지며 희고 고왔던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지나간 젊음과 그들 삶의 고난들이 영하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햇볕을 오래 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타면 어때요.”

“하얘서 이쁘구먼. 됐다. 가서 점심이나 차려 놔라. 이거만 하고 갈게.”

밭에 덜렁 내려 두고 마시던 유리 물병마저 품에 안겨 주고 등을 돌리니 어쩔 수 없다.

영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향했다. 아빠도 엄마도 없는 이주 남짓. 보통의 가족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이제야 조금 배우는 기분이었다.

점심시간에 아랫집에 사는 말숙 할머니가 놀러 오셨다. 몇 달 전에 담근 매실주를 함께 열어 보자며 쑥으로 만든 장떡과 함께 마루에 내려놓았다.

장떡이 뭐지? 영하는 할머니의 반찬통에 담긴 음식을 흘끗흘끗 보며 점심상을 차렸다. 시들어 가는 남은 쪽파를 몽땅 썰어 넣어 시퍼런 색을 띠는 계란말이와 꽈리고추와 함께 볶은 삼겹살을 은색 상에 올렸다. 선풍기를 강풍으로 돌리며 말숙 할머니가 엉덩이를 바짝 당겨 앉았다.

“우리 손자는 놀러 오면 손 하나 까딱 안 하는데. 이 집 손님은 밥을 해 주네. 임씨 할매 뭐 하시노. 밭에 있나?”

“네. 곧 오실 거예요. 거의 다 끝났어요.”

“영하네 할매는 좋겠다. 손자가 착하고 밥도 해 주고.”

서울에 계신 할머니가 생각나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그냥 웃자, 말숙 할머니가 웃는 것도 예쁘다며 칭찬하는 통에 영하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었다.

“할 거도 없을 텐데 내일 복이니 잔치 준비하는 거 도와라. 근데 여기는 언제까지 있으려고. 방학 끝나면 서울 올라가려고?”

동물이 그려진 물컵에 보리차를 쪼로록 따르며 머리를 굴렸다. 6개월을 이곳에서 버틸 예정이었다.

비포장도로와 논과 밭만 있는 작은 시골 마을. 몇 가구 없긴 했으나 승준의 말대로 CCTV는커녕 아직도 브라운관 TV를 사용하는 집이나 에어컨 없는 집들이 대다수였다.

“모르겠어요. 아직 결정 안 했어요. 할머니도 오래 혼자 계시니까… 제가 말벗도 되어 드리고.”

“임씨 할매야 네가 옆에 있으면 좋긴 하겠다만… 아이고, 저기 오네.”

끼이익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할머니가 밀짚모자를 쓴 채 걸어온다. 할머니의 꽁무니를 보자마자 얼른 밥을 푸러 바닥에 둔 밥솥으로 기어갔다.

앞으로 계속 언제까지 있냐고 물으면 무슨 핑계를 대야 할까. 더 묻지 않을 만한 핑곗거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식사를 마친 영하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도롯가와 가장 가까운 아랫집이었다.

나오는 길에 할머니가 밀짚모자를 씌워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흰 피부가 탄다며 팔에 토시까지 채워 주는 바람에 흰 티셔츠에 꽃무늬로 팔을 감싼 우스꽝스러운 꼴이 됐다. 어차피 사방이 나무와 흙밖에 없는 이곳에서 옷은 단지 몸을 가려 주고 지켜 주는 최초의 역할만 잘 수행하면 된다.

“깜둥아.”

깜둥이는 아랫집의 비닐하우스 근처 말뚝에 묶인 까맣고 조그마한 소형견이었다. 집에서 대충 가위로 깎은 터라 털이 부숭부숭하고 꾀죄죄해 종을 알아보기 힘든 녀석이었다.

영하는 대충 깜둥이가 잡종견이겠거니 했다. 마른 풀이 등에 붙은 것을 떼어 주고 나니 이제 눈에 끼인 눈꼽이 보여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 눈꼽도 닦아 주었다.

눈가를 닦아 주자 고개를 파르르 떨고는 벌떡 일어나 영하의 어깨에 매달려 헥헥거린다. 까만 털 사이로 반질거리는 눈동자를 마주한 영하가 깜둥이의 얼굴 부근을 쥐며 어깨를 흔들었다.

보송보송한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돌아갔다. 엉성한 털 탓에 바보처럼 보이지만 깜둥이는 의외로 똑똑했다. 누가 자신을 사랑해 주는지 알고 매일 같은 시각 영하만을 기다렸다.

“깜둥이 밥은 먹었어? 근데 자꾸 된장찌개 같은 거 먹으면 안 되는데….”

돌에 부딪혀 여기저기가 구겨진 은색 밥그릇 속 된장찌개의 잔여물을 보며 속상해 중얼거리는 눈꺼풀이 아래로 축 처진다. 입술을 내밀고 귀여운 깜둥이를 보다 이내 말뚝에 고정된 장치를 풀어내고 걸었다. 까만 솜뭉치가 번개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뛰지 말라니까!”

처음 깜둥이를 산책시킨 날은 깜짝 놀랐다. 멀리까지 걷는 것이 흔치 않은 경험이었던 녀석이 잔뜩 흥분해 쏜살같이 달려 나가 영하까지 때아닌 전력 질주를 했다. 쪼그마한 게 힘이 어찌나 센지!

영하는 나무가 우거진 산등성이 아래의 얕은 그늘로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이제 조금 익숙해졌는지 깜둥이의 속도가 느려져 영하의 걸음걸이와 거의 비슷했다. 잠깐의 산책에 기분이 조금 누그러진다. 맑기만 한 하늘을 들여다보다 고개를 내렸다. 꼬리를 치켜든 깜둥이가 씩씩하게 돌부리를 피해 걷고 있었다.

“오빠가 산책시켜 주니까 오빠가 제일 좋지?”

깜둥이가 걷던 길을 멈추고 슬쩍 돌아본다. 입이 벌어지고 분홍색 혀가 튀어나와 헥헥거렸다. 뺨을 둥글게 올리고 웃음이 터진 영하가 그 앞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고는 털 뭉치의 작은 턱을 간지럽히곤 길게 뻗은 다리도 주물럭거렸다.

“귀여워. 귀엽기만 한데.”

이렇게 착한 데다 얌전하다. 자주 짖긴 하는데 원래 개는 짖는 거니까. 그사이 언제 묻은 건지 모를 민들레 홀씨가 머리에 붙은 것을 떼어 내 주고 다시 걷는 순간, 뺨을 부드럽게 간질이고 지나가는 바람 사이로 그리운 음성이 섞여 들었다.

‘섹스할 때마다 들여보내 달라고 방문 긁고 짖는 거 싫어, 방해돼.’

하필이면 이상한 소리를 하던 것이 떠올랐다.

변태 같기는…. 개 키우자니까 그런 소리나 하고. 머리에 야한 거 말곤 든 게 없나 봐.

“하 씨. 생각 안 하기로 했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깜둥이가 돌아본다. 풀이 죽은 얼굴을 하자 걱정이 되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새카만 눈동자가 영하를 올려다본다.

상처받았을까…….

떠나온 이상 자꾸만 그를 떠올려 봤자 아픈 자리를 반복해 내리누르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인지하면서도 속절없이 빈 시간마다 그를 생각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떠나 버렸으니 분명 상처받았겠지.

예상했으면서도 끝내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건 영하의 일방적인 욕심이었다. 그에게 꼭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고 싶다는 솔직함과 마지막으로 그의 진심 어린 반응을 온전히 누리고 싶었던 이기심이다.

손바닥에 느껴진 뜨겁던 고동을 되새기듯 왼손을 들었다. 그 자리에는 여전히 그와 나눠 낀 커플링이 자리했다. 이 반지부터 가장 먼저 처리했어야 했는데……. 아직도 감정을 뿌리 뽑지 못했다. 영하는 아마 죽을 때까지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

다음 날 영하는 혼자 아침 일찍이 마을에서 제일 큰 윗집에 방문했다. 작년에 리모델링하여 마을에서 가장 멀끔한 양옥집이었다. 높은 담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넓은 평상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마을 사람들 전부의 입에 들어가고도 한참 남을 식재료가 쌓여 있었다. 그쯤 되니 음식이 아니라 일거리로만 보였다.

아랫집 할머니들과 영하가 모두 마을 윗집으로 올라가 초복의 잔치 요리를 준비하는 시점. 색이 바랜 마을 간판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깨끗한 구두의 가죽이 비포장도로를 밟을수록 희뿌연 먼지로 뒤덮인다.

영하와 할머니가 사는 집은 입구에서 세 번째 집이었다. 움푹 파인 도랑을 넘고, 새카만 오디 열매가 무수히 맺혀 참새들이 자주 오가는 오디나무가 길가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과실수와 침엽수가 만들어 낸 낮은 산 그림자를 지나면 자두밭과 함께 ‘임순이’라고 적힌 명패가 달린 슬레이트 지붕의 낡은 한옥 하나가 등장했다.

대문 앞에 멈춰 선 세계는 벨을 찾으려 했으나 대문 어디에도 벨 비슷한 것은 흔적도 없었다. 눈썹과 눈 사이가 좁아질 즈음, 대문이 예고 없이 벌컥 열렸다. 담장보다도 키가 큰 남자가 서성이는 그림자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목에 찬물로 적신 수건을 올린 임씨 할머니가 슬그머니 고개를 빼며 세계를 올려다본다. 수십 년의 시골 생활 중에 본 적 없는 차림새의 깔끔한 남자였다. 세계의 얼굴을 보고서는 어딘가 익숙함을 느낀 것인지 몸을 조금 물린 임씨 할머니의 입술이 꾹 다물리다 열렸다.

“누군데 남의 대문 앞에서 뭐 하는고?”

“최영하 여기 있습니까.”

“최영하? 누구… 아.”

“있나 보네.”

말을 더듬는 반응에 그가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이딴 시골까지 온 보람이 없지 않네. 경운기와 사람 발길 닿는 곳만 잡초가 자라지 않아 잡초와 흙먼지가 뒤섞인 오솔길. 차가 들어가질 못해 한참을 걸어 올라왔다. 촌구석 중에서도 촌이었다. 고속도로와도 멀리 떨어진 곳이다.

체력도 변변찮은 녀석이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다니 기특하면서도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안달복달한 것이 느껴져 속이 뒤집혔다.

그래. 이런 곳에 있었단 말이지. 못 찾을 만했네.

“그런 사람 없수다. 나 혼자 사는 집인데.”

“영하 아버지입니다.”

세계는 명함을 넘겨주며 느릿한 눈길로 마당 안을 훑었다. 잡동사니가 그득한 풍경이다.

그 녀석 이런 데선 하루도 못 잘 것 같은데.

좋게 쳐줘야 정감이 느껴지는 풍경이었고, 애초에 세계는 이런 것에 정 따위를 느끼지 않는 족속이다. 얼마나 고쳐야 사람 살 만한 꼴이 되는 거지. 아들이 있는 곳의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목소리가 무뚝뚝하게 흘렀다.

아버지란 이야기에 임씨 할머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글자가 작은 명함을 뒤로 돌려 보자 볼펜으로 크게 갈겨 놓은 그의 휴대폰 번호가 존재했다.

“영하 아버지라고?”

“있는 거 알고 왔습니다.”

“모… 드… 모드……. 그러면 혹시, 자네가 승준이….”

명함을 멀리 밀어 회사 이름을 더듬더듬 읽은 할머니의 표정이 바뀌었다. 키가 훤칠하게 큰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느라 고개가 여러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세계는 대문에서 한 걸음 물러났고 입꼬리를 당겨 올라간 입술 사이에서는 클라이언트를 대하듯 견고하면서도 우아한 목소리가 흘렀다.

“영하가 신세 지고 있다는 것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 녀석이 아직 철이 없어서 저랑 싸우고 가출을 했는데, 어머님이 당분간만 안전히 데리고 있어 주세요.”

“…….”

세계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의 두께나 무게가 묵직하다. 임씨 할머니는 그에게 할 말이 있는 듯 말린 입술을 열다 도로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민망스럽다는 듯이 뺨을 연신 쓸었다. 아마 승준의 진짜 아버지가 최중엽 회장인 걸 아는 모양이었다.

“영하는 승준이가 형제인 줄 압니다. 다른 이야기는 하지 마시고 먹을 것 좀 잘 챙겨 주십시오.”

“예, 예…. 영하는 안 그래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당분간 일을 처리하려면 영하는 이곳에 숨어 있는 편이 낫다. 낡은 집 안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영하의 흔적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목적을 마치고 마을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과 돈 봉투를 들고 멀거니 선 임씨 할머니를 보는 남자 하나가 있었다. 마침 산속에서 상황버섯을 캐고 있던 김씨 아저씨였다.

*

본가에서 한바탕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곧장 침실로 향하려던 세계의 눈길을 붙잡은 것은 여름날 햇볕의 기세를 못 이기고 시들어 가는 허브들이었다. 떠나기 전 영하가 파스타를 해 먹겠다며 심어 뒀던 녀석들이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싸구려 플라스틱 화분에 제대로 가꿔 주지 않아 키만 큰 훌쩍 큰 식물들이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세계와 마찬가지였다. 주인이 사라지니 곧장 목이 마르고 의지를 잃어 간다.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사랑한다던 최영하가, 그 자리에 칼을 꽂은 것이나 다름없다.

시시각각 감정이 변화했다. 주체할 수 없이 요동치듯 화가 치솟다가도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사랑을 속삭이던 최영하의 뺨과 부끄러워하던 눈빛에 거짓이 없다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영하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세계는 조바심을 느꼈다. 뭐 하나 모자란 것 없던 남자가 부끄러운 행위를 하며, 갈망을 느꼈다.

세계의 판단하에 영하가 그에게 집착하던 이유는 단 하나. 최영하를 깊게 사랑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영하는 애정을 갈구한다. 사랑받고 싶어 안달이었다. 최영하에게 내재한 애정과 은근한 배려 따위는 사랑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명확한 애정 표현과 우선순위, 끊임없는 스킨십을 원했다.

그간의 삶에 영하가 원하는 것을 준 사람은 오로지 최세계뿐이다. 그의 작은 관심이 영하의 빈틈을 파고들었고, 그 마음속에 응집되어 퍼져 나갔다

세계는 뻐근한 다리를 펴고 일어난다. 식물은 되살리긴 힘들어 보였다. 키만 껑충하니 줄기가 죄다 가늘어져 있었다.

이튿날 세계는 허브 농장에서 튼튼하게 자라난 바질과 로즈메리 등을 받아 와 영하의 화분에 바꿔 심었다. 사랑한다고 해 놓고 가슴에 대못을 박고 도망친 녀석이 뭐가 예쁘다고 이런 짓을 해 주나 싶으면서도 막상 돌아온 영하가 죽어 버린 식물을 보고 자책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 영하도 자신도 감정의 정리가 필요했다. 이대로 마주하다간 화를 내 버리게 될 것 같아 참아야 했다. 화내지 말아야 한다. 영하가 이런 선택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멍청하게 분노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모든 일을 그르친다.

영하가 떠나기로 한 결정적인 계기를 찾아야 했다. 어머니가 주신 차명 계좌나 승준의 부추김만으로는 불가능했다. 실제로 차명 계좌는 몇 달 전에 만든 계좌였으며 승준이는 아버지의 생신연에 영하와 접촉했다.

“서민석…….”

짐작하건대 서민석이나 영하의 학교 동기인 녀석과 누나의 소행일 확률이 높았다. 둘 중에 더 가능성을 따지자면 서민석이었다.

이미 이정욱의 가족들은 그가 친 덫에 걸려 생을 허덕이고 있었다. 부모님의 가게는 폐업 수순을 밟고 있었고 이해인은 해고됐다. 그녀가 조금만 더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서민석이 접근했을 때 무시했겠으나 이해인은 그의 생각보다도 어리석었고, 정욱의 누나에게는 아무런 짓 하지 말라던 영하와의 약속은 지키기 어려워졌다.

아무래도 서민석 쪽이겠지. 서민석이 사진을 들먹이며 영하를 협박했다면 그의 관점에서 이해하긴 힘들어도 영하로선… 그런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다리를 의자 앞으로 길게 뻗은 세계는 짧게 숨을 뱉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를 쓸어 넘기곤 지끈거리는 뒤통수를 꾹꾹 누르던 시점이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눈만 굴려 확인하자, 그날 아버지의 생신연에서 만난 이사장이었다.

성화기부재단.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 이사장은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시답잖은 인사부터 시작했다. 잘 지냈냐는 둥, 모드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둥. 그의 인사치레를 받아 줄 기분이 아니라 세계는 대충 대꾸하고 넘어갔다. 그제야 본론이 나왔다.

-최 상무 자네. 내가 저번에 말한 것 기억하나? 회장님 생신에서 한 말 말이야.

“성화재단 가입 말씀입니까.”

-그래, 그. 내가 확인해 봤는데 당분간은 신규는 안 받겠다는군.

예상했다. 아마 성화재단은 회원들의 온갖 지저분한 뒷돈을 처리하는 세탁소 역할을 하는 곳일 텐데 그곳에 적대적인 자신을 들여보낼 리가 없다. 게다가 어차피, 이미 이사장과 이야기를 한 다음 날 대성의 셋째 아들을 미리 가입시킨 후였다.

멍청하기는… 내가 가입시켜 줄 때까지 얌전히 손만 빨고 있을 거라 생각했나 보군.

어찌 됐든 성화재단엔 이제 볼일 없다. 이사장이 대단한 곳이라는 듯 말하기에 확인했더니 고작해야 돈세탁이 아니면 고급 룸살롱이나 함께 들르는 같잖은 모임이었다. 재단의 내실을 들여다보자 세계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곳에 가입하지 않은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다음에 기약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그….

휴대폰 너머로 이사장이 머뭇거렸다.

큼. 흐흠, 하고 헛기침을 연달아 뱉더니 스스로 말하기 부끄러운지 말을 질질 끌었다. 하긴. 이 인간한텐 그것이 본론일 것이다. 그날의 불장난을 눈감아 달라는 것.

세계가 만년필을 빙그르르 돌리며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물론 저는 입 다물 겁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비밀 보장은 철저해야죠.”

“고맙네. 내가 언젠간… 꼭 갚겠네. 자네 아들 대학 갈 때 되면 연락 주게.”

서민석이 움직이려는 모양이군. 서민석의 총기 소지 증거를 갖고서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녀석이 영하에게 접근한 이상, 자신의 오점이 들통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수사는 착수됐으나 어느 집단이든 팔은 안으로 굽길 마련이었고 누구나 돈 앞에서 굴복한다. 서민석이 평소 하던 더러운 방식으로 돈이라도 뿌린다면 곤란해졌다.

결국에 세상은 법이 아닌 돈의 논리로 돌아간다. 그런 경우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집단의 우두머리를 내 편으로 설득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검찰총장쯤 되는 인간을 구워삶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단에서 서민석을 고쳐 쓸 생각도 못 하도록, 확실하게 버릴 카드가 있어야 할 텐데. 초점 없이 새까만 모니터 바탕 화면을 보다 그 위로 떠오른 이름 하나를 기억해 냈다.

서수민. 서수민이 도움 되겠군.

그녀가 말하는 복수의 대상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국 그 여자 말대로 일이 흘렀다. 자신의 복수 대상을 알게 되면 거절하지 못할 것이란 말.

“서씨 집안 인간은 죄다 속 시커먼 능구렁이뿐이군.”

우선 영하는 시골에 그대로 두는 게 최선이다.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승준의 할머니와 있다면 의식주는 해결될 테니 걱정이 덜었다.

괜히 자극하여 더 멀리 숨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낫다. 영하가 그곳에 있는 동안, 자신은 갖은 수를 써서 서민석을 확실하게 잡아넣는다. 그쯤 되면 영하도 생각을 정리했겠지. 한 달이면 생각할 시간으론 충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하가 계속해서 자신을 떠나겠다고 하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최악의 상상까지 계산하고 방책을 도모하는 것이 평소 최세계의 방식이긴 했으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영하는 결국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구도 영하에게 저와 같은 사랑을 주지는 못한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세계는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작은 유리 액자 안에 넣어 둔 영하의 사진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카메라를 빤히 보는 얼굴 뒤로는 켄트지에 번진 물감처럼 핑크빛 노을이 펼쳐져 있었다. 영하가 본인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으면서도 굳이 그에게 하늘의 색이 예쁘다며 찍으라고 했다.

최세계는 공기 중 습도와 빛의 산란으로 인해 핑크색으로 보이는 자연현상보다는 평범한 나무 데크 앞에 선 자신의 아들을 사랑했다. 그의 눈동자 안에서만 영하의 움직임에 따라 세상이 반짝반짝 규칙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액자를 펼쳐 책상 한 켠에 올린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었다. 그의 손에 감기던 품의 감각이 흐릿해졌다. 완전히 잊기 전에, 영하를 다시 데려와야 했다. 마침내 그날이 오면, 영하는 다시는 제게서 도망칠 생각 따위 할 수 없어야 한다.

*

“눈물 날 것 같아요.”

쪼그려 앉아 늙은 호박을 따고 돌아온 영하는 양파가 가득한 바구니를 받아 들고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고작 세 개로 시작했는데 사방에서 껍질 까 둔 양파를 썰고 계셔서 그런지 눈이며 코며 매워 죽겠다. 눈가가 벌겋게 물든 영하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투덜거렸다.

영하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할머니들은 잔뜩 즐거워했다. 매일 비슷한 시골 생활 중,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올해의 초복은 남다른 날이었다.

“아이고, 이쁘다. 고추 달린 놈이 이래 이뻐서 어디다 쓰노.”

물에 젖은 수건으로 영하의 뺨을 닦아 주며 제일 아랫집에 사는 할머니가 말했다. 평생 못 받아 본 할머니의 관심을 이곳에서 모두 받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차라리 할머니들께 농사를 배울까……. 영하는 매끈한 흰 면을 드러낸 양파를 빨간색 바구니에 담으며 대꾸했다.

“어디다 쓰긴요. 저 쓸데 많아요. 망치질도 할 수 있다니까요.”

“그러면 뭐 하러 이 시골 촌 동네에 있어. 원래 있던 데로 가지. 얼굴도 이리 훤칠한데 공부 못해도 연예인 하면 먹고살겠구만.”

“할머니, 연예인 아무나 못 해요. 저 노래도 못하고 춤도 못 춰요.”

진심이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 견딜 수 없다. 본인의 머릿속을 뒤집어 볼 이도 없는데 누가 알아챌까 봐 부끄러웠다. 게다가 상상은 안 좋은 곳으로 향했다. 누군가 영하의 집안에 대해 파헤친다면…….

“배우 해라. 그러면.”

“연기도 못할걸요.”

“아이고, 천상 백수 해야겠네.”

너털웃음과 함께 바삭하게 구워진 전이 뒤집어졌다.

“아! 따가워!”

부추전이 프라이팬에 훅 내려앉으며 튄 기름에 영하가 호들갑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느라 반바지가 접혀 올라 살이 드러나니 그 위로 기름방울이 튀었다. 따끔따끔한 허벅지를 벅벅 문지르며 바지를 내리다가 대문 앞에 물끄러미 선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대문 위 지붕이 만든 그늘 아래의 남자는 이 마을의 유일한 오십 대이자 가장 젊은 주민인 김씨 아저씨였다. 염색하지 않아 희끗한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다. 그림자 아래 흐릿한 눈빛이 허벅지에 닿은 것 같아 불쾌해졌다.

이맛살을 찡그린 영하가 일부러 바지를 더 아래쪽으로 내리자, 옆에 앉은 할머니가 김씨 아저씨와 영하를 둘러보고는 영하의 옷깃을 당겼다.

“영하 니 주방에 가서 주스 좀 따라 와라. 목마르네. 토마토주스 있다.”

영하는 고개를 끄덕이곤 주방으로 향했다. 영하가 한참 걸려 쟁반 가득 토마토주스를 담아 왔을 땐 김 씨는 자리에 없었다. 그의 부재에 안도하며 한 분 한 분 컵을 나눠 드리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시점이었다. 집주인 할머니가 닫힌 대문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혼자 있지 말고 김 씨 근처로 가지도 마라.”

“그래. 임씨 할매 옆에 꼭 붙어 있어라.”

“왜요?”

“그 인간 보통내기 아니다…. 재작년에 젊은 외국 아가씨 사 와서 결혼했는데 한 달도 안 돼서 도망갔다. 그 전에 매일같이 맞아 가지고 얼굴이….”

그때의 모습을 상기하는 듯 얼굴이 잔뜩 찡그려진다. 다른 할머니마저 영하의 안부를 걱정했다.

설마 나한테 무슨 짓 하실까 봐 걱정하시는 건가. 나는 남자인데…….

그러나 잠깐 느꼈던 불쾌한 시선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젊은 여자에게는 폐쇄된 시골이 위험하단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설마 남자인 자신에게도 해당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불안함에 얼굴이 어두워진다. 이곳엔 영하를 지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함께 사는 임씨 할머니는 오히려 자신이 지켜 줘야 할 상대였다.

누가 날 지켜 주기를 바라면 안 되는 거지.

이제는 아빠가 없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자. 이제 스무 살이니까, 다 컸으니까…….

윗집 할머니 집에서 점심마저 거하게 먹고 나니 저녁은 도통 입맛이 없었다.

해가 지는 저녁,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서 하는 일이라곤 TV 화면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뿐이었다. 시골은 도시보다 해가 일찍 진다. 가로등도 드물게 있는 바깥에서 괜히 돌아다니는 건 무서웠다.

내일은 깜둥이 목욕을 시킬까.

며칠 전에 씻겼는데도 매일같이 바닥에 뒹구니 금방 더러워진다. 까만색 털이면 때 타는 게 보이지 않을 줄 알았는데 흰 털보다 더 심각했다. 먼지 묻는 것이 실시간으로 확인됐다. 벽에 등을 대고 할 일 없는 두 손을 가만히 내려 두었다. 휴대폰을 만지지 못한 지 벌써 한참이다. 금단 증상처럼 종종 머릿속에 인터넷 화면이 떠올랐다.

충분히 깨끗한 바닥 위를 마른 걸레질 하던 할머니가 뉴스가 시작하는 TV를 보곤 넌지시 영하에게 물었다.

“영하 니 아버지랑 싸우고 이리로 왔다면서.”

“…승준이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 그러면 어머니는 어떡하고.”

“엄마는… 따로 살아요. 미국에요.”

아버지 이야기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혹여나 그에게 위치가 적발되었을까 무서웠다. 승준이의 이야기를 꺼내며 물어보니 할머니는 대수롭지 않은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영하는 반지를 만지작대며 중얼거렸다.

“못 본 지 오래됐어요.”

“그래…….”

이어 대화가 끊겼다. 아빠 생각에 울적해져 영하도 굳이 대화를 이어 갈 힘이 없어졌고, 잡생각을 하지 않으려 삶아 둔 땅콩 까기에 몰두했다. 부지런히 먹지도 않을 땅콩 껍데기를 까며 뉴스 내용은 모두 흘려듣기만 하던 영하의 귀에 와 박히는 내용이 있었다.

[지난해 임관한 신임 검사 A씨가 SNS를 통해 사제 권총을 구입해 자신의 차량에 보관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해 수사에 나섰습니다. 검찰은 검사의 범죄 혐의인 만큼 더 면밀하게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한편 A 검사를 둘러싼 다른 의혹도 추가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A 검사는 형사부 소속 마약 사건 전담 검사로 임하고 있으나…….]

서민석이다. 그를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으나 직감적으로 서민석임을 깨달았다.

그를 떠올리자마자 턱이 덜덜 떨렸다. 바구니를 앞으로 물리고 어깨를 감싸 안은 영하가 눈을 크게 굴리며 뉴스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서민석이 무서운 게 아니라 혹여나 서민석이 보복을 하겠답시고 아빠를 힘들게 할까 봐 그게 무서웠다. 그래도 내가 멀리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겠지…….

그래. 헤어지는 게 맞았어.

엄마도, 아빠도 결국엔 내가 없어야 행복해질 수 있는 거야.

조심스러운 얼굴로 영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하던 엄마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그날,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영하는 엄마를 붙잡고 애원하고 싶었다. 왜 내 옆에선 행복하지 못하냐고…….

*

‘나한테 왜 그랬어.’

‘아빠 사랑한 적 없어.’

밤새 꿈자리가 사나워 도통 잠들지 못했다.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언제인가 까마득했다. 아마 영하가 떠나기 전날이겠지.

뻐근한 눈가를 문지르고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 속에는 최세계란 남자가 미련하게 한 달이나 그리워하는 사람이 존재했다.

날이 더운지 영하는 민소매와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다소 촌스럽게 챙이 긴 꽃무늬 모자를 쓰고서 시커먼 털 뭉치 같은 강아지의 줄을 쥐고 걸었다.

멍하니 걷던 녀석은 털 뭉치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자 강아지풀을 꺾어 털 뭉치에게 내밀었다. 시선을 맞추느라 허리와 고개가 한참 꺾여 있다. 대체 누가 주인에게 애교 떠는 개인지 알아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팔자 좋네. 도망쳐서 하는 짓이라곤 토마토 좀 따고, 강아지 산책시키고. 어딜 가도 고생할 팔자는 아닌가 봐.”

사진을 확대하자 평범한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다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단지 쪼그려 앉아 옷이 올라갔을 뿐 특별히 짧은 바지도 아니었다. 그래도 드러난 흰 다리가 불만이라 입술을 씹었다. 만년필 뒤쪽으로 책상을 툭툭 친다.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

이번엔 강아지를 공중에 들고 웃는 얼굴이었다. 산속에 숨어 몰래 찍은 사진이라 사방을 둘러싼 나뭇잎에 초점이 잡혀 잘못 찍혔다. 흐릿한 미소에도 세계는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옆에 선 비서실장이 서류 하나를 건네었다.

“보고에 따르면 건강하십니다. 마을 주민분들과도 문제없습니다. 다만… 매수한 노인의 말에 따르면 마을에 오십 대 남자 하나가 사는데,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고 푸근한 마음을 가진 노인네만 사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휴대폰을 내리며 수긍했다.

“계속 말해요.”

“매실밭을 하고 있는데, 수확기에 태풍이 겹쳐서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돈이 필요하겠군. 그나저나 이런 꼴로 입고 다니는데도 돈이 된다는 걸 아는 건가.”

세계가 휴대폰 화면을 건드리며 말했다.

“방문한 날, 혹시 저희를 봤을 수도 있으니까요.”

“뭐, 그렇겠지. 일단은 예의 주시 해요. 24시간 내내 눈 떼지 말고. 잠복팀 쪽에도 최대한 며칠간은 신경 더 쓰라고 언질하세요.”

“바로 데려오시는 쪽이…….”

“지금은 데려와 봤자 원망만 할 텐데. 서민석도 불구속 기소 됐으니 당분간은 지켜봅시다.”

화면 속 영하는 웃고 있다. 그렇게 바라던 강아지와 함께하니 행복한 모양이었다. 물론 진심을 다해 행복할 리는 없겠지만, 유치하고 뒤틀린 감정이 머리를 내밀었다.

그의 꿈속에 나타난 영하는 온통 울고 엉망이 된 모습으로 자신을 원망했으니까.

“준비는 해 놔요. 거래 못 한 작물 통째로 사 주겠다고 연락은 해 두는 게 좋겠네요.”

“예. 알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이건 미리 흘려 놔요. 서민석이 주워 갈 수도 있으니.”

정말 시골 생활이 마냥 편안하고 아늑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영하는 이상한 데서만 생각이 많은 녀석이라 정작 중요한 것을 매번 놓쳤다.

‘겪어 보면 녀석도 알겠지. 나 없이 못 버틴다는 걸…….’

하지만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못 버티는 건 영하뿐만이 아니었다.

*

“나 정말 분리 불안이네.”

아빠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무색하게 최영하는 매일 그를 떠올렸다.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아래, 모로 누워서 하는 행위라곤 최세계를 그리워하는 일밖에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것이나, 낮잠을 자는 자신을 끌어안던 단단한 몸체. 늦은 밤, 겨우 퇴근한 남자가 자다 깬 자신에게 “피곤해?” 하며 묻던 것들.

생각은 다른 곳으로 미쳤다. 그의 다정한 손길이 거칠게 변모해 어루만지던 순간이었다.

자신의 새된 음성과 목덜미를 간질이는 가쁜 숨소리, 땀에 달라붙는 피부와 엇각으로 얽혀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하는 다리.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발기하는 순간이 오면 바로 삽입되는 모습들이 짐승의 교미 같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비속어로 이용되는 짐승들마저 하지 않는 더러운 행위였다. 가장 우월한 남자가 아들에게 성욕을 느껴 아들의 장 내에 사정했다.

영하는 그가 제 안에 사정하며 짓는 표정을 알고 있다. 눈가를 흐릿하게 찡그리며 목울대를 울렸다. 울며 빌어도 끝까지 박아 넣어 가장 깊은 곳에 그의 씨앗을 뿌렸다. 그가 안에 사정할 때마다, 뿌려지는 정액의 감각을 느끼려 안달 내는 것은 자신이었다.

허락받지 않은 에로스적 사랑이었다

알면서도 다시 흥분했다. 그와 마지막으로 관계를 맺은 것은 영하가 떠나기 전날, 숙소의 밤이었다.

술에 진탕 취한 남자는 무자비한 몸놀림으로 영하를 안았다. 가슴을 퍽퍽 치며 아프다고 호소를 해도 들어주지 않고 무작정 거칠게 안에 박아 넣다 평소보다 이르게 사정했다.

‘나도 사랑해, 영하야.’

옷도 다 벗지 못한 몸으로 그에게 꿰뚫린 채 흐느끼는 자신에게 대고 세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랑을 전해 왔다. 어쩌면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단지 사랑해가 아니라, 나도 너와 같이 사랑한다는 말.

아직 오전이었다. 할머니는 30분 전 읍내 시장으로 나가셔서 집 안에는 영하 혼자였다. 할머니가 돌아오시려면 아직 두 시간은 남았다. 버스가 한 시간마다 오니 아무리 빨라도 한 시간은 자신만의 시간이었다.

호흡이 가빠지더니 눈동자가 축축이 젖었다. 흥분하면 으레 생기는 현상들이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마당을 습윤한 눈으로 둘러보던 영하는 엉금엉금 기어 손님방으로 들어가 문을 꾹 닫았다.

“흐으…….”

무릎으로 바닥을 기면서도 신음이 흘렀다. 머릿속에서는 바닥에 엎드린 자신의 뒤를 집요하게 핥는 남자가 있었다.

“아빠…….”

문을 닫아도 유리창 너머로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쬔다. 밝은 실내에서 속옷과 함께 반바지를 무릎까지 내린 영하는 자신의 성기를 쥐며 손을 가슴 위쪽으로 더듬었다. 색이 연한 유륜을 문지르자 유두가 톡 솟아오르며 동시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그를 버리고 떠난 주제에 그와의 섹스를 떠올리며 자위하는 것은 머저리 같은 행위였다. 그러나 몸을 잠식하는 쾌락을 버텨 낼 재간이 없다.

영하는 고개를 내려 미미하게 떨리는 자신의 왼손을 혀로 핥았다. 반지를 낀 부근이었다. 세계는 커플링을 낀 이후로는 습관처럼 전희의 순간마다 영하의 왼손을 핥고 빨았다.

그를 따라 하듯 반지 주변을 혀로 핥아 대는 사이 상상은 그의 부푼 성기를 빠는 것으로 접어들었다. 한 번도 빨아 본 적 없다. 지나치게 컸기 때문에, 그것을 입에 물었다간 막연히 괴롭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우응, 흐…….”

밭일을 도와도 아직 굳은살이 박이기엔 한참 모자란 부드러운 손길이 성기를 빠르게 훑는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 입을 달싹이며 다리를 무방비하게 벌렸다.

“흑… 넣고 싶…….”

그에게 완전히 길들여졌다. 아무리 성기를 흔들어도 이전 같은 쾌감은 다시는 찾아오질 않았다. 흥건하게 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비문이 스스로 벌름거리며 개폐를 반복했다. 자신의 몸인 것처럼 매번 안을 메우던 단단한 살덩이를 원하는 모습이었다.

“아, 빠… 제발… 안에, 응…….”

망설이던 손길이 뒤로 향했다. 투명한 물방울이 맺힌 촘촘한 구멍에 손끝이 닿자마자 안에 넣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뇌리에 꽂혔다. 한 번도 스스로 뒤를 건드린 적 없다. 그와 섹스하기 전에는 상상은 했어도 무서워 만져 본 적 없었고 그와 몸을 겹친 이후로는 자위할 필요가 없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넣어 보고…….

“우응…!”

끝내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검지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유달리 축축한 점막이 손가락을 쫀득하게 빨아 당기는 듯 이끌었다. “아으응….” 발등이 잔뜩 곱아든 영하가 흐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손마디 하나만 겨우 문 항문이 연신 아래를 조였다 풀며 뻐끔거렸다. 어찌할 줄 모르며 입술을 질근질근 짓씹는 새 눈물이 뺨 위로 길을 만들며 흘러내렸다.

느끼면, 안 되는데…….

전립선이 압박되어야 흥분하는 게 정상이다. 고작 끄트머리에 손가락 조금 넣었다고 흥분하는 건 이상한 짓이었다.

“아빠, 가 날 이렇… 게….”

손등을 타고 애액이 질질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성기를 뒤로 받아 뒤로 가던 순간을 떠올리자 머릿속이 하얗게 변모한다. 이내 영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바보 같고 어리석게 느껴져 손가락을 빼내었다.

“미친놈…….”

다신 안 볼 생각으로 떠났으면서 그와 섹스하고 싶어 안달이라니. 어깨를 떨며 흐느끼면서도 눈물을 벅벅 닦아 내던 시점이었다.

누군가 집 안에 있다.

황급히 옷을 추켜올리고 숨을 죽였다. 할머니는 아니었다. 발걸음 소리가 묵직했다.

훔쳐 갈 만한 것도 없는 이런 시골에 갑자기 도둑이 든다고?

순간 영하는 자신의 돈 가방을 떠올렸다. 사천만 원의 현금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께 한 달 생활비 백만 원을 드린 후였으니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였다.

할머니가 돈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신 건가. 그러실 분은 아닌데…….

무기로 사용할 만한 무언가가 없는지 방 안을 훑었다. 잠만 자는 방이라 옷장과 개켜 둔 이불 말곤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불안한 시선을 여기저기 돌리다 겨우 플라스틱으로 된 마사지 봉을 들었다. 어깨를 두드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건데 플라스틱이라 경도는 약하지만, 지금은 더는 나은 선택이 없다.

돈 뺏기면 안 되는데…….

게다가 카드까지 함께 있다. 그것마저 잃으면 영하는 정말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된다. 무슨 용기가 난 건지 돈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만 머리에 들었다. 마사지 봉을 꽉 쥐고 문을 열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문이 먼저 열렸다.

드르륵- 하고 열린 미닫이문 너머에는 김씨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

“이 안에서 뭐 소리 나던데.”

저 사람이 왜 이 집에 들어와 있을까. 대문은 어떻게 열고.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김 씨가 수염이 듬성듬성 난 입가를 들어 올렸다.

“혼자 뭐 했노.”

“아저씨야말로 뭐 하세요. 할머니도 안 계시는데 어떻게 여기를.”

“돈만 슬쩍할랬는데.”

“……네?”

이 아저씨가 이 집에 돈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며칠 전 다른 집 할머니가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절대 단둘이 있지 말라고. 위험한 사람이라고.

거세지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마사지 봉을 꾹 쥐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바닥 위에 엉거주춤하게 뻗은 다리를 모으자, 다리 위로 김 씨의 시선이 닿았다. 아. 불쾌한 감각은 머리가 아니라 곧장 몸으로 느껴졌다.

“니 서울에서도 사내구실 못 했제.”

그제야 김 씨가 원하는 것이 뭔지 확실해졌다. 경악스러운 얼굴 뒤로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강구했다.

이딴 마사지 봉으로 김 씨를 이길 수 있을까? 나이는 자신이 훨씬 젊었으나 상대는 평생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다. 완력으론 자신이 이길 수 없을 것이 자명했다. 영하는 그를 구슬리기로 했다.

“돈 원하시는 거면… 드릴게요.”

“아이고야, 돈이야 내가 들고 가면 된다.”

그가 같잖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씨알도 안 먹혔다. 초조한 가슴을 억누르며 입술을 짓씹었다. 김 씨가 들어오자마자 불쾌한 냄새가 흘렀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오히려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떨리는 몸과 두려움을 감추려 얼굴을 구긴 영하가 “꺼져요.” 하고 지껄이자 김 씨가 징그럽게 웃었다.

그 웃음이 영하에겐 도화선이었다. 서민석에 대한 불안감과 분노까지 함께 치민 영하는 마음먹을 새도 없이, 자신에게 불쑥 다가오는 김 씨의 머리 위로 마사지 봉을 콰아악- 세게 내리찍었다.

“으헉!”

영하의 손에 들린 것을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조차 별것 아니라고 여긴 모양인지 김 씨는 머리에 마사지 봉을 얻어맞고 너무 쉽게 나가떨어졌다. 뾰족하게 부서진 플라스틱 마사지 봉에 시뻘건 핏물이 묻어났다.

때린 쪽이 저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이 흐려지고 갈무리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바닥으로 엎어진 김 씨가 머리를 쥐며 비틀거렸다.

그가 움직이는 것을 보자, 희뿌예진 머릿속에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부터 강하게 들었다. 가방, 가방부터 챙겨서……!

황급히 뛰쳐나와 할머니 방 옷장에서 가방을 꺼내 품 안에 안고 달려 나왔다. 갈 데라곤 아무 데도 없다. 온통 밭과 산밖에 없는 곳이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꼴로 끝없이 달려 영하가 도착한 곳은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 오는 버스 정류장이었다.

가방 안에는 돈과 카드, 통장이 그대로 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김 씨가 돈을 노리고 들어온 것이라면 이 가방부터 가장 먼저 챙겼을 텐데 왤까. 그러나 세세한 추리를 하기에는 영하는 완전히 공황에 빠져 있었다. 가방을 꽉 끌어안은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기에 여념이 없었다. 기운이 쭉 빠졌다.

그러나 막상 버스가 도착하자 올라탈 용기도 없었다. 이 마을을 떠나면 분명 자신은 아빠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 분명했다. 홀린 듯이 서울로 향할지 모른다. 그에게 그런 상처를 주고 떠나와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버스를 떠나보낸 영하는 한 시간 뒤 반대편 정류장에서 내린 할머니와 함께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집 안이 쑥대밭이었다. 김 씨는 없었고 그의 흔적처럼 방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내며 많은 것을 후회했다.

“죄송해요. 제가 집 지키고 있어야 했는데.”

“바로 도망쳐야지 뭐 하러 지켜. 이 집에 훔쳐 갈 게 뭐 있다고. 잘했다. 앞으로 혼자 있지 말고, 내 없을 땐 요 밑에 할매 집에 가 있어라.”

“…죄송해요.”

“괜찮다니까. 놀랐으니까 배고플 텐데 고기 구워 먹자. 할매가 삼겹살 사 왔다.”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마저 정리했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이마가 떠올라 무서웠다. 사라진 것을 보면 아주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지만…. 반대로 나를 경찰에 신고하면 어떡하지……. 막상 신고를 당한다면 영하가 불리했다. 먼저 친 것도, 무기를 든 것도 자신이니까.

초조한 마음에 밤잠을 설치고 뒤늦게 잠들었다 깨어난 오전. 영하가 가장 먼저 들은 소식은 김 씨의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교통사고요? 언제요?”

“오늘 새벽에. 매실 팔러 올라갔다가 2.5톤 트럭에 박았다더라.”

“…죽었어요?”

“모르지. 병원에 있다던데…….”

비몽사몽인 와중에도 김 씨의 사고 소식에 아빠부터 떠올렸다. 김 씨가 어제 그런 짓을 저지르고 그다음 날 바로 사고를 당한다는 게…… 우연의 일치일 순 있겠지만…….

“못된 짓 하니까 벌받는 거지.”

할머니는 무심하게 바닥을 걸레질하며 말했다. 하지만 단순히 인과응보라기엔 타이밍이 지나치게 빠르고 좋았다.

만약에 아빠가 한 짓이라면? 아빠가 내 위치를 알고…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가 김 씨 아저씨를 죽인 거라면.

가능성이 없지 않다. 아니. 이 이상할 만큼 좋은 타이밍은 우연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영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마른 무릎을 가슴 가까이 당겨 안았다. 더운 바람이 삐걱대며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불안한 감정이 더위처럼 옷자락 아래 살갗을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떠나야겠어. 더 오래 있지는 못할 것 같아. 하루 이틀만 버티고, 할머니들께 인사만 하고.

겨우 정들었는데.

매일 아침 방바닥을 닦으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흘끗 보곤 도로 무릎 위로 고개를 떨군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진짜 우리 할머니 같았는데. 다만 시간은 영하에게 떠나기 전 서글픔을 느낄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깨끗하게 빨아 둔 걸레를 차곡차곡 개던 와중, 촌스러운 빨간색 집 전화의 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수화기를 든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굳더니 구석에 작게 웅크린 영하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지금 온다고?”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선 영하도 뭔가 이상한 기류를 눈치챘다. 누가. 누가 오는데.

괜한 걱정일 수도 있다. 아랫집 할머니가 놀러 오신다는 걸 수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얕게 고개를 젓다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전화를 내린 할머니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마당 너머를 경계했다.

“영하야. 니 짐 챙겨라.”

“네? 짐이요?”

“경찰 온단다…!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짐 챙겨라!”

이 더위에도 불구하고 문이란 문을 몽땅 닫으며 빠르게 소리쳤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방 안에서 영하는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수화기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뚜- 뚜- 뚜- 시끄러운 기계음이 몽롱한 머리를 때렸다. 그 순간 새빨간 섬광이 눈앞을 스친다. 부리나케 일어난 영하는 어제까지 품에 끼고 있던 돈 가방부터 챙겼다.

“김 씨 할배 일로 경찰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나보다. 아랫집 할매가 니 생각나서 전화했다더라. 일단 내가 할매들한테는 다 이야기해서, 니는 여기 없는 걸로 할 테니까. 잠깐만 몸 피해 있어라. 경찰 가면 다시 오고.”

뒷마당으로 이어진 문을 열며 등을 토닥여준다. 할머니의 한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별일 있겠나. 김 씨는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그냥 뭐, 확인하러 오는 거겠지.”

“네…….”

영하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만약에, 김 씨가 자신이 때린 머리 때문에 뇌진탕이라도 와서 운전하다 쓰러진 거라면?

무거운 가방을 쥔 몸이 속절없이 떨렸다. 애써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당겨 웃었다. 유약한 낯에 새겨진 흐릿한 미소는 믿음을 주지 못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을 끓은 할머니가 괜히 벽만 쓸어 내렸다.

영하가 뒷문 밖으로 발 한쪽을 내미는 그때였다. 누군가 녹슨 철문을 세게 두드렸다. 쾅콰앙!

“아…!”

“아이고, 벌써 왔네. 빨리 가라. 빨리! 산속에 잠깐만 숨어 있다가 나온나. 알겠제?”

“할머니! 경찰입니다! 잠깐 대화만 하게 문 좀 열어 주세요! 별일 없을 겁니다. 오늘 교통사고 난 김동재 씨 아시죠?”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여기까지 닿았다. 짧게 어깨를 떤 영하는 경찰이라는 말만 듣고서 등 떠미는 손길에 이끌려 정신없이 뛰쳐나왔다.

녹슨 가마솥과 항아리 몇 개가 자린 뒷마당 옆에는 수풀이 우거진 얕은 도랑이 있었다. 할머니가 말한 길이었다. 대문에서 보이지 않고, 더 위로 올라가는 길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

“하아… 하아….”

무거운 가방을 품에 세게 껴안고 도랑으로 무작정 뛰어내렸다. 높이가 제법 높았지만 고민할 시간은 없다.

“읏!”

허벅지까지 오는 짧은 바지를 입은 탓에 마른 나뭇가지가 종아리를 따갑도록 스친다. 아픔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영하는 어제 자신을 향해 누런 이를 드러내던 김 씨를 떠올리며 물길을 걸었다. 요 며칠 비가 오지 않아 샌들 밑바닥에 겨우 물이 느껴질 만큼 얕았다.

나 때문에 그 아저씨가 사고를 당한 거면 어떡하지.

만약에 그걸 경찰이 알아채면.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을 안고 자박자박 걸었다. 개구리가 풀잎 사이를 뛰어오르는 모습만 봐도 흠칫 떨렸다. 이내 썰렁한 도로가 저기 멀리 보이는 시점. 영하는 돌연 멈췄다. 이따금 트럭이 지나가는 한적한 깡촌의 입구에 새카만 세단 두 대가 서 있었다.

“아… 설마…….”

멀리서 보아도 고급 승용차였다. 보는 순간 누군가가 떠오를 듯한 우아한 블랙으로 무장한 차체.

마을의 입구와 출구는 저쪽 하나밖에 없다. 돌아서 가려면 논밭을 건너 낮은 산 아래를 둘러 가야 했다. 하지만 논밭에는 영하의 몸을 가려줄 만한 것이 없다.

거친 숨을 몰아쉰 영하는 묵직한 가방을 고쳐 쥐고 도랑을 오르기로 결심했다. 시간을 끌기보다는 재빨리 논밭을 가로질러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뭐야…….”

그러나 자충수였다. 흠뻑 땀을 쏟아 내며 겨우 도랑을 기어 올라오자, 조금 떨어진 기와집 아래 육중한 남자 둘이 장승처럼 버티고 선 모습을 발견했다.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뜨거운 한낮의 열기 속 최악의 상황이 실체화하여 돋아나고 있었다.

새카만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 경찰일 리가 없다. 저런 사람을 쓰는 사람은 분명.

안 돼!

혼비백산해 몸을 떤 영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다급한 몸짓으로 바닥 위 먼지가 희뿌옇게 일어난다. 먼지 너머 그들은 영하를 발견했으면서도 영하가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을 예견하는 듯 묵묵히 자세를 고수했다.

“흐, 하아! 하…!”

잡히면 안 돼. 잡히면 안 돼. 고작 한 달이잖아!

울퉁불퉁한 길 위를 달렸다. 겁먹어 호흡이 여느 때보다 빠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폐가 찢어질 듯 아파졌다. 돈뭉치가 출렁이는 묵직한 가방이 이제는 짐짝으로 여겨져 내던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악!”

허겁지겁 달리다 돌부리에 걸려 기어코 넘어졌다. 가방과 함께 팽개쳐진 영하는 바닥에 무릎이 갈렸다. 가쁘게 숨을 뱉어냈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피가 흐르는 무릎을 느껴 엉거주춤 일어나던 몸에 힘을 뺐다. 괴로웠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것 같았다.

“흐으……. 흑….”

울먹이는 신음 사이로 무언가 끼어든다. 비포장도로 위를 걷는 구둣발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영하는 숨을 멈추고 느리게 입을 다물었다. 온몸의 솜털이 경계하듯 쭈뼛하게 섰다. 이어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계속 뛰어.”

차갑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긴장한 몸뚱이를 갈랐다. 최세계였다.

“계속 뛰어 보라고. 네가 어느 쪽을 향하든 탈출구마다 내가 심어 둔 사람이 있겠지만.”

“…아빠.”

“우리 영하가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지 볼까.”

흙바닥에서 고개를 들자, 태양을 등진 남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세계의 새카만 두 눈이 찡그려진 눈썹 아래에서 가늘게 좁혀진다. 그가 무릎을 굽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왜. 못하겠어? 벌써?”

실소를 터뜨리는 동시에 영하의 몸을 강제로 잡아 일으켰다. 아찔한 어지럼증을 느껴 몸에 힘이 풀리면서도 영하는 그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한 가지만 반복해서 되뇌었다.

“만지지 마! 놔!”

절규를 방불케 하는 비명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거친 움직임 때문에 대충 입은 흰 티셔츠가 짓이겨지고 말려 올라가 허리의 맨 살갗이 드러났다. 최세계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솟아오른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영하의 옷자락을 내려 당기며 거칠게 쏘아붙였다.

“멀쩡한 꼴로 가고 싫으면 계속 발버둥 쳐.”

“놔! 놓으라고!”

붙들린 손목에 힘을 주며 발악했다. 그를 향한 두려움보다는 수치심에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이 겪은 김 씨와의 일을 그가 모조리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할지 뻔하니까.

“경찰 있는 거 몰라? 싫다고! 당신 따라 갈 생각 없다고!”

“당신? 이제 여보 당신 하자는 건가.”

저런 시도 때도 없는 농담에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아득한 절망만이 느껴졌다.

떠나온 한 달간. 아빠를 떠올리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영하는 매일 그를 그리워했다. 따라가지 않겠다고 소리치는 이 순간에도. 실로 오래간만에 자신의 망막에 들어차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같이 있으면 안 돼. 벗어나야 해. 더는, 더는 빠져들어선 안 돼.

하지만 무참하게도 영하는 자신이 여전히 그를 절실하게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피부에 닿는 체온과 그의 목소리. 비록 화가 나 거칠게 끓고 있더라도 최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제게 향하고 있다 생각하자 몸이 떨려왔다. 하늘 아래 부끄러운 짓을, 구름 하나 없는 맑은 하늘 아래 자행하고 있었다.

커다란 몸체는 아무리 발바닥을 땅에 붙여 밀쳐 내봐도 꿈쩍하지 않는다. 바닥에서 일어난 흙먼지가 희뿌옇게 공중으로 올라 그의 고급 수트를 더럽힌다. 그깟 먼지가 저인 것 같아 울음이 날 것 같았다.

세계는 발버둥 치는 영하의 몸을 억세게 붙잡았다. 나지막하고 거친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이딴 시골 촌구석에 숨어들었어? 안 간다는 고집부릴 때가 아니라 확실하게 말해.”

“굳이 말을 해야 알아? 이제 그만하고 싶어서. 싫어서. 끝내고 싶어서!”

“뭘.”

“그런 더러운 짓 그만하고 싶었다고! 몰라서 물어?!”

“…….”

울음 섞인 거짓을 뱉는 찰나. 영하는 자신이 내뱉은 낱말 하나하나가 그에게 상처를 내고 있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멈칫 굳는 다부진 몸체. 멎어버린 숨소리. 저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눈동자에 담긴 속절없는 슬픔.

차마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고개는 바닥으로 한참 꺼져 있었다. 그러다 제 손가락의 반지를 보고선 그가 눈치채기 전에 몰래 빼내어 움켜쥐었다. 그와의 지난 사랑이 더럽다고 일컬으며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왜 매번 이 남자에게 상처를 줘야 하는 걸까. 영하는 애써 괴로움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이어 말했다. 그에게 상처주는 것이 미안해 더 못된 말이 흘렀다. 목구멍 속으로 신물이 느껴지고 눈물 없이도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사랑한다고 말해 보니까 갑자기 현실이 느껴졌고 와닿았어. 우리가 벌였던 짓거리가 얼마나 징그럽고 역겨운지 알게 됐고. 남들한테 말 못 하고 손가락질 받을까 봐 겁먹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해. 그렇게 살기 싫어서.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어졌어.”

“더러운 짓. 역겹고…….”

그가 되새김질하듯 따라 했다. 울컥 목구멍을 메우는 고통을 가라앉혔다. 영하는 지금 그에게 있어 악역이 되어야만 했기에 경멸하는 어투를 꾸며냈다. 그래야 최세계가 최영하를 버릴 테니까. 그래야 최세계의 앞에 이어진 길이 순탄할 테니.

“알잖아. 아빠도.”

한풀 꺾인 영하의 입에서 자조적인 대답이 이어졌다. 곧바로 슬픔을 가라앉히고 그 위로 두꺼운 가면을 덧댄 남자가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난 항상 너와 사랑을 했는데. 더러운 짓이 아니라.”

“…….”

“최영하.”

“…….”

“너와 내가 했던 것들. 그게 사랑이 되는 이유를 알아?”

중얼거림은 곧 물음이 되고, 질문은 그의 안에서 확신이 되어간다.

“네가 날 사랑하니까. 한 번도 우리 사이에선 일방적이었던 순간이 없었으니까.”

세계가 날카롭게 눈동자를 번뜩이며 크게 호흡했다. 강제로 고개가 들려 마주친 시야. 세계의 새카만 눈동자 속에서는 순정이 명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강간이 되겠네.”

“뭐…?”

대답을 들을 틈새도 없이 팔이 붙들려 질질 끌려갔다. 몸부림치는 영하의 발밑에 코스모스 꽃송이가 짓이겨졌다.

마을사람들 모두가 대문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언뜻 임씨 할머니도 본 것 같다. 그들의 시선 앞에서까지 비명을 내지르며 일을 키울 순 없었다. 이윽고 영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눈가가 울컥 뜨거워지는 것도 참아 냈다.

큰 도로까지 내려오자 마을 바로 앞에는 시커먼 세단 한 대가 정차되어 있었다. 그에게 강제적으로 끌려오며 어느 정도 체념을 했으나 막상 차를 보자 두려움이 급격하게 몰려들었다.

시골의 무료함과 외로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도 가장 우선시했던 것은 최세계라는 남자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안 가… 나 안 가. 안 갈래! 싫어! 싫다고! 여기 있겠다고…!”

더듬더듬 우물대던 영하는 차문을 보자마자 몸을 떨었다. 서울로 향하는 순간 모든 것이 제자리걸음처럼 되돌아갈 현실을 예견했다.

이윽고 최후의 발악처럼 자신을 억압하는 세계의 손등에 이를 박아 넣었다. 희게 질린 얼굴로 콱- 깨무는 그 순간, 오히려 더 강한 힘으로 아들을 사로잡은 세계가 숨을 몰아쉬고는 거세게 고함쳤다.

“최영하!”

머리가 얼얼해졌다. 처음으로 그에게 듣는 불호령이었다. 모든 사고력이 멈춘 영하가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멈칫 굳은 아들을 내려다본 세계는 정확히 세 번 심호흡하고, 잇자국이 난 손등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널 여기로 보내 준 동생의 안위는 걱정도 안 되나 봐?”

승준이. 그가 이곳의 위치를 알아차렸다면 승준이와의 일도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 달 내내 제게 친절하셨던 할머니에게 죄송할 일이 생겼을까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영하가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는 차오르는 화를 애써 내리누르는 듯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가고 목울대가 여러 번 오르내리고서야 물음에 대답했다.

“스, 승준이한테 무슨 짓 했어? 걔 잘못 없어… 다 내 잘못이야!”

“네 잘못인 거 알면 다행이네. 정말로 무슨 짓 해 버리기 전에 차에 타. 일부러 화내지 않고 얌전히 데려가려고 했는데 다 망치지 말고.”

차 문이 벌컥 열렸다. 더는 말을 이을 생각이 없는 듯이 무작정 뒷좌석으로 영하를 몰아넣은 탓에 너른 차 안으로 몸이 거의 굴러서 안착했다. 이래서야 완전히 범죄자 취급이나 다름없다.

세계가 차를 돌아 옆자리에 앉기 무섭게 차가 출발했다. 영하는 최대한 그와 멀리 떨어져 있기 위해 차 문에 납작 붙어 몸을 웅크렸다.

서울까지 아마 네 시간… 네 시간 반. 그 시간이 까마득했고, 집에 도착한 이후의 일은 더욱 아찔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영하는 조용히 흐느끼며 창밖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세계가 자세를 고쳐 앉고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집에 돌아가면 네 아킬레스건부터 끊어 놓을 거야.”

겁을 주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해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가 “못 할 것 같아?” 하며 휴대폰을 드는 것을 보곤 경악에 찼다. 영하는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아빠…! 미쳤어? 그러기만 해 봐. 차에서 뛰어내려 버릴 거야!”

“해 봐. 뇌진탕이 아니라 뇌사 상태로 빠져도 집에 데려가서 끊어 놓을 테니까.”

세계의 음성은 동요 없이 침착했다. 자신을 강렬히 주시하는 눈빛 속에 든 감정을 헤아려 보려 했다. 정말 진심인지… 진심으로 그런 잔인한 짓을 하려는지.

당연하게도, 아무리 그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봐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영하는 독심술가가 아니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그에게 물었다.

“진심이냐고.”

“네가 내 진심을 왜 궁금해해. 내 진심은 네가 나를 버린 그날 망가졌고 오늘로서 확실하게 부서졌어. 사랑은 나 혼자 하고 있었던 거지.”

담담하게 대답하던 그는 망가졌다는 이야기를 하며 반듯한 이마 사이에 금을 세웠다. 이윽고 목을 돌려 선팅이 짙게 된 창밖으로 눈길을 둔다.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상처받았다는 표현이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 말만 해 주기를 내내 바라던 남자인데….

내가 이미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듣고 싶어 했는데.

‘우리가 벌였던 짓거리가 얼마나 징그럽고 역겨운지 알게 됐고.’

그 또한 영하가 뱉은 말이었다. 한순간의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무슨 말을 하든 그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텐데. 상처만 남겼다.

칼날 같은 침묵. 자신의 등 뒤에 꽂히는 감각이었다. 턱 막힌 숨을 가까스로 조용히 뱉어 낸 영하는 그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창문에 뺨을 기댄다. 눈을 감았다. 버리고 떠난 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버려진 사람의 비참함을 헤아릴 수 없다.

영하는 버려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와의 관계에서는 영하가 그를 버린 쪽이었다.

이제 내가 미워졌을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졸음이 쏟아졌다.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었다. 평소와 달리 바닥이 푹신해 뒤척여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몸에 닿는 이불의 촉감도 부드럽고 포근하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불이 너무 좋아…….

좀 더 잠들고 싶다고 혼자서 투정을 부리던 시점. 번쩍 눈을 떴다. 한가롭게 잠이나 잘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내 발목……!”

허겁지겁 이불 밖으로 다리부터 들어 확인했다. 뼈대가 얇고 곧은 다리와 가느다란 발목은 멀쩡했다.

“아직 안 잘랐어.”

침대 맞은편 의자에 앉은 세계가 전화를 끄며 차분히 일갈했다. 손으로 발 뒤쪽을 만져 보고서야 영하는 밭은 숨을 토해 냈다. 하아. 하…. 다행히도 잘리지 않았지만, 아빠는 ‘아직’이라고 말했다.

“더 자. 피곤할 텐데.”

데려올 땐 그렇게 역정을 내던 남자가 지나치게 차분하다. 세계는 달이 뜨기 전, 마지막의 힘으로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닿지 않는 그늘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잠긴 목소리를 통해 그의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화를 내지 않는 점이 의아해 조심스레 물었다.

“화 안 내?”

“속으로 삭이고 있어. 괜히 시비 걸지 마.”

그가 테이블에 팔을 괴며 대답했다. 언제 도착한 거고 난 얼마나 잠든 걸까. 노을이 지는 것으로 보아 저녁이다. 그 와중에 차에서 잠들어 침대에 눕힐 때마저도 깨지 않았다니……. 영하가 두 다리를 모아 끌어안으며 웅얼댄다. 떠난 한 달간 바뀐 것이 없나 둘러보는 사이에도 세계의 시선은 영하에게 붙박였다.

“……시비 거는 게 아니라.”

“미안한 마음이 있으면 그냥 조용히 잠이나 자.”

“……저기, 승준이는….”

“어디까지 내 기분을 더럽히려고 딴 남자 이야기야.”

“딴 남자라니…….”

승준이더러 남자라고 표현하는 그가 밉다. 자신을 피 섞인 남자들만 좋아하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었다. 아빠라서 좋아하는 게 아닌데…….

퍽 속이 상해 입을 꾹 다물자 세계도 더는 말이 없었다.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의 침묵처럼, 솜털을 곤두서게 하는 불쾌하고 겸연쩍은 정적이었다.

서로에게 그 어떤 말도 쉽게 건네지 못하는 관계.

영하는 고개를 내려 툭 도드라지는 무릎뼈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벌써 상처에 딱지가 앉았다. 잠든 사이 약이라도 발랐는지 상처 부위가 끈적했다. 곁눈질로 본 세계는 마지막으로 봤을 시점보다 확연히 살이 내려 초췌한 인상이었다. 가슴 위쪽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많이 힘들었을까. 연인이 떠나든, 자식이 떠나든 가슴 아프고 괴로운 것은 당연했다.

“더 잘래.”

영하는 결국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을 선택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이제 막 일어났는데 잠들 수 있을 리가 없다.

*

세계와는 계속 냉전이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데려온 건지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그는 영하를 홀로 내버려 뒀다. 도통 그 속을 이해할 수가 없다.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 안에서 입 한번 떼지 못하고 갇혀 있길 5일째, 바람을 쐬고 싶어 대문을 열어 본 영하는 곧장 기겁했다. 문밖에 시커먼 남자가 넷이나 버티고 있었다. 그가 심어 둔, 경호원을 가장한 감시원들이었다. 그들은 무뚝뚝한 얼굴로 영하가 대문 바깥으론 한 발자국도 내밀지 못하게 했다.

‘…아이스크림만 사 올 거예요. 도망 안 가요.’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저희가 사 드리겠습니다.’

산책도 안 되는 것은 물론이며 휴대폰이나 태블릿, 컴퓨터도 사라졌다. 바깥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모조리 막아 둔 것이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시계 아래 멍하니 앉아 그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혼자 남겨진 무료함보다 괴로운 일은 없는 사람 취급받는 일이었으니까.

첫날을 제외하곤 영하는 작은 방에서 머물렀고, 그와는 한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방이었으나 이제는 낯선 공간. 혼자가 된 자신.

이럴 거면 왜 데려온 거지.

여러 감정들이 뒤죽박죽 섞였고 여름 한낮의 더위. 이제는 사랑이 아니라 강간이라 중얼거리던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뜻했다. 남들이 그런 시선이 괴로워서 떠난 건데. 끝내 아빠의 입에서 나왔으니.

우울함과 외로움은 사람을 좀먹는다. 온종일 홀로 시간을 버티니 무료한 머릿속에 파고드는 건 그를 향한 미움, 설움, 원망, 미안함뿐.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어도 사이는 전혀 좁혀지지 않고 오히려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 확실히 결론을 내야 했다.

7시. 퇴근한 세계는 현관 앞에 버티고 선 영하를 보고 눈가를 좁혔다. 그를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팔을 뻗고 있으니 밀치지 않는 이상 집 안으로 들어가긴 힘들어 보였다. 영하가 순진해 보이는 눈을 최대한 부릅뜨고 그에게 일갈했다.

“잘못했어. 이제 그만 화 풀어.”

“이게 사과하는 태도야? 적반하장이네. 그래. 난 천하의 상종 못 할 쓰레기니까.”

“왜 그런 말 해?”

세계는 앞을 막고 선 영하를 잠시 물끄러미 응시하곤 곧장 몸을 돌렸다. 망설임 없이 집을 나가려는 모습에 어깨를 떤 영하가 비명처럼 외쳤다.

“어떻게 하면 아빠 화가 풀리는데?! 제발 피하지 말고 이야기 좀 하자고!”

거실을 채우는 영하의 고성에도 세계는 반응 하나 없었다. 등을 지고 선 그가 느릿하게 몸을 돌리자 드러난 표정은 무심했다. 그 무감각한 얼굴에 영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출처가 불분명한 불안감이 바닥을 타고 몸을 휘감았다.

“피하는 게 아니라 화를 참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풀어 주고 싶으면 네가 생각해 봐.”

축 가라앉은 목소리가 느리게 대꾸했다. 생각은 이미 충분히 했다. 자신을 봐주지 않고 무시한 건 최세계 쪽이었다.

“내가 잘못한 거 알아. 미안해……. 상처받을 거 알면서도… 그땐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난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내 화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라고 했지.”

비아냥대는 말투와 무미건조한 시선이 제게 진득이 닿은 것을 느낀 영하는 곧 실소했다. “하.” 짧게 뱉어내듯 웃고는 입매를 굳게 다물며 세계와 눈을 마주쳤다.

“여기서 벗기라도 해?”

벗겠다는 말을 할 땐 목소리가 떨렸다. 무슨 짓에도 반응해 주지 않으니 그를 자극할 방법은 섹스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세계는 시큰둥했다. 손을 떼어 내진 않았으나 여전한 것이다.

“그냥 섹스하는 거로 내가 풀릴 것 같아?”

“그러면 어떡하란….”

“……최승준 앞에서 할까?”

“뭐…?”

수치심에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승준이는 단지 동생일 뿐이었다. 그와 같은 의미도, 비슷한 의미도 될 수 없다. 영하에게 평생 에로스적인 남자는 눈앞의 최세계 말고는 없었는데, 그가 자꾸 자신을 모욕했다.

모멸감과 동시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저도 모르게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세계가 멀어지는 발끝을 보곤 입술을 당겨 웃었다. 내리깔아 은밀하게 드러난 눈동자에 술렁이는 분노와 광기가 선명했다. 그가 신경질적인 포효처럼 내질렀다.

“본가 거실에서 할까? 남들 다 보게? 응? 승준이한테 말하는 거야. 앞으론 네 형이 아니라 네 엄마가 될 거라고. 이참에 부모님께도 말해 둘게. 그렇게 바라던 며느리가 생겼으니 혼수 준비해 달라고 할까?”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이어지는 말마다 모두 현실성이라곤 없는 끔찍한 소리였다. 흥분해 소리치던 그가 뒤늦게 눈을 질끈 감더니 호흡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네가 떠난 한 달 동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버텼을지, 상상이라도 해 봤으면 네가 나한테 이런 식으로 못 굴었어.”

“아니야. 생각했어. 미안했어. 매일 아빠 생각만 했어. 힘들 거라고 생각했…….”

“너야말로 네가 힘든 것만 생각하지. 나는 이미 수십 번 말했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막겠다고, 너는 그냥 모르는 척하라고. 그렇게 말해 주면 뭐 해. 너는 내 말에만 귀를 닫고 다른 버러지 같은 새끼들이 떠드는 이야기에만 신경 쓰잖아.”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원망 속에 입을 열 수 없다. 입술을 벌리면 그 안으로 빗물이 흘러 들어올 것만 같았다.

한쪽의 기세가 확연히 꺾인 대치 속, 영하는 그의 마음을 풀어 보고자 감춰 두었던 것을 뱉었다.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서민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세계는 미동조차 없음은 물론이며 오히려 한쪽 입술을 당겨 웃으며 이죽거렸다.

“하지만, 아빠. 서민석이.”

“그래. 서민석이 힘없는 널 붙잡고 협박했겠지. 그런 놈이니까. 하지만 얼마나 네 남자를 물로 보면 그딴 협박에 넘어가 쪼르르 도망갈 생각을 하지? 그게 날 떠나 내게 상처 주는 것보다 더 무서워?”

“…….”

“네가 날 떠난 내내 내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네가 그 좆같은 노인네한테 겁간당할 뻔했다는 말을 들은 순간 내 가슴이 넝마가 됐어. 그래도 참으려 했지. 분명 네가 날 배신했지만, 충분히 놀라고 괴로웠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짓까지 당하고서도 네가 돌아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순간, 내 심정이 어땠을 것 같아?”

영하는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한 번도 그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낱낱이 밝힌 적 없었다. 그래서일까.

영하에게서 최세계는 언제나 단단한 강철 같은 남자였다. 상처를 입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얕은 흠집에 불과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최세계도 죽음에 이르는 그날까지 기억될 상처가 남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 필요 없어. 네가 날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애초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다정한 아빠 흉내를 냈던 거지. 그런 애를 써 봤자 그간의 세월이 한순간에 역겨운 나날로 변할 뿐인데.”

세계가 삐뚜름하게 말했다. 자조적인 웃음이 한숨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아. 더러운 짓 자체가 문제였나?”

보읍마을에서 이곳으로 잡혀올 때 영하가 그에게 뱉은 말이었다. 혀가 칼날이 되어 그에게 영겁의 상처를 남긴 사람이 자신이었다. 죄책감과 도망치고 싶은 감정이 동시에 거센 격풍처럼 몰아쳤다. 세계의 눈은 상처받은 자의 눈길이 아니다. 이미 상처 위로 딱지가 앉고 그 위로 한 겹의 베일이 덮인 모습이었다.

영하는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비껴 나간 마주침 사이로 영하가 소리쳤다.

“그래, 그만해. 서로 숨 막히는 짓 그만하자고. 그래서 떠난 거잖아. 애초에 처음처럼, 모르던 사이로 남남으로…….”

“그러고 싶으면 그러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 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나가는 순간, 네 안위는 장담 못 해.”

“무슨…….”

그가 단숨에 가까이 다가와 낚아채듯 영하의 턱 아래를 바짝 움켜쥐었다. 손아귀의 힘이 아프게 들어가 통증으로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읏….”

뼈가 부서질 것만큼 아파 그의 어깨를 때리며 밀쳐 냈다. “아파!” 단말마의 비명을 외치며 입을 벌리는 동시에 그가 입 맞출 듯 고개를 사선으로 꺾으며 바짝 붙었다.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벌건 자국이 남은 아래턱에 달라붙었다.

“교통사고 당한 그 노인네. 너한테 어디까지 했어.”

“…아무 일도 없었어. 겁주고 덤벼들려고 해서 내가 머리 세게 때리고 도망쳤어. 난 괜찮아.”

“그래서 그 인간 머리에 상처가 났구나.”

“응.”

좀 전까지 아프게 하던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영하를 타일렀다.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던 시절로 잠시나마 돌아간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서로를 향한 눈길에 사랑만이 차 있던 나날들. 고작해야 한 달밖에 안 된 과거였으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의 사근사근한 태도에 마음이 누그러져 얌전히 대답하자, 눈가를 얇게 접은 남자의 입술이 가볍게 겹쳐졌다. 긴장으로 굳은 어깨의 힘이 빠지고, 바들바들 떨리는 아랫입술을 여러 번 빨아 당겼다.

한때 희미해지던 촉각들이 되살아났다. 키스할 때의 그의 호흡과 체향마저도. 춥, 춥. 타액이 얽히는 소리가 멎고 잠시.

아들의 뒷목을 타고 척추뼈를 느긋하게 훑어 내리던 세계가 미소 지었다.

“그럼 김 씨가 깨어나서 널 신고하면 문제가 커지겠군. 안 그래도 그날 경찰이 뭔가 수상하다 느꼈을 텐데.”

“…뭐?”

갑작스러운 키스로 몽롱하던 감각이 유리 깨지듯 와장창 부서졌다.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기엔 그는 웃고 있었다.

얼어붙어 타액으로 점철된 영하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닦아 낸 세계는 가벼운 걸음으로 소파 위에 앉아 긴 다리를 꼬았다.

“덤비려 했다는 증거와 증언은 없고 네가 때린 증거는 그 집에 있어. 바닥에 핏자국을 닦아 냈어도 전문가가 현장 조사를 한다면 단서는 나오는 법이지. 미처 닦이지 않은 피의 흔적과 그 집 쓰레기통에 있을 무기. 아마 김 씨가 신고하면 일주일 안에 네가 김 씨를 특수폭행했다는 결과가 나올 거야. 전과가 없다면 상황을 보거나, 기타 증언으로 참작을 해 주겠지만.”

“……아빠…….”

“우리 영하가 지금 지명수배자라서.”

안타깝게 됐네. 이어서 말하는 최세계의 목소리는 기분 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날만을 계속 고대해 온 듯한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말이야.

아예 다른 세계의 언어를 듣는 것처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왜 자신의 구속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며, 지명수배자가 됐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실종 신고도 아니고 지명수배? 얼빠진 얼굴로 그가 했던 말을 되새겨 보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혼란스러웠다. 굳은 목을 억지로 풀며 그를 바라봤으나 세계는 등을 돌린 채였다.

“무슨 말이야? 지명수배라니.”

“간 크게 남의 돈을 쓰면 되나. 게다가 10억이나 든 통장을 어떻게 구한 거야? 능력도 좋지.”

10억. 시끄럽게 난동 부리는 심장 소리가 더욱 산란해졌다.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 넣으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희게 도드라진 뼈 위를 엄지로 매만지곤 침을 모아 삼켰다. 세계는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내던져 둔 서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뒤돌아본 그가 멀뚱히 거실에 홀로 선 영하를 향해 몇 장의 서류를 내던졌다. 허공을 가르고 나르던 흰 종이가 종아리에 부딪혀 풀썩 바닥으로 흩어졌다.

“…날 계속 감시했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두 장씩 프린트된 사진이었다. 가방을 품에 안고 할머니 집을 뛰쳐나오는 영하와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부여잡고 마당을 나가는 김 씨의 사진.

허리를 굽혀 종이를 들어 본다. 잠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모했다. 바닥을 겨우 붙잡아야 어질한 몸뚱이를 가눌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 황망히 앉은 자신의 모습. 할머니와 함께 마을로 돌아가는 뒷모습까지. 사진은 그날만 찍힌 것이 아니었다. 2주 전으로 추정되는 사진 또한 존재했다. 눈을 여러 번 깜빡이며 침착하려 애쓰던 영하는 가장 마지막 장을 넘겨보며 숨을 가쁘게 들이켰다.

“왜 이러는 거야…….”

지명수배 서류 아래에는 최영하 석 자와 영하의 생년월일, 서류상 기재된 주거지가 등재되어 있었다.

절도 혐의. 소재 불분명. 그가 이걸 가지고 있다는 건……. 당연히 최세계가 이 일에 개입한 것이다. 영하의 일을 경찰에 신고한 장본인임이 틀림없었다.

“타인의 예금 계좌에서 출금하면 절도죄 성립이지. 심지어 너는 기계의 일일 출금 한도 때문에 매일 은행에 들러 출금해 갔으니 계획적이고 악질적인 범행으로 간주해서 가중처벌을 받을 거야.”

“…….”

“이미 소재 불명으로 지명 수배된 상황에, 내가 너의 거취를 경찰에게 알리는 순간 넌 즉시 체포나 구속될 거야. 운 좋게 구속은 면하더라도 벌금 낼 돈이 없을 텐데.”

그럴 일 없다. 그럴 수 없었다. 영하가 서류를 잔뜩 구겨 움켜쥔 채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느새 일어나 소파 뒤쪽에 몸을 대고서 선 남자가 무심한 눈길을 건네왔다. 잔뜩 동요해 몸을 떠는 아들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온몸의 마디마디에서 열이 오르는 것 같다. 영하는 결백했다. 차명 계좌 사용 자체가 불법인 것은 알고 있으나 할머니께 반쯤 강요당한 것뿐이었다.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차명 계좌 사용은 절도가 아니다. 그 계좌 안에 든 금액 자체는 할머니의 것이었다. 그러나 곧장 받아치는 세계의 말에 영하는 절망했다.

“그거 할머니가 주신 거야. 할머니가 주신 거라 사용한 것뿐인데 내가 왜…!”

“서류상 할머니는 김수림 씨가 아닐 텐데.”

“하……. 대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거대한 구렁텅이에 빠진 것과 진배없었다. 눈앞이 하얗고, 곧이어 까매졌다. 숨이 턱턱 막혀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친다.

울지 않으려 애썼으나 영하는 매번 울음을 참아 내는 것에 실패했다.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라 입술을 질끈 깨물며 손바닥 안으로 계속해서 손톱을 박아 넣었다.

밉다.

“……이러려고, 내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바로 데려오지 않은 거야? 날, 이 꼴로 만들려고.”

“내 어머니가 차명 계좌를 개설해 너한테 줬다면, 회사에 세무조사는 기본이고 기사도 여럿 날 테고 추징금에 벌금에……. 대기업 사모가 자식보다 어린 남자에게 덜컥 10억을 넘겨준다니 온갖 더러운 소문이 부풀려지는 건 시간문제일테고. 낯 구겨지는 일이니 체면을 중시하는 그분께서 많이 힘들어지시겠지. ……뭐, 할머니야 그 통장과 전혀 관계없다고 하시지만.”

“……말도 안 돼. 할머니가 아니면 내가 그런 큰돈이 어디서 난다고 그래! 할머니가, 할머니가 시켜서 그랬어.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왜, 왜…….”

입맞춤하는 순간, 잠시나마 예전의 사이로 돌아갔다는 기분은 영하만의 착각이었다. 그는 다가와 입 맞추는 그 찰나마저도 영하를 완전히 집 안에 가둬 버릴 궁리만 하고 있었다.

내가 상처 준 거 알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까지…….

“이런 짓이라니. 아빠는 배운 대로 하는 것뿐인데.”

그가 소파에 기댄 몸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영하는 도망칠 힘과 의지마저 상실했으므로, 다가오는 발을 보며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는 것이 고작이었다.

최세계는 눈가를 곱게 접어 웃고 있었으나 접힌 눈꺼풀 아래 가느다랗게 드러난 눈동자가 희번들하게 빛나고 있었다. 석면보다도 더 단단하고 그림자 진 미소였다.

“벗어나는 법을 알려 줄까? 간단해. 사망 신고면 끝이야. 기소 혐의 없음으로 종결 나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자 발치로 다가온 남자가 몸을 아래로 내려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본의가 아니었다느니 할머니가 줬다느니 변명은 통하지 않아. 네가 시골에 틀어박혀 꼼짝 안 했던 것도 경찰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한 잠적으로 받아들이겠지. 양형이면 양형이지 절대 감형되진 않을 거야. 어떡할래.”

아무리 애를 써도 쏟아지는 빗줄기를 막을 수는 없다. 피한다 한들 옷깃은 젖어 든다. 빗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원망, 사랑, 집착과 비틀린 마음. 그 모든 것을 안은 최세계는 마치 대적할 수 없는 대자연처럼 영하를 지배했다.

평생을 집 안에 갇혀 살 순 없다. 그러나 집 바깥으로 뛰쳐나가 범죄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잘못했어. 응? 아빠, 잘못했어… 이러지 마. 그만해. 왜 이러는 거야….”

“네가 나한테서 도망치려 하니까. 네 위치를 알려 주는 것뿐이야.”

“위치 같은 게 어디 있어. 제발 이러지 마, 아빠…. 나도 힘들어서 그랬어. 싫어서 그랬던 게 아니야. 사랑해. 사랑하는데,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잖아. 내가 아빠한테 방해가 되면 어떡해. 그래서 그만하려고 했던 거야. 그냥, 그냥 애초에 모르고 살았던 처음처럼…….”

“그래? 그렇게 원하면 처음으로 돌아가자.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야.”

무릎까지 굽혀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거칠게 어깨를 잡아챘다. 무기력하게 흔들려 결국 그와 눈을 맞댄 영하가 괴롭도록 눈꼬리를 일그러뜨렸다. 짙푸른 음영이 드리워진 그의 얼굴은 살이 많이 내려 있었다.

“근데 어떡하지, 영하야. 처음으로 돌아가도 넌 내 아들인데. 네가 날 사랑하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네 마음이 어디에 있든, 어떤 형태든, 너와 나의 관계는 절대 끊어질 수도 바뀔 수도 없으니까.”

목이 힘없이 흔들렸다. 결국 자신은 벼랑 끝에 발을 두고 있었다. 이미 예견했던 미래. 알면서도 발을 디딘 자의 결말이었다. “아아…….” 신음하며 몸을 잘게 떨었다. 자신의 미래가 훤히 그려졌다. 이제 와 누구를 원망하고 미워해야 할지도 확실치 않았다. 내 선택을 후회해야 할지, 다른 선택지를 두고도 이런 일을 벌인 이 남자를 원망해야 할지.

“마음이 약해서 네 발목 하나 꺾지 못하는 게 나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내가 널 어떻게 경찰에게 넘기겠어. 영하는 아빠의 아기인데.”

세계의 손길이 다정히 영하의 뺨을 쓸어내리곤 등 뒤로 향했다. 너른 손이 흐느끼는 아이를 달래듯 다정하게 오르내린다. 그러나 성급함이 깃들어 있었다. 오래가지 않아, 달래던 손이 영하의 티셔츠를 벗겨 올렸다. 들끓는 욕망과 집착이 눈앞에서 번득였다.

*

거대한 뱀이 자신의 몸을 조이고 똬리를 튼다. 크게 벌린 입이 제 몸을 집어삼킬 듯했다.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영하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두 발을 버둥거렸다. 몸을 덮는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 위를 손바닥으로 연신 문질렀다. 흐릿한 꿈결 사이로 겨우 정신 차렸다.

뒤가 축축하고, 이어 엉덩이를 세게 그러쥔 손이 그 사이 구멍을 가로로 길게 벌렸다. 새벽까지 남자의 정액을 진탕 받아 낸 후라, 눈 뜨는 게 여의치 않았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 꼼짝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흐으응…….”

침대 위에 엎드린 영하는 두 다리를 강제로 넓게 벌린 채 콧소리를 흘렸다. 나긋한 손길이 붉게 달아오른 회음부를 건드렸다. 살금살금 간지럽히듯 표면을 긁으면, 영하의 허리가 바들바들 떨리며 엉덩이의 근육이 잔뜩 긴장한다. 뒷목까지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어제의 기억이 조건 반사처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전날 밤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을 만큼 무리했다. 두껍게 부푼 음경이 성급하게 안을 파고들고 끊임없이 정액을 쏟아 냈다. 그야말로 배 속에 가득해 더는 들어가지 않을 만큼. 육체의 한계를 느끼곤 더는 섹스하고 싶지 않다며 침대 밖을 빠져나가려던 영하는 곧장 그에게 붙잡혀 난생처음 치욕스러운 경험을 했다.

그가 영하의 두 발과 두 손을 한꺼번에 제압하곤 고환 아래 회음부를 손으로 때렸다. 전기가 이는 듯한 착각이 드는 충격이었다. 울먹임도 멈추고 바짝 긴장한 등허리가 단단히 굳어 갔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단 한 번도 맞아 본 적 없는 몸뚱이는 금세 기가 죽었다. 더는 맞고 싶지 않아 다시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의 목덜미에 콧등을 문지르며 빌어 보았으나 최세계는 가차 없었다. 수치스러운 부위에 세 대를 더 때리고서야 영하를 엎드리게 했다.

반쯤 잠든 머릿속에 꿈처럼 어제의 일이 되풀이된다. 엉덩이도 아니고, 남에게 말 못 할 곳을 맞은 충격이 대단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다시금 회음부의 중앙을 매만지자 야릇한 감각을 느끼기보단 거절의 웅얼거림부터 튀어나왔다.

“싫어…….”

말이 끝나자마자 불그스름한 그곳 위에 혀가 닿았다. 아직도 마찰열이 남은 위로 축축하고 뜨끈한 혀가 용서를 구하듯 여러 번 예민한 피부 위를 부드럽게 핥았다.

“흐윽.”

허공에 뜨인 발가락이 굽고 좁다란 허리가 미미하게 떨려 온다. 발간 혀를 내밀며 밭은 숨을 뱉어 내던 영하가 억지로 눈을 뜨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불가능했다. 다만 마음과 달리 성기와 유두가 꼿꼿하게 서서 이불의 가슬가슬한 촉감 속에 더 단단해졌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면서 성기를 문지르느라 엉덩이가 조금씩 흔들렸다.

“싫다면서, 여긴 왜 자꾸 이래.”

아빠의 목소리였다. 자신보다 늦게 잠들었을 텐데 벌써 일어났다. 애초에 영하의 몸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이 남자밖에 없다.

혀를 단단하게 세워 회음부의 곳곳을 핥아 낸 그가 욕심스럽게 뻐끔대며 투명한 액을 흘리는 구멍 위로 엄지를 꾸욱- 내리누르며 말했다. 마찰의 흔적이 역력한 구멍이었다. 연신 깨물고 핥고, 자지로 쑤셔 박았으니 성치도 않은 주제에 여전히 안을 채울 살덩이를 원하고 있었다.

히윽. 영하는 신음처럼 숨을 삼켜 냈다. 그와 관계를 맺은 후론 평소에 흐르는 양은 줄어들었으나 조금만 흥분감을 느껴도 팬티가 흥건해질 만큼 아래를 적셨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아직 잠에 취한 상태라 그랬다. 어제 한참 울어 여전히 부은 눈가를 바라본 남자가 허리를 둥글게 휘며 몸을 숙였다. 손가락이 닿자 허겁지겁 삼키듯 구멍의 점막이 그의 손끝을 집어삼키곤 제멋대로 오물대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더 안으로 들어오면 극한의 쾌락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애액에 손등이 젖어 간다. 어젯밤, 몇 시간 내내 그의 것을 물고 있던 곳이었다.

무신경한 손길이 구멍 안쪽으로 빠끔 들어간다. 손가락 전체를 물고 조여드는 순간, 세계가 눈가를 찡그리더니 손을 빼내고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 위로 혀를 내밀었다. 갈급한 남자처럼 허겁지겁 통통한 살을 이로 물고 구멍 전체를 혀로 문질렀다.

“아흥… 읏, 아아……!”

전날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구멍과 그 주변 살결은 남은 마찰열로 여전히 뜨끈했다. 통통하게 부어오른 예민한 점막을 혀로 달래듯이 살살 굴리고 혀뿌리에 단단히 힘을 줘 내벽을 내리누르자, 엎드린 몸이 움찔움찔 튀어 올랐다.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엉덩이가 저도 모르게 위로 솟아올랐다.

발기한 성기 끝에서 말간 액이 찔끔찔끔 흘렀고, 입술을 우물대며 끙끙대다 겨우 눈을 떴다. 흐릿한 시선으로 보이는 침대 헤드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순간, 세계가 구멍 속으로 혀와 함께 손가락을 넣어 깊게 삽입했다.

“으으응!”

높고 곧은 콧대가 엉덩이골에 닿아 문질러진다. 손가락 덕에 혀의 깊이는 얕아졌으나 영하의 입장에선 그게 더 힘들었다. 말캉한 혀가 자꾸만 예민하게 부은 점막을 괴롭히고 남자의 손이 전립선 부근에서 안타깝게 배회했다. 좀 더 깊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싶다는 충동이 그칠 줄 모르고 가쁘게 목을 죄어 온다

새벽까지 섹스하는 날이면 최영하의 구멍은 칠칠치 못하게 잠든 와중에도 물을 흘리곤 했다.

잠시 입을 뗀 사이 손가락은 어느새 세 개로 늘어나 쿵쿵 쑤셔 박히기 시작했다. 영하의 몸뚱이가 기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부풀어 오른 깊은 안쪽까진 닿지 않았으나 느끼는 부근이 빠듯하게 압박되어 허리 아래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떨려 온다. 몸을 좀 더 숙인 세계가 연약한 허벅지 안쪽 살을 깨물고 입술로 문지르더니, 이내 춥- 춥 하고 물 자국이 선명한 다리 위를 혀로 핥아 올리고 있었다.

흰 피부에 흘러내린 애액을 빨아 먹는 소리에 노곤한 눈꺼풀이 번쩍이며 뜨였다. 영하가 비명처럼 몸을 흔들었다.

“싫어! 먹지 마, 싫어…!”

그런 걸 먹으면 어떡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계가 등 위를 꽈악 잡아 내리누르면, 움직일 수 없었다. 내친김에 그는 아예 손가락으로 구멍을 벌리고 동그랗게 길이 난 항문 아래 혀를 갖다 대었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연이어 아래위로 오르내린다. 견디기 힘든 수치심에 결국 크게 울음이 터졌다.

억울한 마음에 매트리스를 쾅쾅 내리쳤다. 그의 유전자를 받아 태어났는데 자신만 이 모양이었다. 형제인 승준이도 저보다는 더 컸다. 아무리 최세계가 젊은 아버지라지만 그에게 힘으로 단 한 번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속이 상했다.

“그만, 그만 빨아…….”

영하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혀는 더 깊게 침투한다. 전신에 간지러운 쾌락이 퍼져 나가고, 몸 주인의 수치심과 이성적인 사고 판단과 달리 항문 안쪽의 점막이 기뻐하며 얕게 경련하고 있었다. 찌릿한 경련은 꼬리뼈를 타고 허리와 척추를 따라 올라갔다.

“아으으응…….”

어젯밤 그렇게 하고도 다시 쾌락을 느끼는 몸뚱이가 야속했다. 마음과 달리 구멍은 그를 원했다. 이딴 혀 말고, 두꺼운 자지로 아플 때까지 쑤셔 넣어지고 싶다는 욕망이 절절히 들었다.

그가 자신의 안쪽을 때리던 감각을 기억한다.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가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기 위해 다소 폭력적으로 배꼽 아래 부근을 귀두로 박아 대면 이윽고 못 견딘 그곳이 입을 벌리고 귀두를 제 안에 조붓이 파묻었다. 음모가 발그레하게 마찰열이 오른 엉덩이 위로 바짝 붙을 만큼 깊은 삽입이어야만 가능한 행위였다.

세계는 자꾸만 그곳에 자신의 중심을 파묻고 정액을 쏟아부었다. 분명 파정하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야 정상이었으나, 영하는 그가 눈매를 좁히고 신음하며 바짝 붙은 하체를 진동하며 사정할 때면 배 속에서 퍼져 나가는 뜨거운 술렁임을 느꼈다.

“아…!”

영하의 마음을 모르는 남자는 입구 주변만 맴돌던 혀를 떼어 낸다. 온통 번들거리는 액체로 범벅이 된 살결을 이로 깨물었다. 잇자국이 난 흰 피부를 더듬고는, 동그랗게 벌어진 항문의 주변에 입 맞추고 자신의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엉덩이 들고 있어.”

감정 없는 목소리의 명령이었다. 영하는 젖은 눈꺼풀을 깜빡이곤 한참의 고민 끝에 허리를 들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또 회음부를 얻어맞을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아팠고, 괴로웠고, 수치스러웠다.

늦은 밤, 회음부를 때린 그가 나중에는 결장을 열어 박으면서까지 때린 곳의 살결을 더듬었다. 여리고 약한 부위니 맞고 한참이 지나도 뒤이은 자극이 아파 울음을 터뜨렸다. 동시에 괴로워하는 최영하의 구멍 내벽이 잔뜩 조여들었다.

허리춤을 강하게 쥔 그의 성기가 구멍을 벌려 진입했다. 꽤 오래 빨아 주었으니 단계별 진척 없이 단숨에 뿌리 끝까지 쑤셔 박았다. 퍼억! 하고 흥건해져 형광등 아래 잔뜩 반짝이던 엉덩이가 그의 사타구니에 아프도록 부딪쳤다.

“아파!”

괴로운 신음과 반대로 안쪽의 점막이 겨우 들어온 살덩이를 반기며 잔뜩 조여들었다. 축축한 물기로 남근을 적시고 그를 흥분시켰다.

양쪽 허리를 틀어쥔 손등에서부터 솟아난 힘줄이 팔뚝까지 이어졌다. 허리를 느리게 뒤로 당겼다. 핏발이 선 남근이 물러서자 기둥을 타고 흐른 애액이 뚝뚝, 침대보를 적셨다.

“하아…….”

거친 숨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다시금 꽈앙! 하고 난폭하게 돌진하듯 안으로 거세게 밀어 넣었다. 열락은 즐거움 이상으로 고통을 선사했다. 영하는 열병을 앓듯 흐느끼고 몸을 떨었다.

“아아! 흑…! 천천, 히…!”

타는 듯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 갔다. 척추뼈를 타고 오른 전율이 뇌를 희게 적시고, 쩍쩍 살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와 세계의 신음성이 복잡하고 야릇하게 뒤엉켰다.

“우응, 못 버티겠, 어요…! 응, 으흑, 아빠, 제발요… 아, 흑!”

침대 끝에서 퍽퍽 올려붙이는 통에 영하의 몸통이 헤드까지 밀려 올라갔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헤드를 붙잡고 버텼으나 온통 떨리고 힘이 빠져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무너진 몸으로 고개를 시트 위로 처박아 히끅대며 애원하자, 잠시간 박아 대는 것을 멈춘 남자는 약간의 휴식 끝에 미친 듯이 짐승의 교미처럼 아들을 몰아붙였다.

“아…! 응, 찢어지겠, 너무 거칠어요! 아빠……!”

비명 속에 세계가 목을 울리며 안쪽에 사정했다. 그곳에 사정하면 아주 오랫동안 아래에 힘을 주고 있어야 정액이 흘러나왔다.

그는 출근도 미룬 채 며칠 내내 영하를 안았다. 그와 섹스하지 않을 때는 매번 기절하듯 잠들어 몰랐는데, 사흘이 되는 날 집으로 찾아온 비서실장을 통해서야 그가 말없이 회사를 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도 영하는 소파에 앉은 그의 몸 위에 등을 대고 올라타 성기를 집어삼킨 상태였다. 문을 두드려도 열어 주질 않으니 현관 바깥에 선 비서실장이 전화했다. 두 번째 전화가 끊기고 세 번째 벨이 울릴 때쯤, 세계가 벌떡 일어나 아들의 안에서 성기를 뽑아냈다.

“으응…….”

뻐끔, 구멍이 그의 음경 둘레에 맞춰 한참 벌어져 있었다. 몇 번을 토해 낸 정액이 느리게 구멍 바깥으로 흘러내렸고, 바닥 아래로 떨어진 담요를 들어 영하의 몸 위에 덮은 남자가 귀찮은 몸짓으로 가운만 걸친 채 현관을 열었다.

혹여나 바깥에 선 비서 삼촌이 안에 들어올까 겁이 난 영하는 담요를 몇 번이나 꼭꼭 여미고 몸을 납작 내렸다. 심장이 말도 못 하게 뛰었다. 다른 사람에게 둘 사이를 들키는 일이 더는 없어야 했다.

다행히 비서실장은 현관 앞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떠나갔다.

탐탁지 않은 표정의 그가 곧장 주방으로 걸어가 주스 팩 하나를 가져오더니 빨대를 꽂아 영하에게 내밀었다. 오렌지주스. 그다지 좋아하지 않더라도 살려면 먹어야 했다.

담요 바깥으로 얌전히 손을 내밀어 주스를 받아 들었다.

잦은 섹스로 몸 상태가 최악이다. 첫날보단 횟수가 많이 줄었으나 여전히 최세계는 눈만 마주치면 영하를 안았다. 그래서 일부러 바닥만 노려보며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썼는데 멋대로 안아 올리니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고 무섭게 몰아치고 다그친 주제에, 세계는 영하의 체념을 확인한 후에는 제법 다정했다.

녹초가 되어 침대 바깥을 벗어나지 못하니 직접 점심을 먹여 준 후에는 알몸에 담요 한 장만 둘러 안아 들고는 폴딩 도어를 쳐 둔 테라스 안쪽에 앉혀 햇빛을 쐬어 주었다. 그러나 예전과 분명 달랐다. 그의 말대로, 정말 아기를 대하듯 굴고 있었다.

빨대로 오렌지주스를 빨아 당긴 영하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내일부턴 출근해야 해. 도망갈 생각 말고 집에 있어.”

“어차피 나가지도 못하게 한 장본인이면서.”

“얌전하게 말 잘 들으면 누가 알아. 외출 정돈 할 수 있는 신분으로 만들어 줄지.”

“…….”

그게 언제가 될 줄 알고.

지금은 거의 포기했다.

말싸움할 기력도 없다. 세계의 시선을 느꼈으나 마주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멍한 눈동자가 거실의 통창 너머 정원으로 향했다.

여름은 진정한 생명의 계절이었다. 움튼 싹이 자신의 존재감을 내비치며 두껍게 자라는 나날들. 비가 내린 다음 날 쨍쨍한 햇볕이 내려앉으면 화초들은 금방 무성해진다. 반대로 영하의 생기는 시시각각 사라지고 있었다.

*

영하는 잠들었다 깨어났다. 집 안에 갇힌 이후로는 활동 시간과 수면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졸리면 잠들었고, 금방 깨어났다.

햇살을 받고 싶어 거실 앞에 모로 누워 있다 저도 모르게 잠들어 깨어난 시점이었다. 바닥에 누워 자느라 어깨가 결리고 목이 아팠다. 햇볕을 쬐고 싶으면 정원에 나가도 됐지만, 창문을 조금만 열어도 후끈한 기운이 바람처럼 들어왔다.

완전히 한여름의 날씨. 그토록 더웠던 시골보다도 더 갑갑한 열기가 가득 찬 도심의 더운 공기.

“흣.”

몸을 일으키는 도중, 사색이 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멈춘 로터가 다시 움직이더니 자세를 바꾸자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며 전립선을 자극했다. 징징 진동을 울리며 부풀어 오른 그곳을 자꾸만 내리눌렀다.

“아으, 흥, 흐으, 응, 으응….”

열락에 올라 달뜬 얼굴로 입을 벌리곤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공중에서 얕게 허리를 흔들어도 결정적인 쾌감은 찾아오질 않는다.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부족했다. 진동만으로는 사정할 수 없다. 하의를 입지 못할 만큼의 뒷물만 줄줄 흘러내리게 할 뿐이었다.

“아빠…….”

이렇게 만든 남자를 애타게 부르며 흐느꼈다. 뺨을 바닥에 대고 헐떡이다 겨우 일어났다. 머리가 어지러워 벽을 붙잡고 한참 기대어 버티다 앞으로 나아갔다.

식탁에는 식사가 차려져 있었으나 영하는 매번 점심을 거르는 편이었다. 이렇게 못살게 굴어 놓고선, 스스로 먹질 않으니 최세계는 아침저녁마다 아들을 옆에 앉혀 식사를 챙겨 주고 소화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걸까…….”

그가 진심으로 원한다면 세상과 단절되어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다. 어쩌면 그게 속 편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오로지 최세계만의 최영하가 된다면, 단지 도피하는 것일지라도 열네 살부터 영하를 괴롭히던 문제와 멀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방식으론 안 돼.

“아…!”

물을 마시러 주방으로 들어가던 도중, 구멍에 넣어 둔 로터의 줄이 걸려 쑥 빠져나갔다. 투명한 액에 흠뻑 젖은 분홍색 플라스틱 기구가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영하는 황급히 뒤돌았다. 로터가 여전히 바닥 위에서 웅웅 진동하며 회전하고 있었다. 숨을 가쁘게 헐떡인 영하는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현관문 방향을 흘기며 갈등했다.

눈동자가 여러 번 굴렀다. 이윽고 입술을 질끈 깨문 영하는 바닥 위로 무릎을 꿇었다. 더듬더듬 손을 뒤로 내밀어 떨어진 로터를 바로 잡고 끙끙대는 신음을 삼킨다. 손안에서 진동하는 것이 연신 벌름대는 구멍의 점막에 닿자, 야릇한 쾌락이 발끝부터 타고 올랐다.

“아, 아응…….”

가느다란 허리가 바들바들 진동했고 머릿속이 초조해졌다. 몸도 정신도 그 남자를 원했다. 이런 자그마한 기구로는 아무것도 충족할 수 없다.

“흐윽.”

호흡이 모자라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은 후에야 구멍 위를 자극하던 로터가 안을 파헤치고 들어갔다. 손가락으로 마저 로터를 밀어 넣어, 전립선 아래 부근에 넣고 나니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엎드려 누운 채로 숨만 겨우 몰아쉬었다. 찬기에 자극당한 유두가 꼿꼿이 섰고, 그마저도 괴로웠다.

며칠 전부터 그는 출근하기 전 영하의 안에 로터를 넣고 집을 나섰고, 퇴근하자마자 영하의 뒤를 확인했다. 따로 그가 조종하는 건 아닌 모양이니 없는 사이 빼 두고, 퇴근 전에 넣어 놓으면 모를 일이겠지만 괜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더는 벌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다시 눈을 뜨자 영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언제 또 잠들었을까.

창밖으로 시간을 가늠해 보려 했으나 한참 해가 긴 시점이다. 바깥은 여전한 파란색이 그어져 있었다.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뺨이 그의 가슴과 어깨 사이에 가만히 닿아 있었다.

영하의 움직임을 느낀 남자가 차분히 배 위를 문질렀다. 다시 잠들어도 된다는 의미 같기도 했고, 아무런 이유 없는 행위 같기도 했다.

시시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 최세계는 여전히 매번 듣는 음악만 들었다. 나이 들면, 새로운 걸 찾기 귀찮아져서 매번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데.

전 같았다면 그에게 놀리듯이 말했겠으나, 영하는 속으로만 생각하고 넘겼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몸을 겹치고 키스하지만, 마음이 멀어진 기분이었다. 이럴 거면 시골에서 혼자 떨며 지내는 것이 나았다. 영하의 상상과 기억 속 세계는 자신을 사랑해 주기만 하던 남자였다. 최영하 일생에 유일하게 사랑과 관심을 준 사람.

영하는 몸을 뒤척였다. 그의 다리와 부딪치는 바람에 무릎에 통증이 느껴져 발을 들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하체에는 무릎 여기저기에 멍이 물들었다. 로터를 넣은 초기에 다리의 힘이 풀려 무릎으로 기어 다닌 탓에 생긴 자국이었다.

푸르고 노란 멍이 든 다리를 보고 있자니, 뻗어 나온 세계의 손이 무릎 위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멍 위에 닿아도 아프지 않을 만큼 가볍고 신중한 손길이었다. 그 부드러운 자극에, 울컥 눈물이 솟아올랐다. 코끝이 시큰해져 그의 가슴팍 위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러지 마.”

“…….”

“이러지 말고 예뻐해 줘. 예전처럼.”

“네가 예전처럼 굴지 않는데 나는 왜 전처럼 굴어야 해.”

단호하고 무신경한 어투였으며 대답이 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영하도 같은 말로 반박할 수 있었다.

침묵을 깨는 진동 소리가 어디선가 내내 울렸다. 무표정한 얼굴이 말없이 시선을 내리더니 흰 엉덩이를 아프도록 움켜쥐었다. 여전히 안쪽에서 로터가 돌아가고 있었고, 영하는 이제 로터의 진동에 흥분을 느끼지 못했다.

“이제 도망가지 않을게. 평생 있을게.”

“아직도 네 위치를 모르고 있네. 그걸 결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위치라는 말 싫다. 너무 듣기 싫어서 속상했다. 속눈썹이 푹 젖은 채로 영하가 중얼거렸다. 그가 죄책감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파. 몸이 너무 아파. 아프고 뒤가 망가졌어. 아무런 느낌도 안 나……. 너무 아파.”

기댈 곳이 없다. 그의 손안에 있었으나 영하는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상체를 일으킨 남자가 헤드에 등을 기대곤 협탁에 둔 책을 들었다. 외면하는 모습에 화가 치민 영하는 꾸깃꾸깃하게 참아 둔 것을 몽땅 터뜨렸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무시하지 말고 제대로 들어!”

“엄살 피우지 마. 너한테 손찌검한 적도 없고, 섹스도 네가 가능한 만큼 조절해 주고 있으니까.”

“아프다는 이야기 안 들려?!”

언성을 크게 높이자 세계의 행동이 멈칫 굳는다. 영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칠게 호흡을 들이킨 후, 주먹을 꽉 말아 쥐곤 그의 가슴팍을 아프도록 때렸다.

“윽!”

곧장 통증에 신음하며 이맛살을 찡그린 세계가 손목을 잡았다.

“아빠도 아파 봐!”

악에 받쳐 소리 지르며 반대편 손으로 다시 그의 몸을 내리쳤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미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손에서 떨어진 책이 바닥으로 시끄럽게 나뒹굴었다. 이를 악물고 그의 가슴을 내려치던 영하가 그 소리에 돌연 멈췄다. 양손이 모두 결박당했다. 일렁이는 까만 눈이 맞닿았다. 잔뜩 찡그린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보며 영하가 중얼거렸다.

한숨과 눈물을 거치고 가슴을 거쳐, 그리고 며칠 내내 최영하를 괴롭게 하던 진심을 뱉어 냈다.

“사과해. 사과하면 용서해 줄게.”

*

“씻어.”

며칠 전,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출근 후 곧장 퇴근한 세계는 거실에 혼자 멀뚱히 앉은 영하를 보고서 곧바로 입 맞췄다. 나갈 구석도, 도망쳐 피할 곳도 모두 자신이 없앴으니 세워 둔 가드들의 눈을 피해 달아날 궁리조차 못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알면서도 출근한 내내 초조해서 업무가 엉망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식사도 거르고 한참을 이마만 짚던 그는 퇴근 직전 CCTV를 주문했다. 아무래도 영하가 집에 있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해야 일상이 가능할 것 같았다.

입맛이 없다는 아들에게 억지로 저녁을 먹인 후, 여름의 긴 낮이 바닥으로 잠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영하를 안았다. 매일같이 아래를 열어 삽입하는데도 갈증이 해갈되지 않았다. 젖은 눈동자, 자신의 손자국이 사라지지 않는 몸뚱이, 울음 같은 신음.

욕조에 아들을 내려놓고 따뜻한 물을 받았다. 잠깐 샤워기 아래에서 씻고 나온 세계는 그사이 수증기를 받아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아들의 얼굴을 보고 턱 근육에 가득 힘이 들어갔다. 자제하려는 노력은 잠깐이었다.

세계는 수도 레버를 내렸다. 욕실에는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창이 있었다. 흰 습기로 가려진 창문을 손바닥으로 닦아 내던 영하가 이른 손길에 고개를 돌리더니 흥분이 역력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곤 이내 체념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가 가쁘게 호흡하며 아들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엉덩이가 허공에 뜨고, 물길 속으로 두 손이 빠져들었다. 영하의 몸은 금세 남자의 사타구니 위로 올라탔다.

오랫동안 벌어졌던 구멍을 다시 벌려 둔탁하게 발기된 음경이 그 사이로 파고 들어가며 성포하고 흉악한 움직임을 보여도 영하는 얌전했다. 꽉 잡힌 허리가 아파 찡그리면서도 더는 싫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영하가 온순할수록 그의 독점욕에 불씨가 커져 화마가 되어 그를 삼켰다. 그토록 바라던 것을 충족했다는 환희가 손끝과 발끝까지 가득 차올랐다고, 생각했다.

“흐으응, 아빠…….”

영하의 신음 사이로, 세계는 자신의 저열함을 느껴 실소했다.

절망하고 체념한 아들이 집 안에 머무르는 내내, 이보다 더없을 만큼의 안정감을 느꼈다.

이런 방식만이 진정한 꽉 찬 결말을 낼 수 있는 건가.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며 스스로 억압하고 번뇌했던 것이 헛수고라는 듯이, 그간의 열흘은 그에게 극악한 충족감과 행복을 선사했다.

그러나 열흘이 지난 후부턴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자아 사이를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바늘이 존재했다. 영하의 뺨이 더는 동그랗게 솟아오를 일이 없다는 걸 되새기는 순간, 바늘이 무기가 되어 그를 사냥했다.

지명수배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었다. 마음먹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지만 상황에 따라 가능성만 열어 둔 상태였다. 서류 또한 그가 만들어 낸 가짜에 불과했다. 어차피 영하는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 진위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영하는 또다시 자신이 방해된다 생각하면 얼마든지 떠날 준비를 할 것이다. 어쩌면 완전한 자립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음욕으로 뒤엉킨 최세계의 틈 사이로는 그가 애써 묻어 둔 부정(父情)이 존재했다.

영하는 그대로였다. 늘 같은 자리에서 그를 기다렸다. “왔어.” 짧은 인사와 함께 눈 맞춤이 끝난 후 고개가 돌아간다. 자신에게 닿는 집요한 시선을 느낄 텐데도 미동 없이 TV 화면을 볼 뿐이었다. 분명 손안에 가득 움켜쥐고 있는데 모래처럼 덧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날은 영하를 안지 않았다. 늦은 밤, 한참 떨어져 매트리스 끄트머리에 웅크려 잠든 영하가 새벽녘에는 품속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와 손을 잡아당기더니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했다. 대꾸 없이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밀착한 상태에서도 갈증은 줄어들지 않았다. 질릴 때까지 안아야 하나? 하지만 그 질리는 순간은 또 언제인가.

불안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명확한 형상을 띠었다. 질퍽한 진흙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었다.

불유쾌한 감각과 역겨운 기분을 풀어낼 상대가 필요했다. 잠시 미루고 있던 일을 다시 처리할 때였다.

습기가 가득한 지하. 문을 열고 안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탄식부터 흘렀다. 피부에 들러붙는 오래된 공기가 찝찝한 데다 퀴퀴한 지하실 냄새에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어깨를 털어 낸 세계가 지하실 구석으로 향해 걸었다. 동시에 꺼진 전등이 몇 번 깜빡이며 켜지더니, 온몸을 결박당한 중년의 남자가 책상 아래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음.

우습게도 최세계는 새우처럼 웅크린 그 자세를 보며 이틀 전 영하를 떠올렸다. 그런 짓을 당하고도 품에 스스로 안겨 드는 최영하의 머리 속을 해부해 보고 싶었다. 만약 실제로 뇌 속과 최영하의 마음을 형상화할 수 있다면, 아마 그중에 자신은 몇 할을 차지하는지부터 가장 먼저 확인할 생각이다.

붙잡혀 온 남자는 일전에 골프장에서 접대한 경찰서장이었다. 서민석의 범행을 숨긴 장본인이자 서민석의 파트너 중 하나.

유력한 증거인 CCTV를 소각시킨 장본인에게 자문을 구하려 했다니. 과거의 자신이 한심스러웠으나 이미 지난 일이니 후회해 봤자 의미 없는 일이었다.

서장은 갑자기 켜진 불에 한참을 눈을 찡그리다 뒤늦게 초점을 잡았다. 깨끗한 구둣발을 보던 시선이 위로 오르더니, 이윽고 얼굴을 확인하곤 두 눈을 부릅뜨고 온몸을 버둥거렸다. 꼴사납게 뭐 하는 짓이지.

“읍으으! 읍!”

“예. 저는 안녕합니다. 서장님도 평소보다 보기 좋으십니다. 늙은 남자의 신음은 별로 달갑지 않지만.”

멈춰 서자 뒤쪽에 곧장 의자가 놓였다. 준비된 의자에 앉아 긴 다리를 꼰 세계는 새까만 니트릴 장갑을 끼고 옆에 선 남자에게 턱짓했다. 서장의 입을 틀어막은 초록색 테이프가 쫘아악 소리를 내며 뜯어졌다. 입가가 시뻘게진 서장이 소리쳤다.

“자네 이런 짓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아?”

“제가 더 놀랐습니다. 명색이 경찰서장이란 사람이 이렇게 쉽게 잡혀 와도 되는 겁니까? 우리 서장님은 마음이 편안하신가 봅니다. 경호도 없고.”

다르게 말하자면 넋 놓고 사는 멍청한 새끼지. 최세계는 손에 꽉 끼는 니트릴 장갑을 손으로 늘이며 대꾸했다.

서장이 격하게 발버둥 치자 바로 뒤에 닿은 테이블이 세차게 흔들렸다.

시끄럽네.

텅 빈 지하실이라 진동과 소음이 벽마다 부딪치며 크게 울렸다. 세계가 참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동시에 옆에 선 경호원이 서장의 배를 퍽 소리 나게 걷어찼다. 남자의 살집 그득한 배가 출렁였다.

“크헉! 윽, 흐억……. 최, 최 상무 말로, 큭, 말로….”

“왜 그렇게 편해? 응? 나라고 전생 팔자에도 없을 조폭질 하고 싶은 줄 알아? 다른 놈들은 내가 이렇게 직접 출두 안 합니다. 우리 서장님께는 그래도 얼굴 비치고 대화해야 할 것 아닙니까. 같이 골프도 친 사이인데.”

“말로 합세, 말로…. 서민석, 서 검사 일은 나도 협박, 윽, 협박당한 거야.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 응? 나한테 왜 이러는 건가!”

골프 이야기에 서장이 더듬거렸다. 의자를 더 바짝 당겨 허리를 숙인 세계는 서장의 배 위를 발끝으로 내리눌렀다. 아마 멍이 든 모양이지. 발에 힘을 줄수록 서장의 몸부림이 격해졌다. 다 늙은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역시나 지루하다. 그가 무료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왜냐니. 서민석 행방이 담긴 CCTV 없애는 데 일조한 게 당신이잖아.”

“그, 그건…. 나도 협박당한 거라니까!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나!”

“협박 같은 소리. 줄을 잘 잡는 것도 능력이지. 내가 개입한 이상 당신이 쥔 동아줄이 썩은 동아줄로 바뀌었다는 거야. 잘 들어요. 선택지를 두 개 주죠. 일주일 안에 역대급 부패 경찰로 대한민국 전역에 당신 이름 석 자를 날릴지, 서민석의 지난 행각의 증거를 모두 상납하고 여생을 편하게 보낼지.”

“…….”

“내 뒤통수칠 생각은 마세요. 나는 준법정신이 투철한 인간이지만, 때때로 고전적인 방법을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서민석 그 개자식이 내 아들한테 한 짓을…….”

다시 되새기자 신물이 올라온다. 영하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준 것도 모자라 최영하를 자신에게서 떨어뜨리는 데에 성공한 놈이었다. 가증스러운 새끼.

약자만 골라 괴롭히는 꼴을 보아 전적을 보지 않아도 뻔한 녀석이다. 입 안을 질근질근 씹어 댄 세계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장의 좁아 든 동공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서민석의 사건이 기소까지 흘렀지만, 징역살이한다고 장담할 순 없었다. 게다가 고작해야 1, 2년 살고 나오면 의미도 없다. 그 쥐새끼 같은 놈은 검사직에서 파면당해 봐야 다른 좆같은 수로 세를 불릴 것이 분명했다. 현행범으로 잡아야 확실한데.

“우, 우리 아들은….”

“자식이 무슨 죄가 있겠어. 물론 내 아들도 그랬지만. 자식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되돌려줘도 당신 아들이 아니라 당신이 될 테니까.”

서장의 몸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지, 배를 얻어맞은 직후보다 더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애초에 배신할 생각을 말아야지. 최세계는 약속에 철저한 남자였다. 서장이 약속만 잘 지킨다면, 서민석 이후의 타깃으로 삼을 계획은 없다.

“오늘처럼 또 붙잡히면 안 되니 경호원이 더 필요하겠습니다. 제가 붙여 드리죠. 허튼짓하지 마시고 서민석의 재판만 제대로 진행되면, 그때부턴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드릴 겁니다.”

“내가, 내가 재판을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이런다고 뭐가 바뀐다는 건가!”

“그냥 짜증 나서. 화풀이하는 거야.”

웃으며 튀어나온 대답에 서장의 얼굴이 파리하게 물들었다.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떡하나. 내내 그를 따라붙는 짜증스러운 감정을 해소할 곳이 필요했다. 영하가 웃음을 잃은 것을 깨달은 이후였다.

4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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