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곧 죽어도 우선 샤워를 해야겠다고 주장했다. 관장약도 뭣도 없지만 대충이라도 씻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욕실에 걸린 거울로 내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내가 왜 그렇게 오기를 부렸을까, 후회했다. 평생 흘릴 눈물을 한꺼번에 흘린 데다, 그리고 또 곧바로 잠이 들어서인지 쌍꺼풀은 완전히 풀려 버렸고 입술까지도 퉁퉁 부어서 흡사 금붕어와 닮은 꼴이었다. 욕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자 급기야 태준이 욕실 안으로 들어왔고, 나는 또 엉엉 울어버렸다.
“흐으... 팀장님, 내일 하면 안 돼요?”
“뭐?”
“저 오늘, 아니 지금 되게 흉측하잖아요.. 흣... 그래도 처..처음 하는 건데... 흐윽...”
“하아....”
그는 한심하다는 듯 내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그러나 내 소원은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달랑 안긴 채로 침대 위까지 옮겨졌다. 그리고 그는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내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키스해주었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억지로 눈물을 짜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의 새의 부리로 쪼는 듯한 키스에 웃음을 터뜨려 결국 들켜버렸다.
그는 정성스럽게 애무했고 나는 진지해질 법만 하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아프지 않도록 지겨울 정도로 천천히 손가락을 사용해 그를 받아들일 곳을 늘여갔고, 나는 움찔거리며 떨다가 기어이 본능적으로 속의 근육을 움직였다. 손가락으로도 그것을 알아챈 그는 내 엉덩이를 물며 웃었다.
“어때, 손가락으로 한번 가고 할래?”
“시..싫어요!”
“그럼 이제 내가 들어가도 돼?”
나는 대답 대신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허락을 했다. 태준은 내 허리를 들어 베개를 받쳐주었다. 뭔가 민망한 자세에 입술을 물자, 그때마다 입술을 핥아주었다. 나는 어린 새가 어미 새의 부리로 먹이를 받아먹듯 허겁지겁 그의 혀를 빨아들이며 긴장을 풀었다. 그 사이, 그가 내 다리를 자신의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들어왔다. 똑똑, 노크를 하듯 입구를 맞춘 채 머뭇거리던 그는 내가 먼저 손으로 끌어당겨 유도하자 목안 신음을 내며 끝까지 들어왔다. 허리가 꺾였다.
“아..아앗... 하아, 하아, 팀장님...”
“뭐야, 이런 상황에 팀장님이라고.. 으읏.. 잠깐만... 그렇게 호칭하면, 하아... 내가 정말 직장 사원이나 건드리는 파렴치한 상사 같잖아.”
완전히 들어온 채, 그러나 움직이지 않고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웃으며 말했다. 그가 웃을 때마다 접한 부분이 가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충분히 풀었다고 생각했는데도, 한계까지 벌어진 곳이 화끈거렸다. 무서웠지만, 무엇보다도 가득 차 있는 느낌에 만족감이 우선시되었다.
“그럼 뭐라고 해요?”
“.....그냥 이름 불러.”
“태준씨, 이렇게요? ...하앗..! 아, 아, 아아! 가..갑자기.. 히잇..!”
그리 거칠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상체를 바짝 들어 그의 몸에 매달렸다. 그 때문에 움직임이 힘들어진 태준은 잠시 또 내 입술을 핥아주었다. 내가 너무 꽉 힘을 줘 그 역시 힘들었는지 내 허리를 살살 어루만지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결국 다시 뒤로 가 누운 나는 아이를 낳는 산모처럼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가 또, 웃었다.
그렇게 움직이다 멈추다를 반복하다가 그가 갑자기 몸을 빼내어 자신의 손으로 빠르게 사정을 유도했다. 내가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그는 콘돔을 벗기고 토정했다. 그리고 숨을 고른 후 내 위로 덮치듯 누웠다. 나는 그의 밑에 깔린 채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그의 두 눈을 노려보았다.
“왜요, 막상 해보니까 별로예요?”
“무슨 말이야.”
“손으로 했잖아요, 팀장...태준씨 손으로 직접 했잖아요. 내 안에서 가기 싫었어요? 왜요? 콘돔도 했잖아요.”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완성을 체험해 보지 못했다는 느낌에 또 눈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너무 서툴러서 싫어진 걸까. 입술을 물어뜯으며 바르르 떠는데, 그가 그런 내 입술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말렸다. ‘그런 거 아니야’하고 그가 내 목에 대고 말했다. ‘그럼 왜요’ 울먹이며 묻자, 태준은 목부터 시작해 내 온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심하게 할까봐, 조절이 안 돼.”
“......”
“내 맘대로 했다간 너, 각서를 써도 그냥 도망가 버릴 거다.”
귀가 화끈거렸다.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이 맨 가슴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나는 가만히 손을 내려 그의 것을 움켜쥐었다. 그냥 잡기만 했는데도,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그 소릴 들은 태준이 그대로 엎어진 채로 가슴을 들썩이며 웃었다.
“너 그러지 마라, 아줌마 같아.”
“아줌마랑도 해 봤어요?”
“......”
그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손을 움직이자 끙, 하는 신음을 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었다. 말하지 않아도 ‘한 번 더 해도 돼?’하고 짙게 갈망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한 번 더 해도 되는데’ 중얼거렸다. 태준이 급히 내 목과 가슴을 핥으며 새 콘돔을 더듬어 찾았다. 그리고 자연스레 다리가 벌려진 채 들렸다. 나는 이번에는 내가 좀 더 편한 자세를 요구했고, 내 것도 같이 만져달라고까지 요구했다. 그는 이번에는 처음보다 좀 더 성급했고, 종종 내 것을 만지는 것을 까먹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끝까지, 빼내지 않고 내 안에서 토정했다. 나는 그가 심하게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정 직전엔 확실히 힘 조절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엉덩이가 얼얼했다. 그리고 몸속에 다이너마이트가 숨겨진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에 근접하게 다가왔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 또 다시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결국 창밖으로 새파랗게 차오르는 새벽빛을 바라보며 ‘한번만 더 하면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며 먼저 콘돔을 찾았다.
그렇게 세 번째는, 좀 더 유연해진 곳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곧 찢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 속에서 나는 그에게 몇 번이나 ‘천천히, 천천히’를 주문해야 했다. 나는 내 몸속의 다이너마이트의 심지를 건드리기 위해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그때마다 태준이 먹이의 목줄을 끊어놓듯 내 어깨를 물었다. 차츰 욕망에 익숙해지자 머리에서 불꽃이 튀었다. 갑자기, 거울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으응...핫...태준씨.. 거울, 거울 줘..아앗..!”
“흐읏.. 뭐.. 뭘..?”
“거울.. 아아! 흐응.. 시..싫어, 거울.. 거울...!”
“하아... 꽉 잡아, 읏샤!”
그리고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똑바로 앉은 나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태준은 짧게 입을 맞춘 후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는 듯 자세를 잡았다.
“아....아아아아! 안 돼, 시..싫어... 흐읏..!”
“흣.. 잠깐, 가만...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여전히 연결된 채였다. 연결된 채, 그는 나를 코알라 새끼처럼 안아든 채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나는 도리질을 치며 고함을 지르면서도, 허리를 들썩였다. 그가 떨어지지 않도록 내 허리와 엉덩이 아래를 꽉 붙들었다. 나는 그가 나를 창밖으로 집어던진대도, 그래서 지옥불로 떨어뜨린 대도 절대 그의 어깨를 놓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나를 안은 채 데려간 곳은 욕실이었다. 그는 바닥에 나를 내려놓으며 자신의 몸을 빼내었다.
“아..아아아, 흣...하아..하아.. 왜...왜?”
커다란 것이 갑자기 빠져나가 비어버린 느낌에 나는 눈을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욕망에 잠식당한 짐승이 역시 눈을 떨며 나를 내려다보다 침을 꼴깍 삼켰다.
“손, 세면대에 짚고 뒤돌아 서.”
그가 말하며 내 몸을 돌렸다. 그가 억지로 누르는 몸에 할 수 없이 나는 세면대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정면의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서는 거대한 짐승이 눈을 반질거리며 눈앞의 좀 더 작은 짐승을 낚아채고 있었다. 나는 불안과 흥분 속에서 거울 속의 두 짐승을 지켜보았다. 뒤에서는 낯선 감각이 퉁퉁 부어 예민해진 곳으로 침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순간 눈이 마주친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눈을 잔뜩 찌푸리고 혀를 길게 빼내어 목을 쥐어튼 짐승. 그리고 그 눈 속에서 보이는 지옥의 불꽃도 천국의 햇살도 아닌, 기묘한, 붉게 타오르는 덩어리를 보았다. 그때, 내 허리를 잡은 채 봐주지 않고 움직이는 남자를 느꼈다. 허리가 뒤틀리며 무언가 척추를 따라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거울 속에 비치는 태준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흐읏...아, 아아! 으읏...조여... 해진아...조금만..흣!”
“아..아아...으응, 좋아..아...흐읏..앗, 좋아....”
찾았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거울을 향해 웃어 보였다. 심지를 건드린 후부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마음껏 소리를 지르고 허리를 흔들었다. 거울 속에서 나는 머리에 뿔이 돋고 어깨에선 날개가 솟았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마지막 스퍼트와 함께 안을 가득 조였다. 젖은 살끼리 빠르게 맞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음란하게 욕실을 울렸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며 토정을 했다. 그의 손으로도, 그리고 나의 손으로도 전혀 만지지 않았다. 그에 맞추어 태준 또한 깊숙이 넣은 채 몸을 떨었다.
“하아...하....정해진.... 너 대체.. 뭐야...”
태준이 내 등 뒤에서 바짝 붙어 몸을 수그린 채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곧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버렸다. 그 바람에 그가 다급히 내 몸을 붙잡아야 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에 대답하려다가 아득히 눈을 감아버렸다.
스물 둘, 22이라는 숫자의 모양처럼 동그란 고리 모양의 뿔이 내 머리에 박혔다.
* * *
그렇게 ‘연애’를 했다. 출판사 안에서는 ‘팀장님’과 ‘정해진씨’였고, 둘만 있을 때에는 ‘태준씨’와 ‘해진아’였다. 그 괴리감이 오히려 설레었다. 양심에 걸리지 않을 만큼 서로 부도덕한 약점을 잡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마음은 즐거웠고 몸은 자유로웠다. 가끔 놀림감이 되는 건 여전했지만, 그것을 삶의 낙으로 여기는 태준 때문에 나도 어느 정도 맞받아칠 수 있었다. 여느 연인들처럼 유치하고 하찮은 것들로 다투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그가 졸업 후 정직원 채용 건으로 협박하는 바람에 못이긴 척 화를 풀곤 했다.
다음 해에 나는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리 나쁘지도 않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고, 출판사에서 지하철로 30분 정도 걸리는 곳에 그럭저럭 가격이 적당한, 그래서 여전히 허름한 원룸을 얻었다. 태준은 자신의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원룸을 고르지 않았다며 일주일동안 나와는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주말에 부모님 집에 가는 횟수를 줄이고 그와 좀 더 오래 있기로 하는 조건으로 달래어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가을, 새카맣게 그을린 희철이 제대를 했다.
“정해진, 골라라. 일번 날아차기, 이번 턴차기, 삼번 옆차기, 사번 헤드락, 오번 사이드슬램.”
“저기, 희철아...”
“내 이름 부르지 마. 너는 내 친구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그의 면회를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휴가를 나올 때에도 번번이 태준에게 붙들려 두어 번 만난 게 전부였다. 나는 연인이 아닌 친구인 남자의 화는 어떻게 풀어줘야 하는지 곰곰이 기억을 되살려야 했다.
“문희철, 너 몸 되게 좋아졌다. 군살 다 빠지고 되게 탄탄해졌다, 야. 복학하면 절로 여자 신입생들이 따라 붙겠다.”
“......”
“게임머니 남은 거 다 너 줄게.”
“......”
“일주일 동안 너하고 같이 저녁 할게. 나 이제 진짜 대한민국 월급쟁이야.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집에 들어가서 죽은 듯 쓰러져 자기 일쑨데, 그 정도면 엄청난 출혈이다.”
“...주말까지 포함 되냐?”
입을 삐죽 내민 희철이 흘깃 눈길을 줬다. 군대 갔다 오면 진짜 남자가 된다더니, 이 녀석은 예외구나, 피식 웃으며 나는 밥집을 향해 이끌며 팔짱을 꼈다.
“야.”
“...아, 빨리.”
문득 멈춰서는 발걸음에, 나는 그가 눈치 채지 않을 정도로 슬그머니 손을 빼내었다. 평소에도 길거리에서 태준과 팔짱을 끼고 다니진 않지만 둘만 있을 때엔 팔짱이나 깍지를 끼며 장난을 치곤했다. 남들한테는 일상적인 일이 우리에게는 장난을 전제로 해야만 통하는 행동임을 조금은 씁쓸해하면서도 또 금방 시시덕거릴 수 있었다. 그런데, 키가 엇비슷한 희철과 친근하게 장난을 치다가 문득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말았던 것이다. 희철은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며 갸우뚱거리다가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않고 걷자 곧 평소대로 표정을 풀었다.
“맥주? 맥주 마실래? 주문할까? 난 내일도 출근하니까 그냥 목만 축일게.”
양념 반 프라이드 반으로 준비해서 면회 오라던 말이 떠올라 나는 가까운 치킨 체인점으로 그를 데려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컵에 물을 따르고 그와 내 자리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정리해 놓아두었다.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을 주문하고, 정작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눈치껏 맥주까지 주문해버렸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희철이 눈을 가늘게 뜨곤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왜?”
“수상하다... 분명 뭔가 변했는데...”
“뭐..뭘. 그래, 뭐, 2년이나 지났는데 사람이 좀 변하지. 당연한 걸 가지고...”
“맞다!”
희철이 물을 마시다 갑자기 컵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나는 괜히 화들짝 놀라 의자를 뒤로 젖혔다.
“너, 시집가도 되겠구나.”
“푸..풉...!!!”
무슨 말이 나올까 싶어 미리 찬물을 마시는데, 그의 뜬금없는 말에 입안의 물을 내뿜고 말았다. 희철은 그런 나를 보며 손을 휘저었다.
“에이, 더럽게. 응, 어쨌든. 너 말이야, 솔직히 말해봐.”
“뭐..뭘...뭘, 솔직하게는 또 뭐야, 내가 뭘 숨긴다고.”
“저것 봐, 찔리는 게 있으니까 말도 더듬고. 너, 생겼지?”
희철이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새끼손가락을 흔들었다. 어떻게 알았지, 쟤한테 이상한 능력이 있었나, 어디까지 털어놔야 하나, 고민하는데 희철이 내 이마를 따콩, 때렸다.
“이 자식, 얼굴도 벌게지고. 야, 어때. 이쁘냐?”
“...뭐?”
“절대 인정은 못하지만, 가끔 이쁘장한 애들이 너 좋다고 따라다니고 했잖냐. 어때, 정식 여자친구는 고르고 골랐어?”
희철이 저 혼자 신이 나 낄낄거렸다. 여자친구라니, 한숨이 놓이기도 했지만, 그 한숨 놓인다는 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나는 다시 물을 따라 벌컥 마셨다. 희철은 두 손을 모은 채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한 헛다리다, 문희철. 그런 거 없어. 그리고 야, 애인이 생겨도 장가를 가야지 시집을 가냐?”
내 핀잔에 희철은 ‘에이’하며 야우를 퍼부었다. 그리고 잔뜩 기대했는데 실망했다는 듯 2년 동안 뭘 했냐고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일 했다.”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냐? 연애도 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연애도 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더 심한 것도 했다고 맞장구칠까 하다가, 참았다. 2년 전, 그러니까 내가 아직 태준과 만나기 전, 내 안의 ‘모르는 나’와 마주하기 전이었다면 오히려 순수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을 진실이, 이제는 오히려 더욱 털어놓기 어려운 비밀이 되었다. 희철아, 나는 네가 모르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게 진짜 정해진이다. 나는 말 대신 입 안의 얼음을 아그작 씹었다.
“어쨌든 너, 나 버리고 혼자 여자친구 만들고 그러면 안 된다.”
살코기로 바닥이 보이는 머스터드소스 접시를 박박 긁으며 희철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꼭 어린아이들이 ‘나 말고 다른 친구 만들면 안 돼’하고 질투하는 것처럼 들려 나는 ‘응’ 짧게 대답하고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려 머스터드소스를 좀 더 달라고 주문했다.
“배은망덕한 새끼들,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이런 취급 받을 줄은 몰랐건만. 알고 보니 다들 여자친구 끼고 놀러갔더라고. 복학만 해봐, 1학년 신입생으로 바로 낚아야지.”
“치사한 새끼, 나보곤 여자친구 만들지 말라며.”
“응, 그러니까 나 먼저 만들고.”
“은혜도 모르는 놈.”
“...... 좋다, 일에 지친 월급쟁이를 위하여 특별히 감면해 주마. 일주일은 됐고, 그냥 이번 주말이나 시간 비워둬. 주말엔 어차피 너도 할 일 없잖냐.”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뜨끔했다.
* * *
부모님 집에 가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시간을 내어 들른다고 해도 하룻밤 자기는커녕 딱 한 끼 식사하고 나오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평일 퇴근 후에 잠시 얼굴을 비치는 게 편했다. 나는 아직 아버지가 정년퇴직 전까지 몇 년 더 남았으니, 그때부터 잘하면 된다고, 스스로 위안거리를 만들었다.
부모님은 내가 출판사에 자리를 잡고 안정되게 독립한 것은 마음에 들어 하셨지만, 그래도 언제나 불안한 눈으로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는 것처럼 내 무릎과 팔꿈치를 가만히 바라보시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달리기를 하다가 갑자기 넘어진 것처럼 무릎이나 팔꿈치가 까진 것 같았다. 아프지 않은데도, 가끔은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회사 일 많이 바쁘니?”
평일 밤 늦은 시간에야 겨우 얼굴을 드밀곤 밥 좀 달라고 하는 아들 꼴이 아련해 보였는지 어머니는 국을 떠먹는 내 옆에서 연신 내 이마를 어루만지셨다.
“바쁠 때는 바쁘고, 평소엔 그냥 그럭저럭, 보통 월급쟁이들이 그렇죠 뭐.”
“그런데 회사에 그렇게 입고 다녀도 되냐.”
같이 식사를 하지 않으면서도 앞자리에서 신문을 펼쳐들고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내 청바지를 흘낏 하시곤 마땅찮은 듯 물었다. 내가 여느 회사원들처럼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지 않고 학생 때와 변함없이 입고 다니는 것을 아버지는 언제나 ‘애들처럼 입고 다닌다’며 마땅찮아 하셨다.
“괜찮아요, 출판사 분위기 자체가 자유로운 편이에요. 다른 사람들도 편하게들 입고 다녀요.”
“그래, 눈치 보면서 다녀라. 윗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고, 입는 대로 따라 입고 다녀야 돼.”
“예.”
회사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규칙 몇 가지를 더 일러주시는 가운데, 어머니는 애 밥 먹는데 계속 말 시킨다며 아버지를 타이르셨다. 아버지는 조용히 다시 신문을 펼쳐 드셨다. 예전엔 어머니가 꼼짝도 못하셨는데,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왠지 조금 우울해졌다. 문득, 신문을 쥔 아버지의 손과 이것저것 반찬을 집어 내 숟가락 위에 얹어주느라 바쁜 젓가락을 쥔 어머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번 쥐어볼까, 어릴 때처럼 양 손에 하나씩 부모님 손을 쥐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내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어머니가 문득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여보, 얘 손 좀 봐. 이젠 나보다 더 크다.”
“그럼, 손이야 한참 더 전에 당신보다 컸지. 얼굴을 봐. 선이 단단해 졌잖아.”
아버지가 신문을 내리고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선이 단단해졌다는 건 무슨 말일까 싶어 내 얼굴을 손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저 이제 나이 든 티가 나요?”
“예끼, 진짜 나이 든 부모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다. 그게 아니라, 얼굴 윤곽이 선명해졌다는 말이야. 그게 진짜 네 얼굴이야.”
진짜 내 얼굴. 나는 당황해 급히 고개를 숙이고 얼른 숟가락을 집었다.
“아..아버지도 참.. 그럼 언제 제가 다른 얼굴이었어요?”
“으응. 사람은 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 얼굴을 찾아가는 거야. 어릴 때야 동글동글하니 다들 비슷하게들 생겨도 말이야. 그래, 네 말대로 나이 든 티가 난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허허허.”
“그래, 부모가 볼 때야 아직 한참 애기지만, 그래도 얘가 벌써 스물넷이야.”
부모님은 스물넷이 아기인가 어른인가 하는 문제로 또 작게 다투셨다. 나는 말리는 시늉을 하면서 몰래 웃었지만, 더 몰래, 가슴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