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약혼식 다음은 피로연이었다. 약혼식의 경우 본식보다는 피로연이 더욱 길고 흥겨운 편이었다. 연회장에는 향기로운 술과 음식이 넘쳐났다. 군대를 따라다니는 악단과 음유 시인, 재주꾼이 흥을 북돋았다. 춤과 노래가, 그리고 희극이 연회장을 달구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회장 한쪽에 자리한 린델은 샴페인을 조금씩 마시며 연회장을 빠져나갈 기회를 살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린델은 더 이상 황제의 배행 마법사도, 피후견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의 총애는 여전히 일방적이었다. 공개 청혼을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린델이 후궁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린델은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최고 실력의 마법사이기까지 했다. 린델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고, 주위에는 사람이 넘쳐 났다. 단순한 안부 인사부터, 가족과 친인척이 린델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감사의 말을 하며 다가섰다.
린델도 이제 익숙해진 일이었다. 참전 이후, 전투에서 승리하고 난 다음에 열리는 연회에서 몇 번이나 같은 일이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한 명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키면 또 한 명이 새롭게 나타났다. 린델은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예. 그가 저의 조카입니다. 여동생의 하나뿐인 아들인데, 린델 경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녀석이, 노만이 직접 와서 인사드리는 게 인지상정이나, 하필이면 오늘 아침 일찍 후방으로 지원을 나갔지 뭡니까. 노만이 돌아오면 제가 꼭 린델 경 앞에 대령해 놓겠습니다.”
포병대의 장군인 닐카로오스 백작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전장에서 포병대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는 만큼, 포병대 장군인 백작이 군에서 가지는 권력은 상당한 편이었다. 그런 그도 아무 작위도 없는 린델에게 깍듯이 존대했다.
린델이 단지 황제가 총애하는 애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을 때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만큼 소중한 존재는 또 없었다. 그만큼 린델의 입지도 단단해졌다.
“저야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 걸요. 노만 경께서 끝까지 잘 버텨주셨습니다.”
“하하하. 노만이 끈기 있는 성격이죠.”
“그런데 노만 경께서 임무를 수행하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피를 많이 흘리셔서 한동안 요양하셔야 할 텐데요.”
린델의 걱정에 대답한 사람은 닐카로오스 백작의 옆에 선 굴탄 백작이었다. 그는 황제 친위군의 지휘관으로 닐카로오스 백작과는 사돈 관계였다. 어려서부터 절친했다는 두 사람은 잘 어울려 다녔다.
“노만 경이 워낙 강골이라 금방 멀쩡해졌습니다.”
“천성이 무인이세요.”
연회와 파티에 참석하면서 린델도 사교계의 화술이 늘었다. 어렵지 않게 맞장구를 쳐주며 호응했다. 그 와중에 린델의 주위로 다가온 예이크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마탑주인 예이크가 좋은 소식이라고 하면 진짜 좋은 소식이었다. 예이크는 정치적인 언사에 능했다. 린델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주목했다.
“린델 경께서 칭호를 받으실 겁니다. 이틀 후에 발표가 있을 텐데, 린델 경께서는 미리 아셔야지요.”
“오오. 축하드립니다.”
린델이 칭호를 받는다는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닐카로오스 백작이었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 역시 축하의 말을 건넸다. 린델은 감사하다고 느리게 답변하면서 예이크를 보았다. 그게 진짜냐고 눈으로 물었더니 예이크가 웃으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직접 칭호를 정해주셨습니다.”
“영광스러운 일이군요.”
“어떤 칭호입니까?”
이번에도 린델 대신에 주변 사람들이 난리였다. 하지만 린델은 어이가 없었다. 칭호 문제는 카시어스와 이미 끝난 이야기였다.
마법사에게 칭호는 가장 커다란 명예였다. 누구보다 뛰어난, 최고의 마법사라는 증명이었다. 치유 마법의 마스터가 그 증명이었다. 그러나 린델은 칭호를 받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마법을 배운 지 채 1년도 안 된 탓에 기초가 부족했다. 린델은 전쟁에서 필요한 수호 마법과 치유 마법에만, 특히 치유 마법을 마스터하는 데만 집중했다. 칭호를 받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실력이 엉망이었다.
최연소로 치유 마법을 마스터했다는 건 허울 좋은 명성이었다. 세투아는 평생 동안 빛의 마법을 레드크리스탈에 고정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니 괜찮다고 했다. 카시어스 역시 명예를 빛낼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린델은 고개를 저었다. 원소 마법과 수호 마법, 그리고 치유 마법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데도 최고의 마법사들에게 어울리는 칭호를 받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었다.
조건을 충족했는데 그게 왜 문제냐고 하는 카시어스를 설득하느라 꽤나 애먹었다. 정확히는 거의 싸우다시피 했다. 린델이 강경하게 반대하자 카시어스는 뜻대로 하라고 했다. 그게 2개월 전이었다.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칭호란다.
“폐하께서 이그니스라는 칭호를 내리셨습니다.”
“오, 멋지군요.”
“불꽃과 벼락이라. 강력한 칭호인데, 어떻습니까? 린델 경.”
굴탄 백작이 린델의 의향을 물었다. 심사가 잔뜩 꼬인 린델은 좋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황제의 선물을 받았으니 겸양을 떨어야 했다.
“과분한 영광을 주시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그니스라면…… 폐하께 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폐하께서는 불꽃을 닮으셨잖아요.”
부끄럽다는 의례적인 말이었고, 그 뒤에 이어지는 질문이 진심이었다. 카시어스와 더 잘 어울릴 거라는 소리는 칭찬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중의 의미를 알아들은 사람은 꽤 많았지만 다들 모르는 척했다. 눈치가 제법 없는 누군가가 폐하께서는 타오르는 불꽃이시라며 거드는 덕분에 분위기는 더 좋아졌다.
예이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제가 린델의 축하 연회를 준비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환호했다. 칭호를 받은 마법사는 감사의 뜻으로 연회를 여는 것이 전통이었다. 린델의 경우 씨디프 공작의 양자이기 때문에 공작가에서 나서는 게 맞았다. 그런데도 황제가 나서는 것은 일종의 과시였다. 여전히 린델이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알리는 것이다.
평소의 린델이라면 기뻐하고 감격스러워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자신의 뜻을 무시하는 카시어스가 미웠다. 제국의 황제께서는 그게 문제였다. 다정하고 배려심도 많으면서 이럴 때만큼은 제멋대로 굴었다.
축하한다고, 꼭 초대해 달라는 말이 이어졌다. 린델은 폐하의 뜻이 중요하다며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근위시종이 나타났다.
“황제 폐하께서 린델 경을 부르십니다.”
시종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걸 듣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죄송하지만, 이제 자리를 떠나야겠습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경사는 겹치는 것이 좋으니까요.”
닐카로오스 백작이 재치 있는 인사를 하자 웃음이 터졌다. 백작이 말한 좋은 소식이 결혼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린델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섰다.
예식 전에 반쯤 꺾였던 의욕이 한껏 치솟은 상태였다.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
카시어스가 임시 집무실로 쓰는 장소는 저택의 2층 끝에 위치했다. 요새 사령관의 저택인 만큼 집기는 훌륭했다. 마호가니 나무로 만든 커다란 책상 위에는 카시어스가 읽고 처리해야 할 각종 서류와 상주문, 그리고 서신이 쌓여 있었다.
전쟁이라고 해서 황제의 일거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행정 실무는 수도에 있는 재상이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지만, 황제의 인장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 있었다.
남부 내전으로 반파된 주요 도시들의 복구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읽다가 집어던진 카시어스는 손끝으로 욱신거리는 눈가를 눌렀다. 컨디션이 나쁜 상태였다. 다량의 글자를 읽었더니 머리가 다 아팠다.
이래서 황제를 얼른 때려치워야 했다. 일이 많은 것은 황제의 가장 나쁜 점 중에 하나였다. 일을 하자고 들면 끝이 없었다. 전쟁 중이라 적당한 곳에서 끊을 수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카시어스는 인상을 쓰다가 여섯 개의 반지 중에 세 개의 반지를 벗었다. 린델이 곧 올 것을 알기에 만용을 부릴 수 있었다.
반지를 벗어 탁자 위에 올려두기도 전에 예민해진 감각이 더욱 깊어졌다.
카시어스는 린델의 기척에 더욱 집중했다. 낮과 달리 이번에는 거리가 가까웠다. 집무실은 2층 서쪽 끝이었고, 연회장은 1층 동쪽 끝이었다. 경쾌한 음악 소리, 웃음소리, 간간히 들리는 외침은 선별적으로 지워냈다.
린델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중에 한 명은 굴탄 백작이었다. 그리고 예이크도 있었다.
카시어스는 빅토리아의 약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그다지 애석하지 않았다. 그래도 린델과 함께 그 자리에 서고 싶었다.
한때, 냉철의 마법사라고 불린 린델은 낯을 가리는 편이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면 친절하고 다정하며 살갑게 구는데, 공적인 자리가 되면 찬바람이 불었다. 필요한 말만 하던 녀석이 자신을 바라보면 눈빛이 달라졌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은 매우 특별하고도 행복했다.
“아, 움직인다.”
드디어 린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시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다림이 곧 희열로 바뀔 것이다. 그래서 이 순간이 벅찼다.
“폐하. 린델 경이 도착하였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시종이 린델의 도착을 알렸다. 문 밖에 있는 린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들라 하라.”
명령을 내리자 곧 문이 열리고 린델이 나타났다. 카시어스는 단숨에 거리를 좁혀 린델을 가득 끌어안았다. 왼팔로 그를 끌어안고, 오른손으로 손을 맞잡았다.
“폐하?”
“잠시만 이렇게 있자.”
카시어스는 탄식처럼 내뱉었다. 린델의 온기를, 체향을, 감촉을 한껏 느끼고 싶었다. 오늘 하루 종일 린델이 부족했다. 부드러운 뺨에 얼굴을 대고는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린델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이는 감각이 좋았다.
이제야 살 것 같은데 딱딱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놓아주세요. 그러지 않으면 화낼 겁니다. 아니, 지금 저는 화났어요.”
전에 없는 위압적인 경고였다. 카시어스는 그제야 린델이 마주 껴안지 않고 뻣뻣하게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가 났다고 했다. 의아함에 팔을 풀고 린델을 보았다. 목소리와 몸짓만큼이나 얼굴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제 입으로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화났다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