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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야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가 차를 사주겠다고 했을 때 그냥 받을 걸, 하고 후회하곤 한다. 그의 말처럼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했다면 왕복 40분의 시간동안 잠을 더 잘 수도 있고 운동을 할 수도 있고, 아침밥을 여유 있게 먹고 출근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길거리에서 파는 토스트를 입에 물고 달리지 않았을 테고, 그것 때문에 배탈이 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문은, 김태준이 왜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그것도 입사하고 곧바로 팀장이 될 수 있었는가와 그 때문에 사원들 사이에 평판이 어떠했는가를 알게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아픈 배를 부여잡고 앉아있는 화장실 안에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게로 왔다.
“김태준 지난 주말에 약혼했다며? JH 둘째랑. 근데 어떻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러냐. 이제 태인기업으로 들어가니까 우리는 찬밥이다 이거야?”
“JH 쪽에서도 쉬쉬했대. 요즘 워낙 끼리끼리 사업 차원으로 결혼하는 거 안 좋게 보니까 그런 모양이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갑작스럽잖아. 혹시 벌써 애가 생겼다, 뭐 이런 거 아냐?”
“그게, JH 장녀가 아직 미혼이거든. 그래서 우선 둘째는 김태준하고 연결시키려고 미리 약혼 시키고, 결혼은 장녀 먼저 보내고 내년에 하신단다. 그쪽 세계는 참 오묘해. 약혼이 아니라 ‘장바구니에 담기’고 결혼이 아니라 ‘M&A’이야. 그런 거 보면 그렇게 사는 것도 마냥 부럽지도 않아.”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마다 그의 약혼 소식에 대해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나는 안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있어야 했다. 그 꼴이 우습기도 하고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민망하기도 해서, 나는 실없이 피식피식 웃었다.
“내가 다시는 길거리 토스트 먹나봐라.”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또 충격으로 패닉상태에 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야, 생물 시간에 혈액형을 맞춰보다 내가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닌 것을 알았을 때보다야 훨씬, 정말 훨씬 충격이 덜했다. 언제나 각오하고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언제나 긴장 때문에 어깨 근육이 뭉쳤고, 평소에도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막상 소문을 접하고 나니 앞으로는 소화도 잘 되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후련하고 시원했다.
내가 얼마나 그 일에 대해 대비하고 있었냐 하면, 혼자 집에 있을 때 할 일이 없을 때마다 가상의 김태준을 앞에 앉혀놓고 ‘알았습니다, 나도 이제 당신이 지겨워, 속이 다 후련하다 이 자식아’하고 쏘아붙여주곤 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게임으로 치자면, 시뮬레이션 정도 되겠다. 게다가 그 즈음은 특히나, 별일도 아닌 일에 혼자 화를 내고 놀란 나를 뒤늦게 달래느라 바빴던 태준만큼이나 나는 실전을 예감한 촉수를 높이 세운 채 시뮬레이션에 여념이 없었다. 그게 내가 불안을 견디는 방법이었다. 충격과 상처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
생각해 보면, 우리의 연애는 시간이 갈수록 권태기가 아니라 더 애틋한 공기를 향하고 있었다. 유예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내 경우엔, 어차피 평생 그와 나란히 서지 못할 거라면 이런 연애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불행하게 살다 간 어느 시인의 시처럼 나는 그를 사랑하다 결국 그의 꽃병에 꽂히는 한 송이 꽃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 삶이 시궁창 같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부모님과 유전자가 다르다는 것이 불행이 되지는 않았고, 다른 형제가 있어서 차별대우를 받은 적도 없고, 부자는 아니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환경에서 자랐고, 딱히 모난 성격이 아닌 덕분에 웬만한 사람들과는 둥글게 잘 지낼 수 있었고, 우등생은 아니지만 열등생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 성적 취향이 다르다는 것이 내 삶의 작은 비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내가 실패한 인간이라고 느끼게 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로 인해 내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 언제나 가슴 한쪽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바꿀 수 없는 일이라면 순응하고 최대한 내게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몇몇 위대한 선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 또한 나의 행복을 위해 살고 싶었다. 그러므로, 온갖 개똥 철학들과 생활의 지혜를 혼합하여 내 자신을 위로했다. 그래서 나는 화장실 안에서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계속 웃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바깥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모두 나간 걸까, 얼른 물을 내리고 나왔더니 태준이 손을 씻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회사 내에서 모든 사원들에게 그러하듯 업무용 미소를 띠었다.
“안에 있었어요?”
“...나, 차 사줘. 태준씨 몰던 거 말고 새 차로.”
그의 옆에 서서 손을 씻으며 퉁명스레 대꾸 아닌 대꾸를 하자, 태준은 놀란 얼굴로 화장실 입구를 흘깃거린 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빤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정해진씨, 여기 회삽니다’ 라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약혼 하셨다고요, 그래서, 결혼... 아니 합병은 언제 하십니까? 잘 알았습니다. 나도 이제 당신이 지겨워, 속이 다 후련하다 이 자식아. 아니지, 이게 아니다. 너무 속 좁아 보인다. 최대한 태연하게. 소식은 잘 들었습니다. 여기 안에서, 배를 부여잡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 자식아, 그런 건 나한테 먼저 말해주는 게 예의가 아니냐? 이 빌어먹을 자식아. 아니, 이건 더 심하다. 하긴, 충격이 덜했던 건 그의 입으로 직접 전해 듣지 않아서였을 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내가 해야 할 말을 아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그 역시 무언가를 생각하고 정리하는 듯 불안한 눈으로 내 얼굴 이곳저곳을 관찰하듯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문득 그가,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내가 그 날 토스트를 먹지 않았어도, 늦어도 그 날 하루가 지나기 전에 그 소문을 어떤 식으로든 접했을 것이었다. 소문이란, 빠르고 우아한 바람처럼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으니까.
나는 그의 변명이나 또는 위로를 기다렸다. 화를 내거나 달래거나 놀리거나, 또는 야한 말을 내뱉는 것 외에는 평소에는 그리 말이 없던 그가, 과연 어떤 식으로 변명을 혹은 위로를 할까. 나는 재촉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드디어 힘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사줄게.”
“...뭐?”
“하는 김에 확실히 하지 뭐.”
“뭘?”
“돈지랄.”
“......”
이런 상황에 어떻게 농담 따먹기나 할 수 있냐고 따지려다가, 그럼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도 알 수가 없어서, 그냥 그를 지나쳐 핸드드라이어에 손을 말렸다. 위잉- 하는 소음만이 둘뿐인 화장실을 가득 울렸다. 그러다 문득 거울을 보는데, 거울 속의 태준이, 그러니까 아직 그대로 뻣뻣하게 서 있는 태준의 주먹이 꽉 말려진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도 나처럼 언제나 각오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긴장 때문에 언제나 어깨 근육이 뭉쳤다며 ‘좀 주물러봐’하고 내게 어깨를 내밀었던 걸까. 그도 나처럼 혼자 집에 있을 때 할 일이 없을 때마다 가상의 정해진을 앞에 앉혀놓고 ‘그렇게 됐다, 나는 그저 장바구니에 담는 종마에 불과하다, 너는 더 좋은 여자.. 아니 더 좋은 남자를 만나라’ 하고 털어놓았을까. 그런 시뮬레이션을 게임처럼 하면서 불안을 견뎠을까. 충격과 상처에 익숙해지도록. 그렇다면 왜 아직도 그는 주먹을 저리 꽉 쥐고 있을까.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아플 텐데. 나는 그의 주먹 안으로 부드럽게 손가락을 밀어 넣고 싶었다.
“저 먼저 들어갑니다, 팀장님. 돈지랄 건은 없던 걸로 해주세요.”
그러나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게 내가 허튼 기대를 물리치는 방법이었다.
* * *
장바구니에 미리 담기 식으로 약혼을 하고 M&A처럼 결혼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문학과 한 발이라도 담고 있다는 자부심과 낭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서로 인의를 중요시 하는 출판사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소문이 출판사를 한 차례 휩쓸고 당사자인 태준이 어떤 변명이나 설명도 없이 소문의 진상을 긍정하는 듯하자 며칠 후, 노는 것 좋아하고 그래서 어떻게든 회식 자리 한 번이라도 더 마련하려 애쓰는 최선배가 나서서 ‘축, 김태준 약혼’을 타이틀로 내건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
파티라고 해봤자 ‘1차 밥, 2차 술, 3차 가라오케, 4차 마무리 술’이라는 전형적인 회식자리와 다를 바 없었으나, 최선배는 ‘절대 파티’라고 우겼다. ‘김태준 팀장은 약혼녀를 대동할 것’이라는 그의 우격다짐에 사무적인 미소를 띤 태준의 ‘아직 그 정도 사이가 아니라서’라는 대답은 잠시 좌중을 썰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찌됐든, 5년여를 함께 한 팀장의 ‘몰래 약혼’에 대한 회식은 결국 이루어졌다.
“자아, 주인공 모십니다. 새신랑... 벌써 새신랑이라고 하면 기분 나쁘시지요? 어차피 결혼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유예기간을 즐기고 싶으시지요? 좋아요, 그럼 ‘아직 총각’님이라고 합시다. ‘아직 총각’님은 오늘만은 못 빠져나갑니다. 나오세요!”
어느새 편집부 내의 분위기 메이커가 된 선희는 최 선배와 함께 나서서 사회를 보았다. 술자리가 있기 전부터 오늘은 총대 확실히 맬 테니 다들 무조건 밀어줘야 한다고 벼르더니, 결국 그의 노래 한 곡 듣는 게 계획이었던 것이었다. 하긴, 아무리 비슷한 나이의 상사라 할지라도 엄연히 출판사의 윗선이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의 사장 아들이 아닌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저 웃으며 ‘난 됐어요’ 한 마디에 다들 깨갱 길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난 그동안 참 어려운 사람한테 잘도 대들었다는 생각에 스스로 기특해지기도 했다.
“다들 단단히 각오하신 것 같으니까, 오늘만입니다. ‘한 번 더’ 나오면 저 직권남용할 겁니다.”
어쩐지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앞으로 나오는 태준을 보며 사람들이 테이블을 치며 환호했다. 나도 따라 테이블을 치며 환호했다. 나는 이미 2차 술자리에서 주량을 넘긴 데다 최 선배와 선희, 두 주당들 사이에 끼어 계속 홀짝거리고 있었다. 태준에게 마이크를 건네주고 개선장군처럼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다시 자리로 앉은 선희가 ‘괜찮아?’하고 내 얼굴 앞에 손을 흔들었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한 반주가 흘렀다. 나는 몸을 소파 깊숙이 묻은 채 그 잘난 김태준 노래나 한번 들어보자, 싶었다. 그리고 그가, 마이크를 들었다.
Hey Jude, don't make it bad.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쥬드... 슬퍼하진 마. 슬픈 노래는 즐겁게 불러봐.)
Remember to let her into your heart, then you can start to make it better.
(네 가슴속의 그녀를 기억해 봐. 그러면 좀 더 나아질 거야.)
Hey Jude, don't be afraid. you were made to go out and get her.
(쥬드.. 두려워하진 마.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를 안을 수 있을 테니.)
The minute you let her under your skin, then you begin to make it better.
(너의 품속에 그녀를 안는 순간, 너는 기분이 나아질 거야.)
And anytime you feel the pain hey Jude refrain, Don't carry the world upon your shoulders.
(아무리 고통스러울 지라도 참아. 너의 어깨에 모든 세상을 짊어질 생각은 말아.)
For well you know that it's a fool, Who plays it cool by making his world a little colder.
(그런 게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누가 자신의 인생을 냉대하겠니.)
Hey Jude, don't let me down. you have found her, now go and get her.
(쥬드.. 좌절하진 마. 너에겐 지금 달려가서 안아 줄 그녀가 있잖아.)
Remember to let her into your heart, then you can start to make it better.
(너의 가슴속에 있는 그녀를 기억해 봐. 그러면 너는 기분이 나아질 거야.)
So let it out and let it in hey Jude begin, You're waiting for someone to perform with.
(그러니 걱정거리는 놔두고 새롭게 시작해. 함께 헤쳐 나갈 누군가를 기다려 봐.)
And don't you know that it's just you, Hey Jude you'll do, The movement you need is on your shoulder.
(그런 모습이 바로 너라는 걸 넌 모르니? 쥬드.. 넌 할 수 있어. 너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너의 어깨에 달려있어.)
Hey Jude, don't make it bad.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쥬드... 슬퍼하진 마. 슬픈 노래는 즐겁게 불러봐.)
Remember to let her under your skin, then you'll begin to make it better. oh.
(너의 가슴속의 그녀를 기억해 봐. 그러면 너는 좀 더 나아질 테니까.)
“don't make it bad. take a sad song and make it better.... anytime you feel the pain hey Jude refrain......”
“응? 뭐라고, 해진아? 뭐라고 말하지 않았어?”
중얼거리며 가사를 읊자 옆에서 선희가 바짝 귀를 갖다 대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뭐야, 김태준... 완전 음치였잖아...”
그래서 나는 마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해진아, 정해진. 이것 좀 마셔, 응?”
“으....무울....”
“그래, 여기 있으니까 마시라고.”
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 사근사근한 듯하지만 어딘가 여장부다운 단호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나는 ‘선희야’하고 우물거렸지만 상대는 무작정 내 입술 위로 차가운 것을 적셨다. 입을 벌리고 그것을 삼키자 해장약인 듯한 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가슴이 확 뚫리면서 불편했던 속이 왈칵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순간 몸이 휘청, 앞으로 숙여졌다.
“우욱....우웩-!”
속을 게워내고 있는데, 누군가는 등을 두드리고 또 누군가는 ‘씨발’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요람처럼 두둥실 흔들리던 자리가 갑자기 급하게 덜컹거리며 섰다. 나는 숙이고 있던 머리를 앞의 무언가에 부딪혔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속이 뒤틀리는 느낌에 눈을 떴을 때는 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 집까지는 기어들어왔구나, 안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집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래도 가정집 같지는 않고, 원룸형의 모텔이었다. 아픈 머리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우선 미니 냉장고 안을 뒤져 생수를 들이켰다. 아직 술이 덜 깬 건지, 들이부은 꼴이 되었다. 목을 타고 흐른 물이 가슴팍을 거쳐 속옷 위까지 흘러내렸다. 신경질적으로 맨 가슴을 닦아내다가, 문득 그러고 보니 가슴이 서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
속옷 차림이었다. 팬티 하나 달랑 걸친 스스로의 형편없는 몸에 무언가를 걸친 것을 찾다가 내 옷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허둥대며 이불을 들추고 1인용 소파 위의 쿠션을 들추어 보다가 문득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살금살금 걸어가 욕실 문을 확 열어젖혔다.
“아....”
“...미..미안, 미안, 정말 미안!”
그리고 다시 급하게 닫았다. 욕실 안에는 선희가 슬립 차림으로 쪼그려 앉아 내 것으로 보이는 것과 선희 자신의 옷가지를 세숫비누로 빨고 있었다.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잠시 후 욕실 안에서 ‘나 지금 나가’ 하고 선희가 미리 언질을 주었다. 나는 팬티만 입고 잠시 복도로 나가있어야 하나, 허둥대다가 그냥 침실 위로 기어들어가 이불로 몸을 감싼 채 벽을 향해 앉아 있었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야, 너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내가 무슨... 어린 남자 성희롱하는 되게 나쁜 누님 같잖아.”
“고..고개 돌려도 돼?”
“응.”
설마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걸까, 걱정하며 슬쩍 고개를 돌리니 베스가운을 입고 냉장고 안을 뒤져 음료를 꺼내는 선희가 보였다. 그래도 난 아직 속옷 차림이니 여전히 이불을 어깨에 덮은 채 자세를 바로 앉자 선희가 그 꼴을 보며 황당한 듯 웃었다. 나는 민망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따라 웃기도 뭣해 그냥 이불 아래에 유일하게 드러난 오른쪽 손으로 생수병을 든 채 물을 홀짝였다.
“아- 이것 참, 아무리 나라도 이런 상황은 좀 민망하네. 아..하하하..하...”
마찬가지인지 선희가 어설프게 웃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선 남자가 좀 대범해질 필요가 있을 텐데, 어쩐지 나는 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고만 있었다. 반쪽짜리 남자라서 미안, 하고 농담이라도 걸어볼까 생각하다가, 그건 아무래도 상황을 더 안 좋은 쪽으로 몰고 갈 것 같아 그만두었다. 나는 그저 어서 집으로 돌아가 혼자 있고 싶었다. 아주 질펀한 게이 포르노를 보거나 유치해서 모니터를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의 저질 삼류 코미디영화를 보고 싶었다.
“저기... 미안. 정말 미안하다. 내가... 미쳤었나 보다. 이런 추태나 부리고... 정말 미안.”
물을 마셔도, 마셔도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봄은 지났는데, 이제 곧 태풍이 온다는데, 내 몸속은 지독한 황사에 시달리는 듯했다. 입술의 각질을 이로 물어뜯으며 버석거리고 뻑뻑한 눈을 들어 선희를 쳐다보자, 선희는 입을 벌린 채 웃고 있으면서도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처럼 눈을 깜빡거리며 정지화면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또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 숙인 나를 달래었다.
“아니, 해진아. 네가 그러면... 내가 더 민망하다, 야. 남자가 뭘.. 이런 일로 그렇게 기가 죽어서는...”
“응, 그래도 미안...”
옷걸이에 걸어놓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모텔 측에 세탁과 건조를 맡기면 될 텐데, 우리는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하는 머저리들처럼 물방울이 튀는 소리를 들으며 날이 밝을 때까지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 * *
찰칵, 하고 문고리가 돌아갔다. 누군가 들어와 다시 문을 닫고 구두를 벗는 것까지 느껴졌지만 나는 침대 위에서 웅크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원한 향수냄새가 났다.
“일어나. 설마 하루 종일 이러고 있었던 건 아니지? ....일어나. 밥 먹으러 가자.”
그래도 나는 꼼짝하지 않았다. 반항하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고 시위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오후까지 게이 포르노를 보며 내 외로운 페니스를 달래주느라 지쳤기 때문이었다. 배고프지 않았다. 계속 자고 싶을 뿐이었다.
이불을 더 끌어당겨 몸을 웅크리자 그가 결국 이불을 젖혔다. 몇 번의 사정으로 질퍽해진 사타구니가 눈에 띄었으리라. 꿉꿉한 냄새는 내게도 지독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난 꽤 절륜하구나, 생각하며 실없이 웃었다. 위에서 그의 표정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태준은 이불을 신경질적으로 끌어당기곤 그것을 가지고 쿵쾅대며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 후 세탁기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다시 침대로 다가온 태준이 양말을 벗고 소매를 걷었다. 그리고 몸이 들렸다. 베란다 밖으로 던져버리는 건 아닐까 겁을 먹고 그의 어깨에 꽉 매달렸지만, 향한 곳은 욕실이었다.
발가벗은 채여서 따로 뭔가를 더 벗길 필요는 없었다. 차가운 욕실 타일에 발바닥이 닫자마자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부어졌다. 단지, 차가워서 몸을 비틀었는데 도망가려는 줄 알았는지 금방 제압당했다. 그 후로는 그가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었다. 머리를 감겨주고 양치질을 해주었다. 그리고 특히 사타구니를 중심으로 샤워볼이 아플 정도로 비벼졌다. 제법 호강한다는 생각이 들어 또 피식 웃음이 났다. 이렇게 부려먹으니까, 참 좋다. 생각하면서.
나는 결국 아직 마르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털며 그의 벤츠에 타야 했다. 그제야 배가 고팠다. 음악을 틀지 않아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잠시 후 그가 참기 힘들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민망해서, 나도 따라 웃었다. 그가 속도를 좀 더 올렸다. 그리고 우리는 한정식 집에서 한 사람당 2인분씩을 먹어치웠다. 그도 꽤 배가 고팠는지, 식사를 하면서 우리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디저트만은 좀 여유 있게 먹고 싶었는데, 그는 커피 전문점에서 테이크아웃 시키곤 내게 두 개의 컵을 쥐게 만들곤 그대로 어디론가 또 차를 몰았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커피’하고 말할 때마다 잽싸게 그의 손에 종이컵을 쥐어주었다. 여름의 늦은 저녁노을은 온종일 작열하다가 아직 다 식지 않은 열기를 그대로 반영하듯 지평선 위에서 뜨겁게 타올랐다. 태준은 눈이 부신 듯 햇빛가리개를 내렸다. 나는, 차라리 눈이 멀고 싶었다.
익숙한 길을 그는 몇 시간이고 달렸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청초호였다. 호텔에는 들어가지 않으려는지 차는 주차장이 아니라 호수를 바라보는 둔치에 세웠다. 그가 말없이 혼자 내렸다. 한참을 차 안에서 내리지 않자 그가 혼자 걷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성격을 잘 아니까, 얌전히 내렸다. 내가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제자리에 서 있던 태준은 옆에 와 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정해진, 너 혹시 유부남한테 관심 없어?”
계속 아무 말 않다가 뜬금없이,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태연한 말투에 나는 내가 제대로 들었는지 고민해야 했다. 잠시 후 그가 대답을 재촉하듯 ‘응?’하고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없는데요. 아니, 싫어해요, 유부남.”
“왜?”
“...질척질척하니까. 귀찮고.”
“그런가...”
“그렇죠.”
그는 별로 내 대답에 신경 쓰지 않는 듯 내가 했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리곤 청초호로 고개를 돌렸다. 완전한 어둠이 내려, 그 언젠가처럼 둥근 달과 그것을 비추고 있는 호수의 물결만이 온 세상인 듯 반짝였다. 나는 어쩐지 그것 또한 눈이 부신 듯 했다. 눈앞을 손으로 가린 채 눈을 찌푸리자 태준이 따라했다.
“너같이 고지식한 애가 어떻게 게이가 됐지?”
“태준씨처럼 인간미 없는 사람이 어떻게 양성애자가 됐죠?”
“정해진, 그러고 보니 이름도 여자 같은데 넌 왜 여자가 아니지?”
“......”
“21세기도 됐는데, 사람이 달을 밟은 지도 벌써 한참이나 지났는데, 왜 남자는 임신을 못하지? 과학이 뭐 이따위지?”
“......”
“하긴, 만약에 너하고 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 하체는 방정맞은 주제에 머리는 고지식한 애가 나올 거다. 그건 참 고달픈 인생이 될 거야.”
“...이태백이라는 중국 시인 있잖아요. 그 사람이 술에 취해 뱃놀이를 하다가, 강에 비친 달을 진짜 달이라고 착각해서 손을 뻗어 그걸 가지려다 그만 강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
“응.”
“그거, 거짓말이래요. 그냥, 전설이래요. 사실은 한 평생 떠돌아다니다가, 병들어 친척집에서 앓다가 죽었대요.”
“시시하네.”
“응, 실상은 시시해.”
그가 피식 웃으며 돌멩이 하나를 들어 호수를 향해 던졌다. 커다란 물살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잔물결로 잦아들었다.
“물수제비뜨기, 내기할래?”
“잘 못해요.”
“넌 잘 하는 게 뭐냐? 그럼... 한번 하고 갈래?”
“...싫은데.”
“왜, ‘아직 총각’님인데.”
“......어제 잘 못 잤어요. 피곤해서, 쉬고 싶어.”
“그래, 그럼.”
아이처럼, 혼자 물수제비를 뜨다 말고 그가 손에 들었던 돌멩이를 바닥에 떨어뜨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하고 그가 먼저 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는 벌써 자정이 넘어있었다. 현관문 앞까지 따라오기에 들어오려는 줄 알았는데, 내가 먼저 들어가 신발을 벗자 태준은 열린 현관문을 잡고 그대로 밖에 서 있었다. 아니구나, 생각하며 나도 다시 그의 앞에 마주섰다. 그가 호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집 열쇠를 신발장 위에 올려두었다.
“정해진.”
네, 입을 열고 분명 대답을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밥 좀 많이 먹어. 너 말라서, 안을 때 별로였어.”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연애나 할까’는 말처럼 가볍게 ‘이제 헤어져 볼까’하고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다음주, 편집부에는 새로운 팀장이 왔다. 김태준은 태인기업의 전무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