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도모지 3권-챕터 5. 정의 justice (6/11)

챕터 5. 정의 justice

영하는 햇살이 대각선으로 드는 거실 창가에 대자로 뻗은 채 누워 있다. 오래 앉아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하다며 태블릿을 들고 안방과 거실, 서재를 왕복하며 걷는 최세계의 시선이 이따금씩 멀쩡한 소파를 버려두고 바닥에 드러누운 아들에게 닿았다. 한심하게 보는 눈빛이었기 때문에 영하는 그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 놓곤 누워 있다가 온 것이나 다름없다.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은 지 하루 만에 누워 자다 오다니. 자신은 완전히 글러 먹었다. 1학년 1학기부터 성적이 최악을 달리겠구나. 아빠가 성적표 보여 달라고 하면 모르는 척해야지.

햇볕이 목 아래와 배 위로 내려앉는다. 밝은 빛 속으로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들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티셔츠 아래 살결이 뜨거워지자 조금 더워져, 팔만 뻗어 기다란 창문 하나를 주먹 두 개 크기로 열었다. 열린 틈 사이로 신선한 공기가 금방 들어와 코끝에 닿는다.

아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뒤, 기억이 시시각각 들이닥쳤다. 어둑한 저녁. 서민석의 안경알에 비친 지구대의 형광등 불빛과 그가 내민 미적지근한 이온 음료 캔이.

캔 따는 소리가 들렸는데 어떻게 넣은 걸까…….

캔에다 약을 넣는 방법을 궁리해 봤자 답도 안 나오고. 아빠는 해결되면 알려 주겠다는 말만 할 뿐, 일절 언급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공부에 집중하며 학교생활이나 열심히 해야 하는데…….

“인절미.”

깨끗하게 닦인 유리창 너머로 바람에 흔들리는 정원의 풍경을 보며 넋 놓고 있는 사이, 예고도 없이 다가온 최세계가 갑작스레 말을 붙였다. 뜬금없이 무슨 인절미 타령인가 했더니, 위에 입은 티셔츠가 베이지색이었다. 순 자기 멋대로 영하를 부르고 있었다.

“나가자.”

깜짝 놀란 마음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흰자가 드러나도록 크게 뜨인 눈 위로 대각선의 햇살이 올라 눈동자가 갈색으로 투명하게 반짝였다. 영하의 놀란 얼굴을 무표정하게 바라본 세계는 조용히 손에 든 차 키만 흔들었다.

집 안에서도 외출복처럼 차려입는 최세계와 달리 영하는 다른 이들처럼 집에서는 늘 최대한 실용적이고, 편안하고, 별 볼 일 없는 옷을 선호했다. 오늘은 언제 산지 기억도 나지 않는 티셔츠와 헐렁한 운동복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외출할 만한 꼴은 절대 아니었다. 식사하러 바로 나가자는 그를 붙잡고 겨우 봐 줄 만한 옷을 입고서야 현관을 나섰다.

오늘 날씨는 24도, 구름 적당하고, 자외선 약하고, 바람도 머리카락이 조금 흩날릴 만큼 분다. 외출하기 적당한 날씨였다. 그래서 나가자고 했나?

조수석에 앉자마자 휴대폰으로 블루투스를 연결해 음악부터 틀고 목적지인 식당에서 무슨 메뉴를 판매하는지 훑었다.

집에 누워 있을 땐 기분이 그냥 그럭저럭했는데, 나와 바람을 쐬니 환기가 되어 굳은 표정이 풀어진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하는 데이트하러 나온 줄 알았다. 어제가 토요일이었으니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것만 알았지, 정확한 날짜를 찾아볼 생각도 없었다.

영하가 오늘이 어버이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식사를 마치고 그와 케이크 전문점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고급스러운 하얀 대리석 외벽에 금색 입체 아크릴 간판으로 ‘Daily Sucre’라고 작게 쓰여 있었고, 입구의 유리문 근처에는 호주의 유명 요리 아카데미의 수료증이 붙어 있었다.

덤덤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 진입하자, 쇼케이스에 온통 카네이션 케이크만 가득 진열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오늘 어버이날이구나. 천하의 불효자가 된 기분이라 양심에 찔려 슬그머니 그의 곁에서 떨어져 멀찍이 주변을 훑었다. 대부분은 카네이션 케이크를 주문하는지, 카운터에 젊은 여자 둘과 중년의 남자 한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세계는 모양이 제각기 다른 카네이션 케이크 중에 하나를 골라 보라며 영하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솔직히 영하 눈에는 다 비슷해 보여 잠시 고민하다 폭이 좁고 높이가 높은 하얀색 케이크 위쪽의 화려한 플라워 케이크를 가리켰다. 투명한 쇼케이스 위에 하나로 겹쳐진 두 명의 손이 닿았다.

“케이크를 사?”

“어버이날이잖아.”

“아빠… 그런 것도 챙겼어?”

“물론이지. 난 효자니까.”

싱긋 웃으며 말한 세계가 곧장 한마디 덧붙였다.

“그날마다 집은 비워도 돈으로 해결했지. 늘.”

조금의 죄책감도 없는 대답에 헛숨이 흘렀다. 그러고 보면 그날마다 집에 없었다. 어디냐고 물으면 매번 회사라고 하긴 했는데… 어쨌든 그도 퍽 본보기 좋은 아들의 모습은 아닌지라 천하의 불효자가 저 하나만은 아니라서 다행이긴 했다.

“나도 할머니 선물 살까?”

“할머니의 날 아니고 어버이날인데 네가 챙길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하자, 세계는 한 발자국 물러나며 줄이 사라진 카운터 앞으로 향했다.

어버이날에 뭔가 해 달라고 요구한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하지만 따져 보면 영하가 너무 무심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점이었다. 그에게 새빨간 카네이션을 사 주는 짓 따위는 죽어도 할 생각 없다. 영하는 그가 케이크 결제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물음에 대답했다.

“대신 올해 생일 선물은 챙겨 줄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왜 그래. 카네이션이 받고 싶은 거야? 지금이라도 사서 내일 출근할 때 옷에 달아 줘?”

“미치지 않고서야.”

끔찍하다는 듯이 이맛살을 좁힌 그가 셔츠의 소매를 걷어붙이곤 등을 곧게 펴며 팔짱을 꼈다.

“그럼 왜 억지 부려… 나 돈도 없어. 근데 솔직히, 아빠 이런 거 챙기는 거 진짜 안 어울려.”

“파혼이라는 사고를 쳤으니 이런 거라도 챙겨야지. 원래 안 하던 짓을 해야 감동적이니까.”

생일 선물이란 말에도 시큰둥한 세계가 파혼 주제를 꺼내자 사건의 당사자는 아니나 관련자인 영하가 우물쭈물 입술을 다물었다.

두 분 다 엄청나게 화나셨다고 했지…….

할머니는 그냥 가만히 계셔도 무서운데, 대체 얼마나 화를 내셨을까.

이 상황에서는 안 하던 사람도 뭔가 액션을 취하긴 해야 한다. 뚱하던 얼굴이 시무룩해지자 세계가 영하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내리누르며 물었다. 검지에 말캉한 입술 중앙이 꾹 눌려 들어갔다.

“왜 또 우울한 얼굴이야. 갑자기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나 봐?”

“아빠한텐 안 해.”

“나 말고는 할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하네.”

아랫입술을 잡아당기는 손을 치워 낸 영하는 카운터에서 포장을 완료한 케이크를 발견하고는 자리를 옮겼다.

성산동 본가에는 아빠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내심 같이 가자고 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정말 오래간만에 집중해서 공부하던 때였다. 정말 정도 없이 케이크만 주고 나온 건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세계에게서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다.

-먹고 싶은 거 없어?

내가 돼진가. 밥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속으로 투덜대려던 찰나, 돼지가 되어 버린 건지 머릿속에 그림 하나가 그려졌다. 뽀얗게 아이싱이 된 생크림케이크였다. 여덟 조각으로 나뉜 케이크 위에 모양이 가지런한 딸기가 하나씩 올라간 형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음. 잠깐 고민한 영하가 얼른 대답했다.

“나도 케이크.”

-아까 살 때 사 달라고 하지.

“집 오니까 생각나는 걸 어떡해….”

-어디 케이크. 아까 그 가게?

“상관없어. 난 케이크면 돼. 초코 맛 말고.”

-어버이날에 아무것도 못 받은 어버이가 아들을 위해 케이크를 사다 날라야 한다니.

…….

대체 뭘 봤길래 계속 어버이날에 집착하는 거지?

-집 가면 효도해. 이런 아빠 없으니까. 알아들어?

“어차피 아빠가 직접 사는 것도 아니면서. 비서 아저씨가 사는 거지?”

-하, 내가 직접 사 가서 직접 한 입 한 입 먹여 줄 테니까, 얌전히 씻고 식탁 앞에 앉아서 기다려.

한 자 한 자 또렷하게 뱉은 그가 할 말만 마치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 버린다.

시커먼 화면이 뜬 휴대폰을 잠시간 노려본 영하는 빼쪽하게 솟아오른 눈매를 애써 내렸다. 오늘따라 입이 닳도록 ‘효도’ 이야기를 했으니 듣는 척이라도 해야겠지. 괜히 심기를 거슬렸다가 저번처럼 또 호텔 데려가서 창문 앞에서 하는 둥의 기상천외한 짓을 할까 봐 겁이 덜컥 났다. 남 괴롭히는 데에서는 천부적이라니까…….

날이 지기 전에 그가 돌아왔다. 현관에 선 세계에게서 내내 기다리던 케이크부터 받아 들고 쪼르르 식당으로 가려던 영하의 뒷덜미가 덥석 잡혔다.

“악!”

옷 칼라에 목이 졸려 신음하면서도 소중한 케이스 박스를 떨어뜨릴까 봐 조심스레 뒤돌자 불만에 찬 남자가 저를 보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가서 풀릴 표정이 아니다. 하얀 리본으로 묶은 케이크 박스를 슬그머니 바닥으로 내린 영하가 그의 눈치를 살금살금 보며 다가갔다.

쪽-

“케이크 감사합니다.”

“뽀뽀 말고 이제 슬슬 다른 레퍼토리를 찾아봐.”

“기분 풀렸으면서 그런다.”

한결 나아진 얼굴을 들여다보곤 휭하니 등을 돌렸다.

아메리카노의 쓴맛이 싫을 뿐, 디저트나 액상 과당 가득한 단 음료 역시 크게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케이크는 유일하게 영하가 아주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하얀 생크림 위에 나파주를 발라 반짝반짝한 겉면에 계절 과일을 올리는 생과일케이크도 좋아했고, 갖은 정성이 들어가는 무스케이크나 알록달록하고 조그마한 케이크도 즐겼다.

세계도 그것을 알고 크리스마스나 밸런타인데이에는 케이크를 사 오곤 했다. 그가 사 오는 케이크는 하나같이 본인처럼 예쁘고 화려했다.

곧장 주방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케이크 박스에서 케이크를 꺼내 들었다. 탱탱한 샤인머스캣과 허브, 식용 꽃으로 데코한 생크림케이크였다. 나이프로 두 조각 나눠 욕실로 향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먹겠냐고 소리치니 세계는 “안 먹어.” 하곤 바로 욕실로 들어가 사라졌다.

안 먹으면 나 혼자 먹지 뭐. 어차피 예의상 물어본 것뿐이었다.

두 조각으로 썰어 둔 케이크 중, 조금 더 크기가 크고 샤인머스캣이 세 개가 올라간 조각을 가지고 거실로 향했다. TV를 보며 먹을 생각이었다.

케이크를 녹여 먹을 듯이 아껴 먹던 영하의 뒤로 씻고 나온 세계가 등장했다. 오늘은 머리까지 완전히 말리고 밖으로 나왔다. 회색 실크 가운만 걸친 그는 말없이 서 있기만 하더니, 침실로 들어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집 안을 왕복하는 그에게 관심도 주지 않고 케이크의 맛과 TV에만 집중했다. 그러나 세계가 팔짱을 낀 채 바로 뒤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자 더는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TV 화면이 까맣게 될 때마다 장승인 양 꼿꼿이 서 있는 그의 상체가 비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언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눈을 가늘게 좁힌 얼굴로 소파의 방석 표면을 노려보고 있다. 뭔가 묻었나 싶어 슬그머니 시선을 따라가 보니, 아무것도 없다. 청포도를 넘긴 영하가 그에게 물었다.

“뭐 해?”

“견적 내 보는 중이야.”

“무슨 견적?”

“생크림이 묻었을 때 사후 처리가 둘 중 어느 쪽이 나을지.”

…뭐지. 괜히 덤벙거리다 새로 산 소파에 생크림 묻히지 말고 식탁에서 먹으라는 소리인가.

그와 함께 샀던 소파를 힐끗 내려다보곤 일어섰다. 본인이 생각해도 이러고 먹으면 묻힐 확률이 높았다. 이래서 가죽 소파를 샀어야 했는데.

“알았어…. 식탁에서 먹을게.”

“이제 그만 먹어.”

“뭐? 나 아직 한 조각도 다 못 먹었는데….”

아껴 먹는 중인데.

세계는 무시하곤 리모컨을 들어 TV 화면을 끈다. 여전히 TV 화면에는 귀신처럼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비쳤다. 세계는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영하의 팔을 붙잡으며 지긋지긋한 이야기를 재차 꺼내 들었다.

“그만 먹고 효도할 시간이야.”

“왜 종일 효도 타령이야?”

불퉁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황당하기 그지없다. 세상에 둘도 없는 불효자가 지금 누구보고 자꾸 효도하래. 하고 많은 기념일 중에서 어버이날만은 챙기고 싶지 않다고 꼭 말을 꺼내야 하나? 그런 이유 모를 사람도 아니면서…….

선택적 대답으로 입을 다문 세계는 영하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아 들곤 바로 주방으로 직행해 조금 남은 케이크 조각을 싱크대에 부어 버렸다. 뒤따른 영하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 내 케이크!”

“나중에 먹어. 많이 남았잖아.”

나중이 아니라 지금 먹고 싶다고! 말로는 살을 찌우라면서 케이크 한 조각도 다 못 먹게 하고!

주먹을 꽈악 쥐며 울분을 삭이는데, 세계는 케이크 나이프로 윗면의 아이싱 된 생크림과 샤인머스캣만 골라 접시에 덜어 놓고 남은 케이크를 박스 안에다 집어넣었다. 예쁜 케이크가 순식간에 흉해졌다.

“그건 왜 들고 가?”

영하가 단순한 궁금증 때문에 순진한 얼굴로 침실로 향하는 세계를 따라 들어갔다. 대체 또 무슨 짓을 하는 건가, 해맑은 궁금증은 세계가 그걸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 두는 것과 동시에 답이 나왔다.

탁-

도자기 접시가 테이블 위로 오르는 순간 뒤돌아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 팔을 뻗었다.

“이리 와.”

“그… 걸로 뭐 하게.”

“입 아파. 이리 와.”

오라니까 가긴 가는데, 영 불안하다. 우물쭈물 입술을 말아 물며 느릿한 속도로 다가갔다. 내디딘 걸음마저 확신이 없었다. 생크림에 파묻힌 샤인머스캣을 침대에서 먹으려고 가져온 것은 아닐 테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그에게로 다가가자, 완전히 도착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영하의 손을 잡아 침대 위로 눕힌 그가 상체를 밀착하며 몸 위로 타올랐다.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바짝 붙은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명백한 성적 뉘앙스가 담긴 그의 표정은 얼떨떨한 반응과 함께 짓궂은 것으로 변해 갔다. 왼쪽 눈가를 찡그리며 입술을 당겨 웃은 그가 아들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따뜻한 아랫배로 물기가 식어 조금 체온이 낮아진 손가락이 얽혀 든다. 숨을 멈추고 가만히 올려다보자, 그가 들뜬 목소리를 냈다.

“효도 받을 시간.”

잔뜩 즐거워 보이는 그와 달리 수치심에 젖어 든 영하의 얼굴은 열이 올라 노을이 지는 창밖의 주홍을 칠한 듯 붉어졌다. 그에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부끄러움이 몽땅 자신에게 유전된 것처럼 어쩌지를 못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윤리도 염치도 수치도 없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여겼으나 매일 새로운 수치를 갱신한다. 그의 손길에 맞춰 옷을 벗어 주면서도 영하는 속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크 좋아하잖아.”

“먹는 거랑… 보는 게 좋지.”

생크림을 가슴에 범벅하고 싶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이어 말해도 하얀 생크림을 영하의 유두에 바르는 그의 미소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동시에 불온했다. 통금을 어기고 몰래 집을 빠져나가는 소년의 발칙한 기쁨과 같았다.

*

출근 시간에 맞춰 거센 소나기가 잠깐 세차게 내리더니 차에서 내리자 곧바로 습윤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비가 그쳤어도 하늘은 캔버스를 반으로 나눈 듯 맑은 하늘과 희뿌연 검은 구름이 함께 존재했다. 큰 키를 일으켜 세우느라 깔끔하게 넘긴 검은 머리가 흘러내리자 가벼운 손길로 넘기며 백화점 안으로 들어선다. 후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퍼스널 쇼퍼가 웃는 얼굴로 최세계를 맞이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안 그래도 어제 사모님께서 오전 중에 다녀가셨어요.”

“이런, 늦었네. 선물해 드릴 제품이 없겠군요.”

“아무렴 그럴까요. 사모님께서는 클러치백만 보시고 가셨으니, 목걸이나 브로치는 어떠세요? 브랜드마다 하이 주얼리 컬렉션으로 신제품이 꽤 나왔습니다. 파티에선 심플하게 블랙 드레스로 입으실 예정이라고 하셨으니 포인트 주얼리를 선물하시면 무척 좋아하실 거예요.”

“한번 보죠.”

“괜찮은 제품들로 몇 가지 준비해 갈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은 씨, 상무님 PS룸으로 모셔다드려.”

월말에 있을 아버지 생신과 겹친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맞춰 본가 별관에서 파티를 열 예정이었다. 나이도 그만큼 드셨으면 이제 생일 파티 정도는 조촐히 집안 가족끼리만 할 때도 됐는데 여전히 아버지는 성대하게 자신의 탄신일을 알리고 싶어 했다.

어찌 됐든 아들 노릇을 해야겠지.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에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빛을 빼앗긴 듯한 어두운 가벽. 그 사이에 진열된 쇼케이스 속에 프랑스 주얼리 브랜드의 웨딩 링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다이아몬드가 빼곡하게 세팅된 여성용을 지나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링 중앙에 포인트로 깔끔한 고리 디자인으로 세공한 단아한 반지였다.

걸음을 멈춰 서서 쇼케이스 안의 반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의 곁으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매니저가 다가와 일정 간격을 두고 서서 설명했다.

“운명을 연결하는 고리를 모티브로 제작한 디자인입니다. 한번 꺼내서 보여 드릴까요?”

쇼케이스의 하얀 불빛이 반지를 정확하게 내리꽂았다. 가느다란 반지 아래로 두 개의 링 모양을 한 시커먼 그림자가 가까이 겹쳐졌다. 세계는 잠시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둘 사이에 더 연결할 고리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미 그들은 끊어 낼 수도 없는, 핏줄이라는 지긋지긋한 혈연관계로 엮여 있는 사이였다.

“아직까진 특이한 동태는 안 보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자택에서 출퇴근하고, 금요일 형사부 회식 자리에만 참석했습니다.”

백화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세계는 쇼핑백 두 개를 옆자리에 내려놓으며 긴 다리를 불편하게 뻗었다. 뻐근한 어깨 부근을 문지르고 앞자리 조수석에 앉은 비서실장이 내미는 태블릿을 곧장 받아 클라우드를 확인했다.

그 안에는 서민석을 포함한 그의 가족들, 또 서민석과 긴밀한 관계로 엮인 검사들의 프로필 파일과 며칠간 서민석의 뒤를 쫓은 자가 정리한 일과와 행적이 들어 있었다. 세계가 편안하게 자리를 잡은 후 출발한 차체가 어두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쥐새끼처럼 잘도 빠져나가는군.

증거가 모두 사라졌다. 서민석이 대신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던 남자가 모텔에 들어가는 CCTV만 남아 있었다.

조사서를 썼다던 경찰서 근방에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싸구려 모텔이 몇 군데 있었다. 지구대가 코앞에 있다고 방심한 건지 CCTV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곳도 부지기수였다.

다행히 그중 한 군데에서 목격담은 얻어 냈으나 영하가 경찰에 신고하고 조사받는 과정을 견딜지조차 의문이었다. 각오했다면 겁은 많아도 묘한 구석에서 과감한 녀석이니 이미 한참 전에 경찰서부터 갔을 테였다.

‘내가 아빠라고 불러 버려서…….’

영하는 특히나 그 점을 신경 썼다. 그들의 사이가 발각될까 두려워했다. 그러니 서민석은 영하의 사건이 아닌 다른 사건으로 잡아야만 했다.

약을 먹이고 정신을 잃은 사이 강간하고 증거 인멸을 위해 CCTV를 모두 회수한다. 절대 초범인 놈의 행동이 아니었다. 대담하고 허술한 듯 치밀한 그 흐름은 범인이 일반인이 아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최세계의 연수원 동기이자 그의 친구인 서울지검 검사는 고작해야 임관한 지 1년 된 서민석의 유명세를 이야기했다.

‘알지. 그 자식 캔 따개 검사잖아. 그놈이 음료수 건네면 입 꾹 다물던 조폭 새끼들도 술술 뱉어. 아마 조폭들한테 뒷돈도 꽤 받았을걸.’

녀석은 20년 넘도록 뒤가 구린 짓을 해 온 정재계의 늙은이들의 발과 말이 되어 주는 놈이었다. 이따금 먹잇감을 물어다 주기도 했다. 영하를…… 다음번의 ‘먹잇감’으로 삼을 생각이었겠지.

약혼 결정 전 서승섭만 뒷조사를 했는데. 하필 서민석이 영하에게…….

반쯤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세계는 마른 뺨을 쓸고는 화면을 넘겼다.

분명 전적이 있다. 최세계는 그 전적을 찾아내서 서민석을 나락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좌천이나 면직으론 어림도 없다. 반드시 교도소에 집어넣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확실한 건 서민석과 그의 아버지, 서승섭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승섭은 일찍이 한 번 사고를 쳐 출셋길이 막혔던 검사였다. 그러나 서승섭은 동료들에 비해 직위만 뒤처질 뿐 그 욕심 많은 인간의 뒤에는 방대하고 탄탄한 뒷줄이 존재하는 덕에 검찰 내부와 윗선에서 평판이 좋은 인간이었다. 그 서승섭의 아들이니, 서민석을 처리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성화기부재단…….”

서민석의 프로필을 화면에 띄우고 뚫어지라 보던 그는, 휴대폰 벨 소리를 듣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손만 뻗어 휴대폰을 들었다. 그제야 화면을 보니 이름 석 자만 기록되어 있다. 세계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말씀하세요.”

-예, 상무님. 도련님께서, 하교하는 길에 오늘 친구분과 싸우셔서 연락드립니다. 지금 막 자택에 모셔다드린 길이며 상대는 이정욱이라는 동기입니다. 다행히 도련님께서 다치신 곳은 없습니다.

*

일이 벌어진 것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민재는 내일 있을 과외 준비를 해야겠다며 부리나케 사라졌고, 영하는 늘 그렇듯 곧장 집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휴대폰을 붙잡고 있던 이정욱이 대뜸 자신을 붙잡지 않았다면, 정문으로 나가 지하철을 타고 집까지 갔을 터였다.

“영하야, 잠깐만.”

“왜?”

어딘가 불편한 듯 주변을 두리번대던 녀석이 머뭇대는 목소리로 영하를 붙잡았다.

“우리 누나랑 잠깐만 보자.”

“내가? 너희 누나랑? 왜? 민재도 아니고.”

민재는 잠깐 기자의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니 민재에게 해 줄 말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영하는 그녀에게도, 기자라는 직업에도 전혀 관심이 없다. 만나서 이야기를 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잠깐이면 돼. 누나가 부탁할 게 있다고 해서.”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민재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더라도 이정욱은 학교생활을 함께하는 친구였으니 단호하게 거절하는 것이 어려웠다. 정욱은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복잡한 눈빛으로 휴대폰을 굳게 쥐고 있었다.

누나가 억지로 부탁이라도 한 건가. 자신이 그녀를 도와줄 일이 뭐가 있을까 의아하긴 해도, 영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이정욱의 누나, 이해인을 만난 곳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근방의 학생들이 거주하는 원룸촌과 이어지는 길목이었는데, 거리가 좁진 않았으나 갓길마다 주차되어 있는 차들 때문에 좁은 느낌이 들었다.

마르지 않은 작은 물웅덩이를 밟은 영하가 이마를 콱 구긴다. 하얀 스니커즈에 흙탕물로 얼룩이 들었다. 캔버스 재질이라 발끝에 축축한 기운이 바로 스며들었다. 으익.

며칠 전 초코와 마주했을 때와 달리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녀는 깔끔한 회색 정장 차림이었다. 여기서 이야기를 하자는 건가.

주변을 둘러보니 세탁소 하나와 간판이 낡은 편의점. 아직 오픈하지 않은 술집 두어 군데가 있다. 멀리 카페 하나가 보였지만, 이해인은 기다릴 틈새도 없이 얼굴을 보자 인사부터 하더니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급작스러운 만남에 대한 겉치레 인사조차 모두 뛰어넘은 행위였다.

“미안한데 내가 취재를 좀 할까 하는데. 도와줄 수 있을까?”

“취재요?”

“여기서 말하긴 좀 곤란한데. 조용한 데 가서 하자.”

그녀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안경 아래의 눈동자에 이채가 반짝였다. 그 타오르는 듯한 눈빛에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은 무언가를 태울 듯한 강렬한 뜨거움이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먹잇감은 자신이다.

손을 뒤로 하여 감싸 쥔 영하가 고개를 돌려 친구의 얼굴을 본다. 긴장이 역력했으나 놀라지 않은 모습이었다. 애초에 이곳까지 데려온 것도, 이해인의 가족도 이정욱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좀 전까지 길거리에서 대화를 해야 하는 거냐며 의아함을 표했던 영하는 자리를 옮기자는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됐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안 할래요.”

“별거 아니야. 네가 조금만 용기 내 주면 되는 일이야.”

“뭘 용기를 내요?”

“이정욱, 너 말 안 했어? 해 두라니까. 애 놀란다고.”

“……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굳은 목으로 눈동자만 굴려 정욱을 흘끗 보던 순간이었다. 왜인지 결연한 얼굴을 한 이정욱에게 제대로 항변하기도 전, 이해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야기에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고 동시에 차분히 뛰어오르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네가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

“…….”

“최세계 맞지?”

완전히 얼어붙어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눈앞이 막막하게 흐려지고 명치가 짓눌려 숨통이 조여 왔다. 그녀가 어째서 아빠에 대해 알고 있고, 영하와 그의 관계까지 알고 있는지 유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호흡조차 멎어 머리가 몽롱해졌다.

뒤늦게 밭은 숨을 작게 뱉어 내며 등 뒤로 맞잡은 손바닥에 손톱을 뾰족하게 박아 넣었다.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고 서늘한 기운이 뒤에서부터 몸을 집어삼켰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해인은 표정에 웃음기를 지우고 한 걸음 다가와 겁을 주는 게 아니라는 듯 친절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네가 힘들 거 알아.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서로 조금만 용기 내면 되는 일이야.”

“…뭘 도와준다는 거예요?”

영하는 최악의 가정을 했다. 그녀와 이정욱이 최세계와 최영하의 생물학적 관계는 물론 비도덕적인 관계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이해인은 뜻밖의 이야기를 강요했다.

“너 돈 때문에 하는 거잖아. 증언만 해 주면 회사에 이야기해서 피해 구제와 인터뷰 비용 사례 충분히 할게.”

돈 때문에 하는 일. 피해 구제.

전혀 관련이 없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도리어 혼란스러웠다. 그녀가 뭔가 알고 있긴 한데, 묘하게 핀트가 나가 잘못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는, 누나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요.”

“너랑 최세계 관계를 말하는 거야. 모드 글로벌 최세계 상무이사. 너 최세계한테, 스폰 받는 거… 맞지?”

손바닥 안쪽에 손톱자국이 여럿 겹쳤다. 영하는 꼴사납게 떨리는 성대를 애써 열어 대답했다. 두려움이 아닌 분노에서 오는 떨림이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온몸이 진동하며 창백해진 안색에 탁한 붉은빛이 돌았다. 모멸감에 북받친 분노가 이성과 육체를 지배했다. 살면서 이만큼 화가 난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눈앞이 희게 변해 들었다.

단순히 둘 사이의 관계를 더럽히는 모욕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녀의 악의에 찬 펜촉이 겨냥하고자 하는 사냥감은 자신이 아니라 최세계다. 자신은 특종을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해요.”

“언제부터 시작한 거야? 얼마나 됐어? 개월 수만 말해 주면 충분해. 언제부터야. 혹시, 작년부터……. 방금 보니 너 따라붙는 차도 있는 거 같은데 그런 거 다 불법이야. 너한테 끔찍한 짓 하는 거라고. 아직 네가 멋모르는 어린애라….”

이미 이정욱과 이해인은 영하와 세계의 관계를 의심했다. 단순한 부자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무작정 아니라고 부정했다간, 뜬구름 잡는 헛소리가 아닌 진실을 파헤칠지도 몰랐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뭐……?”

“제가 좋아서 하는 거라고요. 차도 제가 붙여 달라고 했어요. 누나 같은 사람이 나타날까 봐요.”

달라진 태도와 가라앉은 어조로 내뱉은 단호한 대답. 예상에 없던 반응에 이해인이 얼이 빠져 움찔 몸을 떨었다. 흥분한 둘 사이에서 우뚝 서 있던 이정욱마저 놀랐는지 멈칫하며 영하의 옆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평소 이상으로 끓어오른 분노가 오히려 최영하를 차분하게 만들었으나, 이제는 한계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스폰을 정말 좋아서 시작하는 애가 어딨어? 게다가 남자끼리… 괜찮아. 그냥 말해도 돼. 혹시 최세계가 강제로… 야―!”

결국 이해인의 입에서 나온 발언에 치밀어 오른 화가 완전히 범람해 진정할 수 없었다. 점점 두 손이 걷잡을 수 없도록 떨리기 시작했고, 열이 오른 눈으로 주먹을 움켜쥔 최영하의 몸뚱이가 이정욱에게로 회까닥 돌아갔다.

퍼억-!

“이정욱 이 개새끼야!”

주먹으로 정욱의 얼굴을 날렸다. 갑작스레 뺨으로 와 닿는 충격에 큰 키가 휘청이며 주춤주춤 몸이 뒤로 밀려났다.

세로로 크게 확장된 눈과 벌어진 입술이 멍하니 허공에 닿았다.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 뜨이고, 천천히 영하를 돌아본다. 입술 끝이 터진 이정욱은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도 파악이 어려운 모습이었다.

영하는 이정욱을 때리고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연신 어깨를 들썩였다. 습관처럼 안구 아래쪽에서 축축하게 차오르는 것이 느껴져 손바닥에 다시금 손톱을 겹쳐 눌러 박아 넣으며 울음을 삼켜 냈다.

분노의 방향은 정확히 이정욱을 향했다. 모든 일의 원인이 이정욱이라는 것은 두고 볼 일도 아니었고 너무나 뻔한 전개였다. 영하와는 며칠 전 마주친 것 말고는 접점이 없는 이해인이 이렇게 나서는 건 오로지, 동생이 누나에게 전한 이야기들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미, 미쳤어, 너?”

“미친 건 당신들이지. 이게 누나가 말한 세상을 바꾸고 싶은 방식이에요? 내가 진짜 피해자였어도 이런 방식으론 아무것도 못 바꿔요.”

이해인은 다짜고짜 얻어맞은 이정욱을 돌아보곤 목소리를 더듬었다. 혹여 영하의 폭력이 자신에게 닿을까 두려운지 날카로운 눈빛이었지만 발걸음은 느릿하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로퍼의 신발 밑창이 콘크리트 바닥에 조용히 쓸리는 소리가 분명했다. 영하는 그녀가 했던 말을 다시금 되짚는다.

‘최세계가 강제로.’

콧날이 시큰해지고 목구멍이 좁게 조여들었다. 그는 한 번도 강제한 적 없었다. 대답을 재촉하긴 해도, 영하의 동의를 구하는 남자였다.

부드러운 눈가가 설움의 핏물처럼 붉게 물들고, 눈물방울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굳게 다문 최영하는 다시금 볼품없는 주먹을 들었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길 사이로 이해인의 갈라지는 비명이 이어 고막을 때렸다.

“야―!”

“…날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별 병신 같은 새끼가.”

몸을 돌려 다시금 이정욱의 얼굴을 날린 영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걸었다. 그들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비로소 눈물이 뺨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깨를 한 번 들썩인 최영하는 손등으로 거칠게 눈물 자국을 닦아 내며 전봇대 아래 장기 주차된 차량인 척 서 있는 검은색 승용차에 무작정 노크했다. 조금 난폭하게 쿵쿵 내리친 후에는 급하게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세 번째로 손잡이를 당기자 드륵, 하며 잠금이 풀리고 비로소 차체가 열렸다. 등에 멘 가방을 벗어 차 안으로 던진 영하가 뒤따라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까만색 모자를 쓴, 청년과 중년의 경계에 있는 남자였다. 삼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룸미러로 그와 눈이 마주쳐 한 번 더 눈물을 닦아 냈다.

“집으로 가 주세요.”

“저…….”

“그리고 아빠한테 오늘 일, 말하지 마세요.”

“도련님.”

“말하시면 저도 아저씨가 미행에 재능 없는 거 다 말할 거예요.”

원체 겁이 많은 최영하는 사건을 겪은 후 시시때때로 두통을 느낄 만큼 예민하게 긴장을 바짝 올린 채 생활했다. 따라서 자신에게 따라붙는 어설픈 차 한 대를 깨닫는 것은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처음엔 서민석의 짓일까 두려워했지만, 그보단 아빠가 벌인 짓이라고 가닥을 잡았다. 서민석이 며칠째 자신의 뒤에 따라붙는다면 아빠가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어떤 형태이든 영하는 그의 애정과 집착이 달가웠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든, 뒤따라 붙는 사람을 붙이든 그가 주는 사랑이라면 얼마든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강제도 아니고 돈 때문에 맺은 사이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그가 모욕당하는 걸 견딜 수가 없다.

차 안에서도 내내 울컥 치솟는 울음을 삼켜 낸 영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내던지고 다급히 침대에 파고들어 몸을 웅크렸다.

자신을 추궁하는 건 참을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욕보이는 건 싫었다. 영하와 세계의 사이를 갈라 보면 스폰서와는 비교 불가한 도덕적 결여가 존재했으나, 그래도 싫었다.

“개새끼……. 아빠……. 흑…….”

베개를 끌어안고 멍하니 해가 저무는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너른 창 안으로 스며든 노을이 영하의 얼굴과 목덜미에도 내려앉았다. 더운 이불 속에서 한참 울고 나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마가 젖고 얼굴이 노을을 만드는 태양 빛의 산란보다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우느라 산으로 만든 티슈 더미를 들고 침대에서 기어 내려왔다. 실컷 울고 나니 움직일 여력도 없어 온갖 기운을 끌어모아 몇 걸음 걸었다. 까만색 안방 쓰레기통 안에 휴지 더미를 넣은 영하는 우울한 얼굴이었다. 실핏줄이 드러난 뺨이 불퉁했다.

이정욱을 패는 마음으로 주먹을 움켜쥔 채 침대 아래쪽의 베드 벤치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시점이었다. 문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린다. 황급히 침대 위에 내던진 휴대폰을 들어 켜 보자 아직 5시 반이었다.

고개를 들자 안방 문이 열리고, 최세계가 정장 재킷을 가지런히 벗어 팔에 올린 채로 등장했다. 바로 눈가를 닦아 내어도 소용이 없다. 부은 눈이나 빨개진 콧등이나 누가 봐도 운 흔적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이야.”

인사말도 없는 첫마디였다.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 둔 그가 곧장 영하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끝이 부딪치기 직전에 멈춘 세계는 의자에 앉은 영하와 눈을 마주치려 무릎을 한참 굽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쭉 내뱉은 영하가 울음에 메인 목소리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사람은 나한테서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야. 회사에서 뛰쳐나오려던 거 겨우 참은 거니까 얼른 말해.”

말하기 싫다. 시선을 돌려 그의 옷이 걸린 옷걸이에 눈을 둔다. 영하의 반응에 입을 다문 그는 눈물 자국이 드문드문 남은 뺨 위를 엄지로 조심스레 쓸어 냈다. 사뭇 걱정이 담긴 얼굴이긴 했으나, 아직도 화를 다 쏟아붓지 못해 들썩이는 가슴팍을 빤히 보고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어 나온 세계의 말에 영하가 옷자락을 손으로 꽈악 움켜쥐며 눈을 올려 떴다.

“잘 때리고 와선 울긴 왜 울었어.”

“다 들었으면서 뭘 물어?”

“내가 들은 건 그거뿐이야. 네가 두 대 때렸다는 거. 그러니 말해.”

몸을 편 세계가 영하의 옆자리로 옮기며 재촉했다. 각지고 마른 어깨를 감싸 안고, 흐트러진 머리카락 위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괜찮아. 말해도 돼.”

부드럽게 채근하는 목소리마저 다정하여, 영하는 할 수 있다면 다시금 이정욱을 후려 패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두 대로는 성에 안 찬다. 울분을 삼키며 입술을 달싹이다, 영하는 결국 풀 죽은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나더러 모드 상무랑 원조 교제 하는 거냐고 하잖아….”

최세계는 큰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그런 거 가지고. 인턴 기자 여자 맞지?”

“어떻게 알아?”

“취재한다고 깔짝대는데 모를 리가. 걱정 마. 안 그래도 알아서 할 생각이었어.”

짧은 한마디로도 모든 상황이 유추되는 건지, 더 묻지 않은 그는 스트라이프 자카드 패턴의 타이를 무작정 끌어 내렸다. 몇 번의 움직임으로 넥타이는 기다란 끈이 되어 그의 손안에 떨어졌다.

“맨날 걱정하지 말래. 그게 어떻게 가능해. 아빠는 그런 말 듣고도 아무렇지 않아?”

“더한 말을 들어도 상관없어.”

“난 상관있어! 아빠가 그런 말 듣는 게 너무 싫다고.”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쩌려고 그래.”

“약하긴 뭐가 약해. 두 대나 때리고 쌍욕도 하고 왔어.”

영하가 오른쪽 주먹을 꽈악 쥐며 대답했다. 제법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곤 눈썹을 들어 올린 세계는 소매의 단추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봤자 새끼 고양이가 장난감 보고 놀라 털과 꼬리를 바짝 세우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렇게 속상했어?”

“당연하지…….”

“그래도 다음부턴 때리지 말고 무시하고 나와.”

“…나도 아무한테나 그러는 거 아니야. 살아생전 처음으로 싸운 거라고.”

“너한테 많이 맞은 기억이 나는데.”

“그게 뭐가 때린 거야……. 일단은… 당분간 밖에서는 손도 잡지 않는 게 좋겠어. 싫은 게 아니라, 아빠가 그런 오해 받는 거 싫어…….”

이정욱이 대체 뭘 보고 우리 사이를 원조 교제라고 생각했을까?

정욱이 아빠를 목격한 것은 오티 당일의 술집과 며칠 전 학교 카페 앞에 저를 데리러 온 모습뿐이었다. 술집에서는 아빠와 마주 앉아 대화 조금 나눈 것이 다였고 카페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걸리는 점이 없다. 차 문을 열어 준 일 때문일까?

둘 사이의 정확한 관계를 모르는 점은 다행이었으나 그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도 있는 모욕적인 사건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빠와 아들 사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눈치가 빠르고 예민한 사람이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단지 나이 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 원조 교제라고 단정 지은 것이 기가 막혔다.

생각할수록 분노가 꺼지기는커녕 겨우 진정한 가슴에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쿠션감이 탄탄한 소파를 주먹으로 쿵쿵 짧게 내리치며 울분을 토해 냈다. 쿵쿵 소리를 듣고 맨몸에 가벼운 운동복 티셔츠를 입던 세계가 뒤돌았다.

“복싱을 배워야 했어. 아빠가 운동하라고 할 때 할걸. 이딴 얇은 팔뚝으로는 때려 봤자 별로 아프지도 않았을 거야. 더 세게 때렸어야 했는데!”

“하여간 성격하고는.”

소파를 내리치던 최영하는 곧 자신의 팔뚝을 거칠게 만지곤 절망했다. 어깨는 체구에 비해 넓은 편이었으나 빼빼한 뼈대에 극소한 지방과 약간의 근육이 붙은 팔뚝에는 전혀 용맹한 기운이 없었다.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어야 이정욱에게 최대한의 고통을 주었을지 고민해 본 영하가 머릿속에 상상하던 것을 입으로 뱉었다.

“휴대폰 들고 때릴걸.”

“…특수폭행죄야. 너 빨간 줄 그어지고 싶어? 그만하고 진정해. 내가 처리할게. 이러다 옥바라지하게 생겼네.”

세계가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아빠는 영하에게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자 유일한 가족이었다.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더라도 이런 식으로 남들에게 불쾌한 오해를 살 것이라고는 의심치 못한 터라 받아들이는 상처가 막대했다.

이맛살을 찡그린 그가 다가와 영하의 앞에 선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제 눈물의 흔적이 가신 뺨을 양쪽으로 문지르고 열이 올라 있는 귓바퀴를 건드렸다. 네크라인이 넓은 티셔츠를 입어 목덜미와 쇄골이 드러나 있었다. 마른 몸에 도드라지는 척추뼈 위를 성적인 의도 없이 더듬은 그가 영하를 달래듯이 입을 열었다.

“인턴 기자는 더 건드리지 마. 뉴스프레시 소속이던데 아빠 친구가 거기 부사장이야. 그 여자는 네가 화 좀 낸다고 물러설 타입이 아니니까 내버려 둬. 회사 잘리면 정신 차리겠지.”

그런 처사 또한 마뜩잖았다. 실컷 화를 내고 들어왔으나 영하의 분노는 대부분 이정욱을 향해 있었기에, 정욱의 누나가 해고될 거란 생각을 하니 마음이 켕긴다.

“굳이 꼭 해고시켜야 할까? 그냥, 정직이나…….”

“뭐 하러 남을 신경 써?”

“그래도… 이정욱이 잘못한 거잖아. 걔가 비밀을 안 지켰단 말이야. 내가 아빠라고 했는데, 자기 마음대로 이상하게 생각한 거야.”

“가만히 내버려 두면 그 인간이 얌전해질 것 같아? 일단은 알았어. 해고는 고려해 볼게. 그리고 아마 며칠 내로 그쪽에서 변호사 선임해서 만나자고 할 거야.”

“변호사? 왜?”

“네 뒤에 내가 있는 걸 알았으니 그쪽도 머리가 돌아가면 막대한 피해 보상을 원하겠지.”

그런 부분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이불 속에서 영하가 예측하던 것이라고는 서민석 그 개자식이 일을 저지른 그날처럼 지구대에 가서 경위서를 쓰는 것이었다.

너무 충동적으로 저지른 건가.

잠깐 후회가 들었으나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조심스레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그가 깨지 않도록 발꿈치를 들고 문을 나선 후 영하는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다 그의 서재 문을 열었다. 목적지는 서재를 지나 존재하는 작은 테라스였다.

침대에 누워 잠든 척하는 내내 창문이 덜컹거리더니, 역시나 밖으로 나오자 새벽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테라스에서 내다보이는 후원에는 키가 크고 마른 자작나무 열다섯 그루가 심겨 있었는데, 강한 바람에 조그마한 나뭇잎과 얇은 가지들이 서로 부딪쳐 내는 사박사박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속상한 마음이 가시질 않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늘 괜찮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 라고 하지만, 영하는 자꾸만 불안했다.

영하와 세계의 사이는 일면으론 단순했으나 조금만 모래를 파내면 굉장히 치열하고 복잡했다. 도저히 풀어낼 수 없을 만큼 얽히고설킨 수만 갈래의 선들이 존재했다. 그것들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 노력했던 것이 20살, 2월의 최영하였고 지금은 포기했다. 발목을 조이는 실들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게 잘못된 걸까. 포기하지 말아야 했을까. 잔뜩 휘감긴 실들이 오히려 안락하다고 느끼게 된 것이 문제였을까.

“잠이 안 올 만큼 마음을 다친 거야?”

그때 풀 죽은 영하의 뒤로 익숙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혼자만의 시간을 제대로 가지기도 전에 그가 따라붙었다. 분명 잠들어 있는 걸 확인하고 나왔는데.

뒤돌아보기도 전에 그가 먼저였다. 반만 열린 서재와 이어지는 미닫이문을 완전히 열고 테라스로 나온 남자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심장이 찢기는 기분이야.”

현재의 심정을 말하는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지쳐 있었다.

“실제로 찢어지지 않았으니 그냥 넘겨.”

“못 넘겨.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는데….”

아빠한텐 뭐가 그렇게 다 쉬울까? 왜 나는 모든 게 어려울까. 타고난 성정이 달라 어쩔 수 없는 걸까. 그가 가진 두꺼운 쇠심줄의 반만큼만 닮았어도 조금은 편했을 텐데. 왜 그런 건 닮지 않았을까. 어차피 이런 관계가 될 거라면…….

“기분을 풀어 줘야겠네.”

느긋하고 나른한 목소리였다. 정말로 원조 교제니 스폰서니 의심하는 것에 조금도 상처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속상한 건 영하뿐이다. 그가 슬퍼하지 않으니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론 서운했다. 눈꺼풀 위로 실망스러운 감정이 조각조각 내려앉았다.

난간의 각진 모서리를 엄지로 꾸욱, 누르며 구름 사이로 가려진 희뿌연 달빛 아래 자작나무 숲을 바라본다. 나뭇가지가 희고 잎사귀는 조그마했다. 작은 나뭇잎들이 흰 가지에 풍성하게 달라붙어 있다. 더 우울해지기 전에 그것들이 서로 문질러지며 내는 소리에 집중했다.

방학이 되면 별장에서 지낼까….

작년 여름에 잠깐 들렀던 별장은 주변 마을에서 꽤 떨어져 한적한 데다가 뒤쪽으로 너른 정원과 호수를 끼고 있었다. 크고 단단한 나무 퍼걸러 위로 타고 오른 풍성한 하얀 장미 덩굴과 이어진 돌담길을 걸으면 햇빛에 아름답게 반짝이는 호수가 연꽃을 가득 품은 채 반겨 주었다.

아빠는 일 때문에 내내 같이 있을 순 없겠지만… 혼자 집을 지키는 것은 익숙하니 그가 출근하는 시간 정도는 외롭지 않게 버틸 수 있다. 별장에서 지내려면 장을 봐야겠지.

함께 카트를 끌고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는 상상을 잠깐 하던 도중, 가까이 다가온 그가 뒤에서 영하를 끌어안았다.

등 너머로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지고 한쪽 팔이 허리를 휘감는다. 손바닥의 따뜻한 체온이 얇은 면 하나를 넘어 살 위로 맞닿았다. 세계는 아들의 관자놀이에 뺨을 대고는, 조금 웃었다. 광대뼈가 희미하게 위로 솟아오르더니 아무런 말 없이 반대편 손이 불쑥 앞으로 튀어나왔다.

“…뭐야?”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파란색 가죽 케이스였다. 허리를 감던 손을 빼낸 세계가 케이스 중앙의 은장 체인 고리를 빼내곤 열어 보여 주었다.

“…….”

안에 든 것은 같은 디자인인 두 쌍의 반지였다.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도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커플링을 준비했다는 것을 깨닫자 숨을 쉬기 곤란해졌다. 긴장으로 뻣뻣해진 몸에게 별것도 아닌 일이라며 스스로를 타일러 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영하는 그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할 만큼, 그를 사랑했다.

세계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리하여 영하도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버티고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들을 품에 안은 그는 묵직한 반지 케이스를 각이 진 테라스 난간에 올리더니, 두 개의 반지 중 조금 더 두께가 가는 반지를 들어 영하의 왼손 약지에 가져다 댔다. 조금 밀어 넣자 반지는 저항 없이 영하의 손가락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딱 맞네.”

낮게 가라앉았으면서도 동시에 들뜬 어조였다. 그는 영하가 대답하기 전에 이어 말했다.

“하나 더 있잖아.”

반지 케이스를 영하의 앞쪽으로 당겨 온다. 자신의 손가락에 자리 잡은 반지와 똑같은 디자인의 또 다른 반지. 그는 자신의 왼손 약지에다 반지를 끼워 줬다. 그 행위의 뜻이 너무나 명확하다.

그 순간 불현듯 억지로 좁고 단단한 상자 속에 가둬 버린 감정들이 머리를 내비쳤다.

안 돼.

이 이상 튀는 행동은 곤란했다. 그가 돈을 주며 자신과 만난다는 오해를 사는 것도 싫었고 더더욱 그 이상의 진실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원조 교제로 의심받아 잔뜩 화를 낸 상황에서 그와 커플링을 나눠 끼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매번 그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이 남자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면 자신이라도 정신을 다잡아야 했으나, 영하도 이번만큼은 모든 것을 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천지 분간을 못 하는 반편이처럼 굴고 싶었다.

입술이 마른다. 반지를 낀 왼손을 흘끗 본 영하가 결국 고민 끝에 케이스 안의 반지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미묘하게 굳어 있던 세계의 얼굴 근육과 목덜미가 가까스로 느슨하게 풀어지며, 내내 참았던 숨을 뱉듯 뭉텅이로 숨소리가 떨어졌다.

그가 먼저 스스로 왼손을 내밀었다. 영하는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곤 짧게 한숨을 뱉었다. 체온이 비슷한 손바닥 아래를 잡곤 길고 곧아 예쁜 손가락에 반지를 가져갔다.

“누가 물어보면 뭐라고 해…….”

손가락에 마저 반지를 끼워 주고 나니, 보는 사람도 없는데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동시에 가슴이 뜨겁도록 강하게 뛰고 눈동자가 기쁨으로 미미하게 젖어 들었다.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 위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자각이었다.

“남자 친구랑 했다고 해.”

“미쳤지. 게이인 거 동네방네 밝히려고.”

“내 일이 아니라서.”

짓궂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흘렀다. 반지 교환이 끝나자마자 곧장 장난을 치다니. 정말 무드라곤 없어…….

불만스레 손에 낀 반지를 내다보곤 몸을 돌려 무드 없는 남자의 허리를 으스러지도록 껴안고 어깨 위로 코끝을 댔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곧 할아버지 생신 파티 있어.”

“응……. 그날 늦게 들어와?”

세계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번엔 너도 가는 거야.”

“나는 가면 안 되잖아. 뭐라고 소개해….”

“걱정할 것 없어.”

“싫어. 안 갈래. 아빠 아들인 거 말 안 하고 싶어.”

“아무 말도 할 필요 없고 그냥 몸만 가면 돼.”

“왜 굳이…….”

영하는 그와는 서류상 먼 친척이었다. 호적상 부모를 만나 본 적도 없었으며 공식적으로는 그 집안과 얽힐 존재가 아니니 매번 가족 행사에는 당연하게 빠졌는데 이번에는 참석하라니…….

혼자서만 공기 중에 붕 뜬 존재가 될 일이 뻔하기에 내키지 않는다. 더불어 그와 이런 관계를 맺은 이후로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었다.

“같이 가고 싶으니까.”

“…….”

그가 반지 낀 손에 깍지를 끼며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쓸어내린다. 염려스러웠지만 영하는 이내 체념의 몸짓으로 고개를 작게 주억였다.

*

세계의 말은 조금의 다름도 없는 사실이었다. 사흘 뒤, 모르는 휴대폰 번호로 영하에게 문자가 왔다.

법무법인에 소속된 변호사이며 이정욱 학생에 관한 일로 연락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심장이 덜컹 가라앉아 문자를 보자마자 세계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변호사 붙여 줄게.” 하고선 번호를 받아 갔다.

나 사고 친 건가.

그날 이후 이정욱과는 당연하게도 거리를 두고 생활했다. 같은 과니 수업이 있는 날은 마주칠 수밖에 없어 영하는 일부러 자의적인 아웃사이더가 되어 혼자 다녔다. 입술 아래쪽에 피딱지가 앉은 정욱에게 남자 무리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 물었지만 듣기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무시한 것 같다. 딱히 고맙지는 않았다.

이정욱은 최악의 인간이다. 나를 원조 교제나 하는 인간으로 만든 데다 자기 누나 뒤에 숨은 겁쟁이였다. 이정욱이 자신에게 가진 호감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태도가 더 역겨웠다. 나를 좋아하면서, 편하게 대해 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내내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어떻게 된 게… 나더러 좋다고 한 새끼들이 하나같이 이 모양이지. 서민석 같은 쓰레기는 나에게 마음이 있다고 한 것이 사실인지도 판단되지 않았으나 겉으로 보기엔 호감을 표현했던 두 놈 다 미친놈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최영하는 책상 위로 머리를 박았다.

약속 장소는 고급 호텔의 룸이었다, 20분 전에 도착해 호텔 정문 앞에 있는 분수대에서 변호사를 기다리기로 했다. 소극적으로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를 물끄러미 보며 집에서부터 혼자서 줄곧 연습해 왔던 것을 곱씹었다.

‘너와 네 누나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취재하는 걸 멈추지 않는 이상 난 사과하지 않을 거야.’

절대 떨지 않고 굳건하게 말해야 했다. 기선제압이 중요했다. 아빠가 이해인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지만,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할 수 있는 한 영하 쪽에서 이해인도 이정욱도 막고 싶었다.

‘너와 네 누나…….’

반복해서 속으로 되뇌던 중,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분수대 앞으로 접근했다.

안경과 정장, 손에 든 서류 가방과 삼십 대 중 후반으로 보이는 외모. 남자는 눈이 길게 찢어지고 눈썹뼈가 도드라진 얼굴이었다. 영하는 곧장 그가 아빠가 말했던 변호사임을 알아차렸지만, 남자는 분수대 앞에 선 영하를 지나쳐, 옆쪽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보는 젊은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최영하 씨 맞으시죠?”

“네? 아닌데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쓰으, 도착했다고 했는데 어디…….”

다짜고짜 그녀에게 물어보곤 허탕 치자, 남자가 뒷머리를 긁적이곤 가방을 고쳐 든다. 들고 있던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곤 그의 뒤로 다가갔다. 혹시나 놀라실까 봐 일부러 쿵쿵 발소리를 내며 남자의 등을 손가락으로 소심하게 콕, 찔렀다.

“제가 최영하예요.”

통성명하자 잠시 당황한 기색이 그에게 내려앉았으나 곧장 표정을 바꿔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꾸며 낸 듯한 시원한 웃음소리에 영하가 어색하게 “하하하.” 따라 웃었다. 남자가 영하의 팔을 잡고 벤치와 조금 떨어져서는 최영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아이고 제수씨! 반갑습니다. 제가 생각한 성별과 달라서 그렇지, 상상 그대로 미인이시네요. 꽉 막힌 제 잘못이죠.”

“네?”

그의 입에서 나온 호칭에 어찌나 놀랐는지 인사도 잊었다.

“제수씨요……?”

남자는 자신이 말하고도 민망하다는 듯 멋쩍게 입술을 달싹이곤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영하에게 내밀었다.

법무법인 더율

대표/변호사 김율

“학생인 건 알고 나왔는데도 당황스럽네. 오기 전에 최세계 이 새끼를 죽이고 나왔어야 했는데 실수했습니다. 오늘 미팅 마치고 바로 같이 죽이러 가시죠.”

“…….”

영하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개의치 않는 듯 곧장 이어 말했다.

“제가 원래 이렇게 현장에 직접 나올 번수는 아닌데 세계가 애인 변호 좀 해 달라며 무릎 꿇고 부탁해서 나온 겁니다.”

“…정말요? 무릎을 꿇었어요?”

“농담이죠. 그놈이 어디 무릎 꿇을 놈입니까. 조상님 지방 붙인 병풍 앞에서도 고개만 까딱할 놈인데. 이걸 그대로 믿다니 더 기가 막히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떻습니까. 저랑 제수씨랑 합심해서 최세계 그놈 고소해서 합의금 한 백억 받아서 육 대 사 하죠.”

“…….”

“참고로 제가 육입니다.”

“…뭐로 고소하면 합의금이 백억이나 되는데요?”

정말 순수한 의도로 궁금했다. 미국도 아니고 한국에서 합의금으로 백억을 받으려면 어떤 사안으로 고소를 해야 할까. 그러자 김율이 놀란 얼굴을 하며 중얼거렸다.

“무섭네….”

무서운 건 영하도 마찬가지였다. 제수씨라니……. 말도 안 되는 호칭에 머리가 어찔했다. 약속한 방으로 올라가기 직전, 화장실을 들르겠다며 잠시 자리를 피해 곧장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열한 시인데 벌써 보고 싶어서 전화야?

튀어나오는 활기찬 인사에 속이 탄 영하가 이마를 짚으며 끙끙거렸다.

“왜 나를 애인이라고 소개한 거야?”

-그럼 너랑 내가 원조 교제 하는 줄로 아는 놈이랑 대면하는 건데 아들이라고 해? 그쪽도 이유가 있으니 연애하는 줄 눈치챈 거니까 깔끔하게 애인이라고 긋는 게 낫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제수씨라니… 게다가 꼬박꼬박 아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나이대로 보아 아빠의 친구임이 분명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도 아니고 하필 친구를 붙이면서 애인이라고 하면 어떡하자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영하는 절친인 민재가 떠올랐다. 민재는 몇 년 전부터 영하와 그의 관계를 애인으로 알고 있었다.

나도 뭐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네…….

“하지만… 변호사 아저씨가 나더러…….”

-뭐라고 했는데?

“…아니야. 됐어. 왜 하필 아빠 친구분이야? 내가 뭐 실수라도 할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데…….”

차마 제수씨라는 호칭을 들었다고 말하기 곤란했다. 장난치기 좋아하는 이 남자가 또 무슨 소리를 지껄일지 모른다. 자기야 타령이 조금 줄어들어서 다행이었는데, 이젠 또 제수씨 타령을 할지도 몰라 말을 얼버무리자, 세계는 “흐음.” 하고 못마땅한 소리를 내면서도 끈질기게 들러붙지는 않았다.

-생판 남보단 믿을 만한 놈이니까. 그리고 굳이 네가 대면할 필요는 없어. 그냥 변호사한테 맡기고 집에 가도 된다는 뜻이야.

“아니. 만나서 확실하게 끝을 내야지. 어차피 학교에서 마주치는데 찝찝한 기분 드는 거 싫어.”

-우리 영하 다 컸네.

“…아기 취급 하지 마.”

-그래도 어리광 부리는 거 보면 너는 초등학생이랑 친구 해야 할 수준이야.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며 입술을 길게 늘여 당겼다. 그에게는 철없이 구는 것이 사실이니 굳이 변명하지 않고 통화를 끊었다.

의미 없이 비누칠해 손을 씻어 낸 영하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외모를 보며 작게 찡그린다. 위압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마른 몸에 미미한 홍조를 띤 희멀건한 남자 하나가 흰 조명 아래 홀로 서 있었다.

그가 예쁘다고 말해 줄 때면 기뻤으나 사회생활에 있어 자신처럼 약해 보이는 얼굴은 얕잡아 보이기에 십상이었다. 그러니 이정욱도, 이정욱의 누나도 그런 만행을 저지른 것이겠지. 영하가 190cm도 넘는 거구였다면 그럴 일이…….

애초에 아빠도 날 예뻐하지 않았겠네. 곰 같은 타입은 질색이라던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티슈 한 장을 뽑아 손을 닦아 내며 화장실을 벗어났다.

“…….”

“…….”

호텔 방에서 대면한 정욱과 영하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양측 변호사의 사무적인 이야기가 오가고, 의자에서 고쳐 앉은 영하는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이정욱의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기선제압이 중요하다. 이정욱은 자신에게 두 대나 얻어맞았으니 어쩌면 겁을 먹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희 쪽에서 제안하는 합의금 천만 원입니다.”

“어허, 얼굴에 멍도 없는데 전치 2주에 위자료 천을 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원치 않으시면 신고하는 것으로 가죠. 최세계 상무님도 그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시니 사자 대면에 응한 것 아닙니까?”

“경찰에 신고해 봤자 학생들끼리 싸운 거로 귀찮게 하지 말라고 돌려보낼 일에 무슨…….”

“줄게요. 천만 원.”

조용히 앉아 그와 나눠 낀 반지를 돌려 가며 만지작대던 영하가 입을 열었다. 커피 테이블 위 녹차티백을 우린 잔을 멀거니 보던 정욱이 그에 고개를 들었다. 허리를 빳빳이 세운 영하가 이정욱네 변호사를 응시하며 재차 반복했다.

“합의금 그대로 드릴게요.”

“예? 예.”

상대는 이렇게 쉽게 끝날 줄 몰랐는지 조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변호사와도 합의하지 않은 내용이었으나 영하는 세계가 천만 원을 순순히 내 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돈 한 푼이 중요한 시점이 아니었다. 거짓으로 인한 것이라도 자신과의 관계로 인해 그가 더럽혀지길 원하지 않는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어제부터 내내 연습해 왔던 말을 꺼내야 할 시점이다. 떠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끔, 영하는 겉으로 흔적이 드러나지 않은 목울대를 매만지며 짓씹듯 말을 이었다.

“미안해서 천만 원을 그대로 주는 게 아니에요. …이정욱, 네 누나가 다시는 우리 일에 관여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해.”

뼈대가 도드라진 주먹을 세게 움켜쥐며 마음을 다잡고 이정욱에게 시선을 두며 명확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방 나가면, 앞으로 너랑 이야기할 일도 없을 거야.”

“아직도 못 믿겠어. 네가 그 남자를 사랑해서 만난다는 게 납득이 안 가. 속고 있는 거 아니야?”

“네가 뭐라고 납득하도록 설득해야 하는데? 너 나한테 그렇게 중요한 사람 아니야.”

그러자 이정욱의 미간에 금이 가더니 곧 척척하게 상처받은 얼굴로 영하를 바라보다 입술을 다물었다. 그 태도에 기가 막혀 어깨 부근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이정욱은 꼭 혼자서 자신과 절절한 연애라도 했던 것처럼 굴었다. 실연의 상처를 겪은 남자의 표정을 하고 있다. 그래서 더 소름이 끼쳤다. 영하는 절대 이정욱에게 여지를 준 적 없다. 자신에게 우호적이며 단지 내칠 이유가 없었고 그가 전략적으로 필요했기에 옆에 ‘친구’로 뒀을 뿐이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일을 저지른 건지, 이제 알겠어.”

재벌을 파헤치고 사회부로 옮기고 싶다던 이해인의 야망을 돌이켜 보면 그녀가 왜 나와 아빠의 사이를 캐내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정욱이 왜 그녀에게 원조 교제 타령을 해 일을 키웠는지는 며칠간의 고민 끝에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정욱의 태도를 통해 지금, 이 순간, 깨달았다.

이정욱은 혼자서 자신이 내 남자 친구라도 된 듯 굴었던 것이다.

가방이 무거워 보인다고 들어 주려고 하던 것이나, 음료수병을 따 주던 것. 혼자 밥을 먹겠다던 내 옆에 부득불 다가와 함께 밥을 먹으려던 것 전부…….

등줄기 너머로 오싹한 한기가 몸을 훑었다.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도 서민석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치 않는 애정은 사람을 좀먹는다. 그간 이정욱이 챙겨 주는 행위가 부담스러웠던 이유는 영하가 그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일상적인 도움이 필요할 만큼 나약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반지를 끼워 주던 날 밤 그가 머릿속을 지배한다. 반지를 넘겨준 세계는, 전신을 긴장한 채 호흡조차 멈추고 있었다. 비로소 영하가 반지를 꺼내 손에 들어서야 풀어지는 긴장과 함께 그의 숨결이 낮게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사소한 반응들에도 영하는 그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 그 사람 사랑하는 거 맞아.”

“…….”

“너랑 너희 누나가 스폰서니 원조 교제니 하며 더럽혀도 절대 변하지 않을 거고, 또다시 이런 일 벌이면 그때는 두 대로 안 끝나. 내가 감옥 가는 한이 있더라도, 무슨 짓이라도 할 거야.”

단단한 어조와 강렬한 의지가 담긴 말이었으나 영하의 마음 깊이 세운 방파제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느끼는 그의 사랑은 순수하고 장엄했지만, 실은 두 사람의 관계가 돈이 오가는 만남보다도 퀴퀴하며 거무죽죽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정욱을 보낸 뒤, 영하는 김율이 태워 주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남자는 굉장히 말이 많은 편이었다. 운전하는 내내 입이 쉬지를 않았다. 나중에는 길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의 음성과도 대화를 나눴다. “야야, 말 좀 부드럽게 해라.” 하고 기계에 타박한 것이다.

세계도 집에서는 그다지 과묵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이렇게 말 많은 어른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 영하는 잔뜩 낯가리는 내성적인 모습을 감추지 못해 “네, 아… 네….” 하고 어리숙하게 굴었다.

“세계 그놈이랑은 대학 동기인데, 법학과 말이에요. 한동안 연락이 안 되다가 갑자기 연락을 하더니 연애하느라 바빴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2년 안에 사시 패스한 동기 모임이 있어요. 원래는 졸업하자마자 바로 합격이 조건이었는데 최세계 그 자식 빼고 몽땅 다 떨어져서, 어쩌다 보니 2년이 됐어요. 아무튼. 세계 포함하면 다섯 명쯤 되는데, 세계 그놈만 올 초부터 모임에 계속 안 나오길래 무슨 일인가 했지.”

…아빠, 친구들한테 그런 이야기도 하는구나.

“그래서 대체 누구랑 연애한다는 건가 했더니……. 영하 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저랑 함께 최세계 고소 작전, 어떻습니까. 양심이라곤 약에 쓰려도 없는 놈이 어디서 새파란 스무 살이랑…. 그놈이 연예인처럼 생기고 좀 젊어 보인다고 절대 넘어가면 안 돼요. 겉은 휘황찬란해도 속이 시커먼 아저씨라니까요.”

속이 시커먼 아저씨인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으로 시커멓기를 따지자면 영하도 그 못지않았다. 눈썹과 뺨의 근육을 과장되게 움직이며 잇는 김율의 말에 눈만 접어 웃은 영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아저씨가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광대처럼 굴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

“아빠, 지금이라도…….”

“누구 아들인지 몰라도 세기의 미인이 따로 없네. 아빠 쪽 유전자가 좋은 건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남들은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 넌 아니야? 가진 자의 여유인가?”

“제발, 좀…….”

가끔 그는 오묘한 태도를 보였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최영하라는 몸을 구성하고 있는 그의 유전자와 유전 형질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그는 자기애와 자아도취가 뛰어난 사람이었고 아들을 칭찬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추켜세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안 닮았는데….

눈도 코도 입도 다 다르다. 전혀 닮지 않았다.

두 사람이 발이 닿은 곳은 한쪽 벽면이 모두 옷장으로 채워진 피팅 룸이었다. 간접조명 두어 개만 달린 피팅 룸은 어두웠으나 전신을 담아내는 거울 뒤편에서 흰 빛이 뿜어져 나와 전신을 비췄다.

영하는 오전부터 그의 손에 끌려 나와 미용실에 도착해 머리를 하고 곧장 테일러 숍으로 직행했다. 직원이 미리 준비해 둔 세 벌의 정장을 모두 입어 봤는데, 약간의 컬을 넣어 고정한 머리가 망가지지 않게 낑낑거리며 힘들게 갈아입은 보람이 없도록 그는 가장 처음 입은 옷이 제일 예쁘다며 다시 갈아입길 요구했다.

할아버지 생신인데 왜 내가 이렇게 꾸며야 하지.

광택 없이 부드러운 투 버튼 블랙 수트를 입고서 거울 앞에 서자 그가 하얀색 꿀벌 로고가 수놓아진 슬림한 타이를 가져와 등 뒤에 섰다. 일자로 완전히 겹쳐졌으나 영하의 몸으론 그를 가릴 수 없었다. 확연히 차이 나는 몸집에 영하의 눈매가 새초롬해졌다. 할아버지 생신 파티 말고, 이대로 데이트 가고 싶다.

“어느 쪽이 마음에 들어?”

블랙 넥타이를 목에 대어 본 그는 살포시 미간을 찡그렸다. 바로 넥타이와 스카프가 잔뜩 걸린 옷장을 들여다보더니, 폭이 좁은 롱 실크 스카프를 가져와 목 위로 타이처럼 길게 늘어뜨려 대어 본다. “음.” 하고 낮은 탄성을 낸 세계는 두 개의 타이를 들어 영하에게 내밀었다. 고를 것도 없다. 스카프는 별로였다.

“그건 너무 화려한 것 같아…….”

“그럼 이걸로 해야지.”

“뭐야? 그러면 왜 물어봤어.”

“네가 싫어하는 거로 하려고.”

거울 너머로 힘이 들어간 눈을 한 채 노려보는 아들의 시선에 그가 피식 웃었다.

“리본으로 묶어 줄게.”

“됐어. 넥타이처럼 해 줘.”

“리본이 더 예뻐.”

“예쁜 거 말고 멋있는 거 하고 싶어.”

“스무 살밖에 안 된 게 고정관념에 꽉 막혀선.”

스카프를 가로로 대어 본 세계는 리본을 묶는 대신 넥타이 매듭으로 스카프를 마무리 지었다. 부드러운 하늘색 체크무늬와 브랜드 심벌이 그려진 모노그램 패턴이 매듭으로 인해 이리저리 엇갈렸다.

밖으로 나온 스카프를 재킷 안쪽에 넣어 여미자 제법 봐 줄 만했다. 넥타이까지 블랙으로 했다간 파티가 아니라 초상집 패션이 될 수 있으니 이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멀뚱히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던 영하는 은근한 시선을 느끼고 눈길을 들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깨 위를 바깥으로 느리게 쓸어 넘긴 그가 고개를 내렸다. 깨끗한 목덜미에 오뚝한 콧대를 파묻고, 달아오른 따뜻한 숨결이 예민한 살갗 위로 닿았다 흩어진다. 기다란 손가락이 적나라한 의미를 담아 몸을 가볍게 훑었다.

영하는 거울 너머로 굳게 닫힌 문을 보며 불안한 듯 시선을 굴렸지만, 이윽고 그가 자신의 턱을 들게 하여 몸 뒤편에서 입을 맞추기 시작하자 스스로 입술을 열었다.

겁도 없이 굴면 안 되는데……. 마음은 알아도 몸은 자극에 쉽사리 굴복한다. 아무런 의미 없는 호적등본 하나가 둘 사이의 방패막이 되어 줄 것이라고 여기는 어리석은 생각처럼.

여러 번 입술이 겹쳤다가 떨어지고, 흥분으로 달아오른 영하가 가쁜 숨을 내뱉자 천천히 입술이 멀어진다.

무르익은 그의 눈동자가 무섭도록 새카맣다고 느껴졌다.

*

“조촐하게 진행하려 호텔도 빌리지 않고 집에서 열었는데 이리 많은 분이 와 주시고 축하해 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결혼기념일도 곧이니 미우나 고우나 39년 격동의 세월을 함께해 온 내 아내 김수림 여사에게도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나이에 비해 풍채가 큰 노인은 오늘 생신연의 주연이었다. 늙고 기력이 쇠하였지만 큰 키와 굵은 목소리, 주름이 들어도 훤칠한 얼굴은 그의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예상케 했다.

굵은 알이 박힌 반지를 낀 노인의 손길이 한쪽 편으로 향한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화려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목에 건 여인이 웃는 얼굴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박수에 화답하듯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조명 아래 시시각각 빛을 눈부시게 반사했다.

모드 글로벌의 2대 회장 최중엽이 단상을 내려가자 곧바로 무대 아래에 자리 잡은 오케스트라의 잔잔한 연주가 흘러나온다. 동시에 파티 홀 중앙에 길게 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의 조명이 느리게 밝아졌다.

할아버지의 생신연을 위해 한 달을 준비했다던 별채는 조촐하게 열 생각이었다는 발언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꼴이었다. 당장 결혼식을 치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많은 꽃과 촛불 장식, 6년 전부터 영하의 큰고모가 후원하여 설립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단만으로도 이미 입장료를 받아도 될 만한 연주회의 규모였다.

이름 모를 많은 사람과 이 높은 층고를 에워싸는 낯선 기운에 짓눌린 영하는 하고많은 진수성찬 중에서 연두색 마카롱을 하나 들어 반으로 쪼갰다. 안쪽 필링은 더 진한 초록색이다.

녹차 맛일까?

자연스레 곁에 앉은 그에게 쪼갠 절반을 나눠 주려던 영하는 이런 곳에선 음식을 나눠 먹는 짓 따위 하면 안 될 거란 생각에 내밀던 손을 도로 자신의 입으로 가져왔다.

“맛있다.”

“그래도 디저트는 밥 먹고 나서 먹어야지.”

“뭘 먹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너 좋아하는 고기 먹어. 소고기.”

오전부터 내내 굶어 놓곤 잘 먹지도 않던 마카롱을 굳이 먹는 것에 그가 작게 혀를 차곤 자신의 앞에 놓인 접시를 옆으로 옮겼다. 얇게 썬 소고기와 치즈를 두 장씩 겹쳐 담백한 크래커에 올린 로스트비프카나페였다.

“와인은 마시지 마. 취해.”

“나 술 센데.”

“먹지 말라고 했다.”

“응…….”

녹차 맛 마카롱을 입에 넣으면서도 은근히 화이트 와인에 시선을 준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지난 호텔에서 그가 사 주었던 달콤한 모스카토가 제법 입에 맞아서 이번에도 먹어 보고 싶었는데.

자신의 앞접시에 카나페를 올려 주는 세계의 손을 물끄러미 보던 영하는 곧 따끔한 시선을 느끼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 원탁에 앉은 최승준과 작은고모가 이쪽 테이블을 보고 있었다. 큰고모는 의사인 남편과 함께 다른 자리에 앉은 모양이었다.

따지자면 미혼인 세계는 승준이 옆에 앉아야겠지만, 영하와 함께 앉느라 그들과 떨어졌다. 고모에게 눈인사를 건넨 영하는 시선을 슬그머니 테이블로 당겼다. 조명 아래 드러난 흰 얼굴에는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얼굴도 비쳤는데 나는 그냥 들어가면 안 돼?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서 못 살겠어.”

“왜. 설레서?”

“무서워서 그러지…. 대체 여기서 내 포지션이 뭐야?”

“최세계 애인.”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세차게 흔들리는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세계는 바싹하게 구워진 흰 생선 살에 라임즙을 뿌리며 영하의 우물거림에 여상한 태도로 대답했다.

“할아버지 생신 파티잖아. 여기, 여기서 그러면….”

“농담이야. 그냥 외가 쪽 조카로 생각하겠지. 근데 내 애인으로 보이는 건 싫은가 봐?”

둘 다 나직이 대화했지만, 그조차 겁이 났다. 탄식한 영하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만큼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좋아서 그래.”

“그러면 좀 더 사근사근하게 굴어 봐.”

“어떻게?”

“네 단편적인 레퍼토리인 뽀뽀라도 해 보든지.”

“할머니 할아버지 기겁하시겠다.”

“난 그런 거 좋아하니까.”

“좋을 게 따로 있지… 됐어.”

“잠깐 사람 만나고 올 테니까 이거 먹고 있어. 비린내 안 날 거야. 누가 말 걸어도 대답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 돌아왔을 때 자리에 없으면 혼낼 거야.”

라임즙을 뿌린 틸라피아 요리를 넘긴 그가 조용히 의자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깔끔한 턱시도의 옷매무새를 다듬고 영하의 머리를 툭 건드리곤 자신의 목적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혼자 있기 싫은데.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그가 건네준 생선 살을 한입 크기로 잘랐다. 바사삭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입맛을 돋운다. 슬쩍 그의 뒷모습을 보자 홀 외곽에 앉은 중년 부부에게로 다가가는 모양이었다.

언제 돌아올까. 사방에서 따끔한 시선이 콕콕 박히는 기분이라 유쾌하지 못했다.

*

최세계는 아버지의 생신연 파티장에서 지저분한 흥분으로 점철된 두 명의 인간을 목도했다.

불편한 파티 복장을 제대로 벗지도 않은 채로 자제력을 잃은 두 사람이 달뜬 음성과 헉헉대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몸뚱이를 겹치고 있었다.

아버지의 친우들과 만나 안부를 나눈 뒤, 주말 아침부터 움직였더니 피곤해하는 영하를 잠깐 재울 방을 찾던 도중이었다.

철퍽거리며 살 부딪치는 소리가 구둣발을 붙잡았다. 조명이 꺼진 2층 복도를 걷던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등을 돌렸다.

“흐으읏.”

닫힌 문틈으로 빠져나온 신음이 들리자 무표정한 얼굴에 곧 은밀한 미소가 번져 간다. 최세계는 전혀 방해할 의도 없이 실수로 문을 열었다는 듯 신음이 흐른 방의 문을 벌컥 열고는 실소했다. “죄송합니다.” 선명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사과와는 어울리지 않는 신랄한 표정으로 곧장 문을 닫았다.

손님용으로 비어 있는 방 안쪽에는 우아한 앤티크 소파 위에 가로로 겹쳐 개처럼 엎드려 섹스하는 두 명의 남녀가 존재했다. 우습게도 두 사람은 아이까지 딸린 기혼자였으나, 서로의 배우자가 아니었다.

이윽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 벌컥 문이 열리며 흐트러진 머리를 다듬은 여자가 세계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빠져나갔다. 여자가 완전히 2층 복도에서 사라지자 다시금 문이 열리고 안경을 고쳐 쓴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는 문 맞은편 복도에 등을 대고 기대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뜻밖의 부적절한 불륜을 목격한 세계는 계획에 없던 ‘약점’을 잡아 잔뜩 상기되어 즐거운 기분이었다. 잘생긴 얼굴에 기쁨이 담뿍했다. 미소가 그려진 세계의 눈자위를 확인한 남자는 말을 더듬으며 “최, 최 상무….” 하고 간절하게 그를 불렀다. 남자는 아버지의 대학 후배이자 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사학재단의 이사장이었다.

“제가 괜한 소리 할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사장님.”

“그, 자네도 기부 활동을 조금 늘려야지. 곧 회장으로 취임하려면… 우리 재단에 가입하는 게 어떻겠나. 성화재단이라고. 나를 비롯해 용운재단 이사장님도 계시고, 정재계 거물들이라면 다들 거쳐 가는 곳이네.”

남자는 말을 돌리며 다른 이야기를 했다. 성화기부재단. 가늘게 접어 웃은 세계의 눈동자 너머로 날카로운 이채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서민석의 아버지 서승섭이 이사회 고문으로 존재하는 재단이었다. 이 인간도 연루되어 있었지.

“고려해 보겠습니다.”

“아주 흥미로울걸세. 자네도…. 아주 좋아할 거야.”

마누라가 어지간히 무서운가 보군. 하긴, 이사장은 애처가로 소문난 데릴사위였다. 사학재단이니 뭐니, 사실상 아내의 것이나 다름없고 그는 가부장제의 가호 아래 이름만 겨우 올린 바지 사장에 불과했다.

고개를 끄덕인 세계는 수트 재킷을 고쳐 입는 그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 앞, 월넛 목재를 통으로 잘라 거친 형태가 남아 있는 우드 슬랩 커피 테이블 위에는 뜯지 않은 콘돔 몇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을 그대로 움켜쥔 세계가 콘돔의 주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증거 인멸을 해야 하니 이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 그래, 그래요….”

건수를 잡아 기분 좋게 돌아선 그가 향한 곳은 자신이 앉아 있으라는 곳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말 잘 듣는 아들의 곁이었다.

백포도주 대신 스파클링 무알코올 위스키를 불만 가득히 내려놓은 영하는 습관처럼 목과 어깨를 곧게 폈다.

평소 입지 않는 드레스셔츠가 불편하고 목이 조여 그가 매어 준 스카프 타이를 풀어내고 싶은 듯 셔츠의 칼라 주변을 만지작대지만, 이윽고 내려 허벅지 위에 가만히 둔다. 조명에 비쳐 도드라진 아치 형태의 긴 속눈썹이 커다란 두 눈을 가리고 아래로 나부꼈다.

테일러 숍 직원의 추천으로 잘 뿌리지 않던 향수를 뿌린 영하는 그야말로, 꽃향기 속 아찔하게 무르익은 청초한 미인의 형태였다. 샹들리에의 하얀 불빛은 최영하 주변에서만 은은하게 빛나는 듯했고 매끄러운 흰 피부와 유달리 큰 눈의 눈초리가 아래로 조금 처져 화려하지만 온순한 기운을 풍겼다.

자신이 고른 의상에 헤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만 앙칼지게 구는 성격까지. 그야말로 최세계의 취향을 본으로 떠 그려 놓은 모습이었다.

영하의 주변에는 말을 걸 기회를 얻기 위해 타이밍을 재는 인간 두엇이 존재했다.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도 주기적으로 고개를 돌려 얼굴을 훔쳐보는 모양새가 그야말로 꼴사납다. 세계는 팔뚝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곤 영하에게로 다가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라는 타이틀로 파티의 또 다른 주연이 된 영하는 졸린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채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지루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짙은 미소를 감추지 않은 세계가 옆자리에 다가와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말간 얼굴이 고개를 들어 본다. 하얀 공막 위로 샹들리에 속 수백 개의 겹쳐진 조명이 둥글게 담겨 있었다.

“말 잘 듣고 있었네.”

‘아무와도 대화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영하는 그의 명령을 충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명백한 통제가 담긴 자신의 말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순종적인 모습을 보자 욕망을 빠듯하게 채우는, 소유욕이 가속도를 붙여 팽창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제하려는 이성과 달리 매일같이 크기를 키웠다. 최세계답지 않았다. 삐딱한 곳으로 향하고 있어도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었다. 어제와 그제와 똑같으면 뭐 하러 할까.

“왜 이제 왔, 왔어요….”

“가자. 갈 데가 있어.”

주변을 의식한 듯, 영하는 꾸며 낸 존댓말을 하며 그를 채근했다.

그대로 손목을 잡아 건물을 잇는 복도로 향했다. 스쳐 가는 이들의 시선이 세계의 손에 닿아 있었다. 아마 그들의 머릿속에서 영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에서 최세계의 어린 애인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영하와 세계의 뒤를 좇는 시선은 그들뿐만 아니었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던 최승준의 시선도 두 사람의 흔적을 따랐다.

드문드문 그곳에 존재해야 했을 가구들의 빈자리가 역력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과거 세계가 지내던 방이었다.

대부분의 가구를 옮겨 현재는 창가 아래 등받이 없이 벽에 바짝 붙은 길쭉한 소파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안쪽으로 깊게 넣어 선반 역할을 하는 창문에는 오래 비운 방이니 먼지라도 쌓여 있을 법했지만, 매일같이 닦아 내는지 깨끗하다.

영하는 창가에 다가가 소파의 팔걸이 위에 엉덩이를 올리고 돌아보고는 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며 다가오는 세계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만들어 냈다.

“왜 문 잠갔어?”

“아무도 몰랐으면 해서.”

그 대답에 시커먼 속내가 훤히 드러난다. 역시… 야한 짓 하려고 데려온 거구나. 왜 이렇게 밖에서 하는 걸 좋아할까. 변태.

무릎이 소파 앞에 부딪혀 더는 가까이 오지 못하자, 세계는 허리를 굽혔다. 입 맞출 듯 코끝이 맞닿도록 가까이 고개를 내민 그는 정작 키스하지 않고 도로 허리를 꼿꼿하게 편다.

그가 입은 짙은 네이비 컬러의 수트는 재킷의 둥근 라펠에 은은하게 광택이 흐르는 턱시도였다. 이미 충분히 깔끔한 상태지만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의 셔츠 깃을 정리해 주는 사이, 그가 영하의 양쪽 귀를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오늘은 왜 질투 안 하지? 파티장에 여자들 많았는데.”

턱시도에 어울리는 기품 있는 음성으로 ‘질투’와 ‘여자’ 이야기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그 행동에 영하는 이마를 좁히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었다.

“뭐어? 내가 질투할 만한 짓 했어?”

“혹시 모르잖아. 아빠가 비즈니스 하러 가는 척 여, 크으윽…!”

당장 넥타이를 화악―! 거칠게 잡아당기자 그가 신음하며 굳은 상체가 저절로 딸려 온다. 휙, 하고 내려온 얼굴을 올려다보는 영하의 얼굴은 짐짓 엄했다. 연달아 “윽….” 하고 신음한 세계가 졸린 목의 칼라를 붙잡으며 항변했다.

“잠깐, 나는… SM 플레이에는 관심 없어.”

영양가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헛소리였다. 진정하라는 듯이 영하의 어깨를 매만지고 목을 조를 뻔한 자신의 넥타이를 뒤늦게 인도받았다. 그제야 졸린 목에 가해진 힘이 풀려 평소의 목소리가 나온다. SM은 싫다더니, 꽤 짜릿했던 모양인지 잘난 얼굴에 흰빛이 돌았다.

“농담이야.”

“간 떨어질 뻔했어.”

“아빤 목이 떨어질 뻔했어.”

“…많이 아팠어?”

“그래. 반성해.”

영하는 본인이 저질러 놓고 그의 엄살이 걱정되어 단정하게 갈무리된 칼라 속으로 굳이 손을 넣어 목을 매만졌다. 잠깐 넥타이에 졸린 정도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가까이 붙어 목덜미의 표면을 뚫어지라 보던 영하와 세계의 시선이 부딪쳤다.

“…….”

고요한 적막. 그 속에 흐르는 그의 그늘진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발가벗기는 듯한 음험한 기운을 읽어 낸 영하가 머쓱한 얼굴로 손을 빼내는 순간, 손목이 붙잡혔다.

“흐읏….”

화려한 스카프가 떨어지고 이어 다급한 손길이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조금 성급한 몸놀림으로 밝은 밀빛의 피부 위를 문지른다. 납작한 배 중앙을 가로지르는 희미한 세로선이 짙어지는 동시에 그가 배꼽 주변의 말랑한 살결을 간지럽혔다.

간질간질한 감각은 아랫배에서 가슴으로, 목덜미로 튀어 올랐다. 눈가가 쉽게 젖어 들어갔고, 영하의 아래는 매번 눈물을 흘리는 두 눈만큼 쉬운 편이었다.

“흑, 안 돼… 아빠! 여기 본가잖아.”

“어차피 지금은 본채에 사람 없어.”

“그래도, 흣….”

“여기에 침대가 있던 시절을 떠올려 봐.”

반지를 낀 커다란 손이 손바닥 전체로 압박하듯 가슴을 내리눌렀다. 뜨끈한 체온이 닿자 호흡이 가빠지고 함께 지르르한 감각이 뾰족하게 솟아난 유두에 느껴져 가슴이 불편했다. 남은 한 줌의 자제력을 잃고 그에게 매달려 가슴을 더 아프게 만져 달라 애원하게 될 것 같아, 영하는 억지로 입술을 깨물었다.

눈시울이 붉게 물들고 바짝 타는 듯한 자극에 뇌가 절여졌다. 부끄럽게도 가슴을 조금 만진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느꼈다.

“네가 내 방에서 잠들어 있는 걸 볼 때마다. 내가 무슨 상상 했을 것 같아?”

“흑……. 몰라.”

“모르는 척하지 마. 너무 빼도 매력 없어.”

손이 왼쪽으로 넘어간다. 해소되지 못한 쾌락에 신음 소리가 짙어졌다. 허리를 굽힌 세계가 벌어진 입술을 한 번 핥고는 턱 아래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서로 섞여 혼탁하게 방 안을 데웠다. 창문 너머로 드는 강한 햇살이 내리쬔 그의 눈동자는 투명한 갈색으로 변모한다. 그 아래에서도 눈을 찡그리지 않고 똑바로 뜬 세계가 격양된 숨결을 애써 다스리며 영하의 가슴 중앙을 손등으로 내리그었다. 반지의 찌릿한 차가운 감촉이 그대로 살결에 느껴져 어깨가 둥글게 움츠러든다. 함께 나눠 낀 커플링이었다.

“으응, 둘 다 만져 줘…….”

“대답해 봐. 아빠가 무슨 생각 했을지. 그러면 만져 줄게.”

“야, 야한 상상…….”

“어린애도 아니고.”

세계가 혀를 차며 나직하게 타박한다. 자꾸 빼는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난 듯 찌푸린 얼굴로 곧장 영하의 바지를 벗겨 냈다.

버둥대는 몸을 안아 든 그가 한쪽 허벅지를 소파 팔걸이에 단단히 받치고 그 위로 영하의 몸을 올렸다. 탄탄하게 올라붙은 근육과 무릎뼈가 얇은 속옷 한 장 사이로 느껴졌다. 최영하가 기겁했다. 섹스하려는 의도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안 돼! 하지 마. 옷 젖어…!”

현실적인 이유로 고개를 내젓는다. 집도 아니고 밖에서, 게다가 턱시도를 입고서 이러면 안 된다.

그러나 늘 그렇듯 단호하게 무시한 남자가 영하의 몸을 잡아 아래로 내리눌렀다. 도드라진 무릎뼈 위로 압박된 엉덩이의 근육이 움찔 조여들었다.

울음 같은 신음을 뒤로하고 영하의 앞섶이 볼록하게 부풀어 오른다. 질끈 감았다 뜬 눈에 아득한 열락이 선명했다.

뒤를 쑤셔 주는 게 아니라 단지 압박하는 것에 불과한 행위에도 쾌락을 느낀다는 사실이 거북했다. 이렇게 이상한 몸이 아닌데, 아빠가, 자꾸… 이상한 짓만 골라서 하니까…….

원망스러워 가슴을 밀쳐 내는 몸짓에도 꿈쩍도 안 한 최세계는 헐떡이는 영하의 뺨을 붙잡고 귓가에 축축하게 속삭였다. 귓바퀴에 닿는 입김이 간지러워 허리를 떨었다. 뒤가 젖어 들고 있었다.

“뒤가 젖는지도 모르고 남자 침대 위에 올라 잠든 우리 영하 엉덩이에, 박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해 봤어?”

세계는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무릎 위에 앉힌 몸을 힘 있게 아래로 내리눌렀다. 튀어나온 무릎뼈가 갈라진 둔부 사이를 정확하게 내리눌렀다.

“안, 안 해 봤……. 아아… 응, 거기는, 응!”

과거를 떠올리고 흥분한 최세계는 더는 장난칠 이성이 남아 있질 않았다. 와자작 구긴 얼굴로 영하의 몸을 창틀 위에 올려 앉혔다. 놀라 등을 돌린 영하가 창밖을 보곤 전신이 휘청일 만큼 크게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또 창문에 대고 하려고?!”

“안 해. 엉덩이 들어.”

만류에도 불구하고 턱시도 차림으로 아들의 앞에 무릎을 꿇은 그는 회색 드로어즈를 내리곤 발기한 성기를 꺼내 입에 담았다. 창가를 쥔 손등의 뼈마디가 도드라지더니, 흐르는 신음을 막기 위해 입술 위를 틀어막는 용도로 바뀌었다.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순진한 성기가 입 속에서 크기를 키운다. 영하의 시선은 세계의 정수리에서 굳게 잠가 둔 나무 문을 향했다. 누군가 들어올지도 모른다. 긴장으로 발가락이 곱아들고 숨이 가빠졌다. 발기한 기둥 전체를 입 안에 담아 힘 있게 빨아 당긴다.

세계의 손길은 가느다란 발목에서부터 살갗을 어루만지며 위쪽으로 이동했다. 뒤쪽 오금을 간지럽히면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헐떡임이 새어 나왔고, 보지 않아도 분명 뒷구멍이 벌름대며 개폐를 반복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오래가지 않아 영하가 사정하고, 정액을 그대로 삼킨 세계의 입 속에서 성기가 조금 빠져나옴과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엉덩이 뒤쪽을 향했다. 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역력한 구멍은 쉽게 벌어지며 익숙한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따뜻한 내부가 미끈하게 감싸는 감촉을 느끼며 일어선 그가 영하의 손을 자신의 사타구니 앞으로 끌어왔다.

“빠, 빨아……?”

옷을 벗기라는 의미였는데 영하는 다른 것으로 알아들었다. 좀 전까지 그가 자신의 성기를 빨아 주었으니 이번에는 차례가 돌아왔다고 느낀 것이다.

최영하가 개처럼 엎드려 사탕 빨듯 자신의 성기를 빨고, 좁다란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 울리는 상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나 굳이 억지로 오럴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고개를 내저은 그가 손을 당겨 버클 위에 올려 주니 그제야 영하가 이해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내린 팬츠 속에서 조심스레 발기한 성기를 바깥으로 꺼내 들었다.

자신의 성기를 보자마자 손가락을 문 영하의 구멍이 움찔 조여들었다. 최영하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반응이었기에, 놀릴까 고민하던 그는 말하지 않고 몸을 잡아 돌렸다.

“뒤로 하자.”

“응…….”

영하의 뒷구멍은 타고나길 성기였다. 본래의 역할을 넘어 칠칠치 못하게 물을 흘려 대는 탓에 구두와 양말은 온전히 신었으나 하반신은 완전한 나체였다. 남들처럼 바지만 내려 박다간 옷이 흠뻑 젖어 입을 수 없게 되어 버리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손가락 사이에 톡 걸리는 유두를 내리누르며 한 손으로는 바지 주머니에서 콘돔 하나를 꺼내 들었다. 불륜하다 적발된 이사장에게서 뺏어 온 것이었다.

이로 물어 포장을 뜯어 버리고, 말없이 콘돔을 성기에 끼웠다. 잠시 기다리던 영하가 그새를 못 참고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뜨며 “안 넣을 거야…?” 하고 그를 재촉했다.

사이즈가 작아 빡빡한 콘돔을 억지로 당겨 낀 세계가 환하게 웃으며 내민 엉덩이를 큰 손으로 우악스럽게 주물렀다. 말랑한 살결에 꽃잎이 물들듯 붉은 자국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순간, 그가 귀두를 구멍 속으로 느리게 밀어 넣었다.

극도로 얇은 콘돔 막을 넘어 내부의 오돌토돌한 생김새가 여실히 느껴질 만큼 느긋하고 밀착된 행위였다. 주름진 구멍이 넓게 벌어지며 각이 진 눈썹이 찡그려지는 동시에 창가를 붙든 손이 파드득 떨리기 시작했다.

움푹 파인 등허리의 척추뼈 위로 땀방울이 흘러 맺힌다. 최세계는 그것을 핥고 싶어 목울대를 넘겼다. 호텔에서의 그날처럼 겁에 질려 잔뜩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괴롭히고 미동조차 못 할 만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눈앞이 흐려졌다.

“흐윽…….”

겨우 귀두만 밀어 넣었음에도 항문 섹스에 익숙해진 영하가 엉덩이를 뒤로 빼며 흐느꼈다.

“아, 응…….”

구겨져 올라간 셔츠 아래 사내새끼치고 낯간지럽게 가는 허리가 흠칫- 떨린다. 힘을 빼라는 듯 엉덩이 옆쪽을 살살 내려치자 꽉 다물린 구멍의 힘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창틀을 붙잡은 손은 겨우 손가락 두 마디만 힘들게 걸쳐져 있었다. 몸을 아래로 내려 숙이고 있던 고개가 들리더니, 힘들게 꺾여 그를 바라본다. 아름다운 얼굴에 불그스름한 홍조가 들고 촉촉이 젖은 입술이 벌어져 혀가 뻐끔 드러났다.

“아빠, 조금 더 빨리…….”

온 우주의 삼라만상 속에서도 가장 예쁘고 고귀한 것만을 조각내 모아 온 존재처럼 아름답다.

영하에게 눈을 두자면, 그는 늘 사춘기 소년처럼 자제력을 잃었다. 스무 살이 되도록 참아 온 나날이 아득할 만큼 그칠 줄도 모르고 타올랐다. 그릇된 욕망과 하나로 단일화하기 힘든 애정의 감정들이.

“흐윽, 앗, 아…….”

마침내 두꺼운 성기가 완전히 안을 파고들어 사타구니와 엉덩이가 퍽- 부딪치자 우아한 턱시도 아래 부푼 흉곽이 성난 몸짓으로 오르내렸다. 충분히 풀어 주지 못했으니 대신 삽입이 무척 길었다.

영하는 콘돔을 낀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끝까지 박아 넣어 조금 흔들기 시작하자 “안에, 싸지는 마…….” 하고 가엾게 울었다.

순간 세계의 머릿속에 짓궂은 아이디어가 머리를 강하게 때리고 사라졌다.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강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푼 성기가 내벽을 긁으며 끊임없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감각에 가느다란 두 다리가 팔랑팔랑 무력하게 흔들렸다.

“으응, 너무, 세, 천천히… 아으응…!.”

입술을 막으려 붙잡은 창틀에서 잠깐 왼손을 떼자마자 절반 이상 빼낸 성기가 안쪽으로 쿵- 쳐올려진다. 무너지는 몸에 황급히 다시금 창틀을 붙잡는다.

“흐아악…! 아흐, 찢어, 지, 는…!”

울음 사이로 목소리가 먹혀 들었다..

헐떡이며 입술을 말아 물던 영하는 마구잡이로 치받던 그가 엄지로 팽팽한 구멍을 가로로 더욱 벌어지게 하는 행위에 허리를 뒤틀고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흡……!”

콰앙- 하고 온몸을 세게 부딪치며 안으로 박아 대는 순간, 버티지 못한 몸이 벽에 달라붙었다.

영하의 흐릿한 시야에서도 보이는 것이 있었다. 깨끗한 유리창 아래, 별채와 근방의 정원을 오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푸르게 돋아난 녹음의 잔디를 배경으로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옷차림은 눈동자가 눈물로 젖어 들자, 동그란 빛 망울로 변해 마치 들판에 자란 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이다.

“흐으윽, 흣…! 아흑, 응…!”

“아빠 자지 물고 소리 내면, 저 사람들이 볼지도, 하아… 몰라.”

“흐… 그런, 흐읏, 저질스러운 말… 하지… 마….”

부정적 의사를 밝히면서 허리를 흔들었다. 몸 전체를 에워싸는 듯한 쾌락이 지칠 줄 모르고 타올랐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사람 중에서는 익숙한 사람도 있었다. 영하가 이곳에 온 첫날부터 잘 대해 주던 아주머니였다.

자신과 아빠의 관계를 아는 누군가가 이 섹스를 볼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불씨를 지펴 혼탁한 정신과 몸뚱이를 잡아먹는다.

분명히 두려움이었으나 수치도 없는 짐승처럼 번진 흥분감이 전신을 가로질렀다.

“으으응……!”

영하는 조금 전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으로 팔을 뒤로 뻗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더, 더어….”

아들이 원하는 대로 작은 몸을 으스러지도록 끌어안는다. 투명한 물줄기의 흔적이 남은 하얀 허벅지 위로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몸뚱이가 부딪쳐 퍽- 퍽-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최세계는 별채 2층에서 발견한, 불륜을 저지르는 개미 한 쌍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본인도 별다를 바 없는 짐승 새끼였다.

움직임에 방해가 되는 턱시도 재킷을 벗어 근처 의자에 던져 버린 후, 날씬한 배 위로 부딪치는 성기와 유두를 동시에 희롱했다.

손안에 발기한 귀여운 것을 굴리며 마찬가지로 꼿꼿하게 선 유두를 짓누르면 영하의 허리가 바들바들 떨리며 엉덩이 양쪽이 오목하게 들어갈 만큼 구멍이 조여진다. 그럴 때면 세계는 쾌감보다는 지나친 압박감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으나, 입술을 다물며 참아 냈다.

“흐으으윽, 흐, 으흐흑…….”

울음인지 신음인지 애매모호한 신음이 바닥으로 흩어지는 것과 함께 영하가 그의 손안에서 파정했다. 저도 남자라고 정액을 쏟아 내며 추삽질을 하듯 미묘하게 허리를 앞뒤로 흔드는 것을 보며 그가 웃었다.

귀엽네. 구멍에 손가락만 넣어도 좋아서 물을 흘리는 주제에.

“으응, 아빠 안에, 응…! 안 돼요. 아으, 안에 싸면… 밖인데…….”

영하는 사정하는 동안 박아 대면 울면서 자지러지는 편이었다.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고 소리 내어 울며 빌기도 했다. 집이라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아무래도 밖이니 어느 정도 조절할 필요가 있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영하가 아래를 느리게 조였다 풀며 설득을 위해 나긋한 음성으로 그에게 애원했다. 그는 아들의 요구를 정확히 절반만 들어줄 요량이었다. 콘돔을 끼고 있었으나 평소처럼 안전장치 없이 안에 박아 사정하는 흉내를 낼 생각이었으니까.

“제발… 아, 아아! 응, 으흐, 응, 앗, 안 돼…!”

엄지로 연한 빛깔의 귀두를 바짝 훑었다. 희뿌연 정액이 손등 아래로 느리게 떨어진다. 끝까지 사정한 것을 확인한 후, 곧바로 허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영하의 신음성이 커지는 것과 동시에 안을 파고드는 움직임이 짧아지고 빨라지자 세계의 사정을 예감한 영하가 크게 도리질 쳤다. 긴장으로 노곤해진 구멍이 조여들었고 그를 막기 위해 손을 뒤로 뻗어 배 위를 가로막았다. 그 손길이 흥분을 돋웠다.

반쯤 엎드린 몸을 완전히 안아 들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영하의 등이 그의 가슴에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했고 물에 젖은 사타구니가 동그란 엉덩이에 거칠게 비벼졌다. 살갗끼리 부딪쳐 철퍽철퍽 소리가 정제되지 않은 숨소리와 뒤섞여 안을 채웠다.

흰 가슴에 멍이 들 정도로 아프게 마른 살을 움켜쥐는 손끝이 유두를 짓누르고 꼬집는 순간, 잔뜩 끌어안긴 영하가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을 파드득 잘게 떨어 댔다. 안 돼, 아빠, 아빠…!

“큿, 으윽…!”

“아흥, 잉, 안, 안 된다니… 아아…!”

세차게 조여드는 안쪽을 거칠게 파고들어 결국 끝까지 찧어 박은 그가 내벽에 성기를 파묻은 채로 사정했다.

영하는 자신의 몸에 완전히 붙은 하체의 떨림으로 세계의 사정을 느끼고는 원망스레 돌아본다. 반질거리는 눈동자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신음을 참겠다고 한참을 깨물어 댄 입술마저 퉁퉁 부어 있었다.

사정을 마친 그가 엄지로 부은 아랫입술을 만져 주자, 다문 턱이 아이처럼 바르르 떨린다.

어차피 결국 못 참고 내지를 거면 처음부터 입술을 내버려 두지. 나른하게 미소 지은 세계가 영하를 안아 소파에 올려 두며 영하의 뒤쪽에 존재하지 않는 정액을 언급했다.

“흐르지 않게 잘 조이고 있어.”

“싫어, 빼 줘… 흐를 것 같단 말이야.”

“삼십 분 뒤에 빼 줄게.”

창밖을 보며 이마를 짚는 등 뒤에서 몰래 콘돔을 갈무리한 그가 산뜻하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의 생신연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안에 사정할 만큼 나쁜 놈은 아니었다.

곤란해하는 얼굴이 보고 싶어 안에 쌌다고 속이는 못된 애인이긴 해도.

“피곤할 테니까 눈 붙이고 있어. 할머니가 부르셔서 다녀올게.”

젖은 다리를 닦아 내려니 손수건으로도 부족해 재킷 가슴팍에 꽂아 둔 행거치프로 발목을 닦은 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그가 이야기했다.

“문 잠그고 나갈게. 푹 쉬어.”

“빨리 와.”

“알았어.”

시선은 휴대폰 화면에 붙박여 있었다. 바지도 마저 입혀 준 후, 기운 없는 뺨에 짧게 입술만 대곤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난 후 영하는 온통 뒤에 차 있을 정액 걱정을 했다. 몰래 빼낼까 하다가 욕실은 방 안에 없고 밖에 있으니 결국 나가야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정액을 빼낸다고 하더라도 돌아온 그가 화를 낼 수도 있으니 결국 선택지는 얌전히 누워 있는 것이었다.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텅 빈 방을 멀거니 보고 있자니 졸음이 느릿하게 몰려온다. 아빠가 올 때까지만 눈 붙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겨우 잠이 든 찰나 일어난 소음에 눈이 번쩍 떠졌다.

덜컹-

잠긴 문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빠인가?

열어 줘야 하나 싶어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킨다. 긴장한 몸뚱이로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자 두어 번 움직이던 문이 얌전해졌다.

뭐지…….

방을 치우려는 아주머니일까. 혹시 몰라 환기하려 허리를 조금 들어 창문에 손을 뻗어 여는 순간이었다.

덜컹-

다시 문고리를 잡고 앞뒤로 흔드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문이 열렸다. 창문을 여는 손길에 힘이 빠지는 동시에 그 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상기된 표정의 최승준이었다.

“…….”

승준은 손에 마스터키 뭉치를 들고서 안을 훑어본다. 소파에 어정쩡한 자세로 앉은 영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눈가를 찡그렸다. 할 일을 마친 열쇠 뭉치를 복도 옆 장식장 위로 던진 승준이 뒤로 물러나며 뱉은 말에 영하의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나와. 그 추잡한 방에 발도 들이기 싫으니까.”

*

생신연이 끝난 후 곧바로 집으로 가길 원했던 영하의 바람이 무너졌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룻밤 묵기를 강요하여 어쩔 수 없었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서글픈 얼굴로 따로 배정받은 제 몫의 손님방 침대에 오도카니 앉은 영하를 곁으로 데려온 것은 잠들기 직전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오늘은 따로 자자며 싫다는 녀석을 겨우 어르고 달래 제일 큰 손님방 침대에 눕혀 이불을 덮어 주자 투정 부린 것이 언제냐는 듯 순식간에 잠들었다.

숨소리만 색색 내며 얌전히 잠든 모습을 돌아보곤 한 시간째 몸을 뒤척이던 그가 끝내 침대에서 일어난다.

깊게 잠든 영하와 달리 세계는 잠자리에 예민해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뻐근한 몸을 길게 뻗어 스트레칭하며 키가 높은 원형 탁자 위에서 태블릿 피시를 꺼내 들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히 계단 아래로 내려가 응접실로 향하려던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턱 아래 기장의 단발머리 여자가 거실 중앙에 자리 잡은 소파에 앉아 불도 켜지 않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레드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세계의 동생 최지아였다. 그러나 그녀가 야밤중에 와인을 마시든 소주를 들통으로 마시든 관심을 줄 남자가 아니기에 그는 계획대로 플랫폼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세계가 완전히 거실을 벗어나기 전, 유리잔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최지아가 알코올에 잠긴 목소리를 그에게로 던졌다.

“미친놈.”

그에 천천히 돌아본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세계가 태블릿 피시를 고쳐 쥐며 거실 소파로 다가갔다. 지아가 어쩐 일로 내 생각을 해 주네. 오빠가 지루해하는 걸 알고 이벤트를 해 주려고.

다가가 확인한 최지아는 목까지 붉게 물들인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이래서 술주정뱅이와는 대화도 안 하는데. 어차피 지금은 무료하니 적극적으로 거들어 줄 용의가 생겼다.

맞은편 소파에 태블릿을 던지며 팔짱을 끼자, 최지아의 몽롱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초점을 잡으며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최지아는 아버지를 빼닮았다. 세로로 크게 트인 눈과 곧은 뼈대, 주제도 모르고 일을 키우는 점마저 비슷했다. 다만 아버지는 세월이 준 지혜와 타고난 눈치로 물러날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한 걸음 다가가온 세계를 본 최지아는 내려놓은 빈 와인 잔에 남은 것을 콸콸 쏟아부었다. 정량을 넘겨 끝이 찰랑찰랑할 만큼 부은 그녀는 술 없이는 견딜 수 없겠다는 듯 그것을 조금 넘기고서 결연한 얼굴을 만들어 냈다.

시계 초침 소리 하나 없이 공허한 거실 안에 파르르 떨리는 여자의 목소리만 남았다.

“어쩐지 분가하고 영하 얼굴이 좋더라니……. 네가 사람 새끼야? 어떻게 지 아들한테…….”

“하―.”

그것은 한숨과도 같은 웃음소리였다. 숨소리를 섞어 웃음을 뱉은 그가 습관처럼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곤 왼쪽 눈썹 근육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즐거운 기색으로 화답했다.

“어차피 이 집안에 그거 모르는 인간 없을 텐데.”

“네가 이 집에서 무소불위의 왕 노릇 할 수 있었던 건 단지 네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이야. 이 집에선 벼슬이라 가능했을 뿐이라고.”

“꼭 네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회사를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너 같은 미친놈이, 집안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 그냥 대놓고 해 버려. 아주 상속도 후계도 승준이가 아니라 네 아들인지 애인인지한테 줘 버리지 그래!”

덜컹―, 분을 못 이겨 난폭한 몸짓으로 일어나 부딪친 커피 테이블이 진동해 유리잔 속 검붉은 표면에 요란한 파동이 일었다. 명백히 모욕의 의도를 담은 여동생의 고함에도 세계는 일말의 동요 없이 순수하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 파악은 제로지만 어찌 보면 네가 나보다 한 수 위야. 그래도 회사는 승준이한테 줄 생각이었는데, 고려해 보도록 하지.”

“어떻게 너 같은 놈이…….”

어떻게…….

최지아는 아직도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살기를 담아 노려보는 시선에는 그에게 저항하는 패기보다는 두려움. 그리고 깊게 내재한 거북감이 훨씬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고작 이런 것에 동요해 감정적으로 굴면서 회사를 이어받겠다는 주제넘은 야망이 하찮을 뿐이었다.

“신혼집처럼 꾸며 놨다고 했는데 내가 실수했어. 역겹게 지 아들이랑 벌인 진짜 신혼집이었는데.”

높낮이가 다른 두 개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안달이 난 것은 최지아뿐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지아의 말에, 내내 평정을 지키던 그의 미소에도 실금이 그어졌다. 단단한 턱에 힘이 들어가며 숨을 깊게 들이마신 가슴이 천천히 부풀었다.

“그 어린 녀석이 눈치 보고 사는 걸 걱정해 줬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 이 집 호적에 못 들어왔다고 유산 받으려 너한테 꼬리라도 친 거야? 와이프라도 되는 것처럼… 추잡한 새끼들… 아악!”

갈라지고 둔탁한 음성이 채 마무리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뻗어 나온 손이 최지아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낀다. 뾰족한 손톱이 그의 뺨을 긁으려 들었지만 실패했다. 이미 만취해 허공을 뻗는 손길에도 술 내음이 날 것 같은 목적 잃은 움직임이었다.

“술 취했으면, 얌전히, 주무셔야지.”

세계가 주정뱅이를 끌고 간 곳은 1층 주방 옆에 자리 잡은 작은 방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는 이 방에도 주인이 있었으나 지금은 거주하는 사용인들도 모두 별채에 있는 2층을 사용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비어 있는 곳이었다.

낡은 이불 두 채만 덩그러니 놓인 방으로 최지아를 밀쳐 넣은 후 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천장이 낮은 방이라 정수리 끝이 문과 거의 닿아 있었다. 이불 위로 엉덩방아를 찧은 최지아가 확연히 힘이 빠진 눈꺼풀을 내리 감았다 뜬다.

“역겨워. 집안의 수치가 무슨 후계자를…….”

최지아는 3년 전부터 회사 간부로 투입됐다. 비교될 것을 저어하여 일부러 언니이자 부사장인 최승주가 있는 패션이 아닌 호텔 쪽으로 보냈건만, 대규모 투자를 시작한 신규 사업이라 발전의 여지가 많은 파트임에도 불구하고 2년 사이 평가가 최악이었다.

세계가 승계권을 포기해도 최지아에게 순서가 돌아갈 일은 없다. 최세계 다음은 최승주였다.

“나한테 덤빌 거면. 알코올에 의지해 난동 부릴 게 아니라 확실한 네 무기를 들고 덤벼. 네깟 혀 가지고는 생채기 하나 안 나니까.”

문틀 너머로 고개를 내민 세계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목소리를 낮춰 연달아 이야기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호칭 똑바로 해. 너도 와이프라고 인정했으니 음― 새언니라고 부르면 되겠네.”

최지아는 이불 더미 위로 상체를 누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고개가 바닥으로 향해 푹 숙어져 있었다. 허탈하게 웃은 그녀가 느릿하게 목을 든다. 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려 올라간 붉은 입꼬리 한쪽만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이제 하다 하다… 나까지 정신 나간 짓거리에 동참시키려고? 내가 반드시 너희 둘 다 …정신병원에 처넣어 버릴 거야.”

“이왕이면 같은 곳에 보내 주면 좋겠네. 떨어지기 싫거든. 그리고 새언니 앞에서는 입조심해. 워낙 마음 약한 사람이라.”

동생이 살벌한 모습으로 이를 갈아도 ‘새언니’ 이야기를 하며 최세계는 마음이 즐거워졌다.

와이프라니. 듣기 좋네. 비록 영하에게 말을 꺼냈다간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겠으나 오히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쿡 찌르기만 해도 안달 난 퍼포먼스를 보여 주니 놀리는 재미가 남다른 상대였다.

낯 뜨거운 기쁨과 즐거움을 감추지 않은 그가 문을 부드럽게 닫고는 앤티크 선반을 드르륵 당겨 문 앞에 세웠다.

최지아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듯 나올 기미가 없었다. 아마 잠들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창고에서 연장을 가져와 문고리를 박살 냈다. 쇳덩이를 쾅! 쾅! 연달아 내려치는 소리에도 아무도 일어나질 않았다.

“잘 자.”

고장 낸 문에다 대고 굿나잇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이제야 책을 읽을 수 있겠네.

*

“문 열어!”

영하는 비명 같은 소리에 잠에서 깼다. 깜짝 놀라 정자세로 예쁘게 잠들어 있던 몸이 파드득 떨렸다. 발작하듯 침대 위에서 몸을 떨었더니 잠이 홀딱 깬다. 어안이 벙벙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어 보니 자신뿐이었다.

“뭐야?”

“문 열라고! 당장!”

쿵쿵 뛰는 심장 위에 손바닥을 올리며 귀를 기울였다. 곧바로 새된 음성이 귓가를 가로질렀다. 아. 작은고모 목소리다. 대체 무슨 일이지. 서둘러 이불을 걷어 복도로 나가 보려던 영하는 이곳이 자신의 방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대로 나가면… 같이 잤다는 게 들키겠지.

아빠와 아들이 한방에서 잠들 순 있었으나 굳이 따로 방을 내주었는데 같이 잘 일은 드물었다. 켕기는 것이 많아 간이 작게 쪼그라든 영하는 문고리를 잡고 고민하다 욕실부터 들어갔다.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는 순간, 문이 반대편에서 열렸다. 손잡이를 잡은 손목이 쑤우욱 앞으로 당겨졌다.

“일어났어?”

아침부터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마주치자마자 웃는 얼굴이었다. 영문을 모르겠다. 너른 등으로 바깥을 감춘 남자가 허리를 당겨 안고는 입 맞출 듯 몸을 가까이 하여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잠깐.”

미끈한 뺨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물러섰다. 그는 처음부터 장난이었을 뿐인지 의외로 깔끔하게 놓아주며 벽을 짚고 몸을 비스듬하게 기대어 섰다. 아빠의 몸통 아래로 고개를 숙여 바깥을 보니, 주방 옆쪽 문 앞에 남자 셋이 달려들어 문을 따고 있었다.

“뭐야? 왜 저래?”

“정신 나간 새끼가 아침부터 소리를 지르고 있어. 매너라곤 없는 놈이지. 대체 뭘 배운 건지.”

“무슨 소리야, 작은고모던데…. 고모가 저기 갇힌 거야?”

“누가 너무 가둬 버리고 싶었나 보지. 신경 꺼.”

“저렇게 소리 지르는데 어떻게 신경이 안 쓰여?”

그 말과 함께 문 따는 것을 구경하려 계단을 내려가니, 마침 앞치마를 입은 사용인이 계단 난간을 잡고 그들에게 소리쳤다.

“도련님! 아침 식사하세요!”

“자고, 먹고, 눕고. 최영하 하루 일과 시작이네.”

가끔 보면 저게 단순 놀리는 의도인지 비아냥대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된다. 좀 부지런하게 살라고 잔소리하는 건가?

아침 식사 시간 내내 영하는 맞은편에서 입맛 없는 얼굴로 수저를 뜨는 최승준의 눈치를 살폈다. 승준의 주변에 있는 반찬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자기 앞에 있는 열무김치와 마른반찬만 내내 집어 먹기에 세계가 몸을 일으켜 식탁 중앙에 있는 갈비를 접시째로 들어 영하의 흰 쌀밥 위에 올려 주었다.

달그락 식기 부딪치는 소리, 조용히 씹어 넘기는 소리 말곤 없는 적막하고 입맛 떨어지는 식사 시간에 드르륵-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니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다. 영하가 목덜미를 붉게 물들이고 끙끙거렸다.

“아침부터 입맛 떨어지게.”

비난의 주체는 목소리가 완전히 나간 작은고모, 최지아의 음성이었다. 영하의 어깨가 움찔 떨리며 숟가락 위에 오른 갈비가 밥그릇 안으로 떨어진다. 세계는 대꾸도 없이 떨어진 갈비를 다시금 올려 주었다.

“집으로 가라고 해요, 아빠.”

“시끄럽고 밥이나 먹어.”

“왜, 보기 좋은데. 제 새끼 이뻐라 하는 거잖아.”

이어 승주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순수한 의도의 칭찬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피곤한 낯빛의 할머니가 딸들을 조용히 시킨다.

다시 식탁은 적막해졌다. 체할 것 같다. 도저히 위장 안으로 음식물을 씹어 넘기기 힘들다. 다만 자꾸만 반찬을 집어 밥 위에 올려 주는 세계 때문에 식사를 멈출 수가 없었다.

12시에 집에 가겠다고 하자 영하는 또 시무룩해졌다. 왜 이렇게 오래 있어야 하냐고 투덜대곤, 또 침대로 들어가려는 것을 세계가 억지로 끌어 정원으로 나왔다.

싱그러운 잔디 사이로 자란 민들레가 계절을 맞아 하얗게 부풀어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훌훌 흩어졌다. 짙고 푸른 수국 나무에는 미미한 초록을 띤 하얀 꽃다발이 둥그렇게 열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을 두고도 영하의 얼굴은 풀어질 기미가 없다.

“점심 먹기 전에 나가서, 데이트할까.”

“아니… 집에 갈래.”

“왜 이렇게 집을 좋아해.”

“아빠는 말해 줘도 이해 못 할걸.”

성향이 완전 반대라 분명 이해 못 한다. 집에 있어야 마음의 안정이 오고 피곤이 풀린다는 것을 말해 줘 봤자 머리는 받아들여도 가슴으론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걸었다. 한 발짝 떨어져 걷다가, 나중에는 조금 더 멀어졌다. 등을 보이는 남자의 뒤에서 걸어 보자 그제야 현실을 자각했다.

이게 평범한 모습이다. 나란히 걷고 어깨에 팔을 두르는 게 아니라 이 정도 거리감을 두어야 남들이 의식하지 못한다. 그간 정신이 팔려 바보같이 굴고 있었다.

“잠깐만. 할머니 전화네.”

앞서 걷던 세계가 멈추며 뒤쪽으로 팔을 뻗었다. 영하는 고개만 끄덕이곤 근처에 있는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슬리퍼를 신은 맨발에 길게 자란 잔디가 닿아 간지러웠다.

‘언제부터야.’

벤치의 끝을 쥔 손이 하얗게 변한다. 명치와 그 아래쪽이 울렁거렸다. 크게 뜨인 눈이 사방을 둘러보다 곧 얇은 옷감 위로 도드라진 마른 무릎을 응시했다.

‘아버지가 언제부터… 냐고.’

멈춘 숨을 뱉는다. 최승준은 그 말을 하며 영하에게서 등을 지고 섰다. 승준의 등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는 내내 영하는 거대한 파도가 치는 절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파도는 곧 자신을 집어삼킬 듯했고, 눈을 감았다 뜨면 물의 반동은 곧 시퍼런 불길로 변해 모든 것을 잿더미로 태워 버릴 기세였다.

“자꾸 혼자 두게 되네.”

“응…?”

“할머니가 오라셔서. 다녀올게. 이야기만 하고 바로 집에 가자.”

머리 위를 톡톡 가볍게 치는 손이 닿았다 떨어진다. 물기를 머금은 잔디 위를 밟는 발걸음 소리가 멀어질수록 어디선가 흐려지는 기억을 무두질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버지가 언제부터 너한테 그런 짓 했냐고.’

열네 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영하의 몽상과 공상에는 그가 가득했다.

자신의 머릿속이 그려 내는 상상은 아름다웠으나 곧이어 현실의 문을 마주하면 잔인한 현실과 상상이 뒤섞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다. 이루어진 사랑의 처참한 말로였다. 잔인하게 할퀴어지고 수천 갈래로 갈라진 마지막의 모습.

그러나 진정으로 마주친 현실은 완전히 달랐다.

헤집어지고 갈라지는 건 두 사람이 아니었고, 진실을 알게 된 모든 이들의 날카로운 시선은 오로지 세계에게만 닿아 있었다.

모든 것이 그의 책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파티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별채에는 임시로 내려놓은 것이 분명한 의자 네 개가 낮은 테이블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맞은편 벽면에는 최중엽 회장 64번째 생신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여전히 걸려 있다.

세계는 유리 테이블 위로 흩뿌려진 프린트 사진 네 장과 수신인 최승준이라는 이름이 출력된 라벨이 붙은 갈색 서류 봉투를 응시했다.

회사로 받은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아날로그하게 사진을 보낸 놈이 본가에도 보낼 거란 예측을 했기 때문에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곤란했다. 무슨 반응을 보여야 가장 이상적일 수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특별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하던 대로 하는 게 제일 낫겠지.

“…생일 선물 거하게 주는구나, 네가.”

몸을 왼쪽으로 돌려 앉은 최중엽이 아래턱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청천벽력을 마주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의 그는 치솟는 감정을 참아 내느라 연신 의자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옆에 앉은 어머니는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 그런지 아버지만큼 동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승준이가 받았습니까?”

“지아가 오늘 아침에 주더라. 어제 받았다고. 내 생일이라 어제는 일부러 말 안 하고 오늘 가져왔다. 네 동생이 애비 생각하는 마음 반이라도 네가 닮았으면…….”

“회사로 온 것과 같네요. 등기인 척 왔어도 실제론 심부름꾼일 테고 한국어 불가능한 외국인이었을 겁니다. 누가 보냈는진 이미 압니다. 인턴 기자 나부랭이니까, 제 쪽에서 처리할게요.”

“할 말이 그거뿐이냐?”

“누가 보낸지가 제일 중요한 거죠.”

“그 사진이나 다시 들여다봐라! 네가 누구랑 붙어먹고 있는지.”

볼 필요도 없다. 이미 며칠 전 사무실에서 한 시간을 들여다봤던 사진이며 최세계 스스로가 겪었던 일이었다.

2주 전, 변호사와 면담을 끝내고도 우울해하는 영하의 기분을 풀어 주고자 부산으로 가 요트를 태워 줬다.

하늘은 맑고 기온은 올라가기 시작하는 5월은 요트 여행을 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소금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요트의 그늘에 나란히 앉아 키스했다. 희미한 홍조를 머금은 뺨을 핥으니 순식간에 음험한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귀를 때려 대는 바닷바람 사이에서도 네 신음이 들릴지 궁금했다.

바다 한복판에서 안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가슴을 만지려 했으나 최영하는 겁이 많아서 구명조끼를 입고 버클까지 단단히 채워 놓은 상태였다. 벗기려 하자 기겁했고, 겁쟁이의 생명 줄인 새빨간 구명조끼를 입힌 채로 손을 넣으려다 그만뒀다.

섹스는 포기하고 키스나 마저 하려 허리를 감는 순간, 영하가 입술을 가리곤 그를 밀쳐 내며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계단을 쏜살같이 내려갔다. 곧바로 “우엑-” 하는 소리가 파도 소리 사이로 정확하게 그의 귀에 꽂혔다. 신음 말고 구역질은 확실하게 들리긴 했다.

바다 위 섹슈얼한 무드는 고사하고 멀미 때문에 토할 것 같다며 창문에다 코를 박고 있는 아들의 병 수발만 들다 왔다.

“너 지금 웃을 때니?”

그날을 회상하니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어떡하란 말인가. 더한 잔소리를 듣기 전에 입꼬리를 내려 보았지만, 뺨에 남은 미미한 미소는 여전했다.

싸구려 잉크로 인쇄된 사진 속에는 열렬히 키스를 나누는 최세계와 그의 아들이 존재했다. 나사인 척 벽에 부착된 저품질의 몰래카메라를 통해 촬영된 것이었다.

구명조끼를 입은 영하의 모습은 뒤통수와 콧대만 조금 보였지만 세계의 얼굴은 흐릿한 화질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알아볼 법했다.

이미 요트를 운전했던 선장도, 선장에게 접촉한 인간도 해결한 이후였다. 몰래카메라와 원본 파일로 추정되는 USB, 클라우드도 모두 확인해 제거했으나 요즘 같은 세상에 완전한 소멸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언제 유포될지 모른다는 가정을 두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유추해 사전에 막아야 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펼쳐진 네 장의 종이를 들며 말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채로 먼 곳을 응시하던 최중엽이 그 소리에 몸을 바로 하며 호통 쳤다.

“뭘 네가 알아서 해! 이 사달을 내 놓고선! 차라리 평생 혼자 살아!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이딴 더러운 짓 할 거면 아무도 모르게 했어야지 사진까지 찍혀? 이게 퍼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는 놈이! 회사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

“어차피 벌어진 일인데 역정만 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성적으로 판단하셔야죠.”

홀로 팔자 좋은 이야기를 하자 세계의 아버지는 기가 막혀 연신 숨을 크게 뱉어 내고 큼지막한 주먹으로 쿵쿵 벌어진 셔츠 사이를 내리쳤다.

“이성 같은 소리… 당장 영하 미국 보내라. 제 어미한테 보내든지! 유학을 시키든지! 애초에 처음 이 집 올 때부터 유학 보낼 생각이었잖아. 일이 시끄러워지기 전에 당장 보내.”

유학은 무슨. 유학 보낼 계획은 처음 얼굴을 본 그날 접었다.

“14년을 떨어져 지냈는데 이제 와서 다시 보내라고요?”

“…그래서 14년 만에 만난 자식새끼랑 비역질을 계속하겠다고?”

누군 비역질이라고 하고 누군 와이프라고 하고. 하나로 통일해 줬으면 좋겠는데.

“걱정하지 마시고 쉬세요. 몸도 안 좋으신데.”

“내가 뭘 믿고 쉬어. 이런 것도 자식이라고 그동안 키웠는데 내가! 너한테 회사 못 준다. 승주 데려와!”

“그러세요. 안 그래도 일 때문에 피곤했어요. 일주일에 나흘이 철야라니.”

“세계 너…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몰라서 이러는 거야?!”

참다못한 아버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바닥 위를 나뒹굴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최중엽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질린 얼굴은 곧 머리로 몰린 피 때문에 가슴 위쪽까지 벌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생각할수록 차오르는 분노를 이겨 낼 수 없는지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며 포효하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름만 남긴 채 뒷방에 물러난 신세라도 사자는 사자였다.

하지만 최세계는 우두머리를 밀어내고 꼭대기에 앉은 남자였다. 그가 집안의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사내로서도 사업가로서도 그에게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테이블 위의 사진들을 모아 담는 척 허리를 숙이고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형형한 빛이 서리는 두 눈이 자신과 닮은 남자를 담고 그 안에서 질근질근 짓밟았다. 아버지의 왼쪽 뺨이 꿈틀거리는 것을 확인한 세계는 편안하게 목을 풀며 일어섰다.

“승준이가 저를 이어 회사를 물려받을 걸 생각하셔야죠, 아버지. 누나나 지아가 이어받으면…… 안 될 텐데요.”

종이봉투 안으로 가볍게 종이 넉 장을 넣으며 ‘최승준’의 이름을 거론하자, 최중엽의 이마 위에 불퉁한 핏줄이 부풀어 오른다. 늙은 눈동자가 갈 길을 잃었고, 두꺼운 손등이 의자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세계의 어머니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손만 뻗어 버터쿠키를 집어 입에 물곤 손가락에 묻은 자잘한 가루들을 톡톡 털어 낸다. 바닥으로 부스러기가 흩어졌다.

세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때쯤엔 두 손에 꼽히는 기업이 되어 있을 겁니다. 약속해 드릴게요. 아버지도 그거 하나 믿으시고 저한테 전권을 넘겨주신 거잖아요.”

“너 일부러 어제 영하 데려온 거니?”

최중엽이 대답하기도 전, 잠자코 있던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희미한 주름이 진 가느다란 목이 반듯했고 그녀의 시선은 남편에게도, 아들에게도 닿아 있지 않았다. 그녀가 보는 것은 사건의 흐름이었다.

역시 대화를 하려면 어머니 쪽과 해야 한다. 세계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바닥에 널브러진 의자를 바로 일으켰다.

“처음부터 애인으로 소문나면 추후에 까발려져 봤자 입에 올리는 사람들끼리 알아서 거를 겁니다. 이 사진을 보고서도 어린 애인 데리고 노는 것으로 생각하겠죠. 설마 그런 소문을 믿기야 하겠어요.”

“그러면.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 하고 스무 살짜리 남자애 데리고 노는 놈이 되겠다고?”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실소가 튀어나올 것 같아 일부러 목기침을 뱉었다. 이윽고 튀어나온 세계의 언어에는 예리한 칼날이 벼려져 있었다.

“부인이 있는데 어린애 데리고 노는 것보단 낫죠.”

“…….”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데, 며느리 들일 궁리는 마세요. 멀쩡한 여자 인생 망칠 생각 없습니다.”

“너… 너… 이… 네 아들이야! 이 녀석아!”

“아들인 거 백날 말하셔도 소용없어요.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니까.”

서류 봉투를 손안에 갈무리한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멋대로 별채를 나온 세계는 햇빛 아래 잔뜩 미간을 찡그렸다.

“이러다 전 국민이 아는 건 시간문제겠는데.”

조용히 지껄이며 혼자 있을 영하에게로 방향을 틀어 휴대폰을 들었다. 십 분 전에 도착한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조수석 시트 바닥에 손수건으로 감싸 둔 총을 확인했습니다. 정상적인 총기는 아니고 불법 사제 권총으로 보입니다. 탄약은 없습니다.

고개를 반대쪽으로 천천히 꺾으며 메시지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는 순간, 담담한 눈가에 은은한 희열이 담긴다. 메시지에는 고동색 손수건 위로 시커먼 페인트를 칠한 조악한 생김새의 사제 권총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실형도 기대할 수 있겠지. 햇빛 아래 그림자가 짙게 진 잘생긴 외모 위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두껍게 씌워졌다. 서민석을 바닥까지 끌어 내릴 생각에 가벼운 허밍을 노래하며 보폭을 넓혔다.

  서민석 지문 채취 해 오세요. 탄약은 곧 준비하죠.

*

모드글로벌이 검찰의 압수수색 영장을 받았다. 공적인 업무, 사적인 업무 모든 일이 올스톱이었다. 그날 최세계는 전에 없이 열받은 얼굴로 퇴근했다. 원래의 퇴근 시각보다 조금 늦었지만 평소에 바빴던 것을 고려하면 빠른 편이었다.

“서민석이야……?”

“그놈은 아니라도 어쨌든 그놈 연줄의 짓이겠지. 그래도 국세청 조사보단 나아. 최소한 검찰이 압수수색을 하면 미리 영장 발급하고 사전 안내라도 해 주니까.”

현관을 넘어서며 바로 넥타이를 잡아 내리던 세계는 드레스 룸으로 향하던 발을 돌연 멈추고 돌아섰다. 영하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돌아보니 조금 풀어졌으나 여전히 미미하게 짜증이 남은 얼굴이 곧장 다가왔다.

“하루 종일 이러고 싶었어.”

세계가 곧 온몸을 기대듯 영하를 풀썩 끌어안았다. 등 위를 손바닥으로 크게 문지르고 묵직한 무게감이 몸을 짓누르듯 쏟아진다. 한 발자국 물러서며 그의 무게를 힘겹게 버텨 낸 영하가 그가 한 행동을 따라 하듯 등 근육의 모양이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그의 재킷 위에 손을 올렸다.

“하아아.”

뜨거운 숨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성적인 의도 없이 피로감이 다분히 느껴지는 소리였다.

일 때문에 피곤하다고 말은 자주 했어도 몸으로 티 낸 적은 없었는데.

“많이 힘들어?”

“우리 아기가 다 커서 아빠 힘든 것도 알아주고…….”

“음…….”

아기라고 하는 것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거 진짜 싫다고.

세계가 몸을 상체를 들어 영하를 물끄러미 본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이 어두웠다. 빤히 바라보는 그에게 많이 힘드냐고 재차 묻기 전, 영하가 입학한 이후로는 출퇴근 준비를 도와 달라는 말이 없었던 그가 오랜만에 드레스 룸으로 이끌어 따라갔다.

그가 풀어낸 넥타이를 돌돌 말아 맞춤 장에 넣는 사이, 거울에 비치는 영하의 옆모습을 보며 셔츠 단추를 풀던 세계가 남일 이야기 하듯 무심하게 물었다.

“그런데, 요즘 돈 필요해?”

“…응?”

“꼬박꼬박 밥 먹듯이 출금하길래.”

가끔은 밥보다 먼저 출금하더라고.

양심에 찔렸다. 문자 잘 안 본다더니……. 게다가 오늘은 십만 원을 뽑아냈다.

대답해 주기 싫어 후다닥 거실로 도망가려던 몸이 붙잡혔다. 셔츠 단추를 죄다 풀어 헤쳐 상체를 드러낸 세계가 영하의 팔뚝을 잡아 거칠게 당긴 것이다.

“아파, 아파!”

크게 아프지 않았지만, 거짓으로 꾸며 내며 엄살을 피우니 무표정한 미간에 세로로 금이 간다. 연기한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괜히 화를 낼까 무서워진 영하가 일단은 대답했다. 전혀 마음이 풀릴 만한 대답은 아니었다.

“비밀이야…….”

“그 돈, 누가 버는 건데 비밀이야?”

“…용돈으로 주는 거면서 치사하게….”

“치사? 정말 치사한 게 뭔지 보여 줘? 앞으로 하루에 만 원만 써.”

“뭐? 나 대학생이야! 학교 밖에서 점심 먹으면 최소 만 원부터 시작한다고!”

“그럼 굶고 다니든가.”

하루 만 원 이야기에 바짝 독이 올랐다. 이정욱 때문에 혼자 다니게 되니 학교 식당에선 밥 먹기도 싫었다. 민재가 같이 먹자고 하긴 했으나 이정욱과 사이가 갈라진 이유를 말해 주고 싶지 않아 당분간 피할 생각이었다.

언성을 높이니 팔을 꽉 잡은 손이 떨어져 나간다. 눈치 보인 영하가 고개를 숙인 채 눈만 치뜬 채 그를 흘끗 올려 보다 소심하게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싫으면 대답해.”

“…….”

“대답 안 해?”

좀 전까지 실실 웃던 남자가 침묵에 얼굴을 굳혔다. 영하로서는 납득이 안 가는 점이었다. 그런 데 연연하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돈 좀 빼낸 거에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지…….

“버릇없는 행동이 점점 더 심해져.”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한 번만 넘어가 줘.”

“뭘 넘어가. 네가 현금 필요할 일이 뭐가 있다고 매일같이 뽑아 가지? 목적이 뭐야. 용돈 하라고 준 카드니까 완전히 털어먹겠다는 생각인가? 그러려면 하루에 백씩 뽑아. 그래도 한참은 걸릴 거야.”

“화내지 마… 화내면 무서워.”

“너한테 진심으로 화낸 적도 없는데 무섭긴 뭐가 무서워. 두 번 말 안 해. 대답해.”

“그게 아니라…… 아빠 생일 선물 사 주려고 모으는 거란 말이야. 그걸 물어보면 어떡해? 눈치도 없이.”

영하가 세계의 손에 들린 바지를 빼앗으며 말했다. 대답을 들은 세계가 이마를 위로 문지르며 헛웃음 지었다.

“하! 내 생일 선물을 사 준다고? 내 돈으로?”

“그래서 원래는 아르바이트하려고 했어!!”

내내 마음에 두던 것을 정곡으로 찔려 얼굴이 달아오르고 목소리가 커졌다. 아르바이트 이야기에 최세계는 “뭐?” 하고 찡그리며 어깨에 걸쳐진 셔츠를 완전히 벗어 던졌다. 대답을 들어도 영 신통치 않은지 불만족스러운 태도였다.

“생각 접어서 다행이네. 인간의 피가 거꾸로 솟으면 어떤 모습일지 너무 보고 싶으면 아르바이트하든가. 대체 어떤 선물을 사 주시려고. 생일이라면 두 달은 남았는데 삼백이나 뽑아 놨는지. 너무 기대돼서 벌써 심장이 두근거리는 기분이야. 부정맥인가?”

“응. 계속 기대하고 있어.”

이죽거림에도 제 나름대로 뻔뻔하게 대꾸했으나 귓바퀴가 벌겋다. 세계는 민망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아들을 보며 얼굴 근육을 일그러뜨렸다. 잘생긴 얼굴 위로 내내 실금이 가 있었다. 도대체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기색이 다분했으나 성난 목 근육이 누그러지는 것으로 보아 그가 화를 서서히 꺼뜨리고 있다는 것은 명확했다.

“근데 너, 설마 비밀 이벤트 하겠다고 매일 조금씩 뽑는 거야?”

“…….”

“세상천지 이런 바보가. 어떻게 내 유전자 받고 이렇게 바보처럼 구는 거지?”

바보라는 말엔 뭐라 할 말이 없다. 시무룩한 표정의 영하가 서랍장을 발끝으로 툭툭 쳤다.

“그럼 어떡해… 세뱃돈도 다 아빠가 몽땅 가져가면서.”

“불려 주겠다고 했잖아.”

“안 믿어… 나한테 돈 줄 생각 없으면서.”

“아주 바보는 아닌가 보네.”

목소리에 장난이 다시 서렸다. 분노가 가셨다는 의미였다. 아일랜드 시계장 위로 던져진 와이셔츠를 대강 접어 올려 두곤 옷장에서 편안한 옷을 꺼내 드는 남자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영하는 발꿈치를 들어도 손이 닿지 않아 옷걸이 봉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위치를 세계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 하나 뻗어 티셔츠를 뽑아냈다. 조금 사나운 몸짓이었다.

자존심이 상하기보다는 정확히 오른쪽 가슴이 설레었다. 부정맥이 유전인지 영하의 가슴도 때아닌 시기에 용솟음쳤다. 대체 왜 싸우다 말고 옷 꺼내는 모습에 심장이 뛰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단지 최세계의 벗은 몸에 역치가 약한 최영하의 탓일 수도 있다.

회색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린 까만 티셔츠를 빼내는 도중에 영하가 그의 뒤로 다가가 등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살 내음이 나는 뒷덜미에 이마를 대고 허리에 팔이 감긴다. 오묘한 분위기가 생길 듯한 행위였지만, 이윽고 영하가 인형 만지듯 그의 배 위를 만지작댔다. 매끈한 살가죽밖에 없는 자신과는 다른 신체 부위였다. 손가락 아래로 근육의 굴곡이 여실히 느껴졌다.

“못된 손이네.”

“성희롱 아니야…….”

말과는 달리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더불어 고개를 푹 숙이느라 가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어깨 부근을 간지럽혔다.

영하는 재차 “아니야…….” 하고 속삭였다. 그러나 손은 여전히 그의 배에 여섯 개로 나뉜 복근을 매만지고 있었다. “애교 부리는 건가?” 매달린 영하 때문에 옷을 입지 못한 세계가 말을 이었다.

“성희롱이라고는 안 했는데. 찔리나 봐.”

손에 옷을 들었는데 입을 수가 없다. 쥐고 있는 티셔츠를 내려다본 그가 옷장 안을 의미 없이 훑어보다가 여름옷 살까,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생일 선물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그런 준비 안 해도 돼.”

“하지만 해 주고 싶어.”

“안 해 줘도 된다니까. 지금까지 내 생일 챙긴 적도 없는 불효자 주제에.”

단편적으로는 비난하는 내용이었지만 말투는 깔끔했다. 억하심정이나 뒤끝 없이 단지 그냥 하는 말일 뿐이었다.

그대로 미닫이문을 닫고 돌아보려던 찰나였다. 움직임에 도드라지는 날개뼈 사이에 얼굴을 숨긴 영하가, 자신을 집어삼킬 듯한 커다란 몸체가 돌아보지 못하도록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제 사랑하는 사이잖아….”

그 순간, 그가 정도 이상으로 놀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손바닥이 지그시 닿은 복근에 숨이 멈추며 잔뜩 힘이 들어가고, 어깨 근육이 굳어 단단해졌다.

옷장의 손잡이를 쥔 손이 천천히 떨어지며 영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팔등에서부터 탄탄하게 갈라진 팔뚝까지 근육이 약하게 팽창했다. 세계는 힘을 거의 들이지도 않은 가벼운 몸짓으로 돌아봤다.

“뭐라고 했어?”

다급하고 상기된 목소리였다. 그의 속에서 놀라움으로 위장한 감격이 휘몰아치는 중이라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게 무슨 별말이라고 저렇게 좋아하지…….

새삼스레 그에게 표현을 안 했나 싶어 입술을 달싹였다. 좋아한다는 표현은 내내 했을 텐데. 영하는 감정을 숨기는 데에 능숙하지 못한 편이었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두 번 말 안 해.”

그의 말을 인용하여 퉁명스레 나온 대답에 그의 얼굴에 아찔한 미소가 새겨졌다. 눈가가 여우처럼 가늘게 접혀 올라가고 입술이 시원하게 벌어졌다. 곧이어 행복에 겨운 남자가 달려들어 얼굴 전체에 정신없이 쏟아지는 키스를 감당하느라 진이 쏙 빠졌다.

*

최세계의 기분은 최고조였다. 영하와 처음으로 섹스한 다음 날처럼 아침부터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새벽같이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선 한 잔 들이켠 후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조상님께 절하듯 엎드려 잠든 영하를 안아 눈도 못 뜬 아들에게 손수 양치질과 세수를 시켜 줬다. 열네 살 때도 해 주지 않은 것이었다.

고공 행진을 이루는 최세계의 즐거움은 출근 직전까지 여전했다. 그가 직접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 간부 중 말단이라고 사람들 생각만큼 권한이 없다며 그렇게 투덜대더니 9시 넘어서 출근하는 건 상관없는 걸까. 왜인지 머쓱했다. 정확히는 부끄럽고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고 한 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이라고 한 말에 저렇게까지 기뻐하는 모습을, 자신의 앞에선 감정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모습을 사랑했다.

“회사 갈 때도 그렇게 웃고 있으면 안 돼.”

“왜.”

“압수수색 받았다며. 새벽에 난리였을 텐데.”

“어차피 직원들도 회사 일이랑 사생활은 다르잖아. 이해해 줄 거야.”

기뻐하는 것을 감출 생각 없다는 대답이었다. 누가 보면 자기 회사 아니고 그냥 월급쟁이 직원인 줄 알겠네.

“잘 다녀와.”

“응.”

“수업 중간에 울지 말고.”

“퍽이나 그러겠다.”

운전대를 잡은 세계가 몸만 밀어 “퍽”을 말하는 영하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 맞추고 떨어져 나갔다. 길게 트인 두 눈은 여전히 열렬한 행복을 드러내며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눈 아래 접힌, 저와 닮은 애교살을 본 영하는 이대로 떠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학교도, 회사도, 친척들도 모두 없는 곳으로.

서로만 인식할 수 있는 머나먼 곳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떠나자는 말 대신 기어 위 남자의 손등을 매만지고 가방을 들었다.

그에게는 스스로 일궈 온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위협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수업이 있는 건물에 도착해 정문 입구의 계단을 오르며 휴대폰을 켰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 지하로 향하는 복도를 걷는 도중이었다. 남자의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자신의 앞에 서는 것을 느꼈다.

목덜미가 선득하다. 굳은 몸으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검은 정장을 입은 덩치 좋은 남자 하나가 장승처럼 서 있었다.

“도련님, 사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복도에는 이름 모를 학생들이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수군거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도련님.”이라는 단어를 듣자 시선은 영하의 뒷모습으로 비껴간다. 마른 입술을 핥아도 갈증과 불안함을 이겨 낼 수 없었다. 큰 키와 몸집에 비해 다소 순한 얼굴의 남자가 영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재촉하지 않는 것은, 영하에게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랑하는 사이라는 말 하나에 아이처럼 기뻐하던 그의 모습이 허공 위로 덧그려진다. 방파제가 물 없이 지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니.”

할머니의 차는 영하가 수업받는 건물 뒤편에 있었다. 오래된 나무가 우거진 곳이라 담배 피울 때가 아니면 학생들의 발길이 없는 곳이었다. 왜 하필 이런 구석진 곳에 차를 세웠을까, 하는 궁금증은 미리 묻지 않아도 할머니가 먼저 답을 전했다.

“세계가 너한테 사람을 붙인 것 같던데.”

“네…….”

모든 것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신경을 쏟을 만한 것이 필요했다. 차 손잡이 아래에 볼록 튀어나온 부근을 만지며 나직이 대답한다. 할머니가 자신과 만나 하실 이야기는 결국 하나밖에 없다. 아빠의 곁에서 떠나라는 것.

“…….”

영하는 그녀와 두 뼘을 사이에 두고 차량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열네 살에 처음 만난 할머니와 6년을 알고 지낸 지금까지의 세월을 돌이켜 봐도 가장 가까운 거리였다.

6년, 충분히 긴 시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할머니와의 유대는 얄팍한 기름종이보다 못한 관계였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보다 불편해 속이 일렁인다. 룸미러 속으로 비치는 할머니는 언제나 그렇듯 기품 있고 고상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

“네가 세계랑 무슨 짓을 벌이는지는 알고 있다. 그 점에 대해서 네 탓을 하지는 않으마. 자식 잘못 키운 내 탓이지.”

그녀의 마른 어깨와 가슴팍이 위로 솟구친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네 탓을 할 생각은 없지만, 결국에는 바로잡으려면 네가 해야 해. 벌써 집안사람들 다 아는데, 언제까지 숨기려고. 애초에 세계 그놈은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둘이서 손잡고 외국에 가면 달라질 것 같겠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사진을 봤어.’

‘형이랑, 아버지가…….’

‘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사진까지 찍혀서….’

눈꺼풀이 쉴 새 없이 깜빡였다. 괴로워하는 최승준의 목소리와 함께 할머니의 목소리가 뒤엉켜 징그러운 음성으로 입력된다. 아무리 혀를 축여도 소용이 없다. 몸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숨만 꺼덕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둘이서 손잡고 외국에 가면 달라질 것 같겠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그의 차에서 내리기 직전,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던 영하의 생각을 꿰뚫어 본 것 같은 할머니의 말이었다. 두 사람의 사이를 모르는 곳으로 가면멀쩡한 사랑이 될 줄 알겠지만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열이 오름을 느끼는 동시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음으로 호소하고 싶지 않았으나 방법이 없었다.

“하, 할머니…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그렇게 차일피일 미뤄서 언제 떨어지려고.”

나란히 앉았어도 두 사람의 시선은 정면만을 응시한다.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달랐지만, 결국 서로가 바라보고 있는 상대는 최세계 하나였다.

파르르 떨리는 턱 끝 위로 눈물이 긴 자국을 만들어 흘러내렸다. 영하의 입에서 떠나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손등 위를 습관처럼 쓸어내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 반지도 세계가 사 준 거니. 세계도 같은 걸 끼고 있던데.”

“…….”

“그놈이 평생 안 하던 짓만 골라 하는구나.”

이미 알고 물어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손가락을 말아 반지를 감추면서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내가 전에 말했었지. 네가 네 아빠한테 정말 감사한 마음이 있다면. 떠나게 될 거라고.”

“…….”

“네 엄마가 널 가졌다고 연락 왔을 때, 네 엄마는 교도소에 있었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불안함을 해소하고자 내내 손 위를 긁던 손톱이 피부를 긁어내며 그 자리에 멈췄다.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란 파도가 몰아쳤다. 이미 무너진 방파제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도 못하고 파도 속에서 하염없이 깎이고 부서져 간다. 완전히 부서져 버린다.

“두 번 다시 안 볼 손자라도 교도소 안에서 태어나는 것만은 막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네가 상상이 가면.”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아주 많은 것을 감추고 극히 일부분만 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더는 네 존재가 상처가 되진 말아야지.”

그 말에는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알고 있다. 둘 사이가 그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그를 향한 오래된 마음 또한 진심이었다. 손을 세게 움켜쥔 영하가 조금은 날이 선 태도로 대답했다.

“하지만 제가 떠나는 것도 아빠에겐 상처가 된다면요?”

“그렇겠지. 하지만 가슴에 피멍 한 번 들면 나아질 일이야. 멍든 가슴은 언젠간 낫지만, 낙인은 지워지지 않아.”

내리쬐는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게 드리운다.

영하는 그와 함께하는 나날이 행복할수록 곧 닥칠 이별이 두려웠다.

*

“아침까지 멀쩡했는데.”

땀으로 푹 젖은 이마에 시원한 손길이 닿았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억지로 학교 수업을 마친 후에 택시를 타고 돌아와 모든 것을 변기 속으로 쏟아 버렸다. 소화 기능을 잃어버린 위장에 억지로 욱여넣은 음식물과 고통, 울음과 사랑이 묻어나던 추억들을.

“우리 영하 이렇게 아파서…….”

그는 습관처럼 영하의 체온을 재어 본다. 여전히 고열이었다. 무리하거나 찬 바람을 쐬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레 찾아온 몸살에 환자가 아니라 최세계가 맥을 못 췄다.

할머니가 말한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일 것이다. 그녀가 말한 그 날카로운 티끌에 온몸이 해어졌다.

결혼과 최세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던 그의 종용에 넘어가서는 안 됐다. 이성을 다잡고 결혼하게 내버려 뒀어야 했는데.

“영하야.”

몽롱한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벌어진 입술로는 연신 더운 숨이 올라왔다. 이대로 불에 타 죽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가 자신을 불렀다. 가지 말라는 것처럼.

“응급실 갈까? 못 참겠어?”

“…그냥 몸살이야.”

못 참는 것으로 보이는 건 최세계 쪽이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부질없는 한숨을 연신 흘려 대어 흔적처럼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았다.

비스트로의 겨울 강가.

그곳에서 세계를 선택하며, 영하는 스스로에게 타이머를 걸어 두었다.

3년.

길어도 4년.

대학을 졸업하면 떠나자고 마음먹었으나, 타이머의 숫자가 지나치게 빠르게 흘렀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예감했다. 그 타이머가 멈추는 순간 최세계의 발밑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깊게 꺼져 버릴 것이다. 영하는 잃을 것이 그 남자밖에 없었지만, 그는 가진 것이 많은 남자였다.

싫어.

처음 그를 만난 그날처럼. 모든 것이 완벽한 남자로 존재하길 바랐다. 첫눈에 빠져들 수밖에 없던 모습으로.

그 사람 인생에서 유일한 고통을 남긴 것이 자신이 되기 싫었다.

“이제 의젓하네… 아파도 울지도 않고.”

“응….”

몸살에 시달릴 때면 울면서 엄마를 찾아 헤매던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하는 희미하게 웃으며 이불 속에서 손을 빼냈다. 굳이 잡아 달라 말하지 않아도, 세계는 그 손을 붙잡았다. 크기 차이가 명확한 두 손이 얽혀 들고, 타는 듯한 체온이 그에게 닿아 서로의 온도가 조금씩 녹아들고 있었다.

울지 않아도 속눈썹이 푹 젖어 있다. 열로 혼몽한 눈길을 들었다. 세계는 손가락으로 젖은 눈가를 신중한 모습으로 닦아 주며 자신의 눈가를 아프도록 찡그렸다.

다정히 가슴 위를 토닥인다.

그의 사랑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영하가 아는 단어로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어쩌면 영하도 그런 방식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물감의 색을 겹칠수록 시커먼 어둠을 띠는 것처럼. 그런 무수한 형태와 색깔의 사랑이 애초에 잘못된 것 아닐까…….

*

학기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민재는 여름방학을 상상하며 잔뜩 신나 좀 전부터 혼자서 쉴 새 없이 입을 놀려 댔다.

영하가 정욱과 사이가 틀어진 후로 당황해하던 녀석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혼자가 된 영하 옆에 남은 것이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함께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다만 영하가 그것을 일일이 표현할 만큼의 정신력이 부족했다.

정욱은 근래에 얼굴이 조금 상했다. 딱히 알고 싶지 않았는데 눈에 보이니까 어쩔 수 없다. 눈이 마주치자 무언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무시했다. 이정욱 따위에 소모할 기력은 없다.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집에서는 최대한 아무 일도 없는 척을 해야 했기에, 교내에서 영하는 무기력한 인간이 되었다. 수업 시간 내내 생각에 잠겨 있기도 했고, 일부러 곧장 집에 가질 않고 카페에 남아 공부를 하기도 했다. 말이 공부지, 실제론 책만 펴 놓고 딴생각 중이었다.

“이정욱 요즘 얼굴 안 좋은 거. 부모님 가게 때문이더라. 식당 하시는데 상황이 좀 안 좋으신가 봐…. 밥 한번 먹으러 가겠다고 하니 곧 문 닫는다고 하네.”

민재가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스크롤을 내리는지 손가락이 화면 위를 휙휙 터치한다. 돌아오는 답변이 없자 슬그머니 영하를 훑어본다. 흠흠. 목을 가다듬은 민재가 화면 속 보정 잔뜩 먹어 선명한 세룰리안 블루빛의 바다를 보여 주며 제안했다.

“야, 최영하. 우리 여름에 부산 갈래?”

“부산? 어디.”

“뭐, 많지. 그래도 보통은 해운대나 광안리 아니냐? 너 부산 가 본 적 있어? 나는 다른 데는 가 봤는데 부산은 한 번도 안 가 봤지.”

“난 한 번 가 봤어.”

아빠가 요트 타러 가자며 데려갔다. 거기서 신기해하고, 토하고, 멀미로 앓고…. 못 볼 꼴을 오래 보였다. 이야기하는 영하의 얼굴이 흐려진다. 승준이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사진도 찍히고. 대체 뭐 하는 거야? 아버지가 널 데리고 밖에서까지 그런 짓 하는데 왜 아무 말 안 했어?’

사진……. 승준이의 설명을 들어 보면 그날, 요트 위를 찍은 사진이었다. 키스만 잠깐 하고 멀미 때문에 그 이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둘의 관계가 혀가 얽히는 키스까지 용인되는 사이는 아니었다.

“요트 타러 갔어.”

“요트? 아아, 그래. 요트 투어도 있었지. 한 시간에 얼마더라? 사람 많아?”

“기억 안 나…. 시간으로 나눠 타진 않았는데. 그냥 가족끼리만 탔어.”

“아아. 너 부잣집이었지.”

“부잣집은…. 어차피 내 거 될 것도 아닌데.”

“그래도 어느 정도 떨어지는 게 있지.”

민재가 대답하며 티라미수를 한 움큼 떠먹었다. 민재는 영하가 제법 잘사는 집의 자식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이상을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가자. 언제 갈래?”

민재가 재촉했다. 녀석은 성급한 결정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여간 성격도 급해. 영하도 민재와 대화하다 보니 부산이 가고 싶어지긴 했으나, 아쉽게도 같이 가고 싶은 상대가 녀석이 아니었다.

“부산은 좀 그래.”

“왜? 이쁘다며.”

“애인이랑 갈 거라서.”

“에이씨. 꺼져라. 진짜.”

벌어진 입술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민재는 코코아 파우더가 묻은 포크를 신경질적으로 내리면서 다리를 꼰다. 씩씩대는 소리가 흐르더니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

“두고 봐라. 2학기 때에도 내가 솔로인지.”

“그래. 열심히 해라. 꼭 애인 생길 거야.”

“고오맙다.”

마저 이야기하며 책 페이지를 넘겼다. 여전히 진심이 담기지 않은 몸짓이었다. 아마 기말을 최악으로 보게 되겠지. 하지만 별로 상관없다.

어차피 이제 본인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영하의 눈동자가 글자 위를 아래위로 느릿하게 더듬는다. 미련이 차곡차곡 발등 치에 내려앉았다.

“나 과외 때문에 먼저 갈게. 잘 마셨다.”

민재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네 시였으나, 다섯 시에 과외가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영하도 다섯 시까지만 있다가 집에 가야 했다.

그는 영하가 없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불 꺼진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해가 되는데 그렇게 왕자님으로 떠받들려 살았으면서 마마보이가 아닌 점은 의아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사니까 그런 건가.

굳이 부산이 아니라도, 같이 여행 가고 싶은데. 갈 시간이 있을까.

압수수색은 끝났으나 뒤처리 때문에 더 정신없는 모양인지 세계는 집에 와서도 내내 노트북을 들여다보거나 통화를 했다. 꼬박꼬박 제시간에 퇴근하는 게 의아할 정도였는데, 나중에야 알아챘다. 영하가 그의 늦은 퇴근에 서운함을 드러낸 이후로는 최대한 퇴근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아직 철없는 어린애임을 느꼈다. 둘 사이의 애매모호한 관계성을 둘째 치더라도, 투정 부리면 안 됐는데.

하지만…….

투정 받아 주는 사람이 아빠뿐인걸.

문제집의 설명 위로 형광펜을 주욱 그었다. 벌써 같은 위치에 세 번째 긋는 중이었다. 이 이상 그으면 종이가 찢어진다. 뚜껑을 닫고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한적한 카페의 문이 열리고, 차임벨이 맑은 소리로 울린다.

영하는 턱을 괸 채로 지문을 읽었다. 눈만 향해 있을 뿐 머릿속은 영하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와의 여행을 어디로 가면 좋을까, 상상하는 중이었다. 상상이 깨진 것은 커피 옆에 둔 휴대폰의 진동이 울려서였다. 물끄러미 본다.

모르는 휴대폰 번호.

앞자리가 휴대폰 번호가 아니었다면 받지 않았겠으나 혹시 모르니 전화를 들었다. 번호를 어떻게 알고 전화하는진 모르겠지만 종종 과 동기들에게 전화가 오는 경우가 있었다.

영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들고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 들었다. 곧이어 이어지는 목소리에 샤프가 손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오랜만이네요. 휴대폰 번호 찾느라 좀 걸렸어요.

“오랜만이네요. 휴대폰 번호 찾느라 좀 걸렸어요.”

그 순간, 영하의 일상과 평온함이 유리 조각처럼 깨지고 갈라졌다.

두 눈이 크게 확장되고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었다. 숨이 턱 하니 멈추고 목이 강제로 조이는 감각에 배 속이 꿈틀댔다. 목소리가 두 갈래로 들린다. 하나는 귓가에 댄 휴대폰이었고 하나는…….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급급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었다. 폐부에 탁한 호흡이 섞여 들었다.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서민석이, 카페에 있는 것이다. 카페에 들어와 자리 잡은 후 전화를 건 것이다.

영하는 얼른 유리컵을 쥐었다. 그에게 던져 반격하려는 일말의 무모함이었다. 얼음이 들어찬 컵을 쥐자, 작은 용기라도 솟아난다.

고개를 번쩍 들어 깨끗한 창 너머 보이는 골목길을 샅샅이 뒤졌다. 익숙한 까만 차를 찾으려는 행동이었다. 영하의 그런 모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입구 가까이 자리 잡은 서민석이 입을 열었다.

-왜요. 따라다니는 까만 차 찾으려고?

“…….”

-그 아저씨는 지금쯤 경찰들한테 붙들려서 주차 딱지 떼고 있을 텐데. 그리고 불법 주차 신고하는 김에 스토킹도 신고했어요. 영하 씨 뒤를 졸졸 따라다니더라고…. 그렇게 겁줘서 쓰나. 아마 돌아올 때까지 대화할 시간은 충분할 거니까 보채지 말아요. 보자,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 본론부터 시작해 볼까요.

“난 당신이랑, 할 말 없어.”

-난 있어서.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최세계가 어린 남자 뒤꽁무니에 미쳐 있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조금만 부추기니 억하심정이 있는 누군가가 아주 열렬하게 취재 자료를 내놓더라고요.

취재…. 취재라면, 이정욱. 그리고 정욱의 누나일 가능성이 컸다. 영하는 저도 모르게 손톱 끝을 깨물며 초조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서민석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겁이 나 목구멍이 매캐하다.

영하는 뒤이어 나온 발언에 기침을 쏟아 뱉었다.

-언론사에 제보하면 어떻게 될까. 천하의 최세계가 아들이랑 씹질한다고.

머릿속으로 찢어지는 이명이 몸뚱이를 치고 지나갔다.

몸서리치듯 떨리는 어깨에 테이블이 세차게 진동했다. 목구멍이 턱, 하고 막혀 모든 호흡이 끊기고 눈앞이 아찔했다. 시커멓고 하얀 것들이 번갈아 앞을 가로막았다.

“으… 흐…….”

잔뜩 겁에 질린 목소리에는 두려움의 흔적이 역력했다. 거대한 자연재해를 앞에 둔, 무력한 풀 한 포기처럼 흔들리는 영하는 날카로운 종이 끝에 베인 손가락에 피가 묻어나는 줄도 모르고 손을 떨었다.

뭐라도….

뭐라도 해야 해. 뭐라도, 내가 뭐라도 해야 해. 내가…….

침을 삼켜 넘겼다. 콧잔등이 시큰해지고 아래턱이 추위에 떨듯 떨렸다.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으나 두려움으로 망가져 머릿속에 든 모든 것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려 명료한 말로 뱉어 낼 수 없었다. 거의, 쏟아 내는 것에 가까웠다.

“……아무도, 어차피 아무도 안 믿을 거야!”

-내 수사력을 얕보지 말아요. 그런 말로 넘어갈 수 없는 결정적 증거가 있으면 어쩌려고.

단호함이라고는 없는 애처로운 목소리에 그는 즐거운 듯이 이야기했다.

결정적 증거라는 말 한마디가 영하를 끝없는 공포로 밀고 갔다.

결국 알면서도 낭떠러지가 보이는 길로 걸어간 자의 최후가 눈앞에 도사리고 있었다.

동시에 승준이 이야기한 사진이 떠올랐다. 그런 걸 보낼 인간은 역시 서민석밖에 없었다. 그의 짓이었다.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대범하게 직접 모습을 보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유리컵을 쥔 손이 뜨거워졌다. 영하는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울음을 삼켰다. 행복에 겨운 남자의 얼굴.

-최세계가 요즘 날 너무 귀찮게 만들던데, 그 자식이 고작해야 제 아들 주변에 알짱거린다는 이유로 날 좌천 보내지만 않았어도 우리 영하 씨가 그런 힘든 일을 겪진 않았을 텐데 안타깝네요. 아, 내가 더 아깝나. 마침 상사한테 전화가 와서 못 따먹은 게 한이네.

서민석은 마치 자신이 저지른 일을 제삼자가 평가하듯 무심하게 지껄였다. 그 안에는 장난스러운 감정도 무엇도 아무것도 없다. 단지 일의 시발점과 흐름, 결과를 보고하듯 읊을 뿐이었다.

짧게 숨을 들이쉰 그가 단번에 억양을 바꾸며 말을 이어 갔다. 흥분하여 목소리가 빨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이젠 너한테 관심 없어. 대단히 좆같이 구는 최세계에 대한 복수였지. 끔찍하게 아끼는 아들을 망가뜨릴 계획이었는데, 그 아들과 팔자 좋게 요트 위에서 키스라니……. 그런 치명적인 역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뭐가 잘나서 내 뒤를 캐고 있을까. 네 아빠는? 알량한 정의감인가? 검찰을 떠난 미련의 신 포도인가.

톡톡.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친다. 귓구멍 안으로 그 소리가 불쾌하게 파고들었다.

서민석은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다리를 길게 폈다.

-과거에 너희 같은 놈들에게 어떤 형벌을 내렸는지 알아? 집안의 수치이니 최대한 조용한 방식으로 죽였어. 젖은 종이를 얼굴에 한 장 한 장.

그가 방식을 묘사하며 기괴하게 웃었다. 영하는 자신의 손끝이 차가워짐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손을 주물렀다.

무너진 제방처럼 최영하의 마음속에서 절망과 두려움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마른 입술을 연신 핥아도 그 어떤 것도 해소되지 않았다. 두려움도, 갈증도, 몸 전체의 떨림도.

-처음에는 살겠다고 발버둥 치고, 혀를 내밀어 종이를 뚫어 내도 한순간이야. 다시 종이가 올라가고 그게 겹겹이 겹쳐지면 더는 혀를 움직일 힘조차도 없고, 뚫어 내기엔 너무 두꺼워졌거든. 그렇게 숨이 막혀 아주 천천히 죽어 가는 거야. 더러움이 옮을까 봐 피를 보기도 싫어 그렇게 죽이는 거지.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 마지막 젖은 종이를 올리는 게 누구라고 생각해?

“닥쳐…….”

-네 아빠가 그럴 거야.

“…….”

-살기 위해 널 버릴 거야. 너 같은 아들 둔 적도 없고 모든 건 다 거짓말이라고.

아니.

영하는 알고 있다. 최세계는 그럴 일 없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잘난 남자가 자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어 안달이 난 것도, 절대 사랑을 입에 담지 않는 자신에게 상처를 받으면서도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것도. 대답 없는 사랑을 고하면서도 재촉하지 않는 그 마음도.

그는 끝까지 자신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하리라. 그것이 패착이 되어, 그 결과를 온통 뒤집어쓰고 시커먼 악의에 질식되어 죽는 것이 자신이 될지라도.

유리창 너머, 반대편에 검은 차를 세워 둔 남자가 황급히 카페를 향해 달려온다. 티셔츠와 머리카락이 마구 날리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남자를 확인한 서민석은 느릿한 몸짓으로 일어났다. 카운터로 다가가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 오더니 일부러 영하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가 테이블 아래의 휴지통에 좀 전까지 통화했던 휴대폰을 미련 없이 버렸다. 파란색 플라스틱 휴지통이 묵직한 물건이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진 반동으로 빙그르르 회전했다.

서민석이 빨대 끝을 물기 전에 내뱉었다.

“너에게 선택권을 줄게.”

네 아빠를 막을지.

네 아빠의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게 네가 될지.

*

집으로 돌아온 영하는 적막한 식탁 앞에 앉아 초점 흐린 눈으로 멍하니 세월만 흘려보냈다.

사진.

서민석.

승준이.

할머니.

아빠.

갑작스럽게 모든 일이 들이닥쳤다. 영하로서는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서민석을 향한 공격을 막는 것으론 어림도 없다. 영하는 앞으로 이런 일이 한 번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최영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다. 그러니 들켜 봤자 심장이 아리고 고통스러운 시선을 받는 것이 고작일 터였다. 하지만 최세계는 잃을 것이 너무나도 많다. 그가 평생 일궈 온 것과 앞으로 가질 것들이 너무 많은 남자였다.

사진이 퍼지면 끝이야.

아무리 호적이 달라 친척을 가장한다지만, 최영하는 그 호적에서 도드라지는 존재다. 혼자만 최씨였다. 잔뼈 굵은 기자들이 아마 조금만 파헤친다면 최세계와 최영하가 완전한 혈연으로 이루어진 부자 관계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것이다.

더는 안 된다. 더는 그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으로 비롯된 고통이 그에게로 향하는 상황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사랑받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따뜻한 손길과 사랑을 말하는 목소리. 열네 살의 삶까지 엄마를 향한 짝사랑으로 사랑을 학습한 영하에게는 그것이 전부였다.

‘마지막 젖은 종이를 올리는 게 누구라고 생각해?’

그게 자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차가운 대리석에 손바닥을 꾸욱 눌렀다. 계단을 여러 번 오르내린 사람처럼 호흡이 거칠어진다. 영하는 자신의 손으로 그의 입술을 틀어막는 상상을 하다 눈을 떴다.

자꾸만 나쁜 생각만 하게 된다. 우울감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를 열어 키친타월로 감싸 둔 야채와 반찬통 따위를 들여다보곤 도로 닫았다. 뭘 해야 하지. 종강이 코앞이었다. 당장 다음 주면 방학이 시작이다.

승준이가 사진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 분명 아빠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만, 알면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서민석에게 정말 확실한 증거가 남아 있으면 어떡하지?

야외 공간에서 관계를 맺은 적은 없지만, 요트 위의 사진이 찍혔다면 어딘가 몰래카메라를 심어 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모를 만약을 가정할수록, 불안이 커져 갔다. 영하의 몸집보다도 커져 집어삼켜질 위기였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한순간에 몰아닥쳤다. 3년을 기약했던 행복은 고작 4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어떡하지…….”

“뭘 어떡해.”

냉장고에 이마를 쿵 박고 망설이는 도중에 머리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전기에 맞은 것처럼 파드드득 떨린다. 크게 확장된 동공이 향한 곳은 최세계란 남자였다.

“서민석 그 새끼가 어딜 건드렸어.”

세계는 급하게 달려온 모습이었다. 말 그대로였다. 분명 차를 타고 왔을 텐데, 옷깃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고 관자놀이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아…….”

호흡을 길게 뱉은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넥타이를 훅 내리곤 셔츠를 헐겁게 만든 후에 영하의 뺨을 붙잡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양손으로 볼을 잡은 채로 몸 여기저기를 꼼꼼하게 훑어본다. 눈으로 하나하나 더듬듯이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그 인간은 해고야. 대체…….”

이윽고 탐색을 끝마친 그가 탄식처럼 토해 냈다. 멍울진 눈동자로 눈 맞추다 영하의 얼굴 위로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댄다.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아무 일 없었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그 자식이 스토커 신고까지 하면서 사람을 떨어뜨릴 이유가. 좀 더 노련한 사람을 구했어야 했는데, 내 탓이야.”

“…정말로 아무 일 없었어. 그냥…. 말만 좀 한 것뿐이야.”

“뭐라고 했는데.”

“……자기를 건드리지 말랬어.”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채근하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이해한다. 실제로 서민석은 영하와 세계를 향한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다. 다만 그런 이야기는 혼자만 듣고 끝내고 싶다. 아픔을 나누고 싶지 않아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허리를 감아 안았다.

“정말 아무 일 없었어. 자기 계속 건드리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아빠한테 말해 두라고 했어.”

대꾸 없이 조용한 호흡에 그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영하가 여기서 더 해 줄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숨기고 싶다. 눈꺼풀을 깜빡인 영하가 부러 피곤한 목소리를 내며 그에게 매달리듯 무게를 실었다. 어린아이처럼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이제 그 이야기 그만해. 피곤하기도 하고….”

“……그래. 그만하자. 다친 데 없으면 됐지.”

“응…….”

작은 동물을 쓰다듬는 듯한 손길로 등을 쓸어내린다. 느릿하고 규칙적인 접촉으로 불안한 감정에 약간의 안도가 찾아온다. 익숙한 체향과 품. 목소리. 피부의 감촉.

잃고 싶지 않다.

그러나 손안의 나뭇가지 하나만을 지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을 알고 있다. 그를 위해서는 널따란 숲이 필요했다. 호수도, 그 안에 머무는 야생 짐승들도, 사박사박 나뭇잎을 스쳐 가는 바람들마저도 필요했다.

슬픔에 잠긴 영하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쪽- 하는 입맞춤 소리 덕분이었다. 머리카락을 넘기고 이마에 입 맞춘 세계가 몽롱한 눈빛을 보고는 억지로 웃음 지었다. 어색하게 입가가 올라갔다.

“우리 영하 겁도 많은데 무서웠겠네.”

“별로 안 무서웠어. 가까이 오면 던지려고 유리컵도 꽉 쥐고 있었어. 서민석은 비리비리해서 별로 안 무서워.”

“하나 던져서 못 맞히면 어쩌려고 컵 하나만 들고 있어. 아예 테이블을 엎어 버렸어야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했네.”

“앞으론 경호원까지 붙일 거야. 거절은 없어.”

“응…….”

“미리 붙였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너무 안일했어.”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진짜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스스로 최면 걸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영하의 대뇌피질 깊은 곳에는 서민석과 할머니의 말이 묘비에 새겨진 죽은 자의 이름처럼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근데… 서민석 일 어떻게 됐어? 나한테까지 찾아온 거 보면….”

저녁을 하며 물었다. 영하가 생선구이와 씨름을 해 대길래, 뺏어 와 살을 발라 주던 그가 다정하게 대꾸했다. 힐끗힐끗 영하를 눈여겨보기도 했다.

“잘 해결되어 가고 있어. 원하는 죄명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실형 나올 거야. 꽤 오래 썩겠지. 아마 다음 주면 기소될 텐데. 구속 영장이 나오면 좋겠네. 압수수색만 없었으면 벌써 구치소에 집어넣었을 텐데……. 잠깐 시간 벌어 봤자 어차피 그 자식이 풀려날 일은 없을 거야. 그게 겁났겠지, 그 자식은.”

“으음…….”

갈치의 뼈를 완벽하게 발라냈다. 흰 살만 모아 영하에게 밀어 준 그가 칭찬해 달라는 듯 활짝 웃으며 바라본다. 생선 발라낸 걸 칭찬해 달라는 거야, 서민석을 잡은 걸 칭찬해 달라는 거야…….

“왜 석연찮은 얼굴이야?”

자신의 접시를 앞으로 가져온 그가 물었다. 최대한 표정 관리를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던 사이, 그가 스스로 결론을 지었다.

“하긴, 오늘 그런 일이 있었는데 표정이 좋을 순 없겠네.”

말꼬리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도록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세계는 더는 묻지 않았다. 영하도 그것을 바랐다.

*

다음 날, 늦은 오전에 잠에서 깨어난 영하는 양치와 세수만 하고서 세계를 찾아 집 안을 누볐다. 그는 2층 홈짐에서 운동을 한 모양인지 가운 차림으로 2층에서 내려왔다. 세계가 나선형 계단을 모두 내려올 때까지 계단 앞에서 눈에 잔뜩 힘을 주며 기다리고 있던 영하는 그의 슬리퍼가 1층 바닥에 닿자마자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뽀뽀해 줘.”

“애도 아니고. 뽀뽀가 아니라 키스라고 해야지.”

목에 매달리는 영하의 허리를 안아 감으며 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도 영하처럼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다만 영하는 거칠게 세수를 하느라 머리까지 온통 물이 튀었을 뿐이었다.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 몇 개를 털어 낸 세계는 아들의 몸을 가볍게 안아 올리곤 입술을 내렸다. 물기 있는 두 입술의 점막이 느릿하게 문질러진다. 목을 힘껏 감은 손가락이 파드드드 떨리고 발끝으로 바닥을 지탱한 다리가 한참 꼬였다.

“흣….”

나쁜 손이 있었다. 날씬한 허리와 움푹 파인 척추뼈 위를 더듬더니 둥그런 엉덩이를 꽈악 움켜쥔다. 엉덩이 주인의 미간이 잔뜩 찡그려졌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새겨졌다.

뽀뽀만 해 달라고 했는데 앞으로 들어온 손이 가슴을 더듬는다. 본인과 달리 판판하여 만질 것도 없는 것을 뭐 하러 만지나 싶었다. 영하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세계가 눈을 접어 웃으며 아랫입술을 소리 내어 빨아 당겼다. 춥춥 소리가 민망하여 눈썹이 구겨지자 이번엔 목울대가 진동했다. 그가 웃고 있었다.

온몸에 힘을 주어 가까스로 무거운 몸뚱이를 밀쳐 낸 영하는 어젯밤부터 고민하던 것을 꺼내 들었다.

“아빠, 나… 여행 가고 싶어.”

이왕이면 2박 3일이나 1박 2일로. 당일치기는 싫고, 너무 멀리 가는 건 더 싫었다.

“어디로.”

“저번에, 부산 갔잖아. 또 가고 싶어.”

“가면 뭐 해. 넌 어차피 구명조끼 입고 안에서 구역질만 할 텐데.”

세계가 그날의 일을 떠올리는지 콧잔등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그거랑은 다르지. 그땐 배 탄 거고! 이번엔 배 안 타면 되잖아. 그러면 그럴 일 없어.”

“너 그때도 뱃멀미 없다고 했잖아. 그래 놓고선 키스하다가 토하러 갔지. 충격적이었어. 그날 밤에 상처받은 마음 달래려 일기 쓸 뻔했다고.”

“뒤끝도 기네. 하… 진짜 아빠랑 대화하면 매번 이상하게 흘러가. 유치하게 된다고. 초등학생 된 것 같아!”

“네 정신 연령이 그 정도인 걸 내 핑계 대지 마. 난 지극히 정상이니까.”

정상은 무슨……. 아무튼 본론은 이게 아니었다. 고개를 가로젓고는 그의 팔뚝을 붙잡아 흔들었다. “여행 가자. 응?” 오뚝이처럼 흔들리는 몸을 하고서도 세계는 시큰둥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평소에는 늘 먼저 나가자고 하는 사람이 이번엔 딱히 흥미가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언제. 휴가철?”

“…아니. 이번 주 주말.”

“뭐가 그렇게 급해.”

“빨리 가고 싶어…. 그리고 8월 되면 사람 엄청 많아서 싫단 말이야. 그 전에 가야지.”

“뭐… 그거야 그렇긴 하지. 넌 사람 많은 거 싫어하니까.”

“가면, 손잡고 걸을래. 대신 아빠는 마스크 써.”

영하가 커플링을 낀 손바닥을 겹쳐 보며 수줍게 이야기했다. 제법 귀여운 행동에 세계의 목소리에 따뜻함이 담긴다.

“알아볼 사람 없어.”

“그래도 써. 그리고 숙소도 내가 정할 거야. 봐 놓은 데 있어.”

“어딜 가려고. 부산이면 오션뷰 호텔 널렸을 텐데.”

“호텔 말고 다른 데 갈 거야.”

“네 선택을 지지하기 힘들어질 것 같은데…….”

“모르겠고 이번엔 내가 가자는 곳 가야 해.”

“그래… 뭐….”

단호하게 나오니 낯빛이 좋진 않았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두 뺨을 손으로 붙잡는다.

사랑은 눈으로 오고 술은 입으로 오듯, 그의 애정은 체온으로 전해졌다.

*

“누가 보면 이민 가는 줄 알겠네. 무슨 짐을 그렇게 오래 싸?”

“국내 여행 처음이니까 그렇지. 해외여행 갈 땐 이것보다 더 오래 쌌어.”

“고작 하룻밤인데 옷을 무슨……. 패션쇼 해?”

“별로 안 챙겼는데. 그냥 옷이 부피가 큰 거야. 잔소리 좀 그만해. 진짜.”

투덜대자 상대방의 입이 다물린다. 그러나 여전히 문 앞에 비스듬하게 서서 팔짱을 꼬고 있었다. 덩치만 한 배낭에 옷을 욱여넣는 영하를 보고서는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기대하고 갔다가 실망할 것 같은데.”

“처음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기대 안 해. 아빠는 옷 안 챙겨?”

“그냥 이따 두세 벌 챙길 거야.”

등만 보이고 계속해서 옷을 작게 말아 가방에 넣는 것을 지켜보던 세계는 곧 흥미가 떨어졌는지 드레스 룸을 벗어났다.

얇은 반팔을 네 개째 집어넣던 영하는 드레스 룸 중앙에 있는 시계 장 밑으로 몸을 숨기곤 배낭 속에 넣어 둔 힙색을 꺼내 열었다. 그 안에는 오만 원권 지폐로만 묶은 돈다발이 꽉꽉 채워져 있었다. 매일같이 은행에 들러 조금씩 출금한 것이다. 그의 생일까진 아직 한 달 반이 남아 있다. 잠깐 그것들을 들여다보던 영하는 이내 속옷 몇 장을 지폐 위에 덮고 잘 잠기지 않는 지퍼를 억지로 잠갔다.

다시 옷을 챙겼다. 빠짐없이 잘 챙겨야 했다.

영하더러 뭐 하러 짐을 그렇게 많이 싸냐고 타박했던 최세계는 21인치 캐리어를 옆에 두고 섰다. 여름날 햇볕이 따갑도록 내리쬐었다. 골목길까지 차가 들어오지 못해 운전기사가 짐을 숙소 앞까지 내려다 주고 떠났다.

그는 영하가 예약한 숙소 앞에 서곤 말을 잃었다. 새카만 선글라스 아래 드러난 표정이 볼만하다. 굳게 다물린 입이 삐뚜름하게 올라가더니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아 주우욱 위로 올렸다. 숙소를 보고 꺼낸 말이 가관이었다.

“여기 폐가야?”

“무슨 소리야. 작년에 개장했다는데.”

“안 들어가 봐도 알겠는데. SNS 사진용으로 카메라 화각에만 그럴듯하게 담기도록 날림 공사 했을 거야. 방음도 단열도 최악이고 물이 샐지도 모르겠군.”

“짜증 나.”

“특급 호텔 두고 왜 이런 곳에…….”

“원래 내 나이 또래는 다 이런 데 와.”

“…….”

또래 이야기가 나오자 투덜대던 입이 꾹 막혔다. 신경질적으로 선글라스를 벗어 주머니에 넣은 그가 더 불평 없이 캐리어를 끌었다.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 둔 대문은 최세계의 키보다 낮아 허리를 굽혀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마침 대문턱에 캐리어 바퀴가 걸려 관자놀이에 힘줄이 솟아났다.

“안엔 예쁘잖아.”

“……그래. 예쁘네.”

그가 전혀 감흥 없는 투로 호응했다. 들어가자마자 시멘트 대신 나무 바닥이 밟혔다. 나무 타일이 없는 곳곳에 흰 자갈이 깔려 있었고, 마당 안쪽에는 담벼락 아래 깊게 파인 나무 조적 욕조가 있었다.

욕조 앞에 덩그러니 있는 작은 나무와 서까래를 드러내 현대식으로 인테리어한 한옥의 외관은 겉보기엔 멀쩡했으나 분명히 어설픈 데가 있어 평생 최고급만 입에 달고 걸치고 살았던 최세계의 눈에는 차지 않을 터였다. 그가 딱히 반기는 기색이 아니자 영하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찾은 숙소인데.

몸짓이 둔탁해졌다. 가방을 쿵 바닥에 내리고서 소파에 가서 앉자 캐리어를 벽에 얌전히 세워 둔 세계의 눈이 영하에게로 닿았다.

“저녁은.”

내가 밥만 먹는 식충이인 줄 아나.

소파 위에 다리를 길게 올리고 드러누웠다. 머리 위로 짙은 월넛 톤의 실링 팬이 회전하고 있다. 살랑살랑한 바람이 얼굴에 닿아 간지럽다. 대답 없는 영하 대신 숙소의 하자를 찾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둘러보던 세계의 등 뒤로, 잠시 후 조그마한 목소리가 닿았다.

“피자 먹으러 갈래.”

숙소 도착이 네 시였으니 저녁을 먹기에는 다소 이른 시각이었다. 바다까지는 16분을 걸어야 한다. 어차피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 두 사람은 걷기로 했다.

영하는 앞서 그에게 이야기했던 대로, 잘난 얼굴에 마스크를 씌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답답해 재킷도 벗어 던진 그는 얼굴의 절반을 하얀색 부직포로 가려야 했다.

드러난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으나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손가락 사이로 보상처럼 들어온 흰 손에 미간의 구김이 조금씩 덜어졌다. 햇볕을 가로막은 골목길을 완전히 나온 후엔 세계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굳이 마스크를 껴야 해?”

“누가 알아보면 어떡해. 맨날 뉴스 보면서 욕하는 아저씨랑 종일 인터넷 기사만 들여다보는 아줌마들은 알아볼 수도 있잖아.”

“좀 알아보면 어때. 사이좋은 가족인 줄 알겠지.”

“싫어.”

“뭐가.”

영하는 대답 대신 잡은 손을 앞뒤로 크게 흔들었다.

큰 도로를 마주하자 바다와 가까운 동네 특유의 짠바람이 뺨에 닿았다. 거주 지역을 벗어나 상업구로 나오자 금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 인파가 제법 붐빈다. 그들의 시선이 손을 잡은 젊은 남자 둘에게 흥미롭게 닿았다 떨어졌다. 평소의 최영하라면 절대로 견디지 못할 관심들이었다. 누군가 빤히 볼 때마다 움찔움찔 손이 떨리면서도 잡은 손을 무르지는 않는다.

미심쩍은 그의 눈초리가 닿았으나 영하는 애써 모른 체했다. 둥그런 광대에 가까운 뺨이 미미하게 붉게 달아올랐다.

마스크는 식당에 도착하고서야 벗을 수 있었다. 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마스크를 내렸으나 무시하고 메뉴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는 영하 앞에서 그가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마스크 쓴다고 이 얼굴이 가려지나.”

“나 루콜라피자.”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는 듯 묻지도 않은 메뉴명이 튀어나온다. 세계는 빨간색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괸 채로 손을 뻗었다. 메뉴판을 달라는 의미였다.

“영하 맥주 마실래?”

“아니. 안 마셔.”

“별일이네. 술 마시고 싶어 안달이더니.”

“나 그렇게 술꾼 아니야. 아ㅡ.”

말하다 문득 멈춘다. 세계가 힐끗 눈만 굴려 바라본다. 냉기를 머금어 시원한 유리 테이블 위에 손바닥을 꾸욱 눌렀다. 혼자만의 상상으로 헛기침하고는 다시 이어 말했다.

“자꾸 못 마시게 하니까 좀 그런 거지….”

“그래. 그럼 콜라나 마셔.”

깔끔한 답변과 함께 그가 손을 들었다. 빨간색 앞치마를 맨 종업원이 다가오고, 그가 주문한 음식은 정확히 20분 뒤에 테이블 위에 올랐다. 치즈가 산더미처럼 쌓인 시카고피자였다.

한 조각 들어 보니 치즈가 녹아 폭포수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영하의 두 눈에 이채가 새겨졌다. “맛있겠다!” 세계는 그 꼴을 보며 입에 대어 보지도 않고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손이 저절로 맥주잔으로 향했다.

피자는 두 조각이나 남았다. 아까웠지만 포장하려는 노력을 하진 않았다. 그가 딱히 먹고 싶어 하는 눈치도 아니었고, 영하도 썩 미련이 남지는 않았다. 식당의 유리문이 여러 번 반동하며 닫히는 순간 영하는 다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뭐 하는데.”

“몰라.”

“몰라?”

“응.”

“이번 여행은 네가 가이드하는 거 아니었어?”

“뭐 필요해?”

당당하게 대꾸하자 세계는 말을 잃은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마스크의 콧대를 꽉 누르고는 이어 말했다.

“일정 없냐고.”

“없는데?”

“일정 없이 어떻게 1박을 보내?”

“그런 게 왜 필요해?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거지.”

“그게 왜 안 필요한데?”

황당한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도저히 서로의 합의점이 맞물리지 않았으며 상대방을 전혀 이해하질 못했다.

영하는 일상에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시간 나는 대로 사는 거지 뭐. 물론 그는 데이트할 때도 30분 단위로 계획을 세워 오는 것을 알긴 했지만, 도저히 자신은 그렇게는 못 한다. 오늘의 계획은…….

“그냥 걸어.”

“어디까지. 길은 알아?”

“몰라. 그냥 해변 따라 걷다가 숙소 가면 되지 않을까?”

“이런 직무 태만 가이드라니…….”

그가 탄식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은 계획 없이 살아 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잖아.”

“하… 그래. 뭐… 가끔은 그런 것도 나쁘지 않겠지.”

손을 잡고 걷긴 했지만 해변은 아니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드러난 팔뚝에 내리꽂히는 햇볕이 바늘처럼 따가웠다. 다정하게 손을 잡은 모습과 반대로 사정없이 찡그리고 걷다 5분 만에 포기했다. 하얀 바닥에 햇빛이 반사되어 유럽도 아닌데 선글라스 없이는 바깥을 돌아다닐 수 없다. 결국 바닷가를 걷는 것은 해가 완전히 진 저녁으로 미루고 어딘가 어설픈 한옥 숙소로 돌아갔다.

세계는 덥다며 들어오자마자 다시 씻었고, 영하는 그사이 날씨를 확인했다. 중부지방은 내일 이른 새벽부터 대낮까지 비가 올 예정이었다. 가방에 들어 있는 작은 우산을 상기하며 부질없이 소파 위를 긁었다.

그가 들어가고 툭 닫힌 욕실 문을 멀거니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욕실에 같이 들어갈까 고민도 해 봤으나, 이내 접었다. 여섯 시 해변 열차를 예약하며 해가 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갈 시간이 되자, 세계는 다시 마스크를 껴야 했다. 영하가 건네는 마스크를 받아 끼면서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반대로 영하는 그에게 마스크를 쓰게 한 자신의 선택을 매우 흡족해했다. 마음 같아선 선글라스를 끼워서 완전히 가려 버리고 싶었으나, 범죄자처럼 보일까 봐 자제하기로 했다. 이런 노력에도 열차를 타기 위해 함께 줄을 선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보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를 온전히 독점하고 싶다.

“이거 한 번도 안 타 봤지? 처음이지?”

영하가 그의 허리춤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물었다. 느릿하게 들어오는 열차를 멈출 기세로 노려보던 세계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영하는 곧장 눈동자를 접어 만족스레 웃으며 그의 손목을 꽉 잡았다.

남들도 다 해 보는 별것 아닌 일이라도, 그가 자신과 처음 해 본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사소한 것을 나누고 싶었다. 그는 평생 특별한 것들만 하고 자라나 영하가 생각하는 평범한 행위에는 의외로 경험이 없었다.

“이거 타고 마지막 정류장에서 내린 뒤에 거기서 해변을 걷는 거야.”

“이제 다시 가이드 취직했나 보네.”

“응. 오늘만 하고 내일은 퇴사하려고.”

“내일은 가이드 안 해 주려고?”

“응…. 그날은 자유 여행이야.”

“가이드가 꼼꼼하질 못하네.”

조금 머뭇대며 대답하니 세계가 픽 웃었다. 마스크 아래로 올라간 입꼬리가 상상이 갈 듯한 웃음소리였다. 미소에 답해 주지 못하고 눈만 굴리다 그를 잡아끌어 열차에 올라탔다.

남들보다 긴 다리를 주체하지 못한 세계가 뻗은 다리를 이리저리 접어 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의 옆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은 영하는 출발하자마자 휴대폰을 들었다.

하늘은 회색과 주황색이 마블링처럼 자기주장을 하며 섞인 모습이었고, 눈이 부시게 저무는 태양의 붉은빛이 파도치는 바다 위에 울렁이는 노란 선을 그었다.

아름다운 대자연의 광경을 눈앞에 두고서도 영하가 찍고 싶은 것은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풍경이 아니었다. 꼿꼿이 앉아 창밖을 응시하는, 노을이 번진 그의 옆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찰칵- 소리가 들리자 조용히 고개가 돌아간다.

“몰래 찍으면 혼난댔지.”

“몰래 찍은 거 아니야. 대놓고 찍었어.”

찍은 화면을 내밀며 대답했다. 화면을 들여다본 세계는 눈가를 좁히며 투덜거렸다.

“찍을 거면 제대로 찍어.”

“잘 나왔는데.”

“그다지.”

“그럼 마스크 벗어 봐.”

말하면서 동시에 그의 마스크를 벗겼다. 그리고 곧장 손가락으로 버튼을 계속 눌렀다. 빨리 찍어 버리고 다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릴 계획이었는데, 타다다다닥- 하고 연사 찍는 소리가 요란해 같은 칸에 탄 사람들의 시선이 오히려 집중된다. 그가 안을 흘끗 둘러보곤 평온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다 쳐다보는데.”

“나도 알아…!”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이네.”

휴대폰을 허벅지 위로 내던지고 누가 더 볼세라 황급히 마스크를 다시 씌웠다. 실수로라도 벗겨지지 않게 귀에다 제대로 걸고 나서야 푸욱 한숨을 흘렸다. 조금만 덜 잘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이미 볼 사람 다 봤는데 마스크를 다시 씌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영하는 종종, 아니 꽤 자주 그를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 꼭꼭 숨겨 자신만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므로, 오늘만큼은 마스크를 씌우고 다녀야 했다. 간접적으로라도 그 소망을 이루게 되는 거니까.

분명 낮엔 살이 따갑도록 더웠는데. 해가 진 후의 바닷바람은 영하의 상상보다 매서웠다. 바다와 가까이 지낼 겨를이 없었으니 영하가 바닷가에 온 것은 한 손에 꼽을 만큼 한정적인 경험이었다. 열차에서 내려 해변가에 발을 내디디며 나온 첫마디가 “춥다.”였다.

“아무도 없어서 신기해.”

“아직 해수욕할 날씨는 아니니까.”

세계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스크를 벗었다. 영하가 조금 불만스러운 기색을 엿보였으나 깔끔하게 무시하곤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자신에게 뻗은 커다란 손바닥을 물끄러미 보던 영하가 기쁘게 그 손을 맞잡았다. 가볍고 부드러운 손길이 자신을 힘 있게 잡아챈다. 바람이 차니 비슷한 온기마저 반가웠다.

해변가는 놀라울 만큼 한적했다. 시커먼 바닷물이 끝도 없이 펼쳐져 수평선과 하늘이 겹쳐진 광경. 지독한 어두움에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 법도 했으나, 그가 곁에 있으면 무섭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치기 어린 생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모든 것을 막아 주길 기다리고 품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은 전혀 어른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영하는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잡은 손이 뒤로 훅 당겨지자 세계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의 가슴팍이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영하는 대뜸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모래사장 안으로 신발이 푹 파묻혔다.

“갑자기.”

말과는 달리 세계는 놀란 기색 없이 영하의 등을 토닥였다. 이런 식의 어리광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수험생 시절엔 학구열이 이글이글한 친구들 사이에서 뒤처지는 것이 속상할 적에도 그에게 안겨 들어 어린애 흉내를 냈다.

“그냥 추워서.”

허술한 핑계를 댄다. 그러자 가만히 내려 보던 최세계의 얼굴이 입 맞출 듯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을 뿌리치며 이마를 손으로 막았다.

손바닥 아래에서 눈썹이 와자작 구겨지는 감촉이 선연하다. 세계는 입술 끝을 꿈틀거리고는, 방심한 틈을 타 아들의 볼에 재빠르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모래사장 위에서 몸이 펄떡 튀어 올랐다. 새된 목소리가 그 사이를 파고든다.

“밖에서 이러지 좀 말라고!”

“그럼 뭐 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그냥 구경하러 온 거지.”

“그래?”

되물은 그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평소랑 다른 긴장감을 주려고 온 거 아니었어?”

“여행하는데 긴장감을 왜 줘?”

“내가 단어 선택을 잘못했네. 평소랑 다른 연인 놀이를 하려던 거 아니었어?”

거센 해풍이 귀를 때리는 소리와 섞여 들었다. “바람 엄청 부네.” 혼잣말을 뱉은 그가 영하의 등 뒤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부는 방향이었다.

사나운 바람을 등지고 선 남자의 앞에서 영하는 우물쭈물 목소리를 낮췄다. 비밀을 들켜 귀 끝으로 뜨겁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무, 무슨…….”

“오늘 내내 아빠라고 안 불렀잖아. ‘있잖아.’, ‘아— 아니야.’ 이렇게 바보처럼 굴면서까지.”

아, 진짜…!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잘 아는 거지. 영하는 두 눈에 손바닥을 꾸욱 누르며 끙끙대는 강아지처럼 대답했다.

“모른 척하지…….”

“뭘 자꾸 모른 척하래. 난 모르는 게 제일 싫은 인간이야.”

최세계가 툭 튀어나온 영하의 아랫입술을 꾸욱 내리누른다. 영하는 나약한 손길로 그의 손목을 밀어냈다. 혼자서만 한 다짐을 그에게 들켰다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 대답하기도 힘들었다.

오늘 하루만큼은 그와 가족이 아닌 사랑하는 사이로만 남아 보내고 싶다는 것이 이번 여행 계획이었다. 보호자와 피보호자가 아니라, 나란히 선 연인으로.

“아빠가 아니면. 자기야, 라고 하려고?”

“또 그 소리. 안 한다고 했잖아.”

“해 봐. 어차피 아무도 없잖아.”

“…….”

허리를 굽혀 마주 보고 이야기하던 세계는 파도 소리만 들릴 뿐, 영하의 침묵이 길어지자 해 주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의 팔을 붙잡은 영하가 조개껍데기가 박힌 모래사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를 불렀다.

“자기…….”

눈가가 세로로 좁아진다. 빽빽한 속눈썹이 눈동자를 완전히 감췄다. 그는 숨을 크게 한 번 뱉어 내고는 수줍은 듯 떨리는 영하의 턱을 다소 거칠게 잡아 올렸다.

“뭔가 이상해.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자기라고 불러 줘도 만족해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영하의 얼굴을 뜯어보듯 빤히 바라보더니 오늘의 일을 복기하려는 듯 눈동자가 옆으로 굴러간다. 그가 그 잘난 머리로 의구심의 정체를 알아낼까 싶어 셔츠를 걷어 올린 그의 팔뚝을 매만지며 얼른 대답했다.

“꿍꿍이 있어.”

“뭐?”

“오늘은… 마음먹은 날이거든. …한테.”

“뭘.”

세계의 대답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불안함을 안은 시선이 최영하의 작은 얼굴 여기저기를 훑었다. 감정의 기색을 엿보는 모습이었다. 그가 무슨 상상을 하기에 불안해하는지 알면서도, 확신할 수는 없다.

영하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며 명치 위를 손으로 문질렀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다. 세계는 숨도 쉬지 않는지 미동 없이 영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뜨겁도록 방망이질 친다. 그의 손에 손가락을 얽으며 마음에 둔 것을 드디어 토해 냈다.

“사랑한다고 말해 주려고.”

“…….”

“사랑해.”

깍지 낀 손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분명 자신이 떠는 것은 아니었다.

심연처럼 깊은 눈은 흔들림 없이 영하에게 닿아 있었다. 떨리는 손을 제외하면 그는 꼭 근육이 얼어붙은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입술이 꾹 다물려 있었고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마치 사진 속 피사체 같은 모습이었다.

찰나가 영원 같았다. 영하가 잠시간의 아득함을 느끼고 정신을 차리자, 그에게 힘껏 끌어안겨 있었다.

세계가 여러 번 등을 고쳐 안았다. 어깨에 턱이 닿고 모든 것을 꺼뜨릴 듯 깊은숨이 아래로 터져 나왔다. 영하는 마음속 깊이 숨겨 두었던 진심을 내보였다.

“지금까지 말 안 해 줘서 미안해…. 그냥, 말하는 게 무서웠어. 그리고 안 하다 보니까 더 머쓱해져서…….”

“됐어. 말하지 마.”

세계는 곧장 자신의 말을 취소했다.

“아니. 말해. 계속 말해.”

“나는… 처음부터 사랑했어. 아무도 이해 못 하겠지만….”

“남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어?”

고개를 저었다. 마음과는 다른 행위였다. 그가 더 거칠게 안았다. 몸이 쥐어짜이는 기분이라 숨이 턱하고 막힌다. “아파!” 얼굴을 찡그리고 끙끙대자 단단한 팔의 힘을 풀어낸 세계는 예고도 없이 입술을 겹치려 고개를 비틀었다. 영하도 꺾었다. 목을 있는 대로 꺾으며 입술을 피하려 안달이었다.

“안 돼, 안 돼!”

그가 거칠게 호흡했다. 부푼 흉곽이 오르내리는 것이 리넨 셔츠 아래로 드러날 정도였다.

“넌 꼭 밖에서 날 이렇게 만들더라.”

조금은 둔탁한 손길이 뒤통수를 쓰다듬는다. 식당들이 즐비한 방향을 확인한 세계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호소했다.

“해변에 우리뿐이야.”

“그래도 모르잖아. 혹시……. 당분간 밖에서….”

“밖에서 손도 안 잡기로 했지. 하지만 잡았잖아.”

세계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키스는 안 돼.”

“내가 지금 무슨 기분인지 넌 평생 가늠도 못 할 거야.”

“…….”

그가 절정에 다다른 흥분과 들뜸을 감추지도 못한 안색으로 말했다. 바보 같네. 모를 수가 없는 얼굴로 무슨 말이야. 가만히 두다간 억지로 입이라도 맞출 기색이다. 영하는 그의 주머니에 대충 욱여넣은 마스크를 빼어 들곤 키스하지 못하도록 얼굴에 씌워 준다.

세계는 마스크로 다시 얼굴을 가린 것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이내 두 눈이 가늘게 접히도록 웃었다. 절절한 행복에 빠진 남자의 모습이었다. 감정을 숨기지 않는 그의 모습을 가슴속 프레임에 깊게 담았다. 이 남자의 솔직함도 사랑했다.

*

숙소로 가는 길에 칵테일을 종류별로 잔뜩 사고 안주 몇 가지도 함께 포장했다. 숙소의 철문을 넘어서자마자 달려들 줄 알았던 세계는 예상외로 얌전했다. 소파 앞 테이블에 칵테일을 차례대로 놓을 뿐이었다.

“치킨 식겠다. 먹고 나서 씻을래.”

영하는 바삭하게 튀겨진 치킨 위에 손바닥을 올리며 말했다. 따뜻한 온기가 손아래로 느껴진다. 영하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자, 그가 옆에 따라붙었다. 칵테일과 치킨에는 관심도 없고, 곧장 영하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었다. 어쩐지 잘 참는다 했어.

“그만 만져.”

“너도 평소에 내 거 만지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할 거 다 해 놓고 발뺌이라니. 실망이네.”

납작한 가슴을 움켜쥔 손이 점점 짓궂어졌다. 연한 유두를 아프도록 꼬집더니 엉덩이 아래를 받쳐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히고 입술을 붙였다.

말랑한 입술을 빨아 당기고는 안쪽으로 침범해 혀를 얽었다. 울퉁불퉁한 입천장을 집요하게 문지르니 어깨 위로 영하의 손이 올라가 셔츠가 구겨지도록 세게 붙들어 쥔다. “흐으응….”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칵테일이 네 잔이나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내려간 티셔츠를 다시 걷어 올리며 움푹 파인 척추뼈 위로 간지러운 손끝이 닿아 등이 둥글게 굽었다. 우으응. 짧게 깎은 손톱이 흰 살갗 위를 살살 간지럽혔다.

“간지러워!”

아이처럼 몸을 흔들고는 어깨를 쑥 밀쳐 냈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세계의 머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영하는 너른 창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조적 욕조를 보며 말했다.

“밖에… 노천탕 쓰고 싶었는데.”

“밖에서 섹스하는 거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안 좋아하거든. 그냥 씻고 싶다고.”

“안타깝지만 여름에 야외 욕조 쓰는 건 모기한테 수혈해 주는 행위야.”

“제발 그런 무드 없는 이야기 좀 하지 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지.”

분위기 깨는 데에는 뭐 있다니까. 투덜거린 영하는 라임 슬라이스가 둥둥 떠 있는 하얀 칵테일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색소가 들어 있지 않으면 도수가 높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세계가 칵테일을 받아 마시는 것을 확인하고는 치킨 날개를 입에 물며 늘 궁금했던 것을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있잖아. 예전에 다른 사람 사귈 때도 나처럼 이렇게 맨날 이상한 대화만 했어?”

칵테일을 맥주처럼 들이켜던 남자의 이맛살이 찡그려진다. 세계는 자못 완고한 표정을 지으며 영하를 흘겨보았다.

“최영하. 자꾸 과거 이야기 묻는 거 매너 없는 짓이라고 안 배웠어?”

“어디서 배워. 난 처음인데 다…….”

그러자 나직이 나오는 대답에 세계가 할 말을 잃었다. 조용히 입을 다문 그는 잠깐의 침묵 뒤, 침울하게 닭 날개를 뜯는 영하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이미 몸 위에 올려놓고선 얼마나 더 붙어 있겠다는 심산인지 손아귀가 허리를 아프도록 쥐고 있었다.

시무룩한 듯 불퉁한 눈빛을 올려다본 그가 고해성사하듯 이야기했다.

“기억 안 나.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던 사람들이라. 무슨 대화를 했는지 어떻게 알겠어. 그냥 그저 그랬겠지.”

“…스물일곱이나 사귀어 봤다면서.”

“무슨 소리야? 꿈꿨어? 어디서 나온 숫자야. 스물일곱은.”

“전에 아빠가 그랬어. 과거에 여자 친구 스물일곱이었다고.”

“…내가? …언제?”

순간적으로 눈동자가 확장된다. 말을 더듬으며 되물었다. 영하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정말로 그가 이야기해 줬다. 언제인지 기억도 선명했다. 영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중간고사를 앞둔 열다섯 살. 서재에서 잔업을 하던 그의 곁에 앉아 문제집을 풀며 물었다. 그의 업무와도 펼쳐 둔 국어 교재와도 전혀 관련 없는 질문이긴 했으나 영하가 내내 궁금하던 것이었다.

‘아빠, 여자 친구 몇 명이나 만나 봤어요?’

‘스물일곱.’

만년필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그가 곧장 대답했다. 여전히 모니터에 잔뜩 집중한 모습이었다. 열다섯의 최영하는 지금보다도 더 순진했으니 그의 성의 없는 대답을 의심조차 못 하고 믿었다.

“진짜 그랬어. 물어봤단 말이야. 내가.”

“기억 안 나. 스물일곱이라니 말이 돼? 일상생활 포기하고 연애에만 목숨 걸어야 그 숫자가 나오겠네.”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너 도대체 날 어떤 인간으로 보는 거야? 너한테 내 이미지가 그런 건가? 여자에 환장한…….”

“아니, 나는 아빠가…. 에이, 몰라! 아빠가 그러니까 당연히 그런 줄 알았지.”

오늘 하루는 아빠라고 부르지 않으려고 했는데 망했다. 이미 뱉어 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짜증이 나 여러 번 아빠라고 부르곤 기름이 묻은 손을 휴지에 닦아 냈다.

“그러니 내가 밖에만 다녀오면 도끼눈으로 쳐다본 거네. 아무튼, 난 그런 사람 아니야. 생각을 고쳐먹어. 그리고 과거는 더 묻지 말고.”

“으음… 궁금한데.”

“궁금해하지 마. 내가 어떤 인간을 무릎 위에 올려 앉혔겠어. 불가능한 짓이지.”

스물일곱… 하고 이어 중얼거린 그가 얼마 남지 않은 칵테일을 마저 마셨다.

“나만 처음인 건 너무 억울하잖아. 밸런스가 안 맞아.”

“억울할 것도 많네.”

“그래도.”

“나도 네가 처음이야.”

“좀 성의 있게 거짓말을 해.”

뺨을 실룩이며 받아치는 대답에 그가 조용히 웃는다. 무슨 의미일까. 알코올의 흔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흰 얼굴을 보고는 그의 목울대 위로 손가락을 올려 진동을 느꼈다. 가만히 그것을 느끼던 영하는 손을 내려 그의 가슴 중앙에 가져다 댔다.

“사랑해.”

그렇게 말하고 가슴 위를 조금 내리눌렀다. 속삭이는 사랑에 익숙해지려는 사람처럼 세계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으나 손바닥에 느껴지는 야단스러운 번짐과 울림으로 이 남자의 감정을 온전히 엿볼 수 있었다.

이어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목덜미를 훑었다. 따뜻한 체온이 영하를 당겨 안았다. 자신의 일생에 유일하게 뜨거움을 안겨 준 남자였다.

눈가가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불안함과 미안함이 최영하란 시커먼 바닷속에서 쉼 없이 자맥질한다.

얼른 고개를 돌려 눈동자에 잔뜩 힘을 준다. 연한 초록색의 칵테일 잔을 집은 영하는 애써 웃는 얼굴로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또 마셔?”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늘 밤 인사불성으로 취해야 한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영하의 바람과 달리 최세계는 도수 높은 칵테일을 마시고도 이성을 붙들고 있었다. 마치 영하의 의도를 아는 것처럼. 술에 취해 나른한 눈매를 하고서도 아들의 허리를 옭아매고 놔주지 않았다. 밤이 이르게 내린 바닷가는 완전한 암흑으로, 시간은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빠.”

“왜.”

초조하게 허벅지를 문지른 영하가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천장에 별이 보이는 창문 아래 누운 두 사람은 알몸이었다. 취기가 몸에 돌자 다짜고짜 티셔츠 위로 영하의 납작한 가슴을 빨아대는 남자 때문에, 계획에도 없던 섹스를 했다. 아직 그의 성기가 붉게 오른 엉덩이 사이에 머물렀다. 영하는 빠듯하고 더부룩한 아래를 느끼며 다시 한번 그를 채근했다.

“아빠.”

“왜. 말했잖아.”

“나, 내일 오전에 잠깐만 친구 만나도 될까? 아니. 아침 일찍.”

“아침 일찍? 친구? 어디서. 네가 부산에 친구가 있었어?”

아침 일찍. 영하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자신도 그 사실을 알기에 재빠르게 덧붙였다.

“아빠 집에 가기 전에. 엄마랑 살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 친구.”

찡그린 남자의 눈가 위로 손가락을 올려 차분히 문지른다. 세계는 석연찮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영하의 손길을 느끼곤 눈에 힘을 풀어내렸다.

영하가 그와 만나기 전의 삶은 완전히 세계의 손아귀 밖이었다. 초등학교 친구라고 하니 그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술을 길게 다물었다. 조금 화를 낼 것 같아 영하는 일부러 목덜미에 뺨을 문지르며 아양을 부렸다. 그를 이기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애인이랑 데이트 와서 친구를 만나?”

“애인이랑은 응… 또 올 수 있지만… 친구는… 거의 십 년 만에 만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부모님이 여기서 자영업 하신대.”

울먹이지 않으려 맨 살갗을 꼬집었다. 세계의 마음을 돌리려 고개를 파묻은 것이 잘한 선택이었다. 제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물기가 새어날까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친구는 부산에서 오래 살아서. 데이트 코스도 잘 알 거야. 아침에 잠깐만 만나서 이야기하고 내가 가이드 받아올게.”

“현지인이 주는 코스가 최고긴 하지.”

“오늘 내 여행 일정이 어설펐던 거 같아서…….”

“됐어. 충분했어. 그만 말하고 이만 자.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지.”

“싫어. 이거 넣고?”

볼멘소리를 터뜨린 영하의 시야는 하반신으로 향하는 것에 세계가 눈초리를 가늘게 접어 웃었다. 마른 목 위로 입 맞춘 그가 슬그머니 허리를 뒤로 당기자, 안쪽 깊이 파고들었던 귀두가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빼 줄 테니 한 번 더 말해 봐.”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그의 목소리는, 자장가를 노래하는 오페라 가수처럼 차분하고, 부드러운 음성이었으나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였다.

“사랑해.”

사랑을 말하는 제 입술 위로 닿는 따뜻한 남자의 체온을 느끼며 영하는 죽어갔다. 애초에 역겹고 추악한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욕심을 낸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게 파문이 일고 화살이 되어 결국엔 그의 가슴을 찔렀다.

*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누군가 도끼로 뒤통수를 여러 번 찍어 누른 듯한 통증이었다.

잠에서 깨어나 짜증부터 낸 세계는 머리를 쥐곤 엎드려 한숨을 연이어 뱉었다. 다섯 번째 한숨을 쏟아 낸 후 손만 뻗어 옆을 더듬는다. 자리가 비어 있었다. 빗물이 때리는 창밖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벌써 오전이란 이야기였다. 정말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몇 시야…….”

영하가 벌써 일어난 것을 보아 못해도 아홉 시다. 어차피 주말이니 늦게 일어나도 상관은 없었지만, 계획이 틀어지면 그날 내내 묘한 패배감이 느껴져 곤란했다.

흐릿하게 눈을 뜨고 협탁 위 휴대폰을 들어 보니 켜지지 않는다. 어제 충전기 꽂았던 걸 기억하는데. 칵테일 네 잔을 내리 마셨으니 자다 일어나 충전기를 빼 버렸다 해도 놀랍지 않은 일이다.

전원 버튼을 켜곤 도로 눈을 감았다. 숙취 해소제라도 사 둘 걸 그랬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익숙해질 때쯤 다시 눈을 떴다.

일어나야지.

머리가 부서지는 통증을 참으며 세계는 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집과 달리 어설픈 숙소에는 안방에 딸린 욕실이 없다. 거실로 나가 자연스레 욕실로 향하려던 세계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낯선 공간의 기류가 마치 불협화음처럼 뒤틀리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었다. 단지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어서가 아니라……. 비어 있다.

“영하야.”

불러도 대답이 없다. 잠시 몽롱하게 침대에 걸터앉은 세계는 전날 밤과 이른 새벽을 되새겼다. 그렇지. 영하는 친구를 만나러 가겠다고 했다.

‘어디 가.’

‘아. 친구 만나러. 두어 시간만 만나고 올게.’

‘지금 몇 시인데.’

‘여덟 시. 금방 다녀올게.’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깐 깬 그가 눈도 뜨지 못하고 물었다. 영하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들렸다. 아마 현관에서 대답한 모양이었다. 어제 이미 그러라고 허락했으니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어 대답 없이 도로 잠들었다.

그나저나. 그러고도 한참을 잔 것 같은데. 아직 안 들어온 건가.

켜진 휴대폰을 들어 본다. 시간은 열한 시 사십 분. 여덟 시에 나간 영하가 다시 돌아와야 할 시간이었지만, 친구와 대화를 하다 보면 조금 늦어질 수도 있다.

“…….”

사소한 것 하나하나 통제하려 들면 피곤해하겠지. 하지만 알면서도 세계는 자꾸만 기시감이 들었다. 영하는 돌아올 텐데. 찝찝하게 내려앉은 이 습기 때문인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결국 세계는 참지 못하고 영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Drrrr-

벨 소리는 안방에서 울렸다. 반대편 협탁 위에 영하의 휴대폰이 가지런히 올라 있었다.

[아빠]

화면에 뜨는 글자를 응시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단단하게 굳었다.

‘친구 만나고 올게.’

타지에서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나는데 휴대폰 없이 그게 가능한가. 설령 두고 출발했더라도 곧바로 가지러 와야 한다. 게다가 영하는 제 새끼처럼 휴대폰을 품에 끼고 사는 편이었다.

몸을 돌려 빠르게 걸었다. 현관에 신발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짐을 넣어 둔 슬라이딩 도어를 열었다. 거칠게 열린 문짝이 덜커덩거렸다.

“…….”

남색 기내용 캐리어 하나만 덜렁 남아 있었다. 최영하의 몸만 하던 백팩은 흔적도 없다.

빗줄기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그의 눈과 귀를 교란했다. 영하가 떠난 시각이 여덟 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푸른빛 자락이 겨우 일렁이는 새벽이었다.

“…잠깐 늦는 거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는 창백해진 뺨을 쓸며 마당이 훤히 내다보이는 거실로 향했다. 통창과 가장 가까운 소파에 앉아 대문을 주시했다. 언제든 영하가 문을 여는 순간을 가장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는 곳이었다.

온종일 비가 퍼부었다. 며칠간의 가뭄에 사죄라도 하는 양 먹구름은 세차게 비를 쏟아내며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세계도 아주 오랫동안 같은 자리를 고수했다. 마치 시체처럼 굳어 한 곳을 응시하는 그의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날이 차가워 걱정이 든다. 영하가 우산을 가져갔을지 모르겠는데.

세계는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었다. 저 키 작은 철문을 열고 들어온 영하가 비에 맞았다며 투덜대는 목소리와 자신의 품에 안겨드는 감각을.

‘휴대폰 깜빡하고 두고 간 거야. 웬일로 또 내가 길을 잘 찾아서 벌써 지하철에 타 버려서… 그냥 내 감만 믿고 갔어. 많이 걱정했어?’

하늘을 빼곡하게 채운 먹구름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더디게 느껴졌으나, 어느새 바깥은 완연하게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한숨 같은 밤, 비가 일으키는 술렁임이 그에게까지 닿았다.

팔걸이에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묵직한 눈꺼풀을 감았다 뜨자 눈동자가 쓰라리다. 세계는 비척대며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여전히 영하는 없었다. 언제나 제 품에 있을 줄 알았던 아이가 사라졌다.

불거진 목울대가 아래위로 오르내린다. 홀로 남은 캐리어를 노려보는 눈동자에 확신이 엷어졌다. 기다린다면 영하가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사라진 곳에는 다른 감정이 채워졌다.

“…….”

그럴 리 없다고. 지나친 속단이라고 끊어질 듯한 머릿속에 외치면서도 그는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지난밤, 사랑을 말하던 영하가 그를 버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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