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11화 (11/35)

-11-

기다렸다는 듯 장마가 시작되었고, 뉴스에서는 연일 홍수 피해를 보도했다. 나는 무섭게 쏟아 붓는 장대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종종 새로 온 팀장에게 지적을 받았다. 온라인상의 성적소수자 인권단체 사이트에 가입했고, 동시에 그리 건전하지 못한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게이 친목 사이트에도 가입했다. 그러나 두 곳 모두 가입 이후에는 전혀 활동을 하지 않아 아이디와 비밀번호까지도 잊어버렸다. 장마가 끝나면 어떤 운동이든 시작해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생각으로만 끝나리라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밥은, 평소처럼 깨작거리며 먹다가 여전히 같이 먹는 사람들로부터 타박을 받았다. 대신 주량이 한 잔에서 세 잔으로 늘었고, 그 소소한 주량으로도 두 시간 가량은 떠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술자리의 술친구는 주로 선희였다. 선희는 내 주량과 맞춰주려는지 아니면 술이 별로 당기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인지, 나와 함께 조금씩 홀짝이는 정도였다. 대신 대화의 주제는 다양했고, 가벼웠고, 그래서 즐거웠다. 잠시라도.

“전화 왔었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전화가 왔었다며 선희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액정을 확인하자 희철이었다. 재통화 버튼을 누르고 연결음이 흐른 지 채 2초도 되지 않아 ‘여보세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친구야, 난 네가 날 버린 줄 알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계절학기 나가느라 바빴잖아. 그런데, 성적 나왔냐? 졸업할 수 있어?”

-그게 말이다... 오늘 술사면 알려줄게.

“지금?”

-오늘이 몇 시간 안 남았거든?

나는 맞은편에 앉은 선희를 힐끗거리며 ‘지금은...’하고 말을 끌었다. 선희가 알아차리곤 ‘누구?’하고 물었다. ‘친구’하고 입모양으로 대답하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오라고 그래’하고 흔쾌히 말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두 친구, 꽤 죽이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농담투로 희철에게 지금 오면 여자친구도 소개시켜주겠다고 말했더니 선희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헤 벌렸다. 전화를 끊고 왠지 잠시 서먹한 기운이 돌았다. 다행히, 전화를 끊은 지 30분도 되지 않아 희철이 숨을 헐떡이며 도착했다.

“아..안녕하세요, 문희철입니다. 바..방년 이십오 세고요, 이 녀석하고는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자리에도 앉기 전에 희철은 그 자리에 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자기소개를 했다. 선희가 새우깡을 먹으며 그런 희철을 신기하게 쳐다봤고, 나는 그 녀석이 부끄러웠다.

“야, 너 되게 촌스럽다. 어쨌든 이쪽은 강선희. 내 중학교 동창이자 현재는 우리 출판사 편집 디자이너. 그런데 희철아, 아까 그거 농담인데.”

“뭐? 그..그거? 농담? 농담이라고?”

내 멱살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희철이 거듭 물었다. 왠지 안타깝게 느껴져, 나는 슬쩍 선희의 눈치를 봤다. 농담이 진담이 되는 순간, 필요한 건 당사자의 의견이었다. 선희는 손바닥을 탁탁 치며 새우깡 가루를 털어내곤 희철의 얼굴 앞으로 한쪽 손을 내밀었다.

“내 소개는 해진이가 해줬고. 동창인 건 마찬가지니까 동갑이란 얘기고... 그럼 그냥 말 놓으면 안 되나? 이쪽도 친구하면 되지 뭐.”

“아, 예... 아니, 응, 그..그렇지 뭐.”

말은 그렇게 하면서 희철은 선희의 손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움켜잡았다. 선희는 눈가를 찌푸려 웃으며 손을 빼냈다.

희철은 계절 학기까지 들어놓곤 2학점이 모자라 한 학기 더 학교를 다녀야 했다. 대신 일주일에 2학점짜리 과목 하나를 수강하고 평소엔 학원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 후로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기승을 떨치는 동안에도 우리 셋은 종종 함께 모여 시원한 생맥주로 여름을 보냈다. 희철은 감정을 속이는 영악한 부류가 아니었고, 그래서 종종 선희를 곤란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선희는 곤란한 듯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결국 나는 따로 희철을 불러야 했다.

“희철아, 선희가 좋냐?”

“응, 좋다.”

“너 원래 청순가련한 타입 좋아했잖아.”

“응, 그런데 바뀌었다. 선희 같은 타입이 날 잘 이끌어주고 보듬어주고, 그럴 거 같다.”

“그렇구나...”

“응, 응.”

희철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나는 그런 희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당당하게 저 사람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현실이, 부러웠다.

그 뒤로 나는 희철의 편이 되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냥 봐도 선희가 희철을 그리 남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아직 정이 덜 붙어서 그럴 거라는 생각에 나는 종종 셋이서 만날 약속을 만들어 놓곤 중간에 몰래 빠져나오거나 아예 처음부터 빠지거나 해서 되도록 단 둘이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곤 했다.

그러나 잠자코 내 뜻에 따라 속고 또 속던 선희가 어느 날부턴가 안색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싫은 건가, 하는 생각에 할 수 없이 희철에게 잠정적인 후퇴 약속을 받아내야 했다. 어찌 보면, 그 둘의 연애를 성사시켜줌으로서 내 지난 연애를 잊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건 내 욕심이었다. 보상심리였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따로 선희에게 저녁을 사주겠다 약속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선희는 테이블에 나만 혼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곤 힘없이 웃었다.

“이번엔 사실이네.”

“...미안, 불편했어?”

“그냥 뭐... 그래도 그 녀석이 좋은 놈이란 건 알아. 같이 있으면 재밌고, 즐겁고.”

역시, 그래도 남자로서는 아니란 말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단 둘이 있도록 붙여줬는데도 아니라면, 안타깝지만 희철에게도 확실히 해둬야 했다. 주문을 받으러 온 직원을 앞에 두고 뒤늦게 메뉴판을 훑어보고 있는데 문득 선희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술도 같이 시킬까?”

“어? 아..아니, 술은... 술은 됐고.”

하긴 안색이 많이 안 좋구나, 생각하며 주문을 마치고 두 개의 컵에 물을 따랐다. 두 개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겨 각자의 자리 앞에 정돈해 놓아두었다. 휴대폰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놔두고 아차, 싶어 냅킨을 뽑아 놓아두었던 수저 아래에 깔았다. 한참을 혼자 수선을 떠는데 또 선희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깔끔 떤 것처럼 보였나 싶어 어색하게 웃었더니 선희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내가 좀 가만히 못 있지?”

“아니, 괜찮아. 내가 남자라도...”

“응?”

“아니, 네가 여자로 태어나고 내가 남자로 태어났어야 했어. 성격이 말이야.”

순간, ‘넌 왜 여자가 아니지?’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따라놓았던 물을 벌컥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컵을 내려놓으며 쿨럭, 헛기침을 하자 선희가 티슈를 건네주며 ‘물에 체하면 약도 없다’ 타일렀다. 희철이 왜 선희를 보며 자기보다도 한참이나 작은 여자에게 안기고 싶다고 느꼈는지 알 것 같았다.

“해진아, 저기...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

먹는 둥 마는 둥하며 식사를 마친 선희가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꺼냈다. 나는 물을 마시며 ‘뭘?’하고 물었다. 한참을 꾸물대기에 나도 자세를 고쳐 앉고 진지하게 ‘뭔데’하고 다시 물었다. 그러다 문득, 선희가 입술을 이로 꽉 물고 있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생각이 스쳤다. 둔한 것도 죄다. 자책하며 나는 내가 선희를 참 곤란하게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희야, 알겠어. 그거, 내가 해결할게. 내 책임도 크니까.”

“뭐?”

선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앞으로 주욱 내밀었다. 의심과 의문에 가득 찬 눈이었다. 이번엔 내가 입술을 이로 꽉 물었다 놓았다.

“처음부터 내가 그런 식으로 농담해서 희철이가 오해한 것도 있고, 나중엔 내가 나서서 부추기기도 했으니까. 내가 희철이한테 알아듣게 설명할게.”

“...풉...으하하하! 정해진, 너 정말 왕건이다! 너 짱 먹어라! 아하하하!”

나름 진지하게 얘기했는데, 선희는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얼굴을 테이블에 붙인 채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내가 모르는 코미디 요소를 내가 터뜨렸나 싶어 나는 ‘아하하..’ 어설프게 따라 웃으며 이마를 긁었다. 선희는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웃더니 문득, 잠잠해졌다. 그리고 한숨을 훅 쉬더니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붉어진 얼굴을 들었다.

“아니다, 정해진. 희철이한테는 내가 말할게. 그런 얘기는 차라리 당사자한테 직접 들어야 돼. 타격은 커도, 그편이 깨끗하고 빠르다.”

“응... 미안.”

이왕 말 나온 김에 지금 약속을 잡아야겠다며 선희는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단 둘이서 만나자고, 그것도 선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것 때문에, 휴대폰 너머로 희철이 기뻐하며 포효하는 것이 들렸다. 선희가 나와 눈을 맞추며 입술을 꾹 말아 넣은 채 웃었고, 나도 힘없이 웃었다.

타격은 커도, 그 편이 깨끗하고 빠르다.... 그래서 이런 걸까. 그래서, 이렇게 미련을 떨고 있나. 나는 물통을 모두 비우고 맥주를 시켰다. 같이 마시자고 권하자 선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    *    *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 새벽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배가 고파 아침에 잠깐 일어나 대충 허기를 채우고 미적거리며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그리 피곤하거나 어딘가 아픈 것도 아닌데, 땀을 흥건히 흘렸다. 그리고 꿈을 꿨다.

꿈속에서, 누군가 내 몸을 씻겨주었다. 나는 발가벗은 채 멍하니 타일바닥 위에 앉아 이렇게 부려먹으니까 참 좋구나, 생각했다. ‘입 벌려’하는 목소리에 내가 순순히 입을 벌리자 입 속으로 무언가가 들어왔다. 치약이 묻은 칫솔이었다. ‘이’하는 소리에 나는 ‘이’했다. 치카치카 하고 양치질까지 해주었다. ‘아’하는 소리에 나는 또 ‘아’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양치질을 마친 목소리가 ‘가글해’하고 명령했다. 나는 이번에도 착한 아이처럼 물을 머금고 가글을 한 후에 물을 내뱉었다.

-확인해 보자. 아, 해봐.

-아.

-이게 뭐야. 칠칠맞게. 거봐, 넌 네 앞가림도 못한다니까.

-뭐가?

-이것 봐, 이가 썩었잖아. 아아, 이건 흔들리기까지 해. 뽑아야겠어. 조금만 참아.

그리고 입을 닫지 못하도록 턱이 단단하게 잡혔다. 곧 목소리의 손이 무지막지하게 입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덜컥 겁이 나 그 손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도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으..으응...하지 마...

-가만히 있어. 넌 대체 잘 하는 게 뭐가 있어? 양치질도 엉터리로 해놓구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놔 둬, 내 앞가림은 내가 알아서 해. 고개를 돌리려는데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이가 쑥 뽑혔다. 목소리는 ‘하아’ 한숨을 내쉬며 내 턱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의 손에는 잔뜩 썩은 이가 들려 있었다. 나는 왠지 두려운 마음에 도리질을 했다.

-이것 봐, 넌 내가 없으면....

Rrrrrrrr...

전화벨이 울렸다. 날카로운 벨소리에 나는 흥건하게 젖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하....하아...하아....”

갈증이 났다. 벽시계를 올려다보자 벌써 오후 3시였다. 끔찍한 꿈이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처졌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어 주둥이에 입을 대고 벌컥이며 마셨다. 그동안에도 전화벨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시끄러워.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미처 말을 다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해..해진아! 어..어떡하지? 어떡하지?

“...희철이냐? 뭐야, 왜 그래?”

-야... 어떡하냐.. 나 때문에.. 내가 억지로 타자고 해서... 병신 같이, 내가...

다급한 목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끼며 물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수화기를 힘주어 꽉 움켜잡았다. 뭐야, 왜 그래, 침착하게 말 해봐. 이쪽이 흥분하면 더 겁먹는다는 생각에 또박또박 대꾸하자, 희철이 거의 울음을 터뜨릴 듯 대답했다.

-서..선희가.. 피를 흘려서...

“선희가, 뭐? 다쳤어?

-아니.. 피를...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희철아, 어디야. 지금 어디에 있어? 병원엔 갔어?”

-응.. 병원... 여기, 00동 오거리에 있는... 산부인과야. 해진아.. 좀 와 줄래?

산부인과. 갑자기 치통이 느껴졌다.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해?”

“해진아...”

희철은 병실 앞 의자에서 찌그러진 깡통처럼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나도 선뜻 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뭣해 옆에 같이 쪼그려 앉았다. 희철은 벌써 울었는지 눈가가 발갛게 부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작게 속삭여 묻자 희철은 ‘오리 배’ 하고 중얼거렸다.

“오리 배?”

“계속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길래... 한강... 오리 배 타자고... 덥고 귀찮다는 걸 억지로...”

문장이 되지 못한 문장을 이어 맞추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깨끗하고 빠른 방법이라 할지라도, 그게 설령 훗날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 할지라도, 막상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운동화 끝으로 바닥을 문지르며 입술을 달싹거리며 ‘어떻게 운을 떼야할까’ 고민하는 선희와 마냥 좋아 허허 거리며 오리 배 타자고 아이처럼 졸랐을 희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야, 넌 내 친구라는 놈이... 남자가 그것 하나 조절을 못 하고... 여자한테는 그게 쉬운 게 아니잖아, 네가 배려했어야지.”

“...오리 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희철이 어깨를 움츠리며 되물었다. 왜 이렇게 안 맞나, 생각하며 나는 아프지 않게 꿀밤을 때렸다. 행여 이 일에 강제성이 보인다면, 체격 차이는 무시하고 흠씬 두들겨 패줄 생각이었다. 희철은 한 대 맞고도 여전히 울상으로 ‘내가 알았나 뭐’하고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 생각에 ‘너 아니야?’하고 묻자 희철은 또 ‘뭘’하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선희랑 너... 아니야?”

“뭐.....뭐? 설마 너... 아니, 아니야, 나 아니야!”

두 손을 휘저으며 소리 지르던 희철이 문득 입을 틀어막고 병실 문을 살폈다. 조용했다. 나는 희철의 손을 내려주며 ‘너 아니야?’하고 다시 물었다. 희철은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등을 의자 뒤로 기대었다. 그리고 순간, 토기가 치밀었다. 급하게 입을 틀어막자 이번엔 희철이 내 손을 잡으며 ‘왜 그래’하고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눈앞으로 가라오케의 화려한 조명이 지나갔다, 슬프지만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남자의 모습이 지나갔다, 토기가 치밀었다, 덜컹거리는 차 안, 욕설, 슬립 차림으로 옷가지를 헹구고 있는 선희, 베스가운을 입고 눈가를 찌푸린 채 황망한 듯 웃는 선희가, 지나갔다.

“야, 왜... 들어가 보게? 네가 좀 잘 달래줘라, 응?”

나는 천천히 일어나 병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손바닥 안에서 낯설고 차갑게 느껴지는 금속의 문고리를 돌리는 것이, 참 어려웠다. 문고리를 잡고 가만 서 있자 옆에서 희철이 ‘야’하고 옆구리를 찔렀다. 그리고 나는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선희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베개를 쌓아 기댄 채 누워 있었다. 달칵, 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선희야. 혹시.. 나... 나....”

“괜찮냐고 먼저 물어봐야지.”

“그..그러니까 선희야... 내가, 내가....”

“대답하면, 괜찮냐고 물어볼래?”

휘청, 하고 몸이 기울었다. 영원히 우주 미아가 된 것처럼 눈앞이 캄캄했다. 그리고 엉덩이와 허벅지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허우적대자,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제야 내가 주저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런 나를 내려다보았다.

“저런, 엉덩이 아프겠다. 괜찮아? ....제기랄, 결국 내가 먼저 괜찮냐고 물었잖아. 이것 봐, 너랑 난 성별이 바뀌어야 했어.”

“...괘...괜찮아?”

“이제야 물어보네. 아니, 안 괜찮다. 좀 아프다.”

여장부가, 코끝이 빨개졌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무릎으로 침대 앞까지 기어갔다. 그 꼴을 보던 선희가 킥킥대며 웃었다. 그리고 침대 옆의 간이의자를 툭툭 두드렸다. 앉아, 하는 말에 나는 훈련 잘 된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고 선희도 나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병원로고가 프린트된 흰색 시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있잖아, 미안하다, 뭐 이딴 말 하지 마라. 그 날 실수한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넌 아예 정신이 없었고, 난 그나마 뭐가 뭔지는 파악하고 있었어. 딱 두 개, 내가 배란일이랑 콘돔을 미처 생각을 못했다.”

“....미안.”

“야, 그러지 말라고. 그런 소리 들으면 내가 정말 되게 비참한 여자처럼 느껴진단 말이다. 당한 건 내가 아니라 너였어. 마초들이 들으면 기절할 얘기지만, 너 그거 아냐? 여자한테도 성욕이 있다. ....어쩐지 술이 안 땡기더라. 나도 며칠 전에 알았고, 내 책임이니까 내가 알아서 하려고 했어.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돼서 그렇지,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 거란 말이다.”

“그래도 미안...”

“울지 마, 이 새끼야!”

머리에 무언가 쾅, 하고 와 부딪혔다. 내가 희철에게 꿀밤을 때린 것보다 열 배는 강한 꿀밤이었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선희는 갑자기 몸에 힘을 준 게 무리가 되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베개에 몸을 기대었다. 나는 또 멍청하게 ‘괜찮아?’하고 물었다. 선희는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는, 방관자의 언어를 내뱉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많이 아프진 않았느냐고, 얼마나 무서웠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대답이 나올까 겁이 났고, 그래서 흔하디흔한 관계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묻고 답하는 식대로 말해버렸다.

“그래도 선희야...”

“너 인마, 한 마디만 더 해봐. 고추를 따 버릴 거다. 형편없는 주제에.”

“그래도.. 미안해, 기억 못해서, 또.. 그 애한테도...”

“....응, 그건 좀 미안해도 된다.”

훌쩍, 코를 훌쩍이더니 선희가 눈가를 비볐다. 그리고 손등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우는 사람을, 그것도 나 때문에 우는 사람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서, 그저 나도 주먹으로 눈가를 비비며 같이 울었다.  잠시 후, 무슨 일인가 싶어 들어온 희철이 그런 우리 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저 ‘내가 미안’ 중얼거리며 가슴을 들썩이며 눈물을 훔쳤다. 선희는 울며 그리고 또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면서 ‘저 병신들을 정말’하고 이를 갈았다.

그날 나는 병원 뒤뜰에서 내게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희철에게, 체격 차이는 무시된 채 흠씬 두들겨 맞았다. 학창시절에도 그 흔한 사내아이들끼리의 몸싸움 한 번 한적 없었던 나는 맞는 요령도 없이 때리는 대로 고스란히 모두 맞았다. 나중에는 결국 희철이 훌쩍거리며 흙과 모래로 엉망이 된 내 바지를 털어주었다.

“희철아, 나 배 아프다.”

“개새끼.”

“응, 그런데 정말 배가 아프다.”

“너 이 병신새끼.”

“응, 응.”

이상하게, 내 속의 무언가를 긁어낸 것처럼 속이 쓰렸다. 꽃밭에다 대고 헛구역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주 주말, 여자에게는 과연 어떻게 프러포즈해야 하는지 몰랐던 나는, 영화에서 본 대로 무작정 선희의 집에 찾아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선희는 씩씩거리며 꽃다발을 던졌다.

“미쳤어? 내가 몇 살인데 벌써 결혼이야?”

“그..그럼 연애부터...”

“내가 어릴 땐 잠시 사춘기 시절을 겪느라 너 같은 타입에 눈이 돌았었지만 이젠 나도 눈을 떴다 이거야. 난 남자랑 연애를 하고 싶지 어린 애랑 소꿉놀이하고 싶진 않아.”

“내가 잘 할게.”

“너 말이야, 꼴에 남자라고 책임감 뭐 그런 거 느끼나 본데. 웃긴다. 난 그런 거 질색이야. 누가 누굴 책임지고 그런 거. 제발 그냥 가라. 계속 그 일 떠올리면 나 쪽팔려서 네 얼굴 못 본다, 응?”

“그래도 선희야...”

“나 안단 말이다!”

늘어진 츄리닝을 입은 채 현관문 앞에 삐딱하게 서 있던 선희가 갑자기 빽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숨을 고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던져진 꽃다발을 주우며 나는 ‘뭘?’하고 물었다.

“완전히 기억나진 않는 모양인데... 그때 너, 그 사람 이름 불렀단 말이다.”

“...뭐?”

“그 사람 이름... 불렀어.”

“......”

“김태준, 전 팀장.”

선희가 고개를 들었다. 코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다시 꽃다발을 떨어뜨렸다. 이상하게, 꽃일 뿐인데,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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