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얕은 행복
서리를 안은 북풍이 연신 창문을 때렸다. 얄팍하게 열린 창문의 좁은 틈새로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와 누군가 짜증스럽게 창문을 닫았다. 이내 바람이 멎은 교실은 고요해지고, 피부에 닿는 공기가 텁텁했다. 히터를 한참 틀어 둔 탓에 영하의 두 뺨이 부끄럽게도 다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 3학년의 교실은 다들 게으른 얼굴로 시간을 허비하는 중이었다. 시계 분침의 궤적이 그 어느 때보다 느렸다. 아이들은 시간을 죽이는 것도 대단한 고역이라는 걸 요 몇 주간 깨닫고 있다. 최영하도 마찬가지였다.
가늘고 긴 촘촘한 속눈썹이 아래로 늘어진다. 어젯밤 꿈을 돌이켜보고 있으니 무거운 눈꺼풀이 자꾸 감기는데 손등을 꼬집으며 참아 보려 해도 도저히 식곤증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졸리면 자야지. 아직 아기니까.’
피아노 건반의 낮은 음계를 두드리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방금 전 들린 것처럼 떠올랐다.
가끔 그는 영하를 아기 취급 했다. 다른 가족들이 보는 데서 번쩍번쩍 들어 올려 안고 다니거나, 애기야, 라거나 아기. 하고 부르기도 했다.
그가 그럴 때마다 부끄럽고 가족들 보기 민망해서 싫었는데, 왜 지금 그 생각이 떠오르는 걸까.
확실히 잠이 오긴 하나 보다. 이미 반쯤 감긴 눈으로 적막한 교실 안을 둘러본다. 수능 만점을 받았다는 녀석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독종도 이겨 내기 힘든 시간이다.
‘다른 애들도 자는데 나도 잠깐만 잘까. 딱 10분만…….’
정말 잠깐 잠들었다고 했는데,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통에 찡그리며 허리를 들었다.
오른쪽으로 꺾인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잤다. 졸음이 덜 가신 얼굴을 문지르고 가까스로 눈을 떠 보니 흐릿한 시선 너머 다소 당황한 음성이 들렸다.
“뭐야… 기가 막히게 생겼네.”
중얼거리는 선생님의 말씀에 깨어 있던 애들의 웃음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조용하던 교실이 단숨에 시끄러워져 조금 정신이 든 영하는 자다 깨서 어리벙벙한 얼굴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정작 선생님은 영하의 사과에 관심 없는 모양이었다. 뒷자리 여자애와 대화를 나누느라 여념 없었다.
“쌤, 최영하 처음 봤어요?”
“나야 일 학년 담임이니까 삼 학년 건물에는 올 일이 없지. 아니, 자길래 깨웠는데 뭐 이리 이쁘장한 놈이 나와 깜짝 놀랐네.”
몽롱한 정신이지만 창피했다. 빨개진 귀를 숨기려고 귓바퀴를 만지작거렸다. 민망해 고개를 떨어뜨리니 앞머리가 눈 위를 스치고, 새카만 속눈썹 아래로 그늘이 졌다.
일자로 쭉 뻗은 코끝은 버선처럼 동그랗게 올라갔고 완만하게 곡선을 이룬 흰 뺨에 히터의 열기로 홍조가 돌아 영락없는 미인이었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어쩌지 못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뽀오얗네. 우리 아들이랑 딴판이야. 고놈 자식은 그냥 시커먼 곰 같은데.”
관심받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허리를 숙여 얼굴을 보는 열의까지 드러내는 선생님 때문에, 나중에는 조금 짜증이 치밀어 속으로 한숨을 집어삼켰다.
영하는 저에게 쏠린 선생님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기를 기다리며 샤프를 쥐고 의미 없이 영어 단어 위를 따라 그렸다. 외워지지 않았다.
집에서 붙여 주는 과외를 했으니 학업을 멀리하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큰 열의도 없었다. 그사이 영하는 손목시계로 계속해서 시간을 확인했다.
세 시에는 마친다. 그리고 세 시에는…. 아빠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
*
학교가 언덕배기에 위치한 건 학생들의 운동 부족을 어떻게든 만회하려는 의도 같았다. 등교할 땐 허벅지가 불타는 듯해 불편했고 내려올 땐 몸이 기우뚱해 넘어질까 무서웠다.
마음이 조급한 나머지 영하는 길 외곽에 인도용으로 만들어 둔 계단을 무시하고 퇴근하는 선생님들의 차량과 함께 내리막길로 뛰었다.
세 시 오 분.
늦으면 버리고 가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영하는 혹시나 늦을까 싶어 전력을 다해 뛰었다.
멀리서 그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교차로의 한 교복 판매점의 간판이 보일 때쯤 속도를 늦춘다. 헉헉 숨소리가 절로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가슴을 두드리며 신호등의 불이 들어올 때까지 숨을 천천히 골랐다.
하으으… 가늘게 신음하며 가쁜 숨소리가 차분하게 잦아들길 바랐다.
뛰어왔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조심 좀 하라고 잔소리하는 것을 듣기도 싫었지만, 집을 나오던 순간부터 내내 이 시간을 기다렸다는 모습을 숨기고 싶었다.
건널목의 파란불을 기다리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넘기곤 가방도 고쳐 멘다. 영하는 천천히 숨을 뱉어 본다. 운동이라고는 학교 체육 시간이 아니면 머릿속으로 상상조차 하지 않는 인간이라 고작 3분 뛰었다고 요동을 치는 심장박동과 호흡이 돌아오질 않았다.
뛰었다는 거, 들키고 싶지 않은데….
기다리고 있던 건널목의 신호등이 들어와 길을 건너는 순간마저, 영하의 시선은 초록색 교복 전문점 간판 앞에 선 까만색 차체에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남자를 상상했다.
그러자 마치, 꼭 영하가 꽁지 빠지도록 뛰어와 내내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는 것처럼 뒷좌석의 문이 열리고 어두운 에메랄드 컬러의 롱 코트를 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차 안에서 한참 접혀 있던 몸을 꼿꼿하게 세우자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더 큰 남자였다.
차분하게 일어난 남자가 곧 횡단보도를 완전히 건넌 영하와 눈이 마주쳤다. 손을 흔드는 제스처 따위 없이 그는 또 다른 건널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영하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바꾼 지 오래된 낡은 간판과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유려한 자동차.
자신과 같은 교복을 입고 지나가는 아이들.
그 사이에 선 아빠의 모습이 꼭 꿈같아서 영하는 머뭇거렸다. 자신이 그간 꿈꿔 왔던 것들의 결말처럼, 조금만 움직이면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아서.
학교 앞에 올 땐 마스크 썼으면 좋겠는데, 또 안 썼네.
하긴 잘난 얼굴을 최대한 많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위인이니까.
아무리 눈이 좋아도 반대편에서 내가 삐치는 게 보이진 않겠지. 아랫입술을 깨문 영하는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뛰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학교에 너무 가까이 오지 말랬잖아.”
“도보 오 분 거리면 됐지, 어디까지 가. 집 앞에서 기다려? 일부러 제일 평범한 차로 끌고 왔잖아.”
“그래도 애들이 보는 것 같아.”
“눈이 달려 있으면 날 안 볼 수가 없지. 신경 쓰지 마. 기사라고는 연예인 열애설 아니면 보지도 않을 놈들인데.”
본인 손으로 차 문을 열어 본 경험이 극히 드물었을 남자가 우아한 손길로 차 문을 직접 열어 준다.
“일단 타.”
기다림이 무료했는지 올려다본 아빠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작은 배려에도 기분이 좋아 영하는 입술을 양 끝으로 당겨 웃었다. 강아지처럼 처진 눈매 위로 해사한 기색이 내려앉았다.
차에 올라타자 곧바로 따라 착석한 남자의 손길이 뺨에 닿았다. 매서운 바람을 가르고 달려왔으니 홍조가 서린 뺨은 보기와 다르게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얼굴을 감싸는 커다란 손바닥이 그곳에 닿으면, 살을 에는 저릿한 통증과 함께 얼어붙은 살갗이 녹아내렸다.
영하에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죄책감이 자신을 찔러대지만, 그의 곁에 있으면 겨울의 추위가 버겁지 않다. 이런 식으로 매달릴 수 있으니 오히려 기꺼웠다.
영하는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은 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다 큰 아이의 어리광이 둘 다 익숙했다. 허리를 감은 세계의 손이 아들의 엉덩이 아래를 받쳐 가볍게 자신의 무릎 위에 안착시켰다.
이어 더운 호흡도 그의 관자놀이에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마저 들릴 만큼 아주 긴밀한 접촉이었다. 영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아빠, 오늘 처음 본 선생님이… 나보고 예쁘다고 했어.”
“누가. 남자야?”
“응. 남자.”
“하.”
흐르는 목소리가 꼭 어깨에 소리 소문 없이 자리 잡은 눈송이처럼 나긋하다. 영하는 기분이 좋을 때면 톡 쏘는 말 대신 사근사근한 말투로 그를 대했다.
“그런 말을 한두 번 들은 것도 아닐 텐데, 굳이?”
“자주 못 들어. 보통은 남자들한테 그런 말 안 하거든.”
“자꾸 널 보통이라든가 일반적이라든가 하는 말에 포함하려고 하는데 반쯤은 내가 기여한 얼굴이야. 평범한 카테고리에 집어넣으려야 넣을 수가 없다고.”
그의 눈이 영하의 얼굴 곳곳을 샅샅이 훑어본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차창 밖의 풍경이 비친다. 영하는 저를 칭찬한다기보단 자아도취에 가까운 말을 듣고는 눈썹을 찡그리며 짜증스레 이마를 구겼다.
“아무튼, 예쁘다는 이야기는 거의 아빠만 한다고.”
“예쁜 걸 예뻐하는데 무슨 상관이야. 나 말고 다른 놈들이 하면 상관이 생기긴 하는데.”
아, 그런 의미였구나. 굳이 남자냐고 물어본 건 단순한 질투였다.
기분 좋아. 속으로 웃음 지으며 손을 뒤로 뻗었다. 몸 여기저기를 더듬기 시작하자,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참은 것도 잠시. 이내 손목을 붙잡으며 행동을 저지한다. 상관없다. 어차피 손잡으려는 의도였으니까.
건반을 치듯 검지와 중지를 살금살금 움직여 손등을 만지고 길게 뻗은 손가락을 건드렸다. 울퉁불퉁한 뼈대 없이 매끈하고 기다란 손가락. 다시 손등을 만진다. 툭 불거진 핏줄의 존재가 피부로 느껴졌다.
영하에게도 비슷한 것이 있다. 손등과 팔뚝으로 이어지는 초록색 핏줄. 마치 그와 연결된 핏줄과 유전처럼. 비슷한 것.
잠시 생각에 빠지려던 찰나 그가 등을 안아 당기며 말했다.
“곧 있으면 졸업하면서 어리광은.”
타박하지만 억양이나 목소리는 자상했다. 이 남자의 다정함이 좋았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허락된 권리라 더 달콤했다. 영하는 취한 듯이 조용히 웃으며 품으로 좀 더 파고들었다.
제 몸이 더 작아져, 아빠에게 영원한 아이로 남고 싶다는 충동이 슬쩍 머리를 내밀었다.
*
학교는 일부러 먼 곳을 선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하는 숨겨진 아들이었고, 그 본분을 다하려면 이웃집 아이들과 마주치지도 말아야 했다.
열네 살. 이름 앞에 최씨가 아닌 다른 성을 달고 살던 그때.
평생의 꿈이던 미국행을 결심한 엄마에게 영하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생사도 모르던 아버지에게 맡겨지는 것뿐이었다.
‘몇 년만 같이 살아.’
엄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또한 열네 살은 입 밖에 내지 않은 속내를 알 나이이기도 했다. 엄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영하는 앞으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빠와 함께 살아야 한다.
‘아주 부잣집이야. 네가 하고 싶은 건 다 할 수 있을 거야. 엄마랑 살 때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 또한 알았다. 그렇게 어화둥둥 해 줄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영하가 엄마와 이렇게 살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이렇게 외로이 내버려 뒀을 리가 없다. 분명 어쩔 수 없이 나를 데려가는 거겠지.
엄마의 말에도 사실은 있었다. 아버지는 소위 말하는 재벌가의 사람이었다.
짧은 인생을 살며 처음으로 부촌에 발을 들였다. 모든 집마다 담장이 재산의 척도라도 되는 것처럼 단단하고 높게 둘러싸여 있었고, 길거리에는 아무렇게나 주차된 차도, 지저분하게 버려진 담배꽁초와 쓰레기도 없었다.
이런 곳이 존재할 수 있었구나. 감탄하기엔 일렀다. 아빠의 집 대문을 열자 상상만 했던 저택이 눈 안에 들어왔다.
너른 정원을 넘어서면 유럽풍과 현대적 양식을 매치해 건축한 두 건물이 하나의 복도를 두고 이어져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뻥 뚫린 듯한 높다란 층고, 사방으로 시원하게 뻗은 큰 창.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그 커다란 저택에서 어린 영하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의아하게도 건물의 한 귀퉁이였다.
오래된 느티나무에 연결된 줄 조명이 운동회에서 봤던 만국기처럼 늘어지고, 아래에 바비큐 그릴과 파라솔이 달린 야외 테이블이 있는 공간.
절로 꿈이 생기는 곳이었다.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저택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영하는 발이 묶인 것처럼 파라솔 앞에 서서 몽롱한 시선으로 그 위에 자신을 대입했다. 얼굴도 보지 못한 아빠와 새로운 가족들. 그들과 함께 크게 웃으며 바비큐 파티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쩌면 제게 떨어진 재산과 신분 상승보다도 더 달콤한 기대감이었다.
다만 꿈이라는 것은 원래 쉽게 저무는 법이다. 일찍 철이 든 영하는 아빠의 집에서 그런 바비큐 파티 따위를 할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챘다.
영하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두 명의 고모와 할머니, 할아버지는 영하에게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게 역력했고, 미묘하게 불편해하는 기색도 숨기질 않았다.
겹친 해외 출장으로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아버지에게는 심지어 이미 아들이 있었다. 자신보다 두 살 어린 남자아이였다.
“이제 와 보내다니 애 엄마도 낯짝 두껍지.”
“세계 그 자식은 대체 어릴 때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고모들이 하는 대화에서 영하는 아버지 이름이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 몫으로 주어진 방 안에 들어가 그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어 본다. 특이한 이름이었다.
그런 이름을 가진 남자는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영하는 어릴 적부터 종종 아빠를 상상했다. 눈이 나처럼 클까. 코는 어떻게 생기고 피부색은 어떨까. 살집이 있을까, 없을까.
엄마는 단 한 번도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적 없으니 혼자서 상상력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고모들도 모두 키가 큰 편이니, 아마 영하의 아빠도 키가 클 것이다.
영하 또한 키가 큰 편이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나 키 순서로 서면 늘 끝자리에 서곤 했다.
아빠를 닮은 건가 봐.
그게 영하에게 미묘한 행복을 가져다줬다. 앞으로 같이 살아야 하는 사람이니, 닮은 점을 조금이나마 찾고 싶다. 그래야 아빠에게서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3대가 사는 대가족이었지만 영하는 온종일 누군가와 대화를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외로움이 조금씩 발끝부터 자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영하는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대부분은 발레 학원 강사였던 엄마의 옆에서 늦은 밤까지 발레를 했던 기억이었지만, 여섯 살, 함께 기차를 타고 여행했던 기억이 깊게 남아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 이런 저택은 필요 없다. 매일 한숨을 쉬고 돈 이야기를 해도 좋으니 엄마의 곁에 있고 싶어 가끔은 늦은 밤 눈시울을 붉혔다.
그가 없는 한 달.
두 살 어린 동생인 승준이는 굉장히 낯을 가리는 어린이였다. 말을 걸어도 대답이 거의 없어 친해질 수 있을까 앞날이 막막하던 시기에서 조금 벗어났다. 한두 마디씩 대답해 주기 시작할 즈음에, 그가 도착했다.
네 아버지가 도착했다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영하는 정신없이 뛰어 현관 앞에 섰다.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 집에서 본인은 이방인이다. 한 달간 애써 노력했지만 아직 그 누구의 마음도 잡지 못했다. 아버지의 마음까지 잡지 못한다면 어쩌면 죽을 때까지 가족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세계 너는 애 왔다는데도 빨리 오질 않고.”
“하던 일 마무리부터 하느라 어쩔 수 없었어요.”
한 달 넘게 못 본 가족의 인사는 그게 다였다.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두껍진 않았고, 부드러운 말투에는 무게감 또한 느껴졌다. 영하는 이어 제게 따라붙은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숙여 조용히 인사했다.
짧은 손톱으로 손가락 살점을 꾹꾹 짓누른다. 입술을 말아 다물다가 발끝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음이 너무 불안해 어쩔 수가 없었다.
낯선 남자는 옆에 선 사용인에게 코트를 넘겨주며 대뜸 물었다.
“이름은?”
“영하요…. 김…영하.”
“……이 집에 들어오면 김이 아니라 최씨지. …고개 들어 봐.”
고개를 들기도 전에 손이 먼저 다가와 영하의 턱을 잡아당긴다. 갑자기 붙잡힌 턱이 아파 시선을 올려 눈을 마주치는 순간, 벼락에라도 맞은 듯한 충격이 온몸을 지배했다.
영하의 눈꺼풀이 가련하게 파르르 떨렸다. 눈높이가 한참이나 위에 있어 목을 뒤로 꺾어야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는 카라바지오의 그림 같은 사내였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존재를 그림 속에서 현실로 끌어온 것 같았으며 흑과 백의 대비가 뚜렷한 남자였지만, 영하의 눈에서는 그는 어둠이 더 깊어 보였다.
시커멓기만 한 블랙이 아니라, 아름다운 펄이 무수히 흩뿌려진 듯한 우주의 어둠처럼.
남자의 깊은 아이홀이 만든 그늘에 자리 잡은 아몬드형 눈매가 가늘게 좁혀진다. 뚜렷한 입술 산과 목울대가 툭 튀어나온 탄탄한 목선. 공들여 만들었을 것이 분명한 어깨의 형태와 두꺼운 가슴팍이 흰 와이셔츠 아래로 여실히 드러났다.
생애 본 적도 없던 남자. 폭이 좁은 나이프로 유화 물감을 오랜 시간 촘촘히 쌓은 듯한 입체감이 있는 그림 같은 미남자였다. 영하의 상상 속에서 존재하던 푸근한 아빠의 모습이 아니다. 지나치게 젊고 아름답고…… 무서웠다.
그 강렬한 아름다움이 머릿속을 흐리멍덩하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다문 입을 벌리며 바라보자, 그의 선명한 입술 끝이 희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잠깐 동안 시선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이 위압감이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층고의 거실을 가득 메우는 공기로도 알 수 있다. 그는 이 집안의 제일 꼭대기에 위치해 있으며 또한 가장 중심에 있다는 것을.
그는 절대 쳐 낼 수 없는 주석이었다.
*
낮잠을 잤는데도 막상 소파에 다리를 펴고 앉으니 졸음이 쏟아진다. 집에 도착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빠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작은 거실이 보인다. 문 바로 건너편에 느티나무를 비추는 정사각형 창문이 있었다. 평소에 잘 보지 않는 TV와 안마 의자, 등받이가 없는 소파가 있는 거실을 지나 문을 하나 열면 그제야 서재가 나왔다.
커튼을 쳐 둔 탓에 거실보다 훨씬 어두웠다. 차분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서재는 올 때마다 늘 잠이 쏟아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눈이 편하지만, 몸도 함께 노곤해진다. 영하로서는 도통 공부에 집중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는 복도와 서재를 구분하는 벽에 붙여 둔 고동색 가죽 소파에 앉아 태블릿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느슨하게 허리를 대고 앉아 소파의 방석 밖으로 긴 다리가 한참 삐져나갔다.
영하는 조용히 그 옆의 카우치에 두 다리를 뻗고 자리 잡았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 휴대폰 밝기를 최저로 내리고 인터넷을 잠깐 하다가, 역시나 수면제를 뿌려 둔 듯한 서재의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며 아빠의 어깨에 뺨을 대었다.
책을 읽는 줄 알았는데 회사 서류 양식을 읽고 있다. 제대로 읽기나 하는 건지 성의 없이 스크롤을 내려 몇 번 터치하더니, 곧 화면 하단에 그의 이름이 나타났다.
최세계.
본인에게 맞춘 듯한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워낙 가진 것도 타고난 것도 많은 그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했고, 지금은 영하의 세계에서 유일한 사람이라 그랬다.
“졸리면 자.”
서명을 마친 세계는 태블릿을 내려 두곤 어깨에 기댄 영하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첫 만남, 차갑게 고개를 들어 보라던 그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별로 안 자고 싶은데.
간신히 얻은 시간이었다. 그는 근래 일이 바쁜지 도통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 퇴근하니 영하와는 생활 패턴이 겹칠 일이 요원했다.
이 커다란 집에서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라곤 그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뿐이었는데…….
잠을 깨기 위해 어깨에 눈을 비비자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허공에 뜬다.
“잘 거면 침대 가서 자.”
“싫어. 안 잘 거야.”
으름장을 놓은 영하는 카우치에 다리를 쪼그리곤 아빠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절대 안 잘 거야. 눈 또랑또랑하게 뜨고 있을 거라고.
“그러든가.”
“이따 저녁 뭐 먹을 거야?”
“저녁 약속 있어. 나가서 먹을 거야.”
영하가 큰 눈을 깜빡인다. 무슨 뜻이지. 나랑 나가서 먹는다는 건가.
“어디?”
“만날 사람 있어서. 나갈 거야. 오늘 늦어.”
“그래서 오늘 일찍 퇴근한 거야?”
“겸사겸사. 너 데려다주면서. 요새 삐쳐서 말도 안 듣는데 한 번씩 데려다줘야지.”
세계는 길게 꼰 다리를 고쳐 앉더니 성의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며 영하의 머리를 밀어냈다. 순순히 물러나 줬지만, 영하는 불만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도 없이 제방으로 돌아갔다.
고작 한 시간 있어 줄 거였으면서…….
늘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지.
*
저녁 식사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큰고모 부부와 동생 승준이 함께했다. 약속이 있다던 최세계와 막내 고모 최지아를 제외한 이 집 가족들이었다.
결혼한 지 오 년째인데 아이는 언제 가질 거냐는 큰고모 부부를 향한 잔소리를 배경 삼아 영하는 묵묵히 식사했다. 승준이는 저보다 더 말이 없는 녀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겨울이란 계절을 좋아했지만 눈이 내릴 때쯤이면 침엽수 외의 정원의 모든 식물들이 색을 잃는 것이 안타까웠다.
영하는 회색빛이 된 잔디 위를 한참 걷다가 방으로 향하는 길에 승준을 만났다.
이복형제. 같은 집에 살며 매일 보는 사이지만 남보다 못한 사이라 한 달에 두어 번 서로에게 궁금한 게 있으면 묻는 게 다인 그런 사이. 이번에도 역시나 눈만 마주치곤 스쳐 지나갔다.
방 문고리를 잡는 찰나. 귓가에 ‘세계’라는 단어 하나가 들린다. 천천히 뒷걸음질 쳐 허리가 난간에 닿을 때쯤 멈췄다. 2층 복도에서 내려다보면 바로 1층 거실이 훤히 들어왔다.
얼마 전 행정부장관 사모님에게 선물 받았다는 난의 이파리를 손수건으로 닦는 할머니와 그 맞은편에 습관처럼 리모컨을 돌리는 고모가 보였다. 영하는 고개를 조금 더 숙여, 귀를 기울였다.
큰고모가 시큰둥한 시선을 TV로 두며 말했다.
“세계 걘 오늘은 뭐 한다고 안 들어와? 일찍 퇴근했으면서.”
“언제는 행선지 말하고 나가는 거 봤어? 약속 있겠지, 뭐.”
“무슨 약속이겠어. 그냥 또 여자 만나는 거지.”
“여자를 만나기만 하지 말고, 결혼이나 좀 하지! 이십 대도 아닌데 언제까지 결혼도 안 하고 있으려고.”
조심스레 난을 닦던 손이 가슴을 쿵쿵 내리친다. 한이 맺혀 못 살겠다는 듯 할머니는 반복해서 이야기했다. 회색 먼지가 묻은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동시에 난간 앞에 선 영하가 “힉.”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대화의 주제는 계속 세계였다.
“그래도 회장직 받을 때 되면 알아서 결혼할걸. 걔도 회사 일은 열심히 하잖아.”
“그럼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회장직을 덜컥 주니? 못해도 마흔은 넘어야 할 텐데 그때 장가를 들어? 아니면 결혼을 한 달 만에 뚝딱 하게?”
“걱정하지 마, 엄마. 걘 마음먹으면 일주일 안에도 할 거야.”
흥분해 빠르게 말을 이어 가는 할머니를 다독이며 큰고모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 가벼운 말에 마음이 미어지는 것은 영하였다. 애써 눈을 깜빡이고 떨리는 손을 감싸 보아도 흔들리는 심장과 저려 오는 근육마저 어찌하지는 못한다. 그가 자리를 비워 홀로 남은 밤. 외로움이란 어둠이 자욱하게 앉은 2층에서 영하는 침묵했다.
“가족들 기겁하는 건 안중에도 없으니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내 배로 낳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
거기까지 듣고 방으로 들어왔다. 외투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의 잠금 화면을 켜 보니 열한 시. 다섯 시에 나간 아빠는 아직도 들어오질 않았다.
*
갑자기 눈이 떠졌다.
네 시. 낮잠을 많이 자서 그런지 내내 선잠을 자다 깼다. 분명히 자긴 잤는데, 온갖 꿈이 뒤섞여서 잔 것 같지도 않았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아래로 내려가려던 영하는 문득 멈춰 선다. 시선이 복도 안쪽에 있는 방문으로 향했다.
식당까지 가는 거 너무 귀찮아. 멀고, 잠이 덜 깬 상태로 내려가다간 넘어질 수도 있잖아.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둘러댔다. 어두컴컴한 2층 복도를 걸어간 영하는 노크 없이 조용히 문을 연다. 아빠의 거실에는 가끔 냉장고의 냉각기가 돌아가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그 적막함에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목적이었던 냉장고를 지나쳐 서재 문을 열었다.
역시나 조용하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컴컴한 와중에 반대편 벽, 침실로 향하는 길목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내디뎠을 때였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 해.”
“히익……!”
인기척 하나 없이 뒤에서 불쑥 나타난 세계가 영하의 손을 붙잡았다. 놀란 마음에 뻣뻣하게 몸이 굳어 말을 듣지 않았다. 주먹을 세게 움켜쥔 영하는 한 템포 느리게 반응했다.
“무,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모습이다. 세계는 정신을 못 차리는 아들을 보고서는 한쪽 눈가를 찡그리곤 영하의 등을 천천히 문질렀다.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숨 쉬어.”
“헉, 허억, 깜짝이야……!”
“안 자고 뭐 해.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아빠야말로 이 시간에 안 자고…….”
숨을 참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내쉬라는 말에 밭은 숨을 뱉었다. 여러 번 숨을 고르던 영하는 순진한 질문을 한 것을 깨닫고는 입을 굳게 다물더니 세계를 향해 고개를 살짝 내밀어 본다. 굳이 코를 가까이 대어 맡지 않아도 향수 냄새가 영하에게로 흘러왔다.
“이제 들어왔어. 내일 학교 안 가?”
“…….”
“내일 안 가는 날이던가.”
“아빠는 내일 출근 안 해? 왜 이제 들어와.”
“빨리 자야지. 너…….”
대답도 듣기도 전에 영하는 먼저 자리를 옮겼다. 더는 듣고 싶지도 않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목마름도 잊고서 그대로 그를 지나쳐 방으로 돌아왔다. 무작정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으니,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여섯 번의 발걸음 소리. 그리고 머리에 닿는 손.
문이 열리자마자 예민하게 기척을 감지하던 영하는 다가오는 손이 제게 닿기 전에 얼른 쳐 냈다.
“만지지 마.”
“또 왜 이럴까.”
“싫으니까 만지지 마.”
피곤하다는 뉘앙스. 아들의 건방진 행동에 별말 없이 손을 내린 그는 잘 거라는 말에도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잘 거야. 가.”
벽 쪽으로 몸을 돌리고 베개에 머리를 푹 파묻는다. 이불도 목 끝까지 덮고 숨을 죽이자,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영하는 입술을 앙다물곤 몸을 웅크렸다.
아빠가 여자를 만난 날에는 꼭 향수 냄새가 났다. 평소에 향수나 디퓨저 같은 인공적인 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럴 때마다 매번 티가 났다.
며칠 전 통화를 하다 조금 짜증을 냈다. 보고 싶은데 자꾸만 시간이 엇갈리니 함께 있던 기억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투덜대는 목소리에 웃은 그는, 조만간 낮에 시간을 비워 둘 테니 데리러 가겠다고 대답했다.
얼마나 기뻤는지……. 답답한 이 집에서 숨통을 터 주는 건 오로지 최세계뿐이다. 아빠뿐이었다.
근데 고작 한 시간 같이 있어 주고 여자를 만나러 간다니.
생각해 보면 이달 내내 바빴던 것도 일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누군가와 교제하느라 늦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서운함과 억울함에 속이 상해 끙끙댄다. 잦은 야근과 연장 근무에 아빠의 건강 걱정을 했던 것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급기야 눈동자가 젖어 든다.
일단 인지하자 눈물이 그칠 수도 없게 흘러내렸다. 젖어 든 베개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엎드려 울음을 그치려고 애쓰는데 문이 열렸다. 영하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매트리스가 한쪽으로 쏠리는 것으로 그가 침대에 걸터앉았다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머리카락에 닿는 손끝이 촉촉하다. 물기가 어린 손에서는 그가 매일 사용하는 샤워젤의 약한 향만 겨우 감돌았다.
가만히 아들의 머리를 뒤로 넘겨 주던 그는, 숨을 꾹 참아 내다 그사이에 흘린 훌쩍이는 소리를 듣곤 움직임을 멈췄다. 이윽고 물기가 다 가시지 않은 육체가 영하의 몸 위를 타고 올랐다.
“윽, 무거워. 내려가….”
앙칼지게 손을 쳐 내더니, 영하는 그사이 기가 많이 죽었다. 머리카락을 걷어 보니 얼굴에 눈물 자국이 흥건했다. 혀를 찬 세계가 부은 눈꺼풀과 눈물이 지나간 뺨 위로 천천히 입 맞췄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어린애같이 굴까.”
늦은 밤. 그에게 비슷한 말을 하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울지 마.”
“싫어.”
위에서 픽 웃는 소리가 머리를 스친다. 내려와 옆으로 돌아누운 세계는 고개를 돌려 가며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영하를 억지로 붙잡아 내리눌렀다.
시야가 흐렸다. 구름이 많이 낀 어두운 밤, 눈물로 어룽진 탓에 올라탄 아빠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정도만 인지할 수 있었다. 몸싸움으로 인해 헐떡이던 호흡이 잔잔해진 순간, 가만히 얼굴을 내려다보던 세계가 허리를 굽혔다.
이불에 감긴 아들의 몸을 단단하게 끌어안고, 입술끼리 겹쳐졌다. 좀 전에 젖은 손끝처럼, 선이 뚜렷한 그의 입술도 조금 젖어 있었다.
해서는 안 될 짓이었지만, 처음이 아니었다.
가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뽀뽀라는 핑계를 대며 입을 겹쳤다. 단둘이서는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문 입술을 톡톡 건드리는 뜨끈하고 물컹한 감각에 놀라 입을 벌렸다. 습윤한 점막을 가르고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어깨가 소스라치게 떨리고 눈꺼풀이 파르르 진동한다.
올라탄 몸. 흐릿한 밤 아래 짐승처럼 번쩍이는 눈동자에는 조금의 망설이는 기색조차 없다.
“흣, 응…….”
이런 키스는 처음이었으나 싫지 않았다. 좋아. 너무 좋아…….
허리를 살살 간질이는 듯한 감각에 눈앞이 흐려진다. 전혀 싫지 않았다. 다만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무서울 뿐이다. 영하는 자신을 강렬하게 주시하는 눈빛이 무서워 눈을 질끈 감는다.
혀를 넣는 키스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숨 쉬는 걸 괴로워하니 금방 빠져나갔다.
아쉬움에 헐떡이던 영하는 벌어진 입 사이로 저도 모르게 혀를 빼꼼 내밀었다.
젖은 입술 사이로 음란하게 빠져나오는 혓바닥을 마주한 눈빛이 가늘어진다. 음탕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으나 계획된 모습은 아니었다. 잠깐 눈빛이 혼탁해졌던 세계는 금세 웃는 낯을 했다.
“차가워…….”
덜 마른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아 투정을 부리자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는 영하의 몸을 답답할 만큼 힘껏 끌어안고 벽에다 몰아붙였다. 등이 그의 가슴과 맞닿았고 코 바로 앞에 벽이 있었다.
아빠가 숨을 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등으로, 몸으로, 머리로 전달된다.
“너무 좁아.”
“내가 훨씬 크니까 이 정도 공간이 적당해.”
더블베드라 둘이 자기에 그렇게 좁지도 않은데, 벽에 몰려 숨 막히게 좁은 공간에서 잠들어야 했다.
190 가까이 되는 거구라 잠들 공간이 훨씬 더 필요하긴 하겠지만 내 자리를 이렇게까지 뺏어 가다니…….
불편하기 짝이 없어도 영하는 겸허히 받아들이고 곧 조용해졌다. 그러다 입 안을 살짝 벌려 본다. 혀가 얽히던 느낌이 아직도 선연했다.
*
학교를 쉬는 평일이었지만 자신에게 늦잠 자는 행복을 느낄 자유는 없었다.
이 가부장적인 집안에선 몇 가지 고루한 규칙을 지켜야만 했는데, 그중 가장 귀찮은 규칙이 하나 있었다.
‘1년에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7시, 모든 가족이 함께 아침을 든다.’
가족 구성원이라면 절대 어길 수 없는 규칙이었다. 그로 인해 매일 여섯 시 사십 분이 되면 울리는 알람 소리에 영하는 이불 속에서 꿈틀거렸다.
답답하고 좁아 기지개조차 제대로 켤 수 없다. 바로 옆에서 온몸을 끌어안고 자는 아빠 때문이었다.
해가 늦게 뜨는 겨울. 창밖으론 겨우 서리 같은 푸른 빛이 들고 있을 뿐이다. 모로 누워 거의 벽에 이마를 대고 있었던 터라 옆에서 잠든 아빠가 깨지 않게 천천히 몸을 바로 눕혔다.
조용히 잠든 그의 옆얼굴을 보며 영하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막막하고…….
“아빠, 일어나.”
깨울 생각이 없어 보이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가느다랗고 간지러운 음성이었다. 세계는 눈썹을 잠깐 움직일 뿐, 미동이 없다.
그가 바로 옆에 있다. 빈틈없이 끌어안고 한 침대에서 밤을 보냈다.
별것 아닌 문장으로도 영하는 꿈을 꿀 수 있었다.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삶을 받아야만 가능한 꿈이었다.
“아빠….”
이불 밖으로 빼낸 손길이 높게 뻗은 콧날에 닿았다가, 천천히 콧방울과 입술 산으로 내려간다.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
가끔 이 얼굴로 나이와 맞지 않는 어린 소년 같은 표정을 할 때마다 배 속이 답답해졌다.
“아빠…….”
“…그만 부르고 자…. 여덟 시에 일어날 거니까.”
처음으로 혀가 얽혔던 어제의 키스를 떠올리며 입술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는 순간, 입술이 움직이며 음성이 흘렀다. 움직이는 입술을 따라 마른 점막이 영하의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마주 누운 아들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아 당기는 순간. 머릿속으로 비명이 흘렀다.
아침에는 선다. 매일 서진 않았지만, 종종 아래가 서는 경우가 있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혹여나 발기한 아래가 그의 허리에 닿을까 봐 기겁하고 몸을 밀쳤다. 영하가 버둥거리자 거칠게 얼굴을 구긴 남자가 “으음.” 하고 신음하더니 피곤한 몸짓으로 눈가와 이마를 거칠게 문질렀다.
“자자니까.”
“아니, 그. 아니…….”
“아니 뭐.”
“아니……. 아침 먹어야지.”
“안 먹어. 잔다고 해.”
“아빠는 안 먹어도 나는… 악!”
“자는 사람 얼굴 그만 만지고, 너도 그냥 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가족 규율을 어길 수 있는 건 최세계가 유일했다. 그가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대충 둘러대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할머니는 그렇다 치더라도 할아버지까지 저 안하무인인 태도를 넘어가 주다니. 씨가 귀한 집의 3대 독자란 그런 것일까. 법적인 서류로 따지면 이 집안 식구라기엔 애매한 영하는 이해 못 할 그들의 심정을 흘려 넘겼다.
버둥대는 몸을 이불로 칭칭 감은 남자가 몸 위에 기다란 다리를 가로질러 올렸다. 이불에 휘감겨 끙끙대는 영하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잠들려는 듯 눈이 감기고 규칙적인 숨소리를 냈다.
마른 목에 닿은 입술의 감촉이 저릿했다. 하지만 영하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 밥 먹으러 가야 한다고!”
대꾸가 없다. 어떡하지. 밥 먹어야 하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 밥 못 먹은 귀신이 들렸나 시끄러워 죽겠네. 오 분만. 오 분 있다가 밥 먹으러 가자….”
피곤에 전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한 번만 더 이야기했다간 정말로 화를 낼 것 같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속으로 초를 세기 시작했다. 오 분을 세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약속과 달리 오 분이 지나도 꿈쩍일 생각이 없었다.
“도련님, 식사하셔야 합니다. 다른 분들 이미 다 착석하셨어요.”
“잠시만요, 곧 나갈게요!”
문밖에서 영하를 부르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소리친 영하는 이불 속에서 발버둥 치며 꿈지럭댔다. 굳은 뼈마디에서 뚜둑, 하는 소리가 들릴 때쯤, 침대에서 펄떡대는 몸을 끌어안고 있던 최세계가 잔뜩 열받은 얼굴로 드디어 무거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침부터 무슨 산해진미가 올라와 있길래 이 시간에 밥을 꾸역꾸역 처먹어야 하는 건지, 제기랄.”
험상궂게 일그러진 얼굴에서 가라앉은 욕설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그 순간은 패션 회사 상무가 아니라 어디 조직폭력배로나 볼 만한 꼴이었다.
영하는 남자의 팔과 다리가 자신을 놓아주자마자 허겁지겁 침대에서 뛰쳐 내려왔다. 곧장 잠옷 바지를 내리고 옷걸이에 걸어 둔 옷을 걸치며 고개를 돌렸다. 세계는 다시 베개 속에 얼굴을 처박아 두고 있었다. 영하가 한심하다는 눈길을 던졌다.
“일어나라고.”
“난 안 먹는다고 하라니까.”
“그럼 나 혼자 늦잖아! 혼자 가면 혼난단 말이야.”
“하…….”
아들의 성화에 결국 못 이겨 세계가 커다란 몸체를 일으켰다. 영하는 비척비척 걷는 그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며 뒤따랐다. 세수도 못 하고 아침 식사에 참여한 건 이번이 세 번째였다.
식당에 도착하자 이미 두 사람을 제외한 구성원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식사 중이었다. 자연히 그들의 시선이 뒤늦게 도착한 둘에게 닿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뭐야. 같이 늦고 같이 오네?”
“저 찬물 좀 줘요.”
영하는 식사하시는 할아버지께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남은 자리에 착석했다.
세계는 아버지의 맞은편, 식탁의 제일 끝자리에 앉아 아주머니가 건네는 물부터 마셨다. 누가 봐도 막 자다 깬 사람이다. 여동생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은 채로 물 한 잔을 완전히 비워 낸 그는 수저는 들지도 않고 대각선에서 밥을 먹는 아들만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 따가운 시선에 영하가 입 모양으로 “밥 먹어.” 하고 말했지만,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같은 자세를 고수했다.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할머니의 안색부터 살펴보니 역시나 좋지 않다. 영하와 세계가 함께 식당에 들어올 때부터 그랬다.
“세계 너 어제는 몇 시에 들어온 거야.”
“…네 시였나.”
“일로 바쁘다더니 뭐 하느라 그렇게 늦게 들어와 애들 보기 안 좋게.”
“그래서 오늘은 모범을 보이려고 한 달 만에 아침 식사에 나타났잖아요.”
모범 좋아하시네. 옷 잡아당기고 애걸복걸해서 겨우 따라온 거면서.
“근데 도저히 아침에는 밥이 안 넘어가네. 저 먼저 일어날게요. 출근 준비 해야 해서.”
“그래, 일어나라. 아웃렛 리모델링 완공 거의 끝나서 봄에 오픈한다며.”
“네. 한 달 간격 두고 순차적 오픈이라 좀 바쁘네요. 천천히 드세요. 영하도 많이 먹고.”
할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식사 중인 영하의 뒤통수에 가볍게 손이 닿았다 떨어졌다. 뒤돌아보니 세계가 미련 없이 2층으로 향하고 있다. 이번에는 승준의 눈치가 보여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맞은편의 승준이가 무슨 생각을 할까. 영하는 최대한 시선을 내리깔고 바로 앞에 보이는 반찬들만 덜어 먹었다.
영하는 이 집의 모두가 불편했지만, 어쩐지 승준이 앞에서는 죄인이 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밥그릇에 코 박고 먹느라 어디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겠고 속만 더부룩해서 괜히 먹었다. 아빠처럼 물만 마시고 “저 갈게요.” 하고 나갈 수 있었다면, 영하도 따라 나갔을 것이다.
소화도 안 되는 것 같아 윗배를 매만지며 계단을 올랐다. 2층의 입구에는 영하의 방이 있다. 방문을 지나쳐 안쪽 복도로 향하던 시점이었다.
“어디 가니?”
아래층의 큰고모가 영하를 불렀다.
“아빠 출근 준비 좀 도와드리려고요.”
“네가 최세계 마누라야? 내 남편 출근 준비는 나도 안 도와주는데? 아침에도 같이 늦더니 둘이서 웃겨, 정말.”
코웃음 친 큰고모는 진심으로 웃긴다는 듯 입을 막고서 깔깔댔다. 그녀의 높은 웃음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뻐근한듯 기지개를 켜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고모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영하의 기분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새삼 확인 사살을 받은 기분이었다. 이상하다는 것.
좀 전에는 꼭 내가… 어느 방향으로 들어가는지 지켜보고 있던 것 같잖아.
이대로 아빠의 방에 들어가야 할지 고민했으나, 답이 나오질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노크도 없이 들어가는 영하에게 반기는 목소리가 닿았다.
“들어와.”
이미 들어왔는데 들어오래.
거실의 반대편에 자리 잡은 드레스 룸으로 가 보니 그는 커프스 소매가 넓게 빠진 회색 드레스 셔츠에 팔을 꿰어 넣고 있는 도중이었다. 벗은 가슴과 드러난 배 위로 잘 짜인 그림 같은 근육들이 보였지만, 지금은 그런 게 눈에 안 들어온다. 홀린 듯이 쳐다볼 때가 아니었다.
말없이 다가가 넥타이 장을 열어 가지런히 정돈된 넥타이 끝을 만지작거렸다. 무작정 집히는 것을 들어 내밀었다. 블랙 실크에 흐린 도트 무늬가 직조된 자카드 넥타이였다.
“그거 말고.”
세계는 거울을 보며 단추를 잠그던 중이었다. 넥타이에는 시선도 주질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는 다른 넥타이를 집어 드는 동시에 “별론데.” 하는 거절의 말이 돌아왔다.
“하. 그럼 아빠가 골라.”
열이 받은 말투를 숨기지 않고 내자 그제야 그가 고개를 돌렸다. 목 바로 아래까지 단추를 잠그고는 손만 뻗어 선반 위에 올려 둔 커프스단추를 들었다.
“처음 걸로.”
속이 갑갑하다. 명치를 조금 문지르곤 처음의 도트 무늬 넥타이를 들어 거울 앞으로 걸었다.
세계가 매어 달라는 듯이 상체를 아래로 숙였다. 영하는 기계처럼 익숙한 손길로 넥타이를 목에 걸고 매듭을 만들었다. 눈동자는 초점 없이 흐려져 허공을 향해 있었다.
“왜 그렇게 시무룩한 얼굴이지?”
“몰라.”
“곧 있으면 스무 살인데 사춘기처럼 감정이 널을 뛰네. …날 닮았나?”
농담에도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고모가 했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아니, 안다고 해도 의미 없다. 단순 입에 뽀뽀하는 정도야 유난스러운 가족이라면 종종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막연히 불안했다. 이 집에 있으면 늘 그랬다. 편안한 안식처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 학교의 친구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빨리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에 영하는 동의할 수 없었다.
대충 고개만 젓고 한 발짝 물러나려니 허리를 붙잡는 손에 몸이 막혔다. 무표정한 얼굴의 세계가 영하의 얼굴을 면밀히 살피곤 물었다.
“말을 해.”
“……따로 살고 싶어.”
“뭐?”
“…그냥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말을 하라고 할 때부터 목소리가 깔려 있더니, 집을 나가고 싶다고 말을 하자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파…….
팔을 빼내고 싶었는데 그러면 도리어 화를 낼 것 같아 참았다. 참는 건 제 쪽만이 아니긴 했다. 그는 흥분을 최대한 가라앉히려는 듯 크게 호흡하곤,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며 되물었다.
그러나 튀어나오는 목소리에 격양이 담겨 있는 게, 그 일련의 과정은 전혀 효과가 없는 듯했다. 영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갑자기.”
“갑자기 아니야. 그냥…. 이제 대학도 들어갔는데.”
“안 돼.”
“그럴 줄 알았어. 그냥 해 본 말이야. 화내지 마.”
얇은 셔츠로 감싸인 가슴 위를 다독이며 달랜다. 눈높이가 한참 위에 있는 그의 시선이 영하의 머리 너머 벽을 향했다.
“왜 나가고 싶은 건데.”
“그냥… 가끔 숨 막혀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그냥 투정이야.”
시선이 오랫동안 마주쳤다. 그는 영하의 눈동자에서 본심을 찾겠다는 듯이 한참을 바라보더니 잠시 뒤 거울을 향했다.
조금 삐뚜름하던 넥타이를 고쳐 매는 사이, 영하는 미리 준비해 둔 수트 재킷을 옷걸이에서 빼내다 손목을 강하게 붙잡는 힘에 몸이 휘청였다.
“아!”
몸을 돌리자 굳은 얼굴을 한 세계가 허리를 숙여 시선의 눈높이를 맞췄다. 입술이 바짝 마를 듯한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혼자 나가는 건 안 돼.”
“알았다니까. 안 나가, 안 나가는….”
“일주일만 버텨. 집은 확인해 볼 테니까.”
“무슨 소리야?”
“같이 나갈 거야.”
“누구랑? 아빠랑?”
“나 아니면 누구랑 나가 살려고.”
깊게 들어간 눈동자에 불꽃이 튄다. 동시에 꽉 잡힌 손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괴로워하자 조금 느슨해졌지만, 여전히 세계는 영하를 꽉 붙들어 매고 있다.
“아파……! 아니… 나는 좋은데. 그러면 승준이는?”
“둘만 나가는 거야. 더 이상은 없어.”
“하지만… 승준이 혼자만 여기 있는 건 이상한데…….”
“쓸데없는 거에 시간 쏟지 말랬지. 걔까지 데리고 나갈 생각은 없어. 어머니가 최승준은 보내 주지도 않을 거고.”
잠깐 흥분했던 세계는 좋다는 대답에 평정을 찾은 모습이었다. 단단하게 굳은 턱 근육을 느슨하게 풀며 바닥에 떨어뜨린 커프스단추를 주워 옷소매에 착용했다.
단둘이서… 나가 산다고?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늘 꿈꾸던 일이었다. 영하는 순식간에 정해진 이사에 들뜨다가도 뒤따라오는 승준이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졌다. 대역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옷장의 손잡이를 붙잡고 생각에 빠진 영하에게 그가 말했다.
“원래부터 나갈 생각 있었어. 봄쯤으로 생각해 둔 게 시간이 좀 앞당겨진 것뿐이야. 그보다 중요한 거. 잊은 거 없어?”
“잊은 거? 없는데.”
시계는 지금 본인이 차는 중이고, 뭐지. 두리번거리다 액세서리 장에서 넥타이핀을 가리키니, 세계가 영하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그거 말고 아주 중요한 거.”
“모르겠는데….”
애초에 그런 중요한 걸 왜 나더러 찾으라는 거지.
뭘 빠뜨렸는지 확인하여 위아래로 훑는 동시에 새삼 감탄이 나왔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그랬다.
처음 만난 그 순간, 이런 사람을 태어나 처음 봤다고 느낀 감정은 5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변하질 않았다. 남자로서 바랄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남자. 누구라도 선망할 만한…….
“모닝 키스 잊었잖아.”
“…….”
“하루에 딱 한 번 하는 건데 어떻게 매번 기억을 못 하지? 붕어인가?”
그런 잘난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라고는 철도 없고 멋대가리도 없는 모닝 키스 타령.
머릿속에서 뭔가가 와장창 깨짐과 동시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더 귀찮게 굴기 전에 처치하겠단 마음으로 발꿈치를 들어 투덜대는 입술에 성의 없이 꾹 눌러 주곤 손등으로 닦아 냈다.
“됐지? 출근해.”
그러나 온전히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붙잡혔다. 세계가 허리 뒤쪽을 안아 당기곤 입술을 닦아 낸 것이 무색하게 도로 입 맞췄다. 반대편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고 뒷덜미를 간질이자 다물린 입이 저절로 벌어져 그 틈 사이로 혀가 침입했다.
생소하고 물컹한 감각에 놀란 영하의 두 손이 저도 모르게 팔뚝을 붙잡으려다 기껏 입힌 옷이 구겨질까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배회한다.
“우음, 응….”
잠깐씩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영하는 힘겹게 가쁜 숨을 몰아쉬고, 들이마신 가슴이 도톰하게 부풀면 그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비슷한 체온에 미지근한 혀끼리 얽히는 느낌이 낯설고 이상했다, 몇 번이나 떨어졌다 겹쳐지는 입술에 영하는 달뜬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멍한 눈빛을 보더니 잠깐 입술을 뗀 세계는 침으로 번들거리는 아랫입술을 엄지로 문지르곤 살집 없이 들어간 허리춤을 사심을 담아 매만졌다.
“무슨 생각 하는 거지?”
“아무 생각도… 그냥…….”
몽롱한 시선으로 멍하니 대답하던 영하의 정신이 돌아온 건 그때였다. 손목시계를 진열해 두는 아일랜드 형태의 투명 수납장 위에 대충 올려 둔 그의 휴대폰이 진동과 함께 벨을 울렸다.
출근할 때인가 봐.
묘한 아쉬움에 머뭇거리며 그의 가슴을 밀어내는데, 단단히 버티고 선 세계는 짜증스레 통화 버튼을 터치하곤 바로 스피커폰을 눌러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5분 뒤에 나갑니다.”
흔한 인사말도 없는 건조한 통화. 순식간에 전화를 마친 그는 따끈하게 열이 오른 뺨에 입 맞추곤 간지러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아무도 안 보는 데서만 하는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이건, 내가 어쩔 수, 없는 거야….”
헐떡임 섞인 대답이 흘렀다. 예민한 살결에 닿는 그 감각에 순간 다리의 힘이 빠져 그의 어깨에 매달리자, 날씬한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이 트레이닝 팬츠 속으로 예고 없이 침투했다. 어깨를 쥔 손이 끝내 그의 수트를 와자작 구기며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거침없이 속옷을 넘기곤 말랑한 엉덩이를 쥐는 손길 때문에 몸이 튀었다. 세계는 무신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확인하는 거야.”
아침부터 아들의 몸을 희롱하는 작자라고는 생각되지도 않을 아름다운 얼굴로 대담하게 손을 놀렸다.
긴 손가락이 부드럽고 여린 살을 매만지더니 더 아래쪽으로 향했다. 영하는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품에 안긴 몸이 덜덜 떨렸다. 진정하라는 듯 뒤통수를 쓰다듬어도 진정되지 않는다.
“하지 마, 하지…….”
그 순간, 그의 손가락이 젖은 속옷 위를 건드렸다. 귓가가 타들어 갈 듯 뜨겁다. 더듬듯 내려간 손은 곧 갈라진 둔덕에 향했고, 영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엉덩이골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젖었어.”
아들의 팬티 속에서 손을 꺼낸 세계는 티슈를 뽑아 손을 닦아 낸다. 투명하고 미끈한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꼼꼼하게 손을 닦아 내던 그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상표 하나를 입에 뱉었다. 영하가 이를 으득, 물었다.
“베이비 파우더.”
“안 할 거야. 요샌 안 해도 돼.”
“하아……. 그거 발라 주는 게 인생의 낙이었는데.”
“출근 안 해?”
일부러 작위적으로 연출해 내는 탄성에 속에서 불이 타올랐다.
인생의 낙은 무슨. 몇 년 전, 한여름에 하필 증세가 심해졌을 때. 딱 두 번 발랐다.
하필 그때 저 사람한테 들켰다. 엄마도 모르게 철통같이 보안을 지켜 온 비밀이었는데……. 엉덩이 구멍에서 이상한 것이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왔다. 어쩔 땐 팬티 한 장으로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라 두 장이나 입고 잤는데도 엉덩이가 흠뻑 젖었다.
기온이 36도에 육박하던 어느 여름날. 그날따라 세계가 볼일이 있다며 잠깐 집에 들렀고, 하필이면 잠든 영하의 방을 노크도 없이 벌떡 열었다. 등을 보이고 웅크려 누운 영하의 엉덩이가 둥그렇게 젖어 있었고, 영하는 비밀을 지켜 내지 못했다.
안 간다는데 억지로 끌려 병원에 갔다. 의사도 난생처음 보는 케이스였다며 아무런 소득 없이 병원을 나왔지만, 다음 주, 의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해외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고 건강엔 지장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봤자 수치스럽고 불편한 병이다. 손에 감긴 미끈한 액들이 보기 싫어 고개를 팩 돌린 영하는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확인하는 그를 물끄러미 보고는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승준이는.”
기어코 다시 승준이 이야기를 꺼내니 그가 불쾌한 기색을 보여 바로 입을 다물었다.
“추운데 괜히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
“답답한데…….”
“내 방에 가 있든가.”
그가 대충 던져 놓은 휴지 뭉치를 쓰레기통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응……. 돈 많이 벌어 와.”
자신의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닿는 웃음소리와 아쉬움을 담아 뺨을 만져 주는 손길이 좋다. 나가서 단둘이서만 살게 되면, 이런 편안함을 앞으로 계속 느낄 수 있게 되는 걸까.
*
일주일 안에 하겠다던 이사는 정확히 이주 만에 할 수 있었다. 내부 공사를 사나흘 만에 한다는 건 역시나 무리였다. 물론 영하야 열흘이 아니라 한 달이 된다고 해도 기다릴 수 있지만.
실은 영하도 영하 나름대로 정신이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요리 학원을 잠깐 다녔는데, 이유가 있었다. 이사 갈 집에 가져갈 옷들을 미리 챙기다 보니 현실적인 의문에 사로잡힌 것이다.
“거기 가면 청소랑 밥은 누가 해 줘?”
엄마와 함께 살던 적에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씩씩하게 혼자 밥을 차려 먹었지만, 이 집에 온 뒤로 영하는 책상 정리 외에는 청소를 할 필요도 냉장고를 열어 먹을 만한 것이 있는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집 안에는 늘 상주하는 아주머니가 계셨고, 영하가 먹고 싶은 음식은 얼마든지 해 주셨으니까.
“사람 써야지.”
모니터에서 시선도 돌리지 않은 남자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렇지. 하지만 좀 더 면밀히 살펴야 했다. 지금처럼 24시간 사람이 상주하는 것이 아닌 이상, 분명 집안일에 공백이 생긴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챙기지 못해 흠뻑 젖은 채로 집 안에 들어온다면 물바다가 된 바닥과 젖은 옷 빨래는 누가 할까.
내가 하겠지.
갑작스레 예견된 미래를 떠올리곤 창백해졌다. 잔업을 하는 세계의 팔을 붙잡아 흔들고 되물었다.
“혼자 산 적 있어?”
“유학할 때.”
“아, 맞아. 그럼 그때 집안일 어떻게 했어? 뭐 먹고 살았어?”
“사람 썼지.”
“주말이나 휴일처럼 사람 없을 땐?”
“상주해서 몰라.”
이럴 수가.
절망하고 그날은 돌아갔다. 영하가 다시 집안일 이야기를 꺼낸 것은 퇴근한 최세계를 마주친 날이었다. “오늘은 향수 냄새 안 나?” 하고 다시 괴롭힐 작정을 한 남자에게 영하는 밥을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못 해. 네가 배워.”
“내가 요리를 왜 배워? 그렇게 따지면 어른인 아빠가 밥을 해야지!”
“미안하지만, 난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삼대독자라 부엌엔 안 들어가.”
최세계는 아주 뻔뻔할 만큼 잘생긴 얼굴로 궤변을 뱉어 냈다. 난간 청소를 하던 아주머니가 웃지 않으려고 입을 말아 다무는 것을 발견한 영하는 한심하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저번에 분명, 설마 외국에서 몇 년을 살면서 한 번도 주방에 안 들어가진 않았을 거 아니야.”
그러자 최세계는 더한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미국은 유교 국가 아니라서 주방에 들어가도 그거 안 떨어지더라고.”
시선이 영하의 사타구니에 닿아 있었다.
순간 가슴 위로 몰아치는 엄청난 분노가 느껴졌지만, 영하는 애써 참고 후우. 후. 숨을 짧게 꺼뜨렸다. 게다가 아직 난간에 마른 걸레질을 하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녀의 손이 느릿한 것을 보아 이 철없는 대화가 궁금해 여태 똑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반복해 닦는 모양이었다.
조금 창피해졌다. 아빠와 하는 대화의 절반은 엉터리에다 볼썽사납고, 죄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다.
“알았어. 할게. 먹고는 살아야지.”
“처음부터 네, 아빠. 했으면 됐잖아. 어차피 할 거.”
더 말싸움하기도 지친다. 멍청이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찌릿 노려보고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불쑥 허리가 잡혔다. 와락 끌어안고 뺨에 입 맞추길래 배를 때리고 도망쳤다.
*
분가하는 것을 반기는 사람은 아빠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큰고모밖에 없었다. 특히나 할머니는 내내 할 말이 많은 얼굴이라 눈치가 보여 할머니만 보면 피해 다녔다.
당일이 되어 영하는 일찍 일어나 정신없이 차에 올라탔다. 저야 이 집에서 정 주는 사람이라곤 아빠밖에 없었지만, 아빠는 제멋대로이긴 해도 집안의 중심이었고 게다가……. 승준이의 아빠이기도 했다.
정말 승준이 내버려 두고 와도 되나.
본가를 나오는 순간까지도 승준이에게 미안했다. 그보다 더 미안한 것은 승준이에게도 아빠의 애정을 나눠 주고 싶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게 가장 미안했다.
새집은 성산동에 있는 본가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조용한 주택가였다. 마찬가지로 담벼락이 높아 바깥에선 집을 구경하려 해도 지붕과 2층만 언뜻 보일 뿐이었다.
“도어 록은 지문 인식이랑 비밀번호 둘 다 되는데, 혹시 모르니 비밀번호는 문자로 넣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캐리어는 제가 들고 올라갈게요. 고생하셨어요. 먼저 들어가 보세요.”
“도련님도 고생하셨습니다. 그래도 계단을 올라가야 하니 힘드실 텐데 현관까지는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네. 아, 제가 들게요.”
“무거우니 제가 들겠습니다.”
영하가 하나 뺏어 들기도 전에 24인치 캐리어를 양쪽으로 들고 계단을 올라선다. 대문을 닫고 황급히 뒤를 따랐다. 마당이 크다. 언뜻 봐서는 집보다 마당이 훨씬 큰 것 같았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현관문이 있었고, 대문을 들어서면 꽃과 낮은 나무들로 꾸며진 돌담 정원이 자리해 있었다. 다만 동백꽃 몇 그루가 피어 있는 것 말고는 아직 겨울이라 다들 앙상하다. 아마 곧 있으면 봄이니 계절에 맞춰 꽃을 심으려고 비워 둔 모양이다.
돌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새집이 나타났다. 앞으로 영하와 세계가 둘이서만 함께할 집이었다.
둘이서만…….
가슴이 술렁였다. 찬 바람에 뺨이 얼어붙고 있어도 느끼지 못할 만큼 설레어 요동치는 심장을 느꼈다. 색이 바랜 계절과 달리 영하의 몸 안에서는 부드러운 꽃 이파리가 허공을 맴돌고 있다. 이제는…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 없었다.
*
본가를 떠난 삶은 생각보다 훨씬 평화로웠다. 이사한 지 한 달이 지났고, 해가 바뀌었다. 성인이 된 후 처음 맞이한 날은 생각보다 별것 없었다. 파티라도 해 주는 것 아닌가 설레었는데 아빠는 그날 야근을 하고 뒤늦게 들어왔다. 역시 로맨틱함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다. 저러니 지금까지 결혼을 못 했지.
영하는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완전한 호화 백수가 됐다. 놀고먹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매일 한식 타령하는 누구만 뺀다면.
최세계는 입맛이 지나치게 향토적이다. 한 번은 요리를 배운 영하가 그에게 먹고 싶은 것을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더덕구이’였다. 기껏해야 찌개나 전골을 떠올린 최영하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치는 발언이었다.
아저씨 입맛에 맞춰 살아 줄 걸 생각하니 암담하지만, 그래도… 이사 후 가장 즐거운 점이라면 여섯 시 반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점 아닐까?
암막 커튼을 쳐 둔 토요일은 아침이 온 줄도 모르게 새카맣다. 이불 속에서 꿈틀대다 목이 말라 겨우 일어난 영하는 물 한 잔을 완전히 들이켜곤 습관처럼 원두가 담긴 진공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네가 아직 아기라는 증거야. 커피는 시럽 없이 먹어야지. 마셔 봐. 너티 베이스에 초콜릿 향이 나니까 괜찮을 거야.’
잘난 척하면서 말하길래 마셔 봤는데 그냥 쓴 커피였다. 초콜릿은 무슨. 쓴맛뿐인데. 조금 식어서 먹으면 단맛이 난다고 해서 일부러 식혀서 먹어 봤는데, 식은 쓴 커피였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커피의 맛이지만, 그가 늘 아침마다 손수 드립으로 내려 먹는 것을 아니 그라인더에 원두만 넣어 두고 멀거니 거실을 응시했다.
질감이 느껴지는 짙은 회색 벽 위로 칸칸이 쌓인 나무 선반에는 프랑스 여행에서 산 에펠탑 기념품이 자리했다. 그 아래 커다란 베이지색 패브릭 소파와 발바닥에 닿는 촉감이 좋은 넓은 러그. 거실은 햇살이 내리쬐지 않아도 늘 봄날처럼 따뜻한 분위기였다.
왼쪽 벽면 전체를 차지한 커다란 창가에서는 정원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여전히 볼 거라곤 앙상한 나무 한 그루와 노란색이 된 잔디밖에 없었지만, 암막 커튼 덕에 시커먼 제 방과는 달리 화사한 햇살이 좋아 창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있었다.
이따금 찬 바람이 부는 소리만 들릴 만큼 한적하고 조용한 시간이었다.
그 조용한 영하만의 시간은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등장한 최세계 덕에 사라졌다. 언제 일어난 건지 안방에서 걸어 나온 그는 창밖을 보는 영하를 흘끗 보고선 그라인더를 가동했다.
주방에는 아랫도리 떨어진다고 안 들어가는 사람이 커피 마실 땐 잘만 들어갔다.
왜, 아메리카노는 미국 거라 고추 안 떨어지나 봐?
매일 아침 정성스레 드립커피를 내려 먹는 것을 보면 어쩐지 불길이 치솟았다. 요즘은 저런 남자 안 좋아해. 그러니 어떤 여자도 아빠와 살아 주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분명 평생 혼자 살겠지.
겨울의 쓸쓸한 풍경에 시선을 두고 머릿속으론 누군가를 잔뜩 흉보던 영하는 양심에 찔려 슬그머니 돌아봤다.
블랙 도자기 드리퍼 위로 얇은 물줄기가 둥근 원을 그렸다. 시선의 위치는 드립포트를 쥔 남자의 등으로 향했다. 편안한 흰 티셔츠 위로도 근육의 생김새가 드러났다. 팔을 내리자 도드라지던 날개뼈의 윤곽이 흐려졌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세계가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뭐 해?”
“멍 때리는 중.”
“멍 때리면 머리 나빠져.”
“거짓말…….”
뜨거운 김이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세계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영하는 쿠션 하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눈길이 새카만 커피에서 아들에게로 향한다.
최영하는 삶을 살며 조금 손해 보는 인상이었다. 아주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 외모였다. 작은 턱과 반대로 큰 눈의 꼬리가 미묘하게 강아지처럼 처진 탓이었다.
아니, 어쩌면 긴 속눈썹이 가끔 눈꺼풀을 내리깔아 눈동자를 감추고 있을 때면, 누구의 말이든 어쩔 수 없이 수긍할 듯한 순종적인 분위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세계가 베개에 짓눌려 있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쓰다듬어 주자 쿠션에 턱을 대고 있던 영하가 돌아봤다. 세계는 뜨거운 커피를 천천히 넘기면서도 저를 올려다보는 영하에게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았다. 입꼬리가 올라간 도톰한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저기는 언제까지 저렇게 휑한 거야?”
“봄 되면 디자이너가 와서 견적 내 줄 거야.”
“그것도 디자이너가 따로 있구나. 꽃 심을 거지?”
“무슨 꽃?”
“나는……. 꽃 이름 잘 몰라서.”
자신 없는 목소리에 그가 웃는다. 귀여워서 웃는 것 같기도 했고, 무지함에 대한 비웃음 같기도 했다.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품은 컵을 투명한 소파 테이블 위에 올린 그는 가까이 다가와 영하가 그러는 것처럼, 바닥에 주저앉았다.
탈깍- 소리가 나고부터 영하는 어쩐지 두근거렸다. 소파 위에 올린 턱을 여러 번 위아래로 움직이고 마른 허벅지 아래를 끌어안은 손이 꼼지락거렸다.
진달래니 철쭉이니……. 전혀 궁금하지 않다. 영하는 바로 뒤에 있을 남자에게만 온 신경이 집중됐다. 그러나 가까이 와 앉고는 막상 자신을 끌어안지 않으니 조금 의아했고, 깨끗한 통유리창에 슬쩍 비친 그의 모습을 보니 저를 앞에 두고 휴대폰을 만지고 있어서 또 서운했다.
왜 안아 주지 않는 거지? 평소라면 아프게 끌어안고 뺨에 뽀뽀했을 텐데.
불퉁해진 최영하의 코끝에 커피 향기가 닿았다. 멀리서 향기 맡는 것만 좋지 마시는 건 싫다.
문득 영하는 지금 그와 자신의 관계가 먹기 꺼려지는 블랙커피와 닮아 보여 싱숭생숭하다. 싫지는 않다. 다만 삼키면 최영하는 감당하지 못하는 쓰라림이 반드시 동반되는 결과였다.
영하가 입은 새카만 티셔츠 너머로 그의 모습이 흐리게 비친다. 유리창 위에 그려진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목을 꼿꼿이 펴고서 휴대폰 화면 위를 몇 번이나 터치하고 나자 곧 벽 선반에 놓인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팝송인가, 하고 잠시 들어 본다.
하나에 꽂히면 질리지도 않고 주야장천 들어 대는 통에 외워 버린 그의 플레이리스트였다. 올드 팝.
“아저씨 취향.”
“아저씨 맞아서 타격 없어.”
세계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하곤 휴대폰을 러그 위에 내려놓는다.
영하의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었다. 이제야 안아 줄 줄 알았는데, 창문의 비치는 모습을 보자니 팔을 뒤로 뻗어 기대곤 천장 부근을 쳐다보고 있다. 슬그머니 따라 올려다보니, 볼 거라곤 하얀색 몰딩뿐이다.
나보곤 넋 놓지 말라더니. 툭 튀어나온 입이 도통 들어가질 않는다.
흥, 하고 더 몸을 웅크리고 있으려니 허전해 결국 영하는 엉덩이를 조금 뒤로 물러앉았다. 꽤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몸이 붙지 않아 좀 더 뒤로 옮겨 보니 세계의 다리와 엉덩이가 툭, 부딪쳤다. 영하는 말랑한 쿠션을 손에 꽉 끌어안고는 새삼스러운 말을 꺼낸다.
“나 추워.”
긴소매를 입은 팔뚝을 문지르며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댔다. 대꾸 없이 피식 웃은 그가 곧 팔을 둘러 영하의 몸을 가득 끌어안았다. 익숙한, 그리고 기다렸던 품의 넓이와 체온에 영하는 다물린 입을 조금 벌리곤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에 뺨을 문질렀다.
“으으음…….”
“우리 애기 추워?”
“아기라고 하지 좀 마.”
세계는 반소매를 입고 있었다. 여름옷을 입어도 춥지 않은 따듯한 실내에서 춥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고 안기는 게 귀여운지 영하의 보송한 뺨에 제 얼굴을 문지르더니 티셔츠 위로 매끈한 배를 매만진다.
커다란 손이 아랫배를 약하게 압박했다. 영하는 숨을 여러 번 뱉고는 달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뜻을 알 수 없는 손길이 왜인지 조금 무서웠다.
“음, 그렇지. 다 컸지.”
혼잣말처럼 뱉은 세계는 배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흩어진다.
익숙한 노래와 익숙한 남자. 다정한 손길. 단둘만의 시간.
영하는 문득 지금의 순간이 행복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겨 어리광 부릴 수 있는 게 좋았다. 이사 나오길 잘했다.
뽀뽀하고 싶어…….
정확히는 입술과 입술을 포개고 싶다. 아빠의 혀가 입 안에 들어왔을 때 등골이 오싹하던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안아 달라고 품에 안기는 것까진 해도 차마 키스를 먼저 할 수는 없어 눈만 내리감았다. 텔레파시가 그렇게까지 잘 통하지는 않는지, 세계는 영하에게 입 맞추지 않았다. 대신 보채는 아이를 달래듯이 여러 번 등을 문지르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래도 그걸로도 만족했다. 충분히 행복하다.
너무 좋아.
평생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다른 건 바랄 것이 없었다.
*
주방을 가볍게 정리하고 영하는 바로 침대로 기어 들어가 휴대폰부터 켰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진 이러고 펑펑 놀 계획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외출 좀 할까.
나흘째 집 밖으론 한 발자국도 안 나갔더니 슬슬 죄책감이 생겼다. 본가에 살 땐 집 안이 숨이 막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내내 외출했는데, 이사를 오고 나서는 눈치를 봐야 하는 가족들이 없으니 온종일 집 안에 콕 박혀 있다.
며칠 더 누워 있다간 아빠도 조금 화낼 것 같고. 오늘은 외출했다는 티를 좀 내 볼까.
이른 아침부터 퇴근 시간까지 빡빡한 일정에 맞춰 살아가는 최세계는 빈둥대는 영하에게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따로 언급은 없다.
다만 매일 하루 종일 뭐 했냐는 물음에 눈만 댕그라니 뜨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한숨만 내쉬었다. 그 성격에 한숨만 쉬고 끝내는 것도 굉장한 인내였다.
“어디 가지.”
아, 그래. 한국사 시험 교재나 좀 사자. 밖에 나갔다는 티를 내야겠어.
아빠 오늘 몇 시에 퇴근해?
나 외출할 거라 혹시 늦을까 봐.
문자를 보낸 뒤 외출 준비를 마치고 나니 한 시 이십 분.
삼 일 전의 외출도 근처 편의점 갔던 게 다였으니, 정말 오랜만의 외출이라 보여 줄 사람도 없는데 옷도 신경 써서 골랐다. 휴대폰만 들고 현관에서 신발로 갈아 신던 중에 전화가 왔다. 신발장 위에 휴대폰을 스피커폰으로 바꾸고 신발 입구가 좁아 잘 들어가지 않는 워커를 꾸역꾸역 신었다.
“응. 아빠.”
-외출한다더니. 나왔어?
“아니. 나 지금 나가려고. 현관이야.”
-어디 갈 건데. 아빠 오늘 정시 퇴근이야. 저녁은 나가서 사 먹을까?
신발과 싸움을 벌이느라 찡그린 얼굴이 반색한다. 휴대폰을 향해 밝게 웃은 영하가 대답했다.
“진짜? 서점 갈 거야. 너무 빈둥댄 것 같아서 책 좀 사려고…….”
-빈둥댄 건 알았어? 잔소리하려다가 찡찡댈까 봐 참고 있었는데.
“왜 자꾸 날 울보 취급해?”
-툭하면 울면서.
“진짜 없는 말 좀 하지 마. 남들이 보면 진짜인 줄 알겠다.”
억울한 발언이다. 자신은 감수성이 풍부하지 울보는 아니었다.
-도착하면 전화할게. 차 밀리니까 좀 일찍 퇴근할 거야. 아마 여섯 시까진 가겠지.
“응. 뭐 먹을지 고민하고 있을게.”
-그래.
끊기기 직전, 통화 너머로 들리는 나직한 웃음소리가 간지러워 영하는 목을 조금 움츠렸다. 맞은편 거울 속에서는 평범한 데다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새카만 롱패딩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신경 써서 입었긴 하지만…….
통화가 꺼진 휴대폰을 잠시 바라보던 영하는 겨우 신었던 신발을 벗어 던지고 다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
영하는 물건을 고르는 데에 신중한 편이었다. 책 한 권을 사는 데에도 고민이 많았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 파트 앞에 서서 책 스무 권을 열어 보고 문제를 확인한 후 그중에서 세 권을 골랐는데도 쉽사리 결정이 어려웠다.
책을 진열해 둔 선반 위에 세 권을 나란히 두고 갈등했다.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며 표지가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를지 아니면 제일 많이 팔린다는 베스트셀러를 사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사십 분이 넘도록 문제집 한 권 못 사고 고민하는 제 꼴이 우스워 그냥 둘 다 사기로 했다.
책 두 권을 끌어안고 목적 없이 걸었다. 영하는 또래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활자와 친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꾸준히 독서를 하는 쪽은 최세계였다.
캄캄한 밤, 스탠드 조명만 켠 채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이 그의 휴식이었고, 영하의 취미는 책을 읽는 아빠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이제 대학도 들어가니까, 책 좀 읽어 볼까. 기꺼운 마음으로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고심하다 책 두 권을 골라 결제했다. 네 권은 아무래도 묵직하다. 종이 가방이 찢어질 것 같아 아래를 받쳐 든 영하는 2자층에 카페 코너가 있다는 안내판을 보고서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아직 그가 퇴근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카페에서 때울 계획이었다.
“카페라떼…… 아니다. 녹차라떼 한 잔이랑 음……. 당근머핀 하나요.”
“아이스로 드릴까요?”
“음……. 으으음……. 네 아이스로 주세요.”
“네 녹차라떼 아이스 한 잔이랑 당근머핀 하나요. 진동 벨 드릴게요.”
고작 몇 시간 걸었다고 발이 아팠다. 운동화를 신고 나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스무 살에 벌써 체력의 한계를 느낀 영하는 비척비척 걸어 가까운 아무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에 올려 둔 책 위에 팔꿈치를 대고 음료가 나올 때까지 멍하니 있으려니 누군가 영하의 주변을 서성였다.
뭐지.
그냥 한 번 쳐다보는 줄 알고 가만히 있었는데, 계속 옆에서 얼쩡거린다.
대체 뭐 하는 건지 보려고 턱을 괸 채로 그대로 올려다봤더니, 잘 차려입은 젊은 남자였다. 깔끔한 화이트 컬러 셔츠에 짙은 네이비 수트. 넥타이 없이 셔츠넥의 단추 하나가 자유분방하게 풀려 있었다.
영하가 겪은 바론 이런 정장 입은 어른이 자신에게 말 거는 이유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하나는 사이비. 하나는…….
“저 연예인 안 해요.”
“예?”
“저 아이돌이고 배우고 다 관심 없어요. 죄송해요.”
게다가 저 남자는 생긴 것도 꽤 멀끔하다. 사이비 남자 2인조도 아니고 한 명이니 딱 봐도 캐스팅하려고 수작 거는 게 분명했다. 이런 식의 수작은 이미 조금 과장해서 수십 번도 더 겪으며 질려 버린 터라 좀 퉁명스럽게 대꾸했더니 그 남자가 당황한 내색으로 입술을 당겼다.
“아이돌이요?”
“네. 저 관심 없어요. 안 하는…….”
응?
말을 하면서도 뭔가 불길하다. 등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이돌 하라는 이야기 굉장히 많이 들었나 봐요.”
“아… 혹시.”
“죄송하지만 제가 그쪽이랑은 관계가 없어서요. 그냥 공무원이라.”
“아.”
“그 자리, 제 자리라서요. 책도 제 거고.”
“아……!”
어쩐지 저 남자,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다. 놀란 영하가 얼른 일어나 테이블을 내려다보니 한자 사전과 일반 서적 두 권이다. 자신의 한능검 교재가 아니었다.
이럴 수가. 남의 자리 앉아 놓고 캐스팅은 필요 없다고 했다니.
영하의 책 네 권은 반대편 원형 탁자 위에 올라 있었다.
쪽팔리게……!
입을 틀어막고 움찔대자 눈앞의 남자는 테이블 위에 아메리카노를 올려 두며 보기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공무원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전형적인 화이트칼라의 표본이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니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이 차올라 더듬더듬 뒷걸음질 쳤다.
끼긱- 하고 신발의 고무 밑창이 바닥에 밀려 요란한 소리가 카페를 울린다. 영하는 벌겋게 타오르는 얼굴로 더듬더듬 사과를 뱉어냈다.
“죄, 죄송해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자리를 착각할 수 있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연예인 캐스팅을 거절하겠다고 대답하는 것은 대단히……. 최세계 같은 짓이었다. 이럴 수가.
“죄송합니다. 하하. 저는…… 제 자리로 갈게요.”
영하는 재빨리 뒤돌아 문제집을 둔 자리에 앉았다. 좀 전의 남자와는 눈이 마주칠 일 없도록 등을 보이고 앉았는데, 이번엔 등이 따가웠다. 가시방석이었다. 두 뺨이 뜨거워 손등을 올려 식혀 보지만 창피함은 쉽게 가라앉질 않는다.
받아 온 음료를 빨아 마시며 환기를 하려고 해도 자꾸만 좀 전의 부끄러운 일들이 멋대로 머릿속에 복기되었다.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해야 했다.
겨우 한 숟가락 떠먹고 오래오래 씹으며 휴대폰을 켰다. 아빠는 자주 스마트폰 중독이라 탓하지만, 이 나이에 휴대폰 중독 아닌 사람은 맹세코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SNS 활보를 마친 뒤 카페 안을 둘러보니 여전히 손님은 드문드문 앉아 있다. 좀 전의 그 남자도 자리에 앉아 책을 넘겨 보고 있었다.
영하는 시간을 다시 확인한다. 어느새 삼십 분이나 흘러 있었지만, 아직도 멀었다.
조금 지루해 엎드려 잘까 싶더라도 불현듯 ‘밖에서 정신 놓고 있으면 누가 납치해 간다.’ 하고 농담하던 아빠의 말이 떠올라 잠이 홀딱 깼다. 나를 납치해 봤자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걸 알아도 기분이 찝찝해 애써 고개를 들었다.
사 온 책이나 좀 볼까.
책 쌓아 두고 휴대폰 하는 것도 어쩐지 눈치가 보여 슬그머니 해설집을 펼쳐 집중 안 되는 머리를 애써 누르며 몇 페이지쯤 읽었을 때였다. 옆에 놔둔 휴대폰에서 반짝- 노란 알림이 떴다. 반색하며 휴대폰을 들었다. 역시 중독이야.
뭐 하냐.
짤막한 한마디. 답장하기도 전에 곧바로 메시지가 추가로 떠올랐다.
PC방가실?
게임 못하는 거 알면서 자꾸 나보고 피씨방 가쟤.
영하는 소위 말하는 똥손이라, 게임에 소질이 없었다. 온라인 게임만 했다 하면 온갖 욕을 수집하는 듯이 먹는 데다 부모님 안부를 자꾸 묻길래 PC 게임은 접었다. 나름의 효도였다.
나 서점이야
공부하려고? 벌써? 야, 입학하고 나서 해
일단 기분만 내려고 샀어. 솔직히 안 할 거 같은데
피씨방 가자
싫어 저녁 약속 있어
뭐야 애인이랑?
아……. 가만히 활자를 들여다보던 영하는 조금 들뜬 듯하면서도 쉽사리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했다. 민재가 애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난처해 눈썹 위를 긁었다.
어떡하지.
작년 여름에 아빠가 말없이 학교로 데리러 온 적이 있었는데, 하필 그날은 출근도 안 한 터라 평소보다 확실히 편안한 복장이었다. 흰 반소매 폴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으니 언뜻 보면 이십 대로 보일 만했다.
너무 튀는 사람이라 학생들이 우르르 내려오는 교문 앞에서 기다리는 게 싫으면서도 그날은 기분이 유달리 좋았다. 하교하는 아이들이 조금 빠져나갈 때까지 운동장 근처에서 기다렸다.
교문을 빠져 내려오는 학생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는 아빠를 지켜보는 내내 가슴속이 조금씩 부풀었다. 설레는 감정이 그 안에 꾹꾹 차올랐다.
한참을 학교 안을 들여다보던 그가 차에서 멀어지며 교문으로 다가오더니 자신을 발견했다.
‘거기서 뭐 해. 안 오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지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인지했다. 영하는 얼굴 가득 지어지는 미소를 감추지도 못하고 그에게로 뛰었다.
여름방학을 마치고 2학기가 시작된 지 며칠 되지 않아 더운 날씨인데도 차 밖에서 기다리는 게 좋았다. 아마 자신에게 서프라이즈를 해 주려던 계획이었겠지.
학교까지 오는 내내 그가 자신을 떠올렸을 거라고 생각하자 뜨거운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울렸다. 그도 그랬으면 좋겠다. 최영하를 생각하는 순간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격동치는 감정을 느꼈으면…….
아빠가 온종일 내 생각만 해 줬으면 좋겠어…….
가볍게 뜀박질해 순식간에 다가갔다. 안아 주려는 듯 팔을 벌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학교 앞이라 그럴 수 없다. 코앞에서 멈춰 서며 고개를 젓자, 인상이 불편해졌다.
‘고등학교 들어가면 아빠랑 껴안기 금지 입법된 지 얼마나 됐지? 전혀 몰랐는데.’
투덜대긴 해도 억지로 껴안지 않는 대신 팔을 잡아끌었다. 영하는 내내 싱글싱글 웃으며 차에 함께 탔다.
기사도 없이 혼자 데려온 날이어서 그랬나? 아니면 그가 너무 젊게 입었나?
영하가 게이인 것을 아는 유일한 존재인 친구 민재가 그 모습을 보더니 그날 저녁 바로 전화를 했다.
-너 언제 애인 생겼어?
난데없는 말에 황당한 것도 잠시. 곧바로 민재가 뭘 보고 오해했는지 깨달았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무슨. 너 성인이랑 사귀니까 아닌 척하는 거 다 알아. 미친 숙맥이라 내가 먼저 솔로 탈출할 줄 알았는데… 몇 살이야? 대학생이야?
‘그, 아니…….’
-미친. 직장인이네.
직장인인 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빠라고 대답하기에도 모호했다. 민재는 한 번 보고 말 사람도 아니고, 영하와 아주 긴밀한 비밀을 서로 나눈 친구 사이였다. 가능하다면 평생 친구로 지내고 싶다. 그러니 언젠간 영하가 패션 화학 업계의 대기업인 모드글로벌 그룹의 집안과 관계가 있는 것도 알게 될 터였고…….
문제는 모드 글로벌의 상무이사 최세계의 아들은 하나뿐인 것으로 공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영하는 그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숨겨진 아들이다. 또한 그에게 철없는 중학생 시절에 생긴 자식이란 추문을 얹고 싶지도 않았다.
아빠라고 말할 순 없어. 어쩌지…….
망설이는 사이에 이미 민재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자기 주도적인 학생이었다.
-좋겠다. 멀리서 보긴 했는데 진짜 잘생긴 거 같던데.
‘…….’
-어디서 만났냐? 어플? 솔직히 어플 아니곤 답 없다던데.
‘나중에 말해 줄게.’
그렇게 민재는 최세계를 영하의 나이 많은 남자 친구로 생각하기로 했다. 헤어졌단 말이 없으니 아직도 사귀고 있다 믿었다.
영하는 언제쯤 결별했다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자꾸 연애 생활을 물어보길래 인터넷 참고해서 이야기를 지어 내는 것도 곤욕이었다.
민재에게 전달해 준 세계와 영화의 첫 만남의 배경은 유기견 보호센터였다. 물론 영하는 마음만 먹었지 한 번도 가 본 적 없지만, 적당히 아름다운 장면을 지어냈다.
자원봉사를 하다 강아지에 서투른 세계가 흉포한 치와와에게 물릴 위험에 처한 상황을 도와주는 것으로 시작된 인연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가 먼저 번호를 물어 와 얼떨결에 신상 정보를 전달했고, 약 삼 개월간의 썸을 통해 사귀게 됐다.
나이는 내려서 스물아홉 살이라고 거짓말했는데, 그래도 민재가 아저씨라고 경악했다. 스물일곱이라고 할 걸 그랬나.
다음 주에 깨졌다고 해야지.
집에 가서 결별 사유를 찾아봐야겠다. 다시는 언급도 못 할 만큼 처참한 이별 사연을 갖다 붙여야 더는 말을 안 꺼내지.
피씨방 다음에 가자 그땐 내가 살게
ㅇㅇ
연락은 일단락됐다. 그래도 영하는 화면을 끄지 못하고 메시지 창을 조금 위로 올려 민재가 보낸 메시지 하나를 읽고 또 읽었다.
뭐야, 애인이랑?
애인. 애인이랑……. 그 사람과 나는 애인이 될 수 없는 관계인데……. 애꿎은 머핀의 중앙을 포크로 꾸욱 내리눌러 반으로 갈라 버렸다.
이유 없이 쓸쓸해졌다.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다. 부스러기가 묻은 포크를 입술에 대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휴대폰에 다시 알림이 온다. 이번엔 문자였다.
나 인기 많네. 스팸 문자는 아니겠지. 심드렁하게 화면의 잠금을 푸니, 아주 의외의 이름 석 자가 떠올라 있다.
최승준.
최승준의 문자였다. 무슨 일이래? 우리 사이에 문자라니. 아닌 게 아니라, 둘 사이의 첫 번째 메시지였다. 이전 메시지는 하나도 없다. 집에서 마주쳐도 말없이 지나치는데 연락할 사이는 당연히 아니었다. 내 번호를 알고 있다는 게 더 신기할 노릇이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최승준이 문자를 보냈나 싶어 터치해 보는 순간, 영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포크를 쥔 손의 힘이 빠져 탁자 위로 떨어졌다. 포크가 식기에 부딪쳐 와장창! 시끄러운 소리가 테이블 위에서 요란하게 흘렀다.
심장도 함께 곤두박질쳤다.
단지 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순식간에 발밑으로 꺼져 앞이 캄캄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그렇다고 세상이 변하진 않았다. 문자 속 활자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목덜미가 서늘해지고, 곧이어 뜨끈해졌다. 다시금 반복해서 읽었다.
아버지 약혼하신다는 거 알고 있었어?
약혼?
내용을 보니 승준이의 연락 자체가 중요한 대목이 아니었다. 사납게 내려앉는 가슴을 쥔다. 모든 사고가 멈춰 석상처럼 굳어 휴대폰을 쥔 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겨우 진정해 답장하려니 이번엔 손이 떨려서 불가능해 전화를 걸었다. 단 네 번의 신호음 만에 승준이 받는다. 상대방 역시 적잖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영하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약혼이라니… 무슨, 무슨 소리야?”
-뭐야, 너도 못 들었어? 아버지 약혼하신다는데? 그것도 다음 달에.
“…처음 들었어. 전혀 몰랐어.”
-너도 아버지 결혼하면 끈 떨어진 연 신세 되겠네.
승준이 비웃듯 대답했다. 조금은 통쾌함을 느끼는 음성이었다.
-분명 결혼하면……. 그 사람이 낳은 자식이 후계자가 되겠지?
“누가 말해 줬어? 할머니?”
-할머니가 엄청나게 좋아하시던데.
“응…….”
후계자엔 관심도 없고 욕심낸 적도 없다. 영하가 바라는 것은 회사가 아니었다. 단지……. 단지 하나뿐이었는데.
“어떡하지?”
-뭘 어떡해. 네가 아버지한테 물어봐.
“어떻게 말을, 아니. 응……. 알았어. 끊을게.”
횡설수설하며 손을 내렸다. 무의식적으로 컵을 들어 빨대를 잘근잘근 씹었다. 약혼이라니. 전혀 예상 못 했다. 그럴 리가 없다. 아빠가 그럴 리가 없는데…….
몽롱한 시선 너머로 영하가 보는 것은 둘만의 집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는 최세계의 모습이었다. 근래에 그는 바쁘지도 않았고, 말없이 외박하거나 늦게 퇴근하는 일도 없었다.
기억하기로는, 최근 2주간은 매일 정시에 퇴근해 7시에는 집에 도착했다. 주말에도 날씨가 춥다는 핑계로 외출하자는 아빠의 제안을 거절하고 늘 집 안에 있었다.
그리고 영하의 옆에는 늘 그가 있었다. 어디를 가도 잠깐 고개를 들면 어떻게 알고 옆에 와 앉아 있었고, 낮잠을 잘 때면 홀연히 나타나 둘이 자기엔 좁은 침대 위에 큰 몸을 욱여넣어 자신을 괴롭혔다.
모든 게 평화로웠는데.
기억을 되돌려 본다. 뭔가 어긋난 것이 있을 터였다. 그가 그렇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선을 보고, 약혼녀를 만나고, 약혼을 결정지었을 리가 없다.
어제 일부터 천천히 거슬러 올라갔다. 손톱으로 흰 테이블 위를 긁으며 이미 넝마가 된 빨대를 짓이겼다. 누군가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지도 못한 채 영하는 세계에 관한 생각을 했다.
어젯밤 아빠는 꼭 입 맞출 것처럼 굴다가 코앞에서 멈추곤 시답잖은 장난을 쳤다.
그저께 밤엔 소파에 나란히 앉아 회사에서 겪은 이야기를 했고, 곧이어 미처 다 하지 못한 업무가 있다며 서재로 가더니 십오 분 뒤, 단지 본인이 심심하다는 이유로 놀고 있는 영하를 강제로 서재에 앉혔다.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그의 옆에서 멀뚱히 자리 잡고 휴대폰이나 하며 그가 무료하지 않도록 가끔 아무런 말이라도 지어내 지껄여야 했었다.
평소와 다름없다.
건조한 눈을 찡그린 영하가 손등으로 눈꺼풀을 문질렀다. 생각해 봐도 없다. 왜 갑자기 약혼한다는 거지. 어쩌면 승준이가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할머니가 아빠를 약혼시키고 싶다는 이야기를, 약혼한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
애초에 그런 중요한 일을 본인이 모른다는 점이 말이 안 된다. 자만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아빠의 첫 번째는 자신이다.
그렇게 뻔뻔하고 이기적이고 배려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저한테만 쩔쩔맨다는 것을 안다. 시종일관 진지하지 못하고 간혹 분노하게 만들지만 정작 영하가 진심으로 화를 내면 풀어 주기 위해 뭐든지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 아빠가 그럴 리 없어.
여자를 만나고 온 그날 밤도 버릇없이 굴었지만 혼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샤워하고 와 향수 냄새를 없애고 영하에게 입 맞춰 줬다.
이번에도 똑같겠지.
애초에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 정착할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 자신도, 영하도 너무나도 잘 인지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영하는, 그렇게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찜찜한 기분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기억을 되돌리면 되돌릴수록 명확해지는 것이 하나 존재했다.
입 맞춘 적이 없다.
아침마다 모닝 키스로 깨워 달라는 헛소리를 하는 남자가 이사를 오고서는 단 한 번도 먼저 해 준 적이 없었다. 가끔 영하가 기분이 좋거나 짜증 내는 그를 달래기 위해 볼에 한 적은 있어도 그 이상은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근래에 꽤 많이…. 어쩌면…….
괜찮다고 생각한 게 모조리 물거품으로 흩어지고 그 자리에는 대신 아득한 절망이 목 끝까지 자리 잡았다.
“어떡하지…….”
정말 약혼하면, 곧 결혼도 하게 되겠지. 결혼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다시 본가로 들어가야 하는 걸까. 아빠의 숨겨진 자식인 내가 그 집으로 돌아가면, 아빠 없이 돌아가면 뭐가 되는 거지? 고모할머니의 최씨 손자?
슬프다는 감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상상은 안 좋은 방향으로만 향했다. 어쩌면 하루, 열 시에 퇴근한 그날 만난 걸지도 몰라. 나한텐 왜 이야기를 안 한 걸까. 그렇게 뽀뽀 타령을 하던 인간이 왜 한 번도 먼저 한 적이 없을까. 이제 내가 필요 없는 건가.
슬픔을 파고들어 열네 살의 기억이 불쑥 찾아들었다.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와의 첫 만남. 그리고 약 14일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쯤이었다.
인간이 아닌 미지의 존재라고 느껴질 만큼 현실감이 없는 남자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색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영하는 그의 뜻에 따라 매일 저녁 퇴근하는 아버지를 맞이하고, 서재에 있는 그가 부를 때면 집 안 어디에 있든지 1분 안으로 뛰어가 노크를 해야 했다.
그때마다 그는 다급하게 뛰어와 헉헉대는 영하를 무서운 얼굴로 바라봤다. 그때는 무섭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건 사나운 표정이 아니라 단지 저를 관찰하고 있었을 뿐이다.
‘조용히 있어.’
그는 영하를 불러 앉혀 두고 시간을 보냈다. 영하에게 지정된 자리는 그가 고개를 들면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아빠의 서재 책장 건너편의 소파는 푹신하고 부드러워 손에 닿으면 꼭 스웨이드처럼 보들보들했다.
영하가 가물가물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는 내내, 그는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기도 했고, 누군가와 통화하기도 했다. 영하는 세계의 시야 안에 앉아 흐르지 않는 시간을 억지로 죽였다.
유난히 꼿꼿이 세운 허리가 아파져 올 즈음에야 그는 방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살가운 말을 걸거나, 하다못해 학교생활을 묻지도 않았다. 단지 그곳에 둘 뿐이다.
그가 무서웠다. 아버지가 부를 때면 심장이 소스라치게 놀라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듯했고 심박이 야단스럽게 뛰어 정신이 산란했다.
깊은 눈은 늘 그림자가 져 있어 어두운 서재의 불빛 아래서는 눈동자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차가운 인상이었고, 웃지도 않았다. 늦은 밤과 새벽의 사이쯤. 아주 깊게 어둠이 내려앉은 그 순간이 늘 그에게 머무르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하면, 아버지가 다른 모든 이들에게도 똑같이 대한다는 점이었다. 고모들이나 할머니처럼 영하에게만 태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날도 퇴근하자마자 불러 댄 탓에 밥 먹다 말고 뛰쳐나간 영하는 늘 그렇듯 같은 자리에 앉아 지루한 얼굴로 멍하니 창 너머만 바라보고 있었다. 낮이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라도 볼 텐데, 날이 어두워지면 창밖은 그저 까만색일 뿐이다. 그러니 딱히 눈을 둘 데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리 와.’
대체 이런 짓을 왜 시키는 건가 미움이 싹틀 시점, 그가 갑자기 영하를 불렀다. 영하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몸이 공중으로 튀었다. 놀라든 말든 관심도 없는 그가 서랍을 열더니 태블릿 PC 박스와 스마트폰, 그리고 의자 뒤편에 노트북 상자를 바닥에 두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가간 영하의 정신이 전자기기들에 쏠렸다. 어차피 바로 앞까지 갈 예정인데도 더 가까이 보고 싶어 허리를 길게 빼다가 중심을 잃어 조금 휘청이자, 급하게 허리를 감싸는 팔이 있었다. 커다란 손이 허리를 쥔 것도 그렇지만, 배에 닿은 성인 남자의 팔이 너무 생소하여 저도 모르게 감아 온 팔을 밀쳐 내고서 아차 했다. 기분 나쁠 만한 행동이었다.
‘죄송해요…. 제가, 깜짝 놀라서…….’
‘됐어. 이 중에 골라.’
시끄럽다며 손을 내젓길래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가 가리키는 것은 좀 전에 꺼낸 전자기기들이다. 영하는 세 가지 크기, 세 가지 종류의 제품들을 보고는 제 아버지의 얼굴을 멀거니 봤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몽롱한 표정이었다.
‘제가요?’
‘그럼 누가 있는데. 내가 고를까?’
‘아니, 갑자기…… 그냥 주시는 거예요?’
‘그냥 줄 거야. 하나만 골라.’
얼떨떨하면서도 순간 가슴이 설레었다. 한 번도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영하의 눈은 태블릿 PC를 보고 반짝였지만 몇 번 망설이다 제일 작은 스마트폰을 골랐다. ‘이거요.’ 하고 손으로 가리키자 그가 턱짓으로만 가져가라는 듯 시늉한다. 표정은 여전히 시큰둥했고 여전히 살벌하게 잘생겼다.
‘받았으니 감사합니다, 해야지.’
‘감사합니다.’
‘말로만?’
‘네?’
‘행동을 보여 줘야 감사한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어…….’
어려운 이야기였다. 어떤 행동을 해야 감사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영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려 귀가 화끈했다.
‘그거 말고.’
‘그러면…….’
똑바로 알려 줘야 할 것 아니야?
선물에 대한 고마움도 잠시. 자신을 갖고 노는 듯 말을 해 주지 않고 감사를 제대로 표현하라는 요구에 덜컥 화가 났다. 그래도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큰 사무용 의자에 완전히 기대어 앉은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영하의 귀 뒤를 간지럽혔다.
그가 웃는 것은 정말 처음이다. 기분이 이상했다. 형용하기 어려울 만치 귀가 간지러워 영하는 엉뚱한 목덜미를 손으로 긁었다. 너무 이상해…….
‘쪼끄마한 게 화를 내네.’
‘…화 안 냈어요. 정말이에요.’
‘그럼 와서 뽀뽀해 봐.’
‘네?’
‘여기. 감사하다는 의미로 뽀뽀해 보라고.’
뽀뽀? 무슨 말도 안 되는…….
영하는 엄마에게 뽀뽀를 해 본 경험도 드물었다. 게다가 열네 살이었고,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어도 그런 행동은 못 한다.
하지만 젊은 아버지는 영하의 행동을 기다리며 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에 눈동자가 반짝인다. 영하는 그의 눈동자에서 의외의 장난스러움을 발견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무섭지 않고, 새카만 밤 같기만 한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고민은 짧았다. 어쩔 수 없다. 이미 스마트폰을 선물받았고, 되돌리고 싶지도 않으니 이번엔 궂은 말 없이 바로 다가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뺨에 닿았는지도 모를 속도로 입 맞추고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짧게 목격한 남자의 속눈썹이 아주 길고 풍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과 닮은 점이었다.
그 사람은 누가 뭐래도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다. 단지 심증뿐만 아니라 15개의 유전자를 분석한 부자 관계 친자 검사표가 증명하는 것이었다.
*
눈앞으로 짙은 고동색에 금색 체인 무늬가 그려진 손수건이 스윽 들어왔다. 남자의 손인 것을 보아하니 영하가 캐스팅 매니저라고 오해한 공무원 남자일 거라 추정했다.
영하는 고개도 들지 않고 잘 접힌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아 냈다. 한참을 울었더니 목이 말라 멀리 두었던 음료를 들어 마셨다. 손수건을 건네준 고마운 공무원은 아직도 근처에 멀뚱히 서 있었다. 눈물을 닦을 것을 건네준 게 고마워 “앉으세요.” 하고 이야기했다. 나오는 목소리가 떨려 형편없었다. 다시는 말하지 않으리라.
“남자도 가끔 울 때 있죠. 저도.”
“…….”
안 물어봤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냥 네 자리 가서 앉으셔도 돼요.’라는 의미였는데 저 남자가 맞은편에 가까이 앉았다. 눈치도 더럽게 없지.
영하는 신경질적으로 포크를 들어 당근 머핀을 쑤셨다. 해적 게임을 하듯 이곳저곳으로 찔러 넣으니 동그란 머핀은 순식간에 부스러기가 되어 모래처럼 변했다. 먹으려면 포크로는 도저히 불가능이고 숟가락이 있어야 할 판이다. 그쯤 되어 흥미를 잃곤 포크를 내렸다. 눈물 뒤에는 분노다. 이제는 절망감이 아닌 악이 치솟았다.
“맛없었나 보네.”
“맛있어요. 드세요.”
“이거 먹으려면 추하게 접시째로 들고 입 안에 흘려야겠는데.”
“…….”
“제가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직업이라.”
괜히 앉으라고 했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이미 충분히 젖은 손수건으로 눈꺼풀을 닦아 냈다. 눈가가 뜨겁다. 울고 나니 몸도 지쳐 무스탕이 거추장스러웠다. 이딴 걸 입고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누구 보여 주려고 이런 불편한 옷을 입은 거야? 당연히 아빠 보라고 입고 왔다.
그 생각에 미치니 겨우 그친 눈물이 다시 흘러 내려놓은 손수건을 또 손에 쥔다. 건너편에 앉은 남자 때문에 고개를 들지도 못하겠기에 더 괴로웠다. 굵은 눈물방울이 테이블 위로 떨어져 투명하게 고인다. 영하는 쓴 입을 삼키곤 결국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슴이 답답해 여러 번 입으로 호흡했다. 맞은편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길래 숨을 훅 뱉고 겨우 허리를 들자 그 남자가 다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잇속으로 욕설을 뱉는 순간 그가 한 움큼 가져온 티슈를 내밀었다.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걸 받아 뺨을 닦아 낸다. 하얀 뺨이 붉은색으로 얼룩지고 눈가가 온통 젖었다. 관자놀이에 닿은 머리카락도 젖어 들어 형편없는 꼴이었다.
애써 다른 생각을 하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남들 다 보는 카페에서 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남들에게 좋은 구경만 시켜 주는 일이다. 다 큰 남자가 이러고 울면 대부분 여자 친구한테 차였다고 생각하겠지.
손안에 가득 있던 티슈의 절반을 사용한 영하는 겨우 누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운 흔적이 역력하지만 조금 전보단 확실히 나아진 모습이었다. 남자와 눈을 마주치곤 부끄러워 고개를 획 돌렸다.
나가야지. 그러나 그쪽이 먼저였다.
“볼일이 있어서 저는 이만 가 봐야겠네요.”
“네…….”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는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책을 쇼핑백에 넣어 챙겨 든 그는 영하가 젖은 손수건을 든 채 내밀자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호감형의 타입이어도 영하는 왜인지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껄끄러운 사람이다.
“손수건. 제가 첫 월급 받고 산 비싼 거라서요.”
“드릴게요.”
“빨아서 주세요.”
“빨아서… 잠시만요. 빨아 올게요.”
“그거 말고 드라이해서 주세요.”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있다.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주기에도 민망해 빨아서 주긴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냥 화장실에서 비누로 손빨래하는 경우였다. 황당한 얼굴로 올려다보니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대답할 뿐이다.
“누가 손수건을 드라이해요?”
“오십만 원이에요.”
웃기지 마. 웬만한 명품도 손수건이 그 정도로 비싸진 않다. 그러나 남자는 막무가내로 손수건을 도로 영하에게 넘겨주고는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 서민석
뭐야. 공무원, 공무원 그러더니 검사였네. 우는 자신에게 손수건을 내밀어 준 것은 고맙지만 드라이해 달라는 말은 당황스럽다.
영하는 당황함 속에 언뜻 감긴 불편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명함을 받아 들었다. 손수건도 외투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대충 빨아서 택배로 보내 버릴 테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짐을 챙겨 서민석과 정반대로 향해 걸었다.
최세계가 도착한 것은 바깥을 배회하는 영하의 빨간 눈이 가라앉고, 엄동설한의 차디찬 냉기가 뺨을 지나 뼈 속을 무참히 파고들었을 때쯤이었다.
영하는 바람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골목길 사이에 서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고급 차 한 대가 골목길 앞을 가로막고 선다. 미끈한 세단에서 기사가 열어 주는 차 문에서 나온 남자는, 당연하게도 최영하의 아버지였다.
셔츠까지 블랙으로 입어 전신을 새카맣게 무장한 그는 빨간 벽돌과 금이 간 콘크리트 건물 사이에 겨우 둘이 들어갈 만한 좁은 공간에 외로이 서 있는 영하를 보며 웃었다.
“서점 간다더니 왜 여기 있어?”
“그냥 걸었어. 심심해서.”
가까이 걸어온 세계가 가죽 장갑을 벗고 영하의 손부터 붙잡았다. 냉랭한 손가락을 매만져 보곤 혀를 차더니 사이즈가 한참 남는 장갑을 손에 끼워 준다. 영하는 조용히 관망하듯 제 손을 내려다본다.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살갗이 너무 아프다. 너무 아파서 소리 낼 수도 없었다.
손목을 완전히 덮도록 장갑을 바짝 당긴 세계는 곧 영하를 훑어보곤 짧게 감탄했다. 그러고는 시원하게 입꼬리를 들었다. 장갑을 벗어 준 손으로 두 볼을 쥐더니 역시나 손과 다를 바 없이 얼음장 같은 피부에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왜 이렇게 예쁘게 입고 나왔어. 누구 보여 주려고.”
“…….”
“설마 데이트한 건 아니지?”
그 순간 욱하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고 눈앞이 번쩍였다.
내가 무슨 생각과 어떤 마음으로 이 추위에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빙빙 돌며 걸었는지 알 리가 없지. 그가 그런 걱정 따위 할 리가 없다. 그러니 이 모습을 보고 데이트라도 한 것 아니냐고 농담하는 거지.
영하는 떨어지던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한다. 스스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눈이 마주치자마자 세계의 미소가 옅어졌다.
“내가 데이트를 하든 말든. 아빠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뭐?”
곧이어 한쪽 눈가가 찌푸려진다. 추울까 봐 장갑도 벗어 고이 끼워 줬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이 모양이니 황당할 법했다. 그러나 영하는 이해해 주고 싶지 않았다.
세 걸음 뒤에 서 있던 기사가 자리를 피하는 것을 힐끗 본 영하는 다시금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아들이 왜 이러나 싶어 궁리하는 모습이었다. 목 안에서 간질간질 차오르는 말을 더는 참아 낼 수 없다. 토해 내듯 소리쳤다.
“왜 내가 승준이한테서 아빠 약혼한다는 소식을 들어야 해?!”
그러면서도 아니라고 해 주길 바랐다. 무슨 헛소리를 듣고 아빠한테 이렇게 버릇없이 구냐고 혼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약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굳어진 그의 표정이 당황스럽게 바뀌는 것을 보며 영하는 숨을 삼켰다. 울분이 치솟았다.
“언제까지 말 안 하려고 했어. 약혼식 전날 말해 주려고 했어?”
“…곧 말하려고 했어.”
자신 없는 그의 말투에서 진심을 느꼈다. 절망이 확실히 형태를 드러내자 울컥 위액이 역류하는 것 같아 명치를 쿵쿵 두드리며 뒷걸음질 쳤다. 세계가 한달음에 다가왔다. 입술을 여러 번 붙였다 뗀 영하는 등에 닿는 전봇대에 도망치는 것을 멈췄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영하야.”
“왜 갑자기 약혼을… 아빠 결혼하고 싶어?”
“나도 할 나이잖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아빠같이 다 큰 아들 둘 있는 남자랑 누가… 대체 어떤 여자가….”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다.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다. 그 생각만이 간절하게 들어 어깨를 돌리곤 그를 지나쳐 무작정 걸었다. 얼마 걷지도 못했는데 뒤따라온 최세계가 영하를 붙잡았다.
“어디 가.”
“지금은 아빠 얼굴 보기 싫어.”
“아빠가 약혼한다는 게 그렇게 큰일이야? 다 큰 아들이 울 정도로?”
좀 전에 당황한 기색은 어디 갔는지.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과 말투로 영하를 대한다. 어르고 달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강압적인 것 같기도 한.
“안 울어.”
“너 울어. 울잖아.”
그가 검지로 뺨을 가볍게 훑는다. 손가락을 타고 훔쳐 낸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영하는 제 눈물을 남의 것 보듯이 보곤 시선을 돌렸다.
“알아서 가. 난 집에 안 들어갈 거니까.”
“안 들어가면. 갈 데는 있고?”
“그런 걱정 필요 없어. 어딜 가든 가겠지. 아는 남자 집이나.”
영하의 입에서 ‘남자’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최세계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부지불식간에 사나운 기색이 그를 삼켰다.
“최영하.”
“놔. 아빠 얼굴 보기 싫다고 했잖아.”
“화내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는데 일단은 싸워도 집에 가서 싸워.”
“싫어. 싫다니까!”
“그만 건방지게 굴고 입 다물고 차에 타.”
집에 가지 않겠다고 할 때부터 가라앉은 목소리는 영하가 반항하자 거칠게 으르렁댔다. 그에게서 도망가듯 반대편으로 뛰려는 영하의 팔을 막무가내로 붙잡고 질질 끌어 차 앞으로 데려갔다.
그 집에 들어가 단둘이서 이성적으로 말할 자신이 없었다. 본성을 잃고 폭주해 무슨 말을 지껄일지 모른다. 가고 싶지 않다.
“아프다고! 하지 마!”
“조용히 하라고 했지.”
드문드문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이 닿았으나 영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큰 손에 강제로 잡힌 팔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아팠다. 단순히 힘에 제압된 고통이 아니었다. 결국 마주한 현실이 바늘이 되어 피부를 찔렀다.
팔을 때리면서 떼어 내려고 할수록 더 세게 붙잡아 뼈마디가 저린 통증에 신음했다. 뜨끈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고, 땅에 발바닥을 바짝 붙이고 버티려고 해도 당기는 힘이 훨씬 강해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던져지듯 차 안으로 넘어진 영하는 울음을 터뜨리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한 번도 이렇게 거칠게 대한 적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세계는 영하를 늘 조심스럽게 다뤘다. 진심으로 화를 내거나 손을 든 적은 없었다.
이제 약혼녀가 생겼다고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건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질투심이 피어올라 고통스럽다. 이런 멍청한 짓, 하고 싶지 않았다.
기사에게서 차 키를 받은 최세계가 명령했다.
“벨트 매.”
그가 차에 올라타자마자 문이 곧장 잠겼다. 영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없는 사람 취급했다.
기어를 드라이브로 변경한 그가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영하는 안전벨트에는 손도 대지 않고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라디오도 틀지 않은 차 안은 바깥의 소음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지나치게 고요하다. 이명이 들릴 지경이었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에 진입하자, 이제 영하는 그가 벨트를 매 주지 않은 것이 야속해 또 울었다. 습관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곤 젖은 손등을 바지에 벅벅 문질러 닦아 낸다. 겨울의 낮은 짧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바깥 사위가 온통 밤처럼 새카맣게 내려앉았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받아 차량을 멈춘 세계의 손이 부지불식간에 눈앞으로 나타나더니 영하의 마음을 읽어 낸 것처럼 벨트를 뽑아 매어 준다.
아들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짧게 한숨을 쉬며 영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깐 사이 그도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만큼 영하도 차오르는 울분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이제는 분노 대신 서러움이었다.
“일단은 집에 가서 말하자.”
“말 안 해.”
“어린애같이 그만 굴어. 너 이제 성인이야.”
날 이렇게 어리광만 부리게 만든 게 본인이면서. 입술을 짓씹었다. 철없다고 하더라도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서른여섯 살이니 결혼 적령기에 꽉 찬 나이이긴 했다. 대기업을 이어받을 사람이니 아마 끝까지 미혼으로 지내진 않을 거라고 잠깐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영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했다.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주차하기도 전에 얼른 벨트를 풀어 차에 내려 집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옷을 벗어 던지고 손을 한참이나 씻고 나와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그사이 뒤따라온 세계가 영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골목에서 그랬던 것보단 확실히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말 좀 해.”
“…….”
“아까는 울고불고 난리더니 이제는 입 다물고 말을 안 해?”
“…….”
“네가 화내는 이유를 설명해 봐. 할머니가 이틀에 한 번씩 선보라고 야단이었던 건 너도 알잖아. 아빠도 이제 서른여섯이야. 더 미루면 힘들기도 하고, 회사 물려받으려면 조금의 흠결도…….”
“몰라. 나 회사 일 관심 없어.”
“관심의 문제가 아니야. 최승준도 별말 없어. 그래, 너야 내가 워낙 오냐오냐했으니 서운한 건 알겠는데.”
서운? 고작 서운해서 내가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겨우 진정했던 게 무색하도록 감정이 격양되기 시작했다.
처음 저택에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이 집에 이사 온 순간까지 인상 깊었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아빠와의 기억이었다. 지난 6년의 세월 속에 온통 최세계밖에 없었다. 너무 깊게 자리해 다른 사람은 발 들일 틈새도 없다.
어린 영하는 빨리 철이 들었고 다른 아이들보다 조숙했다. 비단 겉모습뿐만 아니라 숱하게 애어른 소리를 들으며 자신보다 엄마를 더 신경 썼다. 떼쓰지 않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애써 참고, 외로움을 감추고. 참는 것만 배워 온 최영하가 어리광을 부리는 상대는 오로지 최세계 하나뿐이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다. 자기 앞에서는 마냥 어리광 부릴 수 있도록.
“아빠는 약혼 결정할 때 내 생각 안 했어?”
“했어. 네가 충격받을 거 알았어. 그래서 쉽게 말 못 했던 거야.”
“거짓말하지 마! 정말 내 생각을 했으면 결혼 안 할 거야.”
“억지 부리지 마.”
“나 버리려는 거잖아!”
소파의 등받이를 붙잡고 서 있다 울분을 토하며 손에 집히는 대로 들어 집어 던졌다. 셔츠를 입은 너른 가슴팍에 오렌지색 리넨 소파 쿠션이 퍽- 부딪쳐 바닥으로 떨어진다.
영하는 남은 쿠션도 들어 마구잡이로 그에게 던졌다. 마지막으로 던져진 쿠션은 몸에 맞기도 전에, 세계의 손에 붙잡혀 바닥으로 흩어졌다. 쿠션 세 개를 내리 받은 그는 흐트러짐 하나 없다. 눈 끝을 조금 좁혔을 뿐이었다.
“내가 아프길 바라면 쿠션 말고 다른 걸 던져야 할 텐데.”
명백한 비웃음이다. 열이 올랐다. 영하는 그를 상처 입힐 수 없었다.
“그보다, 내가 왜 널 버려.”
“아빠도 엄마처럼 날 버릴 생각이잖아.”
평생 발레만을 사랑했던 엄마에게도 새로운 사랑이 생겼다. 단지 그게 영하가 아니었을 뿐이다.
언젠가는 엄마의 첫 번째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엄마가 사랑하기 때문에 발레를 시작했고, 발레가 전혀 즐겁지 않았는데도 쉬지 않고 붙잡았다. 그래야만 엄마와 함께할 수 있었고 엄마의 관심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망주였던 엄마에게서 미래를 뺏어 가며 태어난 몸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했다. 그래 봤자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지만.
엄마는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억지로 발레를 하는 아들이 아닌 평생을 함께할 남자를 만나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발레 교습소를 차리고 싶다고 했다. 거기에도 영하의 자리는 없었다.
“나 버리지 마. 안 돼…. 이제 아빠 없으면 난 어떻게 살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고백하던 엄마의 얼굴. 처음으로 엄마의 얼굴에서 그늘이 거둬졌다. 행복해 보였다. 그녀의 행복이 곧 영하의 행복이라 영하는 본 적 없는 아빠의 집으로 가는 것을 승낙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영하는 포기할 수 없다. 영하의 행복은 좀 더 세밀해져 촘촘하게 조건이 달려 있었다.
그의 곁에는 오로지 자신만이 존재해야 했다. 다른 이와 공유할 생각 따윈 없다. 아빠의 첫 번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어야만 했다.
몸을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바닥에 떨어진 쿠션을 소파 위로 던진 세계가 한 발짝 만에 가까이 다가와 영하의 뺨을 쥐자 새카만 눈빛이 이리저리 튄다. 그가 뺨을 다시 고쳐 잡았다. 어깨 너머를 보던 시선이 마주했다.
최세계의 얼굴이 한 치 앞에 있다. 영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머리가 온통 어지러워 서 있기도 곤란해 다리의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무슨 소리야, 응? 그럴 일 없어. 버리긴 뭘 버려, 영하야.”
“버릴 거잖아. 나, 흐으… 할아버지 집에 놔두고 갈 거잖아. 나 거기서 못 산단 말이야. 거기서 살면 말라 비틀어져 죽어 버릴 거야. 괴로워서 못 살아……!”
“천천히, 숨 쉬어. 응? 안 버려. 약속할게.”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결혼해도 여기서 같이 살 거야. 본가로 돌아가는 일 없어.”
달래 주려고 하는 말이었겠지만, 영하는 그 말에 입술을 벌리고 그를 바라본다.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안색이었다.
“여기서……?”
“그래. 여기서.”
확고한 음성. 열네 살의 기억에 머물던 영하의 정신이 송두리째 현실로 끌려 나왔다. 찬물로 얻어맞은 듯 몸이 저렸다. 동공이 좁혀지고 비명처럼 높은 음성이 거실을 가로질렀다.
“싫어…! 안 돼. 누구, 누구 마음대로 여기다 신혼집을 차린다는 거야?”
“내 집이니까, 내 마음대로지.”
발악에 가까운 영하와 달리 최세계는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희미한 미소를 감출 생각도 없이 축축한 뺨을 매만졌다.
“안 돼. 그러기만 해 봐…!”
“싫으면 네가 반대하는 확실한 이유를 말해. 응? 영하야.”
“그냥 싫어…….”
“그냥 말고. 더 정확하게 말해 봐. 응? 들어 보고 아빠가 다시 생각해 볼게.”
영하는 더듬더듬 바닥 위를 지탱하곤 그를 본다. 귀에 아릴 듯 달콤한 목소리였다. 세계는 가늘게 눈을 내리깔곤 영하의 뺨에 입술을 천천히 문질렀다. 마른 어깨를 손바닥으로 쓸고 잘게 떨리는 등을 끌어안은 후,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눈 아래와 광대 위를 혀로 핥았다.
흰 뺨에 뜨끈하고 물컹한 것이 닿아 뱀처럼 기어 올라가는 감각이었다.
“흐윽.”
순식간에 등에 전류처럼 저릿한 감각이 치고 올라가 영하의 몸이 휘청거렸다.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 세계가 먼저 잡아 품 안에 가뒀다.
으흑. 울음소리를 흘리며 허겁지겁 그의 목에 매달렸다. 온종일 온몸이 아프다. 품에 안겨 그만 쉬고 싶었다. 사실 모두 거짓말이고, 단지 놀리기 위한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말해 주면 다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세계는 연신 귓가에 입을 맞추며 대답을 종용한다. 옷 위로 허리를 매만지는 손길도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이어 입술을 옮긴 그가 귓바퀴를 간지럽히고 코를 문질러 대어 정신이 혼몽했다. 나쁜 생각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치… 섹스하기 전 애무와도 같은…….
“말해 봐. 둘밖에 없잖아.”
“…….”
“이 집엔 둘밖에 없어. 다른 사람을 여기 데려와 살게 하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고 시위하는 거로는 해결되지 않아.”
“그냥, 그냥 아빠가 결혼하는 게 싫어.”
“왜 싫은 건데.”
“아빠를… 아빠를 뺏기기 싫어. 왜냐하면 이제 엄마도 없고 나한테 가족이라곤 아빠밖에 없잖아…….”
“아닌 것 같은데.”
횡설수설 내뱉었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모르겠다. 바닥 위를 짧은 손톱으로 긁다 그를 올려다본다. 이 이상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탄탄한 팔뚝 위에 손을 올렸다.
다른 이에게는 몰라도, 세계는 영하에게만큼은 아주 다루기 쉬운 남자였다. 불같이 화를 내는 중에도 영하가 어깨에 기대어 몸을 맞추고, 애교를 부리면 졌다는 듯이 자신의 뜻을 굽혔다. 그러니 이번에도 예쁘게 굴면 약혼도 결혼도 모두 무를 것이다. 이유도 묻지 않고 한숨을 쉬며 단지 품에 안고 달래 줄 것이 분명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젖어든 눈길이 마주쳤다. 그는 목구멍을 울리듯 나직하게 웃더니 몸을 당겨 안아 달래 주는 대신 귓불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아읏!”
통증에 비명을 지를 만큼 강한 힘이었다. 피라도 났을까 두려워 반사적으로 만져 보려 하자 억지로 팔을 잡아 내리더니 귓불에 난 잇자국 위로 혀가 지나간다. 그 감각에 몸서리쳤다.
방어하듯 가는 몸을 잔뜩 옹송그렸다. 세계가 다시 웃음을 흘렸다. 퍽 즐거워 보였다. 웃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영하는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다.
“하으으…….”
이상했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리고 무서웠다. 그의 품 안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도 잦아들어 슬그머니 가슴팍을 밀어내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영하는 지독한 말을 들은 것처럼 어깨를 떨었다.
“확실하게 말했어야지. 네 남자를 뺏기고 싶지 않다고.”
하얗게 질려 온몸의 뼈마디가 굳은 듯 움직일 수 없다. 세계는 바짝 굳은 몸을 배려 없이 다시 끌어안고는 젖은 앞머리를 찬찬히 넘겨 주며 희게 질린 얼굴을 꼼꼼히 살펴본다.
영하의 크게 뜨인 두 눈이 온전히 그를 향하고 있다. 둥글게 올라간 속눈썹이 길고 빽빽하다. 하얀 공막에는 점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는 여전히 웃는 채였다. 마주친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넌 매번 아닌 척하지만, 한 번도 날 아빠로 여긴 적 없어.”
“무슨, 아빠라고, 매번…….”
끝맺지 못했다. 머리칼을 매만지던 손이 스르륵 내려가 옷 속을 파고들더니 배꼽 부근에 도달했다. 넓은 손바닥이 아랫배를 힘 있게 내리눌렀다. 갑작스러운 압박감과 남의 손길이 닿을 일이 거의 없는 맨살이 손바닥과 닿는 순간, 영하는 머릿속으로 시커먼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요의가 치솟아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손은 느리고 둥글게 배 위를 문질렀다.
말랑한 살결이 손바닥에 부드럽게 마찰했고 동시에 힘을 줘 내리누르는 그 감각이 온전히 느껴졌다.
떨리는 뺨에 얼굴을 가까이 붙인 그는 영하의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나직이 물었다. 고아한 목소리로 뱉는 단어들이 하나같이 천박했다.
“여기에 아빠 좆이 박히는 상상 해 봤어?”
“아, 아—, 아흐, 아니, 아니야….”
파드득 떨며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세차게 젓고 발로 바닥을 밀었다. 그러나 등이 꽉 붙잡혀 한 발자국도 멀어지질 못했다.
여전히 배 위를 내리누르는 손길에 머릿속이 온동 엉망진창이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충격에 높은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들어서는 안 되었다.
“네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어.”
“…….”
“다만 네가 발정하는 대상이.”
“…….”
“나라는 얘기지.”
“…아니, 아니야! 아니야!”
끝내 온 힘을 다해 소리치며 버둥거렸다. 악을 쓰며 손을 뻗고 발버둥을 쳐 밀어내자 맨살을 만지던 손이 빠져나가고 영하는 그 틈에 엉금엉금 기며 뒷걸음질 쳤다.
겨우 조금 멀어졌나 했더니 쑥 뻗어 와 발목을 붙잡아 당기는 손에 미끄러져 바닥을 긁으며 다시 돌아왔다.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곧바로 두 귀를 손으로 막고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귀는 눈과 달리 가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조금 작아진 목소리가 여전히 똑똑히 들렸다.
“날 네 남자로 생각했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커서 만난 아버지에게 너처럼 어리광 부리는 녀석은 없어.”
억울했다. 참고 넘기에는 너무 억울해 숙인 고개를 쳐들고 대답했다.
“…그건 아빠가 먼저!”
“그래, 내 핑계 댈 줄 알았어. 내 잘못이 없다곤 나도 말 안 해. 그럼 선택해야지. 내가 결혼하게 내버려 둘지, 아니면 막기 위해 네 진심을 말할지. 하지만 무작정 울기만 한다고 바뀌는 건 없어, 최영하. 말 못 하겠으면 고개라도 끄덕여 봐.”
“…싫어.”
“내가 안아 줬으면 좋겠어?”
흐으….
결국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보기 싫다. 야살스러우면서도 자상한 목소리가 귀 가까이 닿았다. 자꾸만 괴롭힌다. 달콤한 것으로 꾀어 처참한 수렁 속으로 이끌고 있었다. 지옥 속으로 가고 싶진 않다. 행복해지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 끝은 더러울 게 자명하다. 영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낭떠러지가 뻔히 보이는 길로는 걷지 않는다.
“다른 여자들 말고 널 안아 줬으면 좋겠어?”
“아빠, 그만해….”
“아빠도 널 안고 싶어. 네 옷을 찢어발기고 구멍에다 내 좆을 박아 버리고 싶어. 이 납작한 배 안에 다 담기지도 못하도록 정액을 싸지르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는지 알아?”
“그만해… 듣기 싫어…. 나한테 왜 이래! 아빠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단 말이야…….”
왜 굳이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다. 뭐 하나 제대로 가진 것이라곤 없는 삶이다. 하다못해 엄마마저 잃었다. 유일하게 남은 건, 눈앞에 이 남자밖에 없다.
“아빠…….”
배 속이 너무 쓰리다. 내장이 뒤틀리는 듯 아팠다.
미간을 찌푸리며 감은 눈을 뜬다. 최세계가 바로 앞에 앉아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최영하가 가진 유일한 것. 오도카니 그를 본다. 나는 이렇게 아파 죽겠는데, 온몸이 쓰라린데, 그는 표정 하나 어긋남 없이 평온하다. 아직도 저를 독촉하고 있었다. 어서 결정하라고, 대답을 하라고.
“그냥, 지금처럼… 살면 안 될까…?”
선을 넘고 싶지 않다. 굳이 갈림길 넘어 갈래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영하는 그 애매모호함을 사랑했다. 이도 저도 아닌 이 순간이 좋다. 선택의 보류는 불안함을 동반하지만, 어느 한쪽의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괴팍한 지금의 사이가 좋다. 자주 껴안고, 예쁘다 말해 주고, 모닝 키스로 깨워 달라는 말이 불편하지 않은 관계. 가끔은 입 맞추고 그것보다 더 가끔은 혀를 얽히기도 하지만 단지 이상야릇한 부자 사이로 치부하고 넘길 만한 지금이 좋았다.
“아빠, 나는… 싫어…. 지금이 좋아. 정말로, 흐, 싫어. 무섭단 말이야. 나는 지금도 충분히 좋은데, 괜찮은데…….”
눈앞이 흐려진다. 아빠의 손을 붙잡아 당기곤 손바닥 위에 뺨을 비볐다. 굵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손바닥을 적셨다. 어리광을 피우려고 했지만, 그가 손을 당기는 바람에 불가능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냉정한 목소리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어리광을 받아 줄 의향이 없는 그는 영하를 내버려 둔 채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겨진 영하는 외면하고 있던 절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그는 아마 끝까지 선택의 기로에 자신을 세워 두리라.
최승준과 똑같은, 단지 아들이 되거나.
그게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