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37)

-36화-

황제의 하루는 규칙적이었다.

8시에 기상한 후, 몸단장을 하면서 그날에 있을 스케줄을 점검했다. 오전에는 특별접견과 정무회의, 그리고 알현식이 매일 열렸다. 그리고 점식 식사 후의 산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후에는 소회의와 일반접견, 그리고 업무가 유동적으로 이루어졌다.

어제 있었던 사냥대회의 여파로 대신들은 느슨해져 있었고 특별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정무회의는 무난하게 끝났다. 알현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시어스는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난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한꺼번에 찾아오는 법이었다.

첫 번째는 예견된 불청객이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정오 무렵에 접견을 신청했고 카시어스는 흔쾌히 승낙했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카시어스는 접견실에 들어섰다.

“누님께서 여기까지는 웬일이십니까?”

카시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루미아나 대공주를 향해 친근하게 인사했다. 웃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야 누이가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미아나 대공주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녀도 서글픈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섭섭합니다, 폐하. 늙은 누이가 이렇게 찾아뵈려 한 이유를 정녕 모르신단 말입니까?”

대공주의 맞은편에 자리하던 카시어스는 스스로를 늙은 누이라고 지칭하는 말에 쓴웃음을 삼켰다. 늙은 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녀는 쉰 살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 살은 더 젊어 보였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것이 대공주의 특성이었다. 카시어스는 그녀가 자신 앞에서는 야심을 숨기고 늘 약한 척하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글쎄요.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요.”

“폐하.”

“제 성격이 어떤지는 누구보다 누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린 막냇동생을 찾은 연유를 직접 말씀하셔야지요.”

황족쯤 되면 형제자매라도 그 속내를 숨기고 빙빙 말을 돌리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카시어스는 말장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욱 그랬다. 그의 성격을 아는 루미아나 대공주는 표정 관리를 하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폐하의 성정이야 제가 잘 알지요. 무례를 무릅쓰고 기탄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스탄 말입니다. 그 아이가 어제 사냥대회를 채 마치지도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상심한 아이를 달래주시지는 못할망정 장교로 임명하시다니요. 폐하, 너무하십니다.”

“어제 문득, 황족 사내 중에 오직 데스탄만이 입대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사랑하는 조카가 스물다섯이나 되도록 군 경력이 없는데도 신경을 쓰지 못한 게 부끄러워지더군요. 데스탄이 황족으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짧은 경력이나마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투는 나긋했지만 권유가 아니었다. 카시어스는 오늘 아침 일찍, 데스탄에게 북관에서 복무하라는 발령장을 보냈다. 북관은 닐르에서 가장 먼 군사주둔지로, 그곳에 데스탄을 보내는 것은 일종의 질책이었다.

“폐하. 데스탄은 심약한 아이입니다. 북관에서 어떻게 지내겠습니까?”

“어제 결투를 하던 모습을 보니 용맹하기 그지없던걸요?”

“그래도 데스탄은.”

“누님. 데스탄은 황제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황제의 명령이라는 말에 루미아나 대공주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데스탄의 발령이 질책이자 보복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의 아들은 황제의 마법사를 말로 위협했다. 일이 커졌다면 발령이 아니라 유배를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 황제의 마법사는 멀쩡했다. 오히려 데스탄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결투에 패배하는 치욕을 당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황제는 보복성 발령을 내렸다. 아들을 사랑하는 루미아나 대공주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깟 남첩을 조금 위협했다고.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는데.

데스탄이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라는 것도, 황제가 적정한 수준의 질책을 내렸다는 것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이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막냇동생이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13명의 형제 중에 공주는 유일하게 자신뿐이었고, 거기다 막내이기까지 해서 부황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나이를 먹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부황은 딸을 먼 곳으로 시집보내지 않겠다며 제국 제일의 신랑감과 짝지어 주셨다. 혼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낳자 부황께서는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모든 게 완벽했다. 막냇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부황의 여성 편력은 당대에도 유명한 것이었다. 정부와 애인은 언제나 잔뜩 있었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예순 살의 나이에 스무 살의 황후를 맞이했다는 점이다.

스무 살의 아가씨가 하룻밤이 아닌 평생을 책임져야만 당신의 여자가 되겠다고 황제에게 선언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가 카시어스의 어머니였다.

부황께서는 카시어스가 태어나자 세상을 바칠 것처럼 굴었다. 손자손녀가 10명이 넘었지만 늦게 얻은 어린 아들에게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다. 당연히 루미아나 대공주는 부황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녀가 낳은 첫째 아들도 찬밥 신세가 되었다.

그때서야 사랑만 받아오며 꿈속에서 살던 루미아나 대공주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자신은 부황의 사랑을 받는 공주가 아니라 쥴란 공작 부인이 되어 있었다. 남편인 쥴란 공작은 의지가 되어주기는커녕 부황께서 돌아가시자마자 바람을 피워댔다.

열 살이나 어린 자신에게 절을 하던 공작 영애는 큰 오라버니와 혼인을 하여 황태자비가 되었고, 황후가 된 그녀는 이제 황태후가 되었다. 겨우 공작 부인밖에 되지 못한 자신이 먼저 예를 올려야 했다.

그것뿐만 아니었다. 모두에게 잊혔던 막냇동생은 황제가 되었다. 종손녀인 빅토리아는 황태녀였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그들이 그저 운이 좋아 지고의 자리에 올랐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도 충분히 자격이 있었지만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분했다. 억울했다.

“그렇지요. 데스탄은 폐하의 명령을 따를 겁니다.”

루미아나 대공주는 시커멓게 치솟는 감정을 감추며 자애롭게 웃었다. 지난 두 번의 내전에서는 기회가 없었다. 첫 번째는 남편이 너무 몸을 사렸고, 두 번째는 황제의 권력이 너무 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기에는 그녀가 가진 것이 너무 적었다.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기회가 찾아올 거라고 믿었다. 없으면 만들어야 했다.

“발령일은 한 달 후이니, 데스탄과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누님.”

“폐하의 은덕에 감사드립니다.”

감사의 인사를 올린 루미아나 대공주는 예의 바르게 절을 올리고는 접견실을 나섰다.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카시어스는 입 끝을 올리며 웃었다.

대공주의 생각은 눈에 잡힐 듯 확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아낸 것만큼은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앙심을 품은 그녀의 다음 행동이었다. 영악한 만큼 신중하기도 한 루미아나 대공주에게는 딱히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그녀의 바보 같은 아들들만 빼고 말이다. 그녀가 이대로 굴복한다면 끝까지 안고 갈 수 있겠지만, 아니라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귀찮은 일이야.”

카시어스는 불만을 담아 투덜거렸다. 황제란 이렇게나 귀찮은 일을 잔뜩 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것도 모르고 단순히 지고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황제가 되고 싶어 하는 놈들이 널렸다.

물론 빅토리아같이 모든 것을 다 알고도 황제가 되려고 하는 특이한 녀석도 있었다. 주입식 교육을 시킨 결과였다. 카시어스는 멋진 은퇴를 꿈꾸며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로 향했다. 아직 자신은 황제였고 해야 할 일이 잔뜩 있었다.

두 번째 불운은 재상이 가져왔다.

재상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시아무크 제국에서 정변이 일어나 황제가 바뀌었다고 알려왔다. 열심히 상주문을 처리하던 카시어스는 형제들을 죽이고 시아무크의 황제가 된 자의 이름을 듣고는 얼굴을 구겼다.

“빌어먹을.”

카시어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재상도 같은 심정이었다.

닷새 전, 시아무크 제국에서 정변을 일으킨 것은 3황자인 세무흴이었다. 그는 형제들을 죽이고 아버지에게서 황위를 찬탈했다. 여기까지는 흔하디흔한 황위 교체 방법이었다. 그러나 할엔라드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세무흴이 시아무크의 새로운 황제가 된 것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세무흴은 할엔라드 제국에도 잘 알려진 강경 주사파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해 안달이 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60여 년 전에 할엔라드 제국에게 복속된 노벡 평야를 되찾아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를 배제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을 텐데.”

“그가 정변을 일으키고, 성공까지 시킬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요.”

“골치 아프게 되었어.”

카시어스는 혀를 찼다. 할엔라드의 적대국인 시아무크의 정세는 언제나 관심 대상이었다. 특히 카시어스는 호전적인 세무흴이 황제가 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시아무크 제국을 혼란에 빠트리는 게 아니라 온화한 성향의 황자가 황위에 오르도록 간자를 썼다. 그런데 작전은 장렬히 실패하고 말았다.

세무흴은 주구장창 전쟁을 외쳤다. 그런 그가 황제가 되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언제쯤이 될까?”

“빠르다면…… 겨울이 지난 다음이겠지요. 선황의 장례식을 치러야 하니 말입니다.”

재상의 대답에 카시어스는 혀를 찼다. 자신의 예상도 비슷했다. 장례문화가 독특한 시아무크 제국은 6개월 동안의 국상 기간에는 하던 전쟁도 멈추곤 했다.

“미친놈이 황제가 되다니……. 회의를 열겠다. 대신들을 모으도록.”

“알겠습니다.”

재상이 물러났다. 짜증스러운 기분에 카시어스는 읽고 있던 상주문을 노려보다가 인상을 썼다.

내전이 끝나니 이제는 외전이란다.

정말 이 짓도 못 해먹겠다고 중얼거리고 있는데 사가에서 시종이 찾아왔다. 황궁과 벨룬드 공작 저택을 오가며 린델의 근황을 보고하던 그가 세 번째 재난을 말했을 때, 카시어스는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셰리드엘이 쓰러졌다고?”

“예, 그러하옵니다.”

“의원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말해.”

답지 않게 시종을 재촉한 카시어스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공작 저택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시종은 주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결론만 말했다고 반성하며 말을 이었다.

“새벽에 말을 타고 돌아오시는 중에 쓰러지셨는데, 다행히 션이 바로 옆에 있어서 금방 옮겼습니다. 열이 너무 올라 오전 내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고……. 의원의 말로는 감기라고 합니다.”

“감기라고?”

“예. 열감기라서 크게 앓을 거라고 합니다.”

“이런.”

한여름에 감기란다. 카시어스는 어젯밤에 만찬장을 돌아다니던 린델을 떠올렸다.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그는 멀쩡해 보였는데 쓰러졌다니,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싶었다.

“저녁에 찾아갈 거라고 애쉰 부인에게 전해라. 잘 보살피라 이르고.”

시종을 돌려보낸 카시어스는 몇 번째인지도 모를 혀를 찼다. 이런 날이 있다. 조금씩 일이 틀어지다가 종국에는 엉망진창이 되는 날.

루미아나 대공주의 역정도, 그리고 세무흴이 황제가 된 것도 모두 예상한 범위 내의 일이었다. 린델에게 변고가 생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사람이고 아플 수도 있다는 것은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감기로도 사람은 쉽게 죽을 수 있었다. 의원도 다녀갔고 애쉰 부인이 제대로 보살피기는 하겠지만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카시어스는 인상을 썼다. 그의 자리는 언제나 최악의 가능성을 따져야 했다. 린델을 잃어버렸을 때의 타격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저 다시 과거로 돌아갈 뿐이라고 타산적으로 따졌던 것이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끙끙 앓고 있을 린델을 떠올리자 괜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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