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137)

-128화-

“얼마나?”

아주 많이요, 라고 대답하는 것은 유치했기 때문에 린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카시어스 때문에 마음이 약해졌다. 자신을 구명줄을 붙잡듯 껴안았을 때도 그랬다. 그러나 한껏 치솟은 의욕은, 실망과 미움은 쉽게 사라질 게 아니었다.

린델은 얼굴에 더욱 힘을 주며 목을 가리켰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다른 사람들 눈에 띄는 곳에 흔적 남기는 걸 싫어해요. 그걸 아시면서 계속 이러시니까 화가 났어요.”

“이런.”

“오늘 낮에 한 장교가 알아봤어요. 전 이런 거 싫다고 분명히 말씀드렸고, 그래서 앞으로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린델이 싫다는 소리를 두 번이나 했다. 그건 아주 명확한 신호였다. 카시어스는 입매를 당겼다. 지금은 린델을 달래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자제는 하겠지만, 그러지 않겠노라고 약속은 못 해. 지키지 못할 테니까.”

“폐하.”

“네 목에 남긴 키스 마크는 내 애정의 흔적이야. 그리고 욕심쟁이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지. 감히 짐의 것을 넘보지 말라는 뜻으로 말이야. 부디 즐기도록 해.”

카시어스의 눈빛과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사랑한다. 아낀다. 보호하겠다. 그래서 린델은 더 답답했다. 카시어스가 기분이 상했을 때 대화를 끊고 뒤돌아 가버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은 바보같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즐기고 싶지 않아요.”

“린델.”

“폐하는 이미 약속을 어기셨어요. 뜻대로 하라고 하셨으면서 칭호를 내리셨죠.”

“받아야 할 때가 됐어. 3개월이나 지났으니까.”

린델에게는 겨우 3개월이었다. 그런데 카시어스는 그게 최대 한계였단다.

그가 자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카시어스가 아무리 그게 당연한 거라고, 즐기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에는 연륜도, 능력도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도 카시어스는 밀어붙이려고만 했다.

그게 화나고, 또 이상하게 슬펐다.

“진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화가 났다면, 소리를 쳐야지.”

소리치라 말한 카시어스는 린델의 뺨을 만지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린델이 뒤로 한 발 물러나면서 손은 허공을 더듬었다.

놀란 카시어스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린델이 선수를 쳤다.

“돌아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 상황에서?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이냐?”

카시어스는 린델이 자신의 손을 피했다는 사실에 꽤 충격을 받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이유를 들어야 했다.

겨우 칭호 때문일 리 없다고, 뭔가 심각한 일이 있을 거라고 카시어스는 생각했다. 작은 불만이 쌓여 생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은 제대로 이야기를 못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폐하. 뒤센트 자작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린델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밖에서 뒤센트 자작의 도착을 알렸다. 뒤센트 자작이 방문하면 우선 알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카시어스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린델을 보며 혀를 찼다.

린델을 기다리지 않고 시종을 보낸 것은 급히 뒤센트 자작과 동행할 중요한 손님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린델을 만나 바닥을 기는 컨디션을 회복하려고 했다. 다정한 미소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린델은 화를 내고, 손님은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일이 이상하게 꼬이고 말았다.

“물러나겠습니다.”

잠깐의 정적 끝에 린델이 한 발 더 물러났다.

“고집쟁이로군.”

기어코 쓴 소리를 내뱉은 카시어스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마음 상한 린델을 달랠 재주도, 시간도 없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다. 물러가라.”

“물러가옵니다.”

가볍게 절을 한 린델이 그대로 집무실을 떠났다. 아직 뒤센트 자작의 입실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시어스는 잠시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정적은 익숙한 것이었다. 다만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혼란이 낯설었다. 시리고 욱신거리는 감각은 오랜만에 느끼는 것이었다. 들끓는 마력이, 거기에 반응하는 구속구가 육신과 정신을 좀 먹었다.

세 개의 반지를 빼두었기에 그나마 견딜 만했지만, 감각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은 자신 있었다. 그런데 린델이 얽히면 그게 불가능해졌다. 오늘은 특히 심했다.

카시어스는 눈을 감고는 크게 숨을 쉬었다. 이제 손님을 맞이해야 할 때였다.

카시어스는 전에 없이 냉담한 얼굴로 뒤센트 자작과 그의 동행인을 맞이했다. 카시어스 때문에 집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얼어붙은 상태였다. 세 개의 반지를 벗었기에 그나마 이 정도였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 뒤센트 자작이 인사를 했다.

“뒤센트 자작은 물러나라.”

“명 받듭니다.”

카시어스의 명령에 뒤센트 자작이 동행인을 두고 퇴장했다. 카시어스와 마주하게 된 젊은 사내는 뒤센트 자작이 사라지자마자 입을 열었다.

“할엔라드의 황제시여.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시어스 눈에 갈색 머리의 사내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평범하고 말쑥한 귀족 청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신분은 특별했다.

일로드 스피로스.

시아무크 제국의 차랄랑포스 대공작인 그는 세무흴의 동복동생이었다. 세무흴이 형제들을 죽이고 황위에 오를 때 가장 활약한 인물로, 그 공을 인정받아 대공작이 되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번 전쟁에서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군인으로 경력을 쌓은 그가 제외당할 정도로 세무흴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인지, 아니면 견제를 받은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바로 지난 전투에서 세무흴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세무흴의 친동생에 대공작이라는 지위는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황제의 신하라는 뜻이었다. 그런 그가 온갖 인맥을 동원해 뒤센트 자작에게 선을 댔다. 그러고는 할엔라드 황제를 직접 만나 뵙고 싶다는 뜻을 타진해 왔다.

그의 행동은 은밀했지만 과감했다. 틀루엔까지 직접 찾아온 다음, 뒤센트 자작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다. 카시어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듣겠다. 청하는 바가 무엇인지 말하라.”

의례적인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을 말하는 카시어스를 보며 일로드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할엔라드의 황제를 직접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에 대한 위명은 시아무크 제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화려한 미모와 악마 같은 무훈이 유명했다.

후방에서 전군을 지휘하는 할엔라드의 황제가 기사들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면 그곳에는 죽음만이 남는다고 했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도 한 합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었다.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다. 지금 카시어스가 뿜어내는 마력은 집무실 전체를 차갑고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사람 눈을 현혹시킬 만한 미인이지만 그래서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카시어스의 눈빛은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결코 우호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살벌한 분위기를 보자면 이 자리에서 목을 잘릴 수도 있었다.

일로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죽을 각오로 왔으니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형님은, 시아무크 황제께서는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유는?”

“반드시 이길 거라고 맹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석상 때문인가?”

석상이라는 말에 일로드는 흠칫했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설명이 쉬웠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다만, 그것 때문에 형님이 변하신 것은 확실합니다. 그제 하루 만에 3만 명을 잃었는데, 이 지경이 되고도 이길 수 있다고 믿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이나 내일, 사신이 도착해서 평원에 있는 시신을 수습하겠다고 할 겁니다. 그리고 수습이 끝난 직후, 바로 전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장소도 그곳입니다.”

“과격한 말이지만, 그대의 황제는 미쳤다.”

카시어스의 악담에 일로드는 반박하지 못했다. 자신의 형님은 미친 게 맞았다. 3개월 동안에 잃은 병사만 7만 명에 가까웠다. 전체 전력의 절반이 넘게 사라졌는데도 항복을 하는 대신에 다시 싸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진 채 말이다.

“형님이 처음부터 그러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궁 지하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차랄랑포스 대공. 그대는 아직 무엇을 바라는지 말하지 않았다.”

카시어스가 일로드의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말은 듣지 않겠다는 그의 행동에 일로드는 위압감을 느꼈다. 자신보다 겨우 한 살이 많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힘과 연륜이 달랐다. 제국의 황자로, 황제의 동생으로, 그리고 전장의 군인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오면서 전공을 쌓아왔던 일로드는 굴욕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겨냈다.

“시아무크의 전력은 3만 명이 겨우 넘습니다. 지원군이 도착한다고 해도 4만 명은 넘지 못할 겁니다. 사기도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전투가 벌어지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디, 제 형님을, 형님이 명예롭게 전장에서 전사할 수 있도록…….”

“말을 어렵게 하는군.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그대 손으로 직접 영광을 쟁취할 생각은 없나? 불만을 품은 자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장군과 장교들의 형님에 대한 충성심은 두텁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실질적인 무력이 없습니다.”

“각자의 사정은 언제나 있는 법이지.”

“비겁자라고 욕하셔도 좋습니다. 전투 후, 패퇴하는 병사들을 쫓지 말아주십시오. 남은 이들은 살아 돌아가야 합니다.”

비장함이 흘러넘치는 언사였다. 일견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카시어스는 적국의 황제를 찾아와 미친 황제를 죽여달라고 매달리는 용기를 가상하게 여겼다. 남은 병사들을 살려 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높이 샀다.

“짐과 화평을 할 상대는 그대가 되겠군.”

“제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신들만이 아실 겁니다.”

“배상금으로 3만 톤의 황금과 틀루엔, 에시고르, 기쉐롤트, 세 개의 성을 요구하겠다.”

“그건!”

“남아 있는 3만의 병사를 몰살시키고 시아무크의 동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집어삼킬 수도 있다. 그에 비하면 아주―”

카시어스는 아주 저렴한 가격이라고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일로드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봤지만 카시어스는 다른 곳에 집중했다.

일로드와 대화를 하면서 카시어스는 계속 린델의 기척을 좇고 있었다. 린델은 연회장으로도 숙소가 있는 별채로도 가지 않았다. 계단을 재빠르게 내려갔다가 잠시 멈춰 섰다. 거기서 제라르가 끼어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