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137)

-78화-

“답장은…… 조금 있다가 쓸게요. 폐하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린델은 갈무리한 편지를 이드나카에게 건네주었다. 서재에 가져다 놓겠다고 한 이드나카가 대련장을 빠져나갔다.

제라르는 편지 내용이 궁금했다. 과연 황제가 어떤 글을 적어놓았기에, 린델이 기쁘게 웃었다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지 알고 싶었다.

“경께서는 폐하와 함께 참전했다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예. 멀리서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폐하의 무위를 두 눈으로 확인했지요. 영광이었습니다.”

제라르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남부 내전에서 전장에 나선 황제를 본 것은 두 번이었다. 말을 타고 적을 베어 넘기는 그의 모습은 한때 그가 꿈꾸던 영웅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폐하께선 많이 강하시죠?”

린델의 질문은 단순했고, 그래서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었다. 제라르는 지난 트윈문 파티 때, 린델이 습격당했다는 것을 사촌 형님으로부터 들었다. 원래는 황제를 노린 전문 암살자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황제는 여러 가지 살해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건 현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린델이 연인인 황제를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애틋한 미소, 심각한 눈빛은 모두 황제를 위한 것이었다. 제라르는 그게 부러워서 질투가 날 지경이었지만 티를 낼 수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 반지를, 그러니까 마력 제어 반지를 여섯 개나 착용하고 계시는 것을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제 손에는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죠. 만약 제가 여섯 개의 반지를 꼈다면 그대로 쓰러져 일어나지도 못할 겁니다. 어쩌면 기절하겠지요.”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반지의 개수는 마력의 강함과 비례합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지난 200년 동안 반지를 세 개를 넘게 낀 사람은 오로지 폐하 한 분뿐이었습니다. 예. 폐하께서는 제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십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100명의 적에게 둘러싸여도 이기실 겁니다.”

과장이 아니었다. 제라르가 본 황제는 그러고도 남을 실력이었다.

“엄청나군요.”

“린델 경께서 무엇을 걱정하는지 압니다. 감히 단언컨대, 황제 폐하께 상처를 입힐 자는 없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린델 역시 카시어스가 무척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뭉툭한 지팡이를 던져 벽에 박은 것은 그냥 힘이 센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이 카시어스와 비교해 체격이 작다고 하더라도 단번에 들어 올려 가볍게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강하다고 해서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린델은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칼로, 마법으로, 혹은 몸을 던져서라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이 먼저였다. 그러니 기사를 동경하는 것과 별개로 검에 익숙해져야 했다.

“다시 시작하죠.”

연습용 검을 고쳐 쥔 린델이 자세를 잡았다.

이름을 되찾은 것을 미리 축하한다.

실내등을 켜놓은 마차 안에서 짧은 편지를 읽은 린델은 입매를 당겼다. 카시어스는 얼굴을 보여주는 대신에 계속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좋다와 같은 별 의미 없는 것부터, 소네트, 혹은 음담에 가까운 것까지 내용은 다양했다. 그러나 결코 찾아오지는 않았다.

카시어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얼굴을 마주하면 웃기만 하는 게 아니라, 키스하고 끌어안을 거라고 적어 보냈다. 허락만 한다면 언제든 달려갈 거라고도 덧붙였다. 협박과 이해의 경계를 오가는 설득에 린델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카시어스가 덤벼들까 싶어 보고 싶다고도 하지 못했다. 이런 게 연애인가 싶었다.

린델은 한숨을 삼키고는 카시어스의 편지를 갈무리해 품속에 집어넣었다. 마차는 쉼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백장미 궁에 갇힌 지 9일 만에 밖에 나왔다. 복수 때문이었다. 이제 이슈라드의 무대가 막이 오를 차례였다.

그런데 카시어스가 옆에 없었다. 복수는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 카시어스의 뜻이었다. 혼자인 것은 괜찮았다. 오늘을 위해 뒤센트 자작에게서 꾸준히 보고를 받았다. 무대도, 사람도, 사후 처리까지 모두 준비되었다. 이제 실행만이 남아 있었다. 기쁨과 함께 긴장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래서 더욱 카시어스가 보고 싶었다. 편지에 남아 있는 그의 향기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큰일이네.”

보고 싶다고 생각하자 복수보다 카시어스의 존재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내 심장이 내 것 같지 않고, 모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무엇인지 이제 안다. 마냥 좋지만은 않은 아주 이상한 감각이었다.

“정신 차려야지.”

린델은 스스로에게 주의를 주었다. 딴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곧 이름을 되찾는다. 아셰리드엘 페르난이 아니라, 린델 시어드로 살 수 있다. 이중 신분으로 활동했지만 그건 황제의 허락을 받은 것이니까 뒷수습은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린델 시어드의 이름으로 다시 충성을 맹세하고 마탑의 입회서도 새로이 작성해야 했다.

로벅으로 가서 마법사가 되었다고 하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놀랄 것이다. 출세했다고 한마디씩 하며 축하를 해줄 터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황제께서 세상에 둘도 없는 미남이라고 말하는 상상도 했다.

고대하던 미래의 끝자락에 카시어스가 끼어드는 바람에 린델은 소리 없이 웃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카시어스를 직접 대면시켜 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마차가 천천히 자리에서 멈춰 서는 게 느껴졌다.

린델은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과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확인했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카시어스에게서 마법구를 빌렸다. 금색이었던 머리가 검은색으로 바뀌자 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애쉰 부인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해주었다. 자세를 가다듬은 린델은 마차에서 내렸다.

선스톤으로 밤을 낮처럼 환하게 밝혀놓은 저택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붉은 기와의 고풍스러운 건물은 린델이 한 번 방문했던 곳이었다. 바로 건설청 장관인 일로아나 백작의 저택이었다.

일로아나 백작이 이슈라드의 무대를 제공하기로 했다. 파면당하기 직전에 구원을 받은 백작은 황제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였다. 뒤센트 자작의 말로는 일로아나 백작이 아주 적극적으로 협조를 약속하며 공범자가 되었다고 했다.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며 가면무도회까지 열었다. 황제가 베푼 호의는 뜻밖의 방법으로 린델에게 돌아왔다.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저택의 홀에 들어서던 린델의 옆으로 뒤센트 자작이 다가왔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그럴까 봐 걱정이었다.

“한눈에 알아보시네요.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요?”

“저야 사람을 알아보는 게 직업이니까요.”

“아.”

옆에 선 뒤센트 자작이 가볍게 대꾸했다. 안티 카발리에의 수장이니까 눈썰미가 좋아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쪽으로 가시죠.”

뒤센트 자작이 무도회장 안으로 안내했다. 린델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새해가 오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머. 그건 너무 빠르잖아요.”

“캐롤라인 아가씨. 제 사랑은 당신의 것입니다. 사랑이 완성되려면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어야 합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의 사랑은 맹목적이었다. 여인의 살인을 눈감아 주다 못해 거짓 증언을 할 만큼 말이다. 그러나 사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같은 마음이 아니었다.

“워든 경. 저는 겨울에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너무 춥잖아요. 봄이 좋아요.”

“너무 늦습니다.”

“사랑하신다면서요. 조금 더 기다려주세요.”

여인의 목소리는 화사했지만 어딘가 성의가 없었다. 그녀의 몸값은 이미 한껏 높아진 상태였다. 어리고 잘생긴 귀족 청년이 그녀에게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남자와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들이 서로 어떤 입장인지 명백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남자는 매달리고 여인은 멀어지려고 했다. 린델 뿐만 아니라 무도회장에 모인 20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사각 지대에 몸을 숨긴 채 대화를 듣고 있던 린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쾌한 춤곡도, 소란스러운 수다도 멈춘 상태였다.

무도회장에는 캐롤라인도 워든도 없었다. 그들은 이곳이 아니라 무도회장 뒤편에 있는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들의 대화는 어떤 장치를 통해 무도회장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린델은 며칠 전에야 안 사실이지만, 과거 한 때 수도에서는 밀실에서 오가는 대화를 엿듣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했다. 커다란 저택의 연회장마다 장치가 있는 밀실이 하나씩 있었다. 사연이 있는 남녀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모두에게 폭로되는 것은 이슈라드의 무대와 같았다.

타깃은 사교계에 갓 데뷔한, 지방에서 올라온 어린 청년이나 아가씨였다. 데뷔탄트를 골탕 먹이는 고약한 신고식 방법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애절한 고백이나, 때론 치졸한 다툼이, 그리고 끈적한 키스까지 밀실 안에서는 온갖 일이 일어났다. 주인이 적당한 순간에 대화를 끊어주는 것이 묘미였다.

눈물겨운 사랑에 인기를 얻을 수도 있고, 아니면 끔찍한 치정에 휩쓸려 사교계에서도 퇴출당할 수도 있었다. 가끔은 의도된 연출이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데 열광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며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고약한 놀이였지만, 린델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제 돌아가겠어요, 워든 경.”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겁니다. 캐롤라인 아가씨.”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예요?”

“약혼녀가 딴 사내랑 어울리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니까요. 결혼식은 해가 바뀌기 전에 열릴 겁니다.”

“워든 경. 신사의 품격을 지키세요.”

“당신이랑 결혼을 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을 폭로할 겁니다. 당신이, 에드리아나 아가씨를 죽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워든 경!”

캐롤라인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은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겹쳤다. 조용하던 연회장 내부가 술렁거렸다. 흥미진진한 치정 싸움에 갑자기 살인이 언급되니 그럴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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