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21화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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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돔을 사놓지 않았다. 평소에 콘돔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만큼, 김태준이 그만큼 빌어먹을 놈은 아니니까, 다른 때보다 더 꼼꼼히 관장을 하느라 시간이 길어졌다. 그래도 조절 못하고 안에다 해 버리면, 거길 발로 차버려야지. 샤워를 하고, 뭘 입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알몸에 베스가운만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 어차피 모두 벗을 테니까. 그런데 거실에도 주방에도 침실에도, 태준이 보이지 않았다. 현관으로 가보니 아직 신발은 있었다. 그리고 문득 현관 바로 옆의 작은 방의 문을 열어보았다.

“......여기서 뭐 해요?”

“자고 가라며.”

서재로 사용하는 방이었다. 책상과 책꽂이, 컴퓨터와 안락의자와 작은 테이블이 전부였다. 그 작고 차가운 느낌의 방에서 태준은 침대도 없이 맨 바닥에 시트 한 장 달랑 덮고 누워있었다. 그나마 베개도 없이 거실 소파 위에 놓여져 있던 쿠션을 베고 있었다. 한심한 눈으로 빤히 노려보자, 태준은 헛기침을 하며 벽을 향해 뒤돌아 누웠다.

“여기서 잔다고? 하! 왜, 차라리 소파에서 자지?”

“......소파는 발이 삐져나와.”

“왜 갑자기 착한 척, 순진한 척 해요?”

“나 원래 착하고 순진하거든?”

“보란 듯이 방바닥에 누워 자는 거잖아, 지금.”

“아니야.”

“정말 여기서 잘 거예요?”

“......”

“알았어요. 오늘 내 몸에 손대면 정말 거길 물어버릴 거야. 다신 좋아하는 짓 못하게 만들어줄 거야.”

쾅, 거칠게 문을 닫았다. 잠시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안의 동정을 살폈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쿵쿵 소리를 내며 거실을 건너 침실로 들어가 역시 쾅, 거칠게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베스가운을 벗어 바닥으로 던져버린 후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스프링에 몸이 흔들렸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어져 누워있는데, 조용했다. 옆집 윗집 아랫집에서 늦은 밤 애인을 데리고 온 집주인들이 낮은 신음을 흘리던 것까지 생생하게 들리던 예전 집과는 비교가 되었다. 아니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섹스리스 부부거나.

침대의 맞은편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이 똑딱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몇 시인지 보려고 했지만,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막아놓아 달빛도 들어오지 않는 방안은 그야말로 암흑천지였다. 결국 포기하고 넓은 침대 위에서 대자로 팔다리를 뻗어버렸다. 변태. 저질. 결국 이런 걸 원해서 더블베드를 갖다놓은 것 아닌가. 눈을 감았다.

그가 포기한 대신 지켰던 게 뭐였을까. 태인 기업의 후계자 자리, 늦둥이 외동아들로서의 역할, 안정적인 가정. 그리고, 그리고 또 뭐가 있었을까. 내가 포기한 것은 김태준, 그리고 얻은 것은... 고작, 자존심.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의 질문에 따라 내 대답이 달라졌다면, 무언가 바뀌었을까. 그렇다면 그건 옳은 일이었을까. 이것보다 더 나았을까. 결국, 이 자리다.

한참을 뒤척이는데, 문득 침실 방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리고 캄캄한 방안에서 더 짙은 그림자를 만들며 그가 들어왔다. 나는 그가 했던 것처럼 벽을 향해 등을 돌려 누웠다. 그리고 침대의 한쪽이 움푹 꺼지는 것을 느꼈다. 숨소리를 좀 더 크게 내며 꼼짝도 않고 자는 척을 하는데, 뒤에서 단단한 몸이 바짝 붙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이 돌려졌다. 계속 눈을 꼭 감고 있는데, 목덜미에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오늘 내 몸에 손대면 어떻게 한다고 했던 말, 농담 아닌데.”

“12시 넘었어.”

“이건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12시 넘으면 양의 탈을 벗고 늑대가 되는 거야? 비켜요, 내 기준에선 아직 오늘이 지나지.....아!”

목덜미와 턱을 핥던 태준이 갑자기 코를 앙 물었다. 눈이 번쩍 뜨여졌다. 분명, 캄캄했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방안이었는데,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부드럽게 웃지 마. 그렇게, 보지 마.

“아프잖아!”

“못된 말을 하는 피노키오한테는 이렇게 해줄 거야.”

“먼저 창피하게 한 건 태준 씨잖아!”

“삼세판이란 말도 있는데, 최소한 세 번은 물어봐야 하잖아.”

“안 물어봐도, 아니 오히려 싫다고 해도 매번 먼저 덤비는 게 누군데?”

“나라고 부끄러움도 없는 줄 알아?”

거짓말. 일부러 야한 농담만 잔뜩 쏟아내면서 내가 부끄러워하는 걸 즐겁게 구경하는 주제에.

또 코를 물려는 것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따귀를 때려버렸다. 태준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재빨리 얼굴을 내려 이번에는 귓불을 물었다. 아파, 소리치며 고개를 저어도 먹잇감의 목줄을 문 짐승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얌전하게 몸을 바로 해서 눕자, 제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았을 내 귓불을 말랑한 혀로 물고 빨았다. 그리고 또 턱을 앙 물고는 혀로 핥았다. 매번 이런 식으로 한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애써 내가 ‘짐승’이라고 말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착실하게 본성을 따른다.

“정해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 안 놔. 이제는, 안 돼. 미친놈이라고, 도둑놈이라고 욕해도, 안 돼. 이젠 안 돼.”

알몸을 덮고 있던 얇은 시트를 들추곤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며 으르렁 거리듯 경고했다. 그리고 그 경고가 거짓이 아니라고 다시 한 번 쇄기를 박듯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시트가 거추장스러웠던지 짜증스러운 손길로 냅다 침대 아래로 던져버렸다. 몸을 덮고 있던 것이 사라져,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어깨를 웅크리자, 곧바로 몸을 겹쳐왔다. 그러고 보니, 그도 벌써 알몸이었다. 나는 시트처럼 그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의외의 반응에 그가 잠시 흠칫하더니 다급하게 허벅지를 벌렸다.

“젤 있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웃긴 상황도 아닌데 그는 비식 웃으며 내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이렇게, 야하지 않은 곳에 입을 맞춰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부인에게도, 이렇게 해줄까.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해주던 버릇대로,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자신의 부인에게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질 나쁜 생각을 하는 동안 그는 내가 좋아하는 대로 이마와 눈가를 쪽쪽 소리 내어 키스했다.

“콘돔, 있어요?”

“....참 아쉽게도 내가 콘돔을 휴대해 다닐 만큼 빌어먹을 놈은 아니거든, 정해진 씨.”

“여기도 없는데...”

“안에다 안 할게.”

복부에 그의 단단하게 선 페니스가 느껴졌다. 입술을 핥고 자연스레 벌려진 입속으로 혀를 밀어 넣은 태준은 얌전한 내 혀를 마음대로 빨아 당겼다. 그리고 역시 그의 버릇대로 혀 또한 아프지 않게 잘근 물었다. 무어라 항의의 말을 하려고 했지만 곧바로 입이 막혔다. 내빼려는 줄 알았는지, 조금 거칠었다. 그 동안에도 그는 착실하게 내 페니스를 주물러주었다. 조금씩 숨이 가빠왔다. 내 손으로도 만지고 싶었지만, 손을 내리기만 하면 그가 몸을 꽉 눌러왔다. 할 수 없이 양 손 모두 그의 겨드랑이 아래로 둘러 등을 껴안고 있어야만 했다. 잠시 후, 몸이 들썩이다가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토정했다.

힘이 풀린 내 말랑한 배를 그가 내 정액과 함께 쓰다듬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것을 모아 뒤쪽으로 가져가 대었다. 조금 더 다리를 벌리자 그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인상을 찌푸릴 때마다 태준은 눈가를 핥아주었다. 손가락의 개수가 하나씩 더 늘어날수록 벌린 입 사이로 거침 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자세를 잡고는 허벅지 아래로 자신의 무릎을 밀어 넣었다. 하체가 들렸다. 자신의 손에 잡힌 종아리를 쓰다듬던 태준이 문득 장난스런 표정으로 나를 힐긋거리곤 내 발가락을 입안에 넣고는 손가락을 빨 듯 입술로 오므렸다.

“하... 하지 마!”

“왜?”

“더럽잖아!”

“괜찮아. 작아서 귀여워.”

더러운 것과 귀여운 건 다른 의미가 아니냐고 반박하려는데, 갑자기 그가 몸을 겹쳐왔다. 흡, 숨이 멎었다. 힘을 줘서 그런지, 그도 완전히 들어오지 못한 채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게, 왜. 그리고 뒤늦게야 ‘미안, 힘 좀 빼줘’ 비굴하게 부탁했다. 씩씩거리며 노려보자, 몸을 숙여 눈가며 이마, 콧잔등에 새처럼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힘이 빠진 틈에 완전히 밀고 들어왔다.

“후우..”

“아..앗..!”

단지 몇 번 움직였을 뿐인데, 그는 내가 느끼는 곳을 금방 찾았다. 하긴, 몸을 섞었어도 백번은 더 섞었는데. 귀신이겠지. 허리가 들썩였다. 뱀처럼 몸을 뒤틀면서도 그의 것을 단단히 문 아래가 느껴졌다. 그도 자신의 것을 단단히 조이는 것을 느꼈는지, 내 눈을 고요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왠지 분해서, 그의 어깨에 들려져 있는 종아리를 파닥거려 발꿈치로 그의 등을 찍어버렸다. 아, 인상을 찌푸린 그가 잠시 내 눈을 바라보다가 혼내듯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아읏...! 아..안 할게..!”

“까불긴.”

“씨....”

그리고 몇 번 더,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핑계로 내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잡고는 제 마음대로 거칠게 움직였다. 내지르는 신음이 강하게 밀리는 움직임에 막혀 딸꾹질처럼 끊겨 나왔다. 우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다시 다리를 벌려 제 허리로 둘렀다. 그리고 다정한 척, 상체를 숙여 어깨를 안았다. 우는 아이를 달랠 때처럼 ‘쉬이’ 하고 귓가에 속삭여 대서, 오히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여전히 상체를 붙인 채 자신의 두 팔로 체중을 지탱하며 허릿심으로만 부드럽게 움직였다.

맞닿은 가슴으로 그의 심장이 뛰는 것이 내 오른쪽 가슴 위로 느껴졌다. 내 심장도, 그의 오른쪽 가슴 아래에서 뛰고 있을까. 나는 고개를 들어 내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응?’하고 눈을 맞추었다.

“나...나도 이제... 아..! 나도 안 돼, 이제.. 으..응!”

“하.. 뭐가?”

“내 맘대로 할 거야. 내 멋대로.. 아, 아, 아... 할 거...읏!”

단순히 투정을 부리는 걸로 알았는지, 태준은 그저 비식 웃으며 ‘알았어’하고 달래듯 말했다. 나는 몇 번이나 더 ‘내 맘대로’를 주장했다. 거친 신음과 강하고 짧게 와 부딪히는 그의 일부에 숨이 막혀 그 짧은 문장도 제대로 완결 짓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여 있었는지, 그가 치고 들어오는 순간 몸이 흔들리면서 귓가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태준은, 울려서 미안하다는 듯 더없이 부드럽게, 꽉 물린 하체끼리 그저 가볍게 비벼대듯 느리게 움직였다.

그제야 숨을 좀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 짧은 틈을 이용해 머리를 굴렸다. 이제부터 내가 잃는 것은 사회적 모럴과 나의 가치관, 도덕심. 얻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과 죄의식, 그리고, 김태준. 과연 내 남자가 어디까지 그 모든 것을 대신해줄지, 그 모든 것을 견디게 해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아... 해진아...”

그렇다면, 당신은 무얼 얻고 무얼 잃게 되는 걸까. 아니, 예전에 당신이 지키고 싶었던 것이 곧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이었다면, 이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당신은 이제 내 어떤 것을 지켜줄 것인가.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그런 더하기 빼기의 숫자놀음은 상관이 없었다. 손바닥으로 아무리 막아도 계속해서, 끔찍하게 흐르는 아버지의 피를 두 손 가득 묻힌 채, 그런 상황에서 겨우 그의 전화번호밖에 생각나지 않았던 것처럼, 이제는 어떤 것도 우리가 흐르는 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으...으읏..! 아, 아....”

“후우... 잠깐만.”

바짝 붙였던 상체를 떼어내며 그가 허리를 세웠다. 허벅지에 마찰되는 그의 단단한 허리가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힘줄이 선 그의 팔뚝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그는 빠르게 상체를 숙여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 후, 내 허벅지를 더 바짝 당겼다. 속살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그가 인상을 썼다. 그리고 종아리를 높이 들고는, 깊이 넣었다가 아슬아슬하게 빼내며 빠르게 움직였다. 아래가 매달리다시피 한 나는 내 페니스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잔뜩 힘이 들어간 아랫배에서 찰박거렸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물면서도, 비식 웃는 표정에 온 몸이 경직되었다. 그리고 허리를 뒤틀며 먼저 토정했다.

잠시 느슨해진 틈에, 그가 봐주지 않고 빠르게 침입했다. 나는 그의 어깨에 매달린 내 두 다리가 나달거리는 것을 보았다. 심술이 나서 힘을 꽉 주었는데, 그는 잠시 고개를 푹 숙였다가 불량스러운 표정으로 서서히 얼굴을 들었다.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에, 슬금 엉덩이를 빼려는데 ‘어딜’하며 곧바로 잡혔다. 그리고는 온몸이 들썩일 만큼 강하게 밀어붙였다. 또 앓는 소리를 내며 우는 시늉을 했지만, 이번에는 봐주지 않았다. 급하게 파고들던 그가 어느 순간 온 몸의 근육을 긴장시키더니 내 위로 와락 쓰러졌다. 안이 뜨뜻미지근한 것으로 가득 찼다. 귓가에 그의 가쁜 숨이 바로 와 닿았다. 내 몸을 온전히 자신의 몸으로 덮어버린 태준은 뒤늦게 무언가 생각나는 듯 멈칫, 했다.

“아, 미안. 깜빡했다.”

“......나가!”

이왕 안에 한 거, 한 번 더 하면 안 되느냐는 말에 발꿈치로 이번에는 이마를 차 버렸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엉덩이 사이에서 주룩 흐르는 느낌이, 더러웠다. 뒤뚱거리며 욕실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뒤에서 휘파람 부는 것을 들었을 때는, 김태준을 시멘트와 함께 인천 앞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혹 들어올까 싶어 욕실 문을 잠가 놓고 샤워와 함께 안을 깨끗하게 씻어내면서는, 울었다.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고 우는 꼴이 더 한심하게 느껴져 아예 소리 내어 대성통곡하듯 울어대자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해진아, 울어? 미안, 안 놀릴게. 정해진, 잘못했어.”

“됐어. 씻기나 해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샤워가운만 걸치고 문을 열었다. 태준이 얼른 욕실에서 마른 수건을 가지고 나와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닦아주었다. 몇 대 더 걷어차고 싶은 걸 꾹 참고 ‘물, 아니 오렌지 주스, 로션, 아니 바디로션’하고 주문했다. 그리고 욕실로 들어가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나 한번 안아 봐요. 아니, 들어봐.”

“...그런 게 하고 싶어?”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부끄럽지도 않은지 방금까지 내 안을 헤집었던 자신의 물건을 가리지도 않은 채 그가 소파로 다가왔다. 그리고 피식 웃곤 읏차, 소리 내며 내 겨드랑이와 무릎 아래로 손을 밀어 넣은 채 들어올렸다. 무거운지, 그는 자신의 목을 팔로 감싸라고 했지만, 나는 내 무게를 그가 온전히 감당하도록 뻣뻣하게 몸을 경직시켰다. 그리고 거실과 주방, 각 방을 한 바퀴씩 돌도록 주문했다. 그의 팔뚝 근육이 크게 부풀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하긴, 아무리 말랐네, 어떻네 해도 어쨌든 남자니까. 집안 순회를 끝마친 그가 다시 거실 소파 위로 나를 집어던지듯 내려놓았다. 나는 그의 들썩이는 가슴을 올려다보며 멍청한 어투로 말했다.

“새털처럼 가볍지 않아요?”

“......”

“아닌가? 난 지금 내가 참 가벼운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욕실로 들어가라고 허벅지를 툭툭 걷어차는데, 태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파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덥석 내 머리를 잡더니, 원숭이들이 서로의 이를 골라주듯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머리를 뒤흔들며 빼내자, 그가 골몰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나 보려고.”

그리곤 성큼성큼 욕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뒤늦게야 쿠션을 던졌다.

아닌가. 가벼워지지 않았나. 바람에도 둥실둥실 떠다닐 만큼, 가벼워진 게 아닌가. 왜, 그럴까. 최기정 씨도, 출판사 사람들도, 하물며 그의 어머니조차도, 모두, 모두 아무렇지 않게 좋아한다고 하고, 좋아한다는 걸 인정해주고, 아들의 불륜 상대를 인정해주는데, 왜 나는. 누가 또 인정해줘야 하는 걸까. 그의 아버지? 또는... 그의 아내.

문득 벽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새벽 3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불현 듯, 궁금해졌다. 욕실 안에서는 샤워기의 세찬 물살이 타일바닥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욕실 문을 힐긋거리다가, 그가 불쌍한 척하며 누워있었던 작은 방으로 향했다. 의자 위에 그의 재킷이 걸쳐져 있었다. 나는, 이런 짓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이거야 정말... 정말 그런 거 같잖아.”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그의 재킷 주머니를 뒤져 납작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배고픔 때문에 빵 한 조각을 훔치는 장발장처럼 나는, 비참하고, 외롭고, 괴로웠다. 그러나 기어코, 침을 꼴깍 삼킨 후에야 폴더를 열었다. 캄캄한 방안에서 휴대폰 액정의 조명만이 반딧불처럼 빛을 밝혔다.

액정에는 그의 성격답게 새카만 화면에 커다랗게 시계와 날짜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부재중 전화 같은 표시는, 없었다.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럼, 전화를 미리 하고 온 걸까. 나는 엄지손톱으로 최근 통화목록 버튼을 꾹 눌렀다. 가장 최근의 통화기록은 누구누구 부장, 실장, 팀장, 비서 등, 사무와 관련된 사람으로 추정되는 것뿐이었다. 좀 더 아래로 내리자 간간히 ‘밉상’이 이름 대신해있는 번호가 눈에 띄기도 했다. 내 휴대폰 번호였다. 이를 바득 갈며 좀 더 아래로 내리는데, 기어이 집모양의 아이콘이, 오로지 ‘집’으로만 표시된 번호가 하나 나타났다. 날짜를 확인하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우리 부부는 아주 쿨한 사이거든. 자유방임주의, 학교에서 배운 적 있어?”

“흣!”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손에 힘이 풀려버렸다. 그의 휴대폰이 딸깍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놀라서 그런지, 딸꾹질이 나왔다. 어깨를 움츠린 채 천천히 뒤돌아서니, 그가 바로 뒤에 바짝 붙어 문틀에 손을 기대고 서 있었다. 맨몸에 타월만 허리에 묶은 채였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두 손을 마주잡은 채 주춤거리고 있자, 그가 또 질 나쁘게 웃으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일부러 ‘끙’ 소리를 내며 휴대폰을 주워들고는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정해진 씨. 내가 돈지랄하는 거 보기 싫으면 내 물건 좀 소중하게 다뤄줄래?”

나는 주방으로 가서 물을 따라 마시는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그는 컵에 물을 따르면서도, 물을 마시면서도, 다 마시고 입술을 닦으면서도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할 말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기 싫었다. 한심하고, 비참해질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태준이 냉장고 안을 뒤지며 무심하게 말을 건넸다.

“내일이 일요일인가? 아, 토요일이지. 내일 용인 갈까?”

“내일은 희철이하고 선희랑 가기로 했어요.”

“야, 걔랑 놀지마.”

냉장고 문을 거칠게 닫으며 그가 고개를 돌렸다. 희철이는 너랑 놀지 말라고 하던데. 말해줄까, 하다가 말았다.

아직 자고 싶지 않은지 기어이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하나 꺼낸 태준이 어슬렁거리며 걸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또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무 것도 없는 바닥을 응시했다. 나는 소파에 앉지도 못하고 한쪽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 맞은 편 벽을 응시했다.

금요일 밤에 들어오지 않는 남편에게 전화를 하지 않는 아내란, 좋은 여자일까. 나쁜 여자일까. 자신만만하다는 걸까, 그만큼 믿는다는 걸까. 문득, 태준의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부드러운 오만함이 떠올랐다. 온화한 인상과 차분한 어조. 그러나 밑바탕에 깔려있는 과시와 정복의 본능. 많은 것들을 누리고 또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사람 특유의, 배려를 가장한 위압감.

“그런 게 신경 쓰여? 전화 말이야.”

문득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다 비운 맥주 캔을 아그작 우그러뜨리며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찌그러진 캔을 쥐고 있는 그의 왼손에서, 반짝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눈이 부셔서,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리고 곧장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방에서 자요.”

그가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뭐? 나더러 바닥에서 자라고?”

“처음부터 저기서 자겠다고 한 사람은 태준 씨잖아. 왜요? ....침대 더블베드로 갖다 놓은 거... 그거죠?”

“아니야! 너 편하게 자라고...”

“딱딱한 바닥이 싫으면 소파에서 주무세요.”

“소파는 발이 튀어나온다고.. 야, 정해진, 야..야...!”

그가 팔을 뻗어 내 팔뚝을 붙잡으려 했다. 나는 얼른 몸을 숙여 침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안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밖에서 잠긴 문고리를 거칠게 돌려댔다.

“바닥도 싫고 소파도 싫으면 집에 가시든가요.”

“단물 다 빼먹었다 이거야?!”

“말 했잖아. 이제 내 멋대로 한다고.”

“야!”

“....나한테 올 때 반지 빼고 와요.”

발광을 하던 태준이 쿵쿵 발소리를 내며 걸어가 작은 방 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나와서 소파에 몸을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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