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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다, 가정 파탄범!”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희철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뒤따라 들어오던 선희는 얼른 뛰어가 희철의 뒤통수를 쳤다. 기정은 아직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워둔 입구에 서서 아이처럼 좋아하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아무래도 그냥 돌려보낼까, 싶어 ‘기정 씨 그냥 갈래?’하고 물었더니 금방 울상이 되어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안녕, 친구야.”
“넌 의자에 앉지 말고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라, 이 가정 파탄범.”
“넌 왜 자꾸 애한테 그런 소릴 하냐? 정해진이 아무리 가정 파탄범이라도, 친구인 이상 우선은 감싸줘야지.”
선희는 이번엔 숟가락으로 희철의 이마를 때렸다. 희철은 선희를 데리고 나온 것에 대해 ‘가정 파탄범답게 치사한 방법을 썼다’며 나를 힐난했지만, 나는 오히려 선희가 진짜 지원군이 맞는지 의문스러웠다.
기정은 여전히 입구에 세워진 트리 앞에서 사진을 찍어대다가, 급기야는 카운터를 보던 직원에게 자신의 휴대폰을 쥐어주며 트리와 옆에 선 자신을 찍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나와 선희는 그 모습을 보다가, 창피해서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기정이 너무나 해맑게 ‘사진이 잘 나왔어요’하며 다가와선 희철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의외로 낯을 가리는 희철은 낯선 사람이 곁에 앉자 깜짝 놀라서 의자를 주춤 뒤로 물렸다.
“여기는 최기정 씨. 우리 출판사 막내로 들어온 내 쫄병. 해진이가 참 예뻐하.... 해진이를 참 예뻐라 해줘서 데리고 나왔다. 어이, 최기정. 인사 해야지. 이쪽은 문희철. 보다시피 우리네 친구다. 깍듯하게 인사해.”
“우와아....”
깍듯하게 인사하라는 말을 듣기는 들었는지, 기정은 바로 옆의 희철을 아래위로 훑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헤 벌린 게 꼭, 당장이라도 그의 엉덩이 사이에서 풍성한 꼬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희철은 앉은 자리에서 등을 최대한 뒤로 젖힌 채 그런 기정을 경계했다.
“뭐...뭐야, 이건.”
“우와아.... 크다아... 형은 꼭... 꼭... 곰 같네요!”
“......”
“풉.”
“푸풉..”
“웃지 마, 가정 파탄범! 강선희 너도! 뭐야 이건. 이런 걸 왜 데리고 나온 거야!”
흥분하는 희철이와 눈을 반짝이며 그런 희철이 정말 불곰 같다고 감탄하는 기정을 내버려두고 선희와 나는 서로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둘만 건배를 하자 희철이 왁왁 소리를 지르며 얼른 제 잔에도 스스로 술을 따르곤 잔을 맞부딪혔다. 선희가 희철에게 참 자존심 없는 놈이라고 타박했다. 나도 가정 파탄범과 잔을 부딪히고 싶더냐고 물으려다가, 한 대 맞을까봐 참았다.
아직 저녁 전이어서 희철을 제외한 세 명은 식사를 먼저 주문했다. 기정이 있어서인지, 그래도 희철은 밥을 참 꾸역꾸역 잘도 먹는 나를 그저 노려보기만 할 뿐 다른 때처럼 직접적으로 유부남 어쩌고 하며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기정을 어서 보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일부러 무서운 동네 형 흉내를 내며 겁을 주었다. 기정은 오히려 그런 희철을 재미있어 했다. 희철의 얼굴 앞에 휴대폰을 갖다 댄 채 사진 한 번 찍어도 되냐고 묻기까지 했다. 나는 소화가 아주 잘 되었다.
“최기정이라고 했냐? 좋아, 너 오늘 죽어봐라. 선희 쫄병이면 내 쫄병도 된다. 자, 마셔라.”
희철은 기정을 집으로 보내버리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쪽으로 보내버리겠다고 생각했는지, 느닷없이 소주와 맥주를 섞어 폭탄주를 만들어 기정에게 내밀었다. 기정은 밥을 먹다말고 자신 앞에 주어진 폭탄주를 보면서 그제야 난감한 표정으로 나와 선희에게 구조요청 눈빛을 보냈다. 선희는 그것을 외면한 채 고개를 숙이고 계속 밥을 먹었고, 나 역시 다를 건 없었다. 결국 기정은 부대찌개를 떠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희철이 내민 잔을 받았다.
“원샷, 원샷.”
희철은 전혀 즐겁지 않은 목소리로, 두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원샷을 외쳤다. 기정은 코를 막고 정말 한 번에 잔을 비웠다.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기정은 오만 인상을 다 찡그리며 ‘크아아-’하고 이상한 신음을 내질렀다. 그것을 보는 선희와 나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그것이 열 잔이 넘어갈 즈음, 드디어 기정이 갔다. 기정은 아주 편안하게 테이블 위로 얼굴을 기댄 채, 뻗었다. 희철은 아주 뿌듯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냐?”
“당연하지. 아휴,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대체 이런 혹은 왜 달고 온 거야? 뭐... 정해진이 예뻐한다고? 아님 정해진을 예뻐한다고?”
“정해진을 예뻐라 한다고.”
“그럼 이 녀석도 뭐 그런 거야? 호모?”
희철이 엎어져 있는 기정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순간 기정이 꿈틀거리자 희철을 얼른 ‘자장자장 잘도 잔다’하고 자장가를 부르며 기정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나와 선희를 번갈아보며 대답을 재촉했다. 선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를 보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어때?’하고 내게 답을 미루었다. 나 역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다. 기정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단지 사심 없이 사람을 좋아하고 예쁜 것이나 귀여운 것, 또는 특이한 것을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기정이 다시 잠든 사람 특유의 숨소리를 내자, 희철은 안심한 듯 그의 뒤통수에서 손을 떼곤 제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기정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렇지’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너, 차라리 얘랑 사귀어라.”
“그런 쪽 아니라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 예뻐라 한다며! 유부남보다는 낫잖아!”
희철이 버럭 소리 지른 덕분에, 주위 사람들이 내가 아닌 선희를 보며 쯧쯧 손가락질을 했다. 선희는 앞머리와 옆머리로 최대한 얼굴을 가린 채 희철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무슨 말을 해도 좋으니 목소리는 좀 낮추라고 부탁하자, 희철은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곤 ‘여기 얼음물이요!’하고 카운터를 향해 외쳤다. 그리고 얼음을 아작아작 깨어 물고서야 한숨을 훅 내쉬곤 테이블 위로 두 팔을 얹은 채 침착하게 말했다.
“그런 놈 뭐가 그리 좋아서 못 놓는 거냐? 잘난 건 돈밖에 없잖아. 너, 예전에 매일 나한테 그 놈 뒷다마 깠었잖아. 딱 봐도 성격도 지랄 맞게 생겼더구만.”
“그..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야.”
“야, 솔직히 그거 잘 생긴 거 아니다? 눈도 쭉 찢어져선 말이야. 내가 호모가 아니라서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다만, 아니다, 내가 아마 호모였으면 너한테 완전히 반했을 거다. 그래, 정해진 너 참 잘 났어. 남자들이 청순파에 약하잖냐. 호모라고 뭐 다를까. 어쨌든 너 정도면 그런 놈보다 훨씬 괜찮은 총각 호모를 건질 수 있다 이거야. 정 안 되면 그.. 게..게이바 같은 데에 가서 건전한 만남을 한번... 그래, 혼자 가기 쪽팔리면 내가 같이 가줄 수도 있다. 응?”
“...자세히 보면 잘 생겼는데...”
“야! 너 대체 누구 편이야! 나야, 그 놈이야!”
선희가 호박전을 희철의 입에 쑤셔 넣으며 중재에 나섰다. 나는 희철이의 ‘누구 편이야’하는 말이 참 재밌다는 생각에 혼자 히죽 웃었다. 그걸 보고 희철이가 또 왁왁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선희도 나를 참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나는 눈치를 보며 깍두기를 씹어 먹었다. 그리고, 희철이 계속 태준의 흉을 보는 게 듣기 싫어서, 냄새도 끔찍해하는 소주를 병째로 들고 마셔버렸다. 최기정처럼 테이블 위에 뻗어버리고 싶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선희도, 희철이도 나를 말리지 않았다.
물처럼 꿀꺽꿀꺽 마시다가, 그렇게 반 병 정도를 비우다가 역류할 것 같아 술병을 입에서 떼버렸다. 당장이라도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것을, 또 깍두기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버티었다. 눈알이 화끈거렸다.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졸려’ 한 마디 내뱉고 테이블 위로 엎어져버렸다. 그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진짜 자는 줄 알았는지, 잠시 후 희철이와 선희가 목소리를 낮추어 대화를 이어갔다.
“강선희, 너도 그러는 거 아니야. 친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말려야 한단 말이다.”
“네가 너무 그러니까 나라도 다독여줘야 할 거 아니냐, 이 불곰 새끼야. 나라고 뭐 그런... 그런 관계가 보기 편한 줄 아냐? 그냥, 저 놈, 저희 어머니한테도 편하게 말 못하는데, 이유 불문하고 편들어 줄 사람 하나 없는데, 나라도 있어줘야 할 거 아냐. 게다가 저 놈이랑 나는, 하나씩 약점을 잡고 있잖냐. 나는 저 놈이 무슨 짓을 해도 편들어줄 거고, 저 놈도 마찬가질 걸? 문희철 왕따야.”
“내가 말이다. 그래, 호모고 뭐고 다 인정한다 이거야. 나도 생각 많이 했어. 백보 양보해서, 그게 진짜 사..사랑 뭐 그런 거라는 것도 인정한다 이거야. 근데, 근데 이건...끝이 뻔하잖아. 저 놈, 큰일 겪은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뭐 터지면 정말 못 견딘단 말이다. 나...나는 정해진 어떻게 될까봐, 씨발... 무서워 죽겠단 말이다..씨...”
“......끝이 뻔하면, 그 때 우리가 독수리 이형제처럼 샤샤샥 나타나서 일으켜주면 되고 뭐... 야, 울지 마라, 불곰. 그 덩치에 울면 되게 추하다.”
희철이 코를 훌쩍이다가, 티슈를 몇 장이나 뽑더니 킁, 코를 풀었다. 티슈 아깝다. 나는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눈을 감은 채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내 옷 소매로 눈물이나 콧물을 닦아줄까 말까 고민했다. 아무래도 한 대 맞을 게 분명해서, 참았다. 그렇게, 꾹꾹 참고 있는데 정말 졸음이 밀려왔다. 토하고 싶은데.
나는 테이블 아래를 손으로 더듬어 동그란 쓰레기통을 찾았다. 그리고 고개를 아래로 내려 웩, 하고 부대찌개와 소주를 아낌없이 쏟아내어 버렸다. 옆 테이블에서 ‘씨발’하고 욕설을 지껄이는 것이 들렸다. 희철이 벌떡 일어났다. 나는 소매로 입을 닦고, ‘싸우지 마’ 한 마디 내뱉고는 다시 테이블에 얼굴을 박아버렸다. 그리고, 진짜로 잠이 들었다.
눈을 뜬 것은 새벽이었다. 잠자리가 불편하다 싶더니, 소파 위였다. 그래도 용케 집엔 들어왔구나, 생각하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서는데, 시선 아래로 커다란 무언가가 잡혔다. 희철과 기정이 대자로 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발꿈치를 들고 두 덩치들을 피해 침실방문을 열어보자, 침대 위에는 선희가 누워 자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시 문을 닫고, 나는 역시 종종걸음으로 베란다로 나갔다. 아직 파란빛이 가득한 새벽이었다. 다시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컵 따르고, 소파 아래에 떨어져 있는 담요를 어깨에 걸친 후 다시 베란다로 나갔다.
나는 어서 해가 떠오르기를 빌었다. 물론 아파트 건물에 가로막혀 어느 방향에서도 해가 뜨는 것을 볼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어서 해가 떠서 이 푸른빛의 공기를 내몰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발가락이 시려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겠다고 생각한 때에야,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푸른빛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세상이 다시, 조금은 흐릿한 각자의 색을 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숙취와 함께 내 생애 스물일곱 번째 새해를 맞이했다.
* * *
태준은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찾아와선 나를 괴롭혀댔다. 춘삼월이라 해도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추운데도 나는 보일러 값을 아끼느라 잠자기 전에는 반드시 난방을 껐다. 덕분에 늙은이처럼 아주 두꺼운 이불을 온몸에 둘둘 말고 자야 했다. 가끔은 자다가 몸부림을 쳐서 발이 이불 밖으로 삐져나오기도 했는데, 그러면 왠지 제대로 잔 것 같지 않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애벌레처럼 두꺼운 이불로 돌돌 몸을 만 채 평소보다 좀 더 늦잠을 자고 있는데, 벨도 누르지 않고 멋대로 들어온 태준이 이불을 확 제치며 내 엉덩이를 때렸다. 나는 휴일에 늦잠을 자지 못한 데다 밤새 이불 밖으로 삐져나왔던 발 때문에 두 배로 억울한 기분이 들어, 잔뜩 뿔을 냈다. 태준은 팔짱을 낀 채 그런 나를 아주 한심한 듯 바라보았다. 결국 달랑 들려서 욕실로 옮겨졌다.
“입 벌려, 아.”
“아.”
“이.”
“이.”
차가운 타일바닥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도 여전히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며 졸고 있자, 태준은 ‘내가 이게 무슨 팔자냐’ 하며 아줌마처럼 혼자 꿍얼거렸다. 그래도 이도 닦아주고 세수도 해줘서, 종종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로션을 발라주면서 ‘한 대 확 쥐어박고 싶다’는 소리에, 그리 종종 써먹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을 사왔기에 언젠가처럼 죽도 떠먹여달라고 했다가, 진짜로 꿀밤을 한 대 맞고서야 이마를 문지르며 숟가락을 들었다. 여러모로 억울한 아침이어서, 오늘 일진 참 사납겠다고, 멋대로 하루를 점쳐버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억지로 꾸역꾸역 죽을 떠먹고 있자, 태준은 또 ‘내 팔자가’ 어쩌고 하며 한숨을 내쉬곤 내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뺏어들었다. 그리고 한 스푼 듬뿍 죽을 떠서는 호호 불지도 않고 내 입 앞에 내밀었다. 무서운 얼굴이어서, 나는 용감하게 입을 벌리고 죽을 삼켰다. 당연히, 혀를 데었다.
“정해진은 참, 나날이 웬수가 되어가고 있어.”
“태준 씨는 뭐든지 나보다 두 배야.”
“...... 정해진은 나날이 멋있어지고 있어, 똑똑한 거야 예전부터 알았어, 거기다 더할 나위 없이 착해.”
“그런 거 빼고.”
“뭐야?!”
“....혀, 데었는데.”
냉동실에서 얼음조각을 꺼내어 내민 혀 위에 올려두며 눈치를 보자, 태준은 ‘쯧’ 혀를 차곤 그제야 숟가락으로 죽을 휘휘 저으며 열을 식혔다. 나는 이제야 김태준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겨우.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그는 내 등을 떠밀며 옷장 앞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제가 입는 것 아니라고, 센스 없이 아무런 옷이나 막 꺼내었다. 등산용 방한점퍼를 꺼내는 것을 보고, 나는 마침내 반항했지만 간단히 무시당했다. 추우니까 무조건 두껍게 입으라고는 했지만, 꿍꿍이가 뻔했다. 먼저 나가있으라고 떠밀고, 방한점퍼를 벗고 대신 초록색 가죽재킷을 입고 나갔다가 현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준에 의해 또 달랑 들린 채 옷장 앞에 서야 했다.
“누구 좋으라고.”
내가 아주 멋을 부리는 성격도 아니고, 그저 게이로서 약간의, 보통의 이성애자 남성보다 조금 더 색감이 좋다는 이유로 나는 종종 태준에게 옷을 입거나 머리를 만지는 데에 제재를 받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김태준이 참 센스가 없다고, 그러고 보니 입는 옷도 매일 모노톤이 전부라고, 자기가 색감이 안 좋으니 나까지 덩달아 촌스럽게 꾸미기 위해 저러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버렸다.
“정해진,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뭐야?”
“파스텔 계통이요. 핑크. 왜, 풍선껌 색깔 있잖아요.”
“....내가 졌다.”
“뭐가?”
어쨌든 내가 이겼다니 기분은 좋았다. 그래서 어디로 가냐고 묻지도 않고 얌전히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채우자마자 모자란 잠도 채우기 위해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아주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목이 꺾이며 잠에서 깨어나 보니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건물의 주차장이었다. ‘여기가 어딘데요?’ 물으며 두리번거리자 태준은 차를 세우며 ‘침 닦아’하고 무안을 줬다. 나는 거울을 보며 입가를 벅벅 문질렀다.
주차장을 돌아 나와 건물의 입구를 향해 들어가면서야 나는 그곳이 한의원인 것을 알아차렸다. 문을 열자마자 은은한 한약냄새가 확 풍겼다. 고풍스럽고 널찍한 실내에 들어서자 문득 이곳이 그 ‘마나님들 전용 한의원’이라는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카운터의 직원이 벌써 태준에게 아는 체를 하며 반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예약 현황 같은 것도 체크하지 않고 곧바로 ‘들어가셔도 됩니다’하고 안내해주기까지 했다. 나는 급히 태준의 팔꿈치를 붙잡고 늘어졌다.
“왜.”
“여긴 왜요? 나? 난 아픈 데 없는데.”
“죽어라 살 안찌는 거, 그것도 병이야. 아무리 먹여도 보람이 없어, 넌.”
“더.. 밥 더 많이 먹을게요! 약 안 먹어!”
“여기서 또 들까?”
이게 대체 무슨 배짱일까. 자기 어머니와 아내가 다니는 한의원에 나를 데리고 오다니. 뭔가, 발을 내놓고 잔 것처럼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결국 풍채가 좋은 원장 앞에 손목을 내어놓고 말았다. 맥진과 간단한 설문지만 작성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피검사는 물론 적외선 체열 검사와 경락기능 검사, 고밀도 검사까지 해야만 했다. 이래서야 한방이 아니라 양방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모든 검사를 다 마치고 나서 오히려 기가 빠져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선 앉아있으니 각종 검사를 도와주었던 간호사가 생긋 웃으며 ‘요즘엔 양한방을 따로 구분 짓지 않으니까요’ 하고 말했다. 그런가, 요즘엔 뭐든지 참 멀티 플레이어 시대구나, 나는 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말에 나는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VIP실로 들어갔다. 어디 갔나 했더니, 태준은 TV를 틀어놓은 채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었다. 흔들어 깨운 뒤 ‘침 닦아’하고 무안을 줘볼까, 생각만 했다. 그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아 탁자 위에 미리 준비되어 있는 국화차를 마셨다. 그리고 TV 볼륨을 줄였다. 프로야구를 중계 중이었다. 아직 눈을 감고 있는 그를 한 번 흘깃한 뒤, 드라마 채널로 바꾸었다.
드라마 같은 것,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아무 말씀도 없는 어머니에게 혼자, 어떤 말이든 지껄여야 해서 어머니 취향의 드라마를 찾아보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허황된 이야기나 아주 가까이에서 실제로 일어날 법한 이야기들을 훔쳐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또한 얼마 되지 않았다.
“핑크색을 좋아하는 정해진은 텔레비전을 봐도 꼭 핑크색답게 보는구나.”
처음부터 그저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었는지, 아니면 예민한 성격답게 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었는지, 태준은 여전히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젖힌 채 그러나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필, ‘애기야 가자’라는 대사를 히트시킨 드라마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핑크색답게라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자기는 차안에 트로트 씨디 가지고 다니면서.”
그가 입술을 휘어 낮게 웃었다. 그리곤 ‘누가 네 자기야?’라며 아주 옛날 옛적 개그를 구사했다. 삼진아웃 당한 투수를 향해 야유를 퍼부을 때처럼 그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려 보였지만, 눈을 감고 있는 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팔푼이처럼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국화차를 호록 마셨다. 입 안 가득 꽃 향이 머금어졌다. 나도 그를 따라 소파 뒤로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었다.
“여기 원장님이요, 내가 아는 사람 할아버지거든요.”
“그랬어?”
“그래서, 알거든요.”
“뭘?”
“여기 단골들, 어떤 사람들인지. 그래서 나는 태준 씨가 미쳤거나 간이 부었다고, 둘 중에 하나가 분명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가 눈을 떴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어서, 코끝으로 내려다보는 게 참 거만하고 얄밉게 보였다. 그런데 그게 참 슬프게도 보여서, 아마 진짜 미친 건 김태준이 아니라 정해진이구나,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겁나?”
내가 좀 감수성이 예민하잖아요, 너스레를 떨자 그가 고개를 꺾으며 웃었다. 그리고 ‘나는...’하고 말을 끌더니 또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나는 차라리, 네가 더 겁이 나. ...... 순둥이처럼 생겨먹어서는, 사람 겁먹게 하는 데엔 도가 텄어, 정해진.”
나는 손끝으로 눈을 쭉 위로 올리며 ‘무서워요?’하고 물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멍청해 보여’하고 답했다.
잠시 후 VIP실로 원장이 직접 검사 결과표를 들고 들어왔다. 진단 결과와 함께 내 몸의 문제점들을 그리 심각하지 않게 열거한 뒤, 챙겨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도표로 나누어 적어주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약을 찾으러 오면서 체질침 치료를 시작하자고 했다. 나는 침을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 부들 떨었고, 태준은 그런 나를 보며 빠뜨리면 침은 더 굵고 길어진다며 협박했다.
나는 건물의 출구를 나서서 주차장으로 돌아서기까지, 아니, 짙게 선팅이 된 태준의 차에 올라타 문을 닫기 전까지, 실은 계속 겁을 먹고 있었다. 겁이 나냐고 그는 물었다. 그렇다. 나는 겁이 났다. 내가 창피해 하고 겁을 먹을까봐, 그게 겁이 났다.
* * *
“선배, 전화 왔어요! 폴더 열어서 얼굴에 대어 드려요?”
점심을 먹고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기정이 내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화장실 입구에서 소리쳤다. 양치질 중에 쓰지 못하는 건 손이 아니라 입인데. 나는 손가락을 까딱 움직여 ‘가져와’하고 웅얼거렸다. 액정을 확인하니 태준이었다. 평일, 그것도 퇴근 시간 전에는 전화를 잘 하지 않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거품을 뱉어내고 대충 입을 헹군 뒤 폴더를 열었다. ‘여보세요’ 대신 ‘왜요?’하고 대뜸 묻자 태준은 버릇이 나쁘다며 잠시 교장 선생님처럼 훈교를 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아, 그게 아니라’하고 본론을 꺼내었다.
-갑자기 출장 일정이 잡혔어. 지금 바로 출발해야 돼.
“그런데요?”
-하여튼 넌... 생긴 대로 좀 놀아. 어쨌든, 내일 한의원 가는 날이지? 혼자 가야겠다. 약은 택배로 보내라고 일러둘 테니까 네가 들고 올 필요 없고. 너, 제대로 치료 받아. 알지? 치료 빠지면 침은 두 배로 굵고 길어진다.
“알았어요!”
어떻게 갈수록 잔소리가 심해지는 걸까. 신경질적으로 폴더를 닫는데 옆에서 기정이 눈을 반짝이며 서 있었다. 나도 이제 기정에게 익숙해져서, 그런 행동이 꼭 어떤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시한 채 입안을 다시 한 번 헹군 뒤 수건으로 손과 입 주변을 닦으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기정이 제 자리로 들어가지 않고 졸졸 뒤를 따랐다. 이번엔 뭔가 할 말이 있는거구나 싶어 ‘왜?’하고 물으니 그제야 ‘그게요’하고 살살 웃으며 손을 꼬았다.
“희철 형님은 언제 또 봐요?”
“그쪽도 입학 시즌이라서 꽤 바쁘거든. 요즘 연락도 잘 못하고 지내지. 근데, 희철이 형이면 형이지 무슨 형님?”
“희철 형님이 형님이라고 안 부르면 죽여 버린다고 했거든요.”
기정이 해맑게 웃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선희가 고개를 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갑자기 희철이 형님은 왜? 희철이 형님 좋아?”
그냥 장난 투로 물었는데, 기정은 힘차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네!’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선희가 입을 떡 벌렸다. 물론, 선희 뿐만이 아니었다. 듣고 있던 최 선배가 ‘그럼 이제 해진 씨한테서 그.. 희철이 형님한테로 옮겨 탔어?’하고 물었다. 그건 또 그것대로 섭섭한 일이어서, 나도 귀를 쫑긋 세운 채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 게 어딨어요! 희철이 형님은 곰처럼 신기하니까 좋고, 해진 선배는 예쁘니까 좋은 거죠.”
“한 마디로 재주는 곰이 부리고 예쁨은 정해진이 받는다, 이거네.”
선희가 간략하게 정리해주었다.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가’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도 역시, 이런 무공해 인간이 좋아해준다니, 기분 좋은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한 기분 좋은 건 기분 좋은 거고,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거라고 기정을 타일러 어서 자리에 돌아가도록 했다. 그리고 선희를 향해 사인을 보냈다.
“내일 시간 돼?”
“어, 강선희 씨 내일 나랑 인쇄소에 파본 검사하러 가야 되는데.”
최 선배가 대신 내일의 스케줄을 전해주었다. 바쁘시네요,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희가 곤란한 듯 웃으며 ‘왜, 어머니한테 가게?’하고 물었다. 침 맞는 거 무서워 같이 가자고 말하면, 영원히 어린이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김태준이 잘하는 ‘쿨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영화나 보려고 했지’하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쿨한 표정은, 선희 옆에서 눈을 깜빡이며 빛내고 있는 기정을 보면서 무너졌다.
“저는 시간 되게 많아요!”
“기정 씨는 희철이 형님 보러 안 가?”
“어, 정해진이 질투한다.”
최 선배가 입을 막고 놀란 척 하며 말했다. 결국 나는 재주넘는 곰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침 맞으러 가는 데에 같이 가주면 영화도 보여주고 밥도 사준다고, 무려 최기정을 상대로 비밀쪽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