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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까지 늘어져서 자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정오 즈음에야 잡상인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할 시간이니까, 그저 없는 척 계속 누워있는데, 밖에서 ‘안 계십니까!’ 소리치며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리기까지 했다. 어느 교양머리 없는 양반이 남의 집 앞에서 소란인가 싶어 씩씩거리며 문을 여는데, 건장한 체격의 남자 세 명이 팔을 걷어붙이고 서 있었다. 그리곤 누구라고 말도 하지 않고 ‘그럼’ 하더니 불쑥 집안으로 들어와 가구에 테이핑 처리를 하고 박스에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말릴 겨를도 없었고, 미리 이야기가 있었는지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제대로 된 문장 하나 내뱉지 못하고 나는 츄리닝 차림으로 집밖으로 내몰려졌다. 그리고 놀이터에서 모래흙을 발로 차며 어떻게 해야 하나, 빙글빙글 주변을 돌았다. 그네를 타고 있던 아이들이 그런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곤 저들끼리 쑥덕거리곤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나쁜 아저씨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주머니 안에서 휴대폰 벨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자, 역시 태준이었다. 폴더를 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가 먼저 ‘여보세요?’하고 확인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전해졌는지, ‘아’하고 뻔뻔스레 아는 척을 했다.
-화내지 마. 난 분명 오늘 사람 갈 거라고 말했어. 난 네가, 다른 때도 아니고 지금 같은 때에 그런 집에 사는 거 못 봐. 주변 환경 문제는 둘째 치고, 그렇게 곰팡이가 기생하는 집에선 멀쩡한 사람도 우울증 걸리기 십상이야. 그리고 나한테는 이 정도 간섭할 수 있는 권리는 있어.
“......”
-이 갈지 마.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한테만 덤벼도 너, 못 이겨. 그냥 얌전히 음료수나 하나씩 돌리고 태워다주는 대로 따라와. 저녁에 들를 테니까...
“오지 마! 네가 뭔데!”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정해진.
“......”
-짐 정리 다 할 때까지 근처에서 밥 먹으면서 기다려. 언제 갈 지는 확실히 모르니까 저녁도 혼자 먹어. 도착해서도 그 사람들이 다 알아서 정리해줄 테니까 넌 거들 거 없어. ...정해진, 대답 안 해? 정해진 씨. 정해진. 해진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제야 달래듯 이름을 불렀다. 나는 대답 없이 폴더를 닫아버렸다. 터덜터덜 걸어 아이들이 자리를 비운 그네에 앉았다. 너무 낮아서, 제대로 그네를 밀 수도 없었다. 다리를 끌며 고개를 뒤로 젖혀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3층 복도에서 사내들 중 한 사람이 그런 나를 바라보며 휴대폰을 바짝 귀에 붙였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손을 입가에 모아 우렁찬 목소리로 ‘저기요!’하고 불렀다.
“정리 끝나기 전에 점심 드시고 오세요!”
눈곱도 안 뗐는데. 그래도, 그런 상황에서도 허기는 졌다. 휘적휘적 일어나 바로 앞의 김밥가게에서 천오백 원짜리 김밥 한 줄을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그리고 이삿짐차를 앞세우고 나는 내 차를 몰고 그들을 따랐다. 도착한 곳은 출판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아파트였다. 들어가 보니, 우려한 대로 웬만한 가구는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이래서야, 내 작고 허름한 가구들은 아예 버리고 오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구들을 옮기는 남자들도 황망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저어... 필요 없는 물건들만 추려주시면, 저희가 정리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중고가구를 사 들여서 멋지게 리폼 싸악 해서 저렴하게 파는 데를 알고 있거든요. 요즘엔 버리는 것도 돈이 드는데, 어떠세요, 그쪽으로 옮길까요?”
태준의 전화를 받았으리라 예상되는 남자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구라고 해봐야, 침대와 옷장, 책상, 식탁이 전부인데, 그것조차 모두 한 자리씩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서 어쩌지요? 차라리 처음부터 그쪽으로 가지고 갈 수도 있었는데, 괜히 힘드시게 한 것 같아요.”
“아니요, 어차피 저희는 평균 일급의 세 배는 미리 받았습니다.”
“......”
“아..저기, 그럼 아..안녕히 계십시오.”
자잘한 짐들은 알아서 정리하겠다는 말에 남자들은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그리고 나는 커다란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서서히 저물고, 이어서 노을이 지고, 또 짙은 어둠이 내려앉는 것을 오도카니 앉아 바라보았다. 높은 빌딩들 사이로 보이는 캄캄한 밤하늘에서 드문드문 별이 떠 있는 것을 헤아리고 있는데, 문득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비밀번호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저녁은 혼자 먹으라니. 나가지도 못하게 해놓고선.
“정해진. ....해진아, 어디 있어?”
캄캄한 거실로 들어서며 그가 나를 찾았다. 거실의 형광등이 켜졌다. 그가 주방과 욕실, 두 개의 방문을 열어젖히며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나와 소파 위에 풀썩 앉았다. 혼자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더니, 휴대폰의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내 호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이 앉은 소파의 뒤편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휴대폰의 폴더를 열었다 닫았다.
“놀랬잖아. 앉으려면 제대로 앉아있지, 도둑고양이처럼 거긴 왜 기대어 앉아있는 거야?”
“별 보려고.”
그래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자, 그도 소파 뒤로 돌아와 베란다를 향해 다리를 뻗고 앉았다. 그가 피우는 담배냄새가 났다. 블랙스톤. 한 번도 다른 담배를 피우는 걸 본 적이 없다. 혹 블랙스톤이 없을 때에는 아예 다른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리틀 시가라고 불릴 정도로 독하다는, 웬만한 애연가들도 고개를 젓는다는 걸 왜 그리 고집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체리향이 나는 담배연기가 내 얼굴에 닿지 않게 고개를 돌려 연기를 내뿜으며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었다.
‘피우고나면 입술이 달착지근해지거든.’
‘독하지 않아요?’
‘응, 독하면서도 달아. 그래서 중독이 돼.’
‘뭐야, 그게.’
‘예를 들자면... 정해진이 키스할 때 실수로 혀 깨물고 또 그게 미안해서 열심히 매달릴 때. 그런 기분이야.’
‘...완전 변태.’
그럼 나도 한 번 피워보자고 담뱃갑에 손 내밀었다가, 금방 웃고 또 금방 화내는 태준에게 역시 혼이 났다.
“...저녁 먹었어?”
멍청한 표정으로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가 머뭇거리며 또 블랙스톤을 꺼냈다. 밖에서 충분히 피고 들어온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멀뚱히 쳐다보자 한 개비 꺼내려다 말고 다시 집어넣었다. 나는 다시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안 먹었으면 나가자. 나도 아직...”
“내가 이런 거 좋아할 줄 알았어요?”
“...... 아니. 내가 널 몰라? 좋아하기는커녕 아주 질색을 하지. 그래서 난 이때껏 네 눈치만 봤고. 뭐 하나 선물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조바심 냈는지 알아? 지금도 너 조용한 거, 어떻게 이걸 다 불 질러 버릴까 고민 중이라는 것까지도 알아.”
“미쳤어요? 아파트에서 불 지르면 다른 집까지 옮겨 붙는데. 차라리 밑에 사람 안 다니는 새벽 즈음에 베란다 너머로 던져버릴까 생각 중이었어요.”
“힘이 남아돌아? 잘 됐네. 이 앞에 스포츠센터 있으니까 운동이나 해.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절로 약해지...”
“이런 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돈지랄.”
“아니. 이런 걸 사람들은......”
갑자기 말이 막혔다. 이런 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어떻게 표현하는지, 어떤 달착지근한 단어를 사용해 본질을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리는지, 알고 있었다. 당신도 알아? 우리는 어느 편이 붙을까. 잔인한 본질, 혹은 달착지근한 비유.
숨을 깊이 들이쉬자, 그의 블랙스톤 냄새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직접흡연보다 더 안 좋은 게 간접흡연이라는데, 같이 죽자는 속셈인가,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주방 쪽으로 향했다. 곧이어 서랍을 열어보며 무언가를 뒤적이더니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해진. 짬뽕, 짜장. 어떤 거?”
“난 탕수육.”
“넌 먹는 데엔 참 안 아껴. ...여보세요? 아, 여기 짬봉 하나 짜장 하나 탕수육 하나요. 군만두 서비습니까?”
소파 위에서 배를 두드리며 반쯤 누워있는데, 태준은 같이 배를 두드리다 말고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쌓아둔 짐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냥 놔두라는데도 기어이 옷걸이에 옷을 걸고 책장에 책을 꽂았다. 그러다 스케치북을 발견하곤 제멋대로 훔쳐보았다. 후다닥 달려가 빼앗으려 했지만, 그는 팔을 높이 쳐들곤 키 자랑을 했다.
결국 그는 그림은 물론 여백에 써 놓은 이야기도 모두 읽었다. 그리고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담배를 뻑뻑 빨았다. 나는 마치 순결을 잃은 처녀처럼 스케치북을 가슴에 감싸 안은 채 씩씩거렸다.
“여기서 담배 피우지 말아요!”
“여기 내 돈이 더 많이 들어갔거든? 아, 그리고 미리 말해두는데, 예전 그 곰팡이 집은 지금쯤 벌써 누군가 이사 와서 짐 풀고 발 닦고 잠이나 자고 있을 테니까 허튼 생각하지 마. 하긴 넌 우선은 여기 전세금 갚을 생각부터 해야지, 참. 그래도 특별히 무이자야.”
“겨..결국은, 내 건강이 걱정된다느니 하는 건 다 핑계고, 결국은 이게 목적이죠?! 날 괴롭히면서 스트레스나 풀려고!”
“아니. 뭐 꼭 그렇지만은 않아.”
그 말은 그런 목적이 더 많이 전제되어 있다는 뜻이잖아, 꽥꽥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귀찮다는 듯 귀를 후비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작은 종지와 티슈, 약간의 물로 즉석 재떨이를 만들곤 담뱃재를 털었다. 나는 여전히 가슴에 스케치북을 꼭 붙여 안은 채, 여전히 씩씩거리면서도, 재떨이를 하나 사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벽에 기대어 한참 말없이 담배를 피우던 태준이, 역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는 게,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주춤, 뒤돌아 주방에서 나가려는데 역시나 ‘정해진’하고 불러 세웠다. 왠지 불안해서 인상을 찌푸린 채 돌아보자 그는 불쑥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내밀었다.
“피워볼래?”
“...별로 안 내켜요.”
머뭇거리다가, 체리향에 반해 그 맵고 독한 연기에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자 그가 피식 비웃었다.
“거봐. 넌 투덜거리면서도 막상 뭔가를 모험해볼 용기는 없어.”
힐난하는 말투에 얼굴이 붉어졌다. 입술을 물며 고개를 숙이자 그가 담배를 끄고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박스를 마저 풀었다. 가구는 별로 없으면서, 이상하게 잡동사니는 많았다. 바닥에 쏟아 부은 필기도구를 줍고 있던 그가, 고개도 들지 않고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자고 갈까? 그냥, 빈 방도 있으니까.”
“......”
“안 되나..? ...... 안 되나보네.”
각종 사전을 들며 그가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눈이 마주쳤다.
“야, 노려보지 마. 난 그냥... 이왕 푼 거 짐정리나 마저 해주고 싶어서...”
“집에서, 안 기다려요?”
“......”
태준은 싸늘해진 표정으로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들고 있던 사전을 내 가슴에 억지로 맡기듯 들려주었다. 그리고 ‘갈게’ 한 마디 하곤 또 저벅저벅 현관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도어락 비밀번호는 가르쳐주고 가지. 나는 사전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현관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그리고 현관문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센서조명이 달린 복도는 아직 주홍빛 등이 켜져 있었다. 태준은 벽을 향해 이마를 박고 서 있었다. 불쌍한 척 하기는. 칫, 소리를 내며 오픈 버튼을 누르고 문을 열었다. 그가 얼른 몸을 바로 세워 가까이 다가왔다.
“왜...”
“비밀번호, 가르쳐주고 가요.”
“....... 올해 네 음력 생일. 앞뒤로 0 하나씩, 마지막에 별표. 됐냐?”
“네.”
그가 잔뜩 눈에 힘을 준 채 한참 노려보았다. 사람을 앞에 두고 문을 닫으면 너무 야박해 보일까봐 나는 그저 그의 어깨 즈음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자 그도 칫, 소리를 내며 뒤돌아섰다. 엘리베이터의 내림버튼을 누르는 것까지 보고, 이제 문을 닫으려는데 그가 또 몸을 휙 돌려 빠르게 걸어왔다. 나는 얼른 현관문의 걸쇠를 채웠다. 얼른 문가를 잡은 태준은 내가 문을 닫지 못하도록 단단히 당겼다.
“왜..왜요.”
“이대로 가려니까 분해서. 외국에선 키스 정도는 인사로 하는데, 무이자 대출 값으로 키스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이것 봐. 결국 이게 목적이었어. 노려보는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해줬다간 문을 붙잡고 뜯어버릴 기세여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 외국에선 한다는 인사 정도로만 해요.”
“알았어. 근데 이거 안 풀어?”
“안 풀어요.”
“그럼 어떻게 해줄 건데?”
“....가까이 얼굴 내밀어.”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로, 그래도 걸쇠로 막힌 문틈으로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머뭇거리다가, 나도 발꿈치를 들고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분명 입술을 다물고 있었는데, 어느새 슬금슬금 그의 혀가 내 입술을 핥고 있었다. 이게 뭐냐고 반박하려는 틈에 아예 혀끼리 얽히려는 것을, 얼른 얼굴을 떼버렸다. 그리고 보란 듯이 손등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그가 으르렁 거리듯 문을 잡고 바짝 얼굴을 내밀었다.
“정해진, 너는 못생겼고 머리도 나쁘고 거기다가 싸가지도 없어.”
“씨.. 태준씨는 재수 없어.”
“뭐야?! 문 열어, 이거 안 풀어? 열어, 야, 열어!”
걸쇠가 거칠게 뒤틀렸다. 문을 닫아버리려고 문고리를 잡고 안으로 당겼지만 끄떡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하는데 맞은편 집 문이 열렸다.
“거 밤도 깊었는데 좀 조용히 합시다.”
“예, 죄..죄송합니다...”
문틈으로 허리를 푹 숙이는데, 태준은 뭘 잘했다고 비죽 비웃었다.
* * *
다음 주 월요일, 아르바이트 원서를 들고 출판사 문을 두드렸을 때처럼 바짝 기합이 든 채 출근을 했다. 책상에는 초콜릿이나 사탕, 위로카드 같은 것이 가득 쌓여 있었다. 100번 정도 ‘괜찮냐’는 질문을 받았고 100번 정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격려나 위로가 진짜 격려나 위로가 될 줄 알았는데,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언제까지나 우울한 척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것을 눈치 챘거나 혹은 이런 일을 일주일 먼저 겪은 선희가 손바닥을 치며 내 시선을 끌었다.
“나보다 일주일 더 놀았으니 이제 몸은 말짱해졌지? 이제부터 밀린 야근이 우리를 기다린다.”
“응, 몸은 괜찮은데... 그러고 보니, 이때까지 일은 어떻게 돌아갔었어요?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빠졌었는데.”
“그래서 정해진이 고대하고 고대했던 막내가 들어왔지!”
옆에서 최선배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유쾌하게 대답했다. 내가 하던 일은 합병한 출판사에서 한 달 정도 사람을 붙여줘서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지만, 선희가 하던 편집 디자인은 전문 분야인데다가 어차피 한 명 더 인원을 보충할 계획이어서 아예 정직원을 채용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고대하던 막내를 찾았다.
“출근하자마자 커피 심부름 시켰어. 기강 좀 잡으려고. 벌써 한 달째 기강만 잡고 있어. 만만치가 않아. 아아, 옛날에 정해진이는 눈에 힘만 좀 줘도 바로 깨갱이었는데. 이제 해진 씨처럼 순둥이표 신입은 기대할 수 없나봐. 해진 씨는 막내한테 안 잡아먹히도록 조심하고, 선희 씨가 좀 확실히 잡아줘.”
“저도 쉽지 않던데요. 뺀질뺀질한 것이. 어, 왔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대체 어떤 인간인데 감히 하늘같은 직장 선배들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가 싶어 선희가 눈짓하는 데로 얼른 고개를 돌렸다. ‘뺀질뺀질’이라는 선희의 표현에 나도 모르게 수긍하듯 고개가 끄덕여졌다.
“커피 시키신 분~!”
예전 광고 카피를 따라하듯 나름 경쾌하게 손을 번쩍 들며 ‘커피 시키신 분’을 외쳤지만, 모두들 그저 얌전히 나, 나, 여기, 여기, 하고 짧은 대답이 돌아갔다. 그러자 금방 시무룩해져서는 ‘에이 재미없다’하며 입을 삐죽였다. 허!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최 선배가 그런 나를 보며 ‘물건이지?’하고 어깨를 툭 쳤다.
“해진 씨보다 한 살 어려. 그래도 한 살 선배가 제일 무서운 거 알지? 기에 눌리면 안 된다.”
예에, 힘없이 대답을 하긴 했지만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너무 기가 센 상대를 만나면 위축된다. 어차피 내 후임도 아니니 간단히 인사만 하고 지내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 앉는데 뒤에서 ‘엇! 저분’하고 소리쳤다. 웬지 내 말을 하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리자, 역시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선희가 옆에서 감히 선배한테 손가락질을 하냐며 타박을 했지만, 별로 먹히지 않는 듯 여전히 싱글벙글이었다.
“두 달 가까이 병가 내시고 오늘 출근하시는 분, 맞지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최기정이라고 합니다. 많이 예뻐해 주세요!”
풍성한 꼬리가 휙휙 바람을 일으키며 흔들리는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유쾌하기도 했지만,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분명하겠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예, 반갑습니다. 정해진입니다. 그게... 저하고는 일 하는 데에서 그리 겹치는 부분이 없으니까... 예쁘게 보여야 할 사람은 저쪽, 강선희 씨일 겁니다. 어쨌든 같이 일하게 됐으니까, 저도 잘 부탁합니다.”
“예! 참, 말 놓으셔도 돼요. 그나저나, 우와- 속눈썹 되게 길다. 남자 속눈썹이 이렇게 길고 예쁜 건 처음 봤는데, 만져 봐도 돼요?”
“에..예?”
황당해서 입을 헤 벌린 채 쳐다보고 있으니, 그 최기정인가 뭔가 하는 녀석도, 다른 느낌으로 입을 헤 벌린 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당장이라도 내 속눈썹을 만지겠다는 듯 손을 꼼지락거렸다. 어버버거린 채 대답도 하지 못하고 주위를 돌아보자 다른 사람들 표정도 나와 썩 다르지 않았다. 간간히 내게 입모양으로 ‘눌러!’ ‘지지 마!’ ‘기강!’하고 파이팅을 외치기도 했다. 이쪽 저쪽에서 압박감이 느껴졌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처음 보는 사람, 그것도 직장 선배한테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최기정씨.”
“...예... 죄송합니다아...”
금방 어깨가 축 처졌다. 그렇게 심하게 한 것도 아닌데. 왠지 미안해져서 위로라도 해주려고 어깨에 손을 갖다 대려는데, 주위에서 또 손을 휘저으며 ‘안 돼!’ ‘놔 둬!’하고 입모양만으로 주문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선희에게 눈으로 SOS를 청했다. 선희가 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정을 불렀다.
“기정씨. 자리에 와서 어제 저질러놓고 간 일, 마저 마무리하지?”
“앗. 그건 선배님이 도와주실 거지요?”
“그런 게 어딨어. 할 수 있는 데까지 혼자 해 봐야 늘지.”
“그래도요.”
그러더니 마치 선희가 개껌을 들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헤헤거리며 자리로 건너갔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최 선배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좀 피곤하긴 하지만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아.”
“예, 뭐 그렇긴 하네요. 뭐랄까... 그거 뭐더라... 하여튼, 개 같네요.”
속삭인다고 나름 목소리를 낮추었는데, 마침 그 순간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때라 ‘개 같네요’하는 말이 선명하게 들렸다. 모두 일시정지를 누른 듯 멈추어 서서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최선배도, 선희도, 그리고 최기정도. 기정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스스로를 손가락질해 보였다.
“저..저요?”
“아..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기정씨. 나쁜 뜻이 아니라... 그... 뭐더라... 크고 털도 북실북실하고 귀여운 개 있잖아요, 그... 아! 골든리트리버! 그거 말이에요! 붙임성도 있고 귀엽다는 말이었...는데...”
그러나 이미 기정은 후다닥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누군가 ‘우나?’하고 슬쩍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화장실로 가는데?’하고 가르쳐주었다. 가서 달래줘야 하나, 고민하는데 여기저기서 잘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오히려 내가 울상이 되어 털썩 자리에 앉자 선희가 다가와 내 책상 위의 초콜릿을 까먹으며 말했다.
“이 중에 하나 던져줘. 그럼 금방 풀릴 걸. 되게 단순해. 난 일주일 만에 다 파악했어.”
그럴까, 하고 나는 초콜릿 하나와 사탕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냥 계속 손에 쥐고만 있자 선희가 ‘안 줘?’하고 물었다.
“들어오면 던져주려고.”
“......”
“왜?”
“봄이 잔인한 이유를 알아? 순수하기 때문이야.”
옆에서 최 선배가 ‘맞아’하고 응수했다. 여름도 다 가는 중인데 갑자기 무슨 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는 사무실 입구를 힐끗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