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직접 찾아온 걸 보니, 급하긴 했나 보군.”
“송구합니다.”
“기상 의식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기다려라.”
“예. 물러나겠습니다.”
카시어스가 명령을 내리자 낯선 목소리가 대답했다.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멀어지더니 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천천히 정신을 일깨우던 린델은 한동안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눈이 왜 제대로 떠지지 않을까 싶다가 방금 전에 들었던 단어를 떠올렸다. 카시어스는 기상 의식이라고 했다. 몽롱한 머리로 그게 무엇인지 기억해 내려고 노력하던 린델은 한 박자 늦게 카시어스가 옆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한순간에 정신이 들었다.
린델은 뻑뻑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마치 지독한 몸살에 걸린 것처럼 아파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으…….”
허리만이 아니었다. 허벅지가, 팔이, 종아리와 발끝이, 사타구니가 욱신거렸다. 특히나 그곳에서 시작된 시큼한 통증은 한순간에 정수리까지 솟을 정도였다.
기억이 떠올랐다. 서재에서 오간 대화와, 지금 누워 있는 침대에서 벌인 정사와, 그리고 욕실에서 카시어스를 만졌던 것까지 자극적인 장면만 무작위로 머릿속을 휙휙 스쳤다. 결국 욕실에서 정사가 이어졌고 중간에 의식을 잃었다. 깜빡깜빡 정신이 돌아왔을 때 카시어스가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강렬한 기억에 몸이 반응했다. 심장이 뛰고 열이 올랐다.
“이런.”
이번에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에 숨을 삼켰다. 이틀 전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카시어스의 얼굴을 못 볼 것 같았다.
린델은 빨개진 얼굴을 문지르며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창밖은 밝았지만 아직 새벽이었고, 침실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카시어스는 아마도 기상 의식 때문에 황궁으로 간 것 같았다.
이렇게 카시어스의 침실에서 깬 것이 두 번째였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이 알몸이라는 것과 울혈이 찍힌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는 것이었다. 린델은 카시어스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 퍼렇게 변한 것을 보며 애매하게 웃었다. 어떻게 입을 맞추면 이렇게 멍이 생기는 건지 궁금했다.
이래서야 아무래도 말을 타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다시 자야겠다고 이불을 그러잡는데 문이 열렸다.
카시어스였다.
완벽하게 예복을 차려입고 나타난 카시어스를 보며 린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때와 다른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카시어스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벌써 깼어? 더 자지 않고?”
“기상 의식은요?”
멍한 머리에서 떠오른 단어가 린델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왔다. 그런데 형편없이 쉰 목소리라서 린델은 당황했다.
“목소리가 쉬었어.”
린델은 그 이유가 어젯밤에 내도록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기상 의식은 8시에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황제의 일과는 그보다 일찍 시작했다. 공작 저택에서 황궁까지는 마차를 타고도 30분은 걸렸다. 광대한 황궁을 가로질러 황제의 침전까지 가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몇 시죠? 가야 하시는 것 아닌가요?”
“아직 시간이 남았어.”
“다행이다.”
“가지 말고 곁에 남아달라고 해봐. 애인의 특권으로 말이야.”
침대 끝에 걸터앉은 카시어스가 린델의 오른쪽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귓가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무리한 요구에 린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의 중요 일정을 제치라고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지금껏 공식 일정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시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입으로는 귀찮다고 황제 따위는 때려치울 거라고 하면서도 성실하게 국정을 돌봤다. 원칙을 어기라고 권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가시면 돼요.”
“이런, 내 애인은 무정하군. 가지 말라고 붙잡아주지도 않고.”
“시종장님께 미움받을 수는 없어요.”
반은 농담이고 나머지 반은 진담이었다. 린델은 잠결에 들었던 목소리가 시종장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황제의 측근 중에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시종장은 이른 새벽부터 찾아와 스케줄을 확인하고도 남을 정도로 꼼꼼한 성격이었다. 완벽하게 궁으로 귀환할 준비를 마친 황제를 붙잡았다가는 시종장의 미움을 받을 게 확실했다.
“감히 그가 짐의 애인을 미워할 순 없지.”
“그거랑은 관계없어요. 얼른 가세요.”
“짐은 무정하고도 착한 애인을 두었어. 저녁에 보자.”
저녁에 보자는 말에 린델은 흠칫 놀랐다.
“저녁에 오실 거예요?”
“당연하지. 왜? 내가 오면 안 될 일이라도 있어?”
“오늘은…….”
린델은 말을 하다가 말았다. 오늘도 할 거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카시어스가 재촉했다.
“오늘은 왜?”
“못해요.”
카시어스는 린델이 뭘 못한다고 하는지 단숨에 알아들었다. 울상을 짓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한 린델의 귀가 빨갛게 되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덤벼들 수 있었지만, 제대로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는 애인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상식과 예의쯤은 가지고 있었다. 사실 어젯밤에 의식을 잃을 정도로 너무 몰아붙여서 반성 중이기도 했다. 린델이 오늘은 못하겠다고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좋은 애인이 되어준다고 했잖아. 오늘은 손만 잡고 잘게.”
카시어스는 어설픈 바람둥이나 할 법한 대사를 읊었다. 그러자 린델이 웃음을 터트렸다.
“별로 믿음이 안 가긴 하지만, 믿어드릴게요.”
“너무 쉽게 믿는걸. 애인이라고 다 받아주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럼요?”
“방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는 고전적인 방법이 있지.”
“어떻게……?”
린델은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애인의 특권이었다. 카시어스는 린델에게 거절의 방법을 가르쳤다.
“어쨌든 손만 잡고 잘 거야. 그건 확실해.”
“네.”
“편히 쉬어.”
카시어스는 린델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델은 카시어스가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되자 버릇처럼 얼굴을 문질렀다.
애인이란 게 이런 건지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한없이 좋기만 했다. 욕심쟁이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린델은 웃었다.
내일이면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었다. 그 작은 깨달음이 세상을 달라 보이게 만들었다. 욕심의 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다시 고민을 하고, 암담함에 절망하고, 후회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06.
할엔라드 제국의 수확제인 그란디스 메시스는 매년 10월 둘째 주에 열렸다. 그해 땅에서 수확한 첫 번째 밀을 일곱 신에게 바치는 제의는 지방 영주들은 물론이요, 속국과 인접국의 사신들까지 찾는 대규모 하례 의식이기도 했다.
사전 준비는 여름부터 시작되었고,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시기가 되면 황궁의 여러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사람을 손꼽으라고 하면 단연코 궁내청장인 팸튼 백작이었다. 황궁인 라드라비그의 살림살이는 물론이요, 황실의 각종 행사를 도맡고 있는 그는 매년 이맘때가 되면 신경성 위염에 시달리곤 했다.
7일간 이어지는 수확제는 신께 올리는 제의 말고도 황궁에서 황제가 주최하는 여러 행사가 연이어 열렸다. 검투 시합, 무도회, 가든파티, 사냥 대회를 성공적으로 열기 위해 궁내청장의 지휘 아래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건 린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황제의 배행 마법사로 황궁을 출입하는 린델에게는 딱히 정해진 업무가 없었다. 며칠에 한 번씩 입궁해 황제를 따라 정무회의와 알현에 참석하고, 가끔씩 만찬과 야연에 자리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주변의 근위시종들이 그란디스 메시스 준비로 바빠지자 린델도 마냥 손 놓고 지켜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드나카를 도와 단순한 잡무만을 도왔다. 서류를 옮기고, 대필을 하고,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그러다가 린델이 고요정어에 능숙하다는 사실을 궁내청장이 알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고요정어는 귀족들의 기본 소양이기는 했지만 실제 제대로 읽고 쓰는 이가 드물었다. 장식미가 요란한 고요정어는 옮겨 적기가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란디스 메시스는 오래된 제의였고 기록용 공식 문서를 고요정어로 남기는 것이 전통이었다. 특히 대신전과 주고받는 문서는 무조건 고요정어로 작성해야 했다. 일손 부족에 허덕이고 있던 궁내청장에게 린델의 존재는 단비나 다름없었다.
궁내청장은 한시적으로나마 배행 마법사의 도움을 받게 해달라고 황제께 요청했다. 인재는 적재적소에 써먹어야 한다는 신조를 지닌 황제는 과로로 고생하고 있는 궁내청장을 물리치지 않았다.
“짐이 인재를 놀리고 있었군.”
애매하게 웃은 황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린델은 문서 더미에 파묻히게 되었다.
머리카락 끝이 린델의 오른쪽 뺨을 간지럽혔다. 집중해서 글을 쓰고 있던 린델은 머리를 쓸어 넘기고 싶은 것을 참았다. 기록으로 남을 공식 문서였다. 조금만 실수해도 처음부터 다시 적어야 했다.
린델은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후, 깃털 펜을 펜꽂이에 세워두고 난 다음에야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지난 3개월 동안 많이 자란 머리는 목덜미를 완전히 덮었다. 그러나 묶을 정도는 아니라서 꽤나 어정쩡한 상태였다. 애쉰 부인이 조금만 더 길러보라고 권유한 탓에 기르고 있기는 했지만 이럴 때면 자르고 싶어졌다.
“흠.”
한 번 더 머리를 넘긴 린델은 의도적으로 허리를 폈다. 그러자 뚜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몇 시간 동안 집중해서 글을 쓴 탓에 몸이 굳어버렸다.
뻣뻣해진 손을 주무르던 린델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제의 집무실 옆에 붙은 작은 사무실은 근위시종을 위한 공간이었다. 정궁의 끝자락에 있는 궁내청 사무실까지 가는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 만든 장소로 간단한 사무 업무를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사무실에는 린델 말고도 몇몇 근위시종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일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린델은 벌써 3일째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식 문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린델에게 주어진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단지 그 양이 많을 뿐이었다. 대부분 그란디스 메시스와 관련된 황제의 칙서와 교서를 고요정어로 옮겨 적는 것이었다.
린델은 아직도 잔뜩 남아 있는 종이 더미와 완성된 문서를 확인하고는 싱긋 웃었다. 몸을 움직여 성과가 눈에 보이는 일을 하고 싶어 했었다. 종이에 가득 적힌 아름다운 고요정어는 수고와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그것을 눈으로 확인하자니 괜히 뿌듯해졌다.
차곡차곡 쌓인 문서를 보면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고 카시어스에게 말을 했다가 일중독자가 되었다며 한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린델은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께서도 일을 많이 하고 계시다고 맞받아쳤다.
그렇게 카시어스를 떠올리던 린델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어젯밤의 일이 연쇄적으로 기억났기 때문이다.
제대로 애인이 된 지 10일째였다. 처음 며칠 동안 카시어스는 손만 잡고 자겠다는 말을 지켰다. 그리고 지난 며칠 동안은 삽입 없이 애무가 주가 되는 정사가 계속되었다. 입을 맞추고, 서로를 어루만지고, 그의 품 안에 잠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쾌락에 빠져 들었다. 단단하고 매끄러운 손이 스치기만 해도 몸이 달아오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아니, 카시어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졌다.
“흠. 흠.”
머릿속에 떠오르는 야한 장면들을 떨쳐버리기 위해 린델은 목을 가다듬고 양 뺨을 문지르며 정신을 일깨웠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새로운 종이를 펼친 린델은 다시 깃털 펜을 손에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