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4. 정의 definition
평일 아침에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최세계는 영하에게 아침밥을 먹이자마자 소파로 안고 가더니 티셔츠를 올려 가슴을 빨아 당겼다. 사선으로 열린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가느다랗고 촘촘한 빛이 숙인 세계의 등 위로 굽이쳤다. 영하는 축축하게 닿는 혀의 감촉에 손가락을 꽈악 쥐며 헐떡였다.
“아침에는, 안 한다고…!”
“오늘은 학교 안 가잖아. 화분에 물 주느라 고생했으니 밥은 먹이고 해야지.”
둥그렇게 뜬 눈가에 입 맞춘 그가 손을 내려 네이비색 잠옷 바지 속에서 성기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짓 몇 번에 순식간에 커진 성기가 영하의 벗은 엉덩이 사이로 닿았다.
엉덩이골 위로 느리게 성기를 문지른 세계는 영하의 다리를 벌리게 하곤 구멍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부드러운 허벅지 사이로 손등이 마찰하고, 다물린 구멍은 몇 번 만져 주자 금방 미끈한 액이 틈새를 비집고 흘렀다. 세계는 물을 흘리는 아래에 중지를 천천히 밀어 넣었다. 좁은 안을 느리게 벌리는 감각에 입술이 벌어진다. 다가온 그가 영하의 아랫입술을 빨며 낮은 목소리로 아들을 종용했다.
“싫으면 말해.”
싫다고 안 하는 걸 알고서 하는 말이었다.
빠르게 들어온 남근의 끄트머리가 결장을 열어 푹 박혀 파묻혔다. “우으응…!” 발꿈치가 소파 바깥으로 빠져나가 흔들렸다. 등받이가 낮은 소파 위를 더듬던 손은 올라탄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 손톱을 세워 두꺼운 원단을 세차게 긁어 낸다. 부우욱- 원단이 긁혀 나가는 동시에 구멍에서 빠져나온 성기가 거칠게 안으로 쑤셔 들었다.
“아흑! 아! 아읏… 아빠!”
몸이 세차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영하의 오른쪽 다리는 등받이 위에 오금이 걸쳐져 있었고, 반대편 다리는 넓게 벌어져 완전히 안쪽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공에서 나풀대던 손이 비틀대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최세계의 배 위를 어루만졌다. 손가락 끝에 툭툭 걸리는 근육의 모양새를 가늠하는 건 금방 끝나 버렸다. 격하게 흔들리는 몸에 손이 다시 허공으로 떨어졌다.
“아흑, 응…!”
너무 빨라. 몸이 세차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영하는 뇌 속을 파고드는 듯한 아래쪽의 격통 같은 쾌감을 느끼고 온몸의 근육을 바짝 굳혔다. 이어 한 번도 만져 주지 않은 성기에서 흰 액이 뿜어져 나왔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자극적인 섹스 속에서 영하는 완전히 뒤로 느끼는 몸이 되어 버렸다.
“아, 아, 아빠, 아아 싫어! 아, 이러지 마… 너무, 아… 빨라서…!”
부푼 기둥이 거칠게 빠져나갈 때마다 성기를 꽉 문 항문 안쪽의 살점이 따라붙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영하의 얼굴 바로 옆에는 최세계의 오른손이 소파를 짚고 몸을 지탱하고 있었고 두 눈에서 어룽거리던 눈물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나면 열기를 가득 품은 최세계의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영하는 자신의 눈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헐떡였다. 그가 집착하듯 만져 대던 아랫배가 간지러웠고, 그 뒤에는 무차별적으로 안을 헤집어 대는 아버지의 남근이 존재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가 빠져나왔다. 내민 입술에 그가 입 맞추기 직전, 영하는 고개를 내젓고 그의 어깨와 승모근 부근을 세게 쥐며 아래를 조였다.
“아. 흐읏, 힉, 흐앗, 아, 아, 아으응, 아…!”
꼴사나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끌어안자 그가 퍽― 하고 거칠게 안으로 쑤셔 박은 채로 사정했다. 뜨끈하고 굴곡진 내부 안으로 정액이 쏟아져 내렸다.
엉덩이에 바짝 붙인 사타구니를 느릿한 몸짓으로 문지른 세계는 사정이 끝난 후에도 삽입한 채 영하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납작한 몸체에 조그마하게 톡 튀어나온 것이 손가락에 걸렸다. 분홍색 돌기를 정면으로 꾸욱- 눌러 주면 영하는 곧 물기 어린 신음을 내며 끙끙거렸다. 다른 쪽도 만져지고 싶어서였다.
“흑, 힘들어….”
최세계의 커다란 몸뚱이가 계속 위에서 내리누르고 있으니, 쾌락과 고통이 동반한 신체적 고충으로 숨 쉬는 게 버거웠다.
움직이지도 않는데 헐떡이며 멍한 눈을 하는 꼴을 보며 세계가 허리 뒤를 받쳐 몸을 안아 들었다. 다리 위에 올려 앉혀서 두 번째를 이어 갈 예정이었다.
영하는 삽입하면서 가슴을 빨아 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럴 땐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끅끅대며 울기만 했다. 다만 지금의 영하는 삽입한 채로 그에게 달랑 안겨 허벅지에 엉덩이가 내리눌러지자마자 간드러지게 신음하여 아래를 떨었다.
“아응…!”
빠듯하게 맞춰진 아래가 세게 조여들었다. 약한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의 품 안에서 파드득 세차게 몸이 떨리더니, 손자국이 난 엉덩이를 바깥으로 내밀며 물을 뿜어냈다.
절반이 빠져나간 성기 옆쪽으로 맑은 액이 타고 엉덩이를 적셨고, 세계의 기둥뿌리로도 흘러내려 그의 사타구니까지 물로 흥건했다. 하체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감각에 세계가 가볍게 타박했다.
“흐아악…….”
“뭘 했다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뒤로 가는 게 의아한지 미간을 좁히고는 픽 웃었다. 영하는 수치심에 목까지 벌겋게 물들이고 최세계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야해 빠져서.”
“흐…….”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틀린 말이 아니라 영하는 그렇지 않다고 변명도 못 한 채로 품에 안겨 있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세계는 아래가 흠뻑 젖은 영하의 하체를 그의 티셔츠로 아무렇지도 않게 닦아 내곤 안아 들었다. 두 번째로 할 생각이 없어졌다.
“귀엽기는.”
일어난 세계가 영하의 얼굴이 아니라 아래를 보며 이야기했다. 뭘 보며 말하나 싶어 느리게 눈을 돌려 보니, 소파에 물 자국이 흥건했다.
“여기다가도 물을 주면 어떡해.”
최세계가 즐거운 음성으로 이어 말하며 등을 돌렸다. 욕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덕분에 그의 어깨에 턱을 댄 채로 안긴 최영하는 자신이 흘려 놓은 소파의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 창피해 죽어 버리고 싶었다.
“물을 너무 흘려 대서 이제 이 소파는 보내 줘야 해.”
세계가 불편한 표정으로 소파를 내려다본다. 처음 이 집에 들여놓을 때만 해도 오점 하나 없던 깨끗한 베이지색 패브릭 소파가 여기저기 얼룩져 있었다.
원인의 절반은 최세계가 침대에서 하는 것보다 소파에서 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었고, 절반은 최영하 때문이었다. 그에게 씻겨져 녹초가 된 몸으로 반대편의 등받이 없는 소파에 상체를 누이고 바닥 위에 발을 붙인 영하가 화를 냈다.
“소파에서 안 하면 되잖아!”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어느 세월에 침대까지 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새로 사야겠어. 안 그래도 질리던 참이었으니까. 이탈리아에서 주문 제작도 취소되고. 그냥 한국에서 사야지.”
돈 아까운데.
물론 꼴 보기 싫은 건 사실이다. 어두운색이었으면 티 나지 않았을 텐데 밝은색이라 군데군데 물 번진 듯 묻은 얼룩이 거슬리긴 했다. 그러니 지금도 저 자리에 눕지 않고 다른 소파에 누워 있는 것이다. 영하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커버 세탁 맡기면 지워지지 않을까?”
“기분 나빠.”
“뭐가?”
도통 알 수 없는 그의 반응에 그를 올려다본다. 최세계는 왼쪽 눈가를 찌푸리며 소파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 나쁘다고.” 그가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왜 저래.
“네 애액 묻은 소파를 딴 남자가 빤다는 게.”
“와, 와… 진짜 어떻게 사람이….”
영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어떻게 커버 세탁에 그런 상상을 하지? 서재 책장을 잘 뒤져 보면 야한 소설만 한가득 나올 수도 있다. 비밀의 문 같은 거 열어 보면 말이야.
“사실 그대로인데. 세탁소는 보통 남자들이 해.”
“그럼 여자가 세탁하는 건 괜찮고?”
“넌 여자한테 안 서니까.”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게이가 아니라 바이일 수도 있는데?”
“넌 뒤에 안 박아 주면 못 가잖아. 어떤 여자가 그런 걸 해 줘.”
“아, 제발, 그만 말해. 알았어. 소파 사러 가면 되잖아.”
애초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대화에 참여하는 게 아니었다. 저질스러운 대화에서 결국 패배한 영하는 희게 질린 얼굴로 소파에서 일어나 그의 옆에 따라 섰다. 서서 보니까 꼴이 더 가관이긴 했다.
*
“아… 또….”
지도 보고 길 못 찾는 건 그렇다고 쳐도, 길치라고 엘리베이터도 잘못 내리는 게 말이 되나? 심지어 이정욱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한참 걷고서야 이곳이 남성복 코너가 아니라 아동복과 가구, 침구 코너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만 더 걸으면 옷 파는 곳이 나올 줄 알았지.
다급히 인터넷을 켜 현재 발을 내린 백화점 지점을 검색해 층별 안내를 확인했다. 남성복은 4층이고 생활 가구 코너는 7층이었다. 아마 휴대폰을 하느라 그냥 지나친 모양이다. 남들 내리는 대로 함께 따라 내리다 보니 애먼 곳에 도착했다.
아기자기한 아동복 코너를 배회하던 스무 살 이정욱은 어쩐지 민망하여 걸음을 빨리했다. 빨리 걸을수록 더 빨리 길을 잃어버릴 확률이 컸으나 괜히 어린 아빠라도 된 기분이라 이상했다. 얼른 아버지 선물만 사고 나가야지. 기자 일로 바쁜 누나 대신 아버지 생일 선물을 사러 나온 길이었으나, 백화점에 혼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나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어디에 있더라. 아까 에스컬레이터 봤을 때 그냥 그거 타고 내려갈걸…….
조금 멍청해진 머리를 겨우 굴렸다. 눈앞에 보이는 데로만 가는 게 아니라, 방향을 제대로 확인하고 걸어야 한다. 그러나 알면서도 늘 당장 보이는 곳으로 가는 것이 길치의 숙명이었다.
“생각보다 별로 끌리는 게 없네?”
“여기가 제일 나은데 그중엔.”
엘리베이터… 저쪽 방향에 있었던가. 자신 없는 마음으로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이정욱의 눈앞에는 노란색 원피스를 입은 꼬마 아이 마네킹이 있었다. 마네킹이 이야기한 건 아닐 테고, 이정욱은 다시 반 바퀴를 돌았다.
그곳은 수입 가구 코너였다. 영하가 소파의 등받이를 진지한 얼굴로 꾹꾹 눌러 보고 있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라. 정욱은 화색을 띠며 머리부터 쓸어 넘겼다. 영하는 이정욱의 대학 동기였다.
“그래도 색깔이 마음에 들어. 어때?”
영하는 어두운 오렌지 컬러의 3인용 소파를 두드리며 말했다. 정말 마음에 들기라도 하는 건지 소파를 만지며 웃음을 터뜨렸다. 영하를 보자마자 다가가려던 정욱은 웃는 얼굴을 보고 멈춰 섰다. 목 아래가 뜨거워졌다.
주말에 여기서 만날 줄 알았다면, 좀 더 차려입고 나올걸.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온 거라 정욱은 그냥 편안한 차림이었다.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쇼핑할 계획도 아니었고, 미리 정해 둔 물건을 곧바로 사고 돌아갈 계획이어서 더더욱 대충 입고 나왔다.
그래서 주춤했다. 평소에 영하는 옷에 관심이 많은지 잘 차려입고 다녔기 때문에, 이 꼴로 말을 걸긴 창피했다. 이정욱은 유난히 영하 앞에만 서면 6개월 된 새끼 몰티즈한테 물리기나, 길을 잃어버리는 둥의 등신처럼 굴고 있었기 때문에 더는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도 길을 잃어 가구 코너에 있는 거니까.
“이거 봐! 오백만 원이나 할인해 준대. 이거 사자!”
“디자인은 예쁘긴 한데, 다리가 너무 가늘잖아.”
“그래서 예쁜 건데.”
“…다리가 가늘면 안 되지, 영하야.”
“아.”
오렌지색 소파가 마음에 든다더니, 카탈로그를 들여다보던 영하가 탄성을 터뜨렸다.
오백만 원을 할인해 준다니… 대체 그럼 원래는 얼마라는 거지?
궁금증이 드는 한편 영하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웃느라 애교살이 잔뜩 접혀 있었다. 목소리가 겨우 들릴 듯한 거리임에도 눈 아래 속눈썹이 보일 듯 길었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뺨도 귀여웠다. 10명 남짓 동기 중, 왜 영하는 유독 다르게 느껴지는 거지?
그래서 정욱은 영하에게서 눈길을 떼기 어려웠다. 긴 속눈썹이 커다란 눈동자를 가리며 내리깔릴 때마다 목울대와 그 아래 가슴이 저릿하게 역동 쳤다.
몰티즈에게 물려 당황한 자신에게 다가온 영하가 보호센터 관계자에게 밴드를 받아 붙여 줬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의 팔목을 쥐고 손등 뼈마디 바로 아래쪽에 난 상처에다 약을 바른 후에 밴드를 붙여 줬다. 그때 손등과 팔목에서 느꼈던 감촉이 선연했다. 살갗은 부드럽고 매끈했고, 자신의 손목과 겹쳐진 영하의 손목은 하얗고 가느다랬으며, 살집이 없어 콩알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조금 놀라 쳐다보기만 하자, 밴드를 붙이고 고개를 든 영하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이정욱은 사람의 쌍꺼풀이 유달리 예쁠 수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영하는 무심코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마른 체형인 영하는 팔다리는 물론 실타래처럼 부드러운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도 가늘었다. 그가 봐 온 동갑내기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햇빛 아래 오래 노출되면 목덜미가 빨갛게 익었고, 그래서 정욱은 여름 햇살 아래 영하의 머리 위로 전공 파일을 올려 햇살을 가려 주는 상상을 했다.
영하는 너무 마르고 약해 보여서, 도저히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누군가 그렇게 도와주어야만 삶을 이어 갈 수 있는 나약한 존재 같았다.
“고객님, 찾으시는 스타일 있으세요?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튼튼한 게 제일 중요하고, 컬러는 좀 짙은 색으로. 패브릭 말고 가죽이 좋겠네요. 패브릭에 자꾸 뭐가 묻어서.”
영하의 어깨 위로 누군가의 팔이 올라간다.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제서야 이정욱은 최영하에게서 눈을 떼고 영하의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 키가 큰 남자였다. 길은 못 외워도 사람 얼굴은 오래 기억하는 이정욱이 알기로는, 그는 영하의 형이었다.
남자와 영하는 직원의 추천에 따라 자리를 이동했다. 몰래 들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정욱은 그들에게 본인의 위치가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이동했다. 뭐라고 하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파티션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뒷모습만 겨우 보였다. 남자가 영하와 손을 잡고 있었다. 가만히 있던 영하는 직원의 구두 소리가 들리자 잡힌 손을 빼려고 이리저리 팔을 당겼다.
그러나 남자가 꽉 잡고 놔주질 않는 듯 깍지 낀 손등에 손마디가 바짝 솟아 있었다. 영하가 끙끙거려도 아랑곳하지 않던 남자는 직원이 다가와 묵직한 카탈로그를 신상이라며 전달해 주는 걸 받아 드느라 손을 풀어 주었다.
그게 이상했다. 분명 형이라고 했는데 손을 잡는 것도 이상했고, 남자 둘이서 가구를 사러 온다는 것도 이상했다.
본인도 층을 잘못 내려서 이곳에 오게 됐고, 보통은 남자들끼리는 생활 층에 올 일이 없다. 실제로 엄마와 딸로 보이는 여자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사이에 낀 남자 둘. 아무리 봐도 이상한 광경이다.
잠시 후, 둥글게 빠진 등받이를 매만지던 영하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다른 소리를 했다.
“소파 사는 김에 TV도 사 줘.”
“TV 있잖아. 새로 산 거야, 그거.”
“안방에 두고 싶어. 안방에 여백이 너무 많아. 난 다 채우고 싶다고. 침대 앞에 두자. 자기 전에 유튜X 틀래.”
“끔찍한 소리를 하네. 절대 안 돼. 침실에는 침대 하나만.”
지금 대화는, 확실하게 이상하다. 꼭 한방에서 지내는 것 같지 않은가. 물론 형제 사이에 같은 방을 쓸 수야 있다. 실제로 친구들 중에 형제가 많은 집은 나이가 들어도 오랫동안 한방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안방’이라고 했다. 자취를 하는 건가. 작은 집이라면 안방에서 함께 생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작은 집에서 사는 사람이 백화점에서 가구를 사 가는 일은 거의 없다. 실제로 좀 전에 영하는 신이 난 목소리로 오백만 원을 할인해 주는 소파를 사자고 했다.
한곳에 오래 있으려니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조금 자리를 이동했다. 목소리가 조금 멀어졌지만, 영하의 얼굴이 보이는 위치였다.
“그냥 침대를 둘까?”
남자가 매트리스 매장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소파에 앉아 몸을 흔들던 영하가 질색하며 반대했다.
“아니. 싫어.”
“침대가 더 나을 거 같은데. 다리도 더 튼튼하고, 여러모로.”
“침대 같은 소리 말고 이거 사 줘.”
“다리 약해서 싫다니까.”
영하는 미련이 남는지 소파를 만지작대고는 남자의 한쪽 팔을 끌어안았다. 아까 손을 빼려고 안달하던 것을 보아 스킨십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잠깐 움직였다고 배고프다. 식당 올라가자.”
“참아. 난 이런 데서 밥 안 먹어.”
둘 다 자리를 옮기는 것 같다. 직원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 슬쩍 주변을 살핀 정욱은 정수기를 발견하곤 물을 마시는 척 그 앞에 서서 종이컵을 들었다.
영하와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정욱의 뒤를 지나쳤다. 아까처럼 손을 잡고 있진 않았지만, 영하가 팔의 옷깃을 붙잡고 있었다. 영하는 의뭉스러울 만큼 아기자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빠가 좋아하는 고오급 레스토랑까지 못 기다려. 배고프단 말이야.”
아빠…?
접힌 종이컵을 펼쳐 찬물을 받으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호칭에 뒤돌아 멈춰 섰다. 그들은 정욱이 한참이나 찾아 헤매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내내 뒷모습이나, 간판에 가려져 얼굴을 거의 보진 못했으나 슬쩍 봐도 아빠는 아니었다. 남자는 아빠보단 형에 가까운 나이대였다. 고작해야 열 살… 많아도 열두 살 차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정수기 앞에서 한참 멈춰 서 있었던 정욱은 이상 행동으로 남들에게 시선을 사기 전에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쓰레기통에 쓰지 못한 종이컵을 버리며 흘낏 눈을 돌려 돌아봤다.
남자는 긴 팔로 영하의 어깨를 감싸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층수 계기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높낮이가 다른 두 사람의 어깨가 긴밀하게 붙어 있다.
정욱은 한 번도 아버지와 저렇게 서 본 적이 없었다.
*
“아까 소파 진짜 마음에 들었는데.”
“대충 봐도 보이잖아. 그 소파 세 번만 하면 다리 나갈걸.”
“근데 비싼데 그렇게 금방 부서질까?”
“대부분은 브랜딩 값이야.”
그래도 오늘 본 것 중에선 그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영하가 배고프다고 계속 칭얼거려 결국 밥을 먹으러 올라왔다. 동남아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따온 베트남 음식점이었다. 귀찮기 짝이 없는 아빠는 백화점 음식도 안 먹는다고 성화였다. 저래 놓고 배달시키는 피자는 잘 먹는다. 그냥 주면 먹는 거 다 아는데, 자꾸 왕자님인 척하지.
쌀국수 위에 올라간 고수를 덜어 쟁반에 놓는 영하를 물끄러미 보며 그가 테이크아웃 컵의 뚜껑을 열었다.
“아빠 베트남 가 봤어?”
쌀국수를 조금 먹자 쪼그라들던 위가 운동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영하는 좀 나아진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가 봤지.”
“거기서 쌀국수 먹어 봤어? 맛이 다르대.”
“위생이 다르겠지. 난 호텔 음식만 먹어 봐서 그런 길거리 음식 맛은 몰라.”
“바보 아냐? 그런 데선 길거리 음식을 먹어야지 호텔 음식은 다 똑같애.”
“똑같은 음식 먹고 말지 비위생적인 조리 공간에서 탄생한 음식 먹고 싶지 않아.”
재수 없어.
“커피도 마시지 마.”
“안 먹고 싶은데 빈손으로 앉을 순 없어서 시킨 거야. 국수나 먹어.”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한 모금만 마시고 등받이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던 그는 셔츠를 걷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따 다섯 시에 본가 갈 거야.”
“뭐? 왜!”
“할머니가 오래.”
“아빠가 언제 그렇게 할머니 말을 잘 들었다고….”
“한 달에 한 번은 가야지. 코앞에서 사는데 코빼기도 안 비친다고 매일 전화 와서 정신 사나워. 가는 김에 너도 가서 효도 좀 해.”
“효도는 셀프야. 아빠가 알아서 해야지.”
“나는 매일 아들한테 봉사하느라.”
두 눈이 흔들리며 더 커질 데도 없이 커졌다. 까만 눈동자 위로 백화점의 흰 조명이 그대로 비친다. 영하는 쌀국수를 젓가락으로 쥔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간담이 서늘했다. 그가 말하는 봉사는 음란한 의미였다.
“그런 말 좀 하지 마. 밖에서…….”
“봉사가 뭐가 어떻다고.”
“아무튼. 가기 싫은데.”
“평생 안 갈 순 없으니까 그냥 가.”
“그래도….”
할머니 집에 가야 한다니. 입맛이 뚝 떨어진다. 며칠 전 집에 오셨던 할머니의 매서운 눈초리가 생각났다. 이제 그와 남들에게 말할 수도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는데, 아들이라면 껌뻑 죽는 할머니에게 죄스러워져 고개를 들지도 못할 것 같다.
“다 먹어.”
“안 먹고 싶어….”
“다 먹어. 살 빠지는 거 싫으니까.”
아마 저 입을 막지 않으면 엉덩이에 살 내려서 섹스할 때 뼈 부딪치는 게 싫다는 말까지 나오겠지. 안 봐도 훤하다. 다시 젓가락을 들어 저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영하는 식어 가는 쌀국수를 집어 자신의 입에 넣는 대신 팔을 내밀어 뻗었다. 팔짱을 끼고 보던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 먹어.” 하고 말해도 계속해서 손을 내밀고 칭얼대니 어쩔 수 없이 짜증스레 입에 넣어 씹는 세계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맛없잖아.”
사실 영하도 맛없었다.
영하는 성산동 본가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자겠다며 눈을 감고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숨소리만 색색 내자 세계는 머리를 몇 번 쓰다듬더니 손을 거둬 갔다. 그러나 영하는 자고 있지 않았다. 할머니가 보고 싶지 않았다.
작은 고모가 전해 주고 간 가방에는 돈이 든 통장과 카드, 짧은 메모 하나가 있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의 명의였고, 통장은 1페이지에 딱 한 줄만 기록되어 있었다.
10억 원. 영하의 눈으로는 처음 보는 숫자였다.
[네가 네 엄마와 다른 사람이라면, 이 통장 쓰게 될 거다.]
메모를 읽은 영하는 처음에는 충격적이고 두려웠으나 나중에는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했다. 아빠의 혼삿길을 막는 자신을 치워 버리고 싶으셨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수민과 결혼을 해도 영하는 둘 사이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호적에도 오르지 못하는 사생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끼고 사는 남자. 일반적인 가정도 아니고 회사의 대를 잇는 것까지 고려하면 문제가 굉장히 복잡해질 테였다.
슬프다기보단 우스웠다. 자신의 몸값이 10억이나 된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유산이라도 감안한 건가. 영하는 그런 것을 바라고 그의 곁에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 상황을 보고 다시 돌려드릴 생각이었다. 만약 아빠가 결혼 후에 자신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그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당시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괴로워할 겨를도 없었다.
작은고모가 본가로 돌아가신 후, 영하는 곧장 아빠의 파혼 소식을 알았고 그와 몸을 섞었다. 사용하지도 않을 10억은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자신을 미워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열네 살이 되어 홀연히 나타난 손자였고 아빠의 흠결이 될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돌이켜 보면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할머니는 그것 말고 다른 사안 때문에 자신을 보내고 싶은 게 분명하다. 어쩌면 하나가 아닌 복합적으로 얽힌 이유라는 판단이 들었다.
‘어디서 이 집에 기어 들어와서 되먹지도 못한…….’
할머니… 어디까지 알고 계신 걸까.
영하는 감은 눈을 슬며시 뜬다. 창가에 물이 맺혀 있었다. 비가 오는구나. 하늘에서 툭 떨어진 빗방울이 긴 줄을 그리며 떨어지는 것을 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빗방울이 차체를 때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옆자리에 앉은 그가 자세를 고쳐 앉는지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길이 영하에게 닿았다. 등을 어루만지고 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등에 그의 손바닥이 올랐다. 영하는 계속 자는 흉내를 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아빠에게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애초에 그는 엄마를 거의 기억도 못 하는 것 같았고, 엄마와 살 때도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릴 적 영하의 상상 속의 아빠는 나이 든 중년의 남자였었다.
엄마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할머니. 아무리 옛날 일이라지만 기억이 전혀 없는 아빠.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내막은 전혀 몰라도, 둘의 나이 차이를 알게 된 후론 단순히 엄마가 성인처럼 보이는 아빠와 사고를 쳤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을걸. 넌 아직 네 엄마 좋아하잖아.’
나, 어떻게 태어난 거지?
*
“다음 주 출장 있어.”
아침부터 딸기바나나우유를 만들고 있는 영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최세계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믹서기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안 들렸다.
“어엉?”
높이가 한참 낮은 뒤통수에 이마를 박은 그는 시끄럽게 돌아가는 믹서가 자동으로 꺼진 후에야 다시 재차 말했다.
“다음 주에 해외 출장 간다고. 수요일부터. 4박 5일. 밀라노. 패션쇼 가야 해.”
“패션쇼를 아빠가 왜 가. 아빠가 모델이야?”
“그냥 보는 거지. 디자이너가 참석하래. 뉴욕 패션쇼는 오래도 안 갔는데, 이번에도 안 오면 파업하겠다고 야단이잖아. 가야지.”
“어디 브랜드인데?”
“여기.”
그가 영하가 입고 있는 티셔츠의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긴, 자사 브랜드 중에 패션쇼를 두 도시에서 열 만한 브랜드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믹서기 뚜껑을 열려는데, 가슴팍의 로고 프린팅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옆으로 옮겨 가더니 가슴을 꽉 움켜쥔다. 와중에 손가락으로 유두가 있을 부근을 꼬집었다. 찌르르한 감각에 영하가 도끼눈을 했다.
“아침에 하지 말라고 했지.”
“너도 내 가슴 막 만지잖아.”
“언제 그랬어, 내가!”
팔로 그의 가슴팍을 쳐 내며 떨어졌다. 빨리 만든 거 맛봐야 하는데 자꾸 귀찮게 군다.
뚜껑을 열어 믹서기 통을 휘휘 저었다. 색깔만 봐서는 파는 거랑 비슷한데. 애초에 그냥 우유와 과일만 넣어서 갈면 되니 이건 요리도 아니었다. 세계는 옆에 붙어 서서 자신도 달라고 했다.
“1인분만 만들었어.”
“버릇없기는. 너만 입이야?”
“빨리 회사 가. 나도 학교 가야 하는데.”
“데려다줄게.”
“혼자 갈 수 있어. 회사랑 우리 학교랑 멀잖아.”
고개를 흔들곤 컵에다 갈아 놓은 음료수를 따랐다. 한 입 먹어 보니 맛이 밍밍해서 설탕을 꺼내는데, 최세계가 영하의 뒤에 붙었다.
“밀라노 같이 갈까?”
“어떻게 같이 가. 학기 중인데 수업은 어떡하고?”
“대충 다녀. 알 게 뭐야, 성적 따위.”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다. 영하는 그의 말에 아주 잠깐 갈등했으나 그건 그래도 아니었다. 애초에 패션쇼에 관심도 없고, 아빠는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업무차 가는 건데 그럼 그때 본인은 뭘 하란 말인가. 숟가락으로 설탕을 푹 퍼서 음료수에 넣는 순간 아빠가 탄식했다.
“당을 얼마나 먹는 거야.”
“원래 이 정도 넣어야 해.”
“……어쨌든 우리 영하, 아빠 보고 싶어도 울지 말고 참아야 해. 멀리 있으면 못 달래 주니까.”
아직 밀라노 가려면 일주일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설레발부터 친다. 영하는 그런 걱정 말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4박 5일이나 없다고 하니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게 사실이었지만, 그 순간 좋은 계책이 떠올랐다. 저번 주부터 동기들이 남자들끼리만 모여서 술 마시자고 한 걸 영하 혼자서 계속 피해 다녔기 때문이었다.
남자들이랑 대화도 하지 말라는 사람이 남자들끼리의 술자리를 허락해 줄 리가 없으니 계속 거절만 했는데, 아빠가 출장을 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좋아. 그때 가면 되겠네.
영하가 산뜻하게 웃으며 뒤돌아 컵을 내밀었다. 설탕을 붓기만 하고 휘젓지 않아 핑크색 음료 위에 하얀 설탕이 산처럼 쌓여 녹아내리고 있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그가 음료의 표면을 바라봤다.
“자. 마셔.”
“네 거라며.”
“으응. 아빠 마셔.”
“맛없으니까 날 주는 거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컵을 받아 입에 댄다. 숨도 쉬지 않고 꿀꺽꿀꺽 넘겼다.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목젖을 물끄러미 보다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난 왜 안 튀어나왔지.
한 번에 딸기바나나우유를 들이킨 세계는 미묘한 얼굴로 컵을 싱크대에 두고 수도꼭지의 물을 튼다. 유리 벽에 붙어 있던 딸기 씨들이 밑으로 쏟아져 내리고 물이 가득 찼다. 커피 한 잔 마시는 데에 유리컵 세 개 꺼내는 남자가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다.
반년만 더 가르치면 알아서 바닥도 걸레로 닦을 것 같다. 그날이 오면 꼭 잔뜩 부려 먹어야지.
“첫맛은 엄청 달고 끝 맛은 아무 맛도 안 나네.”
“일부러 그런 거야.”
영하가 그리 대꾸하며 세계의 가슴을 기쁘게 꽉 끌어안았다.
*
최세계를 배웅한 첫날은 내내 침대에 틀어박혀 있었다. 출국 전날 그가 밤새도록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아주 물까지 옆에 두고 먹이며 섹스했다. 헐떡거리고 목이 말라 괴로워하면 입 맞춰 목구멍 너머로 물을 흘려 줬다.
처음에는 고마웠으나, 나중에야 고마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더 오랜 섹스를 위해 최영하가 탈수로 기절하지 않게 했을 뿐이었다.
몸 상태가 영 별로인 데다 삭신이 쑤셔 그날은 학교 말곤 내내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배달로 치킨도 시켜 먹고 새로 산 소파에 드러누워 혼자 유튜X만 시청했다.
결국 소파는 영하가 사고 싶다고 했던 것으로 구매했다. 요즘 트렌드가 다 가느다란 다리인지, 아무리 찾아봐도 최세계가 원하는 튼튼하고 크고 각졌지만 유려한 선을 가진 소파가 없었다.
“심심하다.”
유튜X를 끄고 영화를 틀었는데도 적막했다. 최세계는 못해도 한 달 중 열흘은 바쁘므로 밤늦게 들어오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 시기와는 또 기분이 달랐다.
밤까지 기다려도 돌아올 사람이 없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커다란 TV 화면에 나오는 잘생긴 배우의 얼굴을 보면서도 영하는 그가 보고 싶었다. 시답잖은 말로 자신을 놀리고 괴롭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우리 영하, 아빠 보고 싶어도 울지 말고 참아야 해. 멀리 있으면 못 달래 주니까.’
안 돼, 안 돼.
아직 집 나간 지 24시간도 안 됐다. 벌써 보고 싶어 하면 안 된다.
억지로 TV로 눈을 돌렸다. 새로 산 소파의 쿠션감이 마음에 들었다.
이튿날 저녁, 영하는 과 동기들과 대학교 근처의 고깃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택시를 타고 학교로 향하던 길에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몰래 술 마시러 가는 도중이니 잔뜩 뒤가 켕긴 영하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거기는 몇 시야?”
-오전 열 시 반. 한국보다 일곱 시간 느려. 뭐 해?
“응? 나, 밥 먹으러 가야지.”
술 마시러 간다는 걸 들키면 큰일이다. 아빠는 밀라노에 있어도 아빠의 직원들은 한국에 있었다. 비서실장 삼촌이 이탈리아에 따라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삼촌이 한국에 있다면 영하는 끝이었다. 그대로 붙잡아 집에 데려가 버리겠지.
택시 바깥 풍경을 흘끗 보고선 대충 둘러댔다. 눈앞에 수제 돈가스 간판이 지나갔다.
“돈가스 먹을 거야.”
-그래? 아빠는 패션쇼 보러 가는 길이야. 나 보고 싶으면 이따 세 시간 뒤에 포털에다 검색해 봐. 사진 뜰걸. 기자들 많이 왔어.
“관심 없거든요?”
참. 사람을 뭐로 보고. 날 무슨 다섯 살배기 취급하는 거 아냐? 며칠 후면 하루 종일 볼 얼굴인데 굳이 남이 찍은 사진까지 검색해 가며 볼 생각 없다.
게다가 영하는 돈가스가 아니라 삼겹살과 술을 먹으러 가는 것이니 휴대폰 들고 포털에다가 최세계 밀라노 따위를 검색할 시간이 없었다. 아주 바쁜 사람이었다. 그는 영하의 대답에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다른 이야기를 했다. 방학이 되면 이탈리아 남부에 함께 가자며, 밀라노와 로마와는 또 다른 분위기라 네가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워. 이탈리아 여름 덥다고 했어.”
-그러면 북유럽 쪽으로 갈까. 근데 돈가스 먹으러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응?”
-…차 타고 가는 것 같길래. 내비게이션 소리가 나서.
“아. 어, 맛집 갈 거야. 학교 근처에 맛집이 있대서… 줄 서서 먹는대.”
-누구랑?
“혼자 가지… 친구 없어.”
세계는 친구가 없다는 영하의 말에 웃었다. 딱히 좋은 일이 아닌데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조금 화가 나도 막상 목소리를 들으니 그가 없어 우중충하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간지러운 마음 대신 뺨 위를 손가락으로 긁는 순간, 최세계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적당히 마시고 집에 들어가. 10시까지.
“으, 으응?”
몹시 당황한 최영하는 손가락을 구부린 자세에서 몸이 굳었다. 마, 마시라고? 어떻게 알았지?
“술 마시는 거 아니고 돈가스…….”
-돈가스 같은 소리 하네. 화 안 낼 테니까 적당히 마셔. 대학 친구들이랑 마시는 거 맞아? 엄한 놈 없어?
“없어, 없어. 그냥 과 동기들이야. 재수생 형도 있고.”
-그래, 알았어. 10시까진 들어가고, 전화해도 당분간은 일 때문에 못 받아. 문자 보내 놔.
허락을 내리는 목소리에 거리낌이나 짜증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신 일찍 들어가라는 말을 반복하기만 했다. 영하는 밝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죄책감이 조금 들었는데, 다행이다. 허락받았다!
-가게 도착해도 전화 끊지 말고 있어. 나도 도착할 때까진 계속 네 목소리 듣고 싶으니까.
영하는 이어지는 세계의 말에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느끼곤 입술을 물었다. 그가 말한 세 시간 뒤에 포털에다가 최세계 이름 석 자를 검색해 사진을 들여다볼 자신이 예감됐기 때문이었다.
*
고깃집을 친구들과 오기는 처음이었다. TV에서 본 동그란 원탁 중앙에 연탄이 새빨갛게 익고 있었다. 또래로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프로페셔널한 몸놀림으로 무거운 그릴을 가볍게 들어 중앙에 배치했다.
영하를 포함한 남자 동기는 총 열 명이었는데, 몇은 아르바이트와 과외 때문에 빠져 여섯 명만 약속 장소에 나왔다. 다음에는 꼭 열 명 다 뭉치자고 안경을 고쳐 쓰며 재수생 형이 말했다. 그가 마카로니 반찬을 숟가락으로 퍼먹고는 집게를 들었다.
“고기는 내가 진짜 잘 굽거든.”
하지만 뒤이어 아르바이트생이 생고기가 오른 접시를 가져와 직접 구워 주는 바람에 재수생 형의 구이 솜씨를 맛볼 수는 없었다. 영하는 아침만 간단하게 먹고 점심을 걸러 허기가 졌다. 멍하니 있다가 마늘을 접시째로 들어 불판 위에 들이부었다.
여섯이나 복작복작하게 앉은 테이블 중앙에 선 아르바이트생이 여전히 무표정으로 고기를 구웠다. 열기가 올라와 뜨거울 것 같은데 딱히 힘들지 않은 얼굴이었다.
영하는 아르바이트의 얼굴을 흘깃 훔쳐보다가 소시지 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 순간 건너편에 앉은 이정욱이 소시지 반찬을 들어 영하의 앞에 두었다. 이정욱이 영하를 챙긴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소주 두 병과 맥주 다섯 병, 사이다 세 병을 주문했다. 아르바이트생이 음료수를 가져다주자마자 영하가 사이다에 손을 뻗었다. 닿기도 전에 이정욱이 그걸 들더니 뚜껑을 따서 영하에게 전달해 주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아무도 이정욱의 행동을 지적하지 않았다.
뭐지?
지나치게 날 도와주는데. 하지만 이상한 행동도 아니니 뭐라 말은 못 하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받아 들었다. 유리잔에 사이다를 따르자 거품만 한가득 올라온다. 거품이 꺼지고 나니 사이다는 겨우 절반만 차 있었다.
“배고프다.”
“된장찌개 시킬까?”
“야, 고기부터 먹고 나서 시켜야지. 밥으로 배를 채우면 안 돼. 일단 고기 먹고 나서 냉면이랑 된장찌개가 기본 코스지.”
듣고 나니 된장찌개가 먹고 싶어졌다. 흰 쌀밥도.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최영하의 시선은 구워지고 있는 고기 한 점에만 붙박여 있었다. 옆에서 민재가 다 구워진 고기를 영하 앞으로 넘겨줬다.
“준민이는 아르바이트 뭐 한대?”
“햄버거 가게 한다고 했을걸. 거기 여자 알바생이랑 썸 타는 중이래.”
고기 세 점을 한꺼번에 먹으며 영하가 들었다. 괜히 아르바이트 이야기에 귀가 기울었다.
실은 영하는 요즘 고민 중인 문제가 있었다. 최세계의 생일은 8월 17일이다. 한창 햇볕이 타들어 가는 열대야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간 영하는 그에게 생일 선물을 한 번도 준 적이 없었다. 모든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영하가 무언가 주려고 해도…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 상대였다. 게다가 돈도 없다. 1년에 두 번. 명절에 받는 용돈은 전부 아빠가 가져갔다.
하지만 올해 그의 생일은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다. 왜냐면… 이제 두 사람의 관계의 정의가 바뀌었으니까. 남들이 100일과 1주년을 특별하게 보내는 것처럼, 올해 그의 생일은 평소와 달랐으면 했다.
“아르바이트 보통 어디서 구해?”
“보통 알바 사이트 같은 데서? 왜, 아르바이트하려고?”
“어… 나도 음, 한 달 정도?”
“한 달? 한 달은 잘 안 구해질걸. 보통 장기로 하는 걸 원하지.”
“그래?”
전혀 몰랐다. 그냥…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둘 수 있는 줄 알았는데. 한 달이면 몰라도 그 이상은 아빠를 속이기 힘들었다.
어물쩍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겠네.
일곱 시가 되자마자 최영하는 풀린 눈으로 휴대폰을 들어 최세계를 검색했다. 간단한 그의 프로필이 가장 먼저 떴다. 회색 배경의 무표정한 프로필 사진 옆으로 출생과 소속이 나열되어 있다. 좀 더 아래로 내리자, 뉴스 카테고리에 기사가 뜨긴 했지만, 아직 그가 말한 세 시간이 되질 않아서 그런지 사진은 없다.
오전에 올라온 기사는 모드 글로벌 상무이사 최세계가 밀라노 FW 컬렉션 패션쇼에 참석한다는 내용이었다. 모델 피지컬이 어쩌고… 그를 추켜세우는 멘트 한 단락 아래에는 ÆCID HOMME 브랜드에 관한 설명과 이번에 열리는 패션쇼에 대한 정보가 간략하게 담겨 있었다.
다시 스크롤을 위로 올린 영하는 그의 프로필 사진을 꾸욱 눌러 갤러리에 저장하곤 휴대폰을 껐다.
“와, 사이다랑 소주랑 같이 먹으니까 직빵이야.”
술이 직빵으로 취했다. 머리가 어찔하다.
“그니까 왜 같이 먹냐. 내가 먹지 말라고 했잖아.”
옆자리에서 민재가 타박했다. 그러는 본인 얼굴도 시뻘겠다.
“여기 삼겹살 5인분 추가요. 맥주도 세 병 더 주세요.”
다들 취해 놓고선 술을 더 시킨다. 남자들끼리만 먹으니까 경쟁이 붙었다.
얼굴에 열이 올라 더워서 손부채질을 계속하다 의자에 축 늘어졌다. 어우. 사이다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 요의가 들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문제였다.
“화장실 어딨지?”
“저기. 제일 끝의 어두운 곳.”
손을 흔들며 테이블을 쥐고 의자를 뺐다. 휴대폰도 챙겼다. 좀 전에는 옆에 민재가 있어서 제대로 검색하질 못했으니 느긋하게 찾아봐야지.
실실 웃은 영하가 휴대폰을 꽉 쥐고 구석에 있는 화장실 안내판을 보며 걸었다. 몸이 휘청거렸다.
사이다와 알코올은 정말 같이 먹으면 안 되는구나.
몸으로 겪고서야 깨닫는 순간. 영하의 골반이 근처에 있던 테이블에 부딪쳤다. 제법 강하게 부딪쳐서 테이블은 물론 영하의 몸뚱이도 함께 흔들렸다.
쿠웅- 하고 박는 동시에 테이블 위에 있던 소주 네 병이 흔들거리더니 중심을 잃은 영하가 바닥으로 엎어졌다. 지저분한 바닥으로 다이빙한 건 최영하뿐만이 아니었다. 부딪친 테이블에 놓인 하늘색의 소주 네 병도 함께 따라 수직 낙하했다.
와장창- 하고 물을 머금어 둔탁하면서 요란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놀란 영하가 소주병을 피해 뒷걸음질 치다 의자에 등이 부딪쳤다.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싸구려 테라조 타일로 마감한 바닥 위에 산산조각 난 소주병들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일진이 사나운 날의 징조였다.
“아, 죄송, 죄송합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영하가 몸을 굽히며 사과했다. 소주병과 테이블에 앉은 세 명의 아저씨를 번갈아 보며 재차 사과했다. 영하네 테이블처럼 얼굴이 시뻘게진 남자 셋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영하에게 손가락질했다. 내미는 손가락이 짧고 두툼하다. 그들은 영하보다 먼저 도착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새끼가 뭐 하는 짓이야!”
술에 취해 목소리가 어눌했다. 고기 굽는 열기 때문인지 그의 뺨 아래로 땀이 흘러내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 탓에 술이 확 깨 버린 영하는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하고 허리를 굽히려다 옆에서 치우겠다고 만류하는 아르바이트생 때문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영하를 가리킨 남자의 손가락이 가슴팍에서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한 그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버릇없는 새끼가… 얼굴은 기집애 같아 가지고.”
뭐야, 이 인간은?
쓰레받기를 들고 오던 아르바이트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괜히 미안해져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는 아저씨는 괴물같이 생겼거든요.
“죄송해요, 제가 변상해 드릴게요.”
“아니, 새끼가 사과도 안 하고.”
방금 사과에 대한 대답이, 사과를 안 했다고 욕하는 것이었다. 영하는 취객을 상대로는 아무런 말이 통하지 않음을 실감했다.
어떡하지. 솟구치는 짜증과 함께 등 뒤로 땀이 삐질 날 때, 의자를 세게 끌며 일어난 이정욱이 영하의 앞으로 나섰다.
“뭐 하시는 거예요. 방금 사과했잖아요.”
“술 네 병이나 깨뜨려 놓고 그냥 죄송하다 하면 끝이야? 어디 어른한테 건방지게!”
영하가 속으로 실소했다. 여기는 대학로였다. 대학생만 오라는 법은 없지만, 가게의 손님 대부분은 근처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었다. 일부러 그곳에 와서 술을 마시는 주제에 어리다고 욕하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바보스러웠다. 저래서 아빠가 술 마시지 말라고 했구나. 취객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분명 속으로 웃었다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마음이 바깥으로 드러났나 보다. 정욱과 언성을 높여 다투던 남자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너 이 새끼가!” 하고 소리치며 이정욱의 뒤에 서 있는 영하의 어깨를 잡아 밀쳤다.
“악!”
정신 놓고 있던 최영하가 밀려나 넘어진 것은 당연했다. 뒤로 나자빠진 영하를 근처에 앉아 있던 재수생 형이 놀라며 팔을 뻗어 붙잡았고, 열심히 공부하느라 코어 근육 따윈 전혀 없는 형과 함께 둘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엉덩방아를 찧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이정욱이 쌍욕을 뱉으며 아저씨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쿠웅! 형이 앉은 의자가 뒤로 넘어져 등 위로 떨어졌고 양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전체가 벌떡 일어났다. 누가 뱉은지도 모를 “아, 시발.” 하는 소리와 함께 취객들이 고깃집을 싸움판으로 만들어 놨다.
난장판이었다. 서로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밀치고 있었다. 생각보다 멋이 없는 싸움판에 헛웃음이 나오는 것도 잠깐, 의자에 등을 맞은 형의 다친 부위를 어루만진 영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깊은 한숨을 뱉었다.
망연자실한 영하가 나이 차이가 두 배가 나는 두 무리의 원색적인 욕이 나부끼는 끈적한 고깃집 바닥에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망했다…….”
조졌다. 최영하는 그냥 조졌다.
이 사건이 아빠의 귀에 들어가는 순간 최영하는 그야말로 집 안에 갇혀 밖에 나오지 못할 신세가 되어 버릴 것이 뻔하다. 기껏 허락해 줬더니 싸움이 나다니. 게다가 재수생 형은 아직도 영하의 허벅지에 얼굴을 대고 누워 있었다. 왜 안 일어나냐고.
그 순간 최영하의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이 난잡한 싸움판과 높은 담장 안에 갇힐 영하의 미래를 구원해 줄 단 한 사람이었다.
“검사 양반, 그거 좀. 그냥 술 먹다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하러 검사가 이런 일에 끼어듭니까?”
“그럼 경찰서 바로 가실까요?”
“아니, 그 말이 아니지, 나는, 그러니까 이런 사사로운 일에 검사 양반께서 귀찮게 일을 안 해도 된다는 뜻이었지.”
술에 취해 눈에 뵈는 것도 없이 한참 어린 이정욱과 욕을 하며 싸우던 아저씨는 30분 만에 도착한 서민석이 대충 묶은 넥타이를 휘날리며 달려와 명함을 보여 주자, 눈을 비비고 안경을 올려 글자를 읽더니 곧바로 입을 쏙 다물었다.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옆의 일행에게 명함을 전달해 주니, 잔뜩 지저분해진 칼라 티셔츠를 고쳐 입은 아저씨가 흠, 흠 헛기침했다. 영하는 그들의 모습에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서민석의 등 뒤에 섰다. 앞에 서긴 무서웠다.
서민석은 아저씨의 말에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안경을 올렸다.
“어차피 관할 경찰서로 이관 중이니까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CCTV 확인한 결과 선생님께서 먼저 손 올리셨습니다. 직원들 증언 들어 보면 학생분이 여러 번 사과하고 배상 의사를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만 내셨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그게 내가 노랫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잘 못 들어서 그래. 들었으면 화 안 냈지.”
“자세한 내용은 경찰서 가서 말씀하시죠. 일단 CCTV로 봤을 때는 먼저 손 나가서 밀친 후에 옆에 앉아 계신 선생님께서 마시던 소주잔 세 잔을 집어 던지셨고요.”
서민석이 가리키는 소주잔을 보더니 아저씨 무리의 입술이 일제히 삐뚜름해졌다.
“합의가 없으면 이 경우 다수, 흉기로 적용되어 특수폭행죄로 불구속 입건될 겁니다. 제가 경찰이 아니니 선생님을 잡아가진 않습니다. 저는 아마 앞으로 있을 일을 설명해 드리는 게 다죠. 일단 앉아 계세요. 5분 내로 지구대에서 도착할 겁니다.”
서민석이 끝까지 흥분 한 점 없는 온화한 얼굴로 줄줄 쏟아 냈다. 상대방이 입을 다물자, 돌아선 서민석은 영하의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다.
팔뚝에 소주잔을 세게 맞은 이정욱이 팔을 잡고 있었다. 의자를 등에 맞은 형 말고는 딱히 다친 곳은 없었다. 여섯을 슥 훑은 서민석은 재킷 밖으로 빠져나온 넥타이를 안으로 넣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같이 싸운 건 사실이니까, 경찰서 함께 동행하셔서 조사에 응하셔야 합니다. 일단 저도 따라가죠.”
두 걸음 다가온 그는 영하의 귓가에 대고 이어 말했다. 시원한 샤워코롱 향이 코끝에 닿았다.
“아마 경찰서 가면 합의하라고 할 거예요. 어떻게 할래요?”
입술이 너무 가까이 붙어 귓가에 간지러운 감각이 느껴져 부담스러웠지만, 뒤에 있는 아저씨들 무리가 못 듣게 하려는 의도인 것 같아 어깨를 굽힌 영하는 눈을 내리깔며 고민했다. 어차피 답은 하나였다.
“합의해야죠…….”
“혹시나 귀찮은 일 있으면 말해요. 친구 중에 변호사 많으니까. 아, 영하 씨 아버지도 변호사 자격증 가지고 계시겠네. 연수원 졸업하셨으니까.”
영하는 아빠의 이야기에 질린 얼굴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허락해 줬다 한들……. 그 잠깐 술 마시러 나간 사이에 싸움이 붙은 걸 알게 되면 그 남자가 이 아저씨들한테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앞으로 최영하는 대학 내내 동기들과 어울리지 못할 신세가 된다는 거지.
“지금은 아빠 출장 가신 데다, 아빠가 알면 안 돼요. 큰일 나요. 이 일… 아빠 모르게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뭐, 관리만 잘하면 모르겠죠. 경찰서에서 서류가 날아온다거나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나중에 전화는 한 번 올 수 있는데.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 출석하라고 하면 저한테 전화해요. 같이 가 줄게요.”
서민석이 그렇게 말하며 영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영하는 순간 신이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그는 현재 상황에서 구세주였다. 발목이 꺾일 위기에서 구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기쁘게 웃으며 고개를 여러 번 주억였다.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머쓱한 웃음이 따라붙었다.
“언젠가 연락할 줄 거라고 기대하긴 했는데, 설마 이런 일로 연락할 줄이야.”
“죄송해요… 퇴근하셨을 텐데.”
“그랬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일하는 중이었어요. 지구대 갔다가 곧 또 가 봐야 해요. 아, 저기 오네요.”
지구대가 가까이 있었는지 5분도 되지 않아 경찰들이 도착했다. 문밖에 정차한 경찰차에서 세 명의 경찰들이 내려 고깃집으로 다가왔다. 영하는 술 한잔하려다가 일이 커진 상황에 한숨을 쉬며 동기들을 돌아본다.
이정욱과 눈이 마주쳤다. 미간을 조금 찌푸린 정욱이 팔뚝을 만지며 영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아픈가. 걱정되어 다가가는 순간, 서민석이 영하의 팔을 붙잡았다.
“일단 제 차 타고 같이 지구대 가요.”
경찰서. 그러니까 지구대에 가 보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지은 죄가… 없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기가 죽었다. 나머지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쭈뼛쭈뼛 지구대 안으로 들어가자 노숙자 한 명이 등받이가 없는 긴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갈색 검댕이 묻은 옷을 슬쩍 본 영하는 서민석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
영하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담당 순경에게 명함을 건네준 서민석이 서글서글하게 말을 걸었다.
“의정부지방검찰청 검사이시네요.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의정부? 영하가 알기론 그는 서울중앙지검 소속이었다.
“아는 친구라서요. 합의하는 거로 하죠. 두 쪽 다 취했으니까요. 필요하면 치료비는 각자 보험 청구하는 거로. 다들 동의하죠?”
영하와 동기들을 보며 그가 물었다. 어차피 스물, 고작해야 스물하나의 어린애들이니 이미 다들 기가 바짝 죽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서민석은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배가 나온 아저씨 세 명이었다. 그들은 서민석과 눈을 마주치고는 뒤통수를 긁으며 경찰에게 이야기했다. 합의합시다.
조서를 쓰고 나오는데 어깨가 잔뜩 무거웠다. 서민석이 영하의 동기들에게까지 집까지 돌아갈 택시비를 쥐여 줘 버려서 죄책감에 어깨가 더 무거웠다. 영하는 단지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이유로 껄끄러워했기 때문에, 저렇게 착한 사람을 괜히 싫어했다는 후회였다.
‘네 마음대로 재단하고 결론 내렸잖아.’
아빠의 말이 떠올랐다. 남의 생각과 마음을 멋대로 결정짓지 말아야 하는데. 맞는 말이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뭘요. 차가우니까 지금 마셔요. 찰 때 마셔야 술도 깨고 효과도 있죠.”
동기들을 택시 두 대에 나눠 보낸 후, 영하는 서민석이 건네는 파란 이온 음료 캔을 받아 뚜껑을 따며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정말, 정말 감사했기 때문에. 진심 어린 인사였다.
지구대 불빛을 등지고 선 서민석은 캔 뚜껑이 갈라지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온화하게 웃었다. “잘 해결됐으니 다행이네요.” 그의 한마디를 들은 영하는 어쩔 수 없이 궁금했던 부분을 물어보았다.
“의정부로 옮기신 거예요?”
“음. 옮긴 게 아니라 좌천당한 거죠.”
예상치 못한 답변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미친. 실수했다. 오늘 왜 이렇게 실수 연발이지. 영하는 당황하며 사과했다.
“네? 좌천… 무슨 일.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누가 보냈을까요?”
“저야 모르죠…….”
제가 그걸 어떻게 아나요. 저는 그냥… 뉴스도 안 보는 대학생인데. 근데, 대체 좌천이면 무슨 짓을 했길래…. 아니야. 참아, 최영하. 아까도 아저씨 속으로 욕하다가 얻어맞았잖아.
영하는 최대한 머릿속을 비우려 노력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 그랬는데.”
“…누구….”
“영하 씨 아빠요.”
“예? 우리 아빠가요? 왜요? 왜?”
“저야 모르죠.”
서민석이 영하의 말투를 흉내 내 대답했다. 그것에 기분 나쁨을 느낄 새도 없었고, 세계가 그를 좌천시켰다는 말이 머리로 이해되지 않았다.
아빠는 검사도, 검찰 관계자도 아니고 그냥 회사의 임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임원 중에 제일 말단이라며 노인네들 고집에 스트레스받는다고 영하에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무,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 저희 아빠가 그랬을 리가… 없는데, 혹시 정말이면 제가 죄송해요.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봐요. 어떡하지, 아빠 오시면, 제가 말씀드릴게요.”
대체 무슨 일이지? 서민석은 이렇게 착한데? 아무리 나한테 호감이 있다고 해도, 지금은 시간이 꽤 지났고 영하가 대차게 거절을 했는데도 의정부에서 여기까지 곧바로 달려와 줬다. 그런데 대체 왜?
당혹스러움과 미안함이 동시에 들었다. 가라앉는 영하의 표정을 보며 손사래를 친 서민석이 고개를 돌려 지구대를 흘끗 응시했다. 안경알 위로 푸른 전등 빛이 대각선으로 비쳤다. 경찰들은 다들 자리에 앉아 있어 정수리 끝부분만 데스크 너머로 겨우 보였다.
그것을 확인한 서민석은 곧장 영하의 볼에 가볍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고, 아주 잠깐이었으나 그것은 분명히 볼 키스였다. 뺨에 입술의 형태와 촉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영하가 놀란 얼굴로 뺨을 잡으며 소리쳤다.
“뭐예요!”
“이건 오늘 변호비예요. 나도 변호사 자격증 있으니까. 뺨에다 하는 정도는 괜찮죠.”
“안 괜찮거든요? 이거 성추행이잖아요!”
영하는 똑똑하고 당돌했기 때문에 그의 잘못을 곧바로 짚을 수 있었다.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확장됐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설레서가 아니라 술집 바닥에 엎어졌던 그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망했다. 조졌다. 그 마음을 알 생각도 없는 서민석은 눈을 휘며 웃고는 대답했다. 그의 손가락이 지구대의 정문을 가리켰다.
“벌금 내고 올까요?”
뻔뻔한 질문이었다. 적반하장이다.
“자기가 검사면서!”
“그쵸. 제가 구형을 내린다면,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예요.”
“어이없어…….”
“이 정도는 봐줘요. 나는 아직 영하 씨한테 마음이 남아 있으니까.”
침묵했다. 단지 고개만 끄덕인 영하는 먼저 가 보겠다고 등을 돌렸다. 그는 굳이 태워다 주겠다고 말하지 않고 잘 가라며 택시비를 쥐여 줬다. 필요 없다고 돌아서니 이미 자신의 차를 타러 갔는지 그가 보이질 않았다. 다행이다.
*
영하는 부유하는 듯한 기분을 안은 채로 집을 향해 걸었다. 누군가 다가와 영하를 붙잡았고, 곧 그 남자의 품으로 몸이 안겨 들었다. 전신이 허공 위를 나는 듯했다. 까만 하늘이 하얗게 빛나더니 곧이어 하늘 위로 희뿌연 안개 같은 연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몸의 힘이 쭉 빠지고, 호흡조차 힘겨워 조금 웅크리자, 발목에 닿은 손길이 느껴졌다. 발목의 두께를 가늠하듯 쥐던 손길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개미가 기어오르는 느낌이라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였던 손은 곧 두 개가 되고, 영하의 다리를 넓게 벌리게 했다. 영하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등 뒤에 이불이 닿는 것이 느껴졌기에 눈을 감고 있어도 알 수 있었다.
허벅지가 양쪽으로 벌어지고, 하늘은 다시 까만색이 되었다. 까만색 위로 올라타는 연기. 희미하게 눈을 떴지만 보이는 것은 뿌옇게 사라지는 연기뿐이었다.
손이 허벅지 안쪽의 야들한 살을 만진다. 조금 흥분되기 시작했다. 성기가 발기하고, 뒤쪽이 젖어 들었다.
연기가 스르륵 모이기 시작하더니 하트 모양으로 변했다. 입술도 움직일 수 없어서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빠, 저것 봐. 연기가 하트 모양이야. 웃기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연기가 다시 사라졌다.
손이 곧 영하의 엉덩이 사이를 갈랐다. 영하는 그럴 때면 아래쪽에 힘을 빼려 노력했다. 곧바로 손가락이 들어오게 되니까. 이번에도 그랬다. 다물린 구멍 위에 손가락이 닿았다.
‘아빠…….’
소리 내어 그를 불렀다. 다리 사이로 들어온 손은 잠깐 주춤했다. 엉덩이가 미끈하게 젖은 것을 확인하더니 한참 아래를 허전하게 만들었다. 왜… 안 넣어 주지.
‘왜, 안 넣어 줘? 응, 아빠?’
영하가 속살대며 그에게 칭얼거렸다. 그는 대답 없이 반대로 멀어졌다. 영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이 피곤하고 어지러우니, 잠을 자야 할 것 같았다. 영하는 마수처럼 몰려드는 잠 속에 빠져들었다.
생각의 끈을 내려놓기 직전,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데…….
*
머리가 아팠다. 정말 깨질 듯이 아팠다. 어제의 기억이 거의 나질 않았다. 또 필름 끊겼나 봐. 으아아아아아.
눈도 뜨지 못하고 한참을 끙끙대다 다시 잠들었다. 눈을 뜨니 오후 1시였다.
몸이 축축 늘어져 겨우 움직이며 이불 속에서 벗어났다. 물부터, 물부터 마셔야 할 것 같다. 목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다. 주방에 있는 정수기 앞까지 가는 데에도 한참이나 걸려 도착했다. 아빠가 있었으면 물 달라고 하면 가져다줬을 텐데……. 아깝네.
아, 기억났다. 어제……. 난장판이었지. 유리컵으로 정수기에 찬물을 받아 원샷을 하곤 식탁에 널브러졌다. 시원한 대리석의 감촉이 좋아 한참을 그렇게 엎드려 누워 있었다.
이제야 조금 정신이 든다. 그래도 여전히 속이 느글느글하다. 영하는 엉거주춤 걸어 다시 안방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침대 위에 올라가 휴대폰을 들어 보니 아빠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 와 있었다.
하, 큰일 났네……. 엄청 화났겠지.
바로 전화할까 고민하다가 밀라노의 시차를 확인해 보니 현재 그곳은 아침 6시였다. 평소에 여섯 시 반에 일어나는 사람이지만, 혹시 모르지. 시차 적응도 있고….
나중에 전화해야겠다고 넘기며, 메시지 창을 켰다. 늘 보내는 사람 아니면 단톡방밖에 없었는데, 의외로 서민석의 메시지가 있었다.
영하 씨 어제 잘 들어갔어요?
다른 게 아니라
어제 차 타고 출발하려는데 영하 씨가 어떤 남자랑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그냥 뭐 아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혹시나 해서요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의심병이 많아서
어떤 남자? 누굴 말하는 거지. 기억이 없다. 어제 서민석이랑 지구대 앞에서 뭔가 대화를 했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그와 대화했다는 사실만 떠올랐다.
“으음…….”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며 한참을 고민했지만 역시! 안 떠오른다. 필름 끊겼네!
네, 괜찮아요 어제 남자 누구요? 기억이 안 나서요
답장을 보낸 후 휴대폰을 껐다. 그리고 정자세로 바로 누워 눈만 끔뻑였다. 아직 아빠가 오려면 이틀이 더 남았다.
보고 싶어…….
아, 맞아. 어제 보려다가 못 봤었지.
싸움 때문에 난장판이 돼서 깜빡하고 있었다. 얼른 휴대폰을 들어 포털에다 최세계를 검색했다. 어제와 달리 새로운 기사가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는 톤 다운 된 베이지색의 트렌치코트를 어깨에 걸친 차림새였다. 안에는 다소 화려한 브랜드 심벌 패턴이 그려진 블랙 셔츠와 심플한 더블 버튼 수트 차림이었다. 늘 그렇듯 잘생겼다.
기사마다 터치하여 사진을 저장하던 영하는 곧 댓글이 많이 달린 기사 페이지를 열었다. 계단을 오르는 최세계를 대각선에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가 미묘하게 고개를 틀어 카메라를 쳐다보며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웃어?”
웃는 얼굴을 보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영하는 왜인지도 모르게 씩씩대며 스크롤을 내린다. 댓글을 보자마자 왜 화가 났는지 인지했다. 온통 잘생겼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씨이…….”
마스크 쓰고 가라고 할 걸 그랬다. 이 얼굴이 인터넷 기사에 올라온다는 게 너무 싫었다. 대체 왜 기사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냐고. 자기가 사업가지 연예인이야?
그를 독점하지 못해 화가 난 어린이처럼 침대 위에서 발을 구른 최영하는 벌게진 얼굴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 구름 같던 연기. 잊고 있었던 어제의 기억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몸을 만졌다. 다리를 벌리게 하고 만졌다.
“뭐…… 뭐지.”
잠깐 빛처럼 떠오른 것이 넓게 퍼져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영하는 그 모텔의 침대에 누워 누군가에게 옷이 벗겨졌다. 분명 눈을 떴는데 앞이 보이질 않았고 온통 흐릿했다. 그래서 영하는 그 몽롱함에 취해 자신을 만지는 남자가 세계라고 생각했다.
‘아빠…….’
그래. 분명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 왜 넣어 주지 않느냐며 칭얼거렸다. 그러자 아래를 만지던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말도 안 돼.”
그러나 확실했다. 꿈은 아니었다. 이깟 기분 더러운 꿈을 꿀 리가 없다. 낯선 남자는 분명 아빠라는 말을 들은 뒤 사라졌다.
“잠깐…….”
크게 뜨인 눈이 허공을 응시했다. 뭔가, 뭔가 더 있어. 잊은 게 더…….
“아, 뭐지. 뭐야…….”
머리를 잔뜩 쥐어뜯으며 방 안을 누볐다. 뭔가 있어. 더. 더…….
왜 날 납치한 남자가 아빠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라진 거지? 뭔가…….
그대로 걸어 거실로 향했다. 잠옷 차림으로 1층을 내내 서성이다가 2층 계단을 오르던 영하는 창가를 돌아보다 불현듯 떠올렸다.
‘네 아빠는…….’
그가 떠나기 직전, 잠에 취한 영하에게 뭔가를 지껄였다. 하지만 정확한 내용까지는 기억나질 않았다.
*
끔찍한 기억 때문에 밤을 지새우고 등교했다. 지하철을 탈 기력도 없어 아침부터 택시를 탔다. 뒷좌석에서 영하는 내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반복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동기들끼리 술 한 번 먹으려고 했던 일이 이렇게까지 복잡해질 줄이야.
어제의 기억이 꿈인지, 정말 현실에서 벌어진 일인지 분간이 힘들었다. 서민석의 문자 답장을 보고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실은 그 모든 게 자신이 겪은 일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으나, 부정하고 싶은 것에 가까웠다.
눈이 안 좋은 편이라, 밤 시력이 나빠서요. 제대로 못 봤어요. 영하 씨랑 키가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 줘요. 기다릴게요
우울하고 무서웠다. 몸에는 아무런 섹스의 흔적도 없었지만, 불안감이 영하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창밖으로 줄지어 달리는 승용차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영하의 얼굴은 잔뜩 지쳐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으나 기댈 수 있는 남자는 아직도 한국에 없다. 가물가물 눈을 감는 동시에, 까만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 하나가 스쳤다.
새벽녘에 혼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광경이었다. 영하는 대학로에서 택시를 잡았고, 주소를 말하곤 그 안에서 잠들었다. 기사 아저씨가 깨워 준 후에야 겨우 일어나 집에 들어왔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강의실에 도착해 멍청하게 서 있던 영하는 뒤늦게 바로 앞자리에 앉아 가방을 열었다. 대각선에 앉아 있던 이정욱이 슬그머니 영하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향수를 뿌렸는지 시원한 비누 향이 영하의 코끝을 스쳤다. 이정욱이 인사했다.
“왔어?”
“어, 안녕.”
어색하게 인사를 마치고 전공 서적을 꺼내 하릴없이 페이지만 냅다 넘겼다. 아직 수업이 시작하려면 11분이 남았다. 이정욱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불안해서 할 말을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상태였다.
때마침 들어온 민재가 바로 뒷자리에 앉은 정욱과 영하를 보곤 앞자리에 다가와 풀썩 앉았다. 뭐가 들었는지 잔뜩 무거운 듯한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 돌아보더니 뭐야? 하고 소리 냈다.
“최영하 너 뭐 잘못 먹었냐?”
“아니. 아침 거르고 왔는데?”
“그래서 그런가? 표정이 왜 그렇게 죽을상이야? 남, 남… 아니 애인이랑 또 싸웠어?”
“아니야. 안 싸웠어.”
민재는 남자 친구라고 이야기하려다 뒤늦게 호칭을 바꿨다. 영하는 놀라지도 않고 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민재가 오니 조금 안심이 된다. 민재는 그러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근데, 어제 그 남자는 누구야? 검사.”
이정욱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넌지시 물었다. 간결한 물음이었지만 대답하기에는 굉장히 복잡했다.
서점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아빠의 전 약혼녀의… 동생? 전자로 대답하려니 그렇게 만났는데 술집에서 일어난 싸움을 도와주러 오느냐고 물을 것 같고, 후자로 대답하기엔 아빠에 관한 질문이 이어질 것 같아서 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크게 올려 뜬 영하는 결국 모호한 답변을 선택했다.
“그냥, 아는 사람.”
“…아.”
이정욱은 혼자서 곱씹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렇구나, 하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영하만큼 그도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질 않았다. 무슨 일 있나. 아, 그렇지. 팔에 소주잔을 맞았다. 그 생각이 들어 영하가 정욱의 팔뚝을 건드렸다.
“너 맞은 건 어때?”
데님 셔츠 부근을 만지며 묻자, 정욱은 민망한지 콧등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맥주잔도 아니고 소주잔이라 멍 좀 들고 말지.”
“그래도 멍들면 아픈데.”
“이쯤은 참아야지.”
영하도 엉덩이에 멍이 들어 본 적 있어서 안다. 앉을 수가 없었다. 엉덩이 생각을 해서 그런가? 이정욱이 엉덩이의 안부를 물었다.
“너도 넘어졌잖아. 쾅 소리 났는데, 엉덩이뼈 부러진 거 아냐?”
“그 정도로 안 부러지지.”
책을 넘기며 시큰둥하게 대답하고 돌아보는 순간, 이정욱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지.
영하의 대답에 더 대꾸도 없고, 책을 넘기는 녀석을 보며 미심쩍은 눈빛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뭐지? 뭔가 찜찜하다. 어쩌면 어제… 이정욱인가? 잠깐 의심의 싹을 틔울 찰나, 서민석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영하와 키가 비슷하다고 했다. 이정욱은 저보다 확연히 키가 큰 녀석이었다.
하지만… 밤눈이 안 좋으면 키 차이를 착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꿈이 떠오르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가슴 안이 초조하게 뛴다. 단 하루 만에 영하의 세상이 뒤집혔다. 더는 안전하지 않았다. 외줄을 걷는 것처럼 마음이 불안하고 감정적 동요가 심해졌다. 이 순간, 지구 반 바퀴 너머에 있을 그 남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수업이 끝난 영하는 무리와 떨어져 혼자 인문대학 근처 벤치에 초라하게 앉아 있었다. 보도블록 사이로 손가락만 한 잡초가 초록빛으로 올라와 있었다.
다음 수업까지 한 시간 반이 남았다. 점심을 먹기에도 모호한 11시 20분. 배 속에 무언가를 넣는 순간 그대로 게워 낼 것 같아 먹지 않겠다고 하고 따로 나왔다.
“…….”
꿈이 아닌 것 같아.
영하는 내내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 아닌 것 같아. 그 자체로도 끔찍하고 토기가 올라왔으나 그것보다 무서운 점은 영하는 어제 만취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술집에서 모르는 누군가와 합석을 한 것도 아니었고, 분명히 취했지만, 오리엔테이션 날처럼 인사불성은 아니었다. 의식이 또렷했고, 싸움판이 벌어진 이후로는 완전히 술이 깨 버려 지구대에 들어가 경찰들과 조서도 제대로 쓰고 나왔다.
“하아.”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한숨을 뱉었다. 몸이 조금 추운 듯해 걸친 청재킷을 단단히 여몄다.
술집에서는 멀쩡했다. 모든 일이 끝난 뒤, 집으로 가는 길에서 뭔가 사고를 당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발이 닿을 수 있는 공간 전체가 두려워졌다. 학교도 안전하지 않았다. 술을 먹지 않아도, 술집에서 모르는 사람과 만나지 않아도 어느 순간, 또 기억을 잃고 모르는 남자가 자신의 몸에 손을 댈 수도 있었다.
안 돼…….
두려움이 발목을 타고 기어올랐다. 그런 일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자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밖에 있으면 안 돼!
뒤이어 수업이 남아 있었으나 영하는 황급히 가방을 챙겨 벤치에서 일어났다. 내리쬐는 태양에 머리가 어지러웠으며 몸에는 오한이 돌기 시작했다. 서둘러 발을 놀려 뛰며 휴대폰을 들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꺼 둔 건지 고객과 연결할 수 없다는 신호음이 들렸다.
눈동자가 왈칵 젖어 들었다. 목소리를 들으면 조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 그가 옆에 없으면 자신은 혼자였다.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안방으로 가면서 허물처럼 옷을 벗어 던졌다. 몸이 뜨거운데 얼어 죽는 기분이었다. 3월 중순이 되고부터 틀지 않은 난방기를 한참 올려 켜 두고, 안방의 침대에 누워 이불로 몸을 둘둘 감았다.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아빠.” 하고 연이어 그를 부르는 목소리만 흘렀다.
한 시간 뒤, 영하는 눈이 내리는 벌판 위에 벌거벗고 서 있는 듯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다.
“추워…….”
입술이 파리하게 질리고 떨리는 손이 두꺼운 이불을 힘없이 쥐었다. 겨울용 이불 두 개를 겹쳐 짓눌리는 듯한 무게 속에 몸을 넣고 있어도 추위는 사라지지 않았다. 얼음덩이를 몸 위로 마찰이라도 시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제 몸은 열이 올라 있다. 자신의 몸을 만지는 곳마다 뜨거웠다.
“추워요, 아빠… 아빠….”
아무리 불러도 그가 오질 않았다. 울음을 삼키며 몸을 작게 웅크린 영하는 베개 아래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무거운 이불 때문인지 숨 쉬는 게 버거워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끌어안고는 침착해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쉽지 않다. 이렇게 오한을 느끼는 게 정상은 아니다.
그래, 119에 신고하는 거야. 아빠가 없으니까 누군가 날 도와주려면……. 그 생각이 번쩍 들자 없던 힘이 겨우 솟아나 손을 뻗었다. 휴대폰을 쥐려 손바닥이 침대 매트리스 위 이곳저곳을 누볐다. 신고해야 한다. 영하는 응급실로 가야 했다.
“최영하. 학교 갔어?”
손끝에 휴대폰의 모서리가 스치던 바로 그때, 영하가 가장 보고 싶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칫 몸이 굳었다. 그를 너무 애타게 부른 나머지 환청을 듣는 것이 아닌가 해서였다. 이윽고 현관문이 닫히고 도어 록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그것이 현실임을 깨달았다. 영하는 번개처럼 일어나 무거운 이불을 밀치고 안방을 튀어 나갔다.
“허물은 있는데.”
거실에 도달한 그가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 던진 바닥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최세계는 조금 얼빠진 얼굴을 했다. 이어 안방에서 뛰쳐나온 헐벗은 영하의 몸이 그의 품 안에 대뜸 안겨 들었다.
거침없이 와락 안기는 몸을 가득 끌어안은 그가 기분 좋게 웃으며 목덜미에 입 맞췄다.
“내 상상보다 훨씬 더 반겨 주는데. 보고 싶었어? 근데 왜 옷을 벗고 있어.”
푹 들어간 쇄골 위로 입술을 문지르고 바닥에 내려 준 그는 속옷 한 장 입고 있지 않은 영하의 모습을 보며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혼자 뭐 했어?” 하고 묻자 영하는 어깨를 잔뜩 떨었다.
아빠의 다정한 목소리 사이로 무언가가 침투했다.
“흐으…!”
영하는 발작처럼 떨며 무너져 내렸다. 마른 무릎이 바닥에 부딪치며 순식간에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놀란 세계의 가방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 너머로 영하는 남자와 여자, 어른과 노인의 목소리가 겹쳐진 음성이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을 들었다.
‘네 아빠는 후장에 손가락 넣어 주나 봐?’
꿈이 아니었다.
*
쓰러진 영하는 연신 춥다는 이야기를 했다. 너무 추워 견딜 수 없다고 목 놓아 울었다. 하지만 몸은 불덩이였고 환각이라도 보는 듯 “피아노가, 피아노 음악이랑… 연기가 이상해.”라고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최세계는 곧장 그의 매형에게 전화했고, 쓰러진 영하에게 아무 옷이나 입혀 자신의 차에 태웠다. 구급차를 기다릴 시간도 부족했다.
곧장 매형이 있는 대학병원의 응급실로 향해 모든 검진을 마치고 영하는 1인 병실로 옮겨졌다. 최세계는 영하의 증세와 약물 복용 검사를 해야겠다는 담당 의사의 말에 내심 무언가 짐작하고 있었다.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알프라졸람이 검출됐습니다. 보통 불안증과 우울증을 치료하는 신경안정제로 사용하는데 가끔…….”
“데이트 강간 약물로 악용되죠.”
예상 그대로였기에 최세계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마른 몸에 안경을 쓴 중년의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예. 병원에서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략 1회에 0.5밀리그램인데, 즉각적인 효과를 위해 그보다 더 많은 양의 약을 사용했을 겁니다. 다른 벤조디아제핀 의약품과 달리 알프라졸람은 중독성과 의존성이 강하기 때문에 앞으로 며칠간은 지켜보며 복용하되 투여량을 조절해야 합니다. 갑자기 투약을 중단했다간 오늘 같은 발작이 계속될 겁니다.”
눈이 질끈 감았다 뜨인다. 씁쓰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른 약은 발견된 것 없습니까. 오피오이드 같은…….”
“검사 결과에는 없습니다. 환자분 몸 상태를 생각해 보면 알코올과 벤조디아제핀의 복용으로 부분적 기억상실 및 발작 같은 부작용이 당분간 계속 존재할 겁니다. 추가적으로 간 검사는 주기적으로 받으셔야 하고요. 퇴원하시고도 한 달 내지 두 달에 한 번씩은 검사받으셔야 합니다.”
세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흘끗 등을 돌렸다.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잠든 걸 보고 나왔으니 영하는 여전히 침대 위에 있을 것이다. 뺨을 감싸 쥔 그는 입을 다문 의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환자에겐 그냥 몸살인 걸로 해 주십시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나요?”
“제 얼굴을 보자마자 발작해서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먼저 말해 주기 전엔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 마음을 이해합니다만, 보통 데이트 강간 약물 후유증으로 병원까지 오게 되는 피해자분들은 드문드문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
“제가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확신을 드리긴 어려워도, 잠든 사이에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더 괴로워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다행히 신체 외관상 폭력의 흔적은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도 일단은 몸살로 해 주시죠. 추후에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세계는 더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젓고 텅 빈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담당 의사가 대꾸 없이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괴로운 음성을 냈다. 차분하게 떨어지는 숨소리마저 떨리고 있었다.
“하…….”
입원 병동은 조용하다. 링거를 꽂은 환자 몇이 소리 나지 않는 얇은 슬리퍼를 끌고 산책하듯 전등이 어두운 복도를 느릿하게 걸어 다녔다. 일반 병실과 조금 떨어진 1인실 앞에 앉은 것은 최세계 혼자였다.
“더 늦게 왔었으면…….”
그는 예정된 출장 기간보다 훨씬 더 빠르게 한국에 도착했다. 사업차 만나기로 했던 비공식 일정을 죄다 취소하고 공식적인 일정인 패션쇼가 끝나자마자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어리광쟁이니 메시지도 자주 보내고 전화도 자주 할 거라 예상했던 최영하가 연락도 없이 조용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새끼가…….”
이를 악문 음성이 목구멍을 긁으며 조용히 흘러나왔다. 최세계는 플라스틱 벤치의 끝을 강하게 부여잡으며 차오르는 분노를 애써 죽였다. 손등의 핏대가 번쩍 서고 도드라지게 드러난 손마디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끝이 희게 변할 때까지 숨을 몰아쉬자 천천히 호흡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한참을 이마를 쥐고 신음하고 호흡해 보나 고통스러운 감각은 나아지질 않는 듯 명치를 문지른 그는 힘이 빠진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김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내내 허공을 바라본 최세계의 동공은 시커먼 그림자로 흐릿했다.
“접니다.”
-예, 상무님.
“내가 공항에서 출발한 이후로 영하 동태 파악해서, 관련 CCTV 다 조사해 봐요. 이틀 전 저녁에 집 밖에 나갔을 텐데 학교 근처 술집 거리였습니다. 거기서부터 48시간 이내에 갔던 곳, 먹었던 것, 만난 사람. 싹 확인해서 보고해요.”
통화를 마친 최세계의 얼굴은 여전히 절망이 가득 내린 모습이었으나, 10분 뒤 영하가 잠들어 있을 병실의 문을 여는 순간에는 더 이상 슬픈 기색은 존재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간 병실 안에서 영하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초췌하긴 했지만 울거나 아파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빠, 나 뭐래?”
조금 쉰 목소리에 최세계의 입가가 움찔했지만, 그는 멀쩡한 낯으로 대꾸했다.
“몸살이야.”
“몸살이라고? 진짜 아팠는데… 엄청 추웠는데 고작 몸살?”
“그러니까 몸살이지. 너 원래 몸살 심하게 걸리잖아.”
“겨울에나 걸리지, 지금은 봄이잖아.”
“원래 이맘때 걸리는 몸살이 제일 독한 거야. 대체 뭘 먹고 사는 거야, 너? 밥 똑바로 안 먹을래?”
“갑자기 무슨 밥 이야기… 제대로 먹거든요?”
몸살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그의 말이 맞았다. 영하는 거의 매년에 한 번씩 몸살을 크게 앓았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다음 날 아침 걷지도 못하고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증세가 갑작스럽게, 심하게 찾아왔다. 이틀 내내 감기로 앓아누울 때마다 열로 혼몽한 의식 너머로 그가 늘 지켜봐 주고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작년에는 감기 안 와서 좋았는데…….”
“뒤늦게 찾아왔나 보지 뭐.”
“근데 몸살인데 입원해? 언제 퇴원하는 거야.”
“일주일.”
“일주일이나? 여기서?”
“빨리 나으려면 그게 좋으니까. 겁만 많아 가지고. 그냥 네가 너무 약해서 그래. 온 김에 건강검진도 받고 그런 거지. 얌전히 있어. 학교 안 가고 좋잖아.”
영하는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고작 몸살로 입원이라니….
침대맡에 다가온 그가 허리를 숙여 영하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조심스럽고 세심한 손길이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 영하는 자신의 손에 꽂힌 링거 바늘을 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이것도 일주일 내내 하고 있어야 해?”
“의사한테 물어볼게.”
세계가 침대 끝에 앉으며 말했다. 엉덩이를 당겨 그의 앞으로 붙은 영하가 어깨에 이마를 대곤 숨을 천천히 몰아쉰다. 등에 손이 닿고 품으로 이끌렸다. 그제야 안심이 된다. 긴장한 목과 어깨 근육이 느슨해졌다. 이제 안전하다. 아빠가 있으면 영하는 안전할 수 있었다.
‘네 아빠는 후장에 손가락 넣어 주나 봐?’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마치 진동하듯, 혹은 합창하듯 온갖 형체로 뒤섞인 음성이 그렇게 말했다.
문제는 상대가, 어쩌면 영하와 최세계의 관계를 눈치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누굴까. 아예 자신과 연관 없는 남이길 바라야 한다. 아는 사이라면… 큰일이었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춘 영하는 최세계의 품 안에서 그에게 어리광 부리듯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보고 싶어서.”
담백하게 나온 대답에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잔뜩 들떠 기뻐하기엔 지금의 기분이 허락하질 않았다. 그러나 침울한 모습을 보이면 그가 이상하게 여길까 봐, 영하는 굳이 고개를 들어 웃었다.
“그러면 나 일주일 내내 여기 혼자 있어?”
“왜 혼자야. 아빠가 있는데.”
“아빠는 돈 벌러 가야지.”
“내일까진 여기 있을 거야. 어차피 밀라노 일정은 4박 5일이었으니까.”
그래도 어차피 그중에 6일은 혼자 있는 거잖아. 심심하겠네. 그의 허벅지를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아니, 차라리 병원에 있는 게 안전할 수도 있다. 영하는 학교의 동기들도 믿을 수 없는 처지였다. 이래서야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하. 벌써 심심하다. 재미있는 이야기 해 줘.”
자책의 수렁 속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최세계는 재미있는 이야기란 말에 난감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
“음. 아빠 파혼한 이야기?”
“하, 지금 그게 재미있는 이야기야? 성질머리하고는.”
“난 재미있지. 해 줘. 서수민 씨한텐 뭐라고 한 거야? 서수민 씨가 아빠 엄청 좋아했잖아.”
영하가 ‘엄청’에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상견례에서 본 그녀는 사랑에 빠진 얼굴이었다. 얼굴만 잘생기고 몸만 좋은 이 남자에게 완전히 빠져들어 있었다. 대체 뭐라고 말하고 파혼하자고 했을까? 상처받았겠지. 미안한 마음도 있다. 약혼식 열흘 전에 파혼을 했다고 했으니… 아마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그런 영하의 마음과 달리 세계는 떨떠름한 얼굴을 하며 대답하기 꺼렸다. 팔을 뒤로 해 몸을 받친 그는 희뿌연 수증기가 올라오는 가습기를 보며 침묵했다.
“빨리. 말해 줘!”
그 꼴을 보니 영하는 꼭 들어야겠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말을 안 해 주지? 최세계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
최세계와 서수민은 그의 사무실에서 마주했다. 파혼으로 들이닥친 일과 잡다한 뒤치다꺼리 때문에 바빠 카페까지 가서 마주 보고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다.
서수민은 깔끔한 블랙 팬츠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파혼 이야기부터 꺼냈는데, 눈썹만 올리며 놀라는 것을 표현할 뿐, 대단한 감정적 동요가 없었다.
그때부터 세계는 그녀에게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하얀 옷을 입던 지난번과 달리 어두운 수트를 입어서 그런 것인지 서수민 특유의 착하고 조신한 모습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처음 선 자리에서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녀와 그 사이에는 어떠한 성적인 접촉과 낭만적인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지만 오늘은 유달리 달랐다.
“파혼으로 저는 잃는 것밖에 없는데, 싫어요.”
서수민이 전혀 싫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냥 해 줄 거라 생각은 안 했습니다. 원하는 걸 말해 봐요. 한두 개 정돈 들어줄 수 있으니까.”
미리 돈도 준비해 뒀다. 피아노를 치다 그만두고 결혼하면 살림을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니 어디 한자리 달라고 하진 않을 것 같고, 돈이나 집 따위를 원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유리 테이블 아래에서 준비해 둔 수표 봉투를 꺼내려 아래로 손을 뻗던 그에게 건너편에 앉은 서수민이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세계 씨는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나요?”
“글쎄요. 그런 고민은 해 본 적이 없어서.”
“약혼 결정하면서 저희 집안에 대한 조사를 해 보셨을 테니 저희 엄마에 대한 일은 아시겠죠. …제가 원하는 건 하나예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도와줘요.”
의외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건이었다. 손에 쥔 수표 봉투를 도로 떨어뜨린 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표정을 조금 구겼다. 파혼하는 게 어렵지 않을 줄 알고 선택한 여자가 예상치 못한 복병으로 드러났다.
첫 만남 때 서수민은 그에 대한 호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결혼을 향한 열망도 강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일반적으로 짝사랑하던 남자와 선 자리에서 만난다면 결혼부터 하고 싶어 안달일 텐데도 서수민은 최세계의 결혼에 앞선 약혼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운 눈치였다.
“난 탐정이 아닌데. 직업을 잘못 알고 있군요.”
“고작해야 사무실 하나 가진 탐정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러면 더더욱 경찰에 신고하셔야죠.”
“경찰에선 이미 사건 종료한 사안이에요. 범인이 잡혔죠. 근방에 살던 육십 대 남자. 하지만 그 남자가 진짜 범인이었다면, 제가 엄마에 대한 복수를 부탁할 일도 없었을 거예요. 세계 씨도 사법연수까지 끝내고 유학을 선택한 데에 이유가 있듯이, 저도 그래요.”
이런. 확실하게 잘못 골랐다. 세계는 잘못 고른 것을 넘어 잘못 걸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겁 많은 영하를 구워삶는 데에 전력을 쏟아야 하는 시점에 관심도 없는 여자의 복수 요청을 들어줄 시간 따윈 없다.
“개인적인 원한이 꽤 큰 것 같은데 스스로 해도 될 텐데요. 그 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서수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지는 동시에 음울한 그림자가 코 아래까지 드리워진다. 그녀는 자조적으로 이야기했다.
“저한테는 상대가 좀… 버거워서요. 일단 제가 원하는 복수는… 죽는 걸 바라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면, 그것도 감안해야죠.”
“타인을 교사하여 죄를 범하게 한 자는 죄를 실행한… 살인 교사는 최소 징역 5년입니다. 물론 살인도 동일하고. 내가 법 공부하는 6년 동안 뭘 배웠다고 생각합니까? 게다가 지킬 가정이 있어 범죄에 가담할 의향이 없습니다. 나는 성실 납세자에 모범 시민이라. 안타깝네요. 그런 것 좋아하는 사람들 있으니 알려 드릴까요? 1억이면 가능할 겁니다.”
최세계가 이때다 싶어 장황하게 읊었다. 최세계는 토끼 같고 고양이 같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수할 만큼 파혼이 급한 것 아닌가요?”
서수민이 입만 당겨 웃었다. 뭔가를 아는 것처럼. 그녀에게서 느낀 기묘한 감각은 역시 사실이다. 가끔은 원칙과 정론, 이론과 실재를 넘어서는 직감이라는 것이 잘 들어맞을 때가 있었다. 최세계는 불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슬쩍 떠보았다.
“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세계 씨 의외로 순진하네요. 제가 연기했을 거란 생각은 못 해 봤어요?”
“…….”
“전부 다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바로 착수해 달라는 것도 아녜요. 저도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때가 되면 연락드릴게요. 그날이 오면 아마 세계 씨도 거절하지 못할 거예요.”
자리에서 일어난 서수민이 그대로 사무실을 떠났다. “다음에 봬요.” 조곤조곤한 인사가 마지막으로 남았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 놓아둔 어린잎 녹차는 찻잎 잔여물이 찻잔 바닥에 잔잔히 고여 있었다. 입도 대지 않은 처음 상태 그대로였다. 불편한 얼굴 로 닫힌 문을 바라본 최세계는 수표 봉투를 천천히 들며 일어났다. 돌이켜 생각해 보곤 미간을 콱 찡그렸다.
“나, 여자한테 인기 없는 타입이었나.”
조금만 건드리면 고양이처럼 아르릉거리는 아들이 보고 싶었다.
*
서수민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역시 모든 사람과 가정은 멀리서 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영하는 최세계의 가슴에 뒤통수를 대며 조용히 되물었다. 끝으로 가면서는 날이 조금 서 있었다.
“여기저기 다 조금씩 아픔이 있네…. 근데 서수민 씨가 아빠를 안 좋아한다는데 왜 충격받았어? 아빠 뭐야?”
“그야 당연하지. 서수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군가 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연기였다면 너라면 충격받지 않겠어? 그 여자는 내 타입 아니야. 강아지인 줄 알았는데 완전히 강아지를 삼킨 뱀이었어. 난 역시 고양이파야.”
세계가 영하의 뺨을 잡아 늘이며 말했다. 최세계는 사람을 동물로 비유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저번에 호텔에서 만난 남자더러는 곰이라고 했는데.
영하는 뺨을 아프게 당기는 손을 잡아 내렸다. 역시 아빠랑 있으면 잡다한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와 나누는 말들이 죄다 생각도 필요 없고 영양가 없는 잡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손바닥과 겹쳤다. 저보다 손가락 마디 하나가 더 큰 손이었다. 가만히 겹치고만 있자 세계가 손을 접어 깍지를 낀다. 손가락끼리 얽혀 들었다. 미소 지은 영하는 고개를 조금 들어 최세계의 얼굴을 올려다보곤 다시 어깨에 기대어 말했다.
“서수민 씨가 부탁했다지만, 그래도 복수 대행 같은 거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거슬렸다. 게다가 어머니를 죽게 만든 상대라면 보통 인간도 아니고,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아빠를 거기에 말려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심지어 나 때문에 결정한 파혼으로 휘말린다니. 복수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불쾌한 날카로움이 있었다. 위험한 상대라는 생각에 어쩐지 불안하기도 했고,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공포도 여전히 도사렸다. 대체 누구일까…….
“걱정 마. 나도 할 생각 없어. 너랑 놀아야지, 누구 복수해 줄 시간 따위 있을 리가.”
말을 마친 최세계는 평온한 영하의 얼굴을 훑더니 예고도 없이 다리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엉덩이 들어.”
“싫어. 하지 마! 병원인데.”
“확인하는 거야. 밑에서 또 물 나왔을까 봐. 팬티도 안 입었는데 젖으면 간호사들이 이상하게 볼 거 아냐.”
“안 나왔어. 안…….”
영하가 몸을 들려 하지 않자, 허리가 그의 팔에 감겨 쑥 올라간다. 초록색 병원의 로고가 박힌 환자복 바지는 너무 쉽게 벗겨졌고 속옷조차 입지 않은 상태라 옷 한 장의 탈의로 엉덩이가 훤히 드러난다. 최세계는 망설임 없이 다물린 골 사이로 들어가 구멍을 더듬었다. 저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음. 괜찮네. 아프진 않아?”
보송보송한 아래를 문지른 그가 영하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물었다. 검지가 오밀조밀 다물린 구멍 위를 조심스레 쓸기 시작했다.
“응, 아프진….”
흥분감은 없었지만, 숨결이 헐떡인다. 흥분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정상적인 호흡으로 돌아오질 못했다. 불안함을 안은 눈동자가 방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작은 냉장고가 놓인 병실에는 흔한 복제품으로 보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판화가 걸려 있었고 문 옆에는 꺼진 TV와 선반이 하나 있었다. 흐읍, 하고 숨을 겨우 들이마실 시점. 끈질기게 아래를 만지던 손가락이 불쑥 들어왔다. 조금도 젖지 않은 상태라 밀고 들어오는 감각에 거부감부터 들었다.
“아, 넣지 마…!”
“가만히 있어. 그냥 확인하는 거라고 했잖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확인만 할 거야.”
“뭘, 뭘 확인한다는 읏….”
“아파?”
손가락은 겨우 두 마디 들어오고 진입을 멈췄으나 안쪽의 내벽을 꼼꼼히 문질렀다. 세계가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영하는 아픈지도 아닌지도 구분이 가질 않았다. 찢어지거나 저릿한 통증은 없으니 아프지 않은 거겠지.
영하는 불편하게 허리를 든 자세로 고개만 내저었다. 이유 없이 뺨이 붉게 상기됐다. 자꾸만 천장 위로 피어오르던 연기가 떠올랐다.
아프지 않다고 하자 다행히 그는 금방 영하를 놓아주었다. 손을 빼내곤 착실히 바지를 올려 입힌 후에 손을 닦고 토닥토닥 가슴을 두드렸다. 그런다고 아기처럼 잠이 들 리가 없었다. 영하는 토닥이는 손을 밀쳐 내곤 현실적인 소리를 했다.
“늘 자기는 원칙주의자라면서… 이런 원칙이 어디 있어. 아픈 아들한테!”
아무리 아빠라지만 이렇게 난데없이 엉덩이를 아무 데서나 까고 싶진 않았다. 갑자기 간호사라도 들어오면 큰일이다. 정말로 큰일이었다.
“살면서 예외라는 게 있는 법이야. 그런 게 융통성이지. 융통성 없는 녀석들은 도태되길 마련이야. 아빠 말 잘 들어. 지금 중요한 거 알려 주잖아.”
다 듣지 않아도 궤변일 게 뻔해 귓등으로 넘기며 휴대폰을 들자 그가 영하를 붙잡았다.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라며 두 뺨을 잡아 눈을 마주치게 했다. 영하는 그의 눈을 보자마자 입술을 삐죽이곤 속으로 투덜댔다.
잔소리…….
“확실히 다른 아픈 데 없지?”
“없어. 지금은 괜찮아.”
“숨기지 말고 뭐든 말해야 해. 난 네 보호자니까.”
“괜찮아. 안 아파.”
이번에도 귓등으로 넘겨 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세계는 영하의 얼굴을 꼼꼼히 살피고는 이윽고 놓아준다. 그의 표정이 그다지 편하지 못했다. 신경 쓰이는 구석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왜 그런지 잠깐 고민해 봤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자식이 아프니 부모 입장에서 마음이 좋을 순 없다. 걱정 끼친 게 미안해 팔을 뻗어 그를 당겨 안았다.
커다란 품에 안겨 있어도 영하의 마음은 여전히 우울했다.
*
“가루약 먹기 싫어.”
하얗게 부서진 가루약 봉투를 형광등에 대고 흔들며 영하가 말했다. 허벅지까지 오는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든 최세계는 철없는 소리에 눈을 가늘게 뜨며 뒤돌았다. 영하의 칭얼거림에도 대답하지 않고 500mL 생수병을 돌려 땄다. 이제 고작 세 번 약을 먹었으면서, 더 못 먹겠다고 찡얼거리는 것이다.
“써서 먹기 싫어. 너무 쓰잖아. 사약 아냐?”
“네가 어린애야? 빨리 넘기고 끝내. 사탕 사 올게.”
영하는 결국 생수병을 받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손안의 투명한 약포지를 뚫어져라 노려볼 뿐, 뜯어서 안의 내용물을 입에 넣을 생각이 없다. 30초면 끝날 복용을 질질 끌고 있었다.
가만히 앞에 서서 지켜보던 최세계가 결국 폭발해 짜증을 냈다. 신경질적으로 팔뚝을 걷고는 근처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를 질질 당겨 와 앉았다.
“화나게 하지 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너 스무 살이라고. 옆방의 여섯 살짜리 애보다 못한 짓 할 거야? 걘 울지도 않고 주사 맞던데, 너는 스무 살이 가루약 하나 못 먹겠다고 떼를 써?”
“떼쓰는 게 아니라, 약 먹어야 하는 거 알지. 근데 진짜 안 넘어가, 안 넘어가서 못 먹겠어…. 알약으로 주면 먹을게.”
“좌약으로 받아 와서 의사 앞에서 박아 버리기 전에 먹어.”
“못 먹겠다니까. 진짜…!”
답답한 가슴을 쿵쿵 치곤 최영하는 캑캑 헛기침까지 토해 냈다. 주먹 안에 꾹 쥔 가루약을 짜증스레 내려다본 최세계는 결국 이마를 쓸어 넘기곤 자리에서 일어나 기존의 약봉지를 챙겨 들었다. 영하는 못된 새끼 고양이처럼 입을 뚱하니 말아 다물고 있었다.
“기다려. 다시 받아 올 테니까.”
세계는 바로 병실을 나갔고,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은 십오 분 뒤였다. 그가 내미는 약봉지를 받아 든 영하는 종이봉투에 병원 이름과 날짜 말고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는 안에 든 약을 꺼내 [점심 식후]라고 적힌 것 하나를 뜯었다.
“아빠. 나, 사이다.”
“……내일부턴 그냥 간병인을 들여야겠어.”
그가 상전의 사이다를 사러 간 사이, 영하는 봉투에서 뜯어낸 약 두 알을 이불 위에 가지런히 펴 놓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약의 이름과 약효를 묻는 글이었다.
얼마 뒤 그가 사이다 세 캔을 사 오자, 영하는 아빠가 보는 앞에서 알약을 넘겨 먹었다. 곧바로 사이다 캔을 따 주며 그가 한숨을 뱉어도, 영하는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두말없이 약을 먹고 나니 세계는 화가 풀린 듯 영하의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화났어?”
“당연히 화났지. 풀어 줘.”
약을 얻으려는 방법이었으나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부린 것은 사실이다. 뺨 위에 닿은 손을 잡으며 묻자 그가 누그러진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화를 풀어 달라는 세계의 말에 곧장 영하는 잡은 손바닥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커다랗고 따뜻한 피부 위로 입술의 감촉이 닿았다 느긋하게 떨어진다. 그러고도 눈치를 보며 흘끗 올려다보니, 특별한 반응이 없다.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일어서서 키스해야 할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지 고민했다. 어쨌든 자신은 표면적으로는 몸살에 걸린 환자였다. 비록 기침도, 목의 아픔도, 아무런 증상도 없지만.
침을 삼킨 영하가 선택한 것은, 키스 대신 그의 손가락을 입 안에 넣는 것이었다.
손가락 두 개를 입 안으로 삼켰다. 막상 넣긴 했으나 어떤 식으로 빨아야 이 행동이 애무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영하가 눈동자만 올려 그와 눈을 마주치며 혀로 손가락을 감았다. 짠맛이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
세계는 말이 없었다. 눈썹의 미묘한 변화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오기가 들어 슬쩍 벌어진 검지와 중지 사이에 혀를 밀어 넣고 춥- 춥-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빨아들이고 절반만 머금은 것을 끝까지 입에 넣으려 고개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가 영하의 이마를 다급히 붙잡았다. 눈동자를 스르륵 굴려 그를 올려다본다. 남의 손가락을 야하게 빠는 것치고는 제법 순진해 보이는 눈동자였다.
“너 자꾸 이런 거 어디서 배워 오는 거야.”
“안 배웠어…….”
“안 배워도 그냥 알아? 그런 게 어딨어. 됐어. 그만하고 자.”
“싫었어?”
“너무 좋아서 문제니까 그만해. 환자 상대로 섹스 안 하니까.”
마찬가지다. 하지만 조금 아쉬웠다.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비서실장이라는 이름을 본 세계는 영하를 흘끗 살피고는 문 앞으로 향하며 말했다.
“잠깐 업무 통화 좀 하고 올게.”
“응.”
최세계가 나가자마자 영하도 휴대폰을 들었다. 좀 전에 진동이 몇 개 울렸는데,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그가 없는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휴대폰을 들어 답변에 오른 약 이름을 그대로 긁어 구글에 검색했다.
자낙스정 0.5mg
항우울제나 불안 장애 치료 용도로 사용됩니다
약만 먹으면 졸음이 쏟아졌다. 영하는 거의 24시간 중 18시간을 잠들어 있었다. 눈을 뜰 때마다 곁에 아빠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함이 해소되질 않았다. 약 효과가 사라지자마자 불안이 썰물처럼 몰려들었다.
대체적으로 감기약을 먹으면 졸리는 증상도 함께 나타나지만, 그 수준이 아니다. 약을 먹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지고 눈이 꾸벅꾸벅 감겼다. 게다가 더는 오한도 발열도 없는데도 앞으로 사흘은 더 입원해 있어야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뭔가 이상해. 감기가 아닌 것 같아.
포털에 약의 이름을 검색하자, 자낙스정이라는 약 이름 옆에 알프라졸람이라는 단어가 따라붙었다. 끈질기게 서치 후, 영하는 그것이 마약류로 오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거의 모든 정보 글마다 중독성과 후유증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자 영하는 혼란스러웠다. 휴대폰은 베개 밑에 넣어 두고 명치 위를 손으로 문질렀다. 약 기운이 올라오고 있으니 또 삼십 분 안에 잠들 것이다.
…왜 나한테 거짓말한 거지?
왜… 몸살이라고 거짓말하고, 약을 숨기기 위해 가루약으로 만들면서까지 나한테…….
여긴 정신과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항우울제로 저 약을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약효가 스며들지 못하는 곳으로 우울함이 파고드는 것 같다. 어쩌면 아빠가, 자신이 숨기고 있는 것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해하면 어떡하지.
영하가 괴로운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 강제로 만져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로 그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
조금 빨리 퇴원할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예정했던 일주일을 다 채우고 퇴원했다.
오래간만에 집에 들어가자 낯선 기분이었다. 잔디가 좀 더 자라난 것 같고, 영하의 어깨까지 오는 능소화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집인데도 잠자리가 뒤숭숭하다. 꿈을 꾸는 듯 정신이 잠든 내내 살아 있었다. 어젯밤 11시가 되어 퇴근한 아빠가 씻고 침실로 올 때까지 기다리다 함께 잠들었다. 하루 종일 뭐 했냐고 묻는 물음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다 보니 졸음이 쏟아져 그대로 잠들었는데, 영 시원찮은 수면이었다.
덕분에 여섯 시 반에 일어난 그가 움직이는 소리에 완전히 깨 버렸다. 분명 잤는데, 잠을 잔 기분이 안 들어서 눈 밑이 퀭하다. 마른 얼굴을 문지르곤 침대 위에 웅크려 엎드려 있다가 끙,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잠든 영하가 깨지 않도록 거실에 있는 욕실에서 씻는 중이었다. 종종 세계더러 자기중심적이고 성격이 나쁘다고 쏘아붙이곤 하지만 사실 그는 최영하에게는 배려가 생활에 녹아든 남자임을 알고 있다. 그러니 사랑하는 것이다.
거울을 슬쩍 들여다보곤 그대로 거실로 나가 욕실 문 앞에서 기다렸다. 건너편 복도 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주저앉아 물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이어의 뜨끈한 바람 소리가 조용해지고 문이 열렸다.
흰 수증기를 뒤로하고 나타난 최세계는 문 바로 앞에 오도카니 앉은 영하를 보고 멈칫하더니 멀뚱히 쳐다보는 아들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 열한 시 수업인데 왜 벌써 일어났어.”
“내 시간표를 다 외웠어? 언제?”
“그런 거 외우는 건 일도 아니지.”
그래? 나는 아직도 가끔 시간표 들여다보는데.
영하의 몸을 일으키곤 아이처럼 엉덩이를 받쳐 안아 올리길래 목을 꽉 끌어안고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본가에 살 땐 그가 안아 올릴 적마다 이러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은 보는 사람 없으니 굳이 싫다고 하지 않았다.
“아침밥 먹을래?”
“됐어. 환자한테 무슨 밥을 차리라고 하겠어. 그 정도로 양심 없는 인간 아니야.”
“이제 환자 아닌데.”
“회사 가서 먹을 거야. 괜찮아.”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끗 본 그가 영하를 안아 든 채로 소파에 자리 잡았다.
“오늘 학교 갈 거야?”
“가야지…. 어디 아픈 것도 아닌데.”
“굳이 억지로 갈 필요 없어.”
“아니야. 갈래. 근데 왜 자꾸 학교 가지 말래. 진짜 나 졸업도 못 하게 할 거야?”
“계부만도 못하게 만드네. 그럴 리가. 졸업은 해야지, 우리 애기. 졸업하고 나선 뭐 할 거야?”
“아직 생각 없어. 난 신입생이라고.”
“공부 열심히 하는 신입생은 이미 입학식에서부터 인생 설계가 되어 있을 텐데.”
난 그렇게까지 부지런하진 못해… 영하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며 그의 어깨 위에 입술을 묻었다. 졸업 전에 샀던 문제집도 거의 못 풀었다.
진짜 아빠 믿고 막 사는 건가. 유산 증여 따윈 관심 없다고 말하긴 해도 아빠가 평생 먹여 살려 줄 걸 아니 미래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물론 빌붙어 살 생각은 없지만…….
“아. 맞아. 아빠, 승준이랑 밥 한 끼 먹어.”
최세계의 품에 꽉 끌어안겨 있던 영하가 고개를 들었다. 어제 그가 오기 전부터 생각해 두고 있던 것이 이제야 떠올랐다.
영하의 동그란 뒤통수를 쓸어내리던 그는 최승준이라는 이름에 의아함을 표시했다. “왜.”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자 영하가 그의 품에서 내려와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거실 창밖으로 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아직 이른 아침은 날이 쌀쌀해 다시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영하가 말을 이었다.
“승준이 모의고사 전교 2등 했대.”
“누가 말해 준 거야? 설마 할머니가 전화하셨어?”
“말해 준 게 아니라 SNS에서 봤어.”
“그 정도로 친했어? SNS 같이 할 정도로?”
덤덤하던 좀 전의 대답과 달리 이번에는 정말 놀란 눈치였다. 영하가 내려가자마자 다리를 꼬아 앉고 TV 리모컨에 손을 뻗던 그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야 영하가 승준이와 대화하는 것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나이 차이가 두 살밖에 안 나는 것치곤 굉장히 데면데면한 형제임을 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아니, 그냥… 어쨌든 형제니까.”
“흠. 그래서.”
“그래서…. 잘했다고 말 한마디 해 주라고.”
“해 주면. 넌 나한테 뭘 해 줄 건데.”
영하가 어젯밤까지 보고 있던 고양이 동영상을 끄며 그가 대꾸했다. 그 뻔뻔한 말에 어이가 없어진 영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팔뚝을 꼬집었다.
리모컨의 버튼을 잘못 눌러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야옹, 야옹, 하고 동시다발적으로 고양이들이 울어 댔다. 세계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웃었다.
“아빠가 아들 시험 성적 칭찬해 주는데 왜 내가 대가를 지불해야 해?”
“귀찮은 걸 시키면 그만한 상이 있어야 하지. 저것 봐. 너랑 똑같이 생겼잖아.”
“왜 자꾸 사람보고 동물이랑 닮았대. 그냥 좀 가서 해 줘. 아빠 후계자잖아.”
동영상 보고 딴소리. 전혀 내 말에 집중을 안 하고 있잖아.
영하가 팔을 잡아 흔들고서야 그가 고개를 돌려 똑바로 바라봤다. 이제는 제 말에 귀를 좀 기울일까 싶어 인상 깊게 보이고자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쳐다본다. 쌍꺼풀이 짙어지는 것과 동시에 최세계는 영하를 놀릴 때 으레 보여 주는 음험한 얼굴을 했다.
“그야 모르지. 네가 임신하면.”
“아, 진짜! 웃기지도 않는 농담 그만하고.”
“왜 농담으로 받아들여? 네 몸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진 않아.”
“난 남자라고.”
그 말에 웃기지도 않는데 픽픽 웃어 댄다. 영하는 짜증스럽게 그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았다. 버튼을 꾹꾹 눌러 동영상을 끄자마자 세계가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귀여웠는데 왜 꺼.
“알았어. 생각해 볼게.”
“시간 없어.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밥 먹어.”
“시간이 왜 없어. 최승준이 어디 도망가기라도 해? 잔소리가 너무 심해. 네 동생이랑은 사이 안 좋은 줄 알았는데 왜 갑자기 챙기는 척이야.”
“척이 아니라….”
“무슨 생각인데.”
고양이가 사라지자 TV에 흥미가 사라진 최세계는 소파 위에 다리를 모으고 주저앉은 영하의 몸을 당겨 안았다. 병원 식사가 입맛에 맞지 않아 영하는 일주일 사이에 살이 조금 내려 얇은 옷 아래로 무릎뼈가 도드라졌다. 그가 무릎 위로 손바닥을 올리며 되물었다.
“응? 무슨 생각인데.”
입술이 턱 끝에 닿아 살결을 혀로 핥아 올린다. 기묘한 감각이 허리춤 위로 치솟는다. 간지러워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밀쳐 내진 않았다. 어깨 위로 올라온 손이 영하의 귓불을 느리게 문질렀다. 설마 아침부터 하려나 싶어 조금 긴장하고 있었지만 옷 속으로는 손이 침투하지 않았다. 최세계의 팔 안에 갇힌 영하는 우물쭈물하다 겨우 대답했다.
“그냥… 아빠도 아빠 노릇 해야지.”
“흠.”
승준이는 내가 아빠를 뺏어 갔다고 생각할 거야.
처음부터 이렇게 대화가 없는 건조한 형제지간은 아니었다. 분명 본가로 온 초반에는 사이가 좋았다. 승준이도 느리지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다. 친한 형제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세계가 영하에게 관심을 주기 시작하자 둘 사이가 애매하게 틀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벌어진 골은 점점 넓어져 도저히 좁힐 수 없는 지금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영하는 승준이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엄마와 함께 지낼 때 자신의 모습이 승준이와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최승준의 경우 훨씬 나은 상황이긴 했다. 영하는 엄마 말곤 아무런 친척도 없었으나 최승준에겐 고모들과 할머니가 있으니까.
“의향이 생길 듯 말 듯 하네.”
“갈 거야 말 거야?”
“좋아. 난 말 잘 듣는 아빠니까. 대신 내가 시키는 거 하나만 해.”
“어떤 거?”
말장난하는 것을 보니 불안하다. 세계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영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은근하게 입꼬리를 당기고 있던 그는 곧 어깨에 두른 팔을 거두더니 팔짱을 끼곤 등을 뒤로 젖혔다.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어.”
“아, 싫어.”
“뭔지는 알고?”
“일단 싫어. 안 해. 그냥 하지 마.”
불안감이 엄습했다. 굉장히 창피한 것을 시킬 거란 예감이 번뜩 들었다. 대체로 이러한 예감은 틀릴 확률이 거의 제로였다.
등받이를 잡고 소파에서 일어나 도망가려 하자 눈치도 빠른 최세계는 곧장 영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도망가려다 붙잡혀 몸이 도로 소파로 넘어지고, 아빠의 무릎 위로 눕게 된 영하는 제 발로 거미줄에 찾아 들어간 기분이었다.
최세계는 영하의 배를 꽉 잡아 눌러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후 느긋한 몸놀림으로 소파 테이블에 대충 올려 둔 휴대폰을 들었다. 뭘 하나 했더니 전화를 건다. 수신인이 누군지 명확했다.
“아직 일곱 시인데 전화하는 거야?”
“너랑 달리 최승준은 고등학생이야. 지금쯤 일어났을걸.”
건성으로 휴대폰을 귀에 댄 세계의 남은 손이 말간 뺨에 닿는다. 말랑말랑한 살결을 만지고는 벌어진 입술 위를 건드렸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천장 등의 동그란 모양이 그대로 비쳤다. 손길은 코끝에 닿아 약하게 내리눌렀다. 영하가 미간을 찌푸림과 동시에 전화가 연결됐다.
“나야. 오늘 일곱 시 시간 비워. 성산동에 저녁 먹으러 갈 거니까. 어디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가.”
“좀 다정하게 말해 주지.”
“너 아니고서야 못 해.”
차갑게 용건만 말하고 매정하게 끊어 버리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타박했더니 뻔뻔스러운 대답에 얼굴을 묘하게 찡그리며 숨을 터뜨렸다.
어쩌지… 좋아.
네가 아니라면 다정해질 수 없다는 그 확고한 음성이 짜릿했다. 아빠의 차별을 좋아하면 승준이에게 못된 짓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걸 알면서도 그 못된 마음이 자꾸만 머리를 치켜든다.
“이미 약속 잡았어. 취소 못 해. 소원은 좀 느긋하게 생각해 봐야겠어. 마음이 급해서는 좋은 아이디어가 안 나오니까.”
“왠지 무서워.”
“무섭기는. 10시까진 올 테니까 기다려. 어차피 너는 안 갈 거잖아.”
“알았어.”
뺨을 쓰다듬던 그가 영하를 일으켜 앉혔다. 인형처럼 자의 없이 몸이 움직여져 소파에 주저앉은 영하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최세계가 허리를 내밀어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는 그의 눈빛이 무섭지 않다. 그는 언제나 영하에겐 관대하고 자상한 남자였다. 이 남자의 눈길을 오롯이 느끼고 있으면 사랑받는다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뽀뽀.”
미약하게 휘어진 눈을 하고서 뱉은 말에 영하는 망설임 없이 다가가 입술을 붙였다.
쪽- 하고 짧게 떨어지는 동시에 최세계가 약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허리를 끌어안았다.
출근하는 세계를 배웅한 영하는 11시 수업에 맞춰 학교에 출석했다. 동기들은 죄다 영하가 교통사고로 입원한 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일 쉬운 변명이었겠지. 술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오토바이에 치였다고 둘러대고선 온몸이 멀쩡하다고 팔을 흔들어 보이고 나서야 집중된 관심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수업이 끝나니 1시. 다른 녀석들은 배고파 죽겠다면서도 학교 밖으로 나가 동문 앞 식당에 가서 먹겠다는데, 영하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이 눈치 없는 이정욱이 그러면 본인은 영하랑 같이 학식을 먹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괜찮아! 괜찮아! 손사래를 쳤건만 정욱이 혼자만 버리고 가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며, 굳이 굳이 영하와 함께 학교 식당으로 향했다.
아이씨. 눈치 없기는.
입맛도 없어 메밀국수를 시키자 이정욱도 똑같이 따라 시켰다. 최영하는 누군가의 호감을 아주 기민하게 알아차린다. 이유는 단순했다. 영하는 언제나 애정과 사랑을 갈구하니까. 영하의 판단으론 이정욱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단순한 친구로서 더 친해지고 싶은 호감인지, 그 이상의 감정인지는 조금 두고 봐야겠지만.
“영하 너, 아르바이트는 못 하겠지? 아파서 일주일 입원했으니까.”
“아… 아르바이트. 잊고 있었다. 응. 그냥 관두려고.”
이 몸과 이 정신으론 아르바이트는 무슨. 학교 나와서 남들에게 날 세우지 않는 것으로도 육신이 지친다. 아르바이트는 취소야…. 선물은 어떡하지. 고민하며 국수를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돈가스 세 글자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다.
“근데 아르바이트는 왜 하려고. 용돈 부족해서?”
“…가족 생일 선물 사려고.”
“아아.”
이정욱은 그러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 밥 먹을 땐 원래 이야기하는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정말 생일 선물은 물 건너갔네. 그냥 뻔뻔하게 아빠 카드로 사서 주면 되지 않을까? 내 할당량을 참고 대신 아빠 선물을 샀어. 하면 되는 거잖아.
아니지. 할머니가 준 통장 지금 쓰면 안 될까? 나보고 마음대로 쓰라고 했잖아. 거기서 조금만 빼서…. 하, 아니야. 정신 차리자.
“정욱이 너 술 마신 그날, 몇 시에 들어갔어?”
“나? 열 시쯤? 왜?”
“아니. 음, 아. 내가 통금 시간이 아홉 시인데 아, 아니 엄마가 자꾸 언제 들어왔냐고 추궁하더라고…….”
자연스레 아빠 이야기를 하려던 영하가 황급히 주어를 변경했다. 이정욱을 떠보는 중이니 아빠 이야기는 피해야 했다.
“통금 시간도 있어?”
“어… 응.”
최영하는 통금 시간에 전혀 불만이 없다. 애초에 밤늦게 나가 노는 타입도 아니었을뿐더러 세계가 통금 시간까지 만들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싫지 않았다. 집착받는 기분이라 오히려 좋았다. 그러나 남들 눈에는 스무 살 아들의 통금 시간이 아홉 시인 것은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라 영하는 곧장 정정했다.
“저번에 말도 없이 외박한 일로 혼나서. 며칠만.”
“아아… 그래도 아홉 시는 심하네.”
“일주일만이야… 아무튼. 그래서 그런데, 뭐 그날 집에 들어간 증거나 음… 사진 같은 거 있어?”
“증거? 그런 게 있을 리가. 사진은 있나…? 집 들어가자마자 강아지가 현관 앞에서 꼬리 엄청 흔들어 대길래 동영상 찍은 건 있을 거야. 잠깐만.”
영하는 증거를 찾는 중이었다. 통금 시간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영하가 추행당하던 그 순간 동기들의 행적 파악을 위한 증거였다.
영하의 마음속 용의자 중 1순위는 이정욱이다. 가장 의심스러운 상대였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고 나발이고 관심 없다. 잡아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상대를 잡고 싶었다.
잡아서… 어떡하지. 그날 내가 헛소리했다고 말해? 아빠 이야기는 그냥 헛소리였다고? 아니. 말한다고 믿기나 하겠어? 나쁜 놈인데. 그냥 확…….
노란색 단무지를 젓가락으로 쿡 찌르며 복수를 다짐하는 순간, 이정욱이 휴대폰을 들었다. 겁도 많은 주제에 상대를 잡아 족치는 상상을 하던 영하는 화면 가득 실버 푸들이 현관에서 가열차게 꼬리를 흔드는 영상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흥분으로 가슴이 높게 부풀고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벌어졌다.
깨갱깨갱 소리와 함께 강아지가 휴대폰을 보며 짖어 대고 꼬리가 프로펠러처럼 재빠르게 회전했다. 통통한 앞다리를 연신 앞으로 구르며 목을 빼는 모양이 잔뜩 주인을 기다린 모습이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영하의 눈동자도 반짝였다.
“귀엽다…….”
“귀엽지. 두 살이야.”
“진짜, 진-짜. 귀여워. 두 살이라고? 이름은 뭔데?”
“초코.”
“초코? 갈색도 아닌데… 근데 그거 강아지한테 청산가리라고 이름 짓는 거랑 똑같댔어.”
애완동물 한번 키워 본 적 없어도 잡지식은 가득했다. 툭- 치면 푸들을 키울 시 특별한 주의 사항도 줄줄 뱉을 수 있었다.
“너 강아지 좋아하는구나.”
“고양이도 좋아해.”
“우리 집에 와서 볼래? 초코.”
멈춘 동영상을 터치해서 다시 재생해 뚫어지라 쳐다보던 영하는 집에 오겠냐는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뻘건 사이렌이 위잉위잉 머리 위로 시끄럽게 돌아갔다.
집에 오라고?
화면에서 이정욱의 얼굴로 시선을 돌려 보니 머쓱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고작 친구를 개 보러 오라고 초대하는데 저런 얼굴을 해? 영하는 단 한 번도 친구를 집에 데려간 적 없지만, 저런 표정은 짓지 않는다. 무슨 라면 먹고 가라는 소리 하는 것처럼…….
역시 이정욱이 제일 의심스럽다. 영하는 고개를 저으며 등을 곧게 폈다.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아니. 다음에 갈게.”
“우리 초코 사람 좋아해서 낯선 사람한테도 애교 많아.”
“…….”
가고 싶다. 하지만 안 돼. 이정욱 집은 위험했다. 그렇게 강아지가 보고 싶으면 유기견 보호센터에 다시 봉사 활동을 하러 가는 편이 나았다. 영하는 재차 고개를 저었다.
“아. 시간 보여 줘.”
“아아, 맞아. 잠깐만. …여덟 시 오십 분인데?”
정욱이 영상의 촬영 정보 화면을 띄워 보여 줬다. 이정욱의 말대로 8:52분에 촬영된 영상이었다. 이정욱은 동영상 편집도 못 하는 녀석이니 일부러 영하가 물을 것을 대비하여 알리바이를 위해 동영상 시각을 조작하진 않았을 테다.
“집이랑 학교랑 가깝나 봐?”
“어. 걸어서 학교까지 오잖아. 걸으면 이십 분 정도?”
“그래서 일찍 도착했구나…….”
일곱 시 조금 넘어서 싸움이 발생했고. 서민석이 일곱 시 사십 분쯤 도착했다. 여덟 시가 되기 전에 지구대에 가서 조사서를 썼으니 지구대를 나왔을 시점은 늦어도 여덟 시 삼십 분이었다.
하지만… 이정욱의 집이 대학로와 가깝다면 이정욱은 택시를 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따 민재한테만 물어볼까. 아니. 아니야. 택시를 안 탔다고 해도 여덟 시 반에 나와 자신을 어디론가 데려가 범죄를 저지르려면 그 시간에만 최소 20분은 걸린다. 불가능한 시간이다.
결국 이정욱은 범인이 될 수 없었다. 복잡하다. 이정욱이 아니라고? 입맛이 뚝 떨어져 젓가락으로 국수를 휘휘 저었다. 시간이 지나자 국수가 서로 달라붙어 떡처럼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이거 영상 보내 줘? 술집에서 일찍 나왔다는 증거로?”
“응… 보내 줘. 고마워.”
정욱이가 아니면 누구일까. 재수생 형? 아예 동기들은 용의선상에서 제외해야 하나. 일면식이 없는 남인 걸까? 설마 서민석?
“안 먹어?”
“아, 먹어야지.”
식판만 노려보고 있으니 이정욱이 물어본다. 정욱은 이미 거의 다 먹은 상태였다. 혼자만 남기긴 뭣하니 억지로 젓가락을 들어 입에 면을 욱여넣었다. 옆 테이블의 남자들이 식사를 마쳤는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엇박자로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가 들렸다. 정욱은 일어나는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목소리와 고개를 조금 낮추며 말했다.
“근데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응.”
갑자기 분위기를 잡는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긴장되어 꿀꺽 침을 삼키며 입 안의 음식을 느리게 씹었다. 영하는 정욱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전에 오티 때 왔던 그 사람.”
“……응.”
“네 아버지야?”
순간 온 정신이 휘몰아쳤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설마 정말 이정욱이 범인인가?
최영하는 잔뜩 동요해 있었으나 최대한 당황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 애썼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어떻게든 감추며 천천히 호흡했고 떨리는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리곤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어떻게 아는 거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그날 통화를 들었나. 그때 내가 아빠라고 말하면서 데리러 오라고 했던가….
영하가 침묵하자, 이정욱은 별것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그날 편의점 가는 길에 네가 아빠가 데리러 올 거라고 했잖아.”
“…그랬어?”
그랬나? 기억에는 없는데. 하지만 워낙 취해 있었으니 잊어버린 내용일 수도 있다. 애초에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이정욱이 아빠의 존재를 알 수가 없었다. 영하는 밖에선 웬만하면 아빠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호적상 영하의 아빠는 다른 사람이기도 했고, 켕기는 게 많아 원천 봉쇄하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떡하지.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메밀국수를 든 젓가락을 도로 내린 영하는 이슬이 맺힌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넘긴 후에야 입술을 벌렸다.
“아빠 맞아.”
“아… 너무 젊으셔서.”
“그래서 형이라고 한 거야. 보통은, 상상도 못 하니까. 그리고 굳이 뒤에서 말 나오는 거 싫으니까. 혹시 몰라서 그러는데, 딴 사람한테 말하지 마. 특히 민재한테는 더더욱. 민재는 형인 줄 알아. 열일곱 살 때부터 아는 사이인데도 말 안 했어. 민재한테 말하면 걔, 음… 상처받을 수도 있으니까. …절대. 절대 말하지 마. 말하면 너 죽어 진짜.”
영하가 굳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하자, 이정욱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왜 형이라고 했는지도… 이해했어.”
“진짜 절대로.”
“진짜 말 안 할게.”
“둘 사이의 비밀이야.”
그러자 이정욱은 왜인지 모르겠으나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묘하게 웃더니 쑥스러운 듯이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일단 동영상 시간으로 보아 이정욱은 범인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영하에게 마음이 있다.
곤란한데……. 대차게 까 버렸다간 괜히 비밀을 여기저기 퍼뜨릴 수도 있으니 당분간 장단에 맞춰 줘야겠다. 이정욱이 고백을 하거나 비밀을 말하지 않는 이상 친구 행세를 계속해 줄 의향이 있었다.
“응. 약속 지켜.”
일단은 두고 보자. 여기저기 신경 쓰기에는 영하의 감정이 남아나질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영하는 소파에 앉아 아빠에게 사실을 말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흥분하지 않고, 울지 않고, 떨지도 않고 차분하게 말해야 했다.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잘 견디고 있다는 걸 보여 줘야 했다. 그래야 아빠가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을 수 있다.
고작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할 뿐인데도 목이 타 커다란 유리잔에 찬물을 한가득 받아 와 마시며 연습했다.
그러니까, 아빠……. 술자리에서 싸움이 나서 경찰서에 가게 됐는데 그 이후로 기억이 안 나. 근데, 내가 실수로 아빠라고 불러 버렸는데…….
다시는 술 안 마셔.
“하아…….”
누굴까. 서민석이 봤다던 키가 비슷했던 남자.
왼손으로 오른손의 엄지손톱을 긁어내듯 쿡쿡 눌렀다. 불안한 상황에서 잔뜩 집중해 생긴 버릇이었다. 벌어진 입술을 여러 번 달싹인 영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잊고 있는 게 있어. 내가 기억을 못 하고 있어. 분명, 범인이, 그 새끼가 뭔가 마실 걸 내게 줬을 거야.
하지만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영하의 기억은 어딘가 드문드문 잘려 있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후로는 희미했다. 대략적인 큰 흐름만 머릿속에 존재했다.
“머리 아파.”
힝. 강아지 소리를 내며 결국 침대에 엎어졌다. 최영하는 이런 데에 쥐약이었다. 관심은 요만큼도 없었다. 소파를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며 오갈 데 없는 분노를 표출하곤 곧 축 늘어졌다. 연습도 이제 하기 싫고, 그냥 아빠 오면 말해야지. 남자답게 시원하게 말하는 거야. 그래. 난 잘못 없잖아.
“왜?”
하지만 정작 최세계가 집에 들어오자 영하의 입이 쏙 다물렸다. 말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본가에서 승준이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소파에서 자신보다 작은 영하의 어깨에 뺨을 대고 TV를 보는 불편한 자세를 고수하다 내내 조용한 영하를 향해 물었다. TV 속에선 매일 보는 단발머리 아나운서가 역시나 세상이 다채롭게 망해 가고 있는 소식을 전달해 주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할 말 있나?”
“아니… 없어.”
영하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곤 시무룩하게 말했다.
“할 말 있어 보이는데. 해 봐.”
“없다니까…….”
깊은 눈꺼풀 아래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뜨끔한 영하가 소파에서 일어나 바닥에 주저앉았다. 엉덩이를 러그 위에 올리곤 등을 소파에 기대고 다리를 끌어모아 안는 자세였다.
“할 말 있잖아. 말해. 무슨 말을 하든 화 안 낼게.”
“응… 있잖아.”
“그래.”
오렌지색 소파의 쿠션을 손으로 쥐며 턱을 들어 고개를 돌리자, 그와 완전히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모습이었다. 자신을 또렷이 응시하는 두 눈을 보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영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다.
그 생각이 머리에 닥치자 목구멍이 조여들고 신물이 차오르는 것 같아 목울대를 넘겼다. 눈을 끔뻑인 영하는 도로 눈동자를 바닥으로 내리깔곤 영 딴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강아지 키우고 싶어서….”
“…….”
“마당도 넓으니까, 근처에 조금만 걸으면 강아지 동반 산책로도 있고…….”
대답 없는 침묵만 흘렀다. 기계 속에 흐르는, 아나운서의 낮고 힘 있는 어조로 전달해 주는 세상 소식 사이로 육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른 무릎을 더 가까이 당겨 안은 영하는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내가 다 할게. 밥도 청소도 목욕도 산책도 다 내가 할게. 털 날리는 게 싫으면 푸들은 어때? 푸들은 털이 꼬불꼬불해서…….”
“강아지가 키우고 싶어서, 지금 개 흉내 내는 거야?”
“개 흉내?”
영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바닥에 앉아서 쪼그리고 있잖아. 그게 개 흉내가 아니면 뭐야.”
“아니야. 그냥 바닥에 앉은 거지.”
“올라와. 그리고 푸들이든 허스키든 안 돼.”
“키우게 해 줘. 마당도 넓은데.”
“개 짖는 거 질색이야.”
“훈련 열심히 시켜서 안 짖게 할게.”
세계의 손을 잡아 소파 위로 다시 올라간 영하는 무릎을 그의 곁에 붙이고 왼팔을 당겨 끌어안으며 호소했다. 원래 하려던 말은 이 이야기가 아니었으나, 강아지를 키우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이정욱의 휴대폰 안에서 왈왈 짖던 푸들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이 들었다.
영하가 최대한 착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바짝 가까이 내밀었다. “으응?” 하고 귀엽게 되물으면 웬만해서는 들어준다. 최세계는 영하에게 약하기 때문에 거절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에 드는 모양이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은 최세계는 곧장 고개를 내저었다. “개가 안 짖으면 그게 개야? 말이 돼?” 하고는 오른팔을 뻗어 영하의 뺨을 꼬집는다. 아프진 않았지만, 강아지 키우는 일은 물 건너갔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노력할게… 말 잘 들을게.”
“안 돼. 이미 여러 번 말했어. 갑자기 강아지는 왜 키우고 싶다는 거야. 그런 말 한 번도 없었잖아.”
“같은 과에 이정욱이 자기 집 강아지 영상 보여 줬는데 귀여워서.”
“흐음.”
눈꼬리가 가늘어진 최세계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더니 아들에게 끌어안긴 팔을 빼내곤 영하의 입가에 입술을 붙였다 떼어 낸다. 가벼운 키스였다.
영하는 힘없이 그에게 안겼는데, 기운 없는 이유가 강아지를 못 키우게 해서는 아니었다. 그에게 약을 먹고 추행당했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으나 최세계는 우울해하는 영하에게 덧붙여 말했다.
“섹스할 때 개 짖는 것도 싫고 안에 들여보내 달라고 문 긁는 것도 싫어. 방해돼.”
전혀 예상 밖의 이유였다. 긴 속눈썹을 무겁게 내리깔고 있던 영하의 두 눈이 경악으로 바짝 솟아올랐다. 넓은 소파에서 빈 곳을 한참 내버려 두고 거의 뺨을 맞대고 있는 만큼 가까이 붙어 있었다.
“아니… 무슨… 변태같이 개 키우는데 그런 걸 상상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을 말하는 거야. 사 주면 분명 내내 개만 보고 졸졸 따라다닐 거고, 네 성격상 백 퍼센트의 확률로 같이 자겠다고 개 안고 침대까지 올라올 거야.”
“살 거 아니고 입양할 거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침대에… 같이 안 잔다고 장담은 못 하겠네.”
“그거 봐.”
“침대에서 같이 안 잔다고 약속하면 키워도 돼?”
“안 된다고 했다.”
단호한 언사에 입을 꾹 다문 영하는 입술을 만지는 손길을 잡아 내리곤 풀이 죽은 어투로 속삭였다.
“…나 외로워. 아빠는 한 달에 반은 늦게 퇴근하고.”
“외로움을 강아지로 해소하려고 하면 강아지도 너도 분리 불안 걸려. 그러니까 다른 취미를 붙여 봐. 집에서 할 수 있는 거로. 퇴근은 빨리하도록 노력할게.”
“난 지금도 분리 불안이야.”
세계가 소리 없이 웃고는 머리카락을 잔뜩 헝클였다. 그에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질했다.
“그럼 같이 출근해?”
“거기 비서들 얼굴 보기 너무 부끄러워.”
“비서는 백만 원이 와 주길 기다릴 거라니까.”
“아무튼, 싫어.”
“귀엽기는.”
허리춤으로 손이 들어와 매만진다. 매끄러운 살결에 손바닥이 감겼다. 영하는 그의 어깨에 뺨을 올리곤 얌전히 몸을 대어 줬다. 손이 허리에서 등을 타고 올라 푹 파인 척추뼈 부근을 매만졌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아래로 내려 주곤 둥그런 뺨에 연이어 입 맞췄다.
*
주말에 세계는 골프 약속이 있다며 아침부터 분주했다. 그가 골프웨어를 어디다 넣어 놨는지 모르겠다고 혼잣말을 하는 것 너머로 영하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엎드려 이마를 베개에 쿵 박아 이상한 자세로 한참을 자는 도중, 골프웨어로 갈아입은 세계가 야구 모자를 침대 위로 성의 없이 던지곤 커다란 이불 뭉치를 잔뜩 끌어안았다.
“일어나, 아기야.”
“으응…….”
“아빠 배웅해 줘야지. 어딜 장유유서도 모르고 버릇없이 아직도 자?”
“다녀오세요….”
“얼굴 보고.”
얼마 전부터 조금 두께가 얇은 침구로 갈아 치웠다. 이불을 걷어 보니 머리가 엉망진창으로 뻗친 최영하가 눈도 못 뜨고 엎드린 채였다.
퉁퉁 부은 눈을 사랑스럽게 쳐다본 세계가 따끈따끈한 볼 위로 입술을 문질렀다. 끙끙대는 소리가 아래에서 연이어 흐르고 영하는 겨우 한쪽 눈만 떠 그를 올려다봤다. 엉망진창인 본인과 다르게 그는 곧바로 출근해도 될 상태였다.
“어디 가….”
“골프 치러. 경찰서장이랑 약속 잡았어.”
“그거… 청탁….”
“각자 내는 거니까 청탁 아니야. 애기도 갈래?”
왜 자꾸 애기래…. 영하는 대답 없이 반대로 고개를 돌렸다.
골프채를 쥐어 본 적도 없는데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잡은 상황에 따라가긴 싫다. 분명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만 잔뜩 있을 게 뻔한데. 뭐 하러 재미없이. 잠에 취한 채 손을 휘휘 내젓고는 허리까지 내려간 이불을 다시 등으로 올릴 즈음이었다.
“같이 가자. 아빠가 가르쳐 줄게.”
“싫어…. 빨리 가 버려.”
“가자니까.”
싫다니까 정말……. 퍽 밀치려는데 은근한 향수 냄새가 난다. 자신의 남자에게서 나는 낯선 향취에 영하가 두 눈을 번쩍 뜨고 이불을 밀친 채로 몸을 일으켰다. 최세계가 두 눈을 길게 접으며 여우처럼 웃었다. 이른 아침부터 구미호같이 굴고 있었다.
“왜 향수 뿌렸어.”
“그냥. 작년에 선물받은 게 있으니까.”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의심되면 따라가든가.”
“음, 의심 안 할게. 그냥 잘래.”
영하가 풀썩 엎드리며 말했다.
이 남자가 오늘따라 정말 끈질기다. 그가 운동하러 가는 길에 영하를 함께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헬스는 이제 완전히 포기한 듯했고, 테니스장은 몇 번 공을 들이며 데려가려 했었다. 테니스는 스쿼시랑 달리 혼자서는 불가능하니까 너랑 나랑 가면 딱 파트너가 되니 좋지 않겠냐고 했지만, 영하는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단호히 거절했다.
골프는 영하 눈에는 굉장히 지루한 스포츠다. 조그마한 공 한 번 치고 멀리 걸어가서 다시 치는 것… 전-혀 관심 없다. 그 시간에 침대에 누워 있는 편이 좋았다.
“가서 나 뭐라고 소개할 건데. 칠촌인데요. 심심해서 데려왔어요?”
“애인이라고 소개해야지.”
“미쳤어……. 싫어. 혼자 가!”
말은 그렇게 해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애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감각이 영하를 들뜨게 했다. 어차피 어디다 애인이라고 소개할 수 없으니 상상만으로 충분하다.
“그럼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얌전히 있어. 편의점도 가지 말고.”
“알았어.”
“모닝 키스 해 줘.”
“양치도 안 하고.”
“난 괜찮으니까, 해 줘.”
진심인지 자꾸 얼굴에다 입술을 붙인다. 향수 냄새가 코끝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흥. 향수 싫어. 영하는 그의 체취를 좋아했다.
목을 뒤로 빼며 가슴을 밀쳐 보아도 힘에서 역부족이었다. 단단한 몸은 도무지 밀려나지 않았다. 오히려 입술 아래 움푹 파인 곳을 핥는 통에 결국 그에게 져 버렸지만, 기어코 고집을 부려 일어나 양치를 하고 입 안을 헹구자마자 뒤에서 욕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최세계가 입술을 겹쳤다.
허리를 숙여 주지 않아 영하가 발뒤꿈치를 들고서 서야 했다. 그가 일부러 심술을 부린다는 것을 알고 목을 팔로 감아 세게 조이자 그제야 허리를 굽혀 준다. 뒤꿈치가 겨우 바닥에 닿았다.
“으음…….”
역시 양치를 하길 잘했다. 찌릿한 민트 맛에 향수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침대에서 그를 마중하고 영하는 도로 잠들었다. 다시 일어나니 열두 시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머쓱해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젯밤에 늦게 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오래 잤지….
휴대폰을 켜 보니 세계에게서 메시지가 몇 개 와 있었다. 가타부타 설명 없는 사진 네 장이었다.
광활한 잔디밭과 짜 놓은 듯 똑같은 하얀 챙모자를 쓴 중년 남자 셋. 경찰서장으로 추측되는 배가 나온 아저씨는 스윙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머지 사진도 똑같다. 아저씨들을 찍은 것뿐이었다. 뭐 하러 이런 걸 보냈나 싶어 사진을 들여다보며 궁리했다. 한참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
여자랑 만나서 노는 게 아니라는 증거인가? 그렇게까지 의심하진 않았는데. 답장으로 하트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 주곤 비척비척 거실로 걸어갔다.
일어나도 할 일이 없어 소파에 드러누워 하품만 한다.
“골프장… 따라갈 걸 그랬나.”
혼자 있으니 또 불안했다. 집 안에만 있으면 안전한 걸 알지만 마음과 머릿속이 언제나 이견 없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손만 더듬어 테이블 위의 리모컨을 잡으려던 찰나. 영하는 문득 요즘에 섹스를 안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매일같이 덤벼들던 남자가 입원 이후로는 털끝도 안 건드린다.
전 같으면 키스를 하게 되면 거의 섹스로 이어졌다. 헐떡대는 영하를 안아 들어 제일 가까운 쿠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이 서재든, 거실이든, 침실이든 가리질 않았다.
영하는 소파 바깥으로 빠져나간 발을 신경질적으로 굴렀다.
왜 그렇게 눈치가 빠른 거지. 몰랐으면 좋겠는데…. 모를 리가 없다. 그 남자가 참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영하가 무서워할까 봐.
진짜 오늘은 이야기하자. 아빠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강간당했다고. 뭐…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미루다 보면 끝이 없다. 불편하다고 한 번 미루면 끝의 끝까지 넘기다가 결국에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지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일이 그랬다. 영하는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이 언젠가는 가라앉을 것이라 믿으며 때때로 방치했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몸이 자라날수록 어른이 되어 갈수록 마음이 불어났다.
10억.
할머니가 주신 통장을 본 당시의 영하는 절대 그것을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코웃음 쳤지만, 막상 그와 몸을 섞는 관계가 되어 보니 그 자신감은 모호하게 희석됐다. 이미 알고 있다. 이런 관계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란 건 예전부터 인지하고 있던 일이었다.
딱 3년만…. 3년만 버티고 싶어.
“오늘은 진짜로 꼭 말해야지.”
길지 않은 소중한 시간을 하루라도 허비할 순 없다.
“…점심 먹을까.”
무거운 생각은 일단 저녁으로 미루고 일어나는데, 전화가 왔다. 아빠인가 싶어 고개를 쓱 내밀어 화면을 보니 서민석이다.
나랑 전화 통화 할 일 없을 텐데.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전화가 끊겼다. 서민석도 꺼림칙하기 때문에 차라리 끊긴 것이 다행이다. 그러나 안심하기도 전에 전화가 다시 울린다. 역시나 또 서민석이었다. 아랫입술을 잡아당겼다 떨어뜨린 최영하는 결국 한숨을 뱉으며 휴대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차분한 서민석의 목소리가 스피커폰 너머로 흘러나왔다.
-바빠요?
“아니요. 무슨 일이세요?”
-미안해요. 그날 일이 자꾸 걱정돼서요. 무슨 일 없었죠?
“네… 괜찮아요. 아무 일 없어요.”
휴대폰을 그 자리에 둔 채 주방으로 향했다. 머릿속으로 그날의 희미한 연기가 스친다. 담배 연기였을까.
-아무 일 없었다니 다행이네요.
웃음을 띤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오한이 들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일하면서 알아본다고 했잖아요. 뭔가 발견했어요.
“발견했다고요?”
예상치도 못한 소식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영하는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찾았어요? 누군지…….” 전화 너머 남자가 그 말에는 부정했다.
-아니요. 하지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전화로 이야기하긴 곤란한데, 만날래요? 지금.
*
고민하던 영하는 서민석과 급한 약속을 잡았다. 외출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정신이 몽롱했다. 잡을 수 있는 걸까. 상대가 괜한 소리를 하기 전에 서민석보다 먼저 범인을 만나야 했다.
영하는 범인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보다, 범인이 영하의 발언을 마음 깊이 담아 두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게 최세계의 등을 찌르는 칼날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으니까.
집에서 멀지 않은 한 개인 커피숍에서 그와 만났다. 부드러운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영하는 초조했다. 서민석이 도착해 인사할 때도 마음이 뒤숭숭해 고개만 숙였다. 서민석은 평소와 다름없다. 넥타이 없는 수트 차림에 온화한 미소. 날짜는 달라져도 저 남자만은 처음 봤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다.
“밥 사 주려고 했는데. 커피로 되겠어요?”
“괜찮아요. 저녁은 아빠 오면 같이 먹어야 하니까. 그보다… 찾았다면서요.”
아메리카노 주문을 마치고 온 서민석이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근무하면서 확인했거든요.” 하고서는 자리에 앉았다. 영하는 오른손의 엄지손톱을 쿡쿡 긁어내며 턱짓으로 알겠다는 시늉을 했다.
“누구예요? 누가… 혹시 저랑 같이 술 마셨던.”
“아직 거기까진 못 찾았어요. 그날 모텔 CCTV를 받아 가려고 했는데, 하필 그 모텔에 CCTV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
CCTV가 없다니. 그러면 범인을 잡을 수 있긴 한 걸까?
기대하고 만났는데 서민석이 전해 준 소식은 절망스러운 이야기였다. 어깨를 늘어뜨린 영하가 풀 죽은 얼굴로 턱을 내렸다.
서민석은 얼음이 가득 찬 아메리카노 잔을 흔들며 입꼬리를 미묘하게 당겼다. 아주 찰나였다. 이윽고 그가 테이블을 톡톡 건드렸다. 그 소리에 처진 눈가가 희미하게 올라온다. 그가 이어 말했다.
“걱정 말아요. 근방 CCTV를 확인했는데, 비슷한 시간대에 한 남자가 모텔에 혼자 들어가는 걸 찾아냈어요.”
“누구예요?”
“밤이라 좀 흐릿하긴 했지만, 제가 봤을 땐. 그날 고깃집에서 싸운 남자 같아요.”
“네……?”
싸움에 휘말렸던 아저씨라고…? 전혀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아니, 그래도. 그래. 맞아… 차라리 아예 남이면 낫지. 내가 중얼거린 아빠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을 수도 있잖아.
그럼 왜 만지다 말고 그만둔 걸까. 내가 남자라는 걸 모르고 시도했나? 아니. 이상하다. 뭔가 이상했다. 앞뒤가 맞질 않았다. 기집애 같단 소리를 했어도, 주정뱅이 남자는 영하가 남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 이후로 영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검사가 찾아왔다는 것 때문에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면 복수였나? 그게 싫어서?
하지만…….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도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찝찝한 감정이 여전히 잿더미처럼 남았고, 복잡해졌다. 일단, 그러면 내가 여기서 뭘 해야 하지?
“아직 꺼림칙한 얼굴이네. 저도 이해해요.”
서민석이 짧게 혀를 차곤 말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길게 기대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편안하고 여유로운 모습. 영하는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가 꺼림칙했다. 어딘지 모르게 피하고 싶은 인상이었다. 입술을 질근질근 물고, 엄지를 세게 틀어쥐다 손가락의 저림을 느꼈다. 가야겠어.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는 시점. 테이블 위에 놓인 서민석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작게 시작한 음악 소리가 점차 증폭되어 영하의 귓가를 교란했다.
클래식. 피아노. 시칠리아. 바흐의 골든 베르크 변주곡 7번.
서민석은 느린 속도로 손을 뻗어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곤 “아, 잠깐 통화 좀 할게요.”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래식에 일가견이 있다곤 할 순 없으나 7년간 발레를 배운 결과, 영하는 발레에 사용되는 클래식 곡들은 대부분 외우고 있었다. 해당 구간은 남녀 무용수가 함께 파드되를 할 때 흘러나오는 선율이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고개를 느리게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통화 중인 서민석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네 아빠는…….’
누군가에게 붙잡힌 모텔. 잠들기 직전. 영하는 음악 소리를 들었다. 클래식, 피아노 연주곡. 벨 소리.
서민석이야.
송두리째 흔들린 몸이 무참히 떨리기 시작했다. 눈이 크게 벌어진 영하가 가쁘게 호흡했다. 술에 취한 아저씨고, 이정욱이고 뭐고. 범인은, 서민석이다. 그가 그날 나를 모텔 방으로 끌고 가 옷을 벗겼고, 자신이 뱉은 아빠라는 말에 조소하며 저질스러운 말을 뱉었다.
그래. 맞아. 서민석은 그 때문에 자신을 두고 간 것이 아니다. 중간에 전화가 왔다. 그래서 내버려 두고 나갈 수밖에 없던 것이다.
흐, 흐으…….
당장 벗어나야 한다. 급한 몸짓으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거친 몸짓 때문에 의자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뒤돌아 전화하던 서민석이 돌아보더니, 이내 입가에 자리 잡은 희미한 미소가 어긋나며 비틀렸다.
“왜 그렇게 떨어요?”
그가 넓은 보폭으로 다가오는 사이, 영하는 의자를 바로 세웠다. 손마디가 희게 질려 차가운 스틸을 쥐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발바닥을 땅으로 세게 내리누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해야 해. 하지만 서민석이 먼저였다.
“아.”
영하의 떨리는 주먹을 보던 그가 허리를 슬쩍 굽히곤 중얼거렸다.
“눈치챘구나?”
마치 번개를 정통으로 맞은 듯 영하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렸다. 서민석이 범인이라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는 영하와 최세계가 피를 나눈 친가족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영하가 그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점 또한 알고 있었다.
“저, 저는… 저는 집에 갈게요.”
연기에는 소질이 없다.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영하가 돌아서자마자 서민석이 팔뚝을 붙잡아 당겼다. 그 순간 소름 끼치도록 끔찍한 감각이 솟아났다. 강제로 몸이 돌려진 영하는 서민석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욕설을 내뱉었다.
“건드리지 마. 이 미친 새끼야!”
소리쳐도 서민석은 변화가 없다. 한 가지 표정 말고는 짓지 못하는 사람처럼 한결같았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영하가 미끄러운 바닥에 신발 밑창을 마찰시키며 내달릴 준비를 한 그 순간.
“서 검사는 한 번 더 좌천당하고 싶나 봐. 그렇게 한직을 좋아하면 어디로 보내 줄까, 이번엔.”
뒤에서 나타난 남자가 영하의 몸을 당겨 안았다. 훌쩍 뒤로 넘어간 몸이 최세계의 가슴에 기대어 멈췄다. 그의 목소리와 온기를 느끼게 되자 영하는 울컥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크게 호흡했다.
“아빠.”
“이런. 아버님이 오셨나 보네.”
“한 번만 더 내 아들한테 연락했다간 검사 생명 마지막 관짝인 법무연수원 보직을 희망하는 거라고 생각해 주지.”
대화는 짧았다. 서민석이 두 팔을 올리며 항복 의사를 보이자마자 세계는 영하의 허리를 안으며 카페를 빠져나왔다. 입구 바로 앞에 그의 차가 정차해 있었고, 영하는 거의 강제적으로 밀려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가 어떻게 이곳을 알고 찾아왔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은 그는 입술 한번 움직이지 않고 창밖만 지켜볼 뿐이었기에, 영하도 조용히 침울해졌다.
세계가 말문을 뗀 것은 집에 도착한 이후였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최영하.” 하고 영하의 뒤통수에다 대고 불렀다.
한참을 숨을 뱉어 내던 그가 고개를 숙인 채로 말문을 열었다. 저런 식으로 말없이 호흡만 하는 것은 보통은 화를 참아 내기 위해서였다. 다만 그러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잔뜩 격양되어 있었다.
“서민석 번호 당장 차단하고 이참에 번호도 바꿔.”
“번호 바꾸는 건… 싫어. 그냥 차단만 하면 안 될까?”
“왜. 네 엄마가 혹시나 전화라도 할까 봐?”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말한 그대로 사실이었다.
“너는 왜 이렇게 착해 빠져서 네 엄마를 그렇게 좋아하는 거지? 최영하. 난 네가 네 엄마한테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린 게 상당히 불쾌하고 넌더리가 나.”
“미안해….”
“그 인간이 너 한… 하아… 네 엄마는 네 생각과 달리 발레 유망주도 뭣도 아니었어. 그냥 쓰레기였지. 하지만 그래도 넌 엄마를 사랑하겠지. 안 그래?”
널브러진 테이블 위의 식재료를 보던 그가 몸을 돌렸다. 영하가 그의 화를 풀고자 다가가 손을 잡았으나 곧바로 뿌리쳐졌다. 그러고도 그는 짜증을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골프 셔츠의 칼라넥을 거칠게 잡아 흔들어 바람을 일으켰다.
“아니야. 엄마한테는 아빠 말대로 그냥 미련이 남은 것뿐이야. 그래도 이제 엄마 생각 안 할게. 휴대폰 번호도 그냥….”
“네 엄마는 좋겠어. 그런 짓을 해도 사랑해 주고, 나는 누구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는데.”
정곡을 찔린 채 그 자리에 붙박였다. 최세계는 무감한 눈으로 굳은 영하를 훑어보곤 자리를 떠났다. 욕실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뒤늦게 정신이 든 영하가 욕실로 다급히 뛰어갔다. 그는 욕실과 이어진 복도 앞, 세탁실에 서서 티셔츠를 벗는 도중이었다. 어깨까지 올린 티셔츠 아래로 등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움직임에 따라 어깻죽지의 날개뼈가 도드라졌다. 마저 티셔츠를 벗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가 서민석을 언급했다.
“서민석이랑은 왜 자꾸 만나는 거야.”
“…자꾸 만난 거 아니야.”
“내가 모를 것 같아? 너 상견례에서 서민석 보기 전에, 이미 그 자식이랑 아는 사이였잖아. 내가 왜 병신같이 참았을까? 왜 널 이해해 보려고 애썼지? 나 같은 놈도 아빠라고 이해심을 기르려고 한 건가?”
최세계가 불편한 기색으로 티셔츠를 빨래 바구니 안에 던져 넣는다. 영하는 아빠가 이전의 상황까지 모두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한 적 없었다. 당황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그가 입술을 당겨 이죽거렸다.
“어떻게…….”
“너같이 낯가리는 녀석이 한 번 보고 말 생판 남도 아니고, 내 약혼녀 동생에게 휴대폰을 빌렸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짓이었지. 너라면 차라리 다시 식당으로 걸어오는 걸 선택했을 거야.”
“…….”
“따라 들어와.”
나체가 된 그가 욕실의 문을 연다. 영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욕실로 들어갔다. 무광 타일로 마감한 너른 직사각형의 조적 욕조와 샤워실이 분리된 넓은 욕실은 벽면은 회색의 대리석이었고 바닥은 그보다 짙은 색의 포셀린 타일이었다. 곧장 샤워실로 들어가는 그를 보며 어찌할 줄 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던 영하가 의자 위에 앉으려던 때였다.
“뭐 해. 벗어.”
“같이 씻어?”
답이 없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눈빛에서 재촉을 읽어 낸 영하는 허둥지둥 옷을 벗어젖혔다. 영하가 속옷을 발목까지 내리자마자 샤워 부스에서 빠져나온 그가 손목을 잡아당겼다. 거의 질질 끌려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 부스는 유리문을 제외하고는 높이의 절반이 가려져 불투명한 형태였으나, 좁은 곳에서 그와 마주 보고 선 영하는 연신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으로 눈을 돌렸다.
열려 있던 유리문이 쿵- 닫히자 심장까지 내려앉는 기분에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두 발을 모으고 선 영하는 구석으로 몰려 숨을 가쁘게 내쉰다. 쿵쾅대는 심박 소리에 정신이 혼미했다.
아무 잘못 안 했어. 잘못한 거 없잖아.
그가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애초에 그는 들어올 때부터 이미 화가 나 있는 모습이었다. 서민석한테서 날 구해 줬으면서 왜 나한테 화를…….
설마 내가 서민석과 바람이라도 피운다고 생각하는 걸까? 둘이서 카페에 함께 있었으니 그런 오해가 불가능하진 않았다. 천장에 붙은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가느다란 물줄기를 맞으며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았다. 손바닥에 닿는 열기가 평소의 체온보다 높아 뜨끈했다.
“아빠가 오해하는 거야. 서민석이랑은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난 오히려 서민석을 싫어하는 쪽이었는데….”
“그딴 역겨운 오해 안 해. 서민석 이야기는 듣기 싫으니까 그만하고, 나한테 할 말이 있을 텐데.”
“무슨…….”
“네가 이번 주 내내 하려고 생각했던 말. 지금 해.”
아.
물러난 영하의 등이 타일 벽에 닿았다. 피부 위로 느껴지는, 소름 끼칠 만큼 차가운 감각에 눈가를 찌푸리며 신음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에 눈을 뜨는 것도 힘들어 몸통을 비틀자마자 그가 허리를 안아 왔다.
맨살갗이 겹쳐지고 동시에 영하의 다리 사이를 가르는 허벅지가 사타구니에 바짝 달라붙는다. 성기가 그의 허벅지에 닿아 물길에 미끄덩하게 문질러졌다.
분노한 상태의 그와 섹스하고 싶진 않아 고개를 저으며 가슴팍을 밀어내 봤으나 오히려 그는 몸을 가까이 겹치며 허벅지로 압박하듯 영하의 성기를 밀어 올렸다. 영하의 마음과 달리 성기는 그의 행위에 발기하고 있었다.
“하지 마! 화내면서 이게 무슨 짓이야!”
“말해. 네가 섹스하기 싫은 이유.”
“뭘 말하라는 거야. 이렇게 무섭게 하니까, 싫다는, 읏……!”
벽에 완전히 몰아붙여진 영하의 성기 위로 그의 손이 닿았다. “그만하라니까!!” 비명처럼 터져 나온 목소리에도 손길은 거침없이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무참히 발기했다. 성적 흥분으로 몸이 달아올랐지만 기분은 처참했다.
그의 손안에서 완전히 크기를 키운 성기가 꺼덕이고 있었다. 최세계는 그보다 더 참담하게 형언했다.
“아직도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몰라? 어디까지 보여 줘야 믿을 셈이야. 뭘 더 하면 되지?”
“그만, 해…! 싫다고 했잖아!”
“넌 매번 싫다고만 하지. 네 엄마한테도 하는 사랑한다는 말을 나한텐 죽었다 깨어나도 할 생각 없고, 네가 강간당했으니 도와 달라는 이야기도 안 하고. 대체 내가 너한텐 뭐야? 최소한 아빠이긴 한 건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그런 일을 당하고도 일언반구도 없는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물줄기 아래에서 눈을 크게 떴다. 영하는 고개를 빠르게 내젓고는 차가운 유리 벽에 등을 붙이며 항변했다.
“강간당한 거 아니야!”
“아니야? 하. 그럼 뭐야. 서민석 그 개새끼가 너한테 접근하는 거.”
성기를 쥔 손이 거칠게 떨어졌다. 영하는 숨을 헐떡이며 손바닥으로 벽을 짚었다. 벌어진 입 안으로 눈물인지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인지 모를 것들이 들어가 캑캑 헛기침을 뱉었다.
“케엑, 윽… 그런 게 아냐. 아니야. 나는….”
“네가 나한테 숨긴다는 건 내가 그만큼 너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상대라는 거겠지. 오늘 내가 경찰서장이랑 뭐 하러 골프 약속을 잡았다고 생각해? 그냥 친목이나 다지러 간 줄 알아? 나는 네 아빠야, 최영하.”
“…….”
“뭐가 무서운데. 그럼 내가, 고작 내가 널…….”
최세계는 차마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몰아붙인 것은 최세계였으나 그는 자신이 벼랑 끝에 몰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끝도 없이 떨어지던 샤워기의 물줄기가 단숨에 멎었다. 그제야 영하는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닦아 내고 똑바로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본다. 그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다. 언제나 태산 같았던 남자가 그랬다.
“아니야. 아니라니까?”
“언제까지 아니라고 할 거야. 그러면 그동안 네가 그렇게 침울해했던 이유가 뭔데.”
“그건…….”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도 도와줄 수 없어.”
쓰라림을 안은 목소리였다. 경찰서장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면 아빠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일을 처리하려 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생각만큼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의미겠지.
“무서워서 그래. 미안해. 근데 내가, 그냥. 그냥 몰랐으면 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빠는 몰랐으면 좋겠어서….”
“너한테 사과 들으려고 한 말 아니야. 난 네 보호자야. 평생 널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고. 나한테도 기대지 않으려면 누구한테 기대려고. 네 엄마랑 둘이서 살던 때가 아니잖아. 난 네 엄마랑 달라. 네가 그러면 나한테 아빠 자격이 없는 것처럼….”
말을 하다 만 최세계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없긴 한데.”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보아 화가 누그러진 것 같았지만 오히려 대화의 의지 또한 상실한 모양이었다. 한숨을 여러 번 뱉은 그는 샤워실의 문을 열며 턱짓했다.
“마저 씻을 거야. 나가 있어.”
바깥 욕실의 공기가 샤워실 안으로 들어오자 피부가 곧장 식어 간다. 영하는 고개를 젓고 그와 몸을 바짝 붙이며 “추워…….” 하고 가녀린 목소리를 내어 봤으나 세계의 굳은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나가지 않고 뭘 버티고 서 있냐는 듯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의 눈빛에 기가 죽은 영하는 이윽고 발을 옮겼다. 싸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살갗에 달라붙어 영하의 체온을 떨어뜨린다. 젖은 발로 타일 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아빠가 제 침묵에 상처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그를 믿을 수 없는 것도, 아빠 취급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으로 이 행복이 깨져 버릴까 두려웠다. 누군가 알게 되고, 할머니와 가족들이 알게 되고… 모두에게 손가락질받게 될까 봐……. 혼자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수건으로 몸의 물기와 젖은 머리카락을 조금 닦아 내곤 곧장 안방으로 들어갔다. 곧은 어깨에 기운이 빠져 몸이 굽었다. 맨몸으로 침대 위에 오른 영하는 이불로 목 아래까지 감싸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아빠…….”
아빠의 화가 완전히 다 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아니 애써 참아 보는 것일 뿐. 그가 정말 화가 풀렸다면 그 자리에서 저를 품에 당겨 놔주지 않았을 것이 자명했다.
어떻게 화를 풀어 주지. 영하가 그에게 해 줄 변명은 이미 좀 전에 욕실에서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빠만은 몰랐으면 했다는 것은 전혀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잘못했다고 해도 분명 싫어할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아빠 마음이 풀어질까. 씻고 나온 그는 또 모른 척할 것이다. “됐어. 자자.” 하고 영하를 끌어안고 억지로 잠자리에 들겠지. 그건 해결 방법이 아니다. 됐다는 말은 아무런 진척도 없이 도피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빨리 말할걸. 왜 자꾸 뜸만 들이고 갈등하다가.
이래저래 속상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던 찰나였다. 안방 문이 열리고 말쑥한 일상복 차림의 최세계가 들어왔다. 그는 움츠리고 있는 영하를 보고선 침대에 가까이 오지 않고 문 앞에 기대어 서며 팔짱을 낀다. 입술을 파르르 떨며 턱을 들자 눈이 마주쳤다. 최세계는 동요 없는 얼굴로 한숨을 꺼뜨린다.
“…그만하고 쉬어. 나갔다 올 테니까. 내일 아침에 이야기하자. 좀 진정되면 이야기해.”
이럴 줄 알았어. 영하의 예상 그대로였다. “됐어. 그만하자.” 그는 영하와 싸우는 것을 싫어한다. 정확히는 영하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자신의 한계 이상으로 분노가 차오르면 됐다며 자리를 피하곤 했다.
전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그런 방식으로는 안 된다.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발을 내린 영하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어, 어디 가?”
“드라이브 좀 갔다 올게. 열두 시 전까진 들어올 거야.”
“가지 마… 어디 가. 왜… 나 혼자 두고 가려고 해.”
“나도 생각 좀 해야지.”
“혼자 생각하지 마. 나랑 같이 해. 응? 아빠,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요….”
헐벗은 최영하의 몸이 침대에서 한 발자국 멀어지자마자 문 앞에 기댄 세계가 등을 바로 세우고 문고리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일 해. 화내는 거 아니야. 다녀올게.”
두려움을 달래는 자상한 목소리였으나 오히려 겁이 났다. 저러고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가 드라이브를 끝내고 돌아오는 순간 그는 완벽한 아빠로서만 존재할 것이란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분명 막막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내가 너에게 대체 어떤 존재냐는 물음이 그에게 가장 큰 벽인 듯했다.
최세계는 영하의 일생에 유일한 사람이다. 영하의 삶이 그로 인해 비롯되었으며 자신의 결핍을 채워 주는 단 한 명이었다.
그의 긴 다리가 안방의 문 너머로 향하는 순간 영하가 비명처럼 그에게 내질렀다.
“자기야…!”
“…….”
방을 나가려던 최세계가 고장 난 듯 그대로 굳었다. 문 옆의 도어스톱을 잡은 채였다. 최영하는 자신의 입으로 뱉어 내고도 놀라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지….
창피함에 귓가가 빨개진 채로 흰자가 보이도록 눈이 휘둥그레졌다. 돌아본 최세계의 찡그린 눈과 완전히 크게 뜨인 눈동자가 맞닿자, 그가 문에서 손을 떼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효과가 지나치게 좋았다.
“이건 또… 뭐 하자는 짓거리지.”
어조만 봐서는 화가 난 모습이었으나 그가 곧이어 말했다.
“한 번 더 해 봐.”
“안 나가면 해 줄게.”
“너 정말…….”
“와서 대화해. 나가지 마. 여기 앉아.”
침대 위로 풀썩 주저앉으며 명령하는 순간 그가 긴 걸음으로 단숨에 다가와 영하의 어깨를 밀어 눕혔다. 뒤통수가 푹신한 침구 위로 떨어지고 긴박하고 성급한 손길과 함께 입술이 맹렬하게 다가와 겹쳐졌다.
“흐윽…!”
가느다란 허리를 양쪽으로 틀어쥔 그가 손아귀에 힘을 준다. 내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동반한 저릿한 압박감이 들어 신음을 흘렸다. 입 안으로 혀가 침투하고 최세계의 무릎이 영하의 양쪽 다리를 강제로 벌렸다. 치노 팬츠의 겉감이 하얀 허벅지 속살을 마구 문질렀다. 흰 살갗이 붉게 달아오르고 동시에 영하가 그의 셔츠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촉촉함이 남아 있는 등줄기를 손톱으로 약하게 긁으며 쓸어 올리자 미간이 잔뜩 좁혀진다. 떨어뜨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뱉어 냈다. 영하는 애끓는 눈빛을 느꼈다. 몸이 바짝 타는 느낌. 그의 입술도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렸다. 서로의 거친 호흡만 연이어 내뱉는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말문을 열었다.
“자, 왔으니까 해 봐.”
등을 문지르던 손에 깍지를 껴 손가락을 얽은 그의 눈이 번뜩였다. 새카만 눈동자는 불꽃이 일렁이는 듯 강렬했지만 동시에 넋을 잃은 듯이 무참하게 조종당하고 있었다. 세계는 이어진 영하의 대답에 턱을 굳게 다물었다.
“…손가락으로, 만지기만 했어.”
“하아, 시발…….”
“그뿐이야. 근데… 내가… 정신이 없어서. 아빠인 줄 알았어.”
“…….”
“아빠라고 불러 버렸어. 그게……. 미안해. 내가 다 망친 것 같아.”
“망치긴 뭘 망쳐. 괜찮아.”
위로를 들어도 시무룩했다. 하필 서민석이었다. 착잡한 마음에 연거푸 한숨을 뱉는 영하의 어깨 위로 따뜻한 손이 닿았다.
“그게 다야? 정말?”
“응.”
“더 숨기는 거 없어? 확실해?”
“없어.”
“하…….”
영하의 정수리 위에 이마를 내리누른 그가 이내 몸을 거칠게 끌어안았다. 어깨가 굽어들고 그의 가슴에 온몸이 새겨 들도록 안겼다. 뜨거운 피부의 체온. 고통스러운 한숨 소리. 세계는 여러 번 입술을 벌리곤 도로 다물었다. 할 말을 수도 없이 고르는 중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다른 걸 원했다. 좀 더 밀착하고 싶다. 그를 느끼고 싶었다. 영하는 세계의 단단한 목을 손끝으로 훑어 내리며 가느다란 목소리를 흘렸다.
“자기… 화내지 마.”
시뻘건 불꽃에 온통 타들어 가 잿더미가 된 최세계의 두 눈이 흔들리고 긴장된 턱에 힘이 들어간다.
“젠장! 매번 이런 식으로 퉁치려고 하지 마. 안 넘어갈 거니까. 이번뿐이야.”
아니. 최세계는 매번 바보처럼 수가 뻔히 보이는 이 작전에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스스로도 알기에 욕을 뱉는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음을 예견해 김이 빠진 콜라에 불과했다.
황급히 바지 버클을 풀어 성기를 꺼낸 그가 아들의 허벅지 위로 남근을 문지르며 입술을 맞댄다. 로맨틱함이 없는 날것의 입맞춤이 계속되었다.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자 갈증을 견딜 수 없다. 영하는 그를 원했고, 아래가 강제로 벌어지고 마구잡이로 쑤셔지는 감각이 주는 쾌락을 아는 몸이었다. 스스로 다리를 벌려 그의 허리에 감고 흐느꼈다.
“으응, 넣어, 넣어 줘….”
“지금 넣으면 다쳐.”
섹스의 부재가 오래되었으니 충분히 공을 들여 풀어야 했다. 이미 몸이 달아 아래가 벌름거렸으나 애액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안쪽의 장 내벽이 몸을 열어 둘 시간이 필요했다. 가볍게 고개를 저은 그가 물기가 남은 영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 번질거렸다.
“감기 걸려. 머리 말려야지.”
다정한 조언이었지만 발기한 성기를 미끈한 허벅지에 문지르고 있는 주제에 할 말은 아니었다.
오른쪽 무릎을 매트리스 위로 올리며 티셔츠를 벗어 던진 최세계가 영하의 몸을 안아 침대 안쪽으로 옮겼다. 예민해진 살결에 닿는 그 자극만으로도 기뻐 벌어진 입으로 연신 헐떡였다. 엉덩이 아래로 베개 두 장이 겹쳐져 허리가 잔뜩 들려 기대와 긴장으로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둔부의 근육도 함께 조여들었다.
세계는 상체를 아래로 숙여 종아리 뒤쪽에 입술을 대고 천천히 위쪽으로 입술을 옮겼다. 단순히 입술을 문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 애무였다. 그러나 영하는 그와 닿을수록 애가 타 눈이 돌아갈 것 같다. 그만두고 얼른 안에 넣어 달라 조르고 싶었다.
“그날 있었던 일, 처음부터 끝까지. 사소한 것 하나라도 빠짐없이 다 말한다고 약속해. 아무것도 빠진 게 있으면 안 돼.”
“응… 말할게. 아빠… 미안해.”
“원래 자식이란 마음대로 안 되는 존재지. 나도 네 할머니 말 안 들으니까.”
결국 ‘자기야’ 소리 하나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분위기에 최세계가 한숨 섞인 욕망을 터뜨렸다.
“네 머릿속에서 다른 것들을 다 지워 버리고 내 생각만 하게 만들고 싶어.”
“충분히 그러고 있어.”
“아니. 넌 잡생각도 걱정도 너무 많아. 네 안에 나는 얼마 되지도 않을 거야.”
“아니야, 정말로, 아, 아, 응, 아앗….”
진심을 전하려고 했으나 신음에 틀어박혔다. 아빠의 높은 콧대가 회음부에 닿아 꾹- 눌렸다. 짧은 손톱으로 이불을 긁으며 벌어진 두 다리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머릿속이 몽롱해 눈가가 뜨거워졌다. 검지를 넣어 길게 벌려 빨간 점막이 드러난 구멍 안으로 그의 혀가 침투해 안쪽 내벽을 핥아 올렸다. 혀뿌리까지 박아 넣을 듯 깊게 안으로 침투한다.
소름 끼치도록 야릇한 기분에 참아 내기 괴롭다. 영하가 붉어진 눈을 감았다 뜨며 매트리스 위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아흐윽, 아아! 잔뜩 곱은 발이 그의 등 위로 올라 다리로 허리를 조였다.
“으흥, 앗, 아아 흑, 아빠아, 좋아, 흑….”
최세계는 오랫동안 끈질기게 아래를 빨았다. 그가 주름을 하나하나 건드리듯 느리게 빨다 조금 열린 구멍을 힘 있게 빨아 당기자 영하가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혀가 뻣뻣해질 만큼 오랫동안 안을 노곤하게 풀고 입술을 떨어뜨릴 때마다 안쪽에 고여 있던 투명한 애액이 쏟아지듯 벌어진 구멍에서 흘러 베갯잇을 적신다. 울컥 쏟아져 흰 엉덩이 아래로 떨어지는 물방울에 혀를 대자 흐느끼던 영하가 몸을 튀어 올리며 거부했다. 손길이 파드드 떨렸다.
“먹지 마…. 싫어!”
영하가 흐느끼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내 세계가 손가락 두 개를 한꺼번에 안에 넣고 휘젓자 곧 엉덩이 근육에 바짝 힘이 들어가며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천장을 향한 눈동자가 물기로 가득 젖었다.
최세계의 성기는 귀두 아래쪽이 특히나 두툼하게 부푼 형태였다. 귀두까지만 넣으면 울지 않고 헐떡이기만 하던 영하도 그곳까지 박아 넣으면 괴롭다고 울음을 터뜨리며 버둥거렸다.
“이러다 매트리스도 새로 사야겠는데. 아예 바닥에서 할까, 이제.”
구멍을 빨기 위해 베개를 안쪽으로 밀어 넣어 허리를 받치고 다리를 잡아당겨 몸을 바짝 붙였다. 붉게 발기한 남근이 영하의 음모가 적은 사타구니 위쪽에 퉁- 닿아서 휘어졌다. 그가 아들의 것과 겹쳐진 자신의 것을 보더니 크기 차이가 확연한 두 성기를 한꺼번에 잡고 문질렀다. 영하가 기겁하고 그의 손등을 밀쳐 냈다.
“싫어. 거기 만지지 마.”
“너도 남자잖아. 자지 만져 주는 걸 왜 싫어해.”
“그냥, 싫어…. 흑 만지지 마.”
앞을 만지는 자극이 생경해 괴로운 것보다는 대부분 뒤를 거칠게 박으며 앞을 만져 대서, 중첩된 지독한 쾌락이 버거웠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절로 진땀이 나는 자극에 기절할까 봐 두렵다.
싫다고 하니 더는 만지지 않은 세계는 자신의 것만 잡아 회음부 위로 귀두를 문질렀다.
“응? 바닥에서 할까?”
“그러면, 무릎 아파… 아파서 싫어….”
영하가 현실적인 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세계는 도리어 좋을 것 같다는 대답을 했다.
멍이 든 네 무릎만 봐도 발기할 수 있을 거라며 지껄인 그는 예고도 없이 단번에 안으로 성기를 쑤셔 넣었다. 마른 몸이 콰아앙― 큰 움직임에 크게 펄떡이며 위로 밀려났다.
“흐아아악―! 아, 앗! 흑…! 아파!”
성기가 안을 밀고 쑤셔 들어오자마자 발기한 영하의 성기 끝에서 흰 액이 후두둑 쏟아졌다. 날씬한 배에 잔뜩 힘이 들어가 납작하게 내려앉았고 옅은 세로선의 근육이 선명해졌다.
“아흑…! 아! 아앗, 아…!”
영하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입술을 벌렸다. 꽈앙! 하고 안으로 크게 박혀 오니 참아 냈던 숨이 겨우 돌아 “흐악, 하악, 흑.” 하고 거칠게 숨만 몰아쉬었다.
“아빠, 흑, 아흑, 나, 천천, 히, 흑… 너무 힘들, 아흑….”
매일같이 해 댈 때는 뒤로 성기를 받는 것이 익숙해졌다고 느꼈는데 며칠간 섹스가 뚝 끊기자 다시 버거워졌다. 엉덩이뼈와 함께 잔뜩 열린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져 찢어질 것 같았고 거칠게 안을 휘저어 대는 성기가 괴로워 헐떡였다. 아프도록 안을 침입한 것이 끝내 깊게 안까지 파고들어 뿌리 끝까지 들어오자 헛구역질까지 해 댔다.
“끄흑, 흐으, 아파, 아빠, 잠깐만, 나 쉬게, 흑, 쉬게 해 줘.”
그러나 최세계는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정제되지 못한 난폭한 움직임으로 영하를 탐했다. 벌써 섹스 없이 이 주나 흘렀다.
그는 처음 섹스를 하는 남자처럼 거칠고 긴박하게 굴었다. 대답 없는 움직임에 눈물이 핑 돌아 앞이 흐릿하다. 영하가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뻗어 온 손바닥에 입 맞춘 그가 팔을 단단하게 결박한 후 과격하게 허리를 쳐올렸다.
얼굴을 붉게 물들인 영하가 거칠게 박아 대는 움직임에 숨을 깔딱였다. 하얀 둔부가 마찰로 벌겋게 달아오르고 그 부위를 최세계의 샅이 다시금 박아 댄다.
“에윽, 흣, 아흐, 응, 아! 너무……! 흐윽, 아빠… 흑. 흐윽.”
“하아, 윽… 자기라고 해 달라니까.”
“으응…… 싫어, 아빠아… 응, 앗, 흐으읏….”
가느다란 신음이 이어 흐른다. 거친 움직임에 겨우 겹쳐 있던 베개가 제멋대로 어긋났다. 엉덩이가 침대 위로 풀썩 떨어지는 동시에 안을 빠듯하게 메우던 성기가 쑤욱 빠져나가자 영하가 울먹였다.
쉬게 해 달라고 해 놓고선 막상 성기가 빠지자 칭얼거린다. “멈추지 마….” 세계는 대답하지 않고 허리 아래를 받쳐 엉덩이를 공중에 높이 치들게 했다.
아으으, 어깨와 목을 제외한 몸이 허공으로 붕 뜬다. 사선으로 몸이 들렸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분이었다. 무릎으로 선 세계가 성기를 아래에서 위로 처박았다. 배꼽 아래 납작한 뱃가죽이 꿀렁이며 그 아래 반복적으로 출납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영하는 볼 수 없는 각도로 오로지 최세계의 눈에만 보이는 음탕한 광경이었다.
“응― 흐아, 응, 앗, 아앗, 흑 아흑!”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는 각도에 그의 귀두가 전립선을 끈덕지게 압박했다. 좋아…. 저릿한 통증 너머로 거대한 파도 같은 쾌감이 일렁인다. 곧장 절정감이 차올랐다.
“흑, 아흐응, 읏, 아흑! 아아…….”
머리로 피가 몰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입술이 울먹이듯 벌어진다. 뒤쪽으로 가 버릴 예감에 수치심이 들었다. 그가 좀 전처럼 바닥에서 해야 하지 않겠냐며 또 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부끄러움과 몸은 별개였다. 판판한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문지른 세계가 성기를 완전히 빼낸 다음 단 세 번의 허릿짓을 하자 그것만으로 영하는 원치 않는 절정을 느꼈다. 아흐으으윽―! 꼴사납게 달아오른 얼굴의 뺨을 타고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아, 흑, 후으으….”
영하는 성기를 담은 채로 절정을 느끼면 거의 성기를 자를 듯이 조이며 몸을 떨곤 으응, 아응, 하고 울어 댔다. 절정감에 못 견뎌 따로 허릿짓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구멍을 죄었다 풀며 스스로 움직였다.
여전히 크게 발기한 그의 성기를 구멍이 옴죽거리며 여러 번 물었다. 다만 오래가진 못했다. 거꾸로 들려 얼굴로 피가 몰리니 숨쉬기도 버거웠고 허리가 붙잡혀 움직이기도 불편했다. 이런 자세로는 오래 하질 못한다. 그렇지 않아도 영하는 세계에 비해 체력이 형편없어 금방 지쳤다.
눈물로 희뿌예진 시야 너머로 존재하는 그에게 영하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요구했다.
“자기… 이 자세 힘들어.”
세계가 탄식했다.
“이러지 좀 마. 너한테 매달려서 아무것도 못 하게 될 것 같으니까.”
그건 영하가 바라던 바였다. 아빠가 자신의 손아귀에 갇혀 아무것도 못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엉덩이 근육에 힘을 준다. 세계가 영하를 안아 든 채로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따뜻한 입술이 감은 눈꺼풀 위에 느리게 닿았다 떨어진다. 한 뼘을 두고 숨소리가 겹치고 가까운 시선을 마주했다.
“사랑해.”
“응….”
화답하지 못하고 작게 주억이자 세계가 흐릿하게 웃었다. 코끝을 마주 댄 세계는 찔걱찔걱 소리와 함께 엉덩이골 아래 부근에 닿은 남근을 밀어 넣고는 부드럽게 안을 가로지른다. 축축한 내벽이 그의 성기를 감싸고 동시에 영하의 말랑한 입술을 혀로 핥은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 나도 사랑해.”
영하는 그와 섹스할 때면, 온몸이 갈라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곧이어 쾌락과 함께 안온한 품 안에서 벅차오르는 사랑을 감지했다.
죽어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듯, 입을 꾹 다문 저를 향해 그는 사랑한다는 대답을 들은 남자처럼 이야기했다.
영하는 그의 목소리와 뜨거운 체온을 통해 그가 자신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와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기 위해 최세계란 남자가 버린 것이 얼마나 많았을지 모를 수가 없었다.
*
하얀색 반소매를 입은 팔이 내리쬐는 햇빛 아래 뜨겁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앉아 있어도 전신이 그늘 안으로 숨겨지는 것은 아니었다.
덥다. 봄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봄의 끄트머리였다. 바야흐로 영하가 좋아하는 초록색이 눈 돌리는 곳마다 퍼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가방을 끌어안은 영하는 뜨거운 햇살과 달리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초저녁에 시작했던 섹스가 밤중에 끝났다. 탈진해 쓰러진 영하를 씻긴 그가 잠에 빠져드는 몸을 붙들고 무언가 이야기했지만 자느라 거의 듣지 못했다. 영하가 듣지 못한 이야기는 다음 날 눈도 뜨지 못한 채로 들을 수 있었다. 한참 울고 잠들었더니 두 눈이 퉁퉁 부었다. 세계는 물컵을 아들의 입에 대어 주며 재차 반복해 이야기했다.
“근방 CCTV가 전부 사라졌어. 말로는 마약 우범지대고 제보 들어온 게 있으니 경찰 조사 때문에 일주일 치 자료를 모두 회수해 갔다는데, 말이 안 되지. 굳이 원본 파일을 가져갈 필요가 없어. 어제 골프 치며 서장한테 이야기해 보니, 검찰 윗선의 지시라더군.”
“…….”
“그쪽은 원래 그래. 완전한 개인 플레이라곤 불가능한 집단이지. 서민석 하나만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지만 얽혀 있으면 시간이 좀 걸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러니 넌 더는 신경 쓰지 말고. 서민석의 메시지는 캡처해서 나한테 보내 놔.”
“응…….”
범인만 알게 되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복잡한 마음이 들어 아빠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인다.
“조심해. 서민석이 어제 널 불러낸 것도 네가 어디까지 아는지 확인하거나, 협박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세계가 말끝을 흐렸다. 무슨 말인지 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두 번째 범행을 저지를 의도도 있었겠지.
서민석을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배신감은 없었으나, 그보다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기죽은 낯을 확인한 세계가 재차 “괜찮아. 넌 마음 편히 있어도 돼.” 하고 연달아 이야기했다.
마음 편하게……. 그게 가능할까.
“……영하야. 야, 최영하!”
어깨를 툭, 건드리는 터치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몸을 부르르 떨고 올려다보니 영하처럼 흰 티셔츠를 입은 이정욱이 서 있었다. 오늘은 수업이 한 시에 끝나니 점심 먹고 도서관에서 잠깐만 공부하다 집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서민석이 범인임을 알게 되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던 이정욱은 혐의를 벗었다. 영하는 그 이후로 정욱이를 꼭 데리고 다녔는데, 경호원 용도였다. 육상을 했다니 일반인보다는 체력도 힘도 좋겠지. 혹여나 서민석이 나타나면 날 지켜 줘야 한다고.
“민재는?”
“과외 간대.”
“깜빡했다. 민재도 알바한다고 했지.”
김민재가 과외라니. 선생님이라니. 말도 안 된다. 그 천방지축이? 김민재와 선생님을 나란히 두며 웃음을 지었다. 정욱이 벤치에 앉으려는 듯 옆에 붙자 영하가 오른쪽으로 엉덩이를 밀어 공간을 마련했다. 말라붙은 조그마한 나뭇잎 하나가 벤치 사이로 떨어졌다. 헛헛하게 웃은 정욱이 옆에 앉아 등받이에 등을 붙이며 물었다.
“근데 넌 어버이날에 뭐 해? 젊으시니까 카네이션 같은 것도 안 좋아하실 텐데.”
“어버이날?”
그러고 보니 5월 8일까진 채 열흘도 남지 않았다. 영하는 떨떠름한 얼굴을 정면으로 돌렸다. 가벼워진 옷차림의 학생들이 올라온 잔디밭 사이의 보도블록 위를 걷고 있었다.
“너 그런 거 챙겨? 효자네.”
“누나가 잘 챙기거든. 뭐 카네이션 같은 거야 사지. 안 하면 은근히 두 분 다 삐지셔. 중학교까진 학교에서도 단체로 하잖아. 넌 챙긴 적 없어?”
당연히 없다. 어버이날을 왜 챙겨 짜증 나게. 하지만 영하는 화이트데이도, 밸런타인데이도 챙긴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의외로 그런 ‘기념일’에는 집착하지 않는 모양이다. 영하가 생일 선물을 안 줘도, 새해 인사를 안 해도 관심 없는지 딱히 언급이 없었다.
“난 그런 거 안 해.”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다. 기분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어버이날 같은 건 안 챙긴다. 다만 이제 애인이니까 생일과 크리스마스 정도는 선물을 줄까. 전날 호텔에 가서 같이 밤을 보내는 거야. 숨넘어가는 거친 섹스는 체력이 축나 힘들었지만 그런 날은 아빠가 원하는 만큼 해 줄 의향이 있다.
생일 선물 어떡하지……. 고민이네.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곧 5월이고 8월도 금방이었다. 7월 초쯤에는 선물을 미리 구매해 둬야 하지 않을까? 보통은 애인끼리 선물로 뭘 사 주는 걸까. 최세계는 워낙 까다로운 사람이라 생일 선물 하나도 쉽지 않았다.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건 워낙 까탈스러운 그 사람의 취향에 맞추는 게 불가능할 것 같고…….
“정욱아.”
“어. 왜?”
바람에 날려 눈썹 아래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묻자 이정욱이 왜인지 긴장하며 대꾸했다. 의아함에 눈동자를 올려 바라보곤 되물었다.
“너는 아버지 생일 선물 어떤 거로 드려?”
“…생일 선물?”
“어. 우리 아빠… 생일도 곧이라. 선물 사 드리고 싶어서.”
영하의 물음에 이정욱은 김빠지는 한숨을 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영하의 머릿속에는 선물밖에 없다. 몰래 하루에 오만 원씩 카드로 출금해서 한 달 모으면……. 야비한 꼼수지만 어떻게 되지 않을까?
“우리 아버지는 오십 대라서. 안 맞을 것 같은데. 우리 아버지는… 백화점에서 지갑 사 드렸어.”
“아아, 지갑.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지갑 이야기가 많긴 하던데…….”
하지만 아빠가 쓸 만한 지갑을 사 주려면… 백만 원으론 어림도 없을 것 같은데? 수천만 원짜리 시계를 사 놓고도 잊고 사는 사람인데. 물론 꼭 씀씀이에 맞춰 선물을 사 줘야 하는 건 아니지만.
골치가 아파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내밀며 기지개를 켠다. 뭉친 근육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아 “으으아….” 하고 앓는 영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욱이 말했다.
“정 생각 안 나면 삼십 대 남자 친구 생일 선물 같은 거로 찾아봐.”
그 이야기에 최영하는 팔을 뻗는 도중 굳었다. 남, 뭐라고? 남자 친구? 어째서 이정욱의 입에서 남자 친구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깍지 낀 손이 스르륵 풀리고 부자연스럽게 팔을 내린 영하가 눈도 못 마주친 채로 더듬대며 항변했다.
“왜, 왜? …왜 남자 친구로? 징그럽게!”
“아버지 삼십 대라며. 인터넷에 아버지 선물 쳐도 죄다 사오십 대 기준이라 안 맞잖아. 나이대로 따지면 그쪽이 더 가까우니까.”
“그렇긴 하지……. 그러네. 응…….”
뭘 그리 놀라? 이정욱이 덧붙였다. 영하는 그냥 징그러워서 그런다고 둘러대곤 불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휴대폰을 만지작댄다.
“내가 좀 찾아볼까?”
옆에서 정욱이 이야기했다. 고개만 끄덕인 영하가 한 블록 너머 걷고 있는 여학생들 무리에 시선을 줬다. 대화 내용을 전환하자. 이제 도서관 가자고 하는 거야.
고개를 슬쩍 돌려 보니 정욱이 정말로 포털에서 생일 선물 소재를 찾고 있었다. 정말 다른 의도 없이, 해답을 주기 위한 발언이었을 뿐이다. 그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최영하 혼자 지레 놀라 겁을 먹었을 뿐.
조용히 한숨을 뱉는다. 정말 간이 콩알만 해져서 못 살겠다. 자신은 원래 이렇게 간이 작은 남자가 아니었는데, 나름대로 담대한 배포를 가진 남자였다.
영하가 입술을 양쪽으로 길게 끌어당기고 얼굴 근육을 풀며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던 시점이었다. 휴대폰에 진동이 울려 보니 [아빠]였다. 커다란 눈동자를 스르륵 굴린 영하가 정욱의 어깨를 콕콕 손가락으로 찔렀다.
“나 통화 좀. 아빠 전화 와서.”
“어어.”
자리를 옮기긴 했지만 멀리 떨어지진 않았다. 대각선의 맞은편 벤치로 걸어가 앉자마자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댄다. 고개만 슬쩍 돌려 보니 이정욱은 여전히 휴대폰을 보고 있다. 자신처럼 스마트폰 중독이었다. 나뭇잎 모양의 그늘에 팔을 뻗은 영하의 귓가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닿았다.
-뭐 해. 점심은.
“먹었지. 아빠는?”
-점심 식사 겸 미팅 끝나고 나오는 길이야. 다 먹었어? 남기지 말고. 살 빠졌잖아.
“응. 다 먹었지.”
-밖에 나오니까 우리 영하 보고 싶네.
목소리를 들으니 감정이 조금 들뜬다. 영하는 올라가는 입꼬리와 접히는 눈을 어쩌지 못하고 등을 조금 굽혔다. 손톱으로 청바지의 갈라진 부근을 긁으며 고개까지 끄덕였다. 운전하는 도중인지 내비게이션 소리가 아주 가까이 들렸다. 전방 앞 어린이 보호 구역입니다, 하는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웬일로 평일에 운전이래. 놀라움에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곧장 웃음기 섞인 최세계의 느물거리는 목소리가 기계적인 음성을 덮었다.
-아빠 보고 싶어요. 해 봐. 아니, 그거 말고. 자기야, 보고 싶어요. 해 봐.
아이씨. 또 징그러운 소리를 해 대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신발 앞코로 걷어차며 고쳐 앉았다.
“안 해. 꺼.”
-해 봐. 어제도 잘만 했으면서.
“1년에 한 번만 해 준다고 했잖아.”
-해 줘. 내년 치로.
“장난해? 지금 벌써 20년 치 가불받았잖아.”
-난 1000년 정도 살 예정이라.
자기가 엘프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영하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화가 난 그를 달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뱉은 죄가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그땐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고, 맨정신으로 ‘자기야’는 정말 곤란했다. 팔에 닭살이 돋고 돌아서면 후회가 들고 자괴감이 솟구쳤다. 징그러워. 본인이 말하고도 소름 끼쳤다. 너무 간질간질한 호칭이 아닌가.
게다가 몇 번 들었으면 됐지 자꾸 시도 때도 없이 해 달라는 점이 제일 문제였다. 아빠가 화낼 것 같으면 잽싸게 써먹어야 하는데 평소에도 써 주면 정작 필요할 때 쓸 수가 없잖아!
-빨리.
이러려고 전화했구나.
잠시 고민하던 영하는 그냥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미안함이 남아 당분간은 아빠의 요구를 맞춰 줄 생각이다. 슬그머니 주변의 눈치를 보고선 휴대폰을 입술 가까이 대고 목소리를 낮췄다. 콧등이 찡그려졌다.
“…자기야.”
-왜.
자기가 해 달래 놓고 무슨 왜야….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뭐야… 그냥 끊어. 돈 벌어 와.”
-날 ATM기 취급하다니. 이렇게 잘생긴 기계가 어디 있어. 영화 AI에 나오는 주인공인가?
“그거 나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 아냐? 됐고 끊자니까.”
-뭐라고…? 너 그렇게 아기야? 잠깐만, 끊지 마. 수업 끝났잖아. 20분은 더 통화할 거야.
“안 돼. 친구랑 같이 있단 말이야.”
영하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정욱이 휴대폰을 내려 두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슬슬 같이 도서관 가야겠지. 이십 분이나 통화해 줄 시간이 없다. 영하도 어쨌든 사회생활이라는 걸 해야 했다. 친구와 공부하는 것도 엄연한 사회화의 일환이다. 아빠 품 안에서만 살 수는 없다. 벤치에서 엉덩이를 떼고 손을 바꿔 휴대폰을 받았다. 영하가 일어나자 정욱도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다.
-너 친구 없잖아.
“있어. 생겼거든. 진짜 끊어…. 나 도서관 가야 해.”
아싸 아니거든요? 쏘아붙이려다 꾹 참았다. 도서관 방향으로 걸으니 정욱이도 한 걸음 떨어져 다가왔다. 옆에 사람을 두고 계속 통화하는 건 민폐니까 이제 정말 끊어야 했다.
-’아빠 보고 싶어요’ 부터 해 줘.
“하아. 매일 보는데 뭐가 그렇게 보고 싶겠어?”
-자꾸 말대꾸할래?
“알았어. 알았다고.”
물론 영하도 매일 보는 그가 유난히 더 보고 싶을 때가 있긴 하지만, 아직 한 시였고. 그는 오늘 여덟 시에 집을 나섰다. 평소보다 늦게 출근했다.
고작해야 떨어진 지 다섯 시간밖에 안 됐다는 이야기다. 그 정도도 못 견디면 일상생활 불가능이다. 정말로 아빠와 같이 출근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연이어 한숨을 푹푹 내쉰 영하는 붉어진 뺨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아빠 보고 싶어요.”
-어쩔 수 없네.
“뭐가…….”
-정말 어쩔 수가 없네. 알았어. 끊어.
뚝. 먼저 끊어 버린다.
아이, 진짜! 아까 그렇게 끊자고 할 땐 무시하더니 본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자마자 미련 따위 없다는 듯 먼저 끊어 버렸다. 진심으로 최악인 성격이다. 약혼을 뜯어말릴 것도 없었다. 어차피 저런 식이면 결혼식 하기도 전에 먼저 여자한테 걷어차일 것이 분명하다. 나니까 참고 사는 거지!
“짜증 나, 진짜.”
“뭐가 그렇게 짜증 나?”
“그런 게 있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혼잣말하니 정욱이 다가왔다. 영하가 흰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고개를 저었다.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린 영하의 눈에 멀리 있는 카페 간판 하나가 들어왔다. 볼 것도 없는 학교 박물관 지하에 위치한 카페였다. 영하가 정욱에게 말했다.
“도서관 가기 전에 카페에서 마실 것 좀 사자. 내가 사 줄게. 뭐 먹을래?”
“아니, 됐어. 내가 사 줄게.”
“됐거든. 내가 산다고.”
만류하는 정욱의 손을 뿌리치며 바로 걸음을 옮겼다. 꼭 자신이 사야 했다. 왜냐면 보디가드 비용이니까. 혹시나 서민석이 나타나면 어떡해? 영하는 무력에는 자신이 없으니 정욱이가 도와줘야 한다. 그러니 본인은 모르는 뇌물이자 월급이었다. 유순해 보이는 얼굴로 이정욱을 부려 먹을 상상을 한 영하가 새초롬하게 웃는 낯으로 동기를 재촉했다. 빨리, 빨리 와.
“내가 사 줄게. 빨리 따라와.”
“어어.”
마음이 급해 카드 지갑부터 꺼내 들며 손짓하니 뒤처져 있던 이정욱의 걸음이 빨라진다. 카페까지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지만, 이쪽 근처에 카페 비슷한 것이 없다 보니 내부에 손님이 제법 있어 주문까지 한참 걸렸다.
영하는 늘 먹던 걸로 시켰다. 어차피 녹차 맛 메뉴가 있는 이상 녹차라떼와 녹차프라페 중에 뭘 고를지 고민하는 것뿐이었다. 익숙한 맛의 음료를 빨대로 쪼오옥 빨며 지하에서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입 안에 든 녹차 얼음 알갱이들을 목구멍으로 꿀꺽 넘겼다.
“안녕.”
“…….”
뒤따라오던 정욱이 멈춰 선 등을 보곤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옆의 빈자리에 올라선 이정욱은 영하와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을 했다.
폭이 좁은 어린 가로수 아래에 차를 댄 최세계가 운전석 앞에 서 있었다. 게다가 차가…… 튀고 싶어 안달이라도 났는지 평소에 타지도 않던 오픈카를 끌고 왔다. 요란하도록 시뻘건 가죽 시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수트 재킷을 아무렇게나 벗어 조수석 헤드에다 걸어 놓은 상태였다.
깔끔한 흰 셔츠와 밝은 그레이 슬랙스를 입은 세계는 아들과 시선이 겹치자 눈을 접어 웃었다. 직장인들의 로망처럼 점심만 먹고 퇴근한 만큼 기분이 대단히 상쾌해 보인다. 아무리 봐도 여자 친구를 데리러 온 젊은 남자로만 보이지 대학생 아들이 있는 아버지의 얼굴은 아니다.
그 꼴을 하나하나 파악한 영하가 뒤늦게 빼액 소리 질렀다.
“여긴 왜 왔어!”
“관계자 외 출입 금지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미치겠네! 그러니까 아까…!”
옆에 정욱이 있음을 인지한 영하가 목소리를 낮추며 좁은 도로를 건넜다. 몇 걸음 걸을 필요도 없었다.
“네가 보고 싶다며.”
“내가 언, 와, 와….”
세계가 다가온 영하의 허리를 안아 당기며 물었다.
“싫어?”
“싫은 게 아니라, 말없이 갑자기 와서 그렇지… 말했으면 기다렸을 텐데.”
꽈악 안은 손 덕에 가느다란 허리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그가 씩 웃으며 영하의 뺨을 손등으로 톡 건드렸다.
평범한 부자 관계에선 다 큰 아들의 어깨나 허리를 감싸 안고 걷지 않는다. 하지만 영하는 그의 행동이 남들이 보기엔 이상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처음 만난 열네 살 때부터 그가 늘 자연스럽게 스킨십했고, 본가에서 살 때도 무릎 위에 올리지만 않으면 할머니나 다른 가족들의 타박도 없었기에 원래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정욱이 오묘한 시선으로 둘을 지켜보고 있음에도 그의 팔을 풀지 않고 사근사근하게 굴었다. 빨리 아빠와 학교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아무튼… 차에 들어가. 응?”
그의 팔을 토닥이며 음료수를 빨아들였다. 몸을 바로 세운 세계는 허리를 감던 손을 풀어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시선을 옆으로 밀었다. 그곳엔 요즘 최영하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정욱’이 있었다. 그가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루한 이야기를 뱉었다.
“이쪽이 이정욱이라는 친구인가? 어른을 보는데 인사도 없네.”
“아, 죄송합니다. 놀라서요. 안녕하세요. 이정욱입니다.”
왜 갑자기 어른인 척. 강제로 인사하는 정욱에 놀란 영하가 잡은 팔을 아래로 확 끌어당겼다. 세계는 곧장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곤 영하에게 끌려 한쪽 어깨를 아래로 내렸다.
“왜?”
“…그냥 집에 가자.”
“학교, 집 질리지도 않아? 오늘은 데이트하자.”
심장이 덜컹했다. 정욱이와는 고작해야 차 두 대 겨우 지날 수 있는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둔 상태였다. 그가 걱정이라는 걸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되는대로 입을 놀린다. 이정욱에겐 등을 지고 선 영하가 입술을 말아 다물며 짐짓 엄한 얼굴을 만들어 냈다. 입 닥치라는 의미였다.
“그래. 알아들었어.”
“진짜 알아들은 거 맞아?”
“그럼.”
시원한 대답에도 석연찮았다.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흘겨본 영하가 뒷걸음질 쳐 정욱에게로 다가갔다.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로 두 손을 가득 모았다.
“진짜, 진짜 미안. 도서관은 다음에 가야겠다. 아빠가 데리러 오셔서.”
“어쩔 수 없지. 다음에 가자. 다음 주 어때?”
“어. 날짜는 네가 정해. 미안. 나 가 볼게.”
이정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의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자 그가 어느새 조수석의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기에 가방을 벗으며 올라탔다. 차에 오르자마자 그가 조용히 문을 닫고는 운전석으로 넘어갔다.
새빨간 내부를 보니 어쩐지 질리는 기분이라 가방을 좁은 뒷자리에 내팽개쳤다. 지붕이 없으니 문을 닫아도 이건 차에 탄 기분이 아니었다. 여전히 최영하의 머리카락 위로 바람이 스치고 있었다.
지금은 학교에 학생들이 많은 시간이다. 근처를 걷는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자기주장이 넘치는 은색 오픈카에 닿아 있었다. 벌거벗은 기분에 영하가 투덜거렸다.
“뚜껑 못 닫아?”
“닫을 수 있어. 왜.”
“빨리 닫아 줘. 기분 이상해.”
영하가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한 블록 너머로 지나가는 무리들이 이쪽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야 대학에 이런 차를 끌고 오는 건…….
게다가 오픈카에 남자 둘이 앉아 있으니 더 기묘한 광경이다. 잔뜩 부끄러워진 최영하는 손으로 눈 위를 가리고 고개를 비틀었다. 느긋하게 앉아 시동을 거는 남자를 재촉하며 눈을 무릎으로 내리깐다. 정말 너무 부끄러워 심장이 사정없이 뛰었다.
“빨리, 빨리 뚜껑.”
“뚜껑이 아니라 톱이라는 거야. 소프트톱. 그러고 보니 면허는 언제 딸 거야.”
“모르겠어. …여름방학? 면허 따면 차 사 줄 거야?”
“생각해 보고. 근데 넌 어차피 겁이 많아서 운전 못 할 텐데.”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크면 다 알게 돼 있어.”
모르는 일이다. 겁이 많으니까 오히려 차도 위에서 안전 수칙을 준수하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될 수도 있는 일이잖아? 어찌 됐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빨리 톱인지 지붕인지 닫으라고!
급한 영하의 마음을 모르고 지붕도 느긋하게 닫혔다. 뒤에서 나타난 무언가가 스르륵 움직이다 툭, 하고 앞창과 맞닿았다. 그나마 얇은 지붕 하나 닫히니 조금 안심이 된다. 누가 볼세라 얼른 조수석 창문도 위로 올렸다.
“내가 카페에 있던 건 어떻게 알았어?”
“네 카드 내 거잖아. 휴대폰으로 사용 내역 문자로 오니까.”
“…설마 다 보는 거야?”
안 되는데…. 매일 오만 원씩 출금해야 하는데.
“가끔. 매일 보진 않고. 톱 다시 내리고 학교 한 바퀴 쭉 돌고 갈까?”
“뭐? 굳이 왜 그런 짓을 해?”
“너한테 돈 많은 애인 있다고 소문내고 싶어서.”
미쳤구나. 하긴 영하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잘 타지도 않던 오픈카를 끌고 데리러 오는 사람이 미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으, 술자리 안주 되기 싫거든.”
“순진하기는. 너는 이미 안줏거리야. 아예 거들떠도 못 보게 해야지.”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잠깐 차를 멈춰 세운 최세계가 예고 없이 몸을 당겨 입술을 겹쳤다. 무릎 위에 얌전히 올리고 있던 손이 놀라 꿈틀거렸다.
입술을 샅샅이 핥고 다물린 입술 사이를 혀로 톡, 건드려 결국 입 안을 벌려 주니 물컹한 혀끼리 얽혀 들었다.
최세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손을 뻗어 얇은 티셔츠 하나에 덮인 영하의 가슴을 크게 움켜쥔다. 얄팍한 살끼리 뭉쳐 소담한 둔덕을 만들어 냈다.
“우으응…!”
세계가 끌어모아 봉긋하게 만든 가슴살 중앙의 유두를 손톱으로 세게 긁어내자 옷 위의 자극으로도 영하의 온몸이 펄쩍 뛴다. 묵직한 차체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흐읏! 하고 영하가 허벅지를 좁히며 신음했다. 자기가 낸 소리에 놀라 가슴을 우악스럽게 쥐는 손을 잡아 밀어 보나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반대편 손마저 가슴을 움켜쥔다. 양쪽 가슴에 자극이 왔다. 그가 익숙한 손길로 영하의 유두를 압박했다.
“흐윽, 하지 마. 학교에서…!”
엄지가 뭉근하게 젖꼭지 바로 위를 눌러 둥글게 비벼진다. 뾰족하게 솟아오른 유두가 납작하게 내리눌리자 눈동자의 표면에 축축하게 습기가 차오르고 가슴의 자극으로 뒤쪽의 팬티 또한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면 쾌락에 약한 최영하는 얼마 가지 않아 엉덩이를 시트에 문지르며 넣어 달라고 애원하게 될 것이다. 절대 안 될 일이다. 정신이 박혀 있는 이상 야외에서, 거기다 학교에서는 미친 짓이었다. 눈만 굴려도 바로 옆에 학교 건물과 벚꽃이 진 벚나무 거리가 보였고 학생들이 드문드문 지나가고 있었다.
“아빠, 안 돼! 집 가서, 집 가서 해….”
“어차피 이 차는 높이가 낮아서 힘들어. 차를 잘못 골랐군. SUV로 타고 왔어야 했는데.”
집으로 가자고 했건만, 가볍게 대꾸한 최세계는 근방에서 제일 가까운 호텔로 향했다.
언젠가 영하가 빙수를 먹으러 간 호텔에서 만난 사람들과 똑같은 처지가 됐다. 대낮부터 섹스하러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줄을 선 사람들에게서 조금 멀어져 붉어진 뺨으로 티셔츠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좀 전에 세계가 가슴을 아프게 만져 댄 덕분이 유두가 바짝 섰다. 가만히 두면 티셔츠 위로 뾰족하게 솟아난 형태가 드러나 치욕스러웠다.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이러고 있다니… 변태가 따로 없다. 수치심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영하의 시선은 바닥에만 내리꽂혀 있다. 카드 키를 받고 돌아온 세계가 영하를 물끄러미 보더니 가볍게 이마를 때렸다.
“가자. 뭐 해.”
“부끄러워…….”
“부끄러운 것도 많네. 세상 살기 험하겠어.”
그가 건조하게 대꾸하며 영하를 엘리베이터로 잡아끌었다. 20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알 수 없는 흥분으로 숨이 가빠 왔다. 뒤가 왈칵 젖어 허벅지 아래로 물이 떨어지는 게 느껴져 두 다리를 모으곤 불안하게 좁은 엘리베이터 안을 눈으로 훑는다.
그와 호텔에 묵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두세 번 겪었지만, 모두 여행을 위한 단순 숙박이었다. 그 안에서 한 스킨십이라고는 가벼운 키스나 포옹뿐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침착하게 영하의 손목을 잡고 앞만 보던 세계는 호텔 방문을 열자마자 최영하를 우악스럽게 잡아 욕실로 끌었다. 당황한 영하가 그에게 끌려가고, 신발 두 짝이 현관을 넘어서서 겨우 벗겨졌다.
“흐으으!”
욕실 타일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티셔츠가 목에 걸려 길게 늘어나며 겨우 벗겨진다. 거칠게 단추를 풀어낸 세계는 곧장 영하를 욕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반구 형태의 타원 욕조에 콸콸 물을 받으며 그가 안으로 들어와 영하의 두 다리를 넓게 벌리게 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힌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쪽 벽은 투명한 통창으로 바깥의 환한 하늘과 빌딩의 풍경이 드러났다. 따뜻한 물이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위로 차오른다. 숨을 헐떡이며 그의 굳건한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아빠…….”
“내내 이러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둥그런 엉덩이 아래를 손으로 받쳐 조금 일으킨 그가 뾰족하게 서 있는 유두를 입에 담았다. 벗은 어깨의 살갗 위로 짧은 손톱이 박혀 든다. 조금 미간을 찌푸린 그가 혀 안에 톡톡 걸리는 유두를 혀끝으로 힘을 줘 내리눌렀다.
“으응.”
콧소리를 내며 어깨를 쥔 손이 그의 등을 훑고 나선 목과 머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두 손 위에 올라간 엉덩이가 미약하게 아래위로 움찔대며 스스로 움직인다. 말랑한 살결을 누르며 세계의 손가락이 엉덩잇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혼자서 젖은 아래를 몇 번 문지른 그가 몸을 내려 주며 말했다.
“빨아 주려고 했더니, 그럴 필요가 없었네.”
“응…….”
물이 점점 차오른다. 물의 표면을 손바닥으로 살살 건드린 영하가 위를 올려다본다. 욕실 천장에는 조명과 이어진 거울이 달려 있었다. 아이처럼 그의 다리 위에 앉아 마주 보고 몸을 겹친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비쳤다. 기분이 이상해….
“여기서 해?”
“하고 싶으면.”
“아니… 침대에서 할래.”
“흐음.”
대답이 썩 시원찮았다. 불안감에 재차 고개를 저었다. 세계는 말없이 엉덩이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곤 구멍 위를 세차게 문질렀다. 발등이 굽고 절로 몸이 안쪽으로 휘었다.
영하는 어깨 위로 뺨을 올리고 뜨끈하게 올라오는 수증기 속에서 숨을 헐떡였다. 정신이 몽롱하고 가물가물해졌다.
따뜻한 물을 떠올려 엉덩이골 위로 흘린 그가 구멍 안으로 손가락 두 개를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한참 좁아 들던 구멍이 갑자기 벌어져 몸이 파드득 튀었다.
“아윽… 흐읏… 아… 흑, 앗, 부드럽, 게에.”
“이렇게?”
“응. 응 천천히, 흑… 살살 해 줘… 뒤가, 흑, 아파…….”
어젯밤에도 구멍이 아파서 쉬고 싶다는 말을 했다. 세계는 알겠다는 대답 대신 오래도록 아래를 빨아 주었다. 침과 애액으로 범벅된 구멍이 안달 나 벌어진 채로 다물리지 않자 영하는 더는 아프다는 핑계를 댈 수 없었다. 그의 성기 앞에다 스스로 뒤를 내밀며 넣어 달라 애원했다.
손을 잡아 문 구멍의 내벽이 쫀득하게 손가락을 감으며 조여든다. 희미하게 미소 지은 그가 반대편 손을 뻗어 더듬으며 욕실에 비치된 샤워 어메너티를 들어 영하의 등 위로 샤워젤을 뿌렸다.
영하가 좋아하는 투명한 초록색 젤이 등 위로 주르륵 쏟아지고, 세계는 맨손으로 아들의 등을 문질렀다. 거품이 흰 피부 위로 생겨나며 동시에 힉, 히익, 하며 아랫구멍이 함께 옴죽거린다. 움츠리는 목덜미에 입 맞춘 그가 축축한 귓불을 혀로 핥고 나서 물었다.
“아까 그 키 큰 놈이랑은 왜 계속 같이 다니는 거지? 네 고등학교 친구는 어쩌고.”
“민재는, 바쁘고, 응…! 내… 보디가드용이야.”
“툭 치면 쓰러지겠던데 누굴 지켜.”
“그렇지 않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무슨 사인데.”
“그냥… 동기… 아흑, 읏, 아빠, 흑, 벌리지 마…….”
등에서 흘러내린 몽글몽글한 거품이 물 위로 툭툭 떨어진다. 어느새 수도꼭지에서 흐른 물이 영하의 꼬리뼈까지 차올랐다. 물속에서 찰박찰박 움직인 그가 손가락 두 개를 가위처럼 넓히자 구멍이 가로로 벌어졌다. 따뜻한 물이 배 속으로 들어올까 겁이 난 영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 찢어져….”
“더 큰 거 넣어도 안 찢어지는데, 찢어질 리가 없잖아.”
“아흑, 읏, 으응, 그만 만지고, 흑, 넣어 줘…….”
“예의 바르게 말해 봐.”
“아빠… 자지 넣어 주세요….”
“착하네.”
깔끔한 대답과 달리 그는 성기를 넣어 주지 않았다. 대신 샤워볼을 들어 거품을 묻혀 영하의 가슴을 집요하게 닦았다. 울며 그만하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게임을 하듯 즐거운 눈으로 아들의 몸 전체를 씻긴 후에야 영하의 몸을 안아 들었다.
얌전히 안긴 영하는 발이 닿은 곳이 침실이 아니라 거실임을 알고는 말간 얼굴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대충 닦은 머리카락 아래에서 뚝, 하고 느리게 물방울이 세계의 승모근 위로 떨어졌다.
뒤돌아보자 한쪽 벽면이 모두 세로로 길게 난 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는 높은 건물도 없어 시원하고 탁 트인 전망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소파도 반대편에 있었고, 이쪽에선 마땅히 앉거나 누워서 할 만한 가구가 없었다. 하다못해 러그도 없는 나무 바닥이었다. 바닥을 흘끗 내려다본 영하가 그의 손을 잡으며 이전에 그가 했던 이야기를 언급했다.
“바닥에서 하기 싫어….”
“무릎 아파서?”
영하는 고개만 끄덕였다. 무릎에 든 멍만 봐도 발기할 거란 그의 말이 무서웠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까 봐 겁이 난다. 이제 날이 따뜻해져서 반바지를 입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하.”
세계는 웃기만 하더니 곧 너른 창문 앞에 영하를 세웠다. 양 손바닥이 투명한 창문에 닿고, 엉덩이가 뒤로 빠진다.
바깥이 비치는 하얀색 얇은 리넨 커튼을 깨끗하게 걷은 그가 발긋한 엉덩이 사이에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올렸다. 핏대가 진하게 선 남근이 천천히 위아래로 골 사이를 왕복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보송보송해진 살갗에 미끈하고 두툼한 귀두가 문질러지는 감각을 몽롱하게 느끼던 영하가 곧 입술을 벌렸다. 자신은 창문 앞에 서서 유리창을 짚고 서 있었다.
“이, 이렇게 하자고?”
“매일 똑같은 섹스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아니, 난 재미있어!”
“너무 밝히는 거 아냐, 너?”
그가 시원하게 웃으며 영하의 엉덩잇살을 양쪽으로 잡아 벌렸다. 옅은 색깔의 구멍이 드러나고 곧이어 안에서 흐른 투명한 물방울이 천천히 벌어진 입구에 맺혀 들었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음란한 자태였다.
엉덩이골 위쪽을 혀로 핥으며 허벅지 안쪽의 야들야들한 살갗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말랑한 살결이 손가락에 꾹 눌려 옴폭하게 들어간다. 더운 숨을 뱉은 그가 참지 못하고 둥그런 엉덩이 위에 잇자국을 냈다.
불안한 얼굴로 눈부신 대낮의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던 영하가 헐떡이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침으로 젖은 입술이 벌어지고, 흐릿한 시선을 여러 번 감았다 떴다.
“이렇게, 하기 싫어….”
자신감 없고 여린 목소리를 낸다.
아직 대낮이었다. 햇살이 사방을 내리쬐고 있었고, 두꺼운 코팅이 된 호텔의 창문으로도 환한 빛과 뜨거운 태양열이 전해졌다.
영하의 마음은 알 생각도 없다는 듯이 뒤쪽에 손가락 하나가 삽입된다. 입술을 깨문 영하가 창 위로 올린 손을 고쳐 잡았다. 손등 위로 순진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핏줄이 불거졌다.
세계는 조용히 구멍을 늘이며 벌어진 항문 위 점막을 혀로 쓸었다. 야릇한 쾌감이 조금씩 몸을 잠식한다. 멀뚱하게 감았다 뜨는 눈동자가 축축이 젖어 들어가고 벌어진 입술도 헐떡이는 호흡이 흘렀다. 조금 허리를 뒤튼 영하는 이마를 창에 대고 스스로 가슴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풍경이 아름답다. 날이 맑고 높은 건물이 없어 멀리 한강의 줄기도 선명했고 바로 아래 호텔에 조경된 키가 크고 작은 나무들이 숲처럼 우거져 있었다. 만약에 그와 섹스하려는 불순한 의도 없이, 단지 휴식을 위해 이곳에 방문했다면 하염없이 즐거이 바라봤을 풍경이었다.
“아응!”
두 개의 손가락이 가로로 벌어진다. “그거 싫다고 했는데…!” 벌어진 구멍에서 찔끔찔끔 투명한 액이 뱉어지는 것을 확인한 그가 일어나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구멍 위로 문질렀다. 들어올 듯 느리게 귀두가 점막 위를 압박하자 영하는 오싹하게 돋는 소름에 몸을 떨었다.
섹스가 싫은 것이 아니다. 다만 이 고층에서, 창문을 바라보며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서 하지 마. 침대로, 침대…….”
“내내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그렇게 침대로 가고 싶어?”
웃음기 섞인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성기가 침입했다. 안을 메우는 빠듯한 질량감에 목이 뒤로 젖혀진다.
“응… 으응.”
신음인지 긍정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낮게 웃은 세계는 배와 허리를 한 번에 감싸 영하의 몸을 들어 올렸다.
저절로 발꿈치가 높이 올라간다. 둘 데 없는 손을 창문에 밀착하곤 흐느꼈다. 머리카락 아래 드러난 목을 혀로 핥아 올린 그가 척척한 목소리로 느리게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아빠한테 혼날 거야.”
“무슨, 나, 잘못한 거 없, 아…! 흐아앗…!”
퍽-!
그 순간 흉포한 성기가 안을 찢을 듯이 단숨에 파고들었다.
바로 선 몸이 휘청이며 뒤로 넘어가는 영하의 몸을 받아 든 그는 넓은 창에 손바닥을 대곤 푹, 위로 쑤셔 올렸다.
“흐아악! 아빠아!”
도망치려 해도 몸통과 손이 그에게 붙잡혔다. 굵은 것이 안을 밀고 와 내벽을 잔뜩 긁으며 전립선을 그대로 쿡 찔렀다.
“흐응, 악, 아흥―!”
예고도 없이 찾아온 쾌락에 자지러지는 영하의 하체가 두꺼운 자지에 완전히 꿰뚫린 채 위아래로 튀었다. 통통한 엉덩이에 닿은 그의 사타구니가 계속해서 영하의 몸을 위쪽으로 쳐올려 괴롭힌다.
세계와 키 차이가 제법 나는 덕분에, 영하는 이 자세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뒤꿈치를 들고 서야만 했다.
발가락과 발바닥 끝에 하얗게 힘이 들어가고 연신 종아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발을 낮추면 자세 유지가 불가능할뿐더러, 조금 남은 그의 자지 뿌리마저 안으로 처박힐 테다. 영하는 결장이 꿰뚫리면 고통과 맞닿은 열락에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편이었다.
항문 안쪽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감각에 최영하가 울음 섞인 교성을 뱉으며 창문 위로 제 가슴을 문질렀다.
바짝 선 돌기가 습기가 닿은 유리창에 짓눌리며 천천히 미끄러진다. 속눈썹이 눈물로 푹 젖어 무거워졌다.
“아빠, 아빠아…! 으응, 앗, 흐으, 아읏, 으응…!”
그야말로 온몸이 결박된 기분이었다. 압도적인 피지컬 차이에서 오는 근력과 위압감에 옴짝달싹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고작해야 유리 한 장이 영하를 버텨 내는 중이다. 발끝부터 조마조마한 두려움이 치솟았다.
고개를 돌려 뺨을 창가에 대고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리려 했으나, 눈을 돌려도 보이는 건 바깥 풍경뿐이다.
아찔한 공포심에 온몸이 조여들고 피가 말라 손끝부터 저릿해지는 기분이었으나 그렇기에 영하는 전에 느끼지 못한 감각에 휘둘렸다.
“흐, 으, 흑, 좋아아….”
“벌주는 건데, 좋아하면 안 되는데.”
창문 위로 올린 손가락의 손톱 끝이 희게 변한다.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가 흐릿해지고 신음과 함께 울음이 섞여 들었다.
“남자들이랑 대화도 하지 말랬잖아.”
“그게, 응, 현실적으로, 불가, 느… 아흥, 흣, 무서워…!”
“무서우라고 하는 거야. 다리에 힘 확실히 주고 버텨.”
치켜든 까치발이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그가 위로 몸을 쳐올렸다. 끄흐… 울음 섞인 숨을 뱉으며 허겁지겁 발꿈치를 든다.
쿵쿵 박아 댈 때마다 몸이 붕 뜨는 기분에 더해 눈앞의 하늘이 아찔하다. 고소공포증이 없었는데 지금 생길 지경이었다. 더는 아름다운 풍경이 마음에 고요히 와닿지 않는다.
영하는 젖은 눈꺼풀을 감고 헐떡였다. 두꺼운 성기가 연신 내벽을 벌리며 안을 찔러 댄다. 떨어질 듯한 공포심과 뒤로 느끼는 자극이 동시에 영하의 몸 안에서 치솟았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것은 화학작용이다. 뇌의 쾌락 중추가 형성되어 도파민이 전달되면 인간은 자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앞뒤 분간이 힘들었고 다리에 힘을 주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아, 아빠…….”
끝까지 박아 넣은 그가 결장 부근을 쿵- 찔렀다. 어제는 거기까진 안 넣었는데…….
관계 초반에 끝까지 넣어 달란 객기와 달리 이제 영하는 굳이 그곳에 넣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걸 알았다. 입구를 열어 굽은 곳을 억지로 펴며 거기까지 성기를 파묻지 않아도, 부근만 찔러 주면 구멍 안쪽이 잔뜩 저리고 부었으며 발기한 성기 끝에서 멀건 액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는 이번엔 끝까지 넣을 생각이었다. 두툼한 남근을 빼낸 그가 여러 번 안쪽으로 강하게 치받는다. 창문에 몸을 기댄 영하가 교성을 내질렀다.
바들바들 떨리는 두 다리가 애써 몸을 지탱한다. 눈을 돌리자마자 아찔한 아래의 풍경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난다. 그 순간, 세계가 자세를 고쳐 배려 없이 안을 파고들자 꽉 다물린 안쪽이 뻐끔 열려 그 안으로 세계의 단단한 남근이 조급하게 밀려왔다.
“아아아! 흣, 아윽…!”
“하아…… 우리 영하 효자잖아.”
그가 빠듯하게 자신의 성기 전체를 감싸는 아래를 느끼며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애액으로 뒤덮인 것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샅을 적셨고 아들의 두 허벅지가 창문에 콩콩 부딪혔다.
낯 뜨거운 발언에 눈을 질끈 감으며 아래를 조인 영하의 울음소리가 짙어졌다.
“무서워, 흐, 무섭, 떨어지겠어, 제발, 너무, 세게 하지 마…….”
“알아? 이게 보디가드라는 자세야.”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안 들린다. 영하는 추락의 공포에 벗어날 수 없었고, 아래로 떨어지는 상상에 어지럽고 괴로웠다. 이제 아름다운 풍경은 찌를 듯한 공포심만 새길 뿐이었다. 몸 전체가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머리가 몽롱해진다. “우윽, 흐, 흐아….” 숨을 가쁘게 들이마시며 흐느꼈다.
세계는 전혀 봐주지 않고 거칠게 허리를 흔들었다. 안쪽을 꽝꽝 찧어 대는 성기가 연신 전립선을 자극했다.
성기가 발기하지도 않았는데 영하는 잔뜩 느꼈다. 무섭다고 울면서도 에서 오는 쾌감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미 결장까지 열어 그를 받아 냈으면서도 더 넣어 달라 조르고 싶었다.
아찔한 풍경에 차마 앞을 보지 못해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연이어 입 맞춘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핥고 삼키듯 문질렀다.
“우으응, 응….”
영하의 성기는 추락의 상상으로 인해 풀이 죽었지만, 항문은 여전히 옴쭉거리며 그를 받아들였다. 아들의 물로 흥건해진 세계의 단단한 근육으로 짜인 허벅지가 무자비한 속도로 영하의 몸뚱이를 쳐댔다.
뒤에서 느껴지는 둔통과 이리저리 흔들리는 몸에 시달리던 영하는 결국 눈을 떠 다시금 창밖을 보곤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난폭하게 굴고 있다. 그가 섹스할 때는 다정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 경험해 알고 있었지만 유리창 하나를 두고 이러면 정말 곤란했다.
이대로 창문이 깨져 버리면 어떡해…….
힘들어 까치발을 조금 내리자, 성기가 더욱 깊숙이 안을 파고들었다. 아픈 곳까지 들어갈 것 같아 놀란 마음에 허겁지겁 다시 발끝을 올린다. 바짝 힘을 주었더니 매끈한 종아리에 사선으로 근육이 솟아올랐다.
“흐으으… 아! 으응, 읏! 제발… 제발 이러지 마… 무섭, 무서워, 아빠, 제발…!”
“잘못했어, 안 했어.”
“잘못했, 아흑, 앙…! 흑…… 하으, 응, 우응, 흐아….”
“신음 소리하고는… 하아….”
나른한 숨을 뱉은 세계가 영하의 한쪽 허벅지 아래를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몸이 기우뚱하자 놀란 영하는 손바닥으로 유리창을 급하게 짚었다. 눈을 뜨자마자 기울어진 시선 안에 고층의 시티 뷰가 펼쳐진다. 높다란 풍경에 싸늘한 한기가 느껴질 만큼 등골이 오싹했다.
영하는 되는대로 지껄였다. 빨리 창가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용서를 빌며 그에게 애원했다.
“잘못했, 흑, 아빠, 잘못했어요. 싫어요! 흐윽… 무서워, 떨어질 거 같단 말이야!”
“남자들이랑 안 어울린다고 약속하면.”
“나도 남자인데 어떻게, 흐으응…!”
“네 눈엔 남자밖에 안 들어오잖아.”
“그런 말, 으흐, 하지 마. 나 그렇게에… 아…!”
말대꾸에 찡그린 그는 한쪽 다리로는 못 버티겠는지 정처 없이 흔들리는 영하의 양쪽 허벅지를 잡고는 몸 전체를 들어 올렸다. 공중에 몸이 붕 뜨고 시야가 더 위로 올라갔다.
영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을 멈춘다. 심장이 가쁘게 뛰고 눈을 둘 곳이 없었다. 막연한 두려움이 목구멍을 조여 조금 빠져나간 성기가 쿵 안으로 치받을 때야 “헉, 허억-!” 하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발갛게 물든 가슴이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흐, 흐으으, 아빠아, 내려 줘, 내려 주세요…!”
창밖을 보고 싶지 않아 애써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쪽에서 자신의 온몸을 들어 올려 박아 대는 세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깨끗하게 비어 있는 8인용 식탁 위에 시선을 두던 영하는 창문 위로 손을 더듬으며 울음을 삼켰다. 양발이 허공에 떠 달랑거렸고 키가 한참 큰 그와 눈높이가 거의 비슷해졌다.
바들바들 떠는 어깨를 강하게 깨문 세계가 거칠게 몸을 위아래로 쳐올렸다. 단단한 성기가 몸의 무게로 더욱 깊숙이 들어온다. 귀두가 결장 입구에 완전히 파고 들어갔다. 정확히는 몰라도, 너무 깊게 들어왔다는 직감만은 확실하게 들었다.
“으으응! 아… 흐, 흐으윽, 아흐으…….”
너무 힘들어…. 그에게 단지 몸이 공중에 들렸을 뿐인데도 평소에 하던 섹스보다 체력과 기력의 소모가 심하다.
와중에 엉덩이 아래를 받친 세계의 손이 움직이더니 성기로 가득 차 팽팽해진 구멍 위를 더듬었다. 점막이 성기와 함께 파묻혀 엉치뼈 위를 덮은 흰 살갗을 둥그렇게 매만진다.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던 영하는 곧 구멍을 벌리고 들어오는 손가락 하나에 놀라 몸을 퍼덕였다. 눈물로 어룽한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안, 흑, 안 싫, 어, 우응, 손가락, 넣….”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춤하던 검지가 틈새를 어떻게든 비집고 안으로 들어온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벌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손목을 잡아당겨 빼려고 했으나, 오히려 손가락 두 마디까지 안으로 침투했다.
“싫어! 흑, 찢어, 져 안, 흐윽, 아빠, 안 돼요, 찢어져. 그만…!”
“대답해.”
구멍이 그간의 한계 이상으로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의 성기를 받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굵은 손가락을 받아들이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
울먹인 영하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용서를 구했다. 통증은 없었으나 두려움에 턱이 바들바들 떨리고 눈물이 뺨 위로 흘렀다.
“잘못했, 아빠 잘못했어요… 잘못했, 흐으… 무서워요, 제발, 응, 안 할게, 아무것도, 아, 응, 흑.”
손가락으로 빈틈이 생긴 구멍 속에서 뜨끈한 애액이 줄줄 흘러 세계의 손등을 타고 적셔 내렸다. 항문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손가락이 내벽을 더듬듯 움직이고 손가락을 휘었다. 그 모든 것이 절절하게 느껴져 허공에 들린 발가락이 잔뜩 곱아든다.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리고 눈의 초점이 완전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앞이 새까맣게 잠겨 잠시 빛을 잃은 영하는 힘이 빠지는 몸을 애써 추스르고 손가락과 아버지의 성기가 들어간 구멍을 조였다 풀며 울먹였다. 항문의 점막이 저릿저릿해도 상상만큼 아프진 않아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든다. 세계가 허리를 고쳐 안고는 손가락 하나를 기어코 끝까지 밀어 넣었다.
“아흑…….”
“아파?”
“모르겠어. 흐, 흑… 으응……. 아빠…….”
“확실히 학교 가는 아침엔 섹스를 안 하는 편이 좋겠어.”
그가 손가락을 삽입한 채로 조금씩 앞뒤로 움직인다. 영하가 곧장 자지러지며 허리를 튕겼다. 가슴팍까지 발갛게 달아올라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젖은 입술을 달싹이던 영하는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며 그의 성기를 가득 품어 낸다. 허벅지 안쪽이 파들파들 떨려 곧 절정에 다다를 것을 예감했다.
“아윽…!”
“하아… 읏…. 야한 얼굴로 등교시켜 봤자 남 보기 좋은 꼴이지.”
“흐, 손, 가락, 흐, 아빠, 흐, 손가락 빼….”
“좋아서 아빠 자지 끊을 듯이 조이면서 말은.”
무서운데…….
하지만 영하는 그의 성기와 손가락이 제 안에 동시에 들어왔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중추를 가로지르는 지독한 쾌감을 느꼈다. 더 확실한 쾌락을 위해 스스로 몸을 움직이자 그가 들어 올린 몸뚱이를 단단히 조여 안으며 손가락을 박은 채로 추삽질한다. 달라붙은 영하의 등 너머로 세계의 팽팽한 가슴 근육이 몰아치듯 움직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완전히 벌어진 구멍이 홧홧할만큼 뜨거웠다. 세계는 평소보다 훨씬 조이는 감각에 연신 더운 숨을 터뜨렸다. 눈가를 세게 찌푸린 채 성기를 느리게 빼내며 내벽의 감촉을 느꼈다.
“으응, 아흐윽, 흐… 흐아아! 우응, 어떡, 어떡하…!”
동시에 양가감정이 들었다. 극악으로 몰아붙여진 이 감각을 그대로 느끼고 싶어 그가 손가락을 빼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과 이대로 계속 섹스를 하다간 뒤가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양면적인 생각이 영하를 사로잡았다.
“으윽…!”
손가락을 빼내자 뒷구멍이 벌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듯 곧장 강하게 조여들었다.
세계가 잇새를 깨물며 신음하더니 곧 안쪽 깊이 콰앙―! 격렬하게 박아 넣은 성기가 많은 양의 정액을 세차게 쏟아 냈다.
엉덩이에 바짝 붙은 탄탄한 허벅지와 사타구니가 전율하며 떨렸다. 연결된 영하의 몸도 파들파들 떨리고, 한참을 쏟아 낸 성기가 빠져나오자마자 안쪽에 고여 있던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높게 든 발꿈치 아래까지 흥건한 애액이 떨어져 바닥에 물방울이 맺혔다.
“아… 흣, 흐아…….”
영하는 허벅지를 덜덜 떨며 경련했다. 바들바들 떠는 아들을 고쳐 안은 세계는 거실을 넘어 침대로 데려와 조심스레 몸을 눕혔다.
그는 꼴사납게 벌어진 하얀 허벅지 위에 입술을 반복적으로 내리눌렀다. 눈만 하염없이 끔뻑이던 영하가 힘없이 입술을 연다. 나오는 소리라곤 온통 신음이었다.
“흐으응, 흐, 흐윽….”
“우리 토끼. 오늘은 오래 버텼네.”
섹스 후 나른한 음성을 뱉으며 흐느끼는 영하의 가슴을 빨고 풀이 죽은 성기가 서도록 다시 만져 준다. 구멍이 뻐끔대며 안쪽에 싸 둔 정액을 천천히 시트 위로 뱉어냈다. 세계가 흐른 정액을 걷어 다시 안쪽에 밀어 넣었다.
아래의 감각에도 영하는 몽롱한 눈만 스르륵 굴려 그를 응시했다. 세계는 후련한 얼굴이었다. 땀으로 젖은 구릿빛 몸체가 밝은 햇살에 닿아 번들거렸다. 너른 어깨와 굴곡이 뚜렷한 가슴 근육을 눈으로 훑어본 영하가 눈꺼풀을 끔뻑였다. 아치 형태로 길게 난 속눈썹이 함께 팔랑거린다.
“영하 잘못했지.”
“네에…….”
머릿속으론 그가 완전히 억지라는 것을 알지만 또 창밖에 대고 박을까 봐 무서워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 바로 옆도 통창이었다. 다시는 창에다 얼굴을 대고 섹스하고 싶지는 않다. 없던 고소공포증이 생기는 줄 알았다.
얌전한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미소를 띤 세계가 아들의 온몸에 잇자국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 마.”
목에는 하지 말라고 하자, 아예 쇄골에서부터 목덜미까지 자국을 낸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온통 벌겋게 물들었다.
아까부터 내내 무섭게 군 게 밉고 야속해 영하도 있는 힘껏 세계의 몸을 거칠게 당겨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오른쪽 쇄골 위쪽에 벌건 잇자국이 났는데도 세계는 뭐가 좋은지 소리 내어 웃었다.
목을 깨물고 지쳐 침대에 누운 영하는 화가 났다. 고작 남자들이랑 대화했다고 나를 혼내다니. 말도 안 되는 억지였으며 단순 강압적인 플레이가 하고 싶어 그런 것이 분명했다. 아직도 허공에 추락할 것 같은 그 붕 뜬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잠깐의 휴식을 통해 힘이 돌아오자마자 짜증이 치밀어 베개를 주먹으로 퍽퍽 쳐 대다가 일어났다. 바닥에 닿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어린 기린처럼 비틀대고 있었다.
“내 티셔츠…!”
알몸으로 눈밭에 떠밀린 사람처럼 바들바들 떨며 복도로 향했다. 목적은 벗어 둔 옷이었다. 펼쳐 보니 그가 거세게 잡아당겨 벗기는 바람에 목이 잔뜩 늘어났다. 영하가 제법 아끼는 티셔츠였다.
재작년에 나온 거라 올해는 안 팔 텐데…….
바닥에 주저앉아 티셔츠를 바라보던 영하가 도끼 눈을 뜨고 세계를 쏘아봤다. 그는 샤워 가운을 걸친 채로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우아하게 룸서비스 책자를 넘겨 보고 있었다.
“배고프지. 뭐 시킬까. 힘을 쓰셨으니 완도산 전복삼계탕, 이거 먹여야 하나.”
또 한식 타령.
날 괴롭혀 놓고선 뻔뻔하게…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뒤통수를 노렸다.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최세계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와인 살까? 웰컴 기프트는 드라이라서 네가 못 마실 것 같은데. 모스카토 같은 거로 하나 주문할까.”
책자에 눈을 고정한 채로 영하에게 묻는다. 영하는 대답하지 않고 그가 어딘가 벗어 던졌을 셔츠를 찾아 바닥을 기었다. 역시나 욕실 문 뒤에 던져져 있었다. 잡아 펼쳐 보니 위쪽만 풀어 급하게 벗었는지 아래쪽 단추 세 개는 여전히 잠가져 있었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셔츠를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첫 번째 단추 하나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투둑- 하고 뜯겨 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아쉬워 다시 한번 힘주어 팍팍 잡아당기던 때였다.
최영하가 대답 없이 조용하자, 사고 치는 강아지를 예견한 주인처럼 최세계가 슬며시 욕실 앞 복도로 다가왔다. 사태 파악을 마친 눈이 크게 뜨였다. 영하가 본 아빠의 눈 중에서 가장 컸다.
“너…!”
“내 티셔츠의 복수야.”
“하여간 저 성질머리… 버릇없기는 너만 한 아들도 세상에 없을 거야.”
“아빠 닮아서 그래.”
얼이 빠진 한숨에도 콧방귀를 뀐 영하가 그를 지나쳐 소파에 내려 둔 룸서비스 책자를 집어 들었다.
삼계탕은 무슨. 아저씨같이.
소파에 두 다리를 올리고 앉아 다리 사이에 책자를 두고 펼쳤다. 한참을 시달린 엉덩이가 아려 눈 사이를 좁히면서도 검지로 하나하나 짚으며 메뉴를 확인한다. 비싼 거로 시켜야지.
“아저씨랑 만나면 여름에 계곡 가서 능이백숙 먹어야 한대.”
“계곡 가고 싶다는 건가?”
“아니. 아빠가 아저씨란 의미지. 호텔 와서 삼계탕 시키려고 하잖아. 무드 없이.”
“호텔이 뭐가 특별하다고. 이런 데 오면 꼭 고기에 칼질해야 해? 그리고 내가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체력이 달리는 아들에게 먹이려는 거지.”
아저씨라는 말에 부인하지 않은 그가 곧장 소파로 다가와 굳이 영하의 몸째로 안아 들어 허벅지 위에 앉혔다. 몸을 웅크린 영하는 눈만 굴려 그를 바라본다.
오늘은 내내 짜증 좀 부릴까 했는데, 얼굴 보니 화난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매번 얼굴 보고 화가 풀리면 내 손해였다. 아빠는 서른여섯이라도 이렇게 잘생겼으니 사십이 넘어도 여전할 텐데.
영하의 다리 사이에서 책자를 집어 든 그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친다. 촘촘한 속눈썹 아래 그윽한 눈길을 느낀 영하가 세계의 목을 끌어안고 어리광을 부렸다. 안으로 말려드는 목소리를 내며 그의 뺨에다 자신의 뺨을 갖다 대었다.
“삼계탕 말고 햄버거 먹을래.”
“장어 들어 있는 거로 먹어.”
“정력 증진 필요 없다니까.”
본인이야말로 점심시간에 전복과 장어만 먹는 것 아닌가? 떠올려 보니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라 접었다. 가볍게 하품하며 몸을 기댄 영하가 실없이 책자를 넘기며 말했다.
“남자 동기들이랑 말도 하지 말라는 거 진심이야? 그냥 해 본 말이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 봐.”
“그게 어떻게 가능해. 날 정말 아싸로 만들 거야? 혹시… 애들 괴롭히거나 그러면 안 돼. 정욱이도.”
덧붙인 이정욱의 이름에 그의 미간이 구겨진다. 아까 섹스할 때 화내던 게 정욱이 때문인가? 왜 이정욱을 견제하지? 이런 말은 조금 곤란하지만, 이정욱이 한참 모자라는데…….
“해 보지도 않고 어떻게 장담해? 안 괴롭혀.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대학생 괴롭힐 맛도 안 나. 그리고, 내가 학교 찾아갈 일 만들지 말고 조용히 수업만 듣고 집에 와.”
“그건 이미 그러고 있잖아. 매일 집만 간다고 이제 애들이 나랑 안 놀아 줄 기세야.”
오토바이 교통사고 핑계도 하루 이틀이지. 남자들의 놀이 코스란 당구, 술집, 피시방이 대부분이다. 영하가 운동에 취미가 있었더라면 축구나 스케이트, 볼링 정도가 추가될 수 있었겠으나 안타깝게도 최영하는 그런 것들에 정을 붙일 수가 없었다.
피시방에서도 남들 하는 게임이나 구경하는 게 전부였다. 친구들과 함께 온라인 게임을 켜서 대전하면, 부모님 안부와 함께 채팅으로 말싸움이 시작된다. 나중에는 그냥 속 편하게 레이싱 게임이나 했다. 속도 게임전에서 영하는 꽤 실력자였다.
“잘됐네.”
책자를 넘겨 와인 페이지를 내려다보며 그가 대답했다. 억양에 미묘한 웃음기가 깃들어 자존심이 퍽 상했다. 가운 속으로 손을 넣어 단단한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니 편안했던 얼굴이 콱 구겨져 그제야 영하의 기분도 풀렸다.
*
“덥지도 않냐. 이 날씨에 무슨 목티를 입냐.”
“…원래 더울 때 덥게 입어야 멋있는 거야.”
“멋있긴 개뿔, 그냥 멍청한 놈 같은데.”
햇빛 아래 인상을 찡그린 민재가 신랄한 악담을 퍼부었다. 주근깨가 난 민재의 뺨 위에 손가락으로 만든 그늘이 길게 늘어난다. 반대편 손에는 두께가 두꺼운 전공 서적이 들려 있었다.
손으로 가릴 게 아니라 저걸로 그림자를 가리면 될 텐데.
굳이 조언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날씨 파악도 못 하고 집을 나온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은 영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목에 최세계가 낸 자국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기에 평범한 티셔츠를 입고는 도저히 현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다. 자꾸 신경이 쓰여 목폴라 안으로 손을 넣어 자국이 난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은 도서관을 막 나온 참이었고 영하는 대부분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차피 성적은 포기했다. 아빠도 대충 하라고 했으니까 B+만 나와도 감지덕지로 생각해야지.
영하와 달리 까만색 반소매 티셔츠에 얇은 청바지를 입은 민재는 초췌한 얼굴이었다. 수능 치기 일주일 전보다 더 퀭했다.
먼저 내려가는 계단을 밟은 정욱이 뒤돌아보며 물었다.
“민재, 너 가르치는 애 몇 살이라고?”
“고1. 겁나 까불어, 진짜.”
“너랑 잘 맞겠네.”
“잘 맞기는 무슨…. 수업하는데 자꾸 헛소리가 너무 많아. 그래도 공부는 꽤 하는 것 같더라. 덕분에 내가 모르는 거 물어볼까 봐 수능 칠 때처럼 공부한다니까.”
끄덕이며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미약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간다. 바람을 느낀 영하는 슬그머니 주변을 살폈다. 커다란 눈동자가 도서관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며칠 전, 세계가 말도 없이 데리러 온 후로 예기치 않게 또 그가 등장할까 봐 잔뜩 예민해졌다. 앞으론 꼭 연락하고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제발 데리러 올 거면 좀 얌전하게 하고 왔으면 좋겠어. 뭘 그렇게 자길 자랑하고 싶을까? 멋지다는 이야기는 살면서 질리도록 들었을 텐데도…….
어디선가 아빠가 튀어나올지 몰라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술 마시러 가자. 야.”
“술 금지야. 나 금주하기로 했다고.”
“야, 오토바이 그건 사고잖아. 원래 아픈 건 알코올로 소독해야 해.”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하네. 난 안 마셔. 둘이서 마시든가.”
“술은 최소 셋이서 마셔야지. 재미없게…. 아, 며칠 만에 쉬는 시간인데 그냥 집 가긴 싫은데.”
당분간은 술을 안 마신다. 술 때문이 아니라 약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만 술자리는 모두 피하고 싶었다.
“안 돼. 난 집 갈 거야.”
“야, 최영하. 너무 빼지 마. 스무 살에 이러고 놀지 언제 이러고 노냐?”
민재가 손을 뻗어 앞서 나가는 영하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신축성이 좋은 티셔츠가 주욱 늘어났다. 목이 드러날까 놀라 늘어나는 옷을 따라 뒷걸음질 쳤다.
민재 녀석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1학년이니까 생각 없이 놀지, 몇 살 더 먹으면 철없이 놀 시간도 없다. 하지만… 아직은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입술 끝을 당기며 다시 고개를 젓자 민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우울한 몸짓으로 흐느적흐느적 걸었다.
“아무튼, 다음에 놀자.”
“매번 다음이지.”
어지간히 바로 집에 가기 싫은 모양이었다. 등딱지만큼 커다란 백팩을 메고 어기적어기적 걷는 뒷모습을 보며 따라 걷는데, 아까부터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정욱이 영하의 팔을 붙잡으며 경직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강아지 근처 산책 중이라는데, 보고 갈래?”
당연히 강아지를 거부할 순 없다. 덩달아 집에 가기 싫은 민재도 함께 정욱이네의 ‘초코’를 맞이하러 따라갔다.
초코는 조그마한 토이 푸들이고, 초코라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초콜릿색의 갈색 푸들이 아닌, 어쩐지 배신감이 느껴지는 실버 푸들이었다.
영하는 이미 동영상으로 한 번 봤으니 어떻게 보면 구면이었으나 민재는 실물을 보곤 ‘에엑, 초코라며?’ 하고 쪼그려 앉아 초코와 눈을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는 민재가 아닌 정욱에게 향해 있었다. 역시나 주인을 알아본다. 그사이 영하는 초코를 만지고 싶어 안달복달이었다.
일단 처음에는, 처음에는 몸을 작게 하고 손을 천천히 코에다 뻗어서 냄새를 맡게 해야 해. 얌전해지면 그때 만져야 하잖아.
“너 강아지 진짜 좋아하나 보구나.”
“네, 저 강아지도 좋아하고 고양이도 좋아하고요. 하늘다람쥐도 좋아해요.”
떨리는 손길이 부들부들 코앞에 닿았다. 초코의 하네스 줄을 잡은 정욱의 누나 이해인의 물음이었다.
영하는 어젯밤 잠들기 전에 본 하늘다람쥐 영상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곧 영하의 깨끗한 손바닥에 까만 콩을 대고 킁킁 냄새를 맡은 초코의 눈동자가 영하에게 닿았다. 물끄러미 영하를 올려다보는 순수한 눈동자가 깜빡이더니, 날름 손바닥을 한 번 핥고 뒷걸음질 쳤다.
“귀여워.”
말랑한 혀가 스쳐 지나간 감촉도 간지럽다. 너무 귀여워. 용기 내 까만 코를 검지로 건드려 보자, 초코가 고개를 팩하니 돌렸다.
“난 좀 앉아야겠다.”
아래를 내려다본 해인이 바로 뒤에 있는 벤치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녀의 신발 위에 엉덩이를 대고 따라 앉은 초코가 영하를 올려다보다가 오른쪽 발을 슬며시 들어 올리자 조그마한 발이 허공에 나부꼈다. 영하가 얼른 손바닥을 내밀자 손 위로 손톱보다 조금 더 큰 발이 안착한다.
어떻게 이렇게 조그마한 발이 움직이지…?
민재도 영하의 옆에 붙어 앉아 초코를 구경했다. 매일 보는 사이이니 정욱은 굳이 강아지에게 다가가지 않고 누나의 옆에 공간을 두고 앉았다. 정욱의 시선이 영하의 둥그런 뒤통수에 향해 있었다.
“오늘 왜 회사 안 가고 집에 있어? 잘렸어?”
“쉬는 날이야. 오늘 쉰다고 어제 종일 기사를 몇 개나 쓴 줄 알아? 자그마치 오십 개야. 온갖 커뮤니티랑 SNS마다 돌아다녀서 캡처하고 복사 붙여 넣기 하고… 이게 기자냐 커뮤니티 헤비 업로더냐.”
그녀가 손에 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둥글게 흔들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내고는 다리를 꼬았다. 초코의 등을 쓰다듬던 영하가 그 이야기에 고개를 돌렸다.
맞아. 저분과도 구면이다. 오티 술집에서 만난 기억이 있다. 터프한 정욱이의 누나. 언론학과였으니 기자로 취직을 했구나.
“누나 기자세요?”
물은 것은 영하가 아니라 민재였다. 초코에게서 관심이 사그라든 민재가 기계적으로 초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 얼마 안 됐어. 인턴이야. 그러면 뭐 하냐. 기자 되면 밤낮 안 가리고 취재할 줄 알았는데 인턴은 아니야. 포털에서 남의 기사 긁어 가지고 수정만 조금 하고 내 바이라인 붙여서 하루에 수십 개 복사 붙여넣기가 일인데.”
“그래도 기자, 멋있는데요. 저도 고등학생 때까진 기자가 꿈이었는데, 성적 때문에 언론학과 못 들어갔잖아요.”
“과는 별로 상관없으니까 준비해 봐, 지금이라도. 나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 기자가 꿈이었는데, 들어와 보니 그러려면 최소 이십 년은 여기에 붙박여 있어야겠어. 들어와 보니 연예부 기자는 기자 취급도 안 해 줘. 세상을 바꾸려면 정치나 사회부로 가야 하는데. 언제 가겠어.”
꿈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매너리즘에 잔뜩 얽매여 지친 듯 보였다. 다만 아직 이루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가진 열정과 배포가 영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누나, 통이 크시네요. 어디를 바꾸고 싶으신데요?”
“내가 졸업 기사로 재벌 파헤치는 기사를 썼거든. 그쪽이 내 전문이지.”
“오.”
재벌 이야기에 조금 움츠러들었다. 영하가 움찔하자 초코가 반들반들한 눈동자로 올려다본다. 다시 희미하게 웃으며 쓰다듬어 주니 입이 헥헥 벌어지고 귀여운 혓바닥이 드러났다.
민재는 이해인의 이야기가 재미있는지 쪼그려 앉은 허리를 펴고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 면접에 관해 물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초코의 귀를 매만진 영하는 잠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최영하가 이루고 싶은 것이라곤 아빠의 옆에서 평생 살고 싶다거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뿐이었다. 누군가 들으면 한심해할 만한 꿈이다. 얼마 전 아빠가 졸업하면 뭘 할 건지 물어본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 떠오르자 괜스레 초라하기 짝이 없는 존재가 된 듯해 마음 한쪽이 시큰해졌다.
“다리 안 아파?”
초코의 코끝을 툭 건드릴 때쯤, 가만히 앉아만 있던 정욱이 영하에게 물었다. 다리가 조금 저리긴 하지만 버틸 만하다. 고개만 끄덕이곤 초코의 조그마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영하의 시야 너머 조금 떨어진 거리에 까만 승용차 한 대가 있었다. 얼마 전부터 따라다니던 차.
“언젠간 내가 꼭 사회부로 간다. 그때가 되면 너한테도 후기를 말해 줄게.”
이해인이 당차게 말하며 눈길을 내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긴 목폴라 티셔츠로 온몸을 가린 영하가 조그마하게 몸을 말고 있었다.
*
이따금 마른기침과 조용히 의자를 끄는 소리만 들린다. 옆자리 남자가 책을 챙겨 가방에 넣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람실에 앉은 이정욱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문제집을 펼치기만 한 채 겨우 네 문제 풀었다. 5번을 여섯 번째 반복해서 읽는 중이었다.
볼펜을 빙그르르 돌리고 뻑뻑한 눈을 깊게 감았다 뜨더니, 잠깐 눈만 붙이겠다며 옆자리에 엎드린 영하의 마른 등 위로 시선을 올렸다. 눈매가 길고 홍채가 아주 새카만 눈동자가 영하의 척추뼈에서 도드라진 날개뼈 위로 향했다.
‘최세계한테 아들이 있긴 한데 아직 고등학생일걸. 확실히 너보단 어렸어.’
‘그러면… 숨겨 둔 아들?’
‘굳이? 최세계 미혼이야. 지금 아들도 혼외자인데 뭐 하러 숨겨. 이미 아들 딸린 총각인데도 평가 나쁘지 않은데 숨길 이유가 있나?’
며칠 전 정욱은 누나에게 영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비밀을 엄수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한 것이다.
학교의 카페 앞에서 본 최영하의 ‘아버지’는 누가 봐도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은 나이와는 관계없이, 마치 애인을 에스코트하는 듯한 그 남자의 태도와 아버지를 상대한다기엔 지나칠 만큼 나긋나긋하게 굴던 영하의 모습이 그들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백화점에서 목격한 그날부터, 이정욱은 그 남자가 영하의 아빠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아빠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일까. 그 남자와 영하의 관계를 떠올리며 곱씹을 때마다 극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갑고 가느다란 뱀이 맨살을 휘감고 몸을 올라타는 기분이었다.
불편한 기분으로 집에 도착한 이정욱은 그날 당일, 집에서 그 남자를 다시 목격했다. 8시 저녁 뉴스가 흐르는 TV 화면에서였다.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어두운 실내, 단상 앞에 선 남자가 마이크에 대고 무언가 이야기 중이었다. 잠깐 전체 화면을 잡은 풀샷이 이어지다 곧이어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기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모드 글로벌의 섬유, 석유 화학 계열사인 모드 머터리얼이 최근 산화아연과 그래핀 섬유를 케미컬 소재와 물리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친환경 신소재 섬유를 개발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최세계 상무이사는 ESG 경영의 일환으로 친환경과 재활용 섬유 사업을 대폭 확대 예정이며 글로벌 트렌드…….]
‘얼굴은 여전히 미쳤네. 저런 남자가 결혼은 언제 하나 몰라.’
소파에 안짱다리를 하고 앉아 초코의 등에 손을 올린 이해인이 육포를 한쪽으로 씹으며 이야기했다. 초코는 고개를 한껏 치들고 그녀의 입에 있는 육포만 바라보고 있었다. 소파 아래에서 늦은 저녁 식사를 하던 정욱이 다급하게 물 잔을 들어 입 안에 든 것을 넘기고 뒤돌았다.
‘누나 저 남자 알아?’
이해인은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포츠카를 끌고 온 것을 봐서 돈이 많은 남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재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상대인 줄은 몰랐다.
한참을 숟가락을 내린 채 생각에 잠겼던 정욱이 누나에게 영하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15분이 지난 뒤였다.
무료한 듯 잠긴 눈으로 뉴스의 채널을 돌려 드라마를 보던 이해인의 얼굴이 이야기를 들을수록 생기가 가득 차올랐다. 초코를 품 안에 안고 다리를 모은 그녀가 채널을 돌리며 가볍게 답을 끌어냈다.
‘간단해. 원조 교제지. 스폰서.’
‘……뭐라고?’
‘너 의외로 순진하네? 그런 짓에서 제일 흔한 호칭이 뭔지 알아? 아빠야. 오빠도 아니고. 아빠.’
‘영하 그런 애 아니거든.’
이정욱이 반사적으로 영하를 옹호했다. 영하는 착하고 순진한 녀석이다. 그런 지저분한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돈 때문에 나이 많은 남자와 만나는 데다 그 남자를 아빠라고 부른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불편함에 눈 끝을 찡그리고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가슴이 괴롭도록 울렁거렸다. 백화점에서 목격한 모습이 날씨를 알려 주는 기상 캐스터 위로 겹쳐졌다. 깍지 낀 손. 같은 침대 쓰는 사이.
‘네가 믿기 싫으면 어쩔 수 없는데 내가 보기엔 이건 뻔해. 아무리 좋게 쳐줘도 네 친구가 최세계 애인인 건데 애인더러 아빠라고 부르진 않지. 게다가 진짜 아들이라고 쳐도 걔 아르바이트 구하고 있었다며. 무슨 재벌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냐. 말 같은 소리를 해. ‘
‘…….’
‘엄마 아빠 평범한 변호사인 내 친구도 카드 받아 쓰지, 아르바이트 안 하거든. 뭐, 최세계가 누굴 돈 주고 만난다는 건 좀 어불성설이긴 한데 그렇다고 잘난 남자가 룸살롱 안 가는 것도 아니니까. 좀 재밌네.’
‘아니라고.’
회상에서 빠져나온 정욱은 뻐근한 고개를 바로 펴며 눈꺼풀 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눈알을 내리누르는 압력과 함께 마음이 복잡한 게 느껴졌다.
누나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 남자와 영하의 관계…….
겨우 시선을 돌린 것이 무색하게 정욱은 곧바로 잠든 영하의 모습을 돌아보곤 숨을 삼켰다. 그의 두 눈은 흔적이 모두 사라진 영하의 뒷덜미에 향해 있었다.
초코를 보여 준 그날.
민재가 옷을 당겨 드러난 영하의 목덜미에서 붉은 자국들을 발견했다. 그런 자국들의 의미를 모를 만큼 이정욱은 순진하지 않았고, 못내 불쾌했다. 열이 끓어오르고 정체 모를 화가 그 안에 소용돌이쳤다.
영하에게 애인이란 존재가 있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이나 그 상대가, 그리고 그 자국을 낸 장본인이 그 남자라면…….
스폰서.
돈이 필요한 영하.
어쩌면 영하는 도움이 절실한 걸 수도 있다.
자의로 시작한 것이 아닐 수도 있었고, 돈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이정욱 안의 최영하란 사람은 유약하고 어리숙하며 순진하기만 한 아이였다. 그런 녀석이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남자와 자의로 만났을 리가 없다.
한참을 쥐고 있어 뜨끈해진 펜을 고쳐 잡으며, 이정욱은 뒤틀린 생각을 붙잡을 고삐를 완전히 놓쳤다.
영하는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걸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누군가가 자신일지도 모른다.
3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