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들의 로맨스-1화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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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에 관해 흔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 그러나 죄책감과 증오로 물든 핏빛 불륜이 어떻게, 발음조차도 휘파람처럼 가볍고 노란 개나리꽃처럼 밝고 맑은 색채를 띠는 ‘로맨스’로 둔갑할 수 있을까.

이것은, 설령 당신들의 로맨스일 수는 있으나, 그러나, 나의 ‘죄’에 관한 이야기다.

애인이라고 말하긴 뭣하고 섹스파트너라고 하기엔 더욱 뭣한, 현재 내가 사귀고 있는 사람은 유부남이다. 물론, 대범하지도 못하고 영악하지도 못한 내가, 그리 정직하진 않으나 또 그렇다고 그리 부도덕적이지도 않은 내가 처음부터 유부남을 만난 것은 아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열아홉, 그리고 그는 스물넷, 아직 그가 왼손 약지에 어떤 것도 끼워져 있지 않았을 때였다.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다 어느 날 호기심에 들어간 게이바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날 바로 그와 잤다. 게이로서의 첫 데뷔가 어떤 느낌이었냐 하면... 아프고 아프고 무섭고 무서웠다. 쾌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친근하게 다가와 부드럽게 달래며 꼬셔놓곤 아무리 울며 난리를 쳐도 봐주지 않고 꿰뚫는 남자를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지만, 다음날 아침, 아직 잠들어 있는 미끈한 콧날을 가진 남자의 얼굴을 한동안 노려보다가 문득 눈을 뜬 그와 시선이 마주쳐, 엉덩이를 문지르며 날쌔게 모텔에서 도망 나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삼년 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취향인 남자들을 보면 멍하니 넋을 빼놓고 구경하긴 했지만, 스스로 게이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첫 경험의 기억이 너무 선명히 남아 누구와도 잠자리를 할 수는 없었다. 가끔 인터넷 상에서 ‘좋은 만남’을 기약하며 서로의 신상정보를 교환한 후 실제로 만남을 가진 적은 있었지만, 상대가 모텔 앞으로 끌고 가려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게이바는 쳐다도 보지 않았고, 커밍아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나는, 말이 게이지 정작 게이 노릇도 못하는 반쪽짜리였다. 그리고 삼년 후, 더 이상 집에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교사 임용고시와 학원 강사 말고는 도무지 취업할 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국문과 학생이라는 타이틀을 쥐고, 그나마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출판사였다.

<태인 문학>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예부터 태인기업과 정치인들의 더러운 돈이 모였다 흩어지곤 하는 비밀 저장고로 각인된, 한마디로 그리 문학적이지 않은 출판사였다. 그러나 이것저것 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아르바이트 사이트에 올라온 ‘교정교열’ 일자리를 보자마자 지원서를 대충 휘갈겨 써넣고 출판사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물두 살이 된 나는 스물일곱의 그와 만났다.

*   *   *

“김태준입니다. 저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실수투성입니다만, 어쨌든 팀장이니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봐요.”

“정해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맞잡은 손 사이로 내 것임이 확실한 땀이 주룩 흘렀다.

나는 그가 나를 알아볼까 걱정스러웠고, 이제 갓 학생 티를 벗은 새파랗게 젊은 그가 어떻게 팀장 자리에, 그것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서 그렇게 빨리 팀장이 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내 그런 의문은 입사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모두 해결되었다. 모쪼록 기업이나 자영업이나, 행여 농업이나 축산업이라 할지라도, 그에 속한 직원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화장실에서의 잡담’이다.

아침부터 잘못 먹은 상한 김밥 때문에 배를 부여잡고 들어앉은 내가 문 밖의 ‘익명의 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는 즉, 김태준이가 바로 태인기업 회장의 늦둥이 외동아들이라는 것, 날 때부터 은수저를 들고 태어난 대한민국의 건장한 청년들이 그러하듯 김태준 또한 유학을 갔다왔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출판사 하나를 통째로 이어받았다는 것, 아마 얼마 안 있어 태인기업에 까지 이사 즈음 되는 자리에 떡하니 앉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차마 물을 내리지 못하고, 이번에는 쥐난 다리를 부여잡고 웅크려 있으며 덤으로 들은 이야기란 즉, ‘새파랗게 어린 놈’이 권위주의에만 물들어서는 저보다 한참이나 연장자인 입사 선배들을 아무렇게나 쥐고 주무른다는 것-그러나 출판사에는 ‘한참이나 연장자’라고 할 만한 진짜 연장자는 없었다-, 깔끔 떠는 놈이 알고 보면 룸살롱의 황태자라고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 예의 바른 척은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든 이를 아랫사람 대하듯 한다는 것, 그러니까 한마디로, 김태준은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리 청결하지 않은 곳에서 나는 김태준의 첫인상에서 느낀 거칠 것 없는 태도와 약간은 사람을 깔보는 듯한 시선의 배경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진짜 걱정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아무런 아는 체도 하지 않았지만, 인사 정도만 할 뿐 그저 지나칠 뿐이었지만, 고개를 숙이는 나를 향해 묘하게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응시해 오는 게, 그리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로부터 얼마 후, 이번에는 화장실도 아니고 ‘익명의 그들’로부터도 아닌, 당사자로부터 직접 해결될 수 있었다. 그것은 명사수가 멀리서 쏜 화살처럼 내 정수리 한 가운데에 정확히 날아 들어왔다.

“정말 나한테 궁금한 것 없습니까?”

“예? 아... 일은 주위에 선배들이 잘 돌봐주시고 있습니다. 실수도 곧잘 하지만...”

“아니, 그런 것 말고.”

“무슨...”

“내 성적 취향이라던가, 삼년 전 즈음에 자주 가던 바(bar)에 대해서 말입니다.”

학교 수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모든 수업을 오전으로 밀어놓고, 출판사에 양해를 구해 점심 즈음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을 하는 식이었다. 어차피 월급도 시간당으로 계산되어 나오는 데다, 때로는 일이 밀리면 집으로까지 원고를 가져가 마무리 지어 내놓는 것을 보곤 아무도 이견을 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실수 없이 일을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나는 정직원들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예를 들면, 정해진 일 외에도, 혼자 남은 회사에서 바닥을 쓸고 선배들의 책상을 정리하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등의, 아주 하찮은 일까지도 말이다.

그 날도 역시 늦은 저녁까지 눈이 충혈 될 정도로 원고를 들여다보고, 부지런한 청소부처럼 이곳저곳을 쓸고 닦으며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집에 가져가야 할 원고도 없고, 내일이 주말이라는 안도감에 개미처럼 일하는 것도 그리 억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때까지도 자리에서 꼼짝 않고 앉아 내가 정리한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침 내가 청소까지 다 하고 어설프게 인사를 한 후 가방을 들자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려다 줄게요.”

그는 뭔가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와 함께 단둘이 있는 것은 어쩐지 불편해 피하려 했지만, 늦은 시간이었고, 그 시간에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결국 그의 새카맣고 위압적인 세단에 얻어 탔다.

“해진씨 혹시 완벽에 관한 강박관념 같은 것 있습니까? 아니면 결벽증 같은 것 있어요?”

그가 또 예의 그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라디오 볼륨을 줄이며 물었다. 나는 어물거리며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예? 아니요, 그런 것... 없는데요.”

혹 내가 잘못한 것이 있나싶어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신호등을 기다리며, 결국 내가 먼저 ‘제가 뭘 실수했나요? 아까 원고...’하고 죄인마냥 웅얼거리자 그가 또 질 나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을 잘 해서요. 부지런하기도 하고.”

미심쩍기는 했지만, 스스로 생각해봐도 딱히 실수한 것은 없어 그냥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파란불이 반짝 켜지는 것을 보며 나는 들릴 듯 말 듯 ‘고맙습니다’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열심히 해요’하고 가볍게 답했다.

“그런데.”

한참을 묵묵히 가는 중, 이번에도 역시 가로막힌 신호등 아래에 천천히 미끄러지듯 차를 세우며 그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상반형 접속부사에 덜컥 겁이 났다. 역시 내가 알아채지 못한 실수가 있었나보다 싶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해진씨. 그렇게 너무 정확하게 일처리 하면 주위에서 심심하지 않겠어요? 가르쳐주세요, 하고 애교도 좀 떨어 봐요. 가끔은 실수도 하고 게으름도 좀 피워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알죠? 하지만 요즘 시대엔 개미는 통하지 않아요. 지금이 새마을운동 하던 70년대도 아니고. 오히려 요즘엔 너무 열심히 했다간, 베짱이한테 당하기 딱 좋지. 해진씨 들어온 이후로 다른 직원들은 오히려 나태해진 것 압니까?”

“죄송합니다..”

“하...! 이거 정말 곤란하네. 내 말 못 알아듣겠어요?”

일개 아르바이트생이 팀장에게 할 말이란 자고로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여기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데요.’ 이 정도가 전부다. 사실 그대로 말하자면, 나는 그때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지는 당연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것은 무리다. 할 수 없이 나는 그저 처분만을 기다린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내 말은, 너무 그렇게 철갑 두른 채 일하지 말란 얘깁니다. 나한테 혼나지 않을 정도로 게으름 피워도 괜찮아요. 팀장이란 사람이 아르바이트생한테 게으름을 조장할 정도니 해진씨 문제점이 뭔지 알겠어요? 좀 영악해지란 말입니다.”

“예에...”

“그 대답을 보니 아직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좋아요, 그럼 간단히 말할게요. 질문 하고, 파고들고, 이용할 건 적당히 이용하란 말입니다. 됐어요? 이제 알아들었습니까?”

“아, 네.”

그러니까 그의 말인즉, 그가 내게 처음 했던 말처럼, 궁금한 것은 혼자 어떻게든 하려말고 우선 도움을 청하고, 적당히 게으름은 피우되 일에 관해서는 선배들과도 경쟁할 수 있도록 경쟁력을 키우고, 이 모든 것이 곧 정직원 채용의 길과 연관된다, 뭐 이런 뜻인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밝은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도 이번에는 알아들어 다행이라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자, 그럼. 나한테 궁금한 것 없습니까?”

그가 핸들을 꺾으며 또 질문했다. 둘 다 몸이 왼쪽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 내가 하는 일이 그저 단순노동과 다를 바 없다는 결론에 그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딱히... 아직은 없는데요.”

그러자 그는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 혹은 ‘뭐 이런 게 다 있나’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흘깃거렸다. 그리고 또 ‘하!’ 같잖은 듯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운전석의 창문을 반 정도 내린 후 담배를 꺼내 물더니, 그러나 불도 붙이지 않고 담배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열린 창문 틈으로 아직은 찬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그 바람에 눈을 가늘게 뜬 채 또 정체 모를 웃음을 얼굴에 띠웠다. 나는 순간 불길해진 마음에 그의 옆얼굴을 쳐다보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할까? 정해진씨, 정말 나한테 궁금한 것 없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조금 묻어난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궁금한 것들, 예를 들자면, 그의 성적 취향이라든가 삼년 전 자주 다니던 바(bar) 같은 것이 궁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그저, 아연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던 것 같다.

틀어놓은 라디오 뉴스에서는 내일의 날씨를 전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맑은 여자 아나운서는 한껏 들떠 내일은 때 아닌 봄눈이 오겠다고 전하여 안전 운전과 함께 모처럼 집안에서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낼 것을 권유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태준은 그런 나를 흘낏 한번 바라본 후 거칠게 핸들을 돌렸다. 기우뚱, 몸이 기울었다. 유턴을 하고 검정 세단이 달리는 길은, 내가 그에게 알려준 방향과 반대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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