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37)

-35화-

“툴라드 백작이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았습니다. 수사슴이 다섯 마리에, 암사슴도 세 마리나 됩니다. 거기다가 여우랑 멧돼지도 있습니다.”

“타고난 사낭꾼이군.”

“워낙 사냥을 좋아하시는 분이니, 실력에 운이 더해졌지요.”

카시어스는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벗으며 시종장에게 사냥대회의 결과를 듣고 있었다. 땀과 먼지로 더러워진 얼굴과 몸을 깨끗하게 닦아내기 위해 나신이 된 카시어스에게는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었다.

대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린델이 얼굴을 굳혀야 했다. 배행 마법사로 황제가 환복하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다. 하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나신이 된 카시어스는 처음이었다.

다행히 뒷모습이긴 했다. 그래도 오늘에서야 자신이 발정 난 망아지라고 인정한 린델에게는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붉은 머리가 반쯤 등을 뒤덮은 뒤태는 훌륭했다. 인간의 벗은 몸이 이렇게나 예쁠 수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린델은 슬쩍 시선을 옆으로 비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아무리 자신의 상태를 인정했다고는 하지만 상대를 앞에다 두고, 그것도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을 훔쳐보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린델은 카시어스의 맨발을 보았다. 화려한 양탄자를 밟고 선 남자는 맨발도 예뻤다.

역시나 무도하고 불경한 생각이었다. 린델은 표정 관리를 하려고 힘쓰면서 카시어스 옆에 선 시종장의 구두를 보았다. 그제야 두근거리던 심장이 조금이나마 진정되었다.

몸을 다 닦아낸 카시어스가 옷을 입고 있는 와중에 새로운 근위 시종이 입실하여 데스탄의 상황을 알렸다.

“상처가 깊어서 출혈이 컸지만, 세투아 경께서 무사히 아물게 하셨습니다.”

“죽지 않았으면 됐다.”

카시어스가 심드렁히 대꾸했다. 린델은 데스탄의 상처를 떠올렸다. 제라르의 칼은 데스탄의 어깨를 거의 관통했었다. 상처가 심각했을 텐데도 무사히 아물었단다. 린델은 치유 마법을 꼭 배워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데스탄 경께서는 만찬에는 참석하지 않고 이대로 닐르로 돌아가신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런 창피를 당하고는 만찬에서 얼굴을 내밀지 못하겠지. 제라르 경에게 첫 번째 시음을 맡기겠다. 그에게 알려라.”

“알겠습니다.”

카시어스의 목소리는 흥겨웠다. 만찬에서 황제의 첫 번째 시음을 담당하는 것은 꽤나 큰 명예였다. 결투의 승자인 제라르를 첫 번째 시음자로 선택했다는 것은 패자인 데스탄을 제대로 망신 주겠다는 의도였다. 린델은 눈에 빤히 보이는 편애에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확실히 카시어스는 무능한 자를 싫어하는 만큼 유능하고 뛰어난 인재를 편애했다.

카시어스는 신하의 실수도 실패도 합리적으로 용서하는 군주였고, 딱 부러지기보다는 의뭉스럽게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넘기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는 호오를 드러내길 꺼리지 않았다.

린델은 문득 자신이 카시어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궁금해졌다. 디비티에의 쓸모야 확실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자신은 내세울 것 없는 애송이였다. 춤은 아직도 뻣뻣하게 췄고, 사냥에 동행할 만큼 말을 타지도 못했다. 마법사라고 해도 이제 겨우 기초를 배우고 있는 수습이었다.

아직은 배우고 익혀야 할 게 잔뜩 있는 애송이 중의 애송이였다. 특히 카시어스와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욕심도 많아, 린델.

아직도 시종장의 구두를 노려보고 있던 린델은 제 양심은 지키고자 했다. 애송이 주제에 감히 제국의 황제 폐하와 비교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 과한 욕심이었다. 나란히 서는 거야 꿈도 꾸지 않았다.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게, 뒤 따라다녀도 괜찮은 수준까지는 되어야 했다.

카시어스가 이례적으로 자신을 챙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후견인으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 당연한 거였다. 그러나 정무회의와 알현식을 관청할 수 있게 하는 것은 파격적인 대우였다. 또한 거의 매일같이 여름밤의 닐르를 함께 거닐어주는 것은 배려를 넘어선 것이었다.

시종장의 말에 의하면 카시어스는 원래 암행을 자주 다닌다고 했다. 피후견인을 핑계로 놀러 다니는 거라는 말이 반쯤은 사실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카시어스가 얼마나 바쁜지 아는 만큼 나머지 반의 의미도 알고 있었다.

처음에야 몰랐지만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는 지금에는 카시어스의 배려가 부담스럽고도 고마웠다. 그러니까 정말 잘해야 했다. 받은 은혜에 제대로 보답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렇게 린델이 시종장의 구두를 노려보고 있는 동안에 카시어스가 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었다. 그제야 린델은 고개를 들어 카시어스를 보았다. 시종이 카시어스의 여름용 크라바트를 묶어주고 있었다.

여름의 해는 길었다. 숲속의 오후 햇살은 카시어스의 머리를 황금색에 가깝게 만들었다. 성화 속의 천사를 닮은 황제께서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사특한 욕망을 품기에는 너무 귀하신 분이었다.

“린델.”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와중에 카시어스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린델은 카시어스에게 다가갔다.

“짐의 조카이자 쥴란 공작의 둘째 아들인 데스탄이 너를 위협한 이유를 아느냐?”

“가리온의 빌트우스트와 같은 마음이겠지요.”

린델은 단순하게 대답했다. 가리온의 빌트우스트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었다. 구두장이인 그는 변변찮은 실력을 가지고도 욕심은 많아서 라이벌을 방해하려고 온갖 술수를 부렸다. 어설프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계속 실패하는 모습은 희곡에서 코믹하게 그려지곤 했다.

어설픈 욕심쟁이인 빌트우스트와 데스탄이 비슷하다고 말하자 카시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맞아. 빌트우스트랑 비슷하지. 놈은 너무 멍청해서 말을 잘 듣는 개로도 만들지 못해. 나이를 먹을 대로 먹었는데, 언제 철이 들지 몰라.”

린델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카시어스가 코트를 입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속도 좁은 놈이라 앙심이 깊어. 마주칠 기회는 별로 없겠지만, 대거리는 하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제라르 경이 무어라고 말을 걸더냐?”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린델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린델은 카시어스에게 숨길 것이 없었다.

“나비를 쫓아주어 감사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구가 되자고도 하셨습니다.”

“친구가 되고 싶다 했다고? 그가?”

“예.”

린델의 고백에 카시어스는 물론이고 같은 공간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종들조차 속으로 쓴웃음을 삼켜야 했다. 친구가 되고 싶단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다 큰 어른이, 그것도 궁중 귀족이 친구가 되자고 노골적으로 말한 것은 꽤나 멋없는 일이었다.

카시어스는 제라르의 꿍꿍이를 따지려다가 관뒀다. 그가 린델에게 호의를 보이며 곁을 맴돌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승부사 기질이 있는 재상을 닮은 그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린델에게 진심을 내보인 것이다.

확실히 린델에게는 친구가 있어야 했다. 정확히는, 친구보다 사교계에 능숙한 멘토가 필요했다. 적당한 인물을 꼽으라면 제라르의 이름이 목록 상단에 적힐 것이다. 바람둥이라고 했지만 그는 세련된 사교를 할 줄 아는 신사였다. 그리고 데스탄과 달리 제 분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제라르 경과 친분을 쌓는 것부터 시작하지. 하스넨 남작에게 검술수업을 맡아달라고 해야겠군. 하스넨 남작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사인데, 은퇴는 했지만 짐의 부탁이라면 너를 가르쳐줄 게다. 하스넨 남작에게서 검술을 배우면, 제라르 경은 네 상대가 될 테고. 제라르 경은 남작의 마지막 수제자거든. 그와 어울려 지내봐.”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배운 대로 인사한 린델의 목소리가 들떴다. 사제가 되기를 희망하며 노력했지만, 그래도 멋진 검사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알렉스가 칼을 휘두르며 연습하는 모습이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자신도 검술을 배운다니 가슴이 설렜다.

그렇게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종들은 황제가 피후견인의 친구로 제라르 경을 낙점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건 꽤나 중요한 정보였다.

어심의 향방이 민감한 궁중이었다. 황제의 피후견인은 아낌없는 총애를 받는 만큼 엄청난 과보호도 받았고, 그래서 딱히 친구나 친인이라고 불릴 사람이 궁중에 없었다. 만약 제라르 경이 황제의 피후견인과 친구가 된다면 재상을 수장으로 하는 중앙귀족에게 힘이 실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카시어스는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다들 제멋대로 판단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웃고 있는 린델을 보았다.

“짐의 피후견인을 위협에서 구해주었으니 제대로 사의를 해야겠지. 아셰리드엘. 짐을 대신해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라. 짐이 선물을 골라줄 테니, 닐르로 돌아가면 그에게 건네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황제의 편애와 배려는 끝이 없었다. 린델은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대낮처럼 환하게 빛나는 별궁의 홀에서 열린 만찬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숲의 바람이 흘러들어 왔고, 향기로운 술과 음식이 식탁을 채웠다. 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을 배경으로 사내들은 저마다 잡은 사냥감을 자랑하기 바빴고, 뒤늦게 합류한 귀부인들은 부채를 흔들며 웃음소리를 키웠다.

만찬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들의 시선은 홀의 한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오늘의 주인공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재상의 셋째 아들인 제라르와 쥴란 공작의 둘째인 데스탄이 중정에서 결투를 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 원인이 황제의 피후견인이라는 것도 입에서 입을 타고 퍼졌다. 데스탄이 꼴사납게 패배한 것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다. 그리고 소문의 두 사람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여러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정보가 빠른 이들은 황제께서 제라르 경을 피후견인의 친구로 낙점했다고 속삭였다.

린델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제라르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경이 아니었다면 말에 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친구 편을 드는 건 아니지만 위협만 하려고 했을 겁니다. 그래도 때마침 제가 그 자리에서 있어서 다행이긴 했습니다.”

“저를 대신해 일부러 화를 내주신 것도 압니다. 그것까지 포함해서 모두 감사드립니다.”

린델의 인사는 진솔했다. 그래서 제라르는 최선의 선택을 한 자신을 칭찬하며 뿌듯한 마음으로 웃었다. 데스탄과의 사이는 끔찍하게 틀어지겠지만, 어차피 좋은 사이가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별말씀을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데스탄 경은 좀 그러니까요. 그것보다 이드나카 형님께 언질을 들었습니다. 경께서 저와 동문이 된다 하시더군요. 제가 마지막 수제자로서 말씀드리자면…… 스승님께서는 정말 무서우신 분입니다. 은퇴하신 지 벌써 3년이 지났는데도 힘이 넘치세요. 스승님 문하에서 배우려면 굳게 마음먹으셔야 합니다. 이건 절대 경을 겁주는 게 아닙니다.”

“그거 큰일인데요.”

훌륭한 입담으로 린델의 미소를 끌어낸 제라르는 마주 보며 웃어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어떤 끌림을 느끼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것은 기분 좋은 감각이었고 그래서 제라르는 마음껏 만끽하기로 했다. 황제의 허락도 떨어졌으니 이유 따위야 천천히 찾아내면 그만이었다.

“제라르 경. 귀하신 분을 소개시켜 주지 않겠나?”

담소 중에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남자는 제라르의 오랜 친구인 크리스티안이었다. 제라르는 황제께서 자신에게 맡긴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 위해 린델에게 크리스티안을 소개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린델의 주위에는 제라르의 친인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었다. 황제의 피후견인은 필연적으로 인기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만찬은, 린델이 태어나서 가장 많은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게 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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