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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씨, 내일 저녁 시간 있습니까?”
책상에 고개를 콕 처박고 열심히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문득 정수리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김태준이 사무적인 표정으로 내 답변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순간 사무실 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된 것은 물론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이게 또 무슨 수작인가 싶어 답변을 머뭇거리고 있는데 옆자리의 최선배가 오히려 ‘해진씨, 팀장님이 물으시잖아’하고 재촉했다.
“아... 예, 시간은 있는데요.”
“그럼 아르바이트 좀 해요.”
“저기.. 내일 목요일인데요.”
“그런데?”
“내일도 전 여기 나와서 일 하는데 무슨...”
“아니, 이것 말고 내 개인 업무 좀 도와달란 말입니다. 최경식 시인 알지요? 최 시인 원고를 이번에 우리 쪽에서 맡았으면 하는데, 워낙 경쟁이 심해서, 나름 로비라면 로비로 술 한 잔 대접할까 해서요.”
“아니, 팀장님. 그런 걸 직접 하시게요?”
태준의 말을 듣고 있던 최선배가 또 화들짝 반색을 하며 끼어들었다. 그 말에는 ‘팀장이 뭘 그런 하찮은 데에까지 나가느냐’하는 아부의 의미와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느냐’하는 비꼼의 의미가 동시에 함유되어 있었다. 나는 태준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최경식 시인을 워낙 좋아하기도 해서 말이죠. 팬으로서 대접하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어때요, 해진씨. 나 도와줄 수 있어요?”
그가 최경식 시인을 좋아한다는 말은 절대,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최경식이 누구였던가. 마흔 줄의 남자가 그토록 애절한 시를 쓰는, 이제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서정시를 다시 부활시켰던 시인이 아닌가. 정해진, 순정의 게이 마음에도 꽃처럼 아른거리는 시인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서정 시인을 감히, 인상부터가 삐딱한 김태준 따위가 좋아한다니, 어쩐지 순수가 더럽혀진다는 생각에 나는 몰래 몸서리를 쳤다.
“그..그래도 팀장님, 전 술도 잘 못하는데요.”
“아, 그건 내가 아주 잘 알지. 걱정 말아요, 정해진씨한테 술 같이 마시고 흥 돋우란 말은 안 해요. 내가 말하는 아르바이트는, 대리운전을 말하는 겁니다. 최경식 시인, 취향이 고상하고는 멀어서 룸살롱이나 고급 바에 데려갔다간 단박에 뒤통수 까인다는 말이 있어. 따로 대리운전을 부를 만한 곳에 갈 순 없으니까. 어때요, 괜찮아요? 참, 운전면허는 있어요?”
“있어요. 할게요.”
못해도 할 수 있나, 무조건 한다고 해야지. 나는 보이지 않게 입을 삐죽이며 얼른 대답했다. 그러자 태준 역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짤게 끄덕이곤 팀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곧 직원들에게 질문공세를 받아야 했다.
“웃겨, 룸살롱에만 대리 있나? 요즘엔 그냥 콜로 다 되던데. 그리고 정 안 되면 택시 타면 되지. 괜히 자기 편하게 부려먹어. 그죠, 해진씨?”
“예.”
“그런데 왜 하필 해진씨지? 그냥 아르바이트생이니까 제일 만만해서 그런가? 해진씨, 혹시 팀장이랑 따로 친분 관계 같은 거 있어요?”
“아니요.”
“참, 해진씨. 아무리 대리 아르바이트로 나간다지만 그래도 술자리에 같이 앉아있긴 할 테니까 최경식 시인 대표 시 정도는 외우고 가는 게 좋을 텐데, 최 시인 시집은 읽어본 적 있어요?”
“예.”
“그래도 참 안 됐다. 술자리에 불려나가서 술도 못 마시고 대리나 하고. 아르바이트비 왕창 뜯어내요, 알았죠?”
“예에...”
다시 원고에 고개를 콕 처박고 ‘예, 아니요’로만 대답하자 금세 시들해졌는지 다들 또 우르르 흩어져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조금, 피곤했다.
* * *
시인은, 내가 알던 시인이 아니었다. 아니, 시집 안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작은 흑백 사진 속의 인물과는 분명 동일 인물이었지만, 술자리에서의 그는 내가 예상했던 시인이 아니었다.
술자리는 역시 고급 바나 룸살롱이 아닌 조촐한 술집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김태준의 대리운전자로 나왔다는 핑계로 시인이 집요하게 건네는 술잔을 겨우 물리칠 수 있었지만, 결국 태준의 눈치로 딱 한 잔만 받고 또 딱 한 모금만 마셨다. 내가 눈을 질끈 감고 잔뜩 인상을 쓴 채 소주를 넘기자 시인은 아이처럼 손뼉까지 치며 좋아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소주와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김태준이 시인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홀짝홀짝 잘도, 그러나 역시 그리 인연은 없는지 맥주나 양주를 마실 때와는 달리 약간 미간을 찌푸린 채 마시는 것을 보는 것은 이쪽도 꽤나 재미있었다. 그러나 한 병 두 병, 테이블 위에 쌓이는 빈 소주병이 늘어날수록 시인은 점점 본색을 드러내는 듯했다.
“내가 그걸 따먹을 수도 있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아까워. 아아, 처녀 맛을 못 본 지 너무 오래 됐어. 어때, 김 대표. 아직 젊은데, 주위에 삼삼한 처녀들 좀 소개시켜줘요.”
시인은, 이제 우리 시대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서정시를 다시 부활시킨 시인은, 그저 여자나 밝히는, 머릿속에 섹스 생각밖에 없는, 그것도 처녀와의 섹스 생각밖에 없는 지독한 마초였다. 같은 남자가 들어도 원색적이고 민망한 대화 내용에 목소리는 또 얼마나 컸던가. 주위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자들이 힐끗거리기도 하고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욕설을 내뱉기도 하고, 기어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또각또각 신경질적으로 하이힐 소리를 내며 아예 가게에서 나가버리기까지 했다.
얌전히 오징어 다리나 씹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태준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점잖게, 그러나 내용을 듣고 보면 똑같은 말을 지껄여댔다. 오징어 다리만으로도 체할 것 같아 나는 손을 번쩍 들어 사이다를 시켰다. 그런 나를 보고 시인은 뭔가 재미난 것을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엇, 그렇게 마음대로 주문해도 돼?”
“예? 저... 사이다 한 병만...”
“아니지, 아니지. 땅을 파 봐. 사이다 한 병이 그냥 나오나. 요즘 젊은 애들은 고생을 너무 몰라. 노동의 가치를 모른다 이거지. 사이다 한 병 값을 해야지. 자, 두 손으로 곱게 한 잔 따라봐.”
당혹스러움에 버벅대던 나는 갑자기 불쑥 내밀어진 소주병을 받아든 채 시인의 얼굴과 김태준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까짓 남자가 남자에게 술 한 잔 따르는 것쯤이야 별 것 아니고, 아니 외려 술자리에서는 당연한 일인데, 시인의 의도는 그런 단순하고 담백한 뜻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마치 ‘따먹힌 처녀’처럼 수치스러웠고, 만나고 싶었던 시인에 대한 기대가 무너짐으로써 실망스러움을 넘어서 분노까지 느낄 지경이었다.
“뭐해? 어서.”
“......”
“안 따라줘? 에이. 김 대표, 이왕 데리고 나올 거면 삼삼한 처녀나 데리고 나올 것이지 이렇게 뻣뻣한 사내 녀석을...”
“예, 이 녀석이 숫기가 좀 없습니다. 이리 줘. 받으십시오, 그냥 제가 계속 따르겠습니다.”
정말 빳빳하게 굳은 내 손에서 소주병을 낚아챈 태준은 좀전처럼 시인의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 남아있던 술로 시인과 잔을 맞춘 후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그의 미간이 또 살짝 찌푸려졌다. 나는 남자한테는 별 것도 아닌 일로 괜히 내빼서 분위기를 흐린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고 무안하기도 해서 씹던 오징어 다리를 다시 질겅거렸다.
“선생님, 제 잔도 비었습니다.”
“응?”
무릇 술잔이란 눈치껏 서로서로의 비운 것을 확인하고 먼저 따라주고 여전히 빈 잔에는 슬쩍 눈치만 주고 마는 것을, 김태준은 한 번에 털어 넣은 빈 잔을 내려놓자마자 시인에게 자신의 잔이 비었음을 알렸다. 자연스레 주고니 받거니 해야 하는 술자리에서 그런 행동은 어찌 보면 참 싸가지 없는 행동 되겠다. 나는 종업원에게 건네받은 사이다를 혼자 따르며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아, 그래. 자, 들어요, 이번에도 시원하게 한 번에 쭈욱 털어 넣어! 하핫! 김 대표, 성격 참 마음에 들어.”
“예, 저도 선생님 인생관이 참 마음에 듭니다.”
“응? 어떤 거? 설마 처녀 사냥? 으하하핫!”
“예, 그것 말입니다. 이왕이면 순진한 녀석을 길들이는 맛이 좋죠. 내가 뚫어놓은 길이 어떻게 변했나 궁금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끼이이익-!
“뭔가?”
거칠게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자 시인이 흐리멍텅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김태준은 모른 척 하며 시인에게 받은 소주를 홀짝였다. 나는 앞니로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놓으며 겨우 떨리지 않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화장실이요.”
* * *
평일 저녁인데도 길은 지독하게 막혔다. 틀어놓은 라디오 뉴스에서는 정체된 도로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정체되어 있던 도로였고 앞으로 가야하는 도로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룸미러로 뒷좌석을 흘낏 살피자, 태준은 잠이 든 듯 고개를 의자 뒤로 완전히 젖힌 채였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시인의 집에 먼저 데려다 주고 이제 김태준의 집으로 차를 모는 중이었다. 시인을 집 거실까지 데려다주며 봤던 그의 부인은, 박색이었다. 그러나 그게 오랜 세월 그의 바람기로 마음고생을 해 인상을 찌푸린 날이 많은 탓에 원래는 고왔던 얼굴이 절로 박색으로 변했으리라, 나는 짐작했다.
“실망 했나?”
“......”
잠든 줄 알았던 태준이 문득 말을 걸어왔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온 이후로 일부러 그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으므로 계속 기분이 상한 티를 내야하나, 아님 내 일이 아니라는 듯 대해야 하나 고민했다. 조금씩 움직이던 차량 덕분에 나 역시 조금씩이라도 속도를 내며 슬금슬금 앞으로 가고 있는데 딱 우리 앞에서 빨간불이 걸렸다. 신경질이 나서 손가락으로 다급히 핸들을 두드렸다.
“최경식 시인, 좋아했지? 저번에 며칠 동안이나 책상 위에 그 사람 시집 꽂아뒀던 거 알아. 뒤집어 놔서 모를 줄 알았지?”
“......”
“나도 소문만 들었지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다시는 안 읽을 거예요, 그 사람 시집.”
“흥. 예술가와 그 작품을 동일시하지 마. 그 사람이 시를 쓸 때 ‘최경식’으로 시를 쓴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시인을 흔히 무당으로 표현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야. 모르지, 처녀나 밝히는 최경식이 진짜인지, 절절한 시를 쓰는 최경식이 진짜인지. 아니, 누가 알아? 따먹은 처녀한테서 그렇게 절절한 영감을 얻는지도.”
“다시는!”
마침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었다. 출발하지 않자, 뒤에서 곧 요란한 클랙슨이 울렸다. 나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이를 악물고 룸미러로 그를 노려보았다. 김태준은 여전히 고개를 젖힌 채 그러나 눈을 뜨고 역시 룸미러로 내 눈을 응시했다. 뒤에 꼬리를 문 여러 대의 차가 동시에 클랙슨을 울리기 시작했다.
“다시는, 따먹는다느니 하는 천박한 말 쓰지 마.”
나름대로 위협적으로 경고했다. 룸미러 안의 그의 입가가 한쪽으로 휘었다.
“흥. 역시, 내가 처음이었군. 어쩐지, 심하게 울더라니.”
빠앙-----
핸들 사이의 클랙슨을, 나 또한 힘주어 꾹 눌렀다.
* * *
“정해진씨, 오늘 점심에 시간 있습니까? 식사 하는 김에 나하고 같이...”
“아니요, 선약이 있습니다.”
“저런. 홍종욱 작가하고 점심 약속이 있어서 데려가려 했더니. 난 또, 저번에 정해진씨가 홍 작가 팬이라고 떠드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 같아서.”
“......”
머뭇거리는데 옆에서 또 냉큼 최선배가 끼어들었다.
“해진씨,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잘 대답해.”
그에 응원을 받은 듯 태준은 느긋한 태도로 내 책상에 한쪽 팔을 기대어 삐딱하게 선 채 다시 물었다. 고개를 약간 돌린 자세여서, 그의 정면 얼굴은 나밖에 볼 수 없었다.
“정말 선약 있습니까?”
“예! 정말 중요한 선약이 있습니다!”
홍종욱이라면 어릴 때부터 직접 촌스러운 감상문까지 팬레터로 보낼 만큼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였지, 김태준의 이죽거리는 얼굴을 보자 없던 약속이라도 만들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함을 빽 지르자 사무실 안 사람들이 놀란 토끼눈이 되어 팀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정말 안타깝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유유히 팀장실로 들어가는 그를 나는 이를 바득 갈며 노려보았다. 팀장실의 문이 달칵 닫히자, 또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 주위를 둘러쌌다.
“해진씨, 제 정신이야? 이럴 때는 선약이 있어도 없다고 하고 따라갔어야지.”
“아, 예.”
“정말 팀장하고 아무 친분관계 없어? 아르바이트생한테 저렇게 신경 써줄 타입이 아닌데.”
“아, 예.”
“너무 아깝다. 홍종욱은 인기 작가로는 드물게 인간성까지 좋다고 하던데. 이럴 때 얼굴 알아두면 나중에도 좋을 텐데.”
“...예에....”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뭘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냐? 방학인데 놀지도 못하고 일하는 거 기특하게 여겨 내 친히 같이 점심 먹어주러 왔건만.”
“왜 하필 오늘 점심이었냐?”
“뭐야? 이놈이 감히!”
삼계탕 속의 닭다리를 뜯던 젓가락을 들고 머리를 내려치려는 것을, 역시 삼계탕 속의 닭다리를 뜯던 젓가락을 들어 막아냈다. 유치한 장난에 맛 들인 듯 희철은 포기하지 않고 ‘이얍이얍’ 기합까지 넣어가며 공중에서 허튼 젓가락질을 했다. 그리고 기어이 가게 주인이 ‘에헴’ 소리를 내며 눈치를 주고서야 머리를 긁적이며 얌전히 다시 닭다리를 뜯었다.
“어서 오세요.”
아예 닭다리를 들고 뼈까지 발라가며 쪽쪽 빨아대고 있는데 마침 정면으로 마주한 가게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들어왔다. 나는 닭다리의 뼈를 입에 넣은 채 김태준과 홍종욱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김태준은 처음에는 저도 놀란 듯 눈에 띠지 않게 머뭇거리다가 곧 그런 나를 모른 척 하며 뒤쪽의 테이블로 향했다. 나는 여전히 쪽쪽 대며 닭다리 뼈를 빨고 있는 희철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야, 왜 하필 이곳이었냐. 아니, 왜 하필 삼계탕이냐.”
“이놈이 정말. 더위 먹지 말라고 몸보신 시켜주려고 왜!”
“쉿, 쉿. 조용히. 조용히 해.”
나는 황급히 녀석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희철은 내가 제 닭다리를 뺏어가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며 발악을 했다. 나는 뒤쪽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대각선 쪽 테이블에 앉은 김태준은 주문을 하며 그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정해진씨. 이리 와서 인사 하시죠.”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가 희철이 대뜸 ‘너 부르는 거 아니냐? 누군데?’하고 떠드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힘없이 일어나 휘청이며 뒤쪽의 테이블로 향했다. 그리고 작품도 완벽한데 인간성까지 좋다는 대 소설가 앞에서 공손히 자세를 바로 하고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저기... 팬입니다.”
“우리 출판사에서 교정교열 담당하는 아르바이트생입니다. 지금은 아직 오탈자나 수정하는 정도지만, 어쩌면 언젠가 선생님 원고를 최종적으로 손볼 편집자가 될 지도 모르지요.”
“아, 그렇습니까? 잘 보여야겠네요.”
“아..아니요, 선생님.. 저야 말로.. 여..영광입니다..”
귀가 붉게 물들었다. 보나마자 김태준은 비웃고 있을 게 뻔했다. 인자한 얼굴의 노(老) 작가는 먼저 악수를 청하기까지 했다. 나는 성은이라도 입은 것 마냥 황공한 마음으로 굽신거리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야, 누군데?”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자 용케도 더 이상 삼계탕에 손을 대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희철이 이제야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낮게 속삭였다.
“넌 내 친구로서 자격이 없다. 홍종욱 작가님 아니냐!”
“아니, 저기 젊은 사람 말이다.”
“아, 저건 그냥... 팀장.”
“뭐? 저렇게 젊은데?”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셨댄다. 말이 팀장이지 대표나 마찬가지야. 사무실도 따로 쓴다.”
“뭐야, 그런 거였어? 쳇, 재수 없다.”
“응, 재수 없어.”
“꼭 저런 새끼가 교묘한 수법으로 군대도 안 갔다 오지.”
“응, 그랬을 거야.”
“아마 이중국적일 거야.”
“응, 그럴 거야.”
그렇게 대범하지도 못하게 작게 속삭이며 수다를 떨던 우리는 결국 다 식은 삼계탕을 마저다 긁어먹고, 학생들이 국물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도 먹었다며 주인이 서비스로 나눠준 수박까지 먹었다. 그리고 그동안 김태준과 홍 작가는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 계산대로 걸어갔다. 내가 얼른 뒤따르며 ‘안녕히 가십사’ 또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홍종욱은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좋은 편집자가 되라고 격려해주었다. 김태준은 작가에게 먼저 나가시라 안내한 뒤 지갑을 꺼내었다.
“이 친구 테이블 값까지 같이 계산 해주세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
“...고맙습니다.”
중얼거리듯 인사를 하자 그는 내 인사를 들은 건지 만 건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하고 좀 더 크게 말하자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었다. 한쪽 눈가가 찡그려져 있는 게, 뭔가 불만인 표정이었다. 또 뭘로 시비를 거는 건가 싶어 뒤로 주춤 물러서자 이번엔 그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리고 내 뒤쪽을 힐끗 본 후,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뭐야, 고작 저런... 취향이 저런 타입이었나?”
“예? 그게 무슨...”
뭐가 뭔지 몰라 변명다운 변명도 하지 못했는데,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그는 그대로 걸음을 돌려 나가버렸다. 나는 입구에 멍하니 선 채 그가 흘깃거린 쪽을 돌아보았다. 희철이 수박씨를 뱉으며 ‘야, 저 사람이 우리 계산해준 거냐?’하고 외쳤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후, 한숨을 쉬며 걸어가 의자에 털썩 앉자 희철이 테이블에 몸을 바짝 붙여왔다.
“야, 그래도 그렇게 재수는 아닌 것 같다.”
“...왜 하필 너냐?”
“뭐? 무슨 말이야? 이게 오늘 계속 왜 이래.”
머리를 쥐어박으려다 나는 볼멘소리를 내는 희철이 쥔 수박을 냉큼 빼앗았다.
“문희철, 다이어트 안 하냐?”
“수박은 살 안 쪄!”
“삼계탕을 국물까지 박박 긁어먹었잖아!”
“씨... 그래도 5킬로 빠졌다, 뭐.”
“더 빼!”
더 빼란 말이 그리 충격적이었는지 희철은 입을 헤 벌린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이 또 안쓰러워, 나는 빼앗은 수박을 다시 손에 쥐어주며 달래었다.
“네가 키도 크고 기본 골격이 커서 그렇지 솔직히 비만은 아니지. 그냥 조금만 더 빼면 될 것 같아.”
“정말?”
“...응. 먹어라, 수박.”
그래서 희철은 수박도 참 맛있게 먹는다며 칭찬한 주인이 내온 참외까지 모두,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