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32화 (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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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철은 소파 한쪽 구석에, 기정은 맞은편 텔레비전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둘 사이, 거실의 한 가운데 바닥에 앉은 선희와 나는 양념 치킨을 뜯었다. 희철이가 발로 내 등을 툭 건드리면 나는 녀석에게 닭다리 하나를 건네주었고, 기정이 손가락으로 선희의 어깨를 톡 두드리면 선희가 녀석에게 남은 닭다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뭐시여, 이것들 지금 뭐하는 거시여. 내외 하냐?”

“캭! 내외라니, 내외라니! 어디서 그런 치욕스러운 말을 지껄이는 거냐, 이 아줌마야!”

희철이와 선희가 발바닥 싸움을 하는 것을 나는 말리지도 않고 구경했다. 기정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닭다리를 뜯었다. 아직도 화해하지 않은 건가. 그런데 그런 일에 화해고 뭐고, 그런 게 필요한가? 게이들이면 사귀면 되는 거지만, 이 둘 같은 경우는 그냥 쌓인 걸 같이 풀었을 뿐인데 한번 씩 웃어주면 그만 아닌가.

나는 컵에 콜라를 가득 따른 후 그것을 들고 엉덩이 걸음으로 기정에게 다가갔다. 쭉 들이켜, 하고 컵을 건네주고 기정이 풀이 죽은 채 ‘고맙습니다’ 웅얼거리더니 콜라 한 컵을 원샷했다. 그리고 곧바로 꺼억, 하는 트림을 발사했다.

“저 교양머리 없는 새끼 좀 보게. 어디 선배들 앞에서!”

“......”

희철의 타박에 기정의 어깨가 더욱 수그러들었다. 전후 사정 같은 것 모르는 선희가 희철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네 후배냐!’하고 기정의 편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발바닥 싸움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를 쓰고 서로의 발바닥을 제압하려던 두 용사는 결국 제풀에 지쳐 얌전히 뜯던 닭다리를 다시 들었다.

“그나저나, 그 놈은 왜 코빼기도 안 보이냐? 인사도 좀 하고, 원래 애인 친구들한테 점수 잘 따야한다는 거 모르나?”

소파에 드러누운 희철이 이번에는 내게 시비를 걸어왔다. 상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선희가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이음동화의 합병 건과 함께 벌써 출판사에 돌고 있는 그에 관한 소문으로 어림짐작하고 있을 것이었다. 눈이 마주친 선희가 제 짐작이 맞냐는 듯 ‘응?’하고 눈썹을 올렸다.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기만 했다.

“걔는 요즘 나도 연락이 잘 안 돼. 바에서 무슨 행사한다는 것까지만 들었는데... 바쁜가봐.”

“그럼 안 바쁠 때 진즉 인사를 올렸어야지.”

“그게... 걔가 워낙 밤낮이 바뀐 일을 하잖아. 인사 시키고 싶어도 시간이 안 맞는데 뭘.”

“저는 그 사람 별로예요. 인상이 나빠.”

기정이 혼자 콜라를 제 컵에 쪼로록 따르면서 중얼거렸다. 상민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선희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닭 뼈를 쪽쪽 빨던 희철이 기정을 향해 뼈를 날렸다. 닭 뼈로 이마를 맞은 기정이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왜요!’하고 제법 반항기 있는 모습을 보였다. 오오, 하고 선희와 내가 감탄을 하는 사이 희철은 주먹을 부들 떨었다. 저 성격에, 아무래도 한 대 칠 것 같아서 얼른 소파에 앉아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이거 놔, 인마! 야, 최기정. 네가 뭔데 정해진 애인이 인상이 나쁘다 어떻다, 참견이야? 네가 정해진 뭔데. 인제 회사 후배도 아닌 주제에.”

“그러는 형님은 왜 자꾸 해진이 형 애인더러 인사를 하라마라, 참견이신데요?”

“내가 한번 자세히 봐야 하니까!”

“그러니까 그걸 왜 형님이 참견하냐고요!”

“오오, 최기정이 덤빈다.”

“우와, 기정이가 덤빈다.”

선희와 나란히 앉아 구경을 하는데, 급기야 희철이 기정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아무래도 아래층에서 올라올 것 같아서 ‘나가서 싸워’하고 나는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선희는 벌써 베란다로 식탁 의자를 끌고 가 자리를 마련했다. 복도에서부터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얼른 의자를 베란다에 놓고 앉았다. 잠시 후 밖으로 나간 희철과 기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곤, 희철이 거의 일방적으로 기정을 패기는 했지만, 기정도 나름 방어와 공격을 하며 맞섰다. 우리는 콜라를 홀짝이며 동시에 ‘오오’와 ‘우와’ 감탄사를 연발했다.

“스케일이 크다.”

“덩치들이 있잖아. 근데... 그래서 그런가, 뭔가 애들처럼 치고받는 느낌도 들고...”

선희가 트림을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근데 쟤들은 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싸우지? 문희철이야 그렇다 쳐도, 순둥이 최기정이 거기에 응수하다니.”

“......이거 비밀인데, 쟤들한테 내가 말했다고 하면 안 돼.”

“응.”

선희는 내게 손가락을 걸었다. 나는 아무도 듣는 사람 없는데 괜히 목소리를 낮추어 그날 있었던 일을 고해바쳤다. 예상대로, 선희가 입을 떡 벌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대’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세상에.”

“웃기지? 아무리 쌓였어도, 게이도 아닌 것들이 서로 고추 비비면서 했대. 웃긴다. 근데... 술김에 일 저질렀단 얘기 되게 많이 들어봤어.”

“......”

“...미..미안!”

“우리도 나가서 한 판 뜰까?”

나는 손바닥을 비볐지만 결국 선희에게 목이 졸렸다. 교묘하게, 정말 눈이 돌아가기 직전까지 목을 조른 채 흔들다가 놓아준 선희는 손바닥을 탁탁 털며 ‘말조심, 어린이’하고 주의를 주었다. 나는 콜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밑에서는 의외로 기정이 희철을 제압하고 있었다. 특별히 주먹을 사용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희철이 주먹이나 발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유도 기술을 사용해 팔과 다리를 꼼짝 못하도록 제압한 것이다. 유도라면 희철이 고등학교 때 했던 건데, 오히려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기정에게 잘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 소문, 진짜야?”

선희가 ‘내일은 날씨가 어떻대?’하고 묻는 것처럼 무덤덤한 말투로 ‘소문’에 관해 물었다. 저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경비 아저씨가 손전등을 비추며 달려오고 있었다. 불빛을 발견한 기정과 희철이 얼른 몸을 떼고 다른 단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경비 아저씨도 호루라기를 불며 쫓아갔다.

“친자확인 DNA 감정 맡겼다는 거 말이야. 누구 자식이든, 일이 그 정도로 커졌으면 어쨌든 이혼한다는 거잖아. ......너한테, 왔어?”

“...응, 내 차를 진짜 똥차로 만들어버리면서 등장했어. 나쁜 놈. 근데 소문 참 빠르다. 어떻게 그런 것도 다 새지?”

“말단들은 몰라. 주간님이 또 물고 온 소식인데, 긴가민가한데다 워낙 예민한 부분이라서 우리 최 팀장한테만 살짝 흘렸대. 야, 그것도 술김에.”

“하여튼 술이 문제지.”

우리는 둘 다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에선 단지를 한 바퀴 다 돌았는지 다시 희철과 기정이 헉헉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호루라기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그냥 들어오면 될 텐데. 희철이 바닥에 주저앉으려 하자, 기정이 희철의 손을 잡고 또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참, 미련들 하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저기, 있잖아, 해진아. 나는...나는 좀 조심스럽다. 만약에 그 사람 친자 아니면, 그쪽 집안에서 또 누구하고라도 결혼 시킬 테고, 그럼 같은 일만 반복되는 거 아냐. 그러면 너, 이젠 못 견딜 것 같다.”

“......응. 그러면 나도, 더는 못 견딜 것 같다. 근데... 선희야, 내가 머리가 좀 나쁜가?”

“흐흥, 좀이 아니지.”

“그게 아니면, 생각한 대로 행동하게 해주는 중추신경계에 이상이 있나?”

“그런가.”

나는 선희의 손에 들린 콜라를 벌컥 마셨다. 그리고 꺼억, 트림을 했다. 선희가 웃었다. 나는 아예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어선 하나씩 나누어 들었다. 무엇을 위해 건배를 해야 할지 몰라서, 이제는 호루라기 소리도 손전등 불빛도 없는데 ‘아직도 달리고 있는 저 둘을 위하여’ 우리는 건배를 했다. 하아, 한숨을 쉬면 검은 배경 위에서 새하얀 입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런데 그 이상민인가 뭔가 하는, 코빼기도 안 비치는 녀석은 어떻게 할 거야?”

“김태준이랑 상관없이 정리해야지. 못된 짓이잖아, 좋아죽겠는 것도 아닌데 그냥 필요하니까 계속 곁에 두는 거. 될 줄 알았는데... 이것도 맘대로 안 되네. 아무래도, 중추신경계 이상이 맞는 것 같아. 병원 가볼까?”

“응, 한번 검사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태준의 정리하라던 협박과는 상관없이, 말하려고 했다. 일주일동안 파티다 행사다, 정말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간간히 전화로만 안부를 묻는 상민에게, 나는 기어코 만나서 할 말이 있다고 전하지는 못했다. 내가 들어 아플 말을 차마 남에게 쉽게 할 수도 없었다. 내 마음이 가볍다고 상대의 마음까지 가볍게 취급할 수는 없었다. 상민이 내게 결혼 어쩌고 했던 말이 그저 조금은 농담에 가까운 것이었기를 바랄 뿐이었다.

“말 해야지. 확실하게 전해야지. 그럴 거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맥주를 꿀꺽꿀꺽 마셔대자, 선희가 ‘무리한다’하고 잔소리를 했다. 확실히, 탄산음료를 마시다 알코올이 들어가니 취기가 더 빨리 도는 것 같았다. 그래도, 왠지 거하게 취하고 싶었다. 나는 냉장고에서 또 한 캔을 꺼내어 왔다. 이번엔 코를 잡고 꿀꺽꿀꺽 마시다가 캬아, 소리를 내며 금방 비어버린 캔을 우그러뜨렸다. 선희가 픽 바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다가 또 술김에 뭔 일 저지르지.”

“흐흥. 이번엔 누구랑?”

“으하하하!”

배를 잡고 웃던 선희가 내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그리고 입술을 물었다 말았다, 하며 ‘으음’하고 말을 끌었다. 할 말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안 어울리게. 그냥 말해, 어깨를 툭 치자 훅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네가 정 그러면, 그게 정말 네 맘대로 안 되면 말이다... 야, 우리가 한번 살지, 두 번 사냐. 그냥 눈 딱 감고 가지 말라고 해버려. 그러다가 애정도 식고 정도 떨어지면, 그때 깔끔하게 떨어지면 되고, 뭐.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그냥 맘 가는 대로 해버려. 그래서 깨지면... 깨지면... 까짓, 우리 아직 젊은데 뭘!”

“흐흐흥. 우린 아직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

“크크큭....”

“으하핫! 아이고 배 아파, 이게 언젯적 노래야, 흐흐흣...”

선희와 나는 배를 부여잡고 한참을 웃었다. 술기운이 확확 올라 밤공기가 시린데도 얼굴이 뜨끈했다. 베란다의 창문 밖으로 얼굴을 빠끔 내밀자, 아래로 희철과 기정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괜히 헛기대 할까 얘기 안 했는데 말이다, 이것도 역시 우리 입 가벼운 주간님께서 그 술자리에서 흘린 말인데... 그 어린양 말이다, 친자인지 남에 자식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김태준 아들, 이제 막 백일 지난 애긴데 김태준 판박이란다. 김태준 어릴 때 모습 봤던 중역들은 타임머신 타고 온 베이비 김태준 아니냐고 그런대. 그래서 친자확인 어쩌고 하는 소문을 다들 긴가민가한다고. 어때, 좀 위로가 돼?”

술기운인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태준의 어머니는 분명, 친자든 아니든 이혼을 시키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되면, ....괜찮을까. 정말 그렇게 될까. 뜨거운 물을 끼얹고 탁상시계를 집어던지고, 등을 걷어차고 머리카락을 뜯으며 그를 비난했지만, 아니다,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화가 났지만, 그가 미운 게 아니었다. 몸속이 들끓어 차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어 날뛰었지만, 아니다, 분노가 아니었다.

선희가 다시 한 번 ‘응? 위로가 되냐고’하고 물었다. 나는 입술을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이 막 퐁퐁 샘솟아?”

“...응...”

“으이그, 이 웬수야! 더는 못 견딜 것 같다며! 어휴- 너, 나 임신하면 내 옆에 얼씬도 하지 마. 조금이라도 닮을까봐 겁난다, 겁나.”

“우..우린 아직 젊다며! 괜찮은 미래가 있다며!”

“네가 서태지처럼 어느 한 분야에 재능이나 있고?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한테 괜찮은 미래는 무슨, 그냥 그럭저럭 사는 거지.”

칫, 입을 삐죽이는데 마침 희철과 기정이 나란히 집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빠끔 내밀고 상태를 확인하니, 둘 다 그리 치료가 시급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좀 고분고분해진 것 같아 땀 냄새 집안에 배기게 하지 말고 둘 다 얼른 샤워를 하라고 일렀다. 희철이 기정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뭐?!’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요..욕실이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샤워를 하냐! 그것도 다 큰 사내놈 둘이서!”

선희가 옆에서 ‘누가 같이 하라고 했나, 왜 저래’하고 중얼거렸다.

“그럼 한 명씩 기다렸다 하든가. 너도 웃긴다. 너 예전엔 나랑 같이 목욕탕 가서 서로 등 밀어주고 그랬었잖아. 그렇게라도 해서 좀 풀어. 계속 그렇게 싸울 거야?”

타박을 주자, 이번엔 기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와 희철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예?!“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해진이 형하고는 막 목욕탕도 같이 가고, 막 서로 등도 밀어주고, 정말 그랬어요? 그랬어요?”

“저..저놈이 미쳤나. 야, 술을 마시려면 곱게 마셔! 어디서 헛소리를! 나..나는 집에 간다! 집에 가서 때를 밀든 샤워를 하든, 갈 거다!”

그리곤 희철은 얼마나 뛰었는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 열을 내며 다시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 뒤로 기정이 우물쭈물하더니 ‘저도요!’ 90도로 인사를 하곤 서둘러 신발을 꿰신고 나가버렸다. 뭐 저런 것들이 다 있어, 지들이 어지럽힌 거 치우지도 않고. 씩씩거리자 선희가 어깨를 토닥이며 ‘같이 치워줄게’하고 관대함을 베풀었다.

“결혼하면 어른 된다는 게 진짜구나.”

“내 마음은 원래부터 태평양처럼 넓고 깊었단다.”

그러나 선희가 가진 넓고 깊은 그 무엇은 관대함이 아니라 술독이었다. 슬슬 발동이 걸린 선희는 통닭도 남았는데 치우는 셈치고 한 잔 더 하자고 나를 고셨다. 순진한 나는 냉장고에서 남은 맥주를 모두 꺼내어 왔다. 선희가 말짱한 정신으로 닭 뼈를 고를 때, 나는 이미 그런 선희가 두 명으로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고, 내 것인 줄 알고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뜬금없는 ‘여자’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응, 자기. 아니, 지금 막 일어나는 중. 응, 당연하지. 얼른 갈게, 기다려.”

내 표정이 어떠했는지, 선희는 전화를 끊고는 내 얼굴을 보며 ‘그 표정 뭐야’하고 다시 원래의 목소리로 위협했다.

“토하고 싶다.”

“욕실은 저기다. 나 일어난다. 내가 꼭 치워주려고 했거든? 그런데 우리 최 팀장이 택시도 타지 말고 그냥 날아오라네? 이것 참 미안하게 됐구나, 친구야.”

“꺼져.”

선희가 강아지에게 하듯 내 턱을 쓰다듬고는 현관으로 뛰어갔다. 잡으려고 했지만, 두 명의 선희 중 어느 게 진짜 선희인지 알 수 없었다. 비틀대며 일어서자 ‘안 나와도 돼’하고 착각어린 말을 지껄였다.

“무..물도 좀 사고... 찬바람도 좀 쐬어야겠어.”

“그래, 그럼 같이 나가.”

나는 결국 선희에게 몸을 기댄 채 밖으로 나왔다. 이온음료와 물을 사고, 아이스크림을 쭉쭉 빨며 선희가 택시를 잡아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시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오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아직 추운 초봄,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에, 거기다 아이스크림이나 빨고 있는 취객이라니.

“...어쩐지, 춥더라니.”

이런 꼴로 나와선 아이스크림을 골라 눈앞에서 먹고 있는 꼴을 보고도 말리지 않다니. 강선희, 배신자. 이래서 친구는 결혼하면 땡이라고 하는구나. 서럽다. 문희철이는 절대로 결혼하지 말라고 해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드러난 종아리에 추위로 닭살이 오돌오돌하게 돋아 있었다. 코를 훌쩍이며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문득, 위에서 비치고 있던 가로등의 주홍빛이 어둡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뒤를 올려다보았다.

“추운데 여기서 뭐하는 짓이야.”

“...변태다. 변태 스토커야.”

“......”

“추워. 배도 따끔따끔하고.”

머리 위로 비치는 가로등 불빛에 음영이 진 얼굴이 무시무시했다. 달래려고, 핥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리곤 나를 아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내가 한심해 보이냐고 묻자, 아무렇지도 않게 ‘응’하고 대답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옳은 말인 것 같아서 ‘나도’하고 동조해주었다. 무릎 위로 턱을 받치고 몸을 잔뜩 웅크리자, 그가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고 일으켜 세웠다. 무릎에 힘이 빠져서 비틀거리자, 그는 결국 한숨을 쉬곤 ‘업혀’하고 등을 수그렸다.

나는 그의 등에 업힌 채 아이스크림을 모두 먹어치웠다. 아이스크림의 콘 부스러기가 그의 어깨에 잔뜩 떨어져있었다. 그는 나를 침대로 무지막지하게 던져버리곤 자신의 어깨를 털었다. 침대 위에서 나는 배를 부여잡고 뒹굴었다. 그냥 속이 쓰린 정도였는데, 나를 던져버린 남자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내 엄살을 알아차렸다는 듯 뻔뻔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널 어떻게 할까?”

“잘해줘야지, 던지지 말고.”

내 현명한 대답에 태준은 기가 차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나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사진’하고 웅얼거렸다. 보고 싶었다. 정말, 닮았을까.

“무슨 사진.”

“아..아이... 원래 백일 때 사진 찍은 거 부모들이 지갑에 막 넣어 다니잖아. 김태준도 그런 닭살스러운 짓, 하나?”

일부러 자극시키려고 거들먹거렸는데, 그는 ‘응’하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손을 들어 그가 내미는 사진을 움켜쥐었다. 똑바로 보지 못하고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며 확인한 사진 속 아이의 얼굴은,

“...똑같다.”

“당연하지, 내 아들인데.”

아직 아기인데, 동글동글한 아기인데도 눈매며 아직은 흐릿한 눈썹 형태까지 쏙 빼닮아 있었다. 훅,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정말 다신 그런 일 안 겪어도 될까. 그렇다고 우리 둘이서 결혼 같은 거야 당연히 못하지만, 그래도 김태준이 다른 사람이랑 또 결혼하는 꼴은 안 봐도 되는 건가. 아이 엄마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그 얘기는 그쪽에서 먼저 꺼냈다니까. 정말, 그래도 되나. 미안하지만, 미안한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파리한 안색으로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떨고 있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 속이 따끔거렸다. 배를 움켜쥐자 태준이 침대에 앉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가 아니라 배라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토기가 올라왔다.

“토..토할 것 같아...”

입을 틀어막은 채 웅얼거리자, 그가 내 몸을 달랑 들어 욕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앉아있는데, 태준이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그 느낌이 좋아서, 왠지 속이 쓰린 것도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이제 괜찮은 것 같다고 머리를 들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차라리 한번 토해 버려’하고 다시 고개를 숙이게 했다. 그리고 입 속으로 그의 손가락이 무자비하게 들어왔다. 혀를 누르고 목구멍 더 안쪽으로 찔러 넣어지는 손가락에 다시 토기가 부글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노란 위액까지 모두 토해버렸다.

“너 또 이렇게 술 마시면 정말 혼날 줄 알아.”

“아..아니야, 조금밖에 안 마셨는데... 콜라 하고 같이 마셔서...”

“시끄러워. 입 헹궈.”

내가 입을 헹구는 동안 그는 토사물로 엉망이 된 자신의 손과 옷소매를 씻어냈다. 미안해서, 손바닥으로 물을 담아 그의 손에 끼얹어주었다. 태준은 내가 하는 모양을 가만히 보다가 문득 ‘야, 정해진’하고 이름을 불렀다. 아무래도 화가 난 것 같아서 젖은 손을 티셔츠에 대충 훔쳐 닦으며 쭈뼛 고개를 올리는데, 갑자기 그가 입을 맞추어왔다. 비위도 좋구나, 생각했다.

“..으응...더러워... 냄새 나...”

“냄새 안 나, 깨끗해.”

분명히 냄새 나는 것 같은데. 고개를 돌리며 그의 어깨를 밀었지만, 태준은 내 뒤통수를 꽉 움켜잡은 채 다시 혀를 밀어 넣었다. 말캉한 혀가 마음대로 입안을 휘저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일으켜지고, 밀리고 밀려 어느새 무릎 뒤로 침대가 닿았다. 그가 내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스프링에 통통 밀리며 나는 침대 위로 뻗어버렸다. 그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무릎으로 내 허벅지를 누른 채 재킷과 셔츠를 한꺼번에 벗어던졌다. 버둥거리는 사이, 그의 체중을 고스란히 받으며 나는 다시 입을 벌려야 했다.

“..으.. 싫어.. 변태가... 이런 짓 하려고 왔어..으,읍..”

“그래, 할 거야.”

“하..하지 마, 키스..안 해..”

“키스도 하고, 다른 것도 할 거야.”

그는 일부러 소리를 내어 목덜미를 핥았다. 허벅지에 그의 단단한 페니스가 닿았다. 버둥거릴수록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아서 아예 힘을 쭉 빼버렸더니, 그 사이에 그가 홀랑 내 티셔츠를 벗겨버렸다. 아무리 가슴팍을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딱딱해진 유두를 제멋대로 핥던 태준이 다른 쪽 가슴으로 입술을 옮기다가 문득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뭐야.”

“모..몰라.. 벌레가...”

갑자기 다리가 들려졌다. 헐렁한 반바지를 팬티와 함께 벗겨버린 것이었다. 급히 다리를 오므리자, 그는 아주 손쉽게 무릎을 벌리고 이제 막 단단해지기 시작한 내 페니스를 머금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뒤꿈치로 그의 어깨를 차고 밀어내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가 무얼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지만, 그걸 혼내려는 듯 태준은 내 것을 입에 문 채 이를 세웠다.

“아아!”

“얌전히 있어.”

별로 흥분하지도 않았는데, 단순히 겁에 질려 놀라서 토정해버렸다. 억울해서 씩씩거리는데, 태준은 뻔뻔한 얼굴로 내 정액으로 페니스를 몇 번 더 문지르다가 손가락을 뒤로 뻗었다. 그리고 주름과 근육을 이완시키다가 불쑥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었다. 몸이 움찔, 떨렸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다시 닫힌 문이었다. 손가락만으로도 그걸 알았는지 그가 고개를 들고 만족한 듯 오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시..싫어.. 무섭게 하지 마.”

“무섭게 안 해.”

그리고 그는 내 정액이 꾸덕꾸덕하게 굳을 때까지 오랫동안 근육을 이완시켰다. 다시 감각을 되찾을 때까지, 그는 자신의 바지도 벗지 않은 채 내 몸 위로 누워 느릿느릿한 키스를 퍼부었다. 어느 순간, 내가 아래를 움찔거리자 그가 입술을 휘며 손가락을 빼내었다. 그리고, 버클을 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의미도 없이 몸을 버둥거렸다. 취기로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술 냄새가 확 풍겨서, 차라리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

“여기로 할 거야.”

“아..안 돼...”

이미 두 다리는 벌려진 채 그의 허리에 감긴 상태였다. 그가 내 밋밋한 종아리를 끌어올리며 엉덩이를 들게 했다. 엉덩이에 그의 까슬까슬한 음모가 비벼졌다. 밀쳐낸다고 밀릴 사람이 아니어서, 나는 그냥 두 팔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그는 그런 나를 놀리듯 내 엉덩이 골 사이로 자신의 페니스를 천천히 비벼댔다. 곧 종아리가 그의 어깨 위로 놓이고, 그가 손으로 구멍을 잡아 벌리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싫어, 아..아파, 아프게 하지 마..!”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아프게 안 해.”

그러나 그는 손으로 충분히 늘여놓았다고 생각했는지 봐주지 않고 한 번에 꾸욱 밀고 들어왔다. 생각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이물감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가 재빨리 몸을 숙여 내 벌린 입에 혀를 밀어 넣었다. 그의 몸이 숙여지면서 자연스레 그의 것 또한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잔뜩 벌려진 다리와 벅찰 만큼 꽉 들어찬 곳 때문에 가쁜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입가로 흐르고 있는 타액을 핥으며 허리를 잘게 흔들었다. 그리고 내가 익숙해질 때까지 조금씩 들어왔다가 또 조금씩 나가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내 허벅다리를 고쳐 안더니 무릎을 세운 채 바로 앉았을 때는 그의 숨소리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올려다 본 그의 얼굴은 어딘가 화가 난 것 같았다.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자, 그가 고개를 돌려 내 손가락을 앙 물었다. 그리고,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끝까지 빼내었다가, 한 번에 치고 들어왔다. 그 다음부터는 봐주지 않고 강하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아파.. 아, 아, 아읏... 찢어질 거야..흣...”

“하아... 정해진... 으..읏!”

그의 팔을 잡고, 할퀴기까지 했는데도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빠르고 강하게 치고 들어오는 힘에 죽죽 밀려 침대 헤드에 머리가 닿으면, 다시 아래로 쭈욱 당겨지고, 또 머리가 죽죽 밀릴 때까지 거칠게 질러박았다. 그리고 내가 겁에 질려 눈을 뎅그러니 뜬 채 숨을 쉬지 않으면 그제야 그는 다시 몸을 겹쳐 안고 허리를 잘게 움직였다.

“하아..하... 괜찮아? 응? 숨 쉬어.”

“나..나쁜 짓 하지 마. 흐으..흣...”

“......너한텐 나쁜 짓 안 해.”

그럼 다른 데선 나쁜 짓 하고 다니냐고 물으려는데, 그가 몸을 떼어내고 연결이 된 채로 내 몸을 돌려 눕혔다. 머리끝까지 뻗쳐오는 이물감에 도리질을 치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커다란 손에 이리저리 돌려지다 나는 결국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린 채 유난히 거칠게 치미는 그의 움직임을 받아내야 했다.

눈을 떴을 때는 벌써 커튼 사이로 초봄의 말랑말랑한 햇볕이 쨍쨍하게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자마자 허리와 엉덩이에 느껴지는 둔통으로 다시 몸을 둥글게 만 채 누워야 했다. 욕실에서는 샤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엉덩이 사이로 손가락을 가져가 슬쩍 만져보았다. 찢어지지는 않았지만,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귀가 화끈거렸다.

한참을 웅크린 채 누워 있다가, 조심스레 발을 뻗어 바닥을 디뎠다. 발바닥 끝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저릿한 감각에 잠시 입술을 물고 숨을 멈춰야 했다. 땀을 닦으며 방을 둘러보니, 태준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재킷과 바지가 아직도 바닥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벗으려면 좀 얌전히 벗지, 꼭 벗고는 날리더라. 입을 삐죽이면서도, 그래도 구김이 질까봐 옷을 들어 탁탁 털어주었다. 그 바람에 재킷 안주머니에 걸쳐져 있던 지갑이 툭, 떨어졌다. 허리를 숙일 때마다 ‘어이쿠야’ 하는 신음이 절로 나왔다. 떨어진 지갑을 드는데, 이번엔  휴대폰 벨이 울렸다. 내 것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거실로 나와 휴대폰을 찾아 들고 액정을 확인했다. 상민이었다. 욕실에서는 아직도 샤워기의 거센 물살이 타일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뭐야,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걸렸어?

아침 일찍 웬일이냐고 묻자, 상민은 새벽까지 있었던 파티에 대해 아직도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나는 한 손에 들고 있던 태준의 지갑을 펼쳐보았다. 신분증을 넣는 곳에 아이의 작은 사진이 꽂혀 있었다. 또 봐도, ‘정말 똑같구나’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유전의 신비는 대단한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는데 휴대폰 너머에서 상민이 ‘듣고 있어?’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할 말이 있어. 해야 될 말이 있는데...”

-그래? 주말엔 따로 시간 못 내는데... 여기로 올래?

“아니. 조용한 데에서 얘기해야 돼.”

나는 상민과 이틀 후에 만날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단지 전화만 끊었을 뿐인데, 이제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았다. 훅, 한숨을 내쉬는데 문득 그의 지갑 사이에서 현금과 수표 이외에 삐죽 빠져나와있는 흰 종이가 눈에 띄었다. 닫힌 욕실 문을 쳐다보고, 다시 지갑을 내려다보았다. 돈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조심성 없이 이렇게 함부로. 좀 더 작게 접으려고 빼드는데, 접힌 종이의 끄트머리로 ‘확인서’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사진과 종이를 번갈아보다가, 접힌 종이를 펼쳐보았다.

“......”

욕실에선 샤워를 모두 마쳤는지 떨어지던 물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그리고 잠시 후 타월로 허리를 묶은 태준이 빙글 웃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일어났어? 집에 먹을 것 좀 있어? 없으면 나가는 길에 같이 먹고. 나 며칠 또 바쁘다. 한.. 일주일 후면 다 끝날 것 같으니까.... 왜 그래?”

입술을 꽉 문 채 그를 노려보고만 있자, 태준이 손을 뻗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주춤, 뒤로 물러나자 그가 ‘아’하고 웃으며 속옷을 껴입었다. 나는 그가 바지와 셔츠를 모두 입을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많이 아팠어? 아프게 했다고 그래? 좀 봐줘, 오랜만이었잖아. 알았어, 잘못했어. 내가 정신이 나갔었다.”

태준은 셔츠의 단추를 끼우며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그가 돌아서 다시 걸어오는 것을 보고 그의 얼굴을 향해 쥐고 있던 종이를 던졌다. 피부가 종이의 모서리에 베었는지, 뺨 한쪽이 발긋하게 긴 선을 그리며 금방 부어올랐다. ‘뭐야’하고 인상을 찌푸리던 태준이 발아래 떨어진 종이를 주워 올리다가 문득 당황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진아, 이건...”

“거..검사된 STR 유전자 좌에서 세 개 이상의 불일치가 나타날 경우... 치..친자관계가 성립되지 않...... 맞아? 거기 씌어져 있는 거, 맞아?”

“....아니야, 잘못된 거야.”

“나..나더러 그걸 또 하라고? 그..그 더러운 짓을 또 하라고..?”

“정해진. 아니야, 아니라고. 너한테 다신 그런 일 안 시켜. 이건 검사 결과가 잘못 나왔다고 해서 확인 차 빼온 거야. 아니야.”

“차라리 그냥 한번 자자 그랬음 훨씬 깔끔했어!”

그의 얼굴을 향해 들고 있던 지갑을 던져버렸다. 눈두덩을 맞았는지 눈가를 손바닥으로 꾹 누른 태준이 입술을 꾹 물었다. 시선이 허공에서 팽팽하게 당겨졌다. 한참을 노려보고 서 있는데, 또 배가 따끔거리며 아파왔다. 인상을 찌푸리는데, 그가 자신을 향해 인상을 쓰는 줄 알았는지 ‘너 정말’하고 으르렁거렸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오며 뻗는 손에 돌아서지도 못한 채 곧바로 붙들리고 말았다. 팔을 빼내려는데 그가 아프도록 꽉 쥔 팔을 쥔 채 거칠게 당겨 안았다. 턱을 쥐고 억지로 벌린 입 사이로 그가 다급하게 혀를 밀어 넣었다.

“..으..응...하..하지 마..!”

그의 혀를 물려고 했지만, 오히려 물린 것은 내 쪽이었다. 악, 소리를 지르며 떨어지자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노려보았다. 입안에 비릿한 피 냄새가 감돌았다. 나는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지르며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나가. 꺼져. 더러워.”

“...더러워? 하! 좋아, 제대로 된 검사 결과 다시 나올 때까지 지금 이거, 어떻게 빌 건지 생각이나 해둬. 차 한 대 정도로는 어림없으니까.”

그리고 태준은 재킷을 들고 곧바로 현관으로 나가버렸다. 아직, 머리를 말리지도 않았는데. 나는 물린 혀에서 스며 나오는 피를 침과 함께 삼키며 멍청한 생각을 했다. 속이 쓰려서, 눈물이 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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