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14화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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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홍종욱 작가의 신작이 발표되었다. 물밑 작업을 열심히 해 와서인지, 작품성만큼 인간성도 좋은 작가의 출판사에 대한 의리 때문인지, 이번에도 역시 그의 신작에 ‘태인 문학’의 이름을 내걸 수 있었다. 나는 드디어 문예지의 작가 인터뷰나 평론 분야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소설의 교정 교열을 맡게 되었다.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그의 원고는 역시 별로 손 볼 것도 없어서 오히려 섭섭할 정도였다.

책이 나오기 전에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을 책 마지막 서너 페이지에 할애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작가 또한 흔쾌히 동의했고, 출판사에서 할 일은 작가와 각별한 사이의 다른 작가나 또는 그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평론가를 인터뷰어로 보내야 했다. 나는, 일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고집을 부렸다.

팀장은 작가에게 전화상으로 넌지시 내 이름을 꺼내었다. 나는 팀장이 잡고 있는 수화기에 바짝 얼굴을 갖다 대었다. 내 뒤로 줄줄이 직원들이 서서 귀를 쫑긋 세웠다. 수화기 너머로 ‘괜찮습니다, 저는 좋습니다’하는 노(老)작가의 인자한 대답이 흘러 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콩콩 뛰었고, 직원들은 언제나처럼 술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에서는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나,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저어,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두 번째로 뵙습니다. 정해진이라고 합니다.”

결국 나는 노작가의 손을 맞잡으며 아이돌 스타를 앞에 둔 소녀처럼 입을 가린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목소리는 꺾였고, 의자에 앉을 때는 넘어질 뻔 했다. 작가는 그런 나를 ‘허허’ 웃으며 바라보았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어요. 글 쓰는 사람들은 타인을 유심히 관찰하는 버릇이 있거든. 게다가 정해진씨는 꽤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어서 한 번 보고도 잔상이 오래 남았어요.”

강하게 생겼다는 소리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런가요’하고 묻자 작가는 또 허허 웃으며 ‘외모가 아니라...’하고 정정해주었다. 어쨌든 감사하다,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저런’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나는 다시 이마를 들기 싫었다.

“평론가나 다른 작가 분이 인터뷰를 하셔야 하는데... 제가 고집을 부렸습니다. 죄송해요.”

“아니, 난 그래서 더 좋아요. 어려운 얘기 하는 것도 싫고, 메스 들고 해부하듯 내 소설을 해석하는 것도 싫어요. 오늘은 그냥 편하게 얘기 나눕시다. 그리고 정해진씨가 내 소설 편집잔데, 아주 상관없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아..아니요. 전 아직 편집자는 아니에요. 그냥 교정 교열을 맡는 정돕니다.”

손을 휘저으면서까지 부정하자 작가는 ‘그게 그거죠 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수직으로 신분 상승한 기분이 되어 ‘과연 대작가는 대범하구나’ 생각했다.

“시간이 참 빠르지요? 4년 만인가요? 그때는 정해진 씨도 학생이었지요? 참, 그때 김태준 대표하고 같이 봤었지요. 아, 이제는 김태준 전무라고 해야 하나요? 어때요, 그 양반도 잘 지내고 있나요?”

“그게... 선생님과는 따로 연락을 하고 지내시지 않나요? 저도 김 전무님이 태인 기업으로 들어가신 후로는 잘 만나 뵙지 못해서요.”

“명절이나 집안에 따로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선물 세트 같은 걸 보내오곤 해요. 아무래도 태인 기업으로 들어간 후로는 나도 잘 못 만나지요. 그래도 그게 어딘가, 아무리 자회사 계열이라고 해도 이제 출판사 사람도 아닌데, 젊은 사람이 참 야무지다고 생각해요. 실은 매번 그렇게 굴비다 뭐다 받아먹고 있으니 어디 다른 출판사로 눈길이나 돌릴 수 있나. 이번 소설도 그러니까 굴비 값이라고 합시다. 허허허.”

어린아이처럼 코를 찡그리며 웃는 작가의 대답에 나는 화들짝 놀라 ‘굴비 값이라니요’ 손과 고개를 동시에 흔들었다. 작가는 그 모습을 보곤 더 크게 웃었다. 그리고 호로록, 녹차를 마셨다. 나도 같이 두 손으로 녹차 잔을 받친 채 호로록, 쓰디쓴 차를 마셨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는지 작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쓴가요?’하고 물었다. 실례를 한 것 같아 목이 쏙 들어갔다.

“제가 아직 어릴 적 입맛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차 맛을 잘 모릅니다.”

“그렇구먼. 그런데 차는 혀로 맛을 보려고 하면 안 돼요. 가만 보자... 음, 그래.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다성(茶聖) 초의선사의 시군요.”

마침 익숙한 구절이어서 알은 체를 했더니 작가가 반색을 하며 ‘아는군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은 것 같아 왠지 쑥스러웠다.

“웃기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래 요즘 젊은이들 식으로 표현하자면, 차는 멋으로 마시는 거지요. 입안을 정화시키기 보다는 기분을 정화시키는 겁니다. 굳이 맛을 보려고 한다면... 차 맛은 쓴 맛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 것도 남지 않아서 쓴 것처럼 느껴지는 거겠지요. 씁쓸하다는 말이 있지요? 쓴 맛이 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흔히 씁쓸하다고 할 때는 어떤 일을 모두 끝마치고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무(無)의 상태를 말하기도 하지요.”

“...그거야 말로, 정말 쓴 맛이 나는 말이네요.”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어, 쓴 웃음을 지으며 또 한 번 차를 호록 마셔보았다. 여전히 차는 쓴 맛이 났다. 내 생각을 알아챘는지 작가는 인자하게 웃으며 ‘너무 우울해하지 말아요’하고 말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적일 필요는 없어요. 꽃잎차를 봐도, 우선 꽃잎을 따서 햇볕 아래에서 바짝 말리지요. 안에 머물고 있던 수분도 모두 날아가도록. 그럼 그 상태는 죽음, 무의 세계고요. 하지만 그걸 따뜻한 찻물 위에 떨어뜨리면, 꽃이 필 때처럼 활짝 피어나요. 다시 생명의 세계에 진입하는 거지요. 초의선사의 시처럼, 달이랑 구름이랑 벗 하려면 우선 모두 활활 태우거나 바짝 말리거나 완전히 비우는 수밖에 없어요. 어때요, 내가 너무 늙은이 같은 말을 했나요?”

조금은 쑥스러운 듯한 얼굴로 노작가가 지그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왠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실은 완전히 이해는 안 간다’고 털어놓았다. 작가는 무엇이 즐거운지 손으로 무릎을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직 젊어서 그래요’하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나는 얼른 늙고 싶었다.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1년씩 훌쩍훌쩍 뛰어넘고 싶었다. 볕이 좋은 창가에 앉아서 그런지, 그렇게나 만나고 싶었던 작가를 앞에다 두고 자꾸만 눈이 가물거렸다.

“볕이 좋네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여기서 오랫동안 앉아있으면, 저도 바짝 말라서 죽을 수 있을까요? 무의 상태로 들어갈까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이 바람처럼 떠돌아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작가는 내 시선을 따라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정해진씨는 빨리 이쪽으로 들어왔어요. 조금이라도 문학과 관련된 일을 하는 거니까. 난 어렸을 때 이것저것, 막노동도 하고 세일즈도 하다가 뒤늦게야 뭔가를 좀 만들어내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됐어요. 물론 다양하게 체험한 것들이 글을 쓰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어쩐지 좀 아쉬워. 젊을 때, 한참 반짝반짝 빛날 때에만 발견하고 또 글로 쓸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놓쳤다는 게 말이에요. ......정해진 씨, 글을 한 번 써볼 생각 없나요?”

“예? 제가 무슨...”

생각지도 못했던 조언에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자 작가는 지그시 내 두 눈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깊은 사람들은 할 말이 많아요. 그걸 어떻게든 풀어야지. 속으로만 품고 있으면 병이 들어요. 글이 아니어도 좋아요.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풀어낼 수 있는 건 많지요.”

단지 조언일 뿐 답을 바라는 말도 아니어서, 나는 그저 다시 한 번 차를 마셔보았다. 기분이, 맑아지는 것도 같았다.

*    *    *

남자가 다른 남자의 엉덩이를 때렸다. 엉덩이를 맞은 남자가 고양이처럼 소리를 지른다. 몇 번이나 찰싹 소리가 나고, 다른 남자의 엉덩이에 남자의 손바닥 모양 그대로 빨간 자국이 남았다. 남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다른 남자의 엉덩이 사이 주름을 혀로 핥기 시작한다. 동시에 젤을 바른 손가락으로 구멍을 넓히기 시작한다. 다른 남자의 구멍은 많이 사용한 것처럼 짙은 색이지만 미끈하다. 뒤쪽까지 면도를 한 것인지 깨끗하다. 손가락의 개수를 점점 늘리다가 드디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남자의 허리를 더욱더 굽힌다. 기역 자로 꺾인 다른 남자는 불안하게 테이블을 짚은 모습이다. 남자의 길쭉한 페니스가 다른 남자의 구멍 사이로 들어가기 시작....

“재미없다.”

창을 꺼버렸다. 새된 신음을 내지르던 남자와 다른 남자가 사라져버리자 순식간에 집안은 고요로 잠잠해졌다. 미쳤다. 엉덩이를 찰싹찰싹 맞으면서 좋아하다니. 반말하고 버릇없이 구는 것을 질색하던 김태준도 내 엉덩이는 때리지 않았는데. 깨문 적은 있어도. 거기다가, 세상에, 구멍을 핥게 하다니. 미쳤어. 누군가 내 구멍을 혀로 핥으려 한다면 난 혀를 깨물고 자살할 것이다. 강압적이고 능글맞은 김태준에게도, 한 번도 허락한 적 없다. 넣는 것과 핥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 아닌가. 싫다. ....싫었다.

스트레스 풀려고 봤던 동영상이 오히려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들었다. 결국 모던락 계열의 음악을 골라 볼륨을 크게 높여 틀었다. 긴 반주가 끝나고 드디어 노래가 시작하려던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일어나기도 싫어 몸을 뒹굴 굴려 겨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배를 깔고 누워있던 터라 볼멘소리가 나왔다. 곧바로 ‘자냐?’하는 응답이 들려왔다. 선희였다.

“아니, 누워있어.”

-나 집 앞. 오늘 어머니가 김치 가져가라고 하셨거든. 같이 가자고. 들어가도 되냐?

“당연하지. 문 열려 있어, 들어와.”

어울리지 않게 허락은. 전화가 끊기고, 정말 바로 현관문 앞이었는지 곧바로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서둘러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앉자 선희가 신발을 벗으며 쯧쯧 혀를 찼다. 그리고 또 문을 열어놓았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너, 우리 어머니보다 더 잔소리 심해.”

“어머니가 안 하시니 내가 하는 거다, 왜. 넌 너무 오냐오냐 컸어.”

“치. 근데, 집 앞이면 바로 들어오거나 벨을 누르지, 웬 전화?”

“나보고 그 꼴을 또 보라고?”

“......”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처음 선희를 집으로 초대했을 때, 그때도 역시 문을 잠가놓지 않은 채, 아직 저녁 시간이 멀었으니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심심해서, 게이 포르노를 다운받아 보고 있었다. 보통 때처럼 헤드셋을 쓰고 있었으니, 당연히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무덤덤하게 보다가, 그러나 어느새 하체는 묵직해져 와서 슬금슬금 오른 손을 츄리닝 바지 속으로 넣으려는데, 갑자기 어깨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선희가 저승사자처럼 서 있었다.

“난 그때까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잘 안 와 닿았거든. 그런데 그때, 확실하게 깨달았다. 정해진은 진짜 게이 맞구나.”

“너 앞으로 무조건 전화 먼저 하고 와.”

“씻기나 하시지.”

선희가 내 꾀죄죄한 몰골을 보며 발로 허벅지를 툭툭 찼다. 알았어, 투덜대며 기듯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 아래에 서서 뜨거운 물을 머리끝에서부터 맞았다. 샤워볼에 거품을 내서 몸을 문지르고 샴푸를 짜서 머리를 감는데, 밖에서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하고 선희가 동시에 문을 여는 소리까지도. 누군지 대답도 안 듣고 열어주다니, 저도 조심성 없는 주제에 감히 누굴. 입을 삐죽이며 계속 머리를 감는데, 문득 밖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급하게 물을 잠그고 욕조에서 살금 걸어나와 문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잠시 후

“어이, 정해진.”

욕실 문이 열렸다. 엄마야, 소리 지르며 몸을 웅크렸지만, 선희는 알몸으로 웅크리고 있는 나를 한심하다는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야!”

“볼 것 다 본 사이에 무슨. 택배 왔는데, 내가 사인한다?”

“맘대로 해!”

“....볼 것도 없는 주제에.”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어설픈 미련이 쾅,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씩씩거리며 다시 욕조 안으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거품이 눈에 들어갔는지, 따가웠다. 거품을 씻어내고 눈을 비비고, 샤워기 밑에서 한참 부산을 떠는데 또 밖에서 ‘정해진!’하고 불렀다. 대답도 않고 있으니 ‘나 이거 풀어 봐도 돼?’하고 물었지만, 역시 대답하나마나, 먼저 풀어보고 있을 게 뻔했다.

택배 올 만한 것이 있었나.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생각했다. 팬티만 달랑 걸친 채 머리카락을 탈탈 터는데, 생각났다. 택배 올 만한 것. 아니, 주문한 것의 정체. 그리고 수건을 내팽개치고 급하게 욕실 문을 열고 나갔다.

“그거 안....!”

“해진아, 너... 많이 외롭구나?”

“......”

“이거, 막 돌아간다?”

선희가 신기하다는 듯 그것을 코앞에서 빤히 들여다보며, 스위치를 눌렀다. 돌아갔다. 소음도 거의 없고 약한 진동과 함께 바나나 모양으로 구부러진 것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자극점을 찾아준다더니, 광고가 적합한 듯 했다.

“그..꺼! 당장 꺼!”

“되게 신기하다. 근데 이거 좀 크지 않아? 이게 들어가? 대단하구나, 너. 원래 들어가는 용도로 쓰이는 곳도 아닌데.”

“야!”

냉큼 달려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빼앗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체격으로 보자면, 여자치고는 큰 키의 선희와 나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좁은 방 안을 뛰어다니며 ‘나 잡아봐라’ 놀이 아닌 놀이를 하다가 문득 선희가 내 하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너, 팬티만 입었네. 슬쩍 보인다?”

“......”

“아직도 삐쳐있어?”

“아니.”

“에이, 아직도 삐쳐있네, 뭘.”

운전을 하는 내내 선희는 옆에서 내 몸의 어디는 빈약하고 어디는 통통하니 보기가 좋다며 떠들어댔다. 그런 주제에 간간히 아직도 삐쳐있냐고 물었다. 실은 삐쳐있는 정도가 아니라 친구고 뭐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랬다간 어디는 빈약하고 어디는 통통한 내 몸이 무사하지 않을 것 같아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신호등 앞에서 차를 멈추는데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삐쳤냐는 질문 그만 받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얼른 폴더를 열었다.

“예, 어머니. 지금 가고 있어요.”

-선희하고 희철이도 같이 오니?

“선희만요. 희철인 요즘 애들 시험기간이라서 토요일이 더 바쁘대요.”

-저기, 운전 조심해라, 오늘.

“저 매일 안전운전 해요, 걱정 마세요.”

-그게 아니라, 어제 꿈을 이상한 걸 꿨어. 기분이 찜찜해서 그래.

듣고 있던 선희가 ‘귀신 나오는 꿈 꾸셨어요?’하고 거들었다.

-으응, 무서운 꿈은 아닌데... 꿈에서 글쎄, 이가 몽땅 빠진 게 아니니. 그래서 합죽이가 되었어.

“어머니가요?”

-응, 내가. 기분이 좀 그래. 하여튼 조심해서 와라.

“그런 거 다 미신이에요. 알았어요, 조심해서 가고 있어요. 10분이면 도착해요. 끊을게요.”

휴대폰의 폴더를 닫고, 두 손을 핸들 위에 얹었다. 왠지 팔에 힘이 쭉 빠져버린 듯했다. 마치 남의 손인 것처럼 멍하니 내 두 손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뒤에서 빵, 하고 클랙슨이 울렸다. 어깨가 흠칫 떨렸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다가 선희와 눈이 마주쳤다. 선희는 실없다는 듯 픽 웃었다.

“뭘 멍하니 있어. 파란불이야.”

머리가 쥐어 박히고서야 차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10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15분 만에 도착했다. 토요일 저녁이어서 그런지 골목 구석구석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집 앞보다 좀 더 멀찍이 주차시킬 수밖에 없었다. 두어 골목을 나란히, 투덕투덕 장난을 치며 걸어가는데, 역시 집 앞의 오목한 곳에 검은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먼저 발견한 선희가 ‘어머, 놀래라’하고 걸음을 주춤거렸다. 잠시만, 하고 얼른 지갑을 꺼내었다.

“정해진, 너 뭐하는 거야?”

“저기.. 얼마라도 좀 쥐어주면 돌아가.”

“미쳤어? 한 번 주면 계속 오는 거 몰라? 경찰이나 보호소에 연락해. 너 이러면 여기 동네 애들한테도 위험해.”

“그래도...”

“됐어, 얼른 들어가. 들어가서 내가 연락할게.”

선희가 내 손에서 지갑을 뺏어들고 팔을 끌며 대문으로 향했다. 그림자가, 흘깃 곁눈질을 했다.

집에 들어가니 부모님 두 분 모두 나보다 선희를 더 반기셨다. 여자친구 아니라는데도 부모님은 벌써부터 선희를 며느릿감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 기회에 커밍아웃을 할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선희는 아니라는데 희철이 생각만 해서 희철이 예비 여자친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선희가 넉살이 좋아 언제나 그럭저럭 넘어가곤 했다.

“원래 선희 같은 타입이 우리 해진이랑 잘 맞아.”

“저런 타입은 제가 싫어해요. 쟤 때문에 저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있어요.”

“괜한 소리. 너처럼 비실비실한 애들이 원래 여장부하고 살아야 돼. 선희는 또 의외로 이런 타입이 좋지?”

“저도 싫어요, 어머니. 전 제가 들 수 있는 남자보다 절 들어줄 수 있는 남자가 좋아요.”

“에이, 그래도 해진이가 명색이 남잔데, 그리고 선희도 키가 클 뿐이지 덩치가 큰 건 아니야. 요즘 애들이 너무 삐쩍 말라서 문제지.”

“해진이가 명색이 남자긴 한데... 제가 통뼈라서요, 어머니. 결정적으로 저희 아직 스물여섯이에요. 요즘엔 빨리 결혼하면 능력 없는 여자라고 해요. 저 이래봬도 커리어우먼인데.”

매번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피해간다며 부모님은 눈을 흘기셨지만, 그래도 그것조차 내게 꼭 맞는 신붓감이라고 너그럽게 받아넘기셨다. 이래서 남녀사이에 쿨한 친구사이가 불가능하구나, 생각했다.

새로 담근 김장김치로 저녁을 넉넉히 먹고 배를 두들기며 처음 보는 주말 연속극을 둘러앉아 시청했다.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드라마라서 그런지, 도저히 어디서 웃고 어디서 울어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어머니와 선희는 어느새 훌쩍훌쩍 눈물을 닦아내거나 또 어느새 와르르 웃곤 했다. 강선희, 그래도 여자는 여자구나, 싶었다. 아버지는 드라마가 아니라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계셨다.

그런 모습을 또 보고 있으니, 내가 참 불효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나도 평범하게 결혼이라는 거, 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선희랑도 어떻게 됐던 것 같으니까, 여자랑 아예 안 되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선희 말고는 아직 아무도 아는 사람 없으니까, 대충 착하고 마음 맞는 여자하고 결혼, 해버릴까. 평범하게, 그저 평범하게. 김태준도 하는데 나라고 왜 못할까. 아니지, 김태준은 처음부터 남자 여자 다 됐지 참.

언제나, 어떤 생각을 하든, 결론은 김태준으로 끝났다. 나란 인간도 참 지긋지긋하고 질척거린다, 생각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버지가 ‘왜 그러니’하고 물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비식 웃었더니 ‘실없긴’하고 아버지도 따라 비식 웃었다. 언제나처럼 둘이 사겨라, 둘 다 싫다, 팽팽하게 맞서다가 자정까지 흘렀다. 시간을 확인한 어머니가 어머나, 하며 얼른 내 것과 희철, 선희 것을 각각 따로 김치를 나눠주기 위해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선희 집 앞까지 데려다줘라. 문 앞까지.”

“예, 저도 그 정도는 해요. 근데 실은, 선희가 저보다 힘 더 세요.”

“예끼.”

“참, 한 통 더 담아주세요. 저번에 회사에 김치 조금 가져갔더니 다들 또 가져오래요. 하나는 미리 썰어서 넣어주세요, 통째로 회사 냉장고에 넣어두게.”

“그럼 두 통도 더 주지. 여보, 여기 두 통 먼저 차로 옮겨둬요. 무거워서 한꺼번에 못 들어.”

식탁 위에서 김치를 썰며 어머니가 아버지를 불렀다. 내가 들겠다고 김치통을 드는데 아버지가 얼른 통을 빼앗았다. 그럼 무리하지 마시고 다른 하나는 내가 들겠다고 말하고 손을 뻗는데, 언제 와 있었는지 선희가 냉큼 통을 들고 나가버렸다.

“거봐요, 힘 더 세다니까요.”

냉큼 일러바쳤는데, 꿀밤을 맞았다. 거실을 나서는 아버지를 뒤따라가려는데 ‘나는 선희랑 데이트 한다’는 말에 도로 주방으로 들어왔다. 어머니가 웃으며 ‘아빠 바람 피우러 갔니?’하고 물었다. 웃으면서 하실 말씀이 아니라고 대답하는데, 어머니가 썰어놓은 김치를 통에 담으며 그만 몸으로 도마를 건드렸다.

도마가 식탁 한쪽으로 기울다 기어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어어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악’ 소리가 났다. 도마 위에 있던 식칼이 함께 떨어진 것이었다. 콰당, 의자를 넘어뜨리며 주저앉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바닥은 김칫국물로 흥건했고 양말이 젖었지만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괜찮으세요?!”

“응, 그냥 살짝 비켜나갔어. 괜찮다. 어제 꿈이 이거였나 봐. 괜찮아, 괜찮아.”

“괜찮은 게 아니잖아요, 식칼에 베이신 건 아니에요?”

“아니야, 그건 아니야. 냄새 난다. 얼른 양말 벗어.”

괜찮다고, 손을 저으며 어머니는 당신 발은 걱정도 하지 않고 내 양말과 바지자락을 적신 김칫국물을 걱정하고 있었다. 도마를 치우자, 김칫국물 때문에 정말 괜찮으신지, 혹 식칼 때문에 피가 날 일이 생기진 않았는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양말을 벗고 바지자락을 접어 올리며 흩어진 김치를 주워 담는데, 문득 밖이 소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도 들었는지, ‘설마 둘이 정말 장난 치고 노시나?’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셨다. 그리고 도마를 집어 들고 일어서는데, 역시 다친 게 맞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어디 봐요, 하고 손을 뻗는데,

“..아..아저씨!...안.. 아악....!!”

날카로운 비명소리였다. 선희 목소리였다. 어머니가 퍼뜩 일어서려다 또 주저앉았다.

“가봐, 얼른. 계속 집 앞에 이상한 사람이 두리번거렸어. 시비 붙었나보다. 나가 봐. 아빠하고 싸우지는 못하게 해. 말려.”

“어..어머닌 괜찮으세요?”

“괜찮다니까, 얼른!”

어머니가 손으로 어깨를 밀었다. 나는 스프링처럼 튕겨나가 거실을 뛰쳐나갔다. 현관에선 신발을 제대로 신지도 못했다. 맨발로 마당을 건너뛰었다.

“아앗!”

돌멩이가 발바닥에 박혔다. 그것을 미처 빼내지도 못하고 곧바로 대문을 열었다.

“..선희야... 아... 아버....”

장난인 것 같아서, 코를 킁킁거렸다. 김칫국물 냄새가 아니었다. 대문 앞에 다리를 뻗고 앉아있는 선희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돌 같은 것으로 머리를 맞았는지 이마에 피를 흘린 채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몸을 훑어보았지만 달리 외상은 없었다. 계단 아래에 아버지가 둥글게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조심스럽게 부르며 다가갔지만 ‘왜 그러니’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쓰러진 아버지 옆에 주저앉아 웅크린 몸을 똑바로 뉘었다. 아무래도 장난인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코를 킁킁거렸다. 김칫국물 냄새가, 아니었다.

“아..아버지...아버..지...아...아빠.....”

얼굴은 아무런 상흔이 없었다. 얼굴부터 손끝으로 더듬으며 내려오자, 배 부근에서 무언가 차가운 것이 걸렸다. 말끔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손에 걸리는 것을 차마 확인할 수 없었다. 손가락을 아버지 코밑에 대어보았다. 따뜻한 것이 나오는 것도 같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가슴에 손바닥을 대어봤더니, 무언가 콩닥콩닥 뛰는 것도 같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소리를 들을까, 해서 바짝 엎드려 얼굴을 가슴에 가져다 대려는데 배에 꽂힌 뭔가가 귀에 닿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심장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다시 한 번 코밑에 손가락을 대 보았지만, 어쩐지 이번엔 차가운 것만 느껴졌다. 바람이야. 나는 아버지의 얼굴과 목과 가슴을 쓰다듬다가 배에 꽂힌 것의 손잡이처럼 오목한 부분을 잡았다. 그리고 서서히 빼내었다. 무언가 왈칵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래를 확인하지 않았다. 빼내고 보니, 반이 깨진 맥주병이었다. 이런 걸 왜 배에 꽂고 계셨어요? 물어보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손에 들린 것을 등 뒤로 숨긴 채 뒤돌아보니, 그림자였다. 웅크린 꼽추, 상한 얼굴의 노인, 수줍게 웃는 걸인, 공포를 등에 지고 다니는 그림자.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서 지독한 술 냄새가 났다. 달빛 아래에 환하게 드러난 그의 얼굴은 여전히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손을 내밀었다.

“..도...”

“....도?”

무릎을 꿇은 채 주춤 뒤로 물러났더니,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손이 붉은 것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도...도!”

“...돈..?”

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 하고 숨을 들이키고는 다시 내뱉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꽉 조르는 듯했다. 병을 잡고 있는 손에, 온몸의 힘이 모아지는 듯했다. 무릎이 아팠다. 물러나다보니, 아버지의 허벅지에 발바닥이 닿았다.

“으...으...으아아아아아아!!!!”

몸이 튕겨나갔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팔이 휘둘러졌다. 쑤욱, 하고 무언가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달이 휘영청 밝은데, 눈앞이 캄캄했다. 몸에 경련이 일었다.

“하...하아...하아.....하.....”

털썩, 하고 잡고 있는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뒤에서 끼익, 철제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목도, 돌아가면서 그처럼 끼익, 소리가 나는 듯했다.

“이...이게... 뭐...뭐니? 해진아, 아버지 왜... 왜 누워...왜...해진아...”

“하...하아....하....흐...흐으....으으으....흑.....”

“울면.. 울면 안 돼, 아가.. 병원...경찰을 불러야..하니? 해진아, 뭘..전화를...”

어머니가 절뚝이며 다가왔다. 안 돼요, 보지 마세요. 말을 하려는데, 쉰 목소리가 이상한 신음만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머니 손에 내 휴대폰이 쥐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어머니가 내 손에 그것을 꼭 쥐어주었다. 손이, 차가웠다. 어머니는 나를 구원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흐으...흐...흣.....”

“아가...전화를...해야지...”

그리고 풀썩, 자리에 쓰러졌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란히 바닥에 누워있었다. 나는 멍하니 선희를 바라보았지만, 선희 역시 아직도 대문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떨어졌다. 자리에 주저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를 해야지. 병원이나 경찰이나 119에. 아가, 하고 누군가 속삭이는 듯했다. 손에 힘을 주고 폴더를 열었다. 긴급구조대, 세 자리의 숫자만 누르면 되는데,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였다. 가장 익숙한 번호, 가장 뜨겁고 가장 차가운 번호, 습관 같은 번호를 눌렀다. 휴대폰 너머로 연결음은 오랫동안 울렸다. 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떨어졌다. 전화는 끊겼다.

“으으...아...아버지....이...일어나...보...흐으...흐...”

기어가, 다시 손가락을 코밑에 대려는 순간, 바닥에 떨어졌던 휴대폰이 울렸다. 달빛에 직선으로 그어지는, 잔인하고 텅 빈 골목에 발정기의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벨소리가 울렸다. 두 손으로 휴대폰을 꼭 쥐고 폴더를 열었다.

“......”

-...정해진?

“..하...하아....흐..흐으...으으으....”

-....해진아.

“..태...태준...태준씨....으으...사..사람이...아버지....주..죽었....으으..흐으..흑...”

-정해진, 왜 그래. 뭐야, 어디야.

“흐으...아버지가..흣...죽었어... 내가, 내가...사람을.. 주..죽였어...흐으으...죽은 것 같아..태준씨..으으으....다..죽은 것...”

-......어디야, 집이야? 아버지... 부모님 집이야? 움직이지 마. 내가 갈 때까지 경찰은 부르지 마. 아니, 구급차 먼저... 아니다, 내가 연락할게.

“흐으...태준씨...어...어어어.....흐어어어....”

-해진아, 우선 끊어. 조금 있다 다시 전화할 테니까, 휴대폰 쥐고 있어. 응?

“으으으.....”

-해진아. ...정해진. ...정해진!

휘영청 달이 밝은데, 눈앞이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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