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 에필로그 – 사랑을 꿈꾸는 늑대들(1)
이른 아침, 나는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눈을 떴다. 매일 그랬듯 샤워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이동했다. 이사 온 지 두 달이 넘은 된 새집이 이제 익숙해진 것 같으면서도 새삼 호사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남들이라면 당연하게 느꼈을 것들도 나에게는 새록새록 신기하고 흐뭇했다. 언제든지 온수가 나오고, 원하는 만큼 느긋하게 씻을 수 있는 욕실이 집 안에 있다든가, 부엌에도 화구가 여러 개 있고, 덥거나 습할 때는 에어컨이 금방 집을 쾌적하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 같은 거.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툭툭 말리며 이한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진작에 일어났으면서도 고집스레 자는 척을 하는 건지 모른다. 내가 일어나 부엌을 왔다 갔다 하고 있으면 아무리 졸려도 눈을 부비며 나오는 녀석이니까. 그는 매일 아침밥 같은 건 됐다고 말리다가, 굳이 상을 차리는 나를 보며 한숨을 쉬고는 자기도 돕겠다고 부산을 떨곤 했다.
‘아직도 화난 걸까….’
화가 난 것도 이해는 가지만, 나도 생각을 굽힐 마음은 없었다. 대신 반찬은 이한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냉장고를 열며, 나는 문이 양옆으로 달린 커다란 냉장고와 그 안에 들어있는 며칠 치의 식재료들에 또 신기함을 느꼈다.
‘윤오야, 이것 좀 봐 봐.’
강원도의 병원에 입원한 지 2주쯤 되었을 때, 내내 입원실에 같이 머물던 이한은 갑자기 볼일이 있다며 하루 서울로 다녀왔었다.
좁고 불편한 보호자 침대에 커다란 몸을 구겨 넣고 자는 모습이 안쓰러워 혼자 있어도 되니까 집에 다녀오라고 몇 번을 말했던 주제에, 고작 그 하루가 꽤 쓸쓸하게 느껴졌었다. 병원 밥도 맛이 없고, 1인실이 이렇게 넓고 휑했었나 싶어 자꾸 핸드폰만 들여다봤었다.
다음 날 약속 시간에 칼같이 병실에 도착한 이한은 한껏 신이 난 얼굴로 핸드폰을 내밀어 사진 여러 장을 보여 주었다. 그가 직접 찍은 건물의 내부와 외관 사진들이었다.
‘이게 다 뭐야?’
‘우리 같이 살 집. 내가 며칠 동안 괜찮아 보이는 곳들 골라서 어제 매물 있는 거 다 보고 왔어.’
‘집…?’
얼떨떨하게 되묻자,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이한은 금세 샐쭉해졌다.
‘퇴원하면 같이 살자고 했었잖아. 못 들었어?’
‘듣긴… 했는데….’
‘그럼, 같이 살기 싫어서 그래?’
싫을 리가 없었다. 서이준의 별장에 갇혀 있는 동안 그토록 간절하게 보고 싶던 사람이었으니까. ‘좋아’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쑥스러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감정을 표현하기보단 묻어두는 나쁜 습관은 이제 버리기로 다짐했었는데도.
‘…안 싫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정쩡한 대답을 했지만, 이한은 그것만으로도 좋은지 입꼬리를 살살 말아 올렸다. 그냥 ‘너랑 같이 살고 싶다’라고 하면 될 것을, 더 쑥스러워진 나는 주섬주섬 말을 덧붙였다.
‘워, 원래 있던 집도 없어졌다고 했고….’
이한이 해 준 얘기대로라면 서이준은 나를 끌고 가자마자 난월동에서 엄마와 함께 지내던 판잣집도 정리해 버렸다고 했다. 좋은 기억이 있던 동네도 아니지만 세간까지 다 사라졌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때는 임종도 지키지 못한 어머니의 유품까지 건지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잔뜩 겁을 먹었을 때였다. 분위기에 맞지 않게 표정이 무거워지고 말았다.
‘…그러지 말고 이것 좀 보라니까. 되게 좋은 집들 많아.’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러나 어딘지 우물쭈물하며 이한은 나에게 자꾸만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병원에서 지내는 며칠 사이 그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된 나는 그게 그 나름의 위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더 우울해하고 있다가는 그와 같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오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애써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사진들을 자세히 보았다. 반갑게 반응해 주고 싶었는데 그만 또 토를 달고 말았다.
‘이, 이런 집들… 너무 비싸지 않아?’
그가 심혈을 기울여 골랐다는 새집 리스트는 모두 좋은 위치에 있는 번듯한 아파트였다. 시세에 대해 잘 모르는 나도 그런 집을 구하는 데 한두 푼이 드는 게 아닐 거라는 정도는 알았다.
‘나 돈 있어. 재훈이 형도 보태 준다고 했고.’
‘재훈 선생님한테는 안 그래도 신세 진 게 많은데, 또 왜.’
‘재훈이 형이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또 그런다, 너. 어차피 재훈이 형이 나 주려고 진작부터 모아둔 돈 있다고 했단 말이야. 나 결혼할 때… 주려고.’
그렇게 말하며 이한은 두 볼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나도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오버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모습이 꼭 신혼집을 고르느라 들뜬 새신랑 같았다.
‘…그래도 둘이 지내는데 이렇게까지 큰 집은 필요 없잖아. 방이 세 개? 이런 건 대체 몇 평이야?’
‘40평대? 여기 주변 환경이 진짜 좋더라. 역에서 좀 멀긴 한데 옆에 공원도 있고.’
‘너무 크잖아. 난 그냥… 너 전에 살던 집 정도만 되어도 충분한데.’
‘그렇다고 거기 계속 살 순 없잖아. 학교에서 너무 가깝기도 하고….’
반쯤은 억지로 한 자퇴지만, 천랑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무리해서 들어갔던 곳인 데다 학교는 재단에서 관리하는 영역이니까. 부근에 일족의 사람들도 너무 많다는 것도 이한과 나에게는 껄끄러운 일이었다.
큰 위기 하나를 넘겼을 뿐, 우리는 더 큰 싸움을 앞둔 셈이었다. 일족에 대해 아무런 애정도 없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그는 그저 나와 함께하기 위해서 그가 태어나 여태껏 살아온 세계를 저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사는 해야 하니까. 골라 봐.’
조바심을 느끼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그는 애써 부드럽게 권했다. 나도 각오를 다지듯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 더 주의 깊게 그가 보여 주는 사진들을 살폈다.
나는 결국 그가 추려 온 후보 중 크기는 가장 작지만 교통이 편한 집을 선택했다. 그는 역에서 먼 집을 골라서 그 핑계로 차를 사고 싶었다며 투덜거렸지만, 재훈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다는 내 말에 납득해 주었다.
몸이 쇠약해진 탓에 입원 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졌고, 이한은 새 보금자리를 꾸리기 위해 혼자 바쁘게 뛰어다녔다. 내가 쓸 가구와 살림살이를 갖추는 일도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그의 기준으로는 소박하게, 나에게는 넘치도록 호화롭게 꾸며진 집에서의 생활은 예상보다도 훨씬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
이래저래 부대낄 줄 알았던 이한과의 동거도 그렇다. 어린아이처럼 제멋대로 굴고, 때때로 욱하는 성격인 걸 다 아는데, 그는 무리한다 싶을 정도로 나에게 모든 걸 맞춰 주려고 하고 있다.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침부터 묘한 생각에 빠져 멍해져 있느라, 하마터면 계란말이를 망칠 뻔했다. 나는 두 볼을 착착, 두드리고 맛살을 넣은 계란말이와 소시지 볶음을 완성했다. 어린애 같은 이한의 입맛에 맞춘 반찬이었다.
요리를 마친 나는 외출을 준비했다. 판잣집이 정리되면서 예전에 입던 변변찮은 옷가지들마저 거의 사라져 드레스룸에는 외투부터 양말까지 대부분 그가 새로 사 준 것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부끄럽고 면목 없는, 하지만 그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으로 옷을 골라 입고 가방을 챙겼다. 집을 나서기 전 똑똑, 이한의 방문을 두드렸다.
“이한아, 나 지금 나가.”
자는지 자는 척하는지 대꾸가 없었지만, 나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어제 말했던 대로 면회… 다녀올 거야. 고집부려서 미안한데, 가는 게 맞을 것 같아서. 점심에 약속도 있어서 조금 늦을지도 몰라. 저녁 먹기 전에는 돌아올게. 수업 빠지지 말고, 학교 잘 다녀와.”
결국 집을 나설 때까지도 홀로 허공에 인사를 던졌다. 언짢지는 않았다. ‘돌아올게’라는 말에 스스로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이 집에서 지내는 게 일상이 되었다 싶다가도 외출을 할 때마다 또 기분이 뭉클해졌다. 어딜 가더라도, 그와 내가 함께 사는 집에 돌아오게 된다는 생각 때문에.
지하철에 타서 목적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하철을 한 번 갈아 타고 버스도 타야 하는 복잡한 경로여도 택시를 타는 것보다는 이쪽이 마음 편했다. 이한이 마음대로 쓰라며 카드를 주었지만 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쓰라고 준 돈을 왜 그렇게 아끼냐며 면박을 주는 그에게 ‘남의 돈을 함부로 쓰기 그렇다’라고 대답했다가 티격태격거린 적도 있었다. 그는 ‘남의 돈’이라는 말이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다.
‘빨리 나도 한 사람 몫을 해야 하는데. 대학도 다시 가고, 졸업해서 얼른 돈도 벌어야 하고…. 벌써 9월인데 올해 수능은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차라리 그냥 대학을 가지 말고 바로 취직을 하면…. 아니야. 그냥 공부나 열심히 하자. 지난번에도 이렇게 얘기했다가 화냈으니까.’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골몰해 있다가, 또 가슴이 뻐근해지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불과 몇 달 전 모든 것을 포기한 채로 목숨을 내던지려 했던 내가 다시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 데에는 분명 그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한때는 밉고 경멸스럽기만 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이한과 말다툼을 해 가면서까지 그를 만나러 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다니.
지하철에서 내려 마을버스에 오르자, 금요일이라 붐비던 인파는 점점 한산해졌다. 아직 더위가 남은 계절인데도, 목적지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주위의 풍경이 어쩐지 스산하게 느껴졌다.
높다란 구치소의 담장 안으로 들어선 나는 낯설고 삭막한 느낌에 어깨를 옹송그렸다. 미리 알아둔 절차대로 신분증을 제출하고 접견 신청서를 작성했다. 면회 시간은 10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딱딱한 철제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리며, 나는 뒤늦은 걱정을 했다. 그와 맞닥뜨리면 머릿속이 더 하얗게 변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강화유리 너머 파란 수의를 입은 그가 나타나자 뜻밖에도 반갑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사지에 머물렀다 살아 돌아온 이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저를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빛이 커다랗게 흔들렸지만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고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오 실장님.”
그는 그사이 조금 여윈 듯한 모습이었지만,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늘 날이 서 있던 예전의 모습보다 오히려 평화로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귀하신 분이 어떻게 이렇게 먼 곳까지 오셨을까.”
“잘 지내시죠? 건강은 어떠세요?”
“한 달이나 입원했던 사람이 내가 물어야 할 걸 대신 묻고 있네. 나야 속 편하게 잘 지내지. 송 선생님이 손 써 주신 덕분에.”
병원에서 깨어나 오 실장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이준의 별장에서 그가 나를 감싸 주었다는 것도 여전히 얼떨떨한데, 그가 서씨 일가의 악행에 관한 자료들을 수사기관에 제출하기까지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쯤 이한은 이준이 덮어씌운 혐의를 벗기 위해 쩔쩔매고 있을 거고, 나는 그 자리만 모면했을 뿐 여전히 이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희생’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가 제보한 범죄들은 모두 그 자신도 개입했던 것들이었다. 그는 지금 제 손으로 낸 증거 때문에 서 회장의 지시하에 벌였던 범죄들과 나에 대한 감금 등의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중이었다.
모든 혐의를 인정한 오 실장은 며칠 전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항소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재훈이 선임해 준 변호사가 어떻게든 형량을 낮춰 보려 애를 쓰는 중이었다.
“1심 결과, 들었어요. 저 때문에 괜히….”
“이상한 소릴 하네. 콩밥 먹을 짓 한 새끼가 콩밥 먹게 됐는데, 그게 왜 너 때문이야?”
“…….”
“생각보다 길게 받은 것도 아니고, 형 좀 깎겠다고 질질 끄느니 빨리 재판 끝내는 게 나아. 서 회장이 또 무슨 수를 쓸 줄 알고.”
서 회장은 몇 년에 걸친 비리가 드러나 갑작스레 수사 대상이 되었다. 자택과 회사, 병원에 수시로 경찰이 드나들었고, 어제 그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는 기사까지 보도되었다. 궁지에 몰린 그는 필사적으로 오 실장의 재판에 개입하려 하고 있었다.
“…그 얘긴 들었어? 서이준이 곧 귀국한다더군.”
뜻밖의 소식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별장에서 구출된 날, 경찰에 엉뚱한 진술을 하고 풀려난 이준은 약삭빠르게도 곧장 뉴욕으로 출국했다. 돌아오면 경찰에 붙잡힐 게 뻔하니 영영 미국에서 도망 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못 들었나? 내가 괜한 얘길 했나 보네. 송 선생님한테 혼나겠어.”
오 실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이한은 최대한 수사나 재판에 관한 소식에서 나를 멀리 떨어뜨리려 하고 있었다.
“서이준 그 자식, 뉴욕에서도 이래저래 사고를 치고 다녔던 모양이야. 서 회장이 손을 써서 묻힐 뻔한 사건인데 여기 일이 시끄러워져서인지 그쪽도 수사에 속도가 붙고 있다고 하더라고. 미국에서 성범죄로 재판받는 것보단 차라리 귀국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겠지.”
“…….”
“그 새끼가 돌아오면… 너도 고생하게 될 거야. 수사도 그렇고, 내 사건 때랑은 다르게 법정에도 여러 번 나와야 할지도 몰라.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할 리 없는 놈이니까.”
이준이 돌아와 처벌을 받는 건 다행이지만 그 과정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오 실장에 대한 수사에서도 내가 피해자로 되어 있는 부분에 관해서는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었다. 고통스러운 일을 말하는 와중에 일족에 관한 이야기를 덜어내는 각색을 해야 한다는 것도 복잡했다.
나도 이한도 일족에 관한 비밀이 폭로되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재훈은 그 부분이 언급되면 외부인들의 눈에 내 진술이 모두 헛소리로 비칠지 모른다고 염려했다.
결국 나는 조사를 받기 전 병원에서 재훈이 소개해 준 변호사와 함께 진술할 내용을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병원에 찾아온 경찰들에게 한 번, 퇴원 후 검찰에서 또 한 번 사건을 진술해야 했다. 극복해 가고는 있지만 그 일을 입에 담는 건 역시나 괴로웠다.
이한은 곁에 있어 주고 싶어 했지만, 그가 듣는 자리에서 그때를 이야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나는 매번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진술을 마치고 나와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알아요. 각오는 하고 있어요.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다부진 척하려 애써 봐도 목소리는 조금 떨렸다. 안쓰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오 실장은 화제를 돌렸다.
“서이한 도련님도… 잘 지내나?”
‘도련님’. 이한에게 그렇게 안 어울리는 호칭이 또 있을까 싶은데 어린애 같은 입맛을 생각하면 또 도련님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순간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오 실장의 눈빛이 어쩐지 아련하다는 것 깨닫고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 눈빛에서, 그의 연심을 기억해 냈다. 그를 받아 줄 수는 없지만 나는 그 마음을 조금도 함부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잘 있죠. 건강하게….”
“둘이 같이 지내게 됐다고 들었어. 잘된 일이지.”
“…….”
“잘해 줄 거야, 그 녀석이. 그렇지?”
잘못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이한이 나에게 분에 넘치게 잘해 주고 있는 건 맞지만, 실은 어제도 여기 오는 문제로 말다툼을 했었다.
오 실장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이한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언급될 때마다 어딘지 불편해하던 이한은 면회를 가겠다는 내 말에 불같이 화를 냈다.
‘뭐? 면회? 네가 왜 그 사람을 보러 가?’
‘고마운 사람이긴 하잖아. 그리고 나는….’
‘고맙긴 뭐가 고마워. 널 거기까지 데려가고 감시했던 사람도 그 새끼라는 거 몰라?’
‘서이준이 시켜서 한 일이잖아. 어차피 그 사람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도 했을 일이야.’
‘그런 일, 시킨다고 아무나 할 것 같아? 근본부터 썩은 새끼라고. 그리고 그 일만 문제가 아니잖아. 사람들한테 다 들었어. 난월동 있을 때부터 그 새끼가 널 아주 지독하게 괴롭혔다고.’
‘그건…. 그땐 그랬지만, 나중에는….’
‘그게 뭐, 그 새끼가 자기가 한 짓을 반성이라도 했거나, 새사람이라도 돼서 그런 것 같아? 그런 거 아냐. 그 새끼는 그냥 너를….’
‘…….’
‘꼭 그 사람이라서 그런 건 아니야. 난 그냥… 널 괴롭혔던 새끼들은 다 죽여 버리고 싶어.’
‘…….’
‘내가 진짜 매일, 학교에서도….’
‘하, 학교에서 싸우면 안 돼. 알았지?’
이한은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잔소리꾼 같은 소릴 하는 나에게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같이 가자고는 안 할게. 나 혼자 금방 갔다 올게.’
‘…….’
‘그래야 내가 편해질 것 같아서 그래. 응?’
‘…마음대로 해. 아무튼 난 네가 거기 가는 거 싫어.’
퉁명스레 말을 던진 이한은 방으로 들어가 아침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곧잘 모난 말을 으르렁거리지만, 사실 정말로 모나고 고집 센 건 내 쪽인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그가 그렇게 싫다던 이곳에 굳이 와 버렸으니까.
“…시간 다 되어 가네, 10분.”
이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오 실장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꼭 하려던 말을 빠뜨릴 뻔했다.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강화유리 너머의 그를 바라보았다.
“저, 실장님. 고마웠어요. 감사해요, 정말로….”
“…….”
“실장님이 아니었으면….”
“됐어, 그런 말 들으려고 한 일 아니니까.”
“…….”
“여기 다시 안 와도 되니까… 아니, 다시 오지 마. 그냥 잘살아.”
“…….”
“그거면 되니까, 잘살기나 하라고. 응?”
“…실장님도 건강하세요.”
그리고 면회 시간은 끝이었다. 나는 구치소 밖으로 걸어 나오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내 발로 걸어 나오지 못했던 강원도의 별장에서 이제야 비로소 떠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오고 싶었다. 여기에 와서 그에게 인사를 건네야만 그때의 일을 내 안에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담장 너머의 햇빛이 새삼 찬란했다.
습관처럼 구부러지려던 어깨를 곧게 펴고,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혹시나 이한의 연락이 와 있을지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대신 다른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나 전에 윤오가 알려 준 문제집 다 했어! 많이 틀리긴 했지만ㅜ]
메시지 밑에는 다 푼 문제집 사진도 있었다. 사르르 마음이 풀어진 나는 마을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즐겁게 답장했다.
[형 진짜 대단하네요! 이렇게 빨리 풀 줄은 몰랐는데.]
[국어는 별로 안 어려워. 수학이랑 영어는 진도가 안 나가ㅠㅠ]
[천천히 풀면서 모르는 거 있음 체크해 놔요. 다음에 만나면 알려 줄게요.]
[그래도 돼? 너도 바쁘잖아 수능 보려면….]
[가르쳐 주는 게 제 공부도 되니까 괜찮아요.]
[그럼 다음 주에 볼래? 나 사실 물어볼 거 디게 많아 똥멍청이라서ㅎㅎ]
천진한 말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별장에서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고통뿐이었지만, 친구가 생겼다는 것만은 좋은 일이었다. 지호는 서이준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 불렀던 ‘렌트 보이’였다.
별장에서의 사건에 관해 중요한 증인이었기 때문에, 재훈은 재빨리 그를 찾아냈다. 그는 마침 포주로부터 내버려져 생계가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날 일이 시끄러워져 몇몇 VIP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는 이유로 몇 년간 일한 대가를 제대로 정산받지도 못하고 쫓겨났다고 했다.
겁에 질린 지호는 진술을 망설였지만 변호사가 나서 포주와의 정산 협상을 조율해 주는 조건으로 있었던 수사에 협조하기로 했다.
그를 다시 본 건 검찰청에서였다. 조사 일정이 겹쳤는지 복도에 앉아 있는 그와 마주쳤었다. 나는 어색함에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지만 그는 선뜻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나도 그땐 어쩔 수 없어서….’
그는 심한 일을 당하던 나를 돕지 못하고 이준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나 역시 비슷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나 때문에 그곳에 불려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으니까.
입장도 나이도 비슷해서였는지 우리는 꽤 빨리 가까워졌다. 그는 어릴 때부터 했던 매춘 일을 청산하고 검정고시를 볼 예정이라고 했다. 급하게 수험을 준비했던 경험이 있던 내가 그의 공부를 도와주기로 했다.
지호와의 만날 날짜를 잡고, 지하철로 갈아타 오늘의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살짝 시간이 남아서 서점에서 문제집을 살펴보고 있었다. 내 것도 고르고, 지호에게 줄 것도 집어 들던 차에 누군가 톡톡, 내 어깨를 두드렸다.
“책벌레. 너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뽀얗고 고운 얼굴을 보자 활짝 미소가 지어졌다. 하민이었다.
“아직 시간 안 되지 않았어? 빨리 왔네.”
“집에만 있으려니까 좀이 쑤셔서. 나 지인짜 오랜만에 밖에 나오는 거야.”
“정말? 얼마 만에?”
“지난번에 너 봤을 때 이후로 처음인 거 같은데.”
“웃긴다. 나도 비슷한데, 난 오늘 나오면서 요새 엄청 자주 외출한다고 생각했거든.”
“너랑 나랑 같아? 난 미친개처럼 싸돌아다니던 애고, 너는….”
“나는 뭐? 책벌레 히키코모리?”
하민은 특유의 나른하니 사람을 훑는 듯한. 그러나 밉지 않은 눈빛으로 나를 쓸어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넌… 신혼이지.”
“…….”
“얘 갑자기 왜 이래? 내가 뭐랬다고 얼굴이 빨개져?”
“아니, 네가….”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야? 대낮부터 기운이 넘친다, 진짜.”
“그, 그게 아니라아….”
“됐어, 야.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는 가벼운 손길로 톡,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서점을 빠져나갔다.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정말이지 당해 낼 수가 없는 애다.
그와 이렇게 농담을 주고받을 사이가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OT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의 상황이나, 노천강당에서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섬뜩할 정도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그 역시 나를 살린 많은 사람들 중 하나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준 억제제가 없었더라면 이한이 별장으로 나를 구하러 왔을 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병원에서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된 후로는 나는 계속, 하민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어 막막했다. 학교로 찾아가는 건 생각도 하기 싫고, 연락처도 몰랐다. 이한에게 물어봤다간 화를 낼 게 뻔하다는 생각에 끙끙 앓던 차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한윤오.’
‘김…하민?’
‘아, 생각보다는 목소리가 괜찮네. 다행이다. 그 사달을 버텼으니 다 죽어 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분명 반가웠는데도, 그 얘기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별장에서의 일이 학교에도 알려진 걸까, 뭐라고 떠들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어….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경계심을 가득 담아 되물었지만, 그는 기분 나빠하기보다는 코웃음을 치며 조잘거렸다.
‘걱정하지 마. 다른 애들은 몰라. 행정실 조교한테 물어봤어. 개인정보라서 못 알려 준다더니 한 번 대주니까 바로 불던데?’
‘…….’
‘딱히 할 말이 있어서 전화한 건 아니야. 그냥, 또 혼자 땅 파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
‘혹시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마. 고개 숙이는 건 죄지은 애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경쾌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서늘하도록 냉소적이고, 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딘지 따뜻한 구석도 있는 말투. 나는 강의실에서 하민이 페로몬을 닫는 장면을 가르쳐 주던 순간을, 자퇴서를 내고 나온 나에게 무심히 억제제를 건네던 순간을 생각했다.
‘입원했다며? 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몸 낫는 데만 집중해. 그럼 끊는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가 아무렇지 않은 척 툭툭 나에게 던졌던 것들은 분명 호의였다. 늘 멋대로 구는 것처럼 보이는 하민이지만, 남에게 호의를 비추는 일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일 거다. 나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저, 저기!’
‘응?’
‘나 퇴원하고 나면 다시 서울로 갈 건데, 언제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서울 가게 되면, 우리 한번… 볼까?’
‘…….’
‘그, 다, 다른 건 아니고, 그냥 얘기도 하고, 밥이라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너 웃긴다.’
톡, 쏘듯 듯한 말에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미안, 내가 괜한 소릴 했지, 하고 얼버무리려는데 조잘거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무슨 데이트 신청해? 겨우 그 소릴 하는데 뭘 그렇게 버벅거리고 앉아 있어?’
‘어, 그….’
‘알았어, 나중에 봐. 또 연락할게.’
‘또 연락할게’ 그 말이 신기했는데, 하민은 정말로 얼마 지나지도 않아 또 연락해 왔다. 별다른 용건도 없이 두어 번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한번은 괜찮을까, 하고 내가 먼저 ‘뭐 해?’하고 메시지를 보내 봤는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밥 먹음 좆같음’ 하고 학식 식판 사진이 답장으로 왔다.
그 뒤로는 종종 시시콜콜한 연락이 오고 갔다. 퇴원하기도 전에 하민과 나는 이미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이가 되었다. 이한이 ‘너 쟤랑 썸타?’ 하고 짜증을 낼 정도였다. ‘친구를 사귄다’는 느낌 때문에 내가 조금 들떠 있기도 했다.
막상 서울에 와서 처음 만났을 때는 살짝 데면데면하기도 했지만, 또 금방 익숙해졌다. 집도 가까운 편이라 원래부터 친했던 사이처럼 자주 어울려 지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서울의 여기저기를 데려다준 것도 하민이었다. 예를 들면, 지금 하민이 나를 끌고 온 태국음식점 같은 곳. 가게에 놓인 이국적인 소품들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하민은 익숙한 듯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뭐 먹을래?”
“잘 몰라. 태국 요리 안 먹어 봤어.”
“왜? 서이한이 싫대?”
“…그렇다기보단 외식을 잘 안 해서.”
익숙한 듯 메뉴판을 넘기던 하민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왜? 외출도 잘 안 한다더니. 집에만 있어, 진짜?”
“두 번인가 같이 외출했을 때 자꾸 트러블이 있어서 그다음부터는 좀….”
“아. 데이트하면 둘이 싸우는 편?”
“우리끼리 싸우는 게 아니라 누가 날 쳐다보거나 할 때마다 이한이가, 어… 시비를… 건다고 해야 하나.”
낯부끄러운 기분에 말끝이 흐려졌다. 아니나 다를까, 하민은 질색했다.
“아우, 걔는 진짜 그거, 병이야, 병.”
“좀 예민하긴 해. 그러지 말라고 해도 잘 안 듣고.”
“뭐, 일이 많았으니까 예민하게 구는 것도 이해는 하는데.”
하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름이 낯선 요리들을 주문했다. 난생처음 먹어 본 음식에서는 복잡하고 향긋한 맛이 났다.
“입에 맞아?”
“응. 맛있어.”
“이렇게 잘 먹는데…. 걔한테 좋은 데도 좀 데려다 달라고 해. 아무리 신혼이라도 집에서 계속 그러고만 있지만 말고. 너무 하면 뼈 삭는다, 진짜.”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게. 나 왜 계속 이런 소리만 하지? 욕구불만인가 봐.”
“…….”
“알파 새끼들 꼴 보기 싫어서 휴학하고 그 난리까지 피웠는데 잠잠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벌써 심심해.”
하민은 작게 한숨을 쉬며 알록달록 예쁜 색의 음료를 쪼로록, 빨아들였다. 요즘 그는 말 그대로 휴식 상태였다. 한 달 전쯤, 제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에 관해 이야기하던 하민은 불쑥 그렇게 말했다.
[나 이제 다 그만두려고]
어떤 방식으로든 일족의 사회에서 살아남아 보려고 발버둥 쳤던 그는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다. 뭘 그만두려는 거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뭘 그만두어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지긋지긋한 알파들과 연락을 끊고 휴학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오메가로 발현했지만, 천랑대가 아닌 다른 대학으로 진학해서 일족과 거리를 두기로 한 내 계획이 부러웠다고 했다. 서경제약의 몰락으로 재단과 다른 가문들이 서씨 일가와 선을 긋고 겉으로나마 오메가의 인권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분위기도 결정에 도움을 주었을 거다.
하민을 저들 사이의 공공재쯤으로 생각하던 동기 알파 몇 명은 하민이 제 연락을 무시하기 시작하자 집까지 찾아가서 소동을 피웠지만, 늘 내심 하민을 안쓰러워하던 부모님이 단호하게 나서서 상황을 정리시킨 모양이었다.
절망뿐이던 여태까지와는 다른 삶이 펼쳐질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것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미지수인 상황. 하민과 나는 희망찬 불안과 무료한 평화 속에 찰랑거리고 있었다.
“요샌 뭐 하고 지내는데?”
“뭐… 수능은 봐야 하니까, 공부도 하고. 책도 보고 영화도 좀 보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헛헛한 느낌?”
“갑자기 자유가 생기니까 그런 거겠지.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은데.”
“그래도. 난 내가 혼자서도 잘 노는 타입일 줄 알았는데…. 서이한은 학교 잘 다녀?”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하민의 휴학 소식을 듣고 서이한은 대뜸 저도 2학기를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1학기 학점도 엉망이고, 애초에 가고 싶어 갔던 대학도 아니니 그만두는 게 낫다는 주장이었다.
내년에 내가 갈 학교로 옮기거나 아니면 아예 대학을 다니지 않겠다는 말에, 오랜 불운에 작게 쪼그라든 나의 심장은 초조해졌다. 대학이 무언가를 보증해 주는 건 전혀 아니지만, 단둘이 살아가야 하는 우리 둘이 한꺼번에 백지상태로 돌아간다는 게 겁이 났다.
앞일을 모르니 일단 2학기는 다니라는 나의 말에 우리는 또 한참 언쟁을 했다. 그때도 결국 이한이 2학기를 등록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던 걸 보면, 역시 그보다 내 고집이 훨씬 센 모양이었다.
“맨날 가기 싫다고 하지. 올해 수능도 다시 보겠다고 하고….”
“너랑 딱 붙어 있고 싶어서 그런가 보지. 하긴 지금 한창 좋을 때잖아.”
“그런 건….”
“참, 너 피임은 똑바로 하고 있어? 진짜 조심해야 해, 너. 넋 놓고 있다가 덜컥 임신이라도 하면 대입이고 뭐고 끝이야.”
거리낌 없는 하민의 말에 나는 그만 얼굴을 붉혔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내 반응에 아차 싶었는지 하민도 어물어물 말을 물렸다.
“미쳤나 봐, 나. 오늘따라 왜 자꾸 이런 얘기만 하지? 진짜 욕구불만인가? 사이클이 얼마 안 남았거나….”
하민은 제가 오늘만 그런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그는 종종 이런 화제를 입에 올리는 편이었다. 그동안 이런 얘길 나눌 친구가 없어서 그런지 나는 그게 도저히 적응되지 않아 그때마다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하민의 입담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다짐한 것도 있다. 요즘 나를 괴롭히는 고민만큼은, 그에게 상담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기… 그런 거 아니야.”
“알았어, 알았어. 내가 선 넘었어. 안 그럴게, 이제.”
“그, 그게 아니라… 이한이랑 나, 그런 거 아니라고.”
“…무슨 말이야?”
오늘은 꼭 얘기를 꺼내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고 말하려니 미친 듯이 부끄러웠다.
붉어진 얼굴은 점점 달아오르고, 목소리는 입안에 딱 달라붙은 것처럼 나오질 않았다. 차라리 톡으로 이야기하는 게 나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운을 떼었으니 무를 수도 없었다.
“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막, 그렇지 않아.”
“…….”
“어… 같이 살게 되고 나서는 아직, 한 번도… 그런 거….”
내 말을 알아차린 하민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뭐? 그러니까….”
“…….”
“동거하고 나서 안 했다고? 여태?”
경악한 하민의 표정에, 내 얼굴은 더 빨갛게 물들어 갔다.
“모, 목소리 좀 낮춰. 누가 듣겠어.”
“아니, 내가 지금 안 놀라게 생겼어? 뭐야. 걔, 고자였어…?”
“아, 제발, 조옴….”
내가 발을 동동 구르자 하민은 고개를 숙여 속삭이듯 말하기 시작했지만,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하…. 진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네. 그 서이한이 고자일 줄이야….”
“그, 그런 거 아니야….”
“하긴. 옛날에는 했었다고 했지? 각인까지 했다면 기능에는 아무 문제 없다는 거고….”
얼굴의 홍조는 타오르기 직전이었다. 나는 손으로 두 볼을 감싸 버렸다. 처음부터 이런 문제가 고민이었던 건 아니다, 아니, 사실 처음에는 오히려 반대 방향의 고민이 있었다.
한 달이나 이어진 병원 생활을 정리하고 그가 준비한 새집으로 오던 날이었다. 우리는 재훈에게서 빌린 차를 타고 강원도에서 서울로 이동했다.
창백한 병원복에서 이한이 골라 준 사복으로 갈아입을 때부터도 그랬는데, 그가 나를 애지중지 조수석에 앉혀 벨트를 매어 주자 명치가 간지러울 정도로 심장이 쿵쿵거렸다.
‘나 갑자기 왜 이러지.’
병원에서도 대부분 둘이 시간을 보냈었지만, 차 안이 좁아서 그런지 모든 게 의식되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그의 운전하는 모습이 어쩐지 어른스럽게 느껴져서 자꾸만 두근거렸다.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떨림은 더 커졌다. 그도 긴장이 되는지 말이 조금씩 많아지는 눈치였다. 새집에 관해 설명해 주는 말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그 집에서 우리가 함께 살 거라는 사실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제 이한이랑 같이 사는 거야. 앞으로도 계속, 같이….’
그게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생각한 줄 알았는데, 막상 눈앞의 현실이 되니 새삼스러웠다. 병원에서 꽃잎을 다루듯 나를 조심스레 간호해 주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간혹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내가 웃으면, 애끓는 듯한 온도를 품고 나를 바라보던 눈빛도.
건물 앞에 도착해 차를 세우자 긴장감에 발끝까지 후들거릴 정도였다. 그는 나를 꼭 껴안듯이 부축해서 우리의 집으로 데려갔다. 넓고 환한 집에 햇빛이 한가득 들어와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여기가 네 방이야. 책상이랑 침대랑 내 방에 있는 거랑 똑같아.’
나 혼자 쓸 방인데, 침대는 둘이 자도 자리가 남을 만큼 크고 넓었다. 그걸 보자 또 속도 없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쓸데없이 그런 걱정을 했다. ‘피곤한데. 만지거나 입 맞추면 뭐라고 뿌리쳐야 하지?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지? 오늘은 뿌리치는 게 맞겠지?’
몸을 웅크리고 발끝만 내려다보고 선 나를, 이한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던 끝에 그가 손을 들어 나의 머리 위에 얹었을 때, 나는 정수리부터 찌릿거리는 느낌에 두 눈을 꼭 감고 말았다.
‘그럼… 푹 쉬어.’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다정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김칫국을 잔뜩 들이켠 느낌에 민망해진 나는 피곤하다던 생각도 잊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그런 미묘한 긴장과 이완의 반복이 한참을 이어졌다. 그가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나 혼자 온갖 상상을 하며 ‘아직은 힘들 것 같은데’ 하고 아무도 모르게 내숭을 떨다가, 결국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마치고 각자의 방에서 잠드는 나날이었다.
‘이한이도 참는 거겠지?’, ‘힘들 테니까 괜히 건드리지 말자’, ‘아직 다 회복된 건 아니니까 신경 써 주는 걸 거야’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어느샌가 ‘방금은 나도 키스하고 싶었는데’, ‘이제 가볍게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데’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한 달이 흐를 때까지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정도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기가 죽어 버렸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걸까?’ 하는 생각 때문에.
“아니, 방이 각자 있어? 따로 잔다고? 그것부터 문제 아냐?”
이야기를 듣던 하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방 각자 쓰자는 얘긴 누가 처음 한 거야? 너? 아님 걔?”
“그냥… 이사할 집 정해지고 방이 세 개인데 어떻게 할까 얘기하다가….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내 방을 가져 본 적이 없다고 했었거든. 욕심내는 거로 들렸을까? 그때부터 언짢아서 마음이 상해 버린 건가?”
“…아니, 내가 서이한이었으면 그 얘긴 짠하고 귀엽다고 생각했을 거 같은데.”
하민은 손끝으로 내 콧잔등을 톡톡, 두드렸다. 따스한 말이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하민이한테 귀여워 보이는 게 무슨 소용이야’ 하고 못된 생각을 했다.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비슷한 것도 없었어?”
“비슷한… 거?”
“내가 이런 것까지 꼭 말로 해야 해? 손이나 입으로 한다던가, 다리 사이에 끼우고 문지른다거나 뭐 그런 거 있잖아.”
따스한 말에 뒤이어 노골적인 말을 해 대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에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아서, 나는 두 눈까지 다 손바닥에 파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은커녕 키스조차 한 적이 없다는 말까지는 차마 할 수 없었다.
“하…. 말이 안 되네. 각인한 알파랑 오메가가 같이 사는데 어떻게 두 달 넘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뭐… 둘 중 하나가 고자라면 그럴 수 있긴 한데, 아니라는 거니까….”
내심 ‘너무 뜸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확실하게 도장을 찍어 주니 더 초조해졌다. 나는 변명처럼 그간의 사정을 늘어놓았다.
“근데 그사이에 뭔가 일이 많긴 했거든. 조사받으러 갔던 적도 있고, 병원이랑 상담소도 자주 다녀왔고, 집에 손님이 온 적도 있고….”
“그런 일이 매일 있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 그리고 같이 살고 나서 사이클이 있었다거나 한 건 아니라서…. 곧… 주기가 오긴 하겠지만.”
“사이클은 그냥 불 난 집에 끼얹는 기름 같은 거지. 사이클 아니라고 알파가 오메가를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웠겠어?”
“그런…가….”
“네가 하기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고?”
“나? 아니야…!”
화들짝 놀라 대답하는 바람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빽 소리를 질러 놓고는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던 하민이 살랑거리듯 말했다.
“하긴, 너도 다 큰 남잔데 욕구가 있겠지.”
“요, 욕구는… 무슨….”
“그럼, 없어?”
“…없다고는 안 했어.”
쿡쿡 웃는 하민의 앞에서, 민망해진 나는 나는 빨대를 입에 물고 쪼록쪼록 음료를 들이켰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화제가 야릇해서인지 달콤한 열대과일 맛 음료에 취하는 것 같았다.
“너는 뭔가 되게… 담백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그래. 무성애자 같을 때도 있었거든. 내가 야한 얘기 해도 말 돌리고, 못 들은 척하고. 그래서 아예 그런 쪽에 관심도 없는데 오메가로 발현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서이한이랑 사는 건가, 싶었지.”
“나도… 조, 좋아한단 말이야. 이한이.”
“그래그래. 근데 또 좋아하는 마음이랑 그런 건 별개일 수도 있으니까, 혹시나 해서.”
주스를 마실수록 목이 더 타서, 잘근잘근 빨대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하기 싫으면 이런 게 고민일 리가 없잖아.”
“하긴… 그렇겠네. 문제는 문제다.”
“…….”
“아니, 근데 둘이 어디 외출도 잘 안 하고 내내 집에만 붙어 있으면서 하다못해 비슷한 것도 안 하면, 어떻게 푸는데?”
“무, 무, 무슨 소리야, 그건 또.”
“그렇잖아. 욕구가 없는 것도 아니라며. 둘이 안 풀면 혼자서라도 해결해야 할 거 아냐. 각자 방문 닫고 들어가서 자위해? 그런 쪽 프라이버시는 서로 존중해 주는 거야?”
“아, 으, 진짜아….”
나는 내 이빨에 씹히고 뜯겨 넝마가 되어 버린 빨대를 내려놓았다. 유난히 진저리를 쳤던 건 그가 했던 얘기에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다 큰 남자인데 욕구가 있다는 말도 사실이고, 혼자서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정말 절실한 문제였다.
언제나 성욕 같은 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단칸방에 둘이 살고 있으니 가끔 무언가가 속에서 불끈거리거나, 이걸 어떻게든 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화가 치밀어오르곤 했다.
애초에 누군가와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하는 사치가 허락될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불필요한 욕구는 무시하고 내리누르기에 급급했다. 내가 담백해 보인다는 하민의 말은 계속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일 거다.
그런데, 요즘은 뭔가 달랐다. 오메가로 발현되었기 때문인지 각인을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에 빠졌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태 써 본 적 없던 감각이 눈을 뜬 것 같았다.
‘윤오야, 여기.’
별다른 일도 아니었다. 그냥, 나란히 앉아 아침을 먹다가 그가 물병을 나에게 건네어 줄 때라든가,
‘…미안. 내가 너무 오래 씻었나?’
샤워하고 나와 수건으로 툭툭 머리를 말리는 그를 볼 때,
‘이건 놓을 데가 없네. 자주 쓸 건 아니니까 위쪽에 놔둬야겠다.’
짐을 정리하던 그가 묵직한 물건을 들어 올리며 티셔츠가 살짝 들렸을 때 같은, 작은 순간들이 다 그랬다. 병원에 있을 때도 종종 넋을 놓고 그를 보곤 했지만, 그건 오래도록 혼자 머릿속으로 그려보던 그의 모습이 눈앞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게 신기한 기분이었다.
집으로 오고 나서는 신경 쓸 것도 둘러볼 것도 더 많아졌지만, 그를 훔쳐보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처음엔 ‘이한이는 목소리가 낮구나’, ‘나보다 키가 훨씬 크네’, 하긴 원래 그랬지.’, ‘와, 복근.’ 하고 덤덤하게 생각할 뿐이었지만 그렇게 사소한 것들도 쌓이고 쌓이니 무거워졌다.
마디가 또렷한 손이라던가, 단단해 보이는 어깨. 몇 번이고 보았던 후드 그늘이 드리워진 선명한 콧날 같은 것들이 새록새록 신기하고 보기 좋아서, 혼자 조용히 미소 지어 보다가, 두근거리다가, 닿고 싶어졌다.
컨디션이 좋아질수록 잡생각이 늘어 그러는지 시도 때도 없이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어떻게 나를 불렀는지, 커다란 손이 어떻게 나를 만지고 그 몸이 어떻게 나를 짓누르고 파고들었는지가 떠올라 목덜미를 후끈거리게 했다. 급기야는.
‘아….’
그날 밤, 무언가 야릇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꿈이지만 무언가 야한 내용이었던 건 확실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속옷이 온통 축축해져 있었던 걸 보면.
이불을 슬쩍 들추어 본 나는 난감함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마지막으로 몽정을 한 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된 일이다. 사춘기 어린애도 아닌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방 밖을 확인해 보니, 다행히 이한은 아직 자는 모양이었다. 앞뒤로 축축이 젖은 채로 어그적 어그적 욕실로 향했다. 숨죽여 속옷을 빠는 기분이 묘했다. 예전 같으면 그저 자괴감뿐이었겠지만, 뭐랄까….
오메가의 몸이라는 게 그런 건지 사정을 하고 난 후에도 후련하다기보단 애매한 기분이었다. 뒤쪽의 무언가가 간지럽기도 하고, 팔딱팔딱 맥이 뛰는 느낌에 신경이 자꾸 아래로 쏠렸다.
한숨을 쉬며 방으로 되돌아가려던 길에 문득 욕실 옆의 드레스룸이 눈에 밟혔다. 충동적으로 들어간 그곳에서, 나는 단정하게 늘어선 이한의 옷들을 둘러보았다. 여름 내내 그가 곧잘 입던 반팔 티를 만지작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갑자기 떠오른 엉뚱한 생각에 제풀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자꾸 이 옷을 입고 있을 때 곧고 널찍해 보이던 그의 등이나, 소맷자락 아래로 보이던 팔의 힘줄 같은 것을 생각했다.
결국 나는 그 옷을 집어 들고 도둑처럼 살금살금 내방으로 돌아왔다. ‘도둑처럼’이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 도둑질이었다. 그것도 아주 의도가 불순한.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운 나는 그 옷이 이한인 것처럼 꼭 껴안았다가 이내 옷자락에 뺨을 부볐다. 처음에는 처량한 마음뿐이다가,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코끝이 천 조각을 스치자 희미하게 그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오래 억눌린 감각이 예민해졌는지,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그의 페로몬을 희미하게나마 맡을 수 있었다. 무게감 있는 나무 향기.
‘아, 어떡해….’
닿을 듯 말 듯 한 흔적을 쫓듯 나는 더 집요하게 옷자락의 냄새를 맡았다. 뒷덜미가 살짝 더워지고 하반신에도 바르르 열기와 습기가 돌았다. 두 다리를 바짝 닫고 참아 보려 했지만 허벅지가 서로 스치는 감각조차도 자극적이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나는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단단히 발정이 난 건지, 한심하게도 방금 갈아입은 속옷이 또 젖어 있었다. 골 사이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손가락에 감겨드는 촉감이 찐득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계속 그곳을 만지작거렸다. 미끄럽게 젖어 있던 탓에 손마디 끝이 쑥, 밀려들어 갔을 때는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입술을 꾹 다물고 삼켰다.
나는 자연스레 그가 나를 만지던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손과 몸이 어떻게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벌리고 매만졌는지를 기억해 낸 것만으로도 안쪽은 더 뜨겁게 박동했다.
‘으, 조금… 조금만… 더….’
본능적으로 손가락은 자꾸 안으로, 안으로 향했다. 그가 했던 그대로 따라해 보고 싶었지만, 불편한 이물감이 느껴질 뿐 느낌이 가물가물했다. 어설픈 손짓은 안쪽을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이렇게 하는 게 좋은 건지, 좋아지긴 하는지, 그땐 왜 좋았던 건지….
손가락이 뻐근하도록 밑을 쑤셔 댔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보다 손에 힘이 빠져 지치는 게 먼저였다. 그렇게 싸늘한 침대에 늘어져 있자니 허무하고, 초라하고, 서글프기까지 했다.
조용히 샤워를 마친 후 다시 이런 짓은 안 하는 편이 좋겠다고, 이한의 옷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게 좋겠다고 다짐했었다. 티셔츠를 들고 드레스룸 앞까지 갔지만,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충동은 이성보다 끈질겼다. 나는 뻔뻔스럽게도 이한의 옷이 내 것인 양 서랍장에 숨겨두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나, 무언가 기분이 야릇해질 때마다 몰래 그걸 꺼내 들었다.
‘쓸쓸하니까 향기만 맡을 거야. 조금만. 조금 정도는 괜찮으니까….’
언제나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갈수록 흐려져 가는 향기를 들이켜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몸이 달아오르고, 할 줄도 모르면서 아래를 들쑤시게 되고 말았다.
매번 만족스럽지도 않으면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고, 그럴수록 쓸쓸함은 더 커졌고, 속도 모르게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이한이 야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뭐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
민망한 기억을 되돌아보던 나는 하민의 질문에 화들짝 현실로 돌아왔다.
“아, 아무것도 아냐.”
회상이 더 길어졌다가는 속마음을 읽혀 버릴 것 같아서, 나는 서둘러 생각을 정리했다. 하민은 걱정과 짓궂음이 뒤섞인 얼굴로 허둥거리는 나를 바라보았다.
“둘이 사이가 나쁜 건 아니지? 걔가 잘해 준다며.”
“응. 가끔 말싸움할 때는 있지만….”
“그러니까. 서이한이 다 낚은 고기라고 무심해지는 타입은 아닐 것 같았는데.”
차라리 나에게 못되게 군다거나 매사에 시큰둥했다면, 슬프지만 내가 아예 싫어진 거라고 이해했을 거다. 그러나 이한은 모든 순간 나를 배려하고 맞춰 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의무감 때문에 그런 거라고 보기엔 지나칠 정도로 상냥하게.
‘…의무감?’
문득 떠오른 단어가 마음에 덜컥, 걸렸지만, 나는 고개를 홰홰 저으며 무시하려 애썼다. 하민은 저 혼자 얼굴을 굳혔다 도리질을 해 대는 내가 딱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아예 그런 분위기가 잡히질 않는 거야?”
“으음… 한 번씩 좀 묘한 느낌으로 빤히 볼 때는 있는데….”
“있는데?”
“모르겠어. 그러다가도 또 이렇게, 머리만 쓰다듬은 다음에 그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그럴 때마다 ‘오늘인가?’ 하는 생각에 온몸을 빳빳하게 굳히고 있던 나는 심술이 울컥 솟아나 발을 쿵쿵 울리며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하하, 그놈의 각방이 문제네.”
“…그런가?”
“그러지 말고 걔 방에 확 쳐들어가 버려.”
“어, 어떻게 그래….”
“아니, 진짜로. 우리가 그렇게 별별 얘기를 다 했어도 난 네가 이런 고민 하고 있다는 거 전혀 몰랐거든.”
“…….”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겠어? 게다가 넌 겉보기엔 그런 데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인다니까. 걔도 네가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냥 내버려 두는 걸 수도 있어. 제 딴에는 널 위해준다고.”
“…….”
“그러지 말고 네 쪽에서도 뭔가 어필을 해 봐. 서이한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하민의 제안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나는 그 말에 더욱 부끄러워졌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달싹거렸다.
“…있어.”
“뭐?”
“…어필한 적, 있었단 말이야.”
나는 아예 테이블 위로 엎드려 얼굴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거야말로 정말 민망한 기억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하민과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우리는 영화를 본 다음 저녁으로 마라탕을 먹었다. 처음 먹어 본 국물이 너무 매워서 내 눈시울이 빨갛게 물들자, 하민은 나를 근처의 초콜릿 카페로 갔다.
달고 시원한 음료를 마시자 겨우 혀가 진정되었다. 집에 가려고 카페를 나서는데 쇼케이스에 줄을 지어 진열된 작고 예쁜 초콜릿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한과 함께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원에게 너무 달지 않은 것들로 추천해 달라고 하고, 나도 좋아 보이는 것 몇 개를 골라서 리본까지 달린 상자에 포장했다. 집에 가 보니, 이한은 거실에서 축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막상 상자를 꺼내려니 머쓱해져 서성거렸더니 이한이 먼저 아는 체를 해 주었다.
‘그거 뭐야?’
‘어, 이거… 초콜릿인데….’
나는 뭐 대단한 선물이라도 준비한 것처럼 머뭇머뭇 등 뒤에 숨겼던 상자를 꺼내 보였다. 상자를 열어 보니, 내가 골랐던 초콜릿들이 전부 하트 모양이라는 게 쑥스러웠다.
‘사 온 거야? 고마워, 맛있겠네.’ 이한은 아무렇지 않게 하트 모양 초콜릿을 골랐다. 나는 시치미를 떼듯 직원이 추천해 주었던 초콜릿을 골라 먹었다. 한 귀퉁이를 베어 물자 뜻밖에도 쌉싸래한 맛이 느껴졌다.
‘어? 이거 술맛이 나.’
‘위스키 들어있는 건가 보네. 다른 거 먹을래?’
‘아니, 맛있어. 향긋하고….’
짙은 향기가 어쩐지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한 알을 더 먹으려고 집어 들었는데, 일부러 그런 것처럼 또 위스키가 든 초콜릿을 골랐다. 술이 약한 나는 위스키 초콜릿 두 알에 볼이 발그레해졌다.
‘너 지금 초콜릿 먹고 취한 거야?’
‘취한 거 아니거든?’
‘얼굴이 빨간데.’
‘이, 이건 그냥 조금… 더워서.’
알딸딸한 기분에 손부채질을 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거리가 그날따라 유난히 가까운 것 같았다. 취기가 오른 탓인지 공기도 간지럽고 무거웠다. 볼을 붉힌 나를 바라보는 이한의 눈빛도 촉촉해 보였다.
형언할 수 없는 끈적한 분위기가 그와 나 사이를 휘감고 있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분명히 그렇게 느꼈다. 두근, 두근. 내 심장 소리가 귀를 멀게 할 것처럼 시끄러웠다.
‘지금… 이라면….’
차라리 내 쪽에서 그에게 다가가야 할까, 하는 생각은 나도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엄두가 나지 않고 적당한 타이밍을 잡지 못해 망설이고 있었을 뿐이다.
무언가를 한다면 바로 지금이 좋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더구나 알코올의 힘은 나에게 불필요하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을 감쳐물었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슨 말을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말보다는 차라리 향기로 표현하는 게 쉬울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페로몬을 열었다. 실수인 척 얼버무릴 수 있을 정도로 살짝 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조절이 능숙하진 않아서 그만 훅 풍겨 버리고 말았다.
이한도 분명 나의 냄새를 맡았다. 그 순간 눈빛이 흔들리고 귀 끝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몽롱해지는 기분 속에서, 나는 지금 그와 입을 맞추면 초콜릿 맛이 날 거라고 생각했었다.
‘윤오야.’
‘응….’
나의 이름을 부른 그는 꿀꺽, 침을 삼켰다. 목울대의 움직임마저 야릇해 보였다. 그대로 나를 덮쳐 올 거라는 기대 섞인 예상과는 달리, 그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나 오늘은 과제가 너어무 많아서!’
‘으…응?’
‘밤새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해야 할 거 같아. 잘 자!’
그리고 그는 거실에 덩그러니 나를 내버려 둔 채로, 도망치듯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민은 나의 유혹 실패담을 들으며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그렇게 웃지 마. 나 바보 같은 거 나도 알거든?”
“푸후후. 바보 같아서 웃는 거 아냐. 너 진짜 귀여웠겠다.”
자기가 훨씬 귀엽게 생긴 주제에, 자꾸 나보고 귀엽다고 하는 게 어이없었다.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는데도 그는 주접을 멈추지 않았다.
“아, 꼴에 째려보는 것 좀 봐. 내가 알파였으면 딴 놈이 각인을 했든 말든 지금 우리 집으로 데려갔을 텐데.”
“하…. 이 상황에서 너한테 귀여워 보이는 게 무슨 소용이야?”
답답한 나머지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 버린 사는 민망한 기분에 또 쪼로록, 음료를 들이켰다.
“근데 그런 거로 어필이 됐겠어? 술 취해서 실수로 질질 흘린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잖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어. 이렇게… 빤히 쳐다보면서 풀었단 말이야.”
“…너 지금 겁먹은 표정인데?”
“아니라니까. 아, 그땐 달랐다고. 지금은 널 보고 있으니까 그런 거야.”
“내가 서이한보다 무서워?”
“지금은 둘 다 안 무서워. 아무튼, 말로는 표현이 잘 안 되는데 그땐… 그땐 진짜 분위기가 그랬다니까. 이한이는 내가 일부러 그랬다는 거 알면서도 피한 거야.”
“에이, 내가 봤을 땐 애매한데. 어필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아까 말한 것처럼 방으로 쳐들어가든가. 그럴 엄두가 안 나면 키스 정도라도 갈겨 주든가.”
“무, 무슨 소릴….”
“왜 또 빨개져? 각인까지 한 주제에 키스가 부끄러워?”
솔직히 말해 키스까지는 그렇게 부끄러울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했는데 또 그가 피해 버리면 그때는 부끄러움에 몸이 화르륵 불타 버릴지도 모른다. 하민은 빙글빙글 여유롭게 웃으며 시무룩해진 나를 바라보았다.
“혼자 고민하지 말고 서이한이랑도 얘기를 해 봐.”
“얘기?”
“그래, 대화. 나도 안 해 봐서 잘 모르는데, 사람들이 연애할 때는 대화가 중요하다고 그러던데.”
“…….”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한테도 한 얘기가 걔한테 부끄러워?”
“…맞는 말이야.”
맞는 말이긴 했지만, 막막한 기분에 나는 또 말을 돌려 버렸다. 카페로 자리를 옮겨서는 수능 공부에 관한 이야기와 지호에 관한 얘기를 하고, 알파들이 없는 새로운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일에 관해 떠들어 댔다. 한참 조잘거리던 하민은 지쳤는지 이마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아, 나 말 너무 많이 했더니 머리 아파. 이제 슬슬 집에 가자.”
“벌써?”
“집에서 서이한이 기다리고 있는 거 아냐?”
그 말에 뜨끔, 했다. 일어나려는 하민을 답삭 붙잡은 건 어쩌면 이한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내키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어제 다툰 채로 집을 나온 것도 있지만, 지금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이한과 터놓고 얘기해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해결책이 그거밖에 없다는 걸 잘 아는데도.
초라하고 들쭉날쭉한 내 속내를 남에게 드러내어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도 그랬고, 거절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평생을 거절당하기만 했는데도 새삼스레 그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한에게서 거절당하는 건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거절당하면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이한은 나의 기댈 곳이고, 함께 살아갈 가족이고, 가장 힘들었을 때를 이겨 낼 수 있게 해 준 친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뿐인 나의 사랑이었다.
“나 너 내리는 데서 먼저 내려서 좀 걸을래.”
결국 하민과 나는 카페를 떠나 같이 버스에 올라탔다. 집까지 두 정거장 남겨 놓고 하민의 집 근처 정거장에서 굳이 같이 내리겠다는 나를 보며 하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
“…응, 좋아. 집에 바래다줄게.”
“야, 됐어. 바로 저 앞인데 무슨.”
“어? 잠깐만. 저기….”
투닥거리며 그의 집으로 향하던 나는 멀리서 보이는 그림자에 걸음을 멈추었다. 하민도 그쪽을 보더니 사색이 된 얼굴로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장승우 맞지…?”
멀뚱하니 큰 키에 험상궂은 얼굴. 학교에서 틈날 때마다 나를 괴롭혀 대던 녀석이니 잘못 기억할 리가 없었다. 오싹한 느낌에 치를 떠는데, 하민도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네가 불렀어, 혹시?”
“불렀겠냐? 미치겠네, 진짜.”
“너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저 또라이 새끼가 정신을 못 차리고 왜 자꾸 지랄이야?”
건물 앞을 서성거리던 장승우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끼적거리는 듯 보였다. 하민에게 메시지를 보냈던 건지, 하민의 가방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뭐라고 보낸 거야? 한번 봐 봐.”
“조용히 해. 쟤가 이리 오면 어쩌려고? 너 쟤랑 사이좋게 인사라도 하고 싶어?”
으르렁거리는 듯한 하민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하민이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메시지 알림창에는 언뜻, 내가 다 잘못했으니 한 번만 만나 달라, 기다리겠다, 그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너 요새 쟤랑 연락해?”
“미쳤어? 내가 쟤랑 왜 연락을 해? 그냥 쟤가 혼자 난리 치는 거야.”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데?”
“하… 씨발.”
“쟤가 너 좋아하나 봐!”
‘남의 연애는 재미있다’라는 게 이런 기분인지, 그렇게 끔찍하던 장승우가 엮여 있는데도 나는 방청객 같은 리액션을 보이고 말았다. 하민의 벌레 씹은 표정은 더 심각해졌다.
“역겨운 소리 하지 마, 제발.”
“…하긴 나라도 싫겠다.”
“그리고 그런 거 아니야. 갖고 놀던 게 갑자기 개기니까 적응이 안 되나 보지.”
“…….”
“얼른 들어가. 너까지 시비 붙을라.”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등을 떠미는 하민의 힘이 어찌나 센지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조용히 빠져나온다는 게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저 너머까지 들렸나 보다.
망부석처럼 건물 앞을 지키던 장승우가 갑자기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놀란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소스라치듯 고개를 돌리기 직전, 믿기 어려운 장면이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나를 발견한 장승우는 예전처럼 나를 비웃거나 위협하지 않았다. 오히려 꽤 정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나를 향해 깊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쟤 지금 나한테… 사과한 건가?’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천랑대의 사람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가기로 했으니, 그가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든 말든 크게 상관있는 일은 아니지만, 뭐랄까….
‘역시 쟤, 하민이 좋아하는 거 같은데?’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될 것 같았다. 그 장승우가 사람 취급도 안 하던 나에게 사과씩이나 하다니. 뒷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나중에 연락해 봐야지’ 하고 살짝 신나 있다가, ‘내가 지금 다른 사람 얘길 호들갑 떨 때인가’라는 생각에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좋아한다…라….’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잘 알겠는데, 내 일은 더 어렵다. 사실, 별장에서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때의 각오라면 이한에게 이런 일을 터놓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닐 텐데. 그 순간의 폭풍 같은 감정을 되짚어 보던 나는, 갑자기 여태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의문을 떠올렸다.
‘근데 이한이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나?’
흐릿한 머릿속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그 말을 들었던 기억이 없다. 그날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같이 살아갈 날들에 대해 이야기했을 뿐, 딱히 서로 좋아한다거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날 말했을 수도 있잖아. 내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기억 못 하는 걸지도….’
그때의 기억은 온통 얼룩지고 군데군데 끊어져 있었다. 극도의 긴장감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던 데다가, 그가 오자마자 거의 바로 히트가 시작됐으니까.
그렇지만 강렬한 순간은 모두 남아 있다. 기적처럼 내 앞에 나타난 그의 모습이라든가, 히트가 시작되던 순간 몸을 휘감던 흥분, 그가 나의 목을 물어 각인하던 느낌 같은 것들은. 그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걸 잊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꼭 말로 해야 하는 일은 아니라고, 말로 하지 않더라도 이한이 나를 좋아하는 건 틀림없다고 생각해 보려 해도…. 자꾸만 아까 떠올렸던 단어 하나가 마음을 콕콕 찔렀다. ‘의무감’.
‘아냐. 만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닐 거야. 하민이도 그랬어. 좋아하는 마음이랑 그런 건 별개일 수도 있다고.’
자신을 위로해 보려고 쥐어 짜낸 생각에 어쩐지 더 비참해졌다. 이한이 나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는 길가의 작은 돌멩이처럼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를 원하니까. 꼭 껴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향기를 나누고 저 깊은 곳까지 닿고 싶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럽지만, 더는 숨길 수도 없이 그랬다.
발걸음은 어느덧 집 앞에 와 있었다. 이곳에 온 후에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포근하고 행복했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기댈 수 있는 보금자리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집으로 들어가는 마음이 무거웠다.
‘…역시 서로 얘기를 해야 해. 나도 이한이가 말을 안 해 주니까 아무것도 모르겠잖아.’
굳게 마음을 먹고 문을 열었는데, 뜻밖에도 집이 조용했다. 이한이 학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금요일은 강의가 하나뿐이고, 여태까지는 매일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어떨 때는 마지막 수업도 빠지고 득달같이 집에 들어오곤 했었는데.
‘약속 있나? 그런 얘긴 없었는데…. 내가 늦을 거라고 말해서 자기도 늦게 오려고 그러나?’
저녁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심란한 탓인지 초조해졌다. 금방 오겠지, 생각하면서도 현관문 앞을 서성거리다 보니 초조함은 서운함으로 슬그머니 색을 바꾸었다.
만날 시간을 정한 것도 아닌데, 그간의 답답함 때문인지 기분이 쉽게 출렁거렸다. 나는 누가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공연히 쾅, 문을 닫고 나의 방으로 들어왔다.
외출복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많은 일이 있던 하루니까 피곤할 만도 했다. 그냥 모른 척 잠들어 버릴까, 그래도 일어나 저녁 식사를 준비할까. 고민하던 나는 엉뚱하게도 서랍장에 손을 뻗어 그 안에 감추어 둔 이한의 옷을 꺼냈다.
‘요새 너무… 자주 이러는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런 짓을 할 시간이 아닌데도 나는 습관처럼 이한의 티셔츠에 얼굴을 묻었다. 가져온 지 오래된 탓에 그의 체취는 더 흐려져 있었다. 흔적만 남은 향기를 쫓듯 더 집요하게 숨을 들이켜는 동안, 학습된 것처럼 슬슬 피가 더워졌다.
근육이 일어나는 느낌에 발끝을 까딱이며,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훑었다. 손끝은 주저하면서도 다리 사이를 향해 느릿느릿 기어갔다. 바지 안으로 막 손을 밀어 넣으려던 때였다. 방 밖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