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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듯 한참 더운 8월엔 문학상 시상식과 가을 호 계간지 준비로 다른 직장인들처럼 휴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대신 9월 느지막이 한가한 휴가를 즐길 수 있었지만, 피서객이 모두 떠난 황량한 해수욕장이나 계곡으로 떠났다간 더욱 우울해지기 십상이었다. 대부분은 요령 좋게 공휴일을 전후로 휴가를 내거나 모아두었던 휴가일과 합쳐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 쪽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것 같았다.
선희가 바로 그런 경우였는데, 휴가일이 최 선배와 비슷했던 것은 희철이에게는 절대 알릴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계시는 용인에서 3일을 보냈고, 하루는 태준과 온종일 호텔에서 뒹굴었다. 남은 하루 동안 만큼은 혼자 보내고 싶어 아침을 함께 먹은 후 그의 차도 타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와 버렸다.
손부채질을 하며 가로수의 그늘 아래를 걷는데 아직도 매미가 우렁차게 울고 있었다. 어쩐지 아직 한창 여름인 것 같아서 그럭저럭 위로가 되었다. 길거리에 있는 작은 마켓에서 쭈쭈바를 사서 입에 문 채 아파트 단지의 긴 담벼락을 걸었다. 그러다 문득 위쪽에서 무언가가 코끝을 스쳐 뚝 떨어졌다. 주춤 물러선 뒤 바라보니, 매미였다. 죽었나, 싶어 발끝으로 툭 밀자 도르르 굴러가 버렸다. 죽었구나. 다시 우울해졌다. 여름이 끝나버린 것 같았다.
“어이, 쭈쭈바를 문 정해진 어린이. 기다렸다.”
“기다렸다.”
“기다렸어요!”
경비실을 거쳐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앞을 가로막는 무리가 있었다. 희철이와 선희와 기정이었다. 셋 모두, 나와 같은 쭈쭈바를 물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곧 동시에 부끄러워졌다. 유유상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어서 들어가자고 등을 떠밀었다.
“에어컨 틀어!”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희철이 소파에 드러누우며 명령했다. 저러니 살이 안 빠지지. 쯧쯧, 혀를 차면서 리모컨을 눌렀다. 선희는 냉장고의 냉동실 문을 열고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렇게 더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희철이 ‘정해진 꽤 강한데?’하고 놀라워했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 살도 좀 올랐고. 너 우리 몰래 뭐 먹냐? 혹시... 혹시...”
“얘 보약 먹잖아. 회사에도 가지고 와서 되게 열심히 먹는다.”
희철의 질문에 선희가 대신 답했다. 희철이는 광분했다. 나는 졸지에 우정의 배신자가 되었다. 결국 포장된 한 봉지를 뜯어 녀석의 입 앞에 밀어주어야 했다. 희철은 그 쓴 약을 아주 맛있게 쪽쪽 빨아먹었다.
약은, 열심히 먹으려고 했다. 먹지 말라는 것을 참을 수는 없었고, 먹으라는 것을 억지로 먹을 수도 없었고, 정기적으로 체질침을 맞으러 다닐 수도 없었으니, 약이라도 챙겨먹어야 했다. 태준은 체중계를 사서 현관 앞에 떡하니 놓아두었다. 그가 신발을 신는 동안 나는 체중계 위에 올라서 있어야 했다. 그래도 비싼 약값을 하는지 예전 몸무게를 유지할 수 있었다. 태준의 바람대로 ‘힘세고 오래 가는 정해진’으로까지 발전할 수는 없었지만, 그게 어딘가 싶었다.
“선배! 해진 선배!”
토마토를 갈고 있는데 욕실에서 기정이 다급하게 불렀다. 또 무슨 사고를 쳤나 싶어 믹서기를 선희에게 맡긴 뒤 뛰어갔다. 문을 열어보니, 웃통을 홀랑 벗고 있던 기정이 갑자기 욕조에 손을 짚은 채 엎드렸다. 뭘 하는 거냐고 물어보니, ‘등목해주세요’하고 맹랑하게 대답했다.
“뭐야. 그런 거는 저기 누워 자빠져있는 희철 형님한테 해달라고 하지.”
“희철 형님은 남자가 벗은 거 보면 주먹이 운대요.”
그러면 나는 남자 벗은 거 보면 어떻게 되는 줄 아냐고 물으려다가, 얘가 진짜 뭘 아는 건 아닌가 싶어 얼른 찬물을 끼얹어주었다. 기정은, 제가 등목해달라고 해놓고선 물을 끼얹을 때마다 온몸을 푸르르 떨며 호들갑을 피웠다. 몸을 부들부들 떨 때마다 긴 털이 날리면서 내게도 물방울이 튈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슬쩍 뒤로 물러서곤 했다. 어쩐지, 아주 큰 개를 목욕시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기어코 기정의 휘두르는 팔에 바가지를 엎어버렸다. 덕분에 옆구리 쪽을 살짝 적셨는데, 기정은 큰 죄를 저지른 것 마냥 또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 차라리 같이 등목을 하자며 내 젖은 옷을 억지로 벗기려 들었다. 그렇게 많이 젖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곤 그대로 이어서 장난을 치고 싶었던 거다. 나쁜 의도야 없었겠지만, 나는 화들짝 놀라 벽으로 등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안 돼, 원 위치’하고 강하게 말하자 기정은 끙끙거리며 다시 욕조에 손을 짚고 엎드렸다.
“우리 고향에서는 서로 등목해주면 되게 친해졌다는 의민데...”
그런가. 게이 세계에서는 서로 등목해주면 되게 하고 싶다는 의민데. 뭐 그래도, 순한 녀석인데다 장난을 치려다 혼이 난 탓에 기가 죽은 게 안쓰럽기도 해서, 나는 머뭇거리며 웃통을 벗었다. 그리고 기정을 밀쳐낸 자리에 얼른 손을 짚고 엎드렸다.
“그럼 나도 해줘, 등목.”
“정말요? 네!”
찬물이 등에 닿자, 나도 모르게 기정이 한 것처럼 몸을 푸르르 떨었다. 기정이 재미있다는 듯 깔깔대며 웃었다. 결국 나는 두어 번 더 찬물을 뒤집어쓰고는 두 손을 들었다. 아무래도 약을 더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고 다시 옷을 껴입으려니, 땀 냄새가 지독했다. 예전보다는 더위를 덜 타긴 했지만, 땡볕에 오래 걸어온 탓에 제법 땀을 흘린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새 옷을 꺼내 입어야겠다는 생각에 웃통을 벗은 채 나가려는데 문득 기정이 팔뚝을 잡아 세웠다.
“왜?”
“선배, 용인에 모기 많았어요?”
“무슨....”
기정의 시선대로 고개를 내려 내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얼른 땀이 밴 셔츠를 다시 뒤집어 입었다. 기정이 자기는 새 옷을 꺼내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중화반점에서 기름기 많은 요리를 시켜 둥글게 앉아 게걸스레 먹고, 삼류 코미디 영화에 이어 무시무시한 호러 영화까지 보고나니 어느새 밤이었다. 그새 또 배가 출출해 이번에는 피자를 시켜먹었다. 자고 갈 거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다들 맥주를 찾았다. 당연히 자고 간다는 뜻이었다. 에휴, 한숨을 내쉰 뒤 지갑을 찾았다.
“어이쿠, 우리 정해진이. 알아서 맥주 사러가는 거냐? 착하기도 하지.”
“선배, 같이 가요.”
“많이 사와라. 내일은 일요일이다.”
나는 선희와 희철이의 허벅지를 한 번씩 짓밟아준 뒤 등 뒤에 달라붙는 기정을 떼어냈다. ‘기다려’하고 명령하자 또 끙끙거리면서도 소파 구석에 얌전히 앉았다. 선희는 허벅지를 문지르며 ‘우리 상철 오빠한테 다 일러준다’고 말했다가 이번에는 희철이에게 다른 쪽 허벅지를 짓밟혔다. 어제의 짝사랑이 오늘의 원수가 되는 현장을 목격하며 나는 현관문을 닫았다.
기분이, 괜찮았다. 매일 이렇게 보낼 수 있다면, 이것도 그럭저럭 괜찮지 않을까. 완전한 삶과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이 정도만이라도, 괜찮지 않을까. 더 이상 악화되지 않는 병을 앓는 어머니, 서로를 원수처럼 대하지만 싸우고 나서 하루만 지나면 다시 자석처럼 붙어 다니는 친구들, 귀여운데다 말도 잘 듣는 후배. 그리고, 이제는 습관 같은 사람.
어머니의 병이 악화되지 않기를, 내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친구들만은 등을 돌리지 않기를, 그리고... 그의 어머니처럼 그의 아내 역시 평범한 상식과 철학에서 벗어난 사람이기를.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내 마지막 소원을 생각하며 헛웃음을 쳤다. 정해진, 이제 갈 데까지 갔구나. 그러나, 진정 그러하길 바랐다. 누구보다도 그의 아내가 알게 된다면, 그래서 이번에야 말로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면,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된다면, 그렇게 해준다면, 허락해준다면, 나는 그저 작은 그림자처럼 한 평생 살아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한 평생까지 가지 않을 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었다. 내 가장 우선시 되는 소원은 뭐니뭐니 해도, 어서 이 젊음과 열망과 욕망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더 이상 그를 바라보며 가슴이 뛰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이다. 그건 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순간을 상상하며 단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 시기가 서로에게 동시에 다가오는 것뿐이었다.
언젠가는, 식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도 괜찮아진다면, 서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거나,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가 현재 바라는 것은 오로지, 더 이상 나빠지지만 않는 것이었다.
꿈도 참 소박하다, 생각하며 경비실을 지나치는데 순간 커다란 나무 기둥에서 짙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악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입이 틀어 막힌 채 나무 뒤로 끌려갔다. 버둥거렸지만, 상대와의 악력 차이가 워낙 커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벽에 등을 아프게 부딪친 채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남자가 거칠고 다급하게 고개를 내려 입술을 물었다. 순식간에 뱀 같은 혀가 들어와 입속을 휘저었다.
혀를 깨물어버리려고 했지만, 한 손으로 내 턱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다른 손으로는 내 두 눈을 가린 채였다. 발로 차버리려고 했지만, 허벅지는 물론 온 몸이 상대와 밀착된 채 벽으로 완전히 밀려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겨우 두 팔을 휘저어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뿐이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덜컥 무섬증이 일었다. 더 이상 나빠지지만 않는 소원을 빌고 있는 사이에, 하필이면 그것도 동성에게 당하는 성추행이라니. 팔자 한번 기구하다싶은 억울함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흐으....”
남자는 이번엔 아예 내 가랑이 사이로 자신의 허벅지를 문지르기까지 했다. 너 같은 변태는 김태준한테 걸리면 당장 인천 앞바다에 시멘트와 함께 던져질 거다. 경고했지만, 단지 ‘웅, 웅, 웅,’하는 소리로 들려나올 뿐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온몸에 힘을 빼버렸다. 축 늘어지자, 남자가 급하게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은 채 일으켜 세웠다.
“벌써 포기야? 이래서 어디 안심하고 야밤에 내보내겠어?”
“...태...태....”
익숙한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자, 태준이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숨이 탁 트였다. 그리고 다시 벽에 등을 기댄 채 주룩 미끄러져 주저앉아버렸다. 태준이 따라서 다리를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씩씩거리는 나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그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중심을 잡지 못한 그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야!”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어! 아니, 아예 거길 잘라버리고 싶어!”
“그럼 너만 손해지.”
“변태! 저질! 성추행범! 죽여 버릴 거야!”
“알았어, 됐어, 그만, 그만해.”
그만이고 뭐고, 나는 인정사정없이 그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리고 따귀도 한 대 때려버렸다. 그래도 속이 안 풀렸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데, 그가 자신의 뺨을 문지르며 웃었다. 웃음이 잘도 나온다. 나는 또 손을 들었다. 그러나 곧 손목이 붙들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내 손목을 위로 끌어당겼다. 졸지에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눈물과 콧물까지 닦고서야 몸을 떼어냈다.
“왜 온 거야, 이 변태새끼야. 아침까지 그렇게 해댔잖아.”
설마 또 변태 짓이나 하려고 왔을까, 묻자 그는 호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무언가를 꺼내어 ‘이거’하고 앞에 내밀었다. 내 휴대폰이었다. 가지고 나오지 않았던가. 나는 씩씩대다 말고 입을 헤 벌린 채 기억을 더듬었다. 그 사이에 그가 또 얼른 고개를 내려 쪽 소리 내며 입술을 겹쳤다가 떨어졌다. 나는 악어처럼 이빨을 딱딱 소리 내어 부딪치며 위협했다.
“너야말로 이 야밤에 왜 나온 거야?”
“맥주, 친구들.”
길게 말하는 것도 싫어서 짧게 단어만을 요약해 말하고 다시 인도로 걸어 나왔다. 그러다 문득 혹 이런 짓이 CCTV 카메라에 잡히지는 않았나 걱정이 되었다. 두리번거리자, 그가 알겠다는 듯 ‘없어, 경비실 옆엔 당연하잖아’하고 얄밉게 말했다. 계획된 범죄임이 분명했다.
슈퍼마켓에서 맥주와 간단한 안주거리를 고르는 동안 그는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랐다. 슬쩍 엉덩이를 만질 때마다 정강이를 걷어차 주었다. 그리고 카운터 위에 고른 물건을 내려놓는 동안 그는 냉동실에서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가득 꺼내어왔다.
“이런 걸로 달래려고 하지 마.”
“그래도 먹을 거잖아. 그런데 너 계속 말이 짧다?”
“태준 씨가 한 짓을 생각해.”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가 뭘?’하고 능청을 떨었다. 계산원이 보이지 않도록 그의 발등을 지그시 밟았다. 능글맞게 웃는 그의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결국 착한 나는 그가 차를 주차한 곳까지 따라가 주었다. 차문을 열다말고 그가 차체에 몸을 기댄 채 팔을 벌렸다. 안기라는 뜻이었다. 흥,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그가 또 능청스레 내 허리를 당겨 안았다. 양손에 봉지를 들고 있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얼른 얼굴을 틀었다.
“굿나잇 키스도 안 해주는 정해진, 변비나 걸려버려라.”
“...혀 넣으면 물어서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
변비나 걸리라는 저주보다 끔찍한 게 없어서 나는 얼른 입술을 내어주었다. 그는 내 경고는 아랑곳 않는 듯 자연스레 혀를 집어넣었다. 그러나 나는, 말캉한 그의 혀와 함께 내 혀를 섞었다. 맞댄 그의 입술에 휘는 것을 느끼자마자 나는 얼른 얼굴을 떼었다.
“얼른 가버려.”
“또 맘에도 없는 말 한다.”
그리고 이마에 그의 입술이 와 닿았다. 나는 투덜이 스머프처럼 이마를 벅벅 문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의 차가 아파트 단지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까지 보고서야 발걸음을 돌렸다. 놀라고 무서워 울고, 이 세상에서 다시없을 위안을 얻고, 잔뜩 심술을 부리고. 단 몇 분 만에 그는 나를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하는 재주를 지녔다. 하여튼 웬수가 따로 없다, 생각하며 그러나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무언가 또 앞을 막았다. 반사적으로 주춤 뒤로 물러섰다.
“선배.”
“아... 놀랐잖아.”
기정이었다. 우뚝 서 있는 게 꼭, 제주도의 돌하르방 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기정은, 웃지 않았다. 혹시 봤나 싶어 눈치를 살피며 먼저 걸음을 떼었다.
“왜.. 왜 나왔어? 너무 늦어서? 희철이 마시는 맥주가 요 앞 가게에 없어서 저 밖에 나가서 사 왔...”
“저 봤어요.”
“......”
차라리,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싶었다. 기정이라면, 최기정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게, 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게, 내가 기정을 가까이 대했던 이유였기도 했다. 기정은 내가 아주 오래전에 잊어버린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내게는 그게 필요했다. 그런 사람의 위로와 인정이 필요했다.
“그게... 기정 씨, 실은 나... 남자하고 사겨. 아니, 남자 좋아해. 아니, 남자가 애인이야. 아니... 동성애자야. 그... 뭐라고 부르는지 알지?”
기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심장이 뛰었다. 초조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화가 났다. 너도 남자인 주제에 남자인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주위 사람들까지 그런 너한테는 아무 말도 안하지 않았느냐, 너는 모든 걸 아주 자연스럽고, 아주 공평하고, 아주 평화롭게 설득시키지 않았느냐. 나는,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저 그 사람 얼굴, 봤어요. 저, 바보 아니에요. 그 사람이 누군지도 알아요. 그리고 저, 예전에 선배 따라 한의원 갔다가 그 사람 부인 아이 가졌다는 것도 같이 들었어요.”
무언가에 삐친 어린아이처럼 기정은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입을 삐죽 내민 채, 기정은 무뚝뚝한 말투로 ‘알아요’하고 말했다. 나는 당장 봉지에 든 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 아니, 그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손으로 막 퍼먹고 싶었다.
“하..하지만 기정 씨, 우리는... 그러니까, 사정이 있고....기정 씨는 그런 거 다 이해해줄 수 있...”
“그거, 나쁜 거잖아요.”
“......나..나쁜 거야?”
“...당연하잖아요. 그냥 애인 아니잖아요. 아내가 있고... 거기다 이제 좀 있으면 아이도 생기는데... 그런 거, 나쁜 거잖아요. 안 되잖아요.”
기정은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할 때처럼 몇 번이나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가곤 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러지 말라고, 나 때문에 아프지 말라고, 말리고 싶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제 발아래만 보던 기정이 문득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었다. 어쩐지, 원망이 가득한 빛이었다.
“예전에, 희철 형님이 선배한테 가..가정 파탄범이라고 한 거... 이거였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가 시큰거렸다.
“나..나는 되게 무식하고 단순하고 그래서... 선배처럼 예쁜 사람이 하는 건 뭐든 다 좋아 보이고 그렇지만... 이..이런 건... 선배, 이런 건...”
“아... 나 되게 창피하다. 기정 씨 나 정말, 부끄럽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정 씨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응, 나 되게 쪽팔린다... 기정 씨, 나 정말 쪽팔려 죽겠다...”
귀가 화끈 달아올랐다. 너무 창피해서, 괜히 코를 문질러 닦았다. 기정은 다시 고개를 푹 숙인 채 제 발끝을 바라보았다. 봉지 안에서 아이스크림이 소리도 없이 녹고 있었다.
* * *
샤워를 마친 태준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아주 개운한 표정이었다. 나는 직접 커다란 타월을 꺼내어 그의 가슴팍을 향해 던져주었다. 그가 씩 웃으며 그것을 허리에 감아 묶었다.
“맛있는 냄새 나네?”
“응, 김치찌개.”
“오늘 내 생일 아닌데. 호강하네.”
“뭘... 그냥 이게 제일 손에 익어서 그나마 친구들도 맛있다고 해주는 거니까.”
“아니야, 너 요리 잘 해. 그 정도면 잘 하는 거야.”
어쩐 일로 칭찬을 다 한다며 경계하자, 뒤에서 바짝 몸을 붙여와 안았다.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간지럽게 와 닿았다. 나는 밥을 뜨다말고 주걱으로 그의 얼굴에다 대고 거기서 더 진도 나가면 흥부처럼 밥주걱으로 따귀를 맞을 줄 알라며 경고했다. 그도 더 이상은 정액을 쏟아낼 기력이 없었는지 볼에 쪽, 하고 입술을 붙였다가 얼른 떼었다. 그리고 침실로 가서 시트를 벗겨내어 직접 세탁기에 넣기까지 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너무, 심하게 했다. 이른 저녁부터 거의 동이 틀 때까지 온갖 체위로 뒹굴었다. 그리고 정오가 넘도록 나란히 이마를 붙인 채 잠을 잤다. 일어나서는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가서 늦은 점심을 먹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를 침실로 이끌었다. 나중에는 내 몸이 염려된다며 그가 ‘그만’ 하고 저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금만 조여주면 다시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나는, 귀신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어느 정도로 하면 그의 머리가 도는지 알고 있었다.
잠시 휴전협정을 맺고, 물을 마시기 위해 침대 아래로 발을 내디뎠는데 무릎이 꺾여 풀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꼴을 본 태준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좋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며 ‘응’하고 단순하게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침대로 기어 올라가 그의 허벅지 위에 앉자, 그는 내 몸을 끌어당겨 옆에 뉘었다. 그리고 온몸을 겹친 채, 그저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가슴 사이로 서로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두 개의 심장이 뛰었다.
먼저 샤워를 끝내고, 그를 욕실로 들여보낸 후에 김치찌개를 끓였다. 그는 담백한 걸 좋아하니까 돼지고기 대신 기름기를 뺀 참치를 넣고, 두부는 으스러진다고 싫어하니까 새송이버섯과 느타리버섯을 적당히 손질해 넣었다. 무엇보다 그는 내 손맛이 좋다고 하니까, 그 모든 재료를 씻지 않은 손으로 조물조물 주물렀다. 장난을 치는 개구쟁이처럼 ‘낄낄’ 웃음이 났다.
“밥 너무 많아.”
“다시 뜨기 귀찮은데 그냥 먹죠?”
“덜어놓으면 안 돼?”
“안 돼요.”
“혹시 많이 먹여놓고 또 굴리려는 거 아니지? 안 된다, 정해진. 난 이제 쥐어짜도 물밖에 나오지 않을 거야.”
“하여튼 생각하는 건 그런 쪽밖에 없죠?”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이렇게 웃는 모습을, 희철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김태준이 별로 잘 생긴 게 아니라고 했었으니까, 아주 고약한 성질머리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난다고 했었으니까.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었다.
그는 내 집에서 밥을 얻어먹을 때마다 몇 가지 되지 않는 반찬으로도 아주 맛있게, 그리고 열심히 먹었다. 그렇게 먹는 모습은 차마 재벌 3세라고 보기 어려웠다. 이런 걸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면 아주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가 원래 그렇게 아무 것이나 맛있게 잘 먹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식성이 까다로운 편으로, 일류 주방장의 요리조차도 고개를 젓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가 내 요리를 항상 맛있게, 열심히 먹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명언을 아주 잘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또는 ‘다 먹지 않으면 다시는 밥 없다’는 협박도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까다롭고 과격하고 능글맞고 제멋대로에 특히 하체가 짐승 같은 남자지만, 잘만 다루면 꽤 편한 남자이기도 했다. 다만 그걸 깨닫기까지가 오래 걸린다는 게 문제였다.
“내가 설거지 할까?”
“그러시든지.”
그리고 그걸 써먹으려면 ‘힘세고 오래가는’ 체력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했다.
나는 이를 닦고, 또 닦았다. 설거지를 마친 그가 욕실로 들어와 자신의 칫솔을 들고 치약을 짜내었다. 나는 한 번 더 이를 닦았다. 넓은 거울 앞에서 우리는 나란히 선 채 이를 닦았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가 웃으며 내 이마를 문질렀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인걸까. 아직, 모르는 게 많았다.
“내일 오면서 쇼콜라 케익 사갖고 올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별일 다 보겠다는 듯 ‘왜?’하고 물었다.
“그냥, 이젠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 그런 거 이제 좀 그만 먹을 때 됐다. 이만 썩고 쓸데없는 군살이나 찌우고. 너, 지금은 말랐다고 그런 거 막 먹어대지만, 긴장하면 안 돼. 원래 마른비만이 더 무서운 거다, 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말 잘 듣는다며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어린애 취급 하지 말라며 바락 대들었을 텐데, 그냥 참았다.
신발을 신고 그가 도어락의 오픈버튼을 누를 때까지 나는 그의 뒤에 바짝 붙어있었다. 그의 허리에 팔을 두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살짝, 닿지 않을 정도로만 가까이 손을 가져다 대었다. 따랑,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가 문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시 등을 돌렸다. 나는 얼른 걸쇠를 걸었다. 그가 장난기 많은 아이처럼 한쪽 눈을 찡그리며 피식 웃었다.
“또 뭐. 암호?”
“있잖아요. 우리 출판사에 최기정이라는 후배가 있거든요? 되게 착하고 귀엽거든요?”
“뭐야, 남자야? 그런 걸 잘도 나한테 말한다. 아무 이유 없어도 사람 하나 해고하는 거,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그 후배가 날 참 좋아해요. 내가 예쁜데다가 착하기까지 해서.”
“정해진, 너무 무리했다, 너. 약 먹고 푹 쉬어.”
“청정지역 무공해 인간이에요. 뭐랄까, 순수 덩어리 그 자체요. 그 후배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예쁘고 좋게 보인대요. 그래서 나도 내가 참 잘난 인간인 줄 알았거든요. 내가 하는 게, 괜찮다고 생각했거든요?”
그가 지루하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졸린 표정을 지었다. 말을 뚝 끊자, 금방 또 웃으며 ‘아니야, 계속해’하고 손을 뻗었다. 한 걸음, 나는 뒤로 물러났다.
“나는 있잖아요. 이 세상에서 쪽팔린 게 제일 싫어요. 그런데 그 후배가 날 참 부끄럽게 만들었어요.”
“혼내줄까?”
“아니, 내가 부끄럽다고, 창피하다고, 쪽팔린다고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었어요.”
그는 여전히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손으로 그 얼굴을 한 번 만져봤으면, 싶었다.
“이름이 뭐라고?”
“이제 나한테 오지 마요.”
“응?”
잘못 들었다는 듯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또 무슨 장난을 치고 싶어서 이래.”
“나는, 더 쪽팔리기 싫어요. 가오가 안 서잖아. 나도 벌써 스물일곱인데. 어린이 계속하면, 웃기잖아.”
“해진아. 뭐야, 왜 이래.”
“오지 마요. 또 오면 내가 딴 데로 가요.”
문틈 사이로,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정말, 아직 모르는 게 많구나.
“해..해진아...”
그가 손을 뻗었다.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그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저런 건, 사정하기 직전에 짓는 표정인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술이 떨렸다.
“해진아... 해진아, 제발... 응? 해진아...”
처음 알았다. 그도, 약하고, 아직 어리고, 서툰 남자였다. 나는 김태준이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고 돈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아서, 그래서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인 줄 알았다. 생각해 보면, 그는 자기 뜻대로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뭐든지, 내 뜻대로 따라주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렇게 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그냥 계속 고개를 젓기만 했다.
“해진아, 자..잠깐만.. 해진아..”
김태준도 우는구나.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더니. 나는 위대한 발명을 한 과학자가 된 기분으로, 용감하게, ‘안녕’하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끝까지 장난인 줄 알까봐, 손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