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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105/137)

-105화-

더 해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될까 잠시 망설이던 린델은 조금 더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눈앞에 드러난 목에 입술을 댔다.

“뭘…… 하려고.”

그제야 반응이 왔다. 카시어스의 목소리는 잠에 막 깬 사람답지 않게 또렷했다. 린델은 목과 어깨의 경계선에 입술을 미끄러뜨리며 중얼거렸다.

“좋은 향기가 나서요.”

“잠든 사람에게 그러는 거 아냐.”

엄중하게 주의를 준 카시어스가 한 번 더 끌어당겼다. 린델은 목을 울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맹수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만지고 싶었다. 침대 위에서의 주도권은 대부분 카시어스가 쥐고 있었다. 매번 속절없이 그의 손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헐떡이기만 했다. 그의 등을 깨물어보기도 하고 구음도 해봤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낮 동안의 카시어스에게는 더더욱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저 황제 폐하의 고귀한 손을 잡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였다. 마구 주물거릴 수는 없어도 눈가라든가, 턱 밑이라든가, 콧날을 건드릴 수는 있었다. 사실은 셔츠 밑으로 손을 넣고 싶었지만 그건 자제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모르지 않았다.

카시어스는 잠옷으로 단추가 없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근사한 목과 쇄골이 드러났다. 린델은 또렷하게 드러난 쇄골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맞닿은 카시어스의 근육이 움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는 거 아니라니까.”

“안 주무시잖아요.”

“추행이야.”

추행이라는 말에 린델은 웃음을 삼켰다. 추행이라기보다는 희롱이었다. 매번 카시어스가 하던 희롱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희롱이죠.”

“그래. 희롱하지 마.”

“싫으세요?”

“그냥 자.”

카시어스는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가슴에다 대고 아주 재빠르게 말했다.

“그럼 제가…… 빨아드리는 건. 엇?”

얼굴이 터질 것같이 달아올랐지만 좀 더 만지려면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긴 했다. 그러나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자세가 반전되고 말았다. 자리에서 반 바퀴 굴러 카시어스의 상체를 반쯤 깔고 누운 자세가 되었다.

“어젯밤부터 왜 이렇게 적극적인 거야? 응?”

시선이 마주한 카시어스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용감한 시도는 실패로 끝날 모양이었다.

“그냥 하고 싶기도 했고…….”

“그리고?”

“어, 음…….”

이유야 많았다. 어젯밤에는 정말 카시어스가 그리웠다. 그를 끌어안고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키스를 하고 몸을 섞어 아무 생각 없이 욕망에 휩쓸리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하지만 또 다른 꿍꿍이도 분명 있었다.

“린델.”

“베갯머리송사를 하려고 했어요.”

카시어스의 추궁에 거짓말에 재주가 없었던 린델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카시어스를 기분 좋게 만들고는 부탁을 들어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어제는 쾌락에 못 이겨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오늘은 카시어스가 넘어와 주지 않았다.

“어제는 그냥 자버려서 못 해서……. 다시 시도하려고요.”

린델의 시무룩한 표정에 카시어스는 폭소를 터트릴 뻔했다. 송사야 원래 어려운 부탁을 하는 법이다. 그래도 린델이 몸으로 들이대려고 하는 것도 웃겼다. 무엇보다 린델이 자신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어서 할 말을 잃었다. 린델이야 그저 단순하게 생각한 것이겠지만, 정말 그가 작정하고 덤벼들었다면 안 된다고 못 했을 터였다.

“네 부탁이 뭔지 안다만, 이번만큼은 안 돼. 아주 달콤한 베갯머리송사라도 말이야.”

“뭔지 아신다고요?”

“빅토리아는 데려가지 않으마. 근위기사도 50명만 호위하게 하지.”

“어…….”

린델은 황제가 소유하고 있는 그리핀이 정확하게 62기라는 것을 알았다. 보통 2인 1조로 그리핀에 기승하지만, 보급품의 정도에 따라서 사정이 달라졌다. 그 말은 62기의 그리핀 중에 절반이 이동한다는 소리였다.

“다른 방법은 없어.”

린델은 로벅에 나타난 근위기사 50명과 그리핀이 보여줄 위용을 상상하다가 그만뒀다. 베갯머리송사로도 안 된다고 하니 방법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황제 폐하를 애인이라고 소개해야 할 판이었다. 아득한 기분이었지만 포기할 건 포기해야 했다.

“유능한 의원이 있어야 할 거예요. 할버른 부인은 정말 심장이 약하거든요.”

“의원이야 많아. 이제 그만하고 더 자도록 해.”

카시어스가 자라고 종용하는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린델은 그가 몇 시간 자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강철과 같은 남자가 계속 자자고 한 걸 보면 어지간히도 피곤한 모양이었다. 그란디스 메시스 기간 동안 빡빡한 일정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더 자게 해줘야 했다.

린델은 얼른 카시어스 위에서 내려와 옆에 누웠다. 꾸물꾸물하며 자리를 잡자 카시어스의 손이 머리에 닿았다. 가볍게 쓰다듬는 손짓은 다정했다.

“착한 애인이라고 소개해.”

멋진 애인이기는 해도 착한 애인은 아니었다. 린델은 항의의 의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다란 남자의 손이 다시 머리를 헤집었다. 소리 없이 웃다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린델은 주무시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에 조금 더 편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눈을 감았다.

불안과 비탄, 그리고 슬픔에 눈을 떴던 지난 며칠과 비교하자면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문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었다. 루터 왕세자는 린델을 만나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어제도 형제의 권리를 강조한 편지를 보내 왔다. 어째서 형제를 만나려고 하지 않느냐는 항의성 내용이 가득했다. 어떤 내용은 협박에 가까웠다. 그가 만약 테누안의 내전에서 이긴다면,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 게 뻔했다.

린델에게는 루터 왕세자도, 리세나 공주도 형제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만약 둘 중에 선택하라면 리세나 공주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린델은 그녀를 도울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그러려면 카시어스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그건 정치적인 행위였다. 그건 가장 지양해야 할 행동이었다.

가족을 찾는 것은 린델의 염원 중 하나였는데, 그럼에도 마냥 기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그저 자신이 누군지만 알아도 좋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상황이 달라지자 생각도 바뀌었다. 그래도 잉그란이었다면 신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잉그란을 떠올린 린델은 숨을 삼켰다. 진짜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시려 왔다.

이제 복수는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그래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데스탄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고 싶었다. 양치기를 도와 양을 도축했었다. 닭은 잡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칼날이 살에 파고드는 감각을, 더운 피의 엉김과 냄새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잉그란은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한 일인데도 그게 서러웠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린델은 카시어스의 온기를 찾아 품에 파고들었다. 코도, 눈도, 그리고 머리도 솜으로 틀어막은 것처럼 먹먹했다.

“괜찮아.”

“…….”

“괜찮아질 거야.”

숨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카시어스가 천천히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게 더 서러웠다. 린델은 울지 않으려고 눈을 더 꼭 감았다.

행복한 순간에도 슬픔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그리고 다정한 손길에 위안을 얻는다.

자책도, 후회도 여전했다. 데스탄을 적으로 두지 않았다면, 카시어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누명을 쓰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잉그란은 살아 있을 거였다. 아무리 운명이 제멋대로라고 하더라도, 데스탄이 나쁜 놈이라고 하더라도 그것만큼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카시어스를 사랑한 것을 돌이키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했다.

린델은 시련과 슬픔을 주신 신께 기도를 올렸다.

평안과 굳센 마음을 빌었다.

필라무트 제전 당일, 린델은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쐬며 말을 타고, 목욕 후에 이른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애쉰 부인의 도움을 받아 제전에 참석할 준비를 했다. 적당히 길어진 머리를 리본으로 묶고, 붉은색 의식용 망토를 둘렀다. 카시어스가 선물로 준 목걸이를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치장을 일찍 끝낸 린델은 작은 서재에서 마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자리에는 앉지 못했다. 활짝 열린 테라스 창가에 서서 서성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에는 햇살만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장미 정원 너머로 웅장한 라드라비그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을 바라보며 린델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심장이 떨렸다. 차갑게 시렸다가 쿵쿵쿵 뛰기를 반복했다. 손바닥에는 땀이 찼다. 마치 영광의 홀에서 충성 맹세를 해야 했던 그날의 아침 상태와 비슷했다.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두려움, 혹시나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데스탄에게 복수한다는 희열이 뒤섞였다.

바닥을 밟는 발은 무겁고도 가벼워서 어딘가 현실감이 없었다. 술렁거림을 가라앉히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표정을 숨기고, 차가운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봐야 한다고 배웠다. 제대로 된 복수를 위해서라도 냉정해져야 했다.

그럼에도 그리움의 감정은 끝없이 샘솟았다.

“보고 싶어요.”

린델은 이제 만날 수 없는 스승을 향해 말을 걸었다. 잉그란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를 그리워하는 것도, 복수를 하는 것도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인생의 전부를 잉그란과 함께했다. 이제는 그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복수고 뭐고 그가 살아만 있으면 하고 바랐다. 새끼손가락에 묻은 잉크 자국도, 주름진 미소도, 운명을 거론하는 목소리도 모두 그리웠다.

“하아.”

린델은 뻑뻑해지려는 눈가를 손으로 눌렀다. 이제 울면 수습이 되지 않는다. 우는 건 제전이 끝난 다음이어야 했다.

한 번 더 심호흡을 한 린델은 시계를 확인했다. 제전은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오르는 정오에 시작한다고 했다. 이제 곧 마차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린델은 의식용 망토를 고정시킨 다이아몬드 핀을 매만지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언젠가 잉그란이 백합 문양의 망토를 고정시키는 은제 핀을 주겠다고 한 것이 떠올랐다. 잉그란은 작년에 유언장을 작성해 놓았다. 청빈한 사제가 가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중 대부분을 린델이 받기로 되어 있었다.

망토 핀, 잉그란이 집필하던 약초학 책, 낡고 오래된 회중시계.

더 좋고 더 훌륭한 것을 잔뜩 가지고 있지만 이제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물건이 되었다.

“아. 진짜, 울면 안 된다고.”

린델은 결국 뺨을 두드렸다. 그 때 마침 시녀가 뱅쇼를 들고 나타났다. 날씨가 쌀쌀하니 출발하기 전에 마시는 게 좋다는 그녀의 말에 린델은 별다른 의심 없이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와인에 정향과 설탕, 과일을 넣고 끓인 따뜻한 뱅쇼는 기운을 내는 데 딱 좋았다.

달콤함이 목구멍을 타고 흐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지러움이 린델을 덮쳤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시녀를 보았지만 일순 시야가 어지러워졌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눈이 감기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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