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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43/137)

-43화-

“글쎄. 그야 모르지.”

“폐하.”

“너 역시 미움받을 일이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이번에야말로 구혼자들이 네 발치에 몸을 던질 게다. 찬사의 소네트를 읊어대겠지. 소꿉장난 그만하고 그를 잡아. 안 그랬다가는 미움받기도 전에 그가 널 놓아버릴지도 몰라.”

카시어스는 빅토리아의 처지를 일깨워주었다. 제국의 황제와 황태녀 둘 다 독신이었다. 황제인 카시어스는 순조로운 양위를 위해 독신으로 살 것을 선포했고 실천으로 옮겼다. 현 시점에서 황태녀인 빅토리아는 제국이라는 전무후무한 지참금을 가진 아가씨였다. 제국의 주요 귀족들은 물론이고 온 대륙에서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나름 연애를 하고 있었지만, 신분이 좋지 못한 그녀의 수호기사는 철저하게 선을 지키고 있었다. 기회가 되면 미련 없이 물러날 가능성이 높았다.

정곡을 찔린 빅토리아는 당황하는 대신에 고집스럽게 입매를 당겼다.

“돌라낭 여신께 맹세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열여덟 살의 아가씨다운 발언이었지만 빅토리아에게는 자신의 맹세를 현실로 옮길 의지와 힘이 있었다. 그녀는 제 것이라고 움켜쥐면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망가겠다.”

“괜찮아요. 잡아오면 되니까요. 그것보다 하례품으로 온다는 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다 보니 두 사람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자신이 황제를 찾은 이유를 상기하며 대화 주제를 다시 바꾸었다.

“그것만 따로 제외시키라고는 할 수 없지. 그냥 둬. 무엇을 별이라고 내놓을지 궁금하니까.”

“알아본 바로는 리세나 공주일 확률이 높아요. 파혼을 한 지가 언제인데, 지금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니. 아니, 이건 미련이 아니라 몹쓸 욕심이에요.”

빅토리아는 우아한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고귀한 핏줄을 이은 황족들이 그러하듯 카시어스 역시 열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혼인 상대가 정해졌다. 카시어스의 큰 형님이었던 선황께서는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어린 막내 동생이 제국 내에 기반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겨우 한 살이 된 테누안의 공주와 약혼을 시켰었다.

여기까지는 황족의 흔한 정략결혼의 패턴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운명이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8년 전, 황태자 부부와 선황이 승하하시고, 치열한 내전 끝에 카시어스가 황제가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테누안에서는 당연히 황제와 공주의 약혼 관계를 확인코자 하였다. 그러나 카시어스는 황태녀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약혼을 파기했다. 그에 덧붙여 황후를 청하는 자는 황태녀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라며 전국에 공문을 뿌려버렸다.

800년이나 되는 제국의 역사에서 독신을 고수했던 황제가 없었던 것도 아니라서 당시에만 시끄러워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코앞에서 제국의 황후 자리를 놓쳐버렸다고 여긴 테누안 측은 꽤나 끈질기게 매달렸다.

카시어스가 제국을 찾은 테누안의 국왕과 밀담을 나눈 후에야 더 이상 약혼을 이행하라는 청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7년 만에 다시 반복이었다. 약혼의 직접적인 파기 원인이었던 빅토리아의 입장에서는 아주 괘씸한 일이었다. 황제의 공문대로 황후를 청하는 것은 황태녀인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국의 대가 바뀌는가 보군. 데오릭 왕이 와병 중이라고 하니까.”

“그럼 루터 왕세자가 벌인 일이겠군요.”

“누이동생이 제국의 황후가 되는 꿈을 꿔볼 만도 하니까. 이 일은 네게 맡기겠다, 빅토리아. 루터 왕세자가 왕이 되면, 그를 상대해야 하는 건 이제 너야. 녀석의 코를 납작 눌러봐.”

호승심을 부추기는 카시어스의 말에 빅토리아는 눈을 빛냈다. 카시어스는 늘 한결 같았다.

다음 황제는 너라고. 제국은 네 것이라고. 스무 살이 되면 황관을 물려주겠노라고. 가장 빛나는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 모든 것이 빠른 은퇴를 바라는 황제 폐하의 장대한 계획이었지만 어렸을 때는 그걸 알지 못했다. 황제께서 바라시는 대로 자랑스러운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은 스무 살이 될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누안은 우방국인데 코를 납작 누를 수야 없지요. 무슨 꿍꿍이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자신감을 내보인 빅토리아는 몇 가지 사안을 더 전달하고는 물러났다. 다시 혼자가 된 카시어스는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시종을 불렀다.

린델이 왜 이렇게나 늦는지 알아봐야 할 때였다.

시종을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린델이 돌아왔다. 그는 늦은 이유를 간단히 설명했다.

“일로아나 백작이 깨어나시는 것을 확인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병세가 중한가 보군.”

“많이 놀라셨던 모양입니다. 무사히 깨어나셨고, 당장에 내일 입궁하겠다고 벼르고 계십니다.”

“그가 행동파이긴 하지. 수고했다.”

카시어스의 치하에 린델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다음을 기다렸다. 황제의 집무실은 넓었고 커다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있기에 그와의 거리도 꽤 있었다. 그러나 근위시종 하나 없이 단둘이었기 때문에 절로 긴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린델이 잔뜩 굳어 있다는 것을 카시어스도 알아차렸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걷도록 하지.”

“예.”

카시어스가 집무실을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따라붙었다. 집무실에서 가장 가까운 분수가 두 사람의 산책 코스였다. 카시어스의 눈짓에 시종들은 언제나처럼 멀찍이 떨어졌다.

“손을 줘.”

분수 앞에 선 카시어스가 손을 내밀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린델은 잠시 머뭇거렸다. 헤어지기 전에 손을 잡는 것은 이제 인사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며칠 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일이 이제는 의식이 되었다. 린델은 숨이 멈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카시어스의 손을 살짝 잡았다.

“고민은 해봤는데,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고?”

“예, 그렇습니다.”

카시어스는 예고대로 다시금 그때의 일을 언급했다. 린델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시어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자 카시어스가 싱긋 웃으면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가깝다는 생각에 린델은 뒤로 슬쩍 물러나려고 했지만 카시어스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 허락 없이는 입 맞추지 않을 테니까.”

“?!!”

입 맞추겠다는 소리에 린델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닷새 전과 거리가 비슷했다.

“허락하겠나?”

“아……니요.”

“아쉬운데.”

아쉽다고 하면서 카시어스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번에도 물러나지 못한 린델은 잔뜩 긴장했다. 심장이 위험할 정도로 뛰었다.

“심장이 뛰는 것을 보면 짐을 의식하고는 있군.”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건 그렇지. 짐이 그대와 하고 싶은 것은 명확해.”

린델은 자신을 붙잡은 카시어스의 손가락이 소매 속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매끄러운 것이 손목을 쓸어내리는 감촉에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카시어스가 손을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폐하.”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잡힌 손은 뜨거웠고 거기서 열기가 퍼져나가는 것을 린델은 막을 수가 없었다.

늦여름의 햇살은 그늘을 만들어내는 차양 아래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웃고 있는 카시어스가 더없이 빛나서 난감한 상황에서도 홀린 듯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대의 열렬한 시선을 받을 때가 있었지.”

“!!”

“그대도 짐에게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까 의심하기도 했었는데.”

고개를 숙인 카시어스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린델은 허리를 펴는 카시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천천히 깨달았다.

자신이 카시어스에게?

반사적으로 카시어스의 손목을 내려다보는 순간에 떠오른 구체적인 장면에 얼굴에는 열이 확 몰렸다.

린델의 극적인 반응에 카시어스는 손을 더 꽉 잡았다. 창백하게 질리는 대신에 빨갛게 얼굴을 붉히는 걸 보면 상상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유혹이란 걸 대낮에 하는 건 아니었다. 어둠 속이었다면 그를 끌어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유능한 사냥꾼이었고, 도망칠 곳을 마련해 주지 않고 린델을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어떤가?”

카시어스는 속삭이듯 물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린델의 하늘색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시어스는 입술을 달싹거리는 린델을 끝까지 기다렸다.

“잘…….”

“잘?”

“잘 모르겠습니다.”

린델다운 대답이었다. 혼란스러움이 손에 잡히는 것 같아서 카시어스는 웃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귀도, 뺨도 빨개졌어.”

“폐하.”

“짐을 욕망해.”

“?!!”

“뭐든 허락할 테니까.”

카시어스는 린델을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다. 대신 보란 듯이 잡은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놓아주었다.

그러자 린델이 후다닥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아주 몹쓸 짓을 한 것 같군.”

“저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뜻 모를 말을 한 린델의 얼굴은 붉었지만 표정은 비장하기 짝이 없었다. 카시어스는 그것이 욕망에 대한 린델의 대답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당장에 거절하지 말라니까.”

“싫다면 억지로 매달리지 않으신다고 하셨어요.”

린델이 빨개진 얼굴로 씩씩하게 따졌다. 싫다고 하면 매달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카시어스는 한 번 매달려 보았다.

“짐을 싫어하지 않잖아.”

“감히 존경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짐이 차인 거군.”

“예.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한다.”

허락한다고 하자마자 린델이 절을 하고는 그대로 뒤돌아 가버렸다. 거의 뛰다시피 하는 린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시어스는 웃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 뛰어가 버리면 포기할 수가 없어진다.

“이걸 어쩐다.”

차인 건 분명한데 초조하지도 안타깝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즐거워졌다.

우선은 왜 찼는지부터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탐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기도 해놓고는, 막상 욕망하라고 하니 도망가 버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야 다시 유혹을 하든 말든 할 수 있었다.

카시어스는 린델을 잡았던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온기가 손안에 아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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