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할엔라드 제국의 황궁인 라드라비그에는 신축과 증축을 반복하며 덩치를 키웠다. 라드라비그에 자리한 많고 많은 건축물 중에 가장 중요한 건물은 단연코 황제가 기거하는 정궁이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정궁은 제국의 군주를 위한 공간이었다.
황제는 사생활조차 공무였다. 집무실과 알현실은 물론이고, 한 개의 침실과 세 개의 사실, 그리고 서재와 내실까지 모두 정궁에 위치했다.
린델은 정궁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3개월 동안 황궁을 오가기도 했지만, 카시어스의 배려로 이드나카를 따라 두 번이나 정궁을 일주한 덕분이기도 했다.
정궁에서 가장 넓은 장소를 차지하는 것은 알현실이 아니라 연회장이었다. 파티와 무도회가 열리는 연회장은 한꺼번에 천 명의 사람이 들어서도 충분할 만큼 드넓었다.
연회장 한가운데 선 린델은 거대하고도 빈 공간이 주는 압박감을 느꼈다. 단단한 마호가니 나무를 짜 넣은 바닥, 흰색과 황금색으로 장식한 벽과, 높은 곳에 그려진 천장화, 그리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샹들리에가 웅장하고도 화려했다. 연회장 남쪽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모든 것이 눈부시도록 반짝거렸다.
린델이 황제의 배행 마법사로 연회장에 선 적은 딱 두 번이었다. 모두 밤이었고,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은 귀족들로 가득했다.
그때는 멋지다고 감탄만 했을 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낮에 텅 빈 연회장에 서 있으려니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아셰리드엘.”
린델은 자신을 부르는 카시어스를 쳐다보았다. 황금빛 햇살 속에서 아름다운 천사님처럼 웃고 있는 남자 뒤쪽으로 궁중 악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근위시종들이 서 있었다.
춤을 춰야겠다고 카시어스가 명령을 내리자마자 순식간에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황제의 시종장은 또 다른 의미로 마법사나 다름없었다.
“꼭 해야 합니까?”
린델은 카시어스 앞으로 다가가며 속삭였다. 넓디넓은 공간은 조용하기만 해서 목소리가 울렸다.
“당연하지.”
카시어스는 단호했다. 린델은 20분 전에 자신 없다고 말을 한 자신을 때려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멋진 얼굴로 웃고 있는 카시어스도 좀 어떻게 하면 좋겠다고 바랐다.
연회장에 들어선 사람은 자신과 카시어스 외에는 악사들과 근위시종들뿐이었다. 하지만 연회장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소문을 듣고 온 궁중인들이 복도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집요한 시선이 느껴져서 린델은 차마 그쪽을 돌아보지 못했다.
젯타스시여.
어지러운 순간에 신을 외친 린델은 시간을 끌기보다 얼른 끝내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카시어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연주하라.”
카시어스의 명령에 준비하고 있던 악사들이 단숨에 연주를 시작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플롯이 만들어내는 4분의 3박자 춤곡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카시어스와 맞절을 한 린델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잘하잖아.”
나란히 서서 손을 잡은 채 앞으로 걸어가면서 카시어스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린델은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왜 말을 안 해?”
“헷갈리니까요.”
린델은 헷갈린다고 재빠르게 외치면서 정해진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미뉴에트는 서로 거리를 유지한 채 약속된 동작을 해야 했다. 보통 동작이 대칭되는 경우가 많아서 왼쪽과 오른쪽이 헷갈려서 다른 방향으로 걸었다가는 단번에 티가 났다.
아무리 연습이라고 하지만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서 린델은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렇게 진지하고도 심각한 린델을 보며 카시어스는 웃음을 참았다. 린델은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애송이 티를 있는 대로 내고 있었다.
지금껏 린델이 춤을 연습하는 장면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애쉰 부인이 말하길 열심히 연습은 하는데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음률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느라 모든 것이 뻣뻣했다.
춤이란 즐겁고도 은밀해야 했다. 시선과 손이 닿는 순간에 미소를 건네고 서로에게 호감을 건네는 가장 온건하고 적극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린델은 제 손끝과 발끝에만 집중하느라 미소는커녕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냉철의 마법사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표정이었다.
이걸 어쩌나 하면서 카시어스는 끝까지 춤을 추었다. 린델은 왼쪽으로 가야 할 것을 오른쪽으로 두 걸음 걸었고, 손동작도 두어 번 틀렸다.
춤곡이 끝나자 두 사람은 가볍게 절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실수를 하긴 하는군.”
“예.”
“왈츠는 배웠지?”
“예? 예. 배웠습니다.”
“그럼 시작하지. 왈츠를 연주하라.”
린델이 무어라고 할 새도 없이 카시어스가 다가와 허리를 잡았다. 서로 거리를 두는 미뉴에트와 달리 왈츠는 남녀 한 쌍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주 안고 추는 춤이었다. 한때는 음란하다고 하여 금지된 적도 있었지만, 최근 무도회에서 연주되는 춤곡의 절반이 왈츠였다.
“어깨에 손을 올려.”
왈츠가 울려 퍼지자마자 카시어스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린델의 오른손을 자신의 어깨에 올리고는 그대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처음 몇 발자국은 버벅거리던 린델이 곧잘 따라왔다.
황실 무도회에서 왈츠는 최소한의 접촉만 허락했다. 남자의 경우 왼손은 뒷짐을 쥐고 오른손은 파트너의 허리를 잡아야 했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 왼손은 드레스 자락을 잡고 오른손은 파트너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다.
왈츠가 인기가 많은 이유는 그 순간에 오로지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하다는 훌륭한 장점도 있었다.
“아직도 딱딱하게 굳었어.”
“발을 밟을까 봐 그렇습니다.”
“허락하겠다.”
“그럴 수 없습니다.”
“애인이랑 노닥거리는 거야. 발 좀 밟아도 되니까 즐겨.”
카시어스는 크게 턴을 하면서 즐기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린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놀이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커요, 폐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내가 누구인지 자꾸 잊어버려. 이참에 호수에 배를 띄울까? 선상에서 춤을 추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아니요. 사양하겠습니다.”
린델이 정색을 하며 사양했다. 그래서 카시어스는 더 하고 싶어졌다.
“배를 띄워야겠군.”
“폐하.”
린델은 앞으로의 계획을 흥겹게 이야기하는 카시어스를 불렀다. 카시어스라면 배를 띄우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에 허리를 잡아 당기면서 크게 턴을 했다. 휘청거리면서 반쯤 그에게 안겼다가 바로 선 린델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왈츠의 단점은 눈앞의 상대 말고는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웃고 있는 카시어스만이 시야에 가득한 것은 확실히 이상한 느낌이었다. 모든 게 반짝거려서 꿈을 꾸는 듯 공중에 붕 뜬 기분이었다. 그래도 확인할 건 확인해야 했다.
“정말 그러실 거예요?”
“글쎄? 네가 뽀뽀를 해준다면 또 모르지?”
“선상에서 춤추자고 하지 않겠다 약속하신다면 해드릴게요.”
카시어스는 한 번 약속한 것은 꼭 지켰다. 선상에서 춤을 추지 않을 수 있다면 뽀뽀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의 매일 밤 만나고 있으니까 오늘에라도 당장 할 수 있었다.
“이런. 좀 더 대단한 걸 해달라고 할 걸 그랬어.”
“뭐든 말씀하세요.”
배 위에서 춤추는 게 어지간히도 싫은 듯 정말로 뭐든 할 것처럼 구는 린델 때문에 카시어스는 웃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뭘 해달라는 줄 알고 그러는 거냐?”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라고 하시겠죠. 아닌가요?”
린델의 미소는 순진했다. 신뢰인지 애교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카시어스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뭐든 다 말하라고 하는 녀석 때문에 속이 다 간질거렸다. 린델의 춤 실력을 확인하면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질 생각이었는데 예상보다 훨씬 즐거웠다.
“끔찍하게 야한 걸 해달라고 해야겠군,”
“?!!”
“뭐든 말하라며.”
“예.”
린델은 얼굴을 붉히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카시어스는 웃으면서도 속으로 혀를 차야 했다. 거절하는 법이 없는 애인 때문에 카시어스는 매번 참을성을 시험받았다.
이래서 내 성격이 나빠지는 거라고.
카시어스는 이대로 린델을 달랑 들어다가 침대로 향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스스로 한계를 정한 자신을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정말 많이 참는다.”
흥겨운 한탄을 내뱉은 카시어스는 스텝을 이어갔다. 린델은 무엇을 참느냐고 묻는 대신에 웃으며 리드를 따랐다. 왈츠는 절정에 달했다. 아무도 없는 대연회장을 종횡무진 움직이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상황에 사로잡혔다. 황제는 궁정 사교계에서도 비견할 자가 없는 독보적인 미남이었고 그의 애인 역시 우아한 미인이었다.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두 사람이 웃으면서 대연회장에서 단둘이 왈츠를 추고 있으니, 감수성 높은 귀부인들은 황제가 턴을 할 때마다 작게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에 복도에는 구경꾼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냉철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시종장은 저 문을 닫아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황제를 눈으로 좇으며 한숨을 삼켰다.
카시어스가 황제가 되고 8년을 곁에서 봉행한 시종장은 궁정 최고 실세 중에 한 명이었다. 맹목적인 충성과 유능함으로 무장한 그는 황제와 그의 비공식 애인 때문에 꽤나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황제의 연애는 지난 3개월 동안 궁정 스캔들의 중심이었다. 그들의 밀애가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들통이 난 이후, 황제는 피후견인이자 비공식 애인을 아끼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값비싼 비단과 보석을 선물하는 것은 별것 아니었다. 금을 주어도 살 수 없다는 무크란의 비단으로 예복을 지어 입은 배행 마법사가 차가운 얼굴을 하고 복도를 지나가자 귀부인들이 부채를 물어뜯었다는 소문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하지만 진짜 총애는 따로 있었다. 황제는 그를 배행 마법사로 정무회의와 알현장에 동행했다. 그것이 일종의 정치 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의 행보는 애인에게 사랑과 돈만 쏟아부으면 된다는 기존 상식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유능한 인재는 제대로 써먹어야 한다고 외쳤던 황제를 생각한다면 아주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거기까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시종장이 보기에도 황제의 애인은 유순하고, 부지런하고, 어디 모난 구석 없이 조용했다. 다른 근위시종들하고도 곧잘 어울렸고 마찰도 없었다. 황제가 후견인을 자처하며 정치에 무지한 피후견인을 돌보겠다는데 딱히 반대할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황제께서 그에게 넓디넓은 궁중에 거처를 마련해 주지 않고 벨룬드 공작 저택에 계속 머무르게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황제께서는 거의 매일 저녁, 그의 애인을 만나러 황궁을 비웠다.
초반에는 그래도 자정이 넘어서라도 황궁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최근 10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외박이었다. 정확하게는 10일 중에 7일을 공작 저택에서 주무셨다.
시종장은 그날을 떠올렸다. 평소라면 외박을 한다고 언질을 주던 황제께서 귀환을 하지 않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벨룬드 저택을 찾은 시종장은 황제와 그의 옆에서 잠든 마법사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애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말라고 말없이 노려보던 황제는 기상 의식에 늦지 않게 황궁에 도착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 일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제국 최강의 검사라는 황제의 안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남부 내전에서 황제의 무훈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도 매일 밤 애인을 만나러 황궁을 비우는 것은 여러모로 논란거리가 될 게 분명했다. 아무리 황태녀가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황제의 존재는 특별한 법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종장은 마법사에게 황궁 내에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게 좋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건의를 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러지 않겠다고만 답했다. 황궁은 안전하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실제 황궁의 경비가 삼엄하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만큼 개인의 안전에 취약한 것은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