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 : 에필로그 – 사랑을 꿈꾸는 늑대들(2)
그리고 발자국 소리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어떡해. 손님이 왔나 봐…!’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죄짓는 현장을 들킨 사람처럼 허둥거리다가 이불 밑에 이한의 옷을 말아 넣었다. 붉어진 볼을 식히지도 못한 채로 밖으로 나갔다.
“윤오 군. 잘 지냈어요?”
이한보다 먼저 마주친 건 재훈이었다. 나는 더더욱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현관의 신발을 정리하고 재훈을 따라 들어오던 이한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보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
“뭐예요, 형, 얘한테 뭐라고 했어요? 애가 왜 굳어 있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방금 왔는데 뭘….”
“윤오 너 열 있어?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이한은 성큼성큼 내 앞으로 오더니 볼과 이마에 두 손을 짚었다. 안 그래도 그를 생각하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던 나는 더 뻣뻣하게 굳은 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뜨거운데? 괜찮아?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오늘 어디 갔었는데? 무슨 일 있었어?”
“나, 그냥 이불 덮고 누워 있다 나와서….”
“이한 군, 그만해요. 내가 아니라 이한 군이 윤오 군을 굳혀 놓은 거 같은데.”
재훈이 다가와 이한을 나에게서 떼어 놓을 때까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싸운 채로 집을 나가서 마주치면 서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뜸 주물거려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형이 갑자기 찾아오니까 애가 당황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아닌 거 같은데…. 놀라게 했으면 죄송해요, 윤오 군. 오래간만에 맛있는 거라도 대접하고 싶어서.”
재훈은 언제나처럼 여유롭고 친근감 있는 태도로 말을 붙여 주었다. 나는 하필 또 이런 상황에서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는 게 수줍었다. 낯가림을 하기에는 가까운 사이지만, 재훈과 마주칠 때 나는 늘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노천강당에 갇혀 있던 나를 이한이 구해 주었던 날도 그렇고, 강원도의 병원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제일 최근에 그를 만났을 때도 나는 눈물 콧물을 다 쏟아내며 오열했었다.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어 이한과 함께 쇼핑하러 갔던 날이었다. 가을이 짧아서 옷이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이한은 긴 옷과 서로 다른 두께의 외투를 여러 벌 골라 주었다.
옷도 그랬지만 가방을 고를 때는 이한이 뒤적거리고 있는 물건의 가격이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쌀 것 같다는 느낌에 초조해졌다. 가격표를 확인하려고 했는데 이한이 다짜고짜 계산해 버려 그럴 틈도 없었다.
‘이렇게 좋은 건 필요 없는데….’
‘이거 예쁘고 너한테 어울려. 그럼 사는 거지 뭐.’
‘너무 비싼 거 아니야?’
‘나 돈 많아. 앞으로 더 많이 벌 거고.’
‘학교도 제대로 안 다니면서 돈을 어떻게 벌어?’
‘아, 아무튼. 그리고 너 전에 들고 다니던 가방도 없어졌잖아. 가방이 하나는 있어야 할 거 아냐.’
그의 말에 나는 내 낡은 백팩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여름에도 몸이 장판 위로 녹아내릴 것처럼 덥지 않은 집에서 지내며, 아무런 흠도 없이 단정하게 만들어진 물건들을 쓰는 게 조금씩 당연해지면서도, 나는 때때로 어머니를 떠올렸다.
가난에 시달리며 손이 부르트도록 일만 하다 고통 속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 혼자서만 편하게 지낸다는 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혹시 화났어?’
갑자기 어두워진 내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이한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듯 물어 왔다. 그의 입장에서 나는 호사를 누리게 해 줘도 어느새 울상을 짓고 있는, 잘해 줄 보람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투덜거려도 할 말이 없는데 그는 내 기분이 가라앉을 때마다 기민하게 신경을 써 주었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혹시라도 그가 지나치게 마음을 기울이다 지쳐 버리지는 않을지 무서워지기도 했다.
‘아니야. 고마워. 좋은 거 사 줬으니까 오래 잘 쓸게.’
‘괜찮아? 입꼬리가 축 내려간 거 같은데.’
‘그냥, 좀 피곤해서….’
‘커피 마실까? 여기 3층에 카페 있잖아.’
‘아, 거기서 먹었던 케이크 맛있었는데.’
‘그럼 오늘은 아예 여러 개…. 아, 안 돼. 거기 말고 다른 데 가.’
‘왜?’
‘전에 거기 알바생이 너 쳐다보는 거 못 느꼈어?’
‘그랬어? 못 느꼈는데.’
‘넌 너무 경계심이 없어.’
‘…네가 경계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닐까?
툭툭, 말을 주고받고 있는데 재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해 줄 것이 있다는 말에, 결국 예전에 갔던 그 카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갔다. 재훈은 밝은 건지 어두운 건지 미묘한 표정으로 쇼핑백을 들고 찾아왔다.
‘윤오 군, 전에 난월동 집에 있던 물건들 말이에요.’
‘찾으셨어요…?’
‘네, 용역업체가 일부는 이미 처분해서 다 찾지는 못했지만요.’
그가 내민 가방 속에는 어머니와 나의 옷 몇 벌과 학용품 몇 가지, 어머니의 손가방과 신분증, 앨범 한 권과 투병 노트가 들어있었다. 단출한 삶의 흔적에 먹먹해져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재훈은 조심스레 덧붙였다.
‘이거 말고도 처방받았던 약들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사건에 증거로 제출해야 할 것 같아서 따로 보관해 뒀어요. 윤오 군이 갖고 싶어 할 물건도 아닐 것 같고. 저, 그리고….’
그는 안 그래도 눈물을 떨구던 나에게 통장 몇 개를 건넸다.
‘이건 윤오 군 어머님이 윤오 군 앞으로 만들었던 통장인 것 같아요.’
어머니는 매달 내 이름으로 된 통장에 돈을 넣고 계셨던 모양이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병원에 입원해 살 곳이 없게 된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이 통장에 대해서는 함구하셨다. 이 돈만은 절대로 쓰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셨을까.
개설한 지 십 년이 넘은 그 통장들은 네 모퉁이가 다 낡고 헐어 있었고, 입금 내역이 빼곡히 길었다. 공장에 다녀 벌이가 있었던 시절에는 몇만 원씩, 형편이 되지 않은 달에는 몇천 원씩.
모아 놓은 액수는 초라하다 싶을 정도로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게 더 슬펐다. 엄마가 모아 둔 한 줌의 마음이 무거운 닻처럼 나를 저 밑바닥까지 끌어내렸다.
언제부터 우는 줄도 모르게, 나는 목을 놓아 울어 버렸다. 당황한 이한이 재훈을 내쫓듯이 집에서 내보내는 걸 말리지도 배웅하지도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울었다. 이한은 바들바들 떠는 나를 안고 다독였다. 한참 눈물을 쏟은 내가 탈진하듯 축 늘어질 때까지.
‘괜찮아? 물 좀 줄까?’
‘…….’
‘아니면 따뜻한 거 마실래? 김하민이 청귤 차 가져다준 거 좋아하잖아. 응? 한 잔 타 줄까?’
‘…싫어.’
‘그러면….’
‘나는… 이렇게 잘 지낼 자격이 없어.’
‘…….’
‘엄마는 그렇게 힘들면서도 나만 생각했는데, 나 혼자서만 이렇게….’
다 쏟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볼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한은 그런 나를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답답하게 굴지 말라고 화를 내는 표정인 줄 알았는데, 더 자세히 보니 그도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나, 나… 위로에는 서툴러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아.’
‘…….’
‘어머니는 네 생각뿐이었잖아. 네가 잘 지내기만 바라셨던 거잖아. 지금도 그러실 거야. 여태까지 힘들었던 만큼 앞으로는 너한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고 계실 거야. 좋은 곳에서,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실 거야.’
‘…….’
위로에 서툴다며 더듬더듬 읊조리던 그의 말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그날 일을 생각하며 또 콧잔등이 시큰해지려는 나를 놔두고, 재훈과 이한은 포장해 온 음식들을 식탁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윤오 군, 초밥 먹어요?”
“네. 좋아해요.”
“다행이다. 혹시 어떨까 싶어서 튀김이랑 생선구이도 넉넉히 샀으니까 많이 먹어요. 살이 빠진 건 아니죠?”
“퇴원하고 몸무게 많이 늘었어요.”
“그래야죠. 그땐 진짜 위험할 정도로 말랐었잖아요. 잠깐만요. 컵이….”
“제가 꺼낼게요.”
“아녜요. 난데없이 쳐들어와서 일을 시키면 안 되지.”
찬장을 기웃거리던 재훈은 부엌과 거실 사이에 놓인 진열장을 발견했다. 진열장의 한 가운데에는 상자가 두 개와 액자 두 개가 있었다. 재훈이 가져다준 어머니의 유품이 든 상자와, 이한이 아버지의 납골당에서 가져온 상자 사이에 이한과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 저렇게 놔뒀구나. 윤오 군 어렸을 때예요? 귀엽네요.”
‘선생님 덕분에’라고 말하려던 나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던 그의 말을 떠올리며 간신히 말을 멈추었다. 이한처럼 형이라고 부를 엄두는 안 나고 아저씨라고 부르면 더 화를 내실 것 같아 그냥 호칭을 생략했다.
“물건들 가져다주셔서,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밥 먹을까요?”
셋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음식이 식탁에 가득 찼다.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곳으로 찾아와 둘이서는 먹지도 못할 만큼 잔뜩 음식을 배달시키던 이한처럼, 재훈도 손이 큰 모양이었다.
“맛있겠다. 여기 초밥 괜찮아요.”
“윤오 많이 먹어.”
“빈말로라도 형한테는 많이 먹으라 소리도 안 하고.”
“형은 알아서 잘 먹잖아요.”
“그건 그렇죠. 하…. 초밥엔 맥준데.”
“캔맥은 몇 개 있는데, 마실래요?”
“한 캔으로 대리 부르기도 그래서요.”
“그럼 두 캔 드시죠, 뭐.”
“그럴까요? 윤오 군도 맥주 마실래요?”
“아, 저는….”
“얘 술 잘 못해요.”
“그래요?”
“네. 지난번에는 초콜릿 때문에….”
이한이 위스키가 들어간 초콜릿을 먹었던 날을 언급하자, 나는 볼이 빨개졌다. 이한도 아차 싶었는지 급하게 말을 돌렸다.
“아, 아무튼 얘 술 먹이면 안 돼요. 넌 아이스티 마실래?”
이한은 허둥거리듯 맥주 두 캔과 산딸기 맛 아이스티를 가져왔다. 캔 두 개와 잔 하나로 건배하고,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와서 죄송해요. 이한이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학교로 찾아갔다가, 얘기가 길어져서 밥 먹을 때가 되어서요.”
“아니에요. 그런데… 이한이랑 무슨 얘기 하셨던 건지 알려 주실 수 있어요?”
재훈이 이한에게 급히 할 얘기라면 아마도 서씨 일가의 사건에 관한 얘기일 거다. 이한은 그 이야기를 내 앞에서 쉬쉬하기 때문에, 나는 재훈이 있는 자리에서 말을 듣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한은 재훈에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둘 사이에 잠시 실랑이하는 듯한 눈빛이 오간 후, 결국 재훈이 입을 열었다.
“그게….”
그는 이한과 내 눈치를 번갈아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요. 이한이도 저도, 윤오 군을 보호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니까 큰일은 아니에요.”
“…….”
“서이준이… 귀국한다고 해요.”
“아아….”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싶어 잔뜩 긴장했던 나는 이미 알고 있던 소식에 한시름을 놓았다. 내가 놀랄 거라고 생각했었는지, 재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내 반응에 오히려 놀라는 눈치였다.
“윤오 군, 괜찮…아요?”
“네. 실은….”
나는 안 그래도 화를 참고 있는 듯한 표정의 이한을 곁눈질하며, ‘이틀 연속 싸우고 싶지는 않은데’ 하고 조마조마함을 느꼈다.
“오늘 오전에 오 실장님 면회 갔다가 들었어요.”
“하, 그 개새끼는 진짜, 뚫린 입이라고….”
“이한 군, 말 좀 예쁘게 해요. 어차피 윤오 군도 알아야 할 일인데.”
으르렁거리는 이한의 목소리에 나는 어깨를 움츠렸지만, 재훈은 익숙한지 곧장 맞받아쳤다.
“윤오 군. 서이준이 오면 신경 쓸 일이 많아질 거예요. 곧바로 수사가 개시될 거고, 법정 싸움도 길어질 테니까.”
“네, 그렇게 들었어요. 혹시… 언제쯤 귀국하는지도 아시나요?”
“그게… 아직은 확실하지 않은데.”
재훈은 맥주를 한 모금 삼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서이준이 뉴욕에서 일으킨 사건에 대해서도 들으셨어요? 서이준도 수사망이 좁혀오기 전에 최대한 빨리 들어오고 싶을 거예요. 서 회장 사건이랑도 얽혀 있지만 않으면 진작 들어왔을걸요.”
“…….”
“서 회장 쪽 변호사는 지금 서 회장에게 갈 혐의 중에 몇 개 정도를 서이준에게로 돌리고 싶어 하는 눈치거든요. 어떻게든 중형은 피하고 싶을 테니까. 그러려면 서로 말을 맞춰야 하는데 지금 그쪽은 자기 혐의가 어디까진지, 수사기관에서 증거를 뭘 가지고 있는지도 확실히 모르고 있어요. 서이준이 순순히 죄를 뒤집어쓰려고 하지도 않을 거고….”
“…….”
“의견 조율이 어려운지, 여태까진 변호사 쪽에서 서이준의 귀국을 늦추려고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일모레 서 회장에 대한 영장 심사가 있거든요. 거기서 서 회장의 구속이 결정되면 서로 말을 맞추기도 어려워질 거고, 그럼 서이준이 바로 들어오게 될 수도 있죠.”
체포니 구속이니 하는 말들이 솔직히 실감되지는 않았다. 내 인생을 아무렇게나 주무르고, 간단히 무너뜨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된다는 게. 재훈은 걱정을 담은 눈으로 복잡해진 내 표정을 살폈다.
“너무 신경 쓰고 있진 말고, 그때 가서 생각해요.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뭐든 얘기하고.”
“괜찮아요. 지금도 너무 신세 진 게 많아서….”
“무리할 건 없어요. 윤오 군 일이니까,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만둬 버려도 괜찮아요.”
“힘들 것 같긴 한데….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
“그리고 그 사람들 벌주는 게 저만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저희 어머니 일이기도 하고… 이한이 아버지의 일이라고도… 생각해요.”
재훈이 이한의 아버지를 오래도록 마음에 품어 왔다는 이야기를, 이한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말을 꺼내 놓고도 주제넘은 소릴 한 건가 싶어 살그머니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러나 재훈은 언짢아하는 게 아니라 그저 기특하다는 표정이다.
“윤오 군 얼굴이 전보다 많이 좋아진 거 같아요. 상담은 꾸준히 받고 있죠?”
“네. 윤 선생님이 잘해 주세요.”
나는 강원도의 병원에서 퇴원한 후 재훈이 소개해 준 상담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소를 방문하던 게 얼마 전부터는 상태가 호전되어 2주에 한 번이 되었다.
이한도 두 차례 정도 선생님을 만났지만, 워낙에 퉁명스러운 타입이다 보니 상담 선생님께 마음을 여는 것도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무슨 얘길 했는지 물어봐도 도통 알려주지 않았다.
재훈과 내가 말을 주고받는 사이, 이한은 누가 봐도 불쾌해하는 듯한 얼굴로 빠르게 맥주를 들이켜는 중이었다. 이한이 서이준을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요즘 들어 증오가 더 심해졌다는 느낌이었다. 과민반응에 가까울 정도로.
“천천히 마셔요, 이한 군. 취할라.”
“취하면 되죠, 뭐.”
“아, 분위기 이상해지게 자꾸.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요? 예전에는 서이준이 콩밥 먹는 꼴을 빨리 보고 싶다고 그러더니.”
“난 그냥… 서이준 그 새끼가 끔찍하게 싫어요.”
“…….”
“그 새끼 얘기가 나오는 것도 싫고, 그 새끼가 멀쩡하게 나돌아다니고 있다는 것도 싫고, 그 새끼가 있던 자리나 닿았던 물건까지 다 싫어요.”
“…그건 나도 그렇지만.”
재훈과 이한은 맥주캔을 맞부딪쳤다. 사실 이한이 아니더라도 모두에게 유쾌한 화제는 아니었기 때문에,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식사를 시작할 때는 맥주를 두 캔씩만 먹는다던 재훈과 이한은 결국 훨씬 더 많은 술을 마셨고, 기분이 좋아진 재훈은 낯간지러운 말들로 이한과 나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다가 이한에게 등을 떠밀려 쫓겨나듯 집을 떠났다.
“아후, 진짜. 주정뱅이 아저씨.”
저도 맥주에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으면서, 이한은 진저리를 치듯 그렇게 말했다. 재훈을 배웅하느라 현관 앞에 나와 서 있던 나는 그와 단둘이 되었다는 생각에 새삼 머쓱해져 도망치듯 부엌으로 돌아왔다. 재훈의 등장으로 잊고 있던 사실이 와다닥 떠올랐다.
‘터놓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안 그래도 꺼내기 쑥스러운 이야기인데, 지금이 좋은 타이밍인지도 애매했다. 답답했던 걸 생각하면 어떻게든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어색했다. 술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까부터 이한의 표정이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슬금슬금 식탁을 치우고 있으니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따라와 나를 돕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부엌만 차근차근 깨끗해져 갔다. 그가 식탁을 닦고 쓰레기를 정리하는 동안, 나는 사용한 컵을 닦았다.
얘기할까, 말까, 언제 이야기할까. 딴생각에 골똘히 잠긴 채로 다 닦은 컵을 내려놓고, 물 묻은 손을 탁탁 털며 앞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뒤돌아섰다.
그러다 그만 다용도실에서 들어오던 이한과 어깨가 퍽, 부딪치고 말았다. 몸이 밀린 나는 그대로 넘어가면 컵을 깰 거라는 생각에 허우적거렸고, 바닥의 물기 때문에 완전히 중심을 잃어버렸다.
“앗…!”
이한은 급하게 몸을 돌려 한 손은 휘청거리는 나의 허리를, 다른 손은 뒤로 확 젖혀지려는 뒤통수를 붙잡았다. 우리는 부둥켜안은 것 같은 모양새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으으….”
“괜찮아?”
처음엔 바닥에 찧은 엉덩이가 아프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눈을 떠 코앞으로 다가온 이한의 얼굴을 보자 심장은 또 눈치도 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붙잡은 손끝에서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옷 위로 닿은 피부와 꿈틀거리는 근육에서도.
나는 그와 재훈이 집에 들이닥치기 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해 냈다. 그의 옷에 파묻혀 그의 향기를 느낄 때처럼, 다시금 명치가 두근거리고 발끝이 저리는 감각이 나를 간질였다.
그는 술기운에 눈빛도 체온도 뜨거워져 있었다. 기분 탓인지 알코올 냄새에 섞여 그에게서 페로몬 향기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입술이 너무 가깝다는 긴장감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조심해야지.”
그러나 또, 긴장감은 나 혼자만의 것이었나보다. 이한은 웅얼거리듯 그렇게 말하고는 내 어깨 아래 손을 넣어 몸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이런 무안한 순간에 꼭 그랬듯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뒤돌아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부엌에 남겨진 나는 민망함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노골적으로 키스를 조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던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대화해야겠다는 다짐은 놀라서 쪼그라들고, 마음은 저 발끝까지 굴러떨어졌다.
‘왜…?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조바심이 지나쳐서 화가 날 것 같았다.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한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나를 스쳐 가는 모든 것들을 질투하고. 상냥하게 대해 주면서도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나를 향한 마음이 사랑인지, 독점욕인지, 각인으로 엮여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 대한 의무감인지도 잘 모르겠다.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던 나의 머릿속에,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난 그냥 서이준 그 새끼가 싫어요. 그 새끼가 있던 자리나 닿았던 물건까지 다 싫어요.’
이한이 나를 ‘서이준에게 닿았던 물건’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한의 이준에 대한 유별난 증오와, 지나칠 정도로 내 주위를 경계하는 그의 태도를 생각하면 그게 이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쟤, 서이준이 날 어떻게 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저러는 건가?’
너무 많은 고민 끝에 혼란스럽고도 곤란한 결론을 내려 버린 순간, 그가 욕실에서 다시 나왔다. 여전히 술기운에 발그레한 채로, 습기를 머금고는 머뭇머뭇 다가왔다.
“저기.”
“…….”
“…괜찮아?”
“아까 넘어진 거? 괜찮아.”
“아니, 그게 아니라… 서이준이 온다고 하니까 네가… 걱정하고 있을까 봐.”
“왜? 별로 신경 안 쓰는데.”
조심스러운 질문에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사실은 앞으로 다시 이어질 싸움이 두려우면서도,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하고 말았다. 이한은 무어라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또 맥빠지는 소릴 했다.
“…그래. 난 잘게. 잘자.”
또 아무 일 없는 하루가 끝나려 하고 있었다. 설마 했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는 느낌에 나는 눈시울이 벌겋게 물들었다.
“어…? 우, 울어…?”
“아, 안 울어.”
“오늘 역시 무슨 일 있었던 거지? 언제야? 면회 갔을 때?”
그에게 들켜 버린 순간 눈물이 더 솟아올라 뺨을 타고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는 놀라 내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그의 손을 짜증스레 뿌리쳤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왜 그래? 울지 마.”
“너 때문이잖아. 너야말로 왜 그러는데?”
“응…?”
“나, 나… 별장에서 아무 일도 없었거든? 서이준이랑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악에 받쳐 바락바락 소리친 말에 그는 진심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응…?”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모습이, 생각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그러나 일단 내뱉기 시작한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왜… 갑자기 그런 얘길….”
“갑자기가 아냐. 계속, 너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 서이준이 별장에서 나한테… 그랬다고.”
“…….”
“그래서 날 만지는 것도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말로 뱉고 나니 후련해지기는커녕 도리어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 끓어 넘치는 것 같았다. 나는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왜,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그야, 흐윽, 윽, 네가아아….”
이 상황에서도 나는 ‘네가 만져 주지도 입 맞춰 주지도 않는 게 속상했다’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웠다. 돌연 울기만 하는 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이한은 날 와락 껴안고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왜 널 기분 나빠해? 그런 말이 어딨어. 응? 내가 대체 왜 그러는데…?”
“그치만….”
하나가 서러워지니 다른 것도 새삼스레 서러워졌다. 나는 목을 놓아 울면서도 꾸역꾸역 말했다.
“너, 나한테에, 으흐, 윽, 흑. 조아한다고, 흐끅, 말한, 적도, 없잖아아…. 흐으으….”
“내가…?”
그는 당황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기억을 더듬고 있는지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려졌다.
“설마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나…?”
당연히 이야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 떨리는 목소리에서, 나를 꼭 껴안은 손에서, 마주 닿은 심장 박동 소리에서. 나는 아무 말 없이도 내가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울 일도 아니었지만 일단 터진 울음을 그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나는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끄윽끅 흉한 소리를 내며 마구 울어 댔다. 내내 불안하던 마음과, 내버려진 듯했던 설움이 한데 뭉쳐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지난 후, 눈물이 조금씩 잦아들자 울먹임보다 더 감당 못 할 무안함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민이 얘기했던 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했으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을 텐데. 지레짐작으로 화부터 내고, 엉뚱한 말을 하며 엉엉 울기까지 하다니.
“…이제 좀 진정이 됐어?”
이한은 부드럽게 물었지만, 나는 그의 가슴팍에 묻은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그는 말없이 나를 데리고 그의 방으로 갔다. 눈을 감다시피 한 채로 그가 이끄는 곳으로 발 디뎠지만 그곳이 그의 방이라는 것 알 수 있었다. 코끝이 찡하도록 좋은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이사 온 후 그의 방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었다. 매일 그가 화가 날 정도로 정중하게 잘자, 하고 인사하고 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면 더는 그를 찾아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궁금해진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곳에는 내 방과 똑같은 책상과 침대가 놓여 있었다. 내 방도 분에 넘치게 포근하고 아늑한 곳이라고 느꼈지만, 방을 가득 채운 좋은 향기 때문인지 어쩐지 이곳이 훨씬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는 나를 제 침대 위에 앉히고는 가만히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축축하게 젖어 있을 뺨과 퉁퉁 부었을 눈, 빨갛게 물들었을 코끝이 부끄러웠다.
“윤오야.”
“…….”
“나 사실… 너한테 얘기 안 한 거 있어.”
그의 말에 안심되려던 심장 철렁 내려앉았다. 이한은 잘못을 고백하는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뭔데?”
“…오 실장이 가져다준 증거들 중에, 그 사람이 별장에서 있었던 일 녹음한 녹취록도 있었거든.”
“…….”
“나 그거… 봤어. 그래서 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고 있어. 너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은데, 도저히, 도저히… 모르고 있을 수가 없어서.”
“…….”
“마음대로 봐 버려서… 미안해.”
나는 이한에게 별장에서 있었던 구체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변호사나 수사관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그는 나가 있도록 했었다.
그렇지만, 그가 나 모르게 그때의 일을 알아냈다는 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입으로 그 얘기를 전해야 하는 무거운 숙제에서 해방된 기분이었다.
“괜찮아. 나… 딱히 비밀로 하려던 건 아니야.”
“…….”
“계속 말하고 싶었는데, 말하려고 했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어. 숨기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네가… 그때 일 알게 되면… 너무 슬퍼할 거 같아서.”
내가 그곳에서 겪은 일에 그저 분노하거나 가여워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그 이야길 듣는 것이 고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의 일이 나에게 상처를 입혔던 그만큼, 그의 영혼이 상처받게 될 것 같았다.
두 눈 가득 슬픔을 품은 그를 보면 나의 염려가 맞았던 모양이다. 그는 요즘 들어 과민반응에 가까울 정도로 더욱 서이준을 경멸했고, 그때의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꺼렸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 줄 알았는데,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어서 그랬나 보다.
“…네가 그렇게 힘들었을 줄은 몰랐어. 당연히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때 얘기들이 그렇게 쓰여 있는 걸 보니까, 정말….”
분노가 치밀어오르는지 그는 어금니를 꾹 악물었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별장에 갔을 때, 네가 있던 방으로 올라가기 전에 1층에서 서이준하고 마주쳤었어. 그 새끼가 갑자기 뒤에서 칼을 들고 덤벼들었거든.”
“칼을…? 그럼, 그 상처가 그때….”
처음 듣는 이야기에 나는 놀라서 숨을 삼켰다. 이한이 나를 구하러 왔을 때 온통 피투성이였던 기억이 있지만,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붕대로 상처를 가린 후였다. 나중에 어디서 다쳤는지를 물어봐도 그는 별장을 찾아오던 길에 다쳤다고만 이야기했었다.
“담을 넘어가다 다친 것도 있긴 한데 싸우긴 싸웠어. 심하게 찔리진 않았지만. 그때 거기 있던 사람… 지호였나? 그 사람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위험할 뻔하긴 했는데….”
그러고 보면 검찰청에서 지호와 처음 마주쳤을 때, 그는 내 건강에 대한 걱정만큼이나 이한이 무사히 잘 있는지를 걱정했었다. 무언가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렇게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건 몰랐다.
“뒤엉켜서 싸우다가 발끈해서 목을 졸랐고… 그 새끼가 칼을 떨어뜨렸는데…. 그 칼을 주웠을 때 잠깐 생각했어. 그냥, 찔러 버릴까 하고. 그러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거든. 지금 찌르면 다 끝내 버릴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었고.”
“…….”
“그런데… 참아 버렸어. 그 순간이 자꾸 생각나. 그 새끼가 너한테 했던 짓을 다 알았더라면….”
“…….”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 알았으면 그냥 찔러 버렸을 텐데. 그 새끼가 널 괴롭히고, 모욕하고, 손찌검하고…. 네가, 네가 그렇게 궁지에 몰릴 때까지….”
“아니야, 이한아….”
“그 새끼가 한국 오면, 뭐 해. 재판받고 처벌받아도 몇 년 살다 나오면 그만이잖아. 그렇게 될 때까지 넌 또 힘든 일 겪어야 하고….”
“…….”
“너는 착하니까, 널 괴롭혔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지금 잘 지내는 것처럼 언젠가는 서이준 그 새끼도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난 도저히 용서가 안 돼. 서이준도, 그 순간 마음이 물러져서 그 새끼가 멋대로 달아나게 내버려 둔 나도….”
까맣고 깊은 이한의 눈동자 저 아래에, 슬픔과 분노, 후회가 짙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보다 더 위로에 더 서툰 나지만, 이번만은 곧바로 그를 안아 줄 수 있었다. 마음 가득 말이 넘쳐흘러서.
“아니야, 잘했어, 이한아.”
“…….”
“네가 참지 못했으면, 그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해 버렸으면… 나도 날 평생 용서할 수 없었을 거야. 나 때문에 네가 그런 짓을 하게 된 거니까.”
“네가 왜 널 용서 못 해? 넌 그냥….”
“무슨 말 하려는 건지 알아. 지금 네가 널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
“어차피 무슨 일을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어. 스스로에게 무얼 하든, 남에게 무얼 하든.”
“윤오야, 그래도….”
“알아. 그렇다고 서이준을 용서할 생각은 없어.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 사람과의 일은 나만의 문제도 아니고… 나만의 문제라고 해도, 그 사람만큼은 절대로 용서하고 싶지 않아. 아마 앞으로도….”
“…….”
“이한아, 나는….”
나는 그의 어깨에 볼을 기대었다. 그 지옥 같은 별장에 갇힌 채로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토록 되찾고 싶던 그의 품에.
“늘 그렇게 생각했어. 나는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생기면, 그것보다 훨씬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나서 엉망이 되기를 반복했으니까. 그때 그 별장에서는 그것마저도 다 끝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늪에 빠져 있었고, 이게 정말 내 밑바닥이라고.”
“…….”
“그런데… 네가 와 줬어. 나를 그 밑바닥에서 끌어 올려서, 같이 살자고 해 줬어. 그러고 나서 보니까 내가 있던 곳은 늪이 아니라 터널이었던 거야. 그리고 나는 이제 터널의 끝까지 걸어 나온 거고.”
“…….”
“내가 누굴 용서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건 그렇게 하는 편이 내가 편하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일 거야. 그래, 이한아. 나 이제, 내 행복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어.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나한테 그런 용기가 생긴 건 다 네 덕분이야. 그러니까….”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의 두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뜨겁고 보드라운 입술이 도장을 찍듯 꾸욱, 나의 입술을 내리눌렀다가 또 갑자기 멀어졌다.
제가 한 일에 스스로 당황한 듯 손과 입술을 떼어 낸 이한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흐물흐물 녹아내렸던 마음이 다시 토라질 것 같아서, 나는 눈꼬리를 치켜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나랑 키스하기 싫어? 왜?”
“아니, 아니야. 그러니까… 이건….”
손을 둘 곳을 몰라 허둥거리던 이한은 침대 시트를 꼼지락꼼지락 쥐어뜯으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네가… 무서워할 것 같아서….”
그의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어서, 나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거렸다.
“무서워… 해?”
“…….”
“내가 너를? 왜…?”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 내가 당황스럽다는 듯 질문을 더듬거렸고, 이한은 무안하다는 듯 내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담소에서….”
“…….”
“당분간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해서….”
“트라우마…? 키스가 트라우마야?”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한은 시트를 벅벅 긁어 가며 말을 늘어놓았다.
“각인할 때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생각이 안 나는데 혹시 내가 거칠게 굴었을 수도 있을 거 같아서….”
“…….”
“게다가 상담 선생님이, 네가 오메가로 발현한 후에 있었던 모든 일이 너에게는 충격일 수 있다고 하셨어.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오메가가 된 거잖아. 학교 애들도 그렇게 모질게 굴었고…. 나라도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매번 윽박지르기만 하고….”
정말로, 그가 무섭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게 떨리고 두려워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달리 살길이 없어 눈물을 머금고 그에게 갔던 날도 있었다. 그때는 오직 그만이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이었다.
“나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성격이 모나서 그게 잘 안 되니까…. 네가 서이준한테 속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 답답해져서 화풀이처럼 대할 때도 있었어. 네 입장에서는, 나도 널 괴롭힌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뭐…? 아냐. 그건 정말 아니야.”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괴롭고 어지러울 때마다 늘 이한을 기다렸다. 나를 구해 줄 사람이 그밖에 없는 생각에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가 기대고 싶은 곳이 그뿐이라서였던 것 같다.
어쩌면 나와 그가 알아차린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나는 줄곧 그를 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살피는 일이 서툴러 나도 내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으니, 이한이 그걸 알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그 별장에서 나온 후로는 마음을 속에만 품고 있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겠다고. 그러나 속내를 감추며 살아온 습관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각인을 했던 날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후로 그다지 내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좋아한다’라는 말이 없었을 뿐 늘 나를 보살피고 질투를 숨기지 못했던 그와는 달리, 늘 고집만 피우고 잔소리만 늘어놓는 나는 정말로 무심해 보였을 거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꺼내 보여야 할 것 같은 조바심에 입술이, 손끝이 달싹거렸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제 할 말을 하느라 그런 나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단 말이야. 상냥해지고, 부드러워지겠다고. 네가 조금이라도 무서워할 만 한 일은 안 할 거라고.”
“…그럼 이제 영영 아무것도 안 하려고 했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정말… 온종일 그런 생각밖에 안 하는데.”
얼결에 흘리듯 진심을 말해 놓고, 그는 얼굴을 더 붉게 물들였다. 시트를 쥐어뜯는 손길도 더욱더 부산스러워졌다.
“네가… 많이 아팠었잖아. 그런데 나는 병원복 입고 앉아 있는 널 봐도 자꾸 이상한 생각만 들어서, 내가 진짜 징그럽고 변태 같아서…. 이러니까 네가 겁을 먹을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고….”
병원에서…? 그건 정말 뜻밖의 말이었다. 병원에서 이한의 태도는 깍듯하다 싶을 정도로 얌전하고 조심스러웠었다. 나를 부축하거나 옮겨 주어야 할 때도 최대한 몸이 닿지 않도록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가끔 병원복을 갈아입거나 몸에 땀을 닦아 줄 때는 들릴 듯 말듯 얕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다. 예상보다 차도가 없는 나를 답답해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마음이었을 줄이야.
그는 자괴감에 가득 찬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의 말이 징그럽거나 불편하게 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가 내게 닿아 주길 기다린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묘하게….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정말 널 아프게 하거나 무섭게 할 것 같아서… 네가 정말로 원할 때, 하나도 아프지도 무섭지도 않게… 부드럽고 상냥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
“가벼운 스킨십이나 그런 것도 그냥… 네가 다 나으면, 몸도 마음도 완전히 건강해지면 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 애매하게 닿으면… 못 참게 될 수도… 있으니까.”
“…….”
“그런데… 그렇게 매일매일, 지금은 괜찮을까, 후, 지금은 너도… 바라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참고… 기다리다 보니까 점점… 뭔가 너무 오래… 억눌려져 버려서….”
이한의 목소리는 조금씩 조금씩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는 아래로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부드럽지만 무섭도록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나는 어느샌가 내가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은은하게 나를 감싸고 있던 그의 향기 또한 짙어져 있다는 것도.
향을 풀어 낸 것이 누가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뒤섞인 향기 속에서, 그와 나의 호흡이 차례차례 가빠 올랐다.
“후우, 언제부턴가는… 이대로라면, 상냥하게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후… 나는, 내가 너를… 너무….”
“…이한아.”
처음으로 그의 페로몬에 휩쓸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낯선 감각에 혼란스러우면서도, 본능이 시키는 대로 그것을 원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을. 그때는 그것이 괴로운 우연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짝지어진 알파의 페로몬이 나의 충동을 들쑤시고 있었다. 머리를 쨍하게 울리는 현기증에, 정신을 가누는 것이 힘들었다. 그의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흥분이 더해졌다. 선명해지는 모든 감각이 그를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나는, 하아, 나는 너… 안 무서워.”
마음을 표현하고 싶긴 한데 방법을 모르겠다. 아니, 방법을 모른다는 것보다도 이성이 너무 빨리 흐려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에게 닿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고 그걸 몰라준다는 생각에 얼마나 서운했는지를 말하고 싶은데, 성급한 본능은 말보다 먼저 팔딱팔딱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만져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서, 결국 나는 아주 단출하고 서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네가, 이제 나를 만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후, 그, 그게… 무서웠어.”
“…….”
“사, 상냥하게 하지 마. 그냥… 흡…!”
다시 그의 입술이 나에게 겹쳐졌다. 주저함마저 다 삼켜 버릴 듯이 뜨겁게. 눈을 감을 틈도 없이 입술 사이로 혀가 밀려들어 왔다.
“하으, 으…!”
상냥할 수 없을 거라는 그의 말 그대로, 난폭한 키스였다. 그는 혀뿌리가 아릿해 올 때까지 나를 얽고 당겼다. 마구 헤집어 대는 속도를 따라잡을 틈도 없이 입술을 물고 빨아들였다.
그는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지려는 나를 집요하게 뒤쫓아왔다. 풀썩, 침대 위로 몸이 내려앉자 향기가 더 진하게 나를 감싸 안았다. 코끝으로 향기를 들이켜지 않아도, 시트를 스치는 피부를 따라 그대로 스며들어 왔다.
그는 입술을 맞댄 채로 내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순식간에 바지를 벗겨내고는 무릎으로 내 다리 사이를 짓눌러 자연스레 벌어지도록 했다. 어느새 아랫배가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하반신으로 피가 급하게 몰려드는 느낌에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아, 어떡해. 벌써….’
너무 빨리 반응하는 몸이 부끄러웠지만 그는 앞을 숨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곧장 내 성기를 움켜쥐는 손길에 목구멍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힘없는 단말마는 내질러지지도 못한 채 고스란히 그에게 삼켜졌다.
“읍, 으… 읏….”
“코로 숨 쉬는 거, 또 잊었지, 너.”
그의 목소리에서 예전처럼 매정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지만, 움직임만은 거침없었다. 그의 손바닥이 막 고개를 든 페니스를 마구 주물렀다. 오싹거리는 느낌이 나를 자비 없이 찔러 댔다. 그의 손길이 닿는 게 너무 오래간만인데 모든 게 너무도 빠르고 격렬했다.
상냥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 놓고, 그 말을 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 나는 또 겁을 집어먹었다. 오갈 데 없이 허공을 허우적거리던 손을 내려 간신히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툭툭, 어깨를 두드려 그를 멈춰 세우고 조금만 천천히 만져 달라고 하면, 그는 분명 내 말을 들어줄 거다. 그러나 나는 어떤 사인도 보내지 않은 채로 그를 꼭 움켜쥐고만 있었다. 걷잡을 수 없이 휘청거리는 느낌이 두렵지만, 그렇지만….
“하윽…!”
그의 손가락이 귀두의 윗부분을 둥글게 문질렀다. 민감한 부분이 자극되면서 허리가 멋대로 들썩거리고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려 왔다. 선단에서는 벌써부터 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질척한 액체가 그의 손끝을 적시자, 만지는 감촉은 더 야릇해졌다.
나는 밀어낼 듯 말듯 그의 어깨 위에 얹었던 손을 더 뻗어 목 뒤를 감싸 안았다. 전기처럼 몸을 타고 오르는 감각에 취해 버렸다. 두려워도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받아들이기 벅찬 느낌마저 모든 것을 더 짜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이미 긴 시간을 기다렸고, 그에게 닿는 시간을 조금도 늦추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 내 입술을 머금은 그의 입술을 더 깊게 베어 물었다. 점막과 점막이 더 질척하게 부벼지도록 혀를 길게 내밀었다. 삼켜지지 않은 타액이 입술 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얗게 녹아내리는 듯한 입맞춤이 이어지던 끝에, 그가 갑자기 고개를 뒤로 물렸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내민 혀를 거두지도 못한 채로 그를 올려보았다.
“나도… 만져 줘.”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 바지 앞을 조금 끌어 내렸다. 눈을 내려 아래를 보니, 그의 것도 무섭도록 부풀어 있었다. 나는 순간 호흡이 탁 틀어막히는 기분이었다.
그의 것을 처음 보고 놀랐을 때처럼,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저렇게 커다란 것이 내 몸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닥쳐올 고통과 쾌감을 생각하니 아래가 묵직해지는 것 같았다.
넋을 놓고 그것을 응시하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주춤주춤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허리를 낮게 말아 그에게로 다가갔다.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바짝 곤두선 그의 페니스에 입 맞추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표면과 불룩 튀어나온 핏줄은 위협적이고도 유혹적이었다. 손바닥 안에 움켜쥐자 그것은 더욱 딱딱하게 부풀어 올랐다.
아래에 넣을 수 있을지 의문일 뿐만 아니라, 이걸 입안에 다 밀어 넣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기둥 위에 아랫입술을 갖다 댄 채로 내가 머뭇거리자, 그는 조심스레 나를 말렸다.
“윤오야, 무리할 필요는….”
입에 넣기가 물리적으로 버거울 것 같긴 하지만, 하고 싶지 않은데도 억지로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를 기분 좋게 해 주고 싶다는 마음조차도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의 몸에서도 가장 짙은 향기를 내뿜고 있는 그곳을 머금고 빨아들이고 싶었다. 조바심에 입안 가득 침이 고여 들고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혀를 넓게 펴 기둥을 핥아 올렸다. 귀두를 가볍게 입술로 감싸자 끝부분에서 습기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쓰고 비릿한 맛에 오히려 구미가 당겼다.
더 깊게, 가깝게 삼키고 싶은 마음에 입을 크게 열었다. 최대한 밀어 넣어 봐도 긴 기둥의 반도 덮지 못했다. 혀뿌리까지 닿은 기둥이 탄력적으로 꿈틀거리며 입안을 더 가득 메웠다. 욕심껏 삼키긴 했는데, 아는 게 없는 나는 입에 문 것을 어찌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딱 한 번, 그의 것을 입에 담아 본 적이 있었다. 그건 내가 무언가를 했다기보다는 그가 벌려진 내 입에 제 성기를 박아 넣는 행위에 가까웠다. 그때는 괴로움에 눈물과 구역질을 삼켰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흥분에 몸을 떨고 있었다.
방법을 모른다면 본능대로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치아가 닿지 않도록 볼 안의 여린 살과 혓바닥으로 그의 것을 감싸 물었다. 혀를 굴려 보려다 잘되지 않아서 그냥 고개를 뒤로 물렸다가 다시 깊게 숙였다. 입술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기둥의 아랫부분은 손으로 감싸 문질렀다.
서툴게 움직일수록 체온은 더 뜨거워지고 향기는 뻑뻑하도록 무거워졌다. 타인의 성기를 빠는 것이 어째서 나를 흥분시키는지 모를 일이었다. 홀린 사람처럼 고갯짓을 반복하다가 문득 눈을 들어 이한의 모습을 보았다.
“읏….”
그는 붉게 풀어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품고 있던 흥분이 나에게까지 밀려들어 왔다. 더 흥분할 수 없을 만큼 흥분해 있던 나는 시야가 흐려지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제 것을 입에 문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정수리 뒤로 넘어가 목으로, 등으로, 온몸을 훑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좋은 자세는 아니었다. 무릎을 꿇은 채로 어깨를 숙여 그의 하반신에 머리를 처박고 있으니, 엉덩이는 자연스레 위로 들어 올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짐승 같은 자세로, 나는 정신없이 그의 페니스를 애무하고 있었다.
이미 안쪽의 물기가 비어져 나와 입구 부근을 적히는 중이었다. 벌써 젖었다는 걸 그가 보게 될 거라는 생각에 밑이 더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고여 있던 물기가 흘러넘쳐 찐득한 물방울로 뭉쳐졌다. 구물구물, 살갗 위를 기어 다니는 물방울이 간지러웠다.
“후우….”
그는 깊게 숨을 뱉으며 손을 들어 내 등 위를 짚었다. 뜨거운 손끝이 나를 건드리는 느낌에 닿은 곳의 근육이 멈칫거렸다. 숙어진 내 몸 아래에서 혼자 꺼떡거리던 나의 페니스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대로 사정해 버리면 어쩌지, 싶을 정도로 한껏 발기해 아랫배에 착 올라붙었다.
“계속해.”
그는 다정한 건지 매몰찬 건지 모를 목소리로 명령하고는 손끝으로 나를 더듬어 갔다. 허리를 타고 내려간 긴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위에서 아래로 슥, 훑어내렸다. 그것만으로도 털이 쭈뼛해질 만큼 흥분이 솟아올랐다.
골 사이의 물기를 매만지던 그는 자연스레 나의 입구로 다가왔다. 멋대로 뻐끔거리기 시작한 그곳은 곧바로 그의 손가락 한 마디를 삼켰다.
“흐읍….”
이 집에 온 후 몇 번이나 내 손으로 건드려 보았던 곳이다. 혹시나 무어라도 흔적이 남지는 않았을지, 그가 알아채는 건 아닐지 하는 생각에 심장 박동이 더 바쁘게 뛰어올랐다.
머리는 걱정에 가득 차 있는데, 아래는 그런 걱정 같은 것은 모른다는 듯 그를 기다리며 꿈틀꿈틀 더 진한 습기를 뿜어냈다. 둥글게 입구를 쓸어 탐색하던 그는 손가락 두 개를 겹쳐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그저 그것뿐인데, 그다지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것 같지도 않은데 칼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마구 떨렸다. 그동안 내가 서툰 손짓으로 어떻게든 스스로를 달래 보려 애쓰던 것이 허무해질 정도로 강렬한 감각이었다.
그 느낌에 마비되어 버린 것처럼 몸이 굳어 버렸다. 다른 곳은 모두 경직되고, 그가 풀고 있는 아랫부분만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그의 손이 닿은 순간부터 고개를 움직이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던 나는 아예 멈춰서 버렸다.
“계속… 하라니까.”
“읏…!”
그는 재촉하듯 말하며 굵고 긴 손가락을 더 깊게 쑤셔 넣었다. 힘주어 긁고 문지르고 헤집는 감각이 내 하반신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함께 휘젓는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시작한 거니까, 나도 계속 제대로 그의 것을 빨고 싶었다. 그러나 아래에서 쾌감과 이물감이 뒤엉켜 훅훅 치고 올라올 때마다 나는 꼼짝없이 무력해졌다. 이따금 반사적으로 입안을 조일 뿐, 목구멍까지 가득 들어찬 것 때문에 제대로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페로몬에 대한 통제는 놓아 버린 지 오래였다. 흘러나온 것이 한데 뒤섞여 무엇이 그의 것이고 무엇이 나의 것인지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밀도 높은 향기에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하… 아아…!”
숨이 가빠 오는 것을 견디지 못한 나는 결국 머리를 뒤로 당겨 물고 있던 그의 것을 뱉어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올릴 힘은 없어서, 여전히 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였다. 타액과 선액으로 범벅이 된 페니스가 볼에 마구 비벼졌다.
그는 내빼 버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더 거칠게 손가락을 놀렸다. 흥건해진 그곳에서 찰박찰박 소리가 들려왔다. 비집고 나온 물기가 그의 손바닥과 나의 둔부를 다 적시고 다리 사이로 마구 흘러내렸다.
“윽, 으읏, 아…!”
그가 붙들고 있는 엉덩이는 점점 들어 올려졌고, 상체는 점점 낮게 늘어졌다. 납작하게 눌린 몸 아래에서 괴롭게 부푼 페니스가 아무렇게나 짓눌렸다. 하반신을 울리는 묘한 감각은 결국 한 지점으로 쏠렸다. 견딜 수 없이 몰아치는 사정감에 나는 울먹거렸다.
“으, 나, 나 갈 것… 흐윽!”
‘갈 것 같아’ 그 짧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절정이 찾아왔다. 어딘가에서 시작된 전기 같은 것이 묵직하게 아래로 쓸려 내려가며 발끝까지 저릿거리게 만들었다.
몸의 근육이 제멋대로 경련하듯 파들거렸다. 내벽도 수축했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며 그의 손가락을 조여 댔다. 점막이 그에게 밀착되었다 떨어지는 것조차 자극이었다.
“아…으으….”
나는 아득한 숨을 뱉으며 진저리쳤다. 지독한 절정은 여운까지도 길었다. 혼자 성기를 문지를 때나 지금이나 사정하는 것은 같은데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난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후우…. 아직 덜 풀렸는데.”
이한은 진득하게 한숨을 쉬며 젖은 손으로 내 엉덩이를 주물렀다. 또, 매정하지 않게 나무라는 듯한 말투가 어쩐지 듣기 좋았다.
깜빡, 깜빡 초점을 붙잡아 보니 눈앞에는 여전히 흉흉하게 부푼 그의 성기가 있었다. 자청한 숙제를 끝마치지 못한 기분에, 나는 힘겹게 다시 입술로 귀두를 감싸 물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막 절정에 도달해 힘이 빠진 몸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뜸을 들이는 내가 답답했는지 그는 다른 손을 들어 올려 내 목덜미를 짚었다.
목덜미에 오래도록 남아 있던 상처는 각인의 흔적으로 덧입혀졌다. 간혹 이한이 흡족하고도 뜨거운 눈으로 제가 남긴 생채기를 확인한다는 것을 나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아아….”
각인한 자리를 빙빙 맴돌던 그가 목과 머리의 경계 부분으로 손을 옮겼다. 머리칼의 틈새를 훑어 올리는 손끝에서 전류가 느껴졌다. 달게 느껴지는 호흡을 뱉으며, 나는 그의 것에서 입술을 떼어 그를 올려보았다.
“이한아.”
“…….”
“…네가 해 줘.”
그러고는 입을 크게 열어 그의 것을 한껏 머금었다. 하는 방법도 모르고 제대로 할 힘도 없지만, 그런 건 그냥 다 핑계였다. 나는 어느새 내 머리를, 사지를 움켜쥐고 뒤흔드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 난폭한 장면에 흥분한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부인할 수 없이 흥분해 있었다. 그가 아프도록 강하게 나에게 파고들어 주기를 바랐다.
“우웁…!”
이한은 나의 기대대로 거칠게 제 것을 박아 넣어 주었다. 퍽, 퍽, 치고 들어오는 박자에 맞추어 머리채를 움켜쥔 손은 여지없이 내 고개를 그의 허리에 가져다 붙였다.
버겁도록 두껍고 길쭉한 것이 고통스러운 지점까지 밀고 들어왔다. 움직임이 반복되자 목구멍과 눈시울이 타는 듯이 뜨거워지고 자연스레 눈물이 튀어나왔다.
나는 피할 생각도 없이 그의 것을 받아들였다. 턱뼈가 아프도록 입을 넓게 벌리고 혀뿌리를 낮춘 순종적인 자세였다. 고통스럽지만 고통만 느껴졌던 건 아니었다. 호흡이 짓눌리면서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하는 느낌까지 온전히 흥분으로 더해졌다.
“후우, 으….”
입안을 가득 채운 그의 것이 조금 더 커지고 단단해졌다. 꿈틀거리는 살덩이가 입천장과 혓바닥 위를 긁어 댔다. 둔탁하지만 깊숙하게 찌르던 속도는 어느새 얕고 재고 깊어졌다. 터질 듯 뜨겁고 팽팽해진 근육도 그의 절정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찔한 현기증 속에서, 그가 내 입안 깊숙한 곳에 토정할지도 모른다는 난잡한 상상을 했다. 어쩌면 기대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나는 본능적으로 목구멍을 조여 가며 그를 부추겼다.
“읏…!”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한은 절정의 직전에서 제 것을 끄집어냈다. 아쉬움에 고개를 기울여 그를 뒤따라가려 했지만, 그는 내 머리채를 단단히 붙잡은 채로 나의 입술 바로 앞에서 사정했다.
튀어 오른 정액이 나의 얼굴 위에 그대로 끼얹어졌다. 윗입술부터 이마까지 온통 끈적한 체액으로 뒤범벅되었다. 입술 양옆이 찢어질 듯 아프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나는 코끝에 짙게 묻은 그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뭐 하는 거야. 입안에 쌀 뻔했잖아.”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고 싶었지만 속눈썹에 묻은 정액 때문에 눈을 뜰 수도 없었다. 나는 대답 대신, 혀를 내밀어 입술에 묻은 정액을 남김없이 핥았다.
“하, 이게 진짜….”
엉뚱한 짓을 하는 나를 보며, 이한은 날카로운 숨을 뱉었다. 뒤통수를 움켜쥔 그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더니 이내 내 머리채를 아래로 강하게 잡아 내렸다. 저절로 들린 입술 위로, 그가 제 입술을 맞물렸다. 꿈틀대는 혓바닥이 입술을 훑더니 깊게 들어왔다. 다시금 떠밀린 몸이 침대에 눕혀졌다.
“하으, 으, 으….”
또다시 키스할 때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나는 호흡이 달려 흐느적거렸다. 이한은 따뜻한 손으로 멍해진 내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멀어져 갔다.
당황한 나는 끈적한 눈을 억지로 떠 보려고 꿈틀거렸다. 이상한 고집을 부려 그를 화나게 한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그가 곧바로 돌아와 부드러운 수건으로 내 얼굴과 몸을 닦아 주었다.
눈을 뜨자, 선명해진 시야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열기와 격정에 시달리면서도 애써 상냥해지려 하는 표정이었다. 안심되는 마음에 기쁨이 벅차올랐다.
“괜찮아?”
나는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대듯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마르지 않아?”
“으응… 괜찮아.”
“무리할 거 없어. 힘들면 바로 말해 줘. 지금 아니라도 언제든지… 읍….”
다정하게 묻는 말을 자르며, 나는 그의 입술을 다시 찾아 물었다. 목마르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 계속 목이 말랐다. 살을 맞대고 있어도 그를 더 들이켜고 싶었다. 잦아들 줄 모르는 향기가 나에게 쏟아지는 게 좋아서. 더 삼키고 마시고 싶었다.
키스를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뻔뻔스레 그를 재촉해 댔다. 젖을 빠는 아기처럼 서툴게 그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뺨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손끝으로 턱을 쓸어내리다가, 쇄골 언저리 간질이다가 가슴팍에 닿았다.
“흐으, 응….”
처음에는 부드럽게 어루만졌지만 조금씩 반응을 보이는 내 모습에 그도 점점 격해졌다. 유두 부근을 서성거리던 손가락이 돌기를 짧게 쓸어내렸다가 강하게 짓눌렀다.
“아아…!”
이한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순간, 입속을 계속 맴돌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손가락으로 유두를 거칠게 찍어누르다가도, 갑자기 더운 혀로 반대쪽 유두를 간질여 댔다. 번갈아 다가오는 자극에 몸이 떨렸다.
그는 후들거리는 한쪽 무릎 밑을 들어서 내 다리를 넓게 벌렸다. 습기가 남은 입구에 손가락이 밀려들어 왔다. 뒤엉킨 쾌감이 다시금 저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올랐다.
다시 들어온 그의 손은 조금 더 진득하게 나를 만졌다. 길쭉하고 굵직한 손가락을 이리저리 교차하며 내벽을 훑고 풀어 냈다. 내벽을 탐색하듯 어루만지던 그의 손끝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느릿해졌다.
민감한 곳을 문지르고, 누르는 듯한 느낌에 안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징징 울리는 감각에 걷잡을 수 없이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으, 아, 거, 거기… 아!”
“그래, 여기.”
이한은 그렇게 속삭이며 입안에서 굴리던 유두를 살짝 깨물었다. 찌릿한 느낌에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아래를 건드리는 손길이 더 짙어졌다.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생경한 느낌이었다.
페니스가 자극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쾌감에 사타구니가 저릿거렸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숨이 가빠서 머리까지 몽롱했다. 허리를 뒤척일 힘도 없어 아랫배와 두 다리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 흐읏, 자, 잠깐….”
신경을 긁어 대는 감각이 연거푸 다가왔다. 쾌감이 부풀다 못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어느 사이 아래가 이완되어 손가락이 하나 더 들어와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지경이었다.
너무 강하고 빠른 느낌에 당황했다. ‘잠깐’이라고 말했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발끝을 그의 다리에 얽고 있었다. 어쩌면 ‘더’, ‘빨리’ 그런 말이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오락가락하는 나의 마음을 이한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같은 곳을 반복적으로 자극했다. 아찔한 감각이 쉼 없이 닥쳐왔다. 마치 파도처럼, 한계까지 밀쳐지고 다시 떠밀린 나는 결국 둑이 무너지듯 절정에 다다랐다.
“하아앗…!”
시야의 가장자리가 하얗게 번져 갔다. 아니, 새빨갛게 타들어 갔다. 일부러 움직인 게 아닌데도 발끝이 멋대로 까딱거렸고, 뇌가 다 녹아 버린 것처럼 흐물흐물해졌다.
“후우, 후, 하아아….”
호흡을 잊고 있던 나는 이한이 짧게 입 맞춰 준 후에야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는 헐떡이는 내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주었다. 호흡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그는 힘이 풀린 나의 허리 아래에 베개를 받쳤다.
어느새 그의 페니스는 팽팽하게 일어나 있었다. 조금 전 내가 입에 머금었을 때보다도 더 크고 험상궂은 형상이었다. 그는 침대 옆 서랍에서 콘돔을 꺼냈다. 콘돔 포장지를 뜯는 그의 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얇은 고무 막을 제 성기에 대고 도르륵, 말아 올리는 모습도.
풀린 눈으로 저를 뚫어지게 보는 내가 쑥스러웠는지, 그는 귀 끝을 붉히며 허리를 숙여 다가왔다. 나의 이마에 그의 이마가, 나의 콧등에 그의 콧등이 마주 닿았다. 달큼한 숨결을 끼얹으며, 그는 조심스레 속삭였다.
“많이 풀었으니까 괜찮긴 할 텐데….”
“…….”
“아프면… 꼭 말해 줘야 해. 응?”
목소리를 낼 기운도 없던 나는 그와 눈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흐트러진 나의 하반신을 바투 쥐고는 다리 사이로 제 살덩이를 붙여 왔다. 아래에서부터 느껴지는 열기에 작게 몸서리쳤다.
그것은 입구를 누르듯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완전히 풀어진 아래는 성기의 끝부분을 삼키듯 받아내었다. 쑤우욱, 밀어 넣어진 그의 것이 천천히 나의 안쪽을 채워 갔다. 몸이 열렸다고는 해도, 굵직한 것이 밀고 들어오는 압박감은 녹록지 않았다.
“흐…으….”
그렇다고 아픈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아파하면 이한이 그만둬 버릴까 봐 겁이 났다. 나는 신음을 안으로 구겨 넣으며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이한은 나를 달래듯 맞닿은 코끝을 살짝 비볐다.
마침내 그것이 끝까지 들어오자, 몸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에 침대 위에 놓인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힘겹게 발끝을 들어 올려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두 발목을 서로 얽자, 온몸으로 그에게 매달린 모습이 되었다.
맞닿았던 이마를 떼어 낸 그는 벌벌 떨고 있는 나의 어깨 아래로 손을 넣어 제 몸에 더 가까이 붙였다. 포근한 느낌에 안도하려던 찰나, 그는 삽입되었던 성기를 뒤로 물렸다.
그의 것을 잡아 물고 있던 내장이 함께 딸려 나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고통뿐이라면 차라리 견딜 만했을 텐데, 절정의 여운이 남은 스팟이 긁히는 쾌감까지 겹쳐졌다. 등줄기를 타고 오싹, 소름이 돋아올랐다.
“으읏, 으….”
그리고 느릿하게 다시 제 것을 박아넣은 이한은 조금씩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퍽, 퍽, 소리와 함께 젖은 피부가 맞부딪쳤다. 나의 손바닥에도, 감싸 안은 그의 등에도 번들번들하게 땀이 스미기 시작했다.
손이 자꾸 미끄러졌지만 아주 놓아 버릴 수는 없었다. 손을 놓는 순간 몸이 붕 떠올라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그가 무겁게 나를 내리누르고 있는데도 그런 착각이 들었다.
살갗을 가르고 들어온 것은 매번 지독할 정도로 정확하게 민감한 지점을 누르고 지나갔다. 처음에는 쾌감보다 이물감과 고통이 더 컸지만, 순서가 역전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하, 하악, 읏!”
“아파…?”
“아니, 아….”
“천천히… 할까?”
나는 땀에 촉촉해진 이마를 그의 어깨에 갖다 댄 채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 빨리. 하, 아윽!”
“후우….”
“아, 흐읏, 좋…아, 으읏….”
“…….”
“좋아, 하윽, 이한아, 아, 나, 나 지금… 으응, 너무… 아…!”
두서없는 나의 말이 그에게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그는 더 빠르고 강렬하게 허리를 치받아대기 시작했다. 쿵, 쿵. 박아 오는 힘과 속도에 결국 그를 감쌌던 팔과 다리가 풀어지고 말았다.
그는 저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입술을 겹치며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나는 하염없이 짓찧어지는 채로 입을 열어 그의 혀를 빨아들였다. 아무것도 꾸며내지 못한, 그저 원시적인 키스였다.
그의 골반이 엉덩이 아래쪽에 연달아 부대끼며 자세를 무너뜨렸다. 나는 납작하게 깔린 채로도 자꾸만 떠밀렸다. 그는 두 손으로 나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들어 올려 제 몸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깊어진 삽입감에 쾌감은 더욱 적나라해졌다.
‘어떡해, 아아….’
물이 흥건한 뒤쪽으로 빠르게 성기가 드나드는 소리가 찌걱거렸다. 헐떡이는 두 사람의 호흡도, 철썩거리며 살갗이 서로를 때리듯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도 야릇했다.
“하으윽, 아, 으읏!”
이한의 몸도 한계까지 뜨거워졌다. 그 뜨거운 몸에 짓눌린 나도 펄펄 끓고 있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른 열기가 우리 둘을 에워싸고 있었다. 폭발할 듯한 그 열기는, 오직 하나의 출구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아아, 이한, 하, 하윽….”
“윤오…야, 후우….”
“아, 나, 아읏, 가, 갈 것, 같… 하으, 또, 으으….”
“응, 괜찮, 아, 흐, 읏….”
“하으, 아… 아아…!”
번개가 나를 쪼개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다시 격렬한 쾌감에 관통당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머릿속이 번쩍거리는 와중에도, 나는 손을 더듬어 그의 등을 붙잡았다.
절정을 쏟아내고 나에게 더운 무게를 싣는 그의 몸이, 사랑스러웠다. 나의 위로 녹아 흐르는 땀방울도, 선명한 체취도,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도. 그 모든 것이 성급했던 나의 기다림을, 조바심을 씻어 내려가고 있었다.
“하아아….”
찬찬히 식어 가는 절정 속에서, 나는 아득한 숨을 뱉으며 몸을 늘어뜨렸다. 만족스럽고도 나른했다. 연달아 두 번 사정한 탈력감에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몽롱한 여운을 즐기던 차에 내 위에 누워 있던 이한이 몸을 휙, 일으켰다. ‘목마른데, 물을 가져다주려나’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의 눈을 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의 눈동자에는 탈력감이나 여운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오로지 불길만이, 조금 전 살을 맞대고 절정을 향해 달려갈 때와 같은, 아니 그보다 더 형형해진 불길만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한…아…?”
그는 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그는 축 늘어진 내 몸을 휙, 뒤집어 버렸다.
엎어진 채로 버둥거리는 사이, 이한은 다 쓴 콘돔을 벗어 던지더니 서랍으로 손을 뻗어 새 콘돔을 끼웠다.
“자, 잠깐….”
이한은 대답 없이 두 손으로 나의 골반을 붙잡아 올렸다. 엉덩이가 들리자, 채 다물어지지 않은 구멍에서 애액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등 뒤에서 내쏘아지는 기운이 숨 막히도록 흉흉해졌다. 눈이 돌아가는 살벌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으윽…!”
아무런 예고도 준비 동작도 없이 그는 곧장 내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바로 전의 행위로 다 벌어지고 허물어진 자리지만, 묵직한 고통은 여전했다. 그는 경직된 나의 몸이 못마땅한 듯 엉덩이를 거칠게 주물거리며 허리를 치받아오기 시작했다.
“악, 으흐….”
힘이 풀린 상체는 내리꽂히는 힘을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나는 반항할 생각도 못 한 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시트를 움켜쥐었다. 납작하게 깔린 몸은 그가 흔드는 대로 침대 위에 짓눌리기를 반복했다. 그의 허벅지에 연거푸 부딪힌 엉덩이에 매 맞은 것처럼 발갛게 열이 일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허덕거리는데,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한 내벽은 또 착실하게 그를 받아내고 있었다. 아랫도리에서 시작된 열감이 손끝 발끝으로 빠르게 퍼져 갔다.
“읏! 으…으.”
“하…. 윤오야.”
이한은 흐느끼고 있는 나의 위로 제 몸을 낮추었다. 버둥버둥 몸부림치는 나의 등을 강한 힘으로 감싸 짓눌렀다. 흡사 교미하는 늑대의 자세였다.
일생에 단 하나의 반려를 갖는 늑대처럼, 그는 오로지 나를 향해 타오르는 욕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물어 상처 낸 자리를 더운 혀로 핥았다. 몸서리칠 틈도 없이, 그는 그 자리에 다시 깊게 이를 박아 넣었다.
“하악…!”
감미로운 호흡과 향기를 내리쬐는 그의 아래에서, 나 역시도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벅차고 아픈 행위에도 내벽은 맥박치고 페니스는 빳빳해졌다.
얄밉게도 다시 쾌감이 느껴졌다. 아찔한 성감이 이미 지친 신경 위로 마구 들이부어졌다. 쉼 없이 나를 원하는 이한이 얄미운 건지, 이럴 때까지도 꼬박꼬박 쾌감을 찾아 삼키는 내 몸이 얄미운 건지 모르겠다.
“읏….”
“윤오야.”
“아윽, 아, 흐…!”
그는 끙끙 앓고 있는 내 가슴팍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는 그대로 몸을 들어 올렸다. 아래로 쑤셔박힌 것보다는 나은 자세였지만… 아니, 나을 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허리가 뒤로 접힌 채로, 나를 뒤로 당기는 그의 팔에 체중을 싣고 세차게 꿰뚫리고 있었다. 삽입이 끔찍하게 깊어져 헉, 헉 숨이 터져 나왔다.
“…키스해 줘.”
그는 아래를 갈라 버릴 듯 빠르게 박아 대면서도 애타게 나를 졸랐다. 그런 소릴 할 거면 허리라도 좀 잠잠히 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내 목을 타고 흘러나오는 건 음절은커녕 어절도 이루지 못한 신음뿐이었다.
“윽, 으읏!”
“입, 맞추고 싶어, 후우…. 응…?”
그는 다시금 칭얼거리며 나에게 몸을 더 붙여 왔다. 비스듬히 찔러 들어온 성기의 끝단은 부풀어 오른 스팟을 갉작이고 있었다. 굼질거리는 쾌감 속에서, 나는 또 그의 무리한 요구에 응해 어깨를 뒤틀었다.
불편한 자세로 입술이 겨우 맞닿는 순간 그는 가장 깊숙이 제 것을 박아 넣었다. 또다시 괴로울 정도로 황홀한 절정이 우리에게로 쏟아졌다.
“하아아….”
나는 지친 숨을 흘리며 그가 나를 눕히는 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이한은 사정을 마친 후에도 미련이 남은 것처럼 얕은 허리 짓을 하며 내 안을 뭉근하게 휘저었다.
“윤오야….”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르며, 귓불과 목덜미와 어깨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지치지 않고 들러붙는 그가 사랑스러웠지만, 또 무겁고 버거웠다.
“나… 목말라.”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자마자 힘겹게 중얼거렸다. 그는 내 말에 정신이 돌아온 듯 벌떡 일어났다.
“아, 무, 물 가져올게.”
이한은 빛의 속도로 물을 떠 와 나를 부축해 앉히고 컵을 입에 대주었다. 물을 다 마신 후에는 제 어깨에 기대게 하고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미안…. 내가 너무… 흥분해서.”
사실 한소리 해 주려고 했는데, 시무룩해진 모습을 보니 미운 마음이 쏙 들어갔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샐샐거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미소를 참기 위해 시선을 돌리던 나는 침대 옆의 열린 서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거… 내 옷 아냐…?”
재훈이 판잣집의 짐을 찾아준 것들 중에 그나마 멀쩡해서 챙겨두었던 반팔 티였다. 어느 날 사라져서 어디 갔나 했었는데, 이런 곳에 있었다니. 내 질문에 안 그래도 뜨거웠던 이한의 몸이 터질 듯 붉어졌다.
“아, 그… 네 거 맞는데….”
“…….”
“그게 그러니까…. 어…. 나쁜 뜻으로 가져다 놓은 건 아니고… 그냥….”
그는 어울리지도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횡설수설했다. 뒷부분의 말을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것 같았다. 나도 나쁜 뜻으로 그의 옷을 가져갔던 건 아니니까.
문득 짓궂게 나를 놀리던 하민의 말이 생각났다. ‘그럼 어떻게 푸는데? 각자 방문 닫고 들어가서 자위해?’ 그 한심하게 들리던 말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었던 거다.
“괜찮아. 우리 이제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솔직하게 말하자. 그게 좋을 것 같아.”
나도 같은 짓을 했다는 말은 숨긴 채로, 나는 너그러운 척 말했다. 열렬히 고개를 끄덕인 이한은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고는 볼에 가볍게 입술을 부볐다.
“맞는 말이야. 내일 주말인데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글쎄.”
맨살을 마주 대고 있으니, 우리도 평범한 또래의 연인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문득 평범한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 평범하지 않게 만나 힘겨운 과정 끝에 가까워진 우리가 여태껏 누려 보지 못했던 작고 소소한 행복들을.
“외출이라도 해 볼까?”
“좋지.”
“근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또 그렇게 시비 걸면 아무 데도 못 가, 진짜로.”
“그건 그 새끼들이…. 흠흠, 알았어. 안 그럴게. 노려보지 마. 나가서 뭐 할까?”
“음…. 맛있는 걸 먹거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잘 몰라. 외식을 많이 안 해 봐서.”
“안 먹어 본 거 먹어 보는 거도 재밌지.”
“맞아. 오늘 하민이랑 태국 요리 먹어 봤는데 신기하더라.”
“맛있었어?”
“맛있었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 얘기하느라 바빠서.”
“무슨 얘기?”
“…비밀이야.”
새침한 대답에, 이한은 나를 추궁하는 대신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었다. 다시금 그는 내 뺨에 살며시 입술을 부볐다.
놀랍게도, 나는 행복에 대해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가끔은 티격태격하더라도 서로에게 서로를 맞춰 나가며, 여태껏 누려 보지 못했던 것들을 함께할 무한한 미래를.
“너는 하고 싶은 거 없어?”
그렇게 되묻는 나의 목소리가 기쁨에 가늘게 떨렸다. 그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미소에서도 도무지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지그시 나를 바라보던 그는 다시 입술을 기울여 내 볼에 입 맞추었다. 턱과, 이마와, 귓가에도. 가볍게 비비는 듯하던 입맞춤의 뉘앙스가 달라졌다고 느꼈을 때는 곤란하기도 했지만, 애정에 흠뻑 취해 버린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는 내 목에 입술을 묻은 채로 속삭였다.
“나는….”
* * *
기진맥진해 눈을 붙였다 떴을 때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한이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침대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랍장 위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냈다.
[하민아]
힘이 빠져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둘러 메시지를 보냈지만, 평소에는 몇 초 안에 답을 주던 하민이 오늘따라 감감무소식이었다. 이한이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초조해진 나는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하민아 바빠?]
[ㄴㄴ 왜?]
답장을 보고 안도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용건을 꺼냈다.
[지난번에 끈덕진 알파들 떼어 낼 때 쓰는 방법 있다고 했었잖아. 그거, 뭐야?]
늘 솔직하지 못한 습관대로, 나는 갑자기 그런 걸 묻는 이유는 얘기하지 않았다.
금요일 밤 이한의 침대에 갇힌 후로 통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외출하자느니, 맛있는 걸 먹자느니 얘기할 땐 언제고 완전히 불이 붙어 버린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탈진하듯 쓰러져 잠들었다 깨어나도 그가 옆에 있었다. 괜찮은지 묻다가도 다시 지분거리는 일의 반복이었다. 화장실을 가겠다거나 씻고 싶다고 하고 잠깐 침대를 빠져나와도 이내 뒤쫓아왔다. 부축해 준다는 핑계로 몸을 더듬다가 또 침대 행이었다.
이한을 ‘끈덕진 알파’라고 표현하고 싶진 않지만…. 아니, 이한은 끈덕졌다. 오늘이 토요일인지 일요일인지도 모르겠고 체력도 다 바닥나 버렸다.
[서이한이랑 대화가 너어무 잘 풀렸나 봐?]
숨겨 보려 해도, 눈치 빠른 하민은 내 속내를 다 읽은 모양이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얼굴만 붉히는 사이 메시지 하나가 더 날아왔다.
[내가 쓰던 방법은 피임약 먹는 걸 깜빡했다고 하는 건데, 그건 콘돔 쓰기 싫은 머저리들한테나 통하는 방법이라 너한텐 쓸모없어.]
[그럼 나 같은 경우엔 어떡해?]
한시가 급했던 나는 잡아뗄 생각도 못 하고 대놓고 물었지만, 하민은 웃음기가 느껴지는 답장을 보내올 뿐이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ㅎㅎ 그것도 대화해 보든지! 고생해라ㅎㅎ]
입술을 깨무는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사람을 넝마로 만들어 놓고 저는 멀쩡해 보이는 이한이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나는 경계심을 가득 품고 그를 노려보며 와다닥 말을 쏟아냈다.
“나 이제 힘들어. 몸 닦아 줄 필요 없어. 무, 물도 내 손으로 먹을 거야.”
“아, 아니야. 힘들지? 미안해. 내가 자꾸…. 하….”
“…….”
“이제 아무 짓도 안 할 거야. 네 방 가서 자고 싶다며. 데려다주려고….”
이한은 진심으로 반성하는 표정으로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계속 의심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나를 얌전히 내 방 침대에 내려놓았다. 사심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점잖은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푹 쉬어. 자고 일어나면 외출하자. 응?”
“주말 다 끝났잖아.”
“그, 그렇네…. 근데 주말은 또 있잖아. 그치?”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에게 덮어 주려 했는지, 그는 침대 위에 둘둘 말려 있던 이불을 탁, 하고 폈다. 그 순간, 재훈의 방문으로 급하게 숨겨두었던 이한의 티셔츠가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으앗….”
당황한 나는 몸을 날려 티셔츠 위를 확 덮어 버렸다. 이한은 그걸 보고 푸후후, 웃었다.
“응? 내 방에서 자기 티셔츠 봤을 땐 시치미 뚝 떼 놓고.”
“…….”
“이걸로… 뭐 했어…?”
그러나 이한의 눈에서 짧은 웃음기는 금방 날아가고, 또 그 간지럽고 뜨거운 눈빛만 남았다. 그는 스위치가 켜진 표정으로 내 손목을 콱, 붙잡았다.
‘아…. 안 되는데. 외출하려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가 데일듯한 온도로 다시 다가와 입술을 겹친 순간 나는 또 ‘뭐, 상관없나’ 하고 생각했다. 티셔츠를 부둥켜안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려 그를 껴안았다.
어차피 우리에게 남은 주말은 수없이 많고, 버겁고 휘청거려도 맞춰 나갈 날들도 많으니까. 지금은 눈앞의 뜨거운 행복을 즐길 시간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