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린델이 알아차린 것을 제라르가 모를 리 없었다. 제라르는 이유도 알았다. 데스탄이 황제에게 가진 삐뚤어진 반감을 린델에게 표출하는 것이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신사처럼 구는 데스탄은 종종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곤 했다. 그의 고귀한 신분 덕분에 대부분의 문제는 별 탈 없이 무마되곤 했지만, 오늘은 때와 장소가 나빴다. 제라르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사과를 하게. 데스탄. 나와, 그리고 아셰리드엘 경에게 말이야.”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구나. 자네답지 않게.”
“고약한 버릇은 여전하군.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면 되지, 매너 없이 대뜸 말로 들이받으려고 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내가 자네를 싫어하다니. 그건 오해야. 제라르.”
“싫어하지 않는다니. 자네는 마음씨도 참 고와. 자네가 눈 먼 내 칼에 찔려서 바닥을 나뒹굴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러기도 쉽지 않은데 말이야. 두고 보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도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싫어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으니 새삼스럽군.”
“!!”
제라르의 도발에 사람 좋게 웃던 데스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올해 초, 제라르와 데스탄은 결투를 했고 제라르가 일방적으로 이겼다.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보는 사람 중에 린델만 빼고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상대에게 결투의 패배를 언급하는 것은 대놓고 모욕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앙금이 남아 있으면 치졸하게 뒤에서 위협하지 말고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해. 왜? 겁나나? 또 바닥을 나뒹굴까 봐?”
제라르의 도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일었다. 겁쟁이라고 불리는 것은 치욕 중에 치욕이었다. 흥미진진한 상황에 모두의 시선은 데스탄에게 닿았다.
데스탄도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저 황제의 남첩을 가볍게 놀라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일이 너무 커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제라르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싶었다. 사실 둘의 실력은 비슷했다. 올해 초에 패배한 것은 운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봄의 사교시즌을 방탕하게 즐긴 데스탄은 최근 검을 연습한 적이 거의 없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치욕은 다시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에야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건 나중에 갚아주면 그만이었다. 데스탄은 이를 갈면서도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왜 이렇게 정색을 하고 그러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진짜 우리가 사이가 나쁜 줄 알겠어?”
“그렇지. 진짜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 하지만 이제부터 나빠질 걸세. 끝끝내 사과도 못 하는 무례한 친구에게 결투를 청하는 바이네!”
제라르가 결투를 청한다고 커다랗게 외치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다시 사람들의 시선은 데스탄에게로 향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릴 때였다. 한 무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중정으로 진입했다. 선두에 선 사람은 황제였다.
황제의 무리는 대규모였다. 황제와 황태녀. 함께 사냥을 한 귀족과 뒤따르는 시종, 그리고 호위병력까지 모두 70명이 넘는 사람이 말을 타고 도열하자 중정은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무궁하신 광영의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황제의 등장에 그 자리에서 가장 신분이 높았던 데스탄이 대표하여 약식으로 인사를 올렸다. 그의 인사에 맞춰 다들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무슨 일이기에 다들 모여 있지?”
“제가 데스탄 경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황제의 질문에 답을 한 것은 제라르였다. 그러자 황제가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답은?”
황제의 시선을 따라 사람들의 눈이 또다시 데스탄에게 몰렸다. 데스탄은 입술을 깨물고 싶은 것을 참았다. 황제가 보는 앞에서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내릴지, 아니면 이길 확률이 낮은 결투에 임할지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승산이 있는 것은 후자였다. 데스탄은 승리의 여신이 자신에게 웃어주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제라르 경의 결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두 사람의 결투를 허락한다. 시작은 준비가 되는 대로, 상대를 전투 불능으로 만들거나 항복을 받아내는 자가 승리한다. 짐이 참관인이 될 테니 둘 다 용맹하게 싸우길.”
“황공하옵니다.”
“황공하옵니다.”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람들이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린델은 결투라는 최종결과에 어리둥절한 상황이었다. 말에 치일 뻔한 것은 자신이었는데, 제라르와 데스탄이 결투를 하게 되었다.
“응원해 주실 거죠?”
제라르가 애교 있게 웃으면서 응원을 바랐다. 린델은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라르가 자신을 대신해 화를 내주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예. 꼭 이기십시오.”
“물론이죠. 그는 제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제라르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사이 근위시종이 다가와 황제께서 린델을 찾는다고 알려왔다. 린델은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결투는 곧이었다.
명예와 자존심이 걸린 결투는 귀족들이 분쟁을 해결하는 가장 적극적이고도 폭력적인 방법이었다. 특히 황제 앞에서의 결투는 자존심 이상의 것이 걸린 법이었다. 게다가 피를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한쪽을 쓰러뜨리거나 패배 선언을 받아내는 것이 승리 조건이어서 치열한 공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보기 드문 구경거리에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자리를 가늠하며 공간을 만들고 내깃돈을 걸었다.
중정의 커다란 분수 앞이 상석이 되어 황제와 황태녀가 자리했다. 린델은 근위시종을 따라 그 옆에 자연스럽게 섰다.
“아셰리드엘. 너는 누가 이길 것 같나?”
카시어스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린델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라르 경입니다.”
“배당이 형편없겠는걸. 다들 제라르 경에게 걸 테니까 말이야. 아, 너는 모르겠군. 제라르 경이 데스탄을 제대로 한 번 거꾸러뜨린 적이 있지. 그런데, 다친 곳은 없고?”
“보시다시피 무탈합니다.”
“말은 선량한 동물이지만 주인을 잘못 만나면 흉기가 되는 법이지. 제 주제를 모르고 욕심만 많은 놈이 패배할 테니, 흥겹게 구경이나 해라.”
누군지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일련의 대화의 흐름상, 주제를 모르고 욕심만 많은 놈은 데스탄이 분명했다. 그리고 말을 언급한 것을 보면 결투 신청이 있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린델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제라르와 데스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솔직히 제라르가 데스탄을 멋지게 이겨주기를 바랐다.
결투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저마다 친인들에게 둘러싸여 양끝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중앙으로 걸어 나와 마주했다. 결투 무기는 검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안전을 위해 스몰소드를 들었다.
입회인인 카시어스가 칼을 바닥에 꽂자마자 두 사람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시작부터 치열하게 검이 맞부딪혔다. 합이 오갈 때마다 환호성과 탄식이 흘렀다.
카시어스와 함께 여러 검투시합을 구경하고 다녔던 린델은 두 사람의 실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특히 마력을 운용하는 몸놀림은 일반 검투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칼에는 마력이 맺혀 일렁거리고 있었다. 모두 뛰어난 마검사라는 의미였다.
아주 미세하긴 하지만 제라르가 우위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검을 맞대고 있는 것과 별개로 데스탄은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고 제라르는 여유로웠다.
그래도 느긋하게 구경할 여유는 없었다. 혹시나 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제라르의 어깨에 검이 스쳤다. 다행히 피는 튀지 않았지만 제라르를 응원하던 린델은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아셰리드엘,”
카시어스의 부름에 린델은 정신을 차렸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에 린델은 카시어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뜨거운 눈길로 보지 말라니까.”
“?!”
“사람을 고르는 눈은 좋지만, 그래도 짐이 옆에 있는 데서 그러면 안 되지.”
린델이 황제의 숨겨진 애인 역할을 한 것도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다. 아직 황제의 농담에 적응되지 않았지만 웃을 정도의 여유는 생겼다.
“폐하. 저는 제라르 경이 이기는 것을 꼭 보고 싶습니다.”
“그가 이길 거야.”
“열심히 응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시비를 걸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가 바람둥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 줘야겠군.”
“폐하.”
“조심해. 짐은 질투가 많아. 그래도 관대한 마음으로 그를 응원하는 것은 허락하겠다.”
“황공합니다. 폐하.”
한껏 사이가 좋음을 과시하고 난 다음에야 린델을 돌려보낸 카시어스는 다시 칼을 교차하는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카시어스는 결투 그 자체에는 감흥이 없었다. 카시어스는 제라르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고 데스탄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데스탄은 그동안 체력 관리에 신경 쓰지 않은 듯 오래 지나지 않았는데도 발놀림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멍청한 놈.
네 살 어린 조카가 자신에게 반감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제멋대로 경쟁심을 불태웠었다. 자신이 황제가 되고 나서는 불만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놈들이야 차고 넘쳐서 그냥 내버려 두었다. 방탕한 귀족의 소란쯤이야 눈감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제 기분대로 황제의 총신을 위협한 대가는 제대로 받아야 했다.
놈에게는 질책이 통하지 않았다. 좀 더 직접적이고 고통스러운, 그리고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만한 것이 필요했다.
“흐음.”
카시어스는 작게 한숨을 삼켰다. 귀찮기 짝이 없는 모략은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야 그냥 목을 잘라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온 귀족이 적으로 돌아서고 만다. 귀족들은 저마다의 이익을 위해 이합집산을 반복했지만, 황제라는 거대한 적을 두고는 똘똘 뭉쳤다. 목을 치려면 누구나 납득할 만한 정당한 명분이 있어야 했다.
황제란 정말 귀찮기 짝이 없는 직업이라고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 와중에 결투는 종반에 다다랐다. 데스탄이 힘겹게 헐떡이며 칼을 휘두르면, 제라르가 반격을 가하면서 몰아붙였다. 승패는 거의 판가름이 난 것 같았다.
“제길!”
커다랗게 잇소리를 내뱉은 데스탄이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어 내던졌다. 마력을 한계까지 사용하겠다는 의미였다. 제라르 역시 반지를 내던졌다. 서로의 한계를 쥐어짜낸 결투의 끝은 제라르가 데스탄의 오른쪽 어깨에 칼을 박아 넣고 턱을 후려쳐서 기절을 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환호와 박수, 그리고 탄식이 쏟아지는 와중에 제라르가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다.
카시어스는 린델이 열심히 박수를 치는 것을 들으며 살짝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낯설고 어설픈 욕망에 갈팡질팡하는 린델과 달리 카시어스는 제 감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린델이 제라르에게 환호하는 모습에 속이 꽤 쓰렸다.
자신은 저 두 놈을 한꺼번에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카시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예로운 승자에게 환호와 박수를.”
승자에 대한 황제의 치하로 결투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