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24화 (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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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정은 첩보놀이를 하는 거냐며 즐거워했다. 나는 그런 기정을 향해 연신 ‘쉿, 쉿’하고 주의를 주어야 했다.

오랜만에 빛을 보는 내 중고 자동차를 몰고 기정을 태운 후 한의원으로 향할 때까지만 해도, 무난하고 기분 좋은 주말이었다. 내가 하는 건 뭐든 옳다고 하는 최기정을 데리고 왔으니, 침을 맞을 때에도 든든한 백을 둔 기분에 덜 무서울 것 같아서 오랜만에 기정이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의원 건물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건물 입구로 돌아 나오는 순간, 내 무난하고 기분 좋은 주말은 ‘첩보놀이’가 되어버렸다.

은색 메르세데스는 유연하게 커브를 돌고 있었다. 분명 이쪽 주차장으로 들어올 게 뻔해, 나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차체가 가장 높은 차량 뒤로 몸을 숨겼다. 기정은 내가 ‘숨어!’하고 명령하자 정신을 못 차리고 허둥대다가 제 사이즈를 다 가리지도 못하는 소형 자동차 뒤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메르세데스가 들어왔다. 나는 내가 숨을 쉬고는 있는지 궁금했다. 조금 전에 벌써 심장이 멎어서, 죽은 게 아닐까.

“조심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잖니. 괜히 말 새지 않으려면 우선은 이쪽이 차라리 편해.”

“네, 그렇죠.”

고부간의 대화소리가 바로 가까이서 들렸다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운전기사로 보이는 남자도 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갔다. 다시 주차장은 정적에 잠겼다. 기정이 소형차 뒤에서 얼굴을 빠끔 내밀고 ‘해진 선배’하고 부르는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여전히 밖을 경계하며 주춤 걸어 나왔다. 둘은 한의원 안으로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들이 다시 나올 때까지, 아니 차를 타고 저 앞 오거리까지 은색 메르세데스가 나가는 것을 볼 때까지 한의원 안에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기정 씨, 우리 저기 편의점에서 라면 먹을래?”

“라면 좋아요!”

결국 우리는 한의원 건너편의 편의점에서, 통유리를 통해 역시 맞은편 한의원의 입구를 관찰하며 컵라면을 먹었다. 나는 문득 기정에게 영화도 보여주고 점심도 사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떠올렸다.

“라면이라서 미안.”

“저 라면 정말 좋아해요!”

정말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뜨거운 라면 국물을 한꺼번에 후루룩 삼키는 기정을 보며 나는 참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희철의 말대로, 차라리 이런 남자였다면, 아무런 걱정이 없었을까.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고 하는 걸 보면,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거나 그가 어렸을 때 결별한 것이었을까.

나는 문득,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에게, 내가 참 예쁘다고 말해주는 사람에게 그동안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가족 이야기는 아무리 가까워도 쉽게 꺼낼 수 없는 문제인 것 같아, 그저 이때껏 사귀었던 사람들 이야기나 해 달라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일테면 태준이나 나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그러한 것이 더 꺼내기 어렵고 실례되는 질문이 되겠지만 말이다.

예상대로 기정은 참 예쁘게도 연애를 했었다. 첫사랑은 옆집 누나, 정식으로 처음 사귀었던 사람은 중학교 동창, 첫 키스는... 기정이 얼굴을 붉히며 도리질을 해대는 바람에 나까지 부끄러워져 그만해도 된다고 내가 먼저 말려서 듣지 못했다. 나는, 기정이 부러웠다. 짝사랑으로 머문 첫사랑, 교복을 입고 손을 잡는 것만으로 주위 눈치를 봐야했던 풋사랑, 얼굴을 붉히며 도리질을 치게 만들 만큼 소중한 첫 키스까지. 내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선배 형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적은 있었지만, 짝사랑 같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짝사랑을 앓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혼자 설레고 혼자 부끄러워했지만, 그건 오롯 내 성 정체성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경우는 첫 키스는 물론 처음으로 관계를 한 것도 태준이었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내 연애의 경험 전부가 오로지 그뿐이라는 것이었다. 어쩐지, 억울했다. 어느 드라마에서 어머니가 딸에게 말했다. ‘건전한 교제를 전제로 한다면, 되도록 여러 남자를 만나 보거라. 그래야 남자를 보는 눈이 생긴다. 그리고 연애라는 것은 젊음의 특권 아니니?’ 그때 나는 먹고 있던 초밥을 떨어뜨렸다. 최악이었다. 단 한 명의 남자에, 건전하지 못한 교제라니.

기정의 수다를 들으며, 그러나 조리퐁을 하나씩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딴 생각에 젖어있는데, 맞은편 건물의 주차장으로 메르세데스를 몰던 남자가 급히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한의원의 출입문이 열렸다. 나는 기정의 옷깃을 잡아 급히 아래로 끌어당겼다. 쪼그려 앉으면서 과자 봉지를 건드렸는지, 머리 위로 조리퐁이 와르르 쏟아졌다. 기정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아깝다며 주워 먹으려는 것을 말리느라 부산을 떠는 사이, 은색 메르세데스가 주차장에서 머리를 내민 채 도로로 진입할 틈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쪼그려 앉은 채, 어쩐지 나를 빤히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메르세데스의 전조등을 힐긋거렸다.

“기정 씨. 나 지금, 라면 국물 옷에 튀고 조리퐁 머리에 뒤집어쓰고, 되게 웃기지.”

“에이, 조리퐁은 털어내면 되죠. 선배 머리 위에 있는 조리퐁은 더 맛있어 보여요.”

“...고맙다, 기정 씨.”

그리고 기정은 정말 내 머리와 어깨 위에 쏟아져 있는 조리퐁을 손바닥에 모아 입에 털어 넣었다. 나는 손바닥을 탁탁 털며 기정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청소할 거리를 만들어 미안하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왔다. 목을 쭉 내밀고 확인했지만 오거리에도 메르세데스는 뒤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뒤 기정을 잡아끌며 길을 건넜다.

“어, 정해진 씨.”

한의원 문을 열려는데 마침 누군가 안에서 문을 밀었다. 뒤로 물러나 있다가 문을 잡으려는데 내 이름이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한의원장 손자 겸 독일어권 도서 번역가, 강민하 씨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금발의 키가 큰 외국인과 서로 허리를 두르고 있다가 인사를 하며 자연스레 팔을 풀었다. 느낌이 묘하다 했지.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남자끼리의 스킨십에 별로 거부감이 없는 듯 했다. 별 게 다 부럽다, 생각하며 나는 조금 늦게 인사를 했다.

“근데 해진 씨도 그때 예약 했었나요?”

“아니요, 저는 따로 온 거에요.”

“에이, 아는 사람 할인된다는 거 진짠데. 잠깐만, 내가 들어가서 얘기 해둘...”

“아니, 괜찮아요. 저 재벌가 쪽 아닌 거 보였는지 알아서 잘 해주시던데요.”

어쨌든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을 잡고 들어가려는데 그가 다시 외국인 남자의 허리에 팔을 두르다말고 ‘아참’하며 몸을 돌렸다.

“네?”

“이거 빅뉴스. 태인 기업 며느리, 척맥이 잡힌대요. 아, 임신맥이요. 아까 와서 진맥 하고, 방금 양방 산부인과 가서 확실하게 진단 받는다고 갔대요.”

“아, 네....”

“할아버지께서요, 신혼살림 차린 여자가 매일 울상이어서 거참 안 됐다고, 아무래도 부부금슬이 안 좋은 것 같다고 했었는데, 그래도 다행이죠? 그 남편 되는 사람도 말처럼 그렇게 씨가 부실하고, 뭐 그런 건 아니었나 봐요. 아직 결혼한 지... 이제 일 년 되나요?”

아까부터 기정은 ‘우와아’ 감탄사를 연발하며 금발의 외국인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기정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지만 듣지 않았다. 무뚝뚝한 인상의 외국인도 그런 기정의 노골적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아무 것도 없는 하늘만 올려다보며 강민하 씨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옆구리에 감각이 없는지, 강민하 씨는 오랫동안 출입문 앞에 서서 남의 집 사정을 일일이 보고했다. 쌀쌀맞게 생긴 주제에 참 오지랖이 넓다고, 생각했다.

체질침은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일반 침과는 달리 피부에 약간의 자극만 주는 형식으로, 생각만큼 통증이 심하지는 않았다. 대신 시침의 횟수가 많았는데, 나는 기어코 선단 공포증 환자답게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풍채가 좋은 원장은 그런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보고 있던 기정은 용기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저도 겁을 먹고, 우는 나를 보며 당황해서는 이상한 헛소리나 지껄여댔다. 결국 나는 영화도 보여주고 점심도 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시체처럼 침대 위에 엎어져 버렸다.

*   *   *

초인종이 울린 것은 일요일 저녁이었다. 움직이기 싫어서, 어차피 집안의 불도 모두 꺼놓아 캄캄한 상태여서, 아무도 없는 척 했다. 그러나 벨은 신경질적으로, 지치지도 않고 울렸다. 하루가 꼬박 넘도록 침대 위에서 엎어져 누워 있은 탓에 내 머리 꼴은 엉망이었다. 눈은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허기도 져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눈곱을 떼며 현관문 구멍으로 밖을 확인하니, 희철이었다.

만약에 또 때릴 거라고 하면 집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먼저 걸쇠를 건 뒤 문을 열었다. 복도의 주황빛 조명을 뒤로 받은 희철은 어딘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희철이도 내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 내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암호.”

“미친 놈.”

“정답. 들어와도 된다.”

나는 걸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희철은 고마운 줄도 모르고 신발을 벗으며 ‘이거 정말 미친놈 된 거 아냐?’하고 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자, 하고 무언가를 내밀기에 받아들고 보니 프라이드치킨과 캔맥주였다. 문희철도 쓸모가 있을 때가 있다며 나는 손을 쭉 뻗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희철은 내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그런 몰골로는 신성한 프라이드치킨과 맥주를 절대 영접할 수 없다며 욕실을 향해 등을 떠밀었다. 입 냄새를 맡아보니, 그럴 만도 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보니 희철은 벌써 혼자 닭다리를 뜯으며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괘씸한 놈, 하며 앉아있는 녀석의 허벅지를 발로 꾹꾹 누르는데 별 반항이 없었다.

이럴 때다 싶어 구부정하게 앉은 녀석의 등도 꾹꾹 눌렀다. 그래도 희철은 아무 말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벌써 코브라 트위스트를 당하고도 남음직한데. 나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옆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 숙인 녀석의 얼굴로 바짝 얼굴을 드밀었다. 그제야 희철은 내 얼굴을 커다랗고 두꺼운 손바닥으로 확 밀쳤다. 그래도, 다 봤다.

“....우냐?”

“나, 선희한테 퇴짜 맞았다.”

“난 또. 새삼스럽게. 네가 선희한테 퇴짜 맞는 게 한두 번이냐?”

“이번에는 진짜, 아주, 확실하게.”

짧게 단어 하나하나를 끊어 말하더니, 희철은 ‘흑’ 소리와 함께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무어라 해줄 말이 없어서 나는 그저 티슈를 뽑아 녀석의 손에 쥐어주었다. 희철은 사나이는 울 때 티슈를 쓰지 않는다며 치워버렸다. 그리고 제 주먹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눈물을 닦았다.

“너희 출판사에... 거... 최상철? 뭐 그런 사람 있냐?”

“최상철? 최상철... 최상철...... 최 선배?!”

“뭐 하여튼, 그 사람하고 시작했단다, 망할 놈의 연애. 씨발.... 이씨...흐으..”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동상처럼 굳었다. 희철은 빈 맥주 캔을 아그작 구부려 주방 쪽으로 던져버리곤 또 한 캔을 땄다. 그리고 여전히 굳어있는 나를 쳐다보곤, 벌린 내 입에 닭 날개를 쑤셔 넣어주었다. 날개 먹으면 바람난다는데, 내가 고작 이런 농담이나 던지는 바람에  희철이는 더 심하게 울어댔다.

나는 희철이의 두터운 등을 두드려주며, 닭 날개를 씹으며, 머릿속으로 선희와 최 선배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어쩐지, 최근 둘이 유난히 자주 붙어 다닌다 했다. 그리고 나는 내 무릎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 왜 파본 검사를 위해 편집 디자이너가 직접 인쇄소로 가느냐 말이다. 이렇게 둔하다니. 나는 내 이마도 탁 쳤다.

“너 이 새끼. 넌 알고 있었지!”

“아..아니야! 난 절대 몰랐어!”

희철이 꺽꺽 울다말고 갑자기 고개를 들곤 시뻘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억울했다. 내가 둔한 것도 있지만, 내 불륜만으로도 속이 시끄러운데 남의 연애 같은 것을 눈치 챌 겨를 따위, 없었다. 희철은 내 결백을 몰라주고 아예 멱살까지 잡아 올리며 ‘배신자, 배신자’하고 내 몸을 짤짤 흔들어댔다. 그러다가 나보다 오히려 제가 먼저 지쳐서는 잡고 있던 멱살을 힘없이 풀어주곤 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야, 나 정말... 좋아했다.”

“응, 안다.”

“걔가 나한테 욕하고, 발로 까고, 남자 알기를 개떡으로 알고, 씨... 너..너랑 그런 일 있었어도, 아니, 그 뒤에 하나도 안 부끄러워하고 외려 제가 큰소리 떵떵 칠 때도, 여자애가 참 뻔뻔하다 싶으면서도 그게 또 두근두근하고 그랬다. 나 정말... 걔 좋아했다.”

“응, 그것도 안다.”

“조..좆같다, 씨발... 뭐 이래, 뭐가 이래, 씨... 봐라, 정해진. 언젠가 이렇게 될 거 알았으면서도 계속 덤볐다가, 좆 된 거 좀 봐라. 그래도, 그래도 너 계속 그럴 거냐?”

“......그..그럼 넌 왜 처음부터 안 될 우물을 팠냐, 이 개새끼야! 너도 네 맘대로 안 됐던 걸 왜 나한테 하라는 거냐고! 너도, 너도 그게 안 돼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나는 한 톨 희망이라도 있었지! 선희가 남자냐? 선희가 유부남이야?!”

“나..나도, 나도 희망 같은 거... 그런 거... 내가 먼저란 말이다! 내가 먼전데... 그래도 그 사람이 선희처럼 아예 마음이 없는 건 아니잖아! 너는 조건만 됐지, 우..우리는 조건만 안 되는데 그게 왜....!”

“너 지금 나더러 맨땅에 헤딩했다고 꼬집는 거냐? 너, 이... 가정 파탄범 주제에...!”

그리고 우리는 신성한 프라이드치킨 위에서 뒹굴었다. 맥주도 엎어졌다. 힘에서 절대 우위를 차지하는 희철을 상대하느라 나는 할 수 없이 조금 비겁한 방법을 사용했다. 먹다 남은 닭 뼈를 녀석의 얼굴을 향해 날리자, 희철은 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는 결국 코브라 트위스트를 당했다. 항복을 했는데도 풀어주지 않아서,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한참을 그렇게 뒹굴고 도망치고 뒤쫓고 무언가를 던지고 잡히고 또 뒹구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경비실이었다. 아랫집에서 시끄럽다며 신고가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남의 말을 전하는 것뿐인데도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미안한지 경비 아저씨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레슬링 같은 스포츠는 아파트에 살면서 즐기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요.

*   *   *

결혼은 본질적으로 종족번식과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창의적인 제도이다. 그러면, 어차피 종족번식과 보존이 목적이라면, 왜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는 아이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더 많이, 그리고 더 안전하게 종족을 지킬 수 있을 텐데.

언젠가 태준이 내게 이름도 여자 같은 주제에 왜 여자가 아니냐고, 왜 아이를 낳을 수 없냐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그따위 생각이나 하면서 이틀을 멍청하게 보냈다. 능구렁이 같은 최 선배가 종종 내 옆구리를 찔러댔다.

될 수만 있다면, 벌써 백 명은 낳았을 텐데. 그동안 김태준이 콘돔이 없다거나 참을 수 없다는, 꼭 짐승다운 핑계를 내세우며 내 안에 밀어 넣은 정액의 양이 얼마 만큼인데, 백 명이 문젤까. 할 수만 있다면, 정말 백 명이고 이백 명이고 잘 낳고 잘 키울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혹 내가 여자가 되고 싶은 건가, 생각해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또 이틀을 멍청하게 보내었다. 역시 똑같이 능구렁이 같은 선희가 종종 내 이마를 향해 종이뭉치를 날렸다.

자신을 꼭 빼닮은 아이는 얼마나 예쁠까.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울까. 나는 문득 어쩌면 내가 아이 아빠가 될 수도 있었던 때를 떠올렸다. 만약, 아무런 사고 없이 그 아이가 온전히 태어났다면, 그랬다면 지금 조금이라도 덜 외로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역시 이틀을 멍청하게 보냈다. 선희와 최 선배 얼굴을 볼 때마다 괜히 혼자 미안한 마음에 고개가 숙여졌다. 팀장에게 다음 주에도 계속 이런 상태면 확 잘라버린다는 옐로우 카드도 받았다.

그 동안, 출장 같은 건 벌써 두어 번이나 더 다녀왔을 시간동안, 태준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다만,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복도 가득 블랙스톤의 미향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는, 한 기업의 전무이사 자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자리구나, 별로 부러워할 거 없는 직책이구나, 생각했다.

일주일 내내, 온갖 허튼 생각으로 머리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래서 급기야는 아버지의 기일을 잊어버리는 불효 죄를 저질렀다. 토요일 저녁, 큰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제사상은 큰아버지 댁에서 준비하는 것으로 하고, 아침 일찍 제사를 지낸 후 곧바로 성묘를 가기로 했다. 선희와 희철이도, 한 명은 갓 싹트기 시작한 연애로, 또 한 명은 아물려면 한참 먼 실연의 상처로 각자 정신이 없었는지, 당일 아침에서야 전화가 왔다. 같이 가겠다고 하는 걸, 제사는 가족이 아닌 외부인의 참석은 오히려 예법에 어긋날 수 있다는 큰아버지의 말에, 추석 즈음에 성묘나 같이 가자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일요일 이른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여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깔끔하게 이발을 하지 않은 것이 걸렸다. 이발소가 문을 열려면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다. 뒷머리는 어쩔 수 없지만 눈을 가리려고 하는 앞머리만은 혼자서 어떻게든 처리해보자는 생각에 완구용 가위를 들었다. 탁월한 손재주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수전증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러했다. 그래서, 가위를 든 지 십분도 채 되지 않아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은, 바보였다.

가지 말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런 꼴을 오랜만에 뵙는 아버지에게 보여드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모자를 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평소에 없던 수전증이 아버지의 기일을 잊은 죗값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래서 아버지의 화가 풀릴 때까지, 앞머리가 눈썹 아래까지 길 때까지 머리를 다듬지 않기로 다짐했다.

눈썹 위로 댕강 올라간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신발을 신었다. 문득, 독하기도 한 체리향이 나는 것 같았다. 신발의 뒷굽을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현관문의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역시, 음울하게 생긴 김태준이 불량스럽게 복도 벽에 기대서서는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었다. 이러다간 이번엔 앞집에서 신고가 들어올 게 뻔했다.

당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나도 모르게 ‘축 임신’ 같은 걸 지껄일 것 같아서, 웬만하면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은 점점 가는데 김태준은 물러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거듭 확인하다가, 결국 걸쇠를 건 채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틈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암호.”

“...핑크돌이.”

“땡, 틀렸어.”

“호섭이?”

“땡, 땡, 완전히 틀렸어.”

“......성묘 가자. 요즘 내가 좀...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어. 산소에 가서 약소하게 제사 지내고...”

“큰아버지 댁에서 제사 지내고 바로 성묘 가기로 했어요.”

“아.”

걸쇠를 풀고 문을 열자 태준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여전히 앞머리를 손바닥으로 누른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는 올라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닫음’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곧 다시 열렸다. 태준은 담배를 복도바닥에 비벼 끈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옆집에서 뭐라고 하겠다, 중얼거리자 태준은 얼른 ‘열림’ 버튼을 누르고는 꽁초를 주웠다. 어울리지 않게 착한 척 하기는. 이번에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의 차에도 타지 않았고, 내 차를 몰지도 않았다. 우선 큰아버지 댁에 들러야 했기 때문에 그의 차를 탈 수 없었고, 어쩐지 오늘만큼은 안전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곧바로 택시를 탔다. 그리고 그는 첩보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가 탄 택시를 계속 쫓아왔다. 나는 이 기회다 싶어 택시기사에게 뒤쫓는 사람이 있어 그러니 요령껏 잘 따돌려 달라고 말했다. 오거리와 사거리와 다시 오거리를 지나오면서, 더 이상 그의 차가 보이지 않았다. 거참 쌤통이라고 생각했다.

“머리가 그게 뭐냐.”

“그게... 좀 깔끔하게 다듬으려다가요, 실수로...”

손으로 산소의 잡초를 뽑으며 큰아버지가 쯧쯧 혀를 찼다. 나는 헤헤 웃으며 앞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리고 향을 거두고 가지고온 주과포혜를 정리한 뒤 돗자리를 접었다. 나는 아버지께 첫 번째 제사를 이렇게 급하게 준비해서 죄송하다고, 다음에는 꼭 건강해진 어머니와 둘이 어떻게든 정성스레 차려보겠다고 약속드렸다. 햇볕이 따뜻해서, 괜찮다고 말씀하시는 걸로 멋대로 해석해버렸다. 그때 바람이 불었다면 나는 아마 ‘이래서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고 하는구나’ 라고 해석했을 것이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냐? 원, 그렇게 비실거려서는 장가나 제대로 가겠어?”

“어머니 모시고 살아야죠.”

“거참 네 아버지가 좋아하겠다.”

“......”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섭섭했다. 친척 중 누구도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에 한 번 인사차 들른 후로 다시 다녀간 사람이 없었다. 나를 가족의 온전한 일원으로 받아들여주지 않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말로는 어서 결혼해서 애도 낳고 가정을 꾸려 살라고는 하지만, 집안으로부터 나의 완전한 독립을 원해서였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그나마 명절 때만이라도 얼굴을 봤지만, 근 일 년 동안은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내가 결혼을 하면 끝일 게 뻔했다. 그나마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있어서 외가와는 두어 번 교류가 있었다.

먼저 아래로 내려가는 큰아버지 가족을 바라보며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어쨌든, 잊지 않고 아버지 기일을 챙겨준 것은 감사한 마음에 불쑥 ‘고맙습니다’하고 말했다. 큰아버지가 큰어머니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큰어머니가 뒤를 돌아보며 ‘뭘’하고 대답했다.

주차장 입구로 들어서다가, 나는 우뚝 멈추어 섰다. 새우깡을 먹으며 뒤따라오던 사촌들이 나를 앞질러 먼저 차에 올라탔다. 큰아버지가 차문을 닫으려다 ‘뭘 하고 섰어’하고 재촉했다.

“먼저 가세요. 저는... 저는 아버지하고 좀 더 얘기하다 갈게요.”

“무슨 소리야. 그만하면 충분했어. 여기선 택시 잡기도 힘들어, 얼른 타.”

“저 앞에 조금만 나가면 택시도 곧잘 다니던데요 뭘. 먼저 들어가세요.”

“...조심해서 올라와라.”

큰아버지의 차가 주차장을 벗어나 큰 도로까지 멀리 나가는 것을 본 후에 나는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태준이 차에서 내려 차체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따돌리니까 기분 어땠어?”

“짜릿했어요.”

나는 결국 그를 데리고 한 번 더 아버지 묘소 앞에 서야 했다. 향과 향로는 물론 돗자리도 없어서 태준은 그냥 간단하게 묵념만 했다. 나는 조금 웃었다. 묵념이라니, 무슨 식장 행사를 하는 것 같아서 어색한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랫동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잡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새벽부터 부산히 움직인 탓인지 보조석에 기대어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졌다. 내가 안전벨트를 매는 것까지 확인한 태준은 내 위로 몸을 숙여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혀주었다. 좀 자, 하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감고서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잘 수 없었다. 잠들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아버지 기일인데다, 그리고, 그리고, 그와 일주일 만에 얼굴을 보았다. 옆모습을 훔쳐보거나, 낮은 목소리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문득 도로가의 러브호텔이 눈에 띄었다. 나는 핸들을 잡고 있는 그의 팔뚝을 만졌다.

“왜.”

“아까 우리 아빠한테 무슨 얘기 했어요?”

“비밀이다.”

“거참 야박하게 구네.”

그의 말버릇을 따라하자, 태준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곤 ‘그래도 말 안 해줘’하고 말했다.

“문득 생각난 건데요, 내가 죽으면 누가 내 제사를 지내줄까? 이대로 계속... 자식도 없고 그러면.”

“제사 지내줄 자손이 필요해서 아일 갖는 건 이기적이야.”

그럼 당신네들은 그 많은 재산을 물려줄 자손을 위해 결혼을 하고, 결국 그런 식의 아이도 만들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다가, 그저 입술을 꾹 물고 말았다.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무서웠다. 문득, 아줌마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남자가 불륜 상대와 함께 누워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내였다. 아이가 아프다는 말에 남자는 곧바로 일어나 떠난다. ...드라마 좀 그만 봐야겠다, 생각했다. 도로가에 또 하나의 러브호텔이 눈에 띄었다.

“하고 싶다...”

“너 이 불효자식. 아버지 제삿날 그러고 싶어? 실망이다, 정해진.”

“...불효자는 웁니다. 그래도...”

“호섭이 머리한 정해진은 전혀 섹시하지 않아. 별로 안 내켜.”

“콘돔 없이 그냥, 안에 듬뿍... 했으면 좋겠...”

끼익, 소리를 내며 그가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선단 공포증 : 날카롭거나 뾰족한 것에 대한 공포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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