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린델의 오늘 일정은 빠듯했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에 그리핀을 타고 닐르를 출발해 라우그실리안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였다. 두 시간에 걸쳐 공식 업무를 보고 이제 다시 닐르로 돌아갈 때였다.
린델이 리세나와 함께 향한 곳은 왕궁의 뒤뜰이었다. 그곳에는 할엔라드 제국을 상징하는 황금색 독수리의 깃발과 함께 다섯 마리의 그리핀과 아홉 명의 근위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린델은 아홉 명의 근위기사들 사이에 적당히 끼어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마법구로 머리 색을 바꾼 카시어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테누안으로 가야 하는 린델에게 카시어스는 근위기사 60여 명과 카시어스 본인을 포함한 근위기사 열 명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아무리 귀빈을 호위하는 중이라 하더라도 타국에 그리핀을 탄 60여 명의 기사를 보낸다는 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결국 린델은 카시어스와 동행해야 했다.
황제가 아닌 근위기사로, 그것도 머리 색을 검은색으로 바꾼 채 테누안을 방문한 카시어스를 알아보는 사람은 리세나 단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아무 예고도 없이 방문한 황제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었다. 카시어스는 제국의 근위기사처럼 대접받았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빙그레 웃으며 내미는 털외투를 받아 들었다. 그리핀은 고공에서 빠른 속도로 날기 때문에 방한에 신경 써야 했다. 계절이 겨울이어서 더욱 그랬다.
털외투를 챙겨 입고, 털모자와 장갑을 끼는 린델을 조용히 지켜보며 리세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할엔라드의 철혈께서 린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린델은 물론이고 다른 기사들 역시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인의 안위를 걱정해 암행을 하는 황제라니.
누이가 아니라도 그런 남자랑 결혼하는 건 신세를 망치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사랑에 빠진 남동생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터였다. 아니, 그 전에 상대가 황제라는 것부터 틀려버렸다. 황제는 린델을 쉽게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평안과 행복을 빌어주는 것뿐이었다.
“조심해서 돌아가렴.”
마지막으로 얼굴까지 감싼 린델을 향해 리세나가 인사를 건넸다. 리세나와 같은 하늘색 눈동자가 한 번 깜빡거렸다.
“평안히 지내십시오.”
“다음에 보자.”
다음에 보자는 리세나 공주의 인사에 린델은 멈칫했다. 흔한 작별의 말이었다. 그렇지만 특별하기도 했다.
린델은 여전히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큰형과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에 복잡한 기분이 들었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어머니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잃어버린 아들 대신에 작은 인형 둘을 의자에 앉혀놓고 수를 놓으며 말을 걸던 그녀의 모습은 애처로웠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눈동자를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리세나 역시 어렵고도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녀가 자신을 위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만날 약속을 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듯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사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예. 다음에 뵙겠습니다.”
활짝 웃으며 인사한 린델은 그리핀에 올라탔다. 린델의 기수는 당연히 카시어스였다.
린델이 카시어스의 허리를 붙잡자마자 그리핀이 단숨에 솟아올랐다. 그리핀은 바다를 뒤로하고 북쪽으로 향했다.
episode. 02
겨울의 황량함에서 벗어난 푸르른 봄의 초원에 전운이 가득했다. 황금 독수리의 깃발을 휘날리는 할엔라드 군과 진녹색 용의 깃발을 내세운 시아무크 군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를 마주한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여린 잎이 자란 초원은 붉은 피로 뒤덮일 예정이었다.
할엔라드의 황제, 카시어스는 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언덕에 서서 시아무크 진영을 살폈다. 그는 시아무크 황제의 깃발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썼다. 그리고는 반대편 언덕을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는 노려보았다.
“결국 왔군. 수염을 기른 자가 세무흴이 맞지?”
“제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폐하.”
“항복을 해도 모자랄 텐데, 지원군을 데리고 오다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흉계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근위기사단장인 시베르 백작이 충직한 군인다운 조언을 했다. 그리고 카시어스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겨울의 끝자락, 새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아무크 제국은 선전포고와 동시에 국경을 넘어 할엔라드 제국을 침략했다. 목표는 예상대로 노백 평야였다. 시아무크는 8만 대군을 동원했지만, 미리 대비를 한 할엔라드는 쉽게 노백 평야를 내주지 않았다.
카시어스는 직접 친위군을 이끌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최고의 전력을 투입해 전쟁을 일찍 끝낼 계획이었다. 전황은 할엔라드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대전투라고 불릴 두 번의 격돌은 모두 할엔라드가 승리를 차지했다. 군사 수는 시아무크가 4만 명이나 많았지만, 그 외에 장교와 병사의 역량, 전술, 무기는 할엔라드가 우세했다.
특히 열병기인 소총과 대포는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카시어스는 즉위 직후부터 무기 개량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거기에 남부 내전을 겪은 황제 친위군의 활약이 눈부셨다. 시작부터 전황을 압도한 할엔라드 군은 시아무크 군을 국경 너머로 내쫓다 못해, 시아무크의 영토를 점령했다.
지금 카시어스가 서 있는 자룬타오드 평원은 시아무크 제국의 땅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기분이 별로였다.
시아무크의 황제인 세무흴은 유명한 전쟁광이었다. 강력한 무력을 통해 할엔라드에게 빼앗긴 노백 평야를 되찾고, 과거의 영광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세를 모았다. 그리고 결국 황제가 되기까지 했다.
카시어스는 용맹하다고 알려진 시아무크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다. 그러나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은 오합지졸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황제가 된 세무흴은 국가 요직에 자신의 사람들을 채워 넣었다. 능력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오로지 인맥과 혈연이었다. 그리고 그건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휘관은 물론이고 고급 장교까지 대규모로 교체된 시아무크 군은 용맹하기는 했지만 멍청하게 움직였다.
어리석은 놈.
카시어스는 근사한 의자에 앉아 있는 세무흴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전쟁을 주장하며 황제가 된 주제에, 정작 본인은 역량이 되지 않았다. 제 분수도 모르는 놈은 카시어스가 제일 경멸하는 부류였다.
이기지도 못 할 전쟁을 일으킨 세무흴 때문에 할엔라드의 병사를 2천 명이나 잃었다. 시아무크의 사망자는 3만 명이 넘었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놈이 권력을 가지면 생기는 일이었다.
카시어스는 국경을 되찾다 못해 시아무크의 요새 도시인 틀루엔을 빼앗았다. 자신의 계획은 간단했다. 틀루엔을 돌려주면서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고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아무크는 화평을 제안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세무흴이 직접 2만 명의 지원군과 함께 나타났다.
시베르 백작의 말대로 어떤 흉계를 준비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지금껏 모은 정보에 의하면 세무흴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향이었다.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할엔라드뿐 아니라 시아무크를 위해서라도 세무흴 같은 놈은 빨리 죽는 게 나았다.
“암살이 낫겠군.”
카시어스의 혼잣말에 옆에 서 있던 시베르 백작이 흠칫거렸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그걸 모르는 척하면서 뒤쪽에 선 린델을 힐끗 바라보았다. 마법사의 상징인 하얀 망토를 두른 린델이 무슨 일이냐며 시선을 주었다. 카시어스는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린델이 있으니 여섯 개의 반지를 모두 뺄 수 있었다. 어둠에 숨어들어 세무흴의 배에 칼을 꽂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쫓긴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제 몸 하나쯤은 빼낼 수 있었다.
암살은,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폐하. 준비가 끝났습니다.”
패퇴한 세무흴이 이번에도 항복을 하지 않으면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작전 참모가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알렸다.
카시어스는 할엔라드 진영을 바라보았다. 6만 명의 병사가 대형을 갖추고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소총을 든 보병대가 전방에, 그리고 백전병을 지원할 경보병대가 후방에, 우익과 좌익은 경기병이 배치되었다. 손에 든 무기가 활과 창에서 소총으로 바뀌었을 뿐, 대열 자체는 오래된 전술이었다.
새로운 것은 바로 대포의 존재였다.
진격과 함께 소총으로 적진의 주목을 끌고, 포격으로 적의 중앙을 흔들었다. 핵심은 적병이 공포를 느끼며 뒷걸음질 칠 만큼의 정교한 집중 포격이었다. 지난 전투에서 할엔라드의 포병대가 보여준 활약은 무시무시했다. 포격으로 흐트러진 적진의 뒤를 경기병대가 치고 보병대가 진격하면서 손쉽게 승리를 이끌어냈다.
준비가 끝났다는 것은 포병대가 포격 지점을 정했다는 신호였다.
시아무크도 할엔라드와 거의 같은 전술을 썼다. 하지만 병사의 숙련도와 무기의 성능은 할엔라드가 우위였다. 승리의 여신은 할엔라드를 향해 웃어줄 것이다.
“진격.”
카시어스의 명령에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뿔 나팔이 커다랗게 울렸다.
근위기사단의 의무대가 자리한 임시 구호소는 신음과 비명이 넘쳐흘렀다. 애원과 호통, 그리고 격려의 말과 함께 피와 화약, 소독약 냄새가 뒤섞였다.
구호소 한쪽에 마련된 공간에서, 린델은 피 묻은 손을 젖은 무명천에 닦으며 명령을 내렸다.
“벗겨요.”
젊은 장교의 배에 감긴 붕대는 피로 흥건했다.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지만 눈은 반쯤 풀린 상태였다.
치료를 하려면 상처부터 확인해야 했다. 린델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의무병들이 기사의 군복을 벗기고 붕대를 잘랐다. 그러자 길게 찢어진 상처가 드러났다.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리는 깊고 넓은 상처 사이로 장기가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포탄이나 총탄에 팔다리가 날아간 것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감염을 막기 위해 소독약을 잔뜩 뿌리고 난 후, 린델은 지체 없이 상처에 손을 올리고 집중했다.
“생명의 기적. 치·유.”
짧은 주문에 상처는 기적처럼 사라졌다. 다친 장교도, 그를 데려온 병사들도 모두 동시에 안도하며 기뻐했다.
“피를 많이 흘렸으니 뭐든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처에 큰 충격만 주지 않으면 당장에 뛰어다녀도 됩니다.”
정신이 가물거리는 젊은 장교 대신에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병사들에게 린델은 주의 사항을 일렀다. 들것에 실려 온 젊은 장교는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갔다.
“다음은요?”
린델은 옆에 앉은 군의관을 바라보았다. 군의관 브라크는 치료소에서 린델의 보좌를 맡고 있는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아……. 네. 그랬죠.”
린델은 그제야 브라크에게서 이 병사가 마지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고개를 끄덕인 린델은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끝이라고 생각하자 어지러움이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