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황제의 일어나라는 소리에 구경꾼들은 서로 얼굴을 확인하며 다음에 이어질 혼란을 기대했다.
하지만 황제는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상황을 정리했다.
“데스탄, 환담 중이겠지만 짐이 린델을 데려가야겠다.”
“물론이옵니다.”
“이제 몸은 괜찮은 모양이지?”
“예. 폐하의 은덕으로 충분히 쉬었습니다.”
“다행이다. 누님께서 네 부상 소식을 듣고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짐의 마음이 다 아팠단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아, 그리고 짐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이를 아낀다. 이걸로 네 궁금증이 해결되었으면 좋겠구나, 데스탄.”
황제의 의미심장한 말에 구경꾼들이 저마다 숨을 들이켰다. 방금 도착한 황제가 마치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듯 굴었다. 그것이 직접적인 질책보다 더 위협적으로 들린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것 말고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데스탄을 두고 황제가 등을 돌리고 떠나자 구경꾼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아무리 아둔해도 황제를 뒷배로 둔 총신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호기롭게 덤볐다가 웃음거리가 된 데스탄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데스탄이 흉흉한 기세로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 것은 시시한 마무리였다.
물론 린델도, 카시어스도 데스탄이 돌아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특히 카시어스는 린델을 칭찬하기 바빴다.
“네 말솜씨가 상당하다는 것은 알았다만, 데스탄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소란은 무슨. 주먹 쥐고 덤벼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잘 참았다.”
“제게 재주가 있었다면 결투 신청을 했을 겁니다, 폐하.”
린델은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났다. 카시어스는 웃었다. 복수는 제 손으로 하는 법이라고 가르치긴 했다. 그래도 린델의 실력에 결투란 어불성설이었다.
제 능력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발끈하고 덤벼들기보다는 참을 줄 알고 기회를 노리는 일이 더 어려웠다. 그래도 린델이 사람 속을 긁기 위해 일부러 말대꾸하는 것은 처음 봤다. 말솜씨가 좋은 녀석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는 따박따박 따졌다. 카시어스의 눈에는 웃기기만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살벌해 보였을 법했다. 웃지 않는 냉철의 마법사라는 별명에 어울렸다.
“그래. 현명한 자라면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 법이다.”
카시어스는 린델과 나란히 걸으면서 무도회장을 확인했다. 경쾌한 왈츠가 연주되고 있었다. 모처럼 무도회인데 춤을 춰야겠다 싶어서 린델을 보았다. 환하게 웃어 보인 것은 덤이었다.
“린델.”
“안 됩니다.”
카시어스가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자마자 린델이 심각한 얼굴로 안 된다고 거절했다. 눈치가 빠른 반응에 카시어스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뭐가?”
“못 합니다.”
“뭘 못 한다는 것이냐?”
“다 잊어버렸고,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폐하.”
린델은 아주 절박하게 말했다. 트윈문 파티 이후로 춤 연습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다 잊어버렸다. 여기서 카시어스가 춤을 추자고 하면 난감했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다 잊어버렸다는 것이냐?”
“제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재주가 없으니 연습을 하지 않아 백지가 된 것이지요.”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하도록 해. 무도회에 참석해서 석상처럼 서 있는 건, 신사의 덕목이 아니야.”
“그래도 괜찮습니다.”
“짐에게 춤 신청을 해야지.”
춤 신청을 하란다. 린델은 고개를 저었다.
“감히 제가요?”
“허락한다. 해.”
그렇게 가볍게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무도회의 경쾌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은 웅성거림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린델은 소란의 진원을 확인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두 남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린델은 남자가 테누안의 루터 왕세자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잔뜩 치장한 여인이 함께였다. 광택이 있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는 미인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불빛에 반짝이는 백금색 머리카락, 투명한 피부, 하늘색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어딘가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은 오늘 낮에 거울 속에 비친 자신과 퍽 닮아 있었다.
자신과 닮았다고?
린델은 부지불식간에 깨달은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금발에 푸른 눈은 흔한 조합이었다. 그러나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좀 더 작고 선이 가느다랗지만 많이 비슷했다.
“네 이야기는 책으로 엮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폐하?”
린델은 옆에 선 카시어스를 힐끗 보았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테누안의 루터 왕세자와 리세나 공주다. 저들은 바다 위에서 형제를 잃어버린 적이 있지. 꽤나 예전에.”
“?!!”
“기대도, 경계도 하지 말고 기다려라.”
카시어스의 조언에 린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저들이 바다 위에서 형제를 잃어버린 것이랑 자신이 무슨 관계인 것일까 멍하니 생각했다. 리세나 공주가 자신과 닮은 건 또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머리로 이해는 했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린델은 사람들의 시선이 리세나 공주와 자신의 얼굴에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눈에도 닮아 보이는 모양인 것 같았다.
그렇게 얼떨떨한 린델과 달리 카시어스는 상황 파악을 끝내고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린델과 리세나 공주가 닮은 것은 색감뿐만이 아니었다. 섬세한 골격은 타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혈연적 특징이 뚜렷했다.
카시어스는 십몇 년 전에 테누안에서 있었던 사고를 기억해 냈다. 테누안은 남쪽의 진주해를 끼고 있는 해양 국가였다. 바다를 마주한 남국의 여러 나라가 그러하듯 뛰어난 선박을 만들어냈다. 오래전, 테누안의 하나뿐인 공주를 위해 바다 위에서 생일 파티가 열렸다. 그러다 불꽃놀이용 화약이 폭발하면서 배가 가라앉았다. 승선한 사람들 다수가 바다에 빠져 죽거나 실종되었다. 국왕과 왕족이 참석한 행사였고, 직계 왕족이 사고에 휩쓸렸다는 이야기는 카시어스도 들었다.
그리고 린델은 고아였다. 기억을 잃었지만 바다 위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시기도, 상황도 대충 들어맞았다. 린델은 테누안이 잃어버린 직계 왕족일 것이다. 아니고서야 음험한 루터 왕세자가 저렇게 당당하게 웃을 리 없었다.
카시어스는 차갑게 웃었다. 여동생이 아니라 남동생을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테니 좋을 만도 했다. 자신의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린델의 신분이 왕족이라면 모욕스러운 뒷말을 듣지 않을 수 있었다. 결혼은 좀 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린델 본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될지 알 수 없었다.
간단히 정치적 계산을 끝내고 있는 사이에 루터 왕세자와 리세나 공주가 함께 카시어스 앞에 섰다.
“루터 크룬드케일이 할엔라드의 황제께 인사드립니다. 제 여동생 리세나입니다.”
“리세나 크룬드케일입니다. 제국의 황제께 인사 올립니다.”
리세나 공주가 치맛자락을 붙잡고는 가볍게 절을 했다. 흠잡을 데 없는 몸짓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푸른 눈은 린델을 힐끗거렸다.
왈츠는 끝났지만 다음 춤곡이 이어지지 않았다. 무도회장은 기묘한 적막에 휩싸였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시어스였다.
“세상에 닮은 사람이 셋이 있다 하더니, 신기한 일이로군. 마치 쌍둥이처럼 닮았어.”
“예.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루터 왕세자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린델은 또 다른 연극 무대를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 무대의 주인공은 자신이 될 것 같았다.
“린델리프는 제 막냇동생입니다. 리세나와 한 살 차이가 나는데, 어렸을 때부터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죠. 다섯 살에 사고로 잃어버렸습니다. 바다 위에서 배가 가라앉는 바람에요.”
황제의 휴게실에 선 루터 왕세자가 길게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시어스는 손을 들어 저지했다.
“짐도 테누안 왕가에 있었던 비극을 알고 있다. 짐이 궁금한 것은 그가 그대의 막냇동생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이다.”
카시어스는 냉정하게 증거를 요구했다. 정황만으로는 린델이 테누안의 막내 왕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없었다. 만약 린델이 로벅의 종사였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대륙 최강국인 할엔라드 황제의 측근이었다. 루터 왕세자가 린델의 가족이 되는 것은 정치적 사건이었고 확실한 증명이 필요했다.
루터 왕세자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카시어스의 황금색 눈이 매섭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자신만만했다.
오후에 있었던 향연에서 황제의 애인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루터 왕세자는 독이 잔뜩 올라 있었다. 감히 자신에게 모욕을 주게 만든 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어떤 식으로는 앙갚음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확인하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리세나와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치고 나서야, 소문 무성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이름은 린델, 스무 살, 고아, 다섯 살에 바다에서 건져졌고, 기억을 잃었다는 것까지 모두 자신의 실종된 막냇동생과 맞아 떨어졌다. 세상에 그런 기구한 운명을 가진 사람이 둘이나 있을 수 없었다. 확신이 들자마자 이것이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잃어버린 막냇동생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애인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이용할지 생각하자 희열에 몸이 떨렸다.
루터 왕세자는 당장에 움직였다.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 보기 부끄럽다며 숙소에 틀어박힌 여동생을 끌고 나왔다. 서로의 얼굴을 대면하게 하면 황제의 이목을 끌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황제가 납득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터 왕세자에게도 계획이 있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