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37)

-85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시어스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느냐?”

사실 카시어스의 귀에는 캐서린이 무엇을 속삭였는지 다 들렸다. 그녀는 린델을 티파티에 초대했다. 꼭 와달라는 부탁에 린델은 폐하의 허락이 필요하다며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는 중이었다.

“캐서린 아가씨께서 티파티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어느새 호칭이 샤트밀 후작 영애가 아니라 캐서린 아가씨로 바뀌어 있었다. 카시어스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처음으로 티파티를 열게 되었습니다, 폐하. 린델 경께서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샤트밀 후작 가문의 막내에 고명딸로 태어난 캐서린은 귀하게만 자라서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그녀는 카시어스가 질투에 눈이 멀어 훼방을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린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가 황궁 밖을 나가려면 폐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친구들에게 린델 경을 소개시켜 주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폐하.”

린델도, 캐서린도 선량한 얼굴로 악의 없이 카시어스를 자극했다. 그래도 카시어스는 인상을 쓰는 대신에 기분 좋게 웃으며 린델에게 손을 내밀었다. 린델은 당연한 것처럼 망설임 없이 손을 잡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지금껏 그렇게 시켜온 결과였다.

카시어스는 빙그레 웃으며 잡은 린델의 손끝에, 그리고 손바닥에도 입을 댔다. 그러자 린델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변했다. 카시어스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는 린델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린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을 상관하지 않고, 역시나 얼굴이 빨갛게 변한 캐서린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사정이 있어 그는 한동안 황궁을 나가기 힘들단다, 캐서린. 어려운 부탁은 하지 말려무나.”

“예, 폐하.”

“빅토리아가 할 말이 있다니, 가보렴.”

“물러나옵니다.”

타인의 연애사에는 끼어드는 게 아니다. 세상의 진리를 하나 깨우친 캐서린은 재빨리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녀의 샤프롱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단둘이 된 카시어스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린델의 어깨에 두른 팔을 풀어주었다. 린델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카시어스를 불렀다.

“폐하.”

“그래.”

“그러시면 안 돼요.”

“뭘?”

린델은 뻔뻔하게 뭐냐고 하는 카시어스를 보며 난감함과 동시에 폭력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곳에서 자신과 카시어스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한 번씩 손등에 입을 맞추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인 적은 없었다. 다음부터 캐서린을 어떤 얼굴로 만나야 할지 상상하자 아득해졌다.

“미리 예고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캐서린 아가씨도 놀라셨을 거예요.”

“질투가 나서 말이지. 그래도 울리지 않고 상냥하게 쫓아냈어.”

질투가 나서 쫓아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카시어스 때문에 린델은 할 말을 잃었다. 어젯밤에도 질투한다고 하긴 했는데, 정말로 이럴 줄은 몰랐다.

“캐서린 아가씨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세요.”

“흥. 그래. 열다섯 살이지. 너랑은 다섯 살밖에 차이 안 나고, 어리지. 나는 아홉 살이나 많고.”

“진심이세요?”

“나도 알아, 내가 이상한 거. 어쩌면 네가 그녀에게 웃어주어서 그런 건지도.”

네 탓이라는 소리에 린델은 억울했다. 그다지 많이 웃어주지 않았다고 항변하려다가 그냥 웃고 말았다. 큰일이었다. 질투한다며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는 황제 폐하께서 아주 귀여워 보였다.

평소에는 한없이 어른스럽고 든든한데, 이럴 때만은 말을 안 듣는 아이 같았다.

“그래서 저를 아무 데도 못 가게 하실 건가요?”

“음, 한동안은. 곧 사냥이 있을 테니 조심하는 게 좋아.”

“사냥이요? 아. 사냥 대회가 열리죠.”

린델은 그란디스 메시스의 일정 중에 사냥 대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카시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보다는 좀 더 위험한 사냥이지.”

“네?”

“자세한 것은 산책을 하면서 알려줄 테니, 잡아.”

산책을 하자며 카시어스가 팔을 내밀었다. 여인처럼 에스코트를 해주겠다는 몸짓에 린델은 고개를 저었다.

“에스코트를 받는다면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나란히 걷는 게 좋아요.”

“부끄럽다니 어쩔 수 없군.”

다행히 카시어스는 두 번 권하지 않고는 팔을 거두었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옆에 서서 캐서린과 함께했던 산책길을 되돌아 걸었다.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위험한 사냥이 무엇인지 전해 들은 린델은 자신의 애인이 황제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아야 했다.

09.

가을이 되면 신들께 한 해의 수확을 감사드리는 제의를 올렸다. 수확제, 혹은 추수감사제가 열리는 날은 나라마다 제각각이었지만, 제국이 덩치를 키워가면서 열흘에 걸친 대규모 축제로 바뀌었다.

바로 그란디스 메시스(Grandis Messis)였다.

할엔라드의 황도, 닐르의 거리는 1년 중 가장 큰 축제로 인해 북적거렸다. 길거리마다 일곱 신의 상징인 성화에 둘러싸인 독수리가 그려진 황제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그 아래에서는 장사치들이 가판대를 펼쳐 이국적인 물건을 선보였고, 거리와 광장마다 광대들이 재주를 부렸다.

황도의 사람들은 가장 좋은 옷을 차려 입고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란디스 메시스의 첫날은 그해에 선택받은 대제후가 그의 땅에서 첫 번째로 수확한 곡식과 양털을 일곱 신께 바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신들께 공물을 바치러 가기 위한 대제후의 행렬은 보기 드문 볼거리일 뿐 아니라 무상으로 던져주는 귀한 동전을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특히 올해는 더욱 특별했다. 지난 내전으로 공석이 된 남부의 엑바로움 가문을 대신해, 황태녀가 주도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종종 가두 행렬로 황도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던 황제와 달리 황태녀의 모습은 아직 공식적으로 드러난 적이 없었다. 아름다운 황태녀를 기대하며 많은 사람들이 대로변을 가득 메웠다.

하늘은 화창했다. 해가 가장 높이 뜬 정오가 되자 신시가지의 가장 큰 성문에서 긴 행렬이 출발했다.

시작은 커다란 북소리였다. 뒤이어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만들어낸 흥겹고 웅장한 소리가 거리를 뒤덮었다.

행렬에 가장 앞장선 것은 커다란 북을 치는 고수였다. 그 뒤로는 일곱 신을 상징하는 성화가 그려진 깃발과 황제의 후계자를 상징하는 방패와 깃털이 그려진 녹금색 깃발이, 그리고 남부의 귀족 가문들의 깃발이 나부꼈다. 다음은 행진곡을 연주하는 악단과 재주를 넘는 광대의 무리가 이어졌다.

진짜 행렬의 핵심은 황태녀의 앞뒤로 선 근위기사였다. 완전 무장을 한 채 말에 올라탄 근위기사들은 황제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황태녀의 행렬에 참가한 것은 황제가 다음 대 후계자를 사람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계산한 장치였다.

하지만 구경꾼들 중에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대부분은 흥겨운 행진 음악과 멋진 근위기사의 모습에, 그리고 익살스러운 광대의 재주에 즐거워하며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광대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동전을 한 움큼씩 집어 던지면 소리는 더욱 커졌다.

행렬의 절정은 황태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그녀의 앞뒤로 자리 잡은 호위병들은 말을 타지 않고 검은색 제복을 입은 채 걸었다. 그 사이에 흑마를 탄 황태녀는 은색 수를 놓은 순백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망토 역시 흰색이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은 틀어 올리지 않고 반만 땋아 등 뒤로 흘러내리게 하고는 은으로 된 작은 관을 썼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하얗게 꾸민 황태녀는 전설 속에서 나올 법한 성스러운 기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세심하게 의도된 아름다운 모습에 사람들은 만족했고, 기뻐하며 환호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행렬이 대신전에 도착하자 종루의 종들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함성은 더욱 커졌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금속으로 된 우아한 곡선이 아름다운 꽃무늬를 만들어냈다. 장미, 수선화, 백합, 동백, 해바라기, 수국, 모란. 일곱 신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꽃은 아름답고도 장엄했다.

린델은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지난 햇살이 색색으로 바뀌어 대신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을 보며 감탄을 거듭했다. 로벅의 신전에도 멋진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지만 이건 규모가 달랐다. 신들의 위업과 영웅의 시련을 그린 그림들이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황도 닐르에 위치한 대신전은 웅장하고 위엄이 넘치는 건물이었다. 수십 개의 첨탑은 신이 계신 하늘에 닿기라도 할 듯 드높았고, 5층으로 된 내부는 성자의 동상과 신들의 성화로, 아름다운 상징물들이 가득했다.

화려한 황궁에 익숙해진 린델의 눈에도 대신전은 특별하게 보였다.

린델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로 제의에 참석한 린델은 대신전의 정문을 왼쪽에서 살짝 빗겨 보는 자리에 설 수 있었다. 1층의 좌석보다 두 단이 높은 곳이라 먼 곳까지 보였다.

제의용 망토를 두른 황족과 귀족들이 1층에 그리고 하급 귀족과 일반 시민들이 2층과 3층에 자리 잡았다.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며 황태녀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카시어스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으로 된 독수리 조각상을 뒤로하고는 제대(祭臺) 앞에 섰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규모는 다르지만 수확제가 열리면 로벅에서도 비슷한 제의가 치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신전을 가득 채우고, 델라우드 백작이 밀과 양털을 가져와 신들께 바쳤다. 오전에 제의가 끝나면 그다음에는 마을 광장에서 축제를 즐겼다. 대대로 수확제가 열리면 영주들이 영민들에게 귀한 음식을 나누어주는 전통이 있는데, 로벅에서는 모든 술과 음식을 영주님이 제공했다.

작년에는 돼지를 다섯 마리나 잡았고 맥주와 와인도 일곱 통이나 풀었다. 꽃으로 꾸민 광장에는 흥겨운 음악 소리가 울렸다. 그날 하루만큼은 근심 걱정 없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수확의 기쁨을 즐겼다.

그게 벌써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던 린델은 반사적으로 잉그란과 델라우드 백작을 찾았다. 황제의 초대로 두 사람은 로벅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란디스 메시스에 참석하게 되었다. 델라우드 백작은 2층의 왼쪽 끝자리에, 그리고 잉그란은 3층에 여러 사제들과 함께 자리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린델의 진짜 신분이 밝혀지면서 황도의 귀족들이 두 사람에게 많은 초대장을 보내고 있다고, 잉그란이 보낸 편지에 적혀져 있었다.

린델은 그들의 안전이 걱정스러웠다. 카시어스가 말한 위험한 사냥은 비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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