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카시어스는 입매를 당기며 린델의 손가락 사이에 손을 얽었다. 린델이 자신의 심장을 쥐고 있다는 것은 괜히 한 말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어졌다.
“내가 더 사랑하는 것 같아. 매번 내가 지잖아.”
“가둬둔 게 누구신데요.”
순간 억울해진 린델은 저도 모르게 따졌다. 사랑하면 가둬두는 거냐고 한마디 더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수확제가 끝나면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해. 나도 동행하지. 그리핀이라면 날짜를 맞출 수 있을 테니까. 미리 말해 두지만, 암행이 아니라 공식적인 방문이 될 거야.”
카시어스는 결국 방법을 찾아냈다. 하지만 린델은 기뻐할 수 없었다.
닐르에서 로벅까지는 마차로 열흘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그리핀이라면 반나절이면 충분했기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그래도 제전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카시어스가 동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던 린델은 공식적인 방문이라는 소리에 얼이 빠졌다.
황제의 이름으로 잉그란의 장례식에 참석하겠단다. 로벅과 같은 작은 마을에서 황제 폐하의 방문이 무슨 파장을 일으킬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내 심장을 홀로 멀리 보낼 수는 없지. 안 그래?”
린델은 할 말을 잃었다. 카시어스에게서 내 심장이라고 듣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아까는 길게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그냥 넘겼는데, 다시 들으니까 엄청 쑥스러워졌다.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얼굴이 빨개졌어.”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로벅은 작은 산골 마을이에요. 폐하께서 방문하시면, 마을 사람들은 심장마비로 쓰러질지도 몰라요.”
비유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황제가 공식적으로 방문할 때는 근위기사들이 황제를 호위한다. 적어도 30명은 대동하게 된다. 거기에 그리핀까지 함께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정말로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사람이 나올지도 몰랐다. 린델은 당장에 심장이 약한 헐버른 부인을 떠올렸다.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애인이라고 자랑해야지.”
“농담하지 마세요.”
“왜? 날 소개하기 부끄러워? 내가 남자라서? 이만하면 꽤 좋은 조건인데?”
“폐하!”
능글맞게 구는 카시어스를 향해 린델이 참다못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웃으면서 린델의 왼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입맞춤을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뺨을 린델의 손이 감싸게 만들었다.
“키스를 해줘. 그럼 공식적인 방문이 아니라, 암행이 될 수도 있겠지.”
카시어스는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지만 린델은 속지 않았다. 암행을 하겠다는 확언이 아니라 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했다. 황제께서 사기꾼이나 쓸 법한 수법을 쓰는데, 웃기게도 그게 귀여워 보였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서 근위 기사들을 이끌고 로벅에 왕림하시는 것을 막아야 했다. 순박한 마을 사람들에게 황제 폐하가 자신의 애인이라고 소개할 생각을 하면 아득해졌다.
“될 수도 있다가 아니라 하겠다고 하시면요.”
“깐깐하기는. 그럼 그냥 애인에게 키스를 해.”
이번에는 키스를 하라고 명령한 카시어스가 뺨에 대고 있던 린델의 손바닥에 입술을 대더니 손목을 살짝 깨물고는 떨어졌다. 다정한 유혹에 린델은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따스함이 번졌다.
조금 전에 카시어스의 딱딱한 언행에 시린 아픔을 맛보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말도 안 되게 행복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자신이 일희일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웃겼다.
좋아한다. 따뜻한 애정이 넘쳐흐른다.
“좋아해요.”
“린델?”
“부탁을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린델은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하며 카시어스의 양뺨을 잡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살짝 훔쳤다. 그렇게 멀어지려는데 카시어스가 너무하다고 속삭이면서 뒷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춰 왔다. 항의할 새도 없이 혀가 밀려들었다. 허리에 감긴 카시어스의 손길에, 그의 다리를 타고 앉은 자세가 되고 말았다.
농밀한 키스에 머릿속이 달아올랐다. 카시어스의 뜨거운 혀가 입 안을 휘저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허우적거리는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낼 때마다 혀끝이 야하게 빨렸다. 목에서 나지막한 울림이 흐를 때쯤에는 카시어스의 손이 베스트를 파고들었다. 얇은 셔츠 위로 카시어스의 뜨겁고 커다란 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흑.”
입 안 깊숙이 헤집는 키스도, 매만지는 손짓도 집요해서 린델은 속절없이 떨어야 했다. 계속되는 자극에 쾌감이 치솟았다. 겨우 입술이 떨어졌을 때는 숨을 헐떡였다.
“해도 될까?”
“지금 뭘, 뭐 하시려고요?”
“알면서 물으면 안 되지.”
코앞에서 카시어스가 화사하게 웃었다.
“여기서요?”
“싫어?”
“당연하. 흐읏.”
이번에는 카시어스의 입술이 린델의 턱에서 뺨, 뺨에서 귀로 미끄러졌다. 귀를 자극하는 감각에 신음을 흘렸다. 등이 떨려서 미칠 것 같았다. 카시어스에게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헛수고였다. 목과 허리가 단단히 잡힌 탓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안 돼요, 폐하. 제발.”
린델은 귀를 애무하는 카시어스를 필사적으로 말렸다. 5시가 넘었지만 아직 창밖은 해가 훤했다. 문 밖에는 근위시종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었다. 두꺼운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지만 크게 외치면 소리가 들렸다. 하다못해 침실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곳은 황제의 사실이었다. 제발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싫다고 하면 물러나 주는 카시어스가 이상하게도 단단히 버텼다. 감질 나는 애무가 멈추지 않았다.
“괜찮아.”
“안 괜찮아요. 여긴 침실도 아닌데……. 흐응, 읏.”
카시어스 역시 린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사실이라고 하지만 이곳은 공적인 장소였다. 카시어스는 실리주의자였지만 평소에 아무 곳에서나 붙어먹는 놈들을 발정 난 짐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이러지 말라고 하는 린델을 보자니 울리고 싶어졌다. 고약한 취향이라고 생각하며 카시어스는 린델의 귀에 속삭였다.
“그럼 빨기만 할게.”
“빨긴 뭘 빨아요!”
기어코 린델이 소리쳤다. 원망 어린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보고 카시어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더 몰아붙이고 싶은데, 문 밖에서 시종장이 시간을 확인하며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 귀에 들려왔다. 시간이 촉박했다. 황제 따위는 얼른 때려치워야 했다. 애인이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가 이렇게나 어려웠다.
“오늘 밤에 찾아갈게.”
“그야…….”
린델은 습기 어린 눈을 깜박이며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만큼은 순종적이고 착한 애인이었다. 이러니까 괴롭히고 싶어지는 거라고 생각하며 카시어스는 린델의 입술을 살짝 핥았다.
“야한 걸 할 거야.”
“……예.”
이번에도 거절은 없었다. 린델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한 박자 늦게 대답할 뿐이었다.
“잔뜩 빨아야지.”
“폐하?”
“왜? 그럼 지금 할까?”
나중이 아니면 지금 당장 시작하겠다는 뜻으로 카시어스는 린델의 입술을 느릿하게 빨았다. 동시에 허리를 감싼 손을 은근히 움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린델이 황급하게 몸을 뒤로 뺐다.
“나중에, 나중에 해요.”
“엉덩이를 빠는 것도 괜찮아?”
카시어스는 미래를 예고하며 린델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유치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에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린델의 반응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엉덩이를 빤다는 게 무엇인지 곧 알아듣고는 빨갛게 변한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러다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하는 녀석의 목과 귀가 순식간에 빨개졌다. 그러면서 시선을 슬쩍 피하는 모습에 카시어스는 묘한 감동을 느꼈다. 순진하고도 과감하다. 이래서 그에게 빠지다 못해 매번 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반하면 답도 없는데, 마음이 흘러 그에게로만 향했다. 애첩에게 빠져 헤어나지를 못했던 왕들의 심정을 왠지 이해할 것도 같았다.
“내가 다 받아주지 말랬지? 응?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해.”
“어차피, 어차피 뜻대로 하실 거라는 거 알아요.”
린델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항의하듯 말했다. 카시어스는 웃었다. 확실히 자신의 뜻대로 할 것이다.
“맞아. 날 너무 잘 아는군.”
“나중에 마음대로 하시고,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약속한 거야.”
“네. 약속했어요.”
무엇을 약속했는지도 모르는 린델이 카시어스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다. 바라던 대답을 받아낸 카시어스는 린델의 허리를 잡아 제자리에 서게 했다. 그리고 흐트러진 머리와 옷자락을 바로잡아주었다. 그래도 눈가가 빨개지고 입술이 부은 것은 살짝 티가 났다.
“눈이 빨개졌죠?”
린델이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괜찮아. 여기서 네가 내 애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약점 잡히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애인이 황궁의 권력자인 법이지. 네가 제일 강해.”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린델이 큭큭 웃으며 카시어스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부드러운 손짓은 스스럼없었고 애정이 어려 있었다. 그것이 카시어스를 만족스럽게 만들었다.
“암행을 한다고 해주세요.”
“싫어.”
“져주신다면서요.”
“폐하. 환담 중에 죄송합니다. 연회 시간이 지났습니다. 폐하께서 축배를 드셔야 식이 시작됩니다.”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와 함께 시종장의 간절한 부름이 들려왔다. 벽난로 위에 있는 시계를 확인한 카시어스는 투덜거렸다.
“이럴 때면 황제를 때려치우고 싶어진다니까. 같이 가자, 린델.”
“제가 동행해도 되나요?”
“애인이 옆에 있어야지. 이제 비공식이 아니라 공식이니까.”
“공식인가요?”
“그래. 이젠 누구도 부정하지 못해. 나조차도 말이야.”
“더 현명하게 행동하겠습니다.”
조금 전까지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던 린델이 금방 비장해졌다. 이럴 때만큼은 애인이 아니라 전장에 나가는 모습이 되곤 했다. 한결 같은 성격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카시어스는 린델의 뺨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러니까 공식적인 방문이 될 거야.”
“폐하.”
“사랑해.”
짧은 고백에 눈을 크게 뜬 린델은 곧 활짝 웃었다.
“사랑해요.”
달콤한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