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8화 (8/35)

-08-

“아침저녁으론 쌀쌀하다, 옷 든든히 입고 다녀.”

“예, 걱정 마세요.”

“반찬 떨어지면 사 먹지 말고 바로 들러. 아니면 전화해, 낮에 내가 가져다 둘 테니까. 응?”

“예, 그럴게요. 얼른 들어가세요, 얼른요.”

마당까지 따라 나오는 부모님을 억지로 밀어 들여보냈다. 거실 창가에서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보이기까지 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오래된 집의 낡은 대문답게 잔뜩 녹이 슨 철제 대문을 열었다. 한밤중에 울려 퍼지는 끼이익, 아귀가 틀린 것들에게서 나는 소리가 어쩐지 으스스하게 들렸다.

밖으로 나와 제대로 문이 닫혔는지 확인까지 한 후 몸을 돌렸다. 시계를 보니 지하철 끊기는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택시를 타지 않으려면 빨리 걸어야 했다. 쌀쌀한 공기에 하얀 입김을 만들어 훅, 숨을 내쉰 뒤 걸음을 빨리하는데 갑자기 꺾어진 골목에서 무언가가 휙, 지나갔다. 고양이나 바람에 날리는 봉지라고 생각하기에는 커다란 그림자였다. 흡, 숨을 들이키며 조심스레 옴푹 파인 곳을 들여다보자, 사람이었다.

“저... 괜찮으세요?”

잔뜩 웅크린 채 벽을 향해 선 사람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잠자리가 일정치 않은 거리의 사람임이 분명해보였다. 볼과 눈이 움푹 들어간 얼굴의 노인은 불안한 듯 내 얼굴 너머를 흔들리는 시선으로 둘러보다가 문득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부끄러운 듯, 미안한 듯, 쑥스러운 듯, 처녀가 아양을 떨 듯, 어깨를 움츠리며 배시시 웃었다. 순간, 어디선가 악취가 풍겼다. 나는 한걸음 뒤로 주춤 물러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여긴 왜... 주무실 곳이 필요하면, 이 동네엔 그런 보호시설이 없어요.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데... 경찰을 불러드릴까요? 태워달라고 하면...”

문득, 나는 노인의 말간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은 여전히 내 얼굴을 힐끗거리며 수줍은 듯 배시시 웃고만 있었다. 순간, 끔찍한 소름이 온 몸을 뒤덮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득한 공간에 혼자 둥실 떠있는 느낌이 들었다. 꿀꺽, 소리가 날 만큼 침을 삼킨 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지갑에는 만 원짜리 일곱 장이 들어있었다. 시계를 다시 보니, 아무래도 지하철을 타는 것은 포기해야 할 듯 했다.

“이거 가지세요.”

나는 만원을 남겨두고 나머지 여섯 장의 지폐를 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앙상한 두 손으로 그것을 잽싸게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리고 어깨를 떨며 종종 걸음으로 골목을 벗어났다. 택시를 타려면 큰 길로 나가야 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몇 걸음 걷다말고 뒤를 돌아보면, 노인 역시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다 또 황급히 달려가곤 했다.

겨우 빈 택시를 잡아타고 목적지를 알린 후 의자 깊숙이 몸을 뉘었다. 단 몇 분 만에 30년은 나이가 들어버린 것처럼 피로했다. 조용히 눈을 감는데, 호주머니 안에서 휴대폰이 진동으로 수신을 알렸다. 그냥 무시할까 하다가 이 시간에 전화하는 사람이라면 태준일 거라는 생각에 액정을 확인해보니, 역시 그였다.

“네.”

-어디야?

“부모님 집에서 저녁 먹고 이제 들어가는 길이요.”

-피곤해? 목소리가 왜 그래?

“예, 조금.”

-그런데 왜 굳이 오늘 집에 들렀어. 것도 이렇게 늦게까지.

주말엔 당신 때문이잖아, 하고 타박을 하려다 말았다. 어쨌든 나도 동의한 일이니까. 이래서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건가, 생각하다가 문득 언젠가 그가 이야기한 말이 떠올랐다.

“저기 팀장님.”

-저기 태준씨.

“응, 태준씨. 저기... 유전자가 같아도 전혀 닮지 않은.. 그러니까, 체형이라든가 얼굴 생김새라든가 말이에요, 그런 게 전혀 닮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글쎄, 확실한 건 그럴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거야. 거의. 그 ‘거의’에는 내 경우가 들어있고. 보통 DNA 검출할 때 일치확률을 99.9%로 따지니까 그 ‘거의’가 0.01% 정도겠지.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궁금해?

“그냥...”

-또 그 놈의 그냥.

수화기 너머로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음색에서 까끌까끌한 느낌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도 꽤 피곤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누워서 통화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이면 종종 그렇게 하니까.

“혹시 지금 누워 있어요?”

-정해진, 돗자리 깔아야겠다.

그가 또 소리 없이 웃었다. 딱히 어떤 소리를 내서 크게 웃는 법은 좀처럼 없지만, 숨소리의 떨림이나 목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지금 웃고 있는지, 화가 난건지를 알려주었다. 나는 그를 따라 ‘흐흥’하고 콧소리를 내며 웃다가 문득 룸미러로 택시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얼른 손가락으로 볼륨버튼을 아래로 내려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도록 했다.

거의 매일 얼굴을 보는데도 ‘팀장님과 정해진씨’가 아닌 ‘태준씨와 해진아’ 사이에는 할 말이 많았다. 물론 그 ‘할 말’ 대부분이 아주 하찮고 쓸모없는 이야깃거리였다. 통화를 하며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참, 팀장님. 아니 태준씨, 이번 주말에 저 약속 있어요.”

-...응...

“친구가 제대했거든요. 같이 어디 가자고 해서요.”

-.....응..

“듣고 있어요?

-...응...

“주무세요?”

-......으응...

“안녕히 주무세요.”

-.......

"팀장님."

-......

"야, 김태준."

-.....까분다, 정해진.

"안녕히 주무시라고요."

*    *    *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밤새 시달린 악몽에 머리와 등허리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희철이었다.

“이것 봐라, 아직도 자고 있었냐? 군대는 면제 받았지만 그래도 너도 한 나라의 건장한 싸나인데 인마, 빨리 자고 빨리 일어나서 건강한 신체와 마음을 단련해서 나라의 부국과 강병을 위해 힘써야 하지 않겠냐! 정신 차리고 얼른 씻고 나와!”

군대 갔다 오더니 정신 개조를 확실히 받았구나, 생각하며 나는 녀석에게 등을 떠밀린 채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샤워기 아래에 서자 머리끝에서부터 서서히 적셔지는 온기에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잠시 시달린 악몽의 내용이 무언지 기억해내려고 했지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게 뭐냐?”

“아버지한테 싹싹 빌어서 끌고 나왔지!”

단단히 기대하라던 희철은 정말 어디 먼 곳으로 데려가려는지 덩치가 커다란 SUV까지 끌고 나왔다. 옷을 두툼하게 챙겨 입고 나오라는 경고에 나는 때 아닌 겨울 점퍼까지 챙겨들었다. 뒷좌석에는 정리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던져 넣은 낚시 기구와 버너 등이 있었다. 아연한 표정으로 희철을 바라보자 그는 뻔뻔하게 씨익 웃으면 ‘맞아’하고 답했다.

“설마 밤낚시까지 하자는 건 아니지?”

“네가 진정한 낚시의 묘미를 모르는 구나. 원래 낚시는 밤에 해야 제멋이야. 뒤에 텐트도 다 챙겨왔다.”

“희철아... 근데 나 배고프다.”

“응, 나도. 조금만 기다려. 원래 국도 달리다 나오는 국밥집이 최고다.”

그리고 그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무작정 페달을 밟았다. 나는 어디로 가냐는 질문이 무의미한 것을 깨닫고 조용히 의자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물론, 볼륨을 높인 채 노래를 따라 부르는 녀석 덕분에 결코 잠들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설핏 잠들긴 했는지, 그가 밥 먹고 가자며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면 더 깊이 잠들 뻔 했다.

그리고 희철의 말대로 ‘국도 달리다 나오는 국밥집’에서 ‘최고’인 국밥을 먹었고, 포만감에 다시 의자에 기대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옆에서 잠만 자는 게 미안해 가끔 선잠에 든 채 ‘속도 줄여’하고 참견을 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녀석은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페달을 밟았다. 그러다 한 순간, 쿵! 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몸이 거칠게 튕겨나가려다 안전벨트에 다시 아프게 조여졌다.

“아..... 뭐야...”

“씨발... 야, 괜찮냐?”

꽉 조인 안전벨트를 푸르며 눈을 깜빡여 뜨자, 차체끼리 박은 듯한 작은 승용차가 중앙 차선에서 벗어나 역시 비스듬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국도가 한산해 다른 차량 피해는 없는 듯 했다. 두 차량의 위치상, 아무래도 승용차가 뒤에서 끼어들려다가 마주 오는 차량을 피해 방향을 꺾은 듯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당황한 나는 우선 내 몸 어딘가 이상 있는 곳은 없는가 점검을 했고, 희철에게 괜찮은가 물었고, 차량의 손상이 크게 없는가 걱정했다. 차에서 내려와 살펴보니 다행히 앞 범퍼가 조금 찌그러져 있을 뿐 특별히 크게 손상된 곳은 없는 듯했다. 희철은 아직 짧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앞쪽의 승용차를 향해 걸어갔다.

“화내지 말고 조용히 해결 해.”

“이게 그냥 넘어갈 일이냐?”

“아니, 내 말은...”

“아저씨! 나오세요!”

승용차 안에 있던 중년 남자가 두리번거리다가 우리 둘의 얼굴을 확인하곤 갑자기 인상을 확 구기며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다짜고짜 희철에게 ‘이 자식이’부터 시작해 쌍욕을 퍼부었다. 비싸 보이는 SUV를 박고 내심 겁먹고 나오지 않고 있다가 운전자가 나이 어린 것을 확인하곤 기를 죽이려는 것이 빤히 보였다. 평소엔 두루뭉술한 성격에 순해 보여도 한번 화가 나면 덩칫값을 하는 희철도 지지 않았다. 승용차의 주인은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큰데다 따박따박 말대꾸도 잘하는 희철에게 기가 눌리지 않기 위해 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조용히 희철의 팔을 잡았다.

“그냥 보험회사 부르자.”

“뭐..? 야, 이 정도는 그냥 사고자들끼리 합의 보는 게 나아. 괜히 보험회사 불렀다간 보험료만 더 오르고.. 어휴, 됐다, 넌 그냥 가만있어.”

희철은 내게 조용히 타이르듯 말하곤 등으로 가로막았다. 중년 남자는 내가 ‘보험 회사’ 어쩌고 하자 이번에는 나를 향해 쌍욕을 퍼부었다. 나는 또 희철의 팔을 붙잡고 ‘경찰 부를까?’하고 속삭였다. 희철이 잠시 눈을 가늘게 뜬 채 의아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더 펄펄 뛰었다. 결국 희철은 내 등을 떠밀고 차에 들어가 있도록 했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이던 희철은 결국 타협점을 찾은 듯 휴대폰으로 현장 사진을 찍고, 남자의 명함과 함께 무언가를 건네받고는 돌아왔다. 지갑을 꺼낸 것으로 보아 돈인 것 같았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씩씩거리는 희철은 거칠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급출발에 몸이 다시 안전벨트 안에서 튕겨나갔다 조여졌다. 조용한 음악 CD를 찾아가 클래식 라디오 방송 주파수를 맞추어 틀어주자 운전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기분 풀어. 수리비 받았어?”

“응. 지금 한꺼번에 다 못 받았고, 우선 수리한 뒤에 영수증 보내기로 했다. 너 목 괜찮냐? 아프면 병원 치료비도 받아내야 돼.”

“그러니까 그냥 보험회사 부르지. 저쪽 과실인데.”

“별로 큰 사고도 아닌데 뭐. 서로 피곤하지. 시간도 잡아먹고. 그냥 확 세게 욕하고 싸우면서 해결 보는 게 한국식이잖아. 그래도 나중에 딴소리 할까봐 사진 찍어뒀다.”

“응...”

“...그런데 너 말이다.”

희철이 핸들을 부드럽게 꺾으며 흘깃 쳐다보았다. ‘앞에 봐’ 타박하자 그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 아무 말도 없다가 어깨를 으쓱한 뒤 ‘아니다’하고 가볍게 대꾸했다. 그리고 한 시간 즈음 더 달려, 우리는 허허벌판과 이어지는 조촐한 산맥과 그 앞에 펼쳐진 유려한 강과 방죽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 차를 세워둔 후 짐을 내려 각자 어깨에 들고 멘 후에 좀 더 걸으니 낚시터로 개간한 곳이 나타났다.

땅이 고르지 않은 탓인지 텐트를 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몇 십 분이나 둘이서 낑낑거리다가 나는 낚시터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버는 일꾼을 찾아 대신 일을 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동안 우린 저기 매점에서 라면이나 좀 먹자. 배고파.”

“....분위기 깨는 소리 하지 말고, 그쪽 좀 단단하게 당겨.”

희철은 또 눈을 가늘게 뜬 채 빤히 쳐다보다가 어딘가 화가 난 듯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못을 박았다. 겨우 텐트 치기를 완성하고 나니 벌써 해가 지려하고 있었다. 낮은 산에 걸린 빨간 해가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그 언젠가를 떠올리며 멍하니 서 있자 희철이 어깨를 툭 치며 ‘라면 사러 가자’하고 말했다.

“야, 저거 봐.”

라면봉지와 페트 음료를 끌어안고 자리로 돌아가는 중 희철이 갑자기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며 고갯짓을 했다. 그가 지시한 곳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옮기자, 두 명의 남자가 매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뭘?’하고 되묻기도 전에 나는 희철이 왜 그들을 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앞쪽에서는 보이지 않겠지만, 서로 뒤쪽으로 팔을 둘러 허리를 감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마치 내가 구경거리가 된 것처럼 가슴이 빨리 뛰었다.

“저..저게 뭐.”

“저 사람들, 그런 건가봐. 게이. 호몬가? 하여튼, 남자 둘이 좋아하는 거. 어유, 저게 뭐냐? 낳아주신 부모님한테 부끄럽지도 않은가.”

“......그게 뭐, 마음대로 되겠냐.”

“그래도 이상하잖아, 저런 거.”

코펠을 펼쳐 라면을 끓이면서도 희철은 동성애가 얼마나 자연적인 섭리를 거스르는 일인가를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나는 버너의 파란 불꽃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녀석에게도 커밍아웃을 해야 할 텐데, 참 어려운 일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다 익은 라면을 먼저 한 젓가락 맛 본 희철은 아이처럼 좋아하며 내게도 휴대용 수저를 건네주었다. 매콤한 라면 국물을 들이키며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찡긋 감았다.

“있잖냐, 정해진.”

수풀 속에서 귀뚜라미가 쉬지도 않고 울고 있었다. 완전히 캄캄해진 방죽에는 몇몇 밤낚시꾼들이 켜놓은 랜턴이나 텐트 안에서 비쳐 나오는 불빛들만 드문드문 빛났다. 최대한 말을 줄이고, 대화를 하더라도 최대한 조용조용히 속삭이는 분위기에서 잠자코 있던 희철이 문득 말을 걸었다. 나는 오늘 하루 그가 계속 무슨 말을 하려다 마는 것 같아 ‘말해라’하고 직선으로 대답했다.

“내가 네 친구라서 이런 말 하는 거다.”

“응.”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너 말이다, 좀 변했어. 그러니까... 내가 군대 다녀온 동안 사회생활 먼저 시작한 너한테서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건데... 군대도 사회라면 작은 사회잖냐. 그 속에서 2년 구르면서 깨달은 건데, 악착같아야 살아남는다는 거야. 치열해져야 돼. 스스로 보호할 건 결국 자기 자신뿐이더라. 특히 너나 나처럼 보통 인간들은 말이다, 보통 인간이어서 더 그래. 뭐 든든한 빽이 있냐 뭐가 있냐. 난 사실, 네가 그동안 나보다 훌쩍 어른이 돼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너... 오히려 예전엔 겉으론 순해보여도 들여다보면 잔뜩 가시 세우고 있던 녀석이, 요즘엔 아예 알맹이 그대로 그러내놓고 다니는 것처럼 보여. 기집애로 치자면 돈 많은 애인한테 달싹 붙어서 아양 털면서 이거 해줘 저거 해줘 하는 애들 같고, 사내 녀석으로 치자면 험한 꼴이라고는 한 번도 안 보고 자란 도련님 같단 말이다.”

“......”

“..야, 아니다. 맨 뒤에 말은 좀 심했다. 아니야, 그거 아니다. 그냥.. 내가 말이 좀 막 튀어나오잖냐, 응? 정해진, 뒷말은 그냥 없던 거다?”

“......”

“야, 기분 상했냐? 난 그냥 너 걱정돼서...”

“아니. 괜찮다. 내가 좀... 일 자체가 많고 힘들어서 그렇지 출판사 사람들도 다 좋고... 아직 막내라고 실수해도 다들 그냥 대충 봐주고 해서... 내가 사회생활을 고되게 안 해봐서 그런가 보다.”

희철은 몇 번이나 ‘삐쳤어? 삐쳤어?’하고 되물었고, 나는 결국 피식 웃으며 아니라고, 괜찮다고 극구 부인해야 했다.

낚싯대 끝 저 너머, 흐린 불빛에 역시 흐린 물살만을 보여주고 있던 강물 위에서 한참이나 고요히 떠있기만 했던 찌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물었다. 나는 낚싯대를 힘껏 움켜잡았다.

*   *   *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 어머니, 아니면 태준이었다. 나는 조금 무거운 발걸음 소리와 시원한 스킨 냄새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이 태준임을 알아차렸다.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누워 있는데, 가까이 다가온 듯한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시?”

“...점심시간. 잠깐 빠져나왔어.”

“무단결근 혼내러 온 팀장님이에요?”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이마 위로 시원한 손바닥이 놓였다. 나는 살풋 인상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이 음영이 져 있어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병원 데려가려고 온 태준씨다. 그런데, 회사에 전화 안 했어? 대체 사람들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다들 내 얼굴 볼 때마다 정해진씨 오늘 엄청 아파서 못 나온다고 아침 일찍 전화 왔다고 한 마디씩 해서, 난 또 네가 전 사원들한테 전화 돌려서 엄살 피운 줄 알았다.”

“내가 해마다 관광버스 춤을 추거든요.”

“뭐?”

“그런 게 있어.”

그가 털썩 침대 한쪽에 앉았다. 그의 무게에 매트리스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태준이 땀에 흠뻑 젖은 내 앞머리를 손으로 빗어주며 ‘침대 바꿔야겠다’ 중얼거렸다.

“싫어.”

“......”

내가 가끔 장난으로 반말을 할 때마다 ‘혼난다, 까분다’ 어쩌고 하던 그가 웬일인지 그저 못마땅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가끔 아파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주말에 어딜 갔기에 이 지경이 된 거야?”

“밤낚시.”

“추위도 잘 타는 녀석이 왜 그런 걸 한 거야?”

“사나이들의 우정.”

“웃기고 있다. 일어나, 병원 가자. 엉덩이에 주사 한 대 맞고 나면 멀쩡해져.”

“싫어.”

“...정해진.”

“그렇게 약골 아니...에요. 이 정도는 그냥 하루 푹 자고 땀 쭉 빼면 멀쩡해져.”

“오늘만 봐준다.”

웃기고 있다. 무섭게 생긴 주제에, 겉멋만 잔뜩 든 주제에, 성격만 더러우면 다야? 몰래, 입을 삐죽였다. 그 사이 그는 어느새 팔을 걷어붙이고 주방에서 무언가를 달그락거렸다. 고개를 쭉 빼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그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무시무시한 얼굴로 ‘똑바로 누워, 눈 감아, 자’ 하고 명령했다. 잠이 그렇게 금방 오나, 생각하며 베개에 머리를 털썩 뉘었는데, 금방 또 잠이 왔다.

“...어나, 정해진. 야, 일어나라고.”

꽤 단잠을 잤는지 또 등 뒤가 축축했다. 코를 훌쩍이며 일어나 앉자 태준이 허벅지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는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았다. 그릇에 들어있는 게 뭔지 가만히 들여다보니, 정체불명의 죽이었다. 잘게 썬 온갖 채소와 다진 쇠고기가 들어간 걸로 보아 어쨌든 ‘쇠고기 채소 죽’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가만히 앉아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자 태준은 직접 숟가락을 들고 죽을 조금 떠 내 입에 넣어주었다.

“오늘만 이렇게 해줄 거야.”

“...내가 해달라고 안 했잖아요.”

“뭐야?”

화를 낼 것 같아 그의 손에서 숟가락을 가져와 들려하자 손에 힘을 꾹 주고는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말없이 조용히 노려보다가 또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어주었다. 뜨거워서 숟가락의 반만 삼킨 채 우물거리자 그가 그릇을 들고 호호 입김을 불었다. 나는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왠지 화가 나서 그릇과 숟가락 모두 빼앗아 들고 숟가락으로 죽을 휘휘 휘저어버렸다.

“정해진.”

“......”

“내일부터는 내 차 몰고 다녀.”

“지하철로 삼십 분이면 돼요.”

“차로 가면 십 분이면 돼. 왕복 남는 사십 분 동안 잠을 더 자든가 운동을 하든가 해. 건강 무너지는 거, 눈 깜짝할 사이야.”

“내가 알아서 해요.”

“......”

“혼자.. 알아서 할 수 있어.”

“또 뭐에 골이 난 거야?”

“잘 할 수 있어.”

숟가락을 놓은 채 중얼거리자, 그가 얼른 그릇과 숟가락을 다시 빼앗아 들고는 충분히 식은 죽을 떠서 또 내 입 앞에 대기시켰다.

“그래, 정해진씨는 혼자서도 참 잘 하지. 그러니까 어서 다 먹고 푹 자. 땀도 쭉 빼고. 그래서 내일까지 안 멀쩡해지면 넌 병원에 끌려가서 내 손에 엉덩이 까이고 주사 맞을 줄 알아. 입 벌려.”

입을 벌리지 않자 태준은 일부러 죽을 내 입가에 묻혔다. 얼굴을 돌리며 인상을 찡그리자 그가 고약하게 웃었다. 그리고 티슈를 뽑으려 팔을 뻗는 것을 제지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까칠한 혀가 입가에 묻은 것을 핥고 지나갔다.

“입 벌려.”

입술을 간질이는 그의 콧김에 나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혀가 들어왔다.

초기 감기를 완전히 다스리지 않아서인지, 그해 가을과 겨울, 그리고 그 다음해 봄까지도 나는 어떤 약이나 주사도 듣지 않는 감기에 시달려야 했다. 몇 개월을 기다리다 드디어 벚꽃이 피는 봄이 왔다. 나는 없었던 꽃가루 알레르기를 달아야 했다. 그리고 창문을 꼭꼭 닫은 채 그토록 아름답게 만개했던 벚꽃이 봄바람에 하룻밤 만에 허무하게 지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다. 순간 문득, 나는 태준이 벌써 서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이 시작될 무렵, 출판사 안에는 습한 바람 같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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