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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사두었던 수면유도제를 먹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꿈속에서도 끊임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다행히 자명종 소리에 의해서였다.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베개에 문지르다가 또 잠깐 졸았는지, 완전히 침대에서 내려섰을 때는 평소보다 30분이나 늦어있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엉망이었다. 아프다고 하고 땡땡이칠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찬물을 들이켰다. 안 되지. 먹고 살려면 돈을 벌어야지.
차가운 물에 얼굴을 담그고 있어도 붓기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양치질을 하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아에이오우. 얼굴 근육운동을 하면서 신발을 신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살금 걸어가 현관문의 도어뷰로 밖을 내다보았다.
“......”
옷이 바뀌지 않았다. 밤새 저렇게 계단에 앉아있었다는 건데, 오줌은 마렵지 않았을까? 엉뚱한 물음이 떠올랐다.
역시 살금 걸음을 옮겨 냉장고의 냉동실 문을 열고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자세로 휴대폰을 열었다. 팀장은 냉정하게 ‘땡땡이?’하고 물었다. 나는 현재 내 상태에 대해 상세히 답했다. 냉장고의 냉동실 안에 머리를 집어넣은 채로 전화를 하고 있어요. 팀장은 잠시 아무 말도 않다가 ‘하루만’하고 허락해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침실로 기어들어갔다.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먹다 남은 김치찌개를 다시 끓여 밥을 먹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물이 없었다. 컵에 수돗물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가, 다시 뱉어냈다. 정수기 들여놓으라고 할 때 말 들을걸. 후회했다. 언제 수돗물을 끓였다가 또 식혀 마실까. 지갑을 들고 현관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숨도 멈추고 도어뷰에 한쪽 눈을 갖다 대었다.
“......”
다행히, 그는 없었다. 하긴, 내가 먹여 살릴 사람이 내 자신과 어머니, 단 둘뿐이라면 김태준은 그의 가족뿐만 아니라 자회사는 물론 하청업체의 사원들까지 책임져야 했다. 재벌 3세 같은 거, 정말 귀찮고 짜증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들 수 있는 만큼 생수병을 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그것들을 두 팔 가득 껴안은 채 낑낑거리며 문을 열자, 뒤에서 주인아저씨가 ‘배달해줄까요?’하고 물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괜찮아요’ 대답했다. 괜찮았다. 그 정도의 무게쯤이야, 이제 내가 들어야 했다. 어린이, 졸업했으니까.
밥에 물 말아 김치랑 대충 먹고, 볼륨을 최대한 줄여 TV를 보고 있는데 문득 현관문 밖에서 독한 체리향이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가 보니, 확실했다. 두어 시간 후에 앞집에서 사람이 나와서 무어라 큰 소리를 냈다. 김태준 혼난다. 또 살금 걸어가 도어뷰로 내다보니, 아무 말 않고 노려보는 태준과 마주선 이웃 남자가 보였다. 그러나 남자는 혼자 구시렁거리다 헛기침을 하며 다시 들어가 버렸다. 하긴, 김태준이 무섭게 노려보면 호랑이도 오줌을 갈기고 도망갈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TV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하루 종일 뒹군 탓에 새벽 늦게야 겨우 잠이 들었다. 당연히, 다음날 아침에도 평소보다 30분 정도 늦게 일어났다. 오늘도 가지 말까. 미적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병째로 생수를 마셨다. 하체에 냉기류가 훅 불었다. 가야지, 먹고 살려면. 얼음으로 얼굴을 문질러도 붓기가 빠지지 않았다.
신발을 구겨 신는데, 담배냄새가 났다. 블랙스톤. 현관문의 도어뷰 구멍으로 얼굴을 숙이다가, 말았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다시 팀장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잔뜩 목이 쉰 척 연기했는데 팀장은 이번에도 역시 냉정하게 ‘이틀 연속 땡땡이?’하고 물었다. 나는 ‘콜록콜록’ 나오지 않는 억지 기침소리를 냈다. ‘오늘이 마지막’하고 팀장은 전화를 끊었다. 침대 위로 몸을 던지면서야 아직 더운 9월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밀린 빨래나 하자 싶어 베란다로 나가보니, 그가 세탁기에 돌리고 직접 널어둔 침대시트가 바짝 말라있었다. 팔을 넓게 벌려 그것을 껴안고 얼굴에 묻으니, 솜털 같은 햇빛냄새가 났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베란다에서 울면 목소리가 울리니까, 입술을 꾹 물었다. 그리고 콧물을 훌쩍이며, 아줌마처럼 털썩 쪼그리고 앉아서는 속옷은 물론 옷가지들까지도 모두 손빨래를 했다. 9월인데, 손이 시렸다.
전화가 왔다. 선희와 최 선배에게서였다. 요지는 ‘많이 아프냐’였고 결론은 ‘농땡이 부리지 마라’였다. 그리고 잠시 후 기정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내 불륜 사실이 들통 난 후로 일주일 동안 기정은 제가 죄를 지은 것처럼 내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수화기 너머로 기정은 나처럼 코를 훌쩍였다.
-저 때문에 아프신 거죠? 제가 나쁘게 말해서... 그래놓고 계속 피하고...
“아니야, 기정 씨.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점심 즈음, 또 한 번 도어뷰로 밖을 내다보니, 없었다. 언젠가 그의 어머니가 당신 아들에 대해 평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집이 세서 그렇지 똑똑한 아이라고, 제가 할 일이 뭔지, 역할이 어떠한지 아는 아이라고, 했었다. 나는 TV 볼륨을 높이며 ‘그렇네’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에는 경비실에서 인터폰이 왔다. 복도에서 내 집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며칠째 밤새도록, 그리고 아침까지 담배를 피워서 냄새가 집안까지 배었다며 앞집에서 항의를 한다는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인데요.”
-네? 하지만 분명 저번에 같이...
“모르는 사람이에요.”
잠시 후 경비원 아저씨가 올라왔다. 복도에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서 현관문에 바짝 붙어 귀를 기울였지만,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어서 집에 돌아가라’ 한 마디 하고는 끝이었다. 얼른 구멍으로 눈을 갖다 대어 보니, 돌아서는 아저씨가 호주머니 속으로 무언가를 집어넣고 있었다. 이래서야 부정부패 없는 사회 만들긴 글렀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은 자명종이 울리자마자 일어났다. 여유 있게 우유를 마시고, 아침 뉴스를 틀어놓은 채 양치질을 했다. 찬물 세안이나 얼음으로 문지르는 것이나, 아무 것도 얼굴의 붓기를 빼주지는 못했다. 아끼느라 몇 번 입지 않은 옷을 꺼내 입고, 헤어 젤로 머리를 다듬었다. 역시 아끼느라 몇 번 신지 않은 신발을 꺼내어 내려놓고 발을 집어넣으려는데, 문득 앞집 사람들이 나와서 소란을 떠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밖에서 쾅쾅, 문을 두드렸다.
“이봐요! 사람 있으면 좀 나와 봐요! 여기 아는 사람 아니에요? 쓰러졌단 말입니다! 이봐요!”
쓰러졌단 말입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어락의 오픈버튼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그러나 차마 힘주어 누르지는 못했다. 문을 두드리던 사람이 119에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구조원들이 와서 들것에 태준을 싣고 내려갔다. 나는 베란다로 뛰어가 치즈를 훔친 쥐처럼 몸을 웅크린 채 몰래 그가 실려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팀장과 선희와 기정과 최 선배의 전화번호가 휴대폰 액정에 떴다. 나는, 찍찍 소리 내어 울었다.
바짝 마른 시트를 끌어안고 베란다의 차가운 타일바닥에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삼일 동안 잠을 못 자고 아무 것도 못 먹으면, 설마, 죽을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시트를 뒤집어썼다. 전화벨이 계속 울렸다. 시끄러워. 아예 배터리를 빼 버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이 이번에는 학원버스에 올라타느라 북적거리는 소리가 저 아래에서 들려왔다.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마지막 버스가 아이들을 모두 싣고 부드러운 엔진소리를 내며 아파트 단지를 벗어날 즈음, 초인종이 울렸다.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수전증 환자처럼 떨리는 손으로 시트를 뭉쳐 한쪽 구석에 던져놓고 일어섰다. 오래 쪼그리고 앉아있었던 터라 다리가 저렸다. 절뚝이며, 그러나 다급히 달려가다가 식탁 다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쿠당탕 소리와 함께 무릎으로 바닥을 찧었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현관문까지 걸어가는데, 어쩐지 자꾸만 숨이 차올랐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도어뷰를 통해 밖에 선 사람을 확인하지도 않고 무작정 문을 열어주었다.
“정해진...”
희철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물러서서 벽에 몸을 기대었다. 무릎 뼈가 부서진 것처럼 아파왔다. 주룩 미끄러져 주저앉자 희철이 얼른 안으로 들어와 몸을 잡아주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희철은 ‘선희가’하고 털어놓았다. 전화가 안 되는 걸 가지고 정해진 쓰러진 거 아니냐며 둘이서 호들갑을 떨었을 게 뻔했다.
“얼굴이 왜 이래. 많이 아프냐? 울었어? 병원 갈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 고개를 저으니, 희철이 내 머리를 쥐고 그대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이마를 손등으로 짚으며 열을 재었다. 열은 없었다. 오히려 온몸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나는 문득 희철이의 팔뚝을 잡고 ‘태준 씨’하고 그의 이름을 꺼내어 불렀다. 희철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태..태준 씨 어떤지 보고 올래?”
“뭐? 열도 안 나는 거 같은데, 뭐야, 뭐가 문제야? 머리 다쳤냐?”
“나..나는 못 볼 거 같으니까 네가 대신...”
“이게 이제는 친구를 불륜 상대한테 심부름까지 시키네? 야 인마, 정신 차려! 내가 그 새끼를 왜 보냐? 만나서 한 대 까라고? 간통죄로 고소해버린다!”
“...쓰러졌단 말이다.. 앞에서, 쓰러졌는데, 내가 그냥 모른 척 하고 없는 척 했단 말이다!”
버럭 소리를 지르자 희철이 짜증스러운 듯 내가 잡은 팔을 휘둘러 빼버렸다. 그리고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대며 냉장고나 소파 따위를 둘러보며 작게 욕설을 지껄였다.
“싸웠냐? 잘 됐네, 이 기회에 그냥 그 호래자식이랑은 확..!”
“하..하지 마! 이제 그 사람 욕하지 마! 욕하지 마, 이 씨발 새끼야! 네가 뭔데, 뭔데 함부로 떠들어! 끄..끝냈단 말이야! 끝난단 말이다! 이제 다 끝났는데... 바로 앞에서 쓰러지고 막 실려 가는데 난 쥐새끼처럼 숨어있었단 말이다! 욕하지 마, 이 새끼야! 이제 그 사람한테 욕하지 마!”
“야... 정해진...”
“속이 후련하냐? 아주... 기뻐 죽겠어? 네 친구 이제 유부남이랑 안 뒹굴어서 만족하냐? 어?! 근데 어쩌냐? 한번 버린 몸인데, 남자 맛 제대로 들린 몸인데, 이제 유부남만 아니면 막 뒹굴어도 되나? 그런가? 그건 나쁜 거 아니고, 좋은 건가? 어?! 대답해 봐, 이 개새끼야! 니..니들이 뭔데... 흐으...”
“...해진아...”
“이..으으...이제 욕하지 마, 그 사람.. 흣...끝났어.. 다.. 다 끝났다고...으으으...”
나는 아이처럼 눈을 잔뜩 찡그린 채, 입을 크게 벌린 채, 발버둥을 치면서, 희철이의 두툼한 가슴팍을 이유도 없이 두들기면서,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그리고 서서히 눈앞이 흐릿해졌다. 잠들어서,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새파랗게 해가 차오르기도 전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 위에서, 이불까지 얌전히 덮은 채였다. 거실로 나오자 희철이 소파에서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녀석이 잠에서 깨건 말건, 욕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었다. 욕조에 가득 물이 담기고, 욕실 거울에 뿌연 김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옷을 모두 벗고 욕조로 들어가 앉았다. 등을 기대고 팔과 다리를 자연스레 뻗자, 뭉쳐있던 근육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직 덜 잠근 수도꼭지에서 똑, 똑, 하고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몸을 주룩 내려 머리끝까지 물속으로 잠겼다가 숨이 찰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겠다 싶을 때에야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몇 번 반복하다보니,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여섯 번째 시도에서는, 꽤 오랫동안 물속에서 견딜 수 있었다. 막연히 숫자를 세고 있다가, 괴로웠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기어코 뜨거운 물을 코와 입으로 들이마셨다. 뜨거운 것이 왈칵 몸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공포가 엄습했다. 반사적으로 몸이 튕기듯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큭...! 하...하아... 하아....”
그리고 욕조에서 나와서 차가운 물을 틀었다. 차갑고 단단하고 파괴적인 물이 머리꼭지에서부터 광광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열을 식힌 뒤, 몸을 닦지도 않고 알몸으로 밖으로 나왔다. 희철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나는 물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베란다로 나갔다. 새벽의 차가운 바람이 몸을 훑었다. 서서히 푸른 새벽이 차올랐다. 몸의 물기도 완전히 말랐다.
스물일곱, 이제야 조금, 어른이 된 것 같았다.
* * *
10월이 시작되면서 나는 긴팔을 꺼내어 입었다. 가끔,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나갈 때마다 블랙스톤 냄새가 미미하게 남아있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꾸만 소매를 끌어당겨 손등을 덮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끔 담뱃재가 떨어져 있기도 했다. 나는 손끝으로 그것을 모아서 호주머니에 넣기도 했다. 빨래를 돌리고 나면 옷들이 엉망이 되어있을 때가 많았다.
최 선배는 팀장이 되었다. 선희와는 공식적인 사내커플을 선언했고, 양가 부모님들 상견례 자리를 알아보기도 했다. 늦어도 내년 봄에는 결혼을 할 것이라고 했다. 희철은 자기가 스스로 ‘그나마’ 건전한 게이바를 알아보고 와선 라면이나 끓여먹고 있는 나를 끌고 데려가기도 했다. 결과는, 처참했다. 의외로 희철이 그쪽 스타일인지 유난히 녀석에게 들러붙는 게이들이 많았다. 희철은 꼼짝도 못하고 얼어선 덜덜 떨었다. 그런 주제에 가끔 내게 붙는 남자들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이와 직업과 결혼 유무를 물었다.
그 다음 주에 희철은 기정까지 끌어들였다. 혼자 당하는 게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기정은 역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오히려 게이들보다 더 흥분해선 스테이지를 누비고 다녔다. 역시, 남자들이 들러붙었다. 나는 알코올이 섞이지 않은 칵테일을 마시면서 숫자를 가늠해 보았다. 나와 희철이와 기정에게 대쉬하는 남자들의 비례는 대충 2대 4대 4 정도였다. 어렸을 때는 주위 어른들에게, 커서는 기정이나 선희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예쁘다, 예쁘다’소리가 익숙한 Natural born gay로서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바텐더를 불렀다.
“내가 더 예쁘지 않아요?”
바텐더는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며 ‘바로 그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예쁘장하고 여자 같은 타입을 좋아하면 차라리 진짜 여자를 좋아하지 남자를 좋아하겠어요? 이쪽에선 저렇게 짐승 같은 타입들이 잘 먹혀요. 곰이나 개. 언니, 아직 초보구나? 뭐, 언니 같은 타입 좋아하는 쪽도 있어. 걱정 마.”
‘언니’ 소리에 닭살이 돋았다. 말이 Natural born gay지, 면역력이 전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열아홉 살 이후로 게이바는 처음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태준도 나와 만나는 동안은 게이 전용 바는 출입하지 않았다. 그래도 천성은 못 속이는지, 두세 번 연속으로 출입하다보니 희철이나 기정보다 훨씬 적응이 빨랐다. 희철은 여전히 남자가 자기 허리에 손을 두르면 기겁을 했고, 기정은 꺅꺅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싫으냐고 물었더니, ‘간지러워서’라고 대답했다.
“아아... 무서운 세계야, 정말 어마어마한 세계야...”
보조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며 희철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뒷좌석에 있던 기정이 ‘재밌잖아요!’하고 아직 열이 식지 않은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희철이 고개를 돌려 기정을 향해 쯧쯧 혀를 찼다.
“역시 저 놈은 미스터리야. 정체가 뭐냐? 참... 해맑아, 해맑다고. 맑아도 너무 맑아. 그래도 저런 놈이 정해진이한테 필요한데...”
“야, 나도 타입이 있거든?”
“선배 너무해요.”
룸미러 속에서 기정의 쭉 내민 입술이 보였다. 희철이와 한 손으로 하이파이브를 한 뒤 후진을 하는데, 누군가 차창을 똑똑 두드렸다.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자 바텐더복을 입은 남자가 싱긋 웃으며 얼굴을 차 안으로 드밀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우리 쪽 담당이 아니었다는 말인데. 나는 고개를 뒤로 빼며 경계했다. 남자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남자의 손가락에는 내 휴대폰 고리가 걸려 있었다.
“이거, 빠진 건가? 아님 놓고 간 건가?”
“아... 헐거워서 빠졌나 봐요, 고..고맙습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남자는 웃기다는 건지, 기가 차다는 건지, ‘하!’소리를 냈다. 휴대폰 고리를 받으려고 두 손을 내미는데, 남자가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돌려주지 않았다. 무슨 짓인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다른 손으로 또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휴대폰이었다. 휴대폰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보는데, 남자는 다짜고짜 내 손에 그것을 쥐어주었다. 뒤에서 기정이 ‘번호 찍지 마요!’하고 흥분해 말렸고, 옆에선 희철이 ‘왼손 약지 봐봐’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전화 할게.”
그리고 남자는 등을 돌려 빠르게 다시 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번엔 내 입에서 ‘하!’소리가 나왔다. 희철이 얼른 내 손에서 남자의 휴대폰을 빼앗아 갔다. 그리고 이것저것 눌러보더니 ‘에이, 잠금 기능 해 놨네’하고 아쉬워했다. 기정은 얼른 창밖으로 던져버리라며 앉은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어허... 어두워서 얼굴을 잘 못 봤네, 그래. 관상을 봐야 하는데....”
희철은 도인처럼 턱을 문지르며 ‘어허’소리를 냈다. 나는 다시 들어가 돌려줘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그냥 차를 출발시켰다. 희철이처럼 관상을 볼 수도 없고 운명론자도 아니지만, 이렇게 적극적인 대쉬가 황당하긴 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 게이바에 끌고 갔던 날 희철은 내게 오랜 시간 연애를 하다가 갑자기 혼자가 되면 우울증에 걸리기 십상이라고 충고했다. 나도, 어서 누구든 옆에 두고 싶었다.
운전을 하는 내내 희철은 비밀번호를 푸느라 0001부터 차례대로 번호를 누르고 있었고, 기정은 여전히 입을 삐죽 내민 채 자기야말로 관상을 제대로 보는데 아까 그 사람은 별로 좋지 않은 남자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신호등이 주홍색으로 바뀌어 횡단보도 앞에서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런데 갑자기 쿵, 소리와 함께 차체가 앞으로 조금 밀려났다. 셋 모두 앉은 자리에서 목이 덜컹 꺾였다가 뒤로 가 부딪혔다. 셋이서 동시에 ‘괜찮아? 괜찮아?’하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당장은 모두 괜찮은 듯했다. 나는 뒤차에게 따라오라는 표시를 한 뒤 인도 쪽으로 최대한 가까이 차를 붙여 세웠다.
희철이 뒷목을 잡은 채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기정 역시 뒷목을 잡고 ‘아야야야’ 엄살을 피우며 내렸다. 나까지 그런 짓을 하면 너무 속보일 것 같아 나는 그냥 멀쩡하게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뒤차를 향해 걷다가, 문득 익숙한 번호의 BMW임을 알아차렸다. 태준의 부인 차였다. 나는 얼른 뒤돌아섰다. 뒤차에서 내린 누군가를 향해 희철이 먼저 ‘이보세요! 운전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하고 기선을 제압했다. 누굴까. 누가 타고 있을까.
“죄송..합니다.. 이걸로 대충 합의를 보죠.”
어딘가 어눌한 말투의 남자 목소리였다. 힐끔 뒤돌아보자, 석상 같은 운전기사였다.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눌한 말투로 그 때문인 듯했다. 희철이 남자가 내민 수표를 받으면서도 ‘그쪽 과실이 확실하다’며 왁왁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수표를 힐끗 보고는 조용히 내게로 다가왔다.
“야, 이거 봐. 보험사 부르지 말고 그냥 가도 되겠다. 저 미친 놈, 분명히 술김에 수표 잘못 꺼냈다.”
나는 수표의 0을 세어보다가, 희철의 손에서 수표를 빼와 남자에게로 걸어갔다. 짙은 선팅에 안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것이 확실했다. 한숨을 내쉬는 남자에게서 독한 술 냄새가 맡아졌다. 남자의 얼굴 앞으로 수표를 내밀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걸로 해결 합시다.”
“너무 많은데요.”
“제 과실이니까.. 제가 다 부담하겠습니다. 혹 몸에 이상이 있으면 여기로...”
그리고 남자는 자신의 명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차경현. 그때 여자도 분명 ‘경현 씨’라고 불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뒤돌아 다시 차에 탔다. 희철과 기정이 신이 나서 문을 닫자마자 ‘2차 가자!’하고 졸랐다. 나는 자리에 앉아 잠시 백미러로 남자의 차를 주시했다. 내가 먼저 출발하길 기다리는지, 그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수표를 쥐고 다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뒤차로 가서 운전석 차창을 똑똑 두드렸다. 창문이 부드럽게 내려갔다.
“지갑 좀 주실래요?”
남자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지갑을 건네주었다. 나는 수표를 집어넣고, 0이 하나 빠진 다른 수표를 빼내어 그의 눈앞에 들어보았다. 남자는 고요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많아요. 혹 어딘가 아픈 곳이 있으면 연락은 드리겠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도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고요. 그리고... 취하신 것 같은데 조금 쉬었다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누구죠?”
“......”
“누구... 죄송합니다. 제가 얼굴을 잘 기억 못해서... 그런데... 만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아니요. 뵌 적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 차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희철이 냉큼 내 손에 쥔 수표를 빼앗아 갔다. 기정이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둘 다 ‘아아아아’ 탄식을 내질렀다.
* * *
바텐더복을 입은 남자의 휴대폰이 울린 것은 다음 날 점심시간이었다. 내 휴대폰의 벨소리가 아니어서 한참을 멀뚱히 앉아 있다가 옆 사람이 ‘그쪽에서 소리 나는데?’하고 알려줘서 그제야 퍼뜩 휴대폰을 열었다. 남자는 내 사정 같은 것은 개의치 않은 듯 ‘반드시 오늘 밤’에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럴 거면 왜 멋대로 휴대폰을 차안으로 던져 넣었냐고 따지려다가, 그런 이유야 너무 빤하니까, 알았다고 대답해버렸다.
팀장의 눈총을 받으며 정시 퇴근을 하고, 나는 열아홉 이후로 처음으로 혼자 게이바 입구에서 서성였다. ‘Y Not’이라는 간판이 뭘 하고 섰냐는 듯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주차요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런 나를 힐긋거렸다. 그리고 말을 걸 듯 다가오는 남자를 뒤로하고 후딱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귀를 광광 울렸다. 바를 둘러보았지만 찾는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내게 ‘예쁘장하게 생겨먹은 게 마이너스 요인’이라고 알려준 바텐더를 찾아 휴대폰을 보여주자 싱긋 웃으며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안쪽에서 휴대폰 주인이 나왔다.
“여기요, 휴대폰.”
남자는 휴대폰을 받자마자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잡은 손목을 끌어 바의 출입구까지 이끌었다. 가운데 앉은 사람들이 낄낄 웃으며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바짝 숙여주었다. 나는 어느새 바 안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창고로 통하는 복도까지 끌려들어갔다. 홀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멀리서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뒤늦게 내가 남자의 손을 밀쳐내자 남자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기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여기 어딘데요?”
“밖은 너무 시끄럽잖아. 안 그래도 그쪽은 목소리도 작은데, 잘 안 들리잖아. 아, 그런데 이름이?”
“...정해진이요.”
“뭐야, 이름도 예쁘잖아?”
남자가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론 ‘왜 자꾸 반말이야’ 싶어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더니 ‘왜?’하고 뻔뻔하게 물어왔다.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응, 실례될 거 없고, 스물다섯.”
남자는 잔뜩 찌푸린 내 얼굴을 내려다보며 또 ‘왜?’하고 물었다. 내 나이를 밝히자, 이번엔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곧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괜찮아’하고 스스로에게 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원래 애인한테 존대 안 해.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나는 그쪽 애인한다고 동의 안 했는데요?...안 했..거든?”
혼자만, 그것도 알고 보니 나보다 나이도 어린놈한테 존대를 하는 게 자존심 상해 어설프게 말을 놓았다. 남자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환하게 웃었다. 어딘가 들떠있는 사람 같았다. 구름을 타고 있거나, 혹은 풍선에 매달려 있거나. 꼭 그런 것 같았다.
“삼주 전부터 계속 주말마다 왔었지? 애인 만들 목적이야 다들 같은 거 아니야? 거기다, 나 마음에 안 들었음 휴대폰 같은 거 그냥 밖에 버려두고 갔어야지. 나오라고 하니 또 그대로 나오고. 마음에 없어? 나 별로야?”
별로라거나, 마음에 없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당황스러웠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 연애, 처음에 할 때, 다들 이렇게 하는 건가. 이래서 경험이 중요하다는 거구나. 물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매주 희철의 손에 못 이긴 척 나온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다. 내가 아는 연애의 시작이라곤, 며칠 동안 얼굴을 보다가 간간히 말을 섞다가 어설픈 감정싸움으로 서로를 떠보다가,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연애나 할까?’하고 묻는 것이었다.
아랫입술을 오물거리며 아무 말도 않고 있자, 남자가 손끝으로 내 입술을 매만졌다. 어색해서, 얼른 떼어냈더니 또 뭐가 그리 웃긴지 복도가 왕왕 울릴 정도로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 바짝 다가와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정말, 이렇게 하는 거 맞는 걸까. 엉덩이를 주춤 뒤로 빼자 이번에는 아예 방향을 바꾸어 나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등이 벽에 닿은 채 나는 남자의 어깨 너머를 그리고 내 발등을, 목적도 없이 시선을 우왕좌왕 옮겼다.
“나 괜찮아. 나쁜 놈 아니야. 어때? 어떤데?”
“나..나는 그쪽 이름도 몰라요... 몰라.”
“아, 그게 문제였어? 알았어. 그럼 신사답게 시작할게. 이름은 이상민, 올해 스물다섯, 학력은 대학중퇴, 아, 중퇴 이유는 그냥 공부하는 게 재미없어서, 직업은 보시다시피 게이바의 바텐더,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남자, 아니 상민은 제 소개를 하면서 손등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나는 희철이 그랬던 것처럼 잔뜩 얼어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대충 자기소개를 다했다 싶었는지 상민은 ‘이제 어떤데?’하고 대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나는 티셔츠 안으로 들어오는 그의 손에 머리까지 얼어버렸다. 근육이 하나도 없는 배를 주무르면서 그는 입술을 휘며 웃었다. 그리고 손이 가슴팍을 주무를 때에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난 이런 거 별로야.”
매몰차게 그의 손을 밀어내자 상민은 잠시 놀란 듯 내 눈치를 살피다가 장난스레 두 손을 들고 ‘항복’ 표시를 했다.
“알았어. 이런 거 싫어하는구나? 오케이, 공주님처럼 대해줄게. 나도 너 그럴 것 같아서 끌렸어.”
그리고 손을 내리고 다시 손등으로 내 뺨을 쓸었다. 이건 괜찮아? 하고 남자가 물었다. 나는, 입술을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