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19화 (19/35)

-19-

금요일 저녁에는 두 달 만에 원 멤버들이 모두 모인 기념 겸 기정의 입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오랜만에 회식자리를 가졌다. 내가 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염두에 둔 듯 가라오케까지는 가지 않았고, 밥을 먹고 최대한 조용한 분위기에서 술을 마셨다. 그러나 무릇 술자리란 것이 떠들썩해야 제 맛이라고,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오랜만에 자유롭게 마시기를 권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몇몇은 모여서 가라오케로 향했고, 몇몇은 회식과는 어울리지 않게 일찌감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선희와 나를 비롯해 몇몇은 실내 포장마차로 향했다.

가라오케로 향하는 것이 어울릴 것 같은 기정은 그러나 포장마차를 택했다. 그리고 테이블 이쪽저쪽을 돌며 술을 받아 마시고, 막내답게 온갖 재롱을 떨었다. 한 테이블 앞에서는 급기야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고 마이크 삼아 노래까지 불렀다. 그쪽에 앉았던 최선배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이해해달란 듯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괜찮다고, 즐겁게 취하시라고 손을 저었다.

선희와 나는 따로 작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왠지 속이 출출한 나는 우동을, 선희는 김치찌개를  안주로 소주를 마셨다. 선희는 여전히 털털하고 여장부 기질의 호탕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쩐지 예전보다 말수가 줄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그런 변화가 씁쓸해서, 나는 선희 앞의 잔을 빼앗아 나도 한 잔 달라고 했다. 선희는 피식 웃으며 넘치지 않을 정도로 가득 술을 채워주었다. 한 번에 털어 넣으려고 했는데, 역시 무리였는지 입가로 흘렀다. 선희가 배를 잡고 웃으며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그렇게 웃는 것을 보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너, 희철이한테 들켰다며?”

“저도 뭔가 이상했겠지. 그놈이 아무리 곰처럼 둔해도, 그 사람이 그렇게까지 하는데. 아버지 장례식도, 거의 다 그 사람이 처리했다.”

“희철이, 나 있는 고향집까지 찾아와서 자기 친구 호모 됐다고 아주 울고불고 난리가 났었어. 그냥 호모도 아니고 유부남이랑 치정관계에 얽힌 호모라고. 거기다 자기는 지금까지 비밀이고 뭐고 없었는데 너 혼자만 그렇게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었다며, 거짓 우정이 칼을 품고 제 가슴을 후벼 팠다나 어쨌다나. 하여튼 걔 단단히 삐쳤어. 각오해라, 너.”

“응. 거기다 며칠 전엔 아파트로 이사한 거 이틀 후에야 알려줬다고, 나 희철이한테 쌍욕 먹었다. 나 지금부터라도 격투기 같은 거 배워 둘까봐. 이러다가 정말 맞아죽을 것 같다.”

“그나저나, 정말 어떻게 된 거야? 진짜로... 그래?”

“....모르겠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내가 제일 잘 모르겠다.”

우동 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선희가 한숨을 후 내쉬더니 다시 잔을 내밀며 ‘또 줄까?’ 물었다. 나는 헤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잔을 받고, 선희가 술병을 잡는데 불쑥 낯선 손이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벌써 얼굴이 붉어진 기정이었다.

“선배님,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혀가 꼬부라져 있어서, 발음이 엉망이었다. 나와 선희가 으하하 웃음을 터뜨리자 기정은 멋도 모르고 으하하 따라 웃었다. 악의가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럼 한 잔 따라보라고 하자 기정은 냉큼 선희에게서 술병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술을 따라주었다. 입술 끝을 갖다댄 채 홀짝, 한 모금만 마시자 기정이 ‘우우’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뒤에서 다른 선배들이 ‘정해진 술 잘 못 마신다, 괴롭히지 마라!’하며 그런 기정을 타박했다.

이래도 헤헤, 저래도 헤헤 웃던 기정은 의자를 끌고 와서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버렸다. 선희가 그런 녀석의 이마를 숟가락으로 탁 때렸다. 기정은 이마를 문지르면서도, 헤헤 웃었다. 그냥 놔두라고 하자, 기정은 손등으로 턱을 받친 채 완전히 나를 향해 자세를 틀었다. 바로 앞에서 그렇게 실없이 웃고 있는 인간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민망해서 나는 묵묵히 우동 면발을 쪽 빨아들였다. 선희가 또 기정의 이마를 쳤다.

“최기정 씨, 혹 댁도 이쪽한테 흑심 있나?”

“예? 에이, 뭘 그런 걸. 그냥, 예쁘잖아요. 예쁜 건 보고 있어도 계속 보고 싶고...”

“됐다, 됐어. 가, 저리 가.”

선희가 기정이 앉은 의자 다리를 툭툭 걷어찼다. 의자가 죽죽 밀리면서 선희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내가 앉은 자리와 더 가까워지게 되자 기정은 아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채 폴짝 뛰어 바짝 의자를 붙였다. 팔꿈치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나는 은근슬쩍 자세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선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반달눈이 되어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기정을 내버려둔 채 선희와 나는 그저 요즘 문단 소식과 삐친 희철을 어떻게 달래주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직 몸이 완쾌되지 않은 건 오히려 선희 쪽인지, 예전 같았으면 소주 한 짝을 아예 옆에 놔두고 마셨는데, 세 병을 비우자마자 ‘힘드네’하고 고개를 저었다. 힘들면 그만 마시라는 말에 선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모두들 주말 푹 쉬고 다음 주 월요일에 봅시다!”

“안녕히 가세요. 나랑 택시 같이 탈 사람?”

“이쪽이요, 세 명 같이 타요.”

저마다 방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택시를 잡았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선희가 고개를 돌려 ‘넌?’하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걷는 시늉을 했다. 택시를 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인사를 하고, 나도 발길을 돌렸다. 조금 빨리 걸으면 10분으로 족했다. 이래서야, 차를 산 의미가 없었다. 그나마 희철이와 선희를 태우고 어머니가 계시는 용인으로 갔을 때가 유일한 장거리 운전 경험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인적도 뜸하고 도로도 한산했다. 밤은 벌써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단 두 달이었는데, 이십 년은 흘러간 듯한 기분이었다. 길을 걷다가 문득 휴대폰을 꺼내어 통화목록을 살폈다. 아무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희철이에게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어쩐지 한가한 금요일 밤에 욕먹으면 주말 내내 우울할 것 같아서 그냥 폴더를 닫았다.

휴대폰에 헤드셋을 연결하고 저장된 음악목록을 고르는데, 무언가 앞을 가로막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취객이었다. 딱히 내게 시비를 걸려는 목적은 아니고 그저 비틀거리며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다. 먼저 자리를 비키려고 왼쪽으로 비켜서는데, 취객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주춤주춤, 두어 번 서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짜증이 났는지 ‘씨발’하고 눈을 번쩍 떴다. 술을 드시려면 곱게 드시지. 중얼거리며 다시 오른쪽으로 비켜서는데, 이번에도 방향이 같았다.

“뭐야, 이거어!”

갑자기 취객이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주먹을 휙 휘둘렀다. 당연히 주먹의 방향도 엉뚱한 곳으로 향했고 크게 휘두른 팔에도 힘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가볍게 한 걸음 뒷걸음질 쳐서 피하자, 취객은 그 기세 그대로 기우뚱 몸이 기울어졌다. 제 발에 자기 다리가 꼬인 것이었다. 순식간에 휘청거린 몸이 쏟아지듯 내 몸을 덮었다. 받쳐주려고 했지만, 긴장하지 않고 있던 터라 나도 같이 넘어져버렸다. 순간, 남자의 입에서 구릿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저 단순한 소주와 안주 냄새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씻지 않은, 길거리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악취였다. 이런 냄새를, 알고 있었다.

“아...아...안 돼.... 싫어... 비..비켜.. 비켜!”

숨이 막혔다. 눈이 뒤집혀지고, 발버둥을 치면서 머리가 땅에 찧겼다. 내 위에서 비켜서고 있던 취객이 그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누가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두 손으로 내 목을 감싸 쥐었다. 내가 내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딸꾹질이 나왔다. ‘이런 미친 새끼’하고 일어난 취객이 바닥에 누운 나를 발로 툭 찼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나는 둥글게 몸을 웅크렸다. 그때, 귀를 대고 있는 바닥에서 무언가가 쿵쿵 소리를 내며 울렸다. 누군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이.. 뭐가.. 이기 뭐드래요? 선배, 우터하다...!”

기정의 목소리였다. 낯선 사투리에 바닥을 찧고 있던 머리가 멈추어졌다. 목을 죄고 있던 손에 힘이 빠져 숨이 터져 나왔다. 맺혀있던 눈물이 귀 뒤로 뚝, 떨어졌다. 기정은 나와 취객을 번갈아보다가, ‘우와아아’ 고함을 지르더니 다짜고짜 취객의 가슴을 향해 머리를 들이받았다. 그렇게 한참을, 전혀 기술도 없이 취객과 뒹굴었다가 엎었다가 하더니 결국 취객에게 머리카락이 잡힌 채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비틀대며 일어나 가로수에 등을 기대었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기..기정 씨. 그만 둬요. 최기정 씨.”

칼칼한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말려야 하는 것은 어쩌면 취객인 지도 몰랐다. 그러나, 닿고 싶지 않았다. 기정은 인상을 찌푸린 채 악악 소리를 지르다가 그만 두라는 내 말에 잡힌 머리를 뒤흔들며 겨우 취객과 몸을 떼어냈다. 미친놈들, 씨발 새끼들, 별 좆같지도 않은 놈들. 취객은 여전히 비틀대면서도 황급히 텅 빈 도로를 가로 질러 달려가며 욕설을 퍼부었다. 변태인가, 욕설을 듣고 나니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픽 웃음이 나왔는데, 아직 고여 있던 눈물이 마지막으로 뚝 떨어졌다.

“선배,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우..울어요? 아우씨...어쩌지? 어쩌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도 기정은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이제 안 운다고, 놀란 데다 숨이 막혀서 눈물이 고였을 뿐이라고 대답하려 우선 코를 훌쩍이는데, 기정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문득 제 카디건을 벗고는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괜찮아, 기정 씨.”

“춥잖아요, 떨고 있는데요. 그리고 여기요, 여기에 흥- 하세요.”

‘흥’이 뭔가 싶어 뭐? 하고 묻는데 기정은 불쑥 코앞으로 자기 팔을 내밀었다. 뭘 뜻 하는지 몰라 머뭇거리자, 기정은 직접 자신의 소매 끝을 쥐고 내 젖은 얼굴을 쓱쓱 닦아주었다. 아무 의미 없이 또 한 번 코를 훌쩍였는데, 기정이 또 ‘흥!’하고 소매를 내밀었다. 설마, 그걸 말하는 건가 싶어 고개부터 저었다. 기정은 혼을 내는 것처럼 ‘얼른’하고 닦달했다. 가뜩이나 머리도 아픈데.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흥’하고 코를 푸는 흉내를 냈다. 만족한 듯, 기정은 뿌듯하게 웃으며 제 소매를 탈탈 털어냈다.

“내가 좀... 놀라서 과민반응 일으킨 거야. 아까 그 사람, 나쁜 사람 아니었어. 어쨌든 고맙다, 기정 씨.”

“아휴, 저는 정말 큰일인 줄 알고 엄청 놀랐어요. 정말 괜찮으시지요?”

그리고 나는 기정에게 팔뚝이 잡힌 채 가로수에서 등을 떼고 제대로 섰다. 모래바닥을 걷는 것처럼 걸을 때마다 아래로 푹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이리로 가세요?’하고 팔을 끌었다. 넘어지면서 발목이 접질렸는지 욱신거렸다. 할 수없이 기정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기정 씨 집도 걸어서 가?”

“아니요, 저기... 실은 아까 포차에서요, 배 아파서 화장실 갔다가 나왔는데 벌써 다 가시고 아무도 안 계시고, 혼자 남았는데, 그게요, 아무래도 택시비가 모자랄 것 같아서요, 서울에서는 멍청하게 있으면 코 베어간다고...택시 기사님도 되게 무섭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언가 장황하게 말은 하는데, 어쨌든 요지는 택시비가 없어서 걸어가는 중이었다는 것 같았다. 문득, 그가 내 후임이 아닌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정 씨, 고향이 어딘데?”

“그게...강원도요. 동막골 그 영화 때문에 사람들이 무조건 강원도 사람들은 그런 사투리 쓰는 줄 아는데 아니거든요. 보통 표준어 써요. 근데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커서, 흥분하면 사투리가 나와요. ...웃기셨죠.”

“아니, 귀엽던데.”

“......”

아파트 입구까지 와서 기정이 문득 멈추어 섰다. 기분 나빴던 걸까, 생각하며 팔을 빼내는데 기정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프지 않은 다리로 버티고 서서 기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기정 씨, 왜 그래?”

“부..부끄러워서요.”

기정의 정수리를 멍하니 보다가, 나는 퍼뜩 카디건을 다시 벗어 주었다. 그리고 지갑을 꺼내어 만 원짜리 지폐 세 장을 기정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 정도면 집까지 갈 수 있냐고 묻자, 기정은 말없이 발그레진 얼굴을 끄덕였다. 그리고 카디건을 목에 두르고 후다닥 뛰어갔다. 이왕이면 현관 앞까지 데려다 주지, 다리를 절뚝이며 생각했다.

*    *    *

요리조리 나무그늘만 골라 걷고 있는데 호주머니 안에서 휴대폰 진동이 느껴졌다. 태준이었다. 주말 내내 아무 연락 없다가 월요일 아침부터 전화라니, 참 유부남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괘씸해서 그냥 끊으려다가, 끊으려고 종료 버튼으로 손끝을 누르려다가, 먼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통화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여보세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늦게 받아?’하고 부루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근길이에요.”

-느리긴. 그건 그렇고, 저기.... 주말엔 계속 울산에 내려가 있었어.

“저도 주말 내내 바빴어요.”

-용인 다녀왔어? 언제?

“토요일.”

-일요일엔 뭐 했는데?

늦게 일어나서 김치찌개 끓여 밥 먹고 TV나 보다가, 잠시 밖에 나가서 스케치북과 새 크레파스를 사 와서 또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적어 넣고, 먹다 남은 김치찌개로 밥 먹고, 또 TV 보다가 잠이나 잤다. 참 구차했다. 죽어도 있는 그대로 말하긴 싫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벌써 비식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왜 말이 없어? 뭘 했기에?

“...누구 좀 만났어요.”

-누구, 친구?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내가 누굴 만나든 상관없잖아요. 그냥 궁금해서, 친구 누구, 그 성 개념 꽉 막힌 녀석? 아니요. 그럼 강선희 씨? 아니요. 소모적인 말다툼을 하며 벌써 출판사 앞까지 도착했다. 목이 말랐다. 건물 1층의 편의점에 들어가 생수를 들고 계산을 하려는데, 누군가 어깨를 밀고 얼른 만 원짜리 지폐를 카운터로 내밀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헤헤 웃고 있는 기정이었다.

“제가 계산 할게요! 우와아- 역시 선배는 자연광 아래서 보니까 더 예쁘구나...”

-....누구야?

“참, 여기 빌려주신 택시비요!

-누구냐고.

기정이 쥐어주는 지폐를 다시 그의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휴대폰을 턱 아래로 내린 뒤 ‘됐어. 그때, 도와줬으니까.’ 속삭였다. 그리고 기정을 향해 ‘쉿’하고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었다. 기정은 ‘네? 아, 조용히. 쉿!’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휴대폰 너머 태준이 조용히, 짧게 숨을 내쉬었다.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기정을 향해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한 후, 생수병 마개를 따며 편의점 안의 간이 의자에 앉았다.

“거짓말이에요. 일요일엔 그냥 집에서 밥 먹고 TV 보고, 그렇게 보냈어요.”

-...... 점심 같이 먹자.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에, 입가가 절로 휘어졌다. 그리고 문득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차가운 생수를 마셨다. 꼴깍, 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났다. 그도 무얼 마시는지,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원두커피겠지. 설탕을 하나도 넣지 않은 하와이안 코나. 문득, 어디선가 커피향이 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금, 토, 일. 삼 일.

“오늘은 안 돼요. 바빠요.”

-장난해? 내가 출판사 사정 몰라? 한창 바쁠 때 지났잖아. 점심시간에도 일할 때 아닌 거 다 아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차 보낼 테니까 곱게 타고 와.

“....장난 아니라 진짜 바쁘거든요. 일이 밀렸어요. 아, 지각하겠다. 끊어요. 한가해지면, 연락하든가 할게요.”

그리고 얼른 폴더를 닫아버렸다. 내가 들어도 참, 얄미운 목소리였다. 정해진, 끝까지 대범해질 순 없는지 다시 전화가 올까봐 겁이 나서 얼른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빈 생수병을 쓰레기통으로 버리고 출판사로 올라가는데,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나를 향해 비식비식 웃었다. 그저 아침인사인가 보다 하고 나도 따라 웃어주었는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최 선배가 의자를 빼주며 놀리듯 말했다.

“왔다. 태인의 천사.”

“예? 무슨...”

저들끼리 눈을 맞추며 소리죽여 웃는 게, 왠지 기분이 나빴다. 자리에 앉으며 선희를 쳐다보자 턱 끝으로 사무실 입구를 가리켰다. 돌아보니 마침 기정이 커피를 든 채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이 발그레해져선 내 책상 위에 커피를 놓았다. 순간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최기정 씨가 해진 씨 좋아한대. 반했대. 미인은 성격이 나쁘다는데 해진 씨는 얼굴도 예쁘고 착하기까지 해서 천사래. 태인의 천사. 으하하하!”

“택시비 빌려주고는 안 갚아도 된다고 다시 주머니에 직접 넣어주고, 추울까봐 카디건도 벗어주고, 사투리 쓴 거 창피해 할까봐 귀엽다고도 해줬다면서요?”

“바로 앞에 두고 말씀하지 마세요, 부끄럽잖아요!”

기정이 긴 손가락으로 눈썹을 문지르며 자리에 풀쩍 앉았다. 그리고 한참을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러면 이야깃거리를 만들지를 말든가. 따분하고 짜증스러운 월요일 아침부터 애써 웃음거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헤헤 웃으면서 경쾌한 목소리로 얼마나 이야기를 부풀렸을지 뻔했다. 분위기를 깨기는 싫어서 나도 그저 웃고 말았지만, 단단히 주의는 해두어야 했다.

“기정 씨. 참 얄팍하기도 하다. 겨우 삼만 원에 막 반하고 그래?”

우하하 웃던 사람들이 웃음을 뚝 그쳤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정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금방, 울상이 되었다. 옆에서 최 선배가 옆구리를 툭 쳤다.

“아..아니, 기정 씨. 내 말은.. 나쁜 뜻이 아니라, 그냥 농담이야. 자, 이거 기정 씨가 마셔. 난 아침에 커피 잘 안 마셔. 자, 여기.”

“...거봐요, 맞잖아요, 천사.”

“......”

사람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다. 나는 한숨밖에 쉴 수 없었다. 선희가 책상 대신 그런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축 늘어져서 다시 자리로 돌아오는데 역시 이번에도 최 선배가 의자를 잡아 빼주었다. 그러시지 말라고 눈을 흘기니 ‘아아, 우리 어린이가 변했어요’하며 앓는 소리를 했다. 시무룩한 척, 입을 삐죽 내밀자 등을 토닥였다.

문득, 사무실 내에서 최 선배가 유일하게 ‘괜찮냐’고 묻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배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초콜릿이나 사탕, 위로카드 같은 것이 오히려 사고와 죽음을 더 떠올리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괜찮다는 듯 웃어보였다. 최 선배도 빙긋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야. 해진 씨 예전에는 누구한테라도 곧바로 말 못하고 맨 먼저 꺼내는 게 ‘저기’였는데, 이젠 어느 정도 독한 말도 할 줄 알고 말이야. 아니야, 나쁜 말 아니야. 실은 지금보다 더 독해져야 돼.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발전한 거지. 긍정적인 발전이야.”

의도한 건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이 상처를 입게 하는 말솜씨는 누구 씨에게 배웠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그날 점심시간에는 역시, 밥을 먹는 것 외에는 일이 없었다. 나는 얼른 선희를 불렀다. 그러나 선희는 최 선배와 함께 인쇄소에 가봐야 한다며 ‘미안’하고 두 손을 모았다. 괜찮다고 어깨를 으쓱하며 짝 잃은 외기러기처럼 어깨를 늘어뜨린 채 고개를 돌리는데 기정이 ‘저요! 저하고 같이 점심 먹어요!’하고 우렁차게 말하며 손을 번쩍 들었다. 나는 다시 선희를 불렀다.

“선희야, 기정 씨도 데리고 가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일도 배워야 하고...”

“그게... 오늘은 데리고 가도 별로...”

선희가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최 선배가 얼른 선희의 옷깃을 끌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빠끔 내밀고는 ‘화이팅’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는 결국 휙휙, 꼬리를 흔들며 두 발을 들고 서 있는 기정과 함께 해피밀 세트를 먹어야 했다. 그리고, 미니어처 인형도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그리고 기정이 그러한 일을 어떻게 그리 가볍게 여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단지 기정이 워낙 엉뚱한 스타일이니까, 그런 스캔들 또한 진지함이 결여된 장난처럼 여긴 걸까. 아니면 기정이 정해진 어린이보다 더 순수하니까, 애들 같은 애들끼리 둘이 뭘 어떻게 하겠냐 싶은 생각이었을까. 그렇다면 기정은, 그런 기질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자신이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단정을 짓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처럼 떠벌릴 수 있었을까. 나는 그 단순하고 순수한 사고회로가 화가 났고, 동시에 부러웠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가벼워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단히 삐쳤는지, 수요일에서야 태준으로부터 점심을 같이 먹자는 전화가 왔다. 그러나 그 날은 진짜로 일 때문에 점심시간에 나가봐야 했다. 기어들어가듯 미안하다고 말하자, 이번에는 태준이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확하게 3일이 지났으니 내일은 꼭 먼저 연락해서라도 점심을 같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요일 점심시간, 알지 못하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으레 광고이거나 잘못 걸려온 전화이려니 해서 받지 않았다. 두 번 더 같은 번호로 전화가 왔다. 뜸을 들이다가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낯선 목소리였다. 폴더를 닫고, 서랍에서 미니초코바 하나를 꺼내어 먹은 뒤, 곧바로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건물 앞 도로에 은색의 메르세데스가 주차되어 있었다. 건물 밖으로 한 걸음 내딛자, 보조석에 있던 사람이 얼른 나와서 뒷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입안에 남아있던 초코바의 아몬드를 어금니로 아작 깨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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