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좋아하는 곳이라더니, 역시 꽤 여러 번 온 적이 있는지 호텔 카운터의 직원도 그를 알아보고 미리 열쇠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뭔가를 주문하는가 싶더니 유연하게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내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것을 알아채곤 뻔뻔하게 똑같이 노려보는 태준을, 넥타이만 맸다면 목을 조르고 싶었다.
“또 뭘.”
“지배인이랑 잘 아네요?”
“자주 오니까.”
“거봐.”
“혼자.”
“거짓말.”
“하... 내가 이걸 왜.... 됐다, 잔말 말고 들어가.”
그가 문을 연 채 기다렸다. 들어가 말아, 고민하며 슬쩍 방 안을 들여다보는데, 붉은 노을빛이 정면으로 크게 난 창을 통해 눈을 부시게 했다. 눈을 찌푸리며 간신히 창밖을 확인하는데, 마치 붉은 태양이 호수에 통째로 떨어진 듯 했다. ‘우와’ 탄성을 지르며 발걸음을 옮기자 태준은 ‘거봐, 좋잖아’하고 응수했다. 방의 한쪽 벽면 가득 넓게 뚫린 창으로 바짝 붙어 서자 그 역시 옆에 다가와 섰다.
“크네요.”
“응, 크지. 청초호라고 해. 말이 호수지, 속초시 중앙에 위치한 석호야.”
“술단지 모양이다.”
“응, 그래서 한번 빠지면 취해. 계속 찾게 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노을 때문인지 조금 우울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쩐지 그렇게 해줘야 할 것 같아, 그의 뺨을 문질러주었다. 태준은 잠시 얌전히 얼굴을 맡기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내 손가락을 가볍게 물었다. ‘아!’ 소리 내어 손을 떼어내자 ‘감상해’ 하며 창밖으로 고갯짓을 했다.
나는 창가에 이마를 붙인 채 ‘청초호’하고 발음해 보았다. 왠지 조금 취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나, 난 술도 약한데. 생각하며 피식 웃자 그가 또 ‘감상하라고’하며 핀잔을 줬다.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얄미운 짓만 골라하는 건 아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의도와는 달리 그 붉게 타오르는 호수와 하늘을 바라보다보니 의미가 다른 멀미가 났다. 그 얘길 하려 고개를 돌리는데 마침 벨이 울렸다. 그가 천천히 걸어 나가 벨보이에게 뭔가를 받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불쑥, 코앞으로 은색 쟁반을 내밀었다.
“이거 먹어. 한 시간 정도 더 달려야 되는데 빈속엔 멀미가 더 심해지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프와 폭신해 보이는 빵이었다. 고개를 숙여 킁킁 냄새를 맡자 ‘개냐? 그런 짓 하지 마’하는 타박이 나왔다. 고맙습니다, 웅얼거리며 쟁반을 받아들려는데 그가 팔을 쭉 뻗어 위로 올렸다.
“뭐라고? 또박또박 말해.”
“....고맙습니다. 라고요.”
“뭘, 천만에요.”
빙글 거리며 그릇을 테이블에 놓아주었다.
혼자 의자에 앉아 후룩거리며 수프를 먹는 동안 태준은 멀거니 창밖을 향해 선 채 등을 보이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청승인가 싶어 조심스레 ‘팀장님’하고 불렀다.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왜’하고 답했다. 뭔가 생각할 게 있나, 혼자 놔두어야 하나 싶어 아무 말 않고 다시 수프를 떠 넣는데, 그가 부신 노을 때문인지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 팀장님은 이런 데를 어떻게 아셨는데요?”
“알 거 없다.”
“팀장님 되게 못됐네요.”
“너는 점점 상사 무서운 줄 모르고 기어오르고.”
“우리 지금 상사랑 부하직원 아니잖아요.”
“...알긴 아냐?”
그가 어슬렁거리며 걸어와 옆에 앉았다. 의자가 끌리며 무거운 소리를 냈다. 잘못 건드린 것 같아 고개를 폭 숙이고 말없이 빵조각을 뜯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기댄 채 역시 말없이 내가 수프를 묻힌 빵조각을 열심히, 꾸역꾸역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맛있어?”
“예.”
“... 나도 줘 봐.”
그가 참새처럼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얼른 빵조각에 수프를 듬뿍 적셔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런데 손을 뻗으면서도 테이블 위에 뚝뚝 떨어지던 수프가 기어코 그의 턱으로 흘러내렸다. 그가 빵을 우물거리며 손으로 턱을 문질러 닦았다. ‘거기 말고, 거기, 거기’ 일러주다가 나는 기어이 직접 손가락으로 아직 그의 입술과 턱에 남아있는 수프를 닦아내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다시 혀로 핥았다. 우물거리던 그가 꿀꺽,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빵을 삼켰다.
“왜 그래, 너?”
“뭐..뭘요?”
“...해줄 것도 아니면서 왜 건드리냐고.”
“그... 해드릴까요?”
“손으로?”
“뭐.... 그렇죠.”
혈기 왕성한 20대인 것은 그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언제나 ‘오늘은 좀 나가나’ 싶으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을 움츠리며 바들바들 떨면, 그는 의외로 얌전히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식지 않는 그를 위해 그의 지퍼를 직접 내렸다. 내가 두 손으로 그를 달래는 동안, 그 역시 커다란 한 손으로 내 속옷을 내렸다. 그리고 결국 내가 먼저 그의 손 위에서 도달하곤 했다. 잠시 후 그 또한 토정한 뒤,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이 좋았다. 차라리 직접 하는 관계보다 그렇게 서로 끌어안은 채 손으로 해결해주는 것이 더 야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히는 것은, 언제나 잠자리에 들기 전이었다.
“저기요, 팀장님. 그래도 억지로 덤비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하아...내가 바본 줄 알아? ..읏.. 처음에 심하게 했다고 너 계속 피하는 거 아..아읏...”
그를 그대로 의자에 앉힌 채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한 것을 꺼내어 그에게 배운 대로 손놀림을 움직였다.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꾹 다문 입가는,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심하게 한 거 알긴 아는구나.”
“으..흣... 그때는, 네가 먼저 떼 달라고 접근, 아.. 했잖아..!”
“그.. 그런 적 없어요!”
“웃기지 마. 저 처음인데요, 누가 데뷔 좀 시켜주세요, 폴폴 흘리는 거, 거기 있던 사람들 다 알아차렸어. 나 아니었어도 누구라도 너 데리고 나갔어. 그리고 말이 바른 말이지, 내가 너 약 먹이고 모텔 데려갔어? 때려서 정신 잃게라도 했어? 어쨌든 네 발로 들어간 거야.”
“......”
“하던 거나 계속 하시지, 정해진씨.”
심술이 나 커질 대로 커진 그의 것을 튕기듯 눌렀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끝에 고여 있던 쿠퍼액이 그의 단단한 배와 바지에 튀어 묻었다. 태준이 내 뒤통수를 단단히 잡았다. 눈치를 살피며 다시 부드럽게 감싸쥐자 그가 같잖다는 듯 비웃었다.
“넌... 이런 짓도 하는 녀석이 왜...”
“어쨌든 죽도록 아팠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기억해요.”
“아..아흣!.. 하.. 정해진.. 이리 와봐.”
“난 됐어요. 아... 할 것 같아요? 잠시만, 티슈...”
“으..흣...!”
한 손은 여전히 움직이며 한쪽 팔을 뻗어 티슈를 짚는데, 그가 멋대로 토정해 버렸다. 덕분에 그의 배는 물론 바지, 그리고 내 얼굴에까지 와 튀었다. 멋대로였다. 그 정도는 충분히 조절할 수 있는 남자였다. 수치스러운 기분에 입을 꾹 다문 채 끈적이고 냄새나는 것을 티슈로 닦아내는데 그가 내 손을 치웠다. 그리고 아직 남은 자신의 것을 손가락으로 닦아낸 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단단한 손이 턱을 움켜쥐었다. 절로 입이 열렸다. ‘왜요’하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묻는데, 입 속으로 불쑥 그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으..왜... 하, 하지...으응..!”
비릿한 맛이 혀에 닿았다. 버둥거리는데, 그가 얼굴을 고정시키며 의자에서 내려와 입을 맞췄다. 뜨거운 입김에 전해 들어왔다. 다급하게 얽히는 혀 사이로 아직 그의 것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려할 때마다 그가 혀를 물었다. 버둥대다가 결국 뒤로 누워 버린 자세가 되었다. 위에 올라탄 그가 손을 내려 내 바지 벨트를 풀렀다. 찰칵,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허벅지에 와 닿은 그의 것이 벌써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속옷 안으로 들어온 그의 손이 중심부를 쥐고 흔들다가, 문득 손가락이 뒤쪽으로 향했다.
“으..읏... 아.. 안 한다고... 아읏... 하지 마!!!”
“윽!”
찼다. 아니, 그냥 무릎을 올렸을 뿐인데 하필, 자세가 그렇게 되어서, 의도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의 중심부를 걷어찬 꼴이 되었다. 그가 몸을 떼어내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허리를 수그렸다. 나는 그 틈에 얼른 빠져나와 버클을 채웠다. 화난 듯 붉으락푸르락하는 그의 얼굴에서 턱뼈가 불끈거렸다.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왜...”
“정해진, 나 갖고 놀아?”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그쪽이 아니냐고 되물으려다 말았다. 불 난 곳에 기름 붓는 격이 될까 조용히 손톱을 물어뜯는데, 그가 벌떡 일어나 바지를 꿰어 입었다.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무시무시하게 음영이 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노을로 붉게 물든 태준은 흡사 천재 화가의 그림 속 동물처럼 포악할 정도로 자신의 힘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내 맘대로 하고 싶었으면 벌써 너 눌렀어. 그런데, 그래, 네 말대로 억지로 덤빈 적 없어. 오히려 매번 손으로 해준다고 먼저 꼬리친 건 너야. 재밌어? 이것저것 다 해주고, 이것저것 다 당해주니까, 재밌냐고!”
“내..내가 언제...”
“그래, 알았다. 너 혼자 고상한 척 많이 해.”
비아냥거리듯 고개를 끄덕인 태준은 침대 위에 벗어놓은 재킷을 낚아채듯 걸쳐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바람에 그의 재킷에서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을 본 그가 멈칫 섰다. 나는 그것이 주차장에서 낯선 여자에게서 받은 명함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의 입가가 슬며시 휘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어들곤 다시 빠르게 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어..어디 가요!”
나는 시장에서 억지로 손을 떼어놓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엄마를 부르는 아이처럼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그를 불렀다. 그가 문고리를 잡은 채 불량스럽게 섰다.
“하지 말라며. 안 한다며. 알았어. 네 의견 존중해 줄게. 그런데 정해진, 너도 똑바로 행동해. 너도 남자니까 알겠지, 한번 붙은 불을 끄는 게 얼마나 힘든지.”
“뭐...뭐야, 그건 왜 들고 나가요!”
“돈 주고 상대 구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할 수 없지,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까. 아, 말 안 했던가? 난 다 돼. 남자든, 여자든.”
입이 합 다물어졌다. 목구멍 아래서 뜨거운 것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딱딱해진 내 얼굴을 들어올렸다.
“이때껏 내가 네 그 어린애 같은 손 놀이에 만족하고 끝인 줄 알았어? 게이바든 일반 클럽이든, 그저 하루 욕망만 해결해줄 것들은 저절로 붙어. 남자든, 여자든.”
“거..거짓말...”
“내가 마냥 해바라기처럼 참았다고 생각해? 네가 ‘싫다’ 한 마디 하는 순간, 네가 애벌레처럼 웅크리는 순간, 한참 달아오르다가 손 떼야 되는 내 기분 생각해 봤어? 네 말대로 억지로 덤비기라도 했다간 다시 홀랑 도망가 버릴 거 아냐?”
목구멍 속에서 뜨겁게 부풀었던 것이 눈 밖으로 왈칵 쏟아져 나왔다. 소매 끝으로 아플 정도로 눈가를 닦아내고 계속 흘렀다. 흐릿하게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울지 마.”
“흐으...더..더러워.. 더러워..”
“뭐가? 남자든 여자든 다 된다는 거? 그게 왜? 오히려 축복이지.”
“변태.. 변태야... 흑..”
“정해진, 거울로 네 얼굴 자세히 본 적 있어? 네가 날 볼 때, 어떤 얼굴인지 알아?”
자신의 검지손가락으로 거칠게 내 눈가를 닦아낸 그가 훌쩍 일어나 문밖으로 걸어 나가버렸다.
“아..안 돼.. 가지 마, 안... 가지 마..!”
순간, 언젠가 한번은 겪어봤던 것 같은, 끔찍한 공포가 엄습해 왔다. 나는 공포를 피하기 위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소리 내어 크게 울어버렸다. 그래도 그의 발소리는 멀어져만 갔다.
노을이 모두 지고, 타들어갈 듯 붉었던 호수와 하늘도 완전히 캄캄해졌는데,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꼼짝 않고 울다가 저린 다리를 절뚝이며 욕실로 갔다. 그리고 세면대에 몸을 지탱해 선 채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보았다. 퉁퉁 부은 눈가 때문에 흐릿하게 보였다. 찬물을 틀어 얼굴은 물론 목까지 적셔 닦고 다시 한 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순하고 멍청해 보이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더욱 더 멍청해 보일 뿐이었다.
똑, 똑, 똑...
꽉 잠근 수도에서 미련스럽게 맺혀있던 물방울이 투신자살하듯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짜증 섞인 손길로 꼭지의 입구를 문지른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순간, 무의식적인 표정이, 내가 알지 못하는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흡사, 천재 화가의 그림 속 동물처럼 포악할 정도로 자신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얼굴이었다.
‘누가 데뷔 좀 시켜주세요, 폴폴 흘리는 거, 거기 있던 사람들 다 알아차렸어. ...... 네가 날 볼 때, 어떤 얼굴인지 알아?’
그의 목소리가 잔인하게 정수리를 관통했다.
비틀대며 욕실에서 나와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은 것까지 기억나는데, 그 후로 어떻게 온전히 베개까지 베고 누워 잠든 건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는, 창밖으로 둥근 보름달이 정면으로 떠 있었고, 온 몸으로 노을에 적셔졌었던 것처럼 호수는 이번에도 터질 듯이 한가득 보름달을 안고 있었다. 캄캄한 허공에, 마치 두 개의 달이 마주 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순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지만, 시린 달빛을 받으며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선 남자의 등을 보고, 내가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인지했다.
“일어났어? 더 자도 돼. 펜션에는... 너희 부모님 아프다고 연락 와서 급작스럽게 둘만 서울로 먼저 올라갔다고 전해뒀어.”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이불을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쩐지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어깨를 창가에 기대어 서서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상하게 캄캄한데도 그의 눈빛만은 형형스럽게 빛나는 것을 보며, 그 남자가 마치 잔인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야생동물, 그 중에서도 먹이사슬의 최우위를 선점하는 그 무엇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영원히, 죽을 때까지 그 남자에게서 포박된 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희미하게, 그리고 아프게 예감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건조한 입술을 겨우 떼고 침을 묻혔다. 아, 하고 소리를 내었지만 음성화 되지는 않았다. 칼칼하게 잠긴 목을 축이기 위해 몸을 기울여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여진 물병을 들었다. 꿀꺽꿀꺽, 하는 소리가 탐욕스럽게 방을 가득 울렸다. 그동안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내 행동 모두를 섬세하게 관찰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아’하고 소리를 내었다. 이번엔 ‘아’하고 정확하게 목소리가 울렸다. 그대로, 벌린 입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나는 가만히 내버려두기로 했다.
“나는 지금 우리 부모님과 판박이에요. 얼굴이 말이야. 눈이랑 코는 아버지하고 똑같고, 입이랑 얼굴형은 어머니하고 똑같아요. 우리 가족을 처음 보는 사람은 저마다 어쩜 이렇게 판에 박아놓은 듯 똑같냐고들 떠들어요. 하지만 나는 유전적으로 우리 부모님과 남남이에요. 나는, 아기일 때 이불에 감싸인 채로 지금 우리 집 앞에 버려졌어요. 우리 부모님이 아기를 끔찍이 가지고 싶어 하는 불임부부인 걸 알았던 걸까? 하여튼 난, 복덩이처럼 키워졌어요. 내가 친자가 아닌 건 중학교 때, 생물 시간이었는데, 혈액형이 어떻게 유전되는가에 대해서 배울 때였어요. 이상하게, 한번쯤은 부모님한테 당신들 혈액형이 정확한가 물어봤음직한데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당연하게....라면 거짓말이고, 조금 방황하긴 했지만, 그건 아주 짧은 기간이었고.. 어쨌든 난 그 사실을 받아들였어요. 내가 봐도 난 부모님이랑 그렇게나 똑같은데, 친자가 아닌 건 이상하게도 납득이 되었어요. 그래도, 그래도 난 그 후로도 단 한 번도 지금 우리 부모님이 내 양부모라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물론 유전적으로 일치하진 않지만, 그런 걸 모두 떠나서 부모와 자식 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팀장님, 당신이... 내가 우리 부모님하고 전혀 다른 유전자라는 걸 인식시켰어. 나는... 이런 얼굴, 몰라.”
목소리가 조금 잠긴 것 말고는,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나는 아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실컷 울고 난 후여서 그런지, 탁한 목과 퉁퉁 부어 잘 떠지지 않는 눈두덩이에도 불구하고 왠지 아주 후련한 기분이었다.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태준은 내 말이 끝나자 살풋, 어울리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신기한 우연이네. 혹시 우리 부모님 얼굴 본 적 있어? 잡지나 신문에서 말이야.”
그의 어머니라면 몰라도 태인 기업의 회장이라면 아마도 한번쯤은 봤음직 했다. 그러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우리 부모님하고 전혀 닮은 구석이 없어. 일곱 살 때엔 친자감별을 받기도 했어. DNA를 추출하기 위해서 내 머리카락이 뜯길 땐, 언젠가 꼭 아버지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어. 결과가 어땠게? 99.9 퍼센트 일치. 아버지는 국내 의료과학을 불신하고 미국까지 가서 또 유전자검사를 했어. 결과는? 역시 같았어. 그래서 난 겨우 아버지 호적에 오를 수 있었지. 그때까지 어머닌 화냥년 소릴 들어야 했어. 그리고 여긴... 여긴 원래 여관 수준의 모텔이었어. 외가 쪽이 경영했던 곳이라는데, 그래서 어머니는 화냥년 소릴 들을 때마다 날 안고 이곳에 와서 피신해 있던 곳이야. 아늑하고, 아름답고, 그래서 무시무시한 느낌이 드는 곳이지. ...... 이상한 일이지? 어떻게, 어느 한 구석도 닮은 곳이 없을까. 하물며, 난 우리 어머니와도 닮은 곳이 없어. 난 요즘에도 가끔 어머니한테 그때 친자감별이 정확했는지 묻곤 해. 물론 등껍질이 까질 정도로 얻어맞긴 하지만. 정해진, 넌 우리 어머닐 닮았어.”
“...얼굴이?”
“아니, 등껍질이 까질 정도로 때리는 것 말이야.”
“그.. 그 정도로 난리 피운 적은 없어.”
“있어. 안 돼, 싫어, 비켜, 딱 세 마디 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손톱으로 내 등을 긁어버리잖아. 오늘부터 니킥도 추가시킬까?”
“......”
그가 부드럽게 웃는 소리가 고요한 달빛처럼 낮게 울렸다.
“전화해서... 여자 불러서.. 했어요?”
“버렸어.”
그가 재킷의 호주머니를 들추며 빈 것을 보여주었다.
팔짱을 낀 채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투명한 창가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보였다.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욕망을 풀지 못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상처 받은 듯한 그 짐승을 불렀다. 그가 천천히 걸어와 바로 옆에 털썩 앉는 순간, 나는 미련하고 예민한 초식동물처럼 그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 기민한 감각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 말이 사실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몸에서 맡아지는 냄새는 응축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나랑 해요.”
여지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당돌하게 말했다. 순간 그의 눈빛이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혔다. 그리고 또 다시 피식 웃었다.
“됐다.”
“해요.”
“싫어.”
“왜요?”
“중간에 그만두면 나만 힘들어.”
“...각서 쓸게요.”
“하...! 끝까지 한다고 각서 쓰고 하는 사람은 없어.”
“내일 아침에, 도망 안 간다고... 각서 쓸게요.”
“......그래도 싫어. 내가 떼써서 강제로 하는 것 같잖아, 자존심 상해, 싫다.”
“그..그럼, 내가 떼써서 하는 걸로 해요.”
“정해진.”
“해요.”
이상한 오기가 솟았다. 내가 모르는 얼굴을 가르쳐준 남자에게 나는 순하지만 거친 소처럼 머리를 들이밀었다. 태준은 그런 짐승의 거칠음을 어떻게 조절할 줄 아는 능숙한 조련사처럼 내 열에 들뜬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심장이 머리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광광거리는 소리가 고막 근처에서 크게 들렸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끝까지 거칠어지지는 못하는 짐승답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내 이마에 와 닿는 그의 차가운 이마를 느꼈다. 그가 두 손으로 내 귓불을 건드렸다.
“도망치면 안 돼.”
나는 여전히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돼요, 싫어요, 비켜요, 버둥거려도 안 놔줘.”
실눈을 뜨며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얼굴이 잡힌 채 입술이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