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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디자인을 맡고 있던 전 실장이 퇴사함으로써 새로운 디자이너 채용 광고를 냈다. 이제는 어엿한 입사 3년차인데 여전히 막내라서 잡다한 심부름을 도맡아하고 있던 나는 막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로 괜히 설레었다. 인사 관리를 최종적으로 결정짓는 태준에게 은근슬쩍 나보다 한 살이라도 어린 사람을 뽑아달라고 부탁했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누구 좋으라고’였다.
워낙 직원 수가 적다보니 한 사람이 나가고 또 한 사람이 들어오는 데에도 출판사 전체가 굉장히 들뜬 분위기였다. 신입의 첫 출근 예정일, 사람들의 아침 인사는 ‘왔어?’였다. 그리고 드디어 출근 시간 정각, 신입답게 조금은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사람은,
“오늘부터 출근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강선희라고 합니다. ....어? 정해진, 정해진 맞지?”
중학교 동창이었다.
들뜰 분위기에서 술잔이 오고갔다. 나는 태준의 눈치를 보며 술 한 모금과 물 한 모금을 번갈아 마셔야 했다. 공동 막내가 된 선희는 신입으로서 엄연히 치러야 할 ‘한 잔씩 받기’를 무난히 통과하고 있었다.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는 직원들은 그런 선희가 마음에 쏙 든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괜찮겠어? 난 그냥 조금만 따라줄게.”
꽤 술이 센 지 가장 마지막 순서인 내 앞까지 와서도 조금 발그레해졌을 뿐 달리 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여잔데 하는 생각에 나름 배려해 주려는데, 선희는 씽긋 내가 든 술병을 꾹 잡아 막았다.
“됐어. 괜찮아. 꽉꽉 채워.”
“너 되게... 화끈하다.”
“응, 핫 앤 쿨, 그게 내 인생의 모토다.”
그리곤 내가 잔에 걸쳐질 만큼 아슬아슬하게 따라준 술을 한꺼번에 털어 넣은 뒤 잔을 테이블 위로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직원들이 ‘멋지다’ ‘최고다’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나도 가만있기는 멋쩍어 따라서 ‘와아’ 감탄하며 손뼉을 쳐댔다. 멀리 앉은 태준이 그런 나를 보며 비웃었다. 여자도 저 정도 마시는데 넌 뭐냐는 뜻이었다. 욱하는 마음에 옆에서 최선배가 돌리고 있는 폭탄주를 덥썩 낚아채 들이키려는데, 순간 눈이 마주친 태준이 비웃은 주제에 무시무시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주량을 넘겼다간 여지없이 필름이 끊겨버리는데, 태준의 말로는 그 이후로 나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추태를 부린다는 것이었다. 결국 은근슬쩍 다시 잔을 내려놓으려는데 이미 잔을 빼앗긴 최선배가 다시 받을 순 없다며 ‘마셔라’를 강요했다. 여기저기서 ‘마셔라, 마셔라’ 구호처럼 울려 퍼지자 에라 모르겠다, 다시 잔을 드는데 소란한 가운데 오히려 낮은 목소리가 ‘강선희씨’하고 불렀다. 순식간에 소란이 잦아들었고, 선희는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술은 그만하면 합격이고, 노래는 좀 합니까? 정해진씨가 춤을 되게 잘 춘다는데, 어때요, 합동공연.”
“팀장님!”
“난 찬성! 보고 싶다, 막내들 합동공연!”
“나도 찬성!”
여기저기서 졸지에 ‘나도 보고 싶다’하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도리질을 하며 ‘팀장님’을 애절하게 불렀지만 그는 모른 척 여유롭게 선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이번엔 애절하게 선희를 바라보았지만
“예, 제가 음주가무에 강합니다. 거기다 동창이 뒤에서 백댄서 해주면 더 강해집니다.”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날 저녁 나는 막내에서 탈피하지도 못한 설움과 함께 최 선배에게 강요당해 여자 아이돌 그룹의 춤까지 춰야 했다. 태준은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나를 보며 미친 듯이 웃었다.
방향이 같아 함께 택시에 탄 선희는 쉬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함지박만한 웃음이 계속 얼굴 가득 걸려 있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라면 덜 창피할 텐데, 생각하며 나는 그리 즐겁지만은 않은 마음으로 옆자리의 선희에게 이온음료를 건네주었다.
“응, 고맙다. 해진아, 나 오늘 되게 기분 좋다.”
“다행이네. 사람들도 다 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라. 원래 신입 들어오면 나이에 상관없이 막 부려먹는데, 넌 고생 덜 하겠다.”
“흐흥. 분위기도 좋고, 너도 만났고.”
“응, 나도 반갑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미지근한 초여름 바람이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아무래도 취기가 오르는지 선희는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의자 뒤로 젖히며 실없이 웃었다.
“내가 언젠가 너 만나면 죽도록 패줘야지 생각했거든. 근데 막상 만나니까, 또 좋다.”
착하게만 살았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말똥말똥 쳐다보자, 시선을 느꼈는지 선희가 실눈을 떴다.
“뭐야, 기억 못해? 너, 열네 살 소녀의 순정을 짓밟았잖아.”
순정, 이라는 단어가 낯 뜨겁게 들렸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다고, 그것도 소녀를 상대로. 운전기사가 룸미러로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차창을 좀 더 내리며 바람을 얼굴로 맞았다. 기억해 보자. 열네 살의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더라.
“....아.”
“기억났어?”
솔직히, 기억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 즈음의 기억이라면 거의 텅 비어있다. 내가 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였고, 하루 종일 멍하게 지내던 때였다. 성적은 바닥으로 치달을 때였고, 말도 안 해서 별명은 ‘벙어리’였다. 친구도 없었고, 그래서 솔직히 선희가 먼저 나를 알아보지 않았다면 그녀 또한 기억에 거의 없는 존재였다.
“그때 한참 인기 있던 순정만화가 있었는데, 거기 남자 주인공이 괜히 우울한 척 하고 혼자 지내고 말도 없이 폼 잡고 그랬거든, 근데 유치하게 내가 그런 타입을 좋아했네? 왜, 네가 딱 그런 타입이었잖아. 그래서 혼자 두근두근 하다가 겨울방학 시작하기 전에 좋아한다고 말 꺼냈는데 이 싸가지 없는 자식이 엄청 째려보면서 ‘좀 비켜’ 이러는 게 아니냐. 성격대로라면 따귀를 날렸을 텐데, 그게 첫 실연이라서 그때 나 좀, 울었다. 어떠냐, 정해진. 열네 살 소녀의 순정, 어쩔 거야.”
“아... 미안. 그때 내가 좀... 사춘기여서...”
“으하하하! 그런데 순정만화 주인공이 그런 춤을 추다니. 됐다, 됐어. 충분히 보상 받았어.”
택시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선희는 박장대소를 했다. 같이 웃지 않으면 더 창피할 것 같아 나도 어설프게 ‘아, 하..하...’ 따라 웃었다.
* * *
그 즈음, 며칠 동안 태준이 모든 업무를 기획부의 팀장에게 맡기고 자리를 비웠다. 소문으로는 그가 곧 태인 기업의 전무로 들어가기 위해 이사회를 통합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전화도 잘 되지 않아 나는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토요일 오후까지 연락이 없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로부터 터무니없을 만큼 짧은 문자가 왔다.
-오전 10시까지 대기하고 있을 것.-
오랜만에 늦잠이나 실컷 자려고 했는데, 투덜대면서도, 내심 반가웠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10시, 정확하게 그가 벨을 눌렀다. 평소와는 달리 편안한 복장이기에 어딘가 달라 보인다고 생각했다. 지독한 자동차 마니아인 그가 벌써 몇 번째 바꾼 신형 벤츠에 올라타는 동안 태준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런 걸 서민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돈지랄.”
“아네.”
“지금 네가 하는 걸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내가 뭘요?”
“잔소리.”
“뭐요?”
눈을 삐죽 올려 몇 마디 더 쏘아붙여주려는데 급하게 출발한 탓에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그리고 그는 운전하는 내내 굉장히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 가냐고 물었지만, 음악 소리에 내 목소리는 힘도 없이 묻혀버렸다. 그 기회에, 하고 싶었던 잔소리를 마음껏 다 퍼부었다. 간간히 눈치를 봤지만, 그는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시무룩해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두어 시간 정도 달려 완전한 초원 지대로 나갔다. 드넓게 펼쳐진 초원 지대를 보며 처음엔 골프라도 치려고 하나, 생각했는데 막상 주차시킨 곳은 승마 클럽이었다. 몇 번인가 함께 말 타러 가자기에 농담으로 여기고 무시해 버렸는데, 진짜 말이었을 줄이야. 골프라도 충분히 기가 죽을 텐데, 이 분야는 정말 완전히 문외한이라 괜히 심술이 났다.
“이런 것도 돈지랄이라고 하는 거예요. 뭐야, 귀족도 아니고 웬 말?”
“너 지금 승마 애호인들 모욕한 거 알아? 요즘엔 승마도 많이 대중화 됐어. 다른 스포츠보다 비용이 조금 더 들어서 그렇지. 배워볼래?”
“싫어요.”
“떨어질까봐 무서워서?”
그렇게 얄미운 소리를 늘어놓더니 그는 정말 나를 내버려두곤 어디론가 혼자 걸어가더니 곧 승마복과 함께 헬멧과 부츠까지 갖추곤 나왔다. 잠시 후 교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긴 갈기가 멋들어진 흑갈색의 말을 끌고 나왔다. 태준이 웃으며 교관으로부터 말고삐를 건네받으며 흑마의 단단한 등을 쓰다듬었다.
“건강해 보이네요.”
“예, 아직 한창 때니까요. 말굽 손질도 모두 되어 있습니다. 바로 기승하셔도 됩니다.”
태준은 말의 등과 길쭉한 얼굴을 몇 번 더 쓰다듬어주고 나선 훌쩍 올라탔다. 그리고 타박타박 소리를 내며 일부러 내 주위를 구보 시켰다. 다리 하나가 내 키만 한 흑마에 기가 죽어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못하고 있자 태준이 비웃으며 ‘저리 가 있어’하고 고갯짓을 했다. 교관이 나를 관람석으로 이끌었다.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본 태준은 마장 내에서 몇 바퀴 구보 시킨 후 바깥으로 나가 외승을 시작했다.
구보에서 속보로 나아가더니, 점점 속도가 높아갔다. 방향을 전환할 때마다 내 몸도 따라 기우뚱 기울었다. 헬멧 아래 그의 얼굴과 눈을 맞추려 했지만 말은 너무 빨리 달렸고, 태준 또한 그저 입을 꾹 다물고만 있을 뿐 달리 어떤 표정도 없어 보였다. 타닥타닥 하는 말발굽소리가 가슴을 두드렸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을 꽉 주고 있었는지 어느새 등허리로 땀이 주룩 흘렀다. 나는 문득 입을 꾹 다문 채 달리고 있는 태준을 바라보며 그도, 그리고 말도 참 덥겠다고 생각했다. 멀리 산등성이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초원의 작은 풀들이 일제히 눕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속에서 그가 흘리는 땀 냄새가 맡아지는 듯했다.
한동안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혼자 열심히 달리다 말고삐를 조절하며 서서히 속도를 줄인 태준은 이제 완전한 구보를 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 와서 말에서 내렸다.
“이리 와서 만져 봐.”
“싫어.”
“물까봐 무서워서? 괜찮아, 안 물어. 이리 와 봐.”
그래놓곤 말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너 쟤 물면 안 돼’ 하고 내가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가까이 가지 않으면 진짜 겁이 나서 그렇다고 여길까봐 나는 주춤주춤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태준은 내 손목을 덥썩 잡고는 내 손을 흑마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다. 으아아아, 소리 지르며 뒤로 빼려하자 태준은 쉿, 쉿 하고 주의를 주었다.
“소리 지르면 안 돼. 얘들은 예민해서 네가 겁먹으면 같이 무서워해. 예쁘다고 쓰다듬어줘.”
“차...착하다...”
겁쟁이처럼 보이긴 싫어서 부들부들 떨면서도 팔을 뻗어 억지로 말의 이마를 쓰다듬자 태준이 웃으며 ‘그래, 그렇게’ 하며 독려해주었다. 푸르릉, 하고 말이 콧김을 내뿜었다.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자 역시 비웃었다. 용기를 내어 다시 손을 뻗어 콧등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태준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이 나빠 머리를 흔들자 웃으며 말의 콧등을 함께 쓰다듬었다.
“이름은 와일드 필드야. 이렇게 사람 손에서 관리되고 평소엔 묶여있지만 이름만은 거친 들판을 달리게 하고 싶어서. 경주마 시절엔 전적 27승 1무 1패. 현재 씨수말로서는 국내 랭킹 3위야.”
“씨수말..?”
“흔히 종마라고 하지. 씨를 뿌리기 위해 길러지는 우수한 종자의 말.”
“뭐야, 씨를 뿌리다니, 그런 것도 존재해요? 징그러워.”
종마, 전혀 에로틱하지 않은 질척질척한 에로비디오를 보고 난 후에 역겨워지는 기분처럼 불쾌한 단어였다. 인상을 찌푸리자 태준은 피식 웃었다.
“그게 동물의 세계야. 수십 마리로 이루어진 한 무리에서 교미를 할 수 있는 건 단 한 마리의 종마뿐이지. 다른 수컷 말들은 모두 거세당하고, 이렇게 갈기를 기를 수 있는 것도 종마뿐이야. 대신 일반 말들 수명이 30년 정도인데 비해 종마는 18년 정도로 짧아. 여름이면 하루에 서너 마리씩의 암말과 교미하는 걸 일삼아 하지. 그래서 이 계절엔 종마를 탈 수도 없어. 며칠 전부터 쉬게 해 줘서, 오늘은 이 녀석한테도 휴일 같을 거야.”
태준이 씁쓸하게 웃으며 흑마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나는 동굴처럼 깊고 둥글게 박힌 흑마의 착한 눈을 바라보다가 태준의 아련한 빛을 띠는 눈을 번갈아 보았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이 눈을 찌르는지 자꾸만 깜빡이는 것을, 말의 콧등을 쓰다듬던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올려주었다. 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맙다’ 한 마디 하곤 다시 말의 갈기를 빗질해 주었다.
“이 녀석, 가질래? .....올해 네 생일 때, 바빠서 잘 챙겨주지도 못했잖아.”
“...또 놀리는 거죠?”
“뭐?”
“애마부인, 그거 얘기하려는 거 아니에요?”
경계하듯 말하자 태준이 ‘뭐?’하고 되묻고는, 큰 소리 내지 말라 해 놓고선 ‘와하하’ 크게 웃었다. 미친 게 아닐까, 얼른 주위를 둘러보자 다행히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눈가를 문지르며 겨우 웃음을 그친 태준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때렸다.
“세상에, 정해진. 착각도 유분수지. 애마부인? 애마부인이라... 참나. 정해진씨, 네가 그렇게 에로틱해? 아직도 박자 못 맞추고 낑낑대다가 울기만 하는 정해진이?”
무슨 얘길 하는지 알 것 같아 급히 그의 입을 막으려는데, 그가 얼굴을 더 뒤로 빼면서 야설을 지껄였다.
“미안한데, 너 잘 못해.”
능력에 대해 반박 당하면 분해진다. 설령 그게 어떤 류의 능력이든 간에.
“거짓말. 난 듣는 귀 없는 줄 알아? 할 때마다 온갖 미사여구는 다 갖다 붙이는 주제에. 절대 한 번으로 끝난 적도 없는 주제에.”
“그거야 네가 안 놔주니까.”
아래를, 하고 그가 속삭였다. 귓구멍에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얼른 귀를 막고 뒤로 물러서자 그가 역시 질 나쁜 미소를 흘렸다. 또 졌다는 생각에 씩씩 거리며 말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뒤돌아 빠르게 걷는데, 갑자기 몸이 뒤로 휘청 기울었다. 그가 허리를 붙잡고 끌어당긴 것이었다. 어깨 위로 그가 턱을 얹었다. 어깨를 흔들려는데 그가 허리를 아프게 꽉 조였다. ‘아파’ 투덜대자 조금 힘을 뺐다.
“줄게, 받아. 주고 싶어. 회원권도 같이 끊어줄 테니까 한가할 때 와서 레슨도 받고, 이 녀석도 좀 돌봐줘.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해.”
“...이런 생일선물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돈지랄.”
“응, 아네.”
그가 소리 없이 웃어서, 어깨가 간질거렸다. 태준은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곤 내 셔츠의 네크라인을 끌어내린 뒤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뒤쪽에서 그의, 아니, 나의 흑마가 훅,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승마장 근처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해질녘에서야 서울로 돌아왔다. 일요일 저녁답게 도로는 차라리 걷는 게 더 빠를 만큼 꽉꽉 막혀 있었다. 평소 성격이 급해 속도를 올리지 못하면 괜히 버럭 화를 내곤 하는 태준을 생각해 오히려 내가 먼저 화를 내 버렸더니, 어쩐 일인지 그는 내게 짜증내지 말라며 조용히 타일렀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더니, 나는 그의 건강을 염려했다.
-RRRR..
둘 다 아무런 음악 없이 가장 무난한 벨소리를 선택한 지라 언제나 휴대폰이 울리면 동시에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이번엔 내 것이었다. 액정을 확인한 후 그를 향해 ‘쉿’하고 말을 걸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는 누군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일요일인데 집에 없네?
“에...일요일이니까 집에 없죠. 약속 있어서 나와 있어요.”
-여자친구?
“예? 아..아니요.”
손가락을 움직여 볼륨버튼을 내렸다. 아무래도 들렸는지, 그가 흘깃 쳐다보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요지는, 아무래도 반찬 떨어질 때가 다 된 것 같아 밑반찬을 들고 오셨다는 것이었다. 열쇠가 있으니 평소처럼 그냥 냉장고 안에 넣어두고 가시면 될 일이었지만, 한동안 집에 너무 들르지 않아 섭섭하신 듯했다.
“저기, 다음 횡단보도에서 인도 쪽으로 좀 붙여줘요. 내려야겠어.”
전화를 끊고 눈치를 보며 말하자 그가 눈가를 찡그리며 ‘왜’하고 물었다.
“아무래도 잠깐 부모님 댁에 들러야 할 것 같아서요. 요즘 계속 간간히 전화만 하고 들른 지 뜸했거든요.”
“태워다 줄게.”
“에..예? 아니에요, 피곤할 텐데 그냥 들어가요. 지하철 타고 가면 금방인데. 아니, 택시 타고 갈게.”
아무래도 화가 난 것 같아 입술을 잘근 물며 중얼중얼 변명을 했는데도, 그는 여전히 미간 사이에 주름을 만든 채 또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을 돌리며 딴짓을 하다 멍청히 볼 것 없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그가 ‘정해진’ 하고 낮게 불렀다.
“그냥... 들켜도 그냥, 말하면 안 돼? 그냥, 직장 상사라고 하면 되잖아. 아니, 실제로 그렇잖아 우리. 너랑 나, 그냥 상사랑 직원 맞잖아. 근데 같이 있는 것 좀 보이면 안 돼? 이렇게 될 거 뻔히 알면서 여기까지 왔잖아. 왜 더 끝까지는 못 가!”
단단히 화가 난 듯, 출판사, 그것도 편집부의 팀장답지 않게 엉망으로 나오는 대로 쏟아 부었다. 그가 쏟아내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나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정이야, 어차피 둘 다 마찬가지 아닌가. 누구에게라도 보일까봐 노심초사하고, 직장 내에서는 누구 보거나 듣는 사람이 없어도 서로 깍듯하게 ‘팀장님’과 ‘정해진씨’라 호칭하고, 그 흔한 커플반지 하나 나눠 끼지 못하는 것, 어차피 서로 같은 의미 아닌가.
내가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그는 씩씩거리며 같은 말은 되풀이 하다가 갑자기 클랙슨을 주먹으로 쾅 눌러 쳤다. 빠앙- 하는 신경질적인 경적소리가 앞차와 뒤차까지 도미노처럼 퍼져 거리를 광광 울렸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편의점을 끼고 골목 안으로까지 들어가려는 것을 막아 세웠다. 그가 뭐라든, 아무래도 골목 안까지 들어가는 건 불안했다. 그도 아무 말 없이 차를 세웠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뭔가를 말해야하는데, 고민했다. 문을 열어놓은 채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리지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가세요’ 한 마디 하고 나도 그냥 문을 닫아 버렸다.
골목 안으로 걷다보니 차를 돌리는지 바퀴가 아스팔트와 마찰하는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몇 걸음 더 걷는데, 옴푹 파인 골목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띄었다. 걸인, 노인이었다. 처음 마주쳤을 때 이후로 내가 부모님 집에 들를 때마다 그는 언제나 같은 곳에 웅크린 채 서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상한 기류를 느꼈다. 공포보다는 익숙했고, 동정보다는 안타까웠으며, 안심보다는 두려웠다.
“저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지갑에서 차비 정도만 남기고 모두, 얼마만이라도 쥐어주곤 했다. 그저, 그러고 싶었고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인기척이 나자 화들짝 놀라 몸을 피하려다 내 얼굴을 확인하곤 또 다시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지갑을 꺼내어 차비를 남기고 나머지 몇 만원을 꺼내려는 찰나, 갑자기 뒤에서 강한 불빛이 비쳤다.
손으로 눈앞을 가린 채 돌아보자, 태준의 벤츠 헤드라이트였다. 모든 전조등을 끈 채 따라오다가 내가 지갑을 꺼내는 것을 보고 혹 위험한 일인가 싶어 갑작스레 헤드라이트를 켠 것이었다. 노인은 불빛에 겁을 먹은 듯 잔뜩 웅크린 채 몸을 떨었다. 태준이 무서운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야?”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긴. 방금 지갑 꺼냈잖아. 이 사람, 뭐야?”
태준이 위협적으로 다가오자 노인은 더욱 심하게 몸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 소주냄새가 났다. 나는 얼른 그를 일으켜 지폐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어주곤 다른 골목으로 밀었다. ‘가세요’ 말이 떨어지자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뒤를 힐끗거리며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보다가 태준이 갑자기 내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아프다고 투덜거렸지만, 힘을 빼지 않았다.
“뭐야, 너. 방금 뭐 한 거야?”
“그냥.. 불쌍한 사람이잖아요. 밥이라도 사 먹으라고...”
“정해진. 네가 무슨 테레사 수녀야? 사회봉사단체 회장이야? 저런 사람들, 그냥 불쌍하기만 한 사람인 줄 알아? 앵벌이 뒤에 폭력배 있는 거, 몰라서 돈 주고 돌려보내? 이런 거 한두 번 맛 들이면, 나중에 네 지갑에 돈 없어서 안 주면 무슨 짓 할지 생각 못해? 너 바보야? 네 앞가림도 못하면서 왜 남 일이나 챙기고 다녀? 왜 정작 네 일은... 씨발.”
갑작스런 욕설에 아연해졌다. 이 정도면, 나도 충분히 화가 났다. 그런데, 눈물이 났다.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한 기분이었다. 분한 마음에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도 자존심 상해 숨을 고르며 눈을 깜빡였다.
“왜.. 왜 그래요? 뭐야, 성격 정말 더럽잖아. 아니, 그거야 원래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왜 이러냐고. 오늘 하루 나한테 몇 번이나 천국 지옥 오가게 한 줄 알아요? 피..필요하지도 않은 말이나 가지라고.. 오.. 온갖 호사는 다 누리게 하다가, 갑자기 이게 뭐야... 뭐..뭐야..”
“하... 들어가자. 저기야? 걸어, 대문 앞까지 데려다 줄게.”
한숨을 내쉬곤 저 혼자 감정을 다스린 듯한 태준이 무턱대로 내 팔을 이끌었다. 그 힘에 몇 걸음 끌려가다 나는 거칠게 팔을 휘둘러 그의 손을 떼어냈다.
“냅둬요. 내 앞가림은 내가 해.”
자기가 먼저 화냈으면서, 무턱대고 소리 지르고 욕도 했으면서, 자존심 상하게 바보 취급이나 했으면서, 태준은 외려 자기가 상처 받은 듯한 얼굴로 내 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는 모른 척하고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골목 끝에 있는 집의 대문 안으로 불쑥 들어가자 그제야 그가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에 등을 기댄 채 기다리는데, 기다려도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냥 초인종을 누르려다 바닥에 주저앉아 휴대폰을 꺼내는데, 갑자기 벨이 울렸다. 화들짝 놀라 액정을 확인하지도 않고 얼른 폴더를 열었다.
“......”
-정해진.
“......”
-...미안하다. 너한테 화낸 거 아니야. 너한테 욕한 것도 아니야.
“......”
-해진아.
“......”
-내가 잘못했어, 응?
“...화.. 화내지 말고 운전 함부로 하지 말고 들어가요.”
-..응. 너 먼저 들어가면.
“난 들어왔어.”
-너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
그제야, 설움과 안심에 눈물이 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